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일본으로 가는 '시찰단' 이야기를 들으니, 식민지시기의 이른바 '내지시찰단' 생각이 난다. 2006년도에 이에 관한 논문을 하나 써서 발표한 적이 있었다. 내가 발표한 논문은 "식민지시기 조선인들의 일본시찰 -1920년대 이후 이른바 '내지시찰단'을 중심으로'-"로 <지방사와 지방문화> 9권 1호(2006.5. )에 실었었다. 그 내용은 대체로 아래 요약문과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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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시기 조선인들의 일본시찰 -1920년대 이후 이른바 '내지시찰단'을 중심으로'의 요약문
식민지시기 조선총독부 또는 관변 기관, 관변 언론들은 계획적으로 조선인 군수, 면장 등 관리들을 비롯하여, 유생, 도평의원, 면협의원, 경제인, 교사, 농촌지도자, 청년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내지시찰단’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일본에 보냈다. 그것은 조선의 지도층이 일본이라는 나라가 근대화를 통해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진 나라라는 것을 실감하게 하고, 또 일본의 전통 문화가 결코 만만치 않은 역사와 저력을 지녔다는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른바 '내지시찰'은 식민지 초기인 191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이때의 시찰단은 주로 친일적인 인물들이 중심이 된 것이었다. 하지만 3.1운동이 있은 이후인 1920년대에 들어 총독부 주도의 '내지시찰’은 본격적으로 시행되었으며, 이때부터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이 시찰단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30년대 이후에 들어서서는 농촌진흥운동 관계자, 교원들이 시찰단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그리고 1940년대 이후에는 ‘신경제’를 학습하기 위한 경제인들이 시찰단의 주체가 된 것으로 보인다.
총독부 주관의 ‘내지시찰’, 혹은 개인적인 일본 여행은 당시 조선인들에게 새로운 일본관을 만드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 이 시기 일본 시찰 여행에는 군수, 면직원 등 관리층을 비롯하여, 도평의원, 면협의원 등 관변의 공직자들, 그리고 교원, 청년, 유교개명회원, 금융조합 임원 및 직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관리들이나 관변의 인물들로서 총독부에 이미 협력하고 있거나 앞으로 협력할 가능성이 높은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주변에 영향력이 큰 인물들이기도 하였다.
내지시찰 여행의 코스는 시모노세키(下關) - 오사카(大阪) - 교토(京都) - 나라(奈良) - 도쿄(東京) - 닛코(日光) 코스가 일반적이었다. 이 코스 가운데 오사카는 근대적인 도시로서, 교토와 나라는 역사도시로서, 도쿄는 두 가지 모두의 의미에서, 그리고 닛코는 휴양지와 역사유적지로서 의미를 각각 갖고 있었다. 이밖에도 나고야(名古屋), 고베(神戶), 쿠레(吳)와 같은 산업 도시나 군사도시, 그리고 우량 농촌 마을이 시찰코스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일본 시찰을 다녀온 이들은 여러 관변 잡지나 어용신문에 시찰기를 썼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1) 공업의 발달, 2) 울창한 삼림, 3) 근대화된 도시, 4) 많은 신사와 사찰, 5) 정비된 경지와 잘사는 농촌, 6) 교육기관의 정비, 7) 편리한 교통, 여성노동 등을 주된 소감으로 꼽았다. 또 일본사람들은 근면하고, 일본의 고적이 잘 보존되어 왔다는 것도 그들의 소감에 들어 있었다.
‘내지시찰’애서 시찰단이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일본의 대도시들이 보여주고 있던 놀랄만한 ‘근대성’이었다. 그들은 특히 도쿄(東京), 오사카(大阪) 등 대도시들은 이미 ‘모던 도시’로서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관청가와 번화가의 고층 빌딩, 백화점의 각종 현대적 시설, 대도시의 야경과 이를 구경나온 인파 등은 아직 모던 도시를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던 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철도와 전차, 지하철과 같은 편리한 교통시설과 정비된 도로 등도 그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또 대도시뿐만 아니라 소도시까지도 많은 공장들이 들어서 굴뚝에서는 매연이 피어오르고, 여자들까지도 공장에서 일을 하는 모습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근대도시의 모습에 매료되었다. ‘근대성’의 포로가 되어 간 것이다.
