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30

박정미 살아있는 광주를 위한 기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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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미
35 m  · 

살아있는 광주를 위한 기념사

 다시 오월이 왔다가 간다. 
 동네 구립도서관 어두컴컴한 서가를 뒤적이는데 5.18을 소재로 한 중편소설,  <소년이 온다>가 눈에 띄었다. 
얼마 전 부커상을 수상한 한강의 작품이라서 그런지 일곱권이나 꽂혀있다. 망설이다가 그 중 한 권을 빼서 대출데스크로 가져가니 자리에 앉아있던 청년이 반색을 한다.내 과잉된 자의식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훌륭한 책을 선택한, 개념있는 사람을 만나서 반갑다는 듯한 표정이다. 그런 청년이 아주 반갑지만은 않았다.

 집에 와서 앞 페이지를 열어보니 초판은 2014년 5월에 발행됐고 이 책은 그해 6월 찍은 초판 5쇄본이었다. 잘 나간 책이다. 그 동안 많은 사람이 빌려본 듯 표지는 날긋날긋해졌지만 책은 아직도 낙장이 없이 온전했다.

 뒷표지에는 두 문학평론가의 발문이 발췌되어 인쇄되었는데, 몇 줄의 헌사를 읽다가 힘이 쪽 빠졌다. ‘어둠과 폭력’, ‘상처’ ‘잔혹한 학살의 참상’ ‘증언’ ‘소명의식’, ‘간절한 고백의 서사’, ‘순결한 어린 새’, ‘붙들어야 할 역사적 기억’과 같은 단어들로 빽빽했다.


 다들 5월이 오면 이 책을 이야기하길래 궁금했지만 그 케케묵은 헌사를 보자니 도저히 읽을 엄두가 안났다. 도대체 언제까지 5월 광주는 고통의 단어들로 기리는 피해자에 머물러야 하는가.

 언제나 그랬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한편은 사십년이 넘도록 광주를 신성하게 우러러보며 조심스레 향불을 지키며 예우하고 있다. 맞은편은 광주를 자해공갈단의 죽음처럼 침뱉고 묻어버리고 싶어한다. 흡사 아직 사인이 규명되지 않고 피가 마르지 않은 장례식장에서 싸움이 오가는 형국이다. 

하지만 아무리 뒷공론이 치열해도 지난 43년 동안 오월의 진상은 규명되었다. 그 동안 정권이 엎치락뒷치락 바뀌면서 국가차원에서 진상조사가 끝나고 관련자들의 처벌과 보상이 이루어졌다.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과 슬픔은 생이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겠지만 그래도 5월은 역사에 제 좌표를 찾았고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5월이 오면 순결한 소년의 죽음을 내세운 <소년이 온다>를 다시 불러내는 것이 못마땅하다.
다시 광주의 죽음을 애도하며 광주의 순결함을 증명하고 싶은 사람들, 경건한 그들은 자신의 무신경함과 잔인함을 알까? 

올 5월에도 그 숱한 정치인과 언론은 죽은자를 제사 지내려 망월동을 찾았다. 학살과 폭력의 순결한 희생자로서 광주는 다시 소환되고 종교상품처럼 다시 소비된다.

 하지만 광주는 살아있다. 아직도 광주를 5월에 붙박아놓고 싸움질하는 사이 살아남은 소년은 자라 어른이 되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그 때의 소년 나이가 되었다. 광주는 현실을 살아야 하고 돈을 벌어서 아이와 노모를 부양해야 한다.
 광주는 고통의 기억과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만으로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앞으로 나아갈 힘을 낼 수 없다. 고통과 죄책감에서 얻어낼 수 있는 에너지는 서너번도 더 기름을 뽑아내서 부스러진 깻묵보다 더 많이 짜내지 않았던가. 지금 거기에 또 물을 치고 착즙하겠다고 달라드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제 광주는 오월에서 과거의 고통을 파고들게 아니라 미래로 나아갈 희망을 길어올려야 한다. 그런 면에서 윤석열대통령의 5.18기념사는 정말 특별한 시각을 보여주었다.
 윤대통령은 지난해 취임 후 첫 지역방문으로 5월의 광주를 택했다. 
대통령은 광주 5.18 민주화운동 기념사에서 “오월 정신은 보편적 가치의 회복이고, 자유민주주의 헌법정신 그 자체”라며 “5.18은 현재도 진행 중인 살아있는 역사다. 이를 책임있게 계승해나가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후손과 나라의 번영을 위한 출발”이라고 말했다.
 윤대통령은 올해도 망월동을 찾아 “자유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피로써 지켜낸 오월의 항거”가 오월정신임을 반복해 강조했다. 

