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시해 전 '능욕'당했다"
한일월드컵과 107년전 '을미사변'[단독발굴] '에조 보고서' 일본서 입수 국내 첫 공개
2202.06.03
정지환(jhjeong)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77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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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운의 생을 마친 명성황후. 사진은 명성황후라는 주장이 제기된 한 궁중여인이 성장을 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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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고도 먼 나라'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개최하는 월드컵 대회의 서막이 화려하게 올랐다.
침략과 저항, 지배와 피지배의 불행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일본과 한국. 21세기를 맞아 처음으로 치러지는 월드컵 공동개최를 계기로, 두 나라가 불행했던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그러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다. 양국 정상이 참여한 가운데 월드컵 개막식이 열리던 바로 그날, 일본 정부의 대변인인 후쿠다 야스오 관방장관이 "핵무기 무장" 발언을 한 것이다. 물론 일본 정부는 "진의가 잘못 전달됐다"면서 적극적인 해명에 나섰지만, 한국인들에겐 지금까지 망언 파문 때마다 일본이 보여온 '치고 빠지기'의 전형적 수법으로 비쳐질 뿐이다.
우리는 또다시 터져 나온 이 '망언'을 통해 진정한 한일관계의 재정립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한다. 그렇다면 한국과 일본이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 물론 그 방법은 있다. 불행한 역사에 대한 철저한 진실 규명의 첫걸음을 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잊을 만 하면 터지는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과 각종 망언, 그때마다 냄비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식어버리는 한국의 반일감정은 이제 더 이상 '미래지향적 이웃사촌'이 되는 방법이 될 수 없다. 일본의 역사왜곡을 규탄할 때는 선봉에 서다가도 국내에서 친일 잔재 청산 주장만 나오면 침묵을 지키거나 딴지를 거는 기득권 세력과 수구언론에 이 일을 맡겨둘 수도 없는 상황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숨겨진 진실을 파헤친 이 글은 바로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쓰여진 것이다. 다시 말해 19세기 막바지에 발생한 이 비극적 사건이 20세기 전반기를 점철한 한일 두 나라의 불행한 인연의 첫 단추였다는 것, 이 잘못 끼워진 첫 단추를 바로 채우지 않고서는 전향적 한일관계의 정립은 단 한 발짝도 앞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이 이 글의 문제의식이다.
물론 지구촌 최대의 경사인 월드컵 기간 동안에 '악몽의 역사'를 거론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였을까. 주간 <오마이뉴스> 3호에 이 글이 처음 실렸을 때, 국내 언론사 중에서 관심을 표명한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한 작가가 어렵게 찾아낸 명성황후 최후의 진실, 그 단말마적 비명은 '메아리 없는 외침'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불행한 역사의 회상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망각과 방치로 결코 치유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유태인들이 왜 시기와 장소를 구분하지 않고 끊임없이 나치의 범죄 행위와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전 세계인에게 상기시키려 했는지, 그들보다 더 참혹한 과거를 가지고 있는 우리는 그 진의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전 세계인이 주목하는 한일 월드컵이야말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진실을 언급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점이라는 것이 기자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
명성황후 시해사건 직후 일본 낭인 중 한 명이 작성해 일본 본국으로 비밀리에 보낸 보고서가 있었다. 사건 발생 71년 만인 1966년 한 일본인 역사학자에 의해 최초로 공개된 '에조(英臟) 보고서'가 바로 그것이다. 이 보고서는 그 동안 역사학계 일부에만 알려져 있던, 명성황후에 대한 일본인들의 '능욕(凌辱)'과 '시간(屍姦)'의 근거가 됐다.
그러나 이 문서는 그 존재만 알려져 있었을 뿐 전문(全文)이 국내에 입수되거나 공개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최근 작가 김진명씨가 이 문서의 전문을 찾아내 기자에게 전달했다. 지금부터 이 문서를 '나침반과 지도' 삼아 107년 전에 발생한 '아프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그 날의 진실을 찾아 역사기행을 떠나보자.
1. '에조 보고서'는 어떻게 작성됐나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의 군인, 외교관, 언론인, 거류민, 낭인 등으로 구성된 암살단은 경복궁에서 조선 침략의 최대 걸림돌인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한 비밀작전 '여우사냥'을 수행하고 있었다.
광화문 등을 통해 궁내로 난입한 그들은 무단 침입을 꾸짖는 고종의 어깨에 무례하게 손을 얹어 주저앉혔으며, 세자의 상투를 잡아당겨 방바닥에 내팽개치고 칼등으로 목줄기를 후려치는 행패를 부렸다. 그들의 행패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왕비를 참혹하게 살해한 뒤 기름을 부어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그날 오전 9시 20분. 주한 일본공사관 수비대 소속 니이로(新納) 해군 소좌는 본국 대본영 육군참모부에 한 장의 전문(電文)을 보냈다. '극비(極秘)'라는 붉은 낙인이 찍힌 이 전문에는 '국왕무사 왕비살해(國王無事 王妃殺害)'라는 문구가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그것은 일본 정부의 공식 라인을 통해 '여우사냥'의 성공을 알린 보고서였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을미사변(乙未事變)의 전모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그것은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별도의 새로운 문서가 뒤늦게 발견된 것이다.
'별도의 새로운 문서'가 작성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1895년 10월 9일.
▲ 에조의 보고서
을미사변이 터진 바로 다음날 작성된 또 한 건의 보고서가 일본 본국으로 날아왔다. 조선 정부 내부(內部, 요즘의 내무부) 고문의 직책을 가지고 있던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가 일본 정부의 법제국장관인 스에마쓰 가네즈미(末松謙澄)에게 별도로 보낸 장문의 보고서였다.
그렇다면 이시즈카 에조는 어떤 인물인가. 오랜 추적 끝에 '에조 보고서' 전문을 입수한 작가 김진명씨는 "일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할 당시 현장에 있던 20대의 젊은 낭인"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에조가 갖고 있던 조선 정부 내부 고문은 정식 직책이 아니다. 그가 조선 정부로부터 월급을 받거나 관복을 입고 등청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당시는 일본이 조선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던 때라 낭인들이 명목상 하나씩 그런 직책을 얻어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실제로 1988년 <민비암살(閔妃暗殺)>을 발간한 일본의 저명한 전기작가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 여사도 자신의 저서에서 에조를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에조가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목격자'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발언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에조가 스에마쓰에게 별도의 보고서를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에조가 조선에 들어오기 전 "법제국 참사관"을 지냈다는 후사코 여사의 설명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즉 에조는 당시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현장 총지휘자라고 할 수 있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조선주재 일본공사의 재가를 받지 않고 전직 상사에게 보고서를 보낸 것이다. 이와 관련, 다시 김진명씨의 설명을 들어보자.
