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26

전라도 전년사

 사

자료 제공(가나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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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본 총설은 2018년 전라도 전년을 기념하여 전라도 3개 광역시도의 후원으로 전라도천년사편찬위원회에서 한국사 속 전 라도의 역사를 새롭게 인식하고자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의 전라도 역사와 문화를 편찬한 전라도 천년사 통사 29권의 내 용을 압축•정리한 것이다.

2 '전라도의 위상과 역할을 주제로 1편 전라도 자연환경과 인문, 2편 전라도의 역사적 흐름, 3편 전라도 정신과 문화로 구성 하였다.

3. 역사 서술은 일반 시민 대상의 교양)`目수준으로 하였다

4. 한글 전용을 원칙으로 하되, 의미 전달이 어려운 경우에 한하여 한자를 병기하였다.

5. 사료 인용 등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호남' 대신 '전라도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6. 각 원고는 감수위원회의 감수와 전문가의 교열• 윤문, 집필자의 최종 검토를 거쳤다 

7. 역사 용어의 사용이나 역사 사실에 대한 이해가 다르게 쓰인 경우도 있는데, 이는 해당 집필자의 견해를 존중하였기 때문 이다.

8. 본 총설은 통사 29권을 압축• 정리하였기에 미주 및 참고문현은 생략하였다.

9 집필자명은 개별 집필항목 맨 마지막과 책 앞부분에 일괄 표기하였다.

10. 사진 자료의 출처 및 제공처는 일괄 표기하였으며, 세부 사항은 통사에 병기하였다 

 01

총설 

전라도 찬년사 편수上의 원 회㉭

 


 

2022년 전라북도광주광역사전라남도는 5년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전라 도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전라도 천년사』를 출간하게 되었습니다『전라도 천

년사』는 3개 시도의 역사와 문화를 34권에 담은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전례 를찾기 힘든 방대한규모의 지역사입니다.

전라도 천년이 되던 해를 맞이하여 3개 시도는 앞으로 나아갈 천년은 각

자 도생의 길이 아닌 서로간의 화합과 상생의 길이라는 점에 공감하고, 역사적

발전에 뜻을 함/게하여 전라도 지역사 편찬사업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전라도는 한민족 역사의 흐름에서 외세가 침입할 때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수문장 역할을 담당해 왔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는 이순신의 말처럼 전라도 지역은 인적, 물적 자원의 근거지였으며, 문화• 예술 또한 우리 한민족 문화원형의 근간이었습니다.

문화가 곧 경쟁력인 시대에『전라도 천년사』발간을 통해 우리는 전라도 역사와 문화의 소중함을 알고, 자연스럽게 지역에 대한 정체성과 자긍심을 되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전라도의 긍정과 희망의 기운을 국내뿐만 아니라 전세계로 퍼져 나가게 해야 합니다 과거 전라도가 외세를 막는 수문장이었다 면, 이제 미래 전라도는 지역 역사문화글로벌화의 첨병이 되어야합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편찬사업을 이끌어 주신 편찬위원장과 긴 시간 동 안 에써주신 집필위원 여러분의 노고와 열정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또한 편찬 사업에 참여한 관계자 여러분께도 감사를 전합니다.

전라북도광주광역사전라남도는 솥의 세 발처럼 지난 천년의 길을 함께 걸어 오며 전라도의 안정과 번영, 희노애락을 같이하였습니다 미래 새천년의 길 또한 서로간의 화합과 균형발전을 통해 함께 혁신하고, 함께 성공하는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함께 전라도 사람들이 신명나는 새로운 세상을 위해 힘 차게 나아갑시다 감사합니다.

2022년 12월 전라북도지사 김 관 영

반갑습니다 광주광역시장 강기정입니다.

2018년 전라도 천년을 맞아 시작된 편찬사업이 5년간의 오랜 노력의 결 과, 마침내 결실을 맺었습니다. 무엇보다 광주, 전남, 전북, 3개 시도가 뜻을 모

아 공동으로 추진해 온 사업이라 더욱 의미가 깊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그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오신 편찬위원님들과 집필진, 학계 전문가를 비

롯한 모든 분들의 노고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지난 천년 동안 전라도는 역사뼹정끝화교통 등 모든 분야에서 우리나라 의 중심지였습니다 영산강을 중심으로 한 풍부한 농토는 경제적 토대였고 지 리적으로 바다와도 인접해 해상교역도 활발히 이루어진 지역입니다. 지방통치 제도가 가장 먼저 시작된 곳도 바로 전라도입니다.

이러한 전라도의 축적된 시간과 역사를 오롯이 담아낸『전라도 천년사』가 발간되어 참으로 반갑고 기쁩니다. 통사 29권, 자료집 4권, 총설 1권 등 총 34 권의 방대한 분량입니다.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오신 많은 분들의 헌신과 땀이 고스란히 배여 있는큰 성과입니다.

우리는 이 안에서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한 부리를 찾는 한편, 광주와 전남, 전북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함께 열어갈 동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운명공동체인 3개 시도가 힘과 지혜를 모아 찬란한 천년의 역 사를 새롭게 열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전라도 천년사』가 발간되기까지 애써 주시고 힘 모아주신 모든 분들께 거듭 감사드립니다. 그 열정과 의지를 모아 우리시 역시 '내*일이 빛나는 기회 도시' 광주를 실현해 모든 시민들의 삶이 빛나고 미래보다 가까운 내일이 빛날 수 있도록 더욱 큰 걸음으로 전진하고 또 전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2년 12월 광주광역시장 강기 정

전라도는 수천 년 전 삼한시대 마한에 그 부리를 두고, 천년의 역사를 찬 란하게 일궈온 유서 깊은 고장입니다 기후가 온화하고 땅이 기름진 풍요의 고

장이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미행입니다. 고집스러운 예술혼과 장인정신으 로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하고 세계가 감탄하는 문화예술을 꽃피운 '예행

입니다. 진취적 기상과 열정으로 굴곡진 시대의 고비마다 의병활동, 독립운동, 민주화운동을 펼치며 국가를 살리고 역사를 바로잡은 '의형입니다.

이처럼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변화를 선도하며 오늘의 대 한민국을 이끌어 온 전라도의 고고하고 위대한 기백이 다시금 절실히 요구되 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기후변화와 경제위기, 그리고 대전환의 거센 파고 속에 서 전라도가 다시 한번 한반도의 중심으로서 영광스러운 천년의 역사를 써 내 려가야할때입니다.

이런 시점에 전라남북도와광주광역시가 함께 힘을 모아 엮은 34권의『전 라도 천년사』가 발간되어 대단히 뜻깊습니다. 과거의 역사는 미래의 거울입니 다. 전라도의 지난 천년이 총망라된 이 책은 새로운 미래 천년을 만들어가기 위한 훌륭한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또한, 천년의 역사가 가지는 경제, 사회, 정 치, 문화, 예술 등분야별 의미를 되짚어 봄으로써 전라도 역사의 재조명과 함 께 전라도민의 자긍심을 일깨워줄 것이라 믿습니다.

그동안 짜임새 있고 완성도 높은『전라도 천년사』발간을 위해 에써주신 213명의 집필진과 기명의 편찬위원 여러분, 자료수집에 최선을 다해주신 전북 연구원 관계자 여러분, 그리고 천년사 편찬에 많은 관심과 도움을 주신 모든 분께 깊은 격려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다시 새천년이 밝았습니다. 전라남도는 앞으로도 광주광역시, 전라북도 와 전라도 천년의 역사를 함께 하면서 대통합과 희망의 새 시대를 열어가겠습 니다. 힘을 하나로 모아 세계로 웅비하는 호남 대도약을 반드시 이뤄내겠습니 다 지난 천년이 그러했듯 지역을 넘어 국가를 살리는 전라도의 힘찬 여정에 많 은 지지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2년 12월 전라남도지사 김 영 록

전라도全曪道천년이 되던 2018년, 전라도 3개 시도는 지역민의 자긍심 회 복과 위상 제고 및 이미지 개선을 위해 함께 손을 잡고『전라도 천년사』편찬 찬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1990년대 지방자치제가 부활하면서 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지역 경쟁력 을 강화시켜 줄 수 있다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되었고, 이를 기록하는 시군지 편

찬의 중요성도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2000년대 이후부터는 지역문화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토대로 지역의 역사문화적 특징과 중요성을 발굴하여 지역 정 체성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편찬되기 시작하였습니다.『전라도 천년사』편찬은 이와 같은 시대적 흐름에 발맞춰 우리 전라도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우리의 시 각으로 재정립하여 지역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한편, 한국사의 흐름 속에서 가 리어졌던 전라도의 역사를 제대로 알리고자 시작되었습니다.

『전라도 천년사』는 총설 1권, 통사 29권, 자료집 4권의 총 34권으로, 원고 매수는 5만 3000매가 넘고, 213명의 집필진이 여기에 참여했습니다. 혹자는 『전라도 천년사』책 제목만 보고 단순하게 1000년간의 역사만을 다룬 것이 아 닌가 하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제목의 천년은 영고성쇠의 긴 세월을 의미하 며,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의 방대한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이전에도 이와 같은 거질의 단일 지역사가 발간된 적은 있었지만,『전라도 천년사』는 유일하게 다수의 지역자치단체가 공동 편찬함으로써 지역사 서술 에 있어 소지역주의'에서 벗어나 객관적 시각을 확보할수 있었으며, 지금까지 편찬된 지역사 중 가장 광범위한 지역에 대한 역사서라는 점에서 그 차별성을 갖고 있습니다

2018년 초 전라도 천년을 맞이하여 전라도 지역사 편찬의 필요성에 공감 한 3개 시도는 함께 협력하여『전라도 천년사』편찬사업을 추진하게 되었고, 그 해 4월 전라도천년사편찬위원회가 구성되었습니다. 당시 한국지엠 군산공장 사태와 광주•곡성에 공장을 둔 금호타이어의 해외매각 사태로 지역 민심은 위 축되었고, 편찬사업은 전라도민의 관심사에서 밀려나 있는 듯 했습니다 이와 같이 위축된 분위기 속에서 편찬위원회는 편찬사업이 과거 전라도 천년의 역 사 기록으로 끝나지 않고 미래의 천년을 내다볼 수 있는 희망의 역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임을 도민들에게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고자 5 년에 걸쳐 기명의 편찬위원과 집필진들은 쉽 없이 매진하였습니다.

편찬위원회는 먼저 선사고대•고려•조선전가조선후가근대•현대의 6개 시

대사 분과를 조직하고, 지역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통사의 목차를 구성 하여 각 주제에 맞는 전문 집필진을 선정했습니다. 또한 편찬 성격, 목표, 집필 방향 및 원고 작성 원칙 등을 규정한 편찬 준거안을 마련하고, 전라도 관련 연 구성과와 연표, 전라감사 인명록을 정리하여 자료집을 제작하였습니다.

2020년 초 통사 29권의 초고가 완성된 후, 전문가 29명으로 구성된 감수 위원회는 2020년 말부터 2022년 초까지 준거안의 준수 여부, 보편적 학설의 기재 여부 등을 1•2차에 걸쳐 검토, 10만 매가 넘는 원고를 감수하였습니다.

순항 중이던 편찬사업에도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2020년부 터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확산 및 장기화되면서 원활한 토 론이 불가하였고, 고통받는 집필진이 발생하는 등 편찬사업 또한 난항을 겪었 습니다 이와 같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집필진들이 감수의견을 반영하고 퇴 고를 거듭하며 원고를 탈고해 주신 덕분에, 완성된 원고 속에는 오늘날까지 지 나온 전라도 사람들의 삶과 문화가 잘 녹아들 수 있었습니다. 이 지면을 빌어 원고의 완성을 위해 부단히 에써주신 감수위원과 집필진들의 노고에 다시 한 번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또한 5년간의 사업 동안 한결같이 편찬위원회의 의견을 존중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은 3개 시도 지자제와 편찬사업의 실무를 맡아 사업 기간 내내 편찬위 원회와 집필진을 묵묵히 보필해 준 전북연구원에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전라도 천년사』와 같이 다수의 지자제와 200명이 넘는 집필진이 참여한 대규모 공동 편찬사업은 전에도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진행되기 어려울 것입 니다. 그만큼 어렵고 힘든 작업이었기에, 이 편찬사업에 한 사람의 집필자로서, 그리고 편찬위원장으로서 소임을 다한 점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전라도 천년사』가 전라도 도민들에게는 지역의 정체성을 일깨우고, 전라 도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든든한 안내서의 역할을 하 게 되길 바랍니다. 또한 자라나는 미래세대에는 한국사 속 전라도의 역사를 새 롭게 인식하게 되는 디딤돌이 되길 바랍니다. 이로 인해 전라도 천년사가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고 세대와 민족을 화합하며, 미래를 밝히는 새로운 초석이 되길 희망합니다.

2022년 12월 전라도천년사편찬위원장 이 재 운

초八니

전라도의 위상과 역할

개관 제1편 전라도 자연환경과 인문 013

025

제1장. 자연환경

1. 전라도의 이웃, 충청도-경상도

2. 산줄기의 동남부

3 물술기의 서남부

4 서해와 남해 두 바다

5. 온화한기후 026

026

028

030

032

034

제2장. 인문환경

1. 생활의 터전 - 행정구역의 변전

2. 생업의 현장 - 산업의 발전

3. 정치적 역동성

제2편 전라도의 역사적 흐름 038

039

041

044

047

제1장. 선사고대

1. 전라도 지역의 구석기, 신석) |문화

2. 청동, 철기 문화와 전라도 고인돌

3. 고조선 준왕의 남래와 마한 사회

4. 백제 중흥, 부흥, 부활의 땅 전라도 048

048

052

058

062

제2장. 고러시대 078

1. 전라도 역사에서 고려의 위치 078

2. 고려초 지역사회의 동향 081

3. 사회와 경제 085

4 격동과 변혁 속의 지역사회 087

5. 문화와 예술 091

6.고려시2 | 전라도 역사를 보는 관점 095

제3장. 제4장. 제5장.

제6장.

제3편 전라도 조선전기

1. 조선왕조를 싹틔운 전라도

2 전라감영과 전라도 군현편제

3. 조선 제일의 곡창지대 전라도

4. 호남사림의 형성과 중앙 진출

5. 정여립 모반사건과 전라도

6. 나라와 역사를 지긴 전라도 099

099

103

108

111

115

119

조선후기

1. 정치의 격동적 변화

2. 풍부한 물산과 경제

3. 학문과 사상

4. 문학과 예술 124

124

127

129

136

근대

1. 조선후기 내우외환의 시련과 대응

2. 한말 일제의 국권 침탈과 전라도인의 저항

3. 일제의 식민지배와 수탈체제의 강화

4. 일제강점기 전라도인들의 민족운동

5. 근대시기 전라도인들의 생활과 문화 144

144

148

151

155

159

현대

1. 해방을 맞이하며

2. 분단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3. 독재에 저항하다

4. 한국 민주주의의 심장

5. 새로운 전년을 모색하며 165

165

168

173

178

182

정신과 문화 185

제1장. 종교와 사상

1. 종교2. 사상 186

186

199

 

제2장. 문학과 예술 212

1 문학 212

2. 출판편어 223

3 판소리 232

4. 회화도자因예 242

 

제3장. 생활과 문화 262

1. 음식 262

2. 민속 274

3. 성과 바다 284

4. 특산물 295

개관

013

 

현재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북도 지역을 아울러 전라도全羅道라고 한다. 전라도는 지방행정 단위이자 하나의 지리적 공간을 일컫는다.『고려사에 따 르면, 1018년(현종 9) 행정구역 개편 당시 전북 일원의 강남도江南道와 전남, 광 주 일원의 해양도海陽道를 합치면서 양 지역의 큰 도시였던 전주全州와 나주  州의 첫 글자를 따서 '전라도가 만들어졌다. 전라도는 조선팔도 중 가장 오래 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후 지명이나 영역의 큰 변화 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라도는 대한민국 서남부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섬진강과 소백산맥을 경계로 경상남•북도와 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황해를 사이에 두고 중국과 마 주보고 있다. 남쪽으로는 다도해와 제주해협을 건너 제주도와 마주보며, 북 쪽은 충청남도 금산•논산뿌여•서천군, 충청북도의 영동군과 접해 있다. 이 와같이 전라도는 지정학적으로 서쪽에는 중국, 동남쪽에는 일본이 있는, 동 북아의 중심이자 유라시아 대륙의 기점이다.

전라도의 지형은 크게 서부 평야지대와 동부 산간지대로 나뉘어 동쪽은 높고, 서쪽은 낮은 계단식 지형을 이루고 있다. 서부는 만경강•동진강•영산강

유역권에 넓은 평야지대가 발달되어 있고, 군산반도, 변산반도, 해남반도, 고 홍반도 등의 해안선이 서해와 남해안으로 연결되어 있다. 동부는 소백산맥, 노령산맥 등이 산악지대를 이루고 있다. 평야지대가 30~50%를 자지하고 있 어 전국적으로 볼 때 평야지대가 비교적 많은 편이다.

014 전라도 서북부의 동진강, 만경강 유역의 호남평야와 영산강 유역의 나주 평야는 전라도의 대표적인 평야지대로 우리나라 최대 곡창지대이다. 호남평 야는 전라북도 면적의 3분의 1을 자지하며, 전라북도 총 경지면적의 70%를 전 차지한다. 전주•익산•군산•정읍•김제 등 5개 시와 부안•완주•고창 등 3개 군 이 포함된다. 흔히 동진강 유역에 펼쳐진 평야를 김제평야, 만경강 유역에 펼 쳐진 평야를 만경평야라 부르기도 한다. 동진강을 비롯한 이들 하천은 넓은 4 호남평야에 비하여 규모가 작아 전 지역을 관개할 수 없기 때문에 삼국시대 부터 벽골제 등의 저수지가 축조되었다. 특히 벽골제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저수지로, 그 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수축築되었다. 나주평야는 영산강 중류의 나주시 일대에 넓게 펼쳐진 충적지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그 중심은 황룡강과 지석천이 영산강으로 유입하는 합류 지점 일대이다. 이 지 역의 벼농사는 백제시대부터 시작되었고, 연간 5만 톤 이상의 쌀을 생산하는 전라남도 제일의 곡창지대이다. 이와같이 호남평야와 나주평야가 있는 전라 도는 대한민국 쌀의 주산지로 한국 농업의 상징적인 곳이다.

전라도 기후의 특징은 남북의 차이보다는 동서의 차이가 크다. 동고서저 의 지형적 영향으로 바다와 면한 면적이 많은 서부 연안 및 도서지역은 대체 로 해양성 기후의 특징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 때문에 기온 연교차가 적고 강 우량은 적으나 겨울철 북서계절풍의 영향으로 눈이 많이 내린다. 반면 소백 산맥, 노령산맥 등의 산악지대인 동부 내륙지역은 대륙성 기후의 특성이 강 하다. 소백산맥에 따른 지형성 강우현상이 나타나며, 서해안에 비해 기온 연 교자가 크고 강우량이 많다.

전라도 지역에 살았던 최초 인류의 흔적은 약 10만 년 전 중기 구석기시 대부터 나타나고 있다. 전라도 지역 구석기시대 유적들의 중심연대는 약 5만 년 전~3만 년 전으로 전주 사근리 유적, 진안 진그늘 유적, 나주 당가 유적,

나주 촌곡리 유적 등이 있다.

기원전 5세기경 청동기시대에 북방 지역 이주민의 문화가 전라도에 유입 되었다. 청동기시대 중기 이후 전라도의 지역문화는 외부의 문화와 주민 이주 에 개방적이었고, 그 결과 송국리형문화나 점토대토기문화 등 다양한 문화가 꽃을 피웠다. 청동기시대 중•후기를 대표하는 문화유형인 송국리형문화는 015

충청 • 전라• 경상 지역과 제주도는 물론 일본 큐슈 지역까지 넓게 분포하였다.  그중 전라도의 송국리형문화는 제주도 삼양동유적과 같은 해양거점취락의 기반이 되었고, 일본 큐슈 일대 야요이(미생彌生) 문화의 형성과 발전에 영향 을 끼쳤다. 이와같이 외부 문화에 개방적이었던 전라도는 동시에 다양한 문 화 교통로로서 핵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편, 전라도 청동기 문화 고유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고인 돌(지석묘支石墓)을 들 수 있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양식이자 초기철기시대까지 존속한 거석문화의 일종으로 정치세력 형성과 국가 성립시 기의 사회상을 반영한다. 고인돌은 한국을 대표하는 선사유적으로, 전 세계 적으로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그중에서도 전라도는 우 리나라 분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도 고인돌이 가장 밀집된 곳이다. '고창, 화 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은 장례 및 제례를 위한 거석문화 유산으로 세계의 다 른 어떤 유적보다 선사시대의 기술과 사회상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는 점에서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거석문화로 공인되었다.

기원전 2세기를 전후하여 중국 전국시대의 철기가 유입되면서 고조선 및 중국계 문화가 전래되었고, 전라도는 마한의 중심 지역으로 성장하였다. 중국 사서『삼국지』동이전에 따르면 고조선 준왕準王이 정변으로 남하, 한韓 의 왕이 되어 마한을 다스렸으며, 이후 진한, 변한이 생겼다고 한다. 준왕이 이동한 지역에 대해『제왕운기』,『고려사』,『세종실록지리지』등은 전북 익산 지역으로 보고 있다.

17세기 홍여하를 필두로 이익, 안정복 등 조선후기 학자들은 마한을 정 통으로 파악하였다.『성호선생문집』권38에서 이익은 기자조선의 정통은 기

준이 남하하여 세운 마한으로 이어진다고 하여 역사적 정통성이 삼한 지역 에 있음을 강조하는 삼한정통론을 주장하였다.

철기시대에 접어들면서 묘제에 있어서 고인돌 형식의 묘제는 사라지고 지하에 장방형의 구덩이(묘광墓壙)를 파고 시체를 매장하는 토광묘나 큰 독이 016 나 항아리 등의 토기를 관으로 이용하는 옹관묘의 형태가 만들어진다.

만경강 유역의 전주와 익산, 그리고 완주와 김제 일대의 토광묘 등이 이 를 뒷받침한다. 한편 전라도 서부 지역에는 3세기부터 옹관묘가 괄목할 만한 전 형태와 크기로 발전하였는데, 나주 반남고분군은 대형 옹관고분의 대표 유적 지이다. 반남고분군에는 전통 옹관 묘제를 유지하면서도 백제계 금동관, 금 동신발, 가야계 화살통 등이 부장되어 있어 백제의 직간접적인 영향력에서

4 이탈, 독자화 하려는, 유력 수장의 면모를 볼 수 있다. 54개 마한 소국 중 전라 도 지역에 위치한 마한 소국들은 삼국시대에 점차적으로 백제에 병합되었다. 백제는 한강, 예성강, 임진강 및 충청, 전라 지역 서해안 포구를 중심으로 성장해 동아시아 해양 중심국가로 부상했고, 전라도 지역은 백제 해양진출 및 교류의 중요 거점이었다. 백제의 수도는 한성(서울)-웅진(공주)-사비(부여) 지 역으로 이어진다. 600년 즉위한 무왕은『삼국유사』속 서동설화 등을 통해 볼 때, 즉위 과정에서 익산 지역 세력과 밀접한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익산 지역에는 삼국 최대 사찰인 미록사지와 왕궁지인 왕궁리 유 적이 남아 있다. 왕궁리 유적은 체계적, 계획적으로 조성된 왕궁으로 외곽 담 장 및 내부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 백제 유일한 왕궁 유적이다. 이를 통해 무 왕이 즉위 후 익산을 백제의 새로운 터전으로 정하고, 미록신앙을 기반으로 사찰과 도성을 조성하여 백제의 중흥을 꾀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익 산시는 공주시, 부여군과 함께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 구로 지정되었고, 익산의 미록사지와 왕궁리 유적은 사비시대 백제왕국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통일신라말 중앙의 통치력이 약화되면서, 각 지역에서는 호족 세력이 할 거하고 지방 군웅이 등장하였다. 견훤은 백제의 부흥을 내세우며 후백제를 세웠고, 궁예는 고구려의 부흥을 내걸고 후고구려를 세웠다. 당시 서남해안

의 비장婢將으로 있던 견훤은 892년(진성여왕 6) 무진주(현 광주광역시)를 기반 으로 성장하여, 900년 완산주(현 전주를 도읍으로 정한 후 백제 의자왕의 원 한을 씻는다는 명분을 내걸고 후백제의 왕이 되었다. 후백제(892~936)는 신 라, 후고구려와 함께 후삼국시대 패권을 다퉜고, 견훤은 고조선-마한-백제후백제로 이어지는 역사적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천도 이후 017 견훤은 후백제 국호와 정개正開연호를 제정하였고,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였  다. 이후 대내적으로는 설관분직設官分職등 정치조직을 정비해 본격적인 국가 체제의 면모를 갖추었고, 대외적으로는 오월, 후당, 거란 및 일본에 사신을 보 내 교류함으로써 국제적인 위상을 확보하였다.

후삼국시대 견훤은 공산전투 등 많은 전투에서 전과를 쌓았고, 왕건과 패권을 다퉜지만, 935년 왕위 계승을 둘러싼 문제로 인해 고려에 투항하고, 936년 견훤의 아들인 신검이 선산 부근 일리천전투에서 패함으로써 후백제 는 45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고려 태조는 940년 무주武州를 광주光州로 개편하였고, 983년(성종 기에는 전국에 12목을 설치하면서 전라도 지역에는 전주목, 나주목, 승주목(현 순천)이 설치되었다. 995년(성종 14)에는 3경 4도호부 10도제로 개편되면서 당주(현 영

암)에는 안남도호부, 전북과 전남 지역에 강남도와 해양도가 각각 설치되었다.

1018년(현종 9) 5도 양계가 시행되면서 전북의 강남도와 전남의 해양도 를 합쳐서 전라도라 부르기 시작하였고, 전라도라는 명칭은 전주목과 나주 목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들어 졌다. 이때부터 전라도는 하나의 독자적인 지리 적 공간을 가리키는 이름으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 조선 건국 후 전주는 태조 이성계의 본향으로 조선왕조의 풍패지향뻘沛之鄕이 되었다. 풍패는 건국시조, 제왕의 고향을 의미한다. 개국시조인 태조의 어진剷眞을 본향인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봉안한 것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지 니며, 전주와 전라도 지역이 조선왕조의 발상지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1413년 태종은 전국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하면서 각 도에 관찰사 를 파견하였다. 전라도를 총괄하는 도내 최고 지방통치기구인 전라감영이 전 주에 설치되어 조선말까지 존속하였다. 감영의 운영은 임진왜란 전까지는 감

사가 일도를 돌아다니는 행영제行營制였으나 17세기 감영이 독자적인 재정권 을 확보하면서 감영에 머물며 통치하는 유영제留營脚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감사가 집무를 보는 선화당을 비롯해 여러 감영 건물들이 건립되었다.

조선의 지방행정 체제는 1895년(고종 32) 대대적인 개편이 단행되었다. 018 조선초 만들어졌던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공포되었다. 전라도는 전주 부, 남원부, 나주부, 제주부로 개편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96년 13도제 로 재개편되면서 전라도는 전라북도와 전라남도로 나뉘게 되었고, 전라북도 전 관찰사영은 전주에, 전라남도 관찰사영은 광주에 설치되었다. 왜구와 접촉이 극심한 전라도와 경상도에는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상주하는 주진王鎭으로 우수영과 좌수영을 두었다. 전라도우수영은 처음에 무안에 두었다가 1465 4 년 이후 해남으로 이전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우수영은 삼도수군통제 영 휘하 4개의 수영(경상좌수영 • 경상우수영 • 전라좌수영 • 전라우수영) 중 가장 규모 가 컸다. 전라도좌수영은 1479년(성종 10) 이후 순천 오동포(현 여수)에 두었다. 4개 수영 중 현재 유일하게 온전히 보존되어 있으며, 영내 우물자리에는 방죽 샘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여러 해전에서 왜의 함대를 격파하 였다. 이순신은 옥포 해전에서 처음 승리를 거두었고,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 상우수사 원균과 함께 한산도대첩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한산도대첩의 승리 로 조선 수군은 남해의 제해권을 회복할 수 있었고, 불리했던 전세를 전환시 길 수 있었다.

한산도대첩의 승리로 해상에서의 전세가 전환될 무렵, 육상에서도 관 군과 의병을 중심으로 반격을 시작했다. 당시 전라도관찰사 이광은 김제군수 정담, 나주판관 이복남, 해남현감 변응정 등과 함께 관군을 이끌며, 의병장 황박 등과 웅지에서 일본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 결과 일본군은 병력에 큰 손실을 입었고, 동복현감 황진이 이끄는 관군은 대둔산 기슭의 이 치에서 일본군을 패퇴시켰다.

조선은 해상에서의 한산도대첩 승리, 육상에서의 웅지•이치전투 승리를 기반으로 일본군의 호남 진입을 저지했고, 곡창지대인 전라도 지역을 지켜냄

으로써 장기 항전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전라도는 조선시대 제일의 곡창지대로 16세기 이후 국가재정의 30% 이상 을 담당했다『호구총수』를 통해 1789년(정조 13) 인구수를 살펴보면, 전라도는,

1위인 경상도, 2위인 평안도와 근소한 차이로 3위를 자지하고 있다. 그런데 전 결田수를 보면 전라도가 조선 전체에서 가장 많아, 당시 전라도 사람들의 경 019 제적 형편이 타 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았음을 보여준다. 또한 전라도는 서남  해안의 바다를 무대로 수산업과 조선업이 발달한 경제의 중심지였다『성종실 록』에 따르면 15세기말 전라도 무안 등지에서 장시가 발생하였고,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전국에서 가장 많은 장시가 열리는 곳이었다. 이와 같은 경제적 풍요 를 바탕으로 전라도는 조선시대 문화졔술 분야에서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조선시대 전라도의 문학은 다양한 양상으로 문학사를 주도하였다. 전라 도의 가사문학은 세조의 왕위 찬탈 후 태인에 은거한 정극인이 지은 은일가 사「상춘곡」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담양과 화순 일대 누정을 배경으로 한 송 순의「면앙정가」, 남언기의「고반원가」, 정철의「성산별곡」등의 작품을 통해 문학사에 누정은일가사라는 새로운 유형이 성립하였다. 조선후기에는 특히 장흥에서 가사의 창작이 활발하였는데, 장흥 대기근의 참상을 고발한 작자 미상의「임계탄」과 같은 현실비판가사의 등장이 주목된다.

조선초부터 창작된 시조는 16세기 중엽 이후 송순과 정철이 전라도 지 역에서 면앙정가단과 성산가단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호남가단이 형성되 었다. 이때부터 전라도는 한국문학사에서 본격적인 조명을 받게 되었고, 이후 조선후기 남원의 정훈, 해남의 윤선도, 장흥의 위백규 등이 계승 발전시켰다.

전라도는 한양에서 멀리 남쪽에 위치해 해안과 도서가 많은 지역적 특성 으로 인해 정약용, 김정희, 윤선도 등 많은 이들이 이 지역에 유배되었고, 이들 이 남긴 한시, 시조, 가사, 일기 등의 저술은 전라도 유배문학을 형성하였다.

전라도는 조선후기 시가문학 뿐만 아니라 소설문학도 매우 융성하였는 데, 이는 완판방각본의 유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완판방각본은 조선후기 전주에서 간행된 전라도 사투리가 많은 목판본 책으로서, 한글 소설 뿐만 아 니라 천자문, 사서삼경, 역사서, 그리고 백과사전이나 농사지침서, 병법, 의술

등의 실용서를 포함한 판매를 목적으로 한 책의 통칭이다. 전주는 전라감영 소재지로 전라도에서 생산된 물품이 모여 큰 시장을 형성하였고, 전라감영의 조지소造紙所에는 지장紙匠을 두어 조선후기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품질의 한지를 생산하였다. 전주부는 단일 도시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책을 출판하 020 였고, 남문시장(현 전주 남부시장)의 여러 출판소는 완판방각본完板坊刻本을 인 쇄, 판매하면서 서울, 대구 등과 교류하며 전국적으로 유통 판매하였다. 전주 이외에도 태인의 무성서원을 중심으로 14종이 발간되었고, 나주, 남원에서도 전 방각본이 출판되었다.

한편 조선후기 전라도에서는 판소리가 크게 유행하였다. 판소리는 18, 19세기에 이르러 양반과 평민 모든 계층이 두루 즐기는 음악으로 발전하였

4 고, 지배층과 피지배층 간의 소통 창구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사회적 조절과 통합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19세기 고창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신재효는 판소리 여섯마당을 정 리하였는데, 이후 새롭게 정리된 판소리 사설은『열여춘향수절가』,『심청전』, 『화룡도』라는 이름으로 전주에서 완판방각본으로 출판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전라도 회화는 16세기 화순 출신의 묵죽을 잘하였다고 전하 는 학포 양팽손, 해남 녹우당에서 출생한 풍속화의 흐름을 이끌었던 공재 윤 두서, 진도 출신 소치 허련이 각기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특히 녹우당에서 윤두서의 화첩을 빌려보며 그림 공부를 시작한 허련은 추사 김정희로부터 문 인화의 이론과 필법을 배워 19세기 남종문인화의 대가가 되었다. 그의 화풍 은 호남 회화의 특징이 되어 이후 호남 회화의 근간을 이루었다.

조선시대 전라도 서예는 18세기에 출현한 조선 고유의 서체인 동국진체 東國眞體의 대두 및 보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동국진체를 제창, 보급, 완성한 인물이 대부분 전라도와 깊은 관련이 있거나 전라도 출신이기 때문이다. 동 국진체를 주창한 옥동 이서와 절친이었던 윤두서는 전라도에 동국진체를 부 리 내리게 했다. 이서와윤두서를 이어 동국진체의 맥은 원교 이광사에게 이 어졌다. 이광사는 전라도 출신은 아니나 완도와 신지도에서 20년 넘게 유배 생활을 하였고, 그의 글씨가 전라도 곳곳에 남아 있다. 이후 대흥사 스님이었

던 아암 해장에게 계승되었다.

조선후기 서울의 김정희, 평안도의 조광진과 함께 3대 명필로 뽑히는 전 주의 창암 이삼만은 이광사를 비롯한 여러 대가들의 글씨를 본받으며 물 호 르듯 막힘이 없고 자연스러운 독자적인 '행운유수체行雲流水體'를 창안하였다. 그는 전라도의 멋과 흥취를 잘 살렸다는 평을 들었다. 이후 근현대에 활동한 021 고창 출신 석전 황욱, 김제 출신 강암 송성용은 한국서예의 대가로 전라도 지  역의 서예 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시대 전라도는 문화졔술 분만 아니라 학문과 사상에 있어서도 큰 발전을 보여주었다. 유학의 경우 14~15세기 전라도 도학자들은 정몽주의 절 의정신을 이어받아 조선왕조에 참여하지 않고,『주자가례』의 예법을 중요하 게 여겨 원칙을 강조하는 입장이었다. 1519년 훈구파에 의해 조광조 등의 신 진 사림파들이 숙청된 기묘사화로 인해, 전라도 도학자들은 재야에 머물며 후학을 양성함으로써 사림정권 수립에 기여하였다

16세기 호남사림이 이룩한 학문적 성취는 남달랐다. 이기심성론에 대한 독자적인 이해를 보여주며 조선 성리학사의 선구가 된 이항, 천명사상 연구 를 비롯하여 인심도심론人心道心論에서 독자적인 견해를 피력한 김인후, 이황 과 함께 사단칠정논쟁을 주도한 기대승 등 뚜렷한 학문적 성취를 일궈낸 학 자들이 대거 배출되면서 16세기 전라도 유학은 성세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1589) 이후 호남사림의 기반은 약화되어 갔다.

기축옥사 이후 전라도에 대한 정치적 소외와 경제적 수탈이 가중되는 가운데 개혁적, 현실비판적 성격의 학문인 실학이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태동하였다. 실학은 서울, 경기 중심의 근기실학과 전라도 지역을 기반으로 한 호남실학으로 양분되어 전개되었고, 전라도는 서울•근기지역을 제외하고 는 거의 유일하게 실학이 꽃을 피웠던 지역이다. 호남의 실학은 지리적•사회 경제적 여건 위에서 다양성과 개방성을 바탕으로 근기지역과의 끊임없는 교 류 속에서 형성빨전하였다 호남실학의 비조인 반계 유형원은 1653년 부안 우반동으로 내려와 20 년간 은거하면서 농촌 생활에서 체득한 농촌 경제의 안정책 등을 제시한『반

계수록』을 저술했다. 유형원의 개혁 의지와 사상은 당시 재야 지식인과 후학 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후 18세기 중반에는 호남의 3대 실학자로 불린 신경준, 황윤석, 위백규 등이 배출되어 호남실학의 흐름을 주도했다.

19세기 전라도에서 유학은 새로운 부흥기를 맞이하였다. 전남 지역을 022 중심으로 외연을 경남 지역으로까지 확장한 기정진의 노사학파, 전라 및 충 청 지역을 중심으로 한 송병선의 연재학파, 충청 지역을 중심으로 학파의 기 초를 쌓은 뒤 전라 지역으로 중심지를 옮겨 전국적인 문인집단을 형성한 전 전 우의 간재학파 등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들 학파 이외에도 화서학파의 대표 적 문인인 최익현은 전라도 지역 내에서 많은 문인을 배출하면서 유력한 문 인집단을 형성하였고, 김제 출신 이기는 유학적 가치관을 기반으로 호남학회 4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같은 김제 출신인 이정직은 사서오경 등의 정통 학문 이외에도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서양의 칸트와 베이컨 철학을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 하였다. 그는 전통적인 도학의 기초 위에 새로운 서양 학문을 조화시켜, 우리 나라의 철학과 근대 서구 철학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였다.

19세기 이후 전라도의 유학은 다양한 학파들이 서로 연계되어 전라 지 역의 유학을 주도하였다. 당시 봉건 지배 질서 체제 수호라는 시대적 한계성 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전라 지역의 각 유림 학파가 보여준 실천 지향적 위 정척사 운동과 여기에서 이어진 의병 활동은 제국주의 침탈에 대항하는 민 족의식의 발로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의병은 국가가 외적의 침입을 받아 위급할 때 국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민중이 자발적인 의사에 따라 외적에 대항하는 구국 민병이다. 유학자 이자 독립운동가인 백암 박은식은 '나라는 멸할 수 있어도 의병은 멸할 수 없 다라고 말할 만큼, 우리 민족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 굴복하지 않고 끈질기게 짜하였다. 그중 가장 탁월한 의병활동을 보여준 것은 임진•병자 양란 의병과 한말 의병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 즉 호남이 없으면 곧 국가도 없다라는 이순신 장군의 말처럼 전라도는 우리나라의 근간이 되는 지

역이었다. 그리고 왜군의 침략에 맞서 끈질기게 짜함으로써 그 근간을 지켜 낸 것은 전라도 의병의 힘이었다. 조선은 인적 물적 자원을 조달할수 있는 근거 지인 전라도를 지켜냄으로써, 임진왜란 초기 불리한 전황을 극복할 수 있었다.

한말 의병 활동은 을미의병(1895)- 을사의병(1905)- 정미의병(1907)으

로 이어진다. 그중 정미의병은 고종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 등을 계기로 일어 023 났으며, 이전 의병과 달리 유생 이외에도 해산군인, 평민, 천민 의병장 등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전 계층이 참여하는 전면 항일전의 성격을 띠고 있다. 특 히, 1909년 후기로 접어들면서 일제가 '무정부상태'라고 표현할 만큼 전라도 에서의 의병 항쟁은 매우 치열했으며, 1909년 교전 의병수 3만 8593명 중 전 북과 전남을 합친 수는 2만 3155명으로60.1%가 전라도 의병이었다.

이후 의병 활동은 국내외 항일 무장 독립투쟁으로 이어졌고, 임진왜란 의병과 한말 의병 활동에서 보여준 전라도의 의병 정신은 이후 항일 독립 운 동가들에게 면면히 이어졌다.

조선시대 전라도는 물산이 풍부한 곡창지대로서, 국가 재정의 높은 비 율을 담당하였다. 전라도 농민들은 항상 탐관오리의 학정에 시달렸고, 다른 어느 지방에서도 볼 수 없는 수탈과 착취를 당하였다 1894년 고부군수 조병 갑의 지나친 가렴주구로 농민들이 공분하였고, 자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 의 인내천人乃天사상을 기반으로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부터 동학농민혁 명이 시작되었다. 전라도 사람들은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 주지 못했던 당시 상황 속에서 무능한 지배층의 착취와 수탈, 밖으로는 외세의 정치 경제적 침 탈과 불의에 맞서 공정과 정의를 적극적으로 실현하고자 했다. 동학농민혁명 을 통해 보여준 전라도 사람들의 올곧은 정신과 가치관은 근현대 3 •1운동, 4

•19혁명, 5•18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고, 전라도의 정체성 형성과 역사관 정 립에 기반이 되었다. 시대적 어려움 속에서도 늘 새로운 세상을 위해 실천적 역량을 모아 온 전라도의 혁신사상은 오늘날 대한민국 정신사적 성장의 동력 이 되고 있다.

이재운

024

 

4 

 

제1장 자연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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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라도의 이웃, 충청도•경상도

 

흔히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은 상호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고 말한다. 이 말은 자연환경이 인문환경에 일정한 영향을 끼질 수 있다는 의미로 다가온 다. 그렇다고 자연환경이 역사와 문화 등 인류의 인문환경을 지배할 수는 없 다. 풍수지리 연구가들의 주장처럼 절대 그렇게 될 수는 없다. 반면에 자연환 경의 장점은 극대화되어 왔고, 단점은 극복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기나긴 여정이었다. 전라도의 경우도 예외일 수는 없다.

전라도는 위치상 동북아시아의 중심지이다. 한반도의 서남부 최남단에 존재하면서 서해와 남해 두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그러므로 전라도는 바다 를 건너 서쪽으로는 황해를 사이에 두고 중국과, 남쪽으로는 태평양을 사이 에 두고 오키나와•대만•필리핀과, 그리고 동남쪽으로는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일본과 마주 보고 있다. 이러한 지형적 배경으로 인해 전라도 지역은 일 씩부터 하나의 문화권 내지 생활권을 형성해 왔다. 육로를 통해 대륙과 교류

일신라말 중국에서 선종을 들여온 곳도 전라도였다. 당연히 전라도 사람들은 그 어느 지역보다 개방성이 강하고 외래 문물이나 문화에 친화적일 수밖에 없었다. 027

전라도의 동쪽에는 소백산맥과 섬진강이 남북으로 뻗어 있어 전라도와 편 전

경상도를 구분하고, 북쪽에는 금강이 동서로 흐르며 전라도와 충청도를 나 눈다. 전라도는 큰 강과 높은 산을 경계로 경상도층청도와 접하고 있지만,

이들 지역과 고립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교류의 대안을 찾아 나섰다. 그 결과 1

하면서도 바다를 통해 중국괼본과 독자적으로 매우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대륙문화보다는 해양문화가 전라도에 더 많은 영 향을 미쳤다. 특히 해양을 통한 교류가 부했던 때 전라도는 전국에서 가장 먼저 외래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백제 왕인이 일본에 선진문물을 전하고, 통

전라도 사람들은 수많은 길이나 고개 및 나루터를 통해, 경상도층청도 사람 들과 물자를 주고받고 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며 활발하게 교류하였고, 전란 때에는 함께 의병을 일으켜 국토를 수호하고 생사를 나누었다. 중앙에서 양 호兩湖라 하여 전라도와 충청도를 하나로, 양남兩南이라 하여 전라도와 경상 도를 하나로 불렀던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였다. 별칭으로 전라도를 호남湖南  경상도를 영남嶺南, 충청도를 호세胡西라고 하였던 점을 활용한 연대의식의 발로였다.

전라도와 충청도는 백제-후백제 시절에 한 영토였다. 따라서 두 지역의 문화가 서로 공존할 가능성은 그 어느 지역보다 높은 편이다. 조선시대에 전 라도 인사들은 충청도 출신들과 가장 활발히 교류하였고, 정묘호란 때에는 양 지역 사람들이 함께 '양호 의병진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사실 조선시대에 서울에서 경상도 통영으로 통하는 길이 전주~임실~남원~함양~진주 노선이 었다는 점, 경상도의 세곡선이 순천~영광~군산을 거쳐 서울로 올라갔다는 점, 그리고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전라도 의병들이 도움을 주었 던 점 등은 이 두 지역이 긴밀하게 교류하였음으 증명해주기에 충분하다.

이와 같이 전라도는 스스로를 고립시기지 않고, 옛부터 한반도 외부  물론 한반도 내부와 활발한 교류를 하며 삶을 영위하고 지역문화를 발전시

켜 왔다. 이러한 현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 느 지역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028 2. 산줄기의 동남부

 

전 전라도의 지형은 소백산맥의 높은 봉우리와 노령산맥의 구릉성 저산지 줄기로 이루어진 동남부 산악지대, 그리고 여러 강 유역의 서남부 평야지대로 크게 나눌수 있다. 이러한 지형적 위치 때문에 이 두 지역은 조선시대에 좌도 4 와 우도라 하여 서로 다른 경제구조와 문화를 만들었다. 대표적인 사례를 들 면, 세곡 납부 방법과 판소리 및 농악 등에서 그러하였다.

전라도의 동남부는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의 줄기를 끼고 있는 산지로써,

 

그림 1. 덕유산

원주 약령시와 함께 3대 약령시로 불리며 봄과 가을 2자례 열린 것도 동남부 산악지대에서 우수한 약재가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지리산을 비롯한 고 산지대에서는 고도에 따라 수백 종류의 고산식물이 군락을 이루고, 노루•산 029

돼자여우•늑대•산토끼•솔개•산비둘기•두루미 등의 각종 야생동물이 서식 편 전

하고 있다. 2004년부터는 사라져 가는 지리산 야생곰을 되살리려는 운동도 일어나고 있다.

전라도의 동남부 지역에는 명승지가 많기로도 유명하다. 성해응(成海應 1

민주지산•대덕산•덕유산•지리산•백운산 등 1천 미터 이상의 고산준령이 즐 비할 뿐만 아니라, 안성•진안•운봉•장계•장수•남원•오수•구례•곡성 등지에 제법 넓은 평원의 고원•분지가 펼쳐져 있다. 이들 산자분지에서는 농산물, 각종 약재와 산나물이 적지 않게 생산된다. 전주 약령시가 조선시대에 대구•

1760~1839)은『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에서 우리나라의 명승지 1백경을 들었 다. 그중에는 이 지방의 진도 금골산, 무주 덕유산, 광주 무등산, 해남 두륜 산, 영암 월출산, 장흥 천관산, 구례 지리산, 부안 변산 등이 들어 있다. 특히 지리산을 가장 자세히 설명하면서, 속세를 떠나 수양하기에 으뜸이라 하였다. 또한 전라도의 동남부에는 사람이 살만한 곳이 많기로도 유명하다. 이중환 (李重煥, 1690~1756)과 서유구(i余有榘, 1764~1845)는『택리지擇별하와『임원십육 지林園+六志』에서 전주의 봉상촌을담, 여산 황산촌, 임피 서지포, 광주 경양 호, 구례 구만촌, 순창 복흥촌, 남원 성원, 용담 주천, 금산 제원천, 장수 장계, 무주 주계, 금구, 만경, 변산, 흥덕 장지, 영광 법성포, 나주 금산강, 강진 월남 촌, 영암 구림촌, 해남 송정 등을 사람 살기에 적합한 곳으로 거론하였다. 그 러면서 두 사람은 이곳이 토지가 기름진데다 논밭에 물 대기가 편리하여 오 곡이 풍성하고, 어염이 넉넉하며 물길도 좋고, 풍수지리도 좋아 훌륭한 터전 이 될 곳이라고 하였다 이들이 말한 곳이 대부분 전라도 동남부 산지에 집중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답고 기름져 살기 좋은 곳이었지 만, 여순사건이나 625와 같은 역사적 굴곡은 피할 수 없었다.

3. 물줄기의 서남부

 

소백산맥의 서쪽으로는 금강•만경강등진강괾산강이 동고서저 지형을 030 따라 서해로 흐르고, 탐진강•섬진강이 북고남저 지형을 따라 남해로 흐른다. 이러다 보니 작은 강물이 하나로 합쳐져서 큰 강을 이루는 평안도 대동강, 경 기도 한강, 경상도 낙동강과는 달리, 전라도는 여러 개의 물줄기가 도내 곳  전 을 각기 흐르는 형국이다. 그리고 큰 산과 긴 강을 울타리로 삼아 타 지역과 경계를 이루는 경상도와는 달리, 전라도는 동쪽만 산과 강으로 자단되어 있 을 분 북쪽•남쪽써쪽으로 훤히 트여있다. 이처럼 전라도의 지형지세는 물줄 4 기가 많고 사방으로 열려 있는 형국이다. 그러므로 전라도 사람들은 다른 지 역민들에 비해 그만큼 더 개방적인 성향과 다양한 문화를 지닐 수밖에 없다. 신라말 교종에 맞선 선종 사상의 도입, 조선말 양반 관료지주층에 맞선 동학 농민혁명, 해방 이후 5 • 18민주화운동 등에서 증명되었듯이, 전라도는 역사적 고비 때마다 늘 시대의 물줄기를 바꾸는 역동성을 앞장서 보여 왔던 것이다.

