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시노 루미코,오노자와 아카네 (엮은이),
번역공동체 잇다 (옮긴이)논형2021-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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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쪽
책소개
'전후' 일본의 운동과 사상 2권.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 리서치 액션센터(Violence Against Women in War Research Action Center, 통칭 VAWW RAC)내 일본인 '위안부' 프로젝트팀은 '위안부'가 되기 이전에 매춘했던 여성을 그렇지 않았던 여성과 차별하는 '위안부' 피해 인식을 넘어서, '위안부' 문제에서 '피해'가 무엇인지 재정의하기 위한 조사와 연구를 해왔다.
이 책에 집약된 논고(論考)는 일본인 '위안부' 프로젝트팀에서 3년에 걸쳐 진행한 조사와 연구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제1장에서는 일본인 '위안부'가 어떻게 모집되었는지 살피고, 제2장에서는 일본인 '위안부'가 어떤 사람들이었으며 이들이 어떻게 다루어졌는지 다룬다. 제3장에서는 일본인 '위안부'의 전후의 삶에 초점을 맞추었다.
목차
저자 서문 / 한국어판 서문
제1장 일본인 ‘위안부’는 어떻게 모집되었나?
일본인 ‘위안부’의 징집과 근대 공창제도
오노자와 아카네(小野)
나가사키 사건, 시즈오카 사건 대심원 판결을 읽는다: ‘위안부’ 강제연행은 유괴이다
마에다 아키라(前田朗)
식민지 조선의 공창제도와 ‘위안부’ 제도
송연옥(宋連玉)
일본군 위안소 정책에 대해
나가이 가즈(永井和)
제2장 일본인 ‘위안부’는 어떤 취급을 받았는가?
일본인 ‘위안부’의 처우와 특징: 성노예를 정당화한 전시 내셔널리즘과 ‘성의 방파제’론
니시노 루미코(西野瑠美子)
서적·잡지로 보는 일본인 ‘위안부’ 문제
정리: 야마다 게이코(山田惠子)·요시다 도시코(吉池俊子)·야마구치 아키코(山口明子)
위안소 업자에게 들은 이야기
이시바시 나오코(石橋菜穗子)
오키나와 바쇼시키 위안소의 사례: 히라오카 지쥬의 증언
다바 사치코(田場祥子)
오키나와의 일본군 위안소
하야시 히로후미(林博史)
제3장 일본인 ‘위안부’의 전후는 어떠했는가?
일본인 ‘위안부’의 전후: 기쿠마루의 사례
히로타 가즈코(広田和子)
서적·잡지로 보는 일본인 ‘위안부’의 전후
정리: 야마다 게이코(山田惠子)·요시다 도시코(吉池俊子)·야마구치 아키코(山口明子)
〔칼럼〕‘가니타 부인의 마을’에서 보냈던 시로타 스즈코의 전후
아마하 미치코(天羽道子)
〔칼럼〕싱가포르에 방치된 일본인 ‘위안부’
니시카와 미유키(西川幸)
일본군 위안소에서 RAA·점령군 위안소로
히라이 가즈코(平井和子)
〔칼럼〕전 ‘위안부’들의 ‘전후’: 일본인/조선인/중국인은 어떻게 달랐는가?
김부자(金富子)
후기 / 역자 후기 / 참고문헌과 자료 / 집필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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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한국어판 서문 중에서]
일본의 일본인 ‘위안부’의 특징을 밝히는 작업은 식민지와 점령지의 ‘위안부’를 포함한 ‘위안부’의 전체상을 밝히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중략)
매춘 비판을 강화하고 현대에 성을 파는 여성들의 곤경을 밝히며 그 목소리를 듣는 일이 결과적으로 일본인 ‘위안부’ 문제, 더 나아가 ‘위안부’ 문제 전체에 관한 사람들의 이해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중략)
현재의 성착취에 대해 무관심한 사회는 전시 성폭력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없다. 이 책 <일본인 ‘위안부’: 애국심과 인신매매>의 한국어판이 일본인 ‘위안부’의 특질을 밝힘과 동시에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을 더욱 풍부하게 하고 성착취에 반대하는 한국의 모든 분과 연대하는 데 자그마한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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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신문
- 한겨레 신문 2021년 3월 19일자
저자 및 역자소개
니시노 루미코 (西野瑠美子)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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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 리서치 액션센터(VAWW RAC) 공동대표, 일본인 ‘위안부’ 프로젝트팀.
최근작 : <일본인 '위안부'>
오노자와 아카네 (小野澤あかね) (엮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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릿쿄대학 교수. VAWW RAC 운영위원, 일본인 ‘위안부’ 프로젝트팀.
최근작 : <일본인 '위안부'>
번역공동체 잇다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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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들과 단어들 사이를 수없이 오가며 있을 법하지 않은 질문들을 던지고, 앞뒤가 맞지 않는 대답을 하면서 만들어지는 작은 변화의 과정을 기꺼이 즐기는 모임. 역사와 역사 밖의 이야기, 영화와 문화 등 각자의 관심 영역을 통해 일본을 이해하고자 하는 김해진, 김수용, 경혜진, 심아정이 함께 하고 있다.
역자후기
일본군과 국가의 법적 책임을 면피하지 않으면서도, 여성에 대한 성 착취와 노예화를 지탱해 온 이들의 군상을 면밀히 들여다보는 작업은 사회적 책임과 더불어 제도로서의 위안소가 어떠한 정치·경제·사회적 그물망 속에서 가동하고 있었는지 되물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일본인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새롭게’ ‘문제화’해 나갈 수 있을지, 역사적 사료와 현재적 담론을 오가는 섬세한 물음이 던져져야 할 때다.
나가이 가즈는 두 개의 통첩, 그와 관련된 경찰 보고서, 결재문서 등의 분석을 통해 공문서 간의 관련성과 인과관계를 밝히고 ‘위안부’ 징모와 이송 관련 문서에서 드러나는 일본군, 일본 정부, 경찰, 업자들의 증언을 통해 드러난 여러 행위자의 ‘공모’를 규명했다.
‘위안부’ 모집은 은밀하게 이뤄져야만 했고 군과의 관계를 언급해서는 안 되었다는 사실이 공문서에 대한 나가이의 면밀한 독해를 통해 드러났다. 이 통첩은 한편으로는 ‘위안부’ 모집과 도항을 용인하면서도, 군과 국가가 위안소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서는 은폐할 것을 업자에게 의무화했다. 이것이 요점이다. 이러한 ‘공인’과 ‘은폐’의 이중적 태도가 당시 경보국의 방침이자, 일본 정부의 방침이었다.
본국, 식민지, 점령지 여성들의 전쟁경험과 성폭력 피해는 이 여성의 경험과 저 여성의 경험을 비교하며 피해의 위계를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이 제도와 저 제도를, 이 정책과 저 정책을 비교하면서 여성들을 분리하며 억압하는 갖가지 권력이 어떻게 맞물려 작동하는지에 착목하여 다뤄져야 한다.
‘하찮은’ 존재들로 자리매김되어 온 이들이 서로를 더 낮은 하위의 위계로 밀어내며 자신의 피해를 입증하는 일은 바로 그 위계의 선을 그은 권력의 구조를 강화하며 자기도 모르게 그러한 구조의 유지에 기여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하찮다고 여겨지는 존재들이, 존엄이 박탈당한 바로 그 자리에서 서로를 밀어내거나 지우지 않고서 서로의 존재를 비출 수 있는 ‘다른 이야기’는 어떻게 가능할까.
