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17

戦時中“日本人”として生きた彼女が見た、もうひとつの8月15日。

戦時中“日本人”として生きた彼女が見た、もうひとつの8月15日。

전시중 '일본인'으로 살았던 그녀가 본 또 다른 8월 15일.

일본에 있던 한반도 출신자는 1939년에는 100만명 정도였지만, 종전시 1945년에는 200만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식민지' 출신자로 자란 여성은 어떤 전시하를 보냈는가. 그 증언을 들었다.

한때 '일본 국민'으로 살았고 나중에 '외국인'으로 불린 사람들이 있다.

전전부터 전시중에 걸쳐, 일본의 식민 통치하에 놓여 있던 한반도의 사람들. 일본이 전쟁에 빠지면, 일본 국적을 ​​잃고, 「외국인」으로서 버려진 사람들은, 어떤 생각으로 전중, 전후를 살았는가.

"나는 아무것도 몰랐어. 바보였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당시를 ​​되돌아 보는 재일 코리안 2세 여성의 증언을 들었다.

석일분(석일분)씨는 91세. 1931년, 나가사키의 이사하야에서 태어났다. 일을 찾아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온 부모님도 자신도 일본 국적. 이름도 일본명의 「이시하라 모모코」를 사용하고 있었다.

한국 동남부 출신의 아버지는 건설·토목 작업원을 정리하는 '친척'이었다. 똑같이 일하는 곳을 찾아 일본에 온 사람들이 아버지를 의지하고 모여 함께 밥밭에서 살고 있었다고 한다.

공사가 끝날 때마다 사는 장소를 바꾼다는 생활로 초등학교 4년 무렵은 사가와 오이타, 후쿠오카와 규슈 북부를 전전했다. 아버지는 발전소나 철도, 다리의 공사 등을 맡고 있었지만, 때로는 사업에 실패해 큰 손해를 입기도 했다.

「반바네, 파고 오두막, 버락의 집이 줄지어 있는 느낌. 우리는 가족으로 방이 별이지만, 방은 6 다다미 정도군요. 모기장을 붙이면 움직이는 장소가 없을 정도였어요」

"남자에게 밥을 짓는 사람이 있고, 아무것도 할 수 있습니다. 김치와 수프와 가끔 생선을 끓인 것도 있었지만 반대로 어머니의 밥은 먹지 않았습니다. 아래의 아이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식을 맡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20~30명의 대소대에서 자랐다. 남자들이 일하러 나가는 동안 학교와 집에서 보냈다. 밤이 되면 일에서 돌아온 이들이 꽃패에 흥하거나 조선민요를 부르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이시씨 일가나, 그 쌀집에 모여 있던 노동자나 그 가족들과 같이, 전시중에 한반도로부터 일본에 건너 온 사람들은 적지 않다.

일본이 '한국병합'으로 한반도를 식민지로 한 것은 1910년. 조선총독부를 설치해 통치를 시작해 일본어교육 등 동화정책이 시작됐다. 그 후 토지정책에 의해 곤궁한 농민들이 일을 찾아 일본에 왔다.

일중 전쟁에서 태평양 전쟁에 걸치면 '황민화'라고 불리는 동화 정책이 강해졌다. 모집, 관알선, 징용 등과 형태를 바꾸어 노동력도 요구하게 되었다. 징병도 시작됐다. 일본에 있던 한반도 출신자는 1939년에는 100만명 정도였지만, 종전시 1945년에는 200만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대부분은 탄광과 토목 작업, 공장 등에서 노동에 종사. 결코 좋은 노동 환경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경제적 이유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각지에 돌씨가 살았던 것 같은 밥장이 형성되고 있었다.

"항상 눈에 띄지 않게..."

스스로는 「조선인」이라고 하는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던 돌씨. 그러나 그 출자는 일본인 사회에서 배척, 괴롭힘의 대상이 되었다.