전라도 내에 흐르는 강 유역에는 전국에서 보기 힘든 선사시대의 고인돌

 

그림 2. 금강대교

된 벼의 화분과 그때 사용하였던 여러 농기구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벼가 일 찍 전래되어 오래 전부터 미작문화가 탄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아마 실 핏줄 같은 내륙 수로와 드넓은 원양 해로의 발달한 물길과 부근의 넓은 평야 031

때문에 나타난 결과일 것이다. 편 전

전라도 지역에는 풍부한 용수의 물줄기를 끼고 있는 넓은 평야가 펼쳐 져 있다. 완주에서 발원한 만경강은 진만 전주에서 홀러온 고산천소양천•

전주천퐙천과 합류하여 호남평야의 중심부를 지나 황해로 홀러간다. 정읍 1

과 옹관묘 및 조개무덤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이들 고분에서 발굴된 토가금 동• 철제•옥 유물과 집터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은 일찍부터 선진문화가 꽃피 었음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민족문화의 한 특징적 요소를 형성하고 있다. 또 한 이들 유적에서 지금으로부터 3500여 년 전인 기원전 1500년 무렵에 부식

에서 발원한 동진강은 도원천• 정읍천•원평천교부천과 합류하여 김제평야를 지나 황해로 들어간다. 만경강과 동진강 하구 일대는 미옥간척지와 계화도 간척지를 거쳐 새만금간척사업이 펼쳐진 곳이다. 그리고 담양에서 발원한 영 산강은 장성에서 홀러온 황룡강과 광주에서 유입한 극락강, 그리고 화순• 나 주에서 홀러온 지석강 등 3개의 지류에 의해 형성되어 전남의 대표적인 평야 인 나주평야의 젖줄이 된다. 이들 강 유역에는 삼한시대에 벽골제, 조선시대 에 만석보, 일제강점기에 대아저수지, 해방 이후에 섬진강 다목적댐과 영산강 다목적댐 등 수리시설이 축조되어 주변의 기름진 평야지대에 농업용수를 공 급하였다. 이 외에 전라도 내의 해안에 위치한 시군에는 인근 산지에서 발원 한 소하천들이 바다로 유입하며 평지에 용수를 공급하여 해안 평야가 발달 되어 있다. 이리하여 전라도는 전국에서 가장 넓은 농토를 보유한 우리나라 의 곡창지대라고 불린다. 전라도의 넓은 농토는 땅이 기름지고 일조량이 많 아 단위 면적당 생산력이 높고 농산물 품질이 좋은 곳으로 유명하였다. 이러 한 점으로 인해 악덕 양반지주와 탐학한 부패관리의 수탈이 이어져 임술농 민항쟁과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다. 그리고 19세기초 일본 지주의 이주와 그 들에 의한 민족차별과 경제수탈로 광주학생독립운동과 조정래 소설『아리 법의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4. 서해와 남해 두 바다

 

전라도의 서해와 남해 곳곳에는 많은 도서가 산재한다. 고군산군도, 위 032 도, 신안군도, 지도, 진도, 완도, 돌산도, 거문도 등을 대표적인 섬으로 꼽을 수 있다. 특히 전남 지방에는 유인도와 무인도를 포함하여 2200여 개의 섬이 있어 전국의 60% 이상을 자지하며 세계적인 다도해를 형성하고 있다. 그 가 전 운데 신안군이 가장 많은 섬을 보유하고 있으며, 여수시가 그 다음이다. 신안 군 혹산면에 딸린 가거도는 우리나라 최서남단의 영해 상에 있다. 전라도의 섬은 산지 •구릉, 평지, 갯벌로 구성되어 있어 임산물 채취와 농사 및 어로가

4 가능하여 일찍부터 사람들이 들어와살았다 또한 전라도의 섬들은 역사끝화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남겼다. 예를  면, 선사시대의 고인돌•조개무덤이 여러 섬들에 널리 분포하여 기록이 없던 시대 우리 조상들의 족적을 풍부하게 남겨주고 있다.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 진을 설치하여 동아시아 해상무역을 주도하였고, 진도에는 삼별초 정부의 유 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선유도에는 고려의 수도 개경을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의 흔적이 그의 저서『고려도경』과 함께 남아 있다. 손죽도는 임진왜란 직전 왜구에 의해 점령당하였던 곳으로서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광 사가 유배 가서 원교체圓嶠體란 서체를 완성한 신지도와 정약전이 유배 가서 『자산어보』를 집필한 흑산도도 지역문화 창달 측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 이다. 거문도에는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불법으로 건립한 포대 가 있고, 소록도에는 일제가 설치한 한센병 수용소가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 다. 역사의 고비 때마다 전라도 섬들이 그 현장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가 하면 전라도의 섬은 풍치佩致가 아름답기로도 전국 제일이어서, 최근에는 국민 관광지로도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섬과 섬을 이어주는 교량이 가설되 면서 보다 손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장소로 변하고 있다.

전라도의 서남 해안은 리아스식 해안 때문에 해안선의 굴곡이 심하여 그 길이가 전국에서 가장 길다. 전국의 해안선 길이는 1만 5000km 정도 되는

의 생산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현재 전라도는 우리나라에서 수산물 생산량 이 가장 많은 곳으로서, 그 가운데 조기를 말려 가공한 굴비와 삭힌 홍어와 꿈틀거리는 낙지는 전라도를 대표하는 음식이 되어 남도의 식탁을 풍성하게 033

하였고, 양식에 성공한 김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식자재가 되었다. 편 전

전라도의 갯벌은 어족자원의 보고였지만, 20세기 들어서 방조제와 매립 공사로 부족한 농업용지와 공업용지를 확보하는 데에 이용되었다. 그러나 최

근에는 갯벌을 보존지역으로 주목하고 있다. 특히 보성슨천•신안 갯벌을 포 1

데, 그 가운데 전남은 총 6743km로 전국의 45%를 자지하고 있다. 전라도 서 남 해안에는 변산•해남•화원•무안•고흥•여수 등의 반도, 그리고 줄포•영암•함 평•보성•득량•순천•광양 등의 만이 있다. 이들 도서와 해안에는 갯벌이 발달 하고 파도가 잔잔하여 어업이 발달하고, 해조류의 채취가 활발하고, 천일염

함한 '한국의 갯벌은 생물 다양성과 멸종 위기종 서식처라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2021년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이후 갯벌 생태계의 보전 관리, 지속 가능한 어업을 위한 수산자원의 관리, 지역관광 활성화 측면에서 유산구역의 확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지속되고 있다.

 

그림 3. 홍도 등대

또한 전라도 바닷가 곳곳에는 천연의 포구가 산재해 있다. 이들 포구에 는 어항漁港이나 상항商港이 들어서 있어 지역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다하였 고, 지역 간의 소통은 물론 국가 간의 교역 창구로 우리 문화를 전파하고 선 진문물을 도입하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특히 숙련된 배 만드는 기술과 자유 034 자재로 항해하는 능력은 여몽연합군의 제주도 정벌과 일본 원정에 동원되기 도 하였지만, 반면에 울릉도를 개척하고 독도를 지키는 힘도 되었다. 그리고 전라도 포구에는 전통시대에 조장이나 수군진이 개설되어 국가 물류기지나 전 군사기지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고려 6조창과 조선 3조창은 국세의 절반을 책임지는 곳이었고, 전라 좌수영 •우수영은 임진왜란 극복의 원동력이 되었 던 곳이었다. 그런가 하면 전라도 포구는 전화를 가장 먼저 입었던 곳으로, 을 4 묘왜변 때 달량포는 상륙하는 왜구에 의해 불타는 참화를 겪었다. 이처럼 전 라도는 항구가 발달하지 않은 지역이나 산악으로 둘러싸여 외부와의 통교가 어려운 타 도와는 매우 다른 지형 조건을 지니고 있었고, 그런 점으로 인해 차별화된 역사문화를 창조할 수 있었다.

5. 온화한기후

 

전라도의 기후는 여름 고온과 겨울 저온의 온도자가 큰 대륙성 기후이 고, 여름 우기와 겨울 건기가 나타나는 계절풍 기후이기도 하다. 전라도 전체 적으로는 한반도의 기후 특성이 나타나지만, 바다에 면한 지역이 넓고 해안 선이 길어 해양성 기후 특징이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보다 강하게 나타난다. 그리하여 연평균 기온은 남해안 및 서해안이 약 12~15℃이고, 연간 강수량 은 1200~1500刪내외이다. 그러나 소백산맥이나 노령산맥 등의 산악지대와 이들 산지로부터 발원한 하천들 내륙의 분지지역들은 해안 및 도서지방과는 다른 대륙성 기후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전라도 지역은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온난다우의 특징을 보이고 있으며,

서 남서해안 일대에 짙은 안개를 가져오는 경우가 있다. 그리하여 목포 부근 의 다도해지역은 우리나라 최다 농무일수 지역 가운데 한 곳이다. 또한, 섬진 강 유역은 우리나라의 최다우 지역으로서 일찍부터 녹차의 생산지로 유명하 035

였고, 지금도 전국 제일의 차 산지이다. 편 전

이와 같은 기후조건은 동물과 식물의 생육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첫째, 온도와 일사량 및 강우량은 벼의 생육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데, 전라도

지역은 고온 다습한 기후로 인하여 벼의 생육이 적합한 곳이다 벼는 담수 상 1

지역별로 몇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우선 겨울에는 지형적 요인으로 인하여 소백산맥의 서쪽 비탈진 경사면에 처한 정읍•고창•영광•함평 지역에 눈이 많 이 내린다. 또한, 남서해안에는 난류인 제주해류가 들어오지만, 그 세력이 미 약하고 발해 방면에서 남하하는 한랭한 연안류가 남쪽의 다도해까지 내려와

태에서 주로 성장하는데 그때 전라도 지역에 비가 많이 오고, 개화 이후에 알 곡이 자게 되면 물을 빼고 추수할 준비를 하는데 그때 전라도 지역에는 건기 가 나타난다. 벼의 품종은 파종 후에 105~120일에 성숙해지는 조생종과 파 종 후 150일에 성숙해지는 만종생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전라도 지역은 따 뜻한 기후여서 벼가 일찍 발아하고 넓은 평지여서 일조량이 많다. 그리하여 전라도 지역은 미곡 생산이 전국에서 가장 많은 곳이면서, 생산된 쌀의 질도 가장 우수하였다. 당연히 우리나라 최대 곡창지대인 전라도의 흉작은 전국 의 미곡 생산량에 영향을 주었고, 그 연장선에서 전라도 세곡은 편리한 전납 錢納을 거부당한 채 미납米納을 강요받았다. 그리고 군산항 개항 후 그곳에 이 주해 온 일본인들은 전라도 쌀을 일본으로 실어갔다.

둘째, 전라도의 넓은 야산 지대에는 밭이 많이 분포한다. 전라도의 넓은 밭에는 원산지가 열대지방인 목화가 널리 재배되었다. 목화는 고온다습한 기 후를 좋아하며 생육적온이 20~28℃이고, 연 강우량이 1000~1500mm인 지 대에서 잘 자란다. 문익점이 도입한 목화는 처음 재배지였던 경상도를 제치고 조선초기부터 목화의 생육 조건에 적합한 전라도 지역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 었다. 목화를 이용하여 제작한 면포는 옷감으로 이용되어 의류혁명을 일으켰 고, 상평통보가 유통되기까지 군포로 이용되어 납세수단이 되었으며 추포 

布로 이용되어 유통과 통화의 수단이 되었다. 특히 1905년에 일본영사 다카 마쓰高松가 육지면을 도입하여 전라남도 고하도에서 재배하기 시작한 후, 육 지면은 전라도 서남부 야산지대에 널리 보급되었다. 이곳에서 생산된 목화는 개항장 목포항으로 모아져 탈면되어 솜으로 만들어진 후 일본으로 싼값에 036 실려 나갔고, 이 솜은 일본에서 실이나 옷감으로 만들어져 비싼 값으로 우리 나라에 들어왔다. 결국 일제의 신종 목화 보급은 자국의 자본주의를 성장시 키면서 우리를 일제의 경제 수탈장으로 만들었다 그 창구를 만들기 위해 목 전 포항을 개항시켰던 것이다.

셋째, 전라도 지역에는 다른 곳에서 보기 드문 난온대 산림이 분포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임산자원은 차, 유자, 대나무, 닥나무이다. 차에 대해서 4 는 앞에서 말한 바 있고, 유자는 남해안 일대에서 주로 자라는데 약용과 제 수물로 이용되었다. 대나무는 연평균 기온이 10℃ 이상이며 연중 최저기온 이 -10t 이하로 내려가지 않고 연간강우량이 1000mm 이상인 지역에서 잘 자 라는데, 이러한 조건으로 인해 전라도는 전국에서 대나무 생산이 가장 풍부 한 곳이다. 그로 인해 전라도 사람들은 대나무 공납으로 고통을 겪기도 하였

 

그림 4. 김제 평아

전라도에서는 오래전부터 종이 생산이 활발하였고, 그 품질도 전국 최고였

다. 그리하여 종이를 왕실에 납품하는 데에 적지 않은 고통을 겪기도 하였지 만, 종이로 책을 만들어 지식문화를 보급하는 데에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대 037

나무와 종이를 이용하여 부채를 만들어 멋스러운 지역문화를 창조하였다. 편 전

이렇듯, 온화한 기후로 인하여 전라도 사람들은 성품이 온화하고 낙천 적이어서, 판소리 같은 민족음악을 발달시켰다 그리고 전라도는 교통이 편리

하여 외부와의 교섭이 빈번한 관계로 개방적이고 활동적이며 사교적인 지역 1

지만, 일찍부터 대나무를 이용한 바구니 같은 용기와 참빗 같은 생필품을 활 발히 제작하기도 하였다. 이는 전라도 농가의 알뜰한 수입원이 되면서 생활 의 편리와 풍요로움을 가져다주었다. 전라도 토양은 닥나무 생육에 적합하여 전라도 지역에 닥나무가 가장 많이 식재되었다. 닥나무는 종이의 주원료여서

이기도 하다. 또한 농림산물과 해산물이 풍부하고 사람들의 인심도 후하여 한 상 가득 내놓는 남도 한정식 음식문화가 발달하였다. 한편 전라도는 과거 인구가 많은 편이었다. 조선시대에만 하여도 전라도의 인구는 경상도와 근소 한 차이로 2위를 자지하였지만, 인구밀도 측면에서는 최고 수준이었다. 최근 전라도 인구는 다른 시도에 비해 뒤처져 있는 상태로 감소 추세에 대한 주목 이 필요한상황이다.

김덕진

제2장 인문환경

038

 

4

전라도는 지형적으로 서남 양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며, 온난하고 강 우량이 많은 기후에 비옥한 평야가 넓은 편이고 실핏줄 같은 내륙수로가 널 리 펼쳐져 있다. 이런 점으로 인해 해상활동이 활발하여 선진문화를 앞장서 받아들였을 분만 아니라, 농림수산 물산이 풍부하여 풍요로운 삶을 누렸으 며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곳이었다. 또한 많은 인물을 배출하 여 위기 때마다 긴밀하게 연대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하고 새로운 학문과 문 화 창달에 이바지하였다.

전라도 사람들은 문헌은 말할 것 없고 성곽, 건물, 비석, 지명, 축제, 용품, 기술, 소리, 음식 등등 많은 유무형의 문화유산을 남겨주었다. 그것들 대부분 은 19세기말~20세기초에 사라지고 일부만 남았지만 우리의 소중한 자산이 되고 있다.

1. 생활의 터전 - 행정구역의 변천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졌다. 전라도가 하나의 광역 행정구역으로 우리나라 역 사에 모습을 드러낸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1500여 년 전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후 전국을 9주로 재편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부터 전라도는 금강 039

과 소백산맥을 경계로 충청도껾상도와 인접하며 하나의 행정구역을 형성하 편 전

였다. 9주 가운데 완산주와 무진주, 고려초 10도 가운데 강남도와 해양도가 지금의 전라도 영역에 있었다. 곧이어 10도는 5도로 개편되었는데, 그때 강

남도와 해양도가 합병되어 1018년 전라도로 탄생하게 되었다. 전라도는 조선 1

전라도는 삼한시대 때는 여러 소국으로 분립되어 있었고, 백제 때에는

시대의 8도 가운데 하나로 그대로 존재하였고, 갑오개혁 때의 23부를 거쳐 1896년 13도 체제 하에서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로 나누어져 오늘에 이른다.

결국 전라도는 9주, 10도, 5도, 8도, 23부, 13도로 이어지는 지방제도 개편 속에서 존재하면서 그 위상을 세웠다.

고려 후기부터 전라도는 '호湖(김제 벽골제 또는 금강)의 남쪽이라는 의미의 호남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그 후 호남이라는 용례는 전라도 사람들에 의해 자신들 힘의 집결이 필요할 때나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말할 때 즐겨 사용되었다. 전라도는 통치의 편의상 좌도•우도, 상도•하도, 산 읍빼읍으로 나누어졌다. 이 가운데 좌도우도와산읍빼읍은 산지와 평지를 기준으로 나눈 것으로, 판소리 •농악의 가락이나 세곡의 납입에 차이가 났다.

완산주•강남도•전라북도의 지소는 지금의 전주에, 무진주빼양도쩐 라남도의 지소는 지금의 광주에, 그리고 전라도의 지소는 지금의 전주에 있 었다. 이리하여 광주와 전주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전라도에서 가장 전통 있 는 도시가 되고 있다. 주의 행정을 총괄하는 자는 도독이라 하고 도독성이라 는 성 안에서 집무를 보았다. 전라도의 장은 안찰사-관찰사라 하고 전주부 성 안에 설치된 감영에 상주하며 관내를 순찰하고, 행정실무를 맡은 영리들 은 공무수행 과정에서 부를 축적하면서도 대사습을 열어 판소리 명창을 길

러냈다. 병영은 조선초 강진에 설치되어 전라도 육군 지휘를 총괄하였고, 하 멜이 병영으로 유배 와서 살기도 하였다. 고려말~조선초 왜구 격퇴를 위해 창 설된 수군을 나누어 지휘한 좌수영과 우수영이 순천과 해남에 각각 설치되 었다. 좌수영은 세계 최초의 특수선 거북선을 건조한 곳이고, 우수영은 13척

040 으로 무려 133척의 왜선을 상대로 싸워 이긴 명량대첩의 현장이다. 수영 산 하에 많은 진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목포진과 군산진은 오늘날 목포시와 군 산시의 모체가 된다.

전 성곽을 중심으로 생활하던 사람들은 그것을 키워 독립된 행정구역으로 만들었다. 전라도 안에 104곳에 이르렀던 고려의 군현이 조선에 들어와서 57 곳으로 통폐합되었고, 일제강점기 때에는 38곳으로 줄었다. 군현마다 자기 4 상징으로 진산과 별호를 정하고, 행정 중심지로 읍내를 두고, 읍내 안에 각종 관공서와 제단을 설치했을 분만 아니라, 일부 군현은 거대한 읍성을 쌓아 웅 장한 성문을 냈다. 특히 30곳에 이른 읍성은 근대화 과정에서 대부분 사라지 고 고창과 낙안 것만 살아남아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을 분이다. 또한 객 지 출신 수령이 파견되어 동헌에 앉아 집무를 보았고, 재임 중 선정을 베풀어

 

그림 1. 고창 음성

대화 과정에서 두각을 낸 이가 많았다.

신라말부터 형성된 향•소•부곡이라는특수 행정구역이 조선초기에 완전 히 폐지되었다. 고려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교통기지 역할을 한 역원도 20 041

세기와 함께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삼례 •오수•성전 등은 오늘날까지 편 전

지역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그리고 군현 아래에 존재한 면은 고 려말에 등장한 후 역할이 증대되면서 조선후기에 행정구역으로 자리를 잡았

고, 그것을 일제가 통폐합하고 면장과 면사무소 및 면직원을 두어 오늘에 이 1

선정비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 적지 않다. 그리고 향교를 출입하며 향안과 향 약으로 결속한 그 지역 양반들은 향청을 두어 읍정의 자문에 응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 분열되어 향전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한 그 지역 출 신의 향리들은 질정에서 행정실무를 수행하며 그때 터득한 감각을 토대로 근

른다. 또한 동족마을•점촌쩨역촌향화촌 등 여러 형태의 마을이 면 아래에 편재되어 있었고, 그곳에는 이장등계 •마을숲•회관 등 자치적인 조직 •시설이 구비되어 있었지만, 일제가 주민 자치를 말살하고자 자연마을을 통폐합하여 행정마을로 만들고 말았다

2 생업의 현장-산업의 발전

 

전라도는 산세가 수려하고 기후가 온난하여 사람이 살기에 매우 적합 한 곳이다. 그 때문에 거주 인구가 많아 조선시대 통계에 의하면 경상도 다 음의 인구수와 함께 전국 수위의 인구 밀도를 보였다. 또한 비옥한 평야가 넓 게 펼쳐져 있어 전국 최대 면적의 농토를 보유한 우리나라 농업의 중심 지역 이었다. 농토 가운데 경제성이 높은 논의 비중이 전국에서 제일 높았고, 전라 도 논에서 나오는 쌀은 전 국민을 먹여 살렸을 뿐만 아니라 국가재정을 책임 졌고, 모내기와 김매기 및 물대기를 필수로 하는 논농사는 전라도 문화의 밑 바탕이 되었다. 하지만 최다 부담의 세금과 각계각층의 갖가지 수탈에 노출 되어 그에 대한 농민의 저항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고, 그 투쟁력은 개항 이후

동학농민혁명으로 이어져 신분제 혁파와 지주제 철폐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 라, 일제의 국권피탈 시 의병 항쟁으로 이어져 주권수호운동을 선도하였다. 농업중심 사회가 20세기 중반 이후 산업화 사회로 바뀌면서, 전라도는 역으 로 낙후지역으로 전락하면서 그에 대한 박탈감에서 나온 저항도 뒤따랐다.

042 우리나라 경제구조의 변화 속에서 전라도의 위상은 약화되었고, 그에 대한 작용빤작용으로 파생된 민속의례와 저항정신이 전라도 역사문화의 저변을 형성하였다.

전 전라도의 넓은 밭에서 자란 봉, 목화, 모시, 삼 등은 당시 수공업 산업의 기본이 된 작물로 시장의 명품이 된 직물의 원자재가 되었다. 그리고 고구마, 담배, 인삼, 약재, 유자, 귤, 차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다. 또한 산 4 에서 자란 대나무는 부채•참빗•생활용품으로 가공되어 한류문화를 이끌었 고, 닥나무는 종이로 가공되어 지식문화를 창출하였다. 한편 전라도 곳곳에 매장된 흙은 토기, 청자, 분청사기, 백자를 만드는 데에 사용되었다. 특히 강 진에서 만든 고려청자가 개경으로 운송 도중 충청도 해안에서 좌초되어 갯 벌 속에 묻혀 있다가 발굴되어 찬란한 도자문화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런

 

산업, 자가 낳은 도자기산업, 옥돌이 낳은 공예산업은 민족경제를 선도하였 던 분야였다. 전국적 명성을 지닌 전라도 특산품이 여러 가지였고 그것은 우 리나라 산업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전국적 명성을 얻었던 043

전라도의 특산품 가운데 상당수가 20세기에 사라져버렸으니, 지금이라도 재 편 전

발굴하여 지역산업의 동력으로 키워야 할 것이다.

정기시장인 장시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전라도 서남부 지역에서 15

세기 말기에 탄생하였다. 그리고 도내 곳곳에 장시가 개설되어 장시의 분포도 1

가 하면 사금과 옥은 아름다운 공예를 만드는 데에 사용되었다. 이상의 산물 은 전국적으로 높은 점유율을 지니어 전라도 사람들의 주 수입원이었지만, 그 가운데 대나무•종이 •도자기의 과도한 공납은 전라도 사람들의 삶을 힘들 게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누에고치•목화가 낳은 섬유산업, 종이가 낳은 출판

또한 전국에서 가장 높은 곳이 전라도였다. 이는 전라도가 생산물이 풍부하 고 인구가 많은 곳이어서 자연히 유통경제가 발달할 수밖에 없어 나타난 결 과였다. 장터는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와 천변 등의 넓은 곳에 개설되어 지역 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일제강점기 통합 면의 사무소가 주로 장터에 자리 를 잡은 연유가 여기에 있다. 장시는 5일장 체제로 자리를 잡아가면서 5일마 다 열리는 장날은 군중이 많이 모여 시위하기 좋은 날로 알려져 일제강점기 3

•1운동 등 독립운동의 현장이 되었다. 장시에서는 농산물•임산물•수산물•수 공업품 등 갖가지 지역 특산품과 함께 국내외 외래품이 거래되었고, 그러한 상품을 홍보하기 위해 장돌뱅이 장꾼들은 장타령 •품바 등 민중예술을 공연 하기까지 하였다. 결국 장시가 전라도의 생산기반을 반영하여 개설•운영되었 고, 지역사회의 편재와 공연예술의 발달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3. 정치적 역동성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유적으로 고인돌을 든다. 고인돌은 무거운 덮개로 044 인해 그 사회의 규모나 응집력을 말해준다. 전라도에는 전국의 50%에 해당 되는 2만 여기의 고인돌이 분포한다. 전북 고창과 전남 화순은 이들 고인돌 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바 있다. 철기시대에는 여러 소국이 들어서면서 전 옹관묘가 축조되기 시작한다. 옹관묘는 영산강 유역에서 고유성을 띠고 대형 화되면서 최고의 중심지를 이룬다. 영산강 유역은 옹관 고분 사회로 불릴 만 큼 단일 정치세력을 형성하여 중국에까지 이름을 알리었다.

4 옹관 고분 사회는 백제에 복속되어 그 예하의 군현으로 전락하였다. 백 제가 나당 연합군에 정복당한 후 전남 지역에 마한도독부와 전북 지역에 금 련도독부가 설치되었지만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났다. 통일신라말기에 이르면 전라도는 반신라의 중심지에 서게 되었다.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 여 동아시아 국제무역의 거점으로 삼았지만, 중앙귀족과의 갈등으로 암살당 하고 말았다. 서남해 변방 장수였던 견훤은 순천의 김총•박영규, 그리고 광주 지역의 지원 등을 기반으로 광주에서 거의한 후 전주로 옮겨가서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개성의 해상세력인 왕건은 후고구려 궁예의 명을 받아 나주에 진출하여 오다련의 딸과 결혼하면서 나주 지역과 결합하였고, 그것을 토대로 후삼국 통일을 완성하였다.

나주는 고려 왕조에서 중심 지역으로 대우를 받았고, 나주오씨 소생인 혜종은 제2대 왕으로 취임하였다. 거란의 2차 침입 때 현종이 개성에 멀리 떨 어진 나주로 피란을 왔다가 돌아간 후 팔관회를 나주에서 열게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고려 왕실에서 가장 믿고 의지할 만한 지역으로 나주를 선택한 것 이다. 개경 환도에 반기를 들고 봉기한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진도로 이동하 여 용장성에 정부를 조직하고서 전라도 내륙과 서남해안 일대를 지배하다가 여몽연합군에 의해 진압된 후 제주도로 이동하였다. 몽고 침입 때 전국 각지 에서 삼국부흥운동이 일어났는데, 담양에서는 이연년 형제가 백제부흥운동

들은 바닷가 치소•마을을 내륙으로 옮기고, 직접 무장을 하고서 진포•황산 에서 최무선•이성계와 함께 왜구를 물리쳤고, 해안 지역에 매향을 하고서 왜 구 격퇴를 기원하였다. '남쪽을 지키자'라는 뜻의 '진남鎭南'이란 명칭을 읍성 045

의 남문 이름이나 객사의 건물 이름으로 사용하여 왜구에 대한 경계심을 늦 편 전

추지 않았다. 그러하였기에 전라도 사람들은 임진왜란 때 의병에 가담하고 관군에 참전하였으며, 일제강점기 국권피탈 때는 의병과 항일운동에 대거 뛰

어들었다. 1

을 일으켰다. 승불정책으로 보호를 받던 불교는 보수화와 그 폐단에 대한 반 발로 고려중기에 결사체가 등장하여 개혁운동을 펼쳤다. 결사운동의 중심지 는 순천 송광사와 강진 백련사였다. 고려말 왜구의 침입은 전라도의 도서 및 연해 지역은 물론이고 내륙 지역에까지 큰 피해를 입혔다. 이에 전라도 사람

전라도 선비들은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조선 정치의 핵심세력으로 등장 하게 된다. 이들은 중종~명종대에 주로 언관직에 진출하여 왕도정치의 실현 과 척신정치의 청산을 주장하였다 그로 인해 화를 입고 최산두•유희춘은 유 배를 가고, 김인후는 낙향의 길을 택하였다. 마침내 선조 대 사림정권이 수립 될 때 호남사림이 크게 기여하였다. 이후 유희춘•기대승의 경연 활동과 박순• 정철의 정승 임명으로 호남사림의 중앙정계 진출이 매우 활발하였다. 그러나 사림의 동인•서인 분당 때 전라도 사림들도 나누어졌고, 급기야 기축옥사 때 서로 공격하다 희생을 당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라도 서인은 의병에, 동인은 관군에 투신하여 각기 국토방어에 헌신하였다.

양란 후 조선 정부는 개혁에 나섰지만, 수탈에 못 이긴 농민들이 1862년 에 전국 곳곳에서 항쟁을 일으켰는데 전라도에서 가장 많은 군현이 참여하 였다. 동학의 창시자가 처형된 후 교조신원운동이 충청도 보은과 전라도 금 구에서 일어나자 전라도 동학교도들이 대거 참석하였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맞서 고부 농민들이 전봉준의 지도 아래 봉기하였다. 마침내 농민들 은 무장 기포와 백산 창의를 단행하여 신분제 폐지와 토지의 평균분작을 주 장하였다. 이 가운데 신분제 폐지는 바로 이은 갑오개혁에 반영되었으니, 결 국 동학농민혁명은 우리 사회가 근대사회로 진입하는 데에 결정적 계기가 되

었다.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하는 데에 동원된 일본군은 국권침탈에 나섰다. 이에 전라도의 기우만•임병찬•안규홍 등은 의병을 일으켜서, 나철•오기호 등 은 암살단을 조직하여 주권수호에 나섰다. 특히 1909년 전국 의병의 교전회 수와 인원수의 50% 내외를 전라도 지역이 자지하였다. 이러한 기세는 일제강 046 점기로 이어져 3•1운동이 도내 곳곳에서 일어났고, 소작쟁의와 수리조합 반 대운동 및 노동쟁의 등 각종 경제적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급기야 1929년 나 주에서 발단한 학생독립운동이 광주에서 일어나 전국 및 해외로 확산되었다. 전 1940년대에는 제2의 광주학생운동이 계획되기도 하였다.

해방이 되자 전라도 사람들은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건국준비 위원회 전남지부를 결성하였다. 신탁통치 소식이 전해지자 반탁운동을 펼쳤 4 고, 5•10총선에 즈음하여서는 단독선거 반대 투쟁을 펼쳤다. 단독선거를 반 대하고 제주도 진압명령을 거부한 여수 14연대 군인들의 반란이 일어나자, 진압군은 잔혹한 민간인 학살을 자행하였고, 반란군 및 학살을 모면하려는 도민들은 지리산을 근거로 한 빨치산 활동을 하였다. 이승만정권의 독재정치 는 남원 출신의 김주열 열사의 시위와 전국 최초의 광주고등학교 학생의 시 위를 낳게 하였다. 박정희유신정권이 들어서자 전라도 사람들은 함평고구마 사건, 교육지표 사건, 민청학련 사건, 야학 운동 등으로 맞섰다. 1980년 신군 부의 정권 장악을 반대하는 시위를 펼치던 중 계엄령이 확산되고 민주인사가 체포되고 공수부대가 투입되자, 광주 시민들은 민주정치를 지키기 위해 저항 하였다. 이와 같이 전라도는 기존의 정치체제와 정권에 저항하는 항쟁의 불 길을 높이 쳐들어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데에 늘 앞장서 왔다.

김덕진

 

제1장 선사•고대

048

 

4

1. 전라도지역의 구석기, 신석기문화

 

가. 구석기인, 전라도 지역에 자리잡다 전라도 지역은 지형적으로 서부 평야지대와 동부 산간지대로 나뉜다. 서 부의 만경강•동진강•영산강 유역권에는 넓은 평야지대가 발달되어 서해와 남 해안으로 연결된다. 높은 산지로 이루어진 동부에서는 금강 상류와 섬진강보 성강이 흐르고 주변에 상대적으로 좁은 분지가 형성되어 있다. 전라도의 이러 한 지형과 강물의 흐름은 선사시대 이래 다양한 문화의 형성과 발전에 큰 영향 을 미치게 된다. 즉, 바다와 강, 평야지대로 이루어진 서부지역은육로와 해로를 통해 문화의 이주와 접촉, 교류가 이루어지는 개방형의 환경이지만 동부지역은 산맥의 고개나 강줄기를 따라 문화가 단선적으로 형성되는 특징을 보여준다.

전라도 지역에 살았던 최초 인류의 흔적은 약 10만 년 전 중기 구석기시대 부터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자갈돌을 깨뜨리고 다듬어 주먹도끼를 만들어 쓴 동아시아의 자갈돌 석기' 전통을 잘 보여준다. 전라도 지역 구석기시대 유적들

의 중심연대는 약 5만 년 전~3만 년 전으로 전북의 경우 고창 증산 유적과 전 주 장동 유적, 완주 갈산리 유적, 익산 쌍정리 유적 등이 있다. 전남 지역에서는 주로 영산강 유역 및 섬진강, 보성강유역, 서해안 일대의 나주 당가 유적, 나주 촌곡리 유적, 화순 도산 유적, 화순 사창 유적, 영광마전•군동유적 등이 있다.

3만 년 전부터는 작은 '돌날석기' 제작문화가 시작되어 2만 5000년 전 ~2만 년 전에 제형 돌날문화'로 이어진다. 이때 동북아시아 전역에 큰 문화적 인 변화가 일어나는데 세형 돌날을 제작하고 그것을 나무 등에 끼워 결합도 구를 만드는 기술이다. 그리고 이 기술은 칼, 낫, 톱과 같은 자르는 결합도구 에도 폭넓게 활용되었다.

한편, 1만 3500년 전에는 전 지구적 온난화 현상이 시작되어 1만 2500 년 전까지 빙하가 녹아 해안선이 연간 수백 미터씩 내륙으로 후퇴하였다. 현 재 한반도의 지형적 윤곽은 이 시기에 갖추어지게 되었다. 기온상승으로 형 성된 바닷가를 중심으로 후기구석기 최말기에서 신석기 초기에 정착의 동기 가 된 어로는 신석기시대인들이 강과 바다 근처에서 생활하는 생계양식의 변 화를 가져왔으며 동북아시아 신석기문화가 어로를 중심으로 하는 문화로 전 개되는 기초가 되었다. 해수면 상승이 이루지기 전 전라도 지역 일대에 넓게 퍼져 살고 있던 현생인류는 현재 바닷물에 잠겨있는 서남해안의 넓은 평야를 거쳐 제주도로 이주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많은 유적들은 서남해안의 바 다에 잠겨있을 것으로 보인다. 049

전 1

4

나. 전라도 지역의 신석기인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정착하다

1만 3500년 전 지구적 온난화 현상이 시작되어 한반도에 낙엽수림이 중 심이 된 식물 생태변화가 나타났다. 이때 도토리 등 견과류가 채집되었고, 야 생감자와 식물부리 등을 식용하였다. 또한 맘모스 등 구석기시대 대형 동물 들이 북쪽으로 이동하고 이들을 대신하여 사슴, 멧돼지, 토끼 등 중•소형동 물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이들 동작이 비교적 빠른 동물을 사냥하는데 활과 화살은 필수적이었으며, 새도 포획해 사냥대상이 한층 다양해졌다 한편, 견과류나 감자류에 함유된 전분을 소화시기려면 가열처리를 해야

되고,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토기가 필요하였다. 또 삼면이 바다로 둘러 싸이 면서 강과 바닷가에서 채집된 패류를 익혀 먹는데 토기는 큰 역할을 하였다. 이같은 용도에 맞는 취사도구인 신석기시대 토기의 발명은 인류의 혁명으로 불리는 사건이었다. 이후 토기는 취사와 저장, 가공, 제사, 제염, 옹관, 운반에 050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이 시기 삼림과 강변, 해변 등에서 의 안정된 식량원의 공급, 채집과 포획을 위한 도구의 창조 등으로 생활이 안 정되고 비로소 정주생활이 시작되고 인구도 증가하게 되었다. 더욱이 신석기 전 시대의 후반기에는 보리, 조, 수수 등 곡물농경이 시작되고 돌도끼, 숫돌 등 간석기가 본격적으로 제작되기도 한다. 이 시기에 개, 돼지, 멧돼지 등을 사육 하는 목축도 이루어지고 있다.

4 전라도 지역에서는 다른 시대에 비해 신석기유적의 발굴조사 건수는 적 은 편이기는 하지만, 신석기시대의 전 시기에 걸쳐, 각종 유구는 물론, 토기, 석기, 어로구, 장신구 등이 다양하게 조사되었다. 이로 인하여 주변 지역과의 문물교류 양상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전북 지역 해안에서 조사된 신석기 시대 유적을 살펴보면, 군산의 노래섬, 가도, 띠섬, 비응도, 오식도를 비롯하 여, 신시도, 선유도 등지에 패총유적이 알려져 있다. 금강 하구의 내흥동유적 에서는 도토리의 저장구멍이 조사되기도 하였으며, 익산 웅포리유적에서는 주거지가 조사되었다 부안에서는 계화도 산상유적 이외에도 많은 곳에서 패 총 등이 확인되었다. 내륙지역은 진안 용담댐 수몰지구를 중심으로 진그늘 유적 등이 조사되었다. 섬진강변의 순창 원촌유적에서는 수혈유구, 야외화덕 자리 등이, 익산 신용리유적에서는 주거지가 조사되기도 하였다.

전남 지역 해안에서는 영광의 송이도와 상낙월도에서 패총이 확인되었 으며, 함평 장년리 당하산유적에서 화덕자리와 석기제작소가 조사되었다. 신 안군에서는 가거도패총에서 결합식낚싯바늘, 작살 등이 출토되었고, 그 외에 도 많은 패총이 확인되었으며, 완도 여서도패총에서는 결합식낚싯바늘, 작살, 토우, 분석糞石여수에서는 돌산송도에서 주거지와 혹요석기가 출토되었으며, 안도패총에서는 무덤과 함께 일본 승문계繩文系토기를 비롯하여 혹요석편, 돌톱, 조개팔찌, 돌수저, 고리형귀걸이 등이 출토되어 주변 지역과의 문물교

051

1 4

그림 1. 여서도패총(목포대학교박물관, 2009) 결합식냒싯바늘

 

그림 2. 안도패총(국립광주박물관, 2009) 고리형귀걸이

류를 가늠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 남해상에서의 해상교류는 당시의 동일한 생태조건, 대한해협 의 어장공유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문물의 이동만이 아니고, 새로운 기술이

나 생활양식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의 정보도 같이 전해졌을 것이다. 근래 에 일본 큐슈와의 직접 교류한 흔적이 여수의 안도패총에서 확인되었다. 혹 요석은 화산활동이 빈번한 일본열도에서 산출되는 석기이기 때문에 유물로 여수 안도, 돌산송도, 경도내도, 신안 흑산도 등 주로 해안과 도서지역의 유 052 적에서 출토되었다. 고리형귀걸이는 중국 동북지방에 넓게 분포하고 있었으 며, 1000년 전 이후에는 일본열도, 큐슈지역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우리나라 의 여수 문암리유적의 결합식낚싯바늘, 동삼동, 안도패총의 조개팔찌 등과 전 공반 출토되고 있어, 해상교류의 중심에 있는 유적들로 평가되고 있다.

4 2. 청동, 철기 문화와 전라도고인돌

 

가. 동북아 청동기 문화와 전라도 한반도와 만주지역(중국 동북지역)을 포함한 한국고대문화권에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중원식 청동기문화, 북방초원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북방식 청동기문화와 구분되는 비파형동검문화와 세형동검문화가 분포한다. 비파형 동검문화는 기원전 9~8세기경부터 요서와 요동은 물론 길림성 중남부와 한 반도에 분포한다. 한반도 중남부지역에서는 비파형동검을 중심으로 비파형 청동투겁창과 청동도끼도 약간 확인된다. 비파형동검문화 청동기들은 여수 반도에서 많이 출토되었고 충청남도 남부에서 전라북도 북부에 걸쳐 있는 금 강 중•하류지역에서 나왔다. 중국 동북지역과 비교할 때 남한지역 비파형동 검의 특징은 칼몸이 넓고, 슴베(부리)에 1~2개씩 홈이 있는 점이다. 그리고 전 라도 지역의 세형동검문화는 앞서 비파형동검문화를 계승한 것보다는 중국 동북지역과 연결된다.

기원전 5~4세기에 이르면, 요서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인 십이대영자문 화+二臺營子文化는 커다란 변동을 겪게 된다. 새로운 문화와 문물을 수용해 기원전 300년경 요서지역에서는 비파형동검문화가 급격하게 쇠퇴하고 그 자

동검이, 요동반도 남단에서는 윤가촌식尹家村式세형동검이, 한반도 중남부지 역에서는 동서리식東西里式세형동검이 분포한다.

기원전 5세기경의 청동기시대 후기에는 북방 지역 이주민의 문화가 전라 053

도에 유입되는데, 이를 점토대토기문화粘土帶土器文化라 한다. 점토대토기문화

의 분묘로는 적석목관묘, 토광묘, 옹관묘가 있는데, 이들은 청동기시대 후기 1

에 이어 초기 철기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사용된다. 전라도 지역의 청동기시대 4

리를 중원문화에 내준다. 대신에 요동과 길림성 중남부, 한반도에는 이 지역 들에서 자생하던 토착적인 비파형동검문화와는 다른 세형동검문화가 등장 한다. 세형동검문화는 지역에 따라 세형동검의 모양과 동반 출토되는 유물 들이 약간씩 다르다. 요동 북부와 길림성 중남부에는 대청산식大靑山式세형

문화 특징을 정리하자면 개방성과 독자성, 탁월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청동 기시대 중기 이후 전라도의 재지 문화는 외부의 문화와 주민 이주에 개방적 이었고, 그 결과 송국리형문화나 점토대토기문화 등 다양한 문화가 꽃을 피 우게 된다. 이러한 개방성의 동력으로는 육로와 함께 서해안과 남해안을 통 한 해로의 발전, 그리고 대표적인 곡창지대를 끼고 있는 전라도의 자연환경 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전라도에서 공존과 통합을 거듭한 청동기시대 문화는 경상도 의 남강 일대의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한 전라도의 송국리형 문화는 바다 건너 삼양동유적과 같은 제주도 해양거점취락의 기반이 되고 일본 큐슈 일대로 파급되어 야요이彌生문화의 형성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외부 문화에 개방적이었던 전라도는 동시에 다양한 문화 교통로 로서의 핵심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전라도의 청동기문화는 외부문화에 개방적이었지만 고유의 독자성 도 유지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 지석묘를 들 수 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전라도는 우리나라분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에서도 지석묘가 가장 밀집된 분 포를 보이는 곳이다. 지석묘의 시작과 끝을 볼 수 있고, 지석묘사회의 구조와 발전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핵심 아카이브로서의 지역이 전라도인 셈이다. 고 유의 재지 토착문화를 유지하면서 외부 문화의 유입에 개방적이었던 전라도

의 청동기시대 문화는 공존과 통합을 거듭하여 우수한 청동기시대 문화를 건 설하게 된다. 예를 들어 송국리형문화가 유입되어 가장 탁월한 청동기시대 문 화중의 하나로 자리매김한 지역이 바로 전라도이다. 또한 북방지역의 점토대토 기문화는 만경강을 통해 전라도에 확산되었고 재지의 문화와 효과적으로 융 054 합하여 우수한 청동기시대 문화로 거듭나게 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전라도 는 마한이 시작되고 가장 마지막까지 강력한 마한 문화가 성행했던 지역이다. 전라도 지역의 이러한 마한의 시작과 발달은 그 이전의 우수한 청동기문화와 전 외래계의 점토대토기문화가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나. 전라도의 고인돌, 세계유산이 되다

4 한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선사유적은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청동기시 대에 성행하여 초기철기시대까지 존속한 거석문화의 일종으로 정치세력 형 성과 국가 성립시기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 같은 고인돌의 분포양상 을 보면 전 세계에 존재하는 고인돌 가운데 동북아 지역의 지석묘는 한국을

 

그림 3. 전라도에 집중된 지석묘 분포도(이영문 교수 작성)

21,528기로 추산되며, 총 3,342개 군집에 24,385기가분포하고 있다.

고인돌은 나라에 따라 이름이 다른데, 한국에서는 고인돌(굄돌)로 부르 고 한자로는 한국과 일본에서 지석묘支(받침 지)石(돌 석)墓(무덤 묘), 중국에서 055

는 석붕石(돌 석)棚(시령 붕), 유럽 등지에서는 돌멘(Dolmen) 등의 명칭을 사용

하고 있다. 이 고인돌은 선사시대 무덤으로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제단이자 1

조상신을 모시는 신전같은 의미로도 파악된다. 4

중심으로 중국과 일본의 일부 지역에 분포하며 특히, 중국 동북지역인 라오 닝 지역에서 서해안 지역을 따라 호남의 서남단까지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 다. 이 가운데 전북 고창에서부터 전남 전 지역이 하나의 거대한 밀집분포권 을 이루고 있는데 전라도 지역에 분포된 지석묘는 전북에 2,857기와 전남에

이같이 한반도에 가장 많이 있는 고인돌의 기원에 관해서는 바다를 통 해 동남아시아 또는 육로로 중국 동북지역에서 전해졌다는 전파설과 함께 주변지역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많다는 점과 축조연대가 이르다는 점에서 주변지역과 관계없이 자체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자생설이 맞서고 있어 아직 까지 뚜렷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 같은 우리나라의 고인돌 중 전라도의 고인돌은 예로부터 꽤 유명하 였다. 즉, 820여 년 전인 서기 1200년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는 전주에서 관리 를 지낼 때 당시에도 소문이 자자한 익산의 지석묘를 찾아 우리 역사상 최초 의 고인돌 기록을 남겼다.

다음날 금마군(현재 익산)으로 가는 중에 이른바 '고인돌支石'이란 것을 찾아가 보았다. 고인돌이란 것은 세상에 전하기를 옛날 성인聖人께서 '고여 놓 은 갓이라 하였는 데 과연 기이한 모습이 매우 신기하였다.

「동국이상국집』.

고려 문인 이규보가 정인이 만든 것으로 표현한 고인돌은 2000년 11월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 집중 분포된 고인돌 가운데 전북 고창의 고인돌 군락 과 전남 화순의 고인돌군, 그리고 강화도의 고인돌군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록되어 한국을 대표하며 세계적 거석문화로 공인되었다.

다. 한국 청동기, 철기문화의 중심 만경강유역 기원전 3세기경 한반도를 중심으로 형성된 고인돌문화는 쇠퇴하고 중 국 라오닝지역 철기문화가 한반도 지역으로 옮겨오며 새로운 철기문화가 한 반도 서북 해안권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 문화의 핵심은 세형동검-점토 056 대토기문화로 대표되는데 충청남도부터 전라북도 서해안지역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한편, 역사적으로는 경기, 충청, 전라의 해안을 따라 마한으로 통칭되 전 는 세력이 형성되었는데 금강유역과 함께 만경강을 사이에 둔 익산-전주-완 주지역이 새로운 중심이었음이 최근의 발굴 성과와 역사문헌적 검토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즉, 이 일대에서 발굴된 석관묘나 움무덤에서 청동검과 청동 4 거울 및 철제무기와 토기, 구슬 등이 출토되며 마한문화의 중심모습을 확연 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전북 완주 상림리에서 발견된 중국식 동검문화는 만 경강으로 연결된 교통로가 선사 이래로 많은 문화가 전래된 통로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기원전 까기를 전후하여 중국 전국시대의 철기가 유입되 고 고조선 및 중국계 문화가 전래되면서 이 지역은 마한의 중심으로 성장하 였다.

전라도 권역에서 초기 목관을 쓴 토광묘의 중심 분포권은 고조선 준 왕의 남래지로 알려져 있는 익산을 중심으로 하는 만경강유역이었다. 그리 고 이 문화세력은 기원전 2세기경에 절정을 이루었다. 기원전 2세기 이후에 는 완주 갈동, 신풍, 덕동, 전주 원장동, 중인동, 중화산동 등 만경강 남쪽의 전 주•완주 일대가 중심이 된다. 이 같은 토광묘를 사용하는 철기문화의 유입은 역사적으로 고조선 준왕의 남래사건과 이후 고조선 유민의 이동으로 연결되 며 이들에 의해 촉발된 새로운 마한馬韓성립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마한 의 중심으로 익산과 전주지역이 자리하게 된다.

한편, 영산강 중빠류지역과 섬진강유역에서는 이와는 다른 양상이 확 인된다. 즉, 이 지역에서는 세형동검문화의 청동유물들이 기존의 고인돌에 서 주로 출토된다. 이는 고인돌 문화를 유지한 기존집단이 새로운 물질문화 를 부분 수용하는 방식으로 문화변동 상황에 대응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유적으로는 나주 운곡동 고인돌, 영암 장천리 고인돌, 장흥 송정 고인돌, 순천 평중리 고인돌 등이 있다.