후지메 유키가 지적했듯이 전후의 역사학은 근대 국가의 지배구조 분석이나 지배계급에 대한 인민투쟁사를 주요 연구대상으로 삼아 왔지만, 성과 생식의 자기결정권을 쟁취하기 위해 싸운 인민의 저항과 사회운동은 역사학에서 정통적인 연구대상으로 간주되지 못했다. 일본인 ‘위안부’를 둘러싼 논의는 일본에서도 여전히 신중함 속에 있고, 한국에서는 아직 본격적으로 논의되는 공론장이 드물다. 일본인 ‘위안부’ 여성들이 놓여 있던 사회적·경제적 취약성의 근간에 군국주의, 제국주의, 자본주의, 가부장제, 계급성,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등이 버티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성적 재생산권리에 대한 침해’라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적극적인 관점으로 일본인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일본인 ‘위안부’는 누구인가?
‘공인’과 ‘은폐’의 이중적 태도 아래 존재를 부정당한 여성들
일본인 ‘위안부’ 연구에 첫발을 내딛은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 리서치 액션센터 일본인 ‘위안부’ 프로젝트팀의 공동 연구 성과를 담다.
국가와 성의 관계는 현실적으로 크게 전환했지만 매춘(=성노동)을 ‘공서양속’에 반하는 행위, 도덕적으로 ‘부끄럽게 여겨야 할 행위’로 여기는 의식, 이에 더해 ‘위안부’를 ‘추업부’로 보는 의식이 그대로 유지(保持)되어 거기에서 생긴 괴리가 위와 같은 은폐정책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위안부’는 군·국가에게 성적 ‘봉사’를 요구받음과 동시에 그 관계를 군·국가에 의해 끊임없이 부인당한 여성들이었다. -127쪽
상륙한 첫날은 요코하마에 묵고 다음날 미장원에 갔더니 “모공이 열려있네요. 더운 지역에 있다 왔나 보네요?” 하고 묻길래, 갑자기 ‘위안부’였던 걸 꿰뚫어 보는 것 같아 머리도 안 하고 뛰쳐나와 버렸다. “그때까지는 주눅도 들지 않았었는데, 참 이상하죠?”라며 기쿠마루는 자조하듯 말했다. -216쪽
일본군이 점령지 전역에 위안소를 설치하고 식민지 조선·타이완과 점령지역의 여성들을 ‘위안부’로 만든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런데 사실은 자민족 일본인 여성들까지도 ‘위안부’로 삼았다. 1990년대 이후 각국의 ‘위안부’ 피해자 지원 운동이 일어나며 피해자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피해를 증언했던 것과 달리, 일본인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지원 운동이 나타나거나 피해 당사자가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일본인 피해 당사자는 “일본인 ‘위안부’는 ‘매춘부’였으니 피해자가 아니다”라는 막연한 인식에 가려져 침묵을 강요당했기 때문이다.
‘위안부’ 문제에 매진해 온 저널리스트 니시노 루미코는, 일본군이 차금(借金)에 시달리는 예기, 창기, 작부나 빈곤한 여성들을 ‘애국심’을 이용하여 ‘위안부’로 징모했을 뿐만 아니라 사기 등 실질적으로는 ‘인신매매’라는 방식을 통해 일본인 여성을 징모했다는 것 등 이 책의 골자가 되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서는 일본인 ‘위안부’가 이전에 어떤 상태였는지와는 상관없이 피해자로 인정했다. 그러나 그 후로 일본인 ‘위안부’에 대한 조사나 연구는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 리서치 액션센터(Violence Against Women in War Research Action Center, 통칭 VAWW RAC) 내 일본인 ‘위안부’ 프로젝트팀은 ‘위안부’가 되기 이전에 매춘했던 여성을 그렇지 않았던 여성과 차별하는 ‘위안부’ 피해 인식을 넘어서, ‘위안부’ 문제에서 ‘피해’가 무엇인지 재정의하기 위한 조사와 연구를 해왔다. 이 책에 집약된 논고(論考)는 일본인 ‘위안부’ 프로젝트팀에서 3년에 걸쳐 진행한 조사와 연구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제1장에서는 일본인 ‘위안부’가 어떻게 모집되었는지 살피고, 제2장에서는 일본인 ‘위안부’가 어떤 사람들이었으며 이들이 어떻게 다루어졌는지 다룬다. 제3장에서는 일본인 ‘위안부’의 전후의 삶에 초점을 맞추었다.
책임편집
니시노 루미코 西野瑠美子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 리서치 액션센터(VAWW RAC) 공동대표, 일본인 ‘위안부’ 프로젝트팀.
오노자와 아카네 小野沢あかね
릿쿄대학(立教大学) 교수. VAWW RAC 운영위원, 일본인 ‘위안부’ 프로젝트팀.
집필자
마에다 아키라 前田朗
도쿄조케이대학(東京造形大学) 교수, 일본민주법률가협회 이사,
일한관계개선캠페인(日韓つながり直しキャンペーン) 공동대표.
송연옥 宋連玉
아오야마가쿠인대학(青山学院大学) 교수.
나가이 가즈 永井和
교토대학(京都大学) 문학연구과 교수.
이시바시 나오코 石橋菜穂子
대학원에서 여성학 전공, 석사과정수료.
다바 사치코 田場祥子
VAWW RAC 운영위원, 일본인 ‘위안부’ 프로젝트팀.
하야시 히로후미 林博史
간토가쿠인대학(関東学院大学) 경제학부 교수.
히로타 가즈코 広田和子
1939년 기타큐슈(北九州)시 출생.
아마하 미치코 天羽道子
1926년 만주국 다롄(大連) 출생. 가니타 부인의 마을 시설장 역임, 현재 명예촌장.
니시카와 미유키 西川幸
NHK 문제를 생각하는 모임(효고) 사무국.
히라이 가즈코 平井和子
히토쓰바시대학(一橋大学) 사회학연구과 특임강사. 일본인 ‘위안부’ 프로젝트팀.
김부자 金富子
도쿄외국어대학(東京外国語大学) 대학원 교수, VAWW RAC 공동대표.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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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이라는 미명하에 여성들을 속이고 불법으로 모집해 전장으로 내몰고 전후엔 입 다물어버린 조국에 대해 숨어있던 일본인 위안부 할머님들의 증언과 위안부관련자들의 구체적인 증언과 정황들을 일본의 양심있는 학자들과 시민단체들이 조사연구하여 쓴 책입니다.자료로 손색이 없습니다
갑오징어 2021-08-27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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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회피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국민 ‘위안부‘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해국 국민이자 피해자로서, 일본인 ‘위안부‘는 그동안 조명받지 못했으며, 특히 한국에서 그러하였다. 진정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다면, 이제는 일본인 ‘위안부‘에 대해서도 알아 보는 것이 좋다
P 2021-08-31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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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일본인 ‘위안부’ 문제에 주목해야 할까?:
“선생님, 일본인 ‘위안부’도 있었어요?”
교무실과 교실 오가며 책을 읽고 있으니, 어떤 학생이 물었다. 그러나 나 역시 한동안은 식민지, 또는 점령지 여성들로만 ‘위안부’를 만든 줄 알고 있었다. 비로소 일본인 ‘위안부’의 존재를 실감하게 된 것은 그 유명한 <#제국의위안부>(박유하)를 통해서였다.
그동안 우리에게 ‘위안부’ 문제는 언제나 민족 문제였기 때문이다. 종종 ‘위안부’ 문제에 대한 분노를 “일본에게 똑같이 되돌려 줘야 한다” 라는 격앙된 발언이 나오곤 하는데, 이는 ‘위안부’ 문제가 어디까지나 민족 문제라는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 때로는 ‘위안부’ 문제가 보편적 인권 문제, 여성 인권 문제로도 여겨져 왔으나, 어떻게 규정하든 그것은 민족 문제로서의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또 하나의 표어라는 측면이 있었다.