“한 쌍에 조선인은 5~6명이었어요. 입학이 늦거나 동원으로 늦어져 일본에 오거나 합니다만, 괴롭힘의 대상이 됩니다. 바보가 되는 느낌입니다. 김치가 냄새라든가, 마늘 냄새라든가, 그런 식으로. 도시락도 괴롭히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누군가 조선인이라며 괴롭힘을 당했다면 아무래도 용서할 수 없어서 싸움이 되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가능한 한 눈에 띄지 않게 하고 있었어. 뭐든지 뒤를 좋아했습니다」

조선인 친구에게는 일본인 친구와 걷고 있을 때 길에서 친족과 만나도 숨길 수 있는 아이도 있었다. 돌씨는 거기까지 숨기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몇 가지 슬픈 추억이 있다.

예를 들어, 운동회. 클래스에서 다리가 빨랐던 돌씨가 릴레이의 선수로 선택되면, 전형에서 떨어진 일본인 아이의 언니들이 와서 「신입의 주제에, 조선인의 주제에 건방진」이라고 둘러싸여 걷어차는 적이 있었다.

기대하고 있던 가정 방문에서도, 조선인의 집이라면 와서 오지 않았던 선생님이 있었다. 싸우고 있을 때 조선인의 학생만을 꾸짖거나, 내려본 태도를 취해 소중한 일을 맡기지 않거나 하는 선생님도 있었다.

잘 해준 일본인 선생님이나 친구도 물론 있다. "나는 거기까지 괴롭힘이나 차별을 받지 않았다"고 하지만, 어릴 적에 받은 차별은 지금도 사사쿠레처럼 마음에 남아 있다.

「클래스에 갈아입는 인형처럼, 항상 귀여운 옷을 입고 오는 아이가 있었어요. 그 아이가 생일회에 초대해 주었습니다. , 쭉 봐 오는데요…

어느새 자신이나 자신의 출자에게 가지게 된 「열등감」. 그것은 미래의 선택에도 관여하게 되었다고도 중얼거렸다.

「정말은, 제복도 귀엽고, 친구도 모두 가기 때문에 여학교에도 가고 싶었던 것.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가는 것은 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인이 가도 좋은 것인가, 라고 한다 생각이 있었습니다.그러니까, 어머니에게 부탁해까지 여학교에는 가려고는 생각되지 않았어요」

"나라를 위해"라고 말하면

다만 전쟁이 격렬해질 무렵, 키타큐슈·오리오에 한집을 사, 거기서 살게 되었다.

아버지는 일로 전전하는 가운데 나머지 가족에서 보내고 있었다. 이웃 사람들에게 다행히 '조선인'이라며 싫은 일을 한 적은 없었다.

작은 언덕 위에 세워진 집에는 메이지 천황의 이마가 장식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준비한 것일까. 어디서 봐도,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학교에서는 이미 천황 일변도예요. 교육 칙어도 암창하게 되었고, 학교에 가면(천황·황후의 사진과 교육 칙어를 준) 봉안전에 인사하고 들어가서 돌아가도 인사하고 돌아왔습니다.(개전 기념일의) 12월 8일은, 미야 참배도 하고 있었습니다」

'나라를 위해서'라고 하면 그것은 조선이 아니라 '대일본 제국' 때문이었다. 아이면서, 「일본이 이기기 위한 전쟁 협력」을 해 왔다고 생각하고 있다.

전선 병사들을 위해 천인침을 꿰매기도 한다. 어머니 대신 이웃집 모임에 나가거나 양동이 릴레이 훈련에 참여하기도 했다.

한편, 점점 전황이 악화되면 아이들의 생활에도 영향이 미치게 된다. 수업은 줄어들어 대신 군사교련이나 농가에 대한 근로동원만 됐다. 머리 위에는 미군기가 날아가는 일도 늘었다.

「전쟁에 대해서만, 이기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단지, 정말로 이길 것인가라고 하는 불안도 갖게 되었습니다.

