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쟁자금 추적한 네덜란드 기자…'위안부'의 몫은 어디로 갔을까
일본 전쟁자금 추적한 네덜란드 기자…'위안부'의 몫은 어디로 갔을까
[기고] 네덜란드 탐사 기자가 밝힌 일본 전쟁은행 자금 흐름
장광열 네덜란드 통신원 | 기사입력 2022.08.16. 09:15:58
8월 14일 네덜란드 현지 시간 오전 6시에 탐사보도 전문기자 그리셀다 몰러만스(Griselda Molemans)와 월간조선의 박희석 기자가 공동 취재 활동을 통해서, 국제적인 비자금 추적 전문 웹사이트 '팔로우 더 머니'에 일본군의 전쟁자금의 행방을 공개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 제국의 식민지였다가 1942년부터 1945년 종전 때까지 일본이 침탈한 인도네시아에서의 자금입니다.
네덜란드 정부와 왕실은 네덜란드령 인디아(현재의 인도네시아)의 종군 '위안부' 몫으로 예금되었던 자금을 물려 받은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그들은 일본 국가의 조직적 지원 하에 이루어진 종군 '위안부'들 몫의 돈을 벌었던 것입니다. 그 금액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156.5백만 유로에 이릅니다.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2093억 원에 달하는 금액입니다.
이 르포 기사는 8월 13일 네덜란드 시간 아침 6시에 뜻 있는 언론이들이 국제 비자금을 추적하는 웹사이트 FOLLOW THE MONEY가 공개하였고, 네덜란드 공영방송 NOS와 유력 일간지 텔레그라프 등에 보도됐습니다. 8월13일과 14일 양일에 걸쳐 공개된 글을 그리셀다 몰러만스의 양해를 받아 아래에 정리합니다.
▲지난 14일 국제적인 비자금 추적 전문 웹사이트 '팔로우 더 머니'에 일본군의 전쟁자금의 행방을 공개했다. ⓒFTM
자료 공개에 대해
8월 14일은 일제가 2차대전 당시 저지른 종군 '위안부' 성노예 부역자들을 기리는 국제 위안부의 날입니다. 31년 전, 1991년 8월 14일 한국의 김학순 할머니는 최초로 자신이 종군 '위안부'였음을 공표하였습니다. 그는 수년간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일본군 병사들에게 성적 학대를 당해야 했습니다. 그는 일본정부가 그 당시 점령지에서 군대 조직의 성적 학대를 저지른 데 사실을 인정하고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요구하였습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위안부'들 중 최초로 침묵을 깨고 진실을 말함으로써 수십 만에 이르는 강제 매춘 희생자들의 목소리와 그들의 얼굴이 세상에 알려지도록 했습니다.
'종군 위안부' 이슈는 오늘 이 순간에도 끝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면 일본제국의 역사를 계승한 현재 일본 정부가 책임을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2차대전의 전승국들 역시 지금까지 이 문제를 외면해 왔습니다. 일본과의 경제적인 교역의 중요성이 서구의 식민지배를 당했던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동원된 위안부 할머니들보다 훨씬 크기 때문인 듯합니다.