"에조는 미우라 공사 몰래 보고서를 작성하여 본국으로 보냈다. 실제로 사건의 원인에서부터 실행자, 사후대책까지 충실히 기록돼 있는 이 보고서에는 미우라 공사의 책임과 처벌을 암시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따라서 '에조 보고서'는 철저하게 일본의 입장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조사하고 재판한 '우치다 보고서'나 '히로시마 법정기록' 등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다시 말해 사후에 은폐되고 조작됐다는 의심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유일한 문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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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보에서 공개까지 한 달 걸린 이유
본격적 논쟁은 역사학계의 몫
작가 김진명씨 측으로부터 기자에게 연락이 온 것은 약 한 달 전이다. 그는 자신의 소설 <황태자비 납치사건>의 결정적 모티브였던 '435호 비밀문서'의 존재를 추적하던 중 마침내 진본을 찾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솔직히 그 때만 해도 기자는 그의 제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작가에겐 미안하지만, 쇼비니즘을 조장하는 소설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자는 <황태자비 납치사건>도 읽지 않은 상황이었다.
충북 제천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방문하기 직전에야 끝마친 '뒤늦은 독서'와 그의 진지하고 열정적인 기초설명을 들은 뒤에야 이 문서, 즉 '에조 보고서'의 역사적 무게가 피부에 와 닿았다.
작가가 굳이 기자에게만 이 문서를 전달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모든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돌릴 경우 자칫 일회성 기사로, 그것도 역사적 본질은 사라진 채 선정적으로 다뤄질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둘째, '젊은 세대'에게 이 역사의 진실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인터넷 매체인 <오마이뉴스>가 가장 적합할 것이라는 작가의 현실적 판단이 작용했다.
그러나 이 문서는 곧바로 보도될 수 없었다. 여기에도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문서의 배경이 된 당시의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기 전에는 섣불리(?) 기사를 쓰지 않겠다는 기자의 고집 때문이었다. 실제로 기자는 국사 교과서와 문학작품에서부터 전문서적까지 20여권의 단행본과 자료를 입수해 통독한 뒤에야 기사 작성에 들어갔다. 둘째,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에 악영향을 주지는 않을까라는 우려도 작용했다. 역사의 상흔을 쓸데없이(?) 덧내는 것은 아니냐는 반론의 제기도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바꿨다. 부끄럽고 고통스런 과거라고 해서 망각하는 것이 진정한 치유의 방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 문서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본격적 논쟁은 물론 관련 학계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기사는 '문제의 제기'이자 '미완의 보도'인 셈이다. 기자가 언젠가 명성황후와 관련된 역사적 공간을 순례하는 답사기를 쓰려는 이유도, 그리하여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해 명성황후의 현재성을 밝히려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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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보고서의 존재는 어떻게 알려졌나
'에조 보고서'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70여년이 흐르는 동안 철저하게 숨겨져 있었다. 이 보고서를 맨 처음 찾아낸 사람은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 健太郞, 1905∼1977). 그는 1966년 2월 <일한병합소사(日韓倂合小史)>를 이와나미(岩波書店)에서 발간했다.
그는 이 저서에서 "사체 능욕"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썼는데, 이것이 바로 그후 국내 역사학계에서 거론되기 시작한 '명성황후 능욕설'의 원조가 됐다.
한편 그는 이보다 앞선 1964년 <코리아평론> 10월호에 '민비사건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일한병합소사>의 기본 골격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일한병합소사>가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된 것은 16년이 흐른 뒤인 1982년 6월이다. 신학자 고 안병무 선생이 <한일합병사>(범우사)로 제목을 바꾸어 번역했는데, 문제의 '능욕설' 대목을 이 책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1895년 10월 7일 밤부터 다음날 이른 아침에 걸쳐서, 대원군이 훈련대에게 호위되어 있는 동안 일본 수비대와 대륙 낭인의 무리가 칼을 빼들고 경복궁으로 밀고 들어가서 민비를 참살하고, 그 사체를 능욕한 뒤에 석유를 뿌려 불을 질러버린 것이다."
이 대목이 '에조 보고서'를 근거로 서술된 것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과 달리, 당시 그는 이 책에서 보고서의 존재는 거론하지 않았다.
야마베 겐타로가 '에조 보고서'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1966년 9월 발간한 <일본의 한국병합(日本の 韓國倂合)>이었다. 친북 계열 출판사에서 발간된 이 책은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다.
결국 겐타로는 7개월의 시차를 두고 두 권의 책을 발간한 셈인데, 그나마 '에조 보고서'의 존재를 언급하고 일부 내용을 소개한 두 번째 책은 국내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야마베 겐타로의 언급 이후 '능욕설'은 재일 사학자 박종근, 나카쓰라 아키라 등에 의해서도 거론된 바 있기는 하다. 그러나 '능욕설'의 전적(典籍)이라 할 수 있는 '에조 보고서'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의 저서에도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 보고서를 찾아 헤맸던 김진명씨의 설명이다.
'에조 보고서'가 다시 언급된 것은 22년이 흐른 뒤였다. 앞에서 거론했던 쓰노다 후사코 여사의 <민비암살>에 잠시 등장한 것이다. 이 책은 1988년 발간되고 몇 달 후 조선일보사에 의해 번역됐는데(번역자 김은숙 한국교원대 교수), '능욕설' 관련 부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더욱이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이 같은 일본인인 나로서는 차마 묘사하기 괴로운 행위를 하였다는 보고가 있다. 전 법제국 참사관이며 당시 조선 정부의 내부 고문관(실제 보고서에는 '고문'이라고 적혀 있음-기자주)이었던 이시즈카 에조는 법제국장관 스에마쓰 가네즈미 앞으로 보낸 보고서에서 '정말로 이것을 쓰기는 괴로우나…'라고 서두에 쓴 후에 그 행위를 구체적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쓰노다 여사는 이 책에서 '구체적인 그 행위'에 대해서는 소개하지 않았다. '차마 묘사하기 괴로운' 에조의 심정에 동감한 것일까.
