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27

[Sejin님의 서재] 이완용 평전, 윤덕한 지음, 김윤희 지음

[Sejin님의 서재] "책과 통하는 블로그, 알라딘 서재!"


완용 평전- 한때의 애국자, 만고의 매국노, 개정판
윤덕한 지음 / 길(도서출판) / 2012년 8월

[중고] 이완용 평전- 극단의 시대, 합리성에 포획된 근대적 인간
김윤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5월

이완용 평전- 애국과 매국의 두 얼굴
윤덕한 지음 / 중심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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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평전 - 한때의 애국자, 만고의 매국노, 개정판 
윤덕한 (지은이)길(도서출판)2012-08-06초판출간 1999년







































책소개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로 알려진 이완용. 독립협회와 매국노 이완용이 깊은 관계가 있었고, 더군다나 그 관계가 돈독한 차원을 넘어 창립총회 당일 최대의 후원기금을 낸 사람이 이완용이고 기관지인 '독립신문'에서 그에 관한 기사가 우호적인 차원을 넘어 때때로 비호와 찬양까지 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저자 역시 이 책을 쓰기 위해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런 사실들에 맞닥뜨려서는 당황했다고 서문에서 밝히면서, 글의 실마리를 독립협회와 이완용의 관계로부터 풀어나가고 있다. 저자가 서문에서 "민족 반역자의 매국적 삶을 역사에 고발함으로써 후세에 교훈으로 삼겠다는 당초의 집필 의도는 완전히 빗나간 것 같았고", "고발은커녕 그의 알려지지 않은 애국활동을 들춰냄으로써 매국행위를 희석시킨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부분은 그런 점에서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더군다나 학부대신으로서 이 땅에 의무교육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해 법제화한 '소학교령'을 공포(1895)한 인물도 이완용이었다는 사실까지 접하게 되면 과연 그를 매국노로만 몰아세울 수 있을까라는 의문까지 들 정도이다.

이런 의문으로부터 저자가 이 책을 써내려가는 가장 큰 취지는 바로 '있는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로부터 이완용의 본모습을 들추어내고, 그가 어떻게 한때는 대단한 애국자였다가 점차 만고의 매국노 소리를 듣는 역적으로 표변해가는지의 비극적 과정과 변신의 논리를 밝히는 데 있다.

아울러 저자는 단순히 이완용 한 개인에 의해 우리나라가 구한말의 격동의 세계사 속에서 나라를 잃었다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비록 대한제국이 일제의 침략에 의해 망했지만 왕실(특히 고종과 민비, 대원군 등)과 지배집단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스스로 외세의 침략을 불러들인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었음을 강조한다.


목차


개정판을 내면서 5
책머리에 8

1. 문제의 제기, 『독립신문』의 일관된 이완용 찬양과 비호를 어떻게 볼 것인가
‘대한의 몇 째 안 가는 재상’ 17
2. 보잘것없는 양반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다
우봉 이씨 시조묘를 찾아 개축한 이완용 25
3. 첫 번째 인생의 전기, 명문대가로의 입양
양부 이호준은 대원군의 친구이자 사돈 31
시문과 서예를 즐긴 전형적 조선 선비의 풍모 38
벼슬길 시작부터 세자를 가르친 온건 개화파 46
4. 두 번째 인생의 전기, 신식 교육과의 만남
이완용은 세계화 논리의 증조 할아버지 57
5. 초대 주미 공사관원으로 워싱턴에 부임하다
청국의 간섭과 험난한 부임 과정 69
서양인 남녀 승객들의 망측한 무도회 80
클리블랜드 미국 대통령을 만나다 84
서구 사회를 가장 깊이 있게 관찰한 친미파 원조 89
6. 알렌의 지원으로 30대에 학부대신이 되다
주일 전권공사 부임 거부 99
정동파의 대표로 일본세력 배격에 앞장서다 111
학부대신으로서 의무교육제도를 도입하다 116
7. 아관파천을 주도하다
대원군의 민비살해와 미국 공사관 피신 127
파천 당일 대신 감투를 세 개나 쓰다 140
8. 외부대신으로서 무더기로 외국에 이권을 넘겨주다
경인철도 부설권 허가와 뇌물수수 혐의 153
9.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이끌다
독립협회 위원장에 선출되다 165
외부대신직을 걸고 러시아의 군사교관 파견을 거부하다 174
만민공동회 개최 다음날 전북 관찰사로 쫓겨가다 182
공금 유용혐의로 전북 관찰사에서 해임당하다 192
10. 매국의 길로 들어서다
8년 만의 학부대신 재입각 197
을사조약에 찬성하다 203
엄귀비 방으로 뛰어든 한규설 212
보호조약의 최고 책임자는 고종이다 222
11. 이토를 대신해 고종을 퇴위시키다
이토의 추천으로 총리대신이 되다 229
“황실과 나라를 지키는 길은 양위밖에 없다” 237
12. 이토 암살에 넋을 잃고
황태자의 소사(少師)가 되다 255
‘며느리와 사통했다’ 삼척동자도 노래 불러 263
서울시 일원에 사흘간 가무음곡 금지명령 270
13. 이재명 의사의 칼을 맞다
일진회의 합방 주장에 반대하다 275
대한의원 입원실에서 맞은 ‘경술년’ 새해 아침 280
14. 이름뿐인 나라마저 일제에 넘겨주다
“그물 속으로 물고기가 뛰어 들어왔다” 287
15. 총독정치에 적극 협력하다
일본 천황과 조선 왕실에 똑같이 충성을 바치다 297
3·1운동과 동족을 향한 협박 305
16. 학교비 납부 거부 소동과 여론의 집중 비난
조선 귀족 중 민영휘 다음의 두 번째 재산가 317
17. 화려한 장례식, 고종 국장 이후 최대의 장례 행렬
생전의 영광이 죽어서도 이어지다? 327
18. 이완용만 매국노인가
비열한 책임전가와 역사의 이지메 337

이완용 관련 연표 343
참고문헌 347
찾아보기 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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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윤덕한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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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대전고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으며, 1972년 경향신문에 제13기 견습기자로 입사하여 사회부ㆍ경제부ㆍ외신부 등에서 근무했다. 1980년 전두환 군부의 언론검열과 광주학살 왜곡보도에 항의, 신문제작 거부운동을 벌이다 해직되었으며, 이후 민주언론운동협의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88년 경향신문에 복직되어 국제부 차장, 사회부 차장, 정치2부장, 심의위원, 기획취재부장 등을 역임한 후 1995년 퇴사하였다. 1999년 도서출판 중심을 설립해 2007년까지 운영한 바 있으며, 2012년 현재는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친일인명사전』 집필위원으로 참가했다. 논문으로 「북한의 핵무기개발 의혹에 대한 국내언론 보도태도와 그것이 남북관계에 미친 영향」이 있으며, 저서로 『소설 재벌신문』(움직이는 책, 1995), 『한국언론 바로보기 100년』(공저, 다섯수레, 2000)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이완용 평전>,<한국언론 바로보기 100년> … 총 4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길(도서출판)
출판사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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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아리스토텔레스 선집>,<바다 밑에서>,<이해사회학>등 총 171종
대표분야 : 철학 일반 12위 (브랜드 지수 53,267점), 고전 30위 (브랜드 지수 59,593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한때 애국자로 독립협회 활동에 열성적이었던 이완용, 그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일제치하 독립협회의 활동과 역할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청일전쟁의 결과, 명목상 조선이 자주독립 국가가 되었으니 이를 세계만방에 알리고 후손에게 전하기 위해 과거 청나라 사신을 맞던 치욕적인 자리에 독립기념물(그것이 바로 ‘독립문’이며 현판을 쓴 사람 역시 이완용이다)을 세우자는 취지에서 서재필의 주도 아래 만들어진 것이 독립협회였다. 그런데 독립협회와 ‘매국노’ 이완용이 깊은 관계가 있었고, 더군다나 그 관계가 돈독한 차원을 넘어 창립총회 당일 최대의 후원기금을 낸 사람이 이완용이고 기관지인 『독립신문』에서 그에 관한 기사가 우호적인 차원을 넘어 때때로 비호와 찬양까지 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저자 역시 이 책을 쓰기 위해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런 사실들에 맞닥뜨려서는 당황했다고 서문에서 밝히면서, 글의 실마리를 독립협회와 이완용의 관계로부터 풀어나가고 있다. 저자가 서문에서 “민족 반역자의 매국적 삶을 역사에 고발함으로써 후세에 교훈으로 삼겠다는 당초의 집필 의도는 완전히 빗나간 것 같았고”, “고발은커녕 그의 알려지지 않은 애국활동을 들춰냄으로써 매국행위를 희석시킨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부분은 그런 점에서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더군다나 학부대신으로서 이 땅에 의무교육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해 법제화한 ‘소학교령’을 공포(1895)한 인물도 이완용이었다는 사실까지 접하게 되면 과연 그를 매국노로만 몰아세울 수 있을까라는 의문까지 들 정도이다.
이런 의문으로부터 저자가 이 책을 써내려가는 가장 큰 취지는 바로 ‘있는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로부터 이완용의 본모습을 들추어내고, 그가 어떻게 한때는 대단한 애국자였다가 점차 만고의 매국노 소리를 듣는 역적으로 표변해가는지의 비극적 과정과 변신의 논리를 밝히는 데 있다. 아울러 저자는 단순히 이완용 한 개인에 의해 우리나라가 구한말의 격동의 세계사 속에서 나라를 잃었다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비록 대한제국이 일제의 침략에 의해 망했지만 왕실(특히 고종과 민비, 대원군 등)과 지배집단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스스로 외세의 침략을 불러들인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었음을 강조한다.

보잘 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출세가도를 달리며 친미, 친러, 친일파로 표변하면서 결국 나라를 팔아먹다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은 구한말 보잘것없는 양반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10세가 되던 해인 1867년 먼 친척이었던 이호준(李鎬俊)의 양자로 들어가면서부터 출세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당시 양부 이호준은 대원군과는 친구이자 사돈이기도 했다. 25세에 임오군란이 평정되고 충북 장호원에 피신해 있던 민비가 무사히 환궁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치러진 증광별시(增廣別試) 문과에 급제한 이완용은 4년 후인 1886년 규장각 대교(待敎)로 임명되면서부터 관직의 길에 들어선다. 그로부터 6개월 후에 이완용은 두 번째 인생의 전기를 맞이하는데, 그것이 바로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입학한 것이다. 조정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육영공원은 비록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9년만에 폐교하지만, 이것을 인연으로 이완용은 카멜레온적 인생의 변신과정의 첫 단추인 친미파로의 길을 걷게 된다. 즉 1887년 새로 개설된 미국 주재 조선 공사관의 참찬관(參贊官)으로 임명되어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고, 2년여의 미국 생활은 그에게 세계정세에 눈을 뜨게 한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완용의 조카 김명수가 남긴 『일당기사』(一堂紀事, 1927)에서 그가 “나의 지나온 바를 말한다면 최초 25세경에는 종래 조선인이 목적으로 삼았던 문과에 급제했다. 그런데 당시로부터 미국과의 교제가 점점 긴요해졌기 때문에 그때 신설된 육영공원에 입학하여 미국에 가게 되었다. 갑오경장 후 을미년에 이르러 아관파천 사건으로 러시아당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후 일러전쟁이 끝났을 때 여기에서 전환하여 현재의 일본파라는 칭호를 얻었다. 때에 따라 마땅한 것을 따를 뿐 달리 길이 없다. 무릇 천도(天道)에 춘하추동이 있어 이를 변역(變易)이라 하며 인사(人事)에 동서남북이 있어 이 또한 변역이라 한다. 천도와 인사가 때에 따라 변역하지 않으면 이는 실리를 잃어 끝내 성취하는 바가 없을 것이다”라고 한 점은, 이후 그의 인생행로의 전체 구도를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다. 즉 그는 시세(時勢)에 따라 친미파, 친러파, 친일파로 거듭났고, 특히 을사조약 이후부터는 친일파로서 정국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 결국 매국노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어떻게 보면 당시 조정을 이끌어가던 지배집단의 전형적인 기회주의적 속성을 대표하는 사람이 이완용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을사오적을 비롯해 당시 친일인사 대부분과 친미파였건 친러파였건 지도층 인사 대부분이 그러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물며 고종과 민비, 대원군조차 외세에 기대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려 했으니 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한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1896년 아관파천을 주도한 이완용은 을사조약을 맺는 1905년까지 친러파에서 차츰 친일파로 변모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매국의 길에 들어선다. 아관파천 직후 외부대신이 된 그는 경인철도 부설권 등 이권을 무더기로 외국에 넘겨주기 시작한 것이다. 아관파천 이후 이 땅에서 세력을 키워나간 러시아는 베베르와 스페예르 공사를 앞세워 노골적으로 조선을 지배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비록 아관파천을 주도한 이완용이었지만 수구파가 다시 득세하고 러시아가 원치 않던 고종 환궁을 주도하게 됨으로써, 그는 러시아로부터 미움을 사게 되고 결국 군사교관 파견을 거부하다가 외부대신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 무렵 이완용은 앞서 언급했듯이 독립협회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러시아의 침략정책(절영도 조차 요구와 한러은행 개설 등)과 군사교관, 재정고문 철수를 요구한 만민공동회 개최에도 적극적으로 임한다. 당시 러시아 공사 스페예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완용과 서재필의 결단에 의해 열리게 된 만민공동회에 대해 독립협회 연구로 유명한 신용하 명예교수(서울대, 사회학)는 그의 저서 『독립협회연구』(일조각, 2006)에서 1898년 3월 10일자 『윤치호영문일기』를 근거로 “이완용이 만민공동회 개최를 반대했다고”고 주장하고, 일부 연구자들도 『윤치호일기』를 인용해 이완용이 만민공동회 개최를 앞두고 당국의 압력을 의식해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저자에 의하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이 날짜의 영문 『윤치호일기』 어디에도 이런 내용은 없다는 사실이 본문 186~88쪽에 걸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아울러 당시 새롭게 부임한 러시아 공사 스페예르는 러시아의 영토와 세력 확장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던 팽창주의자며 제국주의자였는데, 그런 그에게 이완용은 군사교관 파견 거부 등 자신의 계획에 반대한 인물로 “그는(이완용)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사람 중에서 가장 나쁜 인간이다. 내가 이곳에 있는 동안 그는 어떤 벼슬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는 언제나 독립, 독립을 외치는 친미 그룹의 우두머리다. 나는 이 그룹을 없애버릴 것이니 두고 보라”고까지 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단국대 사학과 김원모 교수는 그가 번역한 『알렌의 일기』(단국대학교출판부, 2004)에서 이 발언을 미국공사 알렌이 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이는 명백한 오류임이 역시 저자의 자료조사에 의해 밝혀진다(본문 183쪽 참조).
그러나 기세등등하던 러시아는 삼국간섭(1895) 결과 일본이 청나라에 되돌려준 요동반도를 차지하여 부동항을 확보하게 되자, 1898년 갑자기 한반도에서 철수하였다. 친러 수구파가 득세한 이 시기에 이완용은 지방 관찰사에 밀려나 있었지만 그들이 정계에서 축출되자, 1905년 학부대신으로 재입각함으로써 다시금 중앙정계에 발을 들여놓고 주지의 사실처럼 본격적인 친일행각을 벌이게 된다. 1904~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더 이상 거칠 것 없이 한반도를 손아귀에 넣기 시작했으며, 결국 이완용을 비롯한 조정대신들은 현실순응적 태도로 나라를 팔아먹게 된다.

