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05

"우리 시대의 명저 50" : 한국일보

"우리 시대의 명저 50" : 한국일보 검색

우리시대의 명저 50 - 20세기 우리의 삶.문화.사유의 방향을 제시한 50종의 책 
장병욱,박광희 (지은이)생각의나무2009-05-25
---

책소개

<백범일지>에서 <미학 오디세이>까지, 우리 시대 지성의 숲을 수놓은 명저들에 대한 상세하고 친절한 안내서. 이 책은 우리 시대를 수놓은 수많은 명저들 중에서 독보적인 의미와 소용을 통해 우리의 삶에 지울 수 없는 영향과 파급을 미친 책 50종을 엄밀한 기준과 객관적인 관점으로 선정하고 이들 책을 상세하게 안내한다.

명저는 과거의 맥락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당대를 성찰하고 현재를 진단하면서 미래를 투시한다. 이를테면 <전태일 평전> 같은 책은 1970년대, 노동자의 인권과 노동환경에 대한 전폭적인 인식의 전환을 가능하게 해준 책이다. 만일 <전태일 평전>이 없었다면 이후 우리의 노동현실은 아마도 상당기간 그 진화가 더뎌졌을 것이라는 판단이 가능하다.

이 책은 이처럼 시대와 긴밀하게 조응하면서 태어난 명저들의 출간 배경과 의미, 그리고 그 책이 미친 광범위한 영향과 독자들의 반응,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독법과 감상 포인트, 장점과 한계 등을 매우 상세하면서도 속깊게 기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책에 대한 리뷰 뒤에 저자 인터뷰, 책을 펴낸 출판사 관계자의 회고, 저자의 지인이 바라본 책, 후학이 바라보는 저자 등에 대한 풍부한 부가정보를 팁의 형식으로 제공하고 있어 명저의 의미와 가치를 가늠하는 데 유효한 도움을 주고 있다.


목차
  1.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2. 개미제국의 발견
  3. 궁핍한 시대의 시인
  4.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5.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7. 뜻으로 본 한국역사
  8. 김훈, 박래부 기자의 문학기행
  9. 미학오디세이
  10. 민족경제론
  11.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12. 민중사회학
  13. 민중신학을 말한다
  14. 백범일지
  15. 사다리 걷어차기
  16.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
  17. 서준식 옥중서한
  18.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19.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20.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21.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
  22. 우리글 바로쓰기
  23.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24. 인물과 사상
  25. 저 낮은 경제학을 위하여
  26. 전쟁과 사회
  27. 전태일 평전
  28. 전환시대의 논리
  29. 조선미술대요
  30. 조선후기 농업사 연구
  31. 철학 에세이
  32.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
  33.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34. 한국과학기술사
  35. 한국문학사
  36. 한국미술사
  37. 한국민주주의의 이론
  38. 한국사상사
  39. 한국사신론
  40. 한국사 이야기
  41. 한국생활사 박물관
  42. 한국의 여성과 남성
  43. 한국의 민중극
  44. 한국의학사
  45. 한국인물연극사
  46. 한시미학산책
  47. 해방 전후사의 인식
  48.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49. 희랍철학논고
  50.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

접기
=========


[우리 시대의 명저 50] <49> 김두종의 '한국의학사'

2007.12.14 12:08
일산(一山) 김두종의 (탐구당)는 한국인이 저술한 최초의 한국 의학통사다.1966년에 완간된 이 책은 의사학(醫史學)의 기초를 세우고 발전시키는 데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쳤다. 연세대 의대 의사학과 여인석 교수는 “는 한국의학사 연구에 기념비적 업적이고, 의학사뿐 아니라 1960년대 이루어진 국학 전반의 연구성과 가운데에서도 독보적”이라고 평가했다. 여 교수는 특히 “한국의학사 연구를 발전시키는 일은 김두종의 업적을 어떻게 계승하고 창조적으로 발전시키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물론 이 책 이전에도 한국의학사를 쓴 글이 없지 않았다. 일제시대에는 최남선과 이능화가 한국의학사에 관한 단편적인 글을 남겼다. 또한 홍이섭은 일제시대에 한국과학사에 관해 발표한 글을 모아 해방 후 최초의 한국과학통사인 를 펴냈는데, 이 책 일부에 한국의학사를 다루었다.그러나 한국의학사에 관한 본격적인 저술은 김두종에 의해 비로소 이루어졌다. 김두종은 6ㆍ25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 그 동안 이루어진 고려시대까지의 연구성과를 묶어 를 펴냈다. 이어 60년에 근대 서양의학의 도입을 주제로 한 소책자 을 낸 뒤, 66년에 한국의학의 모든 시기를 다룬 노작(勞作) 를 간행했다.김두종이 한국의학사를 서술하는 기본 관점(史觀)은 그의 학문적 경쟁자였던 미키 사카에(三木榮)의 노골적인 식민사관에 대립해 한국민에 의한 자주적인 의학 발달을 강조하는 주체적인 입장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미키의 고대편은 등 일본의 고대사 관련 자료를 인용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임나일본부설과 같은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한국 고대의학사를 서술하고 있다. 또한 한사군의 지배 사실을 강조해 우리 의학의 자주적인 발전 양상보다는 중국의 영향이나 지배를 강조했다. ... 특히 는 우리나라 역사시대가 한사군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보고 고조선을 신화와 전설의 시대로 치부하는 등 우리 고대사를 왜곡했다.반면 김두종은 에서 이런 점을 과감히 탈피해 고조선을 역사시대로 받아들였으며, 문헌 자료가 없으면 유물 자료를 통해 한반도의 의료활동 흔적을 가능한 한 앞선 시기에서 찾았다. 그래서 신석기시대 유물인 폄석(石ㆍ돌 침)을 침술의 기원으로 보는 증거로 제시했다.김두종은 책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단순한 기술사보다는 역량이 미치는 대로 우리의 문화ㆍ사상적 배경으로부터 고립되지 않는 의학사’를 써보려 했다. 의학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료가 워낙 적어 방계 자료를 원용하고 상상력을 동원해야 하는 선사시대와 고대의학사를 서술하면서는 이런 노력의 흔적이 나타났다.하지만 관련 사료가 많아지기 시작하는 고려시대부터는 서술의 갈래를 잡지 못하고 단순히 사료나열식에 그치기도 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저술ㆍ간행된 의서들이 많아지는 조선시대에는 각 의서의 서지학적 정보와 목차, 간단한 내용 소개가 주종을 이루고, 제도사와 관련해서는 각종 법전이나 실록 등에서 뽑은 내용이 나열돼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에 나타난 이런 한계는 저자의 책임이라기 보다 시대ㆍ환경적 제약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라는 평가다. 여인석 교수는 “개별적인 연구성과가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를 서술했기 때문에 가공되지 않은 1차 사료들의 홍수 속에서 체계적이고 일관된 역사상을 끌어 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여 교수는 “어떤 의미에서 60년대까지도 강하게 남아있던 국사학계의 실증사학적 분위기도 혼자 힘으로 뛰어넘기 힘든 시대적인 제약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그런데 는 거의 1차 사료만으로 토대로 저술됐기 때문에 한계가 나타나기도 했지만 1차 사료에 충실했기 때문에 역사서로서의 생명력을 더 지니고 있다.실제로 이 책 이후 통사를 표방하며 간행된 적잖은 한국의학사 책들이 1차 사료 활용도에서 이 책에 미치지 못했으며, 이 책을 요약ㆍ정리한 수준에 그쳤다.김두종이 의학사 연구를 통해 발견한 사실은 100% 순수한 우리 고유의 것이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우리 의학의 독창성을 부각하려 노력하면서도 국학자에게서 흔히 우리 것에 집착하는 국수주의적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그는 우리 의학이 삼국시대에는 중국과 인도 의학, 고려시대에는 중국과 아라비아 의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았다. 그는 또 우리 의학에 큰 영향을 준 중국의학 도 인도나 아라비아, 서양의학의 영향을 받아 형성됐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민족보다는 학문이 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족만 강조하면 학문의 자유도 침해 받고 학문 자체도 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김두종 연보1896년 함안 출생1916년 휘문의숙 졸업18년 경성의전 입학24년 일본교토부립 의전 졸업39년 봉천만주의대 동아의학연구소 연구원47년 조선적십자사 보건부장47년 서울대 의대 교수53년 한국의사학회장54년 (정음사) 출간60년 숙명여대 총장60년 대한적십자사 부총재63년 성균관대 이사장66년 (탐구당) 완간88년 타계▲저서(1945) (60) (66)■ 여인석 연세대 교수가 말하는 김두종 선생"학문을 접을 나이인 43세에 의사학 공부를 시작해 94세로 타계할 때까지 50년 동안 내내 한 길을 걸었지요."국내에서 유일하게 의사학을 전공한 여인석 연세대 의대 의사학과 교수는 우리 나라 의사학 효시이자 태두인 김두종 선생을 이렇게 말했다. ... 여 교수는 "50세만 넘으면 공부를 접는 학계의 조로 풍토에 비춰 볼 때 김 선생은 가히 사표가 될 만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사회,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웠던 시기인 해방 이후와 1950년대에 전혀 매력 없던 분야였던 의사학에 매진한 것은 오늘날 입장에서 보면 경이롭다"고 말했다.김두종의 생애는 ▦의사가 되기까지 ▦중국에서의 연구 활동 ▦해방하고 귀국 후 한국의사학 연구 활동 등 3시기로 나눌 수 있다.14세(1910년)에 경남 함안군 칠원면의 칠원보통학교에 들어가 3년 만에 졸업했다. 김 선생 자신의 회고처럼 중학교 들어갈 나이를 넘어 비로소 보통학교에 들어간 것이다. 만학의 길은 계속 이어져 평생 과업인 의학사 연구도 마흔이 넘어서야 시작했다.선생은 휘문의숙을 졸업(16년)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 의대 전신)에 입학(18년)했지만 3ㆍ1운동에 참가해 퇴학당했다. 우여곡절끝에 29세(24년)에 교토부립의대를 졸업해 의사의 길로 들어섰다.하지만 그는 의술을 펴기보다 연구에 뜻을 굳혔다. 43세(38년) 때 만주의대 동아의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생활하면서 의사학을 본격 연구하기 시작했다.그는 45년 해방 직후 귀국해 한국 의학사 연구에 본격 매달렸다. 이 같은 노력은 71세(66년)에 노작 와 그 자료집인 를 펴내면서 열매를 맺었다. 은퇴했을 나이인 77세(73년)에는 , 을 잇따라 집필했다.김 선생은 학문적 열정을 쏟으면서도 서울대 의대 교수로 국내 최초로 의사학교실을 만들고 대한의사학회 창설을 주도했다. 제2대 서울의대 부속병원장, 한국전쟁 중에는 전시연합대학으로 서울대 서울분교장을 지냈다.이어 숙명여대 총장과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대한의학협회장, 성균관대 이사장 등도 역임했다. 친구였던 외솔 최현배는 "원만한 인격과 너그러운 금도, 능숙한 수완의 소치"라고 평했다.권대익 기자 dkwon@hk.co.kr


[우리 시대의 명저 50] <48> 김용옥의 '東洋學 어떻게 할 것인가'

2007.12.10

우리 인문학에서 ‘번역’의 중요성을 설파한 (도서출판 통나무)는 도올 김용옥 세명대 석좌교수의 첫 저서이다. 이 책은 동양학, 즉 한문 고전과 관련된 학문을 하는 방법론이 주요 내용으로 학술서적의 성격을 띠고 있다.내용이 좀 딱딱한 데도 이 책은 1986년 첫 발간 이후 지금까지 30여만 부나 팔릴 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에 많은 젊은이들이 이 책을 읽고 동양철학에 관심을 가졌고, 인문학 전공자들 가운데 이 책을 읽지 않은 이들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 책은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 교수가 귀국해 고려대 철학과 교수로 부임한 직후 김우창 고려대 교수가 편집하던 1983년 봄 호에 실은 ‘우리는 동양학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비롯됐다. 이 글은 당시 이데올로기에 매몰돼 있던 지식계에 뜨거운 반응을 일으켰고 김 교수의 다른 글들과 함께 엮어져 단행본으로 나왔다.당시 NL이니 PD니 하면서 이념적 성향이 극도로 치닫고 있던 대학사회에서 전혀 이념적이지 않은, 한문고전을 번역하는 방법론을 다룬 책이 어떻게 호응을 얻었을까.“대한민국은 20세기 외래문명을 수용한다는 명분 하에 개화, 근대화를 추구했는데 그 기초적인 방법론이 잘못돼있거나 너무 부실했습니다. 이 책은 외국문명을 흡수해도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번역해서 우리화 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를 포괄적으로, 본질적으로 제시했다고 봅니다. 당시 대학사회에는 이념적 대립밖에 없었는데, 어느 편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지성인들이 갈구하던 짜릿한 쾌감, 본질적 반성을 하는 계기를 줬거든요. 이념적 논쟁의 틀을 벗어나 총체적으로 우리 문명을 다시 건설해야 한다는 새로운 논리를 제시한 것이죠.” 김 교수 자신의 회고이다.책은 ‘우리는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 와 구체적인 번역의 방법을 제시한 ‘번역에 있어서의 공간과 시간’, 중국 철학계의 동향을 다룬 ‘중공학계에 있어서의 중국철학사기술의 전환’, 김 교수가 학부시절에 쓴 ‘“동양적”이란 의미’, 중국어의 우리말 표기법을 제시한 ‘최영애-김용옥표기법 제정에 즈음하여’ 등의 글로 이루어져 있다.김 교수는 이 책에서 국내 동양학계를 ‘불모지’, ‘황무지’로 비유하고 해방 이후를 ‘표절의 시대’로 부르며 번역을 경시하는 학계가 일제시대의 수준에도 못 미치는 점을 일본, 미국 등 학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번역과 구체적으로 비교하면서 철저하게 지적했다. “우리나라에 번역에 견줄 수 있는 번역이 있는가. 성경은 아무리 무식한 사람이라도 한국인이라면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되어 있으나 기존 논어 번역판은 원문의 대조 없이는 한글만 그대로 읽어서는 그 상식적인 뜻조차 파악하기가 힘들다.” “주자학의 정통보루라고 하는 우리나라에 번역은커녕 구두점(문장부호)이 제대로 찍힌 (주희의 어록집)조차 없는데 일본에는 완역에 가까운 이 책이 주자학 본격 도입 전에 이미 출판돼 있었다.” “칸트의 저작이 우리말로 번역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칸트에 대해 강의하는 것은 칸트를 독점한 자의 일방적 강요에 불과하다.”이 책은 또 서구 이념에 절어 있던 세대들 사이에 동양철학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는 일제시대에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답습되고 있던 ‘데칸쇼 철학’ 등 서양철학이 현상과 실체를 분리하는 플라톤주의적 전통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동양철학의 전원적(全元的)인 일원론과 대조 분석해 비판하는 관점을 보여주었다. 이와 함께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겨졌던 불교, 유교, 도가사상 등 동양사상이 결국에는 ‘자아’라고 하는 허위의식의 철저한 타파를 추구하는 것이라며 현대의 서구언어로 표현했다.“나는 동양철학을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컨템포러리(contemporary)한 사상, 즉 지금 여기(here and now)에 살아있는 사상으로 번역해 낸 것입니다. ... 과거에는 한학자들이나 하는 것으로 여겼던 동양사상이 현실을 움직여갈 수 있는 현대의 사상이라는 점을 보여준 것입니다. 소설가 김훈씨가 한문 고전인 를 살아있는 사람의 고민이 들어있는 로 번역해 낸 것이 똑 같은 논리입니다.”김 교수는 이 책을 시작으로 등 고전들을 쉬운 현대어로 풀이하고 TV 대중강연 등을 활발히 전개해 고전과 철학의 대중화 시대를 선도했다.도옥 김용옥 인터뷰"그 동안 학문의 거짓이 너무 심했윱求? 나는 그걸 깬 겁니다."유교, 불교, 도가사상, 기독교 등 동서양의 고전과 종교 해석을 둘러싸고 숱한 논쟁과 화제를 몰고 다니는 도올 김용옥 세명대 석좌교수를 1일 서울 동숭동 집필실에서 만났다."는 한문이란 언어를 번역하는 방법론에서 시작된 것인데, 언어의 번역은 문명의 번역이고, 문명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마음 생각의 번역인데, 그것이 어떻게 정밀하고 정직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를 다룬 것이지요." 김 교수는 이 책이 우리 인문학에서 번역의 시대를 열었으며 아직도 이 책의 역할은 남아 있다고 자평했다."한문서적 한 권 번역하는 게 논문 천편 쓰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하버드 대학의 경우 희랍, 라틴, 한문고전학 분야 박사학위논문의 50%가 번역입니다. 우리나라도 최근 성균관대에서 번역을 논문으로 인정하는 등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또 민족문화추진회가 고전번역원으로 승격된 것도 좋은 일입니다."김 교수는 우리가 아직도 한문문화권에서 한글문화권으로 완전하게 이행이 되지 않았다면서 번역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우리가 의존하는 역사자료의 98%가 한문자료인데 그걸 한글로 옮겨야 한글문명이 사는 겁니다. 박지원이 지은 책 정도면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도록 번역돼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김 교수는 올해 등의 저서로 기독교계와 논쟁을 벌였다. "동양고전학자가 성서를 건드리는 게 외도인 것처럼 비춰지지만, 나한테는 동양고전이나 희랍고전이나 인도고전이나 똑 같은 시공간의 거리에 있는 것입니다. ... 김 교수는 "희랍이나 중국, 마야문명이 겉으로는 다르게 보이지만 이 모든 것을 한 인간의 다양한 활동으로 본다"면서 "많은 목사들이 박지원보다 희랍을 더 가깝게 느끼는 것처럼 우리 개개인은 어떨 때는 희랍식으로 사고하고, 어떤 때는 마야, 어떨 때는 중국식으로도 산다"고 말했다.김 교수는 동서양의 고전 뿐만 아니라 한의학, 영화, 연극, 태권도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한데 대해 "어떤 하나의 이념체계에 얽매이지 않았고, 인간의 모든 경험 양태를 내가 스스로 체험해보지 않으면 진정한 학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면서 "되는대로 집적거린 것은 절대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는 "기(氣)라는 게 인간 생명의 근원인데 그런 기가 발출되어 나타나는 다양한 장르를 체험해보아야 내가 말하는 기철학의 총체적 모습이 나온다"면서 죽기 전에 자신이 경험한 모든 것을 종합하는 작업을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요즘 재즈의 화성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김 교수는 "피아노 건반 위에서 주역 괘를 읽어요. 이건 구라를 피는 게 아니고 원리의 측면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우리나라 학자들이 진짜 공부해야 합니다. 내가 답답해서 자극을 주느라고 거친 말을 하니까 자꾸 뒤에서 욕을 하는데 나는 내 인생을 던져 우리 역사에 자극을 주려고 합니다. 나는 학문의 정확성, 팩트의 엄밀성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나를 씹든 비판하든 응수 안합니다."김 교수는 자신이 책에서 말한 대로 제대로 번역을 하지 않는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한국고전 최초의 일자색인인 을 꺼내 보이며 "내가 하는 작업이 모두 번역인데 사람들은 이런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20세기에는 어딜 가든 날 피했어요. 몇 년 전 만해도 사람들 모이는 곳에 내가 나타나는 걸 싫어했어요. 요새는 내가 늙어가니까 그렇지는 않아요. 한국사회에서는 나이를 먹어야 되는가 봐요." 김 교수는 "재즈를 마지막으로 고전과 기철학의 세계로 침잠해들어가겠다"면서 내년부터는 사회활동도 줄여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교회 권력과 신학 도그마 탓에 ‘사실’이 아니라 ‘가설’로 세상에 나왔다. 어느 시대에도 궤변은 필요하다… 이 사회를 ‘정치적 신학’의 도그마가 지배하는 날까지는, 나는 이 책이 가설인 것으로 만족한다.”1974년 봄, 리영희는 한 권의 논문집을 내며 서문에 이렇게 썼다. 세계를 보는 시각이 반공 이데올로기라는 새장에 갇혀 있을 때, 그는 차갑게 빛나는 한 다발의 지성을 토해 내며 그것을 ‘가설’이라 규정했다. “‘괴(傀)’자 같은 비과학인 감성적ㆍ정치적 목적의 용어”를 써야 하는 “시대적 도그마와의 타협”이 이유였다.1970~1973년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정경연구 등에 기고한 동북아시아 정세에 관한 글을 엮은 책이었다. 라 이름 붙인 이 책이 어떤 무게를 갖게 될지, 자괴감 섞인 서문을 쓰던 마흔 다섯의 해직 기자는 상상할 수 없었다.책이 씌어지던 무렵 군사분계선 이남의 공화국은 유신(維新), 곧 군사정권 영구화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세계 최강의 미국이 베트남에서 패퇴하고 중국 대륙이 꿈틀거리고 있었지만, 그 의미는 한국인의 인식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한반도 상공에도 냉전체제 와해, 신질저 구축의 새로운 공기가 흘러 들었으나 그 풍향을 짚어 줄 사람은 없었다.침묵하는 지식인들은 어둠 속에 자취를 찾기 힘들었고, 정권의 검열을 거친 언론은 오히려 눈을 흐리게 하는 백태였다. 이때 해직 기자이자 해직 교수인 리영희가 ‘전환시대’의 실체규명에 도전하고 나섰다. 벼린 날 같은 시각으로 동북아 정세를 꿰뚫는 ‘논리’는, 몽롱한 의식에 내려 치는 한 바탕 벼락이었다.충격의 크기는 깊고 넓었다. 이 책은 전쟁과 독재를 거치며 체화한 냉전의식의 피부를 걷어 내는 수술용 칼이었다. 이 시기 대학 초년생이던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 남한 사회의 상투적 의식체계를 깨우는 각성제로 작용하다가, 이내 독재권력의 심장을 뚫는 무기가 됐다.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유신교육으로 인한 냉전적 사고의 중독에서 벗어나는 지적 해방의 단비를 이 책에서 맛보았다.유신 말기, 젊은이들이 비판의식을 세례받는 현장에는 언제나 이 책이 있었다”고 당시를 설명했다. 뒤늦게 이 책을 금서(禁書) 목록에 추가한 군사정권의 입장에서는 만시지탄이 아닐 수 없었다.책은 내용상 6부로 구성돼 있지만, 평론집인 만큼 하나의 줄기를 이루지는 않는다. 중국과 일본의 정치역학, 베트남 전쟁의 실상을 미국과의 관계 속에서 실증적으로 고찰한다.중국에 관한 논문을 모은 2부는 국공합작에서 시작해 한국전쟁 개입, 저우언라이(周恩來)의 과도 집단지도체제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실체를 낱낱이 파헤쳤다. 인해전술의 기억과 ‘죽의 장막’이라는 신화 너머에 있던 대륙이, 리영희의 날카로운 분석 앞에 생생한 속살을 드러내야 했다.일본을 다룬 3부도 마찬가지다. 일본 자위대의 외부지향적 구조를 통해 군국주의 부활 의도를 읽어내고, 미국과의 밀월관계 분석에서 아시아에서의 일본 역할론을 정확하게 짚어 낸다.이 책에서 가장 논란이 된 부분은 4부에 포함된 베트남 전쟁 분석. ‘월맹군의 침략’과 ‘자유세계의 대응’이라는 기존의 냉전 논리는, 베트남의 항불(抗佛) 식민지 해방전쟁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리영희의 치밀한 재구성 앞에 맥없이 무너진다.통킹만 북폭 사건과 미국의 사전 계획으로 인한 전면전 확대 등,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베트남전의 본 모습이 이 책에서 까발려진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미국의 혈맹으로 대규모 파병을 강행했던 한국 정부로서는 결코 알리고 싶지 않은 부분이기도 했다. 이 대목은 오랫동안, 이 책에 ‘이적표현물’의 타이틀을 씌우는 근거가 됐다.가 이처럼 동북아 정치역학을 깊이 있게 분석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외신부 기자로서 리영희의 경험이 있었다. ... 이 책의 근거가 된 텍스트들은 정치학 원론서가 아니다.국제정세와 관계된 각종 외신 기사, 미 국무성과 국방성의 비밀 자료와 의회의 공청회 기록, 일본과 중국 외무성의 성명이나 연설 자료 등이 ‘논리’를 세우는 뼈대였다.기자가 아니면 접근하기 힘들었던 각종 자료와 그것을 꼼꼼히 수집, 정리한 리영희의 집념이 이 책의 탄생을 가능케 했다. 70년대 리영희의 서재를 방문한 적이 있는 윤무한 강원대 교수는 “서재를 빽빽이 채? 누런 포장용지를 접고 자르고 구멍을 뚫고 풀로 붙여 만든 스크랩북들이 청동기시대의 유물 같았다”고 기억했다.강산이 세 번도 더 바뀐 오늘, 이 책은 여전히 ‘전환시대’의 해석으로 유효할까. 지난해 초 31년 만에 찍은 2판 서문에 리영희는 다시 이렇게 썼다. “피를 먹고 싹을 튼 한국의 민주주의 나무는 그 앞날이 결코 순탄치는 않겠지만 힘있게 자라서 넓은 번영의 그늘을 드리울 것이다. 왜냐하면 수십만을 헤아리는 전국의 ‘전론’의 사상ㆍ정신적 제자들이 사회와 나라의 주인으로 자랐기 때문이다.”■ 리영희, 결코 꺾이지 않았던 '펜' "리영희! 그는 한반도 상공에 날고 있는 각성의 붕(鵬)이다."지난해 여름, 한길사에서 묶어 낸 12권짜리 에 부치는 시인 고은의 서사(序辭) 한 토막이다. 세상은 그에게 '시대의 양심', '행동하는 지식인' 등의 수식어를 붙였다. 하지만 그는 학자(또는 운동가)라기보다는 기자다. 다만 그 시각의 수승(殊勝)함과 논리의 정치함이, 어떤 이에게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경험케 했고 다른 이에게는 '의식화의 원흉'으로 비쳐졌을 뿐이다.리영희는 1957년 합동통신 외신부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기자 경력은 순탄치 못했다. 64년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 검토중'이라는 기사로 처음 구속(반공법 위반)된 뒤, 72년까지 해직과 복직을 반복했다. 다음 직장인 대학에서도 두 번 쫓겨나는 경험을 했다. ... 아홉 번의 연행, 다섯 번의 기소, 1,012일에 걸친 영어(囹圄)의 시간을 거치며 "나의 글들이 이 사회에서 하루 속히, 읽을 필요가 없는 구문(舊聞)이 돼버렸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고 했다. 하지만 기자 리영희 앞에 우상(偶像)은 건재했고, 그의 펜은 마를 수가 없었다.그는 한국 사회의 허위의식을 벗겨내는 고통을 얘기하며 자주 루쉰(魯迅)의 글을 인용했다. "햇볕도 공기도 안 들어오는 무쇠로 만든 방 속에서, 죽음의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벽에 구멍을 뚫어 밝은 빛과 맑은 공기를 넣어 주는 것은 옳은 일일까. 감각이 마비된 탓에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던 사람에게, 진실을 보는 시력과 생각할 힘을 주는 신선한 공기를 주는 것은 차라리 죄악이 아닐까." 그는 결국 군사정권이 쳐 놓은 허위의 은산철벽에 진실의 구멍을 뚫는 길을 선택했다.그 각성의 작업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2000년 뇌출혈로 쓰러진 뒤 몸을 마음대로 부릴 수 없음에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반대 집회에 참석해 발언하는 등 그의 언어는 아직도 성성하다. 유상호기자■ 리영희-1929년 평북 운산군 출생.- 47년 경성공업교 졸업.- 50년 한국해양대 졸업. 육군 입대.- 57년 소령 예편. 합동통신사 입사.- 64년 조선일보 입사. 반공법 위반 구속.- 70년 위수령 항의 성명 참가로 강제해직.- 72년 한양대 교수직 강제해직.- 74년 출간.- 77년 출간. 반공법 위반 구속.- 80년 만기출옥. 광주항쟁 배후로 지목돼 구속.- 88년 한겨레신문 논설고문 취임. 국가보안법 위반 구속.- 90년 출간.- 95년 출간. 한양대 정년퇴임.- 99년 출간.-2005년 출간. 유상호 기자 shy@hk.co.kr

휴전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 열기로 들떠있던 200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50주년이기도 한 그 때 소장 사회학자 김동춘이 한국전쟁을 다룬 를 세상에 내놓았다. 20세기 한반도의 가장 중요한 사건인 한국전쟁을 분석하고 그것이 한국의 정치ㆍ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도전적으로 질문하는 책이다.1987년 이후 정치적 민주화의 진행으로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뤄지고 자유주의적 정권이 들어섰지만, 한국전쟁의 부정적 유산은 깊고도 넓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에 대한 ‘사상검증’이 무차별적으로 이어졌고, 남ㆍ북한군 수십명의 사상자를 낸 서해교전이 일어나자 언론은 북한 군인의 ‘죽음’을 ‘승리’로 미화하기 바빴다.냉전적 지배 질서와 반공 이데올로기의 장벽은 여전히 완고했지만 그것의 원형을 한국전쟁을 통해 세밀하게 들여다본 연구는 당시만해도 전무했다.기존의 한국전쟁 연구가 왜 전쟁이 일어났는지, 전투가 어떻게 전개됐는지에 대해 집중했다면 는 전쟁 발발 후 국가와 군대, 국민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고 그것이 휴전 이후 남ㆍ북한 사회에 어떻게 작동했는가를 조명함으로써 주목 받았다.한국 사회의 지배 질서를 관찰하며 적극적인 사회 발언을 하던 김동춘이 한국전쟁으로 시야를 돌린 것은 90년대 초 박사학위논문 을 쓰면서부터다. 사용자가 분규현장에서 노동자를 빨갱이로 낙인 찍거나 구사대가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멀리 4ㆍ19, 5ㆍ18 등에서 보여준 군경의 폭력적 진압 혹은 학살과 맥이 닿아 있었다.그리고 그 시원을 찾아가자 한국전쟁을 에두를 수 없었다. ... 예컨대 전쟁 발발 직후 피난민과 잔류민의 성향을 분석하면서 상대적으로 유복한 정부고위관리, 지주, 월남자는 피난을 서둘렀지만 인민정권이 들어선다고 해도 별다른 피해를 받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 중소상인은 방관자적 입장을 보였고 농번기의 농민은 생존을 위해 잔류를 택했다는 것이다.한국전쟁 당시 20만 명 이상이 숨진 민간인 학살은 가해자중 상당수가 일제시대 하급 경찰을 지낸 가난한 하층민이었는데 지주와 부르주아 출신에 대해 이들이 지녔던 계급적 열등감이 전쟁이 발발하자 무자비한 폭력과 학살로 나타났다는 것이다.권력에 대한 한국인의 기회주의적, 순응주의적 태도의 기원을 한국전쟁에서 찾는 점도 설득력 있다. 전쟁이 발발하자 민중을 속이고 먼저 서울을 떠난 뒤, 수복 후에는 잔류할 수 밖에 없었던 민중을 희생양으로 삼은 남한 지배 계급의 태도는 민중으로 하여금‘국가와 권력은 아무 것도 해주지 않는다.힘센 편에 붙어야 산다’는 순응주의적 태도를 낳았다. ... 이는 전쟁 후에도 그들에게 계급적 각성 대신 자유당 때는 자유당을, 공화당 때는 공화당을, 민정당 때는 민정당을 찍도록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새로운 자료를 제시하지 못한 점, 전쟁의 내적 측면을 부각하느라 국제정치적 측면을 소략한 점, 지휘관을 비롯해 참전 군인들의 인터뷰가 부족한 점, 이승만에 대한 격한 도덕적 비판 등은 저자가 밝히는 이 책의 한계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가 벌어지는 전선의 정치가 아니라 피난을 가야하고 점령당해야 했던 민중이 겪은 후방의 정치를 본격적으로 공론화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발표와 함께 학계의 관심을 받았다.최장집 고려대 교수는 “개인들의 ‘압제받은 체험’과‘부인된 기억’을 공공의 장으로 끌어올려 한국전쟁을 재해석하기 위한 근거로 삼았다”며“한국전쟁을 사회학적 측면에서 다룬 거의 최초의 저술”이라고 평가했다.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도 “전쟁이라는 무모한 군사적 운동의 주체인 국가와 국가권력 담당자들, 그 기구와 집단들의 ‘병리학’적 본질을 철저하게 드러내 한국전쟁의 진정한 의미를 밝혀준다”고 상찬했다.저자는 이 책의 발간을 즈음한 2000년부터 한국전쟁 전후 민간학살 진상규명범국민위원회 활동을 주도하며 학살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공론화하려 노력했으며 2005년부터는 해방 후 반민주적 인권유린과 폭력, 학살, 의문사 등을 밝히는 과거사정리위원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하며 자신의 학문적 관심을 사회적 실천으로 옮기고 있다.그는 “남북화해의 진척 속도 만큼이나 한국전쟁을 둘러싼 시각의 격차가 줄어들 것”이라며 “한국전쟁 이후 반공주의가 한국사회에 어떻게 작동했는가를 다룬 이 책의 2부를 준비중”이라고 밝혔다. ■ 약력1959년 경북 영주 출생1984~1988년 구로고 교사1993년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1997년~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및 NGO 학과 교수2002년 참여연대 정책위원장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상임위원저서(1991)(1997) (2000)(2004)(2006)(2007)이왕구 기자 fab4@hk.co.kr ... ■ 한국전쟁 다룬 책들관변학자를 중심으로 호전적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를 전제로 이뤄졌던 한국전쟁 연구에 충격을 준 저술은 브루스 커밍스의 (1986)이다.한국전쟁이 내전이라는 전제 하에 미국과 소련의 책임을 물었던 커밍스의 수정주의는 한동안 학계를 풍미했지만, 소련해체 후 소련과 중국의 새로운 자료가 공개되면서 소장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수정주의와 전통주의를 모두 극복하려는 연구가 시도된다.박명림의 대작 (1996)은 전통주의와 수정주의의 관점을 모두 극복한 대표적인 연구로 꼽힌다.1990년대 말부터는 전쟁의 기원과 발발, 전개과정에 집중한 기존 연구 영역을 뛰어넘는 연구들이 꽃을 피운다. ... 전쟁 피해자로서의 민간인을 중심으로 한국전쟁을 고찰한 김동춘의 (2000)는 비록 본격적인 학술서는 아니지만 한국전쟁을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접근한 기념비적인 저작으로 평가받는다.여성학,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한국전쟁을 바라본 연구도 잇따랐다. 구술 청취를 활용한 지역사인 김귀옥의 (1999)과 윤택림의 (2003), 전쟁 미망인들의 생존방식을 연구한 이임하의 (2004) 등도 한국전쟁 연구를 풍성하게 하는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김동춘은 “인구 구성에서 전쟁 세대가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면서 한국전쟁에 대한 냉전적 시각이 크게 후퇴했다”며 “민족화합ㆍ평화ㆍ인권에 중심을 두고 한국전쟁의 교훈을 보편화할 수 있는 연구가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이왕구기자 fab4@hk.co.kr


[우리 시대의 명저 50] <6> 도정일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2007.02.08 02:24
“친구여, 닭을 잡아 먹지 마라 / 그 닭은 그대의 할머니일지도 모르므로.”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가 쓴 에서의 메타포는 미상불 기괴하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더 바삭바삭하게 튀겨진, 시인의 말을 빌면 할머니를 소스에 찍어 먹는 형국이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것이든 아니든, 오늘날 그 같은 행위는 광범히 유포돼 천연덕스런 일상이 되고 말았다.문학평론가 도정일(66)씨는 오비디우스의 시구를 끄집어 내고, 지금 우리가 처한 환경이 시인들로부터 아름다움에 대한 마지막 인내력마저 소진시켰음에 틀림없다고 단언한다. 그 같은 확신의 밑바닥에는 이런 명제 하나가 불길하게 흐물대고 있을 거라고 그는 예시한다. ‘자동 판매기가 / 고무 호스로, 밑을 대주는 종이컵들을 윤간하고 있다. / 창녀들은 포주의 뱃속에서 / 밥을 빌어 먹는다.’(최승호의 중)운문의 형식을 빌어 그려진 저 지옥도는 우리의 현실이다. 그는 말한다. “1970년대 이후의 한국사는 과거 어느 시기 것과도 다른 욕망 생성의 사회적 환경, 정확히 말하면 ‘천민 자본주의’의 환경 속에서 씌어져 왔다. 21세기, 저 환경은 더욱 정교해져 ‘탐욕’이라는 형태의 지배적 욕망을 사회적으로 생산하고 있다”고.그가 여기 저기 실린 평론들을 묶어 처음으로 낸 책 는 우리 시대의 시에서 읽어 낸 생명들의 표정이다. 시적 분석의 형태를 취하지만, 곳곳에서 문명 비평의 체취를 짙게 풍긴다. 전례를 찾기 힘든 글쓰기에, 사람들은 ‘경쾌한 듯 한데, 읽으면 읽을수록 어렵다’는 반응을 내놓았다.예를 들어 ‘인간에게서 배제당한 자연은 역으로 인간을 배제한다. 시인은 눈 내리는 숲으로 가지 못하고 아이들은, 비를 겁내고, 농사꾼은 땅을 믿지 못한다. 비슷한 이유로, 풀잎은 시인을 배제한다.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비 맞으면 안 돼”라는 어머니의 당부가 깊이 박혀 있다’ 또는 ‘농약 끈적한 풀밭에 앉아 풀잎의 숨소리를 들어야 하는 왜곡과 변태를, 그 비참함을, 그가 무슨 수로 견딜 수 있으랴. ... 그럼에도 여전히 강과 함께 사는 듯이 생각하는 환각의 능력이 필요하고 감성 분열의, 평론가적 능력이 필요하다.경쾌한 듯 어려운 詩분석 속의 문명 비평“눈·비 맞기 두려운 시대 문학도 곤경에 자연 착취·파괴 추방에 문학이 앞장서야”‘인문학의 갈 길’ 10년전의 메시지 오롯이책의 말마 따나 산성 눈 내리는 지금, 이 세계의 어느 숲이 아름다울 것이며 누가 그 숲에 취해 발길을 멈추는가? 그 같은 현실 앞에 낭패감을 느끼고, 처리 곤란한 딸꾹질에 내몰리는 자신을 발견한다고 그는 고백한다. “마르쿠제가 강조했던 것처럼 자연이 노예화할 경우, 그 자연의 일부인 인간 자신도 노예화의 운명을 피하지 못하죠. 자연에 발생한 재난은 곧바로 문학의 재난이며, 자연의 수난은 곧장 문학 자체의 수난이에요.”.문명 비평 같기도 하고, 시민 운동을 위한 굳건한 지지대 같기도 하고, 개성 넘치는 사유에 빚지고 있는 수상록 같기도 한 이 책은 이 강퍅한 시대에 인문학은 어떻게 존재해야 할 지를 예시한다. 창작과비평 등 잡지ㆍ강연 등에 산발적으로 소개된 글들을 어느 눈밝은 편집자가 모아 두었다, 에 썼던 제목을 내세워 단행본으로 묶은 이 책은 1994년 1쇄를 찍은 이래 현재 10쇄 까지 찍었다는 기록에 빛난다.그 와중에 1만부 팔리고 절판된 기록도 갖고 있는, 별난 문학평론집이다. “게으른 나로서는 수정ㆍ보완까지 했죠. 10년이 지났는데도 갖고 와, 사인을 부탁하는 독자에, 저도 놀랄 정도예요.” 아예 재판을 내자는 제의도 심심찮게 듣고 있다.책은 한국 사회가 아직 그 광풍을 체감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눈을 치켜 뜨고 있다. 그것은 인문학자에게 주어진 의무이기도 하다고 저자는 믿는다. “동유럽 붕괴, 마르크시즘 퇴조 등에 대한 대안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은 탈구조주의와 해체론 쪽으로 갔어요. ... 책 속에 일관된 반포스트모더니즘론은 한 시대에 대한 비판적 사유의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바람의 결과였죠.”비판의 칼날은 보건 사회ㆍ청결 사회에 대한 집착, 웰빙에 대한 광적 증후에 예리하게 번득인다. 원로 인문학자의 의무감이기도 했다. “삶의 부조리, 유한성 앞에서 인간의 유한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곧 인문학이니까요. 행복 이데올로기에 미친 시대에 대한 반동일지도 모릅니다.”책은 위기에 처한 우리 시대 인문학이 택할 수 있는 방편도 제시했다. 문학인들끼리 통하는 언어만이 아닌, 문학과 대중의 괴리를 좁히고 문학이 대중의 삶에 어떤 영향 미치는가에 대한 실험이라고 서??밝힌 대로다. “문학과 삶 간의 관계를 끊임없이 환기시키자는 나의 비평적 모토가 발현된 거죠. 대학에서의 난삽한 비평 논의는 대중에게는 부담스럽고 불필요하니까요.” 그는 한국 문학 평론이 그 부분에서 돌파구를 열지 않으면, 문학 평론이 왜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고 힘 준다.평론의 형식과 문체에 대한 실험이기도 했다. “에세이나 문학 저널리즘 같은 문체로, 대중의 삶에 접착된 형식말예요. 친근한 용어를 구사, 이론성ㆍ난삽성에 빠지지 않게 하는 인문학적 글쓰기.” 이런 종류의 평론은 처음 접했다며 일반인들은 반겼다.대학 비평, 문학 이론 가르치며 한국 문학 현장 비평은 삼가왔던 그가 주간 정준수의 ‘꼬드김’에 몇 번 연재했던 계간평이 거둔 결과를 보면 자신도 좀 놀랍다. “이미 당시 문학 평론과 대중 간의 괴리는 심화돼 가고 있었죠. 지금은 서로 백리 밖이지만.”이 반자연적 시대, 그의 책이 노둣돌 삼는 ‘숲’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생태 환경이에요. 좁게는 자연, 넓게는 자연과의 관계죠. 지금 한국은 볼거리 문화로 사람들을 마취시키려는 서커스 정책으로 통합돼 있잖아요?” ... 364쪽에 달하는 책은 눈ㆍ비 오면 오히려 두려워 하는 이 시대, 즉 자연이 망가진 때 문학이 당해야 하는 곤경을 증거한다.삶의 모태인 자연을 착취ㆍ파괴하는 현상을 왜 추방해야 하는지, 문학은 철저히, 뼈저리게 느껴야 함이 동시대 우리 문인들의 육필로 증거돼 있다. 사회 혁명, 생산 양식, 소비 양식에 왜 일대 전환이 이뤄져야 하는지도. “생태란 게 어떻게 문학 속으로 용해될 수 있나를 보여주자는 거 였죠.”그러나 어느 누가 냉장고를, 자동차를 포기할 것인가? “예술 작품이나 교육 같은 일상의 삶 속에서 풀어갈 수 있어야죠.” 그는 일상, 즉 현실에 아직도 문학이 할 일은 남아 있다고 믿는다. “지금은 대중 문화에 쫓겨, 문학 자체가 변두리에 내몰린 때예요. 문학과 예술이 인간의 삶에 왜 필요한지에 대한 인식부터 확산돼야 하는 시기죠.” 그는 이 책이 예술ㆍ문학의 사회적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기를, 나아가 평론가들이 문학과 소비자들 간의 연결 고리를 재정립해 주기를 소망한다.책 속에 드러난 바, 그의 현실 인식 지형도를 고려한다면 상황은 화급하다 ‘지금의 문학은 오락의 한 형태다. 대중이 쉽게 소비할 수 있는 오락물의 형태로 이동해 가고 있다. 문학과 오락의 화간(和姦) 시대다.’ 그는 “문학이 이제 아예 말초적ㆍ외피적ㆍ감각적 엔터테인먼트로 돼 가고 있다”고 말했다.그에게는 오랫동안 품어 온 문학의 속성 혹은 운명론이 있다. 문학이란 기본적으로 반(反)행복론이라는 것이다. “독자의 엔터테인먼트 수준을 높이게 하고, 다양하면서도 근원적인 딜레마 쪽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옮기려 하죠. 삶이 말초적 오락의 수준에 머무르기를 거부하는 예술이 문학이니까요.”생태 파괴와 간통한 온난화가 성큼성큼 한반도를 잡아 먹으려 오는 때, 그의 말은 이 책의 속편을 암시한다.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지만 그들은 하루하루 눈앞의 삶에 매여 있다. 그들에게는 개발 정책만큼 매력적인 것이란 없다. 한국에서, 환경청이란 영원히 찬밥 신세 아닌가?” ... 현재 그의 명함이 알려주는 바, 그는 의 이사장이다. 시인이 숲으로 가지 못하는 시대, 그의 책은 숲속에 안주할 수 없었다.그가 책의 숲에서 사람의 숲으로 온 것은 1999년 문화연대 출범에 맞춰 시민운동에 적극 관여하기 시작하면서다. 그는 뛰면서 생각하고 발로 썼다. 잡지사, 언론사, 대학 교수(작년 2월 퇴임) 등을 두루 거쳐 지금은 민간 사회 운동의 축이 된 그가 한갓지게 자연을 완상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평론이라도 그가 쓴 글은 여느 책상물림의 글과 달랐다. 신문의 칼럼을 써도, 그의 논조는 ‘정치적 변화가 있을 때마다 죽통에 쉬파리 엉기듯 달려들어 세상의 소음을 늘리는 데 공헌하는 3류 학자’( 389쪽)의 글이 아니었다. YS 정권 때는 정부의 문화 정책 자문에, DJ 때는 대통령정책자문위원회에 적극 응했던 그의 관심은 현실 속의 문화 운동 또는 정책이었다.지난해 2월 경희대 퇴임 직후, 지인들은 “책 없는 퇴임 없다”며 “책 내고 강연회도 갖자”고 성화였다. 그러나 팔 걷어 부치고 뛰어든 사업에 열중하느라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2002년 받은 암 수술은 그를 더욱 강하게 했다.“지난 5년 동안은 ‘책 읽는 사회…’ 사업에 송두리째 바쳤지만, 그 동안 잃어 버린 시간들을 앞으로 복구해 낼 것”이라 다짐한다. 대기업의 기부를 받아, 지난해 9월 이후 농어촌 낙도 지역의 도서관 57개를 도시 도서관 뺨치는 수준으로 리모델링한 ‘작은 도서관 사업’은 한국 땅에서 거의 소멸되다시피 한 ‘공공 지식’의 중요성을 새삼 알려낸 쾌거로 기억된다.그의 컴퓨터에 간직돼 있는 20여권 분량의 원고는 더러 제목만으로도 족히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라니. 상생, 평화, 선린, 공존 등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체온에 대해 이야기해 줄 책이다. 이성복 시인의 어투를 흉내낸다면, 일에 밀려 하드 디스크에서 뒹구는 원고들은 언제 잠을 깰까?