한편 국내에서 명성황후 능욕설이 제기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그것은 앞에서 거론했던 야마베 겐타로의 첫 번째 책이 <일한합병사>로 국내에 번역되어 들어온 후부터로 보인다. 그러나 기자가 명성황후의 최후와 관련된 국내 기록을 샅샅이 뒤져본 결과, 능욕설의 근거가 된 '에조 보고서' 전문을 직접 찾아보려는 시도는 전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대다수가 야마베 겐타로의 소개와 해석에 그대로 의존하고 있었을 뿐이다.
3. 보고서 전문을 어떻게 찾아냈나
'에조 보고서' 전문을 찾아 헤매던 김진명씨는 쓰노다 후사코 여사의 <민비암살>을 정독하다가 그 행간에서 명성황후의 죽음에 '어떤 비밀'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을 번역한 김은숙 교수를 통해 후사코 여사로부터 대여섯 권의 전적을 소개받았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을 온통 헤집었지만 그는 도저히 문제의 '에조 보고서' 전문을 찾아낼 수 없었다. 마침 후사코 여사마저 "기억이 희미하다"며 한 발짝 물러선 최악의 상황이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김진명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동경 히토츠바시 대학에서 외교사를 전공하는 권용석씨에게 보고서를 찾아줄 것을 부탁하고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권씨가 몇 권의 책과 자료를 보내왔다. 그 중에는 앞에서 기자가 거론한 <일본의 한국병합>도 있었다. 김진명씨는 이 책을 읽다가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는 문제의 '능욕' 장면 중 일부가 소개돼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그가 원한 것은 보고서의 일부가 아니라 전문(全文)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진명씨는 문득 짚이는 것이 있어 <일본의 한국병합>을 다시 꺼내들었다. 문득 겐타로가 '에조 보고서'를 발견한 장소를 어딘가에 밝혀놓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에조 보고서'가 언급돼 있는 이 책의 223쪽을 보자 주석이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부리나케 주석 번호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출전이 밝혀져 있었다.
"국립국회도서관(國立國會圖書館) 헌정자료실(憲政資料室) 장(藏) <헌정사편찬회문서(憲政史編纂會文書)>".
역사학계에서 수없이 거론됐지만 정작 전문은 공개되지 않았던 '에조 보고서'가 역사학자가 아닌 한 작가의 끊임없는 관심과 열정적인 추적을 거친 끝에 '우연히' 발견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김진명씨는 이 문서를 즉각 찾지는 않았다. 문서를 찾으면 공개해야 하고, 이 문서의 공개가 월드컵 공동개최를 앞둔 한일 양국에 엄청난 파장을 미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다시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일본의 역사왜곡과 고이즈미 총리의 전격적인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지켜보면서 더 이상 공개를 늦출 수 없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는 일본의 권용석씨에게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 가서 이 문서를 찾아 팩스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던 '에조 보고서' 전문은 장장 107년만에 그렇게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4. 보고서엔 어떤 내용 들어 있나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원인과 발단에서부터 실행자와 사후 대책까지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는 '에조 보고서'의 분량은 각 2쪽씩을 차지하고 있는 목차와 서문을 포함해 모두 12쪽이다. 아울러 보고서는 (1)발단 (2)명의 (3)모의자 (4)실행자 (5)외국사신 (6)영향 등의 소제목이 붙어 있는 6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기자는 이 보고서를 김진명씨로부터 입수한 뒤 일본어에 정통한 전문가에게 번역을 맡겼다. 그러나 주로 고어(古語)와 사어(死語)로 쓰여 있어 도저히 완벽한 번역을 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다만 보고서에 한자로 표기된 '부덕의(不德義)' '경솔천만(輕率千萬)' '직무상 책임(職務上 責任)' '주모자(主謀者)는 미우라 공사(三浦 公使)' 등의 표현이, "미우라 공사의 책임과 처벌을 암시하는 내용이 들어 있고, 사후에 은폐되고 조작됐다는 의심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유일한 문서"라는 김진명씨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기자는 이번 취재 과정에서 겐타로보다 좀더 자세하게 '에조 보고서' 내용을 인용한 서적을 발견하는 의외의 성과를 얻었다. 친일문제전문가인 정운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일본 서적들을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뒤지던 중 찾아낸 <외교문서로 말하는 일한병합>(합동출판, 1996)이 바로 그것이다.
재일 사학자 김응룡씨가 쓴 이 책은 '에조 보고서' 전문 중 10분의 1 정도만 인용하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나온 어떤 저술보다도 풍부하게 보고서 내용을 소개하고 있었다. 다음은 이 책에 서술된, '에조 보고서'의 주요 내용에 대한 설명이다.
"에조는 법제국장 앞으로 보낸 보고서 안에서, 왕비 살해를 일본의 모든 이들이 생각하고 있었다고 보고서 머리에 적고 있다. 왕비 살해의 필요성은 미우라도 일찍부터 생각해 오고 있었다고 말하고, 일본의 수비대가 주력이었던 일, 왕비 살해와 사체에 대한 능욕의 상황을 자세하게 적고 있다. 폭력이 난무하는 현장을 외국인들에게 보인 데다, 이 외국인들과 언쟁까지 벌인 일과 대궐에서 난동을 끝내고, 보기 흉한 몰골로 대궐에서 철수하는 것을 대궐 앞 광장에 몰려든 조선인 군중들과 서둘러 성안으로 들어가는 러시아 공사에게도 보이고 말았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사체에 대한 능욕"이란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 역시 명성황후의 최후와 관련해서는 야마베 겐타로의 해석을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 보고서에 담긴 진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한편 김진명씨는 '에조 보고서'와 관련해 기자에게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그의 발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한국인들은 명성황후가 난자 당해 죽은 걸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 다만 '에조 보고서'의 존재를 접한 극소수의 일본인과 한국인 학자들만이 명성황후가 살해당한 뒤 시간된 걸로 주장하고 있다. 나조차도 그런 기존의 해석에 따라 <황태자비 납치사건>에서 시간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그는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본 뒤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다시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명성황후 최후의 장면을 기록한 유일한 문서인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명성황후가 시해 직전 즉 살아 있는 동안 능욕당하고 불태워지면서 죽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명성황후는 시간(屍姦)을 당한 것이 아니라 강간(强姦)을 당한 것이다."
▲ 에조 보고서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處刃傷).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웃을(笑) 일이다. 또한 노할(怒) 일이다)를 하였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그것은 참으로 충격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에조 보고서'에서 능욕 장면을 묘사한 대목을 직접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보고서에서 실제로 그 부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주요 한자 표기 그대로 살렸음-기자주).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處刃傷).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웃을(笑) 일이다. 또한 노할(怒) 일이다)를 하였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筆)로 옮기기조차 어렵도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을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殺害)했다."