국내 연구자에 의해 이완용에 대해 잘못 알려진 역사적 사실을 사료에 근거에 바로잡다
이완용은 1894년의 갑오경장으로부터 시작해서 아관파천, 독립협회 활동, 을사조약, 정미7조약, 한일합방, 식민통치에 이르기까지 우리 근현대사의 중요 고비마다 관련되지 않은 곳이 없다. 시대사로서 이 시기를 다룬 역사서는 많지만 격동의 구한말 시기를, 그것도 애국자에서 매국노로 변절한 이완용을 중심으로 서술한 책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더군다나 개인 이완용에 초점을 맞춰 1999년 국내에서 최초로 『이완용 평전』을 펴낸 당시, 학계는 물론 일반 독자들로부터 많은 호응과 찬사를 받은바 있다. 10여 년 만에 개정판을 펴내는 이 책에서 저자는 상세한 주석과 그동안 잘못 알려진 역사적 사실(앞서 신용하 교수와 김원모 교수의 연구 사례)을 사료에 근거해 바로잡음으로써 좀 더 완성도를 높였다.
매국노로만 일방적으로 매도되는 이완용에 대해 저자는 역사적 사실과 사료에 근거해 그가 어떻게 애국자에서 매국노로 변절해갔는지를 밝혀내고 있다. 전형적인 조선 선비였던 그가 권력을 잡자 시세에 영합하며 국운을 좌지우지했던 점은 우리가 역사적 교훈으로 반드시 되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단 저자의 말처럼 망국에 이르는 과정에서 결코 이완용만이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망국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민비나 대원군이 역사와 민족 앞에 저지른 죄과 역시 이완용의 그것에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고 무거웠고, 고급관료들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망국과 매국의 모든 책임을 이완용 한 사람에게만 묻는 것은 또 다른 역사의 이지메이며 그를 속죄양으로 삼은 대다수 매국노들의 비열한 책임전가라는 평가를 면치 못할 것이다. 접기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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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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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덮는 순간 박수를 치고싶었다. 역사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면 망한 역사를 반복할수 있다. 이완용만이 매국노가 아니었다, 지금도 매국노들이 판을 치고 있다. 구한말의 정세와 대원군과 민비, 고종 등 지배집단의 실상을 보여주는 아주 재밌는 역사책!
고민 2014-03-14 공감 (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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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정말 꼭 읽어봐야 할 책이다.
인디안소년 2013-04-18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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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평전이라기보다는 평론집 느낌. 좀 더 이완용과 그의 시대에 집중할 필요가 있음. 특히 이완용이 상을 치르고 본격 매국적 행동을 시작했을 때에 그 급격한 행보의 변화에 대한 아무런 설명이 없다.
개선비 2015-08-20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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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룽한 책이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긴장하며 속으론 통탄하며 읽었다. 망국의 시기를 이해하는데 이 책보다 더 좋은 게 있을까 싶다. 모두가 읽었으면 한다.
2022-08-10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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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서
김재민 2021-03-20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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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의 본질



만고의 매국노




매국노는 1858년 6월 7일에 태어났다. 1905년의 을사조약에서 1910년의 한일합방까지, 그야말로 일사천리 매국의 길을 달린 남자의 이름은 이완용이다.




그런데 평전이라니?




읽는 내내 주변인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오해의 대부분은 평전의 말뜻을 잘못 이해한데서 온 것이리라. 평전이란 비평을 곁들인 전기란 뜻이다. 그러니 그 평가의 대상을 어찌 훌륭한 사람들로만 한정하겠는가? 악인의 길을 되짚어 보는 건 선인의 인생을 곰곰 들여다보는 것 만큼이나 많은 가르침을 준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악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이다. 악이 동작하고, 그 치부를 숨기고, 역사와 한 몸이 되 영원히 지속하는 법. 악의 메커니즘을 파악하지 못하는 민족은 동일한 악인에 의한 동일한 역사를 반복한다.







매국의 자격




우리는 흔히 매국노가 나라를 팔았기 때문에 권력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매국노는 권력이 있기 때문에 나라를 파는 것이다. 이완용은 대한제국 황제가(고종) 총애에 총애를 거듭하던 '대신'이었다. 국가가 총애하는 사람, 국가가 임명한 사람, 국민이 선택한 사람일 수록 더 크게 눈을 뜨고 감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완용은 총애의 권력을 업고 나라를 팔았다.




이완용은 원래 반일, 친미파였지만 일본이 청나라와 러시아를 물리치고 미국 정부가 조선의 내정에 관여하지 않기로 천명하자(당시 극도로 친일적이던 미국 정부는 일본에 조선을 주고 필리핀을 가져갔다) 일본으로 돌아선 인물이었다. 당시 이완용의 논리는 차가웠다. 동북아 정세의 흐름상 '대세는 일본'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대세순응은 냉정한 사실 판단과 현실주의라는 이름으로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는가? 동일한 마음가짐이 난세에는 매국의 자격으로 평시에는 성공의 조건으로 나타나는 섬뜩함. 누구든 죄 없는 자가 돌로 쳐야 할 텐데 우리 중 누가 죄 없는 자인가?




순응하는 자가 대신이 된다는 점에서 얼마전 낙마한 문창극 총리후보자와 이완용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문창극 후보자는 우리가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된 데에 '신의 뜻'이 있다고 간증했다. 그는 우리가 말씀에 순응해 그 뜻을 헤아리길 바랐다. 이완용도 조선인이 한일합방의 숙명성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잘 살 방법을 찾길 바랐을 것이다. 대신의 마음이란, 이처럼 한결같은 법이다.







매국의 전략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조선은 친청파, 친러파, 친일파, 친미파가 서로 권력을 잡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인 각축장이었다. 고려 범위를 정치인으로 한정한다면 조선에서 외세의 힘을 빌리지 않고 독립을 꿈꿨던 인물은 전무했다. 그들은 모두 나라를 팔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이완용만이 매국노가 되었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이완용이 지지한 일본이 승리했기 때문이다. 승리는 필연적으로 패배를 낳는 데 아이러니한 건 이 패배가 똑같이 나라를 팔 준비가 되 있던 친청, 친러, 친미 매국노들은 순식간에 애국자로 만든다는 것이다. 일본의 한일합방을 저지하기 위해 - 외세의 힘을 빌려 - 있는 힘을 다한 애국자로.




패배한 매국노의 전략은 매국이 아니라 친일에 방점을 찍는 것이다. 전략은 유례없이 성공해 국민의 분노가 매국이 아닌 친일로 향한다. 분노의 불길은 언제나 사람의 눈을 멀게한다. 눈먼 자들이 매국노를 감싸안는다.





친일의 전략







일본의 패망 이후 친일파들이 보인 전략은 친일 이외의 매국노들이 보여준 자기 숨기기 전략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친일파들의 전략은 가장 뜯어 먹을 게 많은 고기를 던져주는 것이었다. 이완용이라는 거대한 고기를. 눈먼 개떼들은 던져주는 고기에 정신이 팔려 자기 뒤로 도망치는 도둑놈들을 놓쳐버린다.




매국노 이완용이 묘까지 파헤쳐지며 부관참시를 당할 때 일본으로 부터 자작 작위를 받은 민영휘는 휘문 학교를 세워 훌륭한 교육인으로 거듭났고 을사조약에 찬성한 법무대신 이하영의 장손자는 '해방 독립된 대한민국'에서 육군 참모총장과 국방장관을 지냈으며(이종찬) 한일합방의 공로로 자작이 된 궁내부대신 민병석의 아들 민복기는 대한민국의 대법원장을 두 차례나 지냈다. 이 뿐인가? 일본군에 입대하기 위해 조국에(일본)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하겠다는 혈서를 쓴, 만주군관학교출신 소위 다카기 마사오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어 16년간 독재를 하지 않았는가?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기에 어느 매국노는 죽은 뒤 묘까지 파헤쳐지며 멸시를 당하는 데 또 다른 매국노들은 대대손손 부귀화 영화를 누리는 걸까?







평전의 전략




바라건대 이 책을 친일파 이완용의 매국 행위를 정당화하는 책으로 보지 않았으면 한다. <이완용 평전>은 한 명의 매국노를 무소불위한 절대악으로 만들어 역사를 왜곡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 우리는 망국의 수치를 벗기 위해 혹은 그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죄과를 오직 한 사람에게만 돌려왔다. 그렇게 우리는 죄 없는 사람이 됐다. 하지만 명심하라. 역사의 왜곡은 타국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더 치명적인 역사 왜곡은 언제나 자국민이 이룬다.




1910년의 대한 제국은(한일합방의 해) 나라는 아랑곳 없이 끔찍한 권력투쟁을 벌인 대원군과 민비(민비 시해는 대원군의 주도로 이뤄졌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 각종 이권을 팔아 넘겼던 매국노, 오직 자기 목숨을 연명하는 데만 관심을 가진 무능력한 황제, 그리고 매국의 가면을 파악하지 못한 어리석은 국민, 이 모두가 만들어낸 악몽이다. 이 사실을 직시하지 않는 한 우리는 영원히 망국의 수치를 지울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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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깨짱 2014-08-03 공감(20) 댓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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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이완용 평전

이 책은 '조선'을 일본에 팔아버린 매국노라 평가되는 이완용의 평전이다. 흔히 평전은 후대 사람들이 본받아야하거나 기억해야 하는 사람을 다루기 마련이다. 저자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이완용'을 평전의 형식을 빌려 다룬다. 책머리에서 "'엉뚱한 이완용 상'에 욕설을 퍼붓는 것이 아니라 한때 대단히 애국적이었던 인물이 왜, 어떻게 해서 만고의 매국노로 전락하게 되었는가 하는 그 비극적 과정과 변신의 논리를 밝히는 데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한 대답을 찾는 데 성공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책은 그리 만족스러운 대답을 하지 못했다.

평전답게 '이완용 평전'은 이완용의 소년 시절부터 와석종신 할때까지의 삶을 세세하게 추적한다. 이완용의 삶을 크게 세 부분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번째(1858~1882)는 별볼일 없는 양반의 아들로 태어나 대원군계열에 속하는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오르는 유년시절, 두 번째(1883~1905)는 주미 대리공사를 지내고 아관파천, 독립협회를 주도하며 고종의 신임을 받던 고위 관료시절, 마지막 세 번째(1905~1926)는 을사조약에 찬성하고, 정미조약, 한일합방에 합의하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일본 천황으로부터 백작의 작위를 받으면서 호의호식하는 친일파 시절로 나뉜다.