'내지시찰‘의 또 하나의 주요한 코스는 일본의 문화유적지들이었다. 천황이나 쇼군과 관련된 역사유적, 수없이 많은 신사와 사찰 등은 그들로 하여금 전혀 다른 문화적 충격을 갖게 하였다. 유교만을 신봉하고 불교를 탄압해온 조선사회와는 다른 불교와 신도의 문화를 일본은 갖고 있었다. 시찰단원들은 일본의 불교와 신도(神道) 문화를 찬양하고, 반면에 조선의 유교문화를 비판하였다. 그것은 일본의 불교와 신도가 종교적인 기능 외에도 국가주의를 고취하는 구실을 해 온 반면, 조선의 유교는 그러한 기능을 해오지 못했다고 보기 때문이었다. 또 그들은 일본의 문화유적, 특히 건축물의 우수성에 대해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유적을 잘 보존해왔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경탄했다. 나아가 그들은 명치유신 이전의 일본의 문화와 사회에 대해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즉 일본은 명치유신 이전에 이미 상당히 발전된 사회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조선 사람들의 통념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식민지 시기 조선인들의 일본 시찰은 결과적으로 일본과 조선의 현실을 비교하게 만들었고, 이에 따라 시찰을 다녀온 이들은 소감문에서 대체로 일본에 대한 선망과 조선에 대한 비판 내지는 반성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자기 분발의 다짐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자기 비하와 열등의식의 고착화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내지시찰’을 주선한 총독부로서는 성공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에는 기껏해야 교육과 산업의 진흥이나 우량농촌의 건설과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무조건적인 복종과 완전한 일본인으로의 동화 쪽으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느 쪽이든 총독부의 입장에서는 바람직한 것이었다. 따라서 총독부 고위관리들은 ‘내지시찰’ 사업이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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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시기 조선인들의 일본시찰 -1920년대 이후 이른바 '내지시찰단'을 중심으로'의 요약문
식민지시기 조선총독부 또는 관변 기관, 관변 언론들은 계획적으로 조선인 군수, 면장 등 관리들을 비롯하여, 유생, 도평의원, 면협의원, 경제인, 교사, 농촌지도자, 청년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내지시찰단’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일본에 보냈다. 그것은 조선의 지도층이 일본이라는 나라가 근대화를 통해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진 나라라는 것을 실감하게 하고, 또 일본의 전통 문화가 결코 만만치 않은 역사와 저력을 지녔다는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른바 '내지시찰'은 식민지 초기인 191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이때의 시찰단은 주로 친일적인 인물들이 중심이 된 것이었다. 하지만 3.1운동이 있은 이후인 1920년대에 들어 총독부 주도의 '내지시찰’은 본격적으로 시행되었으며, 이때부터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이 시찰단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30년대 이후에 들어서서는 농촌진흥운동 관계자, 교원들이 시찰단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그리고 1940년대 이후에는 ‘신경제’를 학습하기 위한 경제인들이 시찰단의 주체가 된 것으로 보인다.
총독부 주관의 ‘내지시찰’, 혹은 개인적인 일본 여행은 당시 조선인들에게 새로운 일본관을 만드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 이 시기 일본 시찰 여행에는 군수, 면직원 등 관리층을 비롯하여, 도평의원, 면협의원 등 관변의 공직자들, 그리고 교원, 청년, 유교개명회원, 금융조합 임원 및 직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관리들이나 관변의 인물들로서 총독부에 이미 협력하고 있거나 앞으로 협력할 가능성이 높은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주변에 영향력이 큰 인물들이기도 하였다.