[우리 시대의 명저 50] <4>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007.01.25 01:35
책의 대중성만큼은 이 같은 수치에 의해 입증된 셈이다. 그렇다면 작품성은 어떨까.작가 박완서가 평소의 그 답지 않게 “읽고 깨우친 바 기쁨이 하도 커서 말하고 싶은 걸 참을 수가 없다”며 약간은 호들갑스런 반응을 보였고,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으로 수감 중이던 시인 박노해가 “ 제 눈을 맑게 열어준 운명 같은 글, 펼칠 때마다 선방의 죽비처럼 내 등짝을 때리는 글”이라고 찬사를 보낸 것을 보면 작품성 역시 부인할 수 없었다. 비슷한 성격, 혹은 비슷한 구성의 답사 책이 그 뒤 여럿 나왔지만 내용의 다양함과 깊이, 감동에서 를 넘어선 책을 찾기는 어렵다는 게 출판계의 일반적인 평가다.“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제1권 머리글에 나오는 이 말은, 책의 성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나라는 어디를 가든 문화유산이 가득한데 사람들이 그것을 찾아보고 감상할 수 있는 눈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남도답사 일번지’라 부른 전남 강진과 해남을 시작으로 전국의 문화유산을 찾아가고 거기에 얽힌 역사적 사건과 그곳에 깃든 사연을 풀어놓는다. 저자의 감상이 보태지고 추억이 더해지면서 한편의 드라마가 되기도 한다.1권은 1991년 5월부터 월간지 에 연재한 것을 중심으로 했다. 에는 박호성 안병욱 조희연 최재현 교수 등 지인들이 많이 참가했는데, 그는 “돈벌이가 어려워 망할지 모른다”며 창간을 만류하다 도리어 편집위원이 된 인연으로 글을 썼다. “몇 번 연재를 하다가 한번 빼먹었더니 독자 항의가 많았다고 해요. 한번 더 펑크를 내자 미국에 있는 독자가 ‘혹시 필자가 죽은 것 아니냐’고 물어왔답니다. 제 글이 제법 인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가 출판됐을 때, 전통적인 기행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미술서나 역사서라 할 수도 없어 도서 분류가 애매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같은 일반적 분류를 넘어 인문서와 기행서의 결합을 시도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 저자는 “단편소설처럼 기승전결식 구조로 썼다”고 나름의 작법을 설명했다.단순한 문화재 소개서라면 재미가 덜했을 것이다. 문화재에 얽힌 사연과 그것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는 기본이요, 때로는 저자와 가족, 친구, 제자가 나오고 때로는 맛난 식당과 여관 집, 답사 현장에서 만난 정겨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보태진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다가 전시회에서 여학생을 만나 수작을 부려 통성명을 한 뒤 고향을 물어보는 대화(그 여학생이 지금의 부인이다)에서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마주보는 군인과 여학생의 풋풋한 얼굴이 그려진다. 대기업에 다니는 동생 부부와 서산 마애불을 다녀오는 광경에선 따뜻한 형제애를 보여주는데, 그 중 한 장면을 책은 이렇게 썼다. ‘초가을 장난기 있는 보드라운 바람이 모자를 날리고 머리채를 흔들어 놓으니 그것이 또 웃음을 자아내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피해 다니며 사진을 찍게 한다. 나는 제수씨가 어려워 웃음조차 크게 내지 못하는데 아우는 버젓이 제 형수를 껴안고 다정하게 포즈를 취한다.’책(1권)은 심지어 개 이야기까지 담았는데 그 역시 재미있다. 강진 무위사의 게으름뱅이 누렁이는 답사객이 오든 말든, 불자가 오든 말든 양지 바른 곳에 엎드려 눈꺼풀만 잠시 들었다가 감아버린다. 반대로 해남 유선여관의 노랑이는 무척 부지런해서 자기 집 손님의 거동을 살피고 길을 인도하는 길잡이로 그려진다. 97년에 나온 3권에는 두 녀석의 나중 이야기가 덧붙여져 있는데, 무위사의 누렁이는 세상을 떠났고 유선여관의 노랑이는 1권을 읽은 답사객의 지나친 관심으로 대인공포증이 생겼다고 적혀있다. 다시 유 청장에게 물어보니 무위사에는 지금 누렁이의 손자가, 유선여관에는 노랑이의 자식이 있는데 핏줄을 속일 수 없는지 한 녀석은 능구렁이고 다른 녀석은 부지런히 손님을 안내하고 있다 한다.그런데 1권은 재미있는데 2, 3권은 재미가 덜하고 좀 어렵다는 독자가 있다. ... 유 청장은 “1권은 문화유산을 보는 시야를 터주는데 주력했고, 2권은 깊이 있는 눈으로 문화재의 내면을 보도록 했으며, 3권은 문화재를 미학적으로 접근하도록 구성했다”고 말했다.의 성공 요인 가운데 하나로 절묘한 출판 시점이 거론된다. 93년은 사회적 이슈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민족 문화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좌우 성향 차를 넘어 이 책을 고를 수 있었다. 자동차 보급이 크게 는 것도 이 때쯤인데, 운전자들이 어디론가 달리고 싶을 때 이 책은 훌륭한 가이드가 됐다.하지만 책이 나온 뒤 유 청장은 답사 강연을 하느라 육체적으로 무척 고달팠다고 한다. 문화유산 전도사를 자처한 그는, 믿지 않는 사람도 설득해야 하는 ‘전도사’처지에 이제 책을 읽고 믿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자 외면할 수 없었다. 책을 낸 창비에서 마케팅을 담당한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그의 저서 에서 출판 이후 한 1년 동안은 이틀에 한번 꼴로 강연을 했다고 전했다.어쨌든 책이 나온 뒤 한동안 답사 붐이 일었다. 답사객들은 한 권을 들고 현장에서 그 내용을 일일이 확인했으며 책에 나온 곳을 일부러 찾아 잠자리를 청하고 음식을 먹었다. 그런 인연으로 유 청장은 명예전남도민, 명예강진군민, 명예안동시민이 됐고 경주시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게다가 책 내용이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리고 연세대 입시 문제에 인용됐으며 일본에서도 출판됐으니 저자로서는 더 할 수 없는 영광을 얻은 셈이다.하지만 책 든 여행자가 몰리자 뒤늦게 관광에 눈 뜬 자치단체가 절 집 앞에 주차장을 만들고 길을 내는 바람에 호젓한 분위기가 망가진 곳이 많아 그도 가슴이 아프다. 유 청장은 “절 집은 그곳으로 들어가는 길이 가장 좋은데 걷지 않고 차를 타고 가면 감동이 그만큼 줄어든다”고 안타까워 했다.독자의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유 청장은 추가로 4, 5권을 쓰고 싶다고 한다. 당장은 문화재청장 일이 우선이지만 여유가 생기면 아직 다루지 못한 서울 경기 충북 제주의 문화유산을 따로 소개하겠다고 한다. ... 이것을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는데, 독자의 높아진 수준에 완벽하게 맞출 수 있을 지 좀 고민스럽다고 했다.■ '전 국토가 박물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숱한 유행어 낳아는 책으로는 드물게 유행어를 만들었다. 그 가운데는 유홍준 청장이 한 말도 있고, 다른 사람의 말이 책에 인용돼 널리 알려진 것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아는 만큼 느끼고 느낀 만큼 보인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미술에 대한 안목을 키울 수 있느냐는, 다소 막연한 질문에 대한 유 청장의 답변이다. 예술을 보는 눈은, 아무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라는 말은, 유 청장이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관계자로부터 한국의 박물관 실태에 대한 질문을 받고 해준 대답이다. 오랫동안 같은 땅에서, 같은 혈통끼리, 같은 언어로, 같은 제도와 풍습을 갖고 살았기에 어디를 가도 유ㆍ무형의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다는 자부심의 표현이다.‘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조선 정조시대의 문인 유한준이 김광국의 수장품에 부친 글이다. 문화유산을 사랑하면 가끔 그것이 말을 걸어오는 것 같은데, 그 목소리는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 들을 수 있다는 뜻에서 인용한 것이다.미술사학자 고유섭 선생의 ‘종소리는 때리는 자의 힘에 응분하여 울려지나니…’는 2, 3권에 거푸 등장한다. 힘껏 때릴수록 종소리가 멀리 퍼지듯, 독자의 더 많은 사랑을 받기 위해 책에 더 많은 이야기, 더 다양한 해석을 담겠다는 저자의 다짐이다.‘저 매화나무에 물 줘라’는 퇴계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 죽음을 앞둔 말치고는 다소 허탈하기도 하고 반대로 오묘한 뜻이 있는 것도 같지만, 매화를 유난히 사랑한 퇴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유홍준 약력 1949년 서울 출생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1980년 서울대 미학과 졸업1984년 민족미술협의회 공동대표1991년 영남대 회화과 교수 및 영남대 박물관장2002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2004년 문화재청장저서 등박광희기자

[우리 시대의 명저 50] <2>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2007.01.11

이이화(70), 그리고 그의 (한길사)가 거느린 숱한 ‘이야기’의 그림자를 밟지 않고, 그의 실체 또 책의 가치 속으로 스며들기란 쉽지 않다. 한국 역사학에서 그의 책이 놓인 지점이 그만큼 독특하고, ‘재야 사학자’로서 학인으로서 그가 걸어온 길이 그만큼 특별하기 때문이다.근 10년에 걸쳐 기획ㆍ저술한 원고지 2만5,000매 분량의 책(전22권). 민중사ㆍ생활사를 포괄하는 한국사 전사(全史)이자 통사(通史). 한학을 하다 16세에 가출해 고아원과 여관 ‘보이’ 등을 전전하며 고학해온, 실로 파란만장한 사적 생애. 한문 선생으로, 고문서 해제 주역으로, 역사기행의 선구적 안내자로, 명(名)강연자로, 역사문제연구소 창립 맴버이자 좌장으로, 근년 들어서는 동학 한국전쟁 고구려사와 관련한 기관ㆍ단체의 장으로 이어온 공적 이력….책의 외형적 성취와 이력의 스펙터클이 곧장 그의 입지전을 완성하고 책의 무게를 지탱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것들은, ‘엄숙한’ 자리에서 그와 그의 책을 폄하하는 논거로 동원되기도 한다.(역사학 방법론이 약하다, 정밀하지 못하다 등등.)이 상반된 평가의 경계에서, 그의 책 18권 을 펼친다. 제3부 4장의 제목이 이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노략질-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원한의 표적인 만석보를 허물다’가 4장 단락들의 소제목이고, 4부()의 1장(에 발표한 그의 논문 이 “동학농민전쟁에 관한 사학계의 관심을 불붙게 한 신호탄이었”(윤해동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고, 89년부터 5년간 동학농민전쟁 100주년 기념사업을 주도하며 발굴해 엮은 등을 보더라도, 저 유(柔)한 화법이 역사과학으로서의 엄밀성을 희생시킨 결과라고 볼 수는 없다. “흥미를 위해 역사를 타락시켜서는 안 된다”는 그의 지론을 덮어두더라도 그렇다는 말이다. ... 그는 역사와 시민의 경계, 강단사학과 대중의 경계에 서서 양자 모두와 소통하며 포용해온 사학자다.그의 역사는 지배집단의 역사가 배척해온 민중사를 복원하고, 정치사의 주변부 혹은 외부에 방치된 생활사와 사상사 인물사를 껴안았다. 근대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궤적 위에 덮여있던 이념의 위장막을 걷어냈고, 설화나 민담 등을 사료로 포섭한, 달리 말해 포스트모던 역사학을 홀로 선취한, 선구적 역사가다. 개화파와 척사파의 대결이라는, 우리에게 익숙한 조선의 19세기 풍경화 속에 농민세력을 당당한 제3의 주체로 그려넣은 점(근대편)도 대표적인 사례다. 하위사학ㆍ대항사학적인 이 면모들은 다양한 원전자료의 국역ㆍ해제 이력을 거치며 쌓은 정통 사료에 대한 해박한 지식, 노소의 학자들과 교유하며 주고받은 지적 자양분으로 하여 이지러지지 않는다. 그러니, 그의 역사학 방법론을 ‘소통’이라 하면 어떨까. 원전과의 소통, 사람과의 소통, 역사 기행과 답사로 이어져온 공간과의 소통!“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반파시스트 역사학자 크로체의 말도 있거니와, 에도 저자의 음성이 짙게 개입한다. 민중적이고, 개혁적인 지점들에서 특히 그러하다. 고려에 대한 편애는 유난하다. ‘최초의 통일국가’요, 이념ㆍ사상ㆍ종교적 도그마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으며, 신분의 지배를 벗어던진 역동적 관료제 사회라는 점을 그는 치우치게 평가한다. 또 중화민족주의와 일본 군국주의, 서구 오리엔탈리즘에 맞서기 위해, 또 통일의 끈으로 움켜쥔 (자위적ㆍ포용적) 민족주의에 대해서도 논쟁의 여지가 없지는 않다. 그렇다면 저자가 자신의 길을 인도해준 스승으로 꼽은 단재 신채호에 대한 비판(독립운동의 도구로서의 역사학)이 어쩌면 그에게도 해당되지 않을까. 물론, 단재에 대한 저자의 변론- “그가 살았던 시대가 다르고….”-이 그에게도 적용돼야 마땅하겠지만 말이다. ...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시대를 사는 것이라고도 하지 않던가.지지난 해 청명 임창순(1914~1999) 선생의 유지로 제정된 의 첫 수상자로 의 그를 선정하면서 심사위원단은 “수준 높은 학문적 성과를 대중적 향유물로 숙성시킨 역작”이라고 평했다. 그리고 그는, 40여년간의 학인의 삶의 노고를 보상 받은 것 같다며 감격해 했다. 하지만 그가 개척한 역사학 연구의 드넓은 터전, 그가 구축한 역사학 수용의 대중적 토대, 무엇보다 그의 사학이 구현한 소? 포용, 다양성, 평등의 가치는 두고두고 기리고 누려야 할 것이다.2005년 7월에 위암 수술을 받았고, 연초에 아치울을 떠나 새 거처(경기 파주시 헤이리 예술인마을)로 이사한 그는, “올해부터 1년 반 기한으로 동학농민전쟁사를 쓸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숙제가 있다면서 예의 소탈한 웃음 속에 겸연쩍음을 감추며 꺼낸 말이 ‘자서전’이다. “가 해방공간에서 멈췄어요. 현대사 연구자는 탁월한 분이 많거든요. 그렇지만 내 몫도 있을 것 같아요. 내가 잘나서 자서전을 쓴다는 게 아닙니다. 내가 살아낸 시대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에릭 홉스봄이 그의 자서전()에 썼듯 “개인의 경험으로 그려낸 역사가 아니라 역사가 경험의 내용을 만들어나가는 모습을” 살피겠다는 의미다. 그의 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슬프고 아름다운 민족사 쩌렁쩌렁 울리는 강의에 우리는 잠들수 없었죠"'작은 거인'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이화 선생이야말로 '작은 거인'이다. 아니 '작은 거장'이라고 할까. '작은 거인'이 그렇게 장대한 한국사를 써냈으니 말이다.우리는 열정적으로 읽고 진지하게 학습한 저 1980년대를 살았지만, 그 80년대의 한가운데에서 선생은 자유를 구가하는 '재야 한국 사학자'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80년대 중반부터 우리 출판사는 조그만 방에서 역사 강좌, 사회과학 강좌와 민족사의 현장에서 온몸으로 체험하는 역사기행을 기획했는데, 선생은 가장 인기 있는 강사 또는 가이드였고, 형처럼 존경하고 친애하는 연구자였다. ... 강의 뒤에 벌인 2차 역시 또 다른 역사의 토론장이었다.역사기행 때 우린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름다운 국토에서 펼쳐진 민족사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풍경을 가슴으로 호흡할 수 있었기 때문이고, 그 산하를 쩌렁쩌렁 울리는 선생의 현장 강의가 쉼 없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선생이 주역인 저 아름다운 역사의 축제가 이어지면서, 그의 역사 인식은, 강의 솜씨가 늘듯이 그렇게, 비약적으로 성숙했으리라.선생의 는 그런 80년대 현장에서의 연구ㆍ토론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작업이다. 그 과정에 우리는 늘 선생의 주변을 맴돌았다. 물론 술이 있어 선생 주위에 몰려든 이들도 있었다. 87년 여름인가 우리는 동학농민전쟁의 또 다른 지도자 김개남 장군의 생가터를 찾아가는 역사기행을 했는데, 나는 선생이 붓으로 '동학농민전쟁 김개남 장군 생가터'라고 쓴 말목을 건네 받아 이미 밭으로 변해버린 현장에 꽂았는데, 지금 그것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모르겠다.흔히 재야 역사학자라고 하지만 그는 이미 제도권 역사학자의 업적을 진정으로 넘어서는 일을 해냈다. 역사문제연구소의 조직과 운영을 주도하고 수많은 젊은 연구자들과 더불어 한국사 연구의 새 지평을 연 것은 아마도 작은 거인의 큰 리더십이었다고 할 것이다.95년부터 우리가 펴낸 시오노 나나미의 와 더불어 는 우리 역사 인식의 균형을 도모하는 데 큰 힘이 되고 있다. 물론 이이화 선생은 우리 역사만을 강조하는 왜곡된 역사인식이 아니라 균형 잡힌 역사인식을 강조하고 있다. ... 의 다음 작업을 우리는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김언호 한길사 대표최윤필기자 walden@hk.co.kr● 이이화 약력 1937년 / 대구 출생 51년 가출 후 고학으로 한영중, 광주고, 서라벌예대 문창과를 다님.73~75년 민족문화추진회 전문위원 겸 국역실장77~80년 서울대 규장각 해제위원81~82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전문위원86~96년 역사문제연구소 운영위원, 부소장, 소장, 계간편집인89~94년 동학농민전쟁 100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위원장2001년 단재상2005년 임창순 학술상 현재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지도위원, 고구려역사문화보전회 이사장,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상임공동대표, 서원대 석좌교수.

==

[이희정의 사람, 이야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펴낸 유홍준 명지대 교수

2012.09.14 12:01
그가 오는 곳에선 바람도 그냥 바람이 아니라 문화의 향기를 가득 싣고 온다"고 했다. 소설가 고 박완서는 "한때 그의 신도였던 적이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창비 발행) 시리즈의 저자 유홍준(63)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얘기다. 무심히 보아온 우리 문화재들에 새 숨결을 불어넣어준 는 1993년 1권 '남도답사 일번지'부터 지난해 펴낸 6권 '인생도처유상수'까지 합쳐 올 봄 판매 300만부를 돌파했다. 인문서로는 전례 없는 일이다. 문화의 향기를 머금은 바람이 이번에는 바다 건너 제주로 향했다. 13일 발간된 7권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은 전편들과 달리 오롯이 제주 이야기로 꾸몄다. 유 교수는 문화유산뿐 아니라 자연과 역사, 민속, 언어 등을 모두 아우른 책의 성격을 '제주학 안내서'란 말로 압축하면서, 그 앞에 '제주허씨'을 위한, 이란 수식어를 붙였다. "렌터카 번호판은 '허'자 돌림이잖아요. 요즘은 앞에 숫자가 붙지만 예전에는 '제주 허'였죠. 올레길이 제주 자연의 속살을 보여줬다면, 이 책은 렌터카 여행객들을 제주 문화 속으로 깊숙이 안내하는 길잡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는 이번에 통일신라와 고려를 다룬 (눌와)도 펴냈는데, 전체 600쪽 가운데 400쪽을 고려에 할애해 "일그러진 고려 문화의 복권"을 시도한다. "내년 말이면 정년인데, 10권, 4권을 완간하고 나면 소설이나 시집 말곤 책을 싹 치워버리고 '원고 빚'없이 사는 것이 인생의 최종 목표입니다." -왜 제주학인가. 독자적인 문화와 언어를 가졌던 탐라국이 한국사에 편입된 것은 고려 숙종 10년(1105) 때다. 고려가 원나라와의 전쟁에서 굴복한 뒤에도 자주권을 인정받았지만, 삼별초의 마지막 항쟁지였던 제주는 근 100년간 식민지배를 받았다. 원의 멸망 이후 제주에 있던 몽골인 목호들의 반란과 최영 장군의 진압 등 곡절을 거쳐 조선 태조 2년(1393) 중앙에서 제주목사를 파견하면서 제주는 비로소 한반도의 확실한 일원이 됐다. ... 국가 차원의 진상조사를 벌여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도민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지만, 아직도 '빨갱이 토벌'이었다고 강변하는 이들이 있다. 격을 높인다고 민주항쟁으로 부르는 것도 옳지 않다. 4ㆍ3은 350명의 남로당 무장대 토벌을 내세워 민간인 3만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경위야 어찌됐든 남로당 무장대가 경찰서에 불을 지른 데서 시작됐고, 희생자들이 무슨 항쟁을 하다 목숨을 잃은 것도 아니다. 자꾸 항쟁, 항쟁 하면 반발만 부르고 국민적 공감대를 넓히기도 어렵다. -화가 강요배의 그림을 통해 제주의 자연에 매료됐다고 썼는데, 그 매력의 요체가 뭔가. 제주는 온대와 난대가 교차하면서도 사계절이 뚜렷하고 겨울엔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리는 난대라니, 그래서 외국인들이 열광한다. 한라산도 높지만 가파르지 않아 윗세오름까지는 쉽게 오를 수 있고, 늘푸른나무들이 있어 차 타고 가며 보기만 해도 즐겁다. 제주가 우리 땅이 아니었다면 한반도가 얼마나 쓸쓸했겠나. 위치도 딱 좋다. 거제도처럼 육지에 붙어있었으면 친숙하면서도 색다른 맛이 없었을 테고, 더 아래였다면 중국하고 일본이 서로 지네 땅이라고 우겨 골치였을 거다. 제주는 자연이 한반도에 내린 축복이다. 제주의 매력에 빠지면 다들 죽기 살기로 좋아하는 '사생 팬'이 되지 않을 수 없다.(웃음) -가장 아름다운 곳 하나만 꼽는다면. 무조건 한라산의 영실이다. 해발 1,700m 윗세오름까지 가는 길은 어리목과 영실 코스 두 가지다. 답사든 등산이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않는 게 원칙인데, 나이 들면서는 영실로 오르내린다. 오를 땐 백록담 봉우리의 절벽이 한눈에 들어오고, 내려오는 길엔 구상나무숲 아래로 바다가 펼쳐지는 게 정말 장관이다.(영실 편엔 '구라' 하면 빠지지 않는 그의 입담이 한껏 발휘된 '팔도 아줌마론'이 나온다. 동료 교수가 하도 웃겨 허리가 끊어질 지경이라는 문자를 보내왔다는데, 자세한 내용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생략한다.) ... 책에는 제주에 함부로 손 대지 말라는 경고의 뜻을 담아 '제주는 더 이상 인간의 간섭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지론'이라고 짧게 언급했다. -한라산 산천단을 지은 청백리 제주목사 이약동을 '제주를 진실로 사랑한, 우리가 알고 있는 최초의 육지인'이라고 썼다. 그 사랑의 깊이에서 당신은 몇 번째쯤 되나. 답사하고 강연 다니느라 제주에 100번 넘게 갔다. 하지만 일찍이 제주학을 부르짖은 나비박사 석주명, 한라산의 높이를 최초로 측정한 독일인 겐테, 1930년대 경성제대 학생 시절 한라산 조난사고로 친구를 잃은 뒤 전공을 인류학을 바꿔 명저 를 써낸 이즈미 세이이찌 등 제주연구의 선구자들을 비롯해 제주가 좋아 아예 둥지를 옮긴 예술인들까지 나보다 상수(上手)들이 즐비하다. 한 101번째쯤 될까. - 후속편 계획은. 충북과 경기를 그동안 한 곳도 다루지 못했는데, 나중에 몰매 안 맞으려면 꼭 써야 한다.(웃음) 섬 이야기도 다룰 건데 하이라이트는 독도가 될 테고, 보길도, 증도, 청산도도 넣어야 한다. 일본과 중국 속의 한국문화도 쓸 생각이다. -에서도 고려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냈는데. 자칭 고려왕조 '사생 팬'이다. 같은 시기 중국에선 5개 왕조가 자리바꿈했는데, 고려왕조는 475년이나 갔다. 그만큼 튼실했다는 얘기다. 거란, 여진, 몽골 등의 침입을 나열식으로 강조하다 보니 이미지가 일그러졌는데 고려의 실리외교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 놓인 현재에도 대입해 볼 수 있다. 신라는 중앙귀족, 조선은 사대부라는 확실한 문화담당계층이 있었지만, 고려는 지방호족에서 문신, 무신, 권문세족으로 권력이 이동했다. 고려 문화의 다양성을 무시한 채 전자의 중앙문화와 수평비교해 뒤떨어졌다고 하면 안 된다. 또 고려는 굉장히 개방적인 나라였다. 지금으로 치면 국무총리 2명이 중국인이었고, 장관급 이상 외국인이 26명이나 됐다. 외래 성 200개도 다 그때 들어왔다. 지금은 어떤가. ... 참여정부 시절 주한미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낸 제프리 존스가 상공장관 물망에 올랐으나 외국인이라고 안됐고, 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이 명창 박동진의 제자인데 외국 국적자란 이유로 이수자 자격을 못 줬다. 개방으로 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한 고려를 배워야 한다. - 1권이 나온 지 내년이면 20년이다. 문화유산 하면 당연히 '우리'를 떠올리는데, 그 시절에 '나의'란 수식어를 단 것이 대단히 파격적이다. 멋있게 들리는 제목 덕을 많이 봤는데, 그게 바로 나의 문학적 센스다.(웃음) 우리, 하면 민족적인 걸 강요하는 느낌이 들지 않나. 원래 91년 월간 '사회평론'에 연재한 글인데, 백낙청 선생이 첫 회 보고는 연재 끝나면 책 내자고 제안했다. 친구이자 내가 멘토로 꼽는 안병욱(가톨릭대 교수), 고인이 된 최재현(전 서강대 교수) 등이 진보지 만든다고 물정 모르고 설치길래 뜯어 말리다가 덜컥 편집위원을 맡고, 원고료 줄 돈 없으니 '너 심심하면 설 푸는 답사 얘기나 써봐라' 해서 시작했다. 그런데 딱 10회 쓰고 망했다.(웃음) 답사기의 밑거름이 된 게 84년부터 꾸준히 열었던 한국미술사 공개강좌인데, 인기가 대단했다. 94년 학전 소극장에서 이 강좌로 번 돈이 뮤지컬 '지하철1호선' 제작 종잣돈이 됐다고 (김)민기가 두고두고 고마워한다. 학전 주최로 10월 24일부터 12회에 걸쳐 '마지막' 강좌를 열고, 마침표를 쾅 찍으려 한다. -말과 글에 다 재주 있기는 드문 일인데, 집안 내력인가. 전혀. 별볼일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자력갱생한 경우다.(웃음) 글은 자고로 중후해야 한다고 믿던 시절, 대담하게 입말을 옮긴 구라체가 먹힌 거다. 시인 이시영이 '간결체도, 화려체도 아닌 수다체다'고 했는데, 딱 정답이다. 조곤조곤 하면서도 사회비평 같은 뼈 있는 얘기도 하고 인생의 깊이가 녹아있는 유머도 던지고…. 오가며 듣는 얘기를 꼭 쥐고 있다가 내 것으로 만들어 풀어낸다. 그래서 어떤 이는 '유홍준은 말을 잘 하는 게 아니라 남의 얘기를 잘 듣는다'고 평했다. ... 또 옛 문장지에 담긴 정지용 이태준 김기림의 명징한 글들을 이 몽블랑 만년필로 베껴 써보면서 많이 배웠다. 10년 전까진 원고지에 이 만년필로 글을 썼는데, 그게 50년쯤 지나면 돈 된다고 가져간 사람들도 있다.(웃음) -문화재청장 시절 구설에 많이 올랐고, 결국 숭례문 화재로 옷을 벗었다. 참여정부와 언론의 불편한 관계 탓에 과도하게 씹혔다. 사실 숭례문 관리 책임은 중구청에 있고 방화범의 소행이었고 당시 나는 해외출장 중이었는데, '국보 태워먹은 놈'이란 욕도 먹었다. 도의적 책임은 죽을 때까지 내가 지고 가야 할 몫이지만, 그런 악의적 비난에 대해서는, 그렇다면 천안함은 국방장관이 부숴먹은 거냐고 되묻고 싶다. 숭례문 복원 후 관리책임을 놓고도 말이 많은데, 이제 기회에 문화재청에 지청을 만들어 절집 소유가 아닌 국보, 보물을 관리하도록 해야 한다. -글이나 쓰고 살 걸 괜히 공직에 나갔다 후회할 법한데. 무탈하게 연륜 쌓아가는 길이 있는 걸 왜 몰랐겠나. 하지만 관행에 젖은 문화재 행정을 바꾸고 싶었고, 실제로 신나게 바꿨다. 문화재청 정원이 650명에서 850명으로, 예산도 2,500억원에서 4,500억원으로 늘었고, 위상도 높아졌다. 개인적으로도 문화재를 더 깊고 넓게 보는 안목을 키웠다. 그 경험이 없었다면 6,7권은 나올 수 없었다. 안티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우리 사회는 무슨 라인을 왜 그렇게 강요할까. 인간 사고의 좌우란 게 영역을 말하는 거지 딱 선 위에 놓인 게 아니잖나. 인간은 12가지의 얼굴이 있어서 경제적으로는 진보면서 여성 문제에선 되게 보수적인 사람도 많다. 정치적으론 진보를 표방하면서 민중미술을 폄하하고 꽃이나 예쁜 여자 그림만 예술로 아는 빌어먹을 놈들도 있다. '진보적 인사들의 비진보적 예술관' 이런 글 한번 써보고 싶다.(웃음) -대동강 물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처럼 국민의 재산인 문화재 갖고 떼돈을 벌고도 문화유산 지키는 데 돈 한 푼 안 썼다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더라. 내 알아서 멋있게 쓸 테니 염려 말라고 해라.

[한국출판문화상 50년-책, 미래와의 대화] <18·끝> 앨런 와이즈먼 '인간없는 세상'

2009.10.15 00:40
인간의 활동이 지구를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지구온난화의 진행 정도 등을 보면 그런 우려를 기우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지금의 에너지 시스템이 지구를 종말로 끌고 갈 수 있다는 극단적인 전망도 나온다. 기후변화가 자연순환의 결과라는 주장도 있지만, 인간의 지나친 활동이 지구에 큰 변화를 초래한 것은 분명하다.그렇다면, 어느날 인간만 몽땅 사라지면, 지구는 제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책이 바로 (랜덤하우스코리아 발행)이다. 저자 앨런 와이즈먼은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애리조나대 국제저널리즘 교수. 2007년 출판된 이 책은 타임, 뉴스위크 등으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고 전 세계 20개 국에 번역 출간됐다.와이즈먼이 책을 통해 보여주려는 것은 자연의 복원력이다. 그는 이메일 인터뷰에서 "인간이 사라지면 인간 이외 생물종이 극적으로, 신속하게 제 모습을 회복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의 연대기에 따르면 인간이 사라지자마자 곰팡이가 건물 벽을 갉아먹고 빗물은 못을 녹슬게 하거나 나무를 썩게 한다. 이틀이 지나면 뉴욕 지하철은 물이 들어차 통행이 불가능해지며 1년 후에는 고압전선의 전류가 차단돼 새들이 고압전선에 부닥칠 일이 사라진다.20년 후면 파나마운하가 막혀 남북아메리카가 하나가 되고 밭 작물은 인간의 입맛에 맞게 개량되기 이전의 야생 상태로 돌아간다. 300년 후에는 댐이 무너지고 휴스턴 같은 도시가 물에 씻겨 나간다. 500년 후에는 온대지역의 교외가 숲으로 변하며 1,000년이 지나면 영불해협의 해저터널 정도만 빼고는 지구상의 인공구조물이 사라진다. 10만년 후에는 이산화탄소가 인류 탄생 이전의 수준으로 떨어지며, 30억년 후에는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한 생명체가 지구상에 번성한다. 인간이 남긴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 전파만이 영원히 우주를 떠다닐 것이다.물론 호모 사피엔스에게만 있는 바이러스가 인간만 없애는 등의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다른 생물종은 그대로 남은 채 인간만 지구에서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 인류와 지구 모두를 위해 "인간은 없어도 지구는 있지만, 지구가 없으면 인간도 없다"는 와이즈먼의 말을 새겨들어야 할 것 같다.■ 저자 앨런 와이즈먼앨런 와이즈먼은 을 쓰기 위해 폴란드-벨로루시 국경의 원시림, 체르노빌 원전 사고 현장, 아마존, 북극 등 생태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여러 곳 방문했다. 그 중 한 곳이 한국의 비무장지대(DMZ)다. 그는 지난해 10월에도 DMZ 보전을 위한 국제 컨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와이즈먼은 "한반도를 둘로 나눈 슬픔이 기적을 만들었다"며 "DMZ는 국제적인 희망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DMZ가 비극적인 한국전쟁의 산물이지만, 지금은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야생 동식물의 서식지가 됐다는 것이다. 그는 "DMZ에 스라소니, 사향노루, 담비 등 야생 동물들이 살 수 있게 된 것은, 끔찍한 참화를 딛고 스스로를 치유하는 자연적 복원력의 대표적 사례"라고 강조했다.DMZ를 국제평화공원으로 선포하자는 제안에 대해서도 그는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와이즈먼은 "국제평화공원이 되면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는 장소이자, 전쟁으로 파괴된 자연이 다시 기적을 이룬 것을 증언하는 상징이 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남북한이 DMZ라는 공유지를 보존하기 위해 협력한다면 양측은 더욱 밀접한 관계로 나아갈 것이고 그것은 세계의 다른 지역에 모범사례가 될 것이라고도 덧붙였다.하지만 그는 DMZ의 개발 가능성에 대해서는 적잖이 걱정을 했다. 수도권에 무려 2,000만여명이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만약 DMZ가 개방되면, 개발업자들이 게걸스럽게 이 지역을 파고 들어올 게 틀림없다는 것이다.■ '책, 미래와의 대화'를 마치며한국일보가 제정한 최고 권위의 출판시상제도이자 책ㆍ출판인의 축제인 '한국출판문화상' 이 올해로 꼭 50년이 됐다. ... 이 땅의 출판 반 세기와 함께 해온 한국출판문화상 50년을 기념해 연재한 '책, 미래와의 대화'는 책으로 우리 현실을 점검하고 미래를 조망해 보기 위해 기획됐다. 21세기와 더 먼 미래에 우리 삶의 조건에 영향을 줄 다양한 담론을 살핌으로써 미래를 보는 우리의 태도를 정리하자는 취지였다.' ... 책, 미래와의 대화'는 이런 의도에서 당대의 명저로 꼽히는 책들의 국내외 저자와 직접 만남이나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그 생생한 발언을 듣고 소개했다. 6월 9일 게재된 시리즈 첫 회에서는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저서 를 통해 미국발 금융위기가 드러낸 신자유주의의 한계를 살피고 그 대안을 모색했다.지식의 배타적 생산과 보급을 거부하고 아래로부터의 지식혁명을 예견한 (피에르 레비 캐나다 오타와대 교수), 먹는다는 행위의 정치ㆍ사회적 의미를 분석한 (슬로푸드 운동 창시자 카를로 페트리니), 가족 개념과 가족관계 메커니즘의 변화를 보여준 (독일 사회학자 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 인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 기후변화의 역사와 실태를 보여준 (팀 플래너리 호주 맥쿼리대 교수) 등이 뒤를 이었다.행복의 중요성을 다룬 (대린 맥마흔 미국 플로리다주립대 교수),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적한 (에이프릴 카터 영국 코벤트리대 교수), 21세기 공교육의 가능성과 한계를 살핀 (미국 교육운동가 존 테일러 개토), 인간복제 시대의 고민을 담은 (권복규 김현철 이화여대 교수), 다문화주의의 유효성에 의문을 던진 (영국 철학자 조너선 색스), 영어의 득세와 소수언어의 위기를 경고한 (영국 언어학자 앤드류 달비), 생산성의 증가가 실업을 야기한다는 (제러미 리프킨 미국 와튼경영대학원 교수), 한 사회의 건강은 그가 속한 사회의 성격에 의존한다는 (리처드 윌킨슨 영국 노팅엄대 교수), 배부른 제국과 굶주리는 세계의 모순을 규명한 (라즈 파텔 미국 예일대 방문교수), 세계를 보는 창으로 지정학을 소개한 (콜린 플린트 미국 일리노이대 교수), 우주의 본질에 다가서려는 (브라이언 그린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 등으로 대상이 확대됐다.물질문명과 경쟁체제가 극도로 발달한 이 세상에서는 미래에 대한 긍정적, 부정적 예측이 엇갈린다. 변화 속도가 너무 빨라 미래에 대한 전망을 자신있게 하기가 힘들 정도다. ... '책, 미래와의 대화'로 바라본 미래는 과거와 현재의 연속선상에 있기도 하고, 지금의 상상력으로는 그릴 수 없는 낯선 모습이기도 했다.'한국출판문화상 50년' 기획의 두번째로 22일(목)자부터는 국내 출판 현장 50년의 과거와 현재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책의 풍경, 2009'(가제)을 연재한다.박광희 기자 khpark@hk.co.kr

한국일보 연재 '우리시대의 명저 50' 단행본으로

2009.05.26 00:52
해방 이후 발간된 국내 명저의 시대적 의미를 짚고 그 저술에 얽힌 뒷이야기를 톺아봄으로써 화제를 낳았던 한국일보의 문화기획 '우리시대의 명저 50' 시리즈(2007년 1~12월 연재)가 단행본으로 출간됐다.(생각의나무 발행ㆍ사진)이 다루고 있는 50종의 저작은 역사, 철학, 사상, 문학, 미술 등 다양한 분야를 망라한다. 한국 근대사의 내재적 발전가능성을 학문적으로 입증한 (김용섭), 한국과학사를 다룬 최초의 본격 통사 (전상운) 등은 역사 연구에 거대한 자장을 드리운 저작들이다.(리영희), (박현채 등 공저) 등은 1970~80년대 군부정권 하에서 진보적 지식운동의 이론적 기반을 마련한 책들이다. (이윤기), (이주헌) 등은 지식대중화에 기여한 책으로 선정됐다.각 명저의 출간 배경과 의미,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과 독자들의 반응, 장점과 한계까지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저자가 들려주는 책에 얽힌 사연, 후학이 바라보는 저자 이야기 등 부가 정보도 풍부하다.출판평론가 표정훈씨는 "시대의 중추를 정확히 건드리며 한 획을 그은 소수의, 아니 극소수의 책들이 있었기에 책의 역사는 단절되지 않았다"고 이 책 출간의 의의를 말했다.이왕구 기자 fab4@hk.co.kr

[우리 시대의 명저 50] <35>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2007.09.11 02:33
공자님 말씀이 담긴 가 그렇고, 셰익스피어의 고전들이 그렇고, 그리스 로마 신화가 그렇다. 제우스와 아킬레우스, 프로메테우스의 이름은 익숙하지만 그들이 엮어가는 태초의 이야기들은 유년의 기억 저편에 흐릿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2000년, 그런 망각의 강을 건너는 다리 하나가 놓였다. 웅진닷컴에서 나온 가 그것이다. 이 책은 화석이 돼 가던 먼 유럽 문명의 원형질을, 단숨에 대중적 관심의 대상으로 되살려 냈다. 인문서로는 기록적으로 174쇄까지 찍은 1권을 비롯, 2년 터울로 나온 2권과 3권이 모두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며 ‘신화’를 21세기의 확실한 문화 코드로 복권시켰다.이 책이 폭발적인 대중성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서술 방식의 독창성이다. 저자는 신화의 계통학적 기술에 관심이 없다. 구수한 문체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상징과 비유의 세계를 토막내 해석하려 들지 않는다. ‘여기에 이런 얘기가 있고, 저기도 이런 전설이 있고…’ 하는 식으로 은근슬쩍 그 속에 감춰진 열쇠를 만지게 해 줄 뿐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독자들이 신화의 세계를 스스로 탐험케 하는 가이드북이다.하지만 이런 이윤기 식 신화 쓰기는 적잖은 논란도 불러 일으켰다. 대중적 인기 못지않게 학계와 평단의 비판도 잇따랐다. 저자가 정한 테마에 맞춰 원래 신화의 내용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거나 그 해석에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었다.저자는 이에 대해 “나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번역’한 것이 아니라 ‘쓴’ 것”이라며 “잡초 없는 뜰은 없다. 뜰 가꾸는 자에게 잡초는 숙명”이라고 해명하곤 했다. 이렇게 논란이 이는 일 자체가 수천년을 내려오면서도 빛이 바래지 않고 오히려 풍성해지는 신화의 힘에서 비롯된 것 아닐까.1권 ‘신화를 이해하는 12가지 열쇠’는 서양문명의 토질에 익숙하지 않아 우리가 종종 소화불량을 일으켰던 그리스 로마 신화를, 한국적 정서의 프리즘에 투과시킨 첫번째 작품이다.저자는 서문에 새천년의 벽두에 신화를 얘기하는 감회를 이렇게 썼다. “신화는 미궁이다. ... 그런 뜻에서 신화는 미궁과 같다.”그러면서 그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쥐어 준다. “모쪼록 독자가 나름대로 지니고 있는 실타래로써 미궁 탈출을 시도해 보기 바란다. 독자는 지금 신화라는 이름의 자전거 타기를 배우고 있다고 생각하라. 일단 자전거에 올라 페달을 밟기 바란다. 필자가 뒤에서 짐받이를 잡고 따라가겠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자전거 타기’를 배웠고, 이 책은 든든한 멘토가 돼 줬다.2권 ‘사랑의 테마로 읽는 신화의 12가지 열쇠’는 보다 심화된 주제로 나아간다. 사랑을 테마로 인간이란 존재의 심연과 관련된 근원적 의문에 다가선다.도덕 관념이 형성되기 전, 어떤 윤리적 잣대로도 재단되지 않은 채 애욕으로 뒤엉켜 있는 그리스 신들의 모습을 통해 ‘성(性)과 사랑’이라는 인간의 조건을 들여다본다. 역사와 철학의 경계를 종횡무진 넘나들며, 적나라한 성에 숨겨진 신화의 비밀을 탐색한다.3권은 신들의 턱밑까지 다가선다. ‘신들의 마음을 여는 12가지 열쇠’라는 부제가 붙은 3권은 호모 테오필로스(신들이 좋아하는 인간)와 호모 테오미세토스(신들이 싫어하는 인간)을 구분한다.그것을 통해 저자가 제시하는 열쇠는 결국, 신화에는 인간들의 보편적인 꿈과 진실이 담겨 있다는 단순한 명제다. 동생을 살해한 뒤 방황하지만 유혹에 저항하며 죄를 갚으려고 노력하는 펠레우스를 신들이 사랑한다는 이야기엔, 신들의 세계가 아닌 인간사의 진리가 스며 있다.저자가 동네 서낭당 전설 얘기하듯, 그리스 로마 신화를 술술 풀어낼 수 있는 능력은 어디서 왔을까. 그 구성진 이야기보따리의 바탕에는, 사실 피 말리는 노력이 숨어 있었다.그가 외국의 미술관과 박물관, 유적지를 돌아다니며 구입한 도록만 수천 권이 넘는다. 미국 미시간주립대 연구원으로 있을 때 사들인 신화 관련 책값만 해도 집 한 채 값이다. ... 각 권에 실린 각 200장 남짓한 사진들은 그가 직접 찍은 수만 장의 사진 중에서 고르고 또 고른 것들이다.그리스의 마른 대지를 떠돌던 이윤기의 붓끝은 요즘 우리 신화의 풍경을 터치하고 있다. 얼마 전 발간한 에세이집 가 그것.하지만 서양 신화 속에 숨겨진 열쇠를 찾는 그의 작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는 모두 10권으로 완성된다. 대리석 조각 속에 잠들어 있는 어떤 신이 다시 독자들에게 말을 걸어올지, 이윤기의 다음 책이 궁금하다.■ 21세기의 신화열풍 왜? 비현실적 판타지·로맨스, 대중의 反이성 성향에 부합 그리스 로마 신화는 물론 한국 신화의 수수께끼, 북유럽 신화를 다룬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드라마로 만들어진 '주몽'과 '태왕사신기'가 시청자들을 사로잡는다. 신화가 넘쳐나는 시대다. 정보문명의 디지털 데이터가 포화상태에 이른 21세기, 사람들이 다시 신화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유럽에서는 1970년대 이후 신화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경험주의 인식론, 극단적 이성주의에 대한 반발이었다. 과학문명에 대한 맹신은 대량 학살과 환경 파괴라는 보복으로 돌아왔고, 사람들 사이에는 이성적 상태 이전의 인간에 대한 동경이 일었다. 그렇게 2,000년 넘게 잠들어 있던 신화가 깨어났다.하지만 21세기 한국의 신화 열풍을 그런 맥락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다. 산업문명의 부조리에 대한 대안을 찾는 것으로 보기엔, 지금 부는 신화의 바람은 너무 가볍고 얕다. 그보다는 대중문화를 생산ㆍ소비하는 메커니즘이 신화라는 콘텐츠와 결합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신화가 가진 판타지, 원초적 로맨스라는 콘텐츠가 보다 즉물적인 감성을 요구하는 대중의 욕구와 맞아 떨어진 것이다.이는 재미와 흡입력이 큰 그리스 신화가 한국이나 동양의 신화보다 큰 파급력을 갖는 데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 극적 스토리와 갈등구조를 지닌 그리스 신화는 신에 대한 찬가로 이뤄진 인도 신화나 제왕의 위업 중심의 중국 신화, 단편적 건국신화가 주를 이루는 한국의 신화보다 훨씬 인기를 끈다.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도 주로 서구의 신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다.이성적 사고작용의 수고를 거부하는 대중의 행태도 신화 열풍의 한 진원이다. 요즘 영화나 방송 드라마 대중소설에서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것은 곧 흥행참패를 뜻한다. 판타지와 엽기성, 비현실적 로망이 적절히 뒤섞인 신화라는 소재는 이런 토양에서 훌륭한 제재가 된다. 근대성의 탈피가 아닌 단순히 비현실로의 탈출구로 신화가 소비되는 바람은, 그래서 그 풍향을 짚어내기가 쉽지 않다.■ 이윤기 연보▲947년 경북 군위 출생▲성결대 중퇴▲197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당선 등단▲1991~97년 미국 미시간주립대 종교학ㆍ인류학 연구원▲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 한국번역가상 등 수상▲소설집 , 장편소설 , 산문집 , 번역서 등유상호 기자 shy@hk.co.kr

[우리 시대의 명저 50] <34> 장하준의 '사다리 걷어차기'

2007.08.30 00:09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에는 일종의 ‘선진국 콤플렉스’가 무섭게 휘몰아쳤다.당시 경제 위기가 다름아닌 우리의 잘못된 시스템 때문에 일어났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고 이를 벗어나고자 그동안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라 불리는 선진국의 제도를 트집잡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사회 전반에 높아지기에 이른다.이러한 움직임은 결과적으로 우리 것은 무조건 나쁘다는 의식을 심어주기에 이르렀고 급기야 모든 분야에서 ‘외국’‘선진국’이라는 명패가 붙으면 설령 문제가 있더라도 마치 면죄부를 받은 것처럼 사회는 입을 다물게 됐으며, 선진국들이 주장하는 자유무역과 시장중심경제는 ‘복음’처럼 받아들여졌다.장하준(44)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경제학 교수가 미국, 영국 등 선진국들이 우리와 같은 중진국과 개발도상국들에 일종의 ‘사기’를 치고 있다고 항변한 (원서 ‘Kicking away the ladder’ 2002년 영국 발행ㆍ한국어판 2004년ㆍ부키 발행)는 비록 한국의 이와 같은 특이한 상황과 시대적인 배경을 감안해 만들어진 책은 아니지만 선진국의 위선을 경계해야 하는 시기에 적절한 경종을 울렸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장 교수는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선진국의 위선을 지적한다고 해서 선진국에서 배우지 말자는 것이 아니지만, 아직 선진국이 되지 않은 입장인 우리나라가 선진국들이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로 내세우며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들을 그대로 따르기보다 그들이 우리와 비슷한 단계에선 어떤 정책을 썼는지 잘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 에 이어 등 국내에서 출간된 장 교수의 저서 대부분을 낸 출판사 부키의 박윤우 대표는 “는 지금까지 공식, 시험 위주로 도식화되어 마치 자연과학처럼 받아들여지던 경제학의 틀을 깨준 책”이라며 “이 책은 막연하게 일반인이 생각하던 의문, 어째서 우리는 외환위기를 맞아야 했나, 혹시 선진국이 우리에게 사실을 말하는 게 아니지 않을까 하는 것들에 대해 거의 처음으로 해답을 제시했다”고 말한다.신자유주의와 자유무역, 그리고 시장의 절대적인 역할을 맹신해온 일반인에게는 거의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으로 다가온 견해가 담긴 책이라는 것이다.2005년 장 교수에게 레온티에프상을 수여한 미 터프츠대는 “장 교수의 이 저서는 가난한 국가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국가의 역할과 세계화에 대한 비판적 고찰로 개발경제학의 지평을 넓혔다”고 의미를 부여했다.에서 사다리는 누군가가 손쉽게 정상에 올라갈 수 있도록 고안된 제도를 뜻한다. 누가 되었든지 이 사다리를 이용해 정상에 오르면 두 가지 선택 앞에 선다.뒤에 올라올 사람을 위해 사다리를 그대로 둘 것인지. 아니면 사다리를 걷어차 후발 주자의 추격을 따돌릴 것인지. 장 교수는 미국, 영국 등 선진국들은 자국이 부자가 되는 과정에서 썼던 각종 정책인 사다리를 후진국들에게는 ‘옳지 않은 방법’이라고 속이며 걷어차는 행동을 해왔다고 이 책을 통해 주장한다.즉 현재 선진국들이 금과옥조처럼 그 쓰임새를 과장하는 시장 중심의 자유무역은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사다리가 아닌 것은 물론이며, 그들이 그토록 옳지 않다고 방점을 찍는 보호무역이야말로 그들이 부자가 되기 위해 과거 사용하던 사다리라고 장 교수는 고발한다.책은 크게 3부로 나뉜다. 장 교수는 우선 선진국의 과거 산업, 무역, 기술 정책들이 어떠했는지 보여준다.그는 정부의 뚜렷한 시장개입 없이도 경제발전을 이룩한 것으로 알려진 영국의 이야기가 사실은 허구라는 주장과 함께 시작한다. ... 자국 산업이 피해를 보지 않고 온실 속에서 잘 자라도록 영국의 여러 왕조는 중세 때부터 보호무역에 주력했다.급기야 나폴레옹 전쟁이 막을 내린 1815년께는 보호무역으로 키운 힘을 믿고 주변국에 ‘페어 플레이’ 를 주장하며 자유무역을 요구한다.현대의 선진국들의 행태와 비슷하다. 이밖에 미국이 절묘하게 관세율을 조정하며 자국 업자들을 육성하고 개발도상국에는 반대의 정책을 요구해온과정을 이 책은 역사적으로, 실증적으로 보여준다.저자는 결론적으로 보호무역이라는 사다리가 미국, 영국 등 선진국들의 전유물로 사용됐으며, 개발도상국에 던져진 신자유주의라는 ‘멋진 신세계’는 결코 경제성장을 담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한다.장하준 교수의 논지는 뚜렷하다. 그는 “외환위기 이후 우리 경제에 처방된 구조개혁 프로그램의 핵심인 시장 원리의 확대는 성장과 분배 모두에 악영향을 미쳤다”고 말磯?그의주장은 미국이 아닌 유럽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이유로 보다 진보적이긴 하지만, 국가나 재벌의 역할을 강조하고 이들을 신랄히 비판하지 않는 측면에서는 보수적이다. 때문에 참여정부 이후 그의 글은 좌우를 막론하고 읽힌다.그의 붓끝은 시종일관 신자유주의를 겨냥한다. 한국경제의 대안으로 여겨져온 이 마술램프에 대해 는 물론 최근 영국에서 출간한 까지 그의 글은 날카로운 일침을 들이대고 있다.●장하준 연혁 1963년 서울생1986년 서울대경제학과졸업1987~91년 영국케임브리지대경제학박사(제도경제학전공)1990년~ 케임브리지대경제학교수2003~04년 고려대교환교수2004년 (사다리걷어차기)로‘뮈르달상’ 한국인첫수상2005년‘레온티에프상’ 역대최연소수상 ▦저서 등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장하준의 쾌도난마, 한국학계선 왕따?장하준 교수를 이야기할 때 먼저 거론되는 것이 그의 집안 배경이다.장재식 전 산업자원부장관의 아들이고 장하석 런던대 교수의 형이자, 장하진 여성가족부장관과 장하성 고려대 경영대 학장의 사촌이라는 가계. ... 하지만 이런 후광을 고려하더라도 그가 국내 순수학문 분야에서 전인미답의 길을 걷고 있는 젊은 학자라는데 반론을 제기하기는 힘들다.그가 국내외 경제학계의 주목을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한 것은 2004년 이 책 로 제도 경제학 서적 가운데 가장 뛰어난 책에 주어진다는 ‘뮈르달 상’을 받으면서부터.세계적인 경제학자의 반열에 올랐음을 증명하는 이 상과 함께 2005년에는 ‘레온티에프 상’이 40대 초반의 학자에게 주어지는 것을 본 국내 경제학계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그것은 시장을 가장 우선시하는 자유주의 무역을 교과서처럼 받아들이던 당시 한국사회 분위기에 가해진 충격이기도 했다.장 교수는 27세의 젊은 나이에 영국 케임브리지대 강단에 섰다. 박사학위 준비 중 석사장교로 병역을 마치는 등 학업에 대한 남다른 노력이 없었다면 얻을 수 없는 결과였다. 케임브리지대 강의 첫날 일화는 그의 면모를 알 수 있게 한다.1990년 강의를 준비하던 그는 아무래도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학생들 앞에 나서서 막히지 않고 할 말을 다 할 수 있을까 하고 자문했다. 결국 그는 2시간 이상 진행할 강의의 모든 내용,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까지를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외우는, 완벽한 준비를 하고 강단에 섰다.하지만 를 비롯한 여러 저서에서 그가 보여준 기존 경제학의 틀에 대한 정교한 도전에도 불구하고, 막상 국내 학계에서 그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국내 유수의 대학들이 그를 끌어들이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왜 그럴까. ... 거기 대해서는 “시장에서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비주류적인 장 교수의 생각이 국내 주류 학자들에게는 영 못마땅하게 들렸으며, 소액주주운동을 비판하면서 ‘박정희 정권 식 경제’를 옹호하는 모습을 보여 일종의 왕따를 당해온 게 사실”이라는 말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자국의 입장을 위해 후진국의 발전을 막아서는 선진국들을 ‘역사적 위선자’로, 그들의 행태를 ‘이중잣대’로 질타하면서, ‘국제적 구타’의 사슬을 끊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젊은 경제학자 장하준에 대한 평가는 아직 현재진행형인 셈이다.양홍주기자