「멀리서 보면 은지와 같은 폭탄이 하치만이나 고쿠라 근처에 떨어지는 것이 보이네요. 역시 무서웠어요. 거기에, 즐겁게 놀거나 하고 싶은 일이 없고,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1945년 8월 15일, 전쟁은 끝났다. 일본에 있어서는 「패전」이었지만, 식민 지하의 한반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해방」이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돌씨는 그다지 그렇게 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았다.

"어쨌든 종전의 날은 조용했습니다. 우리는 라디오도 없었고, 주위에 조선인도 없었고, 일본인도 그렇게 시끄럽지 않았기 때문에. 없었어요」

"단지, 그렇게 하고 있는 동안에, 근처의 치쿠호탄광에 동원된 조선인들이 조금씩 우리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아, 이제 식민지는 끝났다고"

잃어버린 청춘,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어머니는 조선으로 돌아가려고 강력히 주장했다. 글씨를 읽을 수 없는 부모 대신 장부를 달고 있던 남성이 '고향으로 돌아간다'며 인사에 온 것이 계기였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집을 놓고 아이를 데리고 연락선이 있던 야마구치 시모노세키항으로 향했다. 전국에서 모인 많은 조선인들이 항구에 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기뢰가 있다고 해서 배는 출항할 수 없었다. 「돌아도 지금보다 생활은 힘들다」 「콜레라가 유행하고 있다」 그런 소문도 흐르게 되어 불안해진 어머니는 귀국을 그만두었다.

그 후, 합류한 아버지와 함께 잠시 동안 가족은 불타는 밭이 된 거리에 버락을 세우고 살았다.

당시에는 어머니가 무엇으로 거기까지 하려고 했는지 몰랐다. 그러나, 일본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없는, 글자도 읽을 수 없는 어머니에게 있어서, 「이국」으로 아이를 데리고 사는 것은, 괴로웠던 것이 아닐까, 지금이라 생각된다.

아버지는 곧바로 후쿠오카에서 미군 병사의 건설과 시오다의 일을 찾아 다시 이반의 운영을 시작했다. 그리고 생활이 궤도를 타기 시작한 1947년 현장을 이동하는 도중에 철도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 다음에는 어머니가 혼자 고물상 등을 하고 아이 7명의 생활을 담당했다. 돌씨는 그러한 어머니를 장녀로서 지지해 왔다.

“어머니는 상재가 있는 사람이었지요. 시모노세키에서는 메리켄 가루를 철판으로 구워 달콤한 것을 바른 것을 도매하여 돈을 벌고 있었고, 아버지가 죽고 이바가 해산한 후에 남은 3명 를 데리고 고물상을 시작하면, 정확히 조선전쟁의 시작된 무렵으로. 금속의 값이 오르고, 상당히 촉촉한 것 같습니다」

생활이 불안정했던 적도 있어 18세에 맞서 결혼을 했다. 그러나 신혼 생활은 가난하고, 탄광으로 빵을 팔는 등 해 먹고 잇는 후, 이혼. 그 후는 새로운 남편을 만나, 아이에게 축복받으면서, 일하지 않는다.

기회 뜨개질, 넥타이 만들기, 텔레비전 부품의 제조, 보석상, 대체장, 다방이나 참장… 살기 위해 다양한 일을 걸어 갔다. 야미 소주를 만든 적도 있다. 85세까지, 집은 20회, 일은 10회 바꾸었다.

"나, 청춘은 무슨 일이 없었어요. 함께, 친구와 학생 시절을 보낼 수 있는 기간을 갖고 싶었다고 생각하네요. 동창회라고 해도 되는 사람은 부러워요"

"식민지의 고통을 알고"

전후 일본에서 한반도로 돌아온 사람은 130만명에 이른다. 한편, 이시씨 일가와 같이 다양한 이유로 남은 사람들은 전시 중에 가지고 있던 '일본 국적'을 잃어, 결과적으로 다양한 사회 보장 제도에서도 배제되게 되었다.