일반적으로 교과서에서 접했듯이 '이완용'만이 악인이며 을사조약에 체결되는 과정에서 이완용이 큰 역할을 했다는 데에 저자는 의문을 제기한다. 이 통설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맞는 말은 아니라는 거다. 이완용 혼자의 힘으로 과연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는가? 한국이 식민지화된 탓을 이완용의 매국노 행위로 모두 돌린다면 역사에서 배울 것이 없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강화도 조약부터 갑신정변, 임오군란, 갑오개혁,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 모든 사건의 중심에는 항상 외세가 개입했고, 이 외세의 힘을 이용해서 자신의 잇속을 챙기려는 부류들이 있었다. 수많은 신하뿐만 아니라 대원군, 민씨 일가도 마찬가지이며 비극의 주인공처럼 여겨지는 고종마저도 외세의 힘에 크게 의존했다. 이완용도 그저 많고 많은 그 부류들의 하나였을 뿐이라는 점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꽤 소박한 생활을 영위했던 그는 아관파천을 주도할 정도로 친러배일적인 성향을 지녔다. 또한 매국노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군사교관을 파견해 조선 군대를 장악하려 했던 러시아의 시도도 거부할만큼 외국에 이권을 넘기는 것을 강력하게 거부했다. 또한 독립협회의 회장으로 선출되어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의외의 모습도 가지고 있다. 19세기 말 조선은 외세의 힘에 크게 휘둘렸고, 이 외세의 힘들을 어떻게든 자신의 이권다툼에 활용하려는 시도들이 많았고 오히려 이완용은 양반이었다는 소리다.

이 책은 각 인물들 간의 관계나 사료를 바탕으로 이완용의 삶을 복원해 가면 차근차근 추적해간다. 또한 단순히 이완용 삶의 서술에서 그치지 않고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해 나가는 과정에서의 동아시아 국제 정세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글머리에서 제기했던 질문(평범한 관료라고 볼 수 있었던 '이완용'이 어떻게 매국노로 전락하게 되었는가?)에 답을 하는데 실패했다고 본다. 아관파천을 주도하고 외국에 이권을 넘기는 데 거부의사를 밝히기 까지 했던 이완용이 을사조약에 왜 갑자기 찬성으로 돌아섰고, 그 이후에도 꾸준히 친일에 우호적인 행위들을 했을까?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기 때문에? 아니면 기회주의적인 기질을 발휘해 갑자기 사람이 돌변하여서? 국제정세상 1905년 가쓰라-태프트조약(일제의 한국 강점을 미국이 지지해주는 대가로 일제는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인정), 포츠머스 조약 등이 맺어졌기 때문에 자주권의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 저자는 이에 대해 명확한 대답을 하고 있지 않았다. 동양평화론의 입장을 보인다든가, 국제정세 상 전략적 판단이었다든가라는 식의 설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 점이 안타까웠다.

조선의 외교권을 넘겨주는 을사조약 당시, 사실 일본을 제외한 어떤 나라도 조선에게 신경써줄 여유가 있지 않았다. 여태껏 외세의 힘으로 또다른 외세를 몰아냈던 조선의 최후였다. 식민사관의 자학적 태도처럼 우리 자신을 너무 자학하는 것도 문제지만, 우리는 그때 당시 너무 많은 자주독립 기회들을 놓쳐버렸었다. 어쩌면 을사조약은 외교권을 뺏기게 된 사건의 시작이 아니라 그간 이뤄져왔던 외세의 힘을 빌려 자국의 지배권을 획득하려했던 지배층 탐욕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완용을 옹호하지 않는다. 을사조약도 물론 큰 사건이지만, 그건 큰 흐름 속의 일부분이었을 뿐이다.

저자는 주한 미군 문제를 자주 언급하며 이완용 살았던 시대와 비교한다. 물론 그 시대와 지금 시대의 상황은 다르다. 그러나 언제나 공짜는 없다. 더군다나 외교 관계에선 더욱 없다. 외세의 힘을 빌린만큼 그에 대한 대가는 언제나 따르기 마련이다. 변하지 않는 건, 자신은 온전한 자신의 힘으로 지켜야 당당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손 안대고 코를 푸는 사람은 영원히 혼자서 코를 풀 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군대가 힘이 현실적으로 약하니, 미국의 힘을 빌려야 한다? 현실적으로 약하면 내가 강해질 법을 찾는 게 '현실적'으로 우선이다. 그래야만 당당해질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외교 관계를 끊자는 소리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힘이 강해질수있도록 외교적 노력도 당연히 필요하다. 다만 주권 국가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아야 비로소 우리가 우리 스스로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P.S. 문체자체는 기자답게 글을 잘 읽히게 쓴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은 고유명사가 자주 나와고, 글의 흐름이 좀 어수선해서 이해하는 데 좀 어려움이 있었다. 게다가 감정적인 문구도 여럿 보인다. 평전에 감정이 들어가지 말아야할 이유는 없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객관적 시선을 유지해야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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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평전 - 극단의 시대, 합리성에 포획된 근대적 인간 | 한겨레역사인물평전
김윤희 (지은이)한겨레출판2011-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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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양장본
316쪽

책소개
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와 한겨레출판이 공동 기획한 '한겨레역사인물평전'. '한겨레역사인물평전'은 현재 우리의 삶이 과거와 유리되어 있지 않다는 전제하에 우리 과거사 인물들을 현재의 시각으로 조명해보려는 야심찬 시리즈이다. 이 책은 그 첫걸음으로, 그간 '매국노'로 낙인찍혀 거의 실체를 조명받지 못했던 이완용의 평전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완용은 어린 시절 명문 반가의 양자로 들어가 고전을 익혔으며 과거 급제 후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배우고 주미대사관 참찬관으로 파견되었던, 동양의 전통과 서양의 지식에 두루 열려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각종 교육 개혁을 이끌고 독립협회 회장을 지내며 정동파의 수장으로 자리매김하는 등 복잡다단했던 구한말 정계에서 주목받는 기민한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이완용은 을사조약 체결과 함께 국망의 원인 제공자이자 인간적으로도 타락한 존재로 낙인찍혔다. 물론 그의 매국 행위는 비판받아야 하겠지만, 대한제국의 정치 구조 속에 배태되어 있던 문제들이 이완용 개인의 문제로 환원됨으로써 이완용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국가 혹은 민족의 이름 아래 일종의 탈출구를 얻었던 것은 아닐까.

이러한 의문을 품고 추적해본 이완용은 기존의 평가처럼 탐욕스러운 인물도, 근대적인 주권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한 전통적인 관료도 아니었다. '매국노' 이완용은 오히려 합리적인 근대인이었다. 근대적 합리성이 극단의 시대와 마주했을 때 어떻게 발현되는지 이완용의 행적을 따라가보자. 경원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김윤희 교수가 집필을 맡았다.


목차


발간의 글 _‘한겨레역사인물평전’을 기획하며 (정출헌|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점필재연구소 소장)
머리말 _배제된 타자의 봉인을 열다

1장 관료로 내딛은 첫발, 그 신중한 한 걸음
당돌한 아이, 명문 반가에 발 들이다|과거 급제, 고종과의 첫 만남|육영공원 입학, 신문물을 익히다|급변하는 정세 속에 결행한 미국행|서양의 눈에 비친 우리, 그 조선을 돌아보다|자못 신중한 행보, 뜻 펼칠 때를 기다리다

2장 충성스러운 신하에서 기민한 정치인으로
갑오개혁, 급박한 정치적 소용돌이 가운데서|정동파의 입각, 그리고 친일 세력의 척결|성균관 개혁과 근대적 교육기관의 설립|친미파 수장으로 정치적 도박을 시작하다|정쟁을 가르며, 축출과 제휴를 거듭하며

3장 정계의 중심에서 세상과 만나다
보수 세력과 고종의 틈바구니에서|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세력 결집을 시도하다|정계의 주도권 다툼, 그리고 고종의 환궁|고종과의 대립, 뒤이은 중앙 정계에서의 퇴출|러시아 견제의 배후 세력으로 재기를 노리다|상반된 평판의 기로에 서서

4장 정계 밖에서 설움을 겪다
지방의 부정부패와 민심의 이반 가운데서|정계에서 물러났으나 무시할 수 없는 정치인으로|시세를 관망하며 재기를 기다리다|정계의 혼란, 그리고 다시 찾아온 기회

5장 애국과 매국의 갈림길에서
대한제국 점령을 위한 일본의 압박이 시작되다|누구도 찬성하지 않았으나 체결된 을사조약|조약 체결의 책임은 누구에게?|합리성과 실용성을 갖춘 역적의 논리, 사회에 침윤되다

6장 현실주의와 실용주의를 표방하며 친일로 나아가다
노련한 정치 편력으로 입지를 강화하다|신중한 개혁 노선의 표방, 그리고 제국의 분열|대한제국 통치권의 상징, 사법권이 일제의 손으로|정치적 위기, 칼을 맞고 쓰러지다|한 달간의 고민, 그리고 결단|의리와 매국 사이에서

7장 권력의 정점에서 지탄의 절정으로
병합의 회오리 속에서 조선 상류층의 버팀목이 되다|일본인과의 인맥 형성을 통해 구가한 화려한 시절|격렬한 저항 운동의 발발, 내선융화의 논리가 강고해지다|일상생활에 대한 이완용의 소신|‘매국노’ 이완용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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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13 “그는 합리적인 근대인이었다. ‘충군’과 ‘애국’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가치를 위해 용기를 내거나 또는 제국주의의 폭력에 분노하기보다는 자신을 포함한 다수가 문명화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 절대로 분노하지 않는 이성적 인간이었다. 왕과 국가, 개인과 민족 사이에 심각한 균열이 빚어질 때 이완용이 선택한 것은 어느 한쪽도 아니었다. 균열을 직시하고 그것을 파열시켜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고 용기를 내기보다는 국가와 민족의 가치를 ‘미래’로 밀어내고 왕과 개인이 살아갈 현실을 끌어안으려 했다. 근대적 합리성이 극단의 시대와 마주했을 때 어떻게 발현될 수 있는지를 그는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었다.” 접기
P. 14 “그는 현재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갑오개혁, 1898년 독립협회운동 등 부조리에 대한 분노와 체제 변화를 향한 열정이 사라진 이후 현실의 삶이 갑자기 무겁게 다가왔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분노와 열정의 피로감을 덜기 위해 안정을 원했다. 개화와 개혁보다는 근면하고 성실한 노력과 노동, 그리고 그것이 보장해주리라 기대되는 미래를 위해 현실을 감내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민주화 이후 개혁의 피로감이 실용주의에 인도되어 경제적 안정을 희구하는 분위기로 나아간 것처럼 이완용의 동양 문명화론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잡아끄는 자장의 하나였다.
이완용은 현실에 분노하기보다는 현실을 조망하려고 했다. 그에게는 분노해야 할 현실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조약을 주도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평소 자신의 소신이었던 왕과 왕실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그리고 기존 체제가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이들에게 일시적이고 허구적인 ‘안정’을 주었다. 분노해야 할 현실이 없었던 이완용은 현실의 부조리를 극복하고자 하는 그 어떤 사회적 가치의 부름에도 호응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는 분노할 현실이 없거나 또는 그것을 외면하려 하는 지금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접기
P. 299 차별, 불평등, 억압에 분노하기보다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실리를 추구했던 그의 태도 가운데서 우리는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믿는 현대인의 태도를 발견하게 된다. - 카스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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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정일 (소설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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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김윤희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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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에서 근대 금융과 상업의 역사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상하이 푸단대학 역사학계 외국인 강사,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를 거쳐 현재 경원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있습니다. 『영화처럼 읽는 한국사』『조선의 최후』『통계로 본 근현대사』 등을 여러 사람과 함께 썼습니다. 자본주의와 한국 근대 사회의 형성에 관심이 많으며, 역사를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최근작 : <마주 보는 한국사 교실 1~8권 세트 - 전8권>,<이완용 평전>,<마주 보는 한국사 교실 7> … 총 4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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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가장 밝은 검정으로>,<더티 워크>,<바늘 끝에 사람이>등 총 525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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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우리 근대사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있던 타자, 이완용!
이제 그 단단한 봉인을 열고 실체를 들여다본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완용은 어린 시절 명문 반가의 양자로 들어가 고전을 익혔으며 과거 급제 후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배우고 주미대사관 참찬관으로 파견되었던, 동양의 전통과 서양의 지식에 두루 열려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각종 교육 개혁을 이끌고 독립협회 회장을 지내며 정동파의 수장으로 자리매김하는 등 복잡다단했던 구한말 정계에서 주목받는 기민한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이완용은 을사조약 체결과 함께 국망의 원인 제공자이자 인간적으로도 타락한 존재로 낙인찍혔다. 물론 그의 매국 행위는 비판받아야 하겠지만, 대한제국의 정치 구조 속에 배태되어 있던 문제들이 이완용 개인의 문제로 환원됨으로써 이완용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국가 혹은 민족의 이름 아래 일종의 탈출구를 얻었던 것은 아닐까.
이러한 의문을 품고 추적해본 이완용은 기존의 평가처럼 탐욕스러운 인물도, 근대적인 주권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한 전통적인 관료도 아니었다. ‘매국노’ 이완용은 오히려 합리적인 근대인이었다. 제국주의의 폭력에 분노하기보다는 자신을 포함한 다수의 혜택을 위해 절대로 분노하지 않는 이성적 인간, 위기 앞에서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기보다는 국가와 민족의 가치를 미래로 밀어내고 현재를 껴안으려 했던 현실적 인간이었다. 근대적 합리성이 극단의 시대와 마주했을 때 어떻게 발현되는지 이완용의 행적을 따라가보자.