호 움무덤에서는 세형동검 • 청동꺾창(동과銅戈) 거푸집이 출토되어 전라도 지 역에서 청동기가 직접 생산되었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전주 마전 유적과 전 주 안심 유적에서는 청동기 제작 설비인 송풍관送風管이 출토되어 이러한 사 057

실을 더욱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목관을 쓴 토광묘는 기원 후부터는 점자 사라져 무덤주위에 구덩이를 1

판 주구묘로 대체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목관)토광묘 축조를 담당하였던 세력이 준왕세력이라면 주구묘를 축조한 세력은 토착 마한인들로 4

한국에서 청동기 생산과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유물은 국보 제231호 로 지정된 전 전남 영암 거푸집(용범鎔范) 일괄 유물이다. 또 전북 완주 갈동 1

볼 수 있으며 준왕세력이 약화되어 사라진 이후에 다시 마한인들에 의해 마한의 묘제인 무덤 둘레에 구덩을 파 무덤을 감싼주구묘가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같이 익산-전주 지역은 전통시대 문헌자료와 1960년대 이래 발견된 익산의 청동, 철기유적 그리고 2000년대 전주-완주 혁신도시 건설과정에서 발견된 다량의 청동기, 철기유적을 함께 고려할 때 한국 선사시대와 역사시 대를 잇는 중요한 거점지역이었음을 보여준다. 이같이 전라북도의 대표적 강 줄기인 만경강 유역 공간은 한국사의 첫 역사를 연 고조선의 청동기, 철기문 화가 한반도 중남부로 전해진 첫 공간이며 역사적 기록과 고고학적 유적, 유 물을 통해 확인된 마한의 중심으로 전라도 지역을 대표해 성장한 곳이다. 한 편, 세형동검문화는 전라도 서북부지역에 중심을 두고서 그 중 일부가 서남 부의 영산강 상류지역까지 들어온 것으로 생각된다. 영산강 중하류지역과 섬진강유역에는 그 이전부터 자리 잡고 있었던 고인돌-비파형동검문화 집단 의 영향력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3. 고조선 준왕의 남래와마한사회

 

가. 고조선 준왕의 남래와삽한정통론

058 『삼국지』동이전 등 중국사서에는 기원전 194년경 고조선의 준왕이 신 하인 위만의 정변으로 나라를 빼앗긴 후 남쪽 지역으로 이동하여 한韓왕이 되어 마한을 다스렸고 이후 진한, 변한의 명칭이 생겼다는 기록이 나타나 있 전 다. 여기서 '한韓이란 명칭은 동북아에서 왕을 의미하는 Khan(한)汗또는 크 다는 의미의 고유어 '한을 한자로 쓴 것으로 파악된다. 바로 이 명칭이 삼한 의 '한명칭이 된 것이다. 한편 고조선의 준왕이 남쪽으로 이동한 지역에 대해 4 『제왕운기』를 비롯하여『고려사』지리지,『세종실록지리지』등 대부분 전통 지리서는 현재 전라북도 익산지역이 고조선 준왕이 남쪽으로 내려 온 지역이 라고 전한다. 이 같은 사실은 현재 전라북도권 지역에서 한이란 명칭이 시작 되어 마한, 진한, 변한 등 삼한의 명칭으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사실에 대해 조선후기 학자들은 우리 역사의 정통이 단군조 선이래 고조선 준왕을 거쳐 마한지역으로 계승되었다는 '마한(삼한)정통론을 주장하여 역사정통성이 삼한지역에 있음이 강조되었다. 위만이 정권을 장악 했지만 이는 불법적인 것으로 정통성은 남쪽으로 이동한 준왕에게 있고 이 를 계승한 삼한지역에 역사의 정통이 계승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앞서 보았듯이 고고학적으로 익산지역과 함께 만경강을 둘러싸고 있 는 전주지역에서 청동기시대 중요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면서 고조선과의 연계성 이 고고학적으로도 확인되고 있다. 고조선 준왕의 이동과 한이라는 명칭의 사 용, 그리고 조선시대 고조선의 정통성이 삼한지역으로 계승되었다는 삼한정통론 등으로 이어진 계승의식이 있었기에 '대한이라는 명칭을 국호로 사용하게 되었 는데 그 중심지가 전북이었던 것이다. 이를 상징하듯이 고종은 1899년 전주 건 지산에 전주이씨 시조의 무덤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대한조경단을 설치하였다 이같이 전라도 지역은 만경강과 동진강을 둘러싼 호남평야를 중심으로 고조선의 정통을 이은 마한의 터전으로서 삼한에서 삼국으로 연결되는 우리

역사 정통의 중심이자 우리의 자랑스러운 나라이름 '대한'국호의 발상지로서 자리하고 있다.

고고학 자료상 한반도 중부 이남 지역은 후기 고조선 시기인 위만조선 단 계에 점토대토기문화 단계 이래의 주민과 문화가 계승 발전하는 양상을 보이 고 있다. 진국辰國에서 한韓으로의 명칭 변화가 진행되는 기원전 2세기 말부터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철기문화鐵器文化가 급격히 확산하는 변화가 일어났다.

진국辰國사회는 이주민들의 남하로 인해 해체되었지만 그 핵심 세력은 기원전 1세기 초 이전에 중서부 지역에 마한馬韓과 중부 이남 지역에 변한弁 059

전 1

4

나. 만경강유역에서 마한사회가성장•발전하다

韓, 그리고 소백산맥을 넘어 경상도 지역에 진한辰韓을 성립시켰다.

마한은 한강이남 지역에서 진한•변한보다 앞서서 최초로 등장한 정치체 로서 삼한 가운데 가장 강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한에 해당하는 공간 적 범위에 대해서는 한반도 중서부 지방인 경기 지역과 충청, 전라 지역이라 는 것에서는 대체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그런데『삼국사기』에 따르면 백 제 온조왕 27년(서기 9년)에 마한은 이미 멸망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 에, 중국 측 사서인『진사에서는 거의 3세기 말까지 마한의 견사 기록이 남 아 있어 마한의 성립과 소멸시기 분만 아니라 그 사회구조나 문화적 성격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마한의 성립과 발전에 대해서는 문헌자료와 고고학 자료를 적극 적으로 활용하는 연구들이 시도되었다 마한의 성립 시기와 배경에 대해서는 준왕의 남천시기(B℃上.194), 위씨조선의 멸망시기(B℃上그08) 등과 관련이 있으 며, 성립 주체는 토착세력을 계승한 집단, 위씨조선계가 주축이 된 것, 부여계 이주 집단 등을 상정하고 있다. 준왕집단이 남하했을 B.C.E. 200년경에는 당 시에 한족이라 부르고 있었기 때문에 마한의 성립은 일반적으로 B.C.E. 3세 기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충청귄라 지역의 청동유물과 공반되는 철기의 성격을 마한사회 소 국성립과 관련짓고 그 배경에는 서북한지방의 정치적 파동과 관련된 주민 이

동에서 비롯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준왕의 남천 사건을 예시하고 있다 고조선 준왕의 남천지로서 익산과 전주, 완주지역을 지목할 수 밖에 없는데, 서북한 지역의 토광묘들과 직접 연결되는 분묘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고, 군집 내에 서 계층성마저 확인되기 때문에 마한 사회에서 정치•문화적 중심지로서 자

060 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철기문화의 유입과 맞물려 만경강 유역의 전주와 익산, 그리고 완주와 김제에는 토광묘라는 새로운 묘제가 전 개되지만, 전남 지역은 지석묘가 여전히 축조되는 특성도 나타난다. 전

다. 영산강유역 대형 옹관고분의 발전 옹관이란 큰 항아리에 주검을 넣어 묻은 무덤으로 옹관묘가 권력자의

4 무덤으로 사용된 사례는 전남•북 서부지역의 삼국시대 옹관과 일본 큐슈 북 부지역의 야요이시대 옹관이다. 두 지역의 옹관은 시기나 문화적으로 전혀 다른 배경에서 출현해 직접 관련되지는 않는다. 영산강유역 옹관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다. 영산강유역이 자연환경적으로 석재가 부족하며 목관이 썩고 시신이 훼손되는 상황을 막기위해 썩지 않는 옹관을 사용하였 다는 것이다. 또한 옹관묘가 알의 모습을 떤 것과 내부에 칠한 붉은 칠은 부 활, 옹관에 새겨진 톱날모양의 문양은 태양을 상징하여 생명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옹관묘 문화가 고대 난생신화를 투영하고 있다고 보인다.

한편, 정치가회적으로는 백제의 팽창에 따라 토착세력이 정체성을 확보 하는 상징물로서 옹관묘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파악된다. 옹관은 전북 고창 지역에서 서남해안과 영산강을 따라 내려와 전남 해남지역까지 분포한다. 전 남•북 서부지역에는 3세기부터 옹관묘가 괄목할 만한 형태와 크기로 발전했 다. 4세기 전반이 되면 옹관은 관으로서 기능이 강화되며 규모도 한층 커졌 다. 분구는 기존의 방형에서 점자 마제형(말발굽형) 또는 장제형(긴사다리형)이 주를 이룬다. 옹관고분은 다장제 장법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흙을 높이 성토 해서 외형을 뚜렷이 드러낸 분구가 출현하며, 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분구 가 장자리를 따라 주구를 에워쌓는 독자적인 묘역을 구획하였다. 5세기부터 옹 관고분의 규모와 형태에 더욱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고분은 규모가

0 초기 용관

1. 파주 주월 24. 광주 금곡

2. 서울 풍납동 25- 함평 중랑

3. 아산 길에 26. 함평 송신

4. 청원 송대 27. 함평 고양촌

5. 공주 히봉 28. 나주 상등

6』서전 당정 29- 함평 성남

7. 군신 신월 30. 나주 복합

8. 김제 장산 31. 나주 영동/회산

9. 역신 을촌 32- 나주 용호

10. 익산 영등동 33. 나주 송월 Il.부안신리 34. 무안 인평

12. 부안 하입적 35. 부안 양장

13. 부안 대통 36. 영암 금계

14. 고장 송름 37- 영암 전황

15. 고장 -통덕 38. 영암 전황 계양

16. 고장 만동 39. 장홍 신풍

17. 고창 남산 40. 순청 노동

!8. 고장 에지 41. 남원 서전

19. 영장•군동 42. 의신 사니 20. 영광 학명 43. 군산 국동

기. 화평 예덕 44- 담양 태목

22. 함평 -일야 45. 광주 신창동

23. 광주 쌍혿

발전기 이후 통관

[, 부안 고읍 11 영암 내동

2. 나주 복합 12. 영암 민수 3. 나주 용호 13. 영암 대로!

4. 나주 오람 14. 영암 수신

5. 나주 왕곡 15 영암 와우

6. 무안 인평 16. 영암 유야

7』나주 방두 17. 영암 월송

8. 영암 양계 18. 해남 신금

9. 나주 민남 19. 해남 원진 농암123호

10. 영암 신연 20 해남 부길

4

4,17

061

전 1 4

그림 4. 3~6세기옹관묘분포도

확대되어 고총으로 발전하였고, 기존의 제형(사다리형) 또는 타원형 분구는 원 형과 방대형으로 정형화되었다. 이 시기 대표적인 유적은 반남고분군인데 옹 관고분이 탁월한 규모의 분구를 갖춘 고총으로 발전되었다. 반남고분군은 영 산강 지류인 삼포강유역을 터전으로 조영된 약 40여 기의 고분이 밀집 분포 하는데, 대안리, 신촌리, 덕산리 등지에 집중되어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발굴 되기 시작한 반남고분군은 압도적인 크기의 대형 옹관과 함께 금동관, 금동 신발, 금은장 장식큰칼(삼엽문, 단봉문) 등이 부장되어 유력 수장의 면모를 보 여주었다. 반남고분군에서 고총고분으로 발전한 시기는 5세기 후엽~6세기 중엽까지 약 100여 년간이다.

한편, 대형 옹관고분의 중심지인 반남지역은 주변지역과 달리 전통 옹관 묘제를 유지하면서도 백제계 금동관, 금동신발, 금은장 무기류, 가야계 화살

통, 일본열도 하니와埴輪와 닮은 원통형토기 등 외래요소가 도입되어 고분에 융합되는 독특한 지역이었다. 이같은 배경은 당시 백제가 고구려에 의해 한성 이 함락당하고 개로왕이 사망하는 등 극도로 혼란한 시기의 정치적 상황에 따른 것이었다. 지역의 유력 수장은 백제의 직•간접적인 영향력에서 이탈하 062 고 독자화 하려는 움직임을 나타낸 것으로 파악된다. 이같은 상황은 일부 유 적에 나타난 일본열도 북부큐슈의 횡혈식석실과의 유사성 및 전방후원형고 분, 즙석분, 원통형토기, 왜계 토기 등 일본열도와 관련된 유구와 유물이 다 전 수 나타나고 있어서 두 지역 간의 소통을 찾아볼 수 있다.

6세기 중엽 이후에는 반남지역을 중심으로 존속하던 대형 옹관고분은 급격히 소멸하였다. 이 시기는 백제 성왕대 도읍을 사비로 이전하고 지방정책 4 을 강화하는 등 백제가 안정기에 접어들었던 시기로 반남고분군에서도 고총 이 사라지고 백제 사비기의 석실로 교체되었다. 이는 토착세력은 자신들의 지 배력을 존속시키기 위해 백제 지방통치체제에 편입하거나 제압되어 백제의 지방 귀족화 한 것으로 파악된다.

4. 백제 중흥, 부흥, 부활의 땅 전라도

 

백제百濟는 나라 이름이 정해지는 과정이 3단계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삼국지』위지 동이전에는 맏형 백自자를 쓰는 백제伯濟가 마한의 여러 나라 가운데 하나로 소개되고 있다.『삼국사기』백제본기에서는 시조인 온조가 한 강 남쪽에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나라를 세웠다(십신보익+련補翼) 하여 이름을 십제+濟로 정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리고 미추홀로 갔던 형 비류가 죽자 그 를 따랐던 세력이 동생 온조와 합쳐지면서 백성이 즐겁게 따랐다 하여(백성악 종百姓樂從) 백제百濟로 바뀌었다고 전한다.

즉 백제라는 나라이름은 백제伯濟-십제+濟-백제百濟로 바뀐 것이다. 그 런데 이 명칭들의 변화를 보면 이름의 앞 글자만 으뜸 백白-열 십+-일백 백百

으로 바뀌고 뒷부분의 제濟글자는 계속 유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 는 변하지 않은 글자, 즉, 제濟는 '건너다라는 의미와 함께 '나루터' 즉, 배가 정박하는 포구라는 의미가 있다. 결국 백제라는 나라이름은 으뜸나루터 국 가-열 개 나루터 국가-백 개 나루터 국가로 발전한 것이다. 백제가 한강, 예성

강, 임진강 및 경기, 충청, 전라지역 서해안 포구를 중심으로 성장해 동아시아 해양 중심국가로 성장한 사실이 국호에 표현된 것이다. 결국 백제라는 이름 은 당시 바다를 중심으로 중국-한국-일본을 연결하는 동아시아 해양 국가로 063

성장한 사실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우리나라 최초이자 현존 유일의 백제시대 바다제사 유 1

적인 전라북도 부안 죽막동 유적이 발견되면서 극명하게 확인되었다. 부안 죽 막동 제사 유적은 서해안에 돌출된 해안절벽에 형성된 해식동굴 옆에 만들 어진 유적으로 한성백제시기 이후부터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까지 바다 제 사가 이어진 유적이다 이 유적은 1992년 서해 바다를 지키는 여신 개양할미 를 모신 수성당水聖堂주변 해안초소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곳으로 백 제이래 바다 항해의 안전을 기원한 우리 민족의 해양 제사유적의 원형모습을 보여준 곳이다.

제사유적에서는 3세기 후반부터 마한, 백제, 가야, 왜 토기 및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주목되는 것은 가 야토기 및 왜에서 만든 석제 모조 무기와중국제 초기 청자 등이 나타나 이른 시기부터 백제가 중국 및 가야, 왜 등과 바다를 통해 교역을 진행하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1986년 발견된 익산 입점리 유적은 금강 하구지역에서 백제의 해 양진출의 관문 역할의 거점지역을 통치한 인물의 고분유적으로 파악되는 곳 이다. 수십기 백제고분 가운데 제1호분에서 출토된 유물로서는 금동제 장신 구류•금동제 신발•말 재갈•철제 발걸이로가중국산 청자항아리 화살통 장 식•금귀걸이•유리구슬등이 있다.

이 같은 포구세력으로서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 나주유적이 다. 즉, 나주는 영산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대표적인 포구세력으로 반남지역 4

일대인 신촌리, 복암리, 정촌고분에서 백제와 연결되는 최고의 금동제 관모 와 금동제 신발이 출토되었다. 또한, 비슷한 금동제 신발이 전북의 고창 봉덕 리고분, 전남 고성 갈두리유적에서도 발굴되어 백제 지방세력 중 포구로 연결 되는 세력들의 양상을 알 수 있다. 이는 백제가 지방 토착세력에 대한 배려로 064 백제왕이 자방세력에게 하사하였고 이들이 이를 착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 다. 이같은 유물은 일본 구마모토지역의 후나야마고분에서도 금동제 관모와 금동제 신발이 출토되어 이들 유물은 당시 백제와 일본간의 문화교류를 연 전 구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결국 백제는 바다를 통해 한반도 지역의 과거 마한거점 및 가야세력과 교류하였고 바다건너 왜지역까지 연결되는 정치 세력들에게 금동관모와 금 4 동신발 및 각종 권위용품을 하사하여 이들을 포괄한 해양연대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이들을 제후왕으로 장악하며 해양국가로 성장하였다. 또한 양직공 도에 나타난 것처럼 주변소국들을 거느리고 중국 양나라와 교류하며 그 위 상과 역할을 잘 나타내었다. 특히, 이 같은 전라도 권역의 해양거점 공간과 연 결된 유적에 나타난 양상은 전라도 지역이 백제의 해양진출과 교류의 중요 거점으로서 역할했음을 잘 보여준다.

가. 새로운불국토를꿈꾼 백제 중흥의 왕 무왕 해양을 통해 성장한 백제의 공식 수도는 한성(서울 강남), 웅진(공주), 사비 (부여)지역으로『삼국사기』에 전한다. 그런데 2015년 백제역사유적지구로서 공주 부여와 함께 익산지역이 백제의 왕도유적으로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 재되었다. 익산지역에서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유적은 현존하는 백제의 유일 한 왕궁인 '왕궁리유적'과 삼국시대 최대의 사찰인 '미록사지 유작이다. 이들 공간은 누가 그리고 왜 만들었을까?

익산지역에 백제의 새로운 터전을 마련한 존재는 백제의 무왕이다.『삼 국사기』기록에는 법왕의 아들로 나타나고 있는데『삼국유사』에는 백제 무 왕이 삼국시대 왕들 가운데 유일하게 용*의 자식으로 기록되어 주목된다.  , “백제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章인데 그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

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속의 용卍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다.”는 것이다. 무왕의 탄생지에 대해서는 익산지역의 금마면 서고도리 연동마을에 있는 마룡지馬龍池와 주변 용순리지역 명칭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 같은 백제 무왕의 신화적 탄생설화는 신라의 문무왕이 동해 용이 되

었다는 사실과 대비되는 내용으로 유일하게 용의 아들로 부각된 것은 용으 로 상징된 토착성을 잘 보여준다.

한편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으로『삼국유사』에서는 “재주와 065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항상 마를 캐다가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

아 사람들이 서동이라 이름지었다.”라 하였다. 이 내용을 보면 무왕은 용의 1

아들이라 하였지만 평범한 시골 청년으로 성장한 존재였고 왕의 후손이란 내용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무왕이 범상치 않은 존재로 부각되는 것 은 자신의 부인을 얻는 과정 설화이다. 당시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의 미 모가 뛰어나다는 말을 들은 서동이 자신의 부인으로 삼기 위해 신라까지 가 서 아이들에게 선화공주가 서동과 어울린다는 '서동요를 부르게 해 선화가 왕실에서 쫒겨나자 선화를 맞아 부인으로 삼았다는 내용이다. 또 현재의 익 산지역에 와서 함께 살 때 선화공주가 생계를 위해 내놓은 금팔찌를 보고 자 신이 마를 개던 곳에 이 같은 금이 많다고 하였는데, 선화공주가 금을 모아 아버지께 보내자는 말을 따르니 신라왕실과도 관계가 좋아지고 백성들에게 도 베풀어 민심을 얻어 왕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서동은 백제에서 신라로 건너가 자신의 부인을 맞이할 정도로 지 략과 기개가 뛰어난 인물로 묘사되고 있으며 금을 통해 신라 및 백제지역에 서 명성을 얻었다는 점에서 매우 뛰어난 친화력과 포용력을 가늠케 한다. 특 히, 한미한 존재로 묘사된 서동과 선화의 만남은 서동과 신라왕실이 정상적 이지 않은 상황 속에서 연결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신라왕실과 몰락한 백제왕실 세력과의 결합일 가능성도 추측케 한다.

한편 무왕의 왕위등극과 관련된 금관련 설화에서 주목되는 것은 금마지 역의 금이다.

사실 전라북도 지역의 금자 들어가는 지명을 보면 금마와 함께 김제, 금 4

구 등 금자가들어가는 지명이 많으며 특히, 김제의 경우는 금산과 연결되어 사금이 많이 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한때 미록신앙과 연결되어 금은 신화 적인 내용이라 하였지만 미록사에서 멀지않은 왕궁리 유적 공방터에서 금세 공 과정의 부스러기 금이 흙속에서 상당량 찾아진 것은 결코 전설이 아닌 사 066 실을 전하는 내용이다. 또한 미록사지 서답 발굴시에도 규격화된 금으로 된 시주품도 나와 이 지역의 금산출 가능성을 확인시켜준다. 즉 삼국시대의 이 름도 금마저金馬渚였던 이곳이 진짜 금이 났던 곳임을 알려주며 이 금으로 무 전 왕은 신라와 백성 모두에게 인심을 얻었음을 알 수있다. 이같이 무왕은 익산 지역의 금을 바탕으로 성장한 지방세력이거나 몰락한 왕손 중 익산에서 신라 와의 협력을 통해 성장한 세력일 가능성이 보여진다.

4 이같이 '용卍의 아들로 신성시된 무왕은 미록사탑을 세워 익산지역 주민 들의 인심을 얻었다. 결국 무왕은 이는 마한의 중심지였던 익산지방 고유의 용신앙과 불교신앙인 미록하생신앙(미록불이 내려와 사바세계를 극락으로 만들어 달라고 기원하는 신명을 연결하여 고구려•신라의 계속된 침략에 국가존망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익산을 국가중흥의 땅으로 삼아 불국토로 탈바꿈하려 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미록사는 백제 무왕과 왕비가 미록삼존의 출현을 계기로 금당과 탑, 회 랑 등을 세 곳에 건립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1980년부터 1994년까지의 발굴 조사를 통하여 미록사의 배치는 중원과 동• 서 삼원으로 3개 사찰이 함께있 는 구조임이 밝혀졌다.

미록사 서원에 세워져 있는 미록사지석탑은 절반 이상 붕괴되어 6층까 지 일부가 남아있던 것을 1915년 일본인들이 콘크리트로 보강한 상태였다. 이 석탑은 본래 9층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 규모가 장대하고 석재를 사용하 여 목조탑을 표현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의 시원으로서 그 가치가 크다. 미록사지석탑은 2009년 1월 1층의 제1단 기등돌 상면에서 사리를 모 신 구멍이 발견되고 내부에서 사리장엄과 봉안기록 등 유물이 발견되어 백제 사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탑은 2017년 남아있던 6층까지의 모습으로 재현되었고 곧 개방될 예정이다. 미록사의 창건배경은 신라 황룡사

皇龍寺의 예를 감안할 때 주변국을 복속시키고 미록불국토를 구현하고자 하 는 신앙적인 염원에서 발현된 것이라고 보인다. 또 무왕은 현세에서 부처를 돕는 왕인 전륜성왕轉輪聖王에 비유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이 익산은 무왕이 이루고자 한 미륵 불국토의 땅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무왕은 백제를 불교를 통해 신성국가로 중흥하려하였고 이를 위 해 익산지역에서 새로운 수도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익산 천도문 제는 1970년 일본 교토대 마키타 다이료 교수가 찾아낸 '관세음응험기觀世 067

音應驗記'에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했다는 기록에 의해 본격적으로 논의되었

다. 그 내용중에 “백제 무광왕(무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여 사찰을 만들었는 1

데 그때가 정관 13년(639년)이었다. 때마침 하늘에서 뇌성벽력을 치는 비가 내 려 새로 지은 제석정사가 재해를 입어~”라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지모밀자는 『삼국사기』에는 지마마지支馬馬月라고 했는데 이곳이 금마金馬로서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백제 별도로 표현되어 백제 천도설, 별도설, 신도설 등 다양 한 입장이 개진되고 있다.

그런데 왕궁유적 등에서 발견된 '5부명' 인장와와 수부府(수도를뜻함) 명' 인장와의 존재와 왕궁유적에서 발견된 중국 북조朝시대에 제작이 유행 했던 청자편의 발견은 왕궁리 유적이 수도의 왕궁이었음을 보여준다. 결국 600년 무왕이 집권하면서 자신의 출생과 관련있는 익산 금마에 미록사를 창건하고, 비슷한 시기에 왕궁리 유적에서 보이는 당시의 성벽과 건물터들에 궁궐이나 부속건물을 지어 천도를 위해 새로 도성을 조성하였다.

이같이 백제의 무왕武王은 금마로 왕도를 옮겨 백제의 중흥을 꾀하며 당 시 미래의 구세주 신앙인 미록신앙을 백제불교의 주축으로 하고 호국적인 나 라의 사찰로 미록사를 창건하였고, 불교 수호를 자임한 자신의 궁궐의 근처 에는 토착신과 연결되는 제석사를 창건해 왕실의 번창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 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무왕은 익산지역에 백제를 새롭게 중흥시기기 위해 수도를 만들어 옮기고 미륵 불국토신앙과 전통신앙을 결합해 백성들에게 새 로운 백제의 희망을 제시하였다. 4

나. 백제부홍전쟁과동아시아국제전쟁의 현장 서기 660년 7월 18일 백제는 나•당 연합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수도 사 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항복하면서 백제는 전쟁에 패하였다. 당군은 660 년 9월 3일에 백제 왕과 왕족 및 신료 93명과 백성 1만 2000명을 포로로 삼 068 아 사비(부여)에서 배를 타고 귀환 길에 올랐다. 이때 신라와 당의 급습으로 15일 만에 패한 백제지역민들은 의자왕과 왕세자 등 왕실과 귀족대신들이 대부분 당나라로 압송되는 상황이 발생하자 이 전쟁이 단순한 백제 공략을 전 통한 정치적 복속화가 아닌 백제국가의 완전한 붕괴 전쟁이었음을 확실히 깨 닫게 되었다. 소정방이 이끄는 당의 '대군이 돌아간 후(대군회후大重廻後)'에 복 신 등은 곧바로 부흥군을 일으켜 백제부성인 사비성 탈환을 위한 병력 동원 4 을 취하였던 것이다. 당시 부흥세력은 당나라군이 거의 철수하고 내당 주둔 군 1만 7000명만이 남은 사비를 포위했다. 9월 23일부터 개시된 부흥세력의 사비성 포위전은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이후 백제 각지에서 당과 신 라군에 대한 부흥전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백제 부흥세력의 대표적인 인물들로 두시원악의 정무, 구마노리성의 여 자진, 임존성의 혹치상지와복산도침 등이 나타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백제 부흥세력이 사비성을 포위한 지 보름이 지난 10월 9일에 신라 무 열왕은 태자 김법민과 함께 다시 사비성 방면으로 군대를 출동시켰다. 김춘 추는 우선 이례성(논산 연산)을 공략하여 10월 18일에 함락시켰고, 다시 10월 30일에는 사비남령의 부흥세력을 쳐 물리쳤다.

백제부흥군은 661년 2월에 2자로 사비성을 포위 공격하던 중 새로운 나 •당 지원군의 공격으로 웅진강구에 크게 패하였고, 나아가 더욱 적극적인 전 환한 신라군의 공세에 그동안 나•당군의 침탈에서 벗어나 있던 두량이성(완 주 이서)과 고사비성(정옵 고부) 그리고 주류성 등 중방 고사성 일대로 전장을 확대해야만 했다. 하지만 3월 12일부터 개시된 신라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방 어하여 4월 19일에 물리침으로써 661년 4월을 기점으로 하여 백제 부흥전 쟁은 사비와 웅진이란 금강 일대의 좁은 범위에서 벗어나 중방 고사성 등 전 남북 일대의 넓은 범위로 확대하게 되었다. 이같이 661년 2~4월 사이 나•당

군과 부흥군 사이에 치열하게 이뤄진 전투가 기존의 사비 지역을 벗어나 점 자 금강 이남의 백제 지역으로 확산하였다.

사신을 파견하는 등 외교적 고립까지 벗어나려 모색하는 한편으로 새로운 왕 위 계승을 통해 백제의 '재조再造즉 '백제 왕조의 부흥을 실행하려 했던 것 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같은 본격적인 백제의 저항을 상징하는 사 069

건이 금마 즉 익산지역에서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6월에 대관사大官寺우물 물이 피가 되었고, 금마군金馬郡땅에 피가 홀 1

4

러서 그 넓이가 다섯 보가 되었다. 왕이 죽었다. 시호를 무열武烈이라 하고;   묘호를 태종太宗이라 하였다.

「삼국사기』신라본기 태종무열왕.

이러한 상황에서 부흥군은 복신•도침과 여자진을 정점으로 정무와 혹 지상지 등이 참여하는 연합으로 재편되어 조직화되었고, 이를 통해 왜국에

상기 사료는 백제를 붕괴시킨 신라 무열왕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다. 백 제 붕괴 1년 후인 661년 6월 금마 대관사(익산 왕궁리유적에 있던 사찰)의 우물 물이 핏빛으로 변하고 금마군에 피 같은 붉은 물이 흐르는 사건과 무열왕의 죽음을 연결하여 보여준다. 이 기사는 태종 무열왕의 비정상적 죽음을 은유 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파악되는데 금마지역의 반 신라적 성격과 백제부흥세 력의 적극적 반격의 신호로 파악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특히, 당시 왜에서 백 제부흥을 위해 원병이 처음 출발한 661년 5월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이 기록 은 전라북도권의 백제 유민세력이 본격적인 부흥전쟁을 상징하는 것으로 추 정된다.

660년 8월 의자왕이 항복한 직후 지방에 남아있던 백제의 세력들은 각 지역에서 백제부흥 전쟁을 전개하였다. 백제부흥전쟁의 거점지역은 임존성 任存城과 주류성周留城으로 양분되었다. 임존성壬存城은 백제의 서방을 관할하 던 곳으로 충남 예산의 봉수산지역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곳은 유명한 혹치 상지 등이 중심이 되어 초기에 당과 신라군에 대항하였다.

그런데 백제부흥군의 핵심거점은 주류성이었다. 이곳은 복신과 도침 및

일본에 있다 귀국해 부흥군의 중심이 되었던 왕자 부여풍 등이 함께 활동한 부흥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주류성 위치에 대해 충남 한산 건지산설, 홍성설, 전북 부안 우금산성설 등이 제시되고 있다. 한산의 건지산성을 주류성으로 보는 견해는 주변 지형 등이 역사기록과 부합되지 않는 문제점과 최근 발굴 070 을 통해 축조시기가 고려후기로 파악되어 더 이상 주류성으로 보기 어렵게 되었다.

최근 학계는 지형과 관련 기록의 연결성을 감안할 때 부안의 우금산성 전 이 주류성으로 파악된다고 보고 있다.『일본서기』등 사료를 보면 “주류성의 위치는 백제부흥전쟁 수행과정에서 바닷가에 위치해 방어와 왜국倭國과의 통교에는 유리했지만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과 양잠 4 에 적합지 않아 이후 피성避城(현재 김제)으로 이동하였다가 다시 복귀하였다.” 라는 상황이 기록되었다. 따라서 주류성은 김제지역과의 관계도 고려되어야 하며 또한 663년 백제부흥군과 왜 원병이 신라와 당의 군대와 대규모 전투 를 행한 백강구와 인접한 곳이다.

한편, 왜에 주재하고 있던 풍장이 백제왕으로서 백제부흥을 위해 귀국 한다. 660년 백제붕괴 직후 왜는 백제를 지원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준비 하였고 3자례에 걸쳐 각각 1만2만 7천에 달하는 원군을 보냈다.

특히, 663년 8월 마지막 전투가 지러져 백제-왜 연합군이 신라-당 연합 군에 대패하며 부흥전쟁은 종식되었다. 이 전쟁은 동북아 한주일의 군대가 최초로 맞붙은 국제전쟁으로 백제가 완전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백제유민 이 대거 왜로 건너가 새로운 국가 일본을 마련하고 신라와 당이 고구려를 본 격적으로 공격하는 상황이 전개되면서 동북아 역사를 새롭게 구축하게 되 었다. 전쟁이 지러진 백강의 위치에 대해서는 금강설, 동진강설, 금강-동진강 합구설 등으로 크게 대비되어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앞서 주류성, 피성, 백강구로 연결되는 공간으로 가장 적합한 공 간은 이후 675년 당나라의 신라장악 야욕을 꺾은 나당전쟁의 격전지 기벌포 와도 연결되는 곳으로 이는 깻벌을 의미하는 계화(界火를 화火의 원발음 '불로 읽 으면 =개불=개벌)와 연결되어 현재의 동진강 하구가 된다. 이같은 동아시아 국

제전쟁이 벌어진 백강은 동진강 하구일대이고 주류성의 위치는 부안 우금산 성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곳은 김제지역과도 인접하고 당시에는 해수가 더 들어와 섬처럼 둘러싸인 곳으로 특히 산 정상에는 부흥군의 중심인 복신이 머물던 복신굴과 산성 성벽이 여전히 잘 남아 있다.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패하자, 복신福信과 도침道琛을 위시한 백 제부흥군은 일본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일본에 체류 중이던 풍은 661년 1차 일본의 원군을 거느리고 귀국, 복신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격전을 벌여 071

나•당연합군을 위기에 빠뜨렸다. 그러나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여 전권을 장

악하려 하자, 풍은 복신을 살해한 뒤 실권을 잡았다. 부여풍은 663년 백강 1

•工에서 백제부흥군 및 왜국이 보낸 원병과 함께 나당연합군과 싸웠으나 1천 척의 함선 가운데 4백 척이 불타는 대패를 당하자 배를 타고 고구려로 망명 했다. 이 같은 지도부의 내분이 부흥전쟁을 좌절케한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일본서기』에 따르면 663년 9월에 주류성이 함락되면서 백제부흥세 력은 붕괴되었다. 이때 백제 귀족들은 “오늘로서 백제의 이름이 끊어졌으니 조상의 무덤도 다시 찾아뵙지 못하게 되었다”며 왜로 망명길을 떠났다

663년의 백강전투의 패배로 말미암은 백제부흥전쟁의 실패는 백제의 완전한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백제에는 많은 '백제유민'이 발 생하게 된다. 이들 백제유민들은 현실적으로 신라의 복속민이 되거나 풍장 왕과 같이 고구려로 망명한 소수의 백제유민을 제외하고는 당시 백제를 도우 러 온 왜국으로의 피난이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백제와 왜국 은 이전부터 오랫동안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었고, 이제 당과 신라를 대적해 야 하는 동병상린의 현실적 입장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한편, 1979년 12월 우금산성 아래 개암사에서『별기』라는 기록이 발견 되었는 데 내용 중 17세기경 만들어진『개암사사적기』에 우금산성을 주류성 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 확인되어 우금산성 주류성설을 더욱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이같이 최근 국내외 백제관련 연구자들은 백제의 마지막 거점 주류성에 대해 대부분 부안 우금산성쪽으로 입장을 모으고 있다. 또한 이곳은 백제 유 4

민들이 마지막 눈물을 홀리며 백제라는 이름이 사라져감을 아쉬워하며 일본 으로 이주해간 곳이다. 따라서 이 같은 주류성으로 파악되는 부안 개암사 뒤 의 우금산성에 대한 발굴조사와 학술연구, 지역사 교육과 역사교육의 현장으 로 부각하는 사업 등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를 통해 백제의 마지막 부흥의 꿈

072 과 새로운 백제의 역사를 찾는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다. 견훤, 전라•충청(전주, 무주, 공주)권을 아울러 백제 부활을 선포하다 전

“신라가 말년에 쇠미하여지자 정지가 어지럽고 백성들이 흩어졌다.”

「삼국사기』궁예전.

4 “왕의 총애를 받는 소인배들이 왕 가까이 있으면서 정권을 도둑질하고 농락하니 기강이 문란하고 해이해진데다 기근마저 덮지자 백성들은 정처 없 이 흩어지고 도둑의 무리가 벌떼처럼 일어났다.”

「삼국유사』후백제 견원.

신라는 하대(780~935)에 이르러 국가적 혼란의 누적으로 통제력이 급속 히 약화되었다. 특히, 진성여왕 때 군대를 파견해 세금을 독촉하자 나라는 전 면적인 내란상태로 들어갔다. 이 같은 난세를 타개하기 위한 영웅 견훤의 출 현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었다.

견훤甄萱의 출생지역에 대해 2가지 기록이 전한다.『삼국사기』에는 견훤 은 상주지방 출신으로 농사일로 어머니가 숲에 잠시 놓아두면 호랑이가 와 서 젖을 먹였다고 하였다. 또『제왕운기』에는 새가 내려와 감싸주고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고 성품은 용맹한 호랑이(웅호雄虎)같다고 하여 신비로움과 용 행함을 표하였다. 또 군인이 되어 창을 베고 자면서 적을 대비하였고, 용기는 항상 군사들 중 첫째였다고 전해져 견훤출생의 신성함과 용맹스런 기상을 표 현했다. 한편,『삼국유사』에서는 견훤이 광주 북촌 부잣집의 딸과 자색옷을 입은 남자로 변한 지렁이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이는 견훤이 처음 무진주(광주)를 장악해 토호의 딸과 혼인한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

다. 특히, 지령이란 표현은 원래는 백제 무왕처럼 '용죌의 자식으로 전하다가

후백제가 망한 이후 용 대신 지렁이로 비하되었다고 추정된다.

성이 높지만『삼국사기』등 우리 역사서에 '후백제'라 표현하여 '후백제' 명칭 을 학계에서 사용하고 있다.

견훤은 전주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고조선-마한-백제로 이어지는 역사 073

정통성 계승의식을 표명하였다.

“우리 역사를 상고하니 마한馬韓이 먼저 일어난 뒤에 혁거세가 발흥하여 1

4

진한(신라), 변한이 이에 따라 일어났다. 이에 백제百濟가 금마산金馬山에 건국 하여 600년이 되었던 바 당나라 고종이 신라의 청에 따라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다. 이제 내가 어찌 완산山에 도읍을 세워 의자왕의 분함을 풀지 아니하라? ”하고 드디어 후백제왕 濟王을 칭하였다.

「삼국사기』견원.

이같이 견훤은 892년 무진주(광주)에서 성장하여 후백제를 자칭하였고 900년(효공왕 4) 완산주(전주)에 이르자 주민이 환영하므로 후백제왕을 자처 하며 본격적인 후백제 역사를 전개하였다. 당시 국가명칭은 '백제였을 가능

사료에서 '마한이 먼저 일어났고 혁거세가 후에 일어났다는 말은 조선시 대 실학자들이 우리 역사의 정통은 고조선-마한으로 연결되었다는 마한정 통론 인식의 원형으로서 이미 견훤이 고조선 준왕의 익산(금마)지역 망명과 이를 이은 마한과 백제 계승이라는 역사인식을 피력한 것이다. 이를 근거로 자신이 부활시킨 '백제가 우리 역사의 정통 즉, 고조선-마한을 계승하고 있 음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후삼국시기 후백제가 신라보다 역사 정통성이 있는 나라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전주에 나라의 수도를 정한 역사명분을 제시하여 익산-전주를 하나의 권역으로 파악한 지역인식을 제시하였다.

견훤왕은 전주 천도 이후부터 본격적인 영토확장을 하였다. 후백제의 영 역은 크게 세 방향으로 나뉘어 확장되었다. 그 하나는 후백제의 배후지역인 서남해 일대이고, 두 번째는 고려와 접경지역인 한강 상류의 충청도 내륙지역 이며, 세 번째는 신라와 인접한 낙동강 이동의 경상도 지역이다. 후백제의 판 도는 한때 전라남북도와 충청남도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경상도의 서부까지

손을 뻗쳤었다. 대체로 충청남도의 중부선에서는 태봉泰封과 대치하고 남쪽 에서는 전라남도의 서남부에서 왕건의 수군과 다투고 있었으며, 동쪽에서는 상주尙州합천陝川진주晉州를 잇는 선을 전선으로 하여 한때는 안동安東영천 永川경주慶州등지까지 깊숙히 진출하기도 하였다.

074 한편, 918년 6월 자신보다 10살 연하인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자 공작선(부채)와 지리산 죽전(화살)을 선물로 주며 도량과 배포를 보 여주었다. 또한 왕건과의 서신교환에서 “나의 바라는 소원은 활을 평양성문 전 丁平壤城門樓에 걸고 (나의) 말에게 패강貝江(=대동강) 물을 마시게 하는 것이다.” 라고 하여 고구려 영역을 포함한 후삼국 통일의지를 천명하였다.

특히, 견훤은 신라에 대한 공략을 강화하였는데 920년 1만의 기병을 이

4 끌고 합천, 초계지역을 공취하고 925년 12월에는 거창 등 20여 성을 공취하 였고, 이어 927년에는 신라 왕도 경주를 급습하여 당시 신라왕인 경에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옹립하였다. 이때 신라의 구원요청을 받은 왕건의 원병을 대 구 공산에서 대패시켰는데, 고려장수 8명이 전사하였다 하여 이 산의 이름이 '팔공산으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다. 신라왕도를 공략한 견훤은 신라의 보물과 인재를 대거 이끌고 전주로 돌아와 왕도 전주를 새롭게 꾸미게 되었다.

견훤은 후백제왕을 자칭하고 관제를 정비하는 한편, 현재 중국의 항주지 역에 있었던 오월吳越과 후당後唐, 거란契丹및 일본日本에도 사신을 보내어 국 교를 맺거나 통교하는 등 국제적 역량과 위상 확대를 꾀하였다. 이는 해양국 가 백제의 위상을 회복하고 해양대국으로 거듭나기 위한 견훤의 의지가 나 타난 것이다. 특히, 현재의 항주지역에 위치한 오월과 일찍부터 교류하여 전 주에 정도한 900년 사신을 파견하였고 오월왕은 보빙사를 파견하는 등 국제 교류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당시 후백제가 중국과 교류한 항로는 후에 고려가 군산도 즉, 현재의 선유도지역을 활용하여 송나라와 교류하였던 상황을 감 안하면 현재의 만경강을 활용하여 전주에서 군산도(선유도) 및 흑산도를 이용 한 항로를 활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같은 후백제의 대외정책은 후삼국간 의 관계에서 국제적 위상을 활용해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목적이 강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935년(경순왕 9) 왕위계승 문제로 갈등한 장자 신

당시 견훤의 투항과 후백제 지도부를 와해시킨 행동에 대해 부자갈등에 의한 자멸이란 평가도 있지만 당시 대세가 고려로 기운 상황 등을 감안하여 대규모 전쟁에 의한 백성들의 죽음을 막기위한 대승적 조치로 파악하려는 075

입장도 참고된다.

한편, 문화군주를 꿈꾸고 후삼국 통일을 기약하며 다양한 정책을 시행 1

한 후백제왕 견훤과 결자해지적 차원에서 대승적으로 고려 왕건에 귀부하고 4

검i申劍의 정변으로 견훤은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었다 탈출해 고려에 투항하 고 자신의 사위 등도 투항케 해 후백제 지도부는 분열되었다. 결국 935년 신 라의 경순왕은 왕건에게 항복하고 936년 왕건이 선산 부근에서 신검의 후백 제군을 격파하자 후백제는 결국 45년 만에 붕괴되었다.

대규모 살상을 막으며 후삼국 통일을 이뤄낸 견훤의 역사적 평가가 새롭게 시도되어야한다.

라. 새로운가야역사의 거점, 전북 최근 한국 고대사의 새로운 화두로 '가얘가 떠오르고 있다. 가야는 고구 려, 백제, 신라와 함께 우리 고대사의 주역이었다. 그러나 문헌사료의 절대 부 족과 일제의 식민사관에 의한 왜곡에 의해 가야의 실체와 역사적 위상이 밝혀 지지 않은 채 삼국중심의 한국고대사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이같은 가야가 부 각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이후 급증한 가야유적의 발굴을 통해서였다. 가 야 관련 유적은 경상남도를 비롯해 경상북도, 부산광역시, 전라남도, 전라북도 에까지 분포하지만 지금까지는 금관가야(김해지역)와 아라가야(함안지역) 그리고 대가야(고령지역)가 있었던 경상도 지역의 낙동강유역을 중심으로 파악되었다.

그런데 전라북도 지역에서도 동부지역 7개시군(남원, 완주, 진안, 무주, 장수, 임 실, 순창)에 690개의 가야유적(고분 448, 제철 129, 봉수 68, 산성 45)이 분포하고 있 는 상황이 파악되었고 2018년 2월 전북 가야유적으로 남원 두락리우곡리 고 분군이 첫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전라북도의 가야역사 진입이 공식화 되었다.

'가야'라는 나라 이름의 뜻은 무엇일까? 기록에 따라「광개토왕릉비문」 에는가라 Il羅『삼국사기』에는 가야1夐Ⅱ倻,加耶 『삼국유사』에는 가락駕洛등으

로 다양하다. 가야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를 강이나 호수의 의미로 파악해 낙 동강 주변지역의 의미로 보는 견해도 있고 동족을 의미하는 퉁구스어의 '칼 라(xala)'에서 그 연원을 찾기도 한다. 또 김수로왕의 부인 허왕후의 출신지역 인 인도의 불교관련 용어인 부다가야에서 찾기도 하지만 아직 명확한 의미는

076 모른다. 다만 전국적으로 '가야'라는 지명이 강변이나 해변지역에서 나타나고 있어 바다나 강변을 의미하는 명칭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종래 가야는 삼국과는 달리 통일된 정치체를 갖지 못해 멸망 때까지 10 전 여 개 이상의 개별 소국명이 병렬적으로 존속하고 있었다. 따라서 '가야는 신라• 백제와 구분되는 연맹체 국가로 보고 있다. 가야 역사에 대한 기록은 매우 소략하지만, 역설적으로 고고학 자료가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 있어서 4 그 문화상의 복원 뿐 아니라 역사의 재구성도 시도되고 있다.

가야의 기존 영역은 경남과 경북일대로 보았으나 가야 유물이 낙동강 동쪽 일부와 호남 동부지역, 그리고 전남 광양만, 순천만 일대와 최근에는 전 북 남원, 장수, 진안, 임실에서도 확인돼 영역이 상당히 넓었음을 알수 있다.

이 같은 가야영역의 변화와 확산은 고구려의 백제 공략과 밀접히 관련 있다. 즉, 400년 광개토왕의 한반도 남부지역 정벌로 김해 가락국세력이 쇠 퇴하고 서기 5세기 이후 가야의 구심점은 낙동강 서안 경상도 내륙지역으로 옮겨져 내륙의 철산지를 개발하면서 고령의 반파국f半跛國, 즉 대가야가 성장 해 나갔다. 또한 475년 장수왕의 백제공략은 백제가 거의 붕괴될 상황까지 몰렸고 수도를 웅진(공주지역)으로 옮겨 간신히 명맥이 유지되는 시기인 5세기 후반 대가야 세력은 백제의 영향력이 축소된 남원 및 장수 지역으로 영역을 확대하였다. 이는 섬진강과 남강 수계의 교역망을 통해 확산되었는데 5~6세 기 전북 동부지역에 가야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세력권이 나타났다.

2018년 2월 남원 두락라유곡리 가야 고분군이 전북지역 가야유적으로 서는 처음으로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42호로 지정됐다. 이 고분군에서는 가야계 수혈식 석곽묘(구덩식 돌덧널무덤)와 백제계 횡혈식 석실분(굴식 돌방무 덤)이 확인되었다. 특히, 가야 영역권에서 최초로 청동거울, 금동신발 등 최고 급 위세품이 출토되어 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또한 남원시 아영면 월산리

다. 토기들은 백제, 소가야, 대가야의 토기류와혼재된 양상이어서 다른 지역 과 교류해온 사실 등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 같이 새롭게 확인된 전라북도권 가야유적은 과연 우리 역사 기록 속 에서 어떤 존재의 역사유물일가 하는 것이 학계의 큰 관심이다. 전북 동부지 역은 섬진강 수계인 운봉고원(남원시 동쪽)과 금강수계인 진안고원(무주, 장수, 진 법으로 공간 구분이 된다. 이중 남원지역은『양직공도』에서 백제의 주변 소 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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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군에서는 철제 갑주와 등자, 철제 자루 솥 및 금귀걸이와 중국 청자인 계 수호鷄首壺(닭머리 모양 주둥이를 가진 주전자) 등이 발견되었다. 이들 유물은 5~6 세기 가야와 백제사 연구에 중요한 유적이다. 또한 2017년 장수군 동촌리 고 분군에서 가야 수장층의 무덤임을 알려주는 마구류 등 유물이 다량 출토됐

국인 기문국己文國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아울러 철을 생산했던 대규모 야철 지가 발견된 남원과 가야세력이 직접 운용했던 장수의 봉수유적을 통해 '봉 수 왕국 장수가야'가 고고학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백제와 힘 을 겨룰 만큼 강했던 가야문화권의 중심이 대가야가 아닌 '장수가야'라는 주 장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전북지역 가야의 실체에 대해서 아직 고대사 학계는 명확한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기존 가야사를 연구한 학자들은 남원을 중심 으로 기문국 등의 존재를 설정하였지만 장수지역에서 새롭게 확인된 가야유 적의 실체에 대해서는 유보적 입장이다. 6세기 후반 백제에 복속된 가야세력 등에 대한 지속적인 고고학 유적조사와 발굴 및 문헌사학계와의 긴밀한 연 구를 통해 우리 역사의 새로운 화두로 부각된 전북 가야의 실체와 위상 찾기 노력이 요청된다. 이를 통해 더욱 다채로운 전라북도의 역사문화적 토대와 문 화자원의 확충이 기대된다.

조법종

제2장 고려시대

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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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라도 역시에서 고려의 위치

 

전라도는 현재의 광주시 및 전라남콕도를 아울러 부르는 명칭이다. 본 시 하나이던 것이 광역시와 남•북도의 행정구역으로 나뉘었는데, 지금도 흔 히는 단일한 권역으로 간주해 전라도라 칭하는 게 보통이다. 호남이니 전라 지역이니 부르는 것도 그와 매한가지이거니와, 그리하여 전라도는 행정구역 상의 공식적인 구분에 상관없이 하나의 지역 명칭으로 사용되는 게 관행화 한 지 오래이다.

전라도라는 명호가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왕조에서였다. 고려시기에 들 어 비로소 전라도가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설정되어 자리를 잡아갔다. 전라도 라는 명호를 처음 사용한 게 고려 사람들이었으며, 따라서 그 명칭에 집중해 서 굳이 고집하자면 전라도의 역사는 그 출발점을 고려시기로 잡아 마땅한 셈이다. 전라도 일대를 아우르는 이 고장의 실제 역사가 그보다 훨씬 먼 옛날 에 시작되었을 것임은 이를 나위가 없다. 다만 형식적으로나마 명호의 규범성

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고려는 전라도의 역사가 첫 발을 내딛는 시기 에 해당한다고 하여 지나치지 않을 터이다.