그는 이 부분을 소리 내서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은 뒤 이렇게 주장했다.
"보고서 어디에도 살해한 뒤 능욕을 했다는 논리의 근거가 없다. 이 주장은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야마베 겐타로의 해석을 아무런 비판 없이 그대로 따른 것에 불과하다. 겐타로는 1966년 보고서 전문을 소개하지 않은 채 이 부분만 따로 떼어내 소개한 뒤 '사체를 능욕했다'고 해석해 버렸고, 이것이 한국에서까지 그대로 정설로 통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사람을 죽였을 때는 반드시 '살해'라는 구체적인 표현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뒤에 나오는 '궁내부 대신 살해'라는 대목이 결정적인 방증이다."
실제로 시해 장면을 묘사한 '에조 보고서'를 뒷받침하는 증언과 자료들은 많다. "일본인 흉한들은 왕비를 내동댕이치고 구둣발로 가슴을 세 번이나 내리 짓밟고 칼로 찔렀다"(왕세자 이척의 증언) "왕비는 뜰 아래로 뛰어나갔지만 붙잡혀 넘어뜨려졌고 살해범은 수 차례 왕비의 가슴을 짓밟은 뒤에 칼로 거듭 왕비를 찔렀다"(영국 영사관 힐리어가 북경의 오코너에게 보낸 보고서) 등이 대표적이다.
▲'뮤지컬 명성황후'중에서
다만 그들은 명성황후가 그렇게 칼에 찔려 즉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 김진명씨는 이렇게 반론을 펼쳤다.
"그들은 최후의 장면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아니다. 나중에 궁녀 등에게 전해들은 얘기를 다시 전달한 것에 불과하다. 더욱이 '에조 보고서' 이외의 어떤 기록에도 '능욕' 부분은 나오지 않는다.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피해자인 명성황후와 가해자인 일본인들이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죽었고, 일본인들은 진실을 철저하게 은폐하고 조작했다. 가해자 중의 한 명이면서도 미우라 일파와 입장을 달리 했던 에조의 증언이 가장 진실에 가깝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창밖을 응시하며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던 그가 마침내 다시 말문을 열었다.
"결국 일본인들은 명성황후를 시간한 것이 아니라 강간한 것이다. 진보적 역사학자로 알려져 있는 야마베 겐타로조차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이 끔찍한 만행에 놀라 보고서 전문은 소개하지 않고 '사체 능욕'이라고 축소해서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한 주권 국가의 왕비에게 만행을 저지른 것과 그것을 은폐하고 조작한 것에 대해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 한국인들 역시 처참하게 능욕 당하면서 죽어간 명성황후의 원혼을 풀어줘야 할 책임이 있다."
한일 월드컵이 열리는 오늘, 우리는 "나의 억울한 죽음을 잊지 말라"는 명성황후의 단말마적 외침을 가슴으로 생생히 들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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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명 인터뷰 "역사왜곡에 종지부 찍을 문서"
'에조 보고서' 전문이 발견됨으로써 <황태자비 납치사건>에 등장하는 '435호 비밀문서'는 실재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소설의 작가이자 보고서 전문을 찾아낸 김진명씨를 만나 보았다.
-'에조 보고서'를 찾아 헤맨 까닭은 무엇인가.
"한국민과 대다수 선량한 일본인의 기대와는 달리, 역사 교과서 왜곡이나 망언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양국의 역사인식 차이는 좁혀질 줄 모르는 것이 현실이다. 나는 그 이유가 대다수의 일본인들이 자국의 역사를 잘 모르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일본인이 직접 쓴 이 보고서를 찾아내 그들에게 역사의 진실을 말해주고 싶었다."
-한일 양국의 역사인식이 평행선을 달린다고 했는데, 어떤 부분에서 그렇다는 것인가.
"예컨대 한국인들은 군위안부나 징용을 얘기하면 일본인들이 부끄러워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가 군위안부를 말하면, 그들은 전표를 내놓는다. 즉 군부대를 따라다니며 돈을 벌던 여자들이라는 식의 논리다. 징용을 얘기하면, 그들은 다시 봉급명세서를 내놓는다. 징용자는 돈을 벌러 일본으로 온 노동자라는 것이다. 조선 병합과 수탈에 대해서는 서구 열강으로부터 아시아를 지키려고 했다는 식의 논리를 내놓고, 실제로 이런 것들을 자국의 국민들에게 가르친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나는 일본인들이 모두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도 역사를 제대로만 알면 반성하고 사과할 줄 안다. 지난번 후쇼샤의 교과서 채택 거부운동에서 보았듯이 역사왜곡에 종지부를 찍을 사람들도 결국은 일본의 선량한 시민들이다. 나는 일본의 정부, 언론, 학계가 도저히 변명할 수 없는, 그리고 어떤 논리로도 호도할 수 없는 결정적인 역사적 사건, 일본인들이 정말 부끄러워 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 사료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당시 현장에 있던 일본인이 작성해 본국으로 보낸 이 '에조 보고서'는 일본의 역사왜곡에 종지부를 찍을 수도 있는 최고의 사료라고 생각한다."
-국내에선 아직도 일제의 침략과 만행이나 친일 잔재 청산을 말하면 '과거지향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반공과 반북만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실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실 남북한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증오하고 갈등하게 만든 분단과 전쟁의 뿌리는 일제의 침략과 압제였다. 그리고 그 '불행의 씨앗'은 107년 전 어느 날 새벽에 발생한 이 나라 '국모'의 억울하고 참혹한 죽음이었다. 그러므로 명성황후의 비극은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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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고도 먼 나라'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개최하는 월드컵 대회의 서막이 화려하게 올랐다.
침략과 저항, 지배와 피지배의 불행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일본과 한국. 21세기를 맞아 처음으로 치러지는 월드컵 공동개최를 계기로, 두 나라가 불행했던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그러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다. 양국 정상이 참여한 가운데 월드컵 개막식이 열리던 바로 그날, 일본 정부의 대변인인 후쿠다 야스오 관방장관이 "핵무기 무장" 발언을 한 것이다. 물론 일본 정부는 "진의가 잘못 전달됐다"면서 적극적인 해명에 나섰지만, 한국인들에겐 지금까지 망언 파문 때마다 일본이 보여온 '치고 빠지기'의 전형적 수법으로 비쳐질 뿐이다.