■ 본문 소개

우리가 몰랐던 이완용?
구한말 근왕적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개혁 성향을 드러냈던 관료, 이완용

일반적으로 이완용은 매국노, 친일파, 혹은 변신의 귀재 등으로 낙인찍혀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을 잠시 유보해두고 그의 이력을 따라가다 보면, 이제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흥미로운 사실들을 여럿 발견할 수 있다.
명문 반가에 양자로 들어가서 스물다섯에 과거에 급제한 이완용은 관직 생활을 시작한 지 5개월이 지나 육영공원에 입학한다. 조선 최초의 근대식 교육 기관이었던 육영공원은 영어 등 신문물을 가르쳤지만, 이 신식 학교의 입학생들은 정부의 명령이나 주변 사람의 권유로 들어온 고위 관료 자제들이 많았다. 반면에 이완용은 전통 학문만으로는 시세의 변화를 따라갈 수 없다고 판단하여 자발적으로 육영공원에 입학했다. 이러한 식견은 당시 미국에 대한 짝사랑이 대단했던 고종의 의중을 꿰뚫는 것이기도 했다.
이후 이완용은 조선에서 맨 처음 주미공사를 파견했을 때 참찬관으로 임명되어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는 미국이라는 문명화된 사회를 목도하면서 조선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갖춰 나갔다. 귀국 후 제3차 갑오내각 때 학부대신으로 등용된 이완용은 미국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근대적인 인민 교육을 위한 체제를 정비하고 이를 실행한다. 그의 손을 거치면서 근대적 초등교육기관을 비롯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고등교육기관인 한성사범학교의 관제도 개정되었다.
이완용은 왕이 부재하는 미국의 정치 체제를 일견하고 돌아왔으나 공화정이나 입헌군주제 같은 변화를 주장하는 급진성을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정계가 혼란스러울 때 주도 세력과 거리를 두면서 절대군주인 왕의 의중을 헤아려 자신의 행보를 조정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갑오내각 당시 그는 명문 반가 출신답게 군신(君臣)의 예를 지키는 근왕적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서양 문명을 받아들이고 교육을 진작시킴으로써 조선의 점진적 개혁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이완용은 당시 조선 정계에서 개혁적 관료로 지목되는 인물이었다.
이 시기에 이완용은 러시아와 미국을 배후로 삼으며 반일적 색채를 띠었던 정동파의 수장으로 부상한다. 을미사변이 벌어지면서 일본 세력이 득세했을 때, 이완용을 비롯한 정동파는 목숨을 걸고 아관파천을 감행, 이를 성공시킨다. 또한 정동파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사회정치단체이자 개혁 세력의 결집체인 독립협회에도 깊숙이 개입한다. 독립협회는 정동파를 지지하는 여론을 조성하는 역할을 했으며, 정동파를 이끌던 이완용은 독립협회의 발기인이자 초대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1898년 정부의 친러시아 정책과 비자주적 외교에 반발하여 열렸던 대중 집회인 만민공동회의 배후에도 이완용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속해 있는 독립협회가 대규모 민중 집회를 주도한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시전 상인을 만민공동회 회장으로 선출하는 주도면밀함도 갖고 있었다. 이처럼 이완용은 자파 세력을 결집ㆍ확대하면서 활용 가능한 세력과 연합을 모색하는 법도 익혀갔고, 아관파천처럼 목숨을 건 정치 도박을 감행하는 과감성도 갖춘 경륜 있는 정치인으로 성장해갔다.

을사조약 체결을 주도한 합리적 현실주의자, 이완용
그를 둘러싼 대한제국의 구조와 관계의 문제들

이완용이 관직 생활에서 항상 승승장구했던 것만은 아니다. 그는 중앙 정계에서 배제되면서 전라북도 관찰사로 내려가 지방관으로서의 설움을 느끼기도 했고, 비록 무죄로 판결났지만 탐학의 죄를 쓰고 법부의 재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시세를 관망하면서 재기를 기다릴 줄 알았고, 이완용의 뒤에는 그를 신임하는 고종이 있었다.
이완용의 행적을 논할 때 고종과의 관계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통치자로서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지만 이로 인해 자신의 권력이 해체되는 것을 우려했던 고종은, 정치 개혁의 요구는 차단하되 경제적ㆍ사회적으로 근대 제도와 문물을 도입하고, 이 과정에서 외세를 끌어들여 다른 외세를 견제하는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종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조응한 것이 바로 이완용이었다. 유교적 소양을 갖춘 그는 국왕의 권력을 문제 삼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일본이 협상 파트너로 받아들일 수 있는 손색없는 경력과 연륜을 갖추었기에 고종의 공식 라인이 될 수 있었다.
처음에 이완용은 을사조약 체결에 대한 거부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강력한 관철 의지를 확인한 후 고종이 이에 대해 분명한 거절 의사를 표명하지 못할 것을 알고서 자신의 역할을 결정했다. 그렇다면 그의 친일은 자신의 부귀영화와 호의호식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기존의 권력 가운데서 자신의 입지와 역할을 규정하는 관료로서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는 국가의 위기 앞에서 울분과 분노에 치를 떨기보다는, 또 현실을 바꾸려고 몸부림치기보다는, 상황에 자신을 맞추는 실용성을 갖춘 관료였던 것이다.
을사조약 체결 즈음부터 이완용은 조약 체결에 나선 을사5적과 함께 매국노로 호명되었다. 대한제국 지식인들이 지향했던 입헌군주제를 위해 왕은 여전히 국민 통합의 구심으로 존재해야 했고, 덕분에 고종은 매국의 책임론에서 구출될 수 있었다. 유생들 역시 절대적인 존재로 추상화된 왕에게 국망의 책임을 물을 수 없었기에, 조약 반대 상소를 올리면서 모든 책임을 을사5적에게 돌렸다. 이완용은 상소를 올려 이에 대응했다. 대한제국이 부강해지면 권리를 되찾을 수 있으며 을사조약이 한일의정서와 신협약의 결론에 불과하다는 그의 변명은 을사조약의 의미를 축소시키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정치적 발언이었다. 현실주의적 입장을 견지한 그의 논리는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유생들에게 선뜻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완용의 행동은 그 누구에게도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합리성과 실용주의로 포장된 그의 주장은 조금씩 대한제국 지식인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한다. 계몽운동 단체들과 유학파 지식인들은 한국이 부강해질 때까지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하겠다는 을사조약의 문안에 근거해 부강을 위한 실력 양성의 기치를 더욱 높이 내걸었다. 저항과 투쟁이 사회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일본의 강압을 더 불러온다고 생각했던 지식인들은 실력 양성만이 독립 주권을 되찾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부강해지면 나라를 되찾을 날이 있을 것이라는 이완용의 주장은 그렇게 대한제국 사회를 지배하는 논리가 되어 갔다.

매국의 책임에 갇힌 배제된 타자, 이완용
그에게서 발견하는 지금 우리의 모습

우리가 전혀 불편하지 않게 비난할 수 있고 “난 너와는 달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대상이란, 반대급부로 공동체의 소속감을 지속시켜주는 존재일 수 있다. ‘매국노’ 이완용은 이런 측면에서 우리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기제였는지도 모른다.
매국의 책임에 갇혀 있던 이완용이 그 자리에 놓이게 된 배후에는 그의 현실주의와 실용주의적인 인생철학이 있었다. 엄혹한 현실과 맞부딪혔을 때, 모든 것을 포기하기보다는 최대한 얻을 수 있는 것을 고민하는 것이 이완용의 선택이었다. 을사조약을 맺을 것이라면 수정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해야 하고,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할 것이라면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어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는 규정된 법적 절차를 정확히 수행하는 관료의 자세에서 도구적 합리성을 발견하고서, 그것이 자본주의 합리성의 기본 전제라고 보았던 막스 베버의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주어진 현실에서 최대의 결과를 얻기 위해 효율성과 실용성을 최대의 가치로 삼아 자신의 활동과 역할을 규정하는, 베버가 말하는 근대의 합리적인 개인상에서 이완용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어진 현실에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과 함께, 현실에 순응하여 실리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현명한 세상살이라고 생각하는 오늘날의 세태를 발견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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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14-05-13 공감 (6) 댓글 (0)



이처럼 완벽한 반면교사가 있을 수 있을까. 시대의 성공을 쫓다 보면 누구나 이완용이 될 수 있다. 경계하라. 시대의 성공을.
alicego 2012-02-11 공감 (18) 댓글 (0)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보지 말고, 근대화라는 거대한 틀에서 먼저 그를 보아야한다.
낭만인생 2011-09-28 공감 (1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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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완벽한 반면교사가 있을 수 있을까. 시대의 성공을 쫓다 보면 누구나 이완용이 될 수 있다. 경계하라. 시대의 성공을.
alicego 2012-02-11 공감 (1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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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보지 말고, 근대화라는 거대한 틀에서 먼저 그를 보아야한다.
낭만인생 2011-09-28 공감 (1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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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은 미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을 사는 수많은 이완용을 발견하게 한다.
송도둘리 2011-06-15 공감 (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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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이라고여 평전, 위인전이 아니라. 이완용을 다뤘다고 별점테러 하는 사람들 이해가 안가네요. 잘읽었습니다.
저금통 2016-12-21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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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한겨레출판부에 감사를 드립니다!!! 편협되지 않은 시각 훌륭합니다!!! 차기작 기대합니다!!!
베가본드 2012-01-08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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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게 이야기해서 미안하다.