가 하나의 지역단위로 묶여 파악되는 단초는 대략 후삼국시기에 들어 비로 소 마련되는 듯 보인다. 수십 소국의 연맹체이던 마한은 이를 나위가 없으며, 중앙집권적인 백제나 통일신라의 시기에도 전라도 일원은 최소한 둘 이상으 로 나뉘어 파악되었다. 그러다가 신라의 말기에 후백제가 건국되면서, 나주 를 중심으로 한 전남의 서남해안을 제외한 전라도 일대가, 비로소 신라나 고 려와 구별되는 하나의 독립적인 정치체로 등장하였다. 후삼국시기의 치열한 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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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단일한 지리적 공간을 가리기는 용어로서 전라도가 그처럼 자리 를 잡기까지의 경위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한국의 역사에서 전라도 일대

쟁패전, 특히 고려•신라의 연합전선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후백제 즉 현 전라 도 일원의 주민들 사이에는 운명공동체로서의 의식이 싹텄을 가능성이 엿보 이며, 이로써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지리적 단위로서의 전라지역이 배태되는 단초가 마련된 것으로 파악할 수가 있을 성싶다. 후삼국을 통일한 뒤 왕건이 남겼다는(943), 그렇지만 아마도 그 손자인 현종대(1009~1031)의 정치 •사회적 상황과 무관치 않아 보이는 이른바 십훈요+訓要'에서, 대체로 현 전라도 일대 를 지칭하는 것으로 판단되는 '車峴以南公州江外'가 하나의 지리적 단위로 묶여서 등장하는 것은 그 연장선에서 이해되어 마땅할 터이다.

전라도가 하나의 지역단위로서 제 틀을 잡아간 것은 고려중엽에 들어서 였다. 현종대에 그 명호가 처음 출현한다고는 하지만, 전라도가 독자적 경역 으로서 나름의 기능을 지닌 용어로 안착된 것은 제법 시간이 흐른 뒤였다. 성 종대(981~997)만 해도 강남도와 해양도의 둘로 나뉘어 파악되던 이 지역이, 안찰사의 단일 순행구역으로서 제 모습을 굳혀가기에 이른 것은 대략 예종대 (1105~1122) 즈음에 씨였다. 후삼국시기 이래 특히 십훈요가 출현한 현종대 를 거치면서, 전라도 일원을 단일한 지역단위로 파악하던 공간적 인식을 배 경으로 가능한 일이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더불어 거기에는 개개의 군현 단위를 벗어나 보다 광역의 지리적 단위로 묶어서 지방행정을 펼쳐야 할 중앙의 필요성이 개재되었을 법하다. 나아가 그

것을 가능토록 하는 지역사회의 성장, 다시 말해 개별 고을의 한계를 넘어 여 러 고을까지 아울러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제•사회적인 연결망이 형성되는 거와 같은, 지역사회의 자체적인 변화 발전 내지 역량의 성숙이 그 바탕에 깔 려 있었을 것임도 충분히 예상할 수가 있다.

080 이후 그와 같은 지역사회의 성장이라든지 중앙의 필요성 등을 바탕으 로, 무인정권의 시기 특히 몽골의 침략기에, 전라도는 지방행정 감찰관의 순 행구역이라는 의미를 넘어 독립적인 지역행정 단위로서의 성격을 지녀가기 전 시작하였다. 단일한 지리적 단위로서의 의미가 점차 굳어진다 하겠거니와, 그 리하여 원의 간섭기를 거치면서 독립적인 지방행정구획으로서의 성격을 강 화해가다가, 마침내 고려말기에 광역 행정구역으로서의 전라도가 확립되기 4 에 이르렀다. 신라말엽에서 고려시기를 거치면서 마침내 독자적인 지리적 범 주로서의 전라도 지역이 성립되기에 이른 셈이었다.

전라도가 광역의 지방행정단위이자 하나의 지리적 공간을 지칭하는 명 호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위와 같은 정치적 그리고 경제•사회적인 필요성 내지는 변화 발전의 결과였다 다만 그러는 중에도, 그러한 추이를 더욱 촉진 시기는 계기로 작용한 것 중의 하나가 고려말엽의 왜구였다. 고려말 들어 창 궐하는 왜구를 방어하는 군사적 단위로서 '도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도 단 위로 지휘관이 파견되어 왜구 격퇴에 나섰는데, 이들 지휘관에게는 군사를 선발하기 위한 호적의 작성을 포함하여 인력과 군량을 징발하는 등의 권한 이 부여되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그들은 군사력을 독자적으로 운용하 는 특권을 누렸다. 군정은 물론 일반 행정에서 군사작전에 이르기까지 운용 의 기본단위가 도였던 셈이거니와, 그러는 과정에서 전라도와 같은 광역의 지 방행정단위가 더욱 확고히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단일한 지리 적 공간을 가리기는 명호로서 전라도가 부리를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전라도가 하나의 독자적인 지리적 공간을 가리키는 명호로서 자리를 잡 아간 것은 그처럼 고려시기에 들어서였다. 비록 그 명칭의 사용이라는 형식적 측면에 치우친 의미 부여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는 않을망정, 전라도 역사가 첫 발을 내디딘 게 고려에서였음을 헤아린 셈이거니와, 그리하여 고려의 위치

이제 그러한 고려시기의 전라도 역사를 간략히 훑어보도록 하겠다. 고려 왕조의 처음에서 시작하여 그 말기에 이르기까지의 전라도 역사를 개관하려 니와, 그리하여 그 흐름에서 찾아지는 성격이랄까 특징과 같은 것을 헤아려 081

고려시기 전라도의 역사를 보는 시각에 관해 생각해 봄으로써 논의를 마무

리할까한다. 1

는 바로 그처럼 전라도 역사의 출발점에 해당하는 시기라는 데에서 찾아 마 땅할 터이다. 그 명호의 사용에 국한해서 이르는 말이기는 하지만, 형식상으 로나마 고려는 전라도 역사의 시원에 해당한다고 하여 지나치지 않아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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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려초지역사회의 동향

 

고려가 세워지던 즈음 전라도 일원에서는 크게 보아 둘 정도의 정치집단 이 각축하였다. 후백제의 견훤과 고려의 왕건을 대표로 하는 두 세력 사이의 수많은 전투로 표출된 격렬한 다툼이 그것이었다. 당시 이 지역의 대부분은 견훤의 세력권에 들었다. 나주지역이라 일걸어지는 전남의 서남해안 일대를 제외한 전라도 일대가 후백제의 영역이었다.

당시 나주 일원은 해상활동이 매우 활발한 고장이었다. 동북아시아 해 상교통의 핵심 경유지를 점한 이점을 바탕으로, 장보고를 비롯한 크고 작은 수많은 해상세력이 활동하던 해양 진출의 요충이었다. 왕건은 즉위하기 이전 에 벌써 그러한 나주지역으로 눈길을 돌려 진출에 성공하였다. 선대 이래의 해상활동을 배경으로 성장한 인물다운 혜안의 발휘이려니와, 그리하여 왕건 은 이 지역을 주요한 발판으로 삼아 왕위에 오근 구 고려를 개창하였다. 후백 제의 견훤이 끝내 패배하고 왕건의 고려에 의해 후삼국이 통일을 보기에 이 른 요인 가운데 하나로서, 나주지역의 향배를 꼽는 것이 반드시 근거 없다고 만은 할 수가 없다.

나주지역은 후삼국 쟁패의 초반에 벌써 왕건과 손을 잡았다. 왕건은 즉 위하기 전 궁예의 휘하로서 상당한 기간을 나주에서 보냈으며, 즉위한 뒤에 도 이 지역에 남다른 관심을 쏟았다. 나주도대행대라는 특수 행정기구를 설 지하고, 나주 출신인 장화왕후 오씨의 소생을 후계자로 지목하였으며, 그밖 082 에도 나주 일대를 연고로 하는 인물이라든지 승려 등 여러 사람들을 자신의 곁에 두고 도움을 받았다. 나주지역과 왕건 사이의 각별한 관계를 헤아리고 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전 고려와 후백제 사이의 쟁패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즈음, 전라도 일원에서 두 나라의 영역에 얼마간의 변화가 생겼다. 나주지역은 잠시 고려 중앙의 통 제에서 벗어난 듯싶었으나 이내 고려의 판도로 다시 들어왔으며, 전남 동부의 4 승주지역이 새로이 고려의 세력권에 포함되었다. 견훤에 뒤이어 박영규가 고 려로 귀부해온 데 따른 경역의 변화였다. 후삼국의 말엽 즈음이면 광주를 비 롯한 동북부 내륙을 제외한 전남지역의 상당 부분이 고려의 통제 아래 들었 으며, 뒤이어 곧장 고려에 의해 통합이 마무리되거니와, 당시 전라도 역내에서 의 그와 같은 일련의 상황과 관련하여 눈길을 모으는 게 이른바 십훈요이다.

십훈요는 태조 왕건이 자신의 뒤를 이을 후대 왕들에게 남긴 열 조목의 유훈을 가리킨다. 고려의 역대 국왕들로 하여금 준수하도록 당부한 일종의 왕실 가훈이었는데, 그 중에서 전라지역에 관련된 것으로 여겨지며 긴 세월 주목을 받아온 것이 8조의 '車規以南公州江夕卜' 운운의 부분이다. 차령산맥 과 금강의 이남, 곧 현재의 전라도 일대를 거의 아우르는 지역이 고려왕조에 서 차별을 받았을 것임을 암시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십훈요는 그 내용의 신빙성이라든지 그것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 지기에 이른 경위 등에서 적잖이 의심을 받는 자료이다. 나아가 십훈요를 태 조의 실제 유훈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도, 고려 일대에 그 내용이 제대로 준수되었던가를 두고는 부정적인 견해가 대부분이다. 십훈요의 존재가 세상 에 처음 알려진 현종대의 정치적인 상황이 반영된 자료일 가능성이 지적되는 게 보통이거니와, 반드시 그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이 자료를 근거로 고려시 기에 전라지역이 차별을 받았다는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는 게 대체적인 분위

태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혜종은 나주 출신인 장화왕후 오씨의 소생이 었다. 왕건이 고려를 창업하는 데 나주지역의 각별한 후원이 크게 작용하였 으며, 그리하여 왕건을 계승한 혜종 정권이 그러한 나주호족을 중심으로 운 영되었을 것임을 예감케 하는 대목이다. 후일 최승로가 혜종대의 정치를 평 하면서 '鄕里小人운운하며 비난했던 세력이 그 주축이었다. 그렇지만 혜종은 2년 남짓 재위하는 데 그쳤다. 뒤이어 정종定宗이 정변을 거쳐 즉위하고, 또한 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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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것이다. 현대에 들어 정통성이 결여된 정권에 의해 조작되고 부풀려진 지역 사이의 갈등 내지는 특정 지역을 차별하는 폐습이, 마치 오랜 과거 이래 의 일이었던 양 강변하며 십훈요를 내세워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양태는 규 탄을 받아 마땅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광종의 치세에 들어 숙청의 회오리가 일면서, 중앙에 진출 한 나주세력은 쇠퇴의 길을 걸었다.

혜종은 짧은 재위에 그치는 등 국왕으로서 내세울 만한 치적을 남기지 못하였던 듯 보인다. 관련 기록이 거의 남아 전하지를 않는다. 다만 고려왕조에 서는 그를 창업과 수성에 크게 기여한, 이를테면 왕조의 태종太宗에 해당되는 국왕으로 인식하였으며, 그리하여 말기에 이르도록 태묘太廟에 부천지위  之位로 모셔 제향하였다. 한편 혜종과 뗄 수 없는 연고를 지닌 나주고을에서는, 어향剷鄕을 자처하며 또한 그를 기리는 제향을 이어갔다. 흥룡사興龍寺및 그 경내에 들어섰다는 혜종사惠宗祠의 존재가 그것을 웅변하거니와, 조선 세종대 에 이르도록 현지에서 혜종의不상塑f象과 진영眞影을 모셔왔음이 확인된다.

혜종대의 나주를 이어, 정종의 즉위와 함께 문득 그 존재를 새로이 한 고 장이 승주 곧 오늘의 순천이었다 순천 출신인 박영규의 두 딸이 정종의 왕후 였던 것이다. 순천의 해상세력 출신 호족인 박영규는 후백제왕 견훤의 사위 이며 장군이었는데, 견훤을 따라 고려로 귀부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딸 하나 는 왕건의 부인이 되었으며 다른 두 딸은 정종의 왕후가 되었다. 박영규를 필 두로 한 순천지역의 위세가 한때나마 상당하였음을 알려준다. 그렇지만 정종 의 재위 기간은 4년가량에 지나지 않았다. 광종대의 숙청과 함께 얼마 동안 중앙에서 순천 출신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박영규 자신은 후일 순천의

해룡산신으로 추앙되어 지역사회를 상징하는 인물로서 이름을 남겼다.

고려초 태조와 혜종• 정종이 재위하는 동안, 전라도의 서남부와 동부 해 안지역은 나름대로 그 존재를 드러내었다. 반면에 전남 동북부 내륙 및 전북 일대는 옛 후백제의 영역으로서 중앙과 연고를 맺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 084 렇지만 그 기간은 길지 않았다. 광종의 개혁정치와 함께 새로운 세력의 일원 으로서 이 지역 출신도 점자 중앙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성종과 현종 대에 이르도록 전라도 출신의 중앙 진출은 끊임이 없었거니와, 고려초 중앙 전 에 진출하여 부침을 거듭하면서도 살아남은 일부에다 광종대 이후 새로이 성장한 이들이 더해져, 고려전기에 전라도 지역사회를 대표하는 것으로 꼽히 는 주요 세력이 형성되었다.

4 고려에서 체계적인 제도에 바탕하여 전라도 일원을 통치하기에 이른 것은 성종대에 이르러서였다. 그리하여 12목 중 전라지역에는 전주목과 나주목•승 주목이, 그리고 10도제가 마련되면서는 노령 이북과 이남에 각각 강남도와 해 양도가 들어서게 되었다. 중앙에서 파견되어 온 관리가 지방을 통치하는 시대 로의 전환이거니와, 신라말 이래로 자립의 형세를 유지하던 이 지역의 호족은 이제 저들 지방관을 보좌하는 장리長吏, 곧 행정실무자로 자리매김되었다.

성종과 함께 고려의 통치체제 정비에 크게 기여한 국왕이 현종이었다. 그는 즉위하기까지의 경위가 남다르며, 더욱이 전라지역과도 각별한 인연을 지녀 눈길을 끈다. 자못 이색적인 출생의 내력에 더해, 극심한 고초 속의 유 소년기를 거치며 정변을 통해 국왕으로 추대되었는데, 재위 중 두 차례의 거 란 침입을 겪는 가운데 1010년(현종 원년)의 제2차 거란 침입 당시 이 고장 나 주로 몽진하였던 것이다. 곡절 많기로는 손에 꼽히는 국왕이려니와, 피난길에 오른 현종 일행은 신변의 위협을 당하는 등 천신만고를 겪으면서도 나주를 찾아 먼 길을 마다지 않았다. 고려왕실이 그만큼 나주지역을 깊이 신뢰하였 다는 뜻이려니와, 개경으로 돌아간 뒤 현종은 나주를 왕조중흥에 기여한 고 장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하여 나주에서 팔관회弋屬l會를 개최토록 함으 로써 이 고을로 하여금 개경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리도록 우대하였다. 나주 가 제2의 수도에 비길 만한 지위를 누렸다는 게 정도전鄭道傳의 소회이다.

3. 사회와경제

 

1018년(현종 9)에 4도호都護와 8목牧을 필두로 56지주군사知州郡事와 28진장 鎭將및 20현령관縣令官을 설치함으로써 지방 통치의 일개를 갖추었다. 전라 도 지역에는 전주목(안남대도호부)과 나주목을 계수관으로 하여 남원•영광과 085

임피•해양 등 몇몇 지주군과 현령관이 설치되었다. 이들 수령이 파견된 주현

王縣'은 중앙에 직접直牒하며 지역사회의 중심 역할을 하는 반면, 수령이 없는 1

'속현屬縣'은 주현을 통해 중앙과 연결되는 구조였으며, 각각 고을의 크기에 4

고려의 지방 통치제도가 나름의 자리를 굳힌 것은 현종대에 가서였다.

맞춰 향리의 정원도 제정되었다. 또한 뒤에는 고려에 특유한 그와 같은 주현속현제도의 소산인 감무가 자리를 잡아 조선시기의 현감으로 이어졌다. 아울 러 수령이 부임하는 고을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등 지방제도의 추이에 따 라, 허다한 속현과 향•부곡•소•장•처 등의 특수 행정구역을 주요 배경으로, 월경지라는 특이한 존재가 생겨나 전통시기 내내 존속하였다 지방 통치제도 의 정비에 발맞추어 지방군제地方軍制도 자리를 잡아갔다. 전주목도와 나주 목도를 포함하여 전라도 지역에는 모두 9개의 군사도軍事道에 보승•정용•일 품군 합하여 1만 1,000여 명의 군사가 배정되어, 고려 주현군의 약 23%0 정도 를 점하였던 것으로 전한다.

전라도는 강남도와 해양도를 합쳐 1018년(현종 9)에 탄생하였다고 한다. 과연 그처럼 이른 시기의 일이었을까 논란이 없지 않거니와, 다만 그것이 광 역의 행정단위로 실제 자리를 잡아간 것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대략 예종대 즈음에 가서였던 듯 보인다. 이후 무인정권기를 지나 원의 간섭기를 거치면서 안찰사의 역할이 확대되어간 끝에, 고려말 도관찰출척사로 정비되면서 도  가 하나의 행정단위로서 정착되는데, 전라도 역시 그와 유사한 궤적 속에서 부리를 내려간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고려중기 이래 전라도가 그처럼 자리 를 잡아가던 즈음, 오늘의 제주지역이 전라도에 편입되었다. 탐라의 이름으로 백제와 통일신라 그리고 고려에 소속되어 조공을 바쳐오던 이 섬을, 숙종이

군현으로 편입하면서 전라도에 소속시킨 데 따른 일이었거니와, 이후 제주 일 원에는 내내 전라도를 거쳐 중앙과 연결되는 몇몇 고을들이 자리하였다.

고려시기에 지역사회를 이끈 토착세력은 호족을 계승한 장리(향리)계층 으로서, 호장•부호장이 그 중심이었다. 향리는 토성에서 배출되는 바, 토성은 086 대체로 고려시기 이래의 자료에 근거해 작성된 조선초기의 지리지류에서, 각 고을 및 그에 준하는 행정구역 별로 그 존재가 확인된다. 고려시기에 지방 출 신으로서 과거 등을 통해 중앙으로 진출하는 인물은 대략 토성 향리 출신인 전 게 보통이었다. 전라도에서도 그처럼 중앙에 진출한 인물이 허다하였는데, 그 중에는 대를 이어가며 고위직에 오르고 왕실이나 명문가와 혼인하며 문벌 로 성장하여 이름을 떨치는 예도 적지 않았다.

4 고려에서는 교육을 장려하며 군현에 향교를 설치하였다. 성종대 이래 지 방통치제도의 정비에 짝하여 지방교육이 활성화되었는데, 그리하여 전라도 의 경우 현종대 즈음이면 전주목과 나주목을 필두로 수령이 파견된 10여 고 을에 향교가 이미 설치되었고, 인종대를 거치며 향교의 설치가 더욱 확산되 어 무인정권시기에는 널리 속현에까지 향교가 자리를 잡아가는 추세였다. 교 육의 혜택을 입은 것은 주로 향리계층이었다. 향교에서의 유교와 기술교육을 배경으로 제술뼝경업이라든지 잡업을 거쳐 중앙에 진출하는 게 저들의 주 요한 성장 통로였다.

전라도는 고려시기 농업의 중심 지역이었다. 논농사의 비중이 상대적으 로 높아, 세곡으로 운송하는 쌀의 주요한 생산지였다. 그밖에도 다양한 농수 산물이 생산되어 조세 부담이 무거웠거니와, 더욱이 나라 전체 소所274개 중 114곳이 전라도에 속하였다. 41.6%를 점하는 만큼 상공•별공 따위의 명 목으로 다양한 품목을 중앙에 바치는 등, 전라도는 고려왕조의 핵심적인 수 취 기반에 해당하였다. 부세 수취를 위한 성종대의 60포제 하에서 남한강 유 역의 33개 강운형工運形포구를 제외한 27개의 해운형而運形포구 중 전라도 에 17곳이 분포하여 2/3정도를 점하였으며, 현종•문종대에 정비된 13조창제 하에서 내륙의 강창江倉두 곳을 제외한 11해창海倉중 6곳이 분포하여 역시 절반 이상이 전라도 연해안에 설치되었던 등에서, 저간의 사정을 짐작할 수

가 있다.

라든지 관삔영의 상점을 거쳐 유통되었다. 육운陸運은 22개 역도驛道를 통해

상황을 헤아릴 수가 있는데, 전라도 일원에는 전공주도全公州道•승나주도昇羅州道•남원도南原道및 산남도山南道의 62개 역驛이 분포하여, 군사•행정적 기능 과 함께 민간의 물류 유통을 포함한 교통•운송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였 087

다. 더불어 60포라든지 조창이 위치하는 포구를 중심으로 연안항로가 발달

하여, 해운 활동이 자못 활발하였다. 근자에 들어 뚜렷한 성과를 보이는 해 1

저 유물의 발굴에서 저간의 상황을 충분히 헤아릴 수가 있다. 4

수공업과 상업도 나름의 전개를 보였다. 전라도에서는 모시•삼베와 같 은 옷감이라든지 갖가지 종이 도자기와 돗자리 등이 생산되어, 주현시州縣市

4. 격동과변혁속의 지역사회

 

무신난은 고려의 역사에서 분수령으로 이해된다 정권이 문신에서 무신 의 손으로 넘어갔다. 무신난 뒤 권력을 쥔 집정 무인들 가운데, 전라도와 관계 가 깊은 이로는 이의방李義方과 김준金俊이 있다. 이의방은 그 본관과 의향이 전주와 김제이고, 김준은 광주를 의향으로 두었다. 특히 눈길을 끄는 이는 전 주의 호장층출신으로 여겨지는 이의방이다. 그의 아우인 이린李隣이 후일 조 선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의 6대조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성계는 왕조 를 개창하기 전 이 고장에서 의미심장한 잔치를 열었던 것으로 전한다. 1380 년(우왕6)의 황산대첩 후 개선하던 그가 전주의 오목대에서 승전축하연을 베 풀었는데, 그 자리에서 한 고조가 즉위한 다음 금의환향해 노래한 '대풍가'를 읊었다는 일화가 그것이다. 설화일망정, 변방 중의 변방이라 할 동북면 출신 의 장수 이성계가 그 선조의 출생지인 전주를 자신의 본향으로 내세우면서, 대업의 포부를 암시하는 일종의 정치적 의식을 거행한 셈이었다.

전라도는 역대의 무인정권에서 자못 중히 여기던 지역이었다. 첫 손에 꼽

히는 곡창지대로서 수탈의 주요한 대상이었다. 토지 탈점이라든지 개간을 배 경으로 농장이 형성되면서는, 전라도 일대에 무인집권자의 농장이 널리 개설 되었다. 최씨정권의 3대 집정에 오른 최항이 승려 만전이던 시절, 화순의 쌍 봉사를 거점으로 자행하였다는 탐욕적인 여러 행위들도 그와 무관치 않을 088 것임은 물론이었다.

무인정권에 들어 한층 심해진 수탈은 고려중기 이래 유민화 경향을 보이 던 농민의 토지 이탈을 가속화하였다. 늘어난 유민은 때로 도적 집단이 되어 전 각지를 횡행하며 소란을 일으켰다. 무신난 이래 만연한 하극상 풍조는, 저들 동요하던 농민을 자극하여 곳곳에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나도록 만들었다. 전 라도에서도 크고 작은 사건이 잇달았다. 1182년(명종 12) 전주의 기두旗頭죽 4 동竹同이 군인과 관노를 선동하여 일으킨 반란이라든지, 1236년(고종 제에서 이듬해에 걸쳐 담양과 광주 일원을 휩쓴 이연년李延年의 백제부흥운동은 그 중 저명한 사례였다.

전란도 그치질 않았다. 1219년(고종 6)의 거란 침입에 이어, 1231년(고종 18)에 시작된 몽골의 침입은 1259년(고종 46)에 이르도록 30년가량 지속되었 다. 그러고도 끝이 아니었다. 삼별초의 항쟁이 1270년(원종 11)에서 1273년(원 종 14)까지 이어졌으며, 뒤이어 1274년(충릴왕즉위년)과 1281년(충릴왕 7)에는 2 자에 걸쳐 여원연합군이 일본 원정에 나서기도 하였다. 13세기 거의 내내 고 려는 외세와의 원지 않는 전란에 휩싸여 커다란 고초를 겪었던 셈이다.

전라도라고 하여 전란의 소용돌이에서 비켜난 게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몽골의 전라도 침략이 1236년(고종23)에 시작되어 1257년(고종 44)까지 전후 5자례에 걸쳐 20년 이상 이어졌다. 장성 입암산성 공방전에서의 승리라든지, 신안 앞바다에서 군선을 동원해 해전을 시도한 몽골군을 격퇴한 압해도 전 투 등은, 그 중 손꼽을 만한 예에 든다 할 것이다. 진도에 들어선 삼별초정권 의 활동 및 그 격퇴를 위한 일련의 전투에서 전라도 일원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물론, 뒤이은 제주도 삼별초 진압과 일본 원정에서도 병량과 인력 의 동원에 크게 시달림을 당했다. 특히 2차례의 일본 원정 당시 각각 900척 씩 모두 1,800척의 군선이 동원되는 과정에서, 그 조선을 전담한 게 부안 변

산과 장흥 천관산 일원임으로 해서 전라도 지역사회가 받은 고통은 말로 다 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무인집권 하의 격동과 변혁의 시기에 전라도를 배경으로 이채로운 빛을 발한 게 불교개혁을 내세운 결사체의 존재였다. 순천 송광사를 근거로 활약

한 조계종 보조국사 지눌의 정혜결사(수선결사)와 강진 만덕사를 거점으로 삼 은 천태종 원묘국사 요세의 백련결사를 이름이다. 이들은 개경을 중심으로 한 기성 교단이 세속화한 가운데 종파적인 편협성에 사로잡혀 갈등을 일삼 089

는 실태를 비판하면서, 함께 불교 혁신을 부르짖었다. 비록 둘 사이에 수행 이

론이라든지 그 실천 방법을 둘러싼 차이는 없지 않았지만, 궁극의 지향점은 1

다르지 않았다. 서로 다른 종파임에도 불구하고 지눌과 요세 및 그 후계자인 진각국사 혜심과 정명국사 천인 사이에는 대를 이어 교류가 지속되었거니와, 그리하여 수선사와 백련사는 서로 협력하고 또한 경쟁하는 가운데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고려 불교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수선사와 백련사가 그처럼 고려 불교의 새로운 흐름을 이끌어나갈 수 있도록 뒷받침한 것은 전라도 지역사회였다. 지눌이 송광산 길상사를 중건 하여 조계산 수선사로 만드는 데 나주와 순천을 비롯한 주변 토착세력가들 의 적극적인 지원이 줄을 이었다든지, 또는 요서까 만덕산 백련사를 개창하 는 데 강진지역 토착 유력자들의 후원이 토대가 되었던 사실 등에서 알 수가 있는 일이다. 전라도 지역민의 그와 같은 후원을 바탕으로 불교개혁을 주도함 으로써, 수선사와 백련사는 한국불교사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는 존재로 우 뚝 서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후기 들어 전라도에는 크고 작은 변화가 이어졌다. 감무를 비롯한 수령의 파견이 늘면서 속현이 줄고, 향•부곡•소를 비롯한 특수 행정구역이 자취를 감추어갔다. 단속적인 읍격의 승강과 행정구역의 병합으로, 고을의 영역이 조정되는 것과 함께 군현 등의 절대 숫자가 감소하는 방향으로 변해 갔다. 무신난 이래 이어진 지역사회에서의 정치적이며 사회•7d81적인 격동에 중앙이 반응하면서 나타난 변화였다.

새로운 세력의 성장과 중앙 진출도 활발하였다 고려전기 이래의 일로서 4

새삼스러운 현상은 아니었거니와, 무신난 이후 고려말에 이르도록 전라도 일 대를 본관으로 하는 허다한 가문의 출신이 과거라든지 군공 등을 배경으로 중앙 관직에 올라 활동하였으며, 그 중 상당수의 가계는 대를 이어 고위관직 자를 다수 배출하는 세족으로 성장해 이름을 떨치기도 하였다. 고려후기에 090 전라도를 본관으로 하는 세족만도 10여 성씨에 이른다는 연구가 나온 바 있 는데, 그밖에도 한 두 명이 중앙에 진출한 예까지를 더한다면 그러한 인물을 배출한 고을은 일일이 손으로 꼽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고려말 조선초의 이 전 른바 신흥사대부 내지 신흥무인 중에도 전라도를 본관으로 하는 인물들이 상당수였다. 그처럼 중앙에 진출할 기반을 갖춘 계층이 전라도 지역사회에서 널리 성장하는 중이었음을 헤아리게 하는 대목이다.

4 더불어 그러한 즈음 창궐하여 커다란 피해를 입힌 왜의 침구도 잊을 수 가 없다. 큐슈 일대의 무사와 농뻐민을 주요 구성 분자로 하는 왜구가, 쓰시 마와 이키 등지의 섬에서 출발하여 고려의 연해안에 출몰하며 미곡을 약탈 하고 사람을 잡아가는 해적질을 자행하였다. 일본의 이른바 남북조 내전이 그러한 왜구 창궐의 배경이라 일컬어지는데, 대략 20척에서 500척에 이르는 선단을 구성한 수백에서 수천 내지 수만여 명에 이르는 왜구가, 고려말엽에 만 총 500회를 훌쩍 넘어서는 침입횟수를 기록할 만큼 극성을 부렸다. 고려 의 연해안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못할 정도였다 이르거니와, 왜구의 발호로 인해 연해안과 도서의 고을이 내륙으로 옮겨가는 일조차 그리 드물지 않을 정도였다.

한편 고려후기 들어 전라도 일대에서는 지역사회를 주도하는 세력이 일 부 교체되는 등의 변화가 일어났다. 몽골의 침입이나 왜구의 창궐과 같은 전 란이라든지 자연재해 그 밖의 사유들로 인해, 전통적 토착세력인 토성 가운 데 일부가 유망하였다. 그와 함께 다른 지역에서 새로이 이주해 들어오는 집 단이 나타났거니와, 그리하여 주민이 부분적으로 교체되고 더불어 사회적 주 도세력에도 일부 변동이 생겼다. 그 중에서도 지역사회를 주도하는 세력의 변화에는, 정치적 격변기를 맞아 중앙에서 낙향해오는 인물이라든지 혹은 그로 대표되는 성씨 집단의 출현이 큰 영향을 미쳤다

고려에서는 본디 거주 이전이 자유롭지를 않았다. 관직에 나아간다든지 하는 등의 특수한 사유가 없이는 본관을 벗어나 다른 고장에서 거주하는 게 허용되지 않았다. 그런데 무신난이 일어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문신계열의 인물들 가운데 무인의 탄압을 피해 연고지로 낙향하는 사례가 속출하였다. 거기에 몽골의 전란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거주지 통제가 크게 이완되었다. 이 후 정치적 격변기이면, 반드시 본관이 아니더라도 처향이라든지 의향과 같은 연고를 찾아 낙향하는 사례가 늘어만 갔다. 고려말엽의 격동은 그러한 추세 를 한층 가속화하였다. 왜구로 인해 고을 자체가 옮겨가는 마당에 거주지를 체계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조선초 이후 지역의 유력 자로 대두한 측에서 낙향의 이유로 주로 내세우는 바, 신돈의 집권이라든지 왕조의 교체와 같은 정치적 격변은 그러한 변화를 한층 부채질하였다. 중앙에 서 관직생활을 하다 새로 전입해 온 이들은 그만큼 지역의 유력자로 자리를 잡을 가능성이 높았다. 지역사회 내에서 중앙 관직을 역임한 측과 향역을 담 당하는 측 사이에 신분적 차이가 차츰 드러나게 마련이었고, 그리하여 마침 내 사족士族과 이족吏族이 분화되어 가는 형세로 귀결되기에 이른 셈이었다. 091

전 1

4

5. 문화와 예술

 

고려시기 전라도 일원에서는 학문•사상이라든지 문화와 예술이 제법 융성하였다. 우선 학문의 발달이 볼 만하였다. 유교가 널리 부리를 내려가는 추세였는데, 향교가 자리를 잡아 지역 유력자의 자제를 교육하였으며, 과거제 가 시행되면서 다수의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성종에게『설원說苑』의 6정正6 사邪등 봉사를 올려 유교적 정치이넘이 자리를 잡는 데 기여한 김심언金審言 이라든지, 유교적 감계를 강조한 사서인『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을 편찬한 정 가신鄭可臣, 유교 경전에 능통하여 '오경사h經笥'라 불렸으며 그에게서 배우고 자 학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는 이성李晟, 성리학에 입각해 치국의 도를

설파한 정치이넘의 서책인『대학연의大學衍義』를 국왕에게 최초로 진강하여 고려말 주자성리학의 수용• 정착에 이바지한 윤택尹澤,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 해 경렴정을 지어 소요하면서 이제현•이색•정몽주•길재를 비롯하여 이승인• 윤소종•권근과 같은 손꼽히는 당대 성리학의 대가들과 교유한 것으로 이름 092 이 있는 탁광무卓光茂등, 전라도 출신으로서 고려시기 유교의 역사에서 빼놓 을 수 없는 위치를 자지하는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유교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시문의 유행을 낳았다. 유교 사상을 글로 표 전 현하는 주된 방식이 시문이었으며, 그런 만큼 전라도에서 문장가로 이름을 떨 친 인물이 다수 나타난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일일이 거명하기 어 려울 정도이거니와, 위에서 언급한 유학자를 제외하고도, 고문占文에 능해 해 4 동제일이라 칭송을 받은 김황원金黃元이라든지, 죽림고회의 일원이었던 오세 재吳世才와 조통趙通, 이규보최자를 잇는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김구金坵, 더 욱이 유교적 덕목의 실천으로 명망이 높은 가운데 한국 역사상 최초로 역대 의 시문을 집성해『동국문감東國文鑑』을 편찬한 김태현金台鉉등, 한문학사에 이름을 올려 마땅한 인물들만도 여럿이었다.

유교와 함께 불교가 또한 매우 번성하였다. 수많은 고승이 활약하는 가 운데 유명한 사찰이 거의 고을마다 자리하였다. 손을 꼽으며 헤아리는 게 무 의미해 보이거니와, 허다한 경전을 간행함으로써 흔히 화엄종의 대각국사 의 천에 비견되곤 하는 법상종 혜덕왕사 소현과 김제 금산사를 위시하여, 불교 개혁을 주장하며 독자적 수행이론을 정립하여 교종과 선종의 조화를 추구 하는 정혜결사를 이끈 조계종 보조국사 지눌과 순천 송광사라든지, 그러한 지눌과 교류하는 가운데 역시 불교 개혁을 지향하며 참회로써 정토왕생을 꿈꾸던 천태종 원묘국사 요세와 강진 만덕사 등, 별처럼 빛나는 존재만도 하 나 둘이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송광사의 지눌은 고려 불교의 내적인 발전을 이룩하며 새로운 길을 제시한 고승으로 이름이 높은데, 더욱이 심성의 도야 를 강조함으로써 장차 성리학을 받아들이는 터전을 닦아주는 구실을 하였 다는 평가에서 새삼 그의 사상사적 위상을 되짚게 된다.

불교 외에도 민간에서는 토속적인 신앙이라 이를 만한 기복의식 내지 신

주 무등산신이라든지 역사상 실존 인물을 신격화한 순천과 순창•곡성의 성 황신 등, 허다한 산신과 수•해신 및 성황신이 널리 승앙되며 관련 자료를 후 대에 남겼거니와, 이들은 대체로 지역 토착세력을 상징하는존재로서 널리 지 역민의 존승을 받는 게 상례였다. 나아가 당시 상하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 이 믿고 의지하던 풍수지리설도 빼놓을 수가 없는데, 신라말 영암 출신의 도 선을 비조로 하는 지리도참의 이 고장 출신 전문가로서, 고려중엽에 무등산 093

전 1

4

이한 대상을 숭배하는 행위들이 성행하였다. 그 중에는 국가적인 관심의 대 상으로 떠올라 기록을 남긴 사례도 적지 않은데, 가령 산악과 하천•바다의 산신과 수•해신이라든지 성황신 등이 그러하였다. 전라도만 하더라도 구례 의 지리산신과 나주 금성산신을 비롯하여 영암의 월출산신과 남해신 및 광

처사라 불리며 국왕의 신뢰 속에 활동의 자취를 남긴 은원충이 눈에 띈다.

한편 신앙생활과 연관된 종교 의식이나 또는 크고 작은 축전에는, 노래 와 춤이며 악기 연주라든지 줄타기나 접시돌리기와 같은 갖가지 연희가 따르 는 게 보통이었다. 일종의 종합연희가 베풀어졌거니와, 구체적인 기록을 찾아 보기는 쉽지를 않지만 민간에서의 여가생활도 그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 을 성싶다. 전라도 일대의 민간에서 불렸을 법한 노래로는, 옛 백제지역의 속 요로 전하는 '선운산가', '방등산가', '무등산가', '정읍사', '지리산가'를 비롯하 여 고려말에 탄생한 '장생포가' 등이 꼽히곤 한다. 수령이 주관하는 의식을 위 시하여 고을에서 베풀어지는 축전 등 공사公私를 막론한 여러 행사에서는, 주 로 관기官妓를 비롯하여 재인才人(광대) 등이 악기를 다루고 노래를 부르며 또 한 여러 잡희를 공연하였을 텐데, 특히 고려 현종대에 베풀어진 것으로 알려 진 나주 팔관회에서는 개경의 그것과 유사하게 난장亂場이 펼쳐진 가운데 가 무•잡희로 떠들썩한 국제적인 축전이 열렸던 것으로 보여 주목에 값한다.

미술은 대체로 불교 쪽의 자료가 많이 전하는 편이다. 다만 회화의 경우, 그 작품이 현전하지는 않지만 중국의 송에서까지 그림 솜씨로 명성이 자자했 다는 전주 출신인 이명 •이광필 부자의 존재가 눈길을 끈다. 불교 문화재로는, 불상과 승탑(부도), 석비, 범종, 석등 및 경전교문서에서 향로가리합과 같은 불구류佛具類에 이르기까지, 자못 풍부한 자료가 전한다. 등록된 자료만 200

건을 훌쩍 넘어서는데, 문화재로의 지정 유무를 떠나 다양한 양식의 수많은 불상들과 함께 특이하게도 백제계 석탑이 곳곳에 조성되고, 또한 국사• 왕사 를 기넘하는 아름다운 승탑과 탑비들이며 한국식의 독특한 범종이 다수 제 작되는 등,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의 수많은 불교 유물이 전해온다.

094 전라도의 고려시기 예술품으로서 금자탑이라 이를 만한 게 청자이다. 이 고장을 넘어 한국문화를 빛낸 문화유산 중의 하나로서 이름이 높은데, 그처 럼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고려청자의 주요 생산지가 강진과 부안이었다. 전 처음 대체로 중부 서해안에서 시작된 자기 생산은 10~11세기 무렵 전라도 서남해안으로 그 중심을 옮겨갔다. 그리하여 강진이라든지 장흥•해남 등지에 서 고려적인 생산방식으로 자리를 잡았고, 뒤이어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 4 즈음이면 부안에도 부리를 내리면서, 최고의 작품 생산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비색의 맑고 그윽한 바탕에 백토나 혹토로 상감을 넣은 세계 유일의 상감청 자가 탄생하였거니와, 중국에서 먼저 발달한 자기 생산기술을 받아들여 품 위를 갖춘 걸작인 고려만의 비색 상감청자로 빚어낸 창의성이 돋보인다.

청자의 사례와 유사하게 고려의 자연환경에 맞춰 특유의 발달을 보인 것 으로 조선술을 들 수가 있다. 전통시기 한국배[韓船]의 특징으로는 흔히 평저 형 밑판 및 날카롭지 않고 뭉툭한 모양의 이물과 고물, 두터운 판재의 사용 및 선체 내부에 격벽을 두지 않은 채 멍에와 가룡목으로 하여금 횡강력재의 구실을 하도록 하는 내부 구조 등이 거론된다. 바람과 사람의 힘에 의존해야 하는 전통시기의 선박 운항에서, 수심이 얕은 한반도 연안의 바다에 적응하 여 바르기에 못지않게 편의와 안전에 한층 비중을 더한 결과로 풀이된다.

그런데 한국배 특유의 그러한 구조와 배 모양이 자리를 잡은 것은 고려 시기에 들어서였다. 그리고 고려시기에 그와 같은 선박을 대량으로 집중 건조 한 경험을 가진 고장이 또한 전라도였다. 고려와 원 연합군의 2회에 걸친 일 본원정에 소요되는 선박 각 900척씩 모두 1800척 가량을, 부안 변산과 장흥 천관산에서 짧은 기간에 제작해낸 사실을 이름이다. 이례적이라 할 그런 조 선 경험을 바탕으로 고려말 왜구 격퇴에 나선 전함을 건조하였고, 나아가 그 처럼 축적되어간 지식과 기술이 조선왕조로 이어져, 궁극에는 충무공 이순

신이 전라좌수영에서 제작한 판옥선과 거북선을 앞세워 역사에 길이 빛나는 임진왜란의 승첩을 거두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6. 고려시기 전라도 역사를보는관점 095

 

 

고려시기의 전라도 역사를 간략히 훑어보았다. 주마간산일망정 단상이 없지는 않은데, 문득 뇌리를 스치는 게 개방이라는 단어이다. 고려시기 전라 도의 역사에서 먼저 떠오르는 게 그 개방적 성향인 것이다. 전통적 왕조사회 전 1

4

의 일인 만큼 근대적 의미에서의 개방성 따위와는 적잖은 거리가 있을 터이

다. 다만 그런 한계 속에서일망정 타자와 접촉하고 소통•교류한다든지 또는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등에서, 상대적이나마 당시 전라도 지역사회는 제법 열린 자세로 임했던 듯 여겨진다.

이를테면 나주를 비롯한 서남해역을 중심으로 행해진 활발한 해상활동 이라든지, 해룡으로 신격화된 박영규의 존재와 같은 데서 그러한 측면을 찾 아볼 수가 있음직하다. 또한 나라에서 운영하는 포구와 조장의 다수를 품은 가운데, 멀리 해외로까지 이어진 흔적이 전하는혹산도와부안 죽막동을 비 롯한 여러 유적과 유물들이며, 하나같이 이 고장 해역에서 발견되거나 혹은 출발했음이 확인되는 신안선과 마도선 등 해저에서 건져 올린 옛 선박과 관 련 유물들에서도, 그처럼 열린 태도를 느낄 수가 있을 성싶다. 선종이 중국에 서 들어와 가장 먼저 자리를 잡고, 청자가 또한 이른 시기에 전해져 마침내 비 색의 상감청자를 빚어내기에 이른 일이며, 나주사람들이 멀리 떨어진 개성의 왕건을 맞아들이고, 또 그 나주에서 동아시아의 국제축전이라 할 팔관회가 한동안 열렸다든지, 혹은 팔공산 거조사에서 시작된 정혜결사가 집단적으로 이주해 들어와 부리를 내릴 수 있도록 돕고 그리하여 보조국사 지눌이 그 품 은 뜻을 제대로 펼치기에 이르도록 지역사회가 후원하였던 사실 등도 빼놓아 서는 안 될 것이다. 고려시기의 전라도 역사를 그 개방적 측면에서 접근하고

이해하는 게 반드시 그르다고만은 할 수가 없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고려시기에 전라도 사람들이 이룩해간 역사에서, 상대적이나마 그 첫째 가는 특징으로 개방성을 꼽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한데 그처럼 개방적 성 향을 보였다고 해서 저들이 자신의 정체성마저 도외시한 것은 아니었다. 통일 096 신라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백제계 석탑이 고려시기에 들어 새삼 전라도 일원 에 조성되었다. 나주고을은 태조 왕건 내지 혜종과의 연고를 잊지 않은 채 어 향임을 내세우며 왕실의 최후 보루를 자임하였다. 현종이 거란의 침입을 피 전 해 나주로 몽진해오자, 따뜻이 맞아들여 왕조에 밀어닥친 위기를 극복하는 근거지 노릇을 하였다. 백제부흥을 앞세운 이연년의 농민봉기군이라든지 혹 은 진도와 제주도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삼별초를 진압하는 데에도, 이 고장 4 이 크게 기여하였다. 보수적 측면에서 지역사회 나름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적잖이 애를 쓴 흔적이 역력하다.

전라도 지역사회가 그렇다고 정체성에 집착해 배타적이거나 편협한 폐 쇄성을 보인 건 더욱 아니었다. 가령 전주와 나주가 전라도라는 이름 아래 하 나의 권역을 이른 것부터가 그러하였다. 몽진해온 현종을 맞이할 당시, 전주 에서는 나주와 달리 국왕 일행을 위협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어향御鄕나주 와 대비해 역향逆鄕전주라 이를 만한 상황의 전개였거니와, 그처럼 매우 상대 적인 성향의 두 권역이 하나로 합쳐져 전라도를 구성하였으며, 그것이 고려를 거쳐 조선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른다. 편협하고 폐쇄적인 배타성 대신, 자기 와 다른 존재를 용인하며 공존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열린 자세로 적응해간 결과일 터이다.

전라도가 처음 성립한 것은 1018년(현종 9)이었다고 한다.『고려사』지리 지에 그렇게 전한다. 여타의 도에 비해 한 세기를 넘기도록 바른 것이어서 논 란이거니와, 이 기록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전라도의 그처럼 때 이른 출현 에는 아마도 위와 같은 현종대의 상황이 그 배경으로 작용하였을 법하다. 전 주 일원에 떠도는 불온한 기운을 몸소 경험한 현종이라든지 그 일행의 머리 에 문득 떠오른 게 나주였던 듯싶다. 어향을 자부하며 왕조 보위의 최후 거 점 역할을 마다지 않던 나주지역을, 그와 대조적인 성향을 보이는 전주지역

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당시 나주에 머물다 귀경길에 오른 현종 일행은 전 주에서 꼬박 이레를 묵었다고 한다. 전주 지역사회의 동향을 두고 고심한 혼 097

적이 아닐 수 없어 보이거니와, 그리하여 마침내 견제 대상인 전주를 어향인

나주와 하나의 권역으로 묶어서 통치에 편의를 기하고자, 그처럼 이례적인 1

조치에 나섰던 듯 여겨진다. 자못 대비되는 성향의 두 고장이 공존하는 가운 데 조화를 이를 가능성이 모색되었으며, 개방적 태도를 보인 지역사회의 호 4

과 하나의 권역으로 묶어서, 통제와 위무를 병행하는 방식에 생각이 미쳤던 듯 보인다. 강남도와 해양도로 나뉘어 파악되던 두 권역을 하나의 전라도로 묶어 다스림으로써, 민심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그처럼 예외 적으로 이른 시기에 전라도가 성립되기에 이르렀던 건 아닌가 해아려지는 것

응을 얻음으로써 그것이 성공적으로 정착되어 오늘에 이른 셈이다. 전라도 가 때 이르게 출현하여 기록에 오르게 된 연유는 대략 그러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개방적 입장에서 타자를 용인하는 가운데 다양한 존재의 공존과 조화 를 모색하며 더불어 그 융회를 추구하는 경향은, 송광사의 조계종 수선결사 와 만덕사의 천태종 백련결사에서 한층 확연히 드러난다. 지눌이 선교조화 의 사상을 정립하였으며, 요세도 유사하게 선교일지를 추구하였음은 잘 알 려진 사실이다. 서로 다른 종파 소속임에도 지눌과 요세 및 그 후계자 사이 에 교류가 이어지는 가운데, 조화와 융회의 사상을 바탕으로 두 결사가 전라 도 남해안 지역에서 공존하며 고려불교를 이끌어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아 갔던 것이다.

이질적인 성향이 공존하며 조화를 이루는 다양성은, 농경문화와 해양 문화가 더불어 발달하였던 데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한반도의 어느 지역 보다 너른 평야와 긴 해안선 그리고 수많은 도서를 배경으로, 전라도 일원에 서는 풍요로운 물산과 함께 해륙海陸의 다양한 삶이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 였다. 개방적 성향을 바탕으로 다양성이 인정되는 속에 조화로운 공존이 추 구되었으며, 그것이 고려시기 전라도의 역사에서 한 특색으로 자리를 잡았다

고 하여 큰 잘못은 아니지 않을까 여겨지는 것이다.

개방적이면서도 정체성을 잃지 않는 가운데 다양한 요소가 공존하는 사 회에서는 혁신의 바람이 일게 마련이다. 기왕의 것과 새로운 것이 함께 하려 면 맹목적인 수구에서 벗어나 조화와융회를 지향하는 혁신이 필수적이다.

098 청자에 은입사의 상감 기법을 적용하며 또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청 자기와를 제작한다든지, 선종과 교종의 조화를 이룬 돈오점수가 제창되는 등이 그러하였다. 수심이 얕고 간만의 자가 커 조류가 거센 연근해의 특성에 전 따라, 두터운 판재와 평평한 바닥을 특징으로 하는 한국배가 확고하게 부리 를 내린 것도 매한가지였다. 다양한 요소가 공존하는 가운데 조화를 이루도 록 현실에 맞춰 혁신하는 창의성의 발현이다. 운주사의, 어디에도 없는 독특 4 한 형상의 불상과 석탑 및 칠성석이라든지 그 밖의 석조물을 두고, 흔히 얘기 하는 바 토속성이라는 것도 그러하다. 지역사회 기층민중의 정서를 창의적으 로 반영하기 위해, 기득권층만을 대상으로 하던 기왕의 틀을 버리고 수구적 태도에서 벗어나 파격의 혁신적 다양성을 추구한 결과일 터이다.