[우리 시대의 명저 50] <32> 오주석의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

2007.08.16 00:08
박물관이란 것이 본디 시중의 갑남을녀에게는 그 벽이 높고 두터운 것이지만, 한국 고미술만큼 단절과 괴리의 벽이 공고한 곳도 없을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알아도 단원 김홍도의 대표작은 아리송한 게 저간의 사정이다 보니, 무지가 무관심을 낳고 무관심이 무지를 강화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미술사학자 오주석(1956~2005). 그의 짧았던 생애는 대부분 이 장벽을 부수는 데 헌납됐다. 그가 쓴 (솔 발행)은 박물관에 박제돼 있던 우리 옛 그림에 펄떡이는 날숨을 불어넣으며 한국 고미술의 대중화 시대를 열었다.‘주역’ ‘시경’ 등 한학을 두루 섭렵한 실력과 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큐레이터로 일했던 풍부한 경험은 쉽고 친절하면서도 깊고 해박한 설명으로 구구절절 풀려나왔다. 어렵고 고루하게만 보였던 우리 옛 그림들은 그의 인공호흡으로 소생했고, 박물관 벽을 넘어 대중의 안방에까지 스며들게 됐다.2003년 출간돼 한국 전통미술 분야의 베스트셀러가 된 은 그가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행한 강연을 묶은 책이다. 2000년 무렵 본격적으로 시작한 강연활동은 생계를 꾸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방편이기도 했지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격조 높은 우리 문화를 널리 알리겠다는 그의 자긍심의 발로이기도 했다.“문화인, 예술가들이 아무리 피나는 노력을 해도 한 나라의 문화 수준이란 결국 그것의 터전을 낳고 함께 즐기는 전체 국민의 안목만큼, 정확히 그 눈높이만큼 올라설 수 있다.”(저자 서문) 그의 강연이 박물관이나 문화원은 물론 공무원 및 교원 교육원, 삼성 LG 같은 대기업 연수원까지 대상과 장소를 차별하지 않았던 이유다.명강사 오주석에 대한 입소문이 나면서 중앙공무원교육원이 어느날 ‘명강의 선집’을 내겠다며 속기사가 기록한 그의 강연록을 보내왔다. ... 저자의 교정을 거쳐 나온 공무원교육원의 비매품 책을 보강해 펴낸 것이 바로 이다.그의 여러 저작들 중에서도 이 책이 단연 으뜸으로 꼽히는 이유, 그것은 바로 우리 옛 그림의 대중화라는 목적에 부합하는 강연록이라는 형식 때문이기도 하다. 유머와 능청이 곁들여진 구수한 단문의 입말체와 청중들의 웃음소리와 박수소리까지 괄호 안에 넣은 현장감이 강연장의 생생함을 고스란히 살려냈고, 독자는 마치 저자가 옆에 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은 따스한 온기를 책장에서 느낀다.오주석 식의 이런 미술 대중화 작업이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이미 1990년대 이주헌, 노성두 등이 서양미술에 관한 대중서적 바람을 불러일으켰고, 진중권이 로 서구 미학이론을 대중적 눈높이로 풀어낸 바 있다. 하지만 이 바람은 한국 고미술에 가장 늦게 당도했다. 오주석 이후에야 한국미술에도 바야흐로 대중화의 훈풍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오주석이 제안하는 한국 고미술 감상법은 빽빽한 문자로 열거된 백과사전파 식의 지식이 아니었다. 혀에 착착 감기는 입말로 풀어내는, 소박하지만 절대적인 원칙들이었다. 바로 ‘옛사람의 눈으로 보고, 옛사람의 마음으로 즐기라’는 것. “그림 감상, 하나도 어려울 게 없습니다. 나비는 가볍게 활짝 날게 그리고, 새는 포로롱 하고 날아갈 듯 그리면 바로 그게 좋은 그림입니다.”(140쪽)이 절대원칙 아래, 아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 지당한 소원칙들이 제시된다. 첫째, 감상에 적당한 그림과의 거리는 그림 대각선 길이의 1~1.5배다. 둘째, 옛사람들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세로쓰기를 했으므로 그림을 볼 때도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시선을 흘려라. 셋째, 그림을 찬찬히, 구석구석 봐라.오주석은 이런 조목조목 설명을 통해 한국의 그림은 보는 것이 아니라 읽어야 하는 것임을 일러준다. 그래서 그의 다른 책 제목 하나는 이다. ... 보는 것이 아니라 읽어야 하고, 읽어야 재미가 생기는 게 한국 그림이라는 것이다.김홍도의 ‘씨름’만 해도 한국인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그림이지만, 그의 설명을 듣고 나면 한 번도 이 그림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저자는 팔베개 하고 비스듬히 누운 구경꾼을 통해 경기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는 시간의 경과를 읽어내고(오래 구경해 몸이 고단하기 때문에), 들배지기에 걸린 씨름꾼이 오른편으로 넘어질 것이라는 걸 오른쪽 구경꾼들이 놀라 몸을 뒤로 빼는 포즈를 통해 유추한다.금강산 일만이천봉을 하나로 뭉뚱그려 원으로 만든 정선의 ‘금강전도(金剛全圖)’는 음양오행설의 원리에 맞춰 평화로운 이상향의 꿈을 琉?것이라고 설명하고, 김홍도의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에서는 실바늘 같은 선을 수천번 반복해 그린 호랑이 터럭을 통해 수양의 경지에 이른 초인적 묘사력을 각인시킨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절로 실감되는 순간들이다.쉽고 대중적인 글쓰기라고 하지만 오주석의 해석은 전문가들도 감탄을 금치 못할 만큼 독창적이고 깊이있는 것으로 정평이 났다. 미술사의 오류를 바로잡는 데도 혁혁한 공을 세웠는데, 조손(祖孫)인 이재와 이채의 초상화로 알려진 두 작품이 실은 10년의 시차를 두고 이채 한 사람을 그린 작품들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국립중앙박물관 근무 시절 선배로 가까이 지냈던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은 “한국미술은 작품 외적 요소를 통한 해석이 일반적인 데 반해 오주석은 작품 자체에 주목해 자세하고 깊이있는 분석을 했다”며 “이 과정에서 그가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밝혀냈다는 점에도 큰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한국미술의 아름다움을 표나게 강조하는 이 책의 몇몇 대목은 아마도 세계시민주의자들의 감수성에 거슬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코스모폴리탄이라 할지라도 “우리 옛 그림이 이렇게 재미있고 아름다운 것이었다니…” 하고 무릎을 치는 일만은 피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 그리고 그것은 생전의 오주석이 그의 독자들에게서 가장 듣고팠던 말일 것이다.■ 미술사 '마이 웨이' 오주석은 단원 사랑 남달라 "내가 김홍도 이용했다" 울먹이기도 2005년 2월 7일자 신문에는 설 특집에 밀린 작은 부고 기사 하나가 부고란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었다. 49세의 나이에 백혈병으로 숨진 오주석의 부고였다. 그럴싸한 인터뷰로 언론의 조명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했던 소장 미술사학자였지만, 그의 죽음은 미술계와 그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가슴아픈 것이었다.너무 젊은 나이가 그랬고, 갑작스레 닥친 병마에 스스로 곡기를 끊으면서 맞이한 최후가 그랬으며, 찬란하게 절정을 향해 치닫던 그의 저술작업 또한 그러했다.서울대 동양사학과 출신인 오주석은 거대담론에 밀려 문화사나 풍속사에 대한 관심이 미미했던 1980년대, 미술사를 '마이 웨이'로 선택했다. 강연록에 따르면 그는 "고등학교 시절 학과를 결정할 때 국사학과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국사 공부를 해보면 19세기 대목에서 정말 엄청 열 받기" 때문에 한국사 대신 동양사를 선택했다는 것.그러나 그는 결국 우리 역사로 돌아왔다. 그림을 통해서였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시절 기획한 '김홍도 특별전'이 크게 히트하면서 두각을 나타낸 그는 단원 등 18세기 화가들의 자료 발굴과 독창적 해석을 통해 조선 후기 회화사 연구의 지평을 넓혔다.1999년 출간된 은 김명국의 '달마상', 안견의 '몽유도원도', 윤두서의 '자화상' 등 11점의 옛 그림에 대한 번득이는 분석으로 우리 회화의 아름다움을 길어올렸다. 미완성 유고인 는 정선의 '금강전도'와 다산 정약용의 '매화쌍조도' 등 여섯 작품에 대한 독화기를 모았으며, 사후 출간된 는 폭 44㎝, 길이 8.56m에 달하는 조선 후기의 이 작품을 340여쪽의 분량에 풀어낸 방대한 연구서다. ... 도 본래 시리즈로 출간될 예정이었으나 저자의 죽음으로 이뤄지지 못했다.김홍도에 대한 사랑이 남달라 연구서 까지 냈던 오주석은 자신이 기획한 김홍도 특별전 후 뒷풀이 자리에서 "나는 김홍도를 이용해먹는다"며 울먹였다고 한다. 예술가와 그 작품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연구의 1차 질료였던 오주석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일화다.오주석▲ 약력1965년 수원 출생1979년 서울대 동양사학과 졸업1982~83년 코리아헤럴드 문화부 기자1987~88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1993년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석사1994~96년 호암미술관 학예연구사1996년~ 간송미술관 연구위원1998~99년 중앙대 겸임교수2001년~ 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2003년 연세대 영상대학원 겸임교수2005년 2월5일 백혈병으로 별세▲주요 저서, , , , (공저), (공저) 등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우리 시대의 명저 50] <31> 이어령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2007.08.09 00:08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1962년 스물 아홉 살 이어령이 남의 얘기에 귀 기울이지 않고 피를 토하듯 쓴 글이다. 이 땅에 산업사회의 싹이 트는 당시를 살았던 작가의 순결한 지적 모험이 녹아 있는 글이다. 1960년대 당시 빗발치는 시사론을 제치고 순수문화론적 접근으로 한국을 바라본 글이다.그래서 언뜻 봐서는 한국문화 비판론인지 예찬론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눈치만 빠르면 절간에서도 새우젓을 얻어먹을 수 있다’ ‘잘 울어야 효자였고 잘 울어야 충신이며 열녀였다’라는 등의 대목에서는 냉소적 시각에서 한국을 욕하는 것으로 들린다.반면 ‘춘향의 미(美)와 불경이부(不更二夫)라는 춘향의 정절은 분리될 수 없는 것’ ‘공간을 정복하는 미가 서구의 형태미라고 한다면 공간 속에 스스로 동화하려는 순응의 미가 한국적인 형태미’라는 데서는 한국에 대한 예찬론으로 들린다.하지만 결론은 단순하다. 그 시대를 살았던 한국인의 마음속에 녹아 있는 보편타당한 정서를 글로 표현한 것이 이 책이다. 비판론, 예찬론으로 재단하려는 읽는 이의 시각이 무색하다. ‘이념’ ‘흑백논리’라는 색안경을 벗고 보면 ‘흙 속에 저 바람 속에’가 밝게 보인다.책은 본디 한국의 풍토를 말하고 있음을 제목에서부터 보여준다. 풍토를 뒤집어 토풍으로, 이를 다시 우리말로 바꾼 ‘흙 속에 바람 속에’로, 잡을 수 없는 바람을 손가락으로 ‘저’ 하며 가리키니 풍토는 머릿속 관념의 세계를 벗어나 딱딱한 물건인 양 손에 잡힌다.순결한 지적 모험을 토대로 피를 토하듯 저자가 이데올로기에 기대지 않고 쓴 글이라 스스로 “다시 쓰라고 해도 못 쓴다”고 토로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 다만 ‘황토’를 ‘황토 흙’으로, ‘지프’를 ‘지프차’로 바꿔 어법에는 맞지 않지만 진솔한 언어로 바꾸는 ‘개칠’과 스물 아홉 살 이어령의 글에 2002년 예순 아홉 살 이어령이 댓글을 단 ‘그 후 40년’이 붙었을 뿐이다.미군용 카키색 지프차를 타고 산하를 누비며 써내려 간 것이 과거라면 정자에 앉아 21세기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현재다. 그가 말하는 정자는 복고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후기 구조주의자나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의 그 시점과 엇비슷하다.정자 공간의 시점이란 이중성, 복합성, 쌍방향성같이 상호간 교환 가능한 겹 시각을 나타내는 시점이다. 무욕망과 비소유의 공간, 사방으로 열려진 정자에 앉아 문화를 완상하는 순수한 시각 공간이다.40년 세월을 넘어 무엇이 바뀌었는가. 권위주의 형식주의 보수주의 등의 대표격인 ‘갓’이 한국인의 이념이 물질 그 자체로 응집되어 있는 머리의 언어로, 게으름 비행동성의 상징인 ‘장죽(담뱃대)’이 노인 지향적 문화의 산물로 재해석된 것이 그렇다.과거 지적했던 ‘눈물 문화’에 대한 비판이 굶주림과 고통에 맞서 무기력하게 눈물만 흘리고 앉아 있는 패배주의와 그 소극성에 대한 부정이었다면, 21세기 붉은 악마의 눈물은 감동의 눈물, 함께 기쁨을 나누는 그 공감대에서 흐르는 참여의 눈물이다. 비가 와야 하늘에 무지개가 생기듯이 눈물을 흘려야만 마음에 아름다운 인생의 무지개가 생긴다는 문화의 눈물이다.통렬히 비난하던 한국의 엉거주춤 문화가 오히려 새로운 디지털 문명의 패러다임에 적응하는 문화모델이라는 대목도 이와 같다. ‘이’ 아니면 ‘저’의 선택에서 중간항을 허락하지 않은 배제의 논리가 소위 콤플렉시티(complexity)라고 하는 복잡과학으로 이행하고 있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도대체 40년간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큰 시점의 변화가 있었던 것인가. 비단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시대 변화만 녹아 있는 것은 아니다. ... 저항의 문학을 쓰던 저자가 전통과 역사를 부정하는 입장에서 모조리 불태우는 화전민의 마음으로 쓴 글이 전편이라면 4ㆍ19를 겪은 후 모든 것과의 인연을 끊은 결과물이 후편에 해당한다.4ㆍ19 전까지 침묵하던 문인들이 때를 만났다는 듯이 참여문학으로 돌아선 것에, ‘저항의 언어’가 ‘폭력의 언어’로 타락한 것에 염증을 느껴 사회와의 접점이 가장 적은 분야에서 언어를 벽돌 삼아 혼자만의 성을 짓고 들어앉아 쓴 것이 지금 시점의 이다.많은 것이 변해 13편의 문답으로 40년 세월을 이었지만 저자는 비단 감투싸움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감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감투싸움’을 벌이고 있는 오늘날의 그 정쟁은, 기실 모자를 사랑하던 민족의 유습(遺習)”이라는 40년 전 견해에 대해 스스로 되묻지 않은 까닭은 과거의 감투 싸움과 현재의 모습이 그리 다르지 않다는 저자의 판단이리라.2007년 대선을 바라보며 저자는 말한다. “정치판은 권력에 대한 욕망이 대립해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곳이죠. 다만 모든 국민이 평등한 선거 마당에서만이라도 유머와 위트를 느낄 수 있다면, 헐뜯고 상처 내는 싸움이 아니라면 좀 더 즐겁게 정치판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인터뷰 - "창조적인 사람·튀는 생각 포용 못하는 사회 분위기 안타까워""노동자와 자본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등 경제적인 관점의 계급은 이제 의미가 없습니다. 단지 창조하는 계층과 창조하지 않는 계층으로 나뉠 뿐이죠." 지난해 '디지로그'를 선보인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한국이 산업사회에서 지식정보화사회로 이행하는 데 필요한 핵심동력을 '창조'에서 찾았다. 인터넷과 매체의 발달로 지식정보의 획득만큼은 어느 나라나 거의 동등한 입장이다. 따라서 같은 지식정보를 갖고 창조력을 발휘해 누가 더 그럴듯한 작품을 만들어내느냐가 관건임은 분명하다.그는 창조력이 충만한 사회를 만드는 조건을 3T로 집약했다. Talent(재능), Technology(기술), Tolerance(관용)가 그것이다. ... "우리에게는 가장 부족한 것은 관용입니다. 도대체 창조적인 사람을 그냥 봐주지 못해요. 튄다, 뭔가 이상하다며 비난하기 일쑤죠"라며 성별, 연령, 교육의 간판에 대한 관용, 튀는 생각에 대해 끌어안아 주는 사회적 분위기가 시급하다는 진단을 내렸다. 역시 모난 돌이 담을 쌓는 법이다.1980년대 을 시작으로 지식정보화사회와 창조력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고뇌는 결국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방법론을 깊이 천착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는 급변하는 지식정보사회에 대한 고뇌의 결과물을 디지로그 2편에 오롯이 녹여내겠다는 각오다. 새로운 뉴스를 챙겨 담고, 사실 여부를 검증하는 과정이 아직 남아 있기는 하지만 디지로그 2편은 "욕심을 내다보니 자꾸 늦어진다"라는 작가의 푸념을 뒤로하고 조만간 빛을 볼 예정이다.닌텐도의 최신 게임기 위(Wii), SNS(Social Network Service) 등 젊은이에게도 생소한 용어를 줄줄이 꿰고 있는 그는 일흔을 훌쩍 넘겼다. 그 나이에도 자유롭게 창조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불예속' 철학에 기인한다. 어떤 권력, 집단에도 기대지 않는 자유로움이 흥망성쇠의 파고에서 작가의 흔들림을 붙잡아 준 기둥이었다. 그런 불예속이 그를 종교로 이끌었다면 아이러니일까. "이제까지 어디에 예속되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죠. 그게 아직 글을 쓸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만 역사의 언어, 사회문화의 언어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껍질을 벗기고 벗기다가 최후에 인간의 냄새까지 벗겨 내다 보니 영성의 세계가 열리더군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하다는 만해 한용운의 시 과 그가 종교로 들어간 모습이 판에 박은 듯 닮았다."인간의 욕망을 갖고는 속박을 벗어나지 못한다. ... 삶을 치열하게 살기 위해 무중력 상태의 영성으로 가는 것"이라는 그의 설명이 이후 작품 속에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자못 기대된다.이어령▲약력1934년 충남 아산 온양 출생56년 서울대 문리대 및 동 대학원 졸업60년 한국일보, 경향신문 등 주요 신문 논설위원67년 이화여대 문리대 교수89년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객원교수90년 초대 문화부 장관99년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장▲주요 저서 등허정헌 기자 xscope@hk.co.kr

[우리 시대의 명저 50] <14> 최재천 '개미제국의 발견'

2007.04.11 23:34
사람들은 과학을 전공자의 실험실 속에만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접근하기를 두려워했다. 과학자들은 대중을 향한 글쓰기를 하대했다. 과학자가 논문을 쓰고 연구를 해야지, 가벼운 글을 쓰는 것은 외도라고 여겼다.종종 외국의 과학 저술가들이 쓴 책들이 인기를 모으기도 했지만 일시적 현상에 그쳤고, 대중과 과학자들간의 거리는 좀체 좁혀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과학이 대중을 향해 손짓하기 시작했다.그 시작이 바로 최재천(53) 이화여대 교수의 (사이언스북스)이다. 권위 있는 동물행동학자가 열대림에서 직접 관찰하고 연구한 개미의 세계를 인간 사회에 빗대 소개한 이 책은 1999년 처음 나온 이후 5만부가 팔렸고, 올해 초 22쇄를 찍었다. 그 뒤에 나온 수많은 과학책들이 이 책을 모범으로 삼았고, 한 부분이 중학교 2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물론, 이 국내 최초의 교양 과학서는 아니다. 그러나 연구자가 자신이 직접 연구한 고도의 전문 분야를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설명한 최초의 과학책이라는 점은 분명하다.출판 당시 사이언스북스의 편집장이었던 이갑수 궁리 출판사 사장은 “첨단의 과학 분야에서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책으로, 이후 과학 출판의 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이 책은 개미를 사회생물학적으로 접근한 첫 국내 저작물이기도 하다.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친근한 동물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은 큰 반향을 일으킨 원인 중 하나였다. 의대에 낙방하고 어쩔 수 없이 동물학과를 선택한 최 교수였지만, 개미에 대한 관심 만큼은 그 이전부터 강했다.고교 시절 읽은 솔제니친의 라는 짤막한 에세이가 이상하리만치 잊혀지질 않았다고 한다. “개미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하버드대 에드워드 윌슨 교수 밑에서 공부하면서 다시 한번 이 에세이를 읽었어요. 그 때부터 인생이 바뀌었죠.”솔제니친의 에세이가 그를 개미 가까이로 이끌었다면, 을 쓰게 한 것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였다. ... 하지만 질문의 내용이 소설 속에만 한정된 것이 아쉬웠던 최 교수는 마침 의 연재 제안에 개미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재미있게 써보겠다고 답했다. “실화보다 재미있는 소설은 없다”라는 마크 트웨인의 말을 떠올리며. 이것이 의 출간으로 이어졌다.그는 책을 쓸 때 절대 ‘물타기’는 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물론 과학이 마냥 복잡하고 어렵지 만은 않다는 것을 알려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용을 빠트려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최 교수는 “과학의 대중화가 아니라 대중의 과학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과학의 시대인 21세기에 과학을 모르고 살아 남겠다는 것은 언어 도단이죠. 모든 사람이 과학자가 될 필요는 없겠지만 과학을 이해할 수는 있어야 합니다. 과학 냄새만 풍기는 알맹이 빠진 책을 읽는 것은 과학적 사고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그래서 저와 동료들이 연구한 것을 가감없이 그대로 설명하려고 애썼습니다. 문제는 전달 방법인데, 그것은 글 쓰는 사람의 재주와 노력에 달려있는 것이죠.”최 교수가 택한 것은 인간 사회에 대한 비유라는 방식이었다. “인간과 가장 비슷한 동물은 침팬지입니다. 그러나 인간과 유전자가 99% 일치하는 침팬지는 꿈도 꾸지 못하는 국가 건립, 노예제도, 분업제도 같은 일들이 개미 사회에서는 모두 일어나고 있어요.진화 역사를 공유하지 않은 인간과 개미가 숙제에 대해 같은 답을 갖고 있는 것이죠.” 최 교수는 사람들이 과학책에 대해 가질 부담감을 덜어주기 위해 마치 인문서처럼 경제, 정치, 문화의 순으로 개미 사회를 풀어나갔다.합작투자와 다국적 기업, 정치적 갈등과 합종연횡, 권력 투쟁, 전쟁과 노예…. 인간 사회와 놀랄 만큼 비슷한 개미들의 세계는 소설보다 신기하고 황홀했다. ... 여왕개미에 대한 일개미들의 ‘역적 모의’를 설명하기 위해 이방원과 정도전을 가져왔고, 식물로부터 단물과 서식지를 제공받는 대신 주변의 다른 식물로부터 보호해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보디가드 산업의 창시자’라는 제목을 붙였다.이런 방식이 효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전문 분야를 일상 용어로 무리 없이 버무려낸 최 교수의 글 솜씨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기교 없이 간결한 그의 글은 편안하면서도 흡인력이 있다. 신춘 문예를 준비할 정도로 문학에 심취했던 이력이 여기에 한 몫을 했다. “문학적 추억과 과학적 글쓰기가 섞여있다고 할까요.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시절 글쓰기를 지도했던 영문과 교수는 하버드대에 보내는 추천서에 ‘최재천의 글은 군더더기 없고 정확하며 우아하다’고 써 주셨는데, 지금껏 이 말을 글쓰기의 지침으로 삼고 있습니다.”은 한국문학번역원의 외국어 번역 지원 도서로 선정돼 해외 출판을 앞두고 있다. 개미를 비롯한 곤충 뿐 아니라 까치와 영장류 연구, 각종 외부 활동으로 글을 쓸 시간이 부족해 안타깝다면서도 올 들어 2권의 책을 잇달아 펴낸 최 교수는 “사이언스북스로부터 의 개정판을 내자는 제안을 계속 받고 있는데, 기업 경영 차원을 좀 더 강조해 새로운 책을 쓸 계획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교양과학서 시장 매년 10~20% 성장한국에서 교양 과학서의 역사는 해방 이후 전파과학사가 대중과학 시리즈를 번역해 소개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나 오랫동안 번역서에만 의존해왔고, 그 비중 역시 크지 않았다.칼 세이건, 스티븐 호킹, 러처드 도킨스 같은 과학저술가 층이 형성되지 않았고, 베스트셀러가 나오기 어려워 출판사도 부수적 영역으로만 인식해온 것. ... 내용도 계몽적 성격에 머물러 있었다.하지만 시대의 흐름은 인문학 대신 과학을 새로운 교양의 젖줄로 등장시켰고, 과학 내부에서도 연구만 할 것이 아니라 대중과 소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최재천 교수를 필두로 이인식, 정재승, 박경미, 김희준, 주일우씨 등 대중과 호흡하는 과학저술가들이 속속 등장했다. 1997년 사이언스북스가 과학 전문 출판사로 첫 삽을 뜬 이래 교양 과학서 출판에 주력하는 출판사도 10여 곳에 이를 만큼 늘어났다.전체 출판 시장에서 보면 교양 과학서의 입지는 여전히 미미하다. 사이언스북스가 최근 실시한 시장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문서와 교재를 제외한 교양 과학서의 연간 매출은 250억원 정도. 이는 전체 단행본 출판 시장의 2%에 불과하다.하지만 인문, 사회과학 도서 시장이 위축되고 있는 데 비해 과학서 시장이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매년 단행본 종수가 30% 가량 늘어나고 있고, 시장 규모도 10~20%씩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이갑수 궁리 출판사 사장은 "오랫동안 존재했던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칸막이가 없어지고 있다. 과학 잡지를 통해 훈련받은 세대들의 요청에 맞는 책을 공급해줘야 한다"고 말한다.물론, 이를 위해서는 좋은 필자 양성이 절실하다. 국민대 사회과학연구소 김동광 연구원은 "정부와 대형 출판사들이 저술 활동을 위한 제도적 지원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여전히 대중서 출간을 학문적 외도로 인식하는 교수 사회 문화도 바뀌어야 하고, 도서관 역시 양서를 많이 사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지원기자 eddie@hk.co.kr

[우리 시대의 명저 50] <8>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2007.02.21 23:40
등을 통해 무능하고 부패한 지배 계급을 조롱한 조선 후기의 실학자.연암 박지원(1737~1805)에 대한 일반의 지식은 아마 이렇듯 짧고 단순할 것이다. 그는 분명 대문호이자 당대의 천재였지만, 우리 시대에 연암에 굳이 큰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소수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18세기 인물, 연암은 그만큼 아득한 존재다.그런 연암이 고전 연구가 고미숙의 (그린비, 2003)에 의해 다시 살아났다. 고미숙의 연암은 그러나 유머와 역설과 웃음의 인물이다. 시대 상황을 걱정하고 민중의 도탄을 안타까워하는 고뇌의 인간이 아니라, 술과 사람을 좋아하고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통 큰 사람이다. 화통해서 막힘이 없고 누구와도 격의 없이 담소했으며, 말술을 들이키고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논쟁이 붙으면 사흘 밤낮을 쉬지 않았다.는 연암이 청나라 건륭황제의 만수절(70세) 축하 사절단에 동행해 1780년 5월부터 10월까지 여섯 달 동안 중국을 다녀 온 이야기다. 압록강에서 연경까지가 2,300리, 연경에서 열하까지가 다시 700리. 장장 3,000리에 이르는 그 먼 길을 일행은 죽기 살기로 걸어나갔다. 찌는 듯한 더위, 몸서리치는 폭우와 싸워야 했던 여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생의 연속이었다. 연암은 그 길에서 낯선 경치나 구경한 것이 아니다.고미숙에 따르면 연암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했고 보이는 것에서 숨겨진 것을 보려 했다. 그의 시선과 필력은 길에서 만난 여인의 장신구와 패션, 머리 모양에서부터 곰이나 범, 온갖 동물의 모양새까지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았다. 연암은 그 곳에서 사람과 만나는 것을 특히 좋아했다.선과 악의 근대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선18세기 천재 실학자 연암 박지원 재조명지식인의 비판적 사유가 향할 길 제시야음을 틈타 대열에서 이탈, 밤새 술을 마시고 필담을 나누었다. 그런 이야기를 모두 담고 있는 는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다. ... ‘여행이라는 장을 전혀 다른 배치로 바꾸고 그 안에서 삶과 사유, 말과 행동이 종횡무진 흘러 다니게 한다.’고미숙은 나아가 를 두고,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가 펼치는 개그의 향연!’이라고까지 했다. 유머 없는 는 상상할 수 조차 없으며, 더 솔직히 말하면 는 유머로 시작해 유머로 끝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에게 연암의 유머는 우스개가 아니라 자유로운 정신적 편력이었다.유머와 역설을 접하면서, 고미숙은 연암에게서 근대적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지식인의 모습을 발견한다. 근대적 지식인이란 리얼리즘을 우선시하고 현실을 개혁하려 하며, 부패한 정치를 비판하는 고정되고 정형화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볼 때 연암은 선과 악, 정의와 불의라는 근대적 이분법의 경계를 초월한 사람이다. 스스로 권력에서 멀어지고자 했고 지배 체제에 근본적 비판 의식을 갖고는 있었지만, 그것과 직접 대결하기보다는 근본적인 사유를 바꾸려 했다.그 점에서 연암의 사유는,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들뢰즈(1925~1995)의 그것과 닮아 있다. 고미숙은 연암과 들뢰즈 모두가 안팎의 경계를 가로 지른 지식인으로 보았다. 모두 고정된 척도로 세상을 보지도, 선악을 가르지도 않는다. 척도가 견고해지면 그 자체가 도그마가 되고 파시즘이 될 수 있다고 고미숙은 부연한다.연암과 들뢰즈에 대한 이 같은 긍정은, 지식인이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과도 닿아 있다. 사회 모순을 비틀고 비꼬는 것으로 지식인이 할 일을 다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게 고미숙의 생각이다.그는 당대의 정치적 문제를 넘어서는 삶을 표현하고 개선하는 것이 지식인의 임무이며 그런 점에서 딱 들어맞는 인물이 바로 연암이라고 말한다. 같은 이치로 연암은 도달해야 할, 이상적인 사회를 따로 설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마르크스나 레닌 혹은 박정희 같은 사람은 목적을 정해 놓고 그것을 향해 사회 제도를 만들고 배치했지만 연암은 목표 자체를 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연암에 대한 해석은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 ... 홍대용, 정철조,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백동수, 이서구 등으로 이뤄진 연암 그룹은 지금의 파고다 공원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부근에 모여 살면서 시문과 척독(尺牘ㆍ편지글)을 함께 짓고 술과 풍류로 밤을 지새며 세상 이치를 논했다.연암은 자신보다 사회적 지위가 훨씬 떨어지는 사람들과도 친구가 돼 그들로부터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자극을 받았다. 연암의 아들 박종채가 기록한대로다. ‘아버지는 늘 남들과 함께 식사하는 걸 좋아하셨다. 그래서 함께 식사하는 사람이 언제나 서너 사람은 더 됐다.’연암에게 벗이란 존재는 또 다른 분신이었다. ‘아내는 잃어도 다시 구할 수 있지만, 친구는 한번 잃으면 결코 다시 구할 수 없는 법’이라고까지 쓸 정도였다.고미숙은 “조선을 통틀어 이렇듯 폭 넓은 네트워크를 구축한 공부 모임, 친구 모임은 없을 것”이라고 평가하면서 “세대적, 계층적 장벽을 넘는 연암의 공부는 지금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고 말한다. 이주 노동자, 농민, 재소자, 노인 등 사회적 약자 혹은 소수자와 우정을 나누며 만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함께 공부하며 지식을 나누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가 몸담고 있는 연구 공동체 ‘수유 + 너머’가 지향하는 방향을 넌지시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은 역사적 인물을 보는 신선하고 독특한 시각을 제시한 점에서 돋보이는 책이다. 역사적 인물은 이래야 한다거나 근대적 지식인은 또 이래야 한다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있다.하지만 이 때문에 불편함을 느낀 독자도 있었다. 연암을 개그 작가로 만들었다며 분노하기도 했다. 고미숙의 답변은 담담하다. “위대한 천재는 왜 유머가 있으면 안 되는가. ... .”▲ 고미숙 약력-1960년 강원 정선 출생-고려대 독문학과 학사, 국문학과 석ㆍ박사-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저서 등■ '연암 - 다산' 극과 극의 두 거장이 비슷해 보이는 이유의 뒷부분에는 '연암과 다산-중세 외부를 사유하는 두 가지 경로'라는 글을 실려 있다. 조선 후기의 두 거장, 연암과 다산의 비교다. 흔히 둘을 비슷한 계열로 간주하는 것과 달리, 고미숙은 한 시대를 주름잡은 천재 혹은 거장이라는 점 말고는 유사성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이질적이라고 주장한다.우선 문체반정(文體反正)을 보자. 정조가 주도한 문체반정은 이질적인 글쓰기와 내용을 담은 패관잡기(稗官雜記)의 수입을 금지하는 조치다. 정조가 볼 때 패관잡기는 도발적 사유와 글쓰기, 섬세한 개인 감성의 묘사를 통해 독자를 슬픔에 잠기게 하고 작은 것에 빠져들게 함으로써 사대부의 존재 근거를 위협했다.그런 점에서 문체반정은 문체와 국가 장치가 정면 충돌한 사건이었다. 당시 정조가 패관잡기의 배후로 지목한 인물이 바로 연암이었다. 또 관료의 경력을 쌓고 있던 다산은 패관잡서를 불사르고 중국에서 사들여오는 이를 중벌로 다스리라는 책문을 올렸다.둘은 출신도 엇갈린다. 연암은 집권 세력인 노론의 일원이었고 다산은 집권에서 배제된 남인에 속했다. 그런데도 연암은 과거 시험을 거부하고 권력에서 스스로 이탈했으나, 다산은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중심부를 향해 들어갔다. 정조는 노론을 중심으로 확산된 패관잡기를 문제시하면서도, 남인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던 서학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연암과 다산은 글에서도 차이를 드러냈다. 연암은 기교파로 의미를 몇 겹으로 둘러치거나 다방면으로 분사하는 방식을 취했다. 반면 다산은 민중성, 리얼리즘, 전형성에서 돋보인다. 연암은 표현 형식의 전복에 몰두했고 다산은 의미를 혁명적으로 재구성했다. ... 연암은 대상과 소재, 주제 혹은 의미의 배치에 따라 자유롭게 글을 쓰는 능동성을 추구했고 다산은 역사의 거대한 흐름과 세상의 경륜이라는 차원에서 시를 보았다.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이 비슷한 계열로 비쳐진 것은 중세적 체제의 모순을 비판하고 조선적 주체성을 자각했으며 근대 리얼리즘의 맹아를 선취했다는 식의, 실학 담론을 잣대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고미숙은 말한다.박광희 기자 khpark@hk.co.kr

[우리 시대의 명저 50] <7> 유민영 ‘한국인물연극사’

2007.02.14 23:39
과학성과 객관성을 전가의 보도로 삼는 학문의 입장에서 보자면 인물론이란 참으로 까탈스럽다. 스타 아니면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양분되기 십상인 사람 이야기가 학문의 세계로 오면 거르고 정제해야 할 부분이 많다.유민영(71) 단국대 석좌교수의 1, 2(태학사 발행)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했다. 책은 스타와 예술가의 운명을
==



[우리 시대의 명저 50] <50> 김용섭의 '조선후기 농업사 연구'

2007.12.20 14:55
우리의 역사는 외부의 간섭 없이도 근대화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을까?최근 몇 년간 역사학계에서는 일제 식민지 이전 조선후기사회에서 이미 자생적 자본주의가 싹트고 있었다는 ‘내재적 발전론’과 조선후기 사회는 정체된 사회였으며 한국자본주의 발전은 일제의 자본주의 이식에 의해서 가능했다는 ‘식민지 발전론’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1990년대 말 이후 학계 전반에 불어 닥친 탈이념, 탈민족주의의 영향으로 내재적 발전론의 입지는 최근 다소 흔들리고 있지만, 조선의 근대화가 외세에 의해 가능했다는 ‘정체성 이론’이나 ‘타율성 이론’ 등 일제의 식민사관에 짓눌렸던 역사학계에 돌파구를 마련했다는 측면에서 내재적 발전론의 자장은 넓고도 깊다.적지않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60년대 이후 최근까지 내재적 발전론이 학계에서 지배적인 역사 인식론으로 굳건히 자리잡고 있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 일 터이다.김용섭(76) 전 연세대 사학과 교수의 (지식산업사)는 한국 근대사의 독자성을 인정하는 내재적 발전론의 수원지로 꼽힌다.1970, 71년 두 권으로 발행된 의 초판본은 60년대 저자가 발표한 18편의 관련논문을 묶은 것이다. 90년과 95년에는 70~90년대에 발표한 보론격의 논문들을 추가한 증보판과 신정증보판(II권)이 선보였다.저자는 비록 논문들에서 내재적 발전론이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조선후기의 농촌사회에서 이뤄진 중세사회의 주체적 해체과정을 추적한 논문들은 강만길 전 고려대 교수의 ‘자본주의 맹아론’과 함께 내재적 발전론의 이론적 토대를 굳힌 것으로 평가된다.김 교수가 한국사에서의 농촌문제연구를 필생의 연구과제로 삼게 된 계기는 전봉준의 공초(供草)를 통해 동학농민의 성격을 구명하는 석사논문 ‘동학난성격고’를 준비하던 55년께로 거슬러올라간다.지주제의 해체와 토지의 균등경작을 요구한 운동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17~19세기 조선 농촌사회의 토지문제 연구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 그는 중세봉건사회의 해체과정을 분석하기 위한 연구자료로 당시로서는 획기적으로 토지대장인 양안(量案)과 호적대장을 채택한다.핵심과제는 토지소유권의 변모를 파악하는 일이었는데 양안과 호적대장에서 기록된 지주와 경작자의 신분과 토지매매기록, 토지경작형태 등을 통계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중세봉건적인 지주와 전호(佃戶ㆍ소작인)의 관계가 어떤 형태로 변모되었는지를 해명한다.또한 쌀보리 이모작과 이앙법의 보급 등 농업생산력의 발전이 어떻게 농민의 부력(富力)을 향상시켰는지, 그리고 부력의 향상이 토지소유관계의 변동에는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의 관계를 밝힘으로써 조선후기 농촌사회의 변동과 발전을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그는 70년 발간된 이 책의 초판본 서문에서 “한국사 연구에 관하여 그 기본자세의 문제로서 큰 벽에 부딪히고 있었다. 그것은 당시까지의 한국사학이 하나의 철칙으로 여기다시피 하고 있었던 한국사에 있어서의 정체성과 타율성의 문제”라며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그는 그 장애물을 피하지 않았다. 토지대장과 양안 같은 원장부 자료를 분석해 ‘농업생산력의 발전-사적소유의 확립-지주전호제의 성립-지주전호제의 변모’ 라는 논리적 고리를 만들어 한국역사에서 토지사유화가 지체됐기 때문에 자생적 근대화가 불가능했다는 ‘정체성 이론’의 핵심논리를 돌파했다.중세사회의 해체과정에서 다음 시대를 계승할 새로운 사회세력으로서 ‘경영형 부농층’에 주목한 것도 특기할 만한 대목이다. 경영형 부농층이란 봉건지주층의 땅을 차경(借耕)한 뒤 주로 임노동을 이용해 농업생산, 농업경영에 전력하는 역농자(力農者) 계층이다. ... 김 교수는 이들을 영국 농업혁명기의 자본가적 차지농(요먼)과 가까운 존재로 파악한다.그는 경영형 부농층에 대해 “봉건적 생산관계를 타도하고 새로운 생산양식을 수립할 수 있는 사회계층”이라고 정의하는데, 이것은 김 교수가 이들을 서구 근대사회의 주역이 된 중산적부민(中産的富民), 즉 시민계급과 유사한 존재로 취급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실증주의사학, 마르크스주의사학, 민족주의사학 등 해방 이전 근대역사학의 세 가지 전통을 발전적으로 계승, 내재적 발전론의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되는 김용섭의 이론은 학문적 엄정성과 역사적 기여도에 있어 “넘볼 수 없는 큰 봉우리” (이경식 서울대 역사교육과 교수)로 평가 받아왔지만 최근 이런저런 비판에 직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예컨대 그는 자본가?차지농이 자본주의적 발전을 이끌어갈 수 있다는 전제하에 조선후기사회의 변화를 들여다봤지만 이는 영국사회에서 17세기에만 나타나는 특수한 형태라는 점에서 경영형 부농을 자본가적 차지농으로 상정하는 전제는 적절하지 않다는 비판이 그렇다.그의 이론이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증명함으로써 이에 조응하는 사적소유의 발전을 확증하려는 마르크스주의적 도식성을 갖고 있다는 비판과 국가와 민족을 지향하는 강력한 목적론적 특성을 갖고 있다는 비판 역시 매섭다.그러나 그런저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이 두터운 역사적 실증과 이론적 사유 위에 바탕한 것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 “외래이론에 휩쓸리지 않고 근대역사학의 전통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자신의 개성을 만들어온 매우 보기 드문 우리 현대 역사학의 전통으로 굳어졌다”는 평가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97년 연세대에서 정년퇴임한 김 교수는 요즘도 매일아침 일찍 도시락 2개를 싸들고 연희동의 연구실로 출근해 밤늦게 연구실을 나온다. 50년대 동학농민전쟁의 성격을 밝히기 위해 조선후기 농업사에서 출발한 그의 이론적 탐색은 2000년대까지 이어져 한말에서 일제하의 농업사까지 근ㆍ현대 한국사회의 농업구조와 사회변혁사상을 밝히는 데에까지 나아갔다.최근 그는 자신의 학문적 도정을 정리한 ‘농업사로 진로를 정하기까지’라는 글을 남겼다. “이 같은 일을 제가 수행한다는 것은 당시로서 참으로 힘에 부치는 벅찬 일이었습니다. 앞에 태산이 가로놓여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갈 수 있는데 까지 가기로 하였습니다. 자료가 입수되는 분야의 문제로부터 하나하나 풀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50년의 세월이 흐르고 이제 해는 서산에 저물어 가는데, 저의 작업은 겨우 그 태산의 한 모퉁이를 답사하는 데 그쳤습니다” 라고 썼다. 선각자의 겸손은 그래서 더욱 큰 울림을 준다.■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가 말하는 김용섭 "세속 일에는 전혀 관여 하지않고 오로지 학문적 목표만 달성하시려는 분입니다. 당신 스스로 '나는 재미없는 사람' 이라고 하시더군요. 허허허…."이태진(64ㆍ사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비록 사제관계로 맺어지지 않았지만 김용섭 선생은 학자로서 배울 자세가 많은 분"이라며 "학인(學人)에게 그런 선배가 있다는 것은 매우 소중하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1970년대 중반 김 교수가 주도하던 한국사연구회의 연구간사로 일하면서 김 교수와 인연을 맺었다."역사를 보는 관점은 조금 달랐지만 60, 70년대 한국사학계를 이끄는 양대 견인차는 고대사ㆍ중세사의 이기백, 조선후기의 김용섭이라고 볼 수 있다"며 "특히 양안이나 토지대장을 사료로 한 연구는 50년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연구방법론이었다"고 설명했다. ... 엄청난 양이고 서술사항이 너무 많기 때문에 보통의 인내심으로는 엄두도 못 낼 작업이라는 것이다.이 교수는 당신이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선생의 사관에서는 사회주의적 관점이 엿보인다고 추측했다. 일제치하에서 식민사관에 정면으로 도전한 백남운의 역사관을 바탕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으며 농민의 이해관계가 우선시되는 사회를 진보된 사회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의 내재적 발전론이 결과적으로 80년대 민중사관에 영향을 주었기에 때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역사학자들은 그것을 주체사상과 같은 사이비 마르크시즘과는 혼해(混解)하지 않는다고도 설명했다."우리 역사는 제국주의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발전해왔다는 점, 19세기에 찾아온 위기를 우리 스스로 극복할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 그것이 김용섭 선생이 역사를 보는 관점"이라고 설명한 이 교수는 "선생님을 따르는 학문후속세대들은 선생님이 시도했던 양안자료들을 이번에는 전산으로 분석, 다양한 해석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결국 '지금 우리는 누구인가'를 해명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김용섭 프로필1931년 서울 출생1954년 서울대 사범대 역사과 졸업1957년 고려대 대학원 석사1966~1973년 서울대 사학과 교수1967년 한국사연구회 창립발기위원1983년 연세대 대학원 박사1974~1997년 연세대 사학과 교수저서조선후기농업사연구(1970,1971)한국근대농업사연구(1975)조선후기농학사연구(1988)한국근현대농업사연구(1992)한국근대농업사연구(2001) 등이왕구기자 fab4@hk.co.kr

[우리 시대의 명저 50] <43> 한완상의 '민중사회학'

2007.11.05 05:55
“역사와 구조의 주인 되고자 노력하는 민중과 그것을 저지시키려는 지배 집단에 대한 종합적인 파악 없이 현대 사회 구조와 기능을 이해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여기에 민중사회학이 요청되는 이유가 있다.”( 서설에서)은 한완상씨가 1978∼80년에 쓴 글들을 (1980)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가 84년에 일부 보완한 것이다. 이 책이 다루는 것은 사회학적 민중론이다.한씨는 70년대 들어 신학자와 문인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돼가던 민중 논의를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가다듬고 체계화했다. 그는 을 통해 민중 논의의 이론적 토대를 만들었다.사회의 하층을 형성하고 있는 객관적 실체로만 규정되던 민중의 개념을, 현실의 모순을 의식하고 그것을 바꾸어 나가는 주체적 실천세력으로 규정한 것이다. 김귀옥 한성대 교수는 “실천적 지식인의 시각으로 기존의 엘리트론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은 이 책은 ‘난쏘공 세대’가 나름의 이론으로 자기무장화할 수 있는 기틀이 됐다”고 평했다.저자는 책의 머리말에서 “교실에서 배우는 사회학 강의나 교과서를 통해서 얻는 건조한 지식으로는 도무지 문제의식을 터득할 수 없었다… 6ㆍ25사변 이후 조국의 분단은 더 여물어지면서 안으로 정치적 부조리, 경제적 불안정, 공동체의 약화, 가치관의 혼란, 대외의존도의 증가, 권위주의 풍토의 만연 등이 우리의 사회를 시들게 하고 있었는데도 우리들로 하여금 이러한 ‘우리의 현상’에 대해서는 눈을 감게 하는 사회학 책들을 주로 읽었던 것이다. 현실적합성 없는 사회학을 배웠던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이 글이 씌어진 70년대 후반은 군사정권의 권위주의가 절정에 달하던 때다. 한완상씨는 “당시 정권은 권력에 대한 정통성을 갖지 못해 국내외에서 민주주의 정부로 평가받지 못했고 그 결핍을 감추려 압축적 경제성장에 매진했다. 그 결과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했고 노동자는 노동수단을 박탈당했다. 또 이를 비판하는 지식인도 무자비하게 탄압당했다”고 말했다.이때 ‘민중’이라는 새로운 범주가 생겨났다. ... 지배집단은 지배질서와 기득이권의 질서에 도전하지 않는 이 잠자는 민중을 계속 잠자도록 교묘하게 통치한다. 반면 대자적 민중은 잠에서 깨어난 민중이다.잠에서 깨어났기에 자의적으로 초롱초롱하고 자기의 모습을 구조와 역사라고 하는 거울에 비춰볼 줄 안다. 대자적 민중은 자의식의 민중이고, 비판적 민중이고, 행동하는 민중이다.그는 지배엘리트에서 지식인을 빼내 민중에 포함시켰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인은 민중의 세계에 무관심하고 지배계급에 기생하는 ‘지식기사’를 포함하지 않는 집단이다. 책에서 그는 “지식인은 비록 그의 과거 경험과 현재 생활의 어떤 부분이 철저한 피지배자의 특징과 다소 어긋난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이 민중이라는 투철한 자의식을 갖고 있다. 통치수단으로부터의 소외를 가장 예리하게 느끼고 있는 대자적 민중이 바로 지식인이다”라고 정의한다.이러한 의 인식, 즉 소외된 민중을 향한 관심과 이들에 대한 지식인의 연대의식을 전면에 내세우는 민중적 인식은 80년대에 들면서 서서히 주류 사회학에 대항하는 대안적 사회학의 기본 인식으로 자리잡아갔다.김귀옥 교수는 “민중은 70년대 우리 사회에선 혁명적인 언어였다. 80년대 중반 사회구성체론 등 계급론이 적극 대두되면서 민중론은 상대적으로 퇴장했고, 90년대 들어 다시 의미를 찾을 수 있었으나 시민사회론 등에 밀려 부각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하지만 민중이란 개념은 여전히 의미있다. 계급론에서 설명할 수 없는 분단의 문제, 최근 문제 되고 있는 청년실업, 비정규직 문제 등을 민중의 개념으로는 함께 감싸안을 수 있다”고 부연했다.■ 한완상 대한적십자사 총재"사회학은 역사현장에서 만들어져야… 실천 않는 지식인은 의미 없다"까맣고 두꺼운 뿔테 속의 눈동자가 지그시 아래를 응시하고, 가볍게 모아진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있는 모습. 표지 뒷면에 실린 저자의 사진은 '고뇌하는 지식인'의 초상이었다.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한완상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차지해온 위치는 매우 크다. ... 그의 활동은 학자로서 이론적인 틀만 만드는데 있지 않았다. 서울대 교수 재직 중 민주화운동으로 두차례 해직과 복직을 겪었고, 1980년 신군부의 김대중 내란사건 조작에 연루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이에 대해 한 총재는 "역사현장에서 만들어지는 사회학이 진정한 사회학이다. 그러다 보니 두 번이나 해직됐다"고 말했다. 그는 "사회과학을 연구한다면 추상적 담론에서 끝나지 않고 지배구조를 바꿀 수 있는 실천적 과제에 자신의 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중립적 학문인 물리학자라도 자기의 이론이 핵폭탄을 만드는데 이용된다면 반대해야 하는 것"이라며 "바람직한 지식인, 대자적 지식인은 실천의 현장에서 떨어질 수 없다. 실천 없는 지식인은 훈고학적 지식인일 뿐이다. 학문이란 인간을 위해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한 총재는 방송통신대 상지대 한성대 등에서 총장을 지냈고 문민정부 때는 부총리 겸 통일원장관, 국민의정부에선 교육부총리를 역임했다. 그는 "학자와 관료로서 직책상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해야 할 일의 목적에선 같았다"고 말했다. 그의 목적이란 "억압받고 소외된 인간의 고통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그는 "통일부총리 시절 분단에서 오는 고통을 어떻게 줄여야 하는가에 매진했다. 이산가족의 고통, 냉전에서 오는 민족의 고통 등 어떻게 그 짐을 덜어줄 수 있을까 고민했다. 당시 북한에 송환했던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씨는 분단에서 오는 인간의 고통을 집약적으로 가지고 있던 대상이었다"고 말했다.1970년대의 민중과 지금의 민중엔 분명 차이가 있다. 한 총재는 "그 당시 정치적 억압, 경제적 수탈, 문화적 차별 하면 명백히 떠오르는 대상들이 있었다. 시위하다 탄압받는 학생, YH 노동자로 대표되는 수탈당하는 노동자 등. 그래서 그들은 민중으로 한데 뭉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20여년이 지난 지금 사회엔 큰 변화가 있었다. 과거 일방적 지배구조에 의해 억압당했던 민초들이 민주화와 정보화 물결이 합쳐진 지금의 시대에선 각기 자기 목소리를 내면서 정치적 주체로 변했다. ... 오히려 어떻게 보면 여당이나 청와대가 정치적 수세에 몰려있는 듯해 보인다"고 말했다.한 총재가 대한적십자사의 수장을 맡은 지 3년째다.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에 대한 그의 철학은 확고하다. 그는 지금 당장의 정치적 통일을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양 체제를 인정하고 협력, 화해해 사실상 통일효과를 누려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북한이 중국 정도 수준으로 발전하고 스스로 개혁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줘야 한다는 주장이다.그는 "이 지원은 퍼주기가 아닌 평화만들기"라며 "분단의 실타래를 풀어나갈 때는 '평화만들기'와 '불구하고'의 논리 즉 선순환의 논리가 필요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증오의 논리로 서로 망하자는 것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한완상1936년 충남 당진 출생1960년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1967년 미국 에모리대 사회학 박사1970년 서울대 문리대 교수1976년 서울대 해직1980년 서울대 복직,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다시 해직1984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로 복직1993년 부총리 겸 통일원장관1994년 방송통신대 총장1999년 상지대 총장2001년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2002년 한성대 총장2004년 대한적십자사 총재▦저서 (1973) (1976) (1977) (1980) (1980) (1992) (2000)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우리 시대의 명저 50] <27>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