젊은 사학자 김윤희가 발칙한 역사학자라는 좋지 않은 평을 들을 각오를 하고 쓴 평전. 이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독후감을 쓰려하니 나도 덩달아 발칙한 독자가 되지나 않을까 싶어 걱정이 앞선다. 피식민 경험을 한 나라의 국민으로 편하게 살기 위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이완용, 하면 그냥 나라를 통째로 팔아먹은 친일 매국노라고 여기며 살면 된다. 을사오적 가운데 한 명이며, 을사조약 2년 후인 1907년에 맺게 되는 정미7조약과 이어 고종퇴위, 그리고 결정적으로 한일합방 서명까지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이완용이 한 짓이라 단정하고 살면 편하다. 그러면 이완용 말고 당대를 살던 거의 대부분의 위정자들, 고종을 비롯한 모든 위정자들은 면죄가 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매국의 죄를 가볍게 보이게 할 수 있으니까.
우리나라 성인들 대부분 그러하듯이 학교를 졸업한 이후 책을 전혀 읽지 않다가 이제 뼈마디 쑤시고 어금니 빠질 때 되니 시간이 나 독서에 몰빵하기 시작한 나는 특히 북아프리카 사막 위에서 살던 민족들이 막강한 무력을 자랑하는 유럽 백인들의 침략에 맞서 싸우며 국토 전 지역에서 전투를 벌여 한 곳, 한 곳 심각한 타격을 입고 결국 굴복해 식민지로 떨어진 것이 많이 부러웠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빈약한 무기를 들고 백인들을 향해 독립을 외쳐 기어이 나라를 다시 뺐어오는 광경이 감격스러웠다. 우리의 역사는 극소수의 지배계급이 자기들끼리 모여 굴욕적 조약의 몇 부분을 ‘이렇게 수정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렇게만 해주시면 도장 찍어드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라고 해가며 외교권을 빼앗겼고, 국권을 들어다 바쳤다. 35년에서 보름이 모자라는 세월을 지나, 일주일 전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뚱보’와 ‘꼬마’ 두 방의 폭탄 덕에 또 느닷없이 해방을 맞는 우리의 현대사가 나는 슬프다.
세계에서 가장 야만적인 문명을 가지고 있던 조선이란 나라에서 환경과 변화, 그것도 격변 속에서 가장 잘 ‘적응’한 자에 관한 이야기. 당신은 놀랠 수도 있다. 여전히 당신 주변에 이와 비슷한 인간들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어서.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가장 큰 책임은 누가 져야할 것인가.
그런데, 몽고족의 나라 원이 고려를 침공한 이후 한반도가 중국의 식민지가 아니었던 적이 잠깐이라도 있었나? 이것부터 솔직하게 논의를 해야 할 거 같다. 몽고라는 세계 최강, 결코 이길 수 없는 외부의 적이 침공하여 100년에 이르는 무신정권을 종식시킨 다음 원, 명, 청에 이르기까지 식민지, 이 말이 좀 걸린다면 적어도 ‘속국’의 위치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다. 막강한 중국에 자주독립을 주장하기만 하면 그나마 명줄이라도 보전할 수 없었을 터이니 그게 최상의 방법이긴 했을 것이긴 하다.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으려면 늦어도 영조시대엔 개항을 해 유럽의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사상, 경제, 군사적으로 거의 제국주의 수준에 이르는 방법 말고는 없었는데, 만일 그렇게 했더라면 청의 강희제나 옹정제가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은 명나라 초기 정화의 원정 이후 굳게 문을 닫고 있었던 터에 일개 속국인 조선이 백인 유럽에게 문을 연다는 건 난센스. 솔직히 조선이 식민지로 떨어진 책임을 묻는 일은 아프리카가 식민지가 된 책임을 묻는 것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의 생각과 달리 당시는 식민주의 시대였고, 조선은 가망이 없는 야만의 나라였다는 걸 슬프지만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아프리카에서는 줄루족의 대규모 전투라도 있었지....)
좋다. 그렇다면 1876년 일본에 의하여 제물포 항이 열린 이후에라도 제도를 새로 해서 국가의 기틀을 제대로 했어야 한다고? 그게 가능했을까? 대항해시대와 산업혁명의 몇 백 년에 걸친 발전과정을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수십 년 만에 뚝딱 해치우는 것이? 내 솔직한 심정으로는, 세상에 운 좋은 놈은 당해내지 못한다고, 일본이 갑오년 청일전쟁 당시 평양전투에서 청나라를 꺾은 건 그렇다 치고, 1904년 북극곰 러시아와 한 판 붙어 승리를 거둘 줄 누가 알았겠나. 게다가 승전이후에 조선은 속 빈 강정인 걸 알았던지라 삼국간섭과 미국의 견제가 드넓은 만주 경영에 집중되어 일본이 조선을 먹는 건 시간 문제였을 뿐이다.
여기에서 앞에 이야기한대로 전국적으로 지역단위의 봉기와 투쟁이 일어나 예를 들어 각 도의 관찰사가 지휘하는 군대가 막강한 일본군대에 저항하다 실패, 패배로 인해 합병이 벌어지지 않은 걸 통탄할 수밖에. 제대로 된 저항의 역사가 없었다는 것. 구한말 의병활동을 폄훼하는 것이 아니다. 봉건적 양반, 아니면 군왕제 지지자들이 이끄는, 농민 위주로 갑자기 구성된 의병들이 일본군과 조국의 정규군까지 합한 군대에 제대로 대항이나 해보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을 터. 그리하여 누군가 왕을 대신해 국토의 양도서류에 도장을 찍어야 했으며, 감히 왕을 비난할 수 없으니 왕 대신에 누구에겐가 욕을 한 바가지 해주어야 하는데 그게 이완용이 된 것 아닐까. 요새 매스컴의 엉터리 역사 설명에 의하여 재조명을 받고 있지만 나는 이 시절의 왕, 고종의 용렬함을 도무지 좋게 봐줄 수 없다.
이완용을 이 책에서처럼 현실주의자이며 합리적인 근대인이라고 포장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보다 객관적 사실을 써내려간 평전을 읽어보면, 숱한 자기개발서적에 성공한 인물이 되고 싶으면 반드시 들여야 하는 습관, 뭐 이 비슷한 것을 모두 종합해 갖추고 있고 그것들을 정말로 실행에 옮긴 우리 근대사의 한 명이 바로 이완용이었다는 데 이견이 없다. 지금까지 만 33년 반 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숱한 사람을 겪었던 바, 이완용 같은 인간들이 회사에서도 잘 나간다. 그러니 자기계발 서적에서 잘난 놈들의 특징의 종합이라 하는 것.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람들 보면 재수 없다는 거. 이런 류의 인간들을 싫어하는 건 내 문제니까, 직장 생활 잘 하고 싶은 사람들은 이 책을 읽어 이완용의 처세를 배워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너무 솔직하게 얘기해서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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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문트 2020-05-12 공감(13)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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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칙한’ 평전을 쓰려다 ‘망칙한’ 평전을 쓰다.



‘ 발칙한’ 평전을 쓰려다 ‘망칙한’ 평전을 쓰다.
-이완용 평전’을 읽고-

몇 년전에 교사 모임에서 한선생님으로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이○○ 교수가 대학원 수업에서 “내가 보기에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이완용이야! 이완용이 3․1운동이 일어난다는 것을 미리 알고서도 이를 일제에 알리지 않았으니까 3․1운동이 일어나는데 얼마나 큰 기여를 한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순간! ‘아, 저런 괘변을 늘어 놓는 사람이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니...’하는 탄식이 나의 가슴 속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모든 대학교수들이 지성인이고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나보다 나을 수 있다는 환상은 사라졌다. 이때부터 매국노 이완용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었다. 진정 나는 그의 삶에 대해서 많은 것을 모르고 있었다. 이러던 차에 ‘이완용 평전’을 보았다. 부재가 ‘극단의 시대, 합리성에 포획된 근대적 인간’이라 적혀있었다. 이 부재 또한 이 책을 읽고 싶게 했다. 저자는 왜 이런 부재를 달았을까?

1. 분노하지 않고 이완용을 살피다.
저자 김윤희는 분노하지 않고 찬찬히 이완용의 삶을 서술해갔다. 대표적 매국노 이완용을 이렇게 분노하지 않고 살펴볼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들 정도로 김윤희는 천천히 이완용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뜻밖에 사실들도 전해 주었다. 이완용이 탐욕스러운 관리라고 알고 있었는데, 김윤희는 이완용이 전라북도 관찰사로 부임하고 벌어진 여러 비리 사건들을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당시 신문에서는 그를 탐관오리로 비판하였으나, 당시의 만연한 부정부패의 구조적 모순 속에서 이완용이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일을 처리하려했다는 것이다.
또한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음에도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여자관계도 문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이완용하면 떠오르는 것은 『매천야록』에 며느리와 부정한 관계를 맺었고 이 때문에 아들이 자살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당시 민중들의 이완용에 대한 시선이 투영되어 만들어진 이야기이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 이완용의 삶은 정말 뜻밖이었다.

2. 그러나 저자가 놓친 사실들....
이완용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분노하지 않고 천천히 들여다 보는 것은 나름의 의의가 있다. 그러나 진정 분노해야할 때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우리를 분노하게 만드는 사람은 없다. 저자 김윤희는 너무도 냉정하게 이완용의 입장에서 그의 삶을 살펴보고 있었다.
‘차별, 불평등, 억압에 분노하기 보다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실리를 추구’하는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사고를 지닌 인물’이라고 이완용을 평가하는 김윤희는 을사늑약 체결과정을 서술하면서 그를 합리적인 인간으로 그리고 있다. 이러한 김윤희의 침착함은 ‘을사조약은 고종과 9명의 대신들 누구도 찬성하지 않고 결정하지도 않은 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되었다.’라는 결론에서 절정에 다다른다. 을사오적으로 지목된 이들이 을사 늑약에 찬성을 했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그러나 ‘발칙’하게도 김윤희는 이것을 정면으로 부인한다. 김윤희는 ‘이완용의 상소’를 근거로 하여 을사늑약의 자구 수정은 이미 고종과 함께 사전에 이루어졌으며, 이완용은 을사늑약에 찬성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토는 고종의 명령을 따른다면, 동양의 대세를 알고 있다면, 조약 문구를 수정한다면, 그것은 찬성이나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5명의 대신이 찬성한 것이라고 몰아세웠다.
이때 이완용은 “신이 속으로 곰곰이 생각해보니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성상의 하교를 이미 참정이 성명하였으니, 그렇다면 이 안건의 귀결은 이미 판가름 난 것”이라고 하면서 “나는 조금 전에 연석에서 주달(奏達)하는 일이 있게 되어 이러이러하게 아뢰었을 뿐이다. 그러나 끝까지 찬성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라고 밝혔다. …… 이완용은 고종과 합의된 대책이 이미 깨졌음을 알았고, 그다음으로 조약문을 개정하는 협상의 수순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김윤희에게 묻고 싶다. ‘조약 문구를 수정한다면, 그것은 찬성이나 마찬가지’라는 이토의 주장이 잘못되었는가? 그리고 이완용의 논리대로 고종이 ‘하교’를 했다고 자구를 수정하는 것이 합리적인가? 조약 문구를 수정한다는 것은 조약을 찬성한다는 전제하에서 가능하다. 그리고 단호한 부정이 아니면 온건한 찬성으로 비춰질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을사늑약 체결은 대한제국의 운명이 걸린 일이다. 그런데 단호한 반대를 국가 대신으로서 하지 않았다면, 이것은 찬성으로 해석된다. 설사 이완용의 논리대로 고종의 ‘하교’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나라의 대신으로서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반대를 했어야 한다. 그것이 나라의 대신으로서 ‘합리적’인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저자 김윤희의 ‘발칙’함은 사료 선택에서도 드러난다. 왜? 수많은 사료들 중에서 이완용이 자신의 죄가 없음을 항변하기 위해서 올린 상소문을 선택했을까? 이완용에게 유리한 사료를 선택하고 그 위에서 당시 사건을 살펴보았으니 이완용에게 유리하게 결론이 날 가능성이 높다. 김윤희는 역사학자이다. 김윤희가 이것을 몰랐을까? 더욱이 “일본의 요구는 대세상 부득이한 것이다. 국력이 약한 우리가 원만히 타협하여 한국의 지위를 보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라는 이완용의 말은 그의 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대세상 부득이한 것”이라는 이완용의 말은 그가 을사늑약에 찬성했다고 충분히 해석할 수 있는 말이다. 김윤희는 이 사료를 왜? 사용하지 않았을까?
김윤희는 여기서 한발자국 더 나가 망국의 책임을 고종에게 돌린다. “여론은 지배 엘리트들이 원하던 방향대로 흘러갔고, 을사5적은 고종이 져야 할 책임까지 모두 짊어져야 했다.”라는 지적에 대해서 나는 분노에 치를 떨었다. 전제군주제 국가에서 나라가 망한 책임에서 고종이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나라를 지키려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에도 헤이그에 특사를 보내며 빼앗긴 주권을 되찾으려 노력한 사람과 을사늑약 체결에 앞장서며 이후의 대한제국 병합에 앞장서고 친일의 댓가로 풍족한 여생을 보낸 매국노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설정이다. 누가 더 잘못했는가를 비교하면서 고종보다 이완용이 덜 잘못했으니, 이완용은 잘못이 없다는 그릇된 논리의 함정에 빠질 우려가 있다. 국가의 최고 통치자로 고종이 망국의 책임이 있다면, 국가의 대신으로서 이완용에게도 책임이 있다. 더욱이 이후 친일의 죄를 논한다면 이완용 같은 매국노는 고종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또한 조선의 지배층을 무능하고 나약하게 그림으로써 일제의 침략을 합리화하려했던 식민사학자들의 관점을 김윤희가 답습하지 않기를 바란다. 조선 멸망의 책임을 일제에 돌리지 않고 내부로 돌림으로써 일제가 얻으려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저자 김윤희는 이완용을 ‘충성스러운 신하’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러한 ‘충성’은 병합조약을 체결할 때까지 이어진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을사조약 체결 때 보여준 고종의 태도로 미루어보면, 완강한 반대만을 지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 철저히 현실에 순응하는 인물이었던 이완용은 병합을 피할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고, 대세를 인정하는 가운데 최대한 얻을 수 있는 것을 고민했을 것이다. 또한 왕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던 그로서는 고종과 순종의 부탁을 저벌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병합을 하더라도 지켜내야할 것을 지키기 위한 방법과 조약 체결을 무리 없이 진행하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짤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김윤희의 글을 읽다보면, 고종과 순종이 나라를 일본에 넘기기로 결정했고 이 악역을 이완용이 했으며, 이완용은 고종과 순종에 대한 충성심에서 이러한 악역을 대행한 것처럼 읽혀진다. 이것이 나만의 오독일까? 고종이 내린 병합조약에 대한 지침과 관련된 사료를 제시하지도 않고 저자 김윤희의 추측에 의해서 사건을 서술하고 있으며, 이완용의 입장에서 천천히 당시를 들여다 보고 있다. 나로서는 매우 당혹스러웠다. 더욱이 이완용을 ‘충성심이 남달랐’다고 서술한 부분에서는 무척이나 불쾌한 감정이 복받쳤다.
나는 이완용은 고종에 대한 충성심이 별로 없다고 알고 있다. 『매천야록』에는 고종을 강제퇴위 시키기 위해서 이완용이 고종에게 칼을 겨누며 “폐하는 오늘날이 어떤 세상인지 아십니까?” 라는 말을 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고종에 입장에서는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는 역할을 하기 보다는 민영환 처럼 자결을 하는 것이 더 충성스러운 신하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3. 친일파에게는 ‘입장 바꿔 생각해 봐!’가 통하지 않는다.
인생사를 살다보면 자주 듣는 말이 ‘입장 바꿔 생각해 봐! 너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겠니?’라는 말이다. 타인을 이해할 때 가장 좋은 이 방법은 매국노를 이해할 때는 예외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역사적 인물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인물의 입장에서 당시를 생각하면 당시를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일이 당시로서는 ‘합리적’이었으며, ‘이해’가 된다. 그리고 불행한 것은 당시의 인물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인물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완용이 만약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매국노가 아니었을 거야.”라며 이완용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 회의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일제시대를 네가 살았다면 너는 친일파가 안되었어. 당시를 살았다고 모두 친일파라고 하면 안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너무도 친일파 매국노의 입장에서 역사를 이해하고, 그들에게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측은한 마음이 든다.
역사적 인물을 바라보려면 당시의 인물의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아야하지만, 다른 선택을 한 인물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역사적 정의’에 과연 부합하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어떤 중요한 일을 처리할 때에는 그것이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를 따지기 보다는 먼저 그 일이 바른길이냐 어긋난 일이냐를 따져서 결정하라”라는 백범 김구의 말씀처럼 한 인물의 선택을 평가할 때도 그 인물의 선택이 과연 ‘합리적’이었느냐보다는 ‘정당’하였는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단순히 ‘합리성’만을 따질 때는 친일파도 미화되기 십상이다. 김윤희는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믿는 현대인의 태도를 발견’한다며 이완용의 ‘합리성’이 우리 모두에게 적용된다고 주장하며 그에 대한 평가에 물타기를 한다. 김윤희여! 제발, 그러지 말아 주시오.