고려시기 전라도의 역사를 바라보는 기준을 거칠게 단순화해서 두 단어 로 압축하자면 개방과 혁신이 되지 않을까 싶다. 조금 더 일반화시켜 표현하 자면 자유와 변화이다. 개방은 어느 것에도 묶여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의 표출이며, 혁신은 머물러 고정되지 않는 진취적인 변화를 지향한다.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는, 현실에서 어느 한 순간 어디에도 고여 정체되지 않 는 변화로 구현되게 마련이다. 비유하자면 자유를 근본의 바탕으로 하고 변 화를 현실에서의 작용으로 하여 개방과 혁신의 역사가 전개된다 할 것이며, 고려시기 전라도의 역사에서 그러한 측면을 읽어내 마땅하지는 않을까 생각 하는 것이다.

변동명

제3장 조선전기

099

 

전 1

4

1. 조선왕조를싹틔운 전라도

 

가. 조선왕조의 발상지 '풍패지향' 전주 조선 건국과 함께 태조 이성계의 본향 전주는 새왕조가 일어난 풍패지향 뻘沛之鄕이 되었다. 풍패란 한漢나라를 세운 유방의 고향이 풍패인데서 비롯되 어 건국자의 고향을 일컫는다. 조선의 풍패는 이성계의 본향으로 선조들이 살았던 전주와 그가 태어나고 살았던 동북면 영흥•함흥 일원이다. 넓게는 함 경도와 전라도를 풍패로 지칭하기도 한다.

태조 이성계는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李翰의 21대손이다. 전주 세거시 태 조 집안의 가계형편은 목조 이안사가 동북면으로 이주할 때 170여 호가 따랐 다는 것으로 보아 토호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와 다르게 몽고침략기 유민집 단의 하나로 보는 설도 있다. 태조의 6대조 이린李璘은 1170년 무신난의 주역 인 이의방의 동생으로 추정된다. 태조 집안은 이안사 때 전주를 떠나 외가인 삼척으로 이주했다가 동북면으로 옮겨 함흥•영흥 일원에서 살았다.

100

4

그림 1. 태조어진(국보, 전주 경기전, 어진박물관 제공)

전주는 건국 후 풍패지향이 되어 전주목에서 완산부로 읍격이 승격되었 으며, 태조 어진太祖御眞(태조 초상)을 모신 진전 경기전慶基殿이 설치되었다. 조 선은 건국 후, 건국자 태조의 어진을 한양과 함께 태조의 태생지인 영흥, 태조 의 선조들이 살았던 전주, 신라의 수도 경주, 고구려의 수도 평양, 고려의 수도 이자 태조가 임금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개성 등 지방 5곳에 봉안하였다.

경기전은 전주지역 조선 건국 유적의 중심으로 지금의 전주 한옥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전주 한옥마을 일원은 목조 이안사가 살았던 조선왕실의 탯 자리 같은 곳이다. 1410년(태종 10)에 태조어진을 전주에 봉안하였으며 1442 년(세종 24)에 전주의 태조 진전을 경기전이라고 명명하였다. 1771년(영조 47) 에는 경기전 북편에 조선왕실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과 시조비 경주김씨의 위 패를 봉안한 조선왕실 최초의 시조사당 조경묘肇慶廟를 창건하였다.

1899년에 전주이씨 시조 이한의 묘역 조경단肇慶壇을 건지산 자락에 조 성하였다. 1900년에는 이성계가 황산대접을 거두고 귀경길에 전주에 들러 일

가친지를 불러 모아 잔치를 벌였다는 오목대梧木臺에 고종 친필의 '태조고황제 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蹕遺址' 비를 세웠다. 같은 해에 목조 이안사의 구거지 이목 대梨木臺에 고종 친필의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비를 건립하였다. 전주부성의 정문 '풍남문떨南門은 풍패지향의 풍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전주부성 서문은 풍패에서 '패자를 따서 패서문沛西門이라고 하였다. 전주객 사를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고 한 것도 풍패지향에서 연유한 것이다. 세종대 에 전주사고를 설치한 것도 풍패에서 연원하였다 101

한편, 남원•임실• 진안슨창 등에도 태조 유적과 설화들이 전하고 있다.

남원에는 피바위를 비롯해 황산대첩비 등 태조 이성계의 황산대첩 유적들이 1

있다. 1380년(고려 우왕 6)에 이성계는 양광•전근卜경상도 삼도순찰사가 되어 운봉 황산에서 왜장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를 대파하였다.

임실 성수산聖壽山은 태조 이성계가 “성수만세聖壽萬歲”, 천명을 받았다는 곳으로 산 정상 못 미쳐 상이암上耳庵이 있고, 그 경내에 태조 글씨로 전하는 삼청동三淸洞' 비가 있다. 진안 마이산馬耳山은 태조가 꿈에 건국을 상징하는 금척金尺을 받았다는 곳이다. 순창 만일사萬日寺에는 태조가 무학대사를 만 나러 가다가 먹었다는 고추장 설화가 전한다. 4

나. 전라도 출신 개국공신

1392년(태조 원년) 7월 17일(병신) 태조 이성계는 개경 수창궁에서 역성혁 명 세력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 태조 2년에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였으며, 태조 3년에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조선은 건국 직후인 태조 원년에 배극렴 조준•정도전 등 총 52명을 개국 공신에 책봉하였다. 개국 1등공신이 17명, 2등공신이 13명, 3등공신이 22명이

다. 이방원은 정도전에게 밀려 개국공신에 책봉되지 못했다가 태조 7년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후 자신과 방의 •방간 형제를 추록하였다.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들을 제외한 조선 개국공신 52명 중에 전라도 출 신은 이백유•심효생 •오몽을•장지화 등으로 추정된다. 정용수는 출신지를 알 수 없지만 본향이 전라도로 추정된다. 전주이씨 이백유와 세자 방석의 장인

심효생 집안은 대대로 전주에 세거했다. 세자 방석의 인친인 장지화는 흥덕, 오몽을은 보성 출신으로 추정된다. 정용수는 본관이 장성으로 추정된다. 오 몽을은 개국 1등공신, 정용수는 개국 2등공신, 이백유•심효생•장지화등 0  개국 3등공신이다.

102 전라도 출신 개국공신들은 전주최씨 최용갑을 중심으로 혼백으로 연결

되어 있다. 최용갑은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직제학을 지낸 인물이다. 이백유 의 외조부가 최용갑이며, 고모부는 전주유씨의 시조 유습의 아들 유극강이 전 다. 심효생은 유습의 사위이며 최용갑의 처이질(아내 자매의 아들)이다. 오몽을 은 최용갑의 조카사위이다. 장지화는 세자 방석의 인친이다. 이들은 또 고려 말 문과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정용수의 경우도 문신으로 추정된다.

4 전라도 출신 개국공신에서 특이한 점은 모두 1자 왕자의 난과 관련해 제

거되었다는 것이다. 심효생을 필두로 이백유, 오몽을, 장지화 등 4명은 정도전 의 당여로 1자 왕자의 난 때 피살되거나 유배되었고, 정용수는 태조의 측근 으로 1402년(태종 2) 조사의趙思義의 난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전라도 출신 개국공신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4, 5명에 불과하고 이들의 공신 등급을 볼 때 높은 편이 아니며 이들이 역임한 관직도 핵심 고위직은 아 니다. 태조대에서 예종대 2품 이상의 최상급 관직자 241명 중 전라도 출신은

20명 내외 정도로 비중이 높지 않다.

결국 조선왕실을 제외하면, 전라도 출신들이 조선 개국의 중추세력이었 거나, 조선 건국 직후 국정운영의 핵심적 위치에 있지는 않았다. 전라도 출신 들이 중앙정치의 핵심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은 명종대 이후 선조대초이다.

2 전라감영과전라도 군현편제

 

조선은 건국 후 고려의 지방제 5도 양계h道兩界를 8도弋道로 개편하고 각도에 2품의 관찰사觀察使를 파견하여 일도를 다스리게 하였다. 또 고려 계 수관제界首官制와 주속현 체제를 폐하고, 감무監務를 현감縣監으로 고쳐서 전 103

국 330개의 모든 군현에 수령守令을 파견하는 조선의 새로운 지방통치체제

를 확립하였다. 1

전라도 일도를 총괄하는 도내 최고 통치행정기구 전라감영全羅監營- 4

가. 전라감영과전라감사

려후기 전라도안찰사영에 이어 전주에 설치되었다. 전라감영은 하삼도 중에 서 경상감영•충청감영과는 달리 임진왜란 후에도 다른 지역으로 이전되지 않고 조선말까지 전주에 자리했다 전라도관찰사(전라감사)는 종2품의 대신으로 도내 행정과 함께 군사• 사법 •교육까지 총괄하였다. 전라감사全羅監司예하에는 도사都事(종5품), 판관判官 (종5품), 중군中軍(정3품 당상관 무관), 심약審藥(종9품), 검률檢律(종9품) 등 중앙에

 

그림 2. 전라감영 선화당(2020년 복원)

서 파견된 관리와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전라도 지역의 영리營屯들이 있었다.

감영제 운영형태는 조선 건국 후 고려시대 안찰사제에 이어 감사가 일도 를 순력하면서 도정을 살피는 행영제行營制(순영제巡營制)로 운영되었다. 그러다 가 임진왜란 후 17세기에 감영이 독자적인 재정권을 확보하면서 감사가 감영 104 에 머물며 통치하는 유영제留營制로 변모되었다.

유영제로 전환됨에 따라 감사가 집무를 보는 선화당을 비롯해 여러 감 영의 관서들이 건립되었다. 감사의 법적 임기도 구임久任이 가능해지면서 1년 전 에서 2년으로 늘었다. 하지만 감사의 실제 재임기간은 구임제 후에도 1년 정 도였다. 또 유영제가 되면서 전라감사가 전주부윤을 겸하는 겸목제兼牧制가 시행되었으며, 이에 따라 종5품의 전주판관이 임용되어 실질적인 전주부윤 4 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1895년에 8도제를 23부제로 개편하면서 전라도는 전주부, 남원부, 나 주부, 제주부 등 4부로 나뉘어 각각 전주부관찰사, 남원부관찰사, 나주부관 찰사, 제주부관찰사가 임용되었다. 이듬해 1896년에는 13도제로 다시 개편 하여 전라도는 전라북도와 전라남도로 분도되었으며, 각각 전라북도관찰사 와 전라남도관찰사가 임용되었다. 전라북도관찰사영은 전주에, 전라남도관찰 사영은 광주에 설치되었다.

조선 건국 직후부터 1895년에 도제를 혁파하고 23부府로 개편할 때까 지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한 연인원은 총 467명이다. 전라감사를 3번 역임한 원두표를 비롯해 중임한 10번의 경우를 제외하면, 1895년까지 전라도관찰 사를 역임한 실인원은 457명이다.

나. 전라도 수령제와 군현편제 조선시대 각 군현을 다스리는 목민관인 수령守令은 군현의 대소에 따라 주州에는 부윤府尹(종2품), 대도호부에는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정3품), 목에는 목사牧使(정3품), 도호부에는 도호부사(종3품), 군에는 군수郡守(종4품), 현에는 현령縣令(종5품)•현감縣監(종6품)이 임용되었다 조선초『경국대전』에 등재된 전 국의 수령은 총 329명으로 부윤 4명, 대도호부사 4명, 목사 20명, 도호부사

44명, 군수 82명, 현령 34명, 현감 141명 등이다.

않았다. 수령의 입사로人+路에 따라 내지內地는 음관蔭官이 주로 임용되었고, 군사 방어 성격이 있는 변방과 해안 지역은 무과출신이 주로 임용되었으며, 내지와 연변 구분 없이 요지에는 문과출신들이 임용되었다.

조선 건국 후 전라도 군현 편제는 통폐합을 거쳐『경국대전』에 57개 군 현으로 법제화 되었다. 즉 조선 건국 후 전라도는 제주도 3개 군현을 포함한 총 57개 군현에, 1부•3목•4도호부•12군•37현 체제로 확립되었다. 제주도는 105

전 1

4

수령은 고을의 행정과 함께 사법, 군사, 교육 등 전권을 가지고 있었다. 임 기는 1,800일(5년)인데, 당상관 수령 및 가족을 데려가지 않는 미설가未挐家 수령은 900일이었다. 수령의 이런 법적 임기는 찾은 교체로 제대로 지켜지지

전라도에 속했으며, 광복 후 1946년에 독립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1600년(선조 33)에 피폐해진 진원현珍原縣을 장성 부에 편입하여, 조선후기 전라도는 총 56개 군현으로 편제되었다. 이후 능주 현을 목으로 승격하고, 여산군• 장성현 •무주현을 도호부로 승격하여 1746년 (영조 22)『속대전』에 전라도는 총 56개 군현에, 1부•4목•7도호부•11군•33현 으로 법제화되었다.

(조선후기『속대전』에 등재된 전라도 군현(총 56개)]

0 부윤(종2품, 1원) : 전주

0 목사(정3품, 4원) : 나주 • 제주•광주•능주(經:현령)

0 부사(종3품, 7원) : 남원• 장흥 • 순천 • 담양• 여산(韃:군수) • 장성(硜:현감) • 무주

(經•현감)

0 군수(종4품, 11원) : 보성 • 익산•고부 • 영암•영광• 진도•낙안•순창•금산• 진산

•김제

0 현령(종5품, 5원) : 창평 • 용담•임피 •만경•금구

0 현감(종6품, 28원) : 광양• 용안•함열 • 부안• 함평 • 강진• 옥과고산• 태인•옥구 •남평•흥덕•정읍•고장•무장•무안•구례•곡성•운봉•임 실•장수•진안•동복•화순•홍양•해남•대정•정의.(진원 현: 선조 33년 혁파)

 「經」:「經國大典』(성종 16년).

 

조선말 1895년 8도를 23부제로 개편할 때 부•목•군•현'의 구분을 없애 고 '군郡'으로 일괄 통일하였고, 군현의 수장도 '군수郡守'로 통칭하였다. 이듬 해 1896년 13도제로 개편되어 전라북도와 전라남도로 분도되면서, 구례군 이 전라북도에 이속되고, 고창•흥덕•무장이 전라남도에 편제되었으며, 완도 군• 지도군•돌산군 3개 군이 전라남도에 신설되었다. 그리하여 전라북도 26 개 군, 전라남도 33개 군이 되었다.

조선 멸망 후 1914년 일제강점기에 대대적인 군현 통폐합이 이루어져 전 전 라북도는 1부 14군, 전라남도는 1부 22군으로 개편되었다. 이때 구례가 전라 남도로 편입되었고, 고창•무장•흥덕이 전라북도로 이속되어 고창군이 되었

다. 금산과 진산은 본래 전라도인데 1963년에 충청도로 편입되었다.

4

다. 전라도 군사편제 조선 건국 후 군사는 육군과 수군의 양군兩重체제로 편제되었다. 고려시 대만 해도 수군은 육군과 별도의 지휘체계를 가진 군대가 아니었다. 조선 건 국 후 수군은 양적으로도 크게 증가하여 전국적으로 양인 병종의 51%, 양계 를 제외한 6도 지역은 지방군의 70%가 수군이었다. 전라도에서도 수군이 가 장 중요한 비중을 자지하였다. 이와함께 고려시대 군사단위로서 도,首를 폐하 고 그 보다 작은 단위의 군사구역을 설정하여 그 중심 거점에 진鎭을 두었다.

전라도에는 병사와 수사를 겸하는 전라감사 외에 병사 1인(병영 강진), 수 사 2인(좌수영 순천, 우수영 해법이 있었다. 제진은 전주진관•나주진관•남원진관 •장흥진관•순천진관 등 5개의 거진으로 나뉘어 편제되었다.

전라도 제진의 중앙군 5위 편성은 전주진관군사가 중부, 순천진관군사 가 좌부, 나주진관군사가 우부, 장흥• 제주진관군사가 전부, 남원진관군사가 후부를 이루었다. 지방군의 분속은 그들이 직접 번상하여 수도방어에 대처 하는 것이 아니라, 전국의 번상군사를 거주지의 진관별로 파악하고 5위에 분 속시킨 것이다.

조선 건국 후 지방군제는 세조대 진관체제鎭管體制로 정립되었다. 주요한 지역을 거진으로 하여 나머지 주변 지역의 제진을 그 휘하에 속하게 해 일원 적 군사체계를 구축하고, 제진으로 하여금 거진의 첨절제사 지휘하에 스스 로 적을 방어하는 자전자수自戰自守체제이다.

이 소속 군사를 이끌고 지정된 방어지역으로 집결하여 공동으로 방어진지를 구축하는 군사체제이다.

임진왜란 때 제승방략체제의 문제점이 노출됨에 따라, 조선후기에는 진 107

관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영장제營將制로 다시 재편되었다. 진영장은 정3품 당

상관으로 영장, 진장이라고도 한다. 8도에 46인(경기도 6인, 충청도 5인, 경상도 6 1

인, 전라도 5인, 황해도 6인, 강원도 3인, 함경도 6인, 평안도 9인)과 강화부의 진무영 4

이러한 진관체제는 군사 확보 등 군비 마련이 여의지 않음에 따라 이후 제승방략체제制勝方略體制로 개편되었다. 제승방략은 유사시에 각 읍의 수령

撫營에 5인이 있었다. 이들은 중앙의 총융청수어청찐무영 등과 각 도의 감 영퍪영에 소속되어 지방 군대를 통솔하였다. 영장은 또 현종 때부터 수령이 겸직하던 토포사討捕使를 겸하여 치안까지 담당하였다.

[조선후기 영장제하의 전라도 군사편제]

0 전영(순천) : 순천• 장흥• 진도•낙안•보성 • 강진• 홍양•동복• 광양• 해남

0 좌영(운봉) : 남원•곡성•장수•창평•옥과•구례 • 운봉  중영(전주) : 전주• 김제•고부•진안•임실 •금구•만경•부안  우영(나주) : 나주•광주•능주•영암• 영광•화순•남평•무안•함평•무장 0 후영(여산) : 여산•익산•고산•금산• 진산• 용안•함열 • 임피 • 옥구• 용담

전라도 5진영 중에서 좌진영은 운봉현감이 영장을 겸하였고, 후진영은 여산부사가 영장을 겸하였다. 전진영 순천, 중진영 전주, 우진영 나주에는 별 도의 영장이 임용되었다.

3. 조선 제일의 곡창지대 전라도

 

신경申炅이 1693년(숙종 19)에 지은『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 “우리나라 형세로는 전라• 경상 두 도를 중하게 여기는데, 경상도는 문호門戶요 전라도는 창고로서 경상도가 없으면 전라도도 없어지는 것이요, 전라도가 없어지면 비 록 다른 도가 있다 할지라도 끝내 의뢰하여 근본으로 삼을 데가 없게 되므로 전 이것이 곧 왜구가 반드시 침략하려는 바요, 우리는 반드시 지키려는 바입니

다.”라고 하였다.

경상도는 일본이 침략해 들어오는 문이요, 전라도는 백성을 먹여 살리는 4 창고니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 양도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임진 왜란을 겪은 후 전라도와 경상도의 중요성을 논한 것으로, 국가의 보장지처  障之處로서 조선 제일의 곡창지대 전라도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전라도는 조선 제일의 부고府庫로 국가재정의 1/3을 담당하였으며, 동학 농민혁명 무렵에는 국가재정의 절반이 전라도에서 나왔다. 그러기에 조선말 매천 황현은 그의 저서『오하기문』에서, “호남은 우리나라 남쪽의 울타리로 산천의 경계가 뛰어나고 물산이 풍요로워 온 나라가 먹고 입는 자원의 절반 을 호남에 의지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황현은 또, “(서울사람들이) 아들을 낳

 

그림 3. 호남평야(김제 벽골제 일원,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 제공)

아 호남에서 벼슬을 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호남은 재물이 많 아 수령들의 욕심을 채워줄 만하여 그렇다는 것이다. 17세기를 살았던 실학 의 비조 반계 유형원도 그의 개혁론을 집대성한『반계수록』에서, “우리나라 조세 중에서 호남지방에서 나오는 것이 전체 조세의 절반을 차지한다.”라고

하였다.

〈표 1〉은 토지결수와 호조의 수입 지출현황을 정리한『탁지부전부고度支部田賦考』를 통해 살펴 본 1814년(순조 14) 조선 8도의 전답현황이다. 109

〈표 1〉에서 원장부元帳簿는 전체 토지 면적이다. 유래진잡탈流來陳雜頗=O

표 1. 1814년(순조 14) 8도의 전총田摠구조 (단위• 결)

1

4

경기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황해도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 합계

원장부 86,026 255,585 339,731 336,950 13기기1 40,903 119,702 117,746 1,428,854

유래 진잡탈 면세 25,104 108,781 84,027 99,512 41,743 17,379 19,267 10,130 405,943

20,691 21,205 38,631 31,920 16,666 11,769 16,068 4기808 199,758

금재 1기000 33,500 67,979 71,000 3,400 600 3,362 0 191,841

출세

2기236

실결 9기099 149,094 134,696 70,402 11,155 81,005 64,808 625,495

손병규송양섭편,『통계로 보는 조선후기 국가경제 -18-19세기 재정자료의 

2013, 318쪽에서 인용. 원 표에서火田과蘆田은 제외하였다.

표 2.『호구총수』에 나타난 1789년(정조 13) 호구수 기초적 분석』, 성균관대학교출판부,

도명 군현수 원호수 인구수 호당구수 성비

한성부  경기도 38관 159,160 64기069 324,888 317,181 4.0 102

강우」도  

 

56관 319,160 1,220,804 575,485 645,319 3.8 89

71관 365,220 1,590,973 725,062 865,911 44 84

전라도 경상도 황해도 23관 137,041 567,813 304,947 26기866 116

 

평안도 42관 300,944 1,296,044 639,229 656,815 4.3 97

 

함경도 24관 123,882 696,275 346,381 349,894 5.6 99

1,75기837 7,403,606 3,607,376 3,796,230 4.2 95

손병구송양섭편, 앞의 책, 36쪽에서 인용

경작자의 도망이나 죽음, 재해 등으로 인해 경작하지 않는 묵혀진 토지 진전 陳田을 말한다. 면세免稅는 원장부의 경작지 중 궁방宮房이나 아문衙p 의 재원 마련을 위해 면세, 면역 혜택을 준 토지를 가리킨다. 급재給災는 해마다 풍흉 에 따라 구홀책의 일환으로 재해를 입은 토지 재결災結을 선정해 조세를 감 면해 주는 것이다. 출세실결出稅實結은 면세지 등을 제외하고 실제로 조세를 내는 토지이다.

순조 14년 원장부를 보면 전라도가 339,731결로 전답이 가장 많다. 다 전 음이 경상도로 336,950결이고, 그다음이 충청도로 255,585결이다. 원장부 에서 면세지 등을 제외한, 실제로 세금을 내는 실결만을 헤아려 보아도 전라 도가 가장 많아 149,094결, 그다음 두 번째가 경상도로 134,696결, 세 번째 4 가 충청도로 92,099결이다.

도별로 전체 면적을 보면, 전라도는 경상도의 3/4 정도이다. 도별 면적의 크기를 추정해 보면 경상도 30,434M 전라도 21,803M 충청도 15,099k礭순 이다. 전라도의 전체 면적이 경상도에 비해 훨씬 더 작은데도 불구하고 전답 은 경상도보다 더 많다. 이것은 전라도의 토지가 얼마나 비옥한지를 보여준다 1결의 면적은 수확량을 기준으로 정한 것으로 전답의 비옥도에 따라 달랐다

1789년(정조 13)『호구총수』에 수록된 인구수는 경상도가 1,590,973명 으로 가장 많고, 그다음이 평안도 1,296,044명, 전라도 1,220,804명, 충청도 868,219명 순이다. 평안도와 전라도의 인구수는 근소한 차이이다. 호수는 전 라도가 경상도 다음이며 평안도 보다 조금 많다.

즉 정조대 인구조사를 보면, 호수는 전라도가 경상도에 이어 두 번째로 많 고, 인구수는 전라도가 경상도퍪안도에 이어 세 번째로 많다. 그런데 호수나 인구수에서 전라도와 평안도는 근소한 차이이다.〈표 3〉인구수 백분비에서 보 듯이 전라도와 평안도는 시기에 따라 인구수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 있다.

〈표 3〉은 조선후기 각 도별로 전결田結수 및 인구수의 백분비를 정리한 것이다.

〈표 3〉에서 보듯이, 인구수는 전라도가 조선 전체인구의 28%에서 15% 정도로 경상도 보다 앞선 때도 있지만 대체로 경상도 다음이고, 평안도와는

표 3. 조선후기 각 도별 전결수 및 인구수의 백분비

인조 240646) 숙종 460720) 정조 100786) 순조 30803) 순조 280828)

전결 인구 전결 인구 전결 인구 전결 인구 전결 인구

한성 6.3 35 27

경기 3.2 5.3 73 77 8.9

충청 18.2 114 18.3 14.3 17.8 11.8 151 11.8 179 14.2

전라 29.2 28.2 271 16.2 24.3 16.6 25.6 16.6 232 14.9

경상 277 27.8 24.2 23.8 234 21.6 24.8 21.3 23.5 23.7

강원 1.2 3.5 29 2.8 4.4 14 4.5 29 5.6

황해 6.5 3.6 93 9.0 77 7.7

평안 7.0 6.5 15.8 7.4 17.5 9.9 173 12.8

함경 71 4.5 44 75 7.6 91 7.7 9.3

685,300 1,531,365 1,391,700 6,840,000 1,436,400 7,356,783 845,900

100% 100% 100% 100% 100% 100% 100% 7,561,000 1431400 6,099,700

100% 100% 100%

111

전 1 4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33(조선후기의 경제), 1997, 23쪽에서 인용

 

시기에 따라 순위가 뒤바뀌고 있다. 그런데 전결수는 전라도가 조선 전체 전 결의 29%에서 24%로 가장 많다. 그다음이 근소한 차이지만 경상도이다. 그 다음이 충청도인데 결수의 차이가 크다. 이는 곧 전라도 사람들의 경제 형편 이 타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나았을 것임을 보여준다.

4. 호남사림의 형성과 중앙 진출

 

가. 호남사림의 형성과학맥 호남사림에 대한 고영진의 연구에 의하면 고려 후기 전라도의 대표적인 유학자로는 김구金坵(부안), 서릉f余稜(장성), 이성(李晟(담양), 윤귀생尹龜生(금산), 전녹생田祿生(담양), 박상충朴尙~주), 범세동氾世東(나주), 최양崔瀁(전주) 등이 있다. 이들은 성리학을 수용하고 권문세족에 대항하며 개혁을 추구한 신흥 사대부적인 성격을 지녔다.

15세기 조선초 성리학을 전파한 전라도의 대표적인 유학자로는 최덕지

崔德之(전주, 영암), 김문발金文發(광주), 이선제李先齊(광주), 정극인丁克仁(태인), 유 분柳坍(전주), 유승조示祖(전주) 등을 들 수 있다. 유승조는 최초의 경서언해서 經書諺解書인『경서언석經書諺釋』을 저술하여 생도들에게 가르쳤다.

16세기초 호남사림은 김굉필계열, 최부계열, 송흠계열, 박상계열, 이항계 열, 김안국계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당시 호남사림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이 지역에 유배 온 김굉필과 조광조였다. 김굉필은 순천으로 유배를 와 사사 賜死되기까지 4년 동안 있었으며, 조광조는 기묘사화로 능주에 유배되어 한 전 달만에 사사되었다.

16세기 중반 명종대에 이르면 호남사림은 크게 송순계열과 서경덕계열 로 나뉜다. 송순계열에는 송순• 김인후•나세찬•임형수•임억령 •양산보퍙응정 • 4 오겸 등이 활약했으며, 대체로 김굉필계열, 송흠계열, 박상계열, 이항계열, 김 안국계열 등이 여기에 속하였다. 서경덕계열에는 서경덕의 문인이었던 박순 과 정개청•노수신•윤행•윤의중•박응남•박응복•유희춘 등이 활약했으며, 최 부계열이 주로 여기에 속하였다.

선조대에 동서분당이 되면서 송순계열은 서인으로, 서경덕계열은 동인

 

그림 4. 필암서원

으로 자리하였다. 이때 송순계열의 중심인물은 정철•고경명•김천일•이후백 등이었으며, 서경덕계열의 중심인물은 이별이길 형제와 정개청 등이었다. 이 들 양세력의 대립은 기축옥사로 인해 서인 정철계열의 승리로 끝났다.

임진왜란 때 호남의병의 주축은 고경명, 김천일, 최경회, 변사정 등 대부

분 송순-정철계열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서경덕-정개청계열은 주로 관군인 이 순신•이복남 부대에 참여했다. 그 결과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정철 계열의 세 력이 더 커졌다. 113

한편, 오경택의 연구를 통해 16세기 호남사림권을 전주권, 남원권, 나주

권, 광주권으로 분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4

0 전주권 : 송세림•송세형•구대우•이장수•유인홍•이계맹•나안세•소 세량•소세양•김약회•이항•김약묵•나응삼•소봉•이승효•정희증•정 언지•김복억•정언신•김후진•이순인•김대립•정여립

0 남원권 : 양연•김위•윤인서•정염•정황•정환•조희•조희문•최산두• 최언수•최옹•최정•최상중

0 나주권 : 기대승•김백균•김응두•김인후•김천일•나세찬•박수량•박 순•송흠•신희남•양응정•오겸•유성춘•유희춘•임구령•임백령•임복• 임붕•임억령•임형수•정개청•정수강•최경장

0 광주권 : 고경명 •고맹영•고운•고종후• 김계휘 • 김언거 • 김희열 •박광옥 •박상•박소•박순•박우•박응남•박응복•송순•양응태•양팽손•유옥• 정만종•정철

나. 호남사림의 중앙진출과 과거급제자 호남사림들은 16세기에 들어와 인재의 부고府庫라고 칭해질 정도로 많 은 인물이 중앙정계에 진출하였다. 박세채는 임억령의 묘표를 쓰면서 '호남 에서 많은 명현일사名賢逸士가 배출되었는데, 중종에서 명종대가 그 절정이었 다과고 하였다. 홍석주도『양곡집陽谷集』중간서重刊序에서 '호남은 인재의 연 수酬藪로 조선 중엽에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라고 하였다.

호남사림의 중앙정계 진출은 중종 초기만 해도 다른 지역에 비해 활발 하지는 않았지만, 점진적인 증가추세를 보이다가 명종대 이후 급격히 늘어나 선조대 주요 요직을 자지하였다. 그리하여 16세기 호남사림은 정국운영의 주 도적 위치에 있었다. 효종대 비변사에서 지방 인재들을 발탁할 것을 아뢰면 서 “선조대 조정에 등용된 자들의 반수가 호남과 영남사람이었습니다.”라고 한 것은 그런 사실을 잘 대변해 준다.

전라도 출신 문과급제자에 관한 송만오의 연구에 의하면, 조선왕조 500 년 동안 전라도 출신은 총 972명으로 전체 문과급제자 14,609명의6.7% 정 도 된다. 이 수치는 금산과 진산, 제주도를 현 전라도만을 헤아린 것이다. 전 이를 전라북도와 전라남도로 구분해 보면 전남출신이 547명, 전북 출신이

425명이다. 군현별로 보면 전라도에서 가장 많은 문과자를 배출한 군현은 남 원으로 133명, 두 번째는 나주로 107명, 세 번째는 전주로 95명, 네 번째는

4 광주로 84명이다. 본관별로 보면 전주이씨가 872명(5.8%)으로 전국에서 가 장 많은 문과자를 배출하였다.

한편 전체 문과자 중에서 12,792명의 출신지를 분석한 이원명의 연구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은 서울로 5,502명 (43.01%), 2위 경상도 1,750명(13.68%), 3위 충청도 1,328명(10.38%), 4위 경기 도 1,130명(8.83%), 5위 전라도 1,081명(8.45%). 6위 평안도 1,006(7.86%) 순이

다. 조선시대 전체를 놓고 볼 때 전라도가 충청도 보다 문과자를 적게 배출하 였다.

그런데 시기별로 나누어 보면 다르다. 서울을 제외하고 지방들을 비교하 면 15세기에는 경상도가 가장 많아 224명이고, 그다음이 전라도로 120명이 며, 그 뒤를 이어 충청도가 73명이다. 이 순위는 16세기까지도 그대로 이어졌 다. 즉 15, 16세기에 걸쳐 전라도는 경상도 보다는 적지만, 충청도 보다 많은 문과자를 배출하였다 그런데 17세기 전반에 들어와서 경상도 236명, 충청도 148명, 전라도 113명 순으로 문과자가 배출되어 충청도가 전라도를 앞지르고, 이후 조선말 까지 이런 현상이 이어진다. 이와 관련해서 1589년(선조 22) 전주 출신 정여립 의 모반사건이 주목된다. 이 사건 이후 전라도의 문과자 배출이 내리막길을 걸었다.

생원진사시(사마시) 합격자는 생원시 20,698명, 진사시 21,941명, 총 42,639명이 파악된다 이는 조선시대에 설행된 총 230회의 생원진사시 합격 인원의 85%에 해당된다. 유호석의 연구에 의하면, 전라도를 거주지로 한 합 격자는 10%가 채 안 되는 4,239명(금산과 제주도 제오D으로 서울, 경상도, 충청

도에 이어 네 번째이다. 시군별로 보면, 전주가 465명으로 가장 많고, 그다음 이 남원으로 431명, 나주 405명, 광주 315명 순이다. 115

5. 정여립 모반사건과전라도 1

4

정여립 모반사건鄭汝立謀叛事件은 1589년(선조 22) 전주 출신 정여립이 모 역을 도모했다는 것으로 3년간에 걸쳐 동인 천여 명이 희생된 선조 8년 동서 분당 후 최초의 대옥사이다. 이 모반사건이 일어난 해가 기축년이므로 기축 옥사己丑獄事라고 한다.

정여 립은 전라도 전주사람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수찬 벼슬을 지 냈다. 그는 본래 서인으로 율곡 이이를 추종하였으나, 율곡 사후 동인쪽으로 돌아섰으며, 스승 율곡을 비방하였다는 배사론胥師論에 휩싸여 선조의 미움 을 받고 전주로 낙향하였다. 그는 진안 죽도竹島에 서실을 짓고, 상하합계인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매월 활쏘기를 익히고 술과 음식을 나누었다.

정여립은 체구가 장중하고 박학다재한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모두가 하나 되는 '대동사상大同思想, 천하는 만인의 공유물이라는 '천하공물론  公物論',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냐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의 사상적 면목을 지니고 있었다. 정여립은 당시로써는 혁신적 인물이었다.

정여립이 모역을 도모했다는 고변은 황해도에서 이루어졌다. 모역의 산 실은 전라도로 지목되었으나 고변은 모역에 가담했다는 황해도에서 이루어 졌다. 황해감사 한준 등이 정여립이 모반했다고 고변하면서 모역은 기정사실 이 되어갔고, 정여립은 진안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사건 초에 죽었다.

4

그림 5. 진안 죽도

정여립이 일찍 죽음으로써 적가문서賊家文書, 즉 그가 주고받은 편지들이 역모 참여자를 찾아 심문하는 증거가 되었다. 편지를 주고받은 것은 친소를 말 하는 것이지 역모 참여는 아닌데 기축옥사는 그렇게 전개되었다. 여기에는 선 조의 심중이 크게 작용하였다 선조는 중종의 손자로 아버지가 왕이 아니어서 정통성에 취약함을 가지고 있었고 이로 인해 자신의 안위에 예민하였다.

10월 초 모역이 고변되고, 그달 말에 창평(현 담양)의 생원 양천회의 상소 로 전주출신 우의정 정언신과 그의 친형 이조참판 정언지, 남평(현 나주) 출신 동인의 영수 이발과 그의 아우 이길, 백유양등이 희생되었다. 그해 12월에는 동복(현 화순) 유생 정암수의 상소로 무안출신 정개청, 화순출신 전라도사 조 대중, 나주출신 남원부사 유몽정 등이 옥사하였다. 이듬해에는 전라감사 홍 여순의 장계에서 비롯되어, 진주眞州로 이거해 있던 최영경이 길삼봉으로 몰 려 옥사하였다.

기축옥사로 희생된 인물이 문헌상에 확인되는 경우만 해도 232명에 이 른다. 실제로는 기축옥사 때 희생된 인물이 천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 여립의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하여 전주에 사는 동래정씨 족속들이 모두 쫓 겨나고 그 선조들의 전주 묘소는 타지역으로 이장되었다. 남평의 광주이씨 이별이길 형제는 노모와 이발의 어린 아들까지 죽임을 당하였다.

정여립 사건은 임진왜란 직전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많은 인물들이 희생

되었지만 사실로 단정하기에 여러 의문점이 있다. 그래서 정여립이 실제로 모 역을 도모했다는 주장과 서인들이 집정세력인 동인들을 밀어내기 위해 꾸며 낸 당쟁의 산물이라는 날조설이 맞서 있다. 117

정여립의 죽음에 대해서 모역이 사실이라고 보는 쪽에서는 자결이라고

하고, 모역이 날조되었다고 보는 쪽에서는 타살되었다고 주장한다. 대동계에 1

대해서도 모역을 사실로 인정하는 쪽에서는 손죽도에 출몰한 왜구를 물리칠 4

정도의 큰 세력으로 보고, 모역을 날조된 것으로 보는 쪽에서는 그렇게 거대 한 무사집단이었다면 어떻게 단 한 차례의 저항도 없었겠느냐고 반문한다.

이 사건에 대한 동인과 서인의 기록이 다르고, 실재설과 날조설 모두 풀 리지 않은 의문점들이 있다. 따라서 사건의 진상을 어느 한쪽으로 단정하기 에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전반적인 상황으로 볼 때 정여립이 모역을 도모 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모역에 쓸 병기를 끝내 찾지 못했는 데, 병기도 없이 모역을 도모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모역이 실재했다고 보는 경우, 진안현감 민인백이 당시 상황을 기록한 「토역일기」를 대표적인 근거자료로 내세우지만 정황에 맞지 않는 면들이 있 다. 민인백이 정여립을 잡으러 다복동에 도착했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따라 서「토역일기」에도 기록된 것처럼 정여립의 움직임을 속속들이 볼수 있는 상 황이 아니었다. 민인백은 서인으로 정여립모역사건을 평정한 공으로 평난공 신 2등에 책봉된 인물이다.

정여립이 모반을 도모하지 않았음에도 모역자로 몰린 것은 그가 뛰어난 역량을 지녔고 당시로는 위험할 수 있는 혁신적 사상을 지닌 인물이었기 때 문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거기에 전라도의 변혁적 성향과 선조의 불안감이 작용해서, 분명치 않은 사건임에도 엄청난 희생을 사하였다.

정여립 사건은 옥사가 만연되면서 중앙정계에서 동인과 서인간의 주도

 

권 정쟁으로 확산되어 많은 동인들이 정쟁에 휘말려 희생되었다. 이 모역사건 으로 전라도는 중앙정계에서 그 위상이 약화되고, 향촌사회에서 사림들 간 에 심각한 분열이 지속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선조대 중앙정계의 주도적 위치에 섰던 호남사림은 그 실체가 불분명한 118 정여립 사건으로 이후에 내리막길을 걸었다. 고려시대 실체가 불분명한 훈요 십조로 인해 중앙정계에서 전라도 세력이 약화되었고, 조선시대에 또다시 실 체가 분명치 않은 정여립 사건으로 전라도는 중앙정계에서 밀려나고 엄청난 전 희생을 치러야 했다 정여립 사건에 대한 전통적인 시각은 호남자대론이다. 정여립 사건으로 전라도가 반역향이 되어 이 지역출신들의 중앙진출이 저에되었다는 것이다.

4 그런데 근래에는 정여립 사건으로 인한 호남자별은 없었다는 견해가 제기되 고 있다. 호남에 대한 제도적인 차별은 물론 없었다. 하지만 정여립 사건으로 호남사림들이 중앙진출에 어려움을 겪은 것은 사실로 보인다. 17세기 이후 전라도 출신의 문과급제자 감소는 이를 말해준다. 호남사림의 문과 진출이 감소한 데에는 서울 경화자제京華子弟들의 관직 장악과 충청세력의 약진에도 요인이 있지만, 정여립 사건 후 전라도에 대한 중앙정부의 견제가 작용한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전라도의 역사를 저항과 자대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정여립사 건도 그런 차원에서 해석되었다. 그러나 전라도의 저항은 상대에 대한 저항 이 아니라 삶의 높은 질을 추구하는 변혁적 성향을 지닌 것이다. 소외와 자 대는 새 사회를 열어갈 수 있는 전라도의 저력에 대한 중앙정부의 견제적 성 격을 지닌다. 전라도 지역사를 바로 보기 위해서는 호남의 특질을 저항이 아 니라 변혁으로, 차대가 아니라 견제로 보는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정여립 사건도 반역과 차대의 논리에서 벗어나 전라도의 변혁적 성향을 담은 역사적 사건으로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다.

가. “약무호남 시무국가”, 임진왜란 때 수호된 전라도

임진왜란 때 유일하게 수호된 지역이 전라도이다. 충무공 이순신은 “약 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 즉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고 하였으며, 왜란을 겪은 보성 출신의 사림 안방준은 호남의 보존은 의병의 봉기에서 말 119

미암은 것이었다라고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인물 1

은 곡성(옥과)의 성균관 학유 유팽로와 남원의 전』주부 양대박이었다. 유팽 로는 문과급제자로 부모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다가 4월 20일 순창에서 4

6. 나라와 역사를 지킨 전라도

 

기병하였다.

이어 김천일이 나주에서 기병하여, 3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첫 번째로 북상하였다. 광주출신 고경명은 유팽로, 양대박 등과 함께 담양에서 회맹하 여 호남 최대의 의병 6,000명을 이끌고 두 번째로 북상하였다. 이보다 조금 늦게 고부(정읍)의 김제민이 전주 삼례에서 창의하였다. 그래서 김천일을 일운 장, 고경명을 이운장, 김제민을 삼운장이라 하였다.

일본은 4월에 조선을 침공하여 한양과 평양을 점령하고, 6월 하순에야 전라도 공략을 시작하였다. 일본군은 금산성을 점령하고, 이곳을 근거지로 무주, 용담, 진안을 장악하고 웅지와 이치 두 길로 나누어 호남의 수부首府(감 영이 있는 곳) 전주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김제군수 정담, 나주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 등이 전주와 진안의 경계 인 웅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결사적으로 항전하였다. 웅지전에서 정담이 순 절하는 등 많은 사상자를 내고 패했지만, 왜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혀 전주 성을 수호하고 전라도를 보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당시 전주성은 이정란이 수성장이 되어 지켰다.

이치는 진산에서 전주로 들어오는 길목으로 도절제사 권율이 진을 치 고, 황진은 최전방에 진지를 구축하여 대접전을 벌였다. 의병장 황박은 이 전

4

그림 6. 웅지전적비

투에서 순절하였다. 이 싸움에서 조선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이치전투는 왜 군측에서 임진왜란 3대전의 하나로 꼽았을 만큼 치열한 혈전이었다.

고경명이 이끄는 호남 최대의 의병군단은 곽영이 이끄는 관군과 함께 금 산성을 협공하였다. 고경명과 그 아들 고인후, 안영, 유팽로 등이 순절하고 패 하였다. 순창의 한응성도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였다. 금산성 전투는 일본군 의 전라도 공략 본거지를 공격한 것으로 비록 패했지만 일본군의 호남 침입 을 저지시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전라도 의병은 또 영남에서 호남으로 들어오는 관문인 진주로 나가 왜병 을 막았다. 1592년 10월 1차 진주성 전투는 진주목사 김시민이 전사하는 등 지열한 접전 끝에 왜군을 물리쳤다. 이듬해 6월 2차 진주성전투는 사력을 다 했으나 끝내 패하고 말았다. 충청병사 황진, 김해부사 이종인 등 많은 장수와 의병들이 이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성이 함락되자 호남의병장 김천일은 아들 김상건을 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으며, 최경회, 고종후(고경명의 아들)

등도 남강에 뛰어내려 자결하였다. 장수출신 논개는 기생으로 분장하고 왜군 의 승전 축하연에 들어가 왜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하였다.

임진•계사년 격전을 치르고 화의교섭이 진행되면서 조명朝明연합군과 일 본 양측은 경상도 남부지역에서 지리한 대치상태를 이어갔다. 이때 1594년

(선조 27) 광주의 김덕령은 거의擧義하여 전국의 의병조직을 총괄하는 충용장 忠勇將의 군호를 받았는데,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었다고 무고되어 장살 당하 였다. 121

1597년 정유재란 때 일본군은 전라도를 집중 공략하였다. 8월 남원성전

투에서 군관민 만여 명이 순절하는 등 4일간에 걸쳐 치열한 혈전을 전개하였 1

으나 패하였다. 남원성이 무너지자 전라병사 이복남빵어사 오응정 •조방장 김 경로•구례현감 이원춘 등 4인의 장수는 시초를 쌓아놓고 그 위에 올라가 불을 질러 자결하였다. 만인의총은 남원전투 순절자들의 유해를 봉안한 곳이다.

일본군이 남원성 함락을 위해서 20여 일간을 소비하여, 조명연합군은 왜군의 북상에 대비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그해 7월 22일 3도수군통제사로 재임용된 이순신이 수군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일본군은 남원을 점령하고 임실을 거쳐 전주성을 함락하였다. 전주성을 지키던 명나라 유격장 진우충은 도망가고 없었다 남원과 전주가 무너지면서 전라도 전역이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당시 관군은 물론 군현 수령들마 저 달아나고 없었다. 전라감사 황신의 보고에 의하면, 진산군수 신택申澤만이 처음부터 끝까지 관청에 남아 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비록 정유재란 때 전라도가 일본군에 점령되었지만, 임진왜란초 호남 의 병들의 결사적인 항전과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의 활약으로 조선 최대의 곡창 지대 전라도를 보존하여 조선을 지켜낼 수 있었다. 이순신이 1593년 7월 16 일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서, “약무호남 시무국가”라고 한 것은 임진왜란 때 이런 전라도의 역할과 위상을 말해준다. 4

나. 임진왜란 때 유일하게 보존된 전주사고본「조선왕조실록』 한편 임진왜란 때 조선전기의 4대사고 중에서 전주사고에 봉안된『조선

왕조실록』만이 유일하게 보존되었다. 전주사고 실록마저 소실되었다면 임진 왜란 이전의 조선 역사는 송두리째 사라질뻔 하였다. 전라도는 국난에 처해 나라와 역사를 지켜낸 충절의 땅이다.

전주사고는 세종대 성주사고와 같이 설치되었다. 처음에는 실록각이 건 립되어 있지 않아서 실록을 승의사에 봉안하다가 객사 뒤 진남루에 봉안하 였으며, 성종대 실록각을 경기전 진전 동편 담자락 너머에 건립하여 봉안하 기 시작하였다.

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그해 6월 왜군이 전라도를 공략하자 전라감 사 이광을 비롯하여 경기전 참봉 오희길 등은『조선왕조실록』과 태조어진을 안전하게 숨길 곳을 물색하고 정읍 내장산을 적지로 정하였다. 이에 따라 태 4 인의 선비 안의와 손홍록이 선임되어 내장산에 교대로 들어가 무인 김홍무, 영은사 승 희묵대사와승병 4~5명, 산척 100여 명 등과 함께 실록과 어진을 수직하였다.

1593년 진주성이 무너지자 왜군의 침공을 대비해, 그해 7월 내장산에 이안한 지 1년여 만에 정읍현으로 실록과 어진을 이안하고, 이어 아산현에

 

그림 7. 전주사고

임시로 봉안했다. 실록은 곧바로 해주로 이안되었으며 1596년 말쯤 강화도 로 이안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그해 9월에 실 록을 평안도 영변 묘향산 보현사 별전에 이안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호 하였다.

그리하여 한양 춘추관, 충주사고, 성주사고의 실록은 모두 소실되었으 나 전주사고에 봉안했던 실록만은 유일하게 보전될 수 있었다. 전란이 끝난 후 전주사고본 실록을 토대로 1603년부터 3년간에 걸쳐 실록을 재간행하여 123

1606년에 마무리하고 조선후기 5대사고에 봉안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전주사고본 실록은 강화사고에 봉안되었으며 현재 1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조선후기 5대사고의 하나로 설치된 무 주 적상산사고의 실록은 한국전쟁 때 북한에서 가져가 평양에 봉안되어 있 다. 사고 건물로는 적상산사고 선원각이 안국사 천불전으로 개조되어 유일하 게 남아 있다.

전주시와 문화관광부는 2007년부터 2016년에 걸쳐 조선전기 전주사고 본 실록과 조선후기 정족산사고본 실록 복본화 사업을 전개하여 완료하였으 며, 현재 이 복본 실록은 어진박물관(전주 경기전 경내)에 소장되어 있다. 4

이동희

제4장 조선후기

 

4

1. 정치의 격동적 변화

 

양란 이후 전라도 지역은 여러 분야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우선 정치 분야부터 알아보자. 선조가 죽자 광해군이 대북세력의 지원을 받아 영창대군 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다. 대북정권은 어린 영창대군을 죽이고 그의 어머니 인목대비를 감금시켰고, 명과 후금 사이에 중립외교를 펼쳐 서인으로부터 반 발을 샀다. 서인은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축출하고 인조를 즉위시켰다(인조 반정). 인조가 친명 •반후금 정책을 펴자, 후금은 조선을 침략하였고 인조는 강 화도로 피란 갔다(정묘호란). 이때 전라도 사람들은 고장과 나라를 지키는 데 앞장섰다. 호소사로 임명된 김장생 아래에 의병장으로 안방준(보성)•고순후(광

주) 등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군대와 군량을 모집하여 북상하던 중 여산에서 화약이 성립되었다는 말을 듣고 해산한 후 고향으로 각자 돌아왔다. 후금 0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외교정책을 수정하지 않고 있는 조선을 다시 침략하였 다(병자호란). 이때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옮기어 짜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전

라도 사람들은 또 다시 의병을 일으켰는데, 옥과슨창 현감이 지역민을 이끌 고, 안방준•조수성(화순) 등이 문도와 가동을 이끌고 출동하였다. 이러한 사실 은 지역민들이 편찬한『정묘거의록』,『호남병창의록』등에 기록되어 있다.