네덜란드에서는 오랜 침묵의 기간이 지나고 1992년 12월에서야 얀 루프-오헤르너(Jan Ruff-O’Herne)할머니가 젊은 시절에 인도네시아 자바 섬의 세마랑 지역에서 일본군 장교들을 위한 위안소에서 강제 매춘을 했던 과거를 용감하게 고백하면서 비로서 이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습니다. 이로써 네덜란드는 당시 식민지로 지배하던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전쟁 범죄에 대한 조사를 떠밀리듯 하게 되었습니다. 2차대전 당시에 무려 35만명에 이르는 일본 육군과 해군이 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조사 결과 자바와 수마트라 섬에서 최소 65명에서 많게는 삼백여 명에 달하는 네덜란드계 여성이 '위안부'로 동원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은폐된 진실은 네덜란드계와 유럽계 여성, 인도네시아계와 몰루칸, 파푸아계의 젊은 여성 7만 명이 인도네시아 지역 전역에 걸쳐 '위안부'로 동원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감춰진 것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강제 매춘에 동원된 여성들에게 일본군이 지불한 돈이 다시 돌고 돌아 일본의 전쟁자금으로 이용되었습니다. 일본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동안 벌였던 행적에 대해서 전후에 네덜란드 정보기관인 NEFIS에서 포착한 것입니다. 이 기관의 보고서는 전체 공개가 되지 않고 일부 사실만 드러났던 것입니다. 팔로우 더 머니(Follow the Money)는 NEFIS의 보고서 전체를 구해 조사하여 이러한 조직된 강제매춘에서 돈의 흐름을 재구성해 보았습니다.
2차 대전에서 일본의 항복 이후에 두 개의 일제의 전쟁은행인 요코하마 스페시 뱅크(Yokohama Specie Bank)와 뱅크 어브 타이완(Bank of Taiwan)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네덜란드 정부와 왕실은 이 자산을 자기 주머니에 챙길 수 있었고, 그 자금의 일부는 '위안부'들 이름으로 만든 이른바 차명계좌의 예금들이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네덜란드 왕실 말고도 일본의 황실이 위의 두 은행의 대주주였고, 그 지분에 따라 '위안부' 할머니들 앞으로 만들어 놓은 예금의 수익은 고스란히 이들의 주머니로 다시 흘러 들어갔습니다.
저희는 일본 황실 가족의 홍보부처에 여러 차례 이에 대한 입장 발표를 요청했지만 아직 일체의 답변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 당시 왕좌에 있던 히로히토 일왕의 손자이자 현재 일왕인 나루히토는 일본의 연호를 이화라고 지으면서 질서와 화합으로 일본의 침략 역사에 대한 언급은 더 이상 하지 말자고 피해국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제가 벌어들인 '위안부'들의 몫으로 쌓은 부는 자신들이 것이 아니므로 피해자 보상에 쓰여야 합니다.
▲타이완은행이 전쟁자금 확보를 위해서 발행한 국채 ⓒFTM
종군 위안부의 감춰진 역사
일본 제국주의 팽창기인 19세기 말부터 2차대전 때까지 일본의 식민지 개척에 관여해 왔던 요코하마 스페시 뱅크 (Yokohama Specie Bank)와 일본계 기업의 해외 자금을 관리하던 타이완은행(Bank of Taiwan) 의 자금 흐름을 추적한 결과, 네덜란드령 인디아(현재의 인도네시아, 뉴기니아 일부) 지역 내의 자금 규모는 2576만 길더, 현재 가치로는 1억5천6백만 유로(한화 2천 93억원)이 넘는 돈이었습니다. 이 돈은 전후 패전국 일본의 자산 처리 과정에서 인도네시아의 식민지 모국이던 네덜란드 정부와 왕실 자산으로 귀속되었음을 밝혔습니다.
네덜란드 탐사보도 기자 그리실다 몰러만스는 수리남계 아버지와 인도네시아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성장 과정에서 네덜란드 제국의 식민지 역사에 문제의식을 키워 왔고,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네덜란드의 식민지 지배의 숨겨진 비사를 추적하며 자신의 탐사취재를 기초로 다섯 권의 저서를 냈고,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도 하였습니다.