2007.07.12 11:48
1970년 11월 13일 22세의 젊은 노동자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치며 서울 청계 6가 평화시장 앞에서 분신 자살한다. 청년의 이름은 전태일. 그는 하루 서너 시간 밖에 잠을 못 자면서 일해야 하는 평화시장 봉제공장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로조건에 항의, 자신의 희망이던 ‘근로기준법’ 책과 함께 생명을 불태웠다. 이 땅에 근로기준법이 최초로 제정된 것은 1953년. 국가의 법이 규정한 하루 8시간 노동을 지키고 이를 초과하는 노동에 대해서 초과근무수당을 지급해야 한다는 내용을, 그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노동자’라는 말을 입 밖에 내기 어렵고 노동의 정당한 대가마저 경제 개발이란 미명 하에 포기하도록 강요했던 개발독재 시대는 이 젊은 노동자의 절규에 귀를 막고 있었다.그러나 다음날 아침 이 사건은 한국일보 사회면 톱기사로 실리면서 한국 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된다. 그의 분신 이후 대학생들과 종교계를 중심으로 노동자들의 노동 현실을 알리려는 움직임이 잇따라 일어나면서 그동안 재갈이 물렸던 노동운동이 들불처럼 번지게 된다.은 평화시장의 청년 노동자 전태일의 짧은 일생을 정리한 책이다. 전태일이 자신의 육신을 불살라 노동자의 현실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다면, 은 전태일이 스스로 노동자로 각성하게 되는 과정과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려 했던 치열한 고민을 세상에 전하려 했다.저자인 조영래의 서울대 법대 친구인 장기표 새정치연대 대표는 이 책이 갖는 현재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 이를 기록한 저자 모두는 시대적 산물입니다. 그동안 전태일의 비범한 삶과 죽음은 70, 80년대 시대적 상황을 반영해 투사로서 강조되었어요. 시대가 변함에 따라 전태일의 사상과 인간적인 면이 부각되면서 젊은 세대들도 쉽게 감동할 수 있는 책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 을 출간한 한철희 돌베개 대표 역시 “최근 전태일은 인간에 대한 억압과 불의의 질서에 침묵하지 않고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 저항한 휴머니스트로서 재조명되고 있다”고 말한다.이처럼 전태일의 삶과 정신에 영속성을 부여한 이는 바로 조영래다. 그는 서울대 법대 재학 당시 학생운동을 함께 했던 장기표를 통해 전태일 분신 사건을 접하게 된다. 장기표는 일찌감치 노학 연대를 통한 사회 변혁을 꿈꾸던 학생운동가로서 전태일의 어머니이소선 여사로부터 전태일의 수기를 전달 받는다.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그는 이 수기를 조영래에게 전달했고, 조영래는 이소선 여사와 전태일의 동료들을 만나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해 을 집필했다.전태일의 분신이 한국 현대사에 끼친 영향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70년대 학생운동권과 종교계가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도록 했고, 노동자들이 민주노동조합을 결성해 생존권 보장을 위한 운동을 실행할 수 있게 해 주었다. 70년대 후반에 일어난 YH사건, 동일방직사건 등도 전태일이 지펴 놓은 노동운동이 꺼지지 않도록 한 노동자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이처럼 전태일의 분신은 70년대 노학연대의 기반을 마련하고 민주노동조합을 탄생시켰지만 그의 정신이 담긴 은 국가 아닌 일본에서 78년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제목으로 처음 나온다. 유신독재 권력의 서슬은 그의 삶과 정신을 담은 책의 존재조차 인정치 않았던 것이다. 국내에는 83년 이란 제목으로 저자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출간됐다.우리 사회가 여전히 억압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출간 이후 판매 금지 조치를 당했지만 은밀한 경로를 통해 책을 접한 대학생, 노동자들의 가슴에 전한 울림은 대단했고, 이는 80년대 민주화와 민중생존권 투쟁에 밑거름 역할을 했다. 저자 조영래의 이름은 91년에야 비로소 밝힐 수 있게 된다.전태일이 산화한 지 37년이 지난 오늘,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이끌어 낸 학생운동, 노동운동의 역할과 그에 대한 평가는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 심지어 대중과 여론의 냉소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은 매년 2만부 가까이 판매될 정도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그 이유는 무엇일까. 노동운동가 이전에 전태일이 가졌던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 때문이다. 어린 소녀들이 빛이 들지도 않고 환기도 되지 않는 비좁은 공간에서 각성제를 먹어가며 장기간 노동에 시달리는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것에서 시작한 그의 노동 운동은, 그 어떤 노동 운동보다 순수하고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는 전태일의 수기는 그의 정신이 시대를 뛰어넘는 생명력을 가지는 이유를 웅변한다.■ 막역지우 장기표씨 회고 인권변호사 활약 故조영래 86년 부천 성고문 변론맡아"조영래는 전태일을 부활시킨 사람입니다. 전태일을 예수에 비유한다면 조영래는 사도 바울이라고 할 수 있죠." 의 저자인 조영래를 장기표(62) 새정치연대 대표는 이렇게 평가했다.1970년 전태일이 분신했을 당시 조영래는 학생운동을 같이 했던 동료들과 달리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장기표로부터 분신 소식을 들은 그는 곧바로 서울대 법대 학생장을 주도하고 시국선언문초안을 작성했다.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학생운동에 대한 열정만은 여전했던 것이다.그는 이듬해 3월 사법시험에 합격하지만 사법연수원 생활을 시작하기도 전에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다. 이 사건으로 막역지우인 장 대표와 함께 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친 조영래는 그 즈음, 장기표로부터 전태일의 수기를 건네 받는다.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장기표는 글 잘 쓰는 조영래에게 집필을 부탁하고, 조영래는 전태일의 생애와 사상을 글로 재구성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 학생운동에 대한 열정, 민중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그가 3년 만에 완성한 원고가 바로 이다.의 저자로 세상에 알려지기 전, 조영래는 83년 시민공익법률사무소를 개소하면서 인권 변호사로서 활약한다. 그가 변론을 맡아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사건에는 84년 '망원동 수재 사건', 85년 '여성 조기정년제 사건', 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89년 '한겨레신문 압수수색 취소청구사건' 등이 있다.이 가운데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공권력의 부도덕성을 만천하에 드러냄으로써 5공화국의 몰락을 재촉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부천공단에 위장 취업한 서울대 제적생 권인숙에게 자행된 성고문 사건에서 조영래는 집요한 변론 끝에 정권이 은폐하려 한 진실을 밝혀낸다. 이 사건은 이듬해 2월 발생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과 함께 87년 6월 민주화 항쟁을 가져온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이처럼 한국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대변혁기에 항상 약자 편에 서서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는데 앞장 섰던 조영래의 행적은, 에서 드러나는 "어려운 이들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전태일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조영래 연보1947년 대구 출생64년 경기고 3학년 재학 당시 한일회담 반대시위 주도로 정학69년 서울대 법대 졸업70년 전태일 분신 사건으로 서울대 법대 학생장 주선 및 시국선언문 초안 작성74~76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집필83년 변호사 개업, 전태일 평전인 출간84~89년 망원동 수재사건, 여성 조기정년제 사건, 부천서 성고문 사건 등 변론 담당90년 폐암으로 사망 주요 저서 , 유고집 등 김회경기자 hermes@hk.co.kr

[우리 시대의 명저 50] <21> 박홍규 전집

2007.05.30 23:31
몇 번을 읽어야 돼”라며 다그치는 모습은 김홍도의 풍속화에나 나올 법한 훈장이 제격.이념 대결, 파편화한 지식 상품, 이 시대의 빅 브라더 인터넷…. 불과 몇 년 사이다. 0 아니면 1이 만들어 내는 매트릭스의 세계에, 또 반성할 줄 모르는 포퓰리즘의 너울에 우리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깊이 연루돼 간다.철학자 고 박홍규 씨의 강의록에는 분명 아날로그 시대의 향수가 짙게 배어 있다. 그러나 고대 철학을 디딤대 삼아 현재와 미래를 논해 가는 풍경은 이 시대가 놓쳐 버린 미덕이 뭔지를 깨닫게 한다.그 장면, 장면을 한 두름으로 쭉 펼친 책이 ‘박홍규 전집’(민음사)이다. 현재 4권까지 나와 있는 이 책은 제 1권 를 기점으로 2ㆍ3권 , 4권 로 이뤄져 있다. 베르그송을 논한 5권 은 출판을 위한 막바지 작업 중이어서, 이 시리즈의 의미가 새삼 새록새록하다.“학생들은 한 문장, 한 단어도 흐리멍덩하게 지나가는 법이 없이 의미가 완벽하게 이해될 때까지 끝까지 파고들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논쟁은 치열했고 대부분의 경우 선생님의 설명으로 결론이 나기는 했지만, 때로는 선생님 자신께서 애매해 하시는 부분도 있었다.” 최화 경희대 철학과 교수가 조만간 나올 제 5권의 서문에서 증언하는 1980년대 말 박홍규 강의실의 풍경이다.하이데거의 난해한 는 책으로 엮어낼 요량으로 진행된 강의를 기록한 것이어서, 한 군데의 둔사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은 거기 비하면 우연적이고 종합적이다. 전집 간행위원회가 “여러 필사본의 윤문 작업과 더불어 필사본을 녹음 테이프와 대조하는 고통스런 작업 그리고 모든 윤문 원고들을 필사본과 대조 검토하고 수정하는 작업”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데는 저간의 사정이 숨어 있다.이 저작은 또 교수평가제라는 실증적 잣대로 교수들의 학문적 성과를 재단하는 요즘의 시각으로 볼 때, ‘서양 철학 소고’ 등 단 6편의 논문 밖에 남기지 않은 고 박 교수는 참으로 큰 스승이었다는 사실을 공표한다. ... 그러한 점에서 책은 이 시대의 이상한 잣대에 대해 근본적 검토를 요청하는 방대한 선언문인 것이다.논문, 강의록, 학생들과의 대화 등 세 형식으로 짜여진 책은 1985~1989년 이뤄진 강연을 일일이 손으로 옮기고 다듬은 결과다. 전라도 토박이 사투리가 심했던 그의 말은 윤문 과정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강의실의 뜨거운 아우라가 손상되지 않았다는 점은 그 전설적 명강을 직접 듣지 못 한 사람들의 아쉬움을 눅이고 남는다.얼른 듣기에는 매우 비현실적일 것 같은 형이상학자이지만, 박 교수가 큰 스승으로 기억되는 것은 ‘철학도 실제 생활과 연계돼야 한다’는 가르침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철학적 소양을 필요로 하는 주제들임에도 불구, 책은 대화의 묘미가 살아 있다. 특히 전집 3권인 는 일반인들에게 가장 넓은 길을 열어두고 있다.그 강의의 매력은 자신의 실제적 체험과 철학을 연계해 흥미를 유발해 내는 방식에 있다. “내 체험을 좀 얘기 해야겠는데, 왜냐하면 나는 전쟁을 두 번이나 겪었으니까.플라톤 철학을 우리가 하나하나 느끼(feeling)면서 읽어야 해.…(중략) 나는 전쟁 시대에 살았지만…(후략)” 그의 철학은 언제나 선명했고, 철학적으로 실재적이었다. 2권에서 밝히는 대로 “철학이란 피와 살을 갖고 있으며, 정신을 소유한 인간의 산물이며 그러한 인간은 사회적이며 역사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204쪽)철학이라는 고도의 추상 작업을 통해 맺어진 사제 관계였지만, 그 저류에는 서로에 대한 굳건한 신뢰감이 있었다. 5권은 이렇게 쓴다. “강의가 끝난 토요일 저녁마다 관악구청 맞은편 에 모여 그날의 강의 내용을 다시 한 번 곱씹으며 파전과 막걸리로 토론을 벌이던 찬란한 젊음의 기억이 생생하다.그것은 정녕 우리 시대, ‘Deux Magots’였다.” 1920년대 프랑스에서 실존주의 작가들이 모이던 아지트처럼, 그의 강의실에는 굳건한 연대감이 넘쳐 있었다.박 교수는 플라톤과 베르그송을 통해 형이상학의 원리를 파악했다. 세계적으로 비근한 예를 찾기 힘들다. ... 학생들은 그의 진지한 철학을 곧 현실에 대한 언급으로 받아 들였다. 꿈 현상, 미개인의 인지와 성정, 희랍 신화 등 기존의 철학계에서 소홀하기 일쑤였던 주제들이 진지한 철학의 대상으로 탐구되기 시작한 것은 그 덕분이다.인간의 가치와 총체성을 지고의 가치로 삼은 희랍 철학은 우리 시대를 반성케 한다. 영혼의 양식을 도시에서 도시로 끌고 다니면서 도매하거나 소매하는 사람도, 수단도 무한 증식해 가는 시대다. 이런 때, 다음과 같은 말은 어떻게 들릴까. “타인에게 해독을 끼치고 자기 이익만을 취함으로써 도시 국가의 사람을 파멸로 이끄는 파렴치한 사람들.” 1권 61쪽의 중 한 대목이다.그런 사람들이 차고 넘쳐 나는 이 시대지만 고대 그리스에도 비슷한 유형의 인간들이 있어 철인 소크라테스의 통박을 받았다. 우리의 철학적 거두는 질박한 전라도 사투리를 섞어 가며 전해 줬고, 당시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명강을 녹취하던 학생들은 한국 철학의 스승이 됐고, 육성을 문자로 풀어 냈다.하이데거의 이 강의록집이었다가 현대 철학의 대표적 저작으로 변한 것과 유사한 이치다. 단, 하이데거의 저작이 책을 염두에 둔 계획적 강의의 결과라면, ‘박홍규 전집’은 책을 염두에 두지 않은 강의였다. 거의 희곡을 방불케 하는 놀랍도록 생생한 대화가 활자화한 것은 그래서다.이태수 김남두(서울대) 양문흠(동국대) 기종석(건국대) 박희영(외국어대) 이정호(방송통신대) 최우원(부산대) 염수균(조선대) 최화(경희대) 강상진(목포대) 교수 등 대학 철학과를 비롯해 철학과 실제를 긴밀히 이어주는 철학자들이 그의 제자다. 생활 속의 철학하기 쪽에 열정을 쏟는 윤구병(변산공동체 대표) 이정호(정암학당장) 등은 그의 또 다른 면을 잇고 있다.철학이라는 이름을 건 고답적 회합이 아니라, 총체적 진리를 찾아 나선 일군의 용사들. 서로에 대한 신뢰와 절대적 허락만이 이뤄 낼 수 있는, 진정 열려진 그 공동체의 수장이 박홍규 선생이다. ... ▲약력1919년 광주 출생1937년 일본 와세다대학 제일고등학교 입학1940년 와세다대학 영문과 입학, 1년 뒤 철학과에 재입학1945년 경성치대 전임 강사1946년 서울대 문리대 강사, 철학과 교수1984년 정년 퇴임1986년 한국서양고전학회 창립1994년 별세●제자 최화 교수 5권 작업“세배하러 간 어느날 공부한다고 문전박대”윤문, 녹음 테이프와의 대조, 최종 정리 등 원시적 수작업을 일일이 수행하고 거기에 최종 OK 사인을 낸 주인공이 바로 최화 교수다. 달리 말하면 대스승의 육성과 영기를 직접 접할 수 있었던, 운 좋은 학생이었다.현재 박홍규 전집 제 5권 간행의 막바지 작업에 분주한 최 교수는 “술, 담배 않고 공부만 하던 분이었다”며 “여행 갈 계획을 세우시던 마지막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스승을 기억했다. 1994년 3월 숨을 거두기까지 박 교수는 간경화증 말기로 3개월째 병고를 치르고 있었고, 최 교수는 교대로 스승의 병상을 지키던 제자 중 하나였다.서울대 법대생으로 철학에 뜻을 품던 그를 돈오돈수케 한 계기가 선생의 강의였다. “하이데거를 공부하던 중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이게 진짜 철학이라고 무릎을 탁 쳤어요.” 독사(doxaㆍ자기류의 견해)가 아닌, 에피스테메(epistemeㆍ인식)로서의 철학이 눈앞에 현현하던 순간을 그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한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형이상학자시죠.”1980년대 어느 정초, 세배하러 과천의 자택에 갔더니 “공부한다”며 들여 보내주지 않은 적도 있다고 그는 전했다. “당시 건강이 안 좋으셔서, 선생님께 공부 시간이란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있던 저희들은 오히려 흐뭇했어요.” 차츰 스승의 또 다른 면모들도 알게 됐다.“4ㆍ19 때 교수 데모단의 일원이셨죠. 저술 작업보다 제자 키우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셨어요. 마치 플라톤처럼.” ... 한국프랑스철학회 총무이사이기도 한 최 교수는 “세계적 철학 명품, 한국에는 빅홍규 선생이 계신다”며 크게 웃었다.강의를 특정 주제에 국한하지 않고 세계를 총체적으로 논한 강의는 “선생이 돌아가신 뒤는 없다”며 최 교수는 스승의 스러짐을 아쉬워 했다.장병욱기자 aje@hk.co.kr

[우리 시대의 명저 50] <11> 김용준 ‘조선미술대요’

2007.03.14 23:37
*“우리미술은 석기시대부터” 일제가 덧칠한 왜곡 걷어내*석기시대~당대까지 시대별 체계적 정리빼어난 문장력, 수필체 서술 원형을 제시*“우리 미술사 대중화 새 기틀 마련” 평가요즘은 미술사 책이 참 많다. 우리 미술의 역사나 가치를 알기 쉽게 소개해 교양서로 잘 팔리는 책도 여럿 된다.하지만 반 세기 전 우리 땅에서 우리 손으로 쓴 우리 미술사 책을 만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우리 미술사는 일본인들이 조사ㆍ연구ㆍ정리해서 체계를 세우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자연히 왜곡과 폄하가 따랐다. 일제 어용 학자 세키노 타다시의 가 대표적이다. 김용준은 이를 부끄럽게 여겼다.는 1949년 처음 나왔다. 새 나라의 기틀조차 제대로 잡히기 전, 모든 것이 열악하던 그 시절, 이 책이 나옴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우리 손으로 써서 대중이 널리 읽는 우리 미술사 책을 갖게 되었다.이에 앞서 해방 직후인 1946년 윤희순의 가 나왔지만, 대중이 읽기엔 딱딱한 책이었다. 김용준과 동년배로 미술사를 전공한 고유섭은 일제시대에 많은 논문을 써서 한국미술사 연구의 토대를 닦았다. 한국 미술사의 서화를 총정리한 오세창의 (1928)도 일제시대에 나온 역저다.를 쓸 때만 해도 김용준은 그림 그리고 골동 취미를 즐기고 평론을 쓰는 사람이지, 전문적인 미술사가는 아니었다.그런데도 나서게 된 이유는 두 가지, 미술 방면 책이 너무 없으니 문외한이나 중학교 상급생이 읽을 만한 계몽 정도의 조선미술사를 써보라는 출판사의 권유를 받았고, 남의 나라 미술을 배워온 사람으로서 내 나라 미술 공부 좀 해보자는 생각에서라고 한다. 스스로 서문에 밝히기를 ‘자신의 무지를 폭로할 각오로 보고 느낀 대로 이야기하듯 썼다’며, ‘후학이 격분해서 더 좋은 책을 내놓기를 바란다’고 했다.이 책은 멀리 석기시대부터 삼국,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까지 시대별 우리나라 미술의 성격과 특징을 건축ㆍ조각ㆍ서화ㆍ공예의 순서로 짚고 있다. ... 김용준 당대인 일제시대와 해방 직후의 미술도 간략하게나마 다루고 있다.반 세기 전에 나온 이 책을 읽는 오늘의 독자들에게 가장 큰 즐거움은 지은이의 글 솜씨와 안목일 것이다. 단순히 지식으로서 미술사를 전하는 건 그의 목적이 아니었다.그보다는 ‘우리가 보고 느끼는 미술품이 왜 아름다우며 어떠한 환경에서 그렇게 만들어졌는가 하는 점을 밝히려고’ 애썼다. 잘 알려진 수필집 에서 보듯 그의 문장력은 매우 탁월해서 그러한 의도를 전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석굴암 본존불을 다룬 대목을 잠시 읽어보자.‘그야말로 그린 듯한 눈썹과 고요하게 내려 뜬 봉안(鳳顔)과, 알맞은 코와 끝없이 예쁜 입술과, 볼록한 두 턱과 연잎 같은 길다란 귀와, 풍만한 두 볼과 탄력성 있는 어깨와 가슴과 좌우 팔이며, 손끝 발끝까지 어느 한 부분 혈관이 아니 통한 곳이 없으며, 따뜻한 피가 돌고 있는 파동을 느끼지 않는 곳이 없다.부드러운 살결이, 만지면 따뜻한 것 같고 혈관이 뛰는 것 같고 그 속에 장대한 근골(筋骨)이 숨어 있는 것 같아서 이 석불은 조각이란 이름을 붙였으되 완전한 한 인격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는 것 같다.’맛깔스럽고 품위있는 문장과 더불어 명쾌한 표현도 읽는 맛을 더 한다. ... ‘패기로 일관된 고구려 미술, 웅혼하고 비약적인 신라의 미술, 화려하고 명랑한 백제의 미술, 그 모든 요소를 종합한 황금시대 통일신라의 미술, 섬약하나마 우미하고 애련하나마 미의 전당에서 떠날 날이 없었던 고려의 미술, 실질적이고 현실적이며 소박하고도 묵중하며 평민적인 조선의 유교미술’이라는 서술은 우리 미술의 시대별 특징을 제대로 추려낸 표현이 아닐 수 없다.이 책의 학문적 성과와 한계에 대해서는 2004년 인물미술사학회(회장 윤범모)가 연 근원 김용준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박은순 덕성여대 교수가 발표한 바 있다.박 교수는 가 우리나라 미술을 보는 기준과 한국미의 성격, 미술품에 대한 깊은 이해와 탁월한 해석력, 뛰어난 논객다운 설득력 있는 서술로 한국미술사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평했다. 그는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성과 중 하나로 한국미술사의 시작을 석기시대로 올려놓은 점을 꼽았다.일제 어용학자들이 조선미술사의 시작을 낙랑시대로 잡아 식민사관을 반영했던 것과 달리 당시로선 고고학의 영역이라 치부되던 석기시대를 제시함으로써 민족의 기원과 문화의 계통을 새롭게 보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것이다.한국미술의 성격과 특징을 긍정적ㆍ적극적으로 해석한 점, 우리 문화와 미술의 형성 과정에 외국과의 교류를 인정하고 그 양상을 비교하는 비교미술사학적 방법을 택한 것, 구수하면서도 느긋하고 정감어린 문체로 이후 이동주 최순우 유홍준 등으로 이어지는 수殼?미술사 서술 방식의 원형을 제시한 점도 성과라고 평가했다.반면 기후나 지리, 풍토를 미술의 특징과 결부하는 전형성, 일제 관학이 펴낸 자료 를 1차 자료로 쓴 점, 조선시대 미술을 소홀히 다룬 점 등은 시대적 한계를 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는 2001년 출판사 열화당이 김용준 전집(총 5권)의 제 2권으로 다시 펴냈다. 당시 전집을 기획한 미술평론가 최열은 의 가치를 이렇게 요약한다. ... ‘일제시대부터 이뤄진 한국미술사 연구 성과의 총화, 우리 미술사의 관점을 새롭게 한 기점, 그리고 미술사 대중화의 출발점’ 이라고. 그는 무엇보다 “근원 자신의 통찰력과 안목, 감각에 빼어난 문장력까지 갖춰 쓴 것이 놀랍다”고 말한다.▲ 연보1904년 경북 선산 출생. 동양화가 겸 미술평론가, 한국미술사학자. 호는 근원(近園) 선부(善夫) 검려(黔驢) 우산(牛山) 노시산방주인(老枾山房主人). 1925년 경성중앙고보, 1931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 졸. 1946년 서울대 동양화가 교수, 1948년 동국대 교수로 있다가 1950년 9월 월북. 북한에서 조선미술가동맹 조선화분과위원장, 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다 1967년 사망. 저서는 (1948) (1949) (1958) 등. 회화 작품으로 수묵채색화 (1957) 등 다수.■그림·저서초판본·사진자료 등 타계 40주기 맞아 전시회도김용준이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40년이 됐다. 2001년 다섯 권의 김용준 전집을 펴냈던 출판사 열화당은 김용준 타계 40주기를 맞아 김용준을 소개하는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5월 파주출판단지의 열화당 사옥에서 열리는 이 전시는 김용준이 그린 그림과 그가 장정한 일제시대 책들, 그가 쓴 책들의 초판, 사진 자료 등을 내보일 예정이다.김용준은 의 서문에서 밝혔듯 본래 미술 작가를 꿈꿨다. 유화로 출발해서 일본 유학시절 동양화로 돌아간 그는 문인화 전통을 사랑했고 직접 그림을 그렸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북으로 가서 미술사를 연구하면서 그림도 계속 그려서 1958년 '공화국 창건 10주년 경축 국가 미술 전람회'에 를 출품해 2등을 하기도 했다.이번 전시에 나올 김용준의 그림은 약 10점. 그의 그림은 그와 절친했던 화가 수화 김환기의 작품과 함께 1996년 환기미술관의 전에서 한 번 선보인 적이 있다.일제시대 화단의 최고 논객으로서 맹활약했던 그는 직접 장정가로도 유명했다. ...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의 청록파 시집 , 김동리의 소설 , 정지용의 시집 등 일제시대에 나온 당대 최고 시인과 소설가의 책을 그가 장정했다. 절친한 친구였던 이태준의 소설집 , 홍명희의 소설 , 신채호의 , 박두진의 시집 , 염상섭의 소설 , 프롤레타리아 문학 이론가로 이름 높은 임화의 등도 그의 손길을 거쳤다. 등 김용준 저작의 초판본도 이 전시에 나온다. 북한에서 쓴 노작 는 초판 원본을 구하지 못해 복제본을 선보일 계획이다.오미환 기자 mhoh@hk.co.kr

[우리 시대의 명저 50] <10> 정민의 '한시 미학 산책'

2007.03.07 23:37
현대의 서정으로 律의 기품을 품다“시대와 코드 맞춘 게 인기 요인인 듯”정민(46)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의 (솔 출판사)은 전문 연구자들도 결코 만만히 접근할 수 없는 두개의 주제를 일반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다룬 교양예술서다.한시를 짓는 전문 시인이 더 이상 배출되지 않고, 한시에 대한 관심이 그저 회고나 호사 취미로 여겨지는 풍토를 생각하면 1996년 7월 첫 출판된 이 책이 20쇄나 인쇄됐다는 사실은 일종의 ‘문화현상’으로 불러도 될 만하다.은 동아시아의 한시 이론을 빌려 중국과 한국 한시를 주제, 형식, 작법에 따라 24개의 테마로 분석한 책이다. 중국의 두보, 이백은 물론이고 신라의 최치원, 고려의 정지상 등 국문학사를 장식한 대시인의 작품과, 계몽기의 언문풍월 등을 포함해 소재의 공간적ㆍ시간적 스펙트럼이 광대하다.출간된 지 11년이나 지났지만 전적(典籍)의 먼지 속에 파묻혀 있던 한시에 현대적 감각을 입혀 대중에게 가깝게 다가간 책으로 이보다 더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찾기가 쉽지 않다. 책의 대중적 인기에 힘입어 정민 교수는 2002년 의 청소년 버전인 를 출간하기도 했다. 등 그가 쏟아낸 엄청난 분량의 저작들은 대부분 대중과의 ‘소통’을 염두에 둔 글이다. 그러나 그를 이른바 ‘대중적인 한문학자’로 자리매김한 책은 역시 이다. 이 책은 애초 고급 독자인 시인이나 시인 지망생을 겨냥한 것이다.그 계기는 우연했다. 93년 12월 의 정진규 주간이 젊은 연구자였던 정민 교수에게 ‘옛 시인들의 한시 쓰기’에 대한 원고를 청탁한 것이 인연이 됐다. 큰 부담 없이 글을 썼지만 지면에 발표되자 박희진 유안진 같은 중견 시인들이 “도대체 정모 라는 사람이 누구냐?” “폴 발레리의 시 이론들보다 훌륭하다”며 관심을 나타냈다.‘시학’이라면 자동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을 연상하던 시인들에게 연암이나 이규보의 이론을 통해 시를 설명하는 그의 방식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 그런데 당시에는 어떤 시인도 그 부분에 주목하지 않았다.”그는 시인독자의 성원에 힘입어 94년 2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에 한시론을 연재했고 이 글들을 517쪽 분량의 단행본으로 묶어 을 냈다.연재기간 동안 매달 원고지 70~80매 분량의 원고를 쓰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박사과정을 밟으며 등 한국 문집 30여종의 대표적 시화와 시 이론을 직접 뽑아 (아세아문화사, 1988)을 편찬했던 경험이 노작(勞作)의 원동력이 됐다고 그는 말한다.대중적 성과 뿐 아니라 한시를 미학적 관점으로 분석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당시 한문학계는 다른 분야처럼 80년대의 자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 리얼리즘 이론으로 작품을 분석하는 연구가 지배적이었다.예컨대 다산의 애민시나 농민시, 현실문제를 다룬 위항인(중인)들의 한시를 분석한 연구가 넘쳐 났지만 미학적으로 분석한 논문은 드물었다.‘이데올로기만 남아있고 아름다움을 논하지 않는’ 당시 문학 담론에 대한 그의 염증(厭症)은 깊어졌고 이는 곧 새로운 미학이론에 대한 갈증으로 이어졌다.그가 대학원에서 조선의 두보라 부를 정도로 화려한 시풍을 자랑하던 권필의 시세계를 다룬 논문을 썼고, 한때는 대학 문학동아리에 몸담았던 시인 지망생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의 탄생은 자연스러운 결과 였는지도 모른다.딱딱한 이론서 스타일이었다면, 이 책이 다룬 한시 이론을 일반인이 이해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예컨대 마음 속에 일어나는 감흥(情)과 사물(景)을 결합시키는 기법인 ‘정경(情景)이론’만 하더라도, 경을 보고 정을 일으키는 정수경생(情隨景生), 정을 머금어 경에 투사하는 이정입경(移情入景), 둘의 선후를 구분하지 않는 정경교융(情景交融) 등 복잡하게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 그러나 “이 책을 내고서야 비로소 대중과 소통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는 그의 고백처럼 ‘친절함’은 이 책이 가진 지고의 미덕이다.편안한 문장, 개인적인 경험을 사례로 설명하기 등 대중에게 다가가는 글쓰기 방식은 인문학 교양서의 전범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다. 물론 기술의 엄정성을 요구하는 보수적인 학계는 그의 ‘발랄한 글쓰기’를 불편해 했고, 그가 새로운 이론적 분석틀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비판?존재했다.그러나 “한시 이야기만으로 대중 독자에게 고전의 가치를 재인식 시키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한시는 한 글자 한 글자 유장한 함축미를 품고 있기 때문에 조금만 잘못 읽어도 오독하기 십상이다.일반인이 한시를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러나 풍부한 문학적 상상력이 대중과 한시를 얼마나 가깝게 만들어 주는가를 증명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가 돋보인다. 예를 들어 연인에게 버림받은 여인의 쓸쓸한 내면풍경을 가을 밤의 정경에 빗댄 두목(杜牧)의 이라는 한시에 대한 해설을 읽어보자. ‘홀로 지새는 깊은 가을밤, 달마저 져버린 창가로 반딧불이 날아다닌다. 옛 사람은 풀이 썩어서 반딧불이 된다고 믿었다.반딧불은 황폐한 풀 덤불에서 날아다니는 것인데, 그 반딧불이 그녀의 창가를 날고 있으니 그녀의 거처가 얼마나 황폐하고 황량한지를 알 수 있겠다. 님이 찾지 않으니 그 꽃밭엔 잡초만 우거져 있을 것이다. 또 그녀는 반딧불을 부채로 후려침으로써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드는 처량함과 황량함을 “저리가!” 하며 몰아내려 안간힘을 쓰는 듯하다…’ 그 자체로 문학적 완결성을 지니는 문장이다.정민 교수가 꾸준히 제기한 ‘고전의 현재적 가치란 무엇일까’라는 문제의식은 이미 이 책에서 단초가 드러난다.조선말 김 삿갓이 선보인 파격시를 80년대를 풍미한 일군의 해체시와 비교하는 대목이 그렇다. ... 저자는 고약한 시골훈장을 기롱한 김 삿갓의 시에 대해 ‘언어에 대한 일말의 애정도 찾아볼 수 없다’고 일갈하는데 이는 80년대를 풍미한 일부 해체주의 시에 대한 비판과 맞닿아있다.무질서한 세계, 파편화한 세계를 그대로 수용하는 유희적인 해체시가 김 삿갓의 밀도 낮은 기롱시와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되묻고 있는데 이는 고전의 해석방식을 현대에 적용한들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반문과도 같다.정민 교수는 올 하반기에 개정판을 펴낼 계획이다. 을지문덕에서 구한말까지의 오언절구 300수와 칠언절구 300수를 엮은 과 함께 개정판을 선보이겠다는 것이다. 한시미학에 대한 이론과 실재가 완결된다는 의미에서 의 재탄생이 갖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정민 프로필 1961년 충북 영동출생.1983년 한양대 국문학과 졸업.1991년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2001년 한국18세기학회 부회장저서 등■"시대의 코드와 호흡했기 때문이겠지요."을 통해 대중독자를 위한 '소통의 글쓰기'를 선보인 정민 교수는 이 책의 성공요인으로 '시대코드'를 꼽았다. '한 편의 훌륭한 시는 독자를 느껴서 알게 할 뿐, 따져서 납득시키려 하지 않는다.' '무언가 꼬집어 말하려 하면 사라져버리는 느낌, 분명히 있기는 있는데 잡을 수 없는 그 무엇을 노래하는 것이 시'… 문장 하나하나마다 '시의 미감적 원리'에 대한 젊은 문학도의 고뇌의 흔적이 역력하다.그가 이 책을 쓴 90년대 초는 이데올로기가 종언을 고하던 시기다. 개인적으로도 이데올로기가 문학의 본령이 될 수 없다는 신념을 굳힌 때였고 사람들도 박노해 대신 도종환과 이해인을 찾기 시작했다. ... 한시를 통해 시의 미학적 원리를 진지하게 탐구한 이 책이 신선한 울림을 줄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시대적 상황 때문이라는 설명이다.정민 교수는 당시만 해도 학계에서 금기시됐던 자유로운 글쓰기가 좋은 평가를 받은 것도 '시대와 소통했기 때문' 이라고 설명했다.그는 "우리가 어릴 때는 삼국지라면 오직 박종화의 삼국지를 의미했지만 지금은 이문열이나 장정일의 방식이 아니라면 읽어낼 사람이 없을 것"이라며 "시대가 바뀌면 글 쓰는 방식이 바뀌어야 하는데 이 책을 쓰면서 비로소 그 문제를 민감하게 인식하게 됐다"고 부연했다.지금은 문화의 영역으로 관심사가 바뀌었지만 정 교수에게 이 책은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찼던 젊은 날의 초상 같은 것이다. 그는 "지금도 시인들이 책을 잘 읽었다며 시집을 보내주곤 한다"며 "소통의 즐거움으로 글쓰기의 과정 자체를 즐기던 그 때를 결코 잊을 수 없다"며 껄껄 웃었다.이왕구기자 fab4@hk.co.kr

[우리 시대의 명저 50] <9> 김윤식·김현 공저 '한국문학사'

2007.03.05 02:05
모자이크화는 작고도 이질적인 단위의 점으로 구성돼 있다. 감상자의 시야가 넓어질수록 그 화소(畵素)들은 한 편의 그림에 충실히 복무한다. 완전히 다른 생명체로 거듭나는 것이다.(민음사)는 견실한 모자이크화다. 김윤식과 김현이라는 빼어난 화가들이 함께 모사해 낸 한국 문학 전도(全圖)다. 그 두 사람이 각각 어느 대목을 서술했는지, 절(節) 단위까지 서문에 명시돼 있긴 하다. 그러나 독자는 읽어가다 보면 한 사람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두 사람이 교직해 가며 한 목소리를 내는 모습은 우리 학술사가 일궈낸 아름다운 풍경이다.1973년 1판이 선보인 뒤 96년 29쇄로 1판은 마감하고, 다시 그 해에 개정판의 시대로 돌입했다. 여느 개정 작업처럼 내용에 대한 수정이 아니라, 한문 투의 문장을 시대에 맞게 업그레이드하는 작업이었다.‘초판이 곧 정본’이라는 완벽주의적 신념 혹은 염결성(廉潔性) 덕에 책은 전국 대학의 국문과 120여 곳에서 여전히 교재로 쓰이는 등 그 의미를 확인해 왔다. 임화 - 백철 - 박영희 - 조연현 등 선구적 학자들의 맥을 잇되, 여전히 현장 교육에서 애용된다는 점에서 새삼 돋보이는 결과물이다.책은 대단한 자의식, 또는 자긍심의 소산이다. 우리 역사의 운명 혹은 질곡이었던 주변 문화성을 문학적으로 극복한다는 목적의 소산이었다. 한국 문학사 고유의 개별적 추진력을 모색하는 한편 한국 근대사의 추진력이 무엇이었는가를 철학적 면에서 바라보자는 의지의 소산이었다.자칫 생각만 웃자랄 수도 있었을 테지만, 수많은 토론과 세미나가 빈 틈을 촘촘히 메워주었다. 두 사람 사이의 굳건한 합치점 덕택이었다. ... 문학사란 역사와 다르게 예외적 개인에 관심을 쏟지만, 결국 당대 특정 계급의 무의식적 기반을 보여주는 상상적ㆍ풍속적 전거라는 것이다.책은 서세동점의 위기의식이 그와 짝을 이루던 당시, 의식을 혁파하고자 한 박지원의 와 김삿갓의 시를 통해 혁명까지 나아가지 못한 그들의 한계부터 논한다.권력 구조의 밖에 서 있는 지식인의 쓰디쓴 자기 반성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직접적으로는 19세기말 조선이 서구의 충격에 의해 국가 상실의 위기에 직면할 때, 부자 중심의 가족 관계가 역기능일 따름이었으며, 이후 이광수의 자유연애론과 이상의 가족 콤플렉스 등으로 연결된다는 지적이다.그러나 적극적 의미가 있다면 시조, 판소리, 가면극 등 민중적 예술 양식이었다. 개화기의 표면적 혹은 포괄적 현상을 풍속 혹은 유행의 차원에서 가장 잘 드러낸 양식, 연극은 그 적자였다.책의 문제 의식은 철저하다. 난세 혹은 전환기에서 진정한 역량은 어디 있는가에 맞춰져 있다.한국 문화가 중국 문화권의 말단 주변인가 혹은 중간 문화권인가 하는 논란, 문화 수용에서 나타나는 엘리트와 민중 간의 편차 등 역사의 동인에 대한 철저한 자의식이 문학 작품의 형식을 통해 간단 없이 확인된다. 유길준이 탁월한 언어 감각에도 불구, 국한문 혼용체에 머문 것은 신분 사상과 평등 사상이 공존해 있었던 내적 갈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또 역사 의식이 결여돼 있던 이광수는 작품상에서 혁신적 개념과 보수적 사고 관례가 무반성적으로 공서(共棲)하는 우를 피하지 못했다. 소월은 창가 리듬에서 벗어나 새 운율을 찾는 노력을 보여주었으나, 절대에의 탐구를 포기했기 때문에 결국 새로운 민요 이상이 되지 못했다.개인과 사회를 발견한 것은 염상섭 최서해 김동인 현진건에 이르러서 였다. 서울 중류 계급의 어휘량. ... 중인층의 현실 감각을 섬세하게 용해한 염상섭은 계급 해방 운동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조선적인 것의 탐구(궁극적으로는 해방)가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벗어나지 못했다.그러나 테러리스트의 묘사는 한국 소설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탁월하며, 특히 는 채만식의 와 함께 식민치하 작품 중 최상급에 속한다.자신은 개량주의적 입장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다같이 흡수하려 했지만, 그러한 태도가 실제 문학화 하지 못한 점은 염상섭의 유일한 한계다. 이와 반대로 김동인은 계급 문학이 있다면 계급 빵, 계급 음료수도 있는 것이냐며 치기 어린 절규를 해보았지만 퇴폐적 정서로 자신의 이상주의를 오염시키고 말았다.한편 이상은 ‘태도의 희극’이라는 문학적 주제를 극한에 이르기까지 몰고 간 식민지 시대 유일의 작가다. 자신이 속한 사회와 그 사회가 만들어 놓은 금기 체계, 그 금기 체계 내에서 생존하지 않을 수 없는 일상인들을 그는 다같이 부정했다. 그의 주인공들은 결사적인 자기 폐쇄에도 불구하고 사회와 은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아무리 폐쇄적인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는 사회와 은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잔인한 관계를 철저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상은 부정적인 자기 폐쇄를 통해 정당하게 사회와의 통로를 차단당한 인간의 파산을 여실히 보여준다.격한 직설체, 센티멘털한 열정의 작가 임화는 한국 문학사를 서구 문학이나 일본 문학과의 연관 아래 비교문학적으로 다루려 했으나 방법적으로 실패는 예정돼 있었다. 이상 채만식 박태원 김유정 같은 탁월한 작가들은 현실과의 치열한 투쟁을 작품화했고 이태준 김남천 등은 페이소스, 시니시즘, 유머 등의 수단을 통해 작품을 완성했다.박태원이, 식민 치하의 가난을 극복할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자유 연애를 은근히 주장하는 것은 서울 서민층의 폐쇄성과 칩거성을 그것으로나마 극복해 보려는 조그만 의지의 소산으로 읽힌다. ... 단, 콤마의 적절한 사용으로 감각적 탄력성을 획득했다는 점, 지적인 재치와 심리주의로 요약되는 다양한 실험 정신은 높이 살만한 작가다.한국어 훈련이란 관점에서 주목되는 시인들이 있다. 감정의 절제를 가능한 한도까지 감행해 본 한국 최초의 시인 정지용, 일제 식민 치하 후반기에 민족주의적 시를 당당히 쓴 ‘기적’을 보여준 윤동주, 일본 리듬인 7ㆍ5조로 기울기 일쑤인 정형시를 새 차원으로 격상해 시조를 현대시의 한 장르로 확고히 자리잡게 한 이병기, 시에 회화성을 도입해 끝까지 밀고 간 김광균, 자폐적 리리시즘의 김영랑 등.해방 공간과 그 이후의 한국 소설은 만주의 대서사시를 쓴 안수길, 낭만주의적 현실 인식의 황순원, 휴머니즘의 기수 김동리, 도회 취미를 띤 과장적 자기 고백의 손창섭, 뿌리 뽑힌 인간을 탐구한 소외 문학의 최인훈 등으로 요약된다.시로는 진실 탐구로서의 언어와 불교적 인생관을 천착한 서정주, 메시아를 열망한 박두진, 무의미의 미학을 추구한 김춘수, 소시민의 자기 확인과 항의의 김수영. 소멸의 시학을 추구한 고은, 실험의 작가 박목월 등을 주목한다.조선조 후기에서 1960년대에 이르는 한국 문학을 조감한 책의 말미. 책은 해방 공간의 이데올로기 문제란 결코 간단치 않음을 다시 상기시키고, 대미 관계와 4ㆍ19의 재해석, 작가들의 전기 연구, 나아가 지성사와 병행하는 문학 연구를 갈망하며 화룡점정에 대신한다."김현과 독립 운동 하듯 밤샘 토론"김윤식 교수 "지금도 그의 의견 듣고 싶어""내가 지금 읽어봐도 명문이네. (지금껏 판을 바꿔 오면서도) 한 자도 안 고쳤네…." 서문을 읽어 가던 김윤식(71ㆍ서울대 명예 교수) 씨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웃음기가 감돈다.34년 세월을 변함없이 이어 온 초판의 서문은 이른바 인문학의 위기라는 이 시대를 예감하기라도 한 듯, 비장미마저 감돈다. '문학에 대한 경멸과 백수(白手)에 대한 조소가 그 어느 때보다도 깊어져 가고 있어 보이는 지금, 인간 정신의 가장 치열한 작업장인 문학을 지킨다는 것은….'" ... 당대의 시대적 과제였던 식민사관 극복 작업에서 국사ㆍ국문학자의 자부심은 대단했어요. 독립 운동한다는 심정이었으니까." 당시 김현씨와 밤 새가며 토론했던 문건이 서울대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던 양안(量案ㆍ토지 대장)이었다. 사조나 문단의 흐름이 아니라 사회경제사에 토대를 둔 '과학적 문학사'라는, 미증유의 길은 그렇게 트였다."이 책은 전적으로 민족주의적이에요. 문학의 독자성에 대한 고찰이 없다는 게 최대의 약점이랄 수 있을 정도로." 일제와 미군정하 국민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그와, 4ㆍ19 세대인 김현에게 근대화라는 화두는 지고의 이슈였다. 시대 정신에 충실했던 책에 대한 수요는 출간 2, 3년 만에 급상승했다.내용뿐 아니라, 인세도 한 해씩 번갈아 지급 받을 정도로 이 책을 정확히 공동 소유하는 김현씨. 집필 당시 그와 함께 펼쳤던 풍경은 우리 지성사의 아름다운 순간으로 기억된다. "연구실, 술집 가리지 않고 벌어졌던 토론이었죠. 문학은 물론 경제학, 사회학자들까지 참석했던."그러나 책의 또 다른 자아(alter ego) 김현의 부재는 그의 가슴을 무겁게 한다. "후배지만 배울 게 많았어요. 아주 작은 원고지에다 늘 글을 쓰고 있었죠. 풍부한 인간성에, 섬세하면서 자상했었는데…." 공조자 김현은 그의 의식 속에 현존하는 듯 했다. "지금껏 얘기들은 김현의 말이 빠진, 내 개인의 생각이므로 부분에 불과해요. 사실 나로서도 그의 의견이 매우 궁금합니다." 김윤식1936년 경남 진영 출생, 서울대 국어과 졸업1975년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2001년 명지대 국어국문학과 석좌교수주요 저작 , , 등김현1942년 전남 진도 출생, 서울대 불문과 졸업1986년 서울대 불문학과 교수1990년 작고주요 저작 , , 등장병욱 기자 aje@hk.co.kr

[우리 시대의 명저 50] <5> 조성오의 '철학에세이'

2007.01.31 23:40
본질과 현상이 다를 수 있다는 이 그림을,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30대 후반 혹은 40대 초ㆍ중반의 독자라면 어디에선가 보았을지 모르겠다. 이 그림을 담은 책, 바로 에서 말이다.는, 어렵고 골치 아프다는 철학을, 제목처럼 쉽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식 철학책이다. 적절한 사례와 쉬운 용어, 적당한 삽화와 경어체 문장이, 부담 없는 대중 철학서를 만들었다. 그러나 200쪽이 조금 넘는 이 작은 책은, 1970년대 리영희 교수의 가 그랬던 것처럼, 80년대의 젊은 독자에
==

[박광희 기자의 책갈피] '미학 오디세이'의 저자 진중권

2009.09.06 23:42
한국일보 문화부는 학문적 의미와 완성도, 지식대중화의 기여도, 독자의 반응 등을 종합해 '우리시대의 명저'라는 기획기사를 2006년과 2007년에 걸쳐 일주일에 한번씩 연재한 적이 있다.연재에 앞서 전문가들과 어떤 책을 소개할지 의논한 끝에 등 50권을 추렸다. 사람에 따라 이견이 있겠지만, 그 50권은 어쨌든 높은 성과를 인정받은 책이다.거기에 포함된 책 가운데 하나가 다. 1994년 1권이 출판된 는 미학이라는 학문의 실체를 비교적 쉽고 경쾌하게 설명한 책으로 젊은 독자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미학이라는, 개념 잡기 어려운 학문을 대중이 읽을 수 있게 소개한 책으로, 대중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미학 서적이었다.그렇다고 내용이 얕은 것은 아니다. 많은 인물과 작품이 나오고 그 사람 혹은 그 작품의 의미를 진지하게 따지기 때문에 책을 읽다가 한번씩 생각을 정리할 게 적지 않았다. 책이 나온 시점이 먹고 살 만해져서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커질 때였기 때문에 시기도 적절했다.감칠맛 나는 구어체 문장으로 독자를 미학의 세계로 인도한 저자가 바로 진중권이다. 1권 출판 당시 서른한 살에 불과했던 그는 책을 쓰기 위해 자료를 모으고 원전을 읽었으며 대학의 석사논문을 뒤졌다. 는 모두 3권이 나왔는데 3년 전 50만부 정도 판매됐다는 말을 들었다. 그 뒤 얼마나 더 판매됐을지 궁금하다. 외에 내가 읽은 진중권의 책은 다. 카리스마, 매스게임, 짝퉁, 디지털 등의 키워드로 현대 한국 사회와 한국인을 분석한 책인데 일부 도식적인 면도 있지만 분석이 날카롭고 재미있었다.진중권은 이 밖에 등의 책을 썼다.그 나이에 이만큼 책을 낸 필자가 한국에는 많지 않다. 정치적 발언을 쏟아내다가 대학에서 밀려났지만 그는 저술에서만큼은 누구 못지않은 열정을 보였고 큰 성과를 이루었다.박광희 기자 khpark@hk.co.kr

[우리 시대의 명저 50] <44> 박종홍의 '한국사상사'

2007.11.08 00:01
“한국의 정치적 독립, 경제적 독립은 누구나 외치며 그를 위하여 싸울 줄 알면서 어찌하여 정신적인 밑받침이 될 사상적 독립을 위하여서는 그렇게도 대범한가.”한국 사상 연구가 전무하다시피 했던 1972년 여름, 열암 박종홍(1903~1976) 선생은 한국사상에 무관심하던 당시 지식인을 준엄하게 꾸짖는 글로 의 첫머리를 열었다. 열암은 40대 중반 이후 한국사상의 두 날개인 불교와 유교를 천착했다. 국내 최초로 한국사상을 다룬 -불교편이 그 서장을 연 책이다.열암은 후속편 -유교편을 준비하다 타계해 애석하게도 그가 정작 애지중지하던 유교철학은 책으로 엮어지지 못했다.는 1960년대 중반 ‘한국철학사’라는 제목으로 지에 연재했던 열암의 글을 모은 것. 연재글이다 보니 일관성이 부족했다고 느낀 탓이었을까.그는 머리말에서 “(이 책은) 하나의 저술로서 집필했다기보다 나 자신이 알고 싶은 일념에서 오랫동안 더듬어 온 자취인 것이요, 따라서 서술의 양식조차 제대로 통일되지 못한 점이 적지 않다”며 애써 저술의 한계점을 밝혔다.이런 열암의 변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 글이 갖는 사상사적 의미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1960년대까지 단편적으로만 이어지던 불교사상 연구를 ‘사상사’라는 틀로 묶어 학문의 경지에 올려놨다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책은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삼국시대부터 꽃을 피운 고려시대까지 대표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불교철학을 설명한다. 저자는 고구려 승려 승랑(僧朗)이 진리의 모습에 다가서고자 내세웠던 본체론과 ‘우주의 궁극적 실체는 오직 마음 뿐으로, 외계의 대상은 단지 마음이 나타난 결과’라고 한 신라 원측(圓測)의 유식(唯識)철학적 인식론에서 한국 불교사상의 뿌리를 찾았다.책은 이후 통일신라시대 원효의 ‘화쟁(和諍ㆍ오직 진리를 따라 종파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논쟁을 하나로 화합하게 하는 사상)’을 거쳐 자칭 미륵불이 출현할 정도로 혼란기였던 신라말 고려초의 정신적 추세를 담았다. ... 책의 대미는 고려시대 의천과 지눌의 철학이 장식했다.책이 역사 속 다섯 사상가에 대한 이야기로 끝났다면 는 인물 평전 쯤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사상가들의 철학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회통(會通)’의 정신을 찾아냈다. 있음과 없음, 긍정과 부정, 어느 것에도 속박됨 없이 자유롭게 구사되는 승랑의 논리와 유식사상가이면서도 그 편협성에 구애받지 않으며 진리에 대한 이견(異見)을 그러 모으는 원측의 자유로움, 분열된 불교사상을 하나의 근원으로 귀일시키는 원효의 화쟁 정신, 모든 불교사상의 겸학을 주장하고 선종과 교종의 대립을 극복하고자 했던 의천의 넓은 시야, 그리고 선종과 교종, 돈오와 점수를 한데 엮어 한국 불교의 포괄적 수행체계를 정립한 지눌의 포용성. 이들에게 도도하게 이어지는 회통의 정신을 열암은 명쾌한 분석을 통해 유감없이 보여준다.열암은 사상사의 기본 요건인 연속성도 빠뜨리지 않았다.승랑과 원측의 사상을 보다 심오하고 근본적이며 전체적인 입장에서 화합시킨 원효. 원효에 대한 의천의 한없는 숭앙, 의천과는 달리 선의 입장에서 교를 포섭한 지눌. 이 같은 분석과 통찰을 통해 열암은 에 개별적 사실의 나열이나 인물 고찰을 넘어서는 진정한 의미의 사상사를 담았다.그러면서도 열암은 스스로 이 책의 한계를 명확히 짚어냈다. “우리의 사상이 우리의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것이 사실인 만큼 경제적인 조건 또는 법률, 정치적인 태도 등등을 포함한 일반 문화 전반에 걸친 연구가 또한 보조를 같이하여 병행하여야 할 것임은 물론”이라는 머리말 후미를 통해 열암은 후학들에게 혈혈단신의 연구로는 이루지 못했던 한국사상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숙제로 남겼다.● 인터뷰/ 열암기념사업회 소광희 교수"열암 박종홍 선생은 우리나라 철학 연구의 개척자입니다. 1945년 해방 후 1950년대 말에 이르도록 '한국에 무슨 철학이 있겠냐'던 풍토는 선생께서 한국철학사 강의를 시작하고, 60년대 중반 한국사상연구회를 창립하면서 깨졌습니다. ... 열암기념사업회를 10년째 이끌고 있는 소광희(73ㆍ사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열암의 가장 큰 업적을 묻자 지체 없이 '한국철학 연구의 개척자'라는 말을 꺼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식자층이라는 유기천 전 서울대 총장조차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을 때 '한국의 사상?샤머니즘적 복합체' 운운하면서 격하했을 정도니 한국사상에 대한 연구가 지지부진했음을 두말 할 나위도 없었다.그런 와중에도 열암은 한국사상 연구를 조용히 끌어갔다. 소 교수는 "열암 선생의 저술은 모두 14권인데 서양철학 소개서와 청탁을 받아서 쓴 짧은 글 모음집을 뺀 5권은 모두 등 한국사상에 대한 논문입니다.5권 모두 선생이 말년에 저술한 책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열암 선생의 사유의 축이 어디에 가서 머물렀는가는 자명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말로 말년에 이르기까지 열암 철학의 중심이 오롯이 한국사상에 있었음을 강조했다.한국사상 다음으로 그의 인생을 타고 흐른 것은 교육이다. 19세에 전남 보성보통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해 서울대 교수로 정년퇴임할 때까지 대학시절을 제외하고는 40여 년간 오로지 후학양성의 길을 걸었다. 또한 열암의 최초의 학문은 한학, 그중에서도 퇴계 이황의 교육에 대한 연구였다.청년기 시절 독학으로 중고등학교 교사 자격을 획득했을 때도 그의 전공은 오로지 교육학이었다. 이것은 열암이 일생을 일관하는 실천적 주제의식이 '교육'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평생을 교육에 몸담은 한국철학의 개척자'였음에도 열암을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오명이 있으니 '독재정권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했다'는 비판이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은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지고 있지만 열암에 대한 비판은 아직 사그라들지 않았다.실제로 그는 5ㆍ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박정희가 이끈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위원과 국민교육헌장 기초위원을 맡았었고, 정년퇴직 후에는 대통령 교육문화담당 특별보좌관을 역임했다. ... 때문에 그의 성품, 학식과는 별도로, 그의 철학은 조선총독부와 박정희가 행한 억압과 폭력의 사상적 배경이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그러나 열암이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 있을 당시 조교였던 소 교수는 "국민교육헌장 제정 직후부터 몇 년간 선생은 불원천리하고 지방에 계몽강연을 다닐 정도로 참다운 민족중흥을 위해 애쓰셨다"면서 "국민교육헌장은 독재 정권을 뒷받침하기 위해 일제의 교육칙어를 차용해 급조됐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진정 열암의 뜻은 참다운 국민교육에 있었다"고 강조했다.또한 소 교수는 말년에 대통령 교육문화담당 특별보좌관을 맡은 것에 대해서 열암의 개인적 상황에 주목해달라고 부탁했다.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 있다가 연금도 없이 100만원을 받고 정년퇴임하고 나니 생활이 막막했을 겁니다. 당시 열암 선생의 일기를 보면 '자식들 학비를 어떻게 하나'하고 걱정했던 내용이 나옵니다. 7남매니 오죽했겠어요. 그러던 차에 청와대에서 강압적인 제의를 누차 해왔죠. 열암 선생은 이참에 차라리 제대로 된 교육정책을 펴보자는 생각에서 그 자리를 수락했을 겁니다. 그 연세에 무슨 정치적인 야심이 있었겠습니까."허정헌기자 xscope@hk.co.kr