그 점에서 가해국 국민이었던 일본인 ‘위안부’에 대한 관심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박유하가 이야기했던 제국의 일부였던 식민지 조선의 ‘위안부’들을 제외한, 제국의 나머지 부분의 ‘위안부’들, 그 중에서도 ‘내지’의 ‘위안부’들에 주목한다면 ‘위안부’ 문제는 다시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외면받아 온 ‘일본인’ 위안부의 조명
일본 근현대사에 관한 여러 논저를 펴내 온 논형에서는 <‘전후’ 일본의 운동과 사상 총서 시리즈>를 기획했다. 그리고 첫번째 번역서인 <일본에서 싸운 한국전쟁의 날들>(니시무라 히데키)에 이어, 그 두번째 책을 펴냈다. 바로 <일본인 ‘위안부’-애국심과 인신매매>다.
책은 3장으로 구성되어, 제1장에서는 일본인 ‘위안부’의 모집 과정에서 나타난 불법성, 군의 주도는 물론 외무성 및 해외 영사관과 내무성 및 경찰의 묵인, 방조, 그리고 조력 문제를 다뤘다. 이를 통해, 위안부 문제를 외면하는 일본 정부의 주장은 점차 설득력을 잃게 된다.
제2장은 일본인 ‘위안부’의 전시 생활상을 다루었는데, 조선인 ‘위안부’가 겪은 것과 같은 참상은 드러나진 않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일본인 ‘위안부’가 상대적으로 나은 지위를 차지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며, 제국 내부의 민족 차별 외에도 여러 요인이 작용하고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제3장에서는 패전 이후 일본인 ‘위안부’의 운명을 다루는데, 이를 통해 일본 정부, 그리고 사회에서 일본인 ‘위안부’를 수십 년에 걸친 외면하여 온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조선인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 정부의 입장도, 일본인 ‘위안부’에 대한 입장 수준을 결코 넘어서지 않을 것이며, 일본인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상황에서 조선인 ‘위안부’ 문제의 해결 또한 지난함을 인식하게 된다.
‘내지’ 출신 여성과 국가주의의 관계
먼저, 일본인들이 ‘위안부’가 된 데에는 국가나 군에 대한 신뢰가 제법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증언에 따르면 이른바 ‘전차금’ 및 위안소 이용료는 군에서 일정 부분을 부담했다.(p.31, 39) 오늘날에도 전봇대나 게시판 등에 ‘꿀알바’ 라는 등, 어딘지 의심스런 곳에서 만들어진 듯한, 뭔가 으스스한 전단지가 붙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모집 경로를 통해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모양이다.
당시에도 비슷하게 모집업자들은 감언이설로 단기간에 고수익을 거둘 수 있다는 좋은 근무조건임을 떠벌렸는데(p.39), 그것이 국가와 군이라는, 공적 기관의 이름으로 행해진다는 것은 오히려 신뢰할 만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국가와 군을 좀 더 두려운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던 식민지의 ‘위안부’들과는 달리, ‘내지’의 ‘위안부’는 오히려 ‘내지’ 사람이기 때문에 국가주의 논리에 더욱 취약했을 수 있다.
더군다나 메이지 유신 이래 지속된 국가의 신성화, 군의 절대화가 정점에 이른 시기에 행해졌다는 점은, 더더욱 많은 여성들이 실제와는 다른 사기 광고에 속아, 안심하고 ‘위안부’가 되는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내지’적 성격이 요구되었던 ‘위안부’
위안소는 ‘내지’의 연장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만 하다. 조선인 ‘위안부’의 경우에는 ‘내지’의 모방으로서의 성격을 강요받았다. 위안소는 현지의 이름이 아닌 ‘내지’의 이름을 간판에 내걸었고, ‘위안부’는 ‘내지인’의 이름으로 불렸다.
‘내선일체’ 같은 표어, 조선인 ‘위안부’들이 했다던 “(일본인과 조선인은)천황 폐하가 같다”는 표현은 그만큼 제국의 지배 민족과 피지배 민족 간에 격차와 차별이 존재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동시에, 위안소 또한 ‘내지’의 성격이 요구되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일부 ‘위안부’들에게는 오히려 식민지적 특색을 그대로 지니도록 요구한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나카자토 치요, 일본 민의련 인터뷰, 2015), 위안부들에게 요구된 것은 기본적으로는 ‘내지’의 속성이었다.
동향 ‘위안부’의 모집
그렇다면 ‘내지’의 모방이 아닌, ‘내지’ 그 자체인 일본인 ‘위안부’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내지’의 요릿집이 그대로 전선으로 옮겨간 경우도 있었거니와(p.34), 군인들과 같은 고향 출신의 여성들을 모집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p.29, 34). 특히 이 책에서는 위안부 모집이 본격화된 1938년의 사례에 주목하고 있는데, 이는 2.26 사건으로부터 2년쯤 지난 시점이었다.
2.26 사건의 배경에는 도호쿠 출신 장병들이 고향의 누이들이 유곽으로 풀려나가는 데 울분을 품었다는 점이 청년 장교들의 쿠데타에 제법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지적되고 있으나, 중일전쟁 이후로는 오히려 동향의 여성들을 ‘위안부로 모집하는 사례가 종종 나오고 있다. 일본군이 전반적으로 도덕적, 성적으로 무감각해진 사례라고 여길 수도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교묘하게도, 동향의 여성들에게는 군인들이 쉽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군 상층부의 계산이라고도 생각된다.
영화 <난징! 난징!>에 묘사되는 어느 일본인 ‘위안부’처럼, 군인들은 일본인 ‘위안부’들에게 더욱 동질감을 느낀 듯한데, 식민지나 점령지 출신의 ‘위안부’가 겪은 것과 같은 극단적 사례가 좀처럼 보고되지 않은 것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단, 자신이 상대했던 군인들과 같은 사회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일본인 ‘위안부’들에게, 그 군인들이 직접 저지른 폭력에 대해서 발설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므로, 아직 진술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검토의 여지가 있다.
자본주의 체제 하의 ‘위안부’
한편,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군국주의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계기들이 있다. <제국의 위안부>가 조선인 ‘위안부’들을 모집한 조선인 업자들에게 주목했다면, 이 책은 일본인 업자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단, 조선인 업자들이 일본인 ‘위안부’들을 좀처럼 모집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데 반하여, 일본인 업자들의 경우 조선인은 물론 일본인들까지도 모집을 할 수 있었다.
그 점에서 보면 일본인 업자들의 제국-식민지 질서 내에서의 우위가 드러나는 한편, 그러한 우위를 바탕으로 자본가적 성격 또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들에게 ‘위안부’는 일종의 자본이었다. 그리고 일본 본토와 식민지. 점령지 내에서 자본의 이동이 원활하게 이뤄지듯, ‘위안부’들 또한 수요에 따라 본토와 식민지, 점령지를 넘나들게 되었다. ‘위안부’ 사업은 확장에 따라 더욱 큰 규모로, 더욱 다양한 지역에 걸쳐 전개되기도 하며 심지어 이들 자본을 공유, 세습할 수도 있었다.
부부가 함께 위안소를 경영한 사례(p.45)는 물론, 위안소 업자였던 아버지를 아들이 계승해서 사업을 이어가는 사례(p.32)를 보면 비정상적이고도 ‘일시적인’ 것으로 여겨지곤 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전쟁의 장기화에 따라 얼마든지 지속될 수 있었다. 그리고 내지 또는 후방의 식민지보다는 전장의 요구가 우선시되고 있음을 볼 때(p.33), 제국주의 내지 군국주의의 비인간성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논리가 기저에 흐르고 있다는 점, 또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일체화되어 있는 구조를 생각해 볼 만 하다.
‘위안부’ 제도에 내재된 파국의 씨앗
생각해보면, 위안부 제도의 등장 그 자체야말로 전쟁의 장기화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선의 확대에 따라 휴가, 귀향의 기회 또한 점점 줄어드는 상황에서 ‘위안부’의 제도화는 의미심장하다. 일본군의 성적 착취가 식민지와 점령지를 넘어, ‘내지’에서도 전개되었다는 것은, 제국 붕괴의 전조를 나타내는 것으로도 보인다.