정부는 전시 중 한반도를 식민지로 지배하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일본인'으로 동화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으로 잘라낸 것이다.

전전도 전후도 이처럼 구조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차별을 받아 온 조선 사람들. 그러한 과거는 각각 개인에게도 큰 상처를 남기고, 그 인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돌씨는 이렇게 분노를 숨기지 않는다.

“조선을 일본이 발전시켰다고 하는 말은, 1번 화가 난다거나, 화내고 싶어요. 그렇지 않다고. 로 한, 침략했잖아. 그걸 솔직히 말하지 말고, 은혜를 잘 하고,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틀린 거 아냐고」

「나는 그런 일, 어렸을 때는 전혀 몰랐습니다. 절대로 갈 수 없지요. 귀여워하는 피해를 받는 것은, 가장 약한 사람들만이니까요」

전후 77년. 지금은 가와사키에서 사는 돌씨. 스스로의 인생을 되돌아보게 된 것은 최근 몇년이다. 지역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재일 코리안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금씩 마음을 풀면서 과거를 검토할 수 있게 되었다.

「형제 7명 중에서 고생은 했지만, 행복했구나.

국가나 전쟁에 농락당하면서, 스스로가 걸어온 전후. 사회의 상황도 조금씩 좋아져 왔다고 생각했던 화살, 최근이 되어 「헤이트 스피치」를 보고 듣게 된 것에, 우려를 안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자신의 경험을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끼고 있다고 한다.

“한국의 문화나 영화나 요리 등이 선호되어 이해가 깊어져 왔는데, 지금 또 헤이트 스피치 따위로 반대로 나빠지고 있는 상태군요.과거의 역사를 모르기 때문이지요. 원래 나 우리들이 일본에 오게 된 것은 식민지로 한 것이 원인이기 때문에, 그 아픔을 여러분에게 알게 되고, 앞으로 어떻게 할까에 대해 토론하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는 기회는 좀처럼 없습니다. 다른 사람끼리 그러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어렵다. 제대로 역사를 교육으로 가르칠 수밖에 없고, 나와 같은 것에서도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라고 이야기하겠습니다.이런 생의 목소리도, 지금이 아니면, 들을 수 없게 되어 버리니까요」

公開 2022年8月15日

戦時中“日本人”として生きた彼女が見た、もうひとつの8月15日。

日本にいた朝鮮半島出身者は1939年には100万人程度だったが、終戦時の1945年には200万人にのぼったとされている。「植民地」出身者として育った女性は、どのような戦時下を過ごしたのか。その証言を聞いた。

かつて「日本国民」として生き、のちに「外国人」と呼ばれた人たちがいる。

戦前から戦時中にかけて、日本の植民統治下に置かれていた朝鮮半島の人々。日本が戦争に負けると、日本国籍を失い、「外国人」として切り捨てられた人々は、どんな思いで戦中、戦後を生きたのか。

「私は何も知らなかったの。愚かだったのかもしれませんね」。そう当時を振り返る、在日コリアン二世の女性の証言を聞いた。

石日分(ソク・イルブン)さんは91歳。1931年、長崎の諫早に生まれた。仕事を求めて朝鮮半島から日本にやってきた両親も、自分も日本国籍。名前も日本名の「石原桃子」を使っていた。

韓国東南部出身の父親は、建設・土木作業員をまとめる「親方」だった。同じように働く場所を求めて日本にやってきた人々が父を頼りに集まり、ともに飯場で暮らしていたという。

工事が終わるたび住む場所を変えるという生活で、小学校4年のころは、佐賀や大分、福岡と九州北部を転々とした。父は発電所や鉄道、橋の工事などを請け負っていたが、ときに事業に失敗して、大損することもあった。