[우리 시대의 명저 50] <41> 채희완 임진택 편 '한국의 민중극'

2007.10.18 00:03
1973년 원주에서 가톨릭문화운동을 하고 있던 시인 김지하(66)는 농촌계몽극 의 대본을 썼다. 농촌 문제를 상징화한 세 마리 도깨비인 수해귀, 외곡귀, 소농귀를 농민들이 단합해 진압한다는 내용이다. 전통 농민굿인 오구굿의 양식을 확대, 극장이 아닌 야외에서 벌이는 탈춤 형태로 극화한 것이다.김지하는 공연을 위해 서울대 연극반의 임진택(57)을 불렀다. 임진택은 당시 손학규에게서 우연히 빌려보았던 마오쩌둥의 책을 들키는 바람에 손학규는 구속되고, 자신은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임진택은 의 연출을 맡고, 서울대 탈춤반의 채희완(59)에게 안무를 청했다.채희완은 70년 서울대에 탈춤반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전국 대학 탈춤반 조직의 산파 역할을 하며 탈춤부흥운동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이렇게 해서 전통 연희를 계승한 최초의 현대적 마당극 이 탄생했다. 지식인과 농민, 연극패와 탈춤패의 공동 작업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서울 제일교회에서 처음 공연됐다.군사독재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젊은 지성인들은 민족적 형식에 민중적 내용을 담은 마당극에서 새로운 문화운동의 실마리를 찾았다. 우리의 것은 버려야 하는 낡은 것으로 치부되던 그 때, 탈춤과 판소리, 풍물, 굿 등 전통 연희의 양식을 계승하면서 한국의 현실 문제를 적극적이고 진보적인 관점으로 담아낸 마당극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이 새로운 문화운동은 학교와 교회, 공장과 농촌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연극평론가 장성희는 “한국 연극이 근대 이후 서구 연극의 미학을 수렴하면서 신명과 풍자의 정신을 잃어버린 가운데 삶과 노동의 밀착감, 실내에 가둘 수 없는 우리 전통 극 유산의 펄펄 뛰는 기운에 주목한 민족극 진영이 정치적 압제와 사회적 억압에 대항하는 양식으로 내놓았던 것이 마당극”이라고 설명한다.무용평론가 채희완, 판소리꾼이자 연출가 임진택. ... 이 두 사람이 30여년 전 시작된 마당극 운동의 중심에 섰던 이들이다. 74년 국립극장에 올려져 ‘극장에서 공연된 최초의 마당극’으로 기록된 역시 이들의 손에 의해 빚어졌다. “벗으라면 벗겠어요 당신이 벗으시라면 창피해도 벗겠어요 쪽팔려도 벗겠어요”로 시작하는 는 대일 굴욕외교 이후 일본의 경제적 침투를 기생관광으로 비판한 내용으로, 남사당 덧뵈기 중 먹중마당의 기본 골격을 원용했다.채희완이 여대생 역을, 임진택이 쪽발이 역할을 맡았고 아구 역할은 김석만(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이 했다. 같은 해 채희완의 주도로 최초의 마당극 극단 가 만들어지면서 마당극 운동은 전문성과 활기를 동시에 갖게 된다.85년 채희완과 임진택의 공편으로 나온 (창작과비평사 발행)은 이런 흐름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는 책이다.81년 계간 에 ‘마당극에서 마당굿으로’라는 글을 게재해 마당극의 미학을 정리했던 이들은, 과 를 비롯해 70, 80년대 대표적인 마당극 14편의 연희본을 이 책에 담았다.마당극의 소재를 민족 문제, 농촌 문제, 근로자 및 도시빈민 문제, 사회 일반 문제, 역사적 사실의 재해석 문제로 나누고 각각에 해당하는 작품을 2~3편씩 골라 해설을 붙였다.연출가 이상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무대와 인물 배치를 설명한 그림을, 화가 김봉준이 삽화를 그렸다. 책의 편집 실무는 서울대 연극반 출신으로 한때 마당극의 뛰어난 배우였고 당시 창작과비평사에 다니고 있던, 나중에 영화감독이 된 여균동이 맡았다.동일방직사건을 다룬 음악극 , 광주 무등산 판자촌 철거반원 살해사건을 다룬 , 공해 문제를 소재로 한 등등 이 책에 수록된 마당극이 공연된 곳에는 항상 채희완과 임진택이 있었다.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기획이든 연출이든 출연이든 관람이든 비평이든” 그 무엇에든 관여하면서 말이다.채희완은 책 서문에 이렇게 썼다. ... “입에서 입으로, 몸에서 몸으로, 어림짐작 눈길로 전해질 뿐, 있었던 뒷자취조차 스스로 없이하려 했던 70년대 이후 마당의 연희를 추스려 모아 그 웅크린 정체의 일면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드러내보았다.이 강요된 구비의 시대, 민중의 삶 속의 연희들은 이 시대 민중적 삶의 숨은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이 작은 기록물은 암울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민중의 끝내 살아있음을 소리없이 웅변하고 있다.”이 책의 큰 가치는 입으로만 전해지던 마당극의 고전들을 기록함으로써 보존했다는 것이다. 한 번에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더하면서 쌓여가는 마당극의 속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암울한 시대상 때문에 마당극은 더욱 기록으로 남겨지기 힘들었다.시인 김정환은 “판소리를 정리한 신재효가 있었기에 판소리가 예술 장르로 선 것처럼, 마당극 역시 채희완과 임진택에 의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그는 “마당극이 마냥 사회 비판으로 빠지지 않고 예술적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 역시 이들의 공”이라고 덧붙였다. 은 또 전통 극 미학의 계승과 민주화 과정에 필요한 정치의식 함양이라는 뚜렷한 관점을 가지고 만들어졌기에 민족극 양식을 탐구하는 사람들에게 선명한 길잡이가 됐다. 시대를 담아내면서 토착적인 구어체는 읽는 맛을 살렸다.채희완은 “80년대 학자들이나 사람들이 마당극을 두고 ‘놀기만 하는 거지 뭐가 있겠냐, 탈미학이다’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출간 배경을 설명했다. 임진택은 “이 책은 2명이 아니라 마당극을 함께 쓰고 기획하고 공연한 수많은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며 “현장에서 일하면서, 싸우면서 쌓인 것들이라 더 소중하다”고 말했다.■ "대학가에서 위축된 마당극, 지역 축제로 갔죠""채희완 형이 수렴청정하고, 내가 광대짓을 했지."임진택은 마당극 운동에서 두 사람의 역할 분담을 이렇게 정리했다. 채희완은 임진택의 경기고 1년 선배지만, 3수를 하는 바람에 서울대 학번은 임진택이 69학번으로 한 해 빠르다. ... 출간 당시 채희완은 청주사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고, 임진택은 전두환 정권이 3S 정책의 하나로 만든 대규모 관제 축제 '국풍 81'의 연출 거부로 KBS PD를 그만두고 연희광대패를 만들어 막 활동을 시작할 때였다. "창비 편집주간이던 이시영 시인이 책을 기획한 후 '채희완 교수가 적임자인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다'며 고민하길래 제가 그랬어요. 형은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 혼자 하면 10년 걸릴 테니 내가 거들겠다고. 그래서 1년 만에 책이 나왔다는 거 아닙니까. 하하하."임진택의 입담을 은근한 미소로 받던 채희완은 인사동 찻집에 놓인 고가구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걸 사용한 사람이 아니라 만든 사람, 바로 민중이야말로 한국 예술의 근간입니다.그들이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었던 길은 바로 굿과 풍물, 탈춤이었죠. 예전엔 대학에 탈춤반이 없는 데가 없었는데 요즘은 몇 군데밖에 남지 않았어요. 대학 축제도 상업문화의 교두보가 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오늘날 마당극의 의미와 비중이 다소 위축된 것이 아니냐는 말에 임진택은 "대학로에서만 찾으려 하니까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20회째를 맞은 '전국민족극한마당'을 비롯해 지방으로 들어가 공연을 펼치고 있다"고 답했다. 민중문화운동을 주도하던 마당극은 지방자치제와 함께 지역 축제의 주역으로 떠올랐고, 다양한 형식에 대한 실험도 이어갔다.그러나 뚜렷한 풍자의 대상이 사라진데다 제도 밖에서 제도를 비판해야 하는 운명을 가진 마당극의 위치가 모호해졌다는 사실 역시 부인할 수 없다. 마당극이 우리 문화예술에서 뚜렷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완성도 있는 작품 창작과 개발이 필수적이라는 지적도 많다.채희완은 "제일 큰 문제는 공공의 적이 없다는 것, 아니 잠세화(潛勢化)됐다는 것"이라며 "이제는 생명과 평등, 평화의 문제처럼 우리 속에 내면화된 공동의 적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때가 됐다. ... 개인의 욕망과 사회가 부딪히면서 일어나는 문제들도 마당극으로 옮겨올 수 있다고 본다"고 강조했다.김지원기자 eddie@hk.co.kr

[우리시대의 명저 50] <40> 박현채의 '민족경제론'

2007.10.11 00:06
“자립적 민족경제의 확립을 위한 길은 생활하는 민중의 소망을 좇아 국민경제의 내용을 정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 민족의 자립자주의 기초를 조성하는 것이기도 하다.”유신정권이 종말로 치달아가던 1978년 4월. 다소 추상적인 머릿말로 시작하는 경제학자 박현채(1934~1995)의 평론집 이 선보인다.박현채가 누구였던가? 그는 좌익 성향이었던 호남의 지주집안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때 빨치산으로 활동했고, 하산 후에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대중강연과 집필을 통해 계급주의적 시각의 경제이론을 전파하던 재야 학자였다.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는 김대중 후보의 집필에도 참가해 대안경제모델을 내놓기도 했다.박현채가 김대중 후보의 대선 공약을 통해 중산층과 중소기업 육성, 농공 병진(竝進), 내포적 공업화로 상징되는 자신의 이론을 간접소개한 후 1970년대 신문ㆍ잡지 등에 발표한 글을 묶은 책이 이다. 한길사가 발행한 이 평론집은 초판 5,000부가 나오자마자 매진되는 등 젊은 독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그러나 빨치산 전력, 인혁당 사건 연루 등 당시 권력에 감시받고 있던 저자의 이력과 김언호 한길사 사장의 표현대로 ‘그저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는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3개월 만에 판매금지조치를 당한다. 판금이 풀린 것은 유신정권이 끝나고 ‘서울의 봄’이 찾아온 1980년 3월. 이후 은 변혁운동의 열기로 뜨거웠던 1980년대를 거쳐 1990년대까지 비판적 지식인들의 이론적 자양분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은 18편의 논문으로 묶여져 있다. 일제 식민지시대의 경제정책,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계획, 차관 도입, 다국적기업 등 각각 소재는 다르지만 문제의식은 공통적이다. 식민지시대를 경험한 지식인 박현채는 해방 이후 한국의 자본주의를 매판자본, 관료주의가 득세하는 식민지자본주의의 연장으로 바라본다. ... 이를 어떻게 민중의 생활을 실질적으로 향상시키는 국민경제 단위, 민족경제 단위의 자립적 경제로 변환시킬까 하는 고민이 그것이다.이 책에 실린 논문 ‘일제식민통치하의 농업I’ ‘일제식민통치하의 공업’ 에서 저자는 토지조사사업이나 회사령 등 일제의 경제정책이 어떻게 조선경제를 일본경제의 일부분으로 종속시켰는가를 규명한다.가령 일제말 대일무역의 확대 현상에 대해 그는 “이는 일본경제의 일부분으로 종속의 강화, 그리하여 식민지 조선에 있어서 경제발전은 일본내의 산업과 경쟁의 가능성이 있는 부분의 발전이 봉쇄되고 일본경제의 보완적 부문으로서의 파행성을 심화시켜 내포적 공업화의 길을 잃었다”고 평가한다.이런 인식은 자연스럽게 한일수교와 일본자본의 유입을 통해 경제성장을 추구한 1960, 70년대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박현채는 특히 차관의 무분별한 도입을 비판하는데 “외국자본에 의한 기술독점은 수출기술의 이용에 여러가지 제한을 나타내고 외자에 의한 원료에서 완성품에 이르는 생산과정의 종속적 결합에 의한 지배 현상을 가져온다”며 ‘외자ㆍ수출주도형’ 경제성장 모델에 회의를 드러낸다.그가 박정희 모델의 안티테제로 제시하는 것은 ‘내포적 공업화’를 동반한, 외세의존적이 아닌 ‘자립경제’ 다. 그의 표현으로 “외자와 수출에 의존하는 외연적 성장모형이 아니라 재생산조건을 스스로의 힘으로 장악한” 모델이다. 이것이 자주성과 자립성, 민주성을 내포한 국민경제의 모델이며 더 나아가 통일된 ‘민족경제’ 의 모델이라는 것이 박현채의 결론이다.박현채의 이론은 그러나 곧 내자(內資)를 어떻게 동원해야 할지에 대한 논거가 미약하고, 박정희식 발전전략에 대항하기 위한 주장에 불과하다는 비판에 부딪쳤다. ... 지금은 진보진영 내부에서조차 외국자본이 주식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대외무역의존도가 60~70%에 달하는 우리경제의 현실을 감안할 때 민족경제론은 “현실적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평가절하되기도 한다.그러나 사회안전망의 붕괴, 양극화, 시장중심주의의 전면화 등 자본주의의 모순이 집약된 신자유주의시대의 대안으로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은 재해석돼야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장상환 경상대 교수는 “박현채 선생의 이론은 한국경제가 의식주에 필요한 기본물자를 충분히 생산하지 못했던 후진적 저생산력 단계에서 제시됐던 주체적 경제발전전략으로서 의미가 있다”며 “이를 요즘에 적용한다면 미국의 서브프라임 주택담보 부실에서 비롯된 금융불안정 사태가 보여주듯 제한없는 외국자본운동의 규제 강화 같은 정책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잣구 그대로의 해석에 매달리지 말고 이 내포한 진보성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박현채의 제자로 진보적 씽크탱크인 한국사린墟極П맑恬? ... 설립했던 조석곤 상지대 교수는 “극단적 외향경제로 변모한 한국경제는 기업의 생산기반이 외국에 있는 경우 기업성장의 혜택을 민중에게 얼마나 돌려줄 것인가의 문제와 맞닥뜨리고 있다” 며 “이는 경제의 양적 성장보다 민중의 경제적 자유 실현, 생활권 보장을 우선시했던 선생의 고민과 궤를 같이한다”고 말했다.이라는 책 제목을 자신이 정했다고 밝힌 김언호 한길사 사장은 “에는 우리 국민을 어떻게 잘 먹이느냐 뿐아니라 이웃과 어떻게 잘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묻는 시대정신이 담겨있다”며 “남북의 경제적 통합이 당면과제로 떠오른 요즘 한민족공동체의 경제적 이익, 경제적 복지를 위해 어떤 사상으로 어떤 전략을 구사해야 할 것인가를 시사하는 책”이라고 말했다.■ 박현채 연보1934년 전남 화순 출생1947년 광주서중 입학1950년 빨치산 입산, 소년돌격중대 문화부 중대장1961년 서울대 경제학과 대학원 졸업1964년 제1차 인혁당사건으로 구속1971년 집필 주도1978년 출간1979년 임동규 간첩사건 연루, 구속1985년 한국사회구성체 논쟁 주도1988년 한국사회연구소 설립1989년 조선대 경제학과 교수1995년 별세이왕구 기자 fab4@hk.co.kr■ 박현채 사상 계승자 조석곤 교수정태인 전 청와대 경제비서관, 정권하 한신대 교수 등과 함께 박현채 사상을 가장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경제학자로 꼽히는 조석곤(사진) 상지대 교수. 그는 요즘 박현채의 사상을 계승할 ‘민족경제연구소’ 설립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경제의 대외의존도가 60~70%를 차지하는 현실에서 우리경제가 외향경제를 지향할지 자립경제로 나아가야 할지의 논쟁은 더 이상 무의미해졌지만, 민족경제이론이 담고 있는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기 때문이다.그가 박현채 사상에서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민족주의’ 가 아닌 ‘민주주의’ 의 문제다. ... “박현채 선생은 글마다 민주주의의 보장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우리는 민주화투쟁을 통해 절차적 민주주의는 이뤄냈지만 경제의 양극화로 민중들의 기본적 삶이 위협받으면서 민중들이 입법자, 행정가를 통제할 만한 동력을 상실한 것이 가장 큰 문제지요. 이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습니다.”그런 의미에서 주택, 교육, 의료 같은 기본적 생존조건들을 시장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공공영역이 담당해야할 ‘사회적 가치재’로 본 박현채의 시각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이는 박현채 사상의 핵심을 ‘민중성’(정태인) ‘공공성’(조희연)으로 파악한 다른 진보학자들의 시각과도 맥락을 같이한다.최근 조교수가 ‘지구화 시대의 공공성’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이는 몇년째 난항을 겪고 있는 민족경제연구소가 설립된다면 핵심적으로 취급할 과제가 무엇인지를 암시한다.그는 구체적 과제로 “박현채 사상을 횡적으로 연구할 기반을 만드는 작업이 긴요하다”고 덧붙였다. 의 완간으로 종적인 연구의 바탕은 마련됐지만, 경제 정치 사회 등 영역별로 그 사상을 파고들기에는 어려움이 여전하기 때문이다.조교수는 “신자유주의가 ‘효율성’을 절대선으로 보는 경제담론이라면 민족경제론은 ‘형평성’을 추구하는 대안이론”이라며 “민중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그 바탕에 깔고 있었던 박현채 선생의 사상을 계승하는 것은 바로 이런 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이왕구기자 fad4@hk.co.kr

[우리 시대의 명저 50] <26> 김우창 전집 '궁핍한 시대의 시인' 등 5권

2007.07.06 02:55
‘김우창 전집’은 인문주의가 현실을 끌어 안을 때, 귀납돼 나오는 사유의 풍경이 얼마나 풍요로운지 증명하는 전거다. 김우창(71) 고려대 명예 교수는 밝혔다. “(내 글쓰기의)지향점은 내가 만드는 게 아니고 주어진다. 시대에 대해 촉발된 느낌이 (글을) 쓰게 한다.” 글쓰기와 사유의 지향점에 대한 질문에 들려 준 답변은 다섯 권의 책에 모범적으로 적용된다.평소 이런 저런 지면을 통해 실어 오던 그의 평론을 주목해 오던 박맹호 당시 민음사 사장이 “책으로 만들자”며 강권하다시피 했고, 어느새 진짜 책이 돼 있었다. 1977년 첫 권 이 빛을 보고 2권 , 3권 , 4권 을 거쳐 1993년 마지막 권 가 나오기까지, 자칫 비연속적 사유의 기록으로 치부되고 말았을 일련의 글은 출판인의 안목 덕에 전집으로 묶였다.그러나 저자 자신으로서는 아직도 결벽증을 떨쳐 내지 못하고 있다. “문학사상, 창작과비평 등 잡지에 수록된 글이라 체계가 없어 유감이에요. 그러나 당시 현안에 민감히 반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저널적이라는 자평이다. “박 사장이 출판을 제의했을 때 체계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나는 거부했으나, 강권에 못 이긴 거죠.” 결과적으로 일련의 책은 한없이 높은 문화의 힘을 갈망하는 한 인문주의자의 내면을 절절하게 증거하고 있다.생활 주변의 모든 것이 인문학적 텍스트였다. 예를 들어 1972년 12월 9일자 한국일보의 칼럼 ‘천자춘추’(유치진 씀)는 당시 미국 사회가 직면한 변화를 주제로 한 ‘자유의 논리’에서 도입부로 쓰였다(2권 ). 첨단의 편의와 번다함이 공존하는 국제 공항은 포스트모더니즘적 상황에 대한 명상의 계기로 전용된다(4권 ).책은 우리 문화의 정통을 이야기한다. ... “조선 자기, 수묵의 산수화, 조촐한 전원 생활의 낙을 이야기하는 시조, 일상적 사건들에 대한 담담한 관찰을 기록한 시화, 수필, 잡기 등은 자연과 인간의 절제된 균형을 목표로 하는 조화의 이상”과 닿아 있다는 것.(3권 ) 북한의 예술 또는 예술적 현상에 대해서는 같은 책 중 ‘이념과 표현’이란 제하로 사유를 전개한다. 북한에서 서사시적 충동이 강한 이유, 개인과 사회의 충돌이 혁명적 낭만주의라는 대전제 속으로 복속돼 가는 기제 등이 북한 예술가들의 작품에 근거해 언급된다. 그 모든 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예술 혹은 문화관에 대한 갖가지 현상을 전제한 후에 나온다. 하나의 체계 아래 유기체적으로 꽉 짜인 글이다.예술과 세계, 실존과 현상에 대해 그는 포괄적 입장을 취한다. 글의 설득력은 그 같은 배려의 결과다. 그는 문학은 결국 제도 안에 있으며, 있어야 할 것은 현존하는 것의 잠재적 부분으로부터 나온다고 본다. 관념적 당위가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영역에서 비롯돼야 한다는 믿음이다.그 인문학적 지평의 방대함은 특유의 유연성과 공존한다. 문학이란, 제도 안에 있으며 있어야 할 것은 있는 것의 잠재적 부분으로부터 나온다는 입장이다. 그의 글은 그래서 지상에 발 디디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설득력을 갖고 접근한다.이 시대의 화두라 할 페미니즘 역시 사유의 그물에 이미 포착됐다. 여성 문제의 의식과 그 현실적 표현을 반성하고 그 성쇠의 요인을 검토하면서, 19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까지의 상황을 점검하는 대목이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격세지감까지 든다. 책은 “오늘날의 여성이 매우 불행한 상황에 있는 것은 사실”이라 전제, 여성 운동의 성패는 다른 사회적 투쟁과 연결돼 있다는 시각을 제시한다. 근대화, 경제 성장, 대중 문화 시대, 민족 분단의 시대, 민족주의 시대, 민족 중흥기, 민중 시대 등을 포괄하는 당시의 핵심적 개념은 ‘산업화’였다.문화에 대한 통찰은 시대를 초월한다. ... “오늘날의 사회에서 특히 언어의 타락에 크게 기여하는 것은 정치적 또는 상업적 선전을 위한 언어의 사용”이라는 지적은 날로 정치적 대립이 격화돼 가는 지금 한국이 더욱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책은 곳곳에 인문주의에 대한 신뢰의 보루를 쌓아 두고 있다. “적어도 고급 문화의 표현으로는”이라는 유보 조항을 달긴 했으나, 문화는 “한 사회의 인문적 전통의 전부 이외의 다른 것은 아니다”라고 책은 단언한다. “인문적 전통을 통한 교양은 지식의 훈련과 함께 지식으로부터 또는 모든 외적인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마음의 해방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3권은 저자의 본령을 확인시켜 준다. 황석영 이문구 등 소설가, 황동규 김광규 등 시인을 중점적으로 논하는 자리다. 그럼에도 책은 자유에 대한 여러 차원의 참고서로 읽힌다. 그에 대한 사유의 흔적은 전집 곳곳에 배어 있다. 저자에 의하면 세 가지 차원의 자유가 필요하다. 동료와 신뢰ㆍ공감할 수 있는 자유, 자연과 조화하며 사는 심미적ㆍ생태학적 자유, 그리고 스스로의 깨우침으로 도달하는 자유. “세 번째가 바로 인문 과학이 필요한 대목이죠.”4권 에서는 오래 음미하고픈 명구가 눈을 붙든다. 근원을 사유케 하는 글이다. “마음의 실체는 고요함이다. 이것이 우리를 자아로서 지속하게 하며, 또 세계를 있는 대로 드러내주게 된다.”(‘고요함에 대하여’) 책의 초입은 이맘때가 제격이다. “장마가 끝나고 밝은 해가 비치고 태평양으로부터 올라온다는 태풍의 영향인지 맑은 바람이 분다.…(중략)…반드시 실제적이 아니고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닐지라도 순간을 넘어서는 영원 아니면 지속에 대한 우리의 갈구는 삶의 근원적인 지향인지 모른다.”자유는 이 전집의 모태이기도 하다. 저자는 “학문적 계보란 내게 없는 것 같다”며 “바로 계보가 없었던 덕에, 즉 요구하는 바가 없어서, 너무 자유로워서, 쓸 수 있었던 것”이라며 돌이켰다. ... 저자는 자신의 전집이 ‘좋은 사회’에 대한 인문 과학적 이해와, 그를 위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 내는 데 쓰일 수 있게 되기를 바랬다.김우창 전집은 인문학에 대한 드높은 애정의 결과다. 어느 한 곳에 편재됨 없이, 그 근원적인 지향점을 찾아가는 구도자의 내면 풍경을 요약한 지도이면서 후세를 위한 솟대이다. 장병욱기자 aje@hk.co.kr▲김우창,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조직위원장 맡기도“인류 정신세계에 기여할 때 진정한 한류”"소위 인문학의 위기란 취직 문제에서 비롯된, 매우 한국적인 현상이에요. 아주 못살지도 잘 살지도 않는 한국에서 경제 가치가 너무 우월해졌기 때문이죠. 한국만큼 경영ㆍ법과 등 전공 따져 모집하는 데도 없어요." 1963년 이래 서울대와 고려대에서 영문학을 가르친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의 논지는 선명하다. 보다 직접적으로는 인문학이 필수적이라는 인상도, 전통적 문화 유산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인식도 주지 못 한 탓이라는 지적이다.그의 언어는 항상 현실과 긴밀히 연결돼 있다. 2005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행사 조직위원회 위원장 역시 그의 현실 발언 행위다. "도서전 결과, 독일에서 한국에의 관심이 높아진 듯했으나 사그러들고 있어요. 문화란 남이 봐서 남이 부러워할 만큼의 좋은 사회를 만들었는가 하는 문제지요. 제도에 우선해, 삶에 무엇이 중요한가 하는 인식의 수준이죠."그로부터 귀한 교훈도 얻었다. "(한류처럼) 너무 큰 성과 기대 말라는 거예요. 한국 문화 전시에 독일인들이 보여준 대호응이 진짜 성과죠." '한국 문화의 우수성, 국가 브랜드 향상, 국위 선양, 한류' 운운하는 팸플릿 문구가 그의 주장으로 상당히 순화되기도 했다. 또 돈을 아끼려 노력한 결과, 정부에 예산을 8억원이나 돌려준 일은 그에 비하면 작게 보일 정도다. "문화란 인류의 정신 세계에 기여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해요. 한류와 명품의 밑바닥에는 필요한 게 그런 생각이죠." 그러나 엊그제 있었던 노무현 대통령과 대학 총장들 간의 만남은 착잡했다. ... "학문 존중의 전통을 무시한 채 대통령이 총장들을 불러 훈계하는 식은 곤란한데…."곧 펴낼 책들은 못다한 언어의 아쉬움을 달래준다. 문예 비평지에 쓴 자유와 가치 체계에 대한 글이 도서출판 생각의나무에서 책으로 나오고, 한 신문에 5년째 쓰고 있는 칼럼과 2년 전 학술협의회에서 가진 강연 '마음의 생태학' 등이 대기중이다. 물론 그 밖의 단문은 숱하다. 경제와 권력에 목매다는 한국인들에게 헤르만 헤세의 을 그는 권했다. "특히나 부동산에 목매다는 서울 사람들에게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사회가 돼야 함'을 말하고 싶군요. 사람 사는 깊이에 대한 고찰이 너무들 없죠."▲약력1936년 전남 함평 출생, 1954년 서울대 영문과 입학, 63~73년 미국 코넬대ㆍ하버드 대학에서 수학, 74년 고려대 영문과 교수, 1993년 도쿄대 교환 교수ㆍKBS 비상임이사, 2000년 고려대 대학원 원장, 2003 고려대 명예교수▲주요 저서 등

[우리 시대의 명저 50] <12>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2007.03.21 23:38
1970~80년대 우리 사회를 지배한 것은 생산 제일주의와 민주화 투쟁이었다. 한쪽에서는 어떻게 하면 생산력을 높일 것인가를 고민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민주주의의 확장을 위한 고난의 투쟁을 벌이던 시기였다. 9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먹고 사는 문제가 많이 해결되고 민주화 역시 이전 보다 훨씬 진전됐다.문화 욕구의 증대가 새로운 과제로 떠올랐다. 단순화하면, 이제 좀 먹고 살만해 졌으니까 즐길 것을 찾고 오락거리에 눈을 돌린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아름다움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미학은 또 어떤 학문일까.그 같은 궁금증에 대한 대답이 바로 진중권의 다. 출판 당시(1994년)만 해도 일반인에게 미학은 어렵고 개념 잡기 곤란한 그런 학문이었는데 이 책이 그런 답답함을 꽤 해소한 것이다.에는 미학, 미술, 철학의 역사가 섞여 있다. 가상과 현실속에 원시 시대부터 최근 탈근대적 시선에 이르기까지의 그림, 건축, 조각 등을 중심으로 인류 역사의 모든 시기에 이룬 예술과 아름다움의 본질을 향해 다가간다.때로는 한 작품을 파고 들고, 때로는 작품의 분석법을 제시하며, 또 때로는 그 작품을 통해 그 시대 사람의 생각과 삶을 읽는다. 대상이 서양으로 국한된 점이 아쉽지만, 이렇듯 대중을 상대로 미학을 소개한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인문서로는 당시만 해도 드물게 구어체 문장을 사용했는데, 독자들은 처음에 그 문장을 불편해 하다가 나중에는 도리어 거기에 매료됐다. 그의 글 쓰기는 특히 인터넷 문장에 익숙한 젊은 독자를 휘어잡았다. 입에 붙는 구어체 문장이기 때문에 죽죽 읽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얕은 책이 아니다.눈으로만 보고 입으로만 읽는다면 어려울 것 없지만, 틈틈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머리로 정리할 내용이 많다. 책의 정체는 한 가닥으로만 뭉뚱그려지지 않는, 특이한 내용과 형식을 취하고 있다. 진중권은 이에 대해 ‘이중 코드’를 적용했다고 표현한다. ... 인문학적 소양이 있는 전문가와, 그렇지 못한 일반인을 동시에 겨냥해 책을 썼다는 것이다.그는 “인류 역사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이고, 미학의 영역과 방법론 역시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보는 시각에서 자칫 혼동이 생길 수 있다”며 “이 책을 통해 미학의 기초 지식을 소개하고 예술을 어떻게 해석, 비평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 틀을 제공하고 싶었다”고 말했다.책을 쓴 현실적 동기는 아주 단순하다. 서울대 미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뒤, 누나(작곡가 진은숙)가 있는 독일 유학 비용을 마련하기위해서 였다. 범상한 이유지만, 과정은 수월하지 않았다. 시중에 변변한 미학사 책 하나 없었고, 몇 안 되는 개설서는 관점이 낡지 않으면 수준이 떨어지거나, 시야가 좁았다.자료 부족이 무엇보다 큰 문제였다. 그는 번역된 것을 모조리 찾아서 읽고 빠진 부분은 원전을 구해 보충했으며 필요하면 지방 대학의 석사 논문까지 찾아 읽어갔다. 독일의 누나에게 부탁해 자료를 구했으며 대형 서점의 외국 서적 코너를 훑었다.노고가 헛되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독자들은 좋은 반응을 보였다. ‘미학에 대해 알게 됐다’, ‘미학을 알게 해주어서 고맙다’는 평가가 쌓여갔다. 인문서 치고는 너무 가볍다며 탐탁치 않게 여긴 학계 인사도 있었지만, 반대로 철학자 박이문 교수처럼 “좋은 책 썼다”며 격려하는 선배도 적지 않았다.출판사를 옮겨가며 책을 냈기 때문에 지금까지 얼마나 판매됐는지 정확하게 알기 어렵지만, 50만부는 훨씬 넘었다는 게 출판계의 정설이다. 미학이라는 낯선 분야의 책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기록을 세운 것이다.그 과정을 진씨는 “책의 탄생은 조용하여 언론의 주목도, 광고의 지원도 받지 못했지만 책을 먼저 읽은 이들이 주위에 소개를 하고, 입소문을 통해 꽤 많은 이들이 책을 사거나 빌려서 읽었다”고 요약한다. ... 출판사의 관계자도 “처음에는 그리 각광을 받지 못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독자들의 입 소문을 타고 알려졌다”며 독자에게 고마워했다.책을 낼 당시 대학원을 졸업한 서른 한 살의 청년 진중권은 이 책을 시작으로 폭 넓은 문필, 저술 활동에 나서 지금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논객이 됐다.진중권은 미학을 단순히 과거의 아름다움을 분석하는 수단으로만 보지 않는다. 현재 혹은 미래의 현상을 해석하거나 예측하고, 개별 현상에서 보편적 의미를 읽어내는데 정말로 필요한 학문이 미학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가령 거리의 간판만 보아도 지금 우리 사회를 해석할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잘 알다시?우리나라의 간판은 글자가 많고 또 매우 크다. 미적 감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 옆에 혹은 위에, 아래에 붙어있는 간판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하면 눈에 잘 띌까 간판끼리 치열하게 경쟁한다. “사회적인 배려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 사회의 경쟁 만능주의를 읽을 수 있지요.”그가 볼 때 미학은 또 우리 사회의 생산력이다. 과거에는 굴삭기, 기계, 파이프라인, 크레인 등이 생산을 상징했다. 지금은 IT, 나노, 디자인, 브랜드 등이 생산력이다. 육체 노동이 정신 노동으로 대체되고, 눈에 보이는 묵직한 것에서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것으로 생산의 주체가 바뀌었다. 노동의 양태가 변한 지금, 가장 중요한 생산력이 무엇일까. 진중권은 상상력이라고 말한다.그러나 아쉽게도, 그가 보기에 우리 사회는 상상력과는 거리가 멀다. 상상력을 북돋아주지는 못할 망정, 도리어 그것을 억누른다. 진중권은 “미래를 내다 보지 못하고 과거로만 눈을 돌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정보화 사회가 됐는데도 왜 옛날처럼 경제 성장을 하지 못하느냐고 야단인 것도 그 때문이다.이 같은 상상력의 부재는 남과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지 못하게 하다. 그렇게 하고 싶어도 타인의 시선이 두렵다. 사회적으로도 남과 다른 것을 이해하거나 참아주지 못한다. ... 현실이 이런데도 사회 지도층은 상상력이 떨어진 우리 사회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고치려고도 않는다.하지만 사정이 그럴수록 미학에 대한 진중권의 믿음은 확고해진다. 미와 예술 그리고 감각의 학문인 미학이 결국에는 사회적 상상력을 돋우고 미래의 생산 동력, 미래의 경제학이 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특이하고 실험적인 형식도 눈길우리에게 익숙한 음악은 대부분 ‘모노포니’(monophony)다. 이런 형식의 음악에서는 멜로디가 중심이 되며 반주는 독립성을 잃은 채 멜로디의 진행을 도울 뿐이다. 하지만 반주가 독립성을 갖고 스스로 또 다른 멜로디 행세를 할 때, 여러 개의 멜로디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화음을 만드는 새로운 음악이 된다. 바로 ‘폴리포니’(polyhphony)다.형식으로 볼 때 는 책의 폴리포니다. 미학사(본문), 철학사(대화), 예술가 모노그래피(에셔, 마그리트, 피라네시)로 내용을 나눠 독립적으로 전개한 뒤 결국에는 서로 만나 화성을 이루게 한 것이다.책에서 미학사 부분을 다룬 것은 본문이다. 그러나 미학이 기본적으로 철학의 한 부분이고, 사유의 틀과 개념을 철학에서 가져왔기 때문에, 그 같은 철학적 배경을 보여주기 위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등장시켰다. 둘의 대화는 그 형식이 좀 가볍고 장난스러울 때가 있지만 내용은 철학과 예술의 핵심을 짚기 때문에 결코 가볍지 않다.진중권이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쓴 제 3권(2003년 발행)에는 디오게네스도 합류한다. 탈근대의 관점으로 볼 때, 철학사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합리주의적 주류와 디오게네스에서 니체로 이어지는 비합리주의적 비주류가 대립하는데 진중권이 이를 잘 활용한 것이다.책에는 네덜란드의 판화가 에셔(1898~1972), 벨기에의 화가 마그리트(1898~1967), 이탈리아의 건축가 겸 판화가 피라네시(1720~1778)의 작품이 등장한다. 책에서 이들은 단순한 미술가가 아니라 당대의 문화 현상을 해석하고 창조한 철학자와 같은 인물이다. ... 이들의 작품은 텍스트의 서술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는 그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같은 특이하고 실험적인 형식에서도 눈길을 끌었다.진중권-1963년 서울 출생-서울대 미학과 졸업, 미학과 석사-독일 베를린자유대 수학-중앙대 겸임 교수, KAIST 초빙 교수-저서 등박광희 기자 khpark@hk.co.kr
==

[우리 시대의 명저 50] <51·끝>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2007.12.26 14:55
통일을 민족의 염원이라 부르짖었지만 실제 북한에 대한 연구는 전무했던 게 당시의 현실이었다. 통일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지피지기의 과학적 연구가 전제돼야 한다는 게 공산권 연구 총서 발간의 목적이었다.그 연구총서 중 하나가 김준엽(88ㆍ사회과학원 이사장), 김창순(2007년 작고ㆍ북한연구소 이사장)의 다. 총 5권의 이 저작은 두 분이 40대 초에서 50대 중반을 넘어서는 인생의 황금기를 다 바쳐 펴낸 필생의 노작이다. 62년 연구에 착수해 76년에 마지막 제5권이 나왔으니 무려 15년의 시간이 소요됐다.저자들은 ‘황무지를 개척하는 마음’으로 가능한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 연구를 시작했다. 하지만 연구의 첫 단계인 자료 수집의 벽이 너무나 높았다. 이 저술과 관련된 것으로 한인에 의해 작성된 체계적인 기록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간혹 단편적인 것을 찾았다 하더라도 그대로 믿을 수 없었다. 한국의 공산주의운동은 가혹한 일제치하에서 지하투쟁으로 전개된 까닭에 어느 부분의 단편적인 기록만 가지고서는 전체의 진실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일제통치기관의 문서를 섭렵하는 일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외국에 나가서 자료를 수집하고 반입하는 일 또한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 또 그것을 입수했다 하더라도 그 기록이 말하는 것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느냐의 한계에 부딪쳐야 했다.저자들은 서문에서 “1961년 5ㆍ16군사혁명으로 반공국시 제일주의가 선포된 당시의 분위기와 우리나라의 좌파운동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형편에서, 독립운동사상의 좌파의 위치를 실증적으로 밝히려는 도전은 분명히 어려움을 넘어선 일종의 무리한 일임에 틀림없었다”고 적고있다.하지만 북한의 역사 날조를 마냥 바라다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 저자들은 북한의 독립운동사를 왜곡하려는 모든 시도를 물리치고, 또한 앞으로의 민족통일에 대비를 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무력함을 절감하면서도 엄청난 과제에 도전한 것이다.1권에서는 볼세비키 혁명 이전의 러시아의 한인들 모습을 다루기 시작, 상하이파 고려공산당과 이루크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생성 과정, 그 두 당의 군권투쟁, 코민테른의 개입에 따른 양당의 해체 등을 다루고 있다.제2권은 3ㆍ1운동의 좌절로부터 1926년 6ㆍ10만세에 이르는 시기의 한국의 민족운동 내에서의 공산주의운동의 움직임을, 3권은 6ㆍ10만세운동으로 발단한 조선공산당 제2차 검거 사건이 있은 때로부터 1928년 12월에 코민테른의 조선공산당 재건 지령이 있기 까지를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4권은 만주지역의 공산주의 운동에 초점을 맞췄다. 만주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은 사실 한인에 의해 조직적인 효시를 보게 되었고 또 그 성장도 급진적이었다.만주각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난 산발적인 한인공산주의 조직의 형태를 개관하고 그것들이 조건공산당 만주총국과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에 흡수돼 조직적으로 체계화된 과정을 살피고 아울러 조선공산당 만주총국과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의 조직 및 활동을 살펴보았다.마지막 5권은 한인공산주의운동의 여러 양상 및 각파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특히 박헌영에 의한 재건통일조선공산당의 성립과 북한에서의 북조선노동당 출현에 의한 일국일당원칙의 파괴 및 조선공산당의 전일성(全一性)부인까지를 주 내용으로 서술하고 있다.■ 김준엽, 독립운동·학자의 길 매진 김창순, 국내 북한연구의 1세대김준엽 사회과학원 이사장을 이 시대의 진정한 원로로 꼽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항일독립운동과 후학 양성에 평생을 바친 김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에서 드물게 별다른 도덕적 상처 없는 지조 있는 지식인으로 존경 받아왔다.평북 강계 출신인 김 이사장은 1944년 일본 게이오대 동양사학과 재학중 학병으로 끌려갔다. ... 중국에서 장준하 등과 탈출해 충칭의 임시정부로 가서 광복군에 가담, 지청천 광복군 총사령관, 이범석 광복군 제2지대장 등의 부관을 지냈다. 그는 일제 하에서는 김구 주석 밑에서 임정신문을 만들었던 광복군 소령으로, 해방 후에는 50년 넘게 학자로 외길 인생을 걸어왔다.김 이사장의 일생의 신조는 "생일상을 차리지 않겠다는 것과 벼슬을 안하겠다"는 것. 실제로 각 정권으로부터 12차례나 총리 등 관직 제의를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82년 고려대 총장에 취임한 김 이사장은 85년 전두환 정권의 압력에 맞서다 사임, 88년 사회과학원 이사장을 맡으며 중국과의 학술문화교류에 전력하고 있다. 지금도 아흔에 가까운 고령임에도 정정하게 중국을 오가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의 명함에는 중국내 일류대학 11곳의 명예교수 직함이 찍혀 있다.김 이사장은 그의 회고록 의 5권 머리말에 "망국의 쓰라림과 민족해방 투쟁, 한국전쟁, 그리고 이런 역경을 딛고 새 나라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나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를 늘 반성하며 살아왔다"고 적었다.또 한명의 저자 김창순 북한연구소 전 이사장은 국내 북한연구의 1세대다. 그는 안타깝게도 지난 3일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평북 의주 출신인 고인은 만주 국립대 하얼빈학원에서 러시아사를 전공하고 광복 후 북한에서 평북신보사와 평북인민보사 주필, 신의주 동방사회과학연구소장, 북조선기자동맹 창립중앙위원, 민주조선사 총무국장 등으로 언론계에 종사했다.49년 반혁명분자로 검거돼 투옥됐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탈출해 남한으로 내려왔다. 이후 김 이사장은 평생을 북한 연구에 헌신해왔다.육군 정훈학교 강사를 지낸 경력이 말해주듯 반공과 지공(知共)의 관점에서 북한을 본다. 사실관계와 정보를 중요시하며 이를 통해 북한 체제의 허구를 보여주려고 노력했다.그는 "북한 공산주의를 배격하는 것보다는 공산주의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내재적 힘의 축적에 의한 평화공존의 추구를 지향해야 한다"며 71년 북한연구소를 세우고 북한학 연구를 시작했다. ... 또한 를 창간하고 북한학회를 창설하는 등 북한연구를 학문의 개념으로 올려놓은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이성원 기자 sungwon@hk.co.kr

[우리 시대의 명저 50] <42> 안병무의 '민중신학을 말한다'

2007.10.25 00:02
미국을 통해 들어온 기독교의 모습을 맹목적으로 추종해 왔다. 예수의 사건과 성서를 주체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때다."1993년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저같은 선언적 명제를 먼저 밝히고 의 길을 열어갔다. 그 해, 1월 한국 기독교는 타성을 깨는 그 천둥 소리를 알아 들었을까.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는 이 시대 일부 한국 기독교는 그 소리를 어떻게 듣고 있을까.험난한 시대에 예수의 도래를 외쳤던 세례 요한처럼, 안병무는 광야에서 외쳤다. 맹목적 확장주의와 폐쇄성으로 한국 기독교가 따가운 비판의 시선을 받고 있는 지금, 그의 통찰은 더 매섭다. "나는 1970년 11월 13일 자기 몸에 기름을 붓고 분신자살한 22세의 그리스도인 전태일을 생각했습니다."(400쪽) 내 살과 피를 먹으라던 예수의 절규가 한 젊은이의 산 제사로 되살아 났음을 그는 책의 말미에서 말했다. 한국의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살아있는 종교가 될 것을 요청했다.그는 이 책에서 먼저 기독교의 역사를 직시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스도교의 변증론, 즉 성서론 그리스도론 신론 교회론 죄론 성령론 하느님의 나라론 등 7가지는 성서의 내용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교권 수호를 위한 싸움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원류인 헤브라이즘과는 상관없는, 헬레니즘의 소산. 로마의 문화권에 대해 자기 방어를 하는 과정에서 헬레니즘적 사고의 틀에 자신을 짜맞춘 것이다."1996년 그는 74세로 서울에서 세상을 떴다. 그러나 그는 '사건'으로서, 현재까지 살아 있다. 그는 이 책에서 "그리스도교를 통해서 본래 한국에 없었던 서구의 개인주의가 침투, '우리'는 없어졌다"며 "예수 사건은 민중으로 부활하고 있다"고 갈파했다. 그는 회고했다. "내가 유학을 마치고 독일에서 돌아 올 때 그림 한 장을 가지고 왔어요. ... 노동자 한 사람이 커다란 십자가를 지고 무거워서 허리를 꾸부정하게 하고 걸어가는데, 배경에는 시커먼 도시의 실루엣이 그려져 있고, 그 십자가 위에서 신부가 앉아서 졸고 있고, 배가 나온 사장도 앉아 있고, 학자가 책을 읽고 있고… 그들이, 모두 노동자가 지고 가는 십자가에 올라앉아 있어요." 독일 유학중 내내 공부방에 걸어뒀다는 그림이다. 그의 민중 의식은 그렇게 태동하고 있었다. 이 무렵부터 그는 '민중'이란 말을 즐겨 썼다.간도땅에서 살았던 소년 안병무는 제국주의 자본주의 같은 단어를 먹고 자랐다. 소학교 4학년때 교장을 상대로 스트라이크를 주도하다 퇴학당한 경험은 일종의 원체험이었던 셈이다.그에게 민족 의식을 심어준 곳이 바로 교회였다. 그는 구약 속 이스라엘 민족의 고난을 한민족의 수난과 동일시했다. 독립군계, 좌익계, 미션계 학교 중 미션계인 은진중을 택했다. 윤동주, 강원룡, 문동환 등 훗날 한국에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게 될 인물들과 함께 수학한 곳이다. 당시 야학과 밀접했던 교회는 민족 운동의 거점이었다.안병무에게 간도는 예수 당시의 갈릴레아 같은 이방인의 땅, 민중의 현장이었다 그가 '아무래도 정신 차려야겠다. 현재의 교회로는 안 되겠다. 뭔가 새로운 정신의 모태가 될 수 있는 공동체를 시작해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한국전쟁 때 피난간 전주에서였다.12호까지 만들었던 잡지 에서 그는 "예수 팔아 밥 먹는 것은 옳지 않다. 직업적인 목사 두지 말고 평신도 교회를 하자." 바로 향린교회의 이념이다. 이미 독일 유학시절 그가 에 투고한 글은 "왜 내가 서구 사람의 질문을 하고, 그들의 대답을 하는가" 하는 반성이었다.하지만 그의 반성의 대가는 엄혹했다. 그는 1967년 동백림 사건, 1969년 삼선개헌 반대 백만인 서명 운동에 이어 1972년에는 민중을 신학의 테마로 글을 썼다가 투옥됐다. "나는 성서를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 등 종교적으로만 보지 않는다. ... 오늘날 한국에서 일어나는 민중 사건들은 단절된 독립 사건들이 아니라, 2,000년 전의 예수 사건과 맥을 같이 한다"고 밝혔다. 그의 눈에 한국은 민중이 주인 되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싸움, 즉 예수 사건의 현장이었다.그것은 출발점이었다. 민중을 바로 말하기만 한다면 민족ㆍ민주도 다 포괄되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 신학은 '삼민 신학'을 신학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허울뿐인 민족주의로 정권이 유지돼온 현실에 신학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절대적 무관심으로 응답하고 있었다. 그가 한국신학연구소를 만들었을 때 첫번째 설립 목적은 '분단 과제를 신학적으로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였다.자본주의 체제 아래 눌리고 빼앗긴 민중의 힘을 살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이름 아래 일부 엘리트들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는 민중의 힘이 되살아 나서, 즉 남북 민중의 힘이 하나로 규합돼야 한다는 관점이었다. 이것 아니고서는 민족 통일ㆍ민족 해방의 길이 없다고 그는 단언했다. 민중 신학이란 한국의 분단 상황에서 특수한 의미를 가지고 성립된 언어인 것이다.그는 "내가 뼈에 사무치게 느끼는 것은 한국 사람은 한국 사람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기 이전에 한국인이어야 한다. 속속들이 서구화된 것, 이것을 극복해야 한다"고 썼다. 신학이 학문하는 사람들의 전유물에서 해방돼 평신도들의 손에 주어지고 그들 나날의 삶에 방향을 제시하고 목회 현장에서 힘을 발휘하는, 살아 움직이는 신학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신학의 현장, 한국에서 태어난 것을 그는 항상 감사했다. "어떻게 하면 이 분단 상황에서 신음하는 민중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을까? 여기서 민중 신학이 나온 것이지요." 그것은 동시에 한국의 교회 현실에 대한 비판이었다. 책은 " '오직 말씀'을 강조하면서도 실은 성서의 권위를 빌려 어떤 특정한 교리를 정당화할 수 있게 성서를 한갓 편리한 도구로 이용한다"며 여러 종파가 난립 가능성을 지적한다. ... "놀랍게도 성서 지상주의를 내세우면 내세울수록 성서는 버림받고 무시당한다"는 그의 비판은 오늘날 여전히 유효하다.■ '안병무 평전' 낸 소설가 김남일"처음에는 엄두가 안 났지만, 2년 동안 그 분의 궤적을 좇아 파고 들었어요." 소설가 김남일(50)씨의 손에는 최근 빛을 본 365쪽의 책 이 들려 있다.기독교에 무지할 뿐더러 1980년대 계간 편집장 등으로 출판사에서 일할 때 먼 발치서 안병무 박사를 스치듯 본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평전을 내기로 한 출판사의 간곡한 요청에, 그는 끈질긴 취재와 문학적 구성력으로 고인의 짙은 인간미를 되살려냈다.출발점은 향린교회. 당시 그 곳은 곧 '데모장'으로 인식되던 때였다 "교회 하면 세상과 섞이지 못하는 착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는 느낌을 주잖아요? 그러나 선생이 세운 교회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어요. 그들은 세상과 함께 나아간다는 사실을 제게 똑똑히 보여주었으니까요."무신론자인 김씨에게는 당연히 '인간 안병무'가 최대의 관심이었다. "유쾌하고 농담도 즐기던 분이셨어요. 46세에 늦장가를 가니 좋은 점이 하나 있다고 하셨대요. 감옥 갔을 때 면회 올 사람이 있다는 것이라고." 가족들은 물론 그의 신학적 지평에 접근하기 위해서 종교인들과 깊은 대화를 마다하지 않았다.신학자 김진호씨에게서는 전태일에 대해, 기독교공동체인 목포디아코니아자매회의 여성숙씨에게서는 고인의 인간적 측면에 대해 도움말을 들었다. 결핵 전문의인 여씨는 고인과 종교에 대해 편지를 교환하는 등 깊이있는 교분을 나눈 사람이다.김씨는 11월 중순까지 열리는 '아시아 아프리카 문학 페스티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을 쓰는 작업은 김씨에게 새로운 문학적 과제도 던졌다. "서구문화 수입 일변도인 우리 문학을 반성하자는 거죠." ... 그는 "안병무 선생이 보여준 시야의 깊이에까지 도달하고 싶다"고 말했다.■ 안병무 약력1922년 평남 안주군 출생1941년 일본 다이쇼대 문학부 입학1946년 서울대 사회학과 입학, 종교학 부전공1953년 향린교회 창립1956년 독일 하이델베르크대 유학1970년 한신대 교수1975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한신대 강제 해직1980년 두번째 강제 해직1994년 재단법인 천원(현재 '아우내') 이사장 취임1996년 사망▦저서 (1975) (1993) (1996) (2006) 등장병욱 기자 aje@hk.co.kr