한편, 일본 정부는 근대의 천황제와 제국 질서를, 신민들에 대한 ‘일시동인’의 명분으로 정당화고자 했으나, 이미 신민들 내부에는 계급 구조가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나이로는 어리고, 성별로는 여성이며, 경제적으로는 곤란한 처지에 처한 이들이 ‘위안부’가 되었다.
착취가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위안부’의 비극성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전시 체제의 얼마 남지 않은 수명을 보여주는 점에서는 훗날 소년층을 대상으로까지 하여 전개된 ‘근로 동원’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나라를 위해’라는 ‘위안부’ 서사의 이면
한편으로는 일본인 ‘위안부’는 식민지 출신과는 달리 더욱 적극적으로 ‘위안부’가 될 것을 강요받고 있다. 당연하겠지만 식민지 및 점령지 여성들에 비해, 일본 여성들은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위안부’가 된 경우가 많았다(p.154 등).
조선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기 등을 통한 모집을 겪기도 했었지만, 그들 스스로 야스쿠니에 합사된다는 기대를 품기도 했을 만큼(p.40), 분명 ‘나라를 위해서’라는 명분에 감응한 사례도 있었으며, ‘내지’ 출신의 위안부로서 일면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듯도 하다. 다만 이는 단순히 애국 논리로만은 볼 수 없다. 한편으로는 그들이 결코 사람들에게 ‘소녀’라고 불릴 수 없는 사회 경제적 조건에서 모집되었다는 점 역시 조선인 ‘위안부’와 구별되는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녀로 형상화되는 경우가 많은 조선인 ‘위안부’들과는 일본인 ‘위안부’의 경우에는 이미 ‘추업’이라 불리는 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상태에서 모집된 경우가 많았다. 일본인 ‘위안부’들이 종종 ‘나라를 위한다’라고 진술한 배경에는, 국가가 내세운 명분에 호응하는 방식으로, ‘추업’의 상태로 전락했다는 심리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괴로움을 생각하게 된다. 그 점에서 조선 출신의 경우에는 ‘위안부’ 이전의 삶과 단절되어 인식되는 경우가 많은 데 비하여, 일본 출신의 경우 ‘위안부’ 이전의 ‘추업’이라 불리던 생활상과 연관성을 찾을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이를 통해 전시의 ‘위안부’ 문제 뿐만 아니라, 여성 인권 문제 전반을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한편, 일본인 ‘위안부’들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나라를 위해...수고가 많다”라는 말을 들었던 것을 전후에도 기억했으며, ‘위안부’ 시절이 더 나았다고 회상하는 일부의 증언, 게이샤가 되었어도 ‘위안부’로서의 과거를 서로 숨겨야 했던 구술, 심지어 패전 이후에도 ‘위안부’ 시절 알게 된 군인들과 교류했던 사례 등을 읽다 보면, 그들이 전쟁 전은 물론 패전 이후에도 사회로부터 극심한 차별과 격리를 받았다는 점은 물론, ‘국가를 위한다’던 명분이 무색하게 국가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이 점에서, 일본인 ‘위안부’에 대한 전후 국가적, 사회적 차원의 처우 문제에 관해 살펴볼 수 있다.
전후에 분명히 드러나는 일본 정부의 ‘위안부’ 인식
‘츠구나이’ 논란이 시사하는 것처럼, 일본 정부는 ‘위안부’의 강제동원 여부 그 자체로 논의를 국한시키는 한편, ‘위안부’ 제도의 본질이나 ‘위안부’ 개인의 삶에 관해서는 모호한 영역으로 남겨 둔 채, 구체화시키지 않으려 한다. 그렇지만 ‘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 차원의 인식을 적나라하게 살펴볼 수 있는 사례는, 오히려 패전 이후 미군 점령 시기 일본 정부 측의 용어 사용으로부터 드러난다.
‘위안부’라는 용어는 미군 점령 시기로 계승되었고, ‘위안부’들은 미군을 상대하게 되었으며, 당시 ‘위안부’ 활동을 ‘여성 특공’으로 명명하기도 했다(p.249). 근현대 일본에서 ‘특공’이란 ‘가미카제’로 알려져 있는 자살공격을 뜻하는 공식 군사 용어였다. ‘여성 특공’이란 용어는 전쟁 당시 미군을 상대하기 위한 ‘특공’과, 패전 이후 ‘위안부’들이 미군을 상대하는 행위에 일면 동일성을 부여하는 듯하다.
그러나 ‘위안부’ 용어의 계승, ‘특공’이라는 명명, 미군을 대상으로 한 ‘성에 대한 굶주림’이란 인식을 통해, 전쟁 전 일본군을 상대로 한 ‘위안부’ 활동 또한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은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여성 특공’이라고 한다면 이는 결코 동등한 동일시로 볼 수 없으며, 기지촌 내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애국자’라 명명한 것과 같이 기만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특공’이라 불리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한일관계사는 주로 고대와 근대에 집중되어 있는 경향이 강하나, 근대의 한일관계에서 발생한 여러 문제들이 현대에 들어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는 양상을 띤다. 현대 한일관계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 이유 또한 여기에 있을 것이다.
‘특공’의 이면
‘위안부’라는 존재 양식이 그 명칭까지 이어받을 만큼 연속성을 지닌다면, 더군다나 시간적 단절 없이 그대로 이어져 왔던 것이라면, ‘위안부’가 처했던 상황 역시 연속성을 지닌 것이며, ‘성에 굶주린 미군’ 이전에 ‘성에 굶주린 일본군’을 상대했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다.
전시체제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표면화될 수 없었던 인식이, 타자였던 미군의 존재를 통해 비로소 나타나게 된다. 게다가, 미군에 대한 ‘특공’이 패전과 함께 끝난 뒤에, 일본인 ‘위안부’에게 여전히 ‘특공’이 강요되었다는 점, 더군다나 대전기 수년 간 증오하도록 강요되어 온 미군을 상대해야 했음을 보면, 그나마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종결지었음은 물론 한국전쟁의 ‘은인’으로 인식되기도 하는 한반도의 미군을 상대했던 이들보다도 더 비극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동시에 전쟁 당시의 의식이 공적 활동의 이면에 지속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듯하다. 패전 후에도 상당 기간 남아 있던 미군에 대한 반감과 더불어, ‘위안부’ 활동이 특공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전제로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인식이 들어 있기도 하다.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이유
<제국의 위안부>에서 박유하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 조성을 둘러싸고 한때 일본 정부가 내걸었던 ‘츠구나이(償い)’라는, 다소 복합적인 용어가 한국 언론을 통해 배상(atonement)이 아닌 보상(compensation)으로 번역되면서, 합의가 불발에 이른 사례를 언급했다. 한편, 이 책에 실린 원고에서 연구자 히로타 가즈코는 책의 기획자이기도 한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 리서치 액션센터 인원들이, “지금 무엇을 하면 ‘위안부’였던 분들께 ‘츠구나이’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p.220).
외견상 한국에서는 ‘배상’문제로 접근하면서 하나의 해결책을 추구하는 한편, 일본 정부 및 리서치 액션센터를 비롯해, 일본 측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경우 ‘츠구나이’라는 다양한 차원의 문제로 접근한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런데 ‘츠구나이’란 어느 하나의 의미로 대응될 수 없는 것인 만큼, ‘위안부’ 문제 또한 다면적인 처우를 수반하는 해결이 요구될 것이다. 이는 일본인 특유의 ‘섬세함’이라고 알려진 데서 비롯된 것일까?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개념 자체를 모호하게 규정함으로써 ‘위안부’ 제도의 실상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고, ‘배상’이라는 직접적인 표현만은 피하는 동시에, 어감의 차이를 통해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을 유발하고, 마침내 결렬에 이르게 함으로써 상대 측에 그 책임을 지우는 기법으로도 읽히기도 한다.