저자 김윤희는 기존의 이완용 평전과 다르게 그를 서술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색다른 글을 써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지나치게 이완용의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본 우(愚)를 범하게 한 것 같다. 다르게 서술하려는 고민보다는 책한권을 내기 위해서 많은 나무를 베어야하는데 이 책이 그러한 가치가 있는지를 먼저 고민한다는 어느 학자의 말을 저자가 되새기길 바란다. 그리고 라면 냄비 받침으로 쓰기에도 부끄러운 이 책을 많은 나무를 희생하면서 까지 발간한 이유를 한겨레 출판부에게도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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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나루 2011-10-26 공감(8)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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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따위'의 인물에게도 평전이 필요한 이유


“지금 우리나라가 러시아로부터 무관을 고용하는 일은 실로 조선의 흥망이 걸린 것이다. 나의 생사는 논할 가치가 없지만, 조선은 한 번 죽으면 다시 소생할 수 없다. 내 몸이 죽어서 이 일을 방지할 수 있다면 지금 죽는 것이 영광스러운 것이다.” - 본문 130쪽

비분강개하는 열사의 풍모가 느껴지는 이 말을 이완용이 했다면 믿을 수 있을까? 나는 결코 믿을 수 없었다. 내 머릿속에 존재하는 이완용은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직 자신의 부와 영달을 위해서는 나라와 민족 정도는 손쉽게 팔아넘기는 천하의 비겁하고 추잡한 사람이 내가 그에게 가지고 있는 고정된 이미지였다. 하지만 이 문장은 이완용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을 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편으로는 ‘말이면 무슨 말이든 못할까’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완용도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했던 ‘사람’임을 비로소 가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이처럼 ‘매국노’라는 이완용에게 붙여진 딱지를 벗기고, ‘인간’ 이완용을 바라보고자 노력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자세는 평전작가가 갖추어야할 기본적인 소양이라 특별할 것은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이완용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위치를 고려한다면, 지은이의 노력은 평가할 만 하다고 생각된다.

우선 이완용의 출신배경을 살펴보면 입이 딱 벌어지게 된다. 노론명문가 출신임은 물론이고, 형은 대원군의 사위요, 어머니는 여흥 민씨로 후일 정계를 주름잡게 되는 민씨 척족세력과 한 핏줄이었던 것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유명 정치가를 배출한 가문의 자손에다가 현재 집권당 대표의 사위를 형으로 두고, 유력 대권주자와 어머니가 같은 가문인, 실로 어마어마한 배경을 갖춘 셈이다. 가정환경만으로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성급한 감이 있지만 이완용이 당시 체제를 유지하면서 부분적으로 서양 문물과 사상을 도입할 것을 주장했던 점을 생각해본다면, 남부럽지 않았던 가정환경이 그 판단에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이완용이 서얼출신이었던 윤치호나 천민출신 송병준과 같은 이들과 불화했던 이유도 출신배경의 차이에서 오는 위화감 때문은 아니었을까. 요컨대 이완용은 개화주의자로 분류되었지만 근대서구문명의 ‘만민평등’이나 ‘천부인권’과 같은 기본가치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던, ‘현실유지 개화파(?)’였던 것이다.

급격한 사회변동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시대의 변화를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완용은 실로 깨인 기득권층이었다.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완용의 부정부패에 대한 처신들만 봐도 알 수 있다. 이완용은 어떤 당사자와도 갈등을 빚지 않으면서 사건을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부정부패를 그대로 눈감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통의 집권층과 분명 달랐다. 하지만 발본색원하여 문제를 처리하기보다는 조용하고 부드럽게 누구도 피해를 입지 않는 선에서 처리했던 점에서 이완용만의 개성을 보인다. 그의 이런 처신은 여러 사람에게 호감을 사기도 했다. 국외에서도 인정받는 명필에다가 검소하고 기품 있는 성품도 그러한 평가에 일조했다. 이완용은 이처럼 나름의 능력과 감각을 갖춘 성실한 관료에 인기 있는 명망가였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고상하고 능력 있었던 인물이 매국노로 전락하게 되는 과정을 보면 두려움이 앞선다. 크게 심성이 고약하다거나 지나친 물욕을 가진 악당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타락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완용은 부조리한 사회의 구조와 관행이라는 거대한 힘에 맞서 승산 없는 싸움을 할 만큼 분노와 투지를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방 향리 및 양반 토호와 한패가 돼서 진흙탕 속에 자신을 내던질 만큼 탐욕스러운 인물도 아니었다. 목민관으로서의 자세를 되새기면서 자신만이라도 오롯이 지켜내려 노력하는 완고한 원칙주의자도 아니었고, 주위의 시선을 무시하고 과감하게 관행을 잘라내는 과격한 행동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주어진 상황에서 어느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피해가 가지 않는 방법을 찾아내서 가능한 무리수를 두지 않고 일을 처리하려 하는 현실주의자, 합리주의자, 실용주의자였다. - 158쪽



이완용의 삶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비극성은 그 타락의 씨앗이 한 독특한 인물의 악한 본성에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평범함에 있다는 사실이다. 먼저 이완용은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대해 단 한 번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는 현실을 일단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고 그 현실 하에서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이익을 얻고자 했다. 말하자면 ‘이 현실이 바뀔 가능성은 없는가?’, ‘이 현실은 과연 정당한가?’와 같은 질문은 던지지 않은 것이다. 현실은 바뀔 수 없다는 전제하에서 지극히 기술적이고 수단적인 합리성만 발휘한 것이다.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고 가정했기에 그의 선택들은 무력감과 열등감이 담겨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을사조약을 피할 수 없다는 무력감은 형식적인 자구 수정을 요구해서 받아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완용의 경우에는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 탓에 그 열등감이 자신을 향하지 않고 자기를 제외한 조선민족에게 향했다. 때문에 실력양성과 계몽만이 민족의 열등함을 구원할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주장한 사실은 놀랍지도 않다. 그에게 열등한 민족에게 병합이라는 현실은 어쩌면 지극히 정당한 것이었을 것이다.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감히 하지 못하고,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며 모나지 않게 누구로부터 미움도 받지 않으면서 그저 최선을 다하면서 살았던 것의 결과가 ‘매국노’라면 우리는 과연 그 덫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새삼 두려움과 동시에 어떻게 살아야 잘사는 것인지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차별, 불평등, 억압에 분노하기보다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실리를 추구했던 그의 태도 가운데서 우리는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믿는 현대인의 태도를 발견하게 된다. - 299쪽



나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탐구는 영웅을 인간으로 만들고, 악당 또한 인간으로 만드는 작업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영웅이 그저 영웅으로 존재한다면 그 누구도 그곳에 닿을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학과 숭배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악당이 그저 악당으로 남는다면 그 누구도 그곳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저 혐오와 자기기만이 남을 뿐이다.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무엇이 되느냐가 결정되는 것이지 애초에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정해질 리야 없지 않은가. 왜 누구는 영웅이 되고 누구는 악당이 되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에 대한 질문을 각자에게 던져주는 것이 평전의 역할이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이 책은 그런 역할에 충실한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인물화가 아니라 풍경화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전체적인 배경에 대한 묘사가 지나쳐서 이완용 개인의 행적에 대한 서술은 압도되어 버린 느낌이다. 물론 이완용에 대한 증오 때문에 그의 내밀한 생각과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를 담은 1차 자료를 얻기 어려운 점을 감안하더라도 아쉬움은 남는다.

끝으로, 책을 읽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평가가 내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 책이 이완용을 너무 미화했다는 평가가 다수인 것에 아쉬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변호하는 입장에 서고자 한다. 일본의 강제합병에 일조한 것은 분명 이완용의 잘못이지만 이 책이 지적하듯 이완용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우리가 진정 식민지의 역사를 청산하고 다시는 그러한 역사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국권상실의 원인을 이완용 개인의 잘못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기 보다는 그 당시 조선의 현실과 사회지도층과 민중들이 어떻게 대응했는지 냉정하게 분석하고 평가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때문에 이 책은 이완용에 대한 인민재판 식의 돌팔매 처형에서 벗어나 역사의 법정에서 이성적인 재판을 통한 엄중한 형벌 부과로 가는 길을 연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에게 이완용의 모습의 있지 않은지, 현재에 또 다른 이완용이 활보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볼 여운을 남겨주는 것, 그것이 이 책이 가진 의의라고 본다. 이제, 이완용 따위의 인물에 대한 평전을 쓰는 데 장안의 지가를 올려야 겠냐는 비판에 대한 답이 되지 않을까.




배제된 타자에게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는 일은 유쾌하지 않다. 특히 매국노의 모습에 깃들어 있는 우리의 모습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불편함을 무릅쓰고 언급해야 하는 이유는 사회적 가치의 부름에 호응해왔던 사람들이 있어왔고, 또 그들에 의해 변화가 주도되어왔기 때문이다. 지금은 국가와 민족의 가치보다는 인권·공공·자유의 가치가 호명되고 있고, 여전히 부름에 호응하는 또는 호응할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오늘날의 이완용은 ‘매국노’로서보다는 ‘부조리한 현실에 분노할 줄 모르는’ 또는 ‘그것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이 호명하는 가치에 호응할 줄 모르는’ 인물로 비판되어야 할 대상이다. -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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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둘리 2011-06-15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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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합리성에 포획된 '친일파' 논란



"아니, 이완용에 대한 평전을?" 아직도 이렇게 놀랄 사람이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그만큼이나 이완용은 '친일파', '매국노'의 대명사다. 내가 강의 시간에 '국민 매국노'라는 드립을 칠 정도로, 이런 평가에 '함부로' 반박 의견을 내놓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이완용 평전은 많아야 하는 것 아닐까? 어쨌거나 중요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으니까. 히틀러 평전이 많은 것은 히틀러가 훌륭한 인물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훌륭한 인물들, 그러니까 독립운동가들의 삶만이 우리에게 지적, 사회적 자극을 주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긴, '평전'이라고 하면 보통 훌륭한 인물의 삶을 생각하기 마련이니, 조금 걱정이 되는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혹시나 이완용을 미화하거나 방어하려는 글이 되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왜 안 생기겠는가? 독자들이 다음의 글을 보면 그 걱정이 현실로 나타났다고 생각하려나?




이완용은 부조리하나 사회의 구조와 관행이라는 거대한 힘에 맞서 승산 없는 싸움을 할 만큼 분노와 투지를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방 향리 및 양반 토호와 한패가 돼서 진흙탕 속에 자신을 내던질 만큼 탐욕스러운 인물도 아니었다. 목민관으로서의 자세를 되새기면서 자신만이라도 오롯이 지켜내려 노력하는 완고한 원칙주의자도 아니었고, 주위의 시선을 무시하고 과감하게 관행을 잘라내는 과격한 행동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주어진 상황에서 어느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피해가 가지 않는 방법을 찾아내서 가능한 한 무리수를 두지 않고 일을 처리하려 하는 현실주의자, 합리주의자, 실용주의자였다. (157~158쪽)



이완용이 탐욕스럽지도 않은 합리주의자, 실용주의자라니? 뭔가 께름칙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실용과 합리는 모든 인간이 추구해야할 최고의 가치인가? 이 가치들은 맥락과는 상관 없이, 비판 받을 여지가 전혀 없는가?