「飯場はね、掘立て小屋、バラックの家が並んでいる感じ。うちは家族で部屋が別なんですけど、部屋は6畳くらいですね。蚊帳を貼ったら動き場がないくらいでしたよ」

「男の人にご飯を炊く人がいて、何もかもやる。キムチとスープと、たまには魚を煮たものもなんかがありましたけど、逆に母のご飯はあんまり食べなかった。下の子たちも多かったので、私は、子守りを任されることが多かったですね」

そんな環境で、20〜30人の大所帯で育った。男たちが働きに出ているあいだは学校や家で過ごした。夜になると仕事から帰ってきた彼らが花札に興じたり、朝鮮民謡を歌っていたことを覚えている。

石さん一家や、その飯場に集っていた労働者やその家族たちのように、戦時中に朝鮮半島から日本に渡ってきた人たちは少なくない。

日本が「韓国併合」により朝鮮半島を植民地にしたのは1910年。朝鮮総督府を設置して統治を始め、日本語教育などの同化政策が始まった。その後、土地政策により困窮した農民らが、仕事を求めて日本にやってくるようになった。

日中戦争から太平洋戦争にかけては、「皇民化」と言われる同化政策が強まった。募集、官斡旋、徴用などと形を変えて労働力も求められるようにもなった。徴兵も始まった。日本にいた朝鮮半島出身者は1939年には100万人程度だったが、終戦時の1945年には200万人にのぼったとされている。

多くは、炭鉱や土木作業、工場などでの労働に従事。決して良い労働環境とは言えなかったが、経済的理由などから多くの人たちが集まり、各地に石さんが暮らしたような飯場が形成されていた。

「いつも目立たないように…」

自らは「朝鮮人」であるというアイデンティティを持っていた石さん。しかし、その出自は日本人社会において、排斥、いじめの対象ともなった。

「1組に朝鮮人は5〜6人いましたね。入学が遅かったり、動員で遅くなって日本に来たりするんですが、いじめの対象になるんですよ。馬鹿にされる感じです。キムチが臭いとか、ニンニク臭いとか、そういうふうにね。お弁当も、いじめられる対象になりました」

「誰かが朝鮮人だからといじめられていると、どうしても許せなくて、喧嘩になることもありましたよ。でも、転校するときは絶対、自分から朝鮮人とは言わなかったし、背が高かったですけれど、できる限り目立たないようにしていたの。なんでも後ろが好きでしたね」

朝鮮人の友達には、日本人の友人と歩いているときに道で親族と出会っても隠れるような子もいた。石さんはそこまでして隠すことはなかったというが、それでも、いくつか悲しい思い出がある。

たとえば、運動会。クラスで脚の速かった石さんがリレーの選手に選ばれると、選考から落ちてしまった日本人の子の姉たちがやってきて「新入りのくせに、朝鮮人のくせに生意気だ」と囲まれて蹴られたことがあった。

楽しみにしていた家庭訪問でも、朝鮮人の家だからとついぞ来なかった先生がいた。喧嘩しているときに朝鮮人の生徒ばかりを叱ったり、見下した態度を取って大事な仕事を任せなかったりする先生も、いた。

よくしてくれた日本人の先生や友人だって、もちろんいる。「私は、そこまでいじめや差別を受けることはありませんでした」というが、子どものころに受けた差別は、いまもささくれのように心に残っている。

「クラスに着せ替え人形のように、いつも可愛い服を着てくる子がいたんです。その子がお誕生日会に招いてくれたんですね。もう初めてだし、嬉しくって遊びに行ったら、お母さんがジロジロ、ずっと見てくるんですよ……」

いつの間にか、自分や、自分の出自に持つようになった「劣等感」。それは、将来の選択にも関わるようになったとも、つぶやいた。

「本当はね、制服もかわいかったし、友達もみんな行くから女学校にも行きたいと思っていたの。でも、最終的には行くことはしませんでした。朝鮮人が行っていいのか、という考えがあったんですよ。だからね、母に頼み込んでまで女学校には行こうとは思えなかったんです」