[우리 시대의 명저 50] <39> '김훈·박래부 기자의 문학기행'

2007.10.04 00:04
“문학작품을 창조하는 일이 시인ㆍ작가의 일에 속한다면, 문학을 탄생시킨 현장-그 지리적 배경과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고 보존하는 일은 문화의 향수자인 우리 모두의 기쁜 책임이기도 하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소중한 명작의 본적지를 찾아 창조적 기쁨을 함께 나누면서, 그 문화의 원형을 복원ㆍ보존ㆍ재창조하는 길을 구상해 본다.”한국일보 1986년 5월11일자 5면엔 이 같은 편집자 주(註)가 실려 ‘문학기행-명작의 무대’(이하 문학기행)란 기획 연재의 시작을 알렸다. 탁월한 문학적 성과를 거두고 있는 생존 작가와 함께 그들의 대표적 소설 및 시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지역을 찾아, 문학과 현장의 창조적 길항 관계를 탐색하겠다는 참신하고도 묵직한 포부였다.입사 9년차의 출판 담당 박래부(56ㆍ현 한국일보 논설위원실장) 기자는 당시 탈고 막바지에 다다른 박경리씨의 대하소설 의 무대인 경남 하동 평사리를 답사하고 마수걸이 기사를 썼다. 한 주 뒤인 18일자엔 문학을 담당하던 13년차 김훈(59ㆍ소설가) 기자가 의 작가 김승옥씨와 함께 가상 공간 ‘무진(霧津)’의 본적, 전남 순천만을 둘러보고 한 면 가득 기사를 부려놓았다.86년 5월~87년 8월, 88년 10월~89년 5월에 걸쳐 무려 85회 연재된 문학기행은, 몇몇 후배 기자의 일시적 참여를 제외한다면, 온전히 김훈, 박래부 두 기자의 성실한 취재와 유려한 문장으로 쌓아올린 기념비적 성과였다.연재가 시작된 86년은 언론사 정ㆍ폐간 결정권을 손에 쥔 문공부가 산하의 홍보조정실을 통해 매일 언론사에 ‘보도지침’을 전달하던 시기였다. ... 기관원들이 신문사를 무람없이 드나들며 편집권을 침해하던 억압의 시절, 명작의 모태를 찾아 삶과 아름다움을 논하던 문학기행은 암담한 세월을 겨우 살아가던 이들이 망명할 수 있는 ‘말의 공화국’이었다.당시 대학생이었던 문학평론가 박철화씨는 “문학기행은 저 엄혹한 80년대를 말의 사랑으로 끌어안으며, 현실 앞에 절망하지 말 것을 요청하는 한 편의 서사시”이자 “그 기행을 쫓아감으로써 악몽과도 같은 청춘을 견디게 해주었던 아름다운 마약”이었다고 추억했다.문학기행의 전반기(86~87년) 연재분은 87년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됐고, 97년엔 두 사람의 기사 71편을 묶은 (전 2권ㆍ한국문원 발행)이 나왔다가 절판됐다.저자들의 신문사 후배 김창영씨가 운영하는 출판사 ‘따뜻한손’은 2004년 홍명희, 김지하, 박노해, 권정생, 전경린 등 다섯 꼭지의 글을 추가하고 전체 분량을 50편으로 추려 (전 2권)이란 제목의 증보판을 펴냈다. 어느덧 머리가 허옇게 센 우리 시대의 문사 두 사람이 오랜만에 마주앉았다.-연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김훈=86년 봄에 장명수 문화부장(한국일보 고문)이 남도 여행을 다녀와서 문학기행 연재를 지시했다. 불과 열흘 만에 취재에 착수했으니 전체 계획이 미진한 채 시작된 셈이다. 준비는 안됐는데 마감은 숨막히게 돌아왔다. 우리가 속을 좀 썩이긴 했지만, 장 선배 말을 알아들었고 그 말을 향해 몸을 던졌다. 장 선배가 이걸 좀 알아주시길 바란다.박래부=장 부장에게 등을 떠밀려 원주에서 박경리 선생을 만나고 다시 평사리로 갔다. 밤을 세워 원고지 30여 장짜리 첫 회 원고를 넘겼다. 2회가 김형 차례였는데 순천에 다녀와 원고를 넘기곤 못하겠다고 했다. 김형이 마음을 고쳐먹기까지 한 달 간 혼자서 참혹하게 시리즈를 끌고 갔다. 세상일이 신통한 것이, 1년쯤 뒤 내가 일본 연수를 떠나는 바람에 김형이 예전의 나처럼 한 달 반가량 혼자서 기사를 써야 했다. 결국 힘에 부쳐 한동안 연재가 중단됐다가 내 귀국 후 재개됐다. ... 서사성이 중요한 기획이다보니 소설을 많이 다뤘다.김훈=당시 문학을 비롯한 우리의 정신사는 양극화된 상태였다. 지금도 어느 정도 그렇지만. 순수문학과 참여문학 진영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어떻게 조화롭게 안배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서 작품 선정에 신경을 쏟았다.박래부=부끄러운 얘기지만 기자로서 어디까지 쓸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늘 있었다. 넘으면 신문사를 떠나야 하는 보이지 않는 선이 있는 상황에서 투사적 면모를 보이기란 쉽지 않았다. 연재가 시작되고 네 달 후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가 지에 보도지침의 존재를 폭로하고 이듬해엔 6월항쟁이 일어나면서 민주적 분위기가 많이 확산됐다.김훈=언론의 속성이자 한계이겠지만 문학기행이 한국 현대문학사를 관통하면서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을 골라 다뤘다고 보긴 힘들다. 만약 그런 생각이라면 이광수부터 시작해야할 텐데 ‘흥행’을 고려해야 하는 대중 매체가 그렇게 하긴 힘들다.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작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문학 작품을 현장과 연결시키는 작업은 어떤 의미가 있나.김훈=현장은 문학과 무관하지 않고, 명백히 그 뿌리가 되기도 하지만 그것을 글로써 증명해내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문학이 리얼리즘의 바탕에서 떠나있는 오늘날엔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그런 면에서 문학기행은 우리 세대가 읽고 자란 문학에 대한 헌사 같은 것이었다.박래부=작품 속 시간과 공간 배경엔 작가 나름대로 상상력을 동원해서 파악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 문학기행은 그런 역사적 의미를 발췌해서 하나의 시리즈로 기록해두는 작업이었다. 그때만 해도 지금과 달리 공간적 원형이 어느 정도 보전돼 있었다. 원래 모습이 훼손되기 전에 현장을 포착하고 작가의 얘기를 적어둔 것은 이젠 불가능하기에 더욱 의미있는 기록 작업이었다.-암울한 시대에 정신적 탈출구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많다.김훈=‘한국문학 지도 그리기’가 원래 기획 취지였지만 그것은 너무 방대한 작업이었고 결국 지도를 다 그리지 못했다. ... 대신 회를 거듭하면서 문학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고, 이로써 야만의 시대에 인간과 시대에 대한 소통을 열어줄 수 있었다는 보람을 느낀다. 가령 조해일의 를 다루며 기지촌 여성의 쓰라린 삶은 ‘부도덕이 아닌 불행일 뿐’이라는 작가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런 것이 인간을 이해하는 작은 단서가 됐다고 믿는다.박래부=억압적 상황이 상존하던 당시, 문화부 내에서 억압의 최전선에 있던 기자는 문학 담당 기자였을 것이다. 80년대는 문학의 위상이 크고 독자에 대한 영향력도 강한 시기였다. 죽은 고정희 시인은 자기 시를 “의미를 숨길 수 있는데까지 숨기고, 표현을 우회할 수 있는데까지 우회해서 쓴 것”이라고 했는데, 그 작품 속 메시지를 수위조절을 해가며 독자에게 전하는 일이 문학 기자의 몫이었다.김훈=문단을 비롯한 독자들의 반응은 열광적이고 진지했다. 편지, 전화가 많이 오고, 찾아와서 격려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반발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자기 작품 안 다뤄준다고 항의하는 소설가들이었다(웃음).박래부=당시 신문 발행면이 12, 16면 정도였는데 그 중 한 페이지를 할애해 장기 연재하는 것은 굉장한 일이었다. 이후 다른 신문사에서도 몇 번의 시도가 있었지만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다시 느끼기는 힘들었다. -서로 경쟁심을 느끼진 않았나.김훈=박형은 나와 한 번의 분란도 없었던 이상적인 파트너였다. 장 선배가 좋은 리더십을 발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박래부=각자 자기 일 하느라 바빴다. 한 주는 다녀와서 기사를 써야 했고, 다른 한 주는 다음 문학기행을 위해 읽어야만 했으니까.▲저자 약력▦김훈1948년 서울 출생. 고려대 영문과 중퇴. 74년 한국일보 입사 이후 30년 가까이 기자 생활을 했다. 2001년 장편 를 발표하며 소설가로 명성을 얻었다.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수상. 유려하고도 서릿발 같은 문체로 장편 , 소설집 , 여행산문집 , 시론집 등을 냈다.▦박래부1951년 경기 화성 출생.

[우리 시대의 명저 50] <38> 정수일의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2007.09.27 02:52
일제 강점과 분단 비극의 민족사를 온몸으로 체험하며 드라마틱한 인생 역정을 보낸 한 지식인이 있다. 함경도에서 북간도로 흘러간 유랑민의 자손으로 태어나 중국에서 25년, 북한에서 15년, 해외에서 10년, 남한에서 12년, 그리고 4년간의 감옥생활을 거쳐 출옥이후 문명연구가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정수일(73)씨다.11년 전 그가 무하마드 깐수란 아랍계 외국인이 아니라 정수일이란 이름의 북한 공작원임이 밝혀져 투옥된 후 그의 정체를 알지 못하고 같이 살아왔던 아내에게 보낸 옥중편지를 모아 출옥 후 엮어낸 것이 (2004년 창비 발행)이다. ‘나를 잊어주오’라는 절규에 ‘기다림’이란 큰 사랑으로 화답한 아내에게 그는 그 동안 자신을 감추느라 못했던 이야기, 미루어오던 이야기, 하고 싶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젊은 시절 중국 외교부에서 촉망받던 엘리트였던 그가 수 십년이 흐른 뒤 둘로 갈라진 조국의 한쪽에서 외국인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간첩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차디찬 감옥 안에 갇혀있을 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의 마음을 헤아리기는 어려우나 학문 연구로 고통의 세월을 극복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감옥 안에서도 분초를 아껴가며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인 문명교류사 연구에 잠심몰두(潛心沒頭)한 흔적이 옥중편지 곳곳에 남아있다.1996년 7월 검거돼 그 해 12월 15년형을 선고받은 나흘 뒤 보낸 편지에서 그는 “전에 발표했던 논문들을 한데 모아 책으로 엮고싶다”며 25편의 논문 제목과 발표한 곳, 호수와 형태 등을 기억나는 대로 적어 아내에게 보냈다. 그러면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이제 충격과 비탄에서의 허둥거림을 그만두고 황소처럼 묵직하고 침착하게 앞만 내다보면서 걸어나가야 할 것이오. 하나하나를 새로이 출발하고 새로이 쌓아간다는 심정과 자세로 과욕이나 성급함을 버리고 천릿길에 들어선 황소처럼 쉼 없이, 조금도 쉼 없이, 오로지 앞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 할 것이오.”우보천리(牛步千里). ... 그는 감옥 안에서 스스로에게, 또 아내에게 이렇게 다짐하면서 학자의 길에 매진했다. “세상이 실로 무상함을 절감한 나로서는 비록 영어의 몸이지만 최선을 다해 정진할 것이오. 무위도식이나 허송세월은 나를 괴롭힐 뿐이오. 일각을 천금으로 여기고 한 순간 한 순간을 값 있고 뜻 있게 보내겠소.”그를 이토록 학문연구에 집착하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인생을 버티고 있는 그 무엇인가를 짐작하게 할 수 있는 한 대목을 옮겨보면 이렇다. “나는 분단비극의 체험자로서 내가 살아온 인생여정을 가끔 되돌아볼 때마다 내가 자신하는 것은 겨레사랑의 민족주의라는 사실이오. 이것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과는 다른 운명의 길을 걸어왔을 것이오. 나는 시대나 겨레를 떠나서 내 인생을 생각해본 적이 없소.”그는 고등법원에 제출한 상고이유서에서 충정과 이상,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는 분단시대의 한 민족적 지성인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했다. 1984년 남한 땅에 첫발을 디딘 그는 목포에서 부산까지 남해안을 누비다 거제도 해금강에서 어릴 때부터 동화 속의 그림처럼 마음에 간직했던 겨레의 꽃 ‘남해의 해당화’를 발견하고 한걸음에 달려가 꽃망울에 볼을 비비고 또 비벼댔다고 했다.타향살이에서도 나라와 겨레를 잊지않고 미래를 설계하던 다른 열혈청년들처럼 베이징(北京)대학 3학년 시절 친구에게 보낸 연하장에 적은 위국헌기위지고(爲國獻己爲至高ㆍ나라를 위해 자기를 바치는 것이야말로 가장 숭고한 일이다)라는 칠언구는 인생의 좌표였다고 한다.이런 인생관을 가진 그는 우리 민족의 교류사를 연구해 세계 속의 한국이란 민족사의 위상을 복원하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 법원도 원심 판결문에서 “개인적으로 정세분석 보고 이상으로 학문연구에 가치를 두었고, 이러한 행위가 단순히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학문적 열정에 따른 것임을 알 수 있다”고 열정을 인정했다.그는 ‘시대의 소명에 따라 지성의 양식으로 겨레에 헌신한다’는 삶의 화두를 스스로 만들고 안거(安居)를 나는 선승들처럼 학문에 몰두했다. 한국어를 포함, 동양어 7종과 서양어 5종 등 모두 12종의 언어를 구사하는 그는 문명교류학의 학문적 정립을 위해 필요하다며 산스크리트어 공부를 새로 시작하기도 했다.책상이 없는 감방 안에서 두 다리를 포갠 채 글을 쓰느라 발등이 희끄무레하게 변색이 되고 하체가 거의 마비가 되면 간신히 일어나 어정어정 걸음을 걷다 다리에 생기가 돌아온 뒤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고 했다. 다양한 학문적 연마를 거쳐 문명교류학과 아랍-이슬람학, 두 분야에 집중한 그는 감옥에서 문명교류학 연구의 핵심인 실크로드학에 관해 200자 원고지 2만5,000매의 원고를 썼다.2000년 8월 출옥한 후에는 등 저서 및 역주서 등을 출간하면서 감옥에서 못한 실크로드 답사와 문명교류사 연구로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정수일 연보1934년 중국 옌볜 출생49년 옌볜고급중학교52년 베이징대학 동방학부56년 카이로대학 인문학부58년 중국외교부 근무64년 평양국제관계대학 및 평양외국어대학 교수82년 말레이대학 이슬람아카데미 교수84년 단국대 사학과 박사과정88년 단국대 사학과 초빙교수96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수감2000년 출감▲저서 (공저), 역주서 ■ 40일간 몽골·인도 답사 "신 실크로드 조명해야"정수일씨는 지난 여름 40여일 간 몽골과 터키, 인도의 실크로드를 답사했다. 실크로드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미흡함을 느낀다는 그는 요즘은 '철의 실크로드'니, '경제 실크로드'니, '오일 실크로드'니 하는 이른바 '신실크로드'에 관해 특별한 학문적 관심을 갖고 있다." ... 몽골, 터키, 인도는 실크로드 3대 간선의 요지에 자리한 나라들로서 볼만한 것이 참 많았습니다. 모두들 나름대로의 전통을 이어가면서 '신실크로드'의 새 시대를 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곳곳에서 우리네 역사 문화와 관련이 있는 유물에 접할 때면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습니다. 분명 실크로드가 우리 한반도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순간이었으니까요." 그는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따라 문명교류의 통로인 실크로드의 개념이나 기능을 새롭게 조명하고 정립해야 한다고 했다.정씨는 지난해 여름 그를 따라 중앙아시아 실크로드를 답사한 이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실크로드학교에 큰 애착을 보이고 있다. 수강하는 이들은 여행을 하려는 사람, 해당 지역의 역사 문화를 알려고 하는 사람, 문명교류와 실크로드에 관심있는 사람 등 다양하다.매 학기 한 번씩(1년에 2회) 실크로드 현장을 답사하며, 이를 위한 준비로 매달 한 번씩 답사할 나라나 지역에 대한 강의를 진행한다. 지난해 겨울에는 이란 페르시아루트, 지난 여름에는 터키 아타톨리아루트를 답사했으며 올 겨울에 서아시아 3국(시리아 요르단 레바논)을 답사하기 위해 현재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정씨는 실크로드학교 외에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문명교류학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올해 초부터 속편으로 집필을 시작했다는 그는 번잡한 일상에 쫓기다 보니 진척은 더디지만 지식의 사회적 환원이란 본분을 조금이라도 다해보려는 생각은 놓치지 않고 있다고 했다.국내 이슬람 연구의 선구자인 그에게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났던 개신교 신자 납치사건에 대해 물었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한국정부와 탈레반 사이에 맺은 합의서 내용은 연내 철군과 선교 금지 두 가지가 아닙니까. 이는 이 사건이 정치적 및 종교적 복합동기에서 발발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측면에서 공히 교훈을 찾고, 합의는 국제적 신의이기 때문에 지켜야 할 것입니다. ... 한편으로 사건의 전말을 지켜보면서 이슬람교와 기독교, 아프간의 정세 등에 관한 우리의 이해와 판단이 너무나 어설프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옹골찬 전문가가 없습니다." 그는 언제까지나 남들이 마구 내뱉는 보도나 언설에 무턱대고 기댈 수는 없다면서 지적 축적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그는 많은 언어를 익힐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저는 언어전공자는 아니지만, 본의 아니게 이곳 저곳에서 외국어 교육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공부하고 써보고, 또 가르치면서 얻은 경험이라면, 외국어란 취미를 가지고 꾸준히 해야 하고, 배울 기회와 환경을 능동적으로 적극 활용해야 하며, 정독과 다독의 결합 등 유효한 학습방법을 터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외국어란 알면 아는 만큼 유익하지요, 세계에로의 지평이 넓어져가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라고 답했다.남경욱기자 kwnm@hk.co.kr

[우리 시대의 명저 50] <36> 이기백의 '한국사신론'

2007.09.13 00:05
‘식민사관을 좌초시킨 우리 사학의 등대’.1967년에 출간된 이기백(李基白)의 (1976년 으로 개정)은 출간과 동시에 당시 국사학계에 커다란 충격을 던졌다.이 책은 일제 어용학자들에 의해 반도성(半島性), 사대성(事大性), 정체성(停滯性) 등으로 폄하돼 온 일그러진 한국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저자는 초판본 서문에서 “식민사관은 한국민족이 선천적 혹은 숙명적으로 당파적 민족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것이 민족적 단결을 파괴해 독립을 이룰 수 없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말한다면 민족성이 역사적 산물이지 역사가 민족성의 산물은 아니다”라며 식민사관을 통렬히 비판했다.고려대 민현구 교수는 “1960년대 들어 한국사학에 중요한 방향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지난날 일제 어용학자들의 그릇된 식민주의적 한국사관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동시에 한국사를 주체적으로 인식하고 발전적으로 파악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새로운 방향 제시는 해방 직후에 진출한 신세대 학자들이 주도했으며 그 결과로 얻어진 가장 값진 성과가 바로 의 탄생이었다”고 평가한다.1947년 출간된 이병도의 이 한국전쟁 이후 한국사학계에서 바이블 격의 지위를 누리고 있던 상황에서 나온 은, 이 넘지 못한 벽을 일거에 허무는 계기를 마련했다.뿐만 아니라 이 책은 식민지사학을 극복하는 데 머물지 않고 국사 연구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그 구체적인 작업은 시대구분을 통해 잘 드러난다.이기백은 왕조 중심의 시대구분은 물론 고대 중세 근대라는 서구식 3분법으로는 한국사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한국사의 시대구분의 기준으로 삼은 것은 지배세력의 변천과정이었다. ... 지배세력은 일정한 시기에 정치ㆍ사회 영역에서 주도권을 쥐고 역사를 움직여 나간 역동적인 인간집단을 말하며, 민중의 이익을 착취하는 지배계급이나 부르주아와는 구분되는 개념이라는 게 이기백의 설명이다.그는 이에 따라 한국사의 발전과정을 ▦원시공동체 사회 ▦전제왕권의 성립 ▦호족의 시대 ▦문벌귀족의 사회 ▦신흥사대부의 등장 ▦사림세력의 등장 등 16단계로 체계화했다.지배세력이 씨족국가에서 부족국가,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현대를 거치면서 소수 집단에서 벗어나 점차 사회의 중추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사의 발전과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자 독창적 발견이었다. 지배세력의 변천과정은 초판에서는 18단계, 1976년 개정판부터는 16단계로 정리했다.이기백은 이런 사관에 따라 지배세력의 몰락과 쇠퇴과정보다는 새롭게 등장하는 세력에 초점을 두는 방식으로 한국사의 주체적ㆍ역동적 흐름을 읽어냈다.그는 자신이 이같은 역사적 시각을 갖게 된 것에 대해 “농민운동가였던 선친(이찬갑 선생)의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일제 하에서 역사와 언어마저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선친의 당부를 들어온 그는 오산학교에 진학, 교사로 있던 함석헌의 와 신채호의 를 읽으면서 뚜렷한 역사관을 갖게 됐다.일본 와세다대에 재학 중이던 1945년 징병으로 전쟁터에 끌려갔다 곧바로 소련군 포로가 된 이기백은 한국인 포로수용소에서 동료들의 권유로 한국사를 강의하며, 신채호과 함석헌 등의 역사관을 토대로 개설서를 썼다. 이 필사본 개설서를 시작으로 그의 오랜 한국사 탐험이 시작된 것이다.이기백은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를 1회로 졸업한 뒤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61년 봄 교재용으로 을 펴낸다. 이 책이 바로 6년 뒤에 발간된 의 모체다. ... 은 이후 개작을 거듭해 1976년에 개정판, 1990년에 신수판, 그리고 1992년 1월에 신수중판을 펴내면서 현재까지 35만부 이상 팔린 스테디셀러다.이 책은 또 1970년 일본어로 처음 번역된 이래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 말레이시아어 러시아어 등 6개 국어로 번역 출간돼 외국인들에게 한국사를 이해하는 필독서로 사랑을 받고 있다.이기백은 생전에 자신의 역사관을 ‘인간 중심 사관’이라 표현하고 “역사발전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균등한 행복을 주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은 이런 사관에 바탕해 신채호의 항일사관, 함석헌의 기독교사관, 손진태ㆍ이인영의 신민족주의사관, 그리고 유물사관의 영향을 비판적으로 수용ㆍ극복하고, 세계사의 보편적 흐름과 함께 하는 새로운 한국사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었다.▲이기백 연보1924년 평북 정주 출생41년 오산중학교 졸업47년 서울대 사학과 졸업56년 서울대 강사58년 이화여대 교수63년 서강대 교수67년 출간76년 개정판 출간85년 한림대 교수90년 재개정판 출간99년 이화여대 석좌교수2004년 별세▲저서(1968) (1986) (1990) 등 저서와 편ㆍ역서 30여 권, 논문 160여 편■ 자신에 엄격했던 ‘학같은 선비’… 역사학의 서강학파 일궈"어차피 죽을 바에는 공부를 하다가 죽는 게 낫다."2004년 6월 2일 80세를 일기로 별세하기 직전까지도 이기백은 이렇게 말하며 학문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고 한다. 명저 을 비롯해 등 신라ㆍ고려사 연구에서 그가 이룩한 혁혁한 연구성과는 이같은 열정의 산물이었다.이기백의 제자들은 그를 '학(鶴) 같은 선비'로 기억한다. 언제나 묵향이 묻어나올 듯한 하얀 모시적삼을 입은 단아한 모습이 영원한 이기백의 상이다.그는 작고 직전 병세가 급속히 나빠지자 직계가족 외에는 문병조차 받지 않을 정도로 스스로에 대한 엄격함을 보였다. 40여년을 대학에 몸담았으면서도 연구소를 제외한 일체의 보직을 맡지 않았다. ... 정두희 서강대 교수는 "대학원 시절 세미나는 제자들이 선생님의 학설을 비판할 정도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이뤄졌다"며 "선생님은 당신과 다른 견해라 하더라도 옳다고 생각되면 다 받아들였다"고 말했다.이기백은 1963년 서강대 교수로 부임한 이후 22년간 후학을 양성하면서 전해종(동양사), 길현모 차하순(서양사) 교수와 함께 '서강학파'라는 학맥을 일궜다. 하지만 정작 그는 '학파'니 '인맥'이니 해서 세속적 인연으로 학문하는 사람들을 분류하는 것을 지극히 싫어했다고 한다.홍승기 정두희 이종욱(서강대), 이기동(동국대), 김두진(국민대), 김용선(한림대), 김수태(충남대), 신호철(충북대), 김당택(전남대), 노용필(덕성여대), 조인성(경희대) 교수 등이 그의 제자들이다. "이기백 선생님은 진리와 도덕을 조화시키고 실천하는 선비였다"는 게 이들의 한결 같은 이야기다.권대익기자 dkwon@hk.co.kr

[우리 시대의 명저 50]〈25〉이진경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 방법론'

2007.06.28 00:11
1985년 57호에서 박현채의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이하 국독자론)과 이대근의 주변부자본주의론(주자론)이 충돌했다.“자기 나라의 성격을 해명하려 수많은 활동가, 연구자가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열성적으로 논의에 참여”(조현연)했던 사회구성체 논쟁의 서막이었다.주자론이 패퇴하고 식민지반봉건론(식반론)이 국독자론과 맞서는 상황에서 87년 5월 스물네살 대학원생 이진경은 (ㆍ아침 발행)을 들고 논쟁에 가세했다.“번역서가 아니라 수입 이론을 소화해 사구체에 대한 본격적 이론을 전개한 최초의 국내 저술”(정성기)을 통해 이진경은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 입장에서 민족해방투쟁(NL) 측의 식반론은 물론, 같은 민중민주변혁(PD) 계열의 수장격인 박현채의 이론까지 논파했다.쟁점은 한국사회가 어떤 사회구성체에 속하는가 였다. ‘social formation’의 번역어인 사회구성체는 한 사회를 생산관계인 토대와 그에 상응하는 상부구조의 유기적 통일체로 파악하는 마르크스적 개념이다.식반론 이론가들은 “일제 식민지였던 조선은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한 것이 아니라 근대적 지주제가 토대, 식민지 국가권력이 상부구조를 이루는 특수한 사회구성체”라고 주장했다.이진경은 조소했다. “군사적 측면 등에서 미국의 영향이 강하니까 식민지라고 하는 것은 그렇다 쳐도, 60년대 이후 이촌향도로 인구의 절반 이상이 노동자인 상황을 봉건사회로 규정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여타 이론들을 ‘주관주의’ ‘관념론’으로 치부하며 의 저자는 한국사회가 명백히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에 속한다고 단언했다. 봉건사회의 잔재들조차 자본주의적 보편이 특수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20년이 흐른 지금 이진경은 당시에 쓴 문장들이 멋쩍다. “자본주의의 보편성, 역사법칙 등 마르크스-레닌의 주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던 시절이었다. ... 지금이야 어디서나 동일하게 관철되는 사회발전 법칙이란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이후 논쟁은 국독자론 우위의 NL-PD 논쟁으로 한층 정교해졌고, 은 85년부터 본격 출판되기 시작한 좌파 이론서들과 더불어 대학가, 노동운동 현장의 필독서로 자리매김했다.윤소영, 서관모 등과 잡지 을 창간해 혁명의 이론적 문제들을 개진하는 한편으로 이진경은 비합법 잡지 을 통해 전국에 분산된 혁명 조직의 구심점 역할을 모색했다. 정작 여러 혁명 단체의 인사들과 접촉하게 된 것은 감방 안이었지만.이적단체를 구성했다는 죄목으로 징역을 살던 90, 91년 소련이 무너졌다. 레닌의 를 성서로 여겨왔던 젊은 혁명가에게 책 제목은 질문으로 고스란히 되돌아왔다.감옥에서, 출옥 후 꾸린 세미나에서 알튀세르, 푸코, 라캉, 프로이트, 데리다, 소쉬르, 야콥슨, 심지어 셰익스피어까지 온갖 분야의 책을 읽었다. “사회주의가 망한 이상 예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혁명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운동할 것인가라는 근본적 문제부터 다시 생각해야 했던 시기였다.”에서 “개념의 공동묘지 속에서 무당들이 불러낸 망령들의 집합”으로 깎아 내렸던 알튀세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사회주의 붕괴 훨씬 이전부터 마르크시즘의 위기를 인식했던 이 프랑스 사상가의 논의에서 “마르크시즘의 도식적 이해를 거부하되 그 본령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창조적 탈주선을 그리려는 시도”가 감지됐다. 하지만 라캉의 무의식 개념을 적극 받아들인 그의 사상엔 혁명적 사유가 허약했다.이런 상황에서 만난 푸코와 들뢰즈는 희망의 다른 이름이었다. 김현의 를 통해 처음 접한 푸코의 이론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극복했음에도 사회주의가 왜 몰락했나”에 대한 고민의 실타래를 풀어줬다.문제는 ‘근대성’이었다. ... 지배자도 신분도 없는 근대사회의 지배ㆍ통제 메커니즘을 다각도로 폭로하는 푸코의 저작을 통해 이진경은 “자본주의를 넘어선다고 해서 근대성이 자동으로 극복되는 것이 아니며, 자본주의와 근대성을 동시에 뛰어넘는 이중 혁명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들뢰즈에게 배운 것은 자본주의 및 근대를 ‘외부를 통해 사유’하는 방법이었다. 그것은 체제를 자폐적이고 완결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나아가 체제 외적인 것을 끊임없이 포획해 내부화하려는 체제 작동 방식에서 ‘탈주’해 끊임없이 외부를 창조하는 실천을 말한다.93년 를 읽으며 “혁명을 근본에서 사유하려는 열정에 감동받”은 이진경은 이후 10년간 들뢰즈를 천착한다. 그가 2002년 말에 내놓은 은 들뢰즈가 가타리와 함께 쓴 의 해설서이자 “10년의 도제수업이 끝났다는 자기선언”이다.“어느 한 사람의 이론에 기대거나 주석하는 것에서 벗어나 ‘나’라는 지점에서 새롭게 사유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고 그는 말한다.“여전히 혁명에 대한 꿈을 갖고 산다”는 이진경은 지금 ‘코뮨주의자’다. 멸망한 사회주의를 일컫는 ‘코뮤니즘’이 아니라, 마르크스가 기획했던 근대 및 자본주의 전복의 표상인 코뮨(commune)을 추구하는 것이 코뮨주의다.“국경과 민족이라는 동일성을 횡단하고 해체하는 소수자들의 탈근대적 삶의 공간”이자 “생산관계뿐 아니라 근대적 습속에 젖은 삶의 방식까지 바꾸려는 노력”으로 코뮨을 설명하는 그에게 자급자족적 생활공동체이자 학문공동체인 ‘수유+너머’는 바로 그 실천의 장이다. 혁명은 불온한 것이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답한다.“이전의 혁명은 권력의 장악과 연계됐기 때문에 혁명성은 지배계급을 긴장시키는 불온성과 같이 갈 수 있었다. 이젠 불온성이 혁명의 척도가 될 수 없다. ... .”● 이진경 약력 1963년 서울 출생(본명 박태호)1987년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1990년 서울대 사회학 석사1998년 서울대 사회학 박사2003년 서울산업대 교양학부 교수(현)저서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이진경의 '생명의 정치경제학'이진경의 최근 관심사는 생명이다. (2006)에서 그는 생명체를 분할 불가능한 ‘개체’가 아니라 분할 가능한 요소들의 집합체인 ‘중-생’(衆-生)으로 새롭게 정의한다. 세포막, 세포질, RNAㆍDNA 등 수많은 요소로 구성된 세포에서부터 토양, 대기, 바닷물, 미생물, 식물 등의 거대한 순환계인 지구까지 생명체는 다양한 층위로 존재한다는 것이다.그는 생명체를 생물과 동일시하는 관념을 “생물을 위해서는 생명 없는 사물들은 어떻게 이용해도 좋다는 식”의 인간중심적 사고라고 비판한다. 그는 무생물이라도 다른 중-생들과 순환계를 구성, 유지할 수 있다면 생명으로 봐야 하며, 그런 관점 속에서 “기계와 자연은 더 이상 대립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그는 ‘순환의 이득’을 중시한다. 생명체는 서로에게 없는 것을 제공하는 ‘증여’를 통해 순환계를 구성한다. 증여는 등가적 교환과 구별되는 것으로, 이익과 손해를 따지지 않는 관계다.식물과 동물이 각각 산소와 거름을 내놓을 때 그것은 ‘한 번의 교환’이 아니라 ‘두 번의 증여’다. 순환의 이득은 제로섬이 아니라 과잉ㆍ중복되기 마련이며, 이런 잉여는 순환계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중요한 자원이 된다.이렇게 정초한 생명관 위에 이진경은 ‘생명의 정치경제학’을 전개한다. ... 그는 28일 ‘맑스코뮤날레’ 주제발표 세션에서 생명체가 발생시키는 순환의 이득을 ‘잉여가치’로 변환하려는 자본의 시도를 강하게 비판한다.혈액, 정자, 난자뿐 아니라 특정인의 몸에 있는 항체, 모세포가 값비싼 상품으로 거래되는 현실은 “생명산업이란 생명력의 해체를 생산과 착취의 일반적 방법으로 사용하는 죽음산업”임을 방증한다.특히 생명복제는 “유기체의 신체 구성 능력을 기계적으로 통제ㆍ조작해 순환계의 고리 자체를 끊고 잉여가치를 가공, 착취하는 시대”의 도래를 알린다고 그는 경고한다.이진경은 자본에 의해 생명이 착취당하는 지점과, 생명과 자본이 충돌하고 대결하는 지점에서 각각 생명의 경제학과 정치학이 사유돼야 한다고 말한다.그는 이번 발표에서 “생명의 권리가 아닌 생명에 대한 자본의 권리를 배타적으로 보증”하는 생명특허에 대한 투쟁을 제안한다.자연의 산물이 아니라는 이유로, 유전자 조작 박테리아의 특허권을 인정하고, 항체에 대한 권리를 당사자가 아닌 기업에 제공하는 상황을 문제 삼으며 “생명력을 착취당하는 생물뿐 아니라 그로 인해 순환의 이득을 상실하게 된 인간 자신을 위해서도 투쟁이 긴요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이훈성기자

[우리 시대의 명저 50] <13> 김구 '백범일지'

2007.04.04 23:37
처칠의 예에서 보듯, 서구에서 자서전은 유명 인사라면 누구나 출간하는 문학의 중요 장르이며 역사적인 자료로도 높은 가치를 인정 받는다.근대 이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자서전을 꼽으라면 백범 김구의 (국사원)가 단연 눈에 띈다. 올해로 출간된 지 60돌을 맞은 이 책이 여전히 우리시대의 명저로 인정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우리나라에 에 버금가는 자서전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 책
==

책과세상/ 새 책 - 세상의 모든 풍경 外

2010.08.27 12:08
문학ㆍ예술▦세상의 모든 풍경 전광식 지음. 동서양의 다양한 풍경화를 철학적 사유를 통해 읽어낸다. 이란의 이만 말레키, 핀란드의 후고 짐베르크 등 낯선 작가들의 작품이 대상이다. 학고재ㆍ356쪽ㆍ1만8,000원. ▦빵과 장미 캐서린 패터슨 지음. 권위있는 아동문학상인 뉴베리상을 두 차례 받은 미국 작가의 장편. 1912년 매사추세츠 노동자 파업을 노동자 자녀들의 눈으로 서술한 감동적인 실화소설. 우달임 옮김. 문학동네ㆍ360쪽ㆍ1만1,000원.▦버림받은 천사들 에이나르 마우르 그뷔드뮌손 지음. 22개국에 번역된 아이슬란드 작가의 장편. 생을 등진 정신분열증 환자를 주인공으로, 정신이상자의 내면을 서정적 문장으로 묘파했다. 정지인 옮김. 낭기열라ㆍ303쪽ㆍ1만2,000원.▦하늘을 나는 타이어 이케이도 준 지음. 차량 정비 불량으로 행인을 숨지게 했다는 누명을 쓴 중소 운송회사 사장이 결백을 증명하려 차량을 만든 대기업과 맞선다. 자본주의의 이면을 꼬집는 미스터리 소설. 민경욱 옮김. 미디어2.0ㆍ608쪽ㆍ1만5,000원. ▦컬러 오브 워터 제임스 맥브라이드 지음. 흑인 재즈 뮤지션인 작가가 폴란드 출신 유대인 어머니에 대해 쓴 에세이. 2명의 남편을 먼저 보내고 홀로 12명의 자녀를 길러낸 그녀의 삶이 감동적으로 서술됐다. 황정아 옮김. 올ㆍ332쪽ㆍ1만2,000원.교양ㆍ학술▦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 최성각 지음. 소설가이자 환경운동가인 저자의 서평집. 시대의 아픔, 권력에 대한 비판, 환경과 생태 문제 등을 녹여냈다. 동녘ㆍ475쪽ㆍ1만5,000원. ▦501 위대한 작가들 줄리언 패트릭 엮음. 세계 문학 거장 501명에 대한 개괄서. 호메로스부터 J K 롤링까지 다양한 시대와 지역의 작가들이 포함됐다. 김재성 옮김. 뮤진트리ㆍ640쪽ㆍ3만5,000원. ▦유교 가부장제와 가족, 자산 박미해 지음. 16세기 전후 조선에서 유교 가부장제가 확립돼가는 과정을 막스 베버의 사회경제사적 시각으로 분석했다. 아카넷ㆍ320쪽ㆍ2만원. ...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 최종덕 지음. 철학자인 저자가 다윈과 진화론과 한국사회라는 화두를 놓고 역사학자, 생물학자 등과 나눈 대담집. 휴머니스트ㆍ468쪽ㆍ2만3,000원. ▦조선 풍수, 일본을 논하다 김두규 지음. 교토, 나라, 에도 등의 풍수를 분석해 일본은 지형과 민족성에 맞도록 풍수를 일본화했다는 결론을 내린다. 드림넷미디어ㆍ344쪽ㆍ1만5,000원. ▦사랑의 대상으로서 시선과 목소리 슬라보예 지젝 등 엮음. 슬로베니아의 라캉학자들이 사랑하는 이들 사이의 시선과 목소리를 정신분석학적으로 검토한다. 라깡정신분석학회 옮김. 인간사랑ㆍ411쪽ㆍ2만원. 실용ㆍ경제▦나의 첫 회계책 _ 하쿠의 나무집 일기 김영린 지음. 외딴 섬에서 회계가 발전해나가는 과정을 소설 형식에 담아 회계의 원리를 자연스럽게 알려준다. 키위북스ㆍ240쪽ㆍ1만2,000원.▦30초 경제학 도널드 머론 엮음. 경제학의 50가지 주요 키워드를 경제학파, 경제시스템, 경제사이클 등의 주제로 분류해 간략하게 풀이했다. 이재영 옮김. 오픈하우스ㆍ264쪽ㆍ1만4,800원. ▦UN, IT’S MY WORLD 김정태 지음. 유엔에서 일하고 싶은 젊은이들을 위해 조직과 채용 시스템 등을 소개. 유엔 산하 유엔거버넌스 홍보팀장이 썼다. 럭스미디어ㆍ460쪽ㆍ2만5,000원. ▦백악관 주식회사 찰스 가르시아 지음. 백악관이 주최하는 리더십 프로그램 ‘백악관 펠로십’을 거친 사람들을 인터뷰해 리더십의 성공 원칙 19가지를 제시한다. 이영래 옮김. 황소북스ㆍ384쪽ㆍ2만원.▦대한민국 국도 1번 걷기여행 신미식 등 지음. 40대 남자 2명이 목포에서 서울까지 450㎞를 함께 걸었던 기록을 사진과 에세이로 담았다. 뜰ㆍ352쪽ㆍ1만5,000원.어린이ㆍ청소년▦합★체 박지리 지음. 청소년 성장소설. 난쟁이 아버지의 자식이라 그런지 키가 너무 작아서 고민인 고1 쌍둥이 형제의 유쾌한 이야기. 제8회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 사계절ㆍ251쪽ㆍ9,500원.▦곰브리치 세계사 에른스트 곰브리치 지음. ... 재미와 깊이를 모두 갖춘 명저. 박민수 옮김. 비룡소ㆍ464쪽ㆍ1만7,000원.▦날개할아버지의 우리 아기 눈맞춤책 이상희, 안상수 지음. 갓난아기들을 위한 작고 사랑스런 그림책. ‘해님 달님 우리 아기’(0~2개월), ‘아롱다롱 우리 아기’(3~5개월), ‘우리 아기 보러 와요’(6개월 이상) 전 3권. 보림ㆍ각 14쪽 내외ㆍ각 권 6,000원.▦마고할미 최정원 지음. 마고할미는 세상을 창조했다는 한국신화 속 여신. 노고할미, 설문대할망 등 여러 이름으로 전국에 흩어져 전하는 이야기를 모았다. 영림카디널ㆍ344쪽ㆍ1만원.▦모두가 행복한 지구촌을 위한 가치사전 레오 린더 등 지음. 세계 여러 나라 어린이들의 삶과 놀이, 인권 문제를 99개의 표제어로 소개한다. 김민영 옮김. 328쪽ㆍ1만8,000원.

