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22

박찬승 - 요즘 일본으로 가는 '시찰단' 이야기를 들으니, 식민지시기의 이른바 '내지시찰단' 생각이 난다.... | Facebook

박찬승 - 요즘 일본으로 가는 '시찰단' 이야기를 들으니, 식민지시기의 이른바 '내지시찰단' 생각이 난다.... | Facebook

요즘 일본으로 가는 '시찰단' 이야기를 들으니, 식민지시기의 이른바 '내지시찰단' 생각이 난다. 2006년도에 이에 관한 논문을 하나 써서 발표한 적이 있었다. 내가 발표한 논문은 "식민지시기 조선인들의 일본시찰 -1920년대 이후 이른바 '내지시찰단'을 중심으로'-"로 <지방사와 지방문화> 9권 1호(2006.5. )에 실었었다. 그 내용은 대체로 아래 요약문과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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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시기 조선인들의 일본시찰 -1920년대 이후 이른바 '내지시찰단'을 중심으로'의 요약문
식민지시기 조선총독부 또는 관변 기관, 관변 언론들은 계획적으로 조선인 군수, 면장 등 관리들을 비롯하여, 유생, 도평의원, 면협의원, 경제인, 교사, 농촌지도자, 청년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내지시찰단’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일본에 보냈다. 그것은 조선의 지도층이 일본이라는 나라가 근대화를 통해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진 나라라는 것을 실감하게 하고, 또 일본의 전통 문화가 결코 만만치 않은 역사와 저력을 지녔다는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른바 '내지시찰'은 식민지 초기인 191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이때의 시찰단은 주로 친일적인 인물들이 중심이 된 것이었다. 하지만 3.1운동이 있은 이후인 1920년대에 들어 총독부 주도의 '내지시찰’은 본격적으로 시행되었으며, 이때부터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이 시찰단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30년대 이후에 들어서서는 농촌진흥운동 관계자, 교원들이 시찰단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그리고 1940년대 이후에는 ‘신경제’를 학습하기 위한 경제인들이 시찰단의 주체가 된 것으로 보인다.
총독부 주관의 ‘내지시찰’, 혹은 개인적인 일본 여행은 당시 조선인들에게 새로운 일본관을 만드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 이 시기 일본 시찰 여행에는 군수, 면직원 등 관리층을 비롯하여, 도평의원, 면협의원 등 관변의 공직자들, 그리고 교원, 청년, 유교개명회원, 금융조합 임원 및 직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관리들이나 관변의 인물들로서 총독부에 이미 협력하고 있거나 앞으로 협력할 가능성이 높은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주변에 영향력이 큰 인물들이기도 하였다.
내지시찰 여행의 코스는 시모노세키(下關) - 오사카(大阪) - 교토(京都) - 나라(奈良) - 도쿄(東京) - 닛코(日光) 코스가 일반적이었다. 이 코스 가운데 오사카는 근대적인 도시로서, 교토와 나라는 역사도시로서, 도쿄는 두 가지 모두의 의미에서, 그리고 닛코는 휴양지와 역사유적지로서 의미를 각각 갖고 있었다. 이밖에도 나고야(名古屋), 고베(神戶), 쿠레(吳)와 같은 산업 도시나 군사도시, 그리고 우량 농촌 마을이 시찰코스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일본 시찰을 다녀온 이들은 여러 관변 잡지나 어용신문에 시찰기를 썼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1) 공업의 발달, 2) 울창한 삼림, 3) 근대화된 도시, 4) 많은 신사와 사찰, 5) 정비된 경지와 잘사는 농촌, 6) 교육기관의 정비, 7) 편리한 교통, 여성노동 등을 주된 소감으로 꼽았다. 또 일본사람들은 근면하고, 일본의 고적이 잘 보존되어 왔다는 것도 그들의 소감에 들어 있었다.
‘내지시찰’애서 시찰단이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일본의 대도시들이 보여주고 있던 놀랄만한 ‘근대성’이었다. 그들은 특히 도쿄(東京), 오사카(大阪) 등 대도시들은 이미 ‘모던 도시’로서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관청가와 번화가의 고층 빌딩, 백화점의 각종 현대적 시설, 대도시의 야경과 이를 구경나온 인파 등은 아직 모던 도시를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던 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철도와 전차, 지하철과 같은 편리한 교통시설과 정비된 도로 등도 그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또 대도시뿐만 아니라 소도시까지도 많은 공장들이 들어서 굴뚝에서는 매연이 피어오르고, 여자들까지도 공장에서 일을 하는 모습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근대도시의 모습에 매료되었다. ‘근대성’의 포로가 되어 간 것이다.
'내지시찰‘의 또 하나의 주요한 코스는 일본의 문화유적지들이었다. 천황이나 쇼군과 관련된 역사유적, 수없이 많은 신사와 사찰 등은 그들로 하여금 전혀 다른 문화적 충격을 갖게 하였다. 유교만을 신봉하고 불교를 탄압해온 조선사회와는 다른 불교와 신도의 문화를 일본은 갖고 있었다. 시찰단원들은 일본의 불교와 신도(神道) 문화를 찬양하고, 반면에 조선의 유교문화를 비판하였다. 그것은 일본의 불교와 신도가 종교적인 기능 외에도 국가주의를 고취하는 구실을 해 온 반면, 조선의 유교는 그러한 기능을 해오지 못했다고 보기 때문이었다. 또 그들은 일본의 문화유적, 특히 건축물의 우수성에 대해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유적을 잘 보존해왔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경탄했다. 