「お国のために」と言われたら

ちょうど戦争が激しくなったころ、北九州・折尾に一軒家を買い、そこで暮らすようになった。

父親は仕事で転々とするなか、残りの家族で過ごしていた。近所の人たちには、幸いにして「朝鮮人」だからと嫌なことをされたことはなかった。

小高い丘の上に建っていた家には、明治天皇の額が飾ってあった。父が用意したのだろうか。どこから見ても、見られているような気がしていた。

「学校ではもう、天皇一辺倒ですよ。教育勅語も暗唱させられたしね、学校に行ったら(天皇・皇后の写真と教育勅語を納めた)奉安殿におじぎして入って、帰りもおじぎして帰っていましたね。(開戦記念日の)12月8日は、お宮参りもしていましたよ」

「お国のために」と言われれば、それは朝鮮ではなく、「大日本帝国」のためだった。子どもながらに、「日本が勝つための戦争協力」をしてきたと思っている。

前線の兵士たちのために、千人針を縫ったこともある。母親の代わりに隣組の集会に出たり、バケツリレーの訓練に参加したりもした。

一方で、段々と戦況が悪化すると、子どもたちの生活にも影響が及ぶようになる。授業は少なくなり、代わりに軍事教練や農家への勤労動員ばかりになった。頭上には、アメリカ軍機が飛びうことことも増えた。

「戦争のことばっかり、勝つことばっかり考えていました。ただね、ほんとに勝つんだろうかっていう不安も持つようになりました。昼も夜も飛行機が飛んでて、空襲警報も鳴るから」

「遠くから見ると銀紙のような爆弾が八幡や小倉あたりに落ちるのが見えるんですね。やっぱり怖かったですよ。それに、楽しく遊ぶとかやりたいことができないし、早く終わってほしいとも思っていましたよ」

1945年8月15日、戦争は終わった。日本にとっては「敗戦」であったが、植民地下の朝鮮半島の人たちにとっては「解放」だった。しかし、日本で生まれ育った石さんは、あまりそうしたことを意識することはなかった。

「とにかく終戦の日は、静かでしたね。うちはラジオもなかったし、周りに朝鮮人もいなかったし、日本人の方もそんなに騒いでなかったから。解放されたから嬉しいとか、そういう感情も一切なかったんです」

「ただ、そうこうしているうちに、近くの筑豊炭鉱に動員された朝鮮人たちがぞろぞろうちの前を通るようになったんですよ。それを見て、ああ、もう植民地は終わったんだって」

失った青春、そして

戦争が終わると、母親は朝鮮に帰ろうと強く主張した。字の読めない両親の代わりに帳簿を付けていた男性が「ふるさとに帰る」と挨拶に来たことがきっかけだった。

父親の反対を押し切り、家を手放し、子どもを連れて、連絡船のあった山口・下関港へと向かった。全国から集まった大勢の朝鮮人たちが、港にいたことを覚えている。

機雷があるということで船は出航できなかった。「帰ってもいまより生活は大変だ」「コレラが流行っている」そんな噂話も流れるようになり、不安になった母親は帰国を取りやめた。

その後、合流した父とともにしばらくのあいだ、家族は焼け野原となった街にバラックを建て、暮らした。

当時は、母が何でそこまでしようとしたのか、わからなかった。しかし、日本語を流暢に話せない、字も読めない母親にとって、「異国」で子どもを連れて生きることは、辛かったのではないかと、いまなら思える。

父親はすぐに福岡で米軍兵舎の建設と塩田の仕事を見つけ、再び飯場の運営を始めた。そして生活が軌道に乗り始めようとした1947年、現場を移動する途中に鉄道事故で命を落とした。