일본인 ‘위안부’ 문제와의 연대 필요성
<제국의 위안부>에서는 ‘츠구나이’ 번역과 관련해 한국 측에서 일을 그르친 듯이 서술되어 있지만, 이 책을 통하여 일본 정부는 자국 내 ‘위안부’들에게조차 ‘츠구나이’가 무엇이든 그조차 하지 않은 듯이 여겨진다. 일본 정부는 자국민 ‘위안부’들에게 ‘은급(恩給공적 임무를 수행한 자 혹은 유족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연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과거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는 ‘황국’, ‘황군’ 그리고 그들이 수행하는 전쟁은 ‘성전’이 되어야 하는 만큼, ‘위안부’ 제도의 실상, 그리고 그 강제성에 대해서는 자체적인 논리에 의해 그 제도의 창설 당시부터 결코 인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당시의 군인들과 그들의 친족들이 일본 사회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자국 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일본이 조선인 ‘위안부’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룰 것이라 기대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완벽하게 타자로 인식되는 조선인 ‘위안부’ 문제를 책임 있게 해결하라는 외침은 정당하고도 호소력은 높은 것이나, 일본 국내에서의 정책 변동을 이끌어내기는 요원한 듯이 보인다.
‘위안부’ 문제를 민족 문제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면, 이제는 자국으로부터도 버림받은 일본인 ‘위안부’들과 연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위안부’ 문제가 보편적인 인권 문제, 여성 인권 문제로도 여겨지고 있는 만큼, 일본인 ‘위안부’ 문제를 함께 해결할 만한 당위성은 충분하리라 여겨진다.
일본인 ‘위안부’ 문제를 통해, ‘위안부’ 제도의 불법성과 폭력성, 그리고 국가의 무책임이 어우러지는 모순은 더욱 더 분명해진다. 이 책의 표지, 그리고 속지 곳곳에는 두 개의 빈 의자가 놓여 있다. 그 자리 중 하나는 물론 조선인 ‘위안부’의 소녀상이 앉을 자리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옆의 의자는 누구의 것일까?
지금껏 소녀상의 양적인 팽창 뿐만 아니라 강제징용 노동자의 상이 함께 세워지는 등 민족 차원에서의 접근이 이뤄졌고 그들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혹은 타국 출신 ‘위안부’의 상이 소녀상과 함께 했다. 일본인 ‘위안부’의 경우, 그동안 가해국 국민으로서의 지위가 부각되어 온 반면, 피해자로서의 측면은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조차 무시되어 왔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서, 나머지 빈 자리는 일본인 ‘위안부’의 자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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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2021-08-10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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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에서 배신당한 일본인 위안부
여명의 눈동자란 드라마에 임팩트있게 등장했던 일본인 위안부 하나코가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2차대전의 전장 속에 둘은 가족이 되었으나 임신한 윤여옥을 보고 부러워하던 하나코는
권총으로 삶을 끝내버린다.
워낙 위안부 피해자가 많으니 일본 자국 내 위안부 문제가 드러나질 않아 잘 모르는 사람이 많고
일본 정부가 쉬쉬하며 은폐하니 자국민도 모르거나 피해자가 아닌 '근로자'로 인식하거나 아예 모르는 일본 국민들이 대부분이다.
이에 양심있는 일본 내 학자들과 시민단체들이 숨어계시던 일본인 위안부들을 찾아 증언을 받고
위안부관련자들을 찾아 증언을 받고 문헌을 찾아 증거를 확보하고 연구하여 이 책이 나왔다.
대게 가난하고 문맹이고 가족이 없거나 있어도 힘이 되어주지못하는 일본 여성들이
과장되거나 거짓인 구인광고에 속아 위안부 시설로 왔고 이는 민관 합동으로 (관의 묵인 하에)
광범위하고 은밀하게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이런 사실을 알고도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거나 혹은 현지인과 결혼 후 눌러산 여성들의 증언을 들어보면,조국으로 돌아가도 가족도 없고 천시받고 차별받을게 뻔한 일본의 삶을 너무나 잘 아는지라
위안부 여성들끼리 서로 의지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조국마저 애국이라는 미명하에 힘없는 여성들을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착취하고 전장으로 내몰았으며 이제 와서는 모르쇠로 일관하는 추악한 모습을 일본인 위안부들은 알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양국의 위안부 관련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고 위안부 할머님의 교류가 이뤄졌으면 하는
바램에서 서평을 올린다.숨어 사시던 위안부 할머님들은 피해자입니다.양지로 나와 큰 소리로 외치시는 날이 오길 기원합니다.
#일본인위안부 #위안부문제해결 #논형 #서평단모집 #서평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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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징어 2021-08-27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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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
*도서출판 논형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고 쓰는 주관적 후기입니다.
"위안부". 전쟁범죄의 피해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지만, 학술서부터 생존자 문학까지 다양하게도 접했던 단어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료를 접할 때마다 내가 아는 것은 정말 새발의 피라는 것을 뼈저리도록 깨닫게 되는 주제이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근대 이성의 실패라는 양차대전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렇게나 참혹하고 잔인한 일이 있을까. 이렇게까지 억울하고 원통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전후' 일본의 운동과 사상 시리즈의 2권으로,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 리서치 액션센터 VAWW RAC의 대표와 운영위원이 책임편집을 맡고 관련 분야의 전문가의 글과 "위안부"당사자의 사례들을 모은 책이다. 에세이나 담론집보다는 자료집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겠다. 한국에서 주로 접할 수 있는 "위안부" 피해 생존자에 대한 기록과 분석은 피식민국 국적자의 증언 또는 연구인 이유로, 가해국의 국민이자 인신매매 혹은 애국 선전의 피해자라는 위치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이중잣대에 억압된 일본인 "위안부"에 대해 다소간 낯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학창시절 내내 주입식 교육으로 들어왔던 "위안부"의 역사는 "나쁜 일본군이 조선 사람을 끌어가 노예처럼 부리고 살해했다" 정도였으니 내가 아는 적극적인 행동이라고 해봐야 수요집회 정도였다는 사실이, 생각해보면 이걸 왜 진작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싶은 일본 내 피해자의 기록에 부끄럽기 짝이 없다.
부제로 알 수 있듯 일본인 "위안부"의 사례는 인신매매와 애국 선전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전자와 후자 모두 국가-남성권력의 기만으로 인한 결과라는 점에서 그 본질은 같다. 그 중 애국 선전으로 "위안부"를 모집한 것을 여성주의적으로 설명한 것이 눈에 띈다. 여러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죽으면 군인과 마찬가지로 야스쿠니 신사에 들어갈 수 있다", "전사하면 군속으로 야스쿠니에 모셔진다"는 말은 당시 전쟁 내셔널리즘이 사회에서 소외되어온 여성의 콤플렉스를 이용하는 동시에 전체주의 국가에서 '나라를 위해 희생하라'는 압력이 얼마나 공고히 작용하는지 아주 잘 아는 것을 넘어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이용했음을 잘 보여준다. 이는 2013년 오키나와 위령의 날에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이 "오키나와 여성이 방파제가 되어 진주군의 강간을 저지해 주었다"는 망발을 치사랍시고 한 사례에서 드러나는 '성의 방파제' 이론과도 맞닿아있다. 그들에게 감사한다느니, 공적이 있다느니 추어올리는 것 또한 여성을 성욕처리 도구로 여기며, '정숙한 부녀'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는 "위안부"가 된다는, '"위안부" 필요론'과 다르지 않은 기만이요 폭력이다.