나아가 그들은 명치유신 이전의 일본의 문화와 사회에 대해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즉 일본은 명치유신 이전에 이미 상당히 발전된 사회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조선 사람들의 통념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식민지 시기 조선인들의 일본 시찰은 결과적으로 일본과 조선의 현실을 비교하게 만들었고, 이에 따라 시찰을 다녀온 이들은 소감문에서 대체로 일본에 대한 선망과 조선에 대한 비판 내지는 반성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자기 분발의 다짐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자기 비하와 열등의식의 고착화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내지시찰’을 주선한 총독부로서는 성공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에는 기껏해야 교육과 산업의 진흥이나 우량농촌의 건설과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무조건적인 복종과 완전한 일본인으로의 동화 쪽으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느 쪽이든 총독부의 입장에서는 바람직한 것이었다. 따라서 총독부 고위관리들은 ‘내지시찰’ 사업이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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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g-Deuk Oak, 이형식 and 77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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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un-sun Bae
    뼛속까지 친일파를 만드는 수단이었군요...
  • 이종일
    시찰단도 그렇고 원폭피해자 방문도 그렇고 모두 이기적인 일본의 사기놀음에 놀아나는 꼴이지요.
  • Constantin Ivanov
    문화재에 대해 알아가다 보면 원본은 온데간데 없고 후대에 국가주의 상징으로서 아름답게 덫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폐허되고 남은 유적이어도 그 자체 그대로 두어야 진실된 역사를 알아갈 수 있지요. 그래서 그런지 내지시찰 문화재 탐방 파트를 보면 당시 일본제국 정부의 정치색이 대단히 짙었던 것 같습니다. 마치 요즘 인스타그램스러운 짓을 80년 전 일본이 했네요. 거짓된 걸 전시하며 상대적 박탈감 및 괜한 열등감 안기기 원조인듯 합니다.
정말 이렇게 다시 식민시기의 역사가 재현되다니 윤정부가 정신이 올바른가 묻고싶습니다. 돌아온 후 시찰단의 반응이 그때처럼은 아니겠지만 이런 행태가 재현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비애를 느끼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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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반일감정] 일본을 보는 삐뚤어진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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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의 <식민지시기의 내지 시찰단> 이야기를 들으니 호주에서 한국에 가는 <시찰단> 이야기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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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주에서는 <한국 시찰단>이라면 한국 정부가 여비와 체재비를 내고 4일 정도 호주인들에게 한국을 소개하는 프로그람이 있었다. 아마 지금도 있을 것이다 나와 아내는 오래 전 (약 20년 전?)에 각 각 따로 이런 프로그람을 경험했다. 나는 호주의 아시아학 학자로서 한국에 관심이 있는 학자들 그룹에 끼어갔다. 아내는 호주인 한국어 교사로서 한국어 교사 연수 프로그람으로 갔다. 우리 둘은 한국인 교포로 간 것이 아니라 호주인으로 간 것이었다. 그 프로그람은 한국에 대한 소개이기도 하고, 교육이기도 하다. 여러 분야의 권위자가 한국에 대하여 영어로 강의를 한다. 그리고 전국을 시찰을 하는데, 관광같은 문화적 민속적 시찰도 있지, 산업단지 같은 곳의 시찰도 있었다. 외국인에게 한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잘 짜여 있는 프로그람이었고,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나나 아내나 한국 정부가 상당히 돈을 써 가며, 노력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우리 집 식구는 아니지만 또 한명의 호주인의 <한국 시찰>에 대하여 말할 꺼리가 있다. 호주에서 자란 한국계 입양아이며 1990년대에 아들의 고등학교 친구에 대해서 이다. <리>라고 불리우는 이 친구는 고등학교 때 부모와 관계가 나빠저서 집을 나왔다. 얼마간 학교도 그만두고 이 친구, 저 친구들 집에서 몇일 씩 살다가 결국 물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빈집에 살기도 했다. 우리 집에서도 일 주일 정도 살았던 것 같은데, 우리 집에 살 때, 나는 <리>에게 꼭 고등학교를 마치라고 말해주었다. 그 후로 <리>는 중국 식당에서 풀타임으로 일을 하며 고등학교를 마첬다. 또 계속 일을 계속하며 대학도 마첬다. 물론 정부에서 나오는 돈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공은 바이오 테크놀로지 였다. 대학을 졸업하는 해에는 내가 마침 한국 정부의 <해외 입양아 연수> 프로그람을 알게 되어 그에게 소개해 주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으나, 한달간 정도의 프로그람인데 숙박비나 프로그람비는 무료이고, 여비는 자기 부담이었다. 나는 한국에 관심이 없는 <리>에게 이 프로그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다. 2000년 정도였으니 여비가 호주불 천불 한국돈 백만원 정도였던 것 같다. 이 만한 돈은 <리>에게는 너무 큰 돈이었다. 그래서 <리>에게는 우리가 돈을 낼터이니 가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한국에 관심이 없지만 돈이 들지 않으니 가본 적이 없는 한국을 한번 이런 프로그람을 통해 경험해보면 어떻겠느냐 물었다.

