2023-02-25

책 [정세현의 통찰] “친미편향 벗어나 ‘줏대 있는’ 자국중심성 외교 절실해요” : 한겨레

“친미편향 벗어나 ‘줏대 있는’ 자국중심성 외교 절실해요” : 책&생각 : 문화 : 뉴스 : 한겨레

“친미편향 벗어나 ‘줏대 있는’ 자국중심성 외교 절실해요”

등록 :2023-02-19 
강성만 기자 사진

[짬]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최근 <정세현의 통찰>을 펴낸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지난 14일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그가 낸 책은 발간 며칠 만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비판을 많이 하면 책을 안 보잖아요. 현 정부 사람들이 제 책을 많이 읽으면 좋겠어요.” 책에 현 정부 비판이 많지 않은 것 같다는 말에 대한 저자의 답이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윤석열 정부 들어 너무 미국 편중 외교를 해요. 심지어 일본과의 관계도 미국이 바라는 방향으로 끌려가는 걸 보면서 도대체 어쩌려고 그러나, 걱정스러워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최근 낸 책 <정세현의 통찰-국제질서에서 시대의 해답을 찾다>(푸른숲)의 핵심 메시지는 한국 외교가 국익을 위해 자국 중심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이 어떻게 망했나요. 중국이 세계 중심에서 멀어진 것도 모르고 ‘소중화’를 자처하며 대외관계 모든 것을 하나하나 중국에 물어보다 일찌감치 유럽 중심 질서에 편승한 일본한테 먹혔잖아요.”

지난 14일 만난 그는 “미 국무장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도 십여 년 전에 ‘미국은 쇠퇴하고 중국은 뜨고 있다’고 진단했는데도 여전히 한국 외교관이나 국제정치학자 중에는 미국 옆에만 있으면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며 안타깝다고도 했다.



그는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 시절 2년5개월 동안 통일부 장관을 지내며 ‘남북 화해협력 정책’을 최일선에서 이끌었다. 장관 재임 중 남북회담을 95회나 지휘했고 남북 합의서 73개를 만들어냈다. 남북협력의 상징인 ‘남북 철도·도로 연결’과 ‘개성공단 착공’도 그가 장관 때 일이다.










그는 이번 책에서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국제 질서의 변천을 짚고 해방 이후 한국 대통령들이 미국과 어떤 외교를 펼쳐왔는지를 주로 살폈다.

책을 보면, 국제정치는 ‘조폭의 세계’와 다름없다.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에서 보듯, 먼저 주먹이 나가고 핑계나 명분은 그다음이라는 것이다. 이 ‘조폭’의 질서에서 국가 이익을 지키려면 외교가 자국 중심성을 가져야 하는데 그가 보기에 한국 외교는 “자국중심성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현 정부건 전 정부건 외교에서 자국 중심성이 필요하다는 의식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다”고도 했다.

그는 ‘한국은 도랑에 든 소가 왼쪽 풀도 먹고 오른쪽 풀도 먹으며 걸어가듯 외교를 해야 한다’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을 빌려 “우리는 미국과 중국을 잘 활용하는 등거리 외교를 해야 한다”고 했다. “한국의 최대 교역국인 중국은 2010년 이미 세계경제 넘버2가 됐고 2049년에는 미국 국내총생산(GDP)을 추월하겠다는 목표로 달려가고 있어요. 우리가 세계 경제 10위가 된 것도 중국 덕이죠. 그런데도 윤 대통령은 나토에 가서 ‘탈중국’을 외치니 답답해요.”

그는 한국 외교가 자국중심성을 발휘한 대표적인 예로 김대중 정부 시절 한미 정상회담을 들었다. “2002년 1월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연설을 한 아들 부시 미 대통령이 한 달 뒤 한국을 방문한 때였어요. 김 대통령은 100분 동안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 설득한 끝에 부시가 도라산역에서 ‘북한과 대화하고 인도적 지원을 하겠다’는 연설을 하도록 했죠.” 반면 자국중심성 결여가 국익을 해친 예로는 박근혜 정부 때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사드 배치 요구에 굴복한 것을 꼽았다.

그는 문재인 정부 시절 남북관계에 진전이 없었던 것도 같은 이유라고 했다. “2018년 4·27 판문점 선언, 9·19 평양공동선언이 나오고 남북이 급속히 가까워지자 미국이 우리 쪽에 ‘한미워킹그룹’ 구성을 제안했죠. 이 기구를 만든 뒤 미국은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려는 우리 쪽 발목을 사사건건 잡았어요.” 그는 “그때 미국은 차량 반입이 대북제재 위반이라며 의약품(타미플루) 수송까지 막았다”며 “미국이 그렇게 나오면 한국은 손수레에라도 실어 북쪽에 보냈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1995년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미국은 대북 정책에서 ‘한미공조’ 원칙을 들이밀며 한국 정부가 미국 방침에 토를 달지 못하게 하고 있다”며 덧붙였다. “한미공조가 지금은 거역할 수 없는 명분이 되었지만 그 본뜻은 미국이 가자는 쪽으로 우리도 가야 한다는 거죠. 문 정부는 한미워킹그룹에서 미국이 우리 발목을 잡으려 할 때 세게 반발하거나 버텨 원래의 방침을 관철했어야 합니다. 제국을 운영해온 나라인 미국은 원칙이나 시한의 굴레를 가지고 다른 나라를 일방적으로 끌고 가려고 합니다.”