얼마로 정할 것인가를 놓고 정파간에 논쟁이 벌어졌다(기해예송). 이때 1년을 주장하는 서인의 의견이 채택되었는데, 여기에 박광일(광주)•위백규(장흥)도 동조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해에 남인이 3년을 주장하였다. 특히 윤선도(해남) 125

의 주장은 강력하여 곧 정치 쟁점화 되었다. 서인의 반격에 윤선도의 상소는

불태워졌고, 함경도 삼수로 유배가고 말았다. 고령에다 남인의 탄원이 이어지 1

자, 현종은 윤선도를 고향 가까운 광양으로 이배하였다. 효종의 비가 죽자, 또 4

인조에 이어 즉위한 효종이 죽자, 인조 계비인 자의대비의 상복 기간을

자의대비의 상복 기간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갑인예송). 이때 현종은 이전과 는 달리 남인의 주장을 채택하였다.

현종을 이은 숙종은 남인 중심으로 정국을 꾸려나갔다. 전라도 남인은 기축옥사 때 희생된 정개청의 신원 및 그를 향사하는 자산서원(무안)의 복설 과 함께 정철의 관작 삭탈까지 주장하였다. 하지만 허견과 3복이 역모를 꾸몄 다는 고변으로 남인 정권이 붕괴되자(경신환국), 서인에 의해 정개청 관련 주 창자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감행되었다. 장희빈 소생을 원자로 정하는 문 제를 계기로 남인 정권이 수립되자(기사환국), 정국이 역전되어 마침내 자산서 원이 중건되고 사액까지 받게 되었고, 정철 또한 삭탈되었다. 하지만 갑술환 국으로 다시 서인 정권이 수립되자, 상황이 또 다시 역전되었다. 이 외에 이이 •성혼•송시열•김장생의 문묘 배향 문제를 놓고도 전라도 사람들은 정파별로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면서 정국을 주도하였다.

소론의 지지를 받은 경종이 숙종을 이어 왕위에 올랐다. 경종은 질병으 로 일찍 죽고 영조가 노론의 지지를 등에 업고 즉위하였다. 자연히 소론과 노 론 사이에 정쟁이 격렬하였다. 소론의 일파가 왕위 교체를 위한 반란을 일으 켰다(무신난戊申亂). 반란은 경가충청껾상•전라도에서 일어났다. 이인좌가 이 끄는 경기•충청도의 반란군은 청주성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경상도에서는 정희량이 안음에서 거병하여 인근 거창과 함양 등을 점령하였

 

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전주땀원 장터에 민심이 흉흉하다는 괘서가 걸렸다. 태인현감 박필현, 부안 유배인 박필현 형인 박필몽, 담양부사 심유현은 담양 에서 화약을 빼돌리고 부안• 태인괌원따주에서 반군을 포섭하며 반란을 준 비하였다. 특히 기축옥사 때 화를 당한 바 있는 나주의 나씨들이 주 포섭 대 126 상이 되었고, '변산적邊山賊'이 반란에 가담했다는 소문이 돌았던 점으로 보 아 그곳 사람들도 대거 참여하였던 것 같다. 반란군은 부안 평교나 임실 회문 산에 집결하여 청주성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전주성 입성 전 을 시도하였으나 이 역시 실패하였다. 박필현은 도주 중 체포되었고, 박필몽 은 무장 동백정에서 배로 도망치려다 체포됨으로써 반란은 끝나고 말았다.

무신란 진압 후 다시 남원 만복사에 거사를 알리는 괘서가 내걸렸다. 범 4 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은 채 사건은 마무리되었지만, 조사 과정에서 관련이 없는 자들이 무수히 붙잡혀 들어오거나, 자백을 강요하는 과정에서 또는 개 인적인 원한 관계에서 허위 진술이나 무고가 난무하였다. 연루된 사람들  적게는 4~5자, 많게는 12차의 고문을 받고 고통을 참지 못하여 자백을 하거 나 그로 인해 참형에 처해졌다. 무신난 격문이나「남사고비결」등의 참서를 집안에 소지하고 있다가 수색 과정에서 압수되어 역적죄로 참형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 뒤에도 크고 작은 괘서 사건은 계속 이어졌다. 그 가운데 나주 객 사 앞 망화루의 동쪽 두 번째 기둥에 괘서가 걸린 사건은 또 다시 대형 옥사 를 불러일으켰다(나주 괘서 사건). 이는 무신란에 연루되어 나주에 20년 동안 유배되어 있던 윤지가 주모자였다. 그는 나주 지역의 관리와 아전들, 나주에 서 함께 지냈던 같은 처지의 유배인들, 윤지를 스승으로 삼고 학문을 배웠던 자들,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았던 서울의 소론 당인들을 끌어들였다. 특히 윤 지와 나주 사람들로 조직된 필묵계는 자금과 사람을 모으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되었다. 중앙에서의 정치적 대립이 격화되는 사이에 전통양반들끼리의 다툼도 있었지만, 신흥양반들이 등장하여 전통양반들과 다툼을 벌였다. 향 촌사회에서 지배층끼리의 다툼을 향전이라 한다. 향전은 주로 향청의 직임인 향임, 향교의 직임인 교임 자리를 놓고 펼쳐졌다.

2 풍부한물산과 경제

 

의 정기시장인 장시의 등장을 들 수 있다. 장시는 15세기 말에 물산이 풍부 하고 상부상조 전통이 강한 전라도 서남부에서 최초로 발생하였다. 이후 장 시는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8세기에 이르면 전국에 1,062개 있었고, 고을 당 3.4개나 되었다. 전라도에는 216개 있었고, 고을 당 4.1개였는데 전국에서 가장 높은 분포도를 보였다. 나주•순천은 13개 있었지 만 고산•고창•구례•만경•여산•용담•용안•화순은 1개 있었으니, 고을별로 편 자를 보였다. 장 이름은 장이 속한 면 이름이나 장이 서 있는 마을 이름을 따 127

전 1

4

이어, 경제 분야에 대해 알아보자. 우리 민족사에서 획기적인 일로 농촌

서 짓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장이 서는 날을 따다 붙이는 경우도 있었다. 장 이 들어서는 곳은 읍내, 포구, 군진, 역원 등이었다. 이들 지역은 인구가 많고 교통이 발달한곳이었으니, 장터는 지역 경제의 중심지였다. 그리하여 대원군 때 몇 개 면을 묶어서 사창가倉을 설치할 때 장터가 그 대상이 되었고, 일제강 점기 때 면소재지를 정할 때에도 장터가 그 대상이 되었다. 장날은 처음에는 15일마다 섰는데, 점자 5일마다 서는 5일장 체제로 자리를 잡으며 한 달에 6 회 서게 되었다. 장시에서는 특산품뿐만 아니라 외지 상품이나 외국 수입품 이 거래되었다. 특히 전라도에서 산출되는 곡류와 직물류•직물원료 및 수산 물과 구품이 널리 유통되었다. 이를 취급하는 상인들은 노상이든 가게이 든 간에 전廛을 경영하였고, 관아에서는 전을 상대로 세금을 부과하거나 대 출을 행하였다. 장세는 관아나 향교• 서원의 경비로 사용되었다. 장날이 돌아 오면 장터는 물건을 사고파는 상인•장인•농민, 그리고 친인척 • 지인을 만나러 나온 사람 등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들을 상대로 잠자리빱•술을 파는 사람, 몸을 파는 사람, 잡기를 일삼는 사람, 공연을 하는 사람들도 북적였다. 특히 손님을 끌어 모아 물건을 팔기 위해 장꾼들이 불렀던 품바는 남도 음악 의 한 갈래를 차지하였다.

목화는 고려 말에 들어온 이래 전라도에서 널리 재배되었다. 직물 가운데

촉감과 보온력이 가장 좋은 것은 면포였다. 전주, 나주, 강진, 해남 등지에서 생 산된 면포는 명품이어서, 이를 매입하기 위해 전국의 상인들이 전라도 포구에 모여들었다. 전라도 상인들이 타도로 물건을 사러 갈 때에도 돈 대신 면포를 가지고 갔다. 대마로 짜는 삼베도 전라도에서 많이 생산되었는데, 구례•동복•

128 곡성•보성 것이 명품이었다. 모시베(저포)는 충청도 것이 명품이었지만, 모시풀 은 정읍•고창•장성 등지에서 많이 생산하여 타지로 판매하였다. 직물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은 단연 비단이다. 비단은 통나무를 재배하여 누에를 키워서 실 전 을 뽑아 짠 것이다. 특히 나주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비단 생산지였다. 이렇게 각종 직물이 다량 생산되었기에, 그것에 물을 들이는 염색업 또한 전라도에서 발달하였는데, 특히 영산강 유역의 파란색을 내는 쪽 염색이 가장 유명하였다.

4 우리 종이는 주로 닥나무로 만들어왔다. 닥나무가 가장 많이 생산되는 곳은 전라도여서 도내에 닥나무로 생계를 이어가는 농가가 있었다. 전라도에 서 만들어지는 종이는 전국에서 품질이 제일 좋았고 가장 많았다. 그 기원은 통일신라 때의 화엄사 사경용 종이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때에 이르면 전 주에서 많이 생산한다고 하였고, 조선왕조 때에는 전주 외에 남원슨창에서 명품 종이를 생산하고 있었다. 민간• 사찰• 관청에서 생산된 종이는 공물로 배 정되어 서책이나 편지 및 외교선물로 이용되거나 시장에서 유통되었고, 부채 제작에 이용되었다. 부채도 전국에서 전라도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었고, 전 라도 것이 명품이었다. 그 가운데 전주의 접선과 남평의 승두선이 일품이었 다. 이 역시 공물이어서 단옷날에 맞춰 납품하느라 도민들이 과하였고, 도 내 수령이나 양반들은 지인에게 부채를 선물로 보냈다. 전라도의 명품 부채 는 양질의 대나무가 자생한 데에서도 기인하였다. 특히 담양은 전국적인 대 나무 산지여서 그것으로 만든 각종 생활용품은 전국으로 유통되었다.

자가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보급되는 때는 선종이 전래된 신라말기라 한다. 지리산 자락에서 재배되기 시작하여 순천보성깖진빼남으로 확산되 었다. 그 결과 정약용•초의선사 같은 자 연구자가 나왔고, 청태전차• 장죽전자 •백운옥판 같은 브랜드도 탄생하였다. 자의 보급은 다기의 발달을 가져와 강 진•부안의 청자, 도내 곳곳에서의 분청사가백자의 생산으로 이어졌다. 특히

고려말~조선초에 고흥, 보성, 장흥, 무안, 광주 등지에서 생산되었던 분청사기 는 전라도 사람들의 미적 감각을 잘 알려주고 있다. 전라도는 발효를 포함한 음식문화가 발달한 곳이기에 옹기 생산도 많았다.

선술•해양술 또한 뛰어나 전라도는 어업이 발달하였다. 그 증거로는 고려 시 기 여원 연합군의 일본 원정 때 동원되는 전함의 배정 숫자가 전라도에 가장 많았던 점부터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시대의 경우 균역법 실시 때 정부 에서 부과한 어•염 •선세의 액수와 해난사고로 표류하거나 익사한 어민의 숫 자가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일제 때의 경우 어업이 성한 '저명 어촌의 숫자와 어업 공동체를 위한 어업조합의 숫자 또한 전라남도가 129

전 1

4

서해•남해를 끼고 있는데다가 많은 포구와 넓은 갯벌을 지니고 있고 조

전국 도 가운데 가장 많았다. 전라도 어업의 특징은 낚시, 어살, 어장, 어조에 의해 조기, 청어, 승어, 고등어, 홍어를 잡았던 데에 있다. 특히 각종 그물을 널 리 사용하였고 조기와 홍어를 말리고 삭혀 가공한 후 남도 식탁의 식자재로 사용하였던 점은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이다. 또 하나의 특 징을 들라면 김과 꼬막의 양식에 성공하였던 점이다. 어업이 발달하였으니, 자연스럽게 경제 수탈을 노리는 일본 어민의 이주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는데 제주•여수 지역이 집중되었다.

3. 학문과사상

 

전라도 사람들의 학문과 사상에 대해 알아보겠다. 전라도 도학道學은 조 선 유학의 역사적 전개과정과 연동하면서 인륜적 가치의 실현과 삶의 정당성 을 실천적으로 구현하고 이론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전통 에도 불구하고 전라도의 도학은 근현대 이후 변방의 학술사상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전라도 도학의 연원은 11세기 중국 송나라에서 탄생하여 주자에 의 해 집대성된 신유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말~조선초 14~15세기 전라도

도학자들은 정몽주의 절의정신을 이어받아 새로 탄생한 조선왕조에 참여하 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그들은『주자가례』의 예법을 중시 여겨 원칙을 강조하 는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전라도 도학의 특징은 16세기 초기에 신비 복위 상 소로 발현되었다. 이는 순창군수 김정과 담양부사 박상이 강천사에서 결의 130 를 한 후 폐위된 중종 비 신비를 복위시켜야 한다고 상소를 올린 것으로, 결 과적으로 당사자들은 유배를 가게 되었지만 신진사림의 결집과 조광조의 등 장을 가져와 개혁정치에 시동이 걸리게 되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전라도 전 도학자들의 위상은 5년 뒤 훈구파에 의해 조광조 일파가 내몰리는 기묘사화 때 또 다시 증명되었다. 이때 화를 당한 전라도 도학자들은 재야에 머물며 유 능한 후학들을 양성하고 누정을 건립하여 사림정권 수립에 기여하였다. 그러 4 면서 김인후•이항은 태극음양에 대한 토론을 전개하였고, 기대승은 이황과 8년간에 걸쳐 사단칠정에 대한 토론을 행하여 전라도 도학의 학술사에서 기 넘비적인 위업을 남겼다.

17세기는 예학시대라고 할 만큼 많은 예학자가 배출되어 학파를 수립하 였고 예서禮書간행이 줄을 이었다. 예학의 성행은 성리학의 심화 발전에 따 른 자연적인 추세였고, 왜란과 호란 이후의 전후 복구의 문제와도 깊숙이 연 결되었다. 전라도 출신의 예학자로 윤선도를 꼽을 수 있는데, 대부분의 예학 자가 학문 자원에서 '예의 원리적 근거를 밝히는 데 주안을 두었다면, 윤선도 는 예를 정치와 연관시켜 '예에 의한 정치를 보다 철저히 추구했던 점이 두드 러진다.

18세기에 전개된 호락논쟁湖洛論爭은 한국 성리학을 한 단계 발전적으 로 심화시킨 철학적 논쟁으로 평가받고 있다. 호락논쟁이란 충청도를 중심으 로 하는 호서 지역 노론의 학풍인 호학湖學과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경기 지 역 노론의 학풍인 낙학洛學의 논쟁을 말한다. 호학은 보수적이고 강경한 입 장을 피력했다면, 낙학은 집권층으로서의 기득권을 유지하면서도 상대적으 로 새롭게 변화된 현실에 적응하려는 포용과 개방적 태도를 지닌다. 이들  미발과 본성에서 기의 작용여부, 기의 순선과 리에 대한 통찰, 심성일치와 이 기분합의 관점 등에 있어서 논쟁을 펼쳤다. 전라도에는 순창 출신의 양응수

를 비롯하여 전주 출신의 이기경 등 낙학 계열 문인들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호학의 입장을 대변한 학자로는 남원 출신의 이이근, 순창 출신의 정재흥 등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흥덕 출신의 황윤석은 호락논 쟁을 정리하고 평가하는 식견을 지닌 인물이었다.

19세기에 접어들어 학술논쟁이 생산적인 차원을 넘어 상호 비난과 분화 로 이어졌다. 그 결과 종장의 강학과 명망을 통해 학문적 영향력을 확대하여 지역적 기반을 토대로 한 학파가 형성되게 되었다. 전라도를 기반으로 한 학 131

파로는 전남 지역을 중심으로 학파의 외연을 경남 지역으로까지 확장한 기정

진의 '노사학파', 충청 지역을 중심으로 학파의 기초를 이룬 후 전북 지역으로 1

중심지를 옮겨 전국적인 문인집단을 형성한 전우의 '간재학파' 등을 손꼽을 수 있다. 리를 중심으로 한 성리설 체계를 구체화 한 기정진의 학문적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위정척사를 주창하기도 하였다. 594명에 이르는 적전 제자 를 두었고, 그들은 나중에 항일 의병 활동을 펼쳤다. 리 중심의 성리설을 비 판해 온 전우는 계화도에 정착하여 확인된 숫자가 1,522명에 이를 정도로 많 은 제자를 두었고, 그들 역시 위정척사를 주창하였다.

한편, 17세기 이후 정차 경제•사회의 전반적인 변동에 바탕을 두고 제기 된 새로운 사상조류로서 현실비판과 개혁의식으로 충만된 실학이 등장하였 다. 실학의 비조로 평가되는 유형원이 20여 년간 부안에서 살면서 그의 사상 을 완성시켰던 점, 정약용이 강진에서 18년간 유배 생활하면서 여러 분야에 걸쳐 500여 권의 저서를 집필하여 실학의 집대성자로 평가받고 있는 점 등에 비추어 볼 때 전라도는 실학사의 초기에서부터 집대성에 이르기까지 현장 내 지 산실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18세기 중엽부터는 전라도 출신의 실학 자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나경적, 신경준, 황윤석, 위백규, 이여박, 하백원 등이 그들이다. 19세기에 가서도 정약용의 영향을 받아 황상, 이강회, 이청 등의 '다산학단을 비롯해 많은 학자가 배출되었다. 19세기 중반의 전환 기에는 이정직, 이기, 황현 같은 이들이 나와 실학을 개화사상으로 발전시기 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선후기 실학사에서 특기할 만한 사안을 들라면 실학자를 가장 많이 4

배출한 지역이 전라도라는 점이고, 전라도 실학자들은 실용적인 학문에 지대 한 관심과 상당한 실적을 남겼다는 점이다. 논농사에 필수적인 수차, 그 가운 데 물을 아래에서 위로 품어 올리는 양수기 연구•개발에 뛰어든 학자가 적지 않았다. 천체관측과 항해술의 바탕이 되는 천문학• 조선술, 측량져계와 과학 132 의 기본이 되는 수학, 관넘세계를 현실세계를 연결시켜주는 지도학•역사지리 학 등의 일상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 학문에 깊이 있는 연구를 행하여 독자적 인 경지로 발전시켰다.

전 조선전기의 불교정책은 불교의 세속적 권력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에 따라 사찰에 딸린 토지와 노비 및 승려를 줄이고, 종파와 사찰 또한 축소시 키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11개 종파를 7개 종파로, 다시 선종과 교종 4 2개 종파로 통폐합하면서 36개 사찰이 각 지역을 관리하는 본산 체제로 개 편하였다. 전라도에는 선종에 구례 화엄사와 태인 흥룡사, 교종에 창평 서봉 사와 전주 경복사가 선정되었으나 1년 이내에 화엄사는 순천 송광사로 대체 되고, 서봉사와 경복사는 각각 다른 지역 사찰로 교체되었다. 조선후기의 불 교는 국가의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생존의 길을 모색해야 했는데, 도 총섭 제도를 통해 토목공사를 부담하였고, 사유재산• 상업활동을 확대하여 재원을 확충하였다. 그 결과 전라도 사찰이 16세기에 238개로 파악되었던 것이 후대에는 늘어나는 추세였다. 그 가운데 현재까지 전통 사찰로서의 가 람을 유지하고 있는 사찰로는 위봉사, 백양사, 송광사, 선암사, 화엄사, 대흥 사, 금산사, 선운사, 안국사, 보림사, 태안사, 도갑사, 백련사, 무위사, 만연사, 향림사, 흥국사 등을 들 수 있다.

조선후기 불교계는 이전까지 있었던 선종이나 교종의 종파적 구별은 없 었지만, 임진왜란 의승義僧의 상징이었던 서산대사 휴정의 문도를 자처한 청 허계와 병자호란 의승장이었던 각성의 문도를 자처한 부휴계를 중심으로 발 전을 이루어 나갔다. 청허계가 전국적으로 문도들이 번성했던 데 비해, 부휴 와 그 제자 각성은 순천 송광사를 거점으로 하여 전라도를 근거지로 활동하 였기 때문에 호남에서는 부휴계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반면에 전라도 청허계 는 해남 대흥사를 거점으로 하였는데, 대흥사 경내에 표충사가 건립되어 휴

을 보냈다. 강원에서 배출된 승려들은 유생들과 교류할 수 있는 지식과 능력 을 쌓았다. 이러한 강원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은 전라도에서 활동한 부 휴계의 백암 성총인데, 그가 간행한『화엄경소초』는 조선후기 화엄학 유행 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조선시대 전라도에서 간행 된 불서는 대략 478건으로 파악되는데, 17세기에 가장 많았고 불교 민중화 비중이 높았다. 특히 송광사의 불서 간행이 많았다는 점은 강학 활동이 다른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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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과 함께 제자 사명 유정, 의승장 뇌묵 처영이 향사되었다. 양란 때의 의승 활동을 한 승려를 중심으로 형성된 각 계파는 자신들의 교육을 위해 강원을 운영하였다. 승려들은 강원에 입학하여 그곳에 비치된 불서를 통해 사미과 에서부터 시작하여 대교과에 이르기까지 대략 10~12년에 걸치는 수학 기간

사찰을 압도할 정도로 활발하였다는 점과 맥을 같이 하는 사실이다 건물 유지와 의례 수행 및 일일 생활을 위해서는 적지 않은 재력이 소요 되지만, 조선정부의 정책에 의해 사찰의 경제기반은 약화되어 갔다. 각 사찰 은 경제기반을 회복하기 위해 자구책 마련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방 법으로는 왕실의 원당이 되는 길이 있었고, 자체 수입원을 두는 길도 있었다. 자체 수입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종이 공장인데, 닥나무를 재배하여 공장 에서 종이를 생산하여 상인이나 시장에 팔았지만 그 반대급부로 관청에서 공납용 종이를 배정하여 납품하기도 하였다. 특히 종이 생산지로 유명한 남 원은 관내 5개 사찰에서 종이를 납품하였는데, 2개 사찰이 너무 무거운 짐을 견디지 못하고 폐사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능주(현재 화순) 쌍봉사도 1 년에 1500권의 종이를 부담할 정도였다. 또 다른 사찰 수입원으로는 승려 개 인의 사유전답도 있었다. 신자들의 헌납이나 개인적인 매입에 의해 형성된 승 려 개인 전답이 사찰에 양도되었다. 대흥사의 경우 많은 토지를 보유하고 있 었는데,『대둔사답고』와『대둔사중답고』라는 문서에 토지 소유주와 면적, 토 지를 사고 판 내역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고, 무려 438마지기의 토지 내 역이 기록되어 있는 또 다른 문서도 있다. 영광 불갑사, 남원 실상사에도 보유 한 토지 내역을 기록한 양안이 소장되어 있다. 특히 대흥사는 대동청 또는 보 사정 등의 전담조직을 두어 체계적으로 재원을 마련하고 운용하였다. 보사청

외에도 각종 계를 운영하여 적극적으로 사찰 경제를 운영한 결과 19세기 초 에는 막대한 재정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나주 다보사에서는 재가의 거사 들이 중심이 된 불향계佛香붲를, 남원 천은사에서는 읍내 관리들에 의해 조직 된 불량계佛糧契를 통해 재원을 조달하였다.

134 사찰 건물의 안이나 밖 벽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 15세기에 그려진 무위 사 벽화는 조선초기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 고 행사 때 걸기 위한 그림[탱화]도 전라도의 여러 사찰에서 소장하고 있다. 전 그리고 불교 경전의 내용이나 그 교의를 알기 쉽게 상징적으로 표현한 그림인 변상도 또한 많이 남아 있는데, '화엄경변상도'가 많은 것이 전라도 특징 가운 데 하나이다. 이러한 그림들은 화승僧이라는 그림을 전문으로 그리는 승려 4 들에 의해 창작되었다. 그들은 특정 사찰을 중심으로 하여 독특한 불화양식 을 형성하였고, 사대부의 초상화도 그렸다. 그 가운데 17~18세기에 지리산 지역을 근거지로 하여 조계산문의 대표적 화승으로 꼽히는 의겸이 있다.

조선후기에는 도교와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한 비기秘記, 곧 정치적 예언 서가 널리 유행하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정감록』이었는데, 전국 여 러 곳에서 정감록 역모사건이 일어났다. 전라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17세 기 초반 호남의 전직 관리 윤운구 등이 진인眞人이 나타났으므로, 이제 새 왕 조가 일어설 것이라는 소문을 몰래 퍼뜨렸다가 적발되었다. 전라도에서 시 작된 '진인 출현설은 전국으로 확대되어갔다. 18~19세기 전라도에서도『정 감록』역모사건이 대기근이나 무신란 등과 연관되어 여러 번 일어났다. 정치 적 변혁을 정당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비기를 만들고 확산시켰고, 그것에 기 댄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었음에 분명해 보인다. 한편, 조선후기의 역사를 보 면 십승지에 대한 논의가 끝도 없었는데, 운봉 지리산이 그 가운데 하나였다. 조선후기의 비기에는 십승지 다음으로 각도에 산재하는 '길지占地'를 언급하 였다. 덕유산, 내장산, 추월산, 변산, 조계산, 월출산, 팔령산 등이 전라도 안에 있는 길지로 언급되었다. 십승지나 길지는 힘든 현실이 아닌 행복한 미래가 보장되는 이상향에 대한 꿈을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비기나 길지는 나중에 동학농민운동이나 의병 항쟁 때에 구현되었다.

6) 무렵 정극인과 그곳 사족들에 의해 창안된 태인(현재 정읍) 고현향약도 전국 적으로 일찍 설행된 향약이다. 이는 향음주례를 통해 지역민의 유대를 돈독 히 하면서 회의 활동을 규정하는 동약耡과 구성원의 명부인 동안渭案을 작 성하였다. 향약은 16세기 사림파의 성장과 함께 널리 보급되었다. 나주 금안 동계는 오랜 전통을 지니면서 관련 문서를 다량 보유한 동계이다. 특히 영암 지역은 영보동계, 구림동계, 장암동계 등 유서 깊은 동계가 설행된 지역으로 유명하다 한편, 면의 역할이 증대되어 가던 18세기에 면약面約이 등장하는데,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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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단위의 공동체 조직으로 대표적인 것은 향약과 계이다. 향약은 고 려 말 주자학의 전래와 함께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 전라도 지역에서 일찍 설행된 향약으로는 1418년(태종 18) 김문발에 의해 창안된 부용정 향약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이선제에 의해 광주향약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1475년(성종

현재 장흥 지역의 것이 잘 남아 있다. 그리고 산림의 보호를 위한 송계松꿪도 조선후기에 등장하는데 심지어 금당도 같은 도서 지역에까지 조직되어 있었 다. 또한 서당이 널리 보급되면서 서당 운영을 위한 학계學契나 서계書횆도 조 직되었는데, 진도 칠전리 사람들은 철비를 세워 그 내역을 기록해 두었다. 일 부 서당•학계 재원은 근대학교 설립 때 그곳 재원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전통시대의 자연재해로는 한해, 수해, 풍해, 냉해, 병충해 등 다섯 가지 가 대표적이다. 이 가운데 횟수가 가장 찾고 피해가 가장 큰 것은 가뭄이었 다. 여름철 홍수와 폭풍 피해도 적지 않았다. 이들로 인해 농사 작황이 안 좋 으면 식량이 고갈되는 기근이 든다. 조선시대 기근은 3년마다 발생하고, 전국 을 강타하는 대기근은 20년마다 발생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때 재력가들 은 재산을 내어 기아자 구제에 나섰고, 그러면 이웃들은 그 선행을 비석이나 읍지 등에 기록으로 남겼다. 하지만 곡식값이 뛰고 땅값이 폭락하는 상황을 이용하여 돈벌이 기회로 삼은 악덕 재력가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기아자들 은 내년 농사 종자까지 먹어치우거나 초근목피는 물론이고 인육을 먹는 경우 도 간혹 발생하여 듣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였다. 먹을 것을 찾아 집을 나서 구걸을 하거나 배를 타고 해외로 밀입국을 시도하기도 하였고 임진왜란 때에는 명나라 군영에 들어가 잡일로 생계를 이어가기도 하였다. 간혹 도둑

질을 일삼거나 무리를 모아 반란을 도모하는 이도 있었다. 이런 참상을 막기 위해 관아에서는 기아자들에게 봄 보릿고개 때 무료 급식소를 운영하여 죽 을 쑤어주거나 곡식을 주어 집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게 하는 진홀을 실시하 였고, 성곽을 쌓는 데에 급료를 주고 그들을 동원하는 공공근로 사업을 펼쳤 136 다. 나주목사는 관내 섬(현재 신안군) 사람들을 구휼하기 위해 전함에 곡물을 싣고 가서 직접 나눠주었다. 그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세금을 감면하거나 훈련을 중단하고 유배인을 타지로 옮기는 조치도 취했다. 강진 병영에 유배 전 중인 하멜이 좌수영(현재 여수)으로 이배되어 고향으로 탈출할 수 있었던 계기 도 기근이었다. 기아자 스스로 장터에 나가 장사를 하거나 황무지를 개간하 여 자활을 도모하는 이도 있었다.

4 자연재해에 세금 폭탄이 겹쳐 부담이 가중되자 농민들은 항쟁에 나섰 다. 1862년에 전국 도처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다(임술농민항쟁). 전라도에서 는 3월 27일 익산을 필두로 하여 4월과 5월에 걸쳐 집중적으로 발생하였다. 중앙에서 파견된 안핵사에 의해 폐정이 수합되어 중앙에 보고되어 삼정이정 청이 설치되는 결과를 보았지만 개혁은 지지부진하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전 라도 전체 53개 고을 가운데 38개 고을에서 민란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참고 로 경상도에서는 18개 고을에서, 충청도에서는 12개 고을에서 농민항쟁이 발생하였다. 전라도에서 가장 많은 봉기 사례가 나타난 셈이다. 이는 전라도 지역에서 첨예한 계층간 대립과 국가의 수탈이 보다 격심하게 전개되었음  보여준다.

4. 문학과 예술

 

이어, 문학과 출판문화 및 예술에 대해 알아보겠다. 조선왕조실록은 편 찬된 후 춘추관 이외에 지방에 설치된 사고에 보관되었다 조선전기에는 충주 •전주•성주에, 후기에는 정족산•태백산•오대산•적상산에 사고가 있었다. 전 주에 처음 실록이 보관된 곳은 승의사儋義寺였다. 승의사는 전주부성의 동북

쪽 성벽 안쪽에 위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한국전통문화전당이 있 는 곳이다. 전주사고 실록각의 건립은 1473년(성종 4)에 이르러서야 2층 누각 형태로 이루어졌다. 1591년 작성된『전주사고포쇄형지안』을 보면, 태조부터 명종까지 13대 실록이 총 806권 577책으로 47궤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 외 에『대명력』•『칠정산』등의 역서,『고려사』•『삼국사절요』등의 역사서,『공안』 같은 국가 회계장부 등이 13개의 궤에 보관되어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 여 서울이 점령당하고 임금이 파천하면서 춘추관•충주•성주 사고는 실록과 함께 소실되고 말았다. 왜군의 전라도 진입이 예상되자, 이듬해 1592년 6월 에 전라도 관리들은 유일하게 남은 '전주 실록을 정읍 내장산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그 일의 책임을 고창 선비 오희길, 태인 선비 손홍록•안의에게 맡기었 다. 이들은 위 책과 어진을 50여 바리에 실어 은적암•용굴암•비래봉 등 세 곳 에 안전하게 옮기고 승려•사냥꾼퍅초꾼 백여 명을 뽑아 수호에 나섰다. 그러 다가 1593년 7월에 보다 안전한 곳을 찾아 육로와 해로를 거쳐 평안도 안주 객사에 봉안되었다. 그 사이에 전주를 점령한 왜군에 의해 전주사고는 1598 년에 소실되고 말았다. 해주, 강화, 묘향산, 영변 등지를 돌던 '전주 실록은 1606년 새로 인쇄되어 원본 1부, 교정본 1부, 신인쇄본 3부 등 5부를 춘추관, 강화도,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에 나눠 보관되었다. 정부는 보다 안전한 실록 보관처를 강구하던 중 무주 적상산에 산성을 수리하고서 1614년(광해군 6)에 실록각을 건립하였다 실록각 건립에 승려 50명과 인근 7읍에서 동원된 인력 이 투입되었다. 묘향산사고본 실록이 적상산 사고로 옮기어졌다. 사고를 지기 는 사찰과 승려 및 주민이 정해졌고, 행정적 책임은 무주에 주어져 그 책임을 강화하기 위해 무주의 읍호를 현에서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조선시대 서적의 간행은 관청, 사찰, 서원, 개인, 서점 등을 통해 이루어 졌다. 지방에서는 감영이 주축이 되어 서적을 간행하여 지역은 물론 중앙에 서 필요한 서적의 보급창구가 되었다. 전라감영의 소재지인 전주가 경상감영 과 함께 출판활동이 가장 활발한 곳이었다. 전라감영이 서적을 간행하는 방 식은 크게 왕명에 의해서 간행하는 방식과 관찰사의 주관에 따라 간행하는 방식으로 구분한다. 감영에서 직접 행하지 않고 관찰사가 관할 군현에 간행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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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하달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주에서 간행한 서적을 '전라감영본이라 하는 데 그 목록을 보면 최소 200여 종에 이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 가운데 전기에는『예기』霑효경』등의 유학 서적 외에, 법률세『결송유취』), 농세『농사직 설』), 의세『향약집성방』)를 주로 간행하였다. 후기에는 노론계 인사의 문집, 농 138 서 • 의서 • 법률서가 주로 간행되었다. 특기할 점은『무경칠서』•『병학지남』등의 병법서의 간행이 활발히 진행되었다는 점,『주자대전』轡동의보감』•『자치통 감』같은 거질의 서적이 간행되었던 점이다. 모두 우리들 귀에 익은 책들이다. 전 출판 후 책판은 전라감영 내 책판고, 인근의 사찰과 서원, 전주 향교 등에 보 관되었는데, 2016년 현재 전주 향교에 11종 5,059개의 책판이 남아 있음이 확인되었다.

4 조선후기에는 민간에서 영리를 목적으로 서적을 출판하는 일도 성행하 였는데, 그런 책을 '방각본이라 한다. 그 가운데 전주에서 발간된 책을 '완판 방각본이라 한다. 최초의 '완판 방각본은 18세기 초에 발간된『동몽선습』이 다. 이후 150여 종이 출판되었는데 고전소쎍『구운몽』,『심청전』), 자녀교육용 도서(r천자문』,『명심보감초』), 생활백과용 도서(r전운옥편』,『방약합편』), 유교 경 전 등이 상업용으로 발행되어 전국적으로 판매되었다. 유통은 읍성 동•서•남 •북과 전주 근교에 위치한 서계서포, 다가서포 등의 서점에서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태인에서도 무성서원을 중심으로 14종이 발간되었다. 이 외에 나주, 남원에서도 방각본이 출판되었다. 전라도 지역에서 방각본이 성행한 이유는 양질의 한지가 생산되고 서당의 설립으로 서적 수요가 많았던 데에 있을 것 이다. 특히 판소리가 발달하여 그 대본에 대한 수요도 적지 않아 출판문화를 선도하였을 것 같다.

백제 가요와 고려 선시 등이 전하지만, 조선 이전 전라도 문학의 작품 유 산은 실로 영성하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한국 문학사에서 전라도 문학이 보 여주는 모습은 전 시대의 그것과는 크게 다르다. 많은 작가와 작품이 등장하 며, 여러 갈래에 걸쳐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였기 때문이다. 먼저 시가문학의 경우, 성종 때 정극인의「상춘곡」에서 비롯된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출발은 이후 송순의「면앙정가」와 남언기의「고반원가」및 정철의「성산별곡」을 거치

며 누정을 무대로 한 은일가사의 전통을 확고하게 수립하였다. 또 같은 시기 특히 송순과 정철에 의해 본격적으로 창작되기 시작한 시조 역시 산수 자연 의 삶을 구가하는 한편, 정치적 현실을 우의하며 활발히 전개되었다.

배경으로 창작된 첫 작품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후 임제의「수성지」와 전란 으로 인한 이산가족의 애환을 소재로 한 조위한의「최척전」이 방외적 기질 의 삶을 형상화하였다. 이러한 한문소설과는 달리 후기에는「춘향전」,「흥부 전」,「심청전」과 같은 판소리계 한글소설이 서민적 삶의 애환을 바탕으로 전 라도에서 형성되었다. 최초의 한글소설로 평가받고 있는「홍길동전」이 전라 도에 있었던 사실을 토대로 하였다는 사실도 전라도 문학사를 거론할 때 빼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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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문학은 김시습의『금오신화』가운데「만복사저포기」가 전라도를

놓을 수 없는 점이다.

전라도 한시를 선도하였던 인물은 16세기 초기에 주로 활약한 박상일 것이다. 이후 양팽손, 임억령, 김인후, 고경명, 정철 등의 문호들의 출현으로 한 시 창작은 전국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특히 16세기 무등산권에서 발달한 원 림 문학은 사림의 시대를 선도하였던 문학운동이었다. 실학파 문인들의 사회 고발적 한시, 제주도의 풍토를 기록한 한시, 한말 우국충정을 표현한 한시도 있다. 장흥 선비가 대기근을 소재로 하여 지은「임계탄」이라는 시, 자연재해 를 소재로 한 여러 문인들의 시는 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에서 현실을 고 민한 결과였다고 여겨진다.

17세기를 전후하여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두 차례의 커다란 전란 이 조선 사회를 휩쓸고 지나갔다. 이러한 미증유의 전란을 맞아 그것을 극복 하려는 관군과 의병의 활동이 특히 전라도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들이 민족 수난의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의리를 실천하며 싸운 사실을 기록한 것 이 바로 실기문학인데, 정경달의『반곡난중일기』, 안방준의『호남의록』•『삼 원기사』가 그것이다. 그리고 왜군에 붙잡혀 일본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후 남 긴 노인의『금계일기』, 강항의『간양록』, 정경득 일가의『만사록』•『해상록』• 『정유피란기』등의 포로 실기도 다수 저술되었다. 최부의『표해록』등 표류 문학도 전라도 문학을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분야이다. 전라도 사람들의

 

해양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고, 표류인이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는 연구성과 를 두고 하는 말이다.

전라도는 지리적으로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남쪽에 위치하면서, 해안과 도서가 많은 지역이다. 따라서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들을 격리시키는 유배 지로도 많이 활용되었다. 멀리는 제주도를 비롯하여 추자도, 진도, 완도, 신안 등에 내몰린 유배객이 많았다. 고려 말에 회진현(현재 나주 다시면)에 유배 온 정 도전은 신왕조 건국의 꿈을 꾸었고, 강진에 유배 온 정약용은 실학을 집대성 전 하였다. 최익현은 강화도 조약을 반대하다 혹산도로 유배간 바 있다. 그들은 고통스러운 유배를 당하여 자신이 체험한 내용을 각종 기록을 통해 남기기도 하였는데, 그것이 곧 유배문학이다. 기록의 형태는 시조, 가사, 한시, 일기 등 4 으로 남아 있다. 당시 유배의 실상과 유배객의 심사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소 중한 자료들이다. 김약행의「적소일기」, 김령의「간정일록」, 이세보의「신도일 록」등은 진도, 임자도, 신지도의 지역 사정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과거 남성에 비해 여성들의 문학 활동은 미미하였다. 하지만 작품이 남 아있는 일부 여성들의 활동은 특기할 만하다. 멀리는 15세기 후반에 활동하 였던 순창설씨를 비롯하여 송덕봉, 이매창, 김삼의당, 광주이씨 등이 작품을 남긴 전라도의 여성 작가들이다. 특히 유희춘의 배우자인 송덕봉의 작품을 보면, 유교적 부덕의 실현이나 아들싸위즈카 등 가족애가 표상화 되었고, 남편과 주고받은 수창시가 많을뿐더러, 잠재된 욕망이 표출된 특징이 있다. 이매창의 작품도 신분을 뛰어넘는 인간미를 풍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라도 예술을 말할 때 단연 제일 먼저인 것이 판소리이다. 판소리는 소 리꾼이 고수의 북장단에 맞추어 긴 이야기를 말과 노래로 풀어나가는 공연 예술이다. 판소리를 전라도 출신 광대들이 17세기부터 불렀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확인된 사실이다. 18세기 중반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유가遊街를 할 때 명창을 거느린 이가 있었으니 당시 판소리가 널리 보급되었음에 분명하다. 19세기에 들어서면 명창이 확인되는데 전라도 출신의 권삼득, 모흥갑, 송흥 록을 오늘날 최고로 친다. 특히 소리꾼이 아닌 향리 출신인 신재효는 진채선 같은 여성을 포함한 많은 명창을 길러냈고 판소리 이론을 정립하거나 사설을

기에 들어서면 전라도 지역에 '협률사'란 공연단체가 조직되어 도내 여러 지 역을 순회하면서 포장을 치고 공연하는 일이 발생하여 해방 이후까지 이어졌

다. 배역을 정해놓고 공연을 하는 창극이 최초로 전라도 소리꾼들에 의해서 141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예기조합인 권번이 설치되어 그곳에서

판소리를 가르치기 시작함으로써 다수의 여성 창자가 배출되었다. 1

전라도에서는 판소리 외에 각급 관아에서 의식음악으로 연주하였던 삼 4

정리하는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이 시기에 판소리가 궁중에 침투하는가 하 면 양반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고, 서편제 판소리의 성립으로 상징되는 서민 지향적 감성의 판소리가 등장하게 되었다. 전주대사습이 생겨나서 판소리 창 자들의 등용문의 역할을 하였다는 점도 이 시기 특징으로 들 수 있다. 20세

현육각이 있었다. 양반들에게는 풍류음악으로 거문고를 대표 악기로 삼아 연주하는 정악正樂과 시를 지어 노래하는 정가正歌가 유행하였다. 평민들이 생활음악으로 즐겨하였던 것은 민요와 농악이다. 특히 그믐이나 정월 대보름 때 마을 가가호호를 돌면서 연주하는 '걸궁'도 성하였다. 사당패 같은 직업 음 악인들이 시장이나 부잣집을 돌아다니며 행하였던 공연예술 음악이 발달하 였던 것도 전라도 음악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전통에서 동학농 민운동 때 민중들이 미래의 비관이나 희망을 노래한 '녹두새요, '가보세' 등의 참요讖謠가 전승되었다. 참요의 전통성 또는 노래를 애호한 지역성은 여순 사 건 때 '여수 부르스 등 각종 노래를 지어 부른 것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전라도 출신의 화가로는 16세기에 묵죽을 잘 그린 양팽손, 호랑이 그림 으로 유명한 고운 등이 있다. 17~18세기에 이르면 윤두서를 들 수 있는데, 그 는 서민들의 일상을 그린 풍속화를 가장 먼저 그린 인물로 이후 조선후기 풍 속화의 흐름을 이끌었다. 자신의 모습을 세밀하게 그린「자화상」을 남겨 '회 화의 새 시대를 활짝 연' 화가로도 평해진다. 그의 화풍은 아들 윤덕희, 손자 윤용에게로 이어졌다. 19세기에는 허련이 진도에 운림산방을 열어 남종문인 화의 맥을 이어나갔다. 그의 화풍은 후손들에 의해 목포의 허건, 광주의 허백 련으로 이어지며 남도 화백을 형성하였다. 이 외에 이 시기 나비를 잘 그린 송 수면, 포도를 잘 그린 최석환 등도 전라도 예술을 빛낸 인물로 꼽을 수 있다.

전라도에 전해오는 전설을 보면 지역 수호신 전설,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산악 전설, 강호 전설, 벽골제•경양제에 관한 제언 전설, 도서와 해양 전설 등의 지명 전설이 있다. 그리고 견훤•김덕령에 관한 위인 전설, 의녀•효녀•열 녀 전설, 홍길동썬우치 같은 이인뼤결 전설 등의 인물 전설이 있고, 불교에 관한 전설도 적지 않게 전해 온다. 전라도는 전국 최대의 농업지대여서 당산 제로 통칭되는 마을신앙이 발달하였다. 마을신앙은 민속음악이나 민속놀이 의 자연적 온상 역할도 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전라도의 세시풍속 가 전 운데 독특한 점을 들라면 추석 때 큰 송편을 만들어 먹었다는 점과 정월 보 름날 강강술래를 행하였던 점을 들 수 있다.

전라도는 물산이 풍부하여 그것을 원자재로 한 음식문화가 발달하였다. 4 전주의 생강 김치와 백산자, 담양의 죽순 요리, 순창의 고추장 등이 유명하다. 이는 오늘날 남도 한정식, 전주 비빔밥으로 이어지고 있다. 전라도의 주택은 일자형으로 짓는 것과 부유층의 별서 형태로 누정과 원림이 많은 것이 특징 이다. 특히 전라도 누정에는 온돌을 갖춘 방이 조성되어 있어 연중 생활을 할 수 있는 조건을 지니었고, 자연미를 최대화하여 16세기에 조성된 소쇄원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역문화의 산실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전라도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섬을 보유하고 있는 지역이다. 그런 섬에 는 오래 전부터 국제 무역기지가 있었고, 섬을 관리하는 고을도 있었다. 그런 데 고려말 왜구 침입과 조선초 지방제도 개편에 따른 공도정책으로 많은 섬 이 황폐화되고 고을도 혁파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들어 가 다시 살기 시작하였고, 18세기에 이르면 섬에 사람이 늘어나고 농토가 많 아졌다. 그런 섬에 수군진•목장이 설치되어 어염선세가 부과되고 죄인의 유 배지가 설정되었다. 그리고 늦게나마 갑오개혁 때 완도군• 지도군 등의 도군島郡이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전라도 지역은 배가 자유롭게 드나들고 풍랑을 막아줄 수 있는 포구가 많았다. 그런 포구에는 상선이나 어선 또는 세곡선이 드나들어 옛날부터 해 상 교역업이나 운송업이 그 어느 지역보다 발달하였다. 해상왕국을 건설한 청해진 포구, 왕인 박사가 학문을 전해주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던 상대포, 해

상교역의 중심지였던 벌교•영산포•줄포•사진포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남당 포•어란•관두량 등지는 제주도를 왕래하는 중심 포구였고, 조장이 들어섰던 법성포•군산포금두포 등은 국가물류의 중심지였다. 독도를 '독도라고 명명 한 것도 전라도 뱃사람들에 의해 전라도 말이 전해진 결과라고 한다.

전라도는 전국에서 소금 생산이 가장 많은 곳이다. 전통시대에는 솥에 바닷물을 넣고 끓여 만든 소금(이를 자염煮鹽이라 한다)을 생산하다가, 19세기 말기에는 바닷물을 증발시켜 만든 소금(이를 천일염天日鹽이라 한다)을 생산하기 143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다. 전라도 사람들은 이러한 소금을 이용하여 발효시

킨 식품인 젓갈을 생산하였고, 굴비처럼 염장鹽藏한 것을 건조하여 만든 식품 1

도 개발하였다. 그것을 식탁에 올리거나 김치 등을 만들 때 사용하여 독특한 전라도 음식을 만들어 먹었던 것이다. 4

김덕진 

제5장 근대

 

4

1. 조선후기 내우외환의 시련과 대응

 

가. 기상재해의 발생과 참정의 문란 조선후기에는 기상재해의 발생과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더욱 피폐하여졌다. 특히 1876(고종 13)~1877년(고종 14)에는 한재와 수해가 이어져 이른바 '병정대기근丙獄飢饉을 초래하였다. 그 피해는 전국에서도 전 라도가 가장 컸으니, 도내道內의 56개 읍 중 재해등급이 낮은 초실읍稍實현亡 1876년 6개, 1877년 18개에 불과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구홀금을 지급하고 어사를 파견하였으며, 지방에서는 기 우제를 지내는 한편 성금을 모으고 비축한 곡식을 푸는 등 수습에 나섰으나 근본적 처방은 되지 못하였다. 농지는 황폐화되어 황무지가 속출하였으며, 전 라도의 경우 1886년과 1888년에도 흉작이 들어 농민들은 각지로 유랑하였다.

이같은 기상재해와 함께 백성들을 괴롭힌 것은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 ,爨穀등 삼정의 문란이었다. 지방군현에서는 세금의 유예나 면제를 감영에 요

'민요民擾'가 이어졌다.

이같은 기상재해와 가렴주구는 농민들을 사지로 몰아넣었고, 곡창지대인 전라도의 사정은 더욱 심각하였다. 여기에 개항 직후인 1876년(고종 13)~1877 145

년(고종 14)에는 쌀값이 폭등하고 땅값은 하락하였다. 정부에서는 방곡령을 실

시하는 등 대책에 부심하였으나 대부분 고식지계姑息之計에 그치고 말았다. 1

4

청하였지만 수령과 향리들은 여전히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참다 못한 전라• 경상•충청의 농민들이 1862년(철종 13) 봉기하였다. 1868년(고종 5)에는 강진 병영에서 병란兵亂이 계획되었으나 악천후로 무산되었다. 이듬해인 1869년(고 종 6) 광양에서도 농민들이 봉기하였고, 나주에서는 1880년대에 크고 작은

나. 외세의 위협과 위정척사론의 대두 이 시기에는 외세의 침탈도 이어졌으니,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 신미양요辛米洋擾는 조선의 위기감과 서구에 대한 적개심을 고조시켰 다. 여기에 일본에서는 1870년대부터 정한론征韓論이 대두하였고, 정부는 쇄 국정 책으로 강경하게 맞섰다.

장성의 노사 기정진은 상소를 올려 위정척사衛正斥邪와 함께 내수외양內修外攘을 주장하였고 고창의 정하원도 이를 계승하였으며, 화서 이항로와 김 평묵의 전라도 제자들도 이에 호응하였다. 이들 노사학파蘆沙學派와 화서학파 華西學i辰외에 전우의 문인들인 간재학파艮齋學派도 전라도 위정척사론 확산에 일조하였다. 일제의 강점 이후 이들은 자결하거나 은둔하여 후진을 양성하기 도 하였고, 민족운동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는 등 전라도 위정척사운동의 전 통을 이어갔다.