우리는 또다시 터져 나온 이 '망언'을 통해 진정한 한일관계의 재정립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한다. 그렇다면 한국과 일본이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 물론 그 방법은 있다. 불행한 역사에 대한 철저한 진실 규명의 첫걸음을 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잊을 만 하면 터지는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과 각종 망언, 그때마다 냄비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식어버리는 한국의 반일감정은 이제 더 이상 '미래지향적 이웃사촌'이 되는 방법이 될 수 없다. 일본의 역사왜곡을 규탄할 때는 선봉에 서다가도 국내에서 친일 잔재 청산 주장만 나오면 침묵을 지키거나 딴지를 거는 기득권 세력과 수구언론에 이 일을 맡겨둘 수도 없는 상황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숨겨진 진실을 파헤친 이 글은 바로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쓰여진 것이다. 다시 말해 19세기 막바지에 발생한 이 비극적 사건이 20세기 전반기를 점철한 한일 두 나라의 불행한 인연의 첫 단추였다는 것, 이 잘못 끼워진 첫 단추를 바로 채우지 않고서는 전향적 한일관계의 정립은 단 한 발짝도 앞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이 이 글의 문제의식이다.
물론 지구촌 최대의 경사인 월드컵 기간 동안에 '악몽의 역사'를 거론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였을까. 주간 <오마이뉴스> 3호에 이 글이 처음 실렸을 때, 국내 언론사 중에서 관심을 표명한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한 작가가 어렵게 찾아낸 명성황후 최후의 진실, 그 단말마적 비명은 '메아리 없는 외침'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불행한 역사의 회상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망각과 방치로 결코 치유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유태인들이 왜 시기와 장소를 구분하지 않고 끊임없이 나치의 범죄 행위와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전 세계인에게 상기시키려 했는지, 그들보다 더 참혹한 과거를 가지고 있는 우리는 그 진의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전 세계인이 주목하는 한일 월드컵이야말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진실을 언급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점이라는 것이 기자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
명성황후 시해사건 직후 일본 낭인 중 한 명이 작성해 일본 본국으로 비밀리에 보낸 보고서가 있었다. 사건 발생 71년 만인 1966년 한 일본인 역사학자에 의해 최초로 공개된 '에조(英臟) 보고서'가 바로 그것이다. 이 보고서는 그 동안 역사학계 일부에만 알려져 있던, 명성황후에 대한 일본인들의 '능욕(凌辱)'과 '시간(屍姦)'의 근거가 됐다.
그러나 이 문서는 그 존재만 알려져 있었을 뿐 전문(全文)이 국내에 입수되거나 공개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최근 작가 김진명씨가 이 문서의 전문을 찾아내 기자에게 전달했다. 지금부터 이 문서를 '나침반과 지도' 삼아 107년 전에 발생한 '아프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그 날의 진실을 찾아 역사기행을 떠나보자.
1. '에조 보고서'는 어떻게 작성됐나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의 군인, 외교관, 언론인, 거류민, 낭인 등으로 구성된 암살단은 경복궁에서 조선 침략의 최대 걸림돌인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한 비밀작전 '여우사냥'을 수행하고 있었다.
광화문 등을 통해 궁내로 난입한 그들은 무단 침입을 꾸짖는 고종의 어깨에 무례하게 손을 얹어 주저앉혔으며, 세자의 상투를 잡아당겨 방바닥에 내팽개치고 칼등으로 목줄기를 후려치는 행패를 부렸다. 그들의 행패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왕비를 참혹하게 살해한 뒤 기름을 부어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그날 오전 9시 20분. 주한 일본공사관 수비대 소속 니이로(新納) 해군 소좌는 본국 대본영 육군참모부에 한 장의 전문(電文)을 보냈다. '극비(極秘)'라는 붉은 낙인이 찍힌 이 전문에는 '국왕무사 왕비살해(國王無事 王妃殺害)'라는 문구가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그것은 일본 정부의 공식 라인을 통해 '여우사냥'의 성공을 알린 보고서였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을미사변(乙未事變)의 전모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그것은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별도의 새로운 문서가 뒤늦게 발견된 것이다.
'별도의 새로운 문서'가 작성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1895년 10월 9일.
▲ 에조의 보고서
을미사변이 터진 바로 다음날 작성된 또 한 건의 보고서가 일본 본국으로 날아왔다. 조선 정부 내부(內部, 요즘의 내무부) 고문의 직책을 가지고 있던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가 일본 정부의 법제국장관인 스에마쓰 가네즈미(末松謙澄)에게 별도로 보낸 장문의 보고서였다.
그렇다면 이시즈카 에조는 어떤 인물인가. 오랜 추적 끝에 '에조 보고서' 전문을 입수한 작가 김진명씨는 "일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할 당시 현장에 있던 20대의 젊은 낭인"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에조가 갖고 있던 조선 정부 내부 고문은 정식 직책이 아니다. 그가 조선 정부로부터 월급을 받거나 관복을 입고 등청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당시는 일본이 조선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던 때라 낭인들이 명목상 하나씩 그런 직책을 얻어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실제로 1988년 <민비암살(閔妃暗殺)>을 발간한 일본의 저명한 전기작가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 여사도 자신의 저서에서 에조를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에조가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목격자'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발언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에조가 스에마쓰에게 별도의 보고서를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에조가 조선에 들어오기 전 "법제국 참사관"을 지냈다는 후사코 여사의 설명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즉 에조는 당시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현장 총지휘자라고 할 수 있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조선주재 일본공사의 재가를 받지 않고 전직 상사에게 보고서를 보낸 것이다. 이와 관련, 다시 김진명씨의 설명을 들어보자.
"에조는 미우라 공사 몰래 보고서를 작성하여 본국으로 보냈다. 실제로 사건의 원인에서부터 실행자, 사후대책까지 충실히 기록돼 있는 이 보고서에는 미우라 공사의 책임과 처벌을 암시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따라서 '에조 보고서'는 철저하게 일본의 입장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조사하고 재판한 '우치다 보고서'나 '히로시마 법정기록' 등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다시 말해 사후에 은폐되고 조작됐다는 의심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유일한 문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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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보에서 공개까지 한 달 걸린 이유
본격적 논쟁은 역사학계의 몫
작가 김진명씨 측으로부터 기자에게 연락이 온 것은 약 한 달 전이다. 그는 자신의 소설 <황태자비 납치사건>의 결정적 모티브였던 '435호 비밀문서'의 존재를 추적하던 중 마침내 진본을 찾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솔직히 그 때만 해도 기자는 그의 제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작가에겐 미안하지만, 쇼비니즘을 조장하는 소설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자는 <황태자비 납치사건>도 읽지 않은 상황이었다.