이러한 측면에서 그는 분노할 현실이 없거나 또는 그것을 외면하려 하는 지금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 그래서 오늘날의 이완용은 '매국노'로서보다는 '부조리한 현실에분노할 줄 모르는' 또는 '그것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이 호명하는 가치에 호응할 줄 모르는' 인물로 비판되어야 할 대상이다. (14~15쪽)




저항과 투쟁이 사회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일본의 강압을 더 불러안다고 생각했던 지식인들은 '실력 양성'만이 독립 주권을 되찾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부강해지면 되찾을 날이 있을 것"이라는 이완용의 주장은 대한제국 사회를 지배하는 논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210쪽)




어쩌면 이 책은 '이완용 평전'이라는 이름을 단, 근대성 비판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비판은 적절한 소재와 관점을 유지한 덕에 꽤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저자는 얼마나 '합리'로부터 자유로운가 하는 의문. 아무래도 대상이 대상인지라 최대한 객관을 유지하기 위해 '합리'를 강제적으로 유지하려는 노력이 엿보이는데, 때로는 그 노력이 약간의 무리수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어쨌거나 이완용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이다. 그동안 이완용을 입에 담기조차 싫어했던 사람이라면 더욱 이 책을 펼쳐봐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이완용은 우리 시대의 금기여서는 안 된다. 그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해야만, 이 시대에 그와 같은 '합리주의자'가 판칠 수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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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뜬별 2014-12-22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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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평전 / 김윤희



1장 관료로 내딛은 첫발, 그 신중한 한 걸음




"이호준은 19세기 말 조선 정계의 복잡한 인맥 한가운데 놓여 있는 인물이었다. 세도정권의 막후였던 조대비 세력, 고종의 등극과 함께 막후가 된 대원군, 그리고 임오군란 이후 고종의 막후였던 중전 민씨 세력과 언제든 소통 가능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노론 명문가에 양자로 들어간 이완용은 그 집안의 상속자로 교육받았고, 다른 명문가 자제들과의 인맥을 형성하면서 관료로 진출하는 길이 예정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22)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양자가 될 수 있는 범위가 줄어드는데, 서자는 적자가 될 수 없었으며 성씨가 같은 집안 아이만이 양자가 될 수 있었다. 서얼이 관직에는 나아갈 수 있었지만, 양반가의 관습에서는 여전히 적자와 서자를 구분하고 있었다. 이호준의 경우도 이미 서자인 이윤용이 있었지만 가문을 상속받을 적자가 필요했고, 같은 우봉 이씨 가문의 이완용을 양자로 들여 그를 적장자로 삼았다."(25)




"고종의 미국에 대한 짝사랑은 대단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종은 1881년 김홍집이 가져온 황쭌센의 『조선책략』을 읽고 조미통상조약의 체결을 결정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부유한 나라가 되었지만, 유럽의 열강과 달리 식민지를 갖고 있지 않았던 미국에 대해 당시 중국도 매우 호감을 갖고 있었다. 서양과 최초로 맺은 조약인 조미통상조약은 조선이 열강과 체결한 불평등조약 중에서 그나마 조선에게 가장 유리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관세율도 높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을 둘러싼 국제 분쟁이 발생하면 미국이 두 나라 사이를 조정하는 거중조정(居中調停) 조항까지 들어 있었다." "육영공원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배우면서 (갑신정변에 연루된) 신기선의 국문을 행했던 1887년의 이완용 행적으로 미루어볼 때, 그는 정계 분위기에 조응하면서도 조용히 미래의 변화를 준비하는 치밀함을 가진 인물이었던 것 같다."(36-8)




"이완용이 귀국했을 때에는 위안스카이와 그의 위세를 등에 업은 민영준(민영휘) 등의 민씨 척족이 큰 세력을 형성하여 정사를 좌우하고 있었다.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고종의 외교 정책과 차관 도입 시도가 좌절되었으며, 내무부를 중심으로 근대 문물을 수용하려는 의지가 점차 빛을 잃어갔다. 고종의 결정을 믿고 주미대리공사직을 수행했던 이완용의 정치적 입지는 고종의 정책 실패와 함께 줄어들어 있었다." "이러한 때에 이완용에게 내부 참의직을 제수한 것은 고종의 신임이 이완용에게 쏠리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조치였다. 더욱이 청과의 불편함을 무릅쓰고 주미대리공사직을 수행한 이완용에 대한 고종의 신임은 청의 세력을 등에 업은 정치 세력을 자극할 만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완용은 사직상소를 통해 "이러한 총애가 미치자 사람들이 오히려 놀라는데, 신의 황송하고 두려운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자신의 난처한 입장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52-3)




"그는 사직상소가 아니면 병을 핑계로 임명받은 자리에 불참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정계와 거리를 두고자 했다. 반면에 왕과 세자를 가까이할 수 있는 시강원과 승정원의 관직은 계속 유지했다." "이완용보다 7살이 어린 윤치호는 조선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보았지만, 그 개혁은 급격한 정치 구조의 변동을 초래하지 않으면서 왕을 중심으로 서서히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종이 추진하던 개혁은 청의 간섭으로 거의 수포로 돌아갔고, 국가의 실권을 가진 내무부는 친청세력과 민씨 척족이 장악한 채 부정부패가 만연되어 있었다. 변화의 새로운 기운이 없는 정계에서 이완용이 자신의 입지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정치적 분란이 생길 수 있는 관직을 마다하고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1893년 가을, 생모 신씨가 사망했다. 이완용은 3년간 꾸준히 지켰던 시강원 겸교사서직을 사직하고 생모의 3년상을 치르기 위해 낙향했다."(55-7)




2장 충성스러운 신하에서 기민한 정치인으로




"1차 갑오내각 때는 대원군과 민씨 척족의 첨예한 대립이 부각되었고, 왕이 배제된 상황에서 새로운 내각이 어떤 방향으로 재편될지 매우 불투명한 상태였다. 이때 이완용은 조선을 떠나 있어야 하는 전권공사직을 마다한 채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반면에 2차 갑오내각은 대원군과 민씨 척족 세력이 배제된 대신 친일적 색채를 띠면서 관료 중심의 개혁을 이끌려 했던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의 세력과 일본 망명에서 돌아온 박영효 등의 갑신파가 핵심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일본공사 이노우에는 조선 정부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기 위해 친일 세력을 중심으로 새로운 내각을 조직하는 한편 앞으로 예상되는 외교적 마찰을 줄이기 위해 러시아, 미국 등 구미 열강의 외교관들과 소통 가능한 인사들을 정계에 끌어들였다. 이때 주목받은 세력이 친미 성향의 정동파였다. 이완용의 입각은 조선 정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노우에의 정략적 필요와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65)




"3차 갑오내각의 초기인 1895년 6월 초에는 아직 이들이 적극적으로 일본을 배척할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이노우에가 조선을 떠난 후 임시 대리공사였던 스기무라 후카시가 6월 16일 일본 외무성에 보낸 보고에 따르면, 정동파는 각국과 골고루 교제하여 각국 공동의 보조에 의해 어느 한 나라의 강제를 피하려 한다고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6월 25일 일본공사관 서기관 히오키 마쓰는 외무성에 보낸 보고서에서 "서광범, 이완용, 이윤용을 지목해 이들은 일본을 배척하는 기색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완용이 열흘 사이에 일본을 배척하는 정치색을 분명히 드러낸 것은 중전의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 중전은 6월 7일 이노우에 공사가 일본으로 귀국하자 정동파 인사들을 통해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접촉했다." "이 과정에서 이완용은 고종과 중전의 의중을 읽을 수 있었고, 일본을 배척하고 고종을 중심으로 개혁을 단행할 기회를 마련하고자 했다."(69)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이 벌어진 후, "미국공사관에 기거하던 이완용은 상하이에서 비밀리에 귀국한 이범진과 함께 다시 고종을 빼내오는 계획을 세웠다." "고종을 자주 만났던 미국 선교사들이 이완용과 고종 사이의 연락을 담당했으며, 고종을 모시던 상궁 엄씨가 계획에 동참했다. 궁궐이 습격당하고 중전이 처참하게 죽자 고종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더구나 임오군란 때처럼 권력 행사에서 배제된 고종은 자신의 권력을 되찾기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과 세자가 궁녀의 가마를 타고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을 빠져나왔다." "이완용은 이범진, 베베르와 함께 러시아공사관에서 고종과 세자를 맞이했다. 이완용과 고종은 4개월 만에 다시 만났다. 아관파천이 춘생문 사건처럼 사전에 발각되었다면 이완용은 망명을 하거나 죽음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이완용 역시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용기를 내어 이 일을 감행했고 성공시켰다."(84-5)




# 춘생문 사건 : 1895년 11월 28일, 고종을 미국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는 시도가 좌절된 사건




3장 정계의 중심에서 세상과 만나다




"이범진의 축출 이후 갑오개혁에 따른 사회적 혼선이 빚어지자 양반을 비롯한 보수 기득권 세력의 목소리가 커져갔다. '신식'에 대한 불만 여론은 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고종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는 적극적으로 여론에 부응하며 구체제를 유지하려는 정치 세력을 등용하여 축소된 왕권을 확대하려 했다. 이러한 상황은 이범진 퇴진 이후 정계를 주도했던 이완용에게는 새로운 갈등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이완용은 왕을 중심으로 하는 통치 체제에 대해서는 동의했지만, 왕실과 정부의 분리를 통해 왕의 권력 행사를 일정하게 제약하고 내각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왕과 내각이 조화를 이루면서 통치권의 일부인 행정권을 내각이 어느 정도 행사하겠다는 것이었다. 고종의 입장에서 보면, 왕실과 정부의 분리라는 갑오개혁의 원칙이 관철될 경우 통치권의 일부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그는 의정부 제도를 부활시켜 행정 권력을 다시 자신의 통치권 내로 편입시키고자 했다."(102-4)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던 1년 동안 이완용은 고종을 등에 업고 세력을 얻은 보수 세력에 맞서 정동파의 입지를 유지하려 하고 있었다. 정동파가 보수 세력의 반격에 맞서는 동안 고종과 러시아공사 사이에서 통역을 담당했던 김홍륙은 이용익 등과 결탁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한편 1896년 10월 21일, 니콜라이 황제의 대관식에 참석한 민영환이 러시아 차관을 얻는 데 실패한 채 러시아 군사교관 14명만을 데리고 귀국했다. 그는 고종에게 러시아가 적극적으로 조선을 도울 의사가 없으므로 더 이상 러시아공사관에 머물 필요가 없다며 환궁을 요청했다. 이완용은 기대했던 러시아의 원조가 성사되지 않자 실망하는 한편 김홍륙 등을 후원하면서 조선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하려는 러시아공사에 대해 불만을 갖기 시작한다. 이에 그는 일본공사관원과 친분이 있는 독립협회 회장 안경수를 통해 은밀히 일본과의 제휴를 도모했다."(118-9)




"김홍륙 등의 정치 공세로 인해 민영환, 박정양이 정계에서 물러나면서 이완용의 고종 환궁 계획은 성공하지 못한다.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고종의 '총신'에 의해 그는 점차 정계에서 밀려난다. 그러나 정동파는 아직 고종에게 유용한 세력이었다. 김홍륙 등의 득세로 실권은 상실했지만, 미국공사관과 소통할 수 있는 이완용 등을 내각에서 완전히 밀어낼 순 없었다. 또한 보수 세력과 정동파 세력을 서로 견제시킴으로써 왕권을 강화해가던 고종은 김홍륙 등의 독주를 견제할 정치 세력이 필요했다." 경운궁 수리가 마무리되자 더 이상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할 명분이 없어진 고종은 "1897년 2월 20일 마침내 경운궁으로 돌아왔다. 결과적으로 고종의 환궁이 실현되었지만, 이완용은 환궁을 주도하지 못함으로써 자신이 계획했던 미국인 고문을 통한 내정 개혁 역시 실현할 수 없었다." "따라서 정계 개편의 주도권은 환궁으로 왕의 건재를 과시할 수 있었던 고종의 손에 넘어갔다."(124-5)




"1898년 1월, 러시아는 조선에서 부동항을 얻기 위해 목포와 진남포 지역의 토지 매입에 적극 나서는 한편 부산 절영도를 석탄고 기지로 사용하기 위해 조차해줄 것을 요구하면서 군함을 부산에 입항시킨 후 무력시위를 벌였다. 또한 김홍륙, 민종묵, 이용익 등의 친러세력은 한러은행 설립을 주장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영향력이 더욱 커져가자 독립협회는 윤치호와 서재필이 주축이 되어 러시아의 국권 침탈을 비판하는 사회·정치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한 다음 2월 13일 토론회를 개최하여 고종에게 상소를 올리기로 건의한다." 1898년 2월 27일, 양부의 병을 핑계로 서울에 남아 있던 이완용은 "독립협회의 부회장에서 회장으로 선출되면서 명실상부하게 독립협회의 반러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하기 시작한다." "독립협회의 반러운동이 서울을 중심으로 공감대를 형성해가자 러시아공사 스페이어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철수시킬 용의가 있다면서)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137-9)