겉으로나마 자발적이었던 이들에게도, 팔려가고 속아 끌려간 이들에게도, 후일에서야 알게되어 그 참담함에 눈을 감는 이들에게도 끔찍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이 폭력이고 범죄이다. "위안부" 범죄에 누가 '창부'였고 누가 '무고한 처녀'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모두가 피해자다. 모두가 국가권력에, 기득권에, 공고한 가부장사회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었던 피해자요 약자다. 모든 범죄가 그렇듯 전쟁범죄 또한 생존자가 곧 증거이자 역사다. 전쟁이라는 비일상적 재난에서 극소수의 주모자를 제외한 대다수의 개인은 어떤 식으로든 피해자가 되고, 그 중 더욱 소외되고 이용되는 약자는 혼란이 수습되고 '정상으로 돌아온' 세상에서도 밀려나고 침묵하기를 강요받는다. 사람들은, 특히나 본인의 자유가 지고의 선이며 '냉철한 분석'이랍시고 망언을 내뱉고 모욕을 일삼는 이들은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지 알지 못한다. 설령 안다 하더라도 티끌만한 지적에도 들보에 매달린 것 처럼 난리를 친다. 피해자를 손쉽게 매도하고 배제하는 이들과 가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가족을 겨냥해 그들이 고통받아야 한다며 저주하는 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혹자는 여성에게는 조국이 없다는 말을 한다. 이 책을 읽고도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자가 있을까. 사람이기를 포기하고서야 겨우 우겨볼 수 있을 것이다. 참혹하게도 우리 사회에는 사람 탈을 쓰고도 사람이 아닌 이가, 사람이기를 포기하고 겨우 우겨보는 이가 너무도 많다.
그렇기에 우리는 연대할 수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지 않도록 끊임없이 기록하고 외치기를 멈추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이 살아남은 이가 살아남은 이들에게, 살아야했던 이들에게 지는 의무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지 않고, 연대해야 할 것에 연대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세상에 내어주신 도서출판 논형에게 감사드린다. 잘 읽었습니다.
#일본인위안부 #위안부문제해결 #논형 #서평단모집 #서평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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뫕 2021-08-20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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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분할 통치를 넘어
제국의 분할 통치를 넘어
[프레시안 books] 서평 <일본인 위안부, 애국심과 인신매매>
이지은 문학평론가 | 기사입력 2021.05.01.
▲ⓒ논형
다음은 <일본인 위안부, 애국심과 인신매매>(논형 펴냄)에 대한 이지은 문학평론가의 서평이다.
매춘부니까 피해자가 아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의 증언과 시민사회 및 학계의 노력은 ‘위안부’ 피해를 여성의 ‘수치’가 아니라 전쟁범죄로 인식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의 전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론화되지 못한 존재가 있다. 바로 일본인 ‘위안부’ 피해자다. “왜 일본인 ‘위안부’는 줄곧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었을까?”(4쪽)
최근 한국에서 번역‧출간된 『일본인 「위안부」-애국심과 인신매매』(논형, 2021)의 첫 문장이다.
이 책은 일본인 ‘위안부’라는 담론의 공백에 문제의식을 지닌 연구자들의 글을 모은 것으로, 일본인 ‘위안부’에 대한 징모 방법, 위안소에서의 처우, 전후의 생활 등 세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여러 필자의 글을 수록하고 있는 만큼 일본인 ‘위안부’ 문제를 하나의 시각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일본인 ‘위안부’에 덧씌워진 편견을 걷어내고, 학계의 연구와 시민사회의 관심을 촉발하고자 하는 의지는 공통적으로 읽힌다.
일본인 ‘위안부’에 덧씌워진 편견이 무엇이길래 지금까지 논의되지 못했던 것일까.
편집자는 「저자 서문」에서 “일본인 ‘위안부’에게는 어느새 창기, 예기, 작부 등 공창제도 하의 매춘부라는 이미지가 각인되어 ‘매춘부니까 피해자라고 할 수 없다’는 사고방식”(4쪽)이 생겨났다고 지적한다.
‘매춘부니까 피해자가 아니다.’ 간단해 보이는 이 문장은 많은 논점과 역사적 사실의 왜곡, 그리고 여성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포함하고 있다. 우선, 여기엔 여성을 창녀와 부녀로 나누어 차별하는 오래된 여성혐오가 전제되어 있다.
그 누가 되었든 간에 신체가 구속된 상태에서 원치 않는 일을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 문장은 좀 더 복잡한 의미 연쇄를 따라 익숙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일본인 ‘위안부’를 ‘매춘부’로 규정하고 나면, 피해자가 ‘자발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지원했다는 논리가 뒤따르고, 따라서 위안소는 업자가 운영한 것이자, 일본군과 무관한 시설이 되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오랫동안 일본인 ‘위안부’를 보이지 않게 했던 이 문장과 대결하면서 『일본인 「위안부」』를 읽어보자.
가난한 집 ‘딸’에서 유곽의 여성으로, 일본군 ‘위안부’로
일본에서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한 이들 가운데는 매춘생활을 하다가 전차금을 받고 위안소로 간 경우가 있다. 참전 군인이나 위안소 관계자가 쓴 기록물에서도 일본인 ‘위안부’를 화류계의 여성으로 묘사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이러한 탓에 그간 일본인 ‘위안부’는 엄밀한 진상조사 없이 매춘부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이들이 매춘부였다는 사실은 거듭 강조되었지만, 이들이 왜 매춘부가 되었는지에는 관심이 닿지 않은 듯하다. 오노자와 아카네(小野沢あかね)의 「일본인 ‘위안부’의 징집과 근대 공창제도」는 일본인 ‘위안부’가 징집된 여러 사례를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엔 매춘생활을 하다 위안소로 간 이들의 내력도 있다.
오노자와가 제시한 여성들의 경우, 적게는 일곱 살, 많게는 열일곱 살에 게이샤집이나 유곽에 팔려갔다.
놀랍게도 미성년 여성들이 유곽에 팔려가는 장면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은 바로 아버지다. 가난한 집의 ‘딸’들은 아버지에 의해 매춘 시설로 ‘팔려’ 가고, 선지급된 ‘몸값’인 전차금은 여성을 구속하는 덫이 된다. 더하여 여성에게 불리한 유곽의 노동 조건은 전차금을 갚고 자유를 되찾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러한 상황에서 업자들은 유곽 여성들이 떠안고 있던 빚을 미끼로 ‘위안부’를 모집하였다. 업자들이 제시한 계약 조건 중에는 ‘전차금의 변제 방법이 계약 기간 완료와 동시에 소멸한다’는 조항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곧, 계약 기간이 종료되면 변제 의무도 끝나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차금으로 고통받았던 유곽의 여성이나 가난한 집안의 딸이 ‘2년만 참으면’이라는 생각으로 응모했”을 것이다.(140쪽)
그렇다면 ‘일본인 ‘위안부’가 매춘부니까 피해자가 아니다’라는 문장은 단지 피해자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반박되어선 불충분하다. 가난한 가부장은 딸을 유곽에 팔았고, 업자들은 팔려온 여성들을 통해 이득을 취했으며, 일본정부와 군대는 여성착취 시스템이 전장에서 체계적이고 광범위하게 실현될 수 있도록 통치 권력을 휘둘렀다. 오히려 피해 범위를 확대하여, ‘가부장제-성산업(자)-국가/군대’가 어떻게 공모하고 착취했는지 낱낱이 밝혀야 한다.
취업사기와 인신매매, 그리고 ‘강제’의 개념
한편, 일본인 ‘위안부’를 모두 매춘여성으로 인식하는 것은 사실에 맞지 않다. 위안소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을 속여서 데려갔다는 업자의 증언이 있을 뿐 아니라,(36쪽) ‘특수간호부’라는 말에 솔깃해서 응모했는데 현지에 와서야 ‘위안부’ 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피해자 증언도 있다.(37쪽)
또, 타자수 여성이 전황이 악화되면서 ‘위안부’로 일하길 강요받은 경우도 있다.(134쪽) 마에다 아키라(前田朗)는 「나가사키 사건, 시즈오카 사건 대심원 판결을 읽는다: ‘위안부’ 강제연행은 유괴이다」에서 당시 일본인 ‘위안부’ 징모가 어떻게 실시되었는지 엿볼 수 있는 대심원 판결(현 최고재판소)을 제시한다.