그의 이런 활동 결과 2019년에는 2차대전 당시 아시아 전역에서 일본이 동원한 종군 위안부의 실태를 담은 서적 LEVENSLANG OORLOG (평생을 전쟁 속에서 삶)의 출간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일제가 2차 대전 당시 아시아 태평양 지역을 침략하여 가는 곳마다 민간인 학살과 부녀자 강간을 일삼았고, 무려 34개국 국적과 50만명이 넘는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여성들을 종군 위안부로 동원한 것을 고발하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1년 전인 19991년 8월 14일 한국의 김학순 할머니가 자신이 2차 대전 당시 일본이 동원한 종군 위안부였음을 공개하면서 비로소 국제 여론의 주목을 받게 된 이 사안은 1992년 12월 네덜란드령 인디아에서 위안부로 동원된 네덜란드 여성 얀 루프-오헤르너 (Jan Ruff-O’Herne)할머니의 증언으로 숨겨진 진실이 차츰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정신대대책협의회와 많은 시민단체들과 언론의 진상 규명 노력이 이어져 왔습니다. 그리실다 몰러만스 기자는 지난 8년간의 탐사 활동을 통해 총 34개국, 50만 명에 이르는 여성들이 위안부로 동원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1년 전인 19991년 8월 14일 한국의 김학순 할머니가 자신이 2차 대전 당시 일본이 동원한 종군 '위안부'였음을 공개하면서 비로소 '위안부' 문제가 관심을 받았다. ⓒFTM
종군 위안부 실상은 왜 아직도 뜨거운 이슈인가?
인류의 수많은 전쟁 역사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일본의 종군 '위안부' 설치 운영,그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의 역사입니다.
근래에는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과 캐나다, 호주, 중국, 필리핀, 독일 등 해외에서 평화의 소녀상 건립운동이 이어지고 있고, 이에 대해서 일본 정부는 자신들의 외교 역량을 총 동원하여 해당 국가 지방자치 단체와 중앙정부에 압력을 넣어 평화의 소녀상의 건립을 막고 있고, 이미 건립된 소녀상은 철거를 요구하며 압력을 넣고 있습니다.
올해도 일본의 기사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4월 28일 일본을 방문한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에게 2020년 9월 베를린 미테구에 건립된 소녀상이 계속 설치되어 있는 것에 유감을 표하였다고 일본의 산케이 신문이 5월 초에 보도했고, 한국의 언론도 이를 인용하여 보도했습니다.
일본은 1930년대부터 1945년 2차대전 패전까지 당시 아시아 제패라는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아시아 전역에서 기존의 제국주의 나라들과 전쟁을 벌여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군 병력의 양성과 군부대의 병력 유지와 충원은 중요한 업무였습니다.
일본이 강제로 한국 등 식민지와 점령지 여성을 '위안부'로 동원한 것은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 확보라는 최고 전략을 달성하기 위해 벌인 사업이었습니다. 무려 50만 명에 이르는 위안부를 동원한다는 것은 한국군 병력이 60만 명 규모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규모입니다.
왜 일본 정부는 지금껏 '위안부' 운영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가?
일본 정부와 일본군이 '위안부' 운영을 주도한 것을 부정하는 데는 그 실상을 피해 당사국에서조차 쉬쉬해 왔고, 관련 자료가 공개되지 않았던 것, 그리고 당시의 가부장적인 문화에서 피해 여성들이 이 사실을 증언하고 관련 책임자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기 어려웠던 것 등이 함께 작용해 왔습니다. 2차대전이 끝난 지 77년이 지난 지금에도 가해자는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이 거대한 범죄행위가 어떻게 가능한 걸까요?
가장 큰 이유는 가해자가 자신의 범죄를 부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차대전 종전 후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일본의 패망 이후 아시아 전역에서 불뿜은 피식민지 민족들의 자주 독립운동에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일본이 전쟁을 벌이기 전에는 서구 열강들이 아시아 지역을 분할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후 쇠퇴한 영국을 대신해서 유일 강대국이 된 미국에서 가장 큰 적은 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하는 소련이었습니다.