오월의 정신을 부정하려는 세력들과 오월을 이념적, 정치적으로 윤색하려는 세력들에 맞서 오월의 좌표를 확인한 것이다.

 올해 대통령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한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갔다.
 윤대통령은 “오월의 정신은 자유와 창의, 그리고 혁신을 통해 광주와 호남의 산업적 성취와 경제발전에 의해 승화되고 완성된다”고 밝혔다.

 대통령은 “저는 광주와 호남이 자유와 혁신을 바탕으로 AI와 첨단 과학기술의 고도화를 이루어내고, 이러한 성취를 미래세대에게 계승시킬 수 있도록 대통령으로서 제대로 뒷받침하겠습니다.”라고 개인적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역대 대통령의 기념사보다 꽤 짧았고, 5.18 기념사에서 경제발전이라는 단어가 나온다는 것이 생경했다. 야당도 대부분의 언론도 성의도 없고 내용도 없는 겉치레용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구구절절 죽은 오월을 불러내고 고통을 쥐어짜는 그 숱한 기념사가 겉치레인가, 관성을 깨고 살아남은 광주에 대해 처음으로 희망의 말을 건네는 기념사가 겉치레인가.
윤대통령은 역대 대통령과 다르게 처음으로 죽은 광주가 아닌, 살아있는 광주를 향해 기념사를 썼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으로 발목이 잡힌 도시가 아니라, 인권과 자유의 도시로서의 자기정체성을 찾고 자유와 창의의 정신으로 새롭게 깨어날 때가 왔음을 알렸다.
 지금 살아있는 광주사람이 잘 살아갈 수 있는 광주, 힘차게 움직이는 생활력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광주, 서울로 오지 않고도 고향에 일자리를 가지고 대대손손 살아갈 수 있는 풍요로운 광주의 꿈을 제시했다.
 그런 도시를 만드는 것은 자유와 창의의 정신으로 움직이는 도시의 기풍이다. 오월의 정신이 자유와 창의가 넘치는 도시 기풍의 밑거름이 될 것임을 대통령은 꿰뚫어본 것이다.
 이번 오월은 특별한 오월이다. 국가권력의 체현자가 기념사로 살아있는 광주에게 말을 건 최초의 오월이다.
 광주가 좌에도 우에도 발목잡히지 않고 보편가치의 단단한 중심을 잡고 광주만의 새롭고 대담한 미래를 열어가는 것이 진정한 오월정신의 계승이라고 한다.
광주가 첨단과학과 산업의 중심도시로 발전하여 오월의 정신을 드러내는 드높은 건축물을 도청옆 하늘 높이 우뚝우뚝 새로 들어올리면 얼마나 좋을까.
광주가 살아있음을 일깨우는 새 오월이다.


Comments

이헌목
깊이 공감합니다!
Reply6 m
박정미
이헌목 고맙습니당! 비개인 오월의 남은 날들이 아름답습니다.
Reply5 m
Ilwon Yoon
오우, 평론이 매우 좋습니다. 미래의 광주, 죽은 고목에서조차 꽃을 피우는 5월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해양으로 향했던 그 힘을 다시 되살려낸다면 못할것도 없는 광주, 그 빛을 다시 한번 보고 싶네요.
Reply4 m
김윤
깊이 공감합니다.
Reply2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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