[우리 시대의 명저 50] <37>조혜정의 '한국의 여성과 남성'

2007.09.20 00:09
“가부장제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 가장 교묘하게 인간성을 억압해온 제도이며, 여성 억압은 인간에 의한 자연의 착취와 맥락을 같이 한다.”조혜정 교수가 1988년 발표한 (문학과지성사 발행)이 당시 지식사회에 던진 충격파는 컸다. 6ㆍ29선언으로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서울올림픽이 열리면서 세계화가 화두로 떠올랐지만 가부장제를 가족관계의 본질로 여기는 통념은 여전히 유효했던 시기였다.그러나 이 책은 가부장제는 가족관계의 본질이 아니라 조선시대 사대부의 권력 확장을 위해 고안된 역사적 구성물이며 이를 통한 여성의 억압은 곧 남성도 ‘남성다움’의 굴레에 갇히게 만드는 부메랑이 되고 있다고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모성(母性)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이라는 주장은 가히 선동적이었다.김영옥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는 “가부장제나 모성의 신화, 억압과 착취에 기반한 남녀관계의 기원 등을 역사적인 맥락 아래 검증한 최초의 저작”이라며 “출간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성을 잃지 않는 저자의 혜안과 선 굵은 문제의식이 놀라울 뿐”이라고 말했다.김 교수는 “여성학의 고전이 된 책이지만 편협한 여성주의에 머물지 않고 여성과 남성이 다 함께 행복한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하고 구체적인 성찰을 담고 있는 것이 이 책의 큰 미덕”이라고 덧붙였다.저자는 한국의 남성과 여성이 이뤄온 생활세계를 깊숙이 들여다보면서, 여성해방 이론가이자 운동가로서 구상하고 실천해온 평등하고 행복한 삶을 위한 분석적 토대를 이 책에 담고 있다. 저자가 처음 시선을 둔 것은 ‘여성 차별과 비하의 근원인 가부장제가 어떤 과정을 통해 생활세계를 지배하게 됐나’ 하는 문제다.조선 초기에는 재산 분배나 제사 상속도 받을 만큼 비교적 평등한 지위를 누렸던 여성들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부계 순수혈통의 원리가 절대화되면서 ‘2등 백성’으로 전락했다. ... 그 이유를 저자는 왕권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양반관료층들이 유교 이념을 교조화하면서 남존여비 이데올로기를 심화했기 때문이라고 파악한다.가부장적 지배는 빈곤과 혼란기를 거치면서 불변적 남성우월주의로 고착됐고, 발전 이데올로기가 주도한 근대 공업화 시대와 산업자본주의 사회를 거치며 ‘국가와 일터를 위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남성의 공적 영역과 그를 위한 ‘휴식처’로 전락한 가정의 관장자로서 여성의 사적 영역을 명확히 가르는 데 이용된다. 공ㆍ사의 명확한 구분과 고정된 성 역할 관념은 제도의 차원이 아닌 일상의 문화로 강력한 의미를 지닌 채 존속된다.가부장제 아래 여성들은 인격이 아닌 어머니로서만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자발적으로 체제의 협력자가 되면서 스스로의 역할과 공간을 제한했다. 이른바 ‘도구적 모성’의 탄생이다.저자는 부부 역시 권력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파악한다. 특히 경제적 능력 여부에 따라 지배와 복종이 정확히 갈리고, 경제력이 없는 여성들은 자녀의 성공을 자신의 성공으로 대리만족하면서 가족 내 존재감을 획득한다.저자는 “가정에서 소외된 남편, 과도한 교육열 등은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에 안주하는 여성들의 계산된 헌신의 산물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면서 “부부관계가 애정과 신뢰를 잃을 경우 자녀의 도구화 위험성은 더욱 커진다”고 경고한다.가정에 안주하지 않은 여성들은 그럼 행복할까. 저자는 “전통사회에서 여성이 배제되었다면 현대에 들어서서는 배제의 정도가 줄어든 대신 보이지 않는 통제는 더욱 체계화되어 여성의 삶은 더욱 교묘하게 왜곡되고 있다”고 갈파한다.소위 ‘성공적인’ 전문직 취업여성일지라도 남성중심적인 조직문화의 이방인으로 전문직의 역할 수행 이외에 여성에게 기대되는 성역할을 수행하느라 기진맥진하게 된다. ... 결혼을 했을 경우는 가정과 일터 모두에서 늘 ‘약간씩 모자란 느낌’을 갖고 자식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린다.저자는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고 고도의 산업화가 진행중인 사회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결혼과 가족에 대한 인식이 중요해진다”며 “특히 결혼과 자녀 출산 시기 및 자녀의 수를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에 무리함이 없도록 조정하는 것, 경우에 따라서는 자녀를 낳지 않는 것도 하나의 정상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은 씌어진 지 30년이 됐지만 불평등한 남녀관계가 잉태하는 가족해체, 저출산, 고령화사회 등 우리 시대의 가장 첨예한 문제들을 정확히 꼬집어내고 있다.저자는 여성과 남성이 다 함께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여성간의 유대를 강화할 것, 여성을 남성과 똑같이 사랑 존경 즐거움 성취 권력에의 욕구를 가진 인간으로 대할 것, 남성은 가부장적 부권을 포기하고 가족구성원으로서 소통과 보살핌의 노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권한다. 가족간의 소통과 감정교환이야말로 행복한 삶의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한국 여성학계의 성과를 여실히 보여주는 이 책은 인문ㆍ사회과학 전문서로는 드물게 현재까지 14쇄를 찍었고, 2002년에는 일본 법정대 출판부가 라는 제목으로 번역서를 출판하기도 했다.■ "초경쟁 시장경제^남녀간 적대감 심화$ 평등^행복세상 더 멀어진듯""신정아 사건은 일터에서의 남녀관계가 동료라기보다는 여전히 연애의 대상으로 환원되고, 성취의 수단으로 쓰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면 조직문화도 바뀔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거죠." ... 연세대 교정에서 만난 조혜정 교수는 "을 쓸 때만 해도 남녀 모두 행복한 세상이 곧 올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고 말했다. "1980년대는 국내 사회학이 꽃핀 시기였고, 여성해방주의자들 사이에서 남녀가 모두 주인공인 일상의 문화를 새롭게 짜보자는 움직임이 활발했어요. 83년에 여성학자 조형, 조옥라, 고(故) 고정희 시인 등과 함께 대안문화운동단체인 '또하나의 문화'를 결성하면서 이들과 토론하고 싸우며 얻은 성찰들이 책을 쓰는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조 교수는 그러나 "지금은 사회가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접었다"고 말했다. 여성운동이 성숙하면 남녀평등사회가 구현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알파걸, 킹콩걸, 골드미스 등 여성파워를 상징하는 용어들은 쏟아지되 남녀간의 적대감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해졌기 때문이다. "여성은 '피해 볼 일은 절대 안 하겠다'는 의식으로 무장하고, 남성은 기득권을 빼앗긴 박탈감에 시달리면서 '사이버 마초' 같은 감정적 대응을 일삼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사회구조에 있는데 서로 감정싸움만 되풀이해요. 남녀 문제만 나오면 너무나 단세포적인 반응을 쏟아내는 사회가 된 것이죠."조 교수는 '누구도 승자가 되기 어려운' 초경쟁 시장경제와 그로 인한 인간의 개체화를 이렇게 분열된 사회의 주범으로 꼽는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주체적인 각성을 바탕으로 대안문화나 대안학교 운동 등을 유연하게 받아들였던 사람들도 IMF사태 이후 개별적 생존경쟁에 내몰리면서 지금은 오로지 일류대학을 목표로 한 무한질주에 동승한다. 동료든 친구든 가족이든, 기본적으로 경쟁자일 수 밖에 없다."이른바 성공한 사람들은 24시간 그야말로 '빡센' 노동에 시달립니다. 잡지 않으면 잡히는 사냥꾼의 시대에 들어선 거죠. 이렇게 경제논리가 압도하는, 극도로 도구화ㆍ개체화한 사회에서 자란 세대는 과연 행복할까요?" 조 교수는 시장경제체제의 제도는 숨가쁘게 변화하지만, 의식의 변화는 여전히 지체상태라면서 '지속 가능한' 사회에 대한 모색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 "가깝게는 호주제 폐지 이후의 삶에 대한 광범위한 인식의 공유가 필요합니다. 호주제 폐지 이후 가족의 정의는 어떻게 내려야 할지, 누구랑 살지 하는 문제 말이죠. 그리고 양극화사회에서의 육아의 사회화 만큼이나, 군 복무도 사회적 책임을 함께 지는 차원에서 여성이 공유하는 문제 등을 심도 있게 검토해야 해요. 소통과 상호 돌봄을 통해 남녀가 조화롭게 살 수 있는 사회만이 지속가능성을 갖는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지요."이성희 기자 summer@hk.co.kr

[우리 시대의 명저 50] <29> 사계절출판사의 한국생활사박물관

2007.07.26 07:50
일군의 출판인과 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사계절출판사 강맑실 사장, 신문 형식의 교양역사서 을 기획했던 출판기획자 김성환 강응천씨, 배기동 한양대 교수(고고학), 최준식 이화여대 교수(종교학), 고(故) 오주석 연세대 겸임교수(미술사),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건축학),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민속학), 주용립 연세대 교수(역사학)가 그들.이들의 목표는 “우리 민족이 100만년 동안 어떤 집에서 잠을 자고 무엇을 먹고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도구로 어떤 노동을 하고 어떤 놀이를 했는지를, 대중독자들에게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역사물을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이들의 소망은 이라는 기획물로 열매를 맺었다.선사시대부터 삼국, 발해ㆍ가야, 고려, 조선을 거쳐 20세기 남ㆍ북한까지 우리민족의 생활사를 다양한 형식으로 보여주는 은 이 모임 이후 1년 만인 2000년 7월 ‘1권 선사생활관’ 와 ‘2권 고조선생활관’ 으로 첫 성과를 냈고 2004년 8월 ‘12권 남ㆍ북한생활관’ 으로 일단락을 맺었다.기획에만 5년 이상이 소요됐고, 30억원 이상의 막대한 비용이 투자된 이 초대형 시리즈는 1990년대 후반의 시대적 분위기와 맞물려 탄생했다.당시 역사학계에서는 지배계급 중심의 왕조사나 정치사를 대신해 기층민중의 생활상을 발굴해서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자는 움직임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출판계에서는 조선 민중의 생활사를 소재로 한 같은 책들을 내놓아 학술적 성과에 부응했다.또 조선왕조실록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풀고 요약한 , 조선의 문화적 르네상스기였던 영ㆍ정조 연간을 다룬 등 교양역사서가 커다란 인기를 얻고 있었다.이런 분위기가 이라는 ‘블록버스터 급’ 기획의 토대가 됐다. “박물관은 옛날의 것, 이미 죽은 것을 전시하는 곳이다.하지만 우리가 박물관을 찾는 까닭은 옛날이 있기에 오늘이 있고 죽은 것들 모두를 토양 삼아 현재 우리의 삶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 따라서 박물관이 전시하는 ‘옛날’ 은 살아있어야 한다”는 첫 권의 서문은 그 지향점을 보여준다.책은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박물관 전시실에 들어서는 것처럼 꾸며져있다. 각 권은 각 시대를 상징하는 사진을 편집한 프롤로그 격인 ‘야외전시장’, 시대별 생활사를 텍스트와 일러스트레이션으로 보여주는 ‘주전시실’, 역사적 사건은 아니지만 그 시대의 생활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가상체험실’, 심화학습코너 격인 ‘특강실’, 당대 세계의 변화와 우리 역사를 비교체험할 수 있는 ‘국제실’로 구성돼 있다.평이한 서술방식을 지양하려는 이색적인 시도도 눈길을 끈다. ‘11권 조선생활관 3’의 경우 봉건사회가 근대사회로 변모하는 시기의 생활상을 설명하기 위해 한 가족의 역사를 보여준다.기획자들은 목포 지역의 유력 가문인 김병욱-김성규-김우진 3대의 이야기를 불러오는데 이들은 각각 시골 선비, 개화 관료, 식민지 지식인을 대표하는 인물로 급변하는 당시의 시대상을 실감나게 증언한다.‘6권 발해ㆍ가야관’ 의 도입부에서는 한ㆍ만 국경인 투먼시의 전경,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청소하는 러시아 처녀,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의 후예로 경북 경산시 남천면에 모여사는 영순 태씨 집안의 사진을 순차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책의 주제의식을 명쾌하게 드러낸다.시각효과를 강조하고 철저한 고증을 중시한 점도 책의 가치를 높인다. ... 시리즈 전체에 670여점의 그림, 1,740컷의 사진자료가 사용됐다.사진이나 일러스트레이션을 보조적으로 활용하는 텍스트 중심의 편집방식과 달리 이 책은 기획단계에서부터 사진과 일러스트레이션을 우선 결정한 뒤 텍스트의 위치를 정했다.1~8권의 아트디렉터를 맡았던 김영철씨는 “시각요소의 독자성을 유지하기 위해 이미지와 텍스트가 각각의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구성했다”며 “고려청자 사진의 비취색을 확인하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의 청자전시관을 다섯번 넘게 오가며 실제 청자를 촬영한 사진과 인쇄본 색상의 대조작업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집필에 참가했던 송호정 한국교원대 교수는 “이 책에 실린 사진 하나 그림 한 컷이 박사논문의 하나”라며 빈틈없는 고증 과정을 강조하기도 했다.이 시리즈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전할 때 중요한 참고자료로 활용될 정도로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았고 30만부 이상의 판매를 기록하는 등 상업적 성공도 거뒀다.그러나 출판전문가들은 무엇보다 “은 책의 성패 여부가 오로지 저자의 역량에 좌우됐던 기존의 출판 시스템에 충격을 주었고 기획편집의 중요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인 출판물”이라고 입을 모은다.이 시리즈에는 편집인, 필자, 내용감수자, 디자인팀, 사진작가 등 연인원 400여명이 참가했다. ... 학술적 성과를 출판물을 통해 대중에게 연결시켜 주는 전문가집단의 네트워크가 이처럼 방대하게 구성된 것은 전례가 없었다.이 시리즈 이후 (범우사), (랜덤하우스코리아) 등 역사교양을 공간적으로 구성한 ‘박물관’ 시리즈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와 출판계의 한 트렌드를 이뤘다.역사 담당 교사들이 교과서를 다시 쓴 (휴머니스트) 시리즈 같은 장기기획물의 탄생을 자극하는 계기도 됐다.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기존 출판계는 학문적 성과를 토대로 대중적인 교양물을 만들었지만 은 출판물이 오히려 생활사라는 학문의 역동성을 자극하고 촉발시켰다는 점에서 도발적”이라고 평가하고 “ ‘읽는다’고만 여겨지던 책의 기능에서 탈피해 보고 만지는 다양한 감각을 주목하도록 했다는 점에서도 21세기 책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한국생활사박물관' 편집인 강응천씨"처음엔 성공 반신반의 청소년 文史哲책 계획" 은 수많은 연구자, 사진작가, 편집자, 디자이너들의 재능과 땀의 결정체다. 공(功)도 과(過)도 공동의 몫이겠지만 이 책의 편집인 강응천(44)씨의 이름을 뺀다면 작업은 훨씬 더디고 결과는 실망스러웠을 것이다.공동작업이었던 만큼 왕조사의 흐름을 따르지 말자는 의견, 지역을 중심으로 구성하자는 의견, 권 수를 30권 정도로 해야 한다는 의견 등 이견도 많았다. "지금도 13, 14권을 만드는 꿈을 꾼다" 는 강씨의 열정과 "꼭 성공시키겠다"는 뚝심이 아니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미지수다.국내 출판계에서 처음 시도된 대형 기획편집인 만큼 강씨 역시 반응에 반신반의했던 것도 사실.그러나 첫 권이 출간된 후 "한국생활사박물관의 개관과 폐관 시간은 몇시냐?" ... 고 묻는, 책을 실제의 박물관으로 착각하기까지 하는 독자의 전화가 잇따르자 그는 성공을 실감했다고 한다.외국의 출판전문가들조차 "이 정도 높은 수준의 역사교양서는 권당 5,000부만 팔리면 대성공"이라고 말했지만 이 시리즈는 벌써 권당 2만부 이상 판매됐다.일반 독자들은 물론이고 대학에서는 교양교재로 쓰이고, 만화가 등 다른 문화 분야 전문가들이 기본자료로 쓰는 '소스'가 될 정도다.서울대 국사학과 출신인 강씨는 1980년대 민족주의 중심의 출판문화에서 탈피해 문명사적인 측면에서 우리 역사를 보는 교양서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출판계에 뛰어들었다.그 결실이 에 이어 으로 맺어졌고, 그는 탁월한 출판기획자로서의 입지를 굳혔다.강씨는 8월에는 작업을 같이했던 연구자들과 협력해 청소년을 위한 역사ㆍ문학ㆍ철학 등 인문서를 만드는 출판기획집단 '문사철(文史哲)'을 출범할 계획이다.그는 "출판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마케팅 비용이 늘어나 같은 대규모 기획이 이뤄질 수 있을지 걱정이지만 기회만 주어진다면 다시 도전해보고 싶다"고 말했다.이왕구기자 fab4@hk.co.kr

[우리 시대의 명저 50] <28> 김원룡·안휘준의 '한국미술사'

2007.07.19 02:39
한국의 미술사는 1968년 김원룡의 (범문사 발행)에 의해 최초로 체계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다. 한국의 미술사가 학술적으로 탐구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대 일본인에 의해서였다.하지만 세키노 다다시의 같은 경우 한국 미술을 자율성이 없는 중국 미술의 부속물로 보는가하면, 통일신라 때 전성기를 맞은 후 쇠퇴한 것으로 파악했다. 해방 이후 김용준의 등 식민사관에서 벗어난 미술사 서적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전문적인 학술서로 보기는 힘들었다.이런 점에서 는 전문 미술사가가 식민사관에서 벗어난 한국인의 시각으로 현대적 연구방법을 도입해 우리 미술사 전체를 조망한 최초의 책이다. 한국미술사학의 준거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간 40년이 된 지금까지도 한국미술사 강의의 기본적인 교재로 쓰일 만큼 생명력이 길다.한국 고고학과 미술사학의 태두로 일컬어지는 김원룡은 미국 뉴욕대에서 신라 토기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교수 시절인 1968년 쓴 이 책은 한국 미술의 특성을 시대적으로 배열하는 서술 방식을 취한다.선사시대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으로 시대 구분을 한 뒤 각 시대의 미술을 조각, 회화, 공예, 건축 등 장르별로 구분해 서술했다. 주관적 입장을 배제한 철저한 객관적 시각에서 각 장르의 대표적 작품을 통해 양식적 특징과 역사적 의의, 시대적 변천을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했다.조은정 한남대 겸임교수는 가 여전히 유효한 이유에 대해 ▲한국미술을 대하는 기본에 충실한 점 ▲시대를 배경으로 미술 작품을 들여다보는 시각으로 사회사적 입장에서 미술품의 생산과 유통을 바라보는 발전적 시각을 제시한 점 ▲민속의 영역으로 분류돼버릴 수 있는 가면이나 공예품, 능묘석물까지 포함시켜 미술사의 연구 영역을 확대했다는 점을 꼽았다.이 책은 김원룡에게만 머물지 않았다. ... 선사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까지는 김원룡, 발해 고려 조선은 안휘준이 맡는 방식이었다.5년에 걸친 작업 끝에 1993년 (서울대출판부 발행)가 나왔다. 김원룡은 머리말에서 “를 절판해 버리지 않고 다시 2인 공저의 신판으로 엮어서 내놓는 것은 한국미술사의 이해와 연구의 출발점이 될 입문서적 개설서의 필요를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는 초판에는 빠져있던 발해시대의 미술을 한국 미술사로 편입시켰다. 또 회화사 전공인 안휘준의 가세로 고고학적 성격이 짙었던 초판에 비해 회화 부분이 대폭 강화됐다. 무려 480점의 도록도 추가됐다.폐암으로 투병하면서도 이 책의 집필에 열정을 쏟았던 김원룡은 책 출간 5개월 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의 타계 10주년인 2003년, 이 책은 안휘준에 의해 (시공사 발행)라는 제목으로 새롭게 태어났다.역시 김원룡, 안휘준이 공저자였다. 이 책은 1993년판에 간단하게 개괄만 했던 발해 미술을 다른 시대와 마찬가지로 회화, 조각, 공예, 건축 등으로 세분화해 완전히 독립시켰다. 신라에 포함돼있던 가야 미술에도 동등한 지위를 부여했다.백제금동향로 등 새롭게 발견된 연구 성과를 추가했고, 중국의 것으로 기록했던 안악3호분을 고구려 고분으로 수정하는 등 잘못된 부분은 과감하게 고쳤다. 한문투 문장을 한글화하고, 모든 도판을 컬러로 게재해 젊은 세대와 일반인의 접근을 쉽게 한 것도 특징이다. 이 책은 벌써 8쇄를 찍었고, 1만부가 넘게 팔렸다.를 기획한 홍선표 한국미술연구소 소장은 “이 책은 명실공히 한국미술사의 결정판이자 근현대 미술사학의 정수”라고 말했다. 그는 “방대한 분야를 역사적으로 꿰뚫고 있는 저자에 의해서만 나올 수 있는 책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런 책의 출간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홍 소장은 또 “세상을 떠난 스승의 업적을 공동의 이름으로 계승, 발전시켰다는 점도 큰 미덕”이라고 덧붙였다. ... 한국미술사학회장 한정희 홍익대 교수는 “초판의 경우 고고학적 측면이 강했고 고대에 비해 후대의 미술에 대한 서술이 약한 편이었는데, 수 차례의 개정 작업을 통해 모든 시대가 균형을 갖췄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현재진형형인 한국의 미술사를 이 책이 조선시대까지 한정杉募?점에 대해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있다. 안휘준은 “미술사는 끊임없이 새로운 연구 성과가 나오는 분야이기 때문에 일정 기간이 지나면 새롭게 쓰여져야 한다”고 말했다. “20세기 미술의 성과가 워낙 방대해 이 책의 양식에 맞추기도 힘들고, 나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회화에 대해서는 정리 작업을 하고 있지만 다른 분야는 후배들이 이어줬으면 좋겠습니다.”■안휘준 인터뷰“공동 저자는 꿈에도 생각못해 학문 계승 좋은 예 된건 기뻐”안휘준은 스승 김원룡으로부터 의 개정 작업 제안을 받았던 20년 전을 떠올리며 "공동 저자로 이름이 들어갈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저 스승을 도와드린다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이 책은 미술사학계 학자들의 연구 성과가 망라된 것이지, 결코 두 사람만의 업적이 아닙니다. 다만 학문 계승의 좋은 예가 됐다는 점에서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1961년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1회로 입학해 김원룡의 지도를 받았던 안휘준은 스승과의 만남을 '운명'이라고 표현했다.6ㆍ25 때문에 남들보다 학교를 2년 늦게 다니는 바람에 고고인류학과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안휘준은 생전의 스승에 대해 "세속적 욕심이 없는 순수하고 소탈한 분이었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집필을 할 만큼 죽음에 대해 초연했다"고 회상했다. "제가 맡은 부분에 대해 전적으로 신뢰해주셨지요. 새롭게 쓴 발해시대 미술의 경우 하나도 지적을 하지 않으셨어요. 초판의 조선시대 개관이 다소 부정적이니 다시 쓰고 싶다고 했을 때도 흔쾌히 받아들이셨습니다."김원룡은 고고학자, 미술사학자였을 뿐 아니라 빼어난 수필가이자 문인화가이기도 했다. ... 안휘준은 "스승의 달필을 많이 남기고 싶은 욕심에 가 나온 뒤 투병 중이신 스승께 100권이 넘는 책에 사인을 부탁드렸다"면서 "아직도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지난해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에서 정년퇴임하고 명지대 석좌교수, 문화재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그는 작게 접은 메모지 하나를 늘 갖고 다닌다. 거기에는 등 앞으로 자신이 쓰리라 작정하고 있는 책 13권의 제목이 또박또박 적혀있다. 등 영문서도 포함돼있다.그는 최근 쏟아져 나오고 있는 미술사 개설서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초보자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학문적으로 중요치 않다는 생각 때문인지 주를 다는 작업 등 기본적인 면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개설서는 그 학문의 모든 것이 담겨있는 종합적인 입문서이자 지침서가 돼야 합니다. 결코 학술적 접근을 경시하면 안됩니다. 학자는 대중을 선도해야지, 대중을 핑계로 하향평준화가 돼서는 곤란하지요."저자 연보▲ 김원룡1922년 평북 태천 출생1945년 경성제대 사학과 졸업1957년 미국 뉴욕대 미술사 박사1962년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교수1970년 국립중앙박물관장1981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1985년 서울대 대학원장1993년 별세저서 등 ▲ 안휘준1940년 충북 진천 출생1967년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졸업1974년 미국 하버드대 미술사 박사1974년 홍익대 미대 교수1983년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1990년 한국미술사학회장2005년 문화재위원회 위원장2006년 명지대 석좌교수저서 등김지원기자 eddie@hk.co.kr

[우리 시대의 명저 50] <17> 이주헌의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

2007.04.25 23:35
그러나 여행자들은 파리의 에펠탑이나 로마의 콜로세움 앞에서 손가락을 브이(V)자로 만들며 사진 찍는 것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함을 느꼈다. 그저 ‘다녀왔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보고 어떻게 느꼈다’고 말하고 싶은 욕망이 비등점으로 끓어오를 그 무렵, 미술과 여행이라는 두 주제를 결합한 한 권의 책이 등장했다.서양화를 전공한 신문기자 출신의 이주헌씨가 1995년 펴낸 (학고재)은 이 씨가 가족과 함께 53일간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체코, 오스트리아, 스위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 10개국 15개 도시 31곳의 미술관을 순례하며 기록한 명화 감상기다. 미술시장이 활성화한 요즘에도 미술책은 5,000부 찍기가 부담스럽지만 두 권으로 나눠 발행한 이 책은 지금까지 10만부 이상 팔렸다. 출판계에 따르면 미술 서적 가운데 이 정도 꾸준히 판매되는 책은 한젬마씨의 (1999)와 타계한 오주석씨의 (2003) 정도다.‘기왕에 나와 있는 서양미술 관련 책이 대부분 번역서인데서 알 수 있듯 우리는 여태껏 남의 눈으로 유럽미술을 보아왔다. 이제 우리 눈으로 보고 우리 식성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나는 그 같은 뜻을 미흡하나마 실천으로 옮겨보았다.’저자가 초판 서문에서 밝힌 대로 당시에는 한국인이 쓴 대중용 미술 기행서가 전무했다. 그나마 읽을만한 미술교양 서적이라면 곰브리치의 나 천경자씨의 미술 에세이 정도였는데 이런 책도 미대생이 아니면 들춰보지 않을 정도로 대중이 접하기에는 딱딱했다. 이 책은 그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이 씨는 “이론가들이 어떻게 평하든 독자가 필요로 하는 책을 독자의 눈높이에 맞춰 내자는 신념으로 책을 썼다”고 말했다. 이 책은 그의 기획의도에 맞춰 사진 한 컷, 글의 구성, 문체 하나하나까지 치밀하게 꾸며진 ‘작품’이다.책의 탄생 과정은 이렇다. 6년 간의 신문기자생활과 1년 간의 미술전문잡지 편집장을 마친 뒤 본격적인 프리랜서 준비를 하던 94년 초. ... 이 씨는 출판사로부터 받은 1,100만원의 선인세에 400만원을 보태 그 해 여름 자신과 아내, 네살과 갓 돌을 지난 아들 둘과 함께 대중미술 저술가로 태어나는 특별한 여름휴가를 떠난다.책에는 칭얼대는 두 아이를 들쳐 업고, 여권을 잃어버렸다가 되찾고, 남부여대한 행색으로 숙소를 찾아 거리를 방황하고,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는 등 가족여행의 에피소드로 시작하는 장(章)이 꽤 많다. 아이들의 이름도 지은이가 좋아하던 만화 주인공의 이름인 ‘땡이’ ‘방개’로 호칭해 친근감을 더했다. “어렵고 딱딱한 사조나 이론으로 시작하면 지루할 것 같아 가벼운 에피소드로 독자의 시선을 붙들었다. 일단 책에 시선을 뺏기면 나중에 전문 용어가 나오더라도 독자들은 관성(慣性)으로 책을 읽어나가게 된다.”저자는 무심코 넘어갈 용어 하나도 친절하게 설명한다. 예컨대 ‘표현주의적 경향’이라고만 써도 되지만 ‘자신의 내면적인 감성을 분출하는 표현주의적 경향’이라는 식으로 표현했다. 글의 구성도 파격적이다. 책의 첫 장 테이트브리튼 편에서 그는 현대미술이 태동한 19세기 전반 도덕지향적 예술관을 내세운 보수적 화가 집단인 영국의 ‘라파엘 전파’를 소개하는데, 그 첫 문단을 비밀결사를 꿈꾸던 이들 미술가의 가상 대화장면으로 시작한다. 대영박물관의 이집트 전시실을 다룬 대목에서는 그가 사회자가 돼 계단식 피라미드를 설계한 이집트 건축가 임호테프, 고대 그리스의 명 조각가 페이디아스와 가상의 대담을 펼친다. 당시로서는 보기 어려운 생동감 있는 글쓰기였다. ‘첫 문장에서 독자들의 시선을 끌어라’ ‘중학생들이 읽고도 이해할 만한 문장을 써라’는 등 저널리스트로서 다진 탄탄한 글쓰기 훈련이 저술의 밑바탕이 된 셈이다. 그는 “논리적인 글보다는 감성적인 글쓰기가 우리 독자에게 호소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반 고흐의 그림을 평가한 반 고흐 미술관 편은 감각적이고 감수성이 풍부한 ‘이주헌표 글쓰기’의 정수(精髓)를 드러낸다. ... ‘반 고흐가 그린 꽃이 만개한 나무들을 보면 그가 추구하는 행복의 성격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가 그린 나무의 꽃들은 대부분 하얗거나 하얀 색이 어떤 식으로든 섞여 있는 것들이다. 쏟아져 내리는 눈처럼 하얗게 캔버스를 누비는 그 꽃들. 그의 행복은 식물성이었? 식물성 중에도 수성(樹性)이었으며, 그것의 절정은 개화였다. 그는 진정 아름다움을 사랑했다. 사람들이 농투성이보다 못한 겉모습을 놓고 뭐라고 이야기해도 그의 마음 속에는 이슬을 새치름히 머금은 꽃들이 무수히 많은 다른 꽃들과 어우러져 낙원의 꽃밭처럼 피어나고 있었고, 그의 영혼은 그것들을 바람처럼 애무했다.’소개하는 작품이 풍성하긴 하지만 미술사조나 지역별 미술의 특징 같이 큰 흐름을 잡아주기에는 다소 부족한 점, 오스트리아 빈 현대미술관과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 등 현대 미술관도 돌아봤으나 도판의 저작권 문제로 현대미술 작품에 대한 소개가 부족한 점은 작가가 두고두고 아쉬워하는 부분이다.그러나 이 책의 성공이 기폭제가 돼 90년대 후반부터 화가, 평론가는 물론 소설가, 시인이 쓴 미술ㆍ예술 기행서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박서림ㆍ2004) (이은화ㆍ2005) (이수영ㆍ2006) 등이 대표적이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유럽박물관을 둘러보는데 제대로 된 한글 안내서조차 구하기 어려웠던 일을 기억하면 제대로 만들어진 책 한 권의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한지 실감할 수 있다.학고재 손철주 주간은 “이씨는 서양화를 전공한 저널리스트라는 경험을 바탕으로 화가와 대중의 생리를 모두 잘 아는 글쓰기를 할 수 있다”며 “은 전문성과 대중성 사이에 교량 역할을 하는 미술교양서의 전범이 된 책”이라고 평가했다.■ "예술의 풍요로움 알리는 일, 제 천직이죠""미술사조를 살펴보면 루벤스, 반 고흐, 피카소 같은 대가들은 모두 다작(多作)을 했더군요. 태작(作: 잘못 만든 작품)이 많아야 좋은 작품도 나오지 않겠습니까. ... 허허허…"이주헌씨는 최초의 대중적인 미술저술가라는 이름이 허명이 되지 않도록 부지런히 노력하는 저술가다. 신문연재를 묶어 94년 펴낸 를 필두로 3월에는 아동용 서양미술해설서인 까지 모두 20여권을 썼다. 매년 2권 가량을 펴낸다는 얘기다.서양화를 전공한 그가 화가의 꿈을 접고 글쓰기로 전업한 계기는 대학 졸업 후 읽은 하우저의 가 준 울림 때문이다. "미술 글쓰기에 관한 영감을 주는 책이었죠. 훌륭한 저작이 주는 감화, 열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작품을 만드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미술에 관한 글쓰기가 이렇게 중요하고 이렇게 도전적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했죠."그러나 하우저의 글 쓰기는 일반인에게는 다소 어려운 방식이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딱딱하게 글 쓰는 것은 독자에게 빚만 떠넘기는 일'이라는 생각을 굳혔고 대중을 위한 글쓰기를 필생의 과업으로 삼은 그다. 이씨는 요즘 기업의 문화마케팅, 감성마케팅에 관한 자문 일에도 열심이다. "미술의 대중화, 삶의 예술적 요소를 살리는 일, 즉 창의적이고 풍요롭게 삶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일이 저의 직업적인 목표라는 맥락에서 글쓰기와 강연, 문화마케팅 자문은 크게 다르지 않지요."글쓰기가 본업인 만큼 새로운 글쓰기도 궁금했다. 그가 요즘 준비하는 책은 도시, 국가별 미술사를 소개하는 일이다. 지난해말 나온 이 첫 결실이다. 올해 안에 편을 내고, 이후 등 다섯 권 이상의 시리즈로 펴낼 계획이다. 함축적이고 개론적이었던 이 한 정력적 글쟁이에 의해 10여년 만에 개론으로 완결되는 셈이다.■ 이주헌 약력1961년 서울 출생1984년 홍익대 서양화과 졸업1986~1988년 동아일보 출판국 기자1988~1993년 한겨레신문 문화부 기자1995~2004년 학고재 관장현 아트컨설팅서울 이사, CJ햄스빌 아트갤러리 명예관장, 스위치커뮤니케이션아트 마케팅 고문 저서 등이왕구 기자 fab4@hk.co.kr

[우리 시대의 명저 50] <16> 백낙청 평론집‘민족문학과 세계문학’

2007.04.18 23:36
“한국 특유의 정치적ㆍ역사적 사연이 있고 문단만 하더라도 서양문화사에는 없는 특이한 요소가 작용하고 (하략)”, “이번(한일국교 수립)에 확립된 한ㆍ미ㆍ일 체계가 우리 사회의 허다한 모순을 해결 못하고 널리 민족 감정의 지지를 얻지 못할 때(하략)”. 순수ㆍ참여 논쟁이 뜨겁던 1966년 창간호 권두 논문 에서의 발언이다.10여년 뒤, “평론가는 그 직접적 소재를 어디서 구하든 간에 결국 우리 문학과 역사의 ‘현단계’에 대해 발언해야 하고, 우리의 경우 그것은 ‘민족’의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라고 밝혔다. 1978년 3월 간행된 평론집 1권의 머리말이었다.지난해에는 제 4권을 발간, ‘통일 시대 한국 문학의 보람’이라는 부제 아래 한국은 이미 통일 시대로 들어섰음을 확인하고 통일 시대를 맞는 한국 문학의 모습을 두루 조망했다. 고은, 황석영, 신경숙, 배수아 등 주요 작가의 분석이 뒤를 이었다. 1집에서부터 견지해 온, 문학과 역사의 ‘현재성’과 ‘민족’이 그 황금률이었다. 1권이 6쇄, 85년 나온 2권은 8쇄, 90년 발행 3권은 2쇄를 기록하고 있다.“당시는 민족 문학이 우리 문학의 화두였어요. 나는 그걸 세계 문학과 함께 생각하자는 거 였죠.” 1월 검박하게 고희를 맞은 백낙청 서울대 명예 교수가 초심을 떠올렸다.“나는 민족 문학을 중심에 세우고, 거기에 종속하는 담론을 펼쳤다“며 “이제 민족 문학은 자기 할 일은 했다는 판단”이라고 그는 말했다. 출판사측의 제안으로 ‘민족 문학과 세계 문학’이라는 책 제목을 부제로 돌리기도 했지만 관련 이론과 현장의 열기를 온존하려 애썼다.소시민 혹은 시민이라는 고색창연한, 그러나 1969년만 해도 충분히 삐딱할 수 있었던 용어를 하나의 장르로 격상한 그의 ‘시민 문학론’( 1969년 여름호 수록)을 맨 앞에 수록함으로써 1권은 힘찬 고동을 울렸다. ... “효도에 도무지 뜻이 없는 아들을 두신 어머님께 다소의 위로가 되기 바”라는 마음으로 머리말에 가름한 2권은 무크 운동 등 1980년대 민족문학론의 안팎을 살핀다. 강연록이 현장감을 더하는 가운데, 책은 민중 문학과 모더니즘 등 인접한 문학적 논의까지 포섭하고 있다. 미국의 의미를 궁구한 논문은 이 시대 각별히 다가온다. 3권에는 6ㆍ29의 울림이 살아 있다.이 시대, ‘세계’라는 말은 기세등등하지만 ‘민족’이란 말의 입지는 갈수록 줄어든다. 그러나 애초부터 두 가지가 공서(共嶼)해 온 일련의 저작에는 초발심이 온존해 있다. 최근 문단 일부가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민족이란 말을 빼자고 들고 나오는 등 민족이란 단어에 대한 심리적 길항이 노출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는 “민족 문학이라는 문제 의식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한국 문단이 포용력을 갖자는 취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지적했다.그러나 작가회의가 전선도 사실상 와해되고 회원수도 소수지만, 실제 활동으로 보면 최대의 단체라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주의를 요청했다.“정당한 절차를 거쳐 내부의 다수결의를 거치면 빼도 좋겠지만, 내 평론집 부제에서까지 뺄 것 있느냐는 생각입니다.” 그는 “최근 일부에서 나오는 바, 그걸 ‘헛것’이라 치부하는 것은 인식 수준의 문제”라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민족 문학이 구호처럼 돼, 그를 중심으로 하는 시대는 지났어요.그러나 그 문제 의식, 즉 문학과 현실의 관련성, 한국 문학과 분단 체제의 극복이라는 역사적 과제와의 연관성 등을 강조하는 문학 담론은 살아 있습니다.”한국 문단의 역동성은 기대의 가장 큰 근거다. 예를 들어 일본의 경우, 현실과 인생이란 문제를 두고 볼 때 경청할 만한 작가가 고갈됐으나, 한국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 그는 “로 외국서 호평 받고 있는 고은 시인의 경우, 작년에 새 시집까지 냈다”며 “황석영 씨도 등 주목을 요하는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고 말했다.여전히 현역인 선배, 김연수 박민규 김애란 이기호 등 신진 작가군을 주목 그룹으로 언급하면서 그는 엷은 중간대 작가군을 우려했다. “공선옥 심경숙 은희경 정도를 언급할 수 있겠죠.”그는 세대별 작가군을 거론하는 것 보다는 같은 세대 작가들의 우열을 가려 주는 게 비평가의 임무라고 믿는다. “예를 들어 박민규나 황병승이 인기 끌 때는 유사작, 아류의 우려도 많았죠. 비평이 동시대인의 정서에 도움되려면 그들의 훌륭한 점, 부족한 점을 정확히 지적해 줘야 해요.” 비슷한 세대 가운데 옥석을 가려줘야 한다는 말이다. 당대에 철저히 관여하고 복무해야 한다는 비평가적 강단이다.“본격 연구자라기보다 비평가로서 문학 해 왔다”는 자평은 씌어진 작품이 아니라, 지금 이 곳에서 씌어 지고 있는 거대한 텍스트, 즉 현실을 비평해 온 그의 입지를 압축하고 있다. 그는 일련의 저작이 “ ‘한반도 분단 체제 극복이 가장 큰 과제’라는 지론이 낳은 산물”이라고 말했다.“외국으로 대학 간 것이 내 인생을 결정한 중요 계기였죠.” 모든 것이 거덜난 휴전 직후라 그를 포함, 명민한 인재들은 외국 행을 많이 들 택했다. “4ㆍ19 발발 전에 한국 행을 결정했던 나는 그 후 4ㆍ19 소식을 들었어요.결정하길 잘 했다, 흥분까지 되더군요.” 당시 미국 하버드 대학서 학부 과정을 마치고 석사 1년 과정에 있던 그는 군필 없이 유학 갈 수 있었던 마지막 세대였다. 해외 유학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돌아오지 않고 군대에 빠지던 때였다. 그러나 그는 군대 가는 것으로 미국 교수 길을 거부. 분단 현실을 피부로 느꼈다.다자 회담이라는 현실의 틀 속에서 지금 한국에 주어진 통로를 묻는다. “남북 통합 추진, 남북 화해 협력 등 점진적 통합 과정에서 힘을 받아 남북 사회의 개선을 기할 때입니다.분단 체제 극복이란 말이 이제는 ‘실감 나게’ 다가 왔어요.” ... 그간 장애물이었다면 북미 대립에 의한 고도의 긴장 상태였지만 2ㆍ13 합의로 최대의 난관은 건넌 셈이니, 이제 진짜 우리 하기 달렸다고 말한다.그는 “앞으로도 어울린다 싶으면 (‘민족 문학과 세계 문학’이라는 틀을) 계속 이어갈 것”이라며 당초의 문제 의식이 여전히 유효함을 내비쳤다.서양의 소설과 시에 대한 생각도 정리됐으면 하는 마음이다. 어쩌면 그보다 앞서, 기자들과 나눈 숱한 대담을 종합한 책이 뒤늦은 고희 기념 선물로 당도할지도 모른다. 1970년대 이후, 그는 이래 저래 언론이 즐겨 찾는 인터뷰 대상자 아니었던가.■ 현재 맡고 있는 직함들 "공익근무 하는 셈" 설명"공익 근무 많이 하죠." 웃음이 말끝에 묻어 나온다. "민주 사회 시민은 어느 정도 '공익 근무'를 해야 해요. 우리 시대 문학 연구가 중요하긴 하지만, (현장 비평에) 끌려 다니다 이도 저도 못하는 게 가장 두려워요. 나도 그런 문제점 없진 않지만 평론가 - 문학도로서의 본령을 지키려 하죠." 현실적으로 그 분량은 엄청나다."비정규직이 셋이에요." 서울대 영문과 명예 교수 외에도 계간 편집인, '시민 방송' 이사장, 2005년 1월 이래 맡게 된 6ㆍ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 대표 등 이름 뒤에 붙는 직함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9월 '시민 방송' 이사장(6년제)의 임기가 끝나지만, 여전히 바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동아시아적 전통이기도 하지만, 공익 업무와 문학적 책임은 대립하지 않아요. 현실적으로 처리ㆍ감당하는 문제량이 많아 힘들지만, 아직 포기 않고 있어요." 나름의 원칙이라면 아무리 공익성 있어도 '비정규직' 아니면 안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독서에 투여할 시간이 부족해 생기는 불만은 어쩔 수 없다. 그 와중에 내놓은 저작들 중 스스로 꼽는 대표작은 2권이다."서두르지 말라는 주장을 해 왔다. 일단 성적표가 좋다고 정부에서는 말 하는데, 이제 내용을 까놓고 제대로 된 검토를 해야 한다. ... 국가적 초미의 관심사, FTA를 지켜보는 그의 소회다.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나름대로 활동한 자로서, FTA에 관한 정부의 비민주적 행태는 지적돼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백낙청 프로필1938년 대구 출생1955년 경기고 졸업 후 미국 브라운대 입학1966년 창간1972년 하버드대 박사. 서울대 영문과 조교수1974년 민주화 회복 국민 선언 서명으로 파면1976년 창작과비평사 대표1996년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2004년 서울대 명예 교수2005년 6ㆍ15 공동 행사차 북한 방문2006년 출간. 제 11회 늦봄 통일상 수상장병욱 기자 aje@hk.co.kr

[우리 시대의 명저 50] <13> 최장집의 ‘한국 민주주의의 이론’

2007.03.28 23:37
1987년 6월 항쟁과 12월 대선, 89년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 90년 독일 통일, 91년 소련 붕괴, 급작스러운 90년 3당 합당에 이은 92년 대선…. 한국 민주주의는 그 지난한 탄생만큼 성장통도 심하게 앓았다.진보 진영, 특히 마르크시즘을 추종했던 지식인들의 명운은 마치 롤러코스터라도 탄 듯했다. 6월 항쟁을 통해 국민적 가치인 양 대중 속을 파고 들던 이들의 변혁 이론은 불과 2, 3년 후 70년에 걸친 현실 사회주의 실험이 실패로 끝나기 무섭게 존재 의미를 잃어갔다.마르크시즘과 함께 지리멸렬하던 진보 이론의 구원자로 나선 것은 소위 ‘모래시계 세대’ 지식인들이었다. 80년대 초 대학을 졸업한 이 젊은 연구자들은 네오마르크시즘을 비롯한 비판이론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였고, 사회운동 참여와 기획에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시카고대학에서 노동정치 논문으로 학위를 받고 귀국한 40대 늦깎이 박사 최장집은 해박한 지식과 열정적 학문 활동으로 단박에 ‘진보 뉴웨이브’의 대부로 부상했다.박사 논문 출간을 빼면 첫 단독 저작인 (1989)에서 최장집은 네오마르크시스트인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 진보 정치학자 필립 슈미터의 ‘코포라티즘’ 이론을 국내에 소개하며 진보적 소장 연구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더불어 특유의 정치한 문장에 담아낸 한국 현대 정치사 분석은 “탁월한 문제 의식을 갖춘, 브루스 커밍스와 쌍벽을 이룰 만한 연구”라는 평가를 끌어냈다.이 책은 권력층이 6·29 선언을 통해 절차적 민주주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는 대신 중산층을 개혁적 민중과 분리하는 성과를 거뒀다고 지적한다. 또 87년 대선에 정치적으로 동원된 지역 감정은 민주화 세력의 분열을 일으킨 것은 물론, 실질적 민주주의 발전에 심각한 장애가 될 것이라 예견한다.최장집을 논할 때 흔히 거론되는 사상가는 그람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혁명이 번번히 실패로 귀결되는 원인 규명에 천착한 그는 국가의 폭력적 권위와 더불어 시민사회의 주류 언술로 유포되는 헤게모니에 주목한다. ... 권력층은 헤게모니를 조작, 유포, 공고화 함으로써 대중의 자발적 복종을 유도한다는 것이다.비판이론 성격이 강함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시즘의 이분법적 토대-상부 구조를 벗어나 시민사회를 언급한 까닭에 그람시 이론은 80년대 후반 시민운동의 발흥을 든든하게 지원했다. 하지만 최장집은 “나는 늘 네오마르크시즘과 자유주의적 비판이론 간 균형을 중시했다”며 자신을 ‘그람시안’으로 규정하는 논의를 경계한다.93년에 내놓은 은 외형적 자유화가 아닌 실질적 민주화를 중시하는 최장집의 문제 의식이 더욱 날카롭게 벼려진 기념비적 저작이다.89년부터 92년 대선 직후까지의 논문을 모은 이 책에 대해 그는 “민주주의가 아직 틀을 잡지 않은 이행기적 상황에서 학자이자 운동가로서의 관심사와 희망을 투영했던 결과물”이라고 설명한다.이 책에서 87년 항쟁 이후의 한국 정치체제를 ‘제한적 민주주의’로 명명한 저자는 권위주의 체제 아래 정치ㆍ사회ㆍ경제적으로 소외된 민중이 민주화의 실질 주체가 돼야 한다는 ‘민중민주주의’ 입장을 견지한다.하지만 그 실천에선 변화가 감지된다. “기존 헤게모니 구조에서 민중 운동은 곧바로 정당 조직으로 발전하기 어렵다”고 진단했던 전작과 달리 “민주주의는 민중들로 하여금 제한적이나마 정치권력을 행사할 여지를 제공한다”며 대의제 민주주의를 통한 변혁의 가능성을 인정한 것이다.최장집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마르크시즘, 그람시, 토크빌 등의 사회구조 이론을 창조적으로 융합하면서 국가-시민사회의 중간 층위에 ‘정치사회’를 위치시킨다.노동 계급을 비롯한 시민사회 속 민중은 정치사회에 참여해 자신의 이익과 요구를 정당을 통해 조직함으로써 국가를 민주화시키는 전략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정치사회 및 정당의 역할을 중시하는 그의 지론이 이 책에서 원형을 갖춘 셈이다. 아울러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는 합리적 사회 건설을 위한 사상체계로서 시대적 역할을 다했다”고 진단한다.은 출간과 함께 학계에 뜨거운 논쟁 거리를 제공했다. ... 정통 마르크시즘 입장에 선 김세균은 최장집의 이론이 사실상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긍정하는 것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한상진은 중산층의 개혁 성향을 긍정하는 ‘중민(中民)론’을 내세우고 하버마스를 국내에 소개하는 등 온건 시민사회론으로 최장집과 대립각을 세웠다.이런 외부적 논쟁이 아니더라도 신간을 뺨?최장집의 속은 편치 않았다. 92년 대선에서 다시금 수평적 정권교체가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며 “한국의 시민사회가 건강한 민주주의를 뒷받침하는 토대가 되긴커녕 지역주의 이데올로기에 힘없이 휘둘리는 걸 보며 실망을 많이 했다”고 그는 토로한다.대선 결과를 보고 쓴 책의 마지막 장과 결문에서도 민주화운동세력이 주도하는 시민사회의 역량에 대한 짙은 회의감이 묻어난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견결한 진보학자에게 한국의 민주주의 이행 과정은 이후로도 기대를 실망으로 환치시키는 쓰린 경험이었다.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 질적 후퇴” 진보논쟁 단초96년 이후 최장집의 저작은 세기를 넘기고도 한참동안 나오지 않았다. 그 사이 그는‘시민사회’와‘정치사회’를 넘어‘국가’에 진출하기도 했다. 98년 김대중 정부 출범과 함께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을 맡은것. 하지만 그가 주창한‘민주적 시장경제론’은좌우 진영에서 동시에 비판받았고, 그해 10월엔 의‘사상 검증’에 휘말려 곤욕을 치르다 1년 만에 물러나고 말았다.최장집의 학자적 양심을 믿었던 이들은 IMF 관리 체제라는 위기 상황에서 그가 소신껏 일하기 어려웠으리라 예상하곤 한다.신자유주의 정책을 펴야 한다는 주장이 워낙 강한 헤게모니를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 외환위기로 기업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웠던 그 시기야말로 민주 정부가 재벌 개혁에 착수할수 있었던 호기였다. ... 현정부도 자신의 진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분석을 담은 최근의 저작과 강연은 대통령까지 가담한‘진보 논쟁’의 단초가 됐다. 정작 그는 자신이‘좌파의좌장’으로 자리매김한 현실을 매우 불편해하지만 말이다.그는 요즘 정당 체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있다. 보수당 외에도 노동자등시민사회속 다양한 계층의 이해를 정치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정당이 출현해야 한다는 게 주장의 골자다. 그런 점에서 양당제보다는 다당제가 바람직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념적으로 널찍한 정당 체제가 곧 형성될 거라곤 기대하지 않는 눈치다. 그가 보기에 한국 민주주의는 어느덧 이행기를 거쳐 공고화 단계, 그것도‘나쁜 방향’으로 굳어가는 과정에 들어섰기 때문이다.협애한 정치 체제, 역량이 부족한 시민사회….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정치적 다원주의는 어떤 활로를 요구하는가. 혹시 정치적 엘리티시즘?“ 글쎄, 좋은 정치의 중심, 리더십을 만드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하지만 사람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이익을 대표할 것 인가에 대한 확실한 비전과 아이디어, 프로그램이다.” 이훈성기자

[우리 시대의 명저 50] <3> 유동식의

2007.01.17 23:46
근대화와 보조를 맞춰가며 이 땅 방방곡곡의 밤하늘은 희고 붉은 불빛으로 물들어갔고, 복음 역시 전래의 무교와 유ㆍ불ㆍ도 삼교(三敎)와 대립하고 조화하며 한국인의 심성에 충실히 스며왔다.그렇다면 이 히브리의 영적 씨앗이 한국인의 심성과 동아시아 문화의 토양에 어떻게 뿌리내렸고, 지금 어떤 열매를 맺었을까. 이 질문은 선교적 관심때문이 아니라, 우리 문화의 주체적 역량에 대한 반추 위에서, 영적 주체의 응답으로서 절실하다. 그 물음에 답한 이가 “교회마다 십자가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삼태극’의 상징을 다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도그마 너머의 신학자, 소금(素琴) 유동식(85)이다1956년 그는 미국 감리교회의 장학금으로 보스턴 유학길에 오른다. 일제 치하에서 민족적 소외에 시달려온 34세의 만학도는 그곳에서 또 한 번 근원적인 소외감, 문화적 열등감에 시달리게 된다.경전과 신학체계 전체가 서구 문화의 틀 안에서 형성됐고, 그들의 언어와 문화로써만 성서적 진리를 이해할 수 있고 복음을 누릴 수 있다면, 기독 신학자와 신앙인에게 반만 년 한국의 종교문화는 단지 미망에 불과했다는 말인가. “신앙이란, 절대자 안에서 우리의 모든 소외감과 열등의식을 극복하고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하는 것”아닌가.( 84쪽)그 즈음 신학의 양식사(樣式史)적 연구, 즉 진리의 절대성과 병행하는 문화의 상대성을 해명한 독일 신학자 불트만(1884~1976)과의 만남은 그에게 새로운 길을 밝혀준 빛이었다. ‘진리를 담는 그릇’인 역사와 문화의 상대성 연구, 종교를 담아온 우리 민족 고유의 마음 틀을 찾아가는 그의 길이 열린 것이다.60년대 초 그는 국내 기독교 ‘토착화 논쟁’을 선도하며 한국학 연구에 몰두한다. 절대자를 인식함으로써 인간을 인식하는 것이 종교라면, 기독교의 복음원리와 우리 고유의 영성이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 민족적 영성의 문학예술적 표현으로서의 ‘신화’와 그 영성의 종교의례적 표출로서의 ‘제례’에서 시작한 그의 한국 종교사 연구는 단군ㆍ주몽ㆍ혁거세 신화와 고대의 제천의례, 신라의 화랑도(풍월도), 최치원의 풍류도, 원효의 불교사상, 율곡의 유교사상, 수운의 동학사상으로 이어진다. 그 시절 집필한 (1965), (1975) 등의 저서는 한국 종교, 특히 무교에 대한 본격 연구서로서 지금도 거대한 지분을 확보하고 있다.신학의 토대 위에서 한국 종교사상사 연구로 나아간 그가 ‘풍류 신학’이라는 독창적이고 주체적인 개념을 정립한 것은 80년대 중반이다. 60년대 에서 최치원 난랑비문의 한 구절-‘우리나라에는 깊고 오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 …이는 삼교를 포함한 것이요’-을 읽은 이래 어슴푸레하게 감지되던 실체를 붙든 것이다. 그는 고대 종교문화를 형성한 한국인의 원초적 영성이 유ㆍ불ㆍ도의 외래 종교와 어울려 맺은 것이 화랑제도요, 풍류도라고 밝힌다.“가무강신(歌舞降神)하여 신과 인간이 하나가 됨으로써 소원을 성취한다는 구조”( 48쪽)다. 화랑의 가무는 예술적 차원 너머 종교적 의미를 지닌다.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 위 책에서 재인용)는 행위였고, “산수를 찾아 노니는 것 역시 자연의 정기를 호흡하고 그곳에 강림한 하늘의 영과 교제하는 데 그 목적이 있”(위 책 53쪽)었다.화랑과 ‘풍류’에 대한 그의 사유는 의미의 깊이로 파고들어, ‘멋진 한 삶’의 사상으로 여물어간다. ‘멋’은 이상적 미의식이자, 초월적 자유, 원융무애한 조화다. ‘한’은 크디 큰 하나의 포월적 ‘한’이고, 사람다운 삶을 향해 나아가는 구체적 일상의 ‘삶’이다. 거기서 그는 천지인(天地人) 삼재의 하나됨, 곧 ‘삼태극’의 형상을 발견한다.화랑의 가무강신과 ‘멋진 한 삶’은 유교의 극기복례나 불교의 무아열반, 기독교의 ‘십자가와 부활’ 상징과 한 뿌리를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종교의식의 본질이자 종교적 진리의 공통 구조인 ‘자기부정’을 통한 초월적 세계, 절대자 인식이다. ... 훗날 그는 ‘멋’을 중시하는 우리 고유 영성의 심미적ㆍ미학적 특성을 돋워, ‘예술 신학’이라는 또 하나의 독창적 경지를 개척한다.이 노학자가 대학 퇴임 후인 95년 연세대 국학연구원이 마련한 에서 교수 및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 이다. 우리 민족 5,000년 종교사상사의 높은 봉우리들을 두루 꿰며 서양 정신사의 정수인 신학과 합류하는 물길을 연, 소금 신학사상의 정수를 담은 책이다.17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대신동 자택에서 만난 그는 연치가 의심스러울 만치 강건했다. 그는 서양 복음이 십계명이라는 ‘율법적 계약관계’ 위에서 성립된 반면 우리 종교사상은 ‘절대자와 내가 땅 위에서 하나’라는 삼태극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며, 십자가의 상징(죄와 대속)이 과연 우리에게 어울리는지 반문했다. “요한복음에 이르기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들이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들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14:20)라고 했어요.그리스도를 매개로 하나님과 내가 하나 된다는 게 바로 삼태극의 원리죠. 신 앞에서의 죄의식을 일깨우는 십자가보다 삼태극의 상징이 우리 교회에는 더 어울려요.” 그가 성직자 안수를 받지않은 평신도 신학자였고, 교권(혹은 도그마)의 바깥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었던 점도 저 우람하고도 자유로운 ‘영성의 성채’를 이룰 수 있었던 배경일 것이다.청년 시절의 한학 스승이던 전주의 고득순 목사가 그에게 준 호가 ‘소석’(素石ㆍ에 나오는, 새로운 이름이 적힌 흰 돌이라는 의미)이다. 지금의 호 ‘소금’(素琴ㆍ줄 없는 거문고)은 고희 어름에 스스로 바꾼 것이다. “소리 안 나는 거문고이니, 미욱하다는 의미죠.무거운 ‘돌’을 내려놓으니 마음은 가볍지만,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싶다는 꿈마저 놓을 수 없어 들고는 다니는 거문고요.” 지난 해 후학들이 를 결성해 성서신학-풍류신학-예술신학으로 이어지는 그의 신학사상사를 정리하려는 참인데, 그는 연전의 강연자료들을 정리해 내년쯤 또 책을 묶을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 “교회의 삼태극 상징도 그 책에서 하고싶은 얘기입니다. 살아있음은 뭔가 창조적인 일을 하는 것이고, 젊고 늙음은 새로운 가치의 창조력으로 나뉩니다.”■ '한 멋진 삶' 속 한국의 하나님이한국이 죽어야 기독교가 산다? 기독교가 죽어야 한국이 산다? 김동리의 소설 는 외래 종교인 기독교와 토착적인 한국문화의 비극적 충돌을 생생하게 문학적으로 증언한다. 한국문화가 서양에서 전해진 기독교를 버려야 한국적인 정신을 제대로 이어갈 수 있다고 보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혹은 기독교가 불필요한 불순물로서의 한국문화를 버려야 기독교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유동식 선생의 은 이러한 번역신학이나 수입신학의 한계를 지적하며, 좋은 한국인이 될 때 좋은 기독교인도 될 수 있다는 토착화신학의 화두를 던진다. 한국문화의 뿌리를 망각하고 서양을 서투르게 모방만 하려는 종교나 신학은 마치 '갓 쓰고 자전거 타는 격'으로 어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선생은 한국문화의 바탕을 풍류도로 본다. 민족의 얼로서의 풍류도는 유교ㆍ불교ㆍ도교가 도입되기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우리 민족의 고유한 마음의 틀이다. 즉 풍류도는 어떤 구체적인 고대 종교에 대한 명칭이 아니라, 한국인의 마음 바탕과 얼을 구성하는 불변의 원리이며 보편적인 영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풍류도의 핵심에는 종교와 예술과 인생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한 멋진 삶'의 추구가 있다.'한'은 크다는 뜻으로, 종교에서는 거기에 인격적 존칭을 붙여 한님 곧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종교들이 담이 없이, 더 나아가 하늘과 땅과 사람이 담이 없이 한 전체로 어우러진 삼매경을 신라의 석학 최치원은 포함삼교(包含三敎)라 불렀고, 이를 한국 기독교는 타 종교와의 대화를 추구하는 종교신학으로 발전시켰다.'멋'이란 단순히 자연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개입된 예술적 미를 뜻한다. ... 삶 자체를 예술로 보고 이러한 흥ㆍ자유ㆍ조화의 멋을 추구한 우리 민족의 예술문화를 최치원은 좁은 의미에서의 풍류(風流)라 불렀고, 이를 한국 기독교는 이른바 예술신학으로 계승하고 있다.'삶'이란 살림살이의 뜻으로, 사람의 준말이다. 사람다운 삶, 사람다운 사람을 이룩하려는 우리 민족의 생명존중사상을 최치원은 접화군생(接化郡生)이라 불렀고, 이러한 생명살림의 요구를 한국 기독교는 8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 민중신학으로 발전시켰다.한국이 살아야 기독교가 살고, 기독교가 살아야 한국이 산다고 선생은 가르치신다. 하나님은 서양 굇내玲?함께 이 땅에 들어오신 분이 아니다. 그는 한울 우주를 창조하고 실현한 예술가이며, 우주 만물의 포월자이며,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다. 이러한 풍류도의 '한 멋진 삶'의 하나님이 바로 기독교가 말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실로 선생은 하나님이 보여준 바람의 길을 걸으며 땅에서 하늘을 산 나그네이다.손호현 (연세대 학부대학 교수)최윤필기자 walden@hk.co.kr●유동식1922년황해 평산군 남천 출생. 춘천고 감리교신학대 졸업48~56년 공주여사범ㆍ전주사범ㆍ배화여고 교사56~72년 미 보스턴대, 스위스 에큐메니칼연구원, 일본 도쿄대ㆍ국학원대학 수학59~67년 감리교신학대 교수73~88년 연세대 신과대 교수(65) (77) (82) (88) (1992) 등 저.76년 한국출판문화상 저작상() 98년 3ㆍ1문화상 학술상
==