한국 외교 진단 ‘정세현의 통찰’ 내
국제질서에서 시대의 해답 찾기
삼국통일 이래 ‘종속 외교사’ 분석



“미국 쇠퇴하고 중국 뜨는 격동기”
“조폭 세계에서 국가 이익 지켜야”
“미국만 쫓다 일본에 또 먹힐 수도”
“북한 ‘핵보유 인정’ 상황 대비해야”



그는 미국의 말만 듣는 외교는 자칫 한국이 일본 밑에 깔리는 결과를 다시 부를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지금 일본은 미국의 부장 노릇을 하고 있는데요. 미국이 힘이 빠질 때 ‘내가 나서서 중국과 1대1로 맞서 미국적 질서를 유지하겠다’며 미국의 위임을 받으려고 할 겁니다. 사실 미국 중심 질서는 명분이고 일본 중심을 꿈꾸는 거죠. 현재 일본 군함이 달고 다니는 욱일기가 그런 야심을 잘 보여주죠. 미국이 볼 때 한국은 일본의 밑이죠. 미국을 쫓아다니면 일본 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중국과도 관계를 잘 유지하면 중국 힘이 세질 때 한국이 중심국으로 진입하기가 더 용이하죠.”

한국 외교의 자국중심성 결여는 어디서 기원하느냐고 묻자 그의 답은 이렇다. “종속성이 우리 유전자에 굳어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어요. 신라 삼국통일 이후 고려나 조선까지 지배층은 오히려 중국과의 관계에서 종속적인 것을 편하게 여겼고 일제 때도 ‘조선놈은 도리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해방 후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을 끌어와 정권유지에 활용한 영향도 있죠.”

미국에 맞서면 오히려 한국 정부를 탓하는 ‘국민 정서’를 뚫고 외교의 자국 중심성을 관철할 수 있을까? 그는 “한국은 지금 군사적으로 세계 6위, 경제적으로 세계 10위로 국제적으로 존중받는 나라다. 앞으로 정치 지도자가 줏대 있는 외교를 하면 국민도 서서히 생각을 바꾸게 될 것”이라며 반문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아버지한테 자기 할 일을 물어보는 초등생처럼 굴면 언제 정상 국가가 되겠어요.”

그는 책에서 1981년 자신의 서울대 정치학 박사 논문(마오쩌둥의 대외관 연구) 심사 때 일화를 소개하며 한국 여론 주도층에 만연한 미국 편향 시각의 문제를 짚기도 했다. “제가 논문 결론에 ‘1978년 개혁·개방한 중국이 경제 성장을 하게 되면 부국강병의 원리에 따라 반드시 군사대국이 될 것이다. 그러면 천하를 호령하던 과거 자국의 위상을 다시 회복하려고 할 터이니 이에 대비한 한국 외교정책을 고민해야 한다’고 썼어요. 그런데 심사 교수들이 ‘중국은 경제가 발전하면 도농과 빈부 격차가 커지면서 소수민족이 들고 일어나 쪼개질 터이니 대국의 명맥도 유지하기 어렵다’며 논문 수정을 요구하더군요. 교수들의 그런 생각이 바로 미국 시각이었어요. 외교관이나 학자들이 미국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지금도 큰 변화가 없어요.”

그는 외교의 자국 중심성 확보의 관건은 결국 사람이라고 했다. “김대중 정부 때 미국을 적당히 구슬리면서 중국이나 북한 관계도 발전시켰어요. 물론 대통령의 지향이 있어 가능했지만 임동원이라는 참모가 없었으면 쉽지 않았을 겁니다. 노무현 정부도 청와대에 이종석이라는 참모가 있을 때는 한미보다 남북관계를 중시했어요.”

남북관계 전망을 묻는 말에는 “남북관계도 사계절이 있다”며 이렇게 답했다. “지금은 겨울로 들어섰는데요. 영국 시인 셸리가 ‘겨울이 오니 봄이 머지않았다’고 읊었잖아요. 그처럼 다음 정부는 김대중, 노무현 시대처럼 남북관계의 봄을 맞을 가능성이 있어요. 물론 ‘김대중-임동원’ ‘노무현-이종석’과 같은 대통령-참모 조합이 된다면요.”

그는 책 말미에 북한은 핵을 포기한 우크라이나가 침공당하는 것을 보면서 ‘절대 핵을 포기해선 안 된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라면서 “앞으로 미국이 북의 핵보유를 기정사실로 하는 협상으로 한국을 몰아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다”고 했다. “핵보유국을 인정받은 북한이 경량화, 소형화된 핵폭탄을 실전 배치하는 게 우리에겐 최악의 상황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북이 우리를 군사적으로 위협하면 그들이 먹고사는 데 타격이 올 만큼 남과 북이 경제적으로 의존도가 높아지도록 구조화해야죠. 지금의 한중 관계처럼요.”

그는 북한과의 관계는 통일이 아니라 유럽연합과 같은 국가연합을 지향해야 한다는 말도 했다. “사실상 남과 북이 두 개의 국가가 된 지 오래입니다. 우선 경제력 차이가 너무 커요. 남북 소득 차이가 28배나 됩니다. 이 상태에서는 연합도 쉽지 않아요. 통일은 북한에 시스템 변화가 생겨 남북의 유사성과 동질성이 커지는 시점에서 남북 주민들이 결정할 문제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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