충북 제천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방문하기 직전에야 끝마친 '뒤늦은 독서'와 그의 진지하고 열정적인 기초설명을 들은 뒤에야 이 문서, 즉 '에조 보고서'의 역사적 무게가 피부에 와 닿았다.
작가가 굳이 기자에게만 이 문서를 전달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모든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돌릴 경우 자칫 일회성 기사로, 그것도 역사적 본질은 사라진 채 선정적으로 다뤄질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둘째, '젊은 세대'에게 이 역사의 진실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인터넷 매체인 <오마이뉴스>가 가장 적합할 것이라는 작가의 현실적 판단이 작용했다.
그러나 이 문서는 곧바로 보도될 수 없었다. 여기에도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문서의 배경이 된 당시의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기 전에는 섣불리(?) 기사를 쓰지 않겠다는 기자의 고집 때문이었다. 실제로 기자는 국사 교과서와 문학작품에서부터 전문서적까지 20여권의 단행본과 자료를 입수해 통독한 뒤에야 기사 작성에 들어갔다. 둘째,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에 악영향을 주지는 않을까라는 우려도 작용했다. 역사의 상흔을 쓸데없이(?) 덧내는 것은 아니냐는 반론의 제기도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바꿨다. 부끄럽고 고통스런 과거라고 해서 망각하는 것이 진정한 치유의 방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 문서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본격적 논쟁은 물론 관련 학계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기사는 '문제의 제기'이자 '미완의 보도'인 셈이다. 기자가 언젠가 명성황후와 관련된 역사적 공간을 순례하는 답사기를 쓰려는 이유도, 그리하여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해 명성황후의 현재성을 밝히려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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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보고서의 존재는 어떻게 알려졌나
'에조 보고서'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70여년이 흐르는 동안 철저하게 숨겨져 있었다. 이 보고서를 맨 처음 찾아낸 사람은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 健太郞, 1905∼1977). 그는 1966년 2월 <일한병합소사(日韓倂合小史)>를 이와나미(岩波書店)에서 발간했다.
그는 이 저서에서 "사체 능욕"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썼는데, 이것이 바로 그후 국내 역사학계에서 거론되기 시작한 '명성황후 능욕설'의 원조가 됐다.
한편 그는 이보다 앞선 1964년 <코리아평론> 10월호에 '민비사건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일한병합소사>의 기본 골격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일한병합소사>가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된 것은 16년이 흐른 뒤인 1982년 6월이다. 신학자 고 안병무 선생이 <한일합병사>(범우사)로 제목을 바꾸어 번역했는데, 문제의 '능욕설' 대목을 이 책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1895년 10월 7일 밤부터 다음날 이른 아침에 걸쳐서, 대원군이 훈련대에게 호위되어 있는 동안 일본 수비대와 대륙 낭인의 무리가 칼을 빼들고 경복궁으로 밀고 들어가서 민비를 참살하고, 그 사체를 능욕한 뒤에 석유를 뿌려 불을 질러버린 것이다."
이 대목이 '에조 보고서'를 근거로 서술된 것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과 달리, 당시 그는 이 책에서 보고서의 존재는 거론하지 않았다.
야마베 겐타로가 '에조 보고서'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1966년 9월 발간한 <일본의 한국병합(日本の 韓國倂合)>이었다. 친북 계열 출판사에서 발간된 이 책은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다.
결국 겐타로는 7개월의 시차를 두고 두 권의 책을 발간한 셈인데, 그나마 '에조 보고서'의 존재를 언급하고 일부 내용을 소개한 두 번째 책은 국내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야마베 겐타로의 언급 이후 '능욕설'은 재일 사학자 박종근, 나카쓰라 아키라 등에 의해서도 거론된 바 있기는 하다. 그러나 '능욕설'의 전적(典籍)이라 할 수 있는 '에조 보고서'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의 저서에도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 보고서를 찾아 헤맸던 김진명씨의 설명이다.
'에조 보고서'가 다시 언급된 것은 22년이 흐른 뒤였다. 앞에서 거론했던 쓰노다 후사코 여사의 <민비암살>에 잠시 등장한 것이다. 이 책은 1988년 발간되고 몇 달 후 조선일보사에 의해 번역됐는데(번역자 김은숙 한국교원대 교수), '능욕설' 관련 부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더욱이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이 같은 일본인인 나로서는 차마 묘사하기 괴로운 행위를 하였다는 보고가 있다. 전 법제국 참사관이며 당시 조선 정부의 내부 고문관(실제 보고서에는 '고문'이라고 적혀 있음-기자주)이었던 이시즈카 에조는 법제국장관 스에마쓰 가네즈미 앞으로 보낸 보고서에서 '정말로 이것을 쓰기는 괴로우나…'라고 서두에 쓴 후에 그 행위를 구체적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쓰노다 여사는 이 책에서 '구체적인 그 행위'에 대해서는 소개하지 않았다. '차마 묘사하기 괴로운' 에조의 심정에 동감한 것일까.
한편 국내에서 명성황후 능욕설이 제기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그것은 앞에서 거론했던 야마베 겐타로의 첫 번째 책이 <일한합병사>로 국내에 번역되어 들어온 후부터로 보인다. 그러나 기자가 명성황후의 최후와 관련된 국내 기록을 샅샅이 뒤져본 결과, 능욕설의 근거가 된 '에조 보고서' 전문을 직접 찾아보려는 시도는 전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대다수가 야마베 겐타로의 소개와 해석에 그대로 의존하고 있었을 뿐이다.
3. 보고서 전문을 어떻게 찾아냈나
'에조 보고서' 전문을 찾아 헤매던 김진명씨는 쓰노다 후사코 여사의 <민비암살>을 정독하다가 그 행간에서 명성황후의 죽음에 '어떤 비밀'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을 번역한 김은숙 교수를 통해 후사코 여사로부터 대여섯 권의 전적을 소개받았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을 온통 헤집었지만 그는 도저히 문제의 '에조 보고서' 전문을 찾아낼 수 없었다. 마침 후사코 여사마저 "기억이 희미하다"며 한 발짝 물러선 최악의 상황이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김진명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동경 히토츠바시 대학에서 외교사를 전공하는 권용석씨에게 보고서를 찾아줄 것을 부탁하고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권씨가 몇 권의 책과 자료를 보내왔다. 그 중에는 앞에서 기자가 거론한 <일본의 한국병합>도 있었다. 김진명씨는 이 책을 읽다가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는 문제의 '능욕' 장면 중 일부가 소개돼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그가 원한 것은 보고서의 일부가 아니라 전문(全文)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진명씨는 문득 짚이는 것이 있어 <일본의 한국병합>을 다시 꺼내들었다. 문득 겐타로가 '에조 보고서'를 발견한 장소를 어딘가에 밝혀놓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에조 보고서'가 언급돼 있는 이 책의 223쪽을 보자 주석이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부리나케 주석 번호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출전이 밝혀져 있었다.