아시아의 가장 큰 대국인 중국에서는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과 전쟁을 벌였고 결국 중국 공산당은 대만을 제외한 대륙 전체를 장악하게 됩니다. 한국에서도 38선을 경계로 소련과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소련은 동유럽에서 친소국가를 만들며 미국의 패권에 도전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아시아의 서구 제국주의국가들이 전쟁 전처럼 식민지를 유지하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했고, 패전국 일본에 대해서도 대표적인 전범들만 처벌하는 선에서 무마하려 하였습니다. '종군위안부' 실태에 대한 자료들은 비밀문서로 지정되어 감춰졌습니다. 네덜란드령 인디아(현재의 인도네시아 지역)에서는 독립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식민지 모국 네덜란드가 다시 통치할 수 있도록 일본군과 식민통치기관의 재산을 네덜란드가 몰수하여 소유하도록 했습니다.
이 와중에 인도네시아가 1945년 8월 17일 독립을 선언하고 네덜란드가 이를 승인하지 않아 전쟁이 발발하고 4년 5개월에 걸친 전쟁 끝에 1949년 12월 27일 인도네시아는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요약하면 '전쟁 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아시아를 지배하던 서구열강들의 공동 합의였던 것입니다.
▲14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문 앞 광장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 공개증언 31주년 기념 시위에서 참가자들이 기념 촬영하고 있다. ⓒ연합뉴스
'위안부'=강제 매춘=일본군 성 노예노동자
위안부라는 용어는 일본이 붙인 것입니다. 실제 그들은 큰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사탕발림식 사기와 강제로 동원된 것입니다. 일본 제국의, 일본 제국에 의한, 일본군을 위한 전쟁 지원조직인 것입니다. 이번에 펴낸 보고서에서 그리실다 몰러만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위안부'라는 이름은 비극적인 은유적 표현입니다. 이것은 강제 매춘입니다. 피해자인 여성과 10대 소녀들은 대부분 일본이 조직적으로 일본군의 주둔하는 곳은 어디서나, 유괴되고 매일 매일 성적 학대를 당한 것입니다. 그들이 있던 위안소는 고급 빌라와 사우나, 호텔, 학교, 절과 교회 등에 설치되었습니다. 이 강제매춘소는 상하의 엄격한 위계적인 구조로 짜여 있었고, 엄격한 규율 하에 운영되었습니다."
또 종군'위안부' 설치의 배경에 대해서는 이렇게 서술합니다.
"강제 매춘은 일본군 병력의 성병을 막기 위해 일본 정부가 설립한 것입니다. 최초의 발단은 1918년부터 19922년 사이에 시베리아 지역으로 파병되어 있던 일본군의 높은 성병 발병률 때문이었습니다. 무려 병력의 1/3이 매독과 임질에 걸려서 전투 불가 판정을 받고 병력에서 제외되었고, 그 중의 상당수가 사망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원인은 병사들의 사기와 관련된 것입니다. 병사들의 성적인 욕구를 채워 줌으로써 그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군대 내의 폭동을 막을 수 있었던 거죠. 그리고 일본의 육군과 해군 내의 집창촌 시스템은 보다 높은 목적이 있었습니다. 위안소에서 벌어들인 돈이 다시 일본의 전쟁 자금으로 쓰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제가 위안소를 국가 전매사업으로 운영하여 군인들에게 주는 월급이 '위안부'에 대한 '화대'로 지불되고, 그 화대는 위에서 언급한 요코하마 스페시 은행과 타이완은행에 예치되어, 일본이 전쟁자금으로 쓰이는 순환구조를 이룬다는 점을 그는 역설하고 있습니다.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의 보르네오지역의 일본 해군 헌병부대 비밀경찰들은 패전 후 네덜란드 군 보안사의 NEFIS (de Netherlands Forces Intelligence Service) 의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그들은 일본 점령군이 거대한 규모의 성적 학대를 해 온 것을 자백한 진술서가 있습니다. 이런 자금의 흐름에 대한 기록이 지금까지 감춰져 있던 것은 네덜란드 군 보안사의 조사 보고서가 몇 조각으로 쪼개져서 전모를 알 수 없었고, 보고서의 일부만 공개되었고, 중요 정보들이 암스테르담에 있는 네덜란드 전쟁문서 보관소(NIOD)와 헤이그에 있는 국립 문서저장소에 보고서가 쪼개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007년에 이르러서야 런던에 있는 네덜란드 국립 문서보관소에서 문서의 전모를 열람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종군 위안부 자금 운영의 전모는 네덜란드가 이미 조사 후 은폐한 것이다!