"갑오개혁 이전의 정계에서 몇 안 되는 개화 성향의 인물로 평가받았던 이완용은 갑오개혁, 을미사변, 아관파천을 거치면서 자신보다 출신 성분이 낮은 사람들과 정치적 행보를 같이 했다. 이들은 정계에 안주하지 않고 인민을 향해 정치적 목소리를 내면서 정치가 겸 언론인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양반 관료로 고종의 신임을 얻어 정계를 주도해왔던 이완용은 이러한 변화에 빠르게 대처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을미사변 전후에 반일을 표명하다가 아관파천 이후 반러로 입장을 바꾸었다는 점 때문에 우리는 그가 변신의 귀재이고, 그래서 을사조약 체결 과정에서 친일파로 변신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간주해왔다. 그러나 고종의 통치권을 회복하여 조선을 개혁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던 이완용에게 그것은 변신이 아니었다. 더구나 고종의 신임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수밖에 없는 권력 구조 속에서 이완용은 일관되게 군주를 보필해야 한다는 자신의 소신을 밀고 나갔다."(143-5)




4장 정계 밖에서 설움을 겪다




"1894년과 1895년에 이완용이 보여준 고종에 대한 충성심과 여전히 고종의 부름을 통해 정치적 입지를 찾으려는 그의 행동은 기존의 권력 구조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위치 지우려는 것이었다. 갑오개혁 시기에 그가 추진한 행정제도와 교육제도의 개혁은 기존 체제 안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전라북도 관찰사로서 보여준 관료적 합리성 역시 기존 지방 행정 체제 안에서 허용 가능한 것이었다. 이완용은 갑오·을미개혁을 거치면서, 그리고 독립협회를 이끌면서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지만, 기존의 권력 가운데서 자신의 입지와 역할을 규정하는 관료로서의 태도를 벗어버린 적은 없었다. 그는 개량적 개혁을 추진하는 정치 관료였다. 그리고 다른 관료에 비해 신중한 성품의 인물로, 유교적 합리성을 교육받았고 근대적 합리성을 체득한 이였다. 그는 체제에 편입된 양반 관료로서 자신의 지위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정세의 흐름과 상황에 맞춰 행동반경을 결정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171-2)




"이완용이 학부대신으로 다시 내각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일본공사 하야시의 추천 때문이었다. 1905년 초에 일진회가 친일 집회를 열었을 때만 해도 이완용은 친러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하야시 공사의 추천을 받을 수 있었을까? 이 시기에 일본공사는 되도록 친일 인사를 입각시켜 고종의 권한을 제한하려 했기 때문에 반일 성향의 인물들은 대부분 내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친러적 이미지를 가진 이완용이 학부대신에 임명된 것은 매우 의외의 일이었다. 그러나 1902년 유길준의 쿠데타 사건으로 이완용과 두터운 관계를 맺고 있던 이하영이 일본공사관을 통해 자신과 이완용 형제의 구원을 요청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면, 이완용은 이하영을 통해 일본공사와 연계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대한제국의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정책 기조로 인해 고종과 이완용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알렌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177-9)




"1905년 9월 5일, 한국에서 일본의 우월권을 승인하는 조항이 들어 있는 포츠머스조약에 러시아가 합의하면서 전쟁이 재발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또한 9월 27일, 영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용인한다는 내용의 제2차 영일동맹을 공개했다. 이로써 일본을 견제할 현실적 가능성도 사라졌다. 갑오·을미년의 위기를 아관파천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기대가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순간이었다. 이때 고종은 측근 세력을 동원하여 미국 등에 지원을 호소할 방안을 고심하고 있었지만, 내각원 중 어느 누구도 이러한 고종의 계획에 함께하지 않았다. 고종 측근들은 내각 대신을 친일 세력으로 몰아가고 있었지만, 내각 대신들은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할 가능성이 사라진 이상 고종의 계획에 가담하지 않았다. 이완용 역시 아관파천 때와 같이 고종을 위해 어떠한 계획도 도모하지 않았다. 자신이 보았던 가능성이 불가능성으로 바뀐 이상 국제 정세는 10년 전처럼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180-1)




5장 애국과 매국의 갈림길에서




1905년 11월 15일, 을사조약 체결을 놓고 이토의 압력에 시달리던 고종은 대신들의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토가 고종의 말에 찬성한 것은 당시 정부의 정책 결정 구조가 의정부에서 각 대신들의 사안을 의논한 후 고종에게 올리면 고종이 최종적으로 가부를 결정하는 형식이었으므로 이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신들이 모두 반대 의견을 표명하더라도 고종이 찬성할 권한은 갖고 있었다. 이토는 이를 잘 알고 있었고, 이완용 또한 그러했다. 그래서 이완용은 "아래에서 대신들이 막아서기 어렵다"고 말함으로써 고종이 결정권자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켰던 것이다. 이날 신하들이 일본공사에게 거절 의사를 전달하기로 대책을 마련한 것은 고종에게 조약 거부의 구실을 제공하는 데 불과했다. 즉 고종이 '신하들이 모두 반대하니 지금 바로 결정하기 어렵다'고 말함으로써 조약 체결을 미루고, 영국·미국·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일 시간을 벌어보자는 것이었다."(195)




"1905년 11월 17일, 소위 '을사5적'으로 불리는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5명의 대신이 '가(可)'에 서명하여 체결된 을사조약 내용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국내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에서 동양 평화의 화신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을 배신했고, 내각 대신이 임금과 백성을 저버리며 일신의 영화만을 추구했다고 비난했다. 장지연은 을사조약 체결의 책임을 이토와 내각 대신들에게 떠넘긴 채 대한제국 권력의 핵심인 고종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한한 충성심을 보여주었다. 이 글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각지의 유생들은 을사5적을 처단하고 조약을 무효화하라는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고, 도끼를 등에 메고 대궐 앞에 엎드려 읍소하기 시작했다. 민영환 역시 유생들과 함께 상소를 올리고 대궐 앞에서 읍소했는데, 일본 헌병들이 이들을 강제로 해산시키자 울분을 참지 못한 채 결국 자결한다."(198-9)




"대부분의 유생들이 최고 결정권자였던 고종을 차마 거론하지 못한 채 모든 책임을 을사5적에게 떠넘기고 있었지만, 최익현은 고종의 허약과 무능을 정면으로 엄중하게 꾸짖었다. 을사5적을 처단하라는 유생들의 상소에 대해 '충심을 알고 있다'라는 비답을 내려왔던 고종은 최익현의 상소에 대해서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임오군란과 갑오농민전쟁에서 보여준 백성들의 힘과 분노를 두려워했던 지배 엘리트들은 백성들에게 나라의 주권을 일부 넘겨주는 것을 불안하게 여겼다. 그래서 이들은 왕과 인민 사이에서 양자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지배 엘리트 중심의 정당을 구상했다. 입헌군주제와 지배 엘리트가 장악한 정당의 수립이 그들이 생각하는 정체였다. 이러한 구상은 기존 체제를 크게 변화시키지 않는 가운데 왕권을 조금 제한하고, 백성들의 요구를 조금 수용하는 절충적인 형태였다. 따라서 이들은 왕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 없었고, 또한 부정해서도 안 되었다."(201-3)




"이완용은 을사조약이 체결되면 대한제국이 국가적 위기에 봉착할 것임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이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어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완용은 일본 정부의 강력한 관철 의지를 확인한 후 고종이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거절 의사를 표명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서 자신의 역할을 결정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판단 속에서 조약문을 수정하여 되도록 왕권 행사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꾼 것이었다. 그래서 통감의 권한을 외교에 한정시킴으로써 고종의 통치권을 침해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 이완용은 현실 상황에 맞춰 자신의 입지를 정하는 매우 합리적인 사람이었고, 그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방향으로 결과를 이끌어내려고 노력하는 매우 실용적인 인물이었다. 국가적 위기 앞에서 울분과 분노에 치를 떨기보다는, 또 현실을 바꾸려고 몸부림치기보다는 상황에 자신을 맞출 수 있는 합리성과 실용성을 갖춘 관료였다."(206-7)




"이완용의 행동은 용서할 수 없었지만, 합리성과 실용주의로 포장된 이완용의 주장은 조금씩 대한제국 지식인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대한자강회를 비롯한 계몽운동 단체와 근대 문명을 받아들인 유학파 지식인들은 을사조약에서 명시했던 "한국이 부강을 인할 시"까지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하겠다는 약속에 근거하여 부강을 위한 실력 양성의 기치를 더욱 높이 내걸었다.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스웨덴-노르웨이 제국 등 실질적으로는 식민지에 가깝지만 형식적으로는 국가 연방의 형태로 통합된 나라들, 그리고 독일과 미국 등의 연방 국가들을 소개하면서, 보호국은 식민지와 다르며 대한제국이 부강해진다면 다시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을 이야기했다. 저항과 투쟁이 사회 혼란을 가중시키고 일본의 강압을 더 불러온다고 생각했던 지식인들은 '실력 양성'만이 독립 주권을 되찾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209-10)




6장 현실주의와 실용주의를 표방하며 친일로 나아가다




"고종의 양위와 정미7조약 체결로 이토의 신임을 더욱 두텁게 얻은 이완용은 자신의 세력과 친인척을 정계에 등용하는 한편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계몽 단체와 일진회를 무력화하려는 계획을 꾸민다." "일진회는 6월 10일 일진회 특별평의원회를 열어 총리대신 이완용의 사직 권고안을 의결함으로써 본격적인 이완용 반대운동을 벌여 나간다. 송병준은 일진회원들을 동원해 여론을 이끌어내고, 일본 군부 세력을 등에 업고 이완용 내각을 전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당시에 일본 정부 내에서는 대한제국 문제를 놓고 두 세력 간의 갈등이 커져가고 있었다. 청일전쟁·러일전쟁의 승리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해갔던 군부 세력은 대한제국에 대한 즉각적인 군사 점령을 주장한 반면, 이토는 주변 열강, 특히 러시아의 눈치를 보면서 대한제국을 점진적으로 점령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일본에 군국주의가 팽배해지면서 이토의 정치적 입지는 축소되어가고 있었다."(229-31)




"1909년 7월 10일 이토의 귀국 연회가 끝나자 소네 통감은 이완용을 불러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감옥 사무를 일본 정부에게 위탁하고,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완전히 보호하는 것이 옳다"고 하면서 '기유각서'의 체결을 요구했다." "이완용은 이미 일본의 지배에 대해 어떠한 회의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일본 차관으로 대한제국이 개발되고 있었고, 강력한 일본의 무력이 대한제국을 전쟁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고 보았다. 순종의 순행 때 행했던, 일본의 지도를 받아 실력을 양성하는 길만이 대한제국을 보존할 수 있다는 이완용의 연설은 대중을 회유하기 위한 연설만이 아니었다. 이는 자신의 행동과 역할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최면이기도 했다. 사법권의 위탁으로 대한제국 언론은 이완용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가장 중요한 통치 수단인 사법권 이양은 통치권의 상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236-7)




"주권의 핵심 내용이었던 통치권을 이양하되, 국호와 왕실을 그대로 두는 형태의 병합은 1905년 이후 대한제국 지식인들이 수용한 국가연합 이론에서도 언급되었던 형태였다." "국호와 황실의 존재는 대한제국의 멸망이란 충격을 완화시키는 방법이었다." "데라우치는 이완용의 제안 중 국호 문제는 양보하지 않았다. 대외적으로 독립 제국임을 선포했던 대한제국이란 국호를 존속시킬 경우, 일본 황족에 포섭된 대한제국 황실의 지위 문제가 맞아떨어지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한국 또는 대한제국이 국제법상 독립국이란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청의 속국인 왕조 국가란 이미지가 있는 조선이란 국호를 고집했던 것 같다. 데라우치는 대한제국 국호 사용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대신 왕의 칭호 존속 요구를 수용했다. 데라우치와의 협상을 마친 이완용은 8월 22일 순종을 알현하고 한일병햡조약에 대한 전권 위임장을 받았다. 그는 곧바로 통감부에 가서 데라우치와 회견하고 조약에 조인했다."(253)




"순종은 이왕(李王)이란 호칭에 불만을 표했다. 병합 조칙이 발표되기 전날인 8월 28일, 순종은 궁내부대신 민병석을 데라우치 통감에게 보내 일본 측이 제시한 '왕'을 '대왕'으로 정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순종이 끝까지 황실의 지위 문제를 고집했던 점으로 미루어본다면, 협상 전 이완용과 만났을 때 고종과 순종이 끝까지 관철시키려 했던 것은 황실의 지위 문제였음이 분명해 보인다. 더구나 데라우치와의 협상에서 이완용이 관철하려 했던 것이 왕호, 즉 황제와 황실에 대한 지위 문제였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그 가능성은 더욱 높아 보인다. 결과적으로 고종과 순종, 그리고 황실의 지위가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8월 29일 일본 천황의 이름으로 '한국을 제국에 병합하는 건'이 선포되고, 고종과 순종을 각각 덕수궁 이태왕과 창덕궁 이왕으로 책봉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자국의 황실 전범에 없는 '왕공족(王公族)'이란 제도를 만들었고, 대한제국의 국호를 조선으로 개칭하는 칙령이 선포되었다."(254-5)




7장 권력의 정점에서 지탄의 절정으로




# 1926년 2월 11일 이완용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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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35 2019-07-01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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