우리 시대의 명저 50] <47> 강준만의 '인물과 사상'


2007.12.03 00:28
1997년 1월 제1권이 발간된 의 제호 아래에는 ‘성역과 금기에 도전한다’는 문구가 뚜렷이 박혀있다. 의 표지 디자인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유독 이 문구는 종간(終刊)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제호 주변에 자리 잡았다. 바로 이 문구야말로 의 존재 이유이고, 그 역할을 가장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문장이기 때문이다.강준만 전북대 교수의 1인 출판물로 시작된 은 지식인 사회의 ‘성역’인 인물에 대해 ‘금기’였던 실명비판을 다룬 언론매체로서의 의미가 가장 크다. 그동안 집단을 두루뭉술하게 비판하고, 개개 인물에 대한 평가에 적극적이지 못했던 언론과 지식인 사회를 통렬히 깨우치며 은 탄생했다.강 교수는 제1권의 머리말에서 현재 우리 사회에 언론의 자유는 없다고 못 박으며 “언론기업 이윤추구의 자유로 언론자유가 변질했다. 출판의 언론화야 말로 언론의 대안”이라고 말했다. 대형언론과 달리 출판물은 보통사람의 접근이 용이하다. 엘리트만이 독점하는 우리의 언로를 한 명이 출간하는 단행물의 활성화로 좀 더 넓힐 수 있다는 게 강 교수가 을 시작하며 가졌던 신념이다.장의덕 개마고원 대표는 “가 괄목할 만한 반향을 받자 이에 고무된 강 교수가 출판물과 언론매체가 규합된 형태의 저널룩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책의 형태를 띤 1인 미디어는 당시 세계 어디에서도 시도된 적이 없는 혁신적인 매체였다”고 말했다.강 교수는 을 기획했던 90년대 중반에 대해 “이 처음 나온 10년 전 권력의 통제는 사라졌지만 지식계의 불문율이라든가 금기 같은 습속은 살아있었다”며 “손바닥만큼 좁은 한국 지식계에서 권력 등 불특정 대상을 상대로 한 비판은 맹렬했지만 동업자들 간 실명비판이 어려웠고 이를 바로잡기엔 기존 매체론 한계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렇다고 책을 한두 권 내서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은 일은 아니었기에 저널룩이라는 방식을 생각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1권은 실명비판과 1인 미디어라는 특이함에 힘입어 현재로선 상상하기 힘든 5만 권의 판매고를 올렸다. ... 하지만 파이팅 넘치는 이슈 잡지로, 그리고 속보보다는 무르익은 분석과 논평으로써 큰 파장을 일으켰다”고 말한다.1권부터 강 교수는 손호철 서강대 교수를 조목조목 비판하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신드롬의 허와 실을 가감 없이 지면에 실어 파문을 불렀다. 조순 대안론을 놓고 유시민씨와 벌인 논쟁, 진중권씨와 오갔던 이문옥 논쟁 등 성역을 설정하지 않는 의 집중포화는 신선한 비판문화를 자리 잡게 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반면 ‘지식계의 선데이 서울’이라는 식의 지독한 혹평도 쏟아졌다.은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도토리라도 키를 재는 식의 직접적인 실명비판을 뿌리내렸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강 교수는 “동종 영역의 내부 비판과 실명 비판을 금기시하는 수위를 낮추는 데 기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자평했다. 김진석 인하대 교수는 “주제별로 만들어진 기존의 잡지와 달리 인물 위주로 쓰여 상당한 사회적 논쟁들을 불러 일으켰다”고 평가했다.강준만 교수의 1인 미디어로서의 외형은 25권으로 마감됐고 은 26권부터 고종석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김진석 인하대 교수를 편집위원으로 위촉, 3인이 기획하는 미디어로 탈바꿈했다. 인쇄매체의 쇠락과 이에 따른 의 시장위축을 보완하기 위한 변신이었지만 2000년대 중반에 접어들며 권 당 판매 부수가 수천 권에 그치는 등 1인 저널룩은 추락했고 결국 2005년 33권을 끝으로 종간이 선언됐다.강 교수는 이 8년 만에 종지부를 찍은 것에 대해 “인터넷의 활성화가 종간의 가장 큰 이유라고 보면 된다”고 답했다. 인터넷 논객으로 활동하는 한윤형(아이디 아흐리만)씨는“지성계와 생활세계 간의 간극을 메우려고 노력했지만 은 충분히 지적이지 못했고 또한 순간 순간에 대중의 반(反)지성주의에 부합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며 그 한계를 지적했다.■ 인물과 사상1997년~2005년 총 33권이 발간됨. 도서출판 개마고원 발행. 강준만 교수의 기획으로 만들어진 저널룩(저널+북)으로 출판의 언론화를 지향. ... 인물과 사상사에서 나오는 월간 과는 다름.■ 강준만 교수는…양비론 청산한 '죽이기' 시리즈 신선한 충격…토론·논쟁문화 대혁신1997년 대선 때부터 막강한 비판력으로 무장한 강준만 교수의 글은 국내 정치 판도에 큰 영향력을 끼치며 대중 속에서 싹을 틔워왔다.에 앞서 90년대 중반 대학생의 필독서로 읽혔던 , 등은 그동안 도토리 키재기에 그쳤던 지식인 사회의 양비론적 비판의 틀을 재구성한 역작이었고 강 교수 스스로 그 수 세기를 포기할 정도로 쏟아낸 많은 대중적인 단행본들은 실명비판이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일궈냈다.장의덕 개마고원 대표는 "그의 글쓰기는 지식인의 토론문화를 혁신했다. 토론과 논쟁을 통해 보상과 문책을 유도해내는 과정을 정착한 공이 있다"고 평가했다.하지만 강 교수의 모습은 뜻밖에 대중의 눈에 띄지 않는다. 글로 일군 그의 정치비판 경험을 생각하면 충분히 TV토론 사회자를 거쳐 대중적인 인지도를 높일 만도 한데 도통 언론에서 그의 모습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강 교수는 그 흔한 휴대폰마저 사용하지 않는다. 특별히 기계를 싫어하지는 않지만 운전면허가 없는 그에겐 자전거가 대표적인 운송 수단이다. 그의 가족(아내와 두 딸)이 사용하는 집 전화가 있지만 강 교수와 연락이 닿기는 힘들다. 공적인 대화는 오직 그의 집필실에 놓인 팩시밀리와 제한된 이메일로만 가능하다.의 편집위원을 지낸 김진석 인하대 인문학부 교수는 "책을 만드는 동안 직접 강 교수를 만난 적은 없고 오직 글로만 대화를 나눴다"고 말할 정도이다. 한 번은 강 교수의 자칭 팬들이 그를 KBS 사장으로 위촉해야 한다는 움직임을 보이자 강 교수는 "실망이다. 내 책을 그렇게 많이 읽은 사람들이 나를 아직 모르나"라며 고개를 젓기도 했다.초면인 사람에겐 마치 은둔자처럼 보일 정도인 강 교수의 이와 같은 모습은 실명비판을 통해 만든 수많은 '적'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라는 분석도 있다. 강 교수가 '원격 비판'을 한다고 꼬집는 이도 있다. ... 하지만 외부와 일정 정도 스스로를 격리하는 모습은 철저한 자기관리의 방법일 뿐이라는 게 지인들의 설명이다.부터 강 교수와 인연을 쌓아온 장 대표는 "다작을 쏟아내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만들려고 외부와 떨어져 있는 것이다. 글쓰기를 가장 즐거운 오락이라고 말하는 강 교수에게 이는 어쩌면 당연한 모습"이라고 말한다.따가운 비판과 논쟁을 즐기는 강 교수는 오만하고 불손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많다. 하지만 그는 "내가 일흔 살이 되어도 스무 살 젊은이의 비판에 대해 성실하게 답할 것"이라고 말하며 상대의 의견을 존중한다. 학생들에게도 겸손하며 거칠지 않다. 장 대표는 "오히려 주변인들에게 말치레가 좋다. 딸들에게도 반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우리 시대의 명저 50] <46> 서준식 옥중서한

2007.11.22 06:34
을 읽는 일은 쉽지 않다. 900쪽에 육박하는 두께가 아니라 ‘그 어떤 권력도 개인의 생각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제한할 수 없다’는 신념아래 비전향 장기수로 17년의 수형생활을 감내했던 한 진보적 사상가의 삶에 동참하는 일의 무게 때문이다. 더구나 수인은 ‘사악한 빨갱이’라는 세상의 편견과는 달리 속속들이 살갑고 정답다.무엇보다 착하다. 타인에 대한 연민에서 출발하는 착하게 살기는 하나 그저 선량한 마음씨와는 구별된다. 타인의 삶까지도 내 삶의 일부로 끌어안고 가려는 적극적인 실천의지를 담고 있다.“사람이란 머리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도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 어떤 환경에서 오는 기쁨이나 고통도 그 몸이 맛보아야만 머리 쪽에서 하는 생각도 절실해지고 진짜가 된다는 것, … 엄청나게 복잡하고 모든 것이 걷잡을 수 없이 헝클어진 세상에서 누구나 가해자가 되지않고 살아가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저 선량한 마음씨만 가지고서는 안될 것이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착해야 하는 것이다.”(1981년 12월 25일 사촌동생 선암에게 준 편지에서)그래서 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비천한 장을 인간 존엄에의 의지로 관통한 한 젊은 사상가의 초상이면서 동시에 독자에게 삶의 가장 근원적 질문,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곱씹게 만드는 책이다.서씨가 2002년 펴낸 은 옥중에서 한 달에 3장씩 배급되는 봉제엽서를 빼곡이 채워 가족과 친지에게 보낸 편지 글을 모았다. 폭력적인 군사정권의 비열한 정치공작에 맞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자 했던 한 순정한 영혼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그려진다. 한국일보 객원논설위원인 사회평론가 고종석씨는 “시대의 을씨년스러움을 인간 존재의 눈부신 고귀함으로 승화시킨 한국어 서간문학의 웅장한 마천루”라고 표현했다.서씨는 일본 교토에서 나고 자랐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유학, 1968년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다. 재일동포라는 신분은 서씨의 사고와 행동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다. ... 재일 한국인 2세로 초등학교 시절부터 이유 없는 몰매와 차별, 따돌림을 받던 저자는 민족주의자로 거듭나는 것만이 ‘재일’의 숙명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방법은 한국으로의 ‘가출’이었다.조국애로 충만한 청년의 눈에 비친 60년대 한국사회는 슬프도록 비참했다. 민족 대신 사회가 보이기 시작했다. 버스 안에서 맨발의 소녀가 구걸을 하고 굶주린 아이들이 신문지를 덮고 노숙하는 비루한 현실을 목격하면서 법학 대신 사회과학 서적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조국의 전모를 알고싶다는 열망은 70년 둘째 형 서승씨와 함께 8일간의 짧은 북한여행을 감행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재일동포였던 그에게 한국인이 골수까지 체화한 레드콤플렉스는 없었다. 일본에서는 공산당이 공식적으로 활동하고 민단과 조총련계가 결혼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국적인 3선 개헌 반대운동에 직면했던 군사정권에게 이만한 국면 전환용 빌미도 없었다. 서씨는 1971년 대통령 선거를 불과 두 달여 앞두고 형 서승과 함께 ‘모국 유학생 간첩단 사건’의 주범으로 체포됐다. 대선에서 박정희는 3선에 성공했다.서씨는 7년형을 선고받고 만기 복역했으나 국가권력은 이번엔 보안관찰법이라는 족쇄를 통해 그를 재구속, 10년의 세월을 더 가둬놓았다. 생각할 자유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죗값을 다 치르고도 세상으로부터 격리당한 것이다. 글을 배우지 못해 책 이름을 받아 적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짜증을 냈다가 감방에 돌아와 시멘트 벽에 머리를 들이받으며 후회의 눈물을 삼킨 저자가 “출소하면 하루에 꼭 한 시간씩 글쓰기와 책읽기를 가르쳐드리리라”던 다짐은 1차 보호감호 기간 중 어머니의 사망으로 영영 이룰 수 없는 맹세가 됐다.서씨는 1988년 비전향 장기수로는 최초로 석방되었다. ... 출소하면 빈민들과 함께 하며 글쓰기를 하겠다던 소박한 꿈은 지난 13일 조작으로 최종 판명난 ‘1991년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을 거치며 시대의 격랑 속에 인권운동가로 수정됐다. 1993년 인권운동사랑방을 열고 비정규직 장애우 성적소수자 등 인권사각지대에서 신음하는 사람들과 함께 인권운동에 헌신했다.서씨는 현재 독일 룰루지역 보쿰시에 거주하고 있다. 인권운동의 범위와 방법론을 놓고 동료들과 갈등을 빚다 3년 전 인권운동사랑방을 탈퇴한 이래 일체의 공식적 활동을 하지않고 있다.함부르크대학 철학과에 입학허가를 받아놓은 상태라고 했다. 2004년께 소리 소문 없이 절판됐던 은 다행스럽게도 노동사회과학연구소를 통해 내달 말 새로운 내용들이 보강돼 재출간된다. 사람답게 산募?것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서준식 옥중서한' 재출간하는 채만수·정호영씨"젊은세대에 시대·삶에 대한 인식 일깨우고파""말로 진보를 외치는 사람은 많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은 드물어요. 처음 옥중서한을 읽었을 때, 인간이 이렇게도 살 수 있구나 감탄했지요."수년 전 절판된 이 노동사회과학연구소(소장 채만수)를 통해 내달 말 재출간된다. 이 연구소 회원인 젊은 출판기획자 정호영씨가 재출간 작업을 총괄하고 서준식씨와는 서울대 법대 68학번 동창으로 40년 지기인 채만수 소장이 다리를 놓았다.정호영씨는 "폭력적인 국가권력에 의해 무고한 개인이 희생당하는 부끄러운 역사가 실제 있었고, 또 앞으로도 일어나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면서 "의 가치는 20년 전에 쓰여진 글들이지만 여전히 현재성을 갖추고 인간 존엄의 문제를 상기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개정판 에는 2002년 판에는 누락됐던 편지 15통, 60쪽 분량이 새롭게 첨가된다. 유일하게 가족이 아니면서 장기간에 걸쳐 편지교류를 했던 'P부인'에게 보낸 글들이다. P부인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정부가 사상전향을 유도하기위해 서씨에게 접근시켰던 인물. ... 채 소장은 "지배계급의 위선에 항거했던 예수를 사랑하지만 보수 기독교에 대해서는 날 선 비판을 멈추지 않았던 서씨의 종교관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1980년 짧은 서울의 봄 기간 중 옥중의 준식과 처음이자 마지막 면회를 했었다는 채 소장은 "9년을 옥중에서 보냈건만 만나자 마자 우리집에서 기르던 강아지의 안부를 물을 정도로 서준식은 다정다감하고 도덕적인 인물이었다"면서 "새로 출간되는 책이 애초의 독자였던 조카들이나 동생들처럼 젊은 세대들에게 시대와 삶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기회로 읽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개정판은 젊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나 서씨가 글에서 인용한 유명 문필가들의 책에 대해서도 꼼꼼히 미주를 달았다. 이성희기자■ 서준식 연보1948년 일본 교토 출생1967년 고교 졸업 후 한국으로 유학 1968년 서울대 법학과 입학1970년 둘째 형, 서승과 함께 북한 여행1971년 서승과 함께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보안사령부에 체포됨1972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 판결1978년 징역 7년 만기와 동시에 사회안전법에 의한 보호감호 처분 결정1980년 교도 당국의 처우에 항의, 18일 간 단식 투쟁1987년 사회안전법 철폐와 석방을 요구하며 51일 동안 단식 투쟁1988년 석방. 사회안전법 폐지 운동 전개1989~1991년 민가협 공동 의장 1991년 6월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 관련 구속1991~1993년 강기훈 공대위 집행위원장 1993년 인권운동사랑방 창립1993~1995년 전국연합 인권위원장1996~1997년 인권영화제 집행위원장1997년 인권영화제에서 제주도 4.3 항쟁을 다룬 상영으로 구속1997년 KNCC 인권상 수상2004년 인권운동사랑방 탈퇴2005년 독일 행2007년 함부르크대 철학과 입학, 현재 독일 보쿰시 거주이성희 기자 summer@hk.co.kr

[우리 시대의 명저 50] <45> 송건호 외 '해방전후사의 인식'

2007.11.22 05:23
“한 권의 책에도 인권이 있을 것입니다. 귀중한 정신의 창작인 책을 저 어두운 창고의 구석에 유폐시켜 둘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어야 합니다. 본인은 제 1권을 기획한 출판인으로서 어두운 창고 어딘가에 유폐되어 있을 그 책들을 생각하면 늘 가슴이 답답합니다. 한 권의 책은 살아 있는 정신과 지성의 생명체입니다.”2004년 5월 한 출판사 대표가 당시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보낸 편지가 화제가 됐다. 1979년 10ㆍ26사건 이후 판매금지 조치로 문화공보부에 압수된 제 1권 500권을 돌려 달라는 김언호 한길사 대표의 간곡한 호소를 담은 편지였다. 이 책은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계엄사령부의 검열을 받아 출간이 다시 허용됐지만 김 대표는 압수된 500권에 일종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다.1979년 10월 15일 발행된 1권을 시작으로 10년 간 송건호, 진덕규, 백기완 등 60여명의 필진이 참여, 전 6권으로 출판된 의 지나온 길을 살펴보면 이 같은 책의 의인화도 무리는 아니다.해방 전후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결정적이고 중요한 시기이면서도 1980년대까지도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다. 더욱이 이 탄생한 1970년대 말은 민족적 상황과 정치현실에 대해 문제의식만 가져도 수난을 당하던 때여서 일제로부터 벗어난 1945년 전후의 역사를 민족사관에 입각해 기록한 은 금기를 깬 파격적인 시도였다. 자연히 책은 발간 직후부터 젊은 지식인과 학생 사이에 일명 ‘해전사’로 불리며 회자됐다.격동하는 역사과정에서 태어나 수난 받고 또 다시 태어나는 모습이 해방 전후 민족의 역사와 꼭 닮아 있기에 책의 ‘인권’을 주장하는 것도 엉뚱한 소리만은 아닌 셈이다.책은 논문집 성격을 띠고 있다. 해방을 전후한 우리 민족사의 이해에 개괄적인 해답을 제시하고자 한 1권은 5개의 장으로 나누어 총 12편의 논문을 담았다.기본적으로 저자들은 8ㆍ15를 단순한 해방의 의미로 보기를 거부한다. ... 그들은 8ㆍ15가 민중이 주체가 될 수 있는 해방의 기회였던 것은 분명하나 민족 지도부의 역량 부족으로 미군정 하에 들어가는 것을 피하지 못했다고 보았다. 미군정에 대한 시각도 은 이전의 여러 연구와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책에 따르면 미국은 해방군으로서의 역할보다는 이데올로기 이해관계 때문에 한국 분단을 묵인한 분단의 책임 당사자 성향이 강하다.또한 미군정의 몰이해로 일제 잔존 세력이 재등장해 친일 청산이라는 식민역사의 정리 작업이 불가능해졌다는 게 이 책의 지적이다. 저자들은 또 독립의 주체 세력으로 대표되는 김구, 이승만, 여운형 등 당시 정치지도자들의 사상과 행동을 자세히 다루고 있는데 당연하게 여겼던 ‘김구=독립운동가’, ‘여운형=공산주의자’ 식의 단순 논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어 학생과 젊은 지식인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2권이 나온 것은 1권 발매 후 만 6년 만이었다. 2권은 책이 시대의 소산이자 사회운동 속에서 재탄생하는 산물임을 입증한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를 더한다.대학시절 1권을 읽고 공부한 몇몇 젊은 지식인들의 논문이 2권에 실림으로써 그들이 독자에서 필자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8ㆍ15 직후 정치지도자들의 노선비교(김광식)’, ‘건국준비위원회의 조직과 활동(홍인숙)’, ‘미군정의 교육정책(이광호)’ 등이 이에 해당한다. ... 발간 이후 한국 현대사에 대해 젊은이들이 폭발적인 관심을 보이자 정치권이 견제를 하고 나섰다. 1985년 11월 하순, 정부와 민정당은 격화되는 학원사태의 발생이 8ㆍ15 이후의 현대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에 원인이 있다고 의견을 모았다.당시 민정당 노태우 대표위원은 “일부 대학생들이 8ㆍ15 이후의 현대사를 독재ㆍ부정선거ㆍ장기집권 등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보고 기성세대를 불신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고 “역사가 야사ㆍ비사ㆍ소문에 의해 오염되고 흥미 위주로 왜곡되는 것도 사회혼란의 근본요인이 되고 있으니 현대사를 시대별ㆍ정권별로 재정립하는 일이 추진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그 와중에도 은 1987년에는 3권이, 1989년에 4~6권이 출간됐다. 우리 현대사가 혁명적으로 격동하던 70, 80년대 10년을 이 젊은 지성인들과 함께 한 것이다.은 사회과학 서적으로서는 이례적으로 1권의 경우 약 40만 권이 팔려 나갔다. 출판 기획자와 필자들의 의지와 이론을 넘어서 하나의 사회운동이 되었다는 이야기다.정치평론가 고성국씨는 “은 냉전 시대에 잃어버린 반쪽의 역사를 온전하게 복원하기 위해 굉장한 위험 부담을 안고 서술된 책”이라면서 “정규 교과과정에서 전혀 배우지 못한 역사가 서술돼 있어 대학생이었던 나를 비롯해 당시 젊은이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그는 또 “이 같은 시도가 있어 후학들이 자유로운 환경에서 균형잡힌 시각으로 학문의 발전을 이룰 수 있는 토대를 마련됐다”면서 “한국 지성사에 있어 실천적 의미를 띠는 최고의 학문적 성과를 올린 책”이라고 강조했다.■ 송건호·백기완·강만길·김윤식…역사학자·언론인 등 59명 공동집필직접 목차를 짜는데 관여한 제 1권의 대표 필자 고 송건호씨는 서울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일보 한국일보 경향신문 논설위원, 동아일보 편집국장 및 논설위원, 한겨레신문 초대사장을 지낸 한국의 대표 언론인이다.그는 2001년 별세했으나 2002년부터 그의 기자정신을 기린 송건호 언론상이 제정돼 매년 시상식이 열리고 있다. ... 김학준 동아일보 사장도 제 1권의 주요 필자 중 한 사람이다.김 사장은 서울대와 미국 켄트주립대 정치학석사, 피츠버그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과정을 마쳤으며 서울대 교수, 인천대 총장, 한국정치학회장 등을 지냈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백범사상연구소 창립자로, 김구의 사상과 행동을 분석한 그의 논문이 제 1권에 실렸다.지난 봄까지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한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는 제 2권의 필자로 참여했다.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상지대 총장을 지냈다.2~5권 필진 목록에 이름을 남긴 고 김남식씨는 북한연구가로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통일부, 국제문제조사연구소 등에서 현대사와 통일 관련 연구에 한평생을 바쳤으며 2005년 별세했다. 문학평론가 김윤식 명지대 석좌교수는 제 2권에 지식인 작가의 문제점을 중심으로 해방전후 문학을 분석한 논문을 실었다.그는 100여종의 저서를 펴내 문학예술의 광범위한 영역에서 거대한 학문적, 문학적 성과를 이룬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들을 비롯해 60여명의 학자들이 집필에 동참했다.■ 김언호 한길사 대표 인터뷰"1980년대는 책을 만들어 읽고 그 가르침에 따라 실천한 '책의 시대'였습니다."김언호(62) 한길사 대표는 "을 통해 한국사회는 변화하기 시작했다"면서 기획자로서의 소회를 밝혔다. 책의 출발은 그의 호기심이었다. 도대체 남북 분단의 원인은 무엇일까. 과연 외세에 의해서만 분단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당시만 해도 해방 전후사를 제대로 논의하는 것이 아직 쉬운 일이 아니라는 의견이 대세였지요. 하지만 으레 해방만을 떠올렸던 8.15 전후의 역사를 해명해야만 우리 자신과 관련된 사회과학이 비로소 맥락을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김 대표는 '독자로서 나부터 읽고 싶은 책을 만들자' 마음먹었고 이렇게 해서 젊은 학자들의 논문을 모은 이 탄생했다. 그는 일종의 논문집인 이 책이 열흘 만에 4,500부나 팔려나가는 것을 보면서 '책은 독자와 함께 만드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 한 권의 책은 어느 날 하루아침에 창출되는 게 아닙니다. 책이 등장하게 되는 역사적 배경 또는 사회적 정서와 사상이 엄연히 존재하죠. 결국 은 1980년대를 살아 온 우리 모두의 공동작업이자 성과입니다."역사와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기획된 은 여러 사회과학 서적의 모티프가 되는 등 역사인식운동에 불을 지폈지만 이 때문에 수난을 겪기도 했다. 지난해 초에는 의 편향성을 문제 삼은 이 출간되기도 했다."이 좌파 민족주의자들의 주장이라는 지적에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책에는 자유 민주주의 학자의 글도 있고 민족적 진보주의 학자의 글도 있습니다. 학문과 지성의 세계라면 보수도, 진보도 존중돼야지요. 생각의 차이를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일 아닙니까."사회 변화에 따라 시대정신을 이야기하는 매체도 달라져 영상과 인터넷이 정보를 얻는 중요한 미디어가 됐지만 여전히 책은 지식과 사상을 확보하는 가장 중요한 매체라는 게 그의 말이다."사람은 책을 만들지만 책은 또 사람을 만들지요. 은 한국인에게 새로운 민족의식과 자주의식을 심어준 책입니다. 바로 그런 책이 우리 시대의 명저가 아닐까요."김소연 기자 jollylife@hk.co.kr.사진 신상순기자 ssshin@hk.co.kr

[우리 시대의 명저 50] <33> 정운영의 '저 낮은 경제학을 위하여'

2007.08.23 00:07
자신은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지언정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전파하고픈 광대의 의지를 가진 그였기에 (1990)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경제학의 소명은 하늘의 일을 근심하지 않고 땅 위의 일을 걱정하는 데 있다”고 믿었던 정운영은 자신의 칼럼을 모아 ‘경제학’이라는 이름에 두려움을 느끼는 민중의 눈을 뜨게 했다. 그는 정ㆍ관계의 소위 ‘높은 이’들이 추진하는 정책, 그들의 행태를 ‘낮은 이’ 즉 민중의 눈높이에서 비판하고자 했다.“경제학이 요구하는 까다로운 암호해독에 질려 경제현상과 경제이론, 즉 밥과 자유의 문제에 대한 일상적인 관심마저 포기하려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안내자가 되기를 바란다”는 그의 소망대로 는 1990년대 필독 교양서의 대명사였다. 경제학을 다룬 책으로는 드물게 1997년까지 11쇄나 찍었다.이 신문에 발표한 글이 대부분으로 사회현실에 대한 단평을 모은 것이었다면, 잡지에 게재한 글 위주로 선택한 는 논리 전개가 좀 더 상세하고 구체화됐다.정운영에 따르면 경제학이란 ‘경영학을 공부한 놀부(자본가)’와 ‘의식화를 학습한 흥부(노동자)’가 공존공영하도록 돕는 것이다.유기적으로 얽히고설킨 현대 사회에서 나만 돈을 많이 벌어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은 경제의 원리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다. 경제란 내가 사는 아파트값이 오르거나, 또는 좋은 회사에 취직한다고 해서 살아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정운영은 경제학이라는 도구를 활용해 1980년대 후반 한국사회의 여러 문제를 암호를 해독하듯 풀이해 놓았다.그리고 그것은 한국 사회를 뒤덮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 대한 맹목적 추종을 강하게 비판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야말로 진보 논객인 동시에 인본주의자인 그의 성향을 드러내는 말이다.정운영은 학자이면서, 강단을 벗어나 자신의 배움을 전파하는 데 누구보다 적극적인 언론인이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석사과정을 마친 그는 잠시 한국일보 등에서 기자로 일하다 벨기에 루뱅대로 유학, 학부 과정부터 다시 밟아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 귀국 후 한신대 교수로 부임한 그는 한국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기틀을 닦았다. 1986년 학내 문제로 해직당한 후에는 서울대와 고려대 등에서 강의했고, 사망 직전까지도 칼럼을 쓰는 열정을 보였다.쉽게 풀어 쓰면서도 유려한 정운영의 글의 힘은 독자들을 흡인하면서 그들이 경제학에 대한 두려움을 던져버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소설가 이윤기가 정운영의 글을 보면서 글 쓰는 법을 배웠다고 말할 정도로 글쓰기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당초 정운영이 를 구상한 것은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대학생들이 고등학교 때까지 전혀 갖지 않았던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그는 강단에서 만난 대학생들이 당대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도록 시사적인 논평을 곁들여 해설한 칼럼을 주로 썼다. 이 책도 ‘대학생 J에게 보내는 편지’로 열고 있다. 이 책이 에세이집을 표방하고 있듯, 경제학이 에세이의 훌륭한 소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 역시 정운영 식 글쓰기의 힘이다.정운영의 저작은 주로 매체에 기고한 칼럼을 모은 칼럼집과 마르크스 경제학자로서 저술한 이론서로 크게 나뉜다. 등이 대표적인 이론서다. 칼럼집은 에서 시작해 , 그리고 등 유고집까지 모두 9권에 달한다.칼럼집은 물론 그의 이론서는 경제학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벨기에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고 귀국한 198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경제학도들의 지식은 일본 또는 영미권의 저작물을 통한 것이 전부였다. 정운영은 프랑스, 독일 등지의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론을 한국에 소개하기 시작했다.1990년대 세계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사회비판 의식보다는 개인의 문제에 온통 집중되기 시작했다. 일반인 뿐만 아니라 대학생도 당장의 눈앞의 현실에 전전긍긍하는 게 지금 우리네 모습이다. ... 자연히 1980년대 후반의 시사 문제를 다룬 이 책의 감동이 2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지속되기는 어렵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운영이 지적했던 세계화의 폐단이 2000년대인 지금 더욱 극대화되는 것을 보면서 그의 선각자적 시각에 경외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어지럽고 복잡한 세상, 진정한 구루(guru)를 찾기 힘든 요즘이다. 정운영의 글이 별처럼 빛나는 이유다.■ 노랑 띠 박스1944년 충남 아산 출생1972년 서울대 경제학과ㆍ대학원1972년 한국일보 기자1973년 중앙일보 기자1981년 벨기에 루뱅대학 경제학박사1982~86년 한신대 경상학부 교수1988~99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1996년 언론인클럽 언론상(신문칼럼상) 수상1999년 MBC TV '100분 토론' 진행2001년 EBS TV '정운영의 책으로 읽는 세상' 진행1999~2005년 경기대 경제학부 교수2000~2005년 중앙일보 논설위원2005년 9월24일 신장 질환으로 별세■ 저서 등■ 아직 못다한 이야기…정운영의 유고"세계화 시대에 정치적 정직성이니 정책의 공평성이니 하는 덕목들이 말짱 힘 빠진 주장임을 잘 안다… 그럴수록 이 시대에 더욱 절박한 제목이 정치적 정직성이라고 믿는다. 영웅을 본뜬 따위로 한 순간이나마 위로를 찾는 것이 현대인의 삶이라면, 그것은 너무 삭막하지만 또한 피할 수 없는 대상이기도 하다."2005년 9월 병상에서 부인의 도움을 받아 구술로 써 내려간 정운영의 마지막 칼럼 '영웅본색'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열흘 걸려 완성한 이 칼럼이 중앙일보에 실린 지 17일 후 그는 세상을 떠났다.경제학이라는 도구로 현실을 날카롭게 분석하면서 인본주의적 성향을 잃지 않았던 정운영의 에세이집 는 아쉽게도 현재 절판된 상태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이 칼럼 '영웅본색'을 비롯한 그의 말년의 글이 실린 유고집 에 그대로 살아 있다.지난해 9월 정운영 1주기를 맞아 와 2권의 유고집이 발간됐다. ... 전자는 를 비롯한 그의 칼럼집의 맥을 잇는 아홉번째 에세이집이며, 후자는 등 이론서의 맥을 잇는 책이다.에서는 보수와 진보를 넘어 한국사회의 핵심을 냉철하게 꿰뚫는 그의 균형감각이 번득인다. 대북 경제정책과 관련, 정부와 기업의 역할을 짚은 '장삿속과 민족애 사이에'(143쪽) 같은 글이 그렇다.독일 경제의 위기와 한국의 주5일제 근무를 연결지은 '천당에 연옥의 시련이'(97쪽) 같은 글에서는 변화하는 세계를 주목하며 한국사회의 현실을 짚어내고 있다.특히 이 책에는 오랜 기간 좌파 경제학자로 험난한 삶을 살았던 그의 여정이 담겨 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소신 하나로 94년을 버틴 폴 스위지의 생애를 다룬 글 '보수든 진보든 진짜이기를'(213쪽)에는 자연스레 그의 인생이 오버랩된다.이 책에 실린 그의 미완성 원고 '선비'(79쪽)에서 그는 '스스로 정결함을 나타내는 단어가 있다… 나는 이 부류에 선비라는 단어를 갖다 놓고 싶다'고 했다. 그의 딸 정유신씨는 이 책 서문에서 "선비의 한 구절을 읽다 나는 아버지를 떠올렸다"며 "나에게는 정결함을 나타내는 단어가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적었다.레테의 강 너머에 있는 그에게서 지혜를 구하고 싶을 정도로 정결한 존재가 그리운 2007년 한국 사회. 벌써 정운영의 2주기가 한 달 앞(9월 24일)으로 다가왔다.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우리 시대의 명저 50/ 디지털시대에 아날로그 숨결을…

2007.01.03 23:47
속도를 최고 가치로 여기는 디지털 시대, 책은 느림의 미학으로 우리 삶을 살찌우고 정신을 깨어있게 한다. 여기 해방 이후 우리 저술 가운데 두드러진 성취들이 있다. 본보는 매주 한 차례 이 명저의 저자와 책 주변의 이야기, 그리고 명저의 내용과 학문적ㆍ시대적 의미를 짚어보려 한다. 아날로그적인 숨결과 입김으로 디지털 세상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지성의 싹을 틔우려 한다.이를 위해 한국출판문화상 심사위원단과 함께 나름의 기준에 따라 50권의 책을 선정했다. 개별 학문이나 연구사에서 고전적 가치를 지닌 책, 그럼으로써 지성사의 주춧돌이 돼온 책, 고답적인 학문의 각질을 벗겨 지식의 대중화에 기여한 책, 시대의 담론을 선도하고 이슈의 중심에 섰던 문제적 저작들을 우선적으로 추렸다. 이 목록을 들고 도서관과 서점에서 책을 구해 올 한해 동안 섭렵해보는 것은 어떨까.최윤필기자 walden@hk.co.kr

[우리 시대의 명저 50] <1> 연재를 시작하며

2007.01.03 23:47
우리 저술의 숲은 건강하고 우람했다. 지성의 숲을 거니는 일은, 굳이 한 그루 한 그루의 결을 더듬고 껴안아보지 않고서도, 황홀하고 뿌듯했다. 책의 전문가들이 전해온 목록의 갈피에서 밀려오던 희열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또 저자와 책이 갖는 이름의 무게감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 기획팀은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 고통마저도 행복했다.추천ㆍ자문단과 기획팀은 선행 연구로 불모의 땅을 일군 선구적 저서와 학문적으로 고전의 무게를 지닌 책, 지식 대중화를 선도한 책 등을 우선적으로 고려했다. 또 특정 저서의 가치 못지않게 해당 저자가 우리 지성사에 미친 영향을 높이 산 경우도 있다. ... 시대적 담론과 이슈의 중심에 섰던 문제적 저작들도 놓치지 않으려고 고심했다.식민지 사관과 실증 사학을 넘어 지배집단의 교체라는 독자적 사관으로 한국사를 정립한 이기백의 , 고난의 역사를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의미로 나아가고자 했던 함석헌의 , 서양 신학과 전통 종교사상을 대비하며 우리 문화의 보편적 소통의 가능성을 탐색한 유동식의 , 재야 학자로서 학문적 엄밀성과 함께 역사의 빈틈을 성실히 메워준 이이화의 , 서양고대철학 연구의 수원지로 여전히 마를 기미 없이 푸르게 출렁이는 박홍규의 , 우리 역사에서 ‘자생적 근대화론’ ‘자본주의 맹아론’의 학술적 근거를 실증해 그 문제 의식을 지금까지 이어온 김용섭의 , 해당 분야에서 아직도 이들의 업적을 넘어서는 저작이 없는 것으로 평가되는 김두종 전상운 김용준 유민영 등의 노작들이 그렇게 선정됐다.암울한 군사독재의 억압을 뚫고 비판적 저널리즘의 시각에서 지성의 균형점을 잡아준 리영희, 1980년대의 질곡에 이라는 독보적인 신학적 응답을 제시했던 안병무, 으로 1970년대와 80년대 변혁운동의 맥을 이어준 조영래, 마당극이라는 전통 연희의 현대적ㆍ변혁적 연구와 실천으로 당대 문화의 큰 정신을 구축했던 채희완, 억압의 시절을 몸으로 살았고 몸의 고백으로 시대를 움직인 서준식 정수일 홍세화의 저작들도 놓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명저로 꼽혔다.경제학이 강단을 벗어나 어떻게 현실과 만날 수 있는지를 가슴으로 보여준 정운영의 , 고도의 과학 전문 연구분야를 대중적 글쓰기로 선도한 최재천의 , 20세기 신화 열풍을 주도한 , 동양미술의 오주석, 서양미술의 이주헌, 한시의 정민, 미학의 진중권 등은 인문학 대중화의 전범으로 꼽혔다.또 우리 글과 우리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을 아프게 일깨운 이오덕의 , 우리 문학의 오랜 딜레마였던 ‘근대’의 숙제를 성실히 풀고자 한 김윤식 김현의 등도 목록에 들었다.기획팀의 어두운 눈과 선택의 편의로 막판에 누락된 소중한 책들도 수두룩하다. ... 이들 책에 대한 응당한 예우는 눈 밝은 독자들의 몫으로 넘기고자 한다.우리는 저자들이 먼저 닦은 저 편한 길을 최대한 힘들여 한 걸음 한 걸음 따라가고자 한다. 인문학을 사랑하는 지성의 독자들과 함께.● 추천 위원 기고/ 무엇이 책을 숨쉬게 하는가광복 이후 '나라 세우기'와 상응하는 '학문의 토대 쌓기'는 광복 직후의 혼란상과 한국전쟁의 상흔 탓에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김두종의 , 김원룡의 , 전상운의 등이 대표적이다. 수용자, 즉 독자 측면에서 보면 60년대는 전집 출판의 전성기였다. 외판원에게 구입한 문학이나 사상 전집을 거실에 꽂아두는 허영심이 팽배했으나, 그 허영심이란 바꿔 말하면 일종의 지적 허기이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의 60년대는 배만 고팠던 게 아니다.특기할 만 한 것은 1970, 71년에 나온 김용섭의 다. 이 책은 우리 역사에서 내발적(內發的) 근대의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인문학과 사회과학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고 김현, 김윤식의 도 김용섭의 연구 성과에 크게 자극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70년대는 근대화의 기치 아래 개발 독재와 정치적 억압으로 점철된 시대였고, 출판과 책도 그러한 시대 상황에 민감하게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리영희의 나 박현채의 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사회과학의 시대로도 불리는 1980년대에는 좌파적 상상력으로 무장한 많은 지식인들이 정당성 없는 권력의 폭압적 전횡에 맞서며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다. 한완상의 , 이진경의 등을 떠올려 볼 수 있다.되찾은 우리 글과 말로 토대를 쌓고 틀을 짓는 시기, 어떤 의미에서는 각 분야에서 개척자적 노력이 요구되었던 시기가 1950, 60년대라면 1970, 80년대는 학문과 출판과 책이 시대와 현실의 요청에 충실히 응답하려 했던 시기다. ... 무너뜨려야 할 우상도, 싸워야 할 대상도, 이뤄야 할 목표도 분명했던 시대, 그래서 일종의 전선(戰線) 시대라 칭해도 좋을 그런 시대였지만 1990년대가 되면서 전선은 가뭇없이 사라졌다.잃은 것은 전선이었고 얻은 것은 다양성이었다. 우리 출판과 책의 지형도는 매우 다채로워진 것은 물론 훨씬 더 독자 지향적으로 바뀌었다. 개성 넘치는 문장 스타일, 입말에 가까운 글쓰기, 엄숙한 강의가 아니라 정겨운 수다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저자들이 부각됐다. 의 유홍준, 의 진중권이 그러했으며, 2000년대에 들어서는 의 이윤기가 그러했다.최근 들어와 많은 이들이 책을 걱정한다. 그들이 보기에 독자들은 더 이상 책의 존엄을 경외하지 않는다. 어떤 주제의 얼개와 뜻을 깊이 파고드는 책은 좀처럼 환영 받지 못한다. 책의 위기, 책의 죽음까지 거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출판과 책의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언제나 책은 위기였다. 다만 위기 속에서도 시대의 중추를 정확히 건드리며 한 획을 그은 소수의, 아니 극소수의 책들이 있었기에 책의 역사는 단절되지 않았다.표정훈 출판평론가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

[우리 시대의 명저 50] <22> 이오덕의 '우리글 바로쓰기'

2007.06.07 00:15
“지난 천년동안 우리 겨레는 끊임없이 남의 나라 말과 글에 우리 말글을 빼앗기며 살아왔고, 지금은 온통 남의 말글의 홍수 속에 떠밀려 가고 있는 판이 되었다. 그래서 이제 이 나라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모국어를 가르치는 일조차 아예 그만두었다. 날마다 텔레비전을 쳐다보면서 거기서 들려오는 온갖 잡탕의 어설픈 번역체 글말을 듣고 배우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진다.”이런 문제 의식에서 비롯된 이오덕(1925~2003)의 (한길사)는 엄한 선생님의 따끔한 회초리와 같은 책이다.권위주의와 유식병이 판을 치던 시절, 이오덕은 정작 지식인들, 글을 쓰는 사람들이 말과 글을 병들고 위태롭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신문과 잡지, 방송을 비롯해 사회 각계에서 쓰는 말 가운데 우리말을 오염시키고 있는 일본말과 한자말, 서양말의 문제를 자세하고 솔직하게 지적하며 ‘말의 민주화’를 주장했다.우리글과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을 아프게 일깨운 이 책은 1989년 나오자마자 사회 전체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책의 반응이 뜨겁자 92년 개정판을 내면서 잡지에 연재하거나 발표한 글을 모아 2권을 함께 냈고, 95년 3권이 마지막으로 나왔다. 1권(개정판)은 34쇄, 2권은 22쇄, 3권은 12쇄를 찍었고, 총 20만부가 팔려나갔다.우리말과 글에 관심있는 사람들, 글을 쓰거나 쓰려는 사람들의 책장에는 어김없이 이 책이 꽂혔다.경북 청송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이오덕은 스무살부터 43년간 시골 초등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한 교육자이자 아동문학가다. 동시, 동화, 수필, 아동문학 평론, 글쓰기 교육 등 80여권의 책을 냈는데, 이 책들은 모두 ‘우리 말과 글 살리기’에 닿아있다.그는 말과 글을 바로 써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이는 의 서문에서도 잘 드러난다. “우리가 그 어떤 일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외국말과 외국말법에서 벗어나 우리말을 살리는 일이다. 한번 병들어 굳어진 말은 정치로도 바로잡지 못하고 혁명으로도 할 수 없다. ... 이 땅의 민주주의는 남의 말 남의 글로써 창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말로써 창조하고 우리 말로써 살아가는 것이다.”는 어떤 국어 교육책보다 풍부한 사례를 들고 있다. 또 단순히 잘못을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는지까지 제시했다.일본말의 영향으로 쓸데없이 남용되는 조사 ‘의’와 ‘진다’ ‘된다’ 같은 피동형, ‘수순’ ‘입장’ ‘미소’ ‘~에 다름 아니다’ 등 일본말을 그대로 쓰는 표현, 영어의 과거완료 시제에서 나온 ‘~었었다’, ‘~적(的)’ ‘~화(化)’ 같은 한자말투, ‘조우’ ‘편린’처럼 공연히 어렵게 쓰는 한자말 등 오염된 우리 말과 글의 현실을 실제 사례를 통해 하나하나 지적하고, 바로잡았다.‘언문일치’가 아니라 거꾸로 ‘문언일치’를 보여준 온갖 소설들도 그의 비판 대상이 됐다. 독자들과 주고 받은 편지를 통해 구체적인 궁금증도 하나하나 풀어줬다.이오덕은 삶에서 나온 말과 글이 가장 값진 것이며, 말하듯 쓴 글, 누구나 알 수 있는 글이 좋은 글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의 문장 역시 쉽고 명쾌하다. 그래서 더욱 호소력이 있다.그는 이 책의 학문적 근거가 뭐냐는 질문을 받고 “내 생각의 뿌리는 나 자신이고, 내가 알고 있는 우리 말이고, 말을 하면서 살아온 백성과 민중들입니다”라고 답했다. 그가 ‘모람’(회원) ‘먹거리(먹을거리)’ 같은 우리 말 신조어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그는 기본적으로 순수한 우리 말을 써야 하지만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말까지 순 우리말로 바꿔놓으면 도리어 거북하다고 했다. 이오덕은 “별난 말을 만들어내서 퍼뜨리고 싶어하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말을 써서는 지식인들의 권위가 안 서고 지식 장사가 안되기 때문”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 또한 삶과 현실이 아닌 관념 속에 갇혀 있는 말이라는 것이다.는 한길사 김언호 사장의 권유로 출판됐다. ... 김 사장은 77년 나온 이오덕의 아동문학 평론집 을 읽고 크게 감동해 이듬해 을 출판하면서 이오덕과 인연을 맺었고, 이후 20여권의 책을 냈다.김 사장은 “이오덕 선생이 80년대에 안암동의 출판사 사무실에 자주 오셨는데 그 때마다 오염된 우리 말과 글의 문제를 걱정하셨다. 그래서 책으로 쓰시라고 권유했다”고 돌이켰다.김 사장은 “는 문법에 치중한 딱딱한 글쓰기 교육 책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말글 운동을 담은 책이며, 이오덕 선생은 어떤 한글학자보다 우리말과 글을 살리는 데 큰 영향을 미친 분”이라고 말했다. 또 “이 책을 통해 일어난 우리 것에 대한 각성은 민족주의 정서와 민주화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덧붙였다.는 언어의 순수성에 지나치게 집착해 현실을 외면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언어 표현의 가능성을 제약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그러나 우리 말과 글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던지고, 반성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만으로도 책의 가치는 너무나 크다.이오덕은 이 책이 나온 후 “많은 사람이 공감의 뜻을 말해주었지만 내가 그토록 애써 비판한 신문의 글은 여전히 그대로 나오고 있다”면서 “겨레의 넋이 담긴 말이 남의 말글로 죽어가고 있다고 해도 아무 대답이 없으니 이거 참 답답할 노릇이다”라고 했다. 아마 지금도 그는 우리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김지원기자 eddie@hk.co.kr■ 이오덕 선생은 "실천적 지식인의 표상"이오덕은 교육과 글쓰기에 대한 신념을 알리기 위해 꾸준히 책을 썼을 뿐 아니라, 연구와 실천을 위한 단체에 참여하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다.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를 비롯해 어린이도서연구회, 우리말 살리는 겨레모임,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 마주이야기교육연구소 등이 그가 만들거나 관여한 단체들이다. 그리고 이 단체들은 여전히 그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1970년대 나온 같은 책을 보고 전국 각지의 교사들이 이오덕에게 편지를 보내왔고, 이오덕은 이들을 모아 83년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를 만들었다. ... 이오덕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이오덕 공부 모임’을 통해 이오덕의 책과 삶을 연구하고 있다. 초창기부터 이 단체에서 활동해온 김익승(화양초 교사) 상임이사는 “이오덕 선생은 늘 ‘아이들을 하늘처럼 섬겨야 한다’고 강조하셨다”면서 “선생이 말씀하셨던 ‘참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이라는 책을 낸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 이주영(송파초 교사) 사무총장은 “선생은 각종 모임의 회보를 손수 쓰고 우표를 붙여 우체국까지 직접 다녀올 정도로 대단한 열정을 갖고 있었다”면서 “떨어진 양복을 꿰매 입고 늘 신문지 위에 과일 껍질을 말려서 말려 거름으로 쓰실 만큼 검소한 분이었다”고 회상했다.25년간 인연을 맺어온 한길사 김언호 사장은 “겉으로는 부드러운 분이었지만 자신의 이론과 정신에 참으로 단호했다. 책 제목 대부분을 직접 지었고, 편집이 조금만 잘못돼도 큰일이 났다. 작은 간행물 하나, 아이들의 편지 하나, 그림 하나도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했다”고 말했다.이오덕은 2003년 충북 충주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나면서 “죽음을 밖에 알리지 말고 장례가 끝난 뒤 ‘즐겁게 돌아갔다’고 전하라”는 말을 아들에게 남겼다. 그가 떠난 곳에서는 그의 이름과 뜻을 이어받은 대안학교 ‘이오덕 학교’가 문을 열었다.김지원기자 eddie@hk.co.kr
==


==


==


==


==


==


==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