"1946년 6월 5일 네덜란드 군 보안사령관 J. 하이부룩(Heijbroek)이 싸인을 한 보고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어요. 위안소는 난요 코핫슈 카부시키 카이사(the South Pacifi Development Company)의 임원이 운영했다고 쓰여 있어요. 관리 감독은 호쿠카이, 일본 경제인 연합회(the association of Japanes Businessmen)에서 맡았고, 이들은 위안소 시설도 설치해서 운영했지요. 운영 책임자는 자기 회사의 직원들에게 위안소의 상시 운영 업무를 맡겼어요. 매일 아침, 전날의 위안소의 매매 전표와 영수증을 받아서 회계 처리하였습니다.
관리 책임자는 월별로 재무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고, 위안소마다 평균 수입이 60 길더 정도였다고 쓰여 있어요. 이 중에서 1/3은 위안소 몫으로 가고, 2/3는 위안부들에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는데, 이 금액이 그들에게 지불되는 것이 아니고, 타이완은행 지부에 예치됩니다."
과연 종군 '위안부'들이 이들 몫의 돈, 그중 2/3를 전쟁이 끝난 후에는 타이완은행에서 인출해서 갈 수 있는 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리실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일본군 병사들이 위안소에 가면 당연히 돈을 냈지요. 하지만 그 돈을 누가 받나요? 위안소 업주가 받지요. 위안부 중에 그 화대의 2/3가 '위안부' 몫으로 나뉘고 그 돈이 타이완은행에 예치되는 걸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어요. 이들이 업주에게 그 돈에 대해서 물었을 때, 업주는 '너희들에게는 빚이 있다. 너희들이 입는 옷과 화장품 값, 비누 등 생필품 값으로 다 나간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실다가 찾아낸 자료는 네덜란드 군 보안사령관이 서명한 보고서에 담긴 것과 종군 '위안부'들의 증언에 기초한 것입다. 일본 정부에서도 그 진위를 의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일본군을 위한 위안소를 일본 기업인들이 운영했고, 그 조직은 철저한 상하 위계질서와 엄격한 규율을 갖춘 기관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군이 낸 돈은 다시 일본의 제국주의 전쟁을 위한 특수목적 은행이었던 타이완은행 계좌로 들어가고, 일본정부는 그 돈을 전쟁자금으로 쓴 것입니다.
명목상 1/3은 위안소 운영 업자들이 가져가고, 2/3는 '위안부' 몫으로 회계 처리했지만, 실제는 일본군과 일본 식민통치기구가 자기 금고로 가져 간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일본이 일본군을 상대로 일본군 병사들의 성적 욕구를 풀 수 있는 위락시설을 운영하고, 그 수익금이 다시 일본은행으로 들어가는 순환 구조를 만든 것입니다.
결국 종군 '위안부'는 일본군의 성병으로 인한 병력 손실을 방지하면서, 일본군 병사들의 성욕을 채워주고, 그들이 내는 돈은 다시 전쟁자금에 충원되는 수익률 67%의 국책사업에 동원된 것입니다.
일본 군국주의 자금 들여다 보기
그리실다가 발표한 보고서에서 일본의 자금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타이완은행은 일본군의 위안소를 거친 자금 조달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 은행은 1899년 일본의 첫 번째 해외 식민지였던 타이완에서 설립되었습니다. 설립 목적은 밋츄비시, 밋수이 같은 일본 기업의 해외투자에 자금을 조달하는 지원 역할을 하였습니다. 자본금 5백만 엔을 최초 자본으로 했고, 해외투자를 위한 융자, 외환 환전 등을 했지요. 타이완을 시작으로 다른 중국과 동남아시아 나라들에서 무역에 필요한 금융활동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위한 전쟁자금의 금고 역할을 했습니다."