"국립국회도서관(國立國會圖書館) 헌정자료실(憲政資料室) 장(藏) <헌정사편찬회문서(憲政史編纂會文書)>".
역사학계에서 수없이 거론됐지만 정작 전문은 공개되지 않았던 '에조 보고서'가 역사학자가 아닌 한 작가의 끊임없는 관심과 열정적인 추적을 거친 끝에 '우연히' 발견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김진명씨는 이 문서를 즉각 찾지는 않았다. 문서를 찾으면 공개해야 하고, 이 문서의 공개가 월드컵 공동개최를 앞둔 한일 양국에 엄청난 파장을 미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다시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일본의 역사왜곡과 고이즈미 총리의 전격적인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지켜보면서 더 이상 공개를 늦출 수 없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는 일본의 권용석씨에게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 가서 이 문서를 찾아 팩스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던 '에조 보고서' 전문은 장장 107년만에 그렇게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4. 보고서엔 어떤 내용 들어 있나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원인과 발단에서부터 실행자와 사후 대책까지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는 '에조 보고서'의 분량은 각 2쪽씩을 차지하고 있는 목차와 서문을 포함해 모두 12쪽이다. 아울러 보고서는 (1)발단 (2)명의 (3)모의자 (4)실행자 (5)외국사신 (6)영향 등의 소제목이 붙어 있는 6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기자는 이 보고서를 김진명씨로부터 입수한 뒤 일본어에 정통한 전문가에게 번역을 맡겼다. 그러나 주로 고어(古語)와 사어(死語)로 쓰여 있어 도저히 완벽한 번역을 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다만 보고서에 한자로 표기된 '부덕의(不德義)' '경솔천만(輕率千萬)' '직무상 책임(職務上 責任)' '주모자(主謀者)는 미우라 공사(三浦 公使)' 등의 표현이, "미우라 공사의 책임과 처벌을 암시하는 내용이 들어 있고, 사후에 은폐되고 조작됐다는 의심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유일한 문서"라는 김진명씨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기자는 이번 취재 과정에서 겐타로보다 좀더 자세하게 '에조 보고서' 내용을 인용한 서적을 발견하는 의외의 성과를 얻었다. 친일문제전문가인 정운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일본 서적들을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뒤지던 중 찾아낸 <외교문서로 말하는 일한병합>(합동출판, 1996)이 바로 그것이다.
재일 사학자 김응룡씨가 쓴 이 책은 '에조 보고서' 전문 중 10분의 1 정도만 인용하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나온 어떤 저술보다도 풍부하게 보고서 내용을 소개하고 있었다. 다음은 이 책에 서술된, '에조 보고서'의 주요 내용에 대한 설명이다.
"에조는 법제국장 앞으로 보낸 보고서 안에서, 왕비 살해를 일본의 모든 이들이 생각하고 있었다고 보고서 머리에 적고 있다. 왕비 살해의 필요성은 미우라도 일찍부터 생각해 오고 있었다고 말하고, 일본의 수비대가 주력이었던 일, 왕비 살해와 사체에 대한 능욕의 상황을 자세하게 적고 있다. 폭력이 난무하는 현장을 외국인들에게 보인 데다, 이 외국인들과 언쟁까지 벌인 일과 대궐에서 난동을 끝내고, 보기 흉한 몰골로 대궐에서 철수하는 것을 대궐 앞 광장에 몰려든 조선인 군중들과 서둘러 성안으로 들어가는 러시아 공사에게도 보이고 말았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사체에 대한 능욕"이란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 역시 명성황후의 최후와 관련해서는 야마베 겐타로의 해석을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 보고서에 담긴 진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한편 김진명씨는 '에조 보고서'와 관련해 기자에게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그의 발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한국인들은 명성황후가 난자 당해 죽은 걸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 다만 '에조 보고서'의 존재를 접한 극소수의 일본인과 한국인 학자들만이 명성황후가 살해당한 뒤 시간된 걸로 주장하고 있다. 나조차도 그런 기존의 해석에 따라 <황태자비 납치사건>에서 시간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그는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본 뒤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다시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명성황후 최후의 장면을 기록한 유일한 문서인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명성황후가 시해 직전 즉 살아 있는 동안 능욕당하고 불태워지면서 죽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명성황후는 시간(屍姦)을 당한 것이 아니라 강간(强姦)을 당한 것이다."
▲ 에조 보고서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處刃傷).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웃을(笑) 일이다. 또한 노할(怒) 일이다)를 하였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그것은 참으로 충격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에조 보고서'에서 능욕 장면을 묘사한 대목을 직접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보고서에서 실제로 그 부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주요 한자 표기 그대로 살렸음-기자주).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處刃傷).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웃을(笑) 일이다. 또한 노할(怒) 일이다)를 하였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筆)로 옮기기조차 어렵도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을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殺害)했다."
그는 이 부분을 소리 내서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은 뒤 이렇게 주장했다.
"보고서 어디에도 살해한 뒤 능욕을 했다는 논리의 근거가 없다. 이 주장은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야마베 겐타로의 해석을 아무런 비판 없이 그대로 따른 것에 불과하다. 겐타로는 1966년 보고서 전문을 소개하지 않은 채 이 부분만 따로 떼어내 소개한 뒤 '사체를 능욕했다'고 해석해 버렸고, 이것이 한국에서까지 그대로 정설로 통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사람을 죽였을 때는 반드시 '살해'라는 구체적인 표현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뒤에 나오는 '궁내부 대신 살해'라는 대목이 결정적인 방증이다."