다. 이양선의 출몰과 거문도사건 조선후기에는 '이양선巽樣船이라 불리는 서양함선이 자주 출몰하여 조 선의 해안을 측량하였다. 1787년(정조 11)에는 프랑스 함선이 제주도와 울릉 도를, 1797년(정조 21)에는 영국 함선이 부산항을, 1816년(순조 16)과 1832년 (순조 32)에도 영국 함선이 서해안을 탐사하였다.

서구 열강은 특히 거문도에 주목하였다. 거문도는 남해안과 제주도 사이 에 위치하고 대부분 주민이 어업과 농업으로 생계를 잇는 평범한 섬이었으나, 그 지정학적 위지 때문에 제국주의 열강은 일찍부터 이 섬에 주목하였다. 영 국, 러시아, 미국 등은 1840~1870년대 수시로 거문도를 탐사하였다. 하지만 조선정부는 이 섬에 관심이 없어서 관리도 파견하지 않았으며 정확한 위치조 자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구열강 중 특히 영국이 거문도에 큰 관심을 보였다. 1845년(헌종 10, 전 1855년(철종6), 1859년(철종 10), 1863년(철종 14), 1875년(고종 12) 연속으로 거 문도를 탐사한 것이다. 영국이 거문도에 주목한 이유는 러시아의 남하를 막 기 위한 군항里港이 필요해서였다.

4 그러던 중 1885년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자 영국은 전격적으 로 거문도를 점령하여 조선을 둘러싼 열강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러시 아와 조선 정부의 항의, 청국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버티던 영국은 1887년에 야 거문도에서 철수하였다.

이 사건은 영국과 러시아의 영토 확장 경쟁의 결과였으며 그 수습 과정 에서 중국의 영향이 커지면서 조선에 대한 간섭도 강화되었다. 그리고 조선중 립화론朝鮮中立化論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 사건을 통해 조선은 국제법에 따 른 세력균형과 제국주의의 침략적 속성을 약간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라. 동학의 창시와 동학농민전쟁의 확대 이같은 내우외환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 전 라도 일대로 확대되었다 창시자인 최제우가 1864년(고종 원년) 처형되자 흩어 졌던 동학교도들은 최시형을 중심으로 1892년(고종 29)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에 나서는 등 점자 교세를 확장하였다.

그러던 중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을 견디지 못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1894년(고종 31) 전봉준의 주도 아래 봉기함으로써 시작된 동학농민전쟁은 태인의 김개남과 무장의 손화중 등이 주도한 백산봉기를白山蜂起를 기점으로 이내 전라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농민군은 고부의 황토현에서 관군을 격파 하였고, 그 여세를 몰아 정읍, 흥덕, 고창, 무장에 이어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지도부는 나주를 제외한 전라도 53개 군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폐정 개 혁에 착수하였다. 개혁의 요강은 다음과 같은 12개 항목이었다고 하나 후대 의 위작이라는 주장도 있다. 147

1. 동학교도와 정부는숙혐宿嫌을씻어내고서정政에 협력할것.

2.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조사하여 엄벌할 것. 1

3. 횡포한부호들을 엄벌할 것.

4. 불량한 유림과 부호들을 엄벌할 것.

5. 노비문서를 불태워 버릴 것.

6. 질반천인七般賤人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 머리에 쓰는 평양립 어비릴 것.

7. 청춘과부는 개가를 허용할 것.

8. 무명잡세는 일체 거두지 말 것.

9. 관리의 채용은 지별地閥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10. 일본과 내통하는 자는 엄벌할 것.

11. 공사채公私債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은 모두 무효로 할 것.

12.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分作케 할 것. 4

이때까지의 농민전쟁은 반봉건反封建의 성격이었다. 하지만 농민봉기는 청국 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출병하는 빌미를 제공하여 청일전쟁을 촉발시켰다. 정부측과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고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철수하였으나

 

笠을 벗

 

그러나 이같은 농민군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고 집강소의 활동도 이내 벽에 부딪혔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 하자 농민군이 다시 봉기하게 된 것이다. 이제 농민전쟁은 반외세反外勢의 성격 을 띠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이겨내지 못한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하였고,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처럼 동학농민전쟁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들이 내세웠던 주장은 이후 각종 개혁안에 반영되었으며, 손병희가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교세를 신 장시기면서 그 명맥을 이어갔다. 그리고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였던 동학농민

 

전쟁의 경험과 정신은 전라도의 천도교가 1919년 3 다운동을 주도함으로써 계승되었다.

148 2. 한말 일제의 국권 침탈과 전라도인의 저항

 

전 가. 계몽운동의 전개와 국채보상운동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진출로 시대의 흐름에 맞는 자강개혁自强改革의 필 요성을 느끼게 된 인사들은 계몽운동에 나섰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896년 4 부터 서재필이 주도한 독립협회운동이다. 전라도는 독립협회운동과 직접적 인 관련이 없으나 서재필과는 간접적인 연관이 있다. 독립협회를 설립한 서재 필의 집안은 충남 논산 출신이나 그는 1864년 외가가 있는 보성에서 태어났 기 때문이다. 현재 보성에는 그의 생가와 서재필기넘관이 자리잡고 있다.

전남의 근대식 교육기관으로는 1890~1900년대 광주, 순천, 영광, 무안, 장성, 담양, 진도, 나주 등지에 보통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11년 3월 현재 전 남의 사립보통학교는 15개, 일반학교는 27개, 종교학교는 9개였다. 전북에서 는 천주교에서 공소학교를 다수 설립하였다. 그리고 전주, 군산, 목포, 광주, 순천 등 미국남장로회의 선교거점(station)이 세워진 지역에는 예외없이 근대 식 남•녀 학교가 문을 열었다. 또 1900년대 전북에는 10개, 전남에는 14개 이상의 야학이 운영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전라도의 계몽운동단체로는 호남학회와 대한협회 전라도 지회가 있다. 서울의 전라도 출신 인사들이 1907년 결성한 호남학회는『호남학보』간행, 법학강습소 설치, 측량학교 설립 등의 활동을 벌였으며, 전주지회를 설치하 였다. 전남지회 설립도 계획하였으나 실제 설립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 밖에 1906년 창립된 대한협회의 전라도 지회는 전북의 전주 등 12개 지역과 전남의 광주 등 9개 지역에 설치되었다.

한편 1907~1908년 전국적으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은 참여 규모만 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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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전라도 국채보상의무소 기사(『대한매일신보』1907.3. 19.)

본다면 한말 최대의 계몽운동이자 민족운동이었다. 전라도에서는 비교적 일찍 1

국채보상운동단체가 조직되었다. 그 최초는 1907년 2월 전북 정읍에서 조직된 4

단연회斷煙會로 짐작된다. 이어 3월 전라도 인사들은 전주와 광주에 대동광문 회大同廣文會지회를 조직하고 국채보상의무소國價報儻義務所또는 상채의무회  債義務會'라 불린 단체를 설치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추진하려고 계획하였다.

참여 규모를 보면 전북에서는 전체 28개 군郡중 18개 군에서 19개의 단체가, 전남에서는 전체 32개 군郡중 16개 군에서 22개의 단체가 확인된 다. 하지만 이들 외에도 더 많은 지역과 단체들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모 금 실적을 보면 전북에서는 13,787명이 참여하여 9,293원을, 전남에서는 20,117명이 참여하여 124,753원을 의연한 것으로 집계된다. 이는 신문기사 등에 근거한 것이어서 실제 실적과는 차이가 날 수 있다.

전라도는 서울 및 경기도층청도껾상도에 비하여 농업의 비중이 높은 대신 상공업이 발전되지 못하였으며 그만큼 주민들의 경제적 수준도 열악하 였다. 또 어느 지역보다 동학농민전쟁과 항일의병투쟁이 활발히 펼쳐졌기에 일제의 탄압과 주민의 불안도 우려할 만한 상태였다. 이같은 난관에도 불구 하고 이 정도의 실적을 보였다는 점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전라도 국채보상운동도 다른 지역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며 전개되었다. 국채보상단체를 조직한 주도인물들은 전•현직 관리나 유생층이 다수였고,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에 구에 없이 각계각층이 참여하였으며, 가족, 문중門中, 직업, 학교, 향교, 직장, 계니 종교 단위의 모금활동이 확인된다. 물론 개인 자

원의 의연도 적지 않았다. 특히 제주, 완도, 지도 등 도서지방에서 적극적으로 동참한 점은 특징으로 꼽을 만하다.

나. 의병투쟁의 발전과 역사적 의의

150 일제의 침략에 맞서 목숨을 건 의병들의 무장투쟁은 가장 적극적인 형 태의 민족운동이다. 특히 전라도에서 의병투쟁이 활발하였는데, 이에 대해 박 은식은 “대체로 각 도道의 의병을 말한다면 전라도가 가장 많았는데, 아직까 전 지 그 상세한 사실을 얻을 수 없으니 후일을 기다려야 한다”고 평가하였다. 의 병투쟁의 시기는 '근왕勤王을 지향한 전기의병(1894~1897), '보국輔國을 지향한 중기의병(1905~1907), '안민安民을 지향한 후기의병(1907~1909)으로 구분된다.

4 시기별로 대표적인 사례들을 들어보면 전기의병에서는 나주의병, 중기 의병에서는 태인의병과 화순의 쌍산의소雙山義所, 후기의병에서는 호남창의 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와 김동신, 심남일, 안규홍 등의 의병부대 등이다. 다른 지역의 의병들이 진압된 후에도 전라도 의병은 최후까지 항전하였으나 1909 년 일제의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南韓暴徒大討伐作戰'으로 말미암아 그 뜻 을 이루지 못하였다.

하지만 1910년대에도 전라도에서는 태인의 독립의군부擉立義重府와 임자 밀맹단壬子密盟團등의 의병투쟁이 지속되었다. 이 시기의 의병을 독립군으로 의 전환을 목표로 한 전환기의병(1909~1915)이라 부른다. 이처럼 전라도 의병

울?하9은휳寧구 ?

그림 2. '남한폭도대토벌작전으로 체포된 호남의병(f남한폭도대토벌기념사진접」)

은 1890년대부터 1910년대까지 일제의 침략에 맞서 줄기차게 투쟁하여 의 향義鄕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였다.

전라도 의병의 역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의병항쟁의 주도인물 들 대부분이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들의 후손이란 점에서 그 정신적 근원을

확인할 수 있다. 둘째, 후기의병의 치열한 항전은 일제의 식민정책을 지연시기 는 데 기여하였다. 셋째, 국내 항일운동기지 건설의 기초를 닦는 데 공헌하였 다. 넷째, 의병 지도부가 명문 유생층에서 점자 가난한 농촌 지식인이나 빈농 151

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다섯째, 반침략 민족운동의 성격을 뚜렷

이 드러내고 있다. 1

4

3. 일제의 식민지배와수탈체제의 강화

 

가. 식민통치를 위한 지방행정제도의 변화 한국을 강점한 일제는 우선 지방행정제도 개편에 착수하였다. 이미 1895년에 8도제道制가 폐지되고 23부제府制가 실시됨에 따라 전라도에는 전 주부, 남원부, 나주부, 제주부 등이 설치되었고 54개 군郡이 여기에 편제되었

다. 그리고 불과 1년 후인 1896년 다시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시행되 었으며, 전북 전주와 전남 광주에 관찰부觀察府가 설치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통감부는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는 개항장인 군 산과 목포에 이사청理事廳을 설치하였다. 군산본청은 산하에 공주지청을 두 고 전북 일원 및 충남 남부일대를, 목포본청은 산하에 광주지청을 두고 전남 일원을 관장하였다.

개항장에 설치되었던 감리서와 제주목사청은 폐지되고 감리의 사무는 부윤, 제주목사의 업무는 전라남도 관찰사가 담당하였다. 13도 관찰부 소재 지에는 새로운 기관들이 들어서고 각 도마다 경무서가 설치되었다. 광주에는 지방법원이 설치되었고 전주에는 재무감독국이 설치되었다. 이사청 소재지

 

와 남원, 나주, 제주 등지에는 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1910년 한국을 병탄한 일제는「조선총독부관제」를 공포하고 지방제도 를 개편하였다. 이에 따라 13도제는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각 도에는 도장관 道長官, 관방장관官房長官및 내무• 재무의 2부部를 두었고, 그 하부인 부府와 군郡에는 각각 부윤•군수를 두었다.

1914년에는 부제府制가 실시되어 군산과 목포는 각각 군산부와 목포부 가 되었고, 전북 14개, 전남 22개 등 36개 군으로 개편되었다. 1915년에는 도 전 제島制의 시행에 따라 제주도에 도청島廳이 설치되고 도사島司가 부임하였다.

한편 기초행정단위로서 면面의 중요성을 인식한 일제는 1917년 면제面制 를 시행하면서 면장과 면리원을 지방통제에 활용하였다. 면은 지정면과 보통 4 면으로 구분되었으며, 광주, 전주, 익산에 지정면이 선정되었다.

1919년 3•1운동은 지방행정제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1920년 도제  制, 부제府制, 면제面制가 일부 개정되었으며, 1923년 여수와 정읍, 1929년 제 주에 지정면이 설치되었다. 1930년에는 지정면 대신 읍뭔의 신설을 골자로 하는 도道부府읍뺘면제面制가 시행되었으며, 1936년에는 전주와 광주가 부 로 승격되었다.

전시체제기에 접어들면서 지방행정제도는 국가총동원체제에 맞게 활용 되었다. 이에 따라 전라도 역시 인적, 물적 수탈의 대상이 되었으며, 말단행정 단위인 정町동洞•리里•부락部落에도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하부조직이 결성되 었다. 1943년 이들 연맹은 전북 4,912개, 전남 9,005개를 헤아렸다.

나. 토지조사사업과산미증산계획의 실시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은 일제가 1910년부터 식민지 토지제도와 지 세제도를 확립할 목적으로 실시한 대규모 조사사업이다. 이는 국유지를 확대 시켜 조선총독부의 소유로 개편하고 이를 통해 지세 수입을 확충하여 식민 통치에 사용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무상으로 점유된 토지는 일본인 이민자들에게 불하하였다. 이에 앞서 일제는 이미 통감부 시기에「토지가옥 증명규칙」(1906),「토지가옥소유권증명규칙」(1908),「산림법」(1908) 등을 제정

전라도에서의 토지조사사업은 1914년부터 시작되었다. 1914년과 1922 년 논밭의 면적을 비교하면 전북은 74,000정보, 전남은 168,000정보 증 가하였다. 전남의 경우 도서지역의 경작지가 새롭게 파악된 결과로 보인다. 1914년과 1922년 논과 밭의 비율을 보면 전북은 1914년76.5 : 23.5에서 1922년71.2 : 28.8, 전남은 56.7 : 43.3에서49.4 : 50.6이었다. 전국의 논과 밭 비율을 보면 1914년36.8 : 63.2, 1922년35.8 : 64.2였으니 전라도는 논 의 비율이 다른 지역보다 높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증가된 경작지 는 대부분 총독부와 일본인 조선인 지주들의 소유였고 소작농과는 무관하 였으며, 오히려 식민지지주제植足地地主制가 강화되었다.

1922년 소작지 비율은 전북의 경우 논 56~58%, 밭 38.9%, 전남의 경 153

전 1

4

하여 토지조사사업을 위한 기반을 닦았다.

우 논 58.396, 밭 38.9%였다. 전반적으로 볼 때 지주-소작 관계는 전남보다 전북이 심각하였으나, 전남 역시 소작지 비율이 계속 상승하면서 농민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1930년 30정보 이상을 소유한 일본인과 조선인 지 주들의 논밭 면적 비율은 전북이 59.4 : 40.6, 전남이 51.0 : 49.0이었다. 이처 럼 일본인 지주의 비중이 높은 지역은 전국에서 전라도뿐이었다. 그만큼 전 라도에서는 식민지지주제의 피해가 컸다 토지조사사업에 이어 일제는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에 착수하였다. 이는 조선을 자국의 식량공급기지로 만들기 위한 쌀 증식 정책이었다. 제1자 계획은 1921~1925년, 제2자 계획은 1926~1935년 추진되었으며, 전시체제 기인 1940년 다시 제3차 계획이 추진되었다.

산미증식계획에 따라 각지에 수리조합이 설립되고 수리시설이 정비되었 으며, 특히 김제를 비롯한 전북 일대에 광활한 논농사 지대가 형성되었다. 이 를 통해 대지주들은 쌀을 일본에 수출하여 큰 수익을 올렸으며, 불이전북농 장不二全北農場, 가와사키농장[川岐農場], 미야자키농장[宮崎農場] 등 일본인 대 지주들의 농장이 확대되었다. 산미증식계획에서 좋은 실적을 낸 모범적인 부 락과 단체를 선정하여 보조금을 지급하였는데, 1926년 전라도에서는 전북 9 개, 전남 73개 등 82개의 모범부락과 모범단체가 선정되었다.

다. 농촌진홍운동의 실상과 허상

1920년대 후반 세계대공황 이후 일제는 식민지배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 하여 1932~1940년 전국 농촌을 대상으로 농촌진흥운동農村振興運動을 전개 하였다. 농촌진흥운동은 물질생활의 안정이 목표였지만 정신생활의 개조에 도 역점을 두었다. 농촌의 피폐를 조선 농민의 나태 탓으로 돌리며 근검절약 과 금주금연, 미신타파, 부업장려 등을 통한 자력갱생自力更生을 강조하였다. 1935년부터 시작된 심전개발운동心田開發運動역시 농촌진흥운동과 맥락을 전 같이 하였다.

농촌진흥운동의 일환으로 시행된 농가경제갱생계획農家經濟更生計劃의 목표는 식량충실, 부채상환, 현금수지개선 등이었으며, 그 추진을 위한 부락 4 과 농가가 선정되었다. 전북의 경우 1933년 32부락 816호에서 1939년 452 부락 9,083호, 전남의 경우 1935년 71부락 159호에서 1939년 736부락 17,262호로 매년 증가하였다. 이들 부락과 농가는 일제의 지원을 받아 초기 에는 사정이 호전되는 듯 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관치행정官治行政의 한계  드러내며 점자 실적이 감소하였다.

라. 총동원체제 하 강제동원과수탈의 강화 일제가 1931년 만주사변에 이어 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하면서 조선의 상황은 전쟁을 위한 총동원체제總動員體규司로 전환되었으며, 1938년 국민정신총 동원운동國民精i中總動員運動과 1940년 국민총력운동國民總力運動이 강요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인들의 삶은 더욱 궁핍하게 되었다. 1942년 일제는 전라도에서 민심을 파악하였는데, 공출과 배급, 전쟁에 따른 고통과 불만이 조사되었다.

1943~1944년 경부터는 일제의 패망에 대한 소문이 유포되었다. 끄은 지역은 전라도의 경우 전북의 금산, 김제, 군산, 진안, 전남의 광주, 목포, 영암, 장성, 함평 등지였다. 또 1938년 부안 공립농업실습학교, 1939년 광주 공립 송정리공업실습학교, 1941년 고흥 사립농업실습학교 등에서는 강제동원에 불만을 품은 학생들이 동맹휴학에 나서기도 하였다.

인적 수탈도 날로 심화되었다.「일제강점기 강제동원피해자 명부」에 따

르면 전북은 79,848명, 전남은 114,748명이 강제동원에 희생되었다 1944년 일제의 침략전쟁 동원을 위하여 징병검사를 받은 전라도인은 전북 14,231명, 전남 23,305명이었다.

155 4. 일제강점기 전라도인들의 민족운동  

 

가. 1910년대 비일결사의조직과3•1운동의 전개 1

1910년 8월 한국은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이른바 일제의 '무 단통치'가 실시되었다. 하지만 전라도에서의 항일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그 4

대표적인 사례로는 1913년 임병찬이 결성한 독립의군부躅立義軍府, 1912년 이석용이 결성한 임자밀맹단壬子密盟團, 1914~1915년경 소안도 등 도서지역 에서 결성된 수의위친계守義爲親횆와 배달청년회倍達靑年會, 그리고 광복회光復會전라도지부 등의 활동을 꼽을 수 있다.

이처럼 1910년대 전라도의 독립운동단체는 의병부대에서 비밀결사로 전환되었으며, 전국적인 통일조직을 구성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보수적 성 향의 의병계통 비밀결사는 복벽주의復辟主義를 고수한 반면, 혁신유림계가 주 도하는 비밀결사는 공화주의共和主義를 짜하였다. 비록 노선은 달랐지만 구국의 일념은 같았고, 이같은 항일투쟁의 맥락은 3 • 1운동으로 이어졌다.

일제강점기 최대의 민족운동으로 불리는 3•1운동의 불길은 전라도 전 역에서도 타올랐다. 전북에서는 3월 5일 군산, 전남에서는 3월 10일 광주가 그 선구였으며, 시기적으로는 3~5월에 활발하였다. 특히 종교계의 활약이 두드러졌는데, 일제의 분석에 따르면 전북은 천도교와 개신교, 전남은 개신 교가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장날을 이용하였다.

전라도에서의 만세시위 건수는 220회 이상이었으며, 연인원은 3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4월 16일 현재 전라도에서의 수감인원은 400여 명이었다.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피해를 입은 사례는 부지기수인데, 여수 출신으로 광주 수피아여학교에 다니던 윤형숙은 일경이 휘두른 칼에 한쪽 팔이 잘려졌는데 도 다른 팔로 태극기를 잡고 만세를 외쳐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1920년대 초 에도 남원, 무장, 완도 해남 등지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대한제국기 전라도 의병의 전통이 일제강점기 3•1운동으로 이어진 점은 의향義鄕전라도 의 위상을 잘 보여주며, 이를 통하여 1920년대 이후 민족운동을 위한 역량 을 기울수 있었다. 전

나. 1920년대 일제의 '문화정치' 실시와 민중운동의 성장 전국적•거족적인 3•1운동의 열기와 국제사회의 비난에 놀란 일제는

4 1920년대에 들어와 '무단통치'에서 이른바 '문화정치'로 지배방식으로 전환 하며 헌병경찰제를 폐지하고 언론츨판•집회껼사의 자유를 일부 허용하였

다. 하지만 헌병이 경찰로 제복을 바꿔 입은 것에 불과한 데다 인력은 더 증가 하였으며, 친일적 조선인을 관리로 채용하여 민족 분열을 획책하였다.

그럼에도 이 시기에는 민중들의 의식이 고양되고 각종 사회단체가 결성 되었으며 전라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교육운동, 청년운동, 농민 운동, 노동운동 여성운동, 형평운동 등 다양한 형태의 운동이 전라도 각지에 서 일어났으며, 이들중에는 항일적인 성격을 떤 것들도 적지 않았다. 전국적 으로 펼쳐진 물산장려운동이나 민립대학설립운동 시기에는 전라도 각지에 지회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3 •1운동 때와는 달리 학생 • 청년층이 민족운동의 주도세력으로 떠올랐다.

그런데 이같은 각종 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이른바 '민족주의계열'과 자 회주의계열'로 구분되었으며, 특히 농민운동, 노동운동 형평운동 등은 후자 가 주도하였다. 1920년대 후반 신간회운동에서처럼 두 계열이 협력하기도 하 였지만 운동의 노선과 방법을 두고 갈등과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인의 7~8할 정도가 농민이었고 다시 그들중의 7~8할 정도가 소작인이었기에 농민운동은 이 시기 민중운동의 핵심분야였으며 소작문제에 대한 관심이 컸다. 특히 곡창지대라 불리는 전라도에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소작료 인하를 위하여 투쟁하였으니 1924년 암태도 소작쟁의, 1925년 나주 궁삼면 토지회수운동, 1926년 옥구 이엽사二葉社소작쟁의 등이 대표적 사례 이다. 1925~1926년 전라도의 농민운동은 농민조합 설립에 역점을 두었으며, 157

이후 수리조합 반대투쟁이 농민운동의 주요 관심사로 떠올랐다.

노동운동은 조선노동공제회 지부가 결성되면서 본격화하였으며, 군산 1

에서는 1923년 군산노동회, 군산철운노동조합, 군산도농연맹회 등이, 목포에 4

전라도에서 농민단체는 1923년부터 증가하였다. 광주의 경우 1923년 15개 면의 소작인회가 모여 소작인연합회를 결성하였으며, 같은 해 순천에서 는 순천농민대회연합회와 함께 순천•광양•여수로성 등 4개 군을 아우르는 남선농민연맹이 조직되었다. 이들은 지주의 횡포에 대항하여 소작권 보장과

서는 1920년 전남노동조합 목포본부와 1924년 목포해륙노동조합이 결성되 었다. 이들의 투쟁방식은 동맹파업이었으며, 1924년 군산 하역 • 정미노동자 동맹파업, 1926년 목포 제유공장 동맹파업 등이 대표적 사례이다.

1920년대 후반기 노동운동은 노동연맹이 지역에서의 구심점 역할을 하 면서 직업별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파업 건수도 45건 (1924), 55건(1925), 81건(1926), 94건(1927), 119건(1928)으로 매년 증가하였다. 요구 조건은 주로 고용 보장과 임금 인상이었다.

다. 1920년대 후반 신간회운동과 광주학생운동의 확산 좌우 합작으로 결성된 신간회는 1927년 2월부터 1931년 5월 사이에 존속한국내 최대의 민족운동단체였으며, 전북에 9개, 전남에 15개의 지회가 조직되었다. 전라도 지회의 회원은 50~100명 정도였으며, 초기에는 회장-간 사제였으나 1929년 이후 집행위원장-집행위원제로 바뀌었다. 각 지회에서는 집행위원회, 정기대회, 임시대회 등을 열고 각종 사회 현안에 대하여 대책을 강구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감시와 탄압 때문에 활동이 여의지 않았다. 여기에 '해소 解消'를 둘러싼 내분까지 겹치면서 신간회운동은 1930년 이후 침체되었다. 그 럼에도 신간회운동은 계열을 초월하여 지역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역량을

결집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으며, 전라도 지회의 지도부 상당수가 일제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는 점에서 그 항일적인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신간회운동이 정점에 들어선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촉발되었다. 10월 '나주역사건'이 직접적인 발단이었으나 일제의 민족자별적 식민교육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그리고 1926년 6•10만세사건 이후 의식화조직화된 학생들의 항일역량이 크게 작용하였다.

1920년대 전반기부터 동맹휴학으로써 식민교육에 대항하여 온 광주의 전 학생들은 1926년 성진회醒進會조직 이후 1929년 학교별 독서회와 독서회중 양부를 결성하였으며, 이들 조직이 광주학생운동의 전개와 확산에 크게 기여 하였다.

4 1929년 11월에는 전남의 목포와 나주, 1930년 1~2월에는 전북의 전주 와 고창, 김제, 남원, 부안, 전남의 광주, 나주, 담양, 대구, 보성, 여수, 제주 등 지의 학생들이 시위나 맹휴로써 동참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간회 등 사회단 체들이 학생들의 투쟁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을 거치면서 이제 학생층은 민족운동의 중심세력으로서 위상을 굳혔으며, 학교측으로부터 퇴학이나 정학 처분을 받은 이들은 이후 1930년대 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렇듯 광주에서 촉발되어 전국으로 확산 된 광주학생운동은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의 분수령이 되었다.

라. 1930~1940년대 비일결사운동의 전개와 해외에서의 민족운동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국내의 민족운 동 세력을 더욱 탄압하였으며, 특히 중일전쟁 이후 이른바 '전시체제기'가 형 성되면서 표면적•합법적인 민족운동은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항일적 비밀 결사가 조직되어 민족운동을 지속하였다.

이같은 비밀결사는 전북에서 17개, 전남에서 12개가 확인되는데, 전 북은 전주가 7개, 전남은 광주가 5개로 가장 많았다. 특히 전북에는 조선 건국단朝鮮建國團과 신인동맹i中人同盟등 보천교並天敎와 증산교甑山敎계통 이 여럿이었다. 결성 추이를 보면 중일전쟁기(19377~1941그2)와 태평양전쟁기

(1941그2~1945.8)가 반반 정도였으며, 전북에서는 태평양전쟁기에 조직된 사례 가 많았다.

석류회•독서회, 이리농림학교 사민단빠랑회, 전남의 광주서중 독서회 무등 회 등이다. 또한 일본에서 전라도인들이 결성한 비밀결사도 5개가 확인된다. 이같은 비밀결사들은 대부분 일제에 적발되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159

못하였다. 하지만 독립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학생층과 종교인을 중

심으로 민족운동의 불씨를 지켜나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1

한편 해외에서 민족운동을 벌인 전라도 출신들도 여럿이다. 정읍 출신인 4

이들 단체의 구성원은 종교 계통의 비밀결사를 제외하면 대부분 학생층 이었다. 대표적 사례는 전북의 전주농업학교 근화회, 전주사범학교 우리회•

고평과 보성 출신인 나정련은 대종교 계통의 독립운동단체에 참여하여 만주 일대에서 활동하였으며, 함평 출신의 김철과 광주 출신인 부인 최혜순, 함평 출신인 조카 김덕근 등은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및 유관단체에 서 활동하였다. 함평 출신인 김석, 정읍 출신인 나용균, 광주 출신인 정광호, 무안 출신인 장병준, 화순 출신인 정호룡, 장성 출신인 변중선 등도 상해에서 임시 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만주에서 결성된 의열단義烈團에는 광주 출신 정율성과 담양 출신 김일 곤이 참여하였고, 김제 출신 정화암과 부안 출신 백정기, 나주 출신 나월환 등은 아나키스트로 활동하였다. 승주 출신 조경한, 영광 출신 최용선, 곡성 출신 장기문, 광산 출신 이사섭 등은 한국광복군韓國光復重에 투신하였다.

5. 근대시기 전라도인들의 생활과 문화

 

가. 근대도시로의 변모와 근대교육기관의 설립 한국을 강점한 일제는 육로와 항로의 교통망을 확충하였다. 물론 이는 침략과 수탈을 위한 것이었다. 일제는 1907년 전주-군산간 및 광주-목포간

도로를 건설하였고, 1914년 대전-목포간 호남선 철도를 완공하였다. 1900년 에는 군산-오사굿H大阪] 간 항로가 개설되었으며, 이후 인천-군산-오사카, 상 하이[上海]-다렌[大連]-군산, 군산-홋카이도[北海道] 간의 항로가 증설되었다. 목포의 경우 1910년 법성포, 해창, 즐포, 군산, 제주, 부산 등을 연결하는 항 로가 개설되었다. 이에 따라 군산과 목포는 항구도시로 발달하였으며 일본인 거류지가 조성되었다.

전통도시라 할 수 있는 전주와 광주도 점자 근대도시로 변화하였다. 성 전 곽이 해체되고 도로가 정비되면서 공간이 확대되었으며, 일본인의 이주가 증 가하였고, 교육기관, 행정기구, 사법기구, 금융기관, 상업점포, 상설시장이 속 속 들어섰다.

4 전주, 군산, 광주, 목포, 순천에는 미국남장로회의 선교거점이 설치되었 는데, 교회뿐 아니라 근대식 학교와 병원이 설립되어 교육과 의료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여기에 백화점, 극장, 공원과 같은 시설도 세워졌으며, 지역 신문 도 창간되어 '근대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근대교육기관에 대하여 살펴보면, 한국을 병탄한 일제는 1911년 사립학 교규칙을 제정하고 1915년 이를 개정하여 사립학교의 설립과 운영을 통제하 였다. 그 결과 전남의 경우 1910년 42개였던 사립학교가 1920년 5개로 감소하 였고, 서당과 강습소가 증가하자 일제는 1919년 서당규칙을 제정하여 감독을 강화하였다. 일제는 1919~1922년에는 '3면1교제'를, 1929~1936년에는 '1면1 교제를 실시하여 초등교육기관인 보통학교를 증설하였으며, 이에 따라 전남의 경우 공사립 보통학교는 1917년 39개에서 1939년 302개로 증가하였다.

1910년대 전라도에는 종교계 학교를 제외하면 조선인을 위한 중등교육 기관은 거의 없었는데, 1919년 개교한 전주고등보통학교와 1920년 개교한 광주고등보통학교, 고창고등보통학교가 전라도 중등교육기관의 효시였다. 아 울러 여자고등보통학교와 농업학교, 상업학교, 실업학교 등이 설립되어 중등 교육을 담당하였다. 이밖에 종교계에서 설립한 학교도 여럿이었다 한편 일제는 '근대교육과 식민교육을 병행하면서 조선인을 일제의 순량 ,偵良한 신민亞民'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럼에도 민족의식을 깨우친 학생들

은 민족운동의 주역으로 성장하여 1919년 3•1운동, 1926년 6•10만세운동, 1929년 광주학생운동 등을 주도하였으며, 전라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라도의 근대문학은 일본 유학생들이 작품을 발표하고 문학동인회를 결성하거나 문예지를 창간하면서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대표적 인물로는 김우진, 이익상, 유업, 조운, 이병기 등을 꼽을 수 있다. 1924년 창간된『조선 161

문단』에는 전라도 문인들의 작품이 많이 실렸다. 아동문학가로는 김태오, 목

일신, 조종현, 곽복산, 정태병, 조남영 등이 있었다. 카프 계열의 문인으로는 1

김창술, 정우상, 김해강, 장준석 등이 눈에 띈다. 4

나. 예술계의 동향

한편 박용철, 김영랑, 신석정 등 지문학파詩文學派'와 서정주, 오장환, 여 상현 등 생명파生命派'의 출현은 1930년대 전라도 문단을 풍요롭게 하였으며, 1935년 창간된『호남평론』은 전라도 문학의 지평을 넓히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서정주, 임학수, 김해강, 채만식, 김태오, 장준석 등은 친일작품을 발 표하여 오점을 남기기도 하였다.

미술 분야는 전통미술과 서양미술로 구분된다. 전통미술에서는 남종문 인화南宗文人畵가 허련과 손자인 허건, 방손인 허백련으로 계승되면서 남도화 단을 이끌었으며, 허백련의 화풍은 1938년 발족된 연진회鍊眞會을 통해 많은 제자를 배출하며 현대화단으로 이어졌다. 허건 역시 해방 직후인 1946년 남 화연구원南畫硏究院을 개설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서예가로는 송운회, 손재 형이 손꼽힌다. 인물화가로는 고종의 어진御眞과 황현의 초상을 그린 채용신 이 대표적이다.

서양미술은 일본 유학생들을 통하여 도입되었으며, 1922년 시작된 조선 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을 통하여 많은 서화가들이 화단에 진출하였다. 전 북에서는 이순재(전주), 김영창(전주), 박병수(임실) 등이, 전남에서는 오지호(화 순), 김홍식(여수), 김환기(신안) 등이 지역 화단을 주도하였는데, 이들 모두 일본 유학생 출신이었다. 하지만 1940년대 조선남화연맹전朝鮮南畫聯盟展과 반도총 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등 친일미술전에 참여한 전라도 화가들도 여럿이었다.

근대음악은 기독교 선교와 관련이 깊다. 전라도에 설립된 천주교와 개신 교 계열의 교회와 학교는 서양음악의 산실이었다. 선교사들은 교인과 학생들 에게 서양음악을 가르쳤고, 음악회와 연주회를 열어 서양음악을 전파시켰다. 예배당이나 학교 강당에서 열린 각종 행사에서 교사와 학생, 교인들의 서양 음악이 공연되었다.

다. 종교계의 추이 전 불교계의 추이를 살펴보면 1904~1905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는 개항장 군산과 목포에 일본불교가 상륙하여 교세를 확장하였다. 강점 직후인 1911년 일제는 사찰령을 공포하여 불교계를 관리 •통제하였으 4 며, 전국의 사찰을 고개의 본산本山과 산하 말사末寺로 재편하였다. 전라도의 본산은 전북의 위봉사, 보석사와 전남의 백양사, 선암사, 송광사, 대흥사, 화 엄사 등이었다. 1937년에는 전남 5개 본산의 주지와 간부들이 선암사에 모 여 전남5본산연합회를 결성하여 종무宗務를 통일하고 교육•포교사업을 실 시하기로 결의하였다.

교세의 추이를 파악하기 위하여 1914년과 1939년의 사찰 수를 비교해 보면 사찰은 전북이 96개에서 116개, 전남이 63개에서 127개로 증가하였으 나 승려 수는 전북이 383명에서 238명, 전남이 894명에서 695명으로 감소 하였다. 1900년대에는 승려 교육을 위하여 주요 사찰에서 보통학교를 설립 하기도 하였는데, 선암사의 승선학교昇fⅡ厚校,대흥사의 대흥학교大興學校, 위 봉사의 봉시학교鳳翅學校, 화엄사의 신명학교新明學校, 송광사의 보명학교普明國校, 구암사의 창흥신숙昌興新塾, 백양사의 광성의숙廣成義塾죠이다. 여기에 서는 승려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도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천주교의 경우 조선후기 발생한 진산사건珍山事件(1791)으로 전라도의 천 주교 신앙공동체는 큰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1795년 주문모周文謨신부가 유항검의 초청으로 전주를 방문하여 성사를 집행하는 등 재기를 모색하였 고, 유항검 등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대박청원大舶請願을 추진하기도 하 였다.

등지에 분포하였다. 1827년에는 곡성에서 정해박해丁亥迫害가 발생하여 전주 에서 10명의 신자가 순교하였다.

이처럼 지속적인 박해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인들은 좌절하지 않았으며, 163

그 결과 1831년 로마 교황청에서는 조선에 대목구代牧區를 설정하고 신부들

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사스탕(J. H. Chastan) 신부는 1837년 전라도를 방문하 1

였다.

전라도에 진출한 개신교 선교회는 미국남장로회이다. 1892년 내한한 남 장로회 선교사들은 전주(1895), 군산(1896), 목포(1898), 광주(1904), 순천(1913) 4

하지만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가 발생하여 전북에서 20명이 순교하고 42명이 유배되면서 전라도 천주교계는 또다시 위기를 맞았고, 신자들은 고 향을 떠나 타지의 산간벽지로 숨어들어 교우촌敎友村을 형성하였다. 이같은 신앙공동체는 전북의 고산, 진산, 금산, 순창, 임실, 용담과 전남의 광주, 곡성

등지에 선교거점을 마련하고 포교에 나서는 한편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였다. 이에 따라 전주에는 신흥학교, 기전여학교와 전주예수병원, 군산에는 영흥학 교, 멜볼딘여학교와 군산예수병원, 목포에는 영흥학교, 정명여학교와목포프 렌지병원, 광주에는 승일학교, 수피아여학교와 광주제중원, 순천에는 남• 녀 매산학교와 순천알렉산더병원 등이 문을 열었다. 이들 학교와 병원은 개신교 선교는 물론 지역의 근대식 교육 및 의료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외래종교인 기독교와 달리 민족적 성격의 종교도 출현하였다. 1909년 나철, 오기호, 이기 등은 서울에서 단군교를 '중광 전하고 1910년 대종교로 개칭하였는데, 이들 모두가 전라도 출신이었다. 이들은 일찍이 을사오적 암살 등 항일투쟁에 참여하였으며, 강점 이후 만주로 거점을 옮기고 포교와 함께 항일무장투쟁도 병행하였다.

한편 동학의 3대 교주 손병희는 1905년 교명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지방 에 대교구와 교구를 설치하였다. 1914년 전북 전주, 익산과 전남 강진, 순천, 장성에 대교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1906~1919년 전라도의 교세 변화를 보 면 교인은 전북이 2,000명에서 4,197명으로, 전남이 2,808명에서 6,287명 으로 크게 증가하였고, 전라도 천도교계의 전국적 위상도 그만큼 높아졌다.

 

천도교에서는 1908년부터 교리강습소를 운영하였는데 1912년의 경우 전북 17개, 전남 25개였다. 이같은 천도교의 조직과 역량은 1919년 전라도의 천도 교인들이 3•1운동을 주도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1916년 원불교를 창시한 영광 출신 박중빈은 1917년 저축조합을 설립 164 하고 근검절약과 자급자족을 강조하여 마련한 재원으로 사업을 벌여 교단의 기초를 닦았다. 1918년부터 벌인 방언공사防堰工事로 얻게 된 간척지도 교세 확장에 기여하였다. 1919년 혈인기도血印祈禱이후 박중빈은 부안으로 근거를 전 옮겼으며, 1924년 다시 익산에서 불법연구회佛法硏突會라는 교명을 선포하고 익산총부를 건설하였고, 불교혁신을 주장하며 예법혁신운동, 사회개혁운동, 선농일치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해방 이후인 1947년 원불교로 개칭하였다.

4 이밖에도 전북에서는 증산교와 보천교 계열의 신종교들이 다수 창시되 었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이상향인 신앙촌을 조성하는 한편 조선건국단이나 신인동맹 같은 단체를 결성하여 일제에 저항하기도 하였다.

라. 아직도청산되지 못한 식민지배의 유산

35년간의 식민지배는 정자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아직도 청산되 지 못한 어두운 유산을 남겼다. 일제에 협력한 인사들은 우선 도장관道長官과 도지사道知事, 군수郡守와 부윤府尹등 고위관리를 꼽을 수 있다. 중추원中橿院 참의, 도평의화首評議會의원, 경찰과 장교 등도 여기에 포함되며, 지역 부호와 유지 중에도 상당수가 있었다.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고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특위 활동이 시작되 면서 전주와 광주에 사무소가 개설되었다. 전북조사부와 전남조사부는 각각 전국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로 많은 영장을 발부하였는데, 그 대상은 중추원 참의, 경찰, 관공리 등이었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의 방해로 반민특위가 와해 되면서 친일파 청산은 무산되었다.

한규무

제6장 현대

165

 

전 1

4

1. 해방을 맞이하며

 

제2자세계대전은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전쟁에 동원된 '총력전 總力Mt(total war)'이었다. 전쟁의 결과, 미소가 힘을 합친 연합국이 승리하고 독 일, 이탈리아, 일본 등이 동맹한 주축국이 패배하였다. 뒤이어 자본주의 세계  미국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동유럽을 위시한 사회주의권은 소련을 중심 으로 재편되었다. 또 과거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과 지배를 받던 아시아와 아 프리가 등지에서 민족해방을 바라는 식민지민족해방운동이 활발해지며 식 민지로부터 벗어나는 국가들이 생겨났다.

이렇듯 해방은 제2차세계대전에서 연합국 승리가 결정적 요인이었다. 소 련의 참전과 8월 6일 히로시마와 8월 9일 나가사키 등 두 차례나 떨어진 원 자폭탄의 위력 때문에 일제는 더 이상 '옥쇄玉碎'하지 못하고 연합국에 '무조 건 항복'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해방은 1876년 개항 이후 계속된 일제의 침 략과 지배에 대응한 독립운동의 승리였다. 구한말 자주독립을 지키려는 운

동에서부터 1910년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뒤에도 독립운동은 멈춰지지 않 았다. 일제의 강력한 탄압이 있었음에도 독립을 바라는 민족적 열망은 계속 독립운동으로 표출되었다. 1919년 3•1운동과 그로부터 10년 뒤 일어난 광주 학생독립운동과 같은 대중시위가 있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폭압의 일제 식민통치에 맞서 비밀결사단체를 조직해 짜하였다. 해방 직전 국내외에서 는 조선건국동맹,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등 일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독립운동이 계속되었다. 결과적으로 8•15해 전 방은 수많은 선열들의 헌신적인 투쟁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 스스 로 일제에 물리적으로 승리하지 못한 까닭에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 나기 어려웠고, 자연 국제정세에 따라 한반도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4 미국의 제안과 소련의 수용에 의해 한반도는 북위 38선을 경계로 남북에 미 군과 소련군이 진주하는 분단이 시작되었다. 후삼국이 고려로 통일된 이후 처음 겪는 민족 분단이었다. 그 결과 해방 직후 우리 민족 앞에는 새로 그어 진 38선을 철폐하는, 즉 민족분단의 극복과 일제 36년의 식민통치의 잔재 청 산이라는 이중의 과제가 놓여졌다.

1945년 9월 8일 제24군단(사령관 : 하지 중장)이 인천항에 상륙하며 미군 과 38도선 이남에 진주하였다. 미군의 정책은 해방 직후 전국 각지에서 전 개된 건국운동을 부인하였다. 전라도에서도 해방 직후부터 건준•인민위원 회가 조직되었다. 건준•인민위원회는 치안유지, 적산관리 등 과도기의 임무 를 수행하였다. 10월 전라도에 진주한 미군은 군정은 설치하고 통치를 시작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군정은 인민위원회의 활동을 부정하고 관련자  을 구속하였다. 해방 후 좌우세력은 이념과 친일청산 등 많은 문제를 두고 대립하였는데, 전북의 '남원사건'이 그 대립과 갈등이 폭발한 대표적 사례이 다. 1946년 10월 말부터 11월에 전라도 지역에서는 미군정의 정책, 그중에서 도 미곡수집에 대해 반발하는 10월항쟁이 발생하였다. 각 지역에서 많은 농 민들이 항쟁에 참여하며 그동안의 미군정의 정책을 적극 비판하였다. 하지만 미군정은 미군과 경찰을 동원해 농민들의 항쟁을 물리적으로 진압해갔다.

1945년 12월 16일 연합국 3개국(미•영•소) 외상들이 모스크바에서 전후

세계질서를 정립하는 문제를 토의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한반도 문제였다. 미 국은 신탁통치를 제안하고 소련이 이를 수용하는 것으로 귀결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의안이 발표되고, 이 결의안에 따라 향후 한반도 문제를 토의할 미소공동위원회가 예정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하루 앞서『동아일보』는 반소•

반공을 목적으로 사실을 뒤집는, 즉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즉 시독립을 주장했다는 왜곡 기사를 내보냈다. 이를 계기로 전국에서는 반탁 운동이 활발해졌으며 이후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의안 중 신탁통치의 수용 167

여부를 둘러싼 좌우 대립이 심각해졌다. 우익세력은 '신탁통치 반대(반탁)'를

주장하고, 좌익세력은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의 전면지지'를 주장하였다. 이 1

를 둘러싼 좌우갈등은 서로를 죽이는 테러와 같은 극단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런 가운데 1945년 12월 18일 미군정 경찰이 집회 군중에 발포하여 6명이 사망하고 15명이 부상하는 '전주사건'이 발생하였다.

1946년 1월 16일부터 2월 6일 예비회담에 이어 3월 20일 서울의 덕수 궁 석조전에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시작되었다. 미소의 대립과 갈등으로 인해 제1자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하였으며, 이후 미소 양국은 자신들의 체 제를 이식시키려 했다. 미국은 좌익세력을 대대적으로 탄압하는 한편 좌우 합작운동을 유도하였다. 민족분열을 극복하려던 좌우합작운동은 결과적으 로 극좌와 극우 세력의 반대와 '입법의원 설치' 문제 등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중간파 세력은 극좌세력과 결별하고 독자적인 활동 을 전개하였고,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중간파 세력도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에 참가하는 한편으로 독자적인 활동을 모색하였다.

1947년 3월 12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전 세계에서 공산주의 위협에 대처하겠다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였다. 미소의 체제대립인 냉전의 시작 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냉전은 한반도에 직접 영향을 미쳤다. 5월 들어 다시 열린 제2차 미소공위도 실패로 돌아가고, 미국은 9월 17일 한반도 문제를 유 엔총회에 상정하였다. 유엔은 11월 14일 유엔기구의 감시 아래 인구비례에 따 라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뒤이어 유엔한국임시 위원단이 구성되고 선거 감시를 위해 한반도에 들어왔으나, 소련과 북한은 유 4

엔의 결정에 반대하며 독자적인 정부 수립의 길로 나아갔다.

2. 분단과 전쟁의 소용들이 속으로

 

1948년 5월 10일 지러진 5•10 총선거는 최초의 보통•직접•비밀•평등이 전 적용된 선거이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선거였다. 비록 김구와 김규식을 비 롯한 많은 정치세력이 참가하지 않았으나, 이 선거로 성립된 제헌의회는 다른 한편으로 소장파 국회의원들이 등장하는 무대였다. 제헌의회의 소장파는 반 4 민법 제정을 비롯한 각종 개혁적인 정책을 추진하며 이승만정권의 독주에 제 동을 걸었다 한편 남로당을 비롯한 좌익 세력은 적극적인 단독선거 반대투쟁을 전개 하였고, 김구와 김규식은 5•10선거에 반대하며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 에 참여하였다. 이와는 별개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5 •10선거를 감시하는 활동을 전개한 뒤 “1948년 5월 10일의 선거투표의 결과는 조선의 감시 가능 한 부분이며 조선 총인구의 약 2/3를 차지하고 있는 지역에서 선거인의 유효 한 자유의사의 표현이며 그들의 자유의사를 정확히 표시한 것으로 유엔에 보고하였다.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에서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보 고를 승인하였다.

1948년 4월 3일 새벽 1시 제주도 한라산 중산간 지대의 오름(봉우리)에 봉화가 피어올랐다. 이날로부터 시작된 43사건은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4•3사건은 해방 이후 쌓인 각종 모순과 1947년 3•1절에 있었던 경찰의 발포와 탄압, 서북청년회의 입도와 만행에 가 까운 행위, 단독선거의 추진, 남로당 제주도당의 노선 변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발생하였다. 4•3사건이 발생하자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신속하게 진압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강력하게 전개하였다. 특히 평화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김익렬 연대장을 대신하여 새로 부임한 박진경 연대

장은 강경하게 토벌작전을 전개하였고, 그로 인해 제주도 출신 사병들의 탈 영사건과 박진경 연대장 암살사건 등이 발생하였다. 또 제주도는 5 • 10선거를 유일하게 지르지 못한 선거구가 되었다. 이런 가운데 전남 여수의 제14연대에 는 1개 대대의 제주도 파병 명령이 내려졌다. 10월 초순부터 제주도 파병을

준비하며 신무기가 보급되고 시가전 훈련을 실시되었다.