"본사는 대만의 타이페이에 있었지만 실제 기업의 핵심은 도쿄에 두고, 모든 중요한 은행의 활동을 수행했습니다. 투자 규모를 놓고 볼 때 동남아 지역에서 두 번째로 큰 은행이었습니다. 그 돈의 출처는 일본 황국이죠. 타이완에 이어 두번째 해외 지사를 1912년 싱가폴에 세웠고, 이어서 태국과 영국령 말레이시아와 네덜란드령 인디아에 세웠지요. 여기서는 지역의 통화를 발행하였고, 예금 업무도 하였습니다."
"1931년에 이 은행은 다가올 대륙 침략을 위해서 해군의 확대 목적으로 도쿄에서 국채를 발행합니다. 그 규모는 은행 자본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많은 금액을 모았습니다. 이 은행에 대주주 중 코라라는 이름의 특별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본 황실입니다. 결국 일본 천황이 이 은행의 주인이라는 것이죠. 일본 천황은 요코하마 스페시 은행의 지분 22%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은행은 일본의 가장 큰 은행이었고, 일본 전쟁 자금을 대는 젖줄이었죠. "
2차 대전 패전 후 두 은행의 자금은 어디로 갔을까요.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선언은 식민지 종주국들의 전쟁에 고통 받던 아시아인들에게 자주 독립의 약속으로 들렸습니다. 그러나 승전국 미국과 연합국은 구 질서의 회복을 꾀하고 있었지요. 일본의 정복지의 일본 은행들과 기업들의 자산은 모두 몰수되어 원래 주인인 서구 열강 손에 들어갔습니다. 네덜란드령 인디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의 항복 선언 이후 요코하마 스페시 은행은 적국의 재산(적산)으로 규정되었지요. 미국의 태평양 전쟁 사령관이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일본의 국내외 자산에 대한 청산에 들어갑니다. 모든 자산은 식민지를 거느렸던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다시 돌려주기로 한 것입니다."
전쟁은 아시아인들에게 엄청난 상처를 남기고 끝이 났습니다. 일본을 누르고 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한 미국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아시아인들은 잠시 나마 해방의 기쁨을 느꼈고, 일본군이 떠나면서 수십만의 종군 '위안부'들 역시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보상 받은 돈은 당연히 없습니다.
승전국이든 패전국이든 모두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고, '위안부'의 실태에 대한 조사 결과도 비밀문서보관소로 들어갔고, 2차대전의 적군 일본은 미국의 충실한 동맹국으로 탈바꿈하였고, 서구 열강들은 다시 식민지에서 자신들의 통치를 재확립하는 데 열중했습니다. 그 와중에 종군 '위안부'들은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평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흔히 국제 외교에서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맹이 되기도 하고 오늘의 동맹이 내일의 적이 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일본의 패망은 새로운 패권국가 미국의 위시 아래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 되찾기로 돌아갔고, 이들은 아시아인들의 자주독립운동을 막기 위해 함께 협력했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다시 들여다보는 것은 현재를 사는 동시대인들이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안녕과 번영을 이루기 위해 누구와 손잡아야 하고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 판단하는 지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총 34개국 출신의 50만 '종군 위안부'의 역사를 들여다 봄으로써 우리는 한 세기 전의 세계를 움직인 국제질서 속에서 왜 그들이 전쟁에 동원되었고, 어떻게 이용되었는지 알게 됩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뉴스로 전해 들으면서 우리는 21세기 새로운 제국주의의 부활을 봅니다. 인류에게는 또다시 종군 '위안부'의 역사가 재연될 것인가? 우리 스스로 물음을 던져 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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