- 입양아들 사이에는 한국에 관심이 있는 아이들도 있고 관심이 없는 아이들도 있는데, 관심이 없는 아이들이 많은 것 같다. 관심이 있다면 친엄마를 만나보고 싶은데서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리>의 경우는 친엄마를 찾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자기를 버린 엄마를 왜 찾느냐는 태도였다. 그러니 엄마의 나라 한국에도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면서 직장을 찾기 전에 <돈이 안든다니까> 한번 가 볼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태도였다.

- 그렇게 해서 <리>는 해외 입양아 <한국 체험 견수> 프로그람을 마치고 호주로 돌아왔다. 이 프로그람이 성공적이었던 것은 한국에 관심이 없다던 <리>가 그 다음해에 한국에 다시 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혼자 결정한 것인데 원어민 영어교사 일을 하러 한국에 가기로 한 것이다. 보통은 일이년 하고 그만두는데, <리>는 영어 학교에서 승진을 하여 한국에 더 오래 있게 되었다. 영어를 가르치는 일에서 외국서 영어교사를 불러오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한국어를 배워가지고 서울 대학교에서 바이오 테크놀러지 대학원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대학원을 한다면 호주에서 하지 왜 한국서 할까? 그렇게 생각했다. .그 동안 <리>에게는 한국인 걸프렌드가 생겨서 한국에 더 머믈 이유가 대학원 공부보다 더 중요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공부해서 박사학위까지 받았고, 그 여성과 결혼을 했다. 박사학위를 끝내고는 한국의 대기업에 취직을 해서 해외와의 바이오 테크놀러지 비지네스를 담당했다. 오년 정도 그렇게 일하고는 가족을 대리고 호주로 돌아왔다. 호주에서는 한국 회사의 분점을 맏았다. 지금은 성장하는 회사의 사장이다.

- <한국 시찰단>같은 한국 정부의 프로그람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 일어난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일본>이라고 하면 빼딱한 눈으로 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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