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26

98 일본을 ‘좋은 이웃’으로-김정기(外大교수) :: 문화일보 munhwa.com

일본을 ‘좋은 이웃’으로-김정기(外大교수) :: 문화일보 munhwa.com

오피니언포럼
일본을 ‘좋은 이웃’으로-김정기(外大교수)
입력 1998-05-01 

김정기 외국어대 신문방송학 교수


65년 한·일 국교정상화후 우리나라 정부가 그동안 일본 문화에 대해 취해온 빗장걸기 정책이란, 한마디로 ‘일본은 없다’는 식으로 대응하는 감정적인 억지가 현실에서 倒錯(도착)한 反日神話(반일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다시 말하면 버젓이 존재하는 이웃이 과거 나쁜 이웃이라고 하여 ‘없는 이웃’으로 만들어 국민의 반일 감정에만 영합한 가짜 신화를 만들었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지금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빽빽이 들어선 노래방을 보라. 이는 정확히 말해 1990년 여름 일본에서 등장한 ‘가라오케 박스’가 현해탄을 건너 그 다음해 봄 부산에 상륙해 ‘노래방’으로 새로 태어난 대중문화의 명물이다. ‘가라오케 박스’가 ‘노래방’으로 한국에서 다시 태어난 것은 ‘歌舞(가무)’를 좋아하는 東夷(동이)민족의 폭넓은 외래문화 수용력 덕분에 가능했다.

노래방이 변태적으로 타락하지 않는 한 도회의 수많은 ‘아가씨와 건달’들을 퇴폐적인 카바레로 내모는 대신 그들에게 흥겨운 노래를 교환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공간을 제공해주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이미 길거리뿐만 아니라 안방까지 들어온 일본 대중문화, 또는 지금도 물밀듯이 들어오는 일본 대중문화를 걸러내는 선택,적응,토착의 메커니즘에 눈을 뜨지 못하는 官治行政(관치행정)의 姑息的(고식적)인 사고방식이다. 이와 함께 시급한 문제는 일본 문화의 유입에 따른 우리나라 문화산업의 자생력을 키우는 일이다.

예를 들어 일본 만화출판업은 세계 만화시장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할만큼 위력적이다. 유럽 각국은 오래 전부터 일본 만화의 침투에 대해 공동으로 대처하여 각국 TV방송사들이 어린이 프로그램을 공동 제작하라고 권고하는가 하면 오래 전부터 유럽연합 본부에 미디어부를 두어 ‘동물 만화’‘교육만화’ 등 양질의 어린이 만화를 제작하고 있다.


‘문화 빗장정책’저질만 유입한편 우리나라는 ‘일본은 없다’식으로 대처하는 동안 거대한 일본 만화산업이 우리 만화시장을 석권하다시피 지배하고 있다. 벌써 십수년 전 ‘드래곤 볼’이라는 일본만화가 나오자 단번에 폭발적 인기를 누리면서 우리나라 만화시장을 석권했다. 그러자 너나할 것 없이 만화출판사들이 일본만화를 전재하는가 하면 불법 복제된 일본 만화가 뒷골목을 누비고 있다. 현재 한해 4백만부 이상 일본만화가 팔려 나가는 가운데 국내 만화 잡지들은 초라하게 연명하면서 죽어가는 현실이다.

이는 모두 ‘일본은 없다’식으로 대응한 대일문화 정책의 부재가 낳은 결과다. 일본문화 빗장걸기로 인해 저질문화가 뒷문으로 들어오는 사례로 일본 폭력만화를 들 수 있으며, 좋은 문화가 들어오지 못한 사례로 ‘사랑의 묵시록’같은 영화를 예로 들 수 있다. 이 영화가 한평생 한국 고아들을 헌신적으로 돌본 한 일본 여성을 주인공으로한 감동적인 인간 드라마로서 양국 국민들의 공감을 살 만한 훌륭한 작품인데도 제작사가 일본에 속한다는 이유로 상영불가 판정이 난 것은 일본 문화 빗장걸기 정책이 얼마나 경직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문제는 ‘일본은 없다’식의 도착된 反日神話가 우리 사회 중요한 계층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언론은 일본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倭色(왜색)’으로 몰고가는가 하면 일본에 관해 좋은 뉴스를 전하는 데는 인색하면서도 나쁜 뉴스에 대해서 針小棒大(침소봉대)하는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서울대학이 입학시험이 부과하는 제2외국어에서 일본어를 제외한 것은 감정적일 뿐만 아니라 時代錯誤(시대착오)가 아닐 수 없다.


고급문화개방 이해폭 넓혀야일본은 싫든 좋든 우리나라의 이웃이다. 나쁜 이웃이 저지른 잘못은 잊지는 말되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는 미래를 미리 차단하지 않는 지혜를 갖는 것이 두 나라의 진정한 이웃관계 복원을 위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매스컴은 일본 대중문화의 개방안을 떠들고 있으나 일본 고급문화에 대한 문호 개방이야말로 일본을 좋은 이웃으로 보는 국민의 안목을 키울 것이다. 예를 들어 가부키(歌舞伎)와 같은 일본적 고전 오페라, 하이쿠와 같은 일본의 短詩(단시), 노(能)와 같은 가면극 등은 일본인의 정서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국가간 문화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통제하던 시대는 지났다. 예를 들어 하이쿠에 대해서는 한국에 벌써 일본을 이해하는 동호그룹이 생겨나 있다. ‘풀피리’(구사부에·草笛)라는 이 동아리 모임은 회원이 30여명에 이르러 풍광좋은 한국의 山河(산하)를 누비면서 일본의 고급문화를 익히고 있어 일본을 좋은 이웃으로 만드는 가교역을 하고 있다.

<김정기 외국어대 신문방송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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