나가사키 사건을 소개하면 이렇다. 상하이에서 위안소 영업을 하고 있던 업자 A는 1932년 ‘해군지정 위안소’로 영업을 확장하기 위해 몇몇 공모자들과 “위안소라는 사실을 숨기고 단순히 여급 또는 여종업원을 고용하는 것처럼 속여 [여성을] 상하이로 이송”(45쪽)하였다. 이에 대해 나가사키 지방재판소 및 공소원은 “국외이송목적 유괴죄의 성립”(46쪽)을 인정했다. 피고인 중 일부가 모의에만 가담했을 뿐 유괴나 이송을 하지 않았다고 상고하였으나, 대심원은 실행 행위를 분담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에 관해 모의한 자는 공동정범의 형책을 지어야 한다고 판결했다.
나가사키 사건 판결은 일본 사법이 일본군 ‘위안부’의 모집을 범죄로써 처벌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판결의 의미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첫째, 일본인 ‘위안부’ 중에서도 업자에게 속아서 ‘위안부’로 ‘유괴’된 이들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위안부’ 모집이 당시 일본 사법을 기준으로도 위법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셋째, 군위안소는 이러한 범죄 행위에 근간을 두고 설립‧운영된 것이었다. 넷째, ‘국외이송목적 유괴죄 성립’ 판결은 법적 ‘강제’ 개념을 검토하는 데 중요한 참조점이 된다.
종종 보수 우익 세력이나 역사수정주의자는 ‘노예사냥’과 같은 물리적 폭력의 경우만을 강제연행이라 한정하여, ‘위안부’ 모집이 ‘자발적’인 ‘계약’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일반적으로도 ‘유괴’는 ‘납치’와 동의어로 인식되곤 한다. 그러나 마에다가 제시한 두 건의 판결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일본 사법부는 기망 또는 유혹을 수단으로 하는 경우를 ‘유괴죄’로 보고 있다.
이때 “‘기망’이란 허위의 사실로 상대방을 착오에 빠뜨리는 것을 말하고, ‘유혹’은 기망의 정도에는 이르지 않지만, 감언으로 상대방을 움직여 그 판단을 그르치게 하는 것”(54쪽)이다. 기망과 유혹에 의한 징모가 일본 사법부의 ‘유괴죄’로 인정되었다는 것은 ‘강제’의 개념이 물리적 폭력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의사의 반하여 징모한 행위’ 전반에 적용되어야 함을 의미하며, 의사에 반한 징모행위가 당시에도 위법이었다는 뜻이다. 물리적 폭력만을 강제로 주장하는 것은 1930년대 일본의 사법부 판결에도 맞지 않는 논리인 것이다.
‘전시성폭력 피해자’이자 ‘전범국가 국민’이라는 곤경
일본인 ‘위안부’ 문제가 논의에서 누락된 또 하나의 이유는 ‘식민지 지배와 전쟁범죄’라는 문제틀이 전범국가 국민이었던 일본인 ‘위안부’를 비가시화 했기 때문이다. 특히 식민지 여성보다 ‘나은’ 대우를 받았다는 측면이 부각되면서 피해자 논의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일본인, 조선인, 점령지 여성 사이의 차별적 조건은 분명히 존재했다. 이 책의 저자들도 강조하는 바, 업자와 일정 비율로 수익을 나누고 비교적 단기간에 귀국한 사례는 일본인 ‘위안부’의 경우에서만 보인다.(138쪽)
또, 위험한 전선에는 주로 조선인 ‘위안부’가 보내졌다.(142쪽) 무엇보다 식민지 여성에 대한 차별은 제도적으로도 존재했다. 가령, 일본은 1921년 「부인 및 아동의 매매금지에 관한 국제조약」에 가입하지만, 식민지 조선에 대해서는 그 국제조약을 적용하지 않았다.(76쪽)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비교적’ ‘나은’ 대우가 일본인 ‘위안부’ 모두에게 해당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 일본인 ‘위안부’ 모두가 계약서를 쓰고 전차금을 받고 위안소로 간 것이 아니었다. 그 중에는 조선 여성들처럼 취업사기꾼에 속아 인신매매를 당한 이들도 많았다. 조선인과 같은 조건에 처해 있었던 일본인 ‘위안부’도 있었다. 이처럼 일본인 ‘위안부’의 피해 양상이 조선인 ‘위안부’와 겹쳐지는 측면이 발견된다면, 어떻게 일본인 ‘위안부’ 문제와 식민지 차별을 함께 말할 수 있을까? ‘더’ 많은 식민지 여성이 ‘더’ 고통스러운 상황에 있었음을 증명해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이러한 방식은 피해자의 고통을 비교하고, 피해자 간의 경합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일본인 ‘위안부’ 문제가 담론장에서 말해지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제국은 우리를 분할하지만, 우리는 연대할 수 있다
일본인 ‘위안부’ 문제가 놓인 곤경을 마주하며, 『일본인 「위안부」』의 역자 심아정은 ‘교차적 시각’을 요청한다. “본국, 식민지, 점령지 여성들의 전쟁경험과 성폭력 피해는 이 여성의 경험과 저 여성의 경험을 비교하며 피해의 위계를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이 제도와 저 제도를, 이 정책과 저 정책을 비교하면서 여성들을 분리하며 억압하는 갖가지 권력이 어떻게 맞물려 작동하는지에 착목”(275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차적 시각은 일본인 ‘위안부’가 식민지나 점령지 여성에 비해 ‘덜’ 고통스러웠다거나, 혹은 그 반대가 ‘더’ 고통스러웠다고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 마이너리티 사이의 비교와 경합을 유발하는 것은 권력이 즐겨 사용하는 통치의 방식이라는 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오히려 반대로 질문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일본인 ‘위안부’는 언제 ‘국민’ 대접을 받았을까. 공공연하게 ‘추업부(醜業婦)’라 불리던 매춘 여성을 위안소로 전업하도록 유혹할 때, 업자들이 꼭 덧붙인 말이 있다. “나라를 위해 봉공의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사하면 군속으로서 야스쿠니에 모셔진다”(145쪽) 위안소에서 일본인 ‘위안부’가 ‘나은’ 대우를 받은 측면이 있기도 하지만, 이 또한 “일본인 여성에게 제국의식을 갖게 만든 것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다.
아래에 또 아래가 있는 계급 질서는 차별을 이용해 지배하는 통치의 상투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142쪽) 여기서 끝이 아니다.
패전을 전후해서 일본인 ‘위안부’는 소련군과 미군으로부터 일본을 지키는 일에 떠밀렸다. 일본 정부는 민족의 재생산을 담당하는 ‘보호해야 할 여자’와 이들을 지키기 위해 ‘방파제가 되어줄 여자’를 구분하고, 후자로 분류된 ‘추업부’나 일본인 ‘위안부’들에게 ‘나라를 위해’ 나서줄 것을 요구했다.
일본인 ‘위안부’가 ‘국민’으로 호명되는 순간을 살펴보면, 기지촌 여성들이 ‘양갈보’라 멸시받으면서도 ‘달러 버는 애국자’로 추켜세워졌던 장면이 겹쳐진다. 어느 쪽에서나 소외된 여성들이 ‘국민’ 대접을 받는 순간은 언제나 국가가 그녀들을 착취하고 이용할 때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자면 여성을 국가/민족에 따라 분할하고, 위계 짓고 경합하게 하는 것은 통치의 방식이라는 것이 선명해진다. 말할 것도 없이 이 통치 방식에서 식민지 차별도 발생한다.
물론 ‘조선인’, ‘일본인’이라는 정체성은 통치성이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주입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 고향을 기억하고 있지만, 동시에 국가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고 있기도 하다. 아마 이 둘은 선명히 구별되는 것이 아닐 테다.