내지시찰 여행의 코스는 시모노세키(下關) - 오사카(大阪) - 교토(京都) - 나라(奈良) - 도쿄(東京) - 닛코(日光) 코스가 일반적이었다. 이 코스 가운데 오사카는 근대적인 도시로서, 교토와 나라는 역사도시로서, 도쿄는 두 가지 모두의 의미에서, 그리고 닛코는 휴양지와 역사유적지로서 의미를 각각 갖고 있었다. 이밖에도 나고야(名古屋), 고베(神戶), 쿠레(吳)와 같은 산업 도시나 군사도시, 그리고 우량 농촌 마을이 시찰코스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일본 시찰을 다녀온 이들은 여러 관변 잡지나 어용신문에 시찰기를 썼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1) 공업의 발달, 2) 울창한 삼림, 3) 근대화된 도시, 4) 많은 신사와 사찰, 5) 정비된 경지와 잘사는 농촌, 6) 교육기관의 정비, 7) 편리한 교통, 여성노동 등을 주된 소감으로 꼽았다. 또 일본사람들은 근면하고, 일본의 고적이 잘 보존되어 왔다는 것도 그들의 소감에 들어 있었다.
‘내지시찰’애서 시찰단이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일본의 대도시들이 보여주고 있던 놀랄만한 ‘근대성’이었다. 그들은 특히 도쿄(東京), 오사카(大阪) 등 대도시들은 이미 ‘모던 도시’로서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관청가와 번화가의 고층 빌딩, 백화점의 각종 현대적 시설, 대도시의 야경과 이를 구경나온 인파 등은 아직 모던 도시를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던 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철도와 전차, 지하철과 같은 편리한 교통시설과 정비된 도로 등도 그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또 대도시뿐만 아니라 소도시까지도 많은 공장들이 들어서 굴뚝에서는 매연이 피어오르고, 여자들까지도 공장에서 일을 하는 모습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근대도시의 모습에 매료되었다. ‘근대성’의 포로가 되어 간 것이다.
'내지시찰‘의 또 하나의 주요한 코스는 일본의 문화유적지들이었다. 천황이나 쇼군과 관련된 역사유적, 수없이 많은 신사와 사찰 등은 그들로 하여금 전혀 다른 문화적 충격을 갖게 하였다. 유교만을 신봉하고 불교를 탄압해온 조선사회와는 다른 불교와 신도의 문화를 일본은 갖고 있었다. 시찰단원들은 일본의 불교와 신도(神道) 문화를 찬양하고, 반면에 조선의 유교문화를 비판하였다. 그것은 일본의 불교와 신도가 종교적인 기능 외에도 국가주의를 고취하는 구실을 해 온 반면, 조선의 유교는 그러한 기능을 해오지 못했다고 보기 때문이었다. 또 그들은 일본의 문화유적, 특히 건축물의 우수성에 대해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유적을 잘 보존해왔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경탄했다. 나아가 그들은 명치유신 이전의 일본의 문화와 사회에 대해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즉 일본은 명치유신 이전에 이미 상당히 발전된 사회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조선 사람들의 통념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식민지 시기 조선인들의 일본 시찰은 결과적으로 일본과 조선의 현실을 비교하게 만들었고, 이에 따라 시찰을 다녀온 이들은 소감문에서 대체로 일본에 대한 선망과 조선에 대한 비판 내지는 반성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자기 분발의 다짐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자기 비하와 열등의식의 고착화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내지시찰’을 주선한 총독부로서는 성공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에는 기껏해야 교육과 산업의 진흥이나 우량농촌의 건설과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무조건적인 복종과 완전한 일본인으로의 동화 쪽으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느 쪽이든 총독부의 입장에서는 바람직한 것이었다. 따라서 총독부 고위관리들은 ‘내지시찰’ 사업이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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