それからは母親がひとり、古物商などをして子ども7人の生活を担った。石さんはそうした母を、長女として支えてきた。

「母は商才がある人でしたね。下関ではメリケン粉を鉄板で焼いて甘いものを塗したのを卸してお金を稼いでいましたし、父が亡くなって飯場が解散した後に残った3人を連れて古物商を始めたら、ちょうど朝鮮戦争の始まったころでね。金属もの値があがって、ずいぶんと潤ったようですよ」

暮らしが不安定だったこともあり、18歳でお見合い結婚をした。しかし新婚生活は貧しく、炭鉱でパンを売るなどして食いつないだのち、離婚。その後は新たな夫と出会い、子どもに恵まれながら、働きつないだ。

機会編み、ネクタイづくり、テレビ部品の製造、宝石商、替場、喫茶店や雀荘……。生きるため、さまざまな仕事を渡り歩いた。ヤミ焼酎をつくったこともある。85歳まで、住まいは20回、仕事は10回変えた。

「私ね、青春ってものがなかったんですよ。一緒にね、お友達と学生時代を過ごせる期間が欲しかったんだと思うんですね。同窓会だなんだってやれる人は羨ましいですね」

「植民地の痛みを知って」

戦後、日本から朝鮮半島に戻った人は130万人にのぼる。一方で、石さん一家のようにさまざまな理由で残った人たちは、戦時中に持っていた「日本国籍」を失い、結果としてさまざまな社会保障の制度からも排除されることになった。

政府は戦時中、朝鮮半島を植民地として支配し、そこに暮らす人々を「日本人」として同化してきたにもかかわらず、「外国人」として切り捨てたのだ。

戦前も戦後も、このように構造的にも、社会的にも差別を受けてきた朝鮮の人々。そうした過去はそれぞれ個人にも、大きな傷を残し、その人生に影響を及ぼしている。石さんはこう、憤りを隠さない。

「朝鮮を日本が発展させたっていうような言い方は、1番腹立つっていうか、怒りたくなりますよね。そうじゃないじゃないのって。利用するため、自分達の欲のために、植民地にした、侵略したんじゃないかって。それを正直に言わないで、恩着せがましく、そういう風に言うのは間違ってるんじゃないかって」

「私はそんなこと、子どものころははまったく知りませんでした。幼かったっていうか、知らなかったっていうか、愚かだったっていうんでしょうかね……。戦争もね、植民地政策もね、繰り返したら絶対にいけないですよね。かわいそうな被害を受けるのはね、いちばん弱い人たちだけなんですから」

戦後77年。いまは川崎で暮らす石さん。自らの人生を振り返るようになったのは、ここ数年のことだ。地域で同じような経験をした在日コリアンの人と語り合うことで、少しずつ心をほぐしながら、過去を見直せるようになってきた。

「兄弟7人の中で苦労はしたけど、幸せだったな。困った時、困った時、誰かが助けてくれる。そういういい思い出の方がいっぱいあって、幸せだなと思います」

国家や戦争に翻弄されながら、自らが歩んできた戦後。社会の状況も少しずつ良くなってきたと思っていた矢先、最近になって「ヘイトスピーチ」を見聞きするようになったことに、憂慮を抱く。だからこそ、こうして自らの経験を語ることが重要とも感じているのだという。

「韓国の文化や映画や料理なんかが好まれ、理解が深まってきたのに、いままたヘイトスピーチなんかで逆に悪くなってるような状態ですよね。過去の歴史を知らないからですよね。もともと私たちが日本に来るようになったのは、植民地にしたことが原因ですから、その痛みを皆さんに知ってもらって、これからどうするかって話し合えばいいと思うんです」

「でも、知る機会ってなかなかないですもんね。他人同士がそういう話ができるっていうのは難しい。正しく歴史を教育で教えるしかないですし、私のようなものでも話せることがあるのなら、とお話しさせていただいています。こういう生の声も、いまじゃないと、聞けなくなってしまいますから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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