다만 ‘삶의 장소’와 ‘모국’이 일치하지 않는 조건에서는 양자가 달리 보이기도 한다. 가령, 최초의 증언자라 알려진 배봉기는 ‘위안부’로 오키나와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배봉기를 오래 취재한 가와타 후미코에 의하면, 배봉기가 ‘나라’라고 했을 때 그것은 ‘고향’을 의미했을 뿐, 국가를 의미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태국에서 정착한 ‘위안부’ 피해생존자 노수복은 일본인 여성운동가 마츠이 야요리에게 “군인은 나쁘지만 한국사람, 일본사람, 타이사람, 중국사람 모두친구”라고 했다 한다. 우리가 정확히 알아야 하는 것은 제국의 기만적이고 폭력적인 통치기술이지, 피해 여성들 사이의 고통의 ‘비교’가 아니다. 제국은 우리를 분할하여 통치하였지만, 우리는 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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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자기 자신을 응시하기_『일본인 ‘위안부’: 애국심과 인신매매』
[서평] 자기 자신을 응시하기_『일본인 ‘위안부’: 애국심과 인신매매』
http://www.militarywatch.or.kr/?p=8390&ckattempt=1
『일본인 ‘위안부’: 애국심과 인신매매』,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 리서치 액션센터 니시노 루미코·오노자와 아카네 엮음, 번역공동체 잇다 옮김, 논형, 2021
“인생에서 트럭섬에 있던 시절이 가장 좋았다.” 트럭섬(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해군의 기항지로 사용되었던 남태평양의 섬)에서 일본인 ‘위안부’ 생활을 했던 야마우치 게이코의 증언이다.
‘위안부’로서 생활했던 시절이 인생에서 가장 좋았다는 증언을 어떻게 들어야 할까. 이를 단순히 ‘위안부’ 피해를 부정하는 말이라거나, 소위 ‘위안부’ 피해의 전형에서 벗어나는 예외적 증언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저 증언에는 일본의 공창제도에서 일본인 ‘위안부’로 이어지는 성착취의 흐름과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전시총동원 체제와 애국심, 그리고 전후 ‘위안부’ 피해자를 침묵시켰던 가부장적 젠더 규범까지의 피해와 가해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있기 때문이다.
『일본인 ‘위안부’: 애국심과 인신매매』 서문의 첫 문장(“왜 일본인 ‘위안부’는 줄곧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었을까?”)이 묻고 있듯이, 일본인 ‘위안부’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문제 제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도 20여 년이 지나도록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했다. 이는 일본인 ‘위안부’가 원래 ‘매춘업’에 종사하던 여성이라는 인식이 만연했던 탓이다.
실제 일본인 ‘위안부’로 유곽 여성이 모집되기도 했지만, 인신매매나 사기에 의한 모집, 그리고 군속 여성에게 ‘위안부’가 되라고 강요하는 등 모집 경로는 매우 다양했다. 하지만 ‘위안부’가 어떻게 모집되었는지 혹은 식민지/지배국 출신인지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군이 ‘위안부’를 모집했고 그 때문에 피해를 당한 여성들이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가이 가즈에 따르면, 심지어 군(국가)조차도 ‘위안부’ 모집이 떳떳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군은 위탁한 업자들이 공개적으로 ‘위안부’를 모집하지 못하도록 경찰에게 단속을 요청해 모집 사실을 은폐시켰다.
모집 경로 따위로 피해 유형을 분류하는 것은 피해의 위계를 설정해 오히려 특정한 피해에 대한 군의 가해 사실을 은폐하고 책임을 축소시키며, 피해의 전형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 ‘당할 만했다’는 낙인을 찍는다. 동시에 누가 피해자인지를 결정하는 권력을 분류하는 자에게 부여하고, 피해의 전형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목소리를 들리지 않게 만든다(이러한 행태들은 지금까지도 여러 성폭력 사건에서 계속되고 있다).
군(국가)은 대외적으로는 ‘위안부’ 모집 사실을 숨겼지만, 뻔뻔하게도 ‘위안부’ 모집 대상자들에게는 나라를 위해 ‘위안부’가 되어달라고 설득했다. 첫머리에 인용한 야마우치 게이코의 증언은 이러한 맥락에서도 이해될 수 있다. 다양한 경로로 모집된 ‘위안부’ 중 ‘매춘업’에 종사하던 여성 대다수는 가난한 가정에서 유곽으로 전차금을 받고 팔려 온 처지였다. 이들은 전차금을 갚지 못해 유곽을 전전했고 사회적으로는 천대받았다. 그런 이들에게 ‘위안부’가 되면 군이 전차금을 갚아주니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거나, 애국자가 됨으로써 “평등하게 대우받”을 수 있다는 말은 큰 희망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일본인 ‘위안부’의 전후는 어땠을까. 야마우치 게이코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유서에 이런 말을 남겼다. “마흔여덟을 눈앞에 두고 죽는 것도 저에게 정해진 숙명일지 모릅니다.” 어쩌면 애국하는 마음으로, “대일본제국을 문자 그대로 가장 밑바닥에서 떠받”치던 ‘위안부’는 전쟁이 끝나자 국가에 의해 버려졌다. 여전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매춘부’에 더해진 ‘위안부’라는 낙인은 피해자들이 더욱더 목소리를 내기 힘들게 만들었다. 피해와 차별의 굴레는 가해 세력인 군(국가)과 가부장적 사회가 덧씌운 것이지만, 피해와 차별 외의 다른 삶을 상상할 수조차 없게 만드는 사회에서 여성들은 그 굴레를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엮은이는 후기의 마지막 지면을 빌려 일본인 ‘위안부’ 당사자들에게 “어떤 정보라도 좋으니” 당신이 경험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요청한다. 책에 실린 여러 글을 세심하게 다듬고 엮었을 사람이 건네는 듣기의 요청은 단순히 더 자세한 연구를 하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위안부’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일본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구성원이 되는 일본 사회에 토양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 위한 것처럼 읽혔다.
도미야마 이치로는 ‘커밍아웃’이 화자 자신이 스스로 정체성(일본인 ‘위안부’의 경우 사회적으로 드러냄이 허락되지 않았던 피해자성)을 말하면서 감수했던 위험에 청자들도 함께 노출되기를 요청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들은 자의 책무는, 청자 자신이 딛고 있었던 “사회의 토양” 아래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묻혀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자신이 딛고 있던 땅을 뒤집어엎고 다시 더 많은 이들이 배제되지 않은 채 함께 설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책무는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뿐 아니라, 이미 증언을 듣고 위험에 노출되었던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나 우리의 발은 누군가의 입을 틀어막게 되기 쉬워지니까.
일본인 ‘위안부’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국전쟁 ‘위안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한국전쟁 ‘위안부’ 당사자의 공적인 증언은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의 목소리를 덮고 있는 토양이 너무나 견고하기 때문이다. “듣는 사람이 말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동화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듣는 사람은 자신을 응시한다. 그리고 말하는 사람은 누군가가 듣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같은 식으로 자기 자신을 응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진다.”(주 1)
적어도 한국전쟁 ‘위안부’에 대해서 한국사회는 아직까지 자신이 딛고 선 ‘토양’을 똑바로 응시한 적이 없다. ‘위안부’ 피해자들 역시 한국사회가 자신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 했기에, 자기 자신을 응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는 우리가 아직 당사자가 말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지 않았고 제대로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이 남는다. 먼저 스스로 발밑을 무너뜨리지 않는 사람이 과연 듣는 자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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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나리타 류이치, 요시다 유타카 엮음, 히토쓰바시대학 한국학연구센터 기획, 『기억과 인식-일본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어떻게 기억하고 인식하는가』, 어문학사, 2020, 164p
2021-05-10|Categories: 리뷰|Tags: 일본인 '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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