실제로 시해 장면을 묘사한 '에조 보고서'를 뒷받침하는 증언과 자료들은 많다. "일본인 흉한들은 왕비를 내동댕이치고 구둣발로 가슴을 세 번이나 내리 짓밟고 칼로 찔렀다"(왕세자 이척의 증언) "왕비는 뜰 아래로 뛰어나갔지만 붙잡혀 넘어뜨려졌고 살해범은 수 차례 왕비의 가슴을 짓밟은 뒤에 칼로 거듭 왕비를 찔렀다"(영국 영사관 힐리어가 북경의 오코너에게 보낸 보고서) 등이 대표적이다.
▲'뮤지컬 명성황후'중에서
다만 그들은 명성황후가 그렇게 칼에 찔려 즉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 김진명씨는 이렇게 반론을 펼쳤다.
"그들은 최후의 장면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아니다. 나중에 궁녀 등에게 전해들은 얘기를 다시 전달한 것에 불과하다. 더욱이 '에조 보고서' 이외의 어떤 기록에도 '능욕' 부분은 나오지 않는다.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피해자인 명성황후와 가해자인 일본인들이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죽었고, 일본인들은 진실을 철저하게 은폐하고 조작했다. 가해자 중의 한 명이면서도 미우라 일파와 입장을 달리 했던 에조의 증언이 가장 진실에 가깝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창밖을 응시하며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던 그가 마침내 다시 말문을 열었다.
"결국 일본인들은 명성황후를 시간한 것이 아니라 강간한 것이다. 진보적 역사학자로 알려져 있는 야마베 겐타로조차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이 끔찍한 만행에 놀라 보고서 전문은 소개하지 않고 '사체 능욕'이라고 축소해서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한 주권 국가의 왕비에게 만행을 저지른 것과 그것을 은폐하고 조작한 것에 대해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 한국인들 역시 처참하게 능욕 당하면서 죽어간 명성황후의 원혼을 풀어줘야 할 책임이 있다."
한일 월드컵이 열리는 오늘, 우리는 "나의 억울한 죽음을 잊지 말라"는 명성황후의 단말마적 외침을 가슴으로 생생히 들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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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명 인터뷰 "역사왜곡에 종지부 찍을 문서"
'에조 보고서' 전문이 발견됨으로써 <황태자비 납치사건>에 등장하는 '435호 비밀문서'는 실재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소설의 작가이자 보고서 전문을 찾아낸 김진명씨를 만나 보았다.
-'에조 보고서'를 찾아 헤맨 까닭은 무엇인가.
"한국민과 대다수 선량한 일본인의 기대와는 달리, 역사 교과서 왜곡이나 망언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양국의 역사인식 차이는 좁혀질 줄 모르는 것이 현실이다. 나는 그 이유가 대다수의 일본인들이 자국의 역사를 잘 모르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일본인이 직접 쓴 이 보고서를 찾아내 그들에게 역사의 진실을 말해주고 싶었다."
-한일 양국의 역사인식이 평행선을 달린다고 했는데, 어떤 부분에서 그렇다는 것인가.
"예컨대 한국인들은 군위안부나 징용을 얘기하면 일본인들이 부끄러워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가 군위안부를 말하면, 그들은 전표를 내놓는다. 즉 군부대를 따라다니며 돈을 벌던 여자들이라는 식의 논리다. 징용을 얘기하면, 그들은 다시 봉급명세서를 내놓는다. 징용자는 돈을 벌러 일본으로 온 노동자라는 것이다. 조선 병합과 수탈에 대해서는 서구 열강으로부터 아시아를 지키려고 했다는 식의 논리를 내놓고, 실제로 이런 것들을 자국의 국민들에게 가르친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나는 일본인들이 모두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도 역사를 제대로만 알면 반성하고 사과할 줄 안다. 지난번 후쇼샤의 교과서 채택 거부운동에서 보았듯이 역사왜곡에 종지부를 찍을 사람들도 결국은 일본의 선량한 시민들이다. 나는 일본의 정부, 언론, 학계가 도저히 변명할 수 없는, 그리고 어떤 논리로도 호도할 수 없는 결정적인 역사적 사건, 일본인들이 정말 부끄러워 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 사료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당시 현장에 있던 일본인이 작성해 본국으로 보낸 이 '에조 보고서'는 일본의 역사왜곡에 종지부를 찍을 수도 있는 최고의 사료라고 생각한다."
-국내에선 아직도 일제의 침략과 만행이나 친일 잔재 청산을 말하면 '과거지향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반공과 반북만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실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실 남북한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증오하고 갈등하게 만든 분단과 전쟁의 뿌리는 일제의 침략과 압제였다. 그리고 그 '불행의 씨앗'은 107년 전 어느 날 새벽에 발생한 이 나라 '국모'의 억울하고 참혹한 죽음이었다. 그러므로 명성황후의 비극은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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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김Richard 2021.08.30
결국 에조보고서에 강간을 묘사한 대목이 있다는건 국부검사를 했다는 기록외에는 김진명이란 소설가의 상상이란 소리잖아, 소설을 사실인것처럼 선동해놓고 사실기반이라고했으면 증거를 내놓으라는데 일본이 엄폐를 해서 없다거리면 뭐하자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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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필naver 대표계정 입니다.-2020.04.18 13:53 · 공유됨(1)
10%만 해석이되어 잘모르겠다는 보고서를 내용에 확인도 안된걸 갖고 그랬을것이란 추측에서 나중에는 능욕당했다라고 끝을내니 이건뭐 조선이 좀비가 지배하던 킹덤판타지 왕국이랑 같은 수준이네요.. 반일을 하던 친일을 하던 바른역사를 가지고 바르게 가르치세요. 이런 가짜역사 반일프레임을 일본의 우익단체가 진짜좋아합니다.. 일본의 우익단체가 한국의 주사파정부를 진짜 좋아합니다..왜냐면 2022년 대선때 문재인계열 주사파정부가 다시한번더 탄생되면 독도는 일본땅이 되기 때문입니다.. 왜 일본땅인줄 아세요? 국제규약에 울릉도가 조선땅 독도는 원래 일본땅이였는데. 제2차대전 일본의 패망후 미국이 전후보상차원에서 독도를 한국에 주었기 때문에 한국땅이 된거기 때문입니다..오로지 미국에 의해 어거지로 한국땅이 되었는데 다음정권도 친중하는 주사파 정권이 생기면 미국이 독도를 한국땅이라 우겨줄까요? ㅋ 미국만 나몰라해서 독도를 국제재판소에 끌고가면 독도가 일본땅인 증거는 차고 넘칩니다.. 우리나라 역사에도 울릉도가 조선땅이라 나와있지 독도가 조신땅이라는 기록은 없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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