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1개월 3일 만에 친일잔재를 청산하다
나는 2019년 4월 22일 독립운동가 성암(聲菴) 김재계 선생 추모식에서 송덕비(頌德碑)의 글을 지은 사람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이므로 선생의 묘소 공간에 장흥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와 친일파가 공존할 수 없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비(碑)의 명칭도 송덕비가 아니라 추모비가 되어야 한다고 의견을 피력했다. 송덕비란본래 조선시대 고을의 감영이나 관아 등에서 근무한 관찰사나 고을 수령 중 청렴하고 고을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거나 성과를 가졌던 이들을 위해 세워진 비석을 말한다. 김재계 선생이 일제의 관직에 근무한 경력이 없고, 독립운동과 송덕비는 격이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당시 군수는 주관부서 과장 팀장 앞에서 친일잔재인 송덕비를 추모비로 교체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동안 과장 팀장 학예사가 3번 이상 바뀌는 과정에서 모두 (나는 몰라요) 물거품이 되었다.
작년에 군수가 바뀌어 추진했지만 본예산에 반영이 되지 않아 나는 입에 칼을 물다시피 하면서 추경편성 약속을 받아 추진했지만 윤달이 들어 주문이 밀린 석재공장에서 선생의 추모일인 4월 22일까지는 추모비 건립이 불가능 하다고 하여 유족의 동의를 얻어 추모식을 5월 25일로 연기하고 추모비 건립을 추진하여 며칠 전에 미리 추모비를 세워놓고 추모식과 제막식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 4월 26일 나는 (사)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 임기가 끝났지만 추모식과 추모비 제막식은 제 책임하에 진행하기로 했으니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참고로 친일파가 쓴 송덕비는 땅에 잘 묻어 주는 장례를 했다.
독립운동가 성암(聲菴) 김재계 선생 제81주기 추모식 및 추모비 제막식
일시: 2023년 5월 25일 오전 10시
장소: 구 남도대학 옆 선생묘소
독립운동가
성암(聲菴) 김재계 선생 추모비
성암 김재계 선생은 1888년 4월 25일 현 장흥군 회진면 신상리에서 동학농민혁명군 규현(圭炫)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은 1906년 동학의 후예인 천도교가 종교의 자유를 획득하자 19세에 살아남은 장흥동학농민혁명군 9명과 함께 천도교 장흥교구 임원이 되었다. 선생은 1917년 천도교 장흥교구장으로 선출되어 초가였던 교당 자리에 1918년 현 지방문화재인 천도교 장흥교당을 와당으로 신축하여 명실공히 장흥 독립운동의 산실로 만들었다.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3.1 독립운동 거사 자금을 모금할 때 교당 건립 모금이라 하여 경찰 눈을 피해 독립자금을 모금하여 여성교도 2명을 시켜 자금을 서울로 보냈다. 독립선언문이 장흥에 전달되자 3월 15일 대덕 장날 만세운동을 전개하여 50여명이 체포되어 나주 헌병대로 압송된 후 그중 17명이 기소되어 선생은 광주에서 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석방된 후 1921년까지 장흥교구장을 역임하면서 고향 덕도에 현 명덕초등학교 전신인 양영학원도 설립했다. 1924년부터는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감사관정 신도관정 금융관장 종법사 공선관장 등 각종 간부직으로 활동하면서 신간회 창립 때는 천도교 대표로 활동하였다. 1926년부터 1936년까지 천도교월회보 편집위원이 되어 천도교 교리 종교사 논설 등을 게재한 원고가 족히 단행본으로 1권 분량이 넘는다. 선생은 1938년에 동학농민혁명 3.1만세운동과 더불어 천도교 3대 항일운동인 무인멸왜기도운동의 주축이 되었다. 전국적으로 멸왜기도운동을 시작한 지 보름 만에 황해도 신천경찰서에 발각되어 총독부 경무국의 지휘하에 황해도 경찰국의 주도로 전국적인 수사가 진행되어 독립자금 모금까지 발각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선생과 대질심문한다고 장흥 천도교 간부 2명을 황해도로 연행해 갔다. 일제가 이 사건을 조사할 때는 3.1운동보다 더한 대음모라고 각본을 꾸몄지만 중일전쟁 수행에 민심이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70여일 만에 병보석으로 석방하였다. 선생은 석방 후 고향으로 내려와 1년여 휴양하다가 춘암 대도주의 부름을 받아 상경한 후 다시 독립운동을 재개하려 했으나 고문 후유증이 재발하여 1942년 6월 27일 종로구 옥인동 자택에서 향년 55세로 순국하였다.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50년대 후손들이 고향으로 이장했다. 1976년 독립유공자 대통령 표창을 수여 받자 장흥군의 주도로 1977년 4월 22일 현 장소로 재이장하여 성역화하였다. 1991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우리 장흥군민은 선생의 숭고한 뜻을 추모하면서 의향장흥 기개를 지키겠습니다.
좌측면:
멸왜기도문: 개 같은 왜적놈을 한울님께 조화 받아 일야간(日夜間)에 소멸하고서 전지무궁(全知無窮)하여 놓고 대보단(大報壇)에 맹세하고 한(汗)의 원수까지 갚겠습니다.
대보단(大報壇): 창덕궁에 있던 명태조의 사우(祠宇)
한(汗)의 원수: 병자호란 때의 원수 곧 청나라
우측면
1977년 12월 20일에 세워진 성암 김재계 선생 송덕비는 장흥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에 대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가 글을 지어 한 공간에 공존할 수 없다는 문제 제기로 장흥군이 친일 청산 작업의 하나로 유족대표의 동의를 받아 철거하였다.
2023년 4월 22일 선생의 순국(殉國) 81주기를 맞아
장흥군 세움
유족대표 김영표
(사)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 위의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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