1948년 10월 19일 새벽 전남 여수 신월리의 제14연대 무기고 앞에서 총 성이 울리고 남로당원이던 연대본부 인사계 지창수 상사의 선동으로부터 여 169

순사건이 시작되었다. 여순사건은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제주도 파병에 반대하

는 봉기로부터 시작되었으나, 다른 한편으로 해방 이후 누적된 군경간의 갈 1

등, 숙군에 반대한 군대 내 좌익세력의 선동, 그리고 해방 이후 악화된 사회경 제적 모순 등이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막아서는 여수 경찰을 물리치고 여수 시내로 들어선 제14연대 반군은 순식간에 여수를 장악하고 통근열자와 트럭 등을 이용해 순천으로 이동하였다. 저지하던 경찰을 무장해제 시기고 순천 을 장악한 반군은 북상하는 방향에 따라 병력을 배치하였다. 이외에도 제14 연대에서 봉기했다는 소식을 들은 인근 지역에서도 인민위원회가 성립되었 다. 순식간에 제14연대의 봉기는 전남 지역의 동부 6군으로 확산되었다.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정부와 주한미군사고문단은 신속하게 대응하였다. 즉시 한국군과 미군사고문단의 최고위급 연석회의가 열리고 10월 21일 반군 토벌 전투사령부가 설치(송호성 준장)되었다. 이후 총 10개 대대와 1개 비행대 (경비행기 10대), 해안경비대 함정을 동원하여 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정부군 은 순자적으로 순천, 벌교, 보성, 광양을 탈환하고. 10월 27일 여수에 정부군 이 진입함으로써 여순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이후 여수와 순천을 비롯한 전남 동부지역에서는 부역자 색출을 빙자해 수많은 민간인들을 즉결처분하는 민 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또 입산한 반군을 토벌하기 위한 토벌사령부가 설 치되는 가운데 빨치산 토벌을 빙자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여순사건을 거치며 정부는 12월 1일에 국가보안법을 통과시기는 등 체제를 정비해 극우 반공체제를 형성시켰다. 정부는 여순사건 이후 전향을 강요하며 국민보도연 맹을 만들어 '반공 국만이 되기를 강요하였으며, 학도호국단을 만들고 교련 4

을 실시하는 등 청년과 학생들을 동원하였다.

1948년 7월 17일 헌법을 제정할 당시에 의원들은 민족적 염원을 담아 헌법 제101조로 '8•15 이전의 악질적인 민족 반역 행위를 처벌할수 있다는 특별조항을 삽입하였다. 즉 과거 일제 식민지 시기에 친일행위를 했던 민족반 역자들을 소급 적용하여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이었다. 이 조항에 따라 국회는 9월 7일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제정하고 정부는 9월 22일 법률 제3호 로 공포하였다. 괴청년들이 국회 본회의장에 난입하는 등 갖은 우여곡절 끝 전 에 반민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정부가 이를 공포함으로써 10월 23일 반민족 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조직되었다. 반민특위는 반민자 대상 7천 여 명에 대한 사전 조사를 진행하고, 이듬해 1월부터 반민족 행위자를 검거

4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3월 28일부터 이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다. 전라 도 지역에서도 반민특위 도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각종 자료와 구술, 그리고 투서함 등을 통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친일파들의 조직적인 저항은 계속되었다. 중앙에서 분 아니라 각 지역에서도 반민특위 활동을 반 대하는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반민특위는 1949년 6월 6일 새벽 중부경찰서 서장 윤기병이 인솔하는 일단의 무장경찰대가 반민특위 본 부를 습격함으로써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다. 물론 이후에도 반민특위의 활동은 계속되었으나 법이 개정되고 친일민족반역자들에 대한 처벌이 이루 어질 수 없었다. 결국 해결하지 못한 친일파 청산의 과제는 수십 년 뒤에 되살 아나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해방 직후 전남의 소작률은 전남이 66%, 전북이 73%0에 이를 정도 로 농지소유 문제는 심각하였다. 1949년 6월 21일 농지개혁법이 제정되어 다 음해 4월에 농지개혁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농지개혁의 법제화를 알아차린 지주들이 사전에 방매함으로써 농지개혁의 의미를 퇴색시켰다. 그럼에도 이 농지개혁을 통해 지주소작관계가 해체되고 자작농체제가 만들어졌다. 그리 고 농촌에서 전반적으로 농업생산력이 향상되고 농지를 방매하고 전환한 새 로운산업자본가 계층이 생겨났다. 1950년 한국전쟁 직전에 지러진 5•30선 거에서는 무소속이 대거 당선되었으며 제헌의원을 지낸 민주당 인사들이 대

거 낙선하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의 포격과 뒤이은 북한 인민군의 남침으 로부터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북한 인민군은 전쟁이 발발한 지 얼마 지나 지 않아 전라도 지역을 점령한 뒤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 뒤 북한에서

시행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청년들로부터 시작하여 많 은 사람들을 의용군으로 동원하였다. 또 길어지는 전쟁에 따라 인력 뿐 아니 라 각종 물자를 강제 동원하였다. 이런 가운데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게 되 171

자 북한 인민군을 비롯한 좌익세력은 퇴각하거나 인근의 산악지대로 들어가

빨치산 투쟁을 시작하였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라도 지역은 경찰이 되돌아 1

오고 이윽고 부역자 처벌의 전개되었다. 양측의 끝을 오르내리는 '톱질전쟁' 과 2년의 교착된 전선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으로 끝이 났으나 한국전 쟁은 커다란 후유증을 남겼다. 양측의 점령과 뒤이은 학살과 동원, 그리고 휴 전 후 남북한 간의 관계는 한반도를 냉전의 경연장으로 만들었다. 한국전쟁 은 총력전인 까닭에 전투에 참가한 군인들 뿐만이 아닌 수많은 비무장 민간 인들도 전쟁의 피해를 떠안았고, 전쟁의 끝난 뒤 수많은 전쟁미망인과 유가 족, 상이용사와 이산가족이 남겨졌다.

한국전쟁은 전선의 후방인 전라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전라도는 전쟁 초기 국민보도연맹원들에 대한 예비검속과 수형인을 포함한 민간인 학 살, 그리고 북한 인민군이 점령함으로써 수많은 주민들이 전쟁에 동원되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좌익의 학살, 뒤이어 부역자 처벌을 빙자한 민간인 학살 이 이어짐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또한 인천상륙작전 이후 퇴각 하지 못한 북한 인민군과 좌익세력들이 지리산, 회문산, 백운산 등 인근의 산 악지대로 들어감으로써 전라도는 빨치산 투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정부는 빨 치산 토벌을 위해 많은 병력을 배치하고 군사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로 인해 전라도 주민들은 많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인천상륙작전 이후 편성되어 후방지역에서 빨치산 토벌을 담당한 제11사단은 초토화 작전인 청 야작전淸野作戰을 전개함으로써 장성, 고창, 정읍, 함평 등 전라도의 많은 지역 에서 수많은 학살이 저질러졌다.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4


 

한동안 피해자들은 '빨갱이로 몰려 그 죽음마저 왜곡되었다. 학살의 피해를 입은 유족들은 '빨갱이 가족이라는 연좌제의 사슬에 묶여져, 국가나 사회로 부터 침묵을 강요당해야 했다.

1950년대의 한국 사회는 전쟁으로 인한 파괴, 인플레이션, 물가 폭등, 투 172 기와 환물풍조의 확산 등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의 결과 한국 사회 에는 반공이데올로기가 정착되었으며, 이러한 반공이데올로기는 독재를 강 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게다가 전쟁의 파괴로 인해 농촌의 500/0가 쌀 전 마저 끊긴 절량농가絶糧農家이며 각종 잡세雄稅와 저곡가低穀價정책 등으로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었다. 여기에 미국의 공법(PD 480조에 의거하여 미국 으로부터 무상으로 원조되는 잉여 농산물은 농촌에 치명적이었다. 자연 농 4 촌경제가 파탄나게 되었고, 자연 살 수 없는 농촌을 떠나 도시로 향하는 인구 가 늘어났다.

1950년대는 원조의 시대였다. 대한민국 국민총생산의 13~14%는 원조 였으며, 국가 재정의 50%가 원조로 유지되었다. 그렇기에 미국의 달러가 위기 에 빠져드는 1957년 이후 무상원조가 점자 유상차관으로 변화하였다 1958 년 이후 원조가 감소하고 경기가 불안해지자 그 타개책으로 정부는 국가 주도 의 경제개발계획인 부흥부의 경제개발3개년계획(1959)을 입안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정권은 독재를 강화하는 가운데 야당인 민주당이 성장하였다. 이승만정권은 전쟁 기간에 부산정치파동과 사사오입을 통해 두 차례나 헌법을 뜯어고치고 부정선거를 실시하며 집권체제를 강화해갔다. 이 과정에서 야당은 민주당과 진보당으로 분화되었다. 전쟁 전부터 이승만 정권 은 '북진통일을 주창하고 있었는데, 전쟁 이후부터는 더욱 강력하게 반공이 데올로기와 함께 '북진통일을 주창하였다. 이에 맞서 진보당은 전쟁에 반대 하며 평화통일을 주장하였고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 후보는 이승 만 대통령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이승만정권은 조봉암과 진보당을 탄 압하였으며, 조봉암은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렇듯 이승만정권은 반공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독재를 강화해나갔으

며, 이미 각종 선거에서 부정선거를 저지르고 있었다. 전라도에서 지러진 선 거에서도 부정선거가 많이 있었는데, 그중 대표적인 예가 1958년 5월 2일 치 러진 국회의원 선거이다. 이 선거에서 야당은 계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며 무 173

효소송에서 승소함으로써 전남 보성에서는 재선거가 지러지기도 했다.

계속된 이승만정권의 실정, 부정부패, 사회문제(실업과농촌의 파탄) 등으 1

로 민중들의 불만이 쌓인 가운데 초보적인 민주주의마저 파괴하는 이승만정 권에 대한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한 역사적 사건이 4월혁명이다. 1960년 3월 15일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전국 각지에서 관권, 금권, 불법선거가 자행되고, 전라도에서도 이승만정권의 부정선거가 극에 달하였다. 경찰이 야당의 선거 운동을 조직적, 계획적으로 방해하고, 민주당 선거운동원들이 괴한에 의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선거 당일에도 3인조, 5인조 투표와 투표함 바 꿔치기, 야당 개표 감시원 축출 등 투개표 과정에서도 부정이 계속되었다. 결 국 전라도에서는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투쟁이 발생하였다 게다가 전북 남원 출신의 김주열이 마산 앞바다에서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되자 전라도에서도 학생들이 나서고 시민들이 합류하는 항쟁의 불길을 타올랐다. 4월 26일 이 승만의 하야성명을 계기로 12년간 계속된 독재정권이 몰락하였다. 뒤이어 치 러진 선거에서 민주당이 압도적으로 당선되며 장면정부가 출범하였다. '경제 제일주의를 내세운 장면정권은 절량농가와 실업문제를 해결하려는 목적에 서 국토건설사업을 추진하였다. 전라도에서도 섬진강개발사업이 추진되었으 나 채 3개월도 지나지 않아 5• 16군사쿠데타로 인해 변질되었다 한편 4월혁명 기에 이승만정권 아래에서 억눌렸던 혁신계 활동 및 사회운동이 활발해졌다. 한국전쟁 동안 학살당한 사람들의 유족들이 학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활 동을 전개하였다. 노동자들은 노조 민주화운동을 전개하였고, 교원들도 교원 노조결성운동을 전개하였다. 장면정권이 무리하게 추진했던 2대악법반대투 4

3. 독재에 저항하다

  

쟁과 혁신계와 학생들이 주도하는 통일운동이 활발해졌다.

1961년 5월 16일 군대가 한강 다리를 건넜다. 단순한 훈련이 아닌 정권 을 장악하기 위해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쿠데타 세력들은 '통일운동 과 장면정권의 무능 때문에 은연자중하던 군이 병영을 벗어났다고 주장하 였으나 그것은 이유가 아니었다. 한국전쟁과 휴전을 겪으며 10만에서 60만 으로 늘어난 군대가 그 힘을 바탕으로 정권을 뒤엎은 것이었다. 권력지향적 인 정치 군인들은 군 내부의 인사 적체가 쌓이며 불만이 높아갔다. 5월 16일 전 새벽 해병대와 공수특전단이 한강 다리를 건너 서울로 들어와 방송국, 치안 국 및 국가 기간시설을 점거하였다.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5월 19일 국가재 건최고회로 개칭)를 구성하며 모든 기구와 권한을 장악하였다. 국가재건최고회 4 의는 입법•사법뼹정권을 장악하고, 7개의 분과위원회와중앙정보부, 재건국 민운동본부, 수도방위사령부, 감사원 등을 통괄하였다. 또 각 도지사와 경찰 의 주요 간부들을 군인들로 교체함으로써 지방과 치안권을 군이 장악하였 다.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모든 정보를 독점하고, 이를 기반으로 제3공화국은 '정보정치'와 '공작정치'를 통해 권력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군사정부는 사회악 제거와 창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는 목표 아래, 폭 력불량배의 근절로 사회의 명랑화를 기한다며 총 87,487명을 검거하여 총 1,243명을 검찰과 사법기관에 송지하고, 18,055명을 즉심에, 3,246명을 국 토건설사업장에 취역시켰다. 1962년 3월 16일 군정은 구정치인들의 정치활 동을 제한하는 법률인 '정치활동정화법을 만들었다. 군정은 '구정권하에서 의 언론의 공기성을 망각한 방종과 난맥상을 숙정肅正한'다며 총 1,170개의 언론기관을 대폭 정비하고 1961년 9월 12일 언론기관의 자율적 정화와숙 정을 목적으로 하는 한국신문윤리위원회를 창립시켰다. 1963년 민정이양을 앞두고 그전부터 중앙정보부는 새로운 정당을 만들 것을 준비하고 있었고, 사전에 당원들을 모집하고 교육시켜 조직을 구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앙정 보부의 4대 의혹사건'이 터지고 쿠데타 주도세력 중 반김종필계에서 집단 반 발하기도 했다. 1963년 10월 15일 지러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2년여의 군정에 대한 평가와 사상논쟁이 벌어지는 등 치열한 선거운동 속에 지러졌으

나 여당인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를 15만 여표 자 로 누르고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3년 12월 16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 해체되고 다음날 제5대 대통령 취임식이 지러지면서 제3공화국은 공식 출범하였다.

쿠데타가 성공한 이후 군정은 지방 통제를 강화하였다. 원래 한국전쟁 중인 1952년 최초로 지방선거가 실시되고, 그 뒤 제2공화국 시기에 지방선 거 대상이 지방자치단체장까지 확대 실시되었다. 쿠데타 직후에 각 도지사와 175

경찰 책임자 등에 군인들을 임명하였고, 1961년 7월 15일 지방공무원령을

개정하고 뒤이어 9월 1일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공포해 읍면자치제 1

를 폐지하고 군을 최말단 지방자치단체로 바꾸어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 를 강화하였다. 지방자치를 폐지하는 법과 함께 공무원에 대한 숙청의 강화 및 국토건설단원의 강제 연행 등을 통해 국토건설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정책에도 불구하고 편중적인 지역개발로 인해 전라도 지역이 발전하 지 못하였을 분 아니라 농촌이 대다수인 전라도의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많 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특히 농촌의 빈곤으로 인해 농촌을 떠나 도시로 향하 는 이촌향도離村向都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1972년부터 박정희 정권은 새 마을운동을 시작하였다. 새마을운동이 실시되며 마을 주거환경이 개선되는 등의 일부 성과도 있었으나 실적 쌓기와 주민 동원, 그리고 정책 담당자들의 입장에 따라 추진된 사업이라는 비판이 생겨났다. 게다가 새마을운동을 거 치며 전통적인 마을공동체가 파괴되어 갔다.

한국사회는 1960년대 이후 급격하게 근대화 되어 갔으며, 그 와중에 대 도시로 인구집중과 발전이 이루어졌다. 도시가 발전하는 것은 동시에 농촌의 쇠퇴와 연동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도시개발을 둘러싼 문제를 낳게 되었다.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국토를 재편한다는 명분 아래 수많은 사 람들을 희생시켰고, 그 대표적인 사건이 1977년 4월 20일 발생한 이른바 '무 등산 타잔(박흥숙)'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도시경관 정비사업을 한다며 강제 로 무등산 인근의 무허가 주택들을 없애려는 철거반원들에 맞서 박홍숙이 대항하는 가운데 네 명이 죽고 한 명에게 중상을 입힌 사건이었다. 언론은 박 4

홍숙을 무등산 타전으로 명명하며 그를 '괴물로 매도하였으며, 왜 이 사건이 발생했는가에 대해서는 보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지나친 도시개발 에 따른 피해가 주민과 철거반원의 갈등에서 파생한 불행한 사건이었다.

1977년 11월 11일 이리역에서는 화약을 실은 기자에서 한국화약 호송 원이 촛불을 붙여 잠든 사이에 화약상자에 옮겨붙는 바람에 대규모 폭발사 고가 발생하였다. 익산열차폭발사고(이리역폭발사고)로 인해 사망자 59명, 중상 자 185명, 경상자 1,158명 등 총 1,402명의 인명 피해와 수많은 가옥이 파괴 전 되는 등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정부는 사고 직후부터 관련 정보를 통제하며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복구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렇듯 이리역 폭발사고는 박정희 정권의 폐쇄적이며 일방적인 정책 추진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 결과 4 정확한 사망자 수는 집계되지 않은 채 한동안 금기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경제개발로 도시가 발전했음에도 오히려 농촌이 쇠락하게 되자 박정희 정권은 1970년대 들어 '새마을운동'을 제창하였다. 1970년 4월 '새마을가꾸 기' 사업은 시멘트 업계의 불황을 해소하려는 자원에서 농촌 마을 환경개선 사업의 추진으로 이어졌다. 계속되는 농촌의 불안은 정권으로 위기로 이어지 는 가운데 1972년 들어 박정희 정권은 본격적으로 새마을운동을 추진하였 다. '근면, 자주, 협동의 정신 아래 전국 각지에서 새마을운동이 추진되었다. 전라도에서도 새마을운동이 추진되어 새마을지도자가 양성되고 마을마다 '새마을부녀회'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우수 새마을로 전남에서는 장성군 북하 면 중평마을, 승주군 서면 증평마을, 무안군 청계면 화설당마을, 전북에서는 김제군 금산면 기룡마을, 익산군 왕궁면 상발마을, 남원군 주천면 용담마을 등이 선정되었다. 계속되는 정부의 압박에 따른 주민 동원과 '가정의례준칙' 과 같은 규율이 농촌의 주민들을 강제하였다.

그러나 박정희정권이 강력하게 추진하던 새마을운동으로도 농촌의 상 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농촌이 쇠퇴하게 되자 이를 극복하려는 농촌 내 외부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기독교계와 천주교계의 농민교육활동을 통해 배출된 농민운동활동가들이 가톨릭농민회와 기독교농민회 그리고 YMCA 농촌사업(농민회) 등을 조직하며 농민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런 가운데 농협의

전량수매라는 거짓 약속으로부터 발단이 된 함평고구마사건은 농민들의 투 쟁을 불러일으켰다. 1976년 11월에 시작된 전남 함평 지역 농민들의 고구마 투쟁은 1978년 4월까지 가톨릭농민회와 농민들이 투쟁함으로써 전국적 관 심사를 불러일으켰고, 결과적으로 유신체제기에 농민들의 승리로 귀결되었

다. 전북 고창에서는 삼양사 소작답 양도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시기부터 이어져 온 지주-소작관계에 따른 모순에 대한 농민들의 문제 제기와 투쟁이 었다. 177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잘못된 농업정책의 결과로 농촌은 피폐해졌다. 여

기에서 맞서 함평고구마투쟁과 삼양사 농민들의 투쟁이 전개되었고, 이 같은 1

농민운동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농민들은 1980년대에 농민회를 결성하는 한편 수세거부투쟁과 농지개량조합선거 투쟁, 농협민주화 투쟁, 미국 농축 산물 수집저지투쟁, 고추 생산비 보장과 전량수매 쟁취 투쟁 등을 활발히 전 개하였다.

해방 직후 노동운동은 이승만정권 초기의 탄압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의 생존권은 심각하게 위협 받게 되었다. 1959년 11월 광주전남의 노동쟁의의 주요 이유는 임금인상, 체 불임금, 무고한 해고 반대 등이었다. 4월혁명 이전에는 주로 탄광과 항만시 설 등 대규모 사업장에서 노동쟁의가 발생하였다. 4월혁명을 거치며 노동조 합이 대거 신설되고 전남방직은 6개월에 세 차례의 대규모 노동쟁의가 발생 하였다. 군산의 부두노조도 간부 총사퇴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는 등 각 단 위 노조의 민주화운동이 본격화 되었다. 그러나 5 •16군사쿠데타 이후 노동 운동이 탄압받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기에는 도시산업선교회와 노동야학(들 불야학, 백제야학) 등에서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전북지역 에서는 가톨릭노동청년회(JOC)가 출범하고 '노동자의 집(이리)'과 노동야학을 통해 노동자들과 연대하였다. 1981년 전북 이리 태창메리야스 노동자들은 민주노조 사수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1987년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며 노동운동은 새로운 단계에 진입하였다. 민주노조가 결성되고 이에 기 반한 연대조직이 결성되었다. 4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 당하고,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상태에서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직을 승계 하였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1979년 11월 10일 특별 담화를 통해 기 존 유신헌법의 절차에 따라 대통령 선거를 일단 실시하여 공백상태의 대통령 직을 채우겠지만 자기 대통령의 잔여 임기를 채우지 않고, 빠른 시일 내에 헌 법을 개정해 새로 정권을 구성하겠다고 약속했다. 최규하는 12월 6일 유신헌 법 절차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최규하는 대 전 통령으로 선출된 그 다음 날인 7일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였고, 나아가 야당 지도자 김대중에 대한 가택 연금도 해제하였다. 비록 계엄령이 지속되는 상 태이기는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계엄령이 곧 해제되고, 새로운 헌법과 민주적 4 인 정부가 만들어져 민주화가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되었다.

4. 한국 민주주의의 심장

 

그러나 독재자 박정희의 죽음이 곧바로 군사독재정권의 붕괴를 뜻하지 않았다. 박정희정권 하에서 일부 정치화된 신군부가 존재하였고, 이들은 박 정회 대통령이 사망한 이후 권력을 장악해갔다.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김 재규를 체포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10•26 사건을 조사하는 합동수사본 부의 책임자가 되어 군 실세로 부각하였다. 그리고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이 대표이던 신군부는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며 계엄사령관 이었던 정승화를 10•26 사건과 관련이 있다며 대통령의 사전 재가 없이 연행 하는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전두환과 그 추종세력들은 심지어 전방의 제9사 단까지 서울로 동원하여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과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 군 의 정치개입을 반대하는 군 장성들을 불법 연행하는 등 군사반란을 일으켰 다. 12•12군사반란 직후 전두환을 대표로 하는 신군부는 군 인사를 단행하 며 군 지휘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신군부는 정권을 장악하는 시도를 전개하

였다. 1980년 초부터 이른바 'K-공작'으로 알려진 권력장악 계획을 추진해갔 다. 1980년 4월 14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하였다 신군부의 움직임과는 달리 '긴급조치'로 대표되는 유신독재가 10•26사 건을 계기로 무너져 내리자 국민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요구하였다. 이른바

'민주화의 봄이 도래하였다. 어떤 지역보다 치열하게 유신독재에 저항하던 전 라도 지역에서도 민주주의를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학원에서, 공 장에서, 농촌에서 모두가 자유와 민주주의, 유신독재의 유산을 청산하려는 179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그러나 신군부가 다시 군부통치를 연장하려고

하자 학생들을 비롯한 국민들은 이것에 대항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신군 1

부는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국민들 의 인권, 기본권, 민주주의를 억눌렀다. 그리하여 언론에는 재갈이 물려지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던 대학을 군인들이 점거하였다. 5월 18일 전북대를 점거 하던 도중 공수부대의 폭력 진압이 진행되는 과정에 이세종이 희생되었다. 5 •18민주화운동 기간 최초의 희생자였다. 공수부대원들은 곧바로 학교에 남 아있던 학생들을 강제 연행하였다. 공수부대원들이 학교를 점거하는 것으로 이세종 죽음의 진상은 이내 덮어졌다. 전북대만이 아니었다. 광주를 점거한 제7공수여단은 전남대와 조선대에서도 전북대에서와 똑같이 무자비한 폭력 을 자행하며 학생들을 강제 연행하였다 1980년 5월 18일 아침 전남대 정문 앞에서는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에 항의하는 전남대 학생들의 시위가 발 생하였다. 학생들의 시위를 전남대에 주둔한 공수부대원들이 진압하는 것으 로부터 5•18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날 오전 금남로로 진출한 학생들 은 시민들에게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김대중 연행' 소식을 알리며 시위를 계 속하였다. 이날 오후 4시경부터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 은 시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광주 시민들은 학생시위에 함께 항의 시위 를 이어갔고, 계엄군은 국민들을 향해 잔혹한 폭력을 행사하고 종국에는 총 을 쐈다. 군의 발포에 대항하여 5월 21일 오후부터 시민들이 무장 저항하자 계엄군은 광주시 외곽으로 물러난 뒤 광주 외곽의 주요 도로를 봉쇄하였다. 계엄군이 물러가자 시민들은 옛 전남도청을 중심으로 한 공간에서 상처받은 4

공동체를 치유해갔다. 이와는 달리 광주 외곽에서는 봉쇄선을 지키던 계엄 군이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함으로써 많은 시민들이 희생되었다. 시민들 은 평화로운 해결을 요구하며 군과 협상하였으나, 군은 무조건 항복만을 요 구하였다. 그리하여 광주 시민들이 바랬던 평화와 한국 사회의 민주화는 끝 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5월 27일 새벽 어둠을 틈타 광주 시내로 들어온 공 수부대 특공조 대원들이 시민군들을 무력 진압하고, 뒤이어 탱크를 몰고 온 보병부대들이 광주 시내에 진주함으로써 5 • 18민주화운동은 끝이 났다.

전 전북 지역에서도 광주의 참상을 알리며 비상계엄에 대항하는 시위가 계 속되었다. 5월 19일부터 전북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주 시내에서는 이세종 의 죽음과 비상계엄을 알리는 시위가 전개되었다. 또한 천주교 전주교구청에 4 서는 광주를 탈출한 김현장의 '전두환의 광주살륙작전'이라는 유인물을 만 들어 배포하는 등 광주의 비극을 알리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5월 27일 전주 의 신흥고에서는 학생들의 시위가 전개되었고, 이후로도 신흥고 학생들 중 몇몇은 유인물을 제작해 전주 시내에 살포하는 활동을 계속하다 구속되기도 했다. 6월 24일 전국 최초로 개강한 전북대 의과대학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 하고 시위하였다 광주 시민들의 저항을 무력 진압한 신군부는 곧바로 권력을 장악하는 계획을 실현하였다.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출범시켰다. 국보위의 의장은 대통령이었으나 실권은 전두환 상임위원장에게 집중되었

다. 신군부는 국보위를 통해 집권을 준비한 뒤 제5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제5공화국은 국가안전기획부(중앙정보부의 후신), 보안사령부, 경찰 등의 기관을 통해 각종 공안사건을 조작하며 민주화운동세력을 탄압하였다. 이 미 제5공화국이 등장하기 전부터 민주화운동세력은 탄압받고 있었고, 삼청 교육대와 10.27법난,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을 통해 폭압적인 통치를 실행하고 있었다. 인권과 민주주의는 사라지고 국민들의 기본권이 침해받는 독재가 계 속되었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시위하다 희생되거나 끌려간 사람들이 늘어 났다. 5•18민주화운동을 겪으며 다른 어느 지역보다 많은 피해를 봤음에도 전라도 사람들은 전두환정권에 대항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5•18의 진상

을 알리고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오월운동이 계속되었다. 오월운동은 민주화 운동과 결합하여 계속되었다. 1983년 전두환정권의 '유화조치'와 새로운 국 면에 접어들었다. 제적생들이 복적하고 학생운동세력이 본격적으로 전두환 정권에 대항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런 가운데 깐접선거'를 규정한 제5공화국의 헌법을 개정하기 위한 개 헌운동이 본격화 되었다. 개헌운동은 1986년부터 시작되었으나 당시 야당인 신민당의 이민우 총재는 내각제 개헌 협상을 언급함으로써 그 저의를 의심케 181

했다. 이런 가운데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받

던 서울대 학생 박종철(언어학과 3학년)이 경찰의 고문을 받고 죽는 사건이 발 1

생하였다. 이 사건은 그렇지 않아도 전두환정권의 폭압에 분노하던 국민들의 감정에 불을 질렀다.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민가협)의 규탄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고문을 규탄하는 행사가 열렸다. 5 •18민주화운동 이후 광주 전남 에서는 전남민주청년운동협의회, 전남사회운동협의회 등을 결성하고, 1987 년 들어서 각 부문에서 박종철 고문치사를 규탄하며 시위하였다. 전북 지역 에서 전북인권선교협의회와 전주시기독교교회연합회 등이 주도하는 고문치 사 규탄시위가 전개되었다. 1987년 전두환 대통령은 이른바 4.13호헌조치' 를 발표하며 개헌 협상의 중단을 선언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각지에서 호헌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다. 4월 21일 광주 전남의 천주교 신부들의 단식농성을 시작으로 각계각층의 호헌반대운동이 활발해졌다. 전북에서는 3월 9일 천 주교 신부들의 단식농성, 3월 14일부터 기독교 목사들의 단식농성이 시작되 었다. 이 같은 흐름이 집약되어 1987년 5월 27일 서울의 향린교회에서 '민주 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출범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5월 18일 망월묘 역에서 4• 13호헌조치 반대 및 민주헌법쟁취 범도민운동본부'가 발족하였고, 전북에서는 5월 21일 '호헌반대민주헌법쟁취국민위원회'가 출범하였다. 6월 들어 본격적으로 전국 각지에서 호헌에 반대하는 투쟁이 전개되었고, 전라도 지역에서도 각 시군에서도 활발하게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결국 이 투쟁 의 결과 6월 29일 여당 대통령 후보인 노태우가 호헌을 철회하는 6•29선언 을 발표함으로써 끝나게 되었다. 이후 7~8월에 수십 년 동안 '경제개발'의 논 4

리에 희생과 고통만을 강요당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 자기 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6월항쟁은 헌법 개정뿐 아니라 이전의 운동과는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 였다. 과거 민주화운동에서 시민사회에 새로운 운동을 시도하려는 흐름이 만들어졌다. 여성, 환경, 교육, 기후변화 대응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각종 단체 가 조직되는 가운데 지방자치가 실현됨과 함께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단계 로까지 나아갔다. 이 같은 시민사회의 역량은 2000년대 들어 2002년 미군 전 장갑차에 희생된 효순이와 미선이의 추모집회를 시작으로 2014년 세월호 사 건 진상규명 요구 촛불집회, 2016~2017년 박근혜 정권 퇴진 촛불집회로 이 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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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새로운천년을모색하며

 

1991년에는 5•16군사쿠데타 이후 정부에 의해 중단되었던 지방자치제 가 다시 실시되었다. 그해 3월 기초의원 선거가 지러지고 6월에는 광역의원 선거가 지러졌다. 지방의회는 지방자치제의 토대이며 중앙과는 다른 새로운 시대, 지방정치, 풀뿌리 민주주의의 시작을 의미하였다. 생활 영역 전체의 진 보와 근본적인 생태공동체의 혁신을 추구하는 다원적 시민운동이 주장되고 그런 운동체가 줄을 지어 생겨났다. NGO라는 개념도 이때 본격적으로 도입 되었다.

한국근현대사에서 호남의 정치는 가장 역동적이며 진취적이라는 특성 을 내포하였다. 김대중이라는 호남 출신의 정치인뿐만 아니라 영남 출신인 노 무현에 대한 절대적 지지로 이어졌다. 이 같은 호남 정치의 특징은 그동안 호 남이 겪어온 정치적, 경제적 차별에 대한 반작용으로부터 발단하였다. 특히 한국 현대사에서 호남은 민주화운동의 핵심으로 '호남의 선박이 한국 정치 의 주요 사안을 결정하는 매개체로 작용하였다. 호남은 지역주의의 가장 큰

피해를 보면서도 동시에 이를 극복하려는 대안을 보여준 정치적 결단을 앞장 선 지역이었다.

욱 심화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수도권과 지방의 격자, 각 지역 간의 격차 는 더욱 심화되었다. 그럼에도 지방자치 시대 이후 지역 간의 격차를 줄이 고 수도권에 집중된 문제를 완화시켜야 하는 것이 '지방분권시대'의 새로운 과제로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광주 전남에서는 아시아문화중심도시와 해 양관광 기반 조성이 실시되었고, 전북에서는 자동차 부품•기계, 생물 산업, RFT(Radiation Fusion Technology. 방사능 융합기술) 산업, 신재생에너지 산업이 실시되었다. 여기에 새만금 개발과 서해안 간척지대에 대한 개발은 아직도 논 183

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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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정권부터 역대 정권을 거치며 수도권에 모든 게 집중되는 현상 이 한층 가속화되었다. 여기에 지역주의의 폐해로 인한 지역 간 불균등이 더

쟁 중이며, 2023년 세계잼버리대회를 유치하며 새로운 대안을 찾고 있다. 다 른 한편으로 영암 FI 그랑프리대회 유지, 부안방사능폐기장 폐기 등에서 많 은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채 논쟁이 진행 중이다. 그리고 전남의 나주혁신도 시, 전북의 혁신도시는 그동안의 지역차별에 따른 지역의 낙후성을 깨뜨리고 새로운 발전을 전망할 수 있는 새로운 시도로 평가할 수 있다 이전까지 수도 권에 집중되었던 공공기관의 지방 이전을 통해 지역균형발전을 꾀하려는 시 도로서 현재에도 그 가능성을 시험받고 있다. 향후 이 같은 혁신도시가 어떻 게 지역의 주민들과 연대하며 대학, 산업체 등과 함께 하는 대안을 찾을 것인 가는 새 천년을 맞이하는 새로운 과제가 될 것이다. 아울러서 광주는 아시아 문화중심도시, 전주는 전통문화중심도시로 자리매김 하며 기존의 산업화 중심의 발전과는 다른 대안을 찾고 있다. 그리하여 광주에는 국립아시아문화 의전당이 전주에는 한옥마을이 조성되었다. 2015년 개관 후 국립아시아문화 전당은 문화중심도시조성사업의 핵심 거점시설로서의 위상에 맞게 각종 공 연, 전시, 교육, 축제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였고, 그 위상에 걸맞는 복합적 인 문화예술기관로서의 기능을 지향하고 있다. 전주는 전라도의 중심지로서 정치껾제뼹정•문화의 중심이었던 전라감영을 복원째창조하는 사업, 전주 역사도심지구의 역사와 문화자산을 중심으로 한 도시재생사업, 손길로 만드

 

는 행복한 문화도시', 핸드메이드시티대andmade City) 사업 등을 추진하였다.

전라도는 천년의 역사에 걸맞게 문학을 비롯한 음악과 미술 등 수많은 문화 예술 분야에서 뛰어난 예술인과 작품을 배출해왔다. 특히 5 •18이라는 국가폭력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지향을 예술로 승화시기며 뛰어난 성취를 이 184 루기도 했다. 이 같은 전라도의 문화예술적 역량에 기반하여 전라도 각 지역 에서는 지역의 실정에 맞는 축제를 개최하는 한편, 전주세계소리축제와 전주 국제영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광주• 전남에서도 광주비엔날레를 필두로 전남 전 수묵비엔날레, 디자인비엔날레 등의 전시회를 개최하고 있다.

전라도는 고려, 조선, 일제 식민지, 대한민국을 거치며 일천년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인물과 사건, 그리고 수많은 문화유산을 간 4 직하고 있다. 한반도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전라도는 그 중심에서 난관 을 극복하는 주체로 활약하였다. 이순신 장군의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는 말처럼 그 역사적 사명을 다하며, 민족의 영욕榮辱의 세월에서 늘 올바른 선택을 한 지역이었다. 이 같은 전라도의 특성은 한국 현대사에서도 크게 다 르지 않았다. 해방 공간에서의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에서, 민주 화운동에서 전라도는 늘 중심에서 활동해왔다. 이제 그 찬란한 역사에 걸맞 게 지난 천년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천년을 대비해야 할 것이다.

노영기

 

제1장 종교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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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백제의 불교수용과 미륵신앙 종교는 초인간적 세계를 믿는 신넘체계와 의례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는 토템이나 정령, 무속, 조상신 등을 믿어 오다가, 삼국시대에 이르러 유교와 불교 등이 중국이나 인도로부터 유입되면서 종교교리와 교단조직을 갖춘 고 등종교로 발전하였다 고구려에서는 372년(소수림왕 2)전진에서 순도道를 보 내 불상과 불경을 전하였고, 백제는 384년(침류왕 0 동진에서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불교를 전하였으며, 신라는 눌지왕 때 고구려에서 묵호자가 들어와 불교 를 전파하였으나 크게 성행하지 못하다가 527년(법흥왕 14)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에서는 불교가 전해진 뒤, 385년(침류왕 2)에 한산潢山에 절을 세웠으 며, 392년(아신왕즉위년) 2월에 교서를 내려 불법을 믿어 복을 구하고자 하였 다. 백제에서는 주로 수도를 중심으로 왕실에서 불교를 받아들였으며, 율학

 

이 깊이 연구되고 미록신앙이 성행하였다. 미록신앙의 경우에는 위덕왕 때 신라 승려 진자가 미륵의 화신을 만나기 위해 공주의 수원사를 찾아왔고, 일 본에서는 584년 사신을 백제에 보내 미록석불 1구와 불상 1구를 보내줄 것 을 청했다.

전라도 지역에서도 미록신앙이 크게 성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백 제 무왕은 익산에 미록사와 제석사를 짓고 왕궁리에 궁궐을 수축하였다. 미  

록사는 중원에 목탑과 금당, 동원과 서원에 금당과 석탑 각각 1개씩을 배치 하여, 3탑 3금당의 미록하생신앙을 반영하고 있다. 목탑은 선화공주, 두 개의 석탑은 백제의 지배세력인 사택왕후가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

나. 통일신라의 미륵신앙과 선종의 유행 백제에서 성행하였던 미록신앙은 통일신라 때에 이르면 진표에 의해서 점찰신앙을 결합시킨 보다 대중적인 미록신앙으로 발전하였다. 진표는 금산 사에 출가하여 순제順濟로부터 점찰법과 지장신앙에 접하였고, 끄세 때 변산 불사의방을 기도처로 정하고 29살 때 지장과 미록보살을 친견하였다. 미륵보 살은 진표에게 점찰경을 주었고, 189간자를 건넸는데, 특히 제8간자와 제9 간자는 미륵의 손가락 뼈로 만든 간자였다고 한다. 진표가 주석한 금산사는 미륵이 머무는 사찰로 여겨지게 되어, 미록장육금상을 조성했으며, 용화삼 회의 미록하생을 의미하는 미록전의 삼층 전각이 만들어졌다. 3층의 미록전 은 미록사의 3탑 3금당이 변형된 것이다. 이후 진표는 보은 속리산을 거쳐 강 릉인 명주로 갔고, 다시 금강산으로 들어가 발연사를 창건하였으며, 아버지 를 모시고 와서 효도를 다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진표의 미륵, 점찰신앙은 진표의 제자 영심永深을 통해 속리산에 전해지고, 다시 진표의 유골이 있었던 금강산으로 이어짐으로써 진표중심의 횡단루트를 형성하였는데, 영심永深의 제자이자 헌안왕의 왕자인 심지心地가 뼈간자를 대구 동화사로 옮김으로써 속리산, 대구, 경주로 이어지는 종단루 트가 형성되어 미록신앙 체계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후 후삼국시대에 석충  i中이 다시 왕건에게 뼈간자를 건냄으로써 개성, 속리산, 대구, 경주에 이르는

거대한 종단루트가 확대 완성되었다. 이러한 미록신앙의 횡단루트와 종단루 트는 후백제의 견훤과 후고구려의 궁예가 횡단루트를 통해 신라를 압박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으나, 궁예와 견훤이 왕건에게 패배함으로써, 고려와 신라로 이어지는 종단루트에 밀리게 되어 미록신앙에서 진표가 언급되지 않게 된 것 으로 보인다.

신라하대에는 전라도에 선종이 크게 유행하였다. 이러한 선종의 유행은 당나라에 불법을 구하러 간 승려들의 활동에 힘입었다. 신라중대에 꽃 피운 전 의상의 화엄사상이 점차 현학화되어 부처님의 가르침과 거리가 있다고 느끼 는 인물들이 많아졌고, 신라 골품제의 한계나 김현창의 난의 여파를 벗어나 고자 한 승려들이 중국에 가서 선종을 배워온 것이다. 당시 유학생들이 수용 4 한 선종은 6조 혜능의 가르침을 토대로 한 마조 도일 계통이다. 마조는 평상 시 마음이 부처이고 일상생활이 도라고 주장하여 서당 지장 등 많은 제자를 얻었다. 장흥 가지산문의 개산조 도의, 전라도 운봉의 실상산문의 개창자 홍 척, 곡성에 동리산문을 연 혜철은 모두 마조의 제자 지장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았다.

이렇게 당나라에서 전해진 선종은 전라도 지역에 크게 성행하였다. 실상 산문은 홍척과 수철로 이어지며, 화엄종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와 백장청규 와 같은 선종산문의 규율을 내세우며 발전해갔다. 가지산문은 도의, 염거를 지나 보조선사 제정 때에 크게 꽃을 피웠다. 도선은 혜철의 심인을 얻고 광양 의 옥룡사에서 주석하면서 동리산문과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쌍봉사의 철감 선사 도윤도 크게 활약하였으며, 연곡사, 무주 황학난야 등은 선종의 대표적 인 사찰로 저명하였다.

이들 선승들은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널리 보시행을 실천하였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 회해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지 방에서 사찰의 자급자족을 중시하였고, 풍수지리설을 통해 자신들이 자리 잡은 선종 사찰이 최고의 길지임을 주장하여 이곳을 중심으로 포교의 중심 지로 삼았다. 불상도 구리보다 쉽게 얻을 수 있는 철불을 제작하고 상 표면에 개금을 함으로서 민중들을 배려하였다. 선승들의 자 마시는 문화는 다완과

같은 청자 생산을 가능하게 하였다.

지방에 새로운 교화의 중심지로 부각된 선종 사찰에서는 기존의 사찰 과 다르게 조사당을 건립하여 조사를 현창하고, 선승들이 죽은 뒤에는 승탑 과 탑비를 제작하였다. 승탑은 예배의 대상이 되었고, 석비는 거북이와 용을 통해 영원성을 나타냈으며, 비문의 내용은 산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데 주력 하였다. 선종 사찰은 신라하대 불교의 새로운 중심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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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고러시대 불교의 결사운동과 민간신앙의 성행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전라도에서는 불교가 크게 발달하였다. 태조 왕

건이 훈요십조를 통해 승불정책을 표방한 뒤, 매년 연등회, 팔관회를 개최하

였으며, 국사와 왕사제도를 두어 불교로부터 후원을 받았으며, 대몽항쟁기인 1251년(고종 38) 대장경을 간행하였다. 또한 불교의 폐단을 막기 위해 고려 중 기에는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하였고, 고려 후기에는 지눌과 요서며 의해 결 사운동이 전개되었다. 전라도에는 무등산이나 월출산, 지리산 일대를 중심 으로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는데, 강진 무위사는 고려 건국을 도운 형미가 주 석하였고, 조계산 송광사는 정혜쌍수의 불교개혁, 강진 백련사는 백련결사의 장소였으며, 화순 쌍봉사는 최씨무인정권의 기반이 되었고, 화순의 운주사 는 천불천탑의 신비를 간직한 곳, 김제 금산사는 미록신앙의 도량으로 명성 이 높았다.

특히 무신정권기에는 전라도가 고려 결사운동의 중심지였다. 순천 송광 사에서는 지눌이 1205년(희종 1)에 수선결사修禪結합를 시작하였다. 지눌은 「수심결修心訣을 지어 수선결사의 참여자들에게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원돈 신해문圓頓信解門, 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의 세 가지 수행법을 제시하였고,「계 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을 지어 수행자들의 일상생활과 예불태도, 수행자의 마음가짐을 규정하였다. 수선결사는 지눌에 이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 던 혜심(慧諶1178~1234)이 주도하였는데, 혜심은 지눌의 가르침을 널리 전파 하였으며, 불교와 유교의 가르침이 본질에 있어서 차이가 없다고 강조하였다. 국왕인 강종康宗이나 무신정권의 집정자 최우崔瑀를 비롯해서 많은 왕족, 고

위관료, 거사들이 결사에 참여하였다. 혜심 이후로는 몽여夢如, 혼원混元, 천 영天英등이 수선결사를 이어갔으나, 점차 무신집권자들이 원찰로 삼았으므 로 수선결사의 본래 정신은 약화되어 갔다 강진의 만덕산에서는 원묘국사 요서까 1232년(고종 19)에 보현도량을 결 성하고「백련결사문白蓮結社文」근 공포함으로써 백련결사가본격적으로 시작 되었다. 요서는 당시 불교의 문제점을 바로잡기 위해 교관과 천태종의 실천수 행법을 중시하였다. 요서는 정토왕생과 천태지의의「법화참매삼의」에 근거 전 한 법화삼매를 중요한 행법으로 실천하였다. 요세 이후 백련결사는 국자감시 에 합격한 천인天因이나 예부시에 급제한 천책이 법화신앙과 정토신앙을 통 합한 요세의 전통을 이어갔다. 그러나 원간섭기에 이르러서는 천책의 제자 4 정오丁五가 요서까 아닌 의천의 위상을 높이 평가하여 백련결사의 정신이 약 화되고, 천책의 제자 경의景宜와 경의의 제자 의선義旋등이 원 황제의 복을 비는 묘련사에 활동함으로써 천태종이 친원화되어 갔다.

고려시대에도 민간산앙이 성행하였다. 신앙의 형태는 산천山川, 성황 

 , 무속피谷신앙 등 다양하였는데, 산천신이나 성황신의 경우 국가제사나 군 현제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전라도 지역에서 국가제사의 대상이 된 산신 으로는 지리산, 월출산, 무등산, 금성산 등이다. 지리산, 월출산, 무등산은 신 라 때부터 제사를 지냈던 것에 비해 금성산은 고려시대에 국가제사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 산에는 산신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왕실과 국가의 안녕을 빌 었다. 수신도 승배하였는데, 나주 지역에서는 고려의 사방을 상징하는 남해 신, 전주지역에서는 비를 내리는 신통력이 있다고 여긴 마포 신이 있었다. 또 한 각 군현에서는 고을의 수호신인 성황을 모신 성황신사를 두고 제사를 올 렸다. 전주나 곡성, 순천, 순창에서 그러한 성황신앙을 살펴볼 수 있다. 무속 신앙도 성행하였는데, 산천신이나 성황신을 모신 신사에는 각각 무격이 있어 서 각종 의례를 거행하였다. 지방관이나 백성들은 가뭄이나 수해와 같은 재 난이 닥치면 무격을 찾았고, 길흉화복이나 미래를 점칠 때, 누구를 저주할 때, 아플 때에도 무격을 찾아와 신령을 섬기며 무격의 말을 따랐다. 금성신당 의 경우에는 무격의 위상이 높았다. 금성산의 무격이 왕궁을 갈 때에 나주관

아에서 역마를 내어주었고, 주현의 수령들이나 국왕이 공복을 입고 마중하 였을 정도로 무격을 예우하였다.

라. 조선시대 불교 사찰과 법통의 계승 및 예언사상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유교가 장려되고 불교가 억압되었다. 태종때에는 242개에서 88개의 사찰로 축소되고, 세종 때에는  

교종과 선종 18사만을 배정하였다 세종 말부터 세조 때까지, 그리고 명종 때 문정왕후 등이 일시적으로 불교를 보호하기도 하였으나, 불교사찰이 축소되 고 사원노비가 혁파되었으며, 도첩제가 실시되어 승려가 되기 어려워졌다. 임 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승병들의 활약으로 불교에 대한 인식이 호전되고 1

산성의 수축과 수비를 담당하였으나, 여전히 국가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자 급자족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종이제조를 사찰이 담당함으로 씨, 큰 사찰은 80여 권, 작은 사찰은 60여 권의 종이를 생산하고 납품하였으 며, 갖가지 잡역 부담에 시달려 없어진 사찰도 많았다.

전라도의 사찰로는 김제의 금산사, 고창 선운사, 장성의 백양사, 순천의 송광사와 선암사, 구례 화엄사, 해남 대흥사, 장흥 보림사, 곡성의 태안사, 영 암 도갑사, 강진 무위사, 순천 향림사, 화순 만연사, 그리고 승병사찰로 유명 한 완주의 위봉사와 여수 흥국사 등이 저명하였다. 전라도는 조선후기에 청 허 휴정의 문인들이 중심이 된 청허계, 부휴 선수의 문인들이 중심이 된 부휴 계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청허계는 사명 유정의 사명파, 정관 일선의 정관파, 소요 태능의 소요파, 편양 언기의 편양파 등 4대 문파를 이루었다. 특히 소요 파는 17세기 후반 대둔사를 근거지로 강학의 전통을 열었으며, 편양파는 휴 정의 사상과 수행기풍을 계승하여 삼문수업체계를 정비하였으며, 청허계 내 의 최대문파를 이루었다. 부휴계는 지리산권 일대와 송광사 등에서 발전하 였는데, 부휴 선수, 벽암 각성, 취미 수초, 백암 성총으로 이어지는데, 성총은 송광사가 지눌을 계승하였다고 선언함으로써 부휴계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 였다. 부휴계는 벽암 각성의 문도 모운 진언에서 비롯되는 교학계보로도 유 명하다.

이들 청허계와 부휴계는 임제종의 법통을 강조하면서도 교종과 정토의 요소를 수용하여 경절문, 원돈문, 염불문 등 삼문수학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삼문수학의 전통은 먼저 불교강원의 교육과정에 영향을 끼쳤다. 17 세기 전반 성립된 강원의 이력과정은 백암 성총에 의해서 사교과와 대교과가 확정되고, 선문염송이 대교과의 과목으로 정해지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백 암성총은『화엄경소초』등 강원교재와 관련된 불서를 202권을 간행하였다. 이후 18세기에는 화엄학이 유행하여 연암 유일과 최눌 사이에 부처와 중생 전 의 마음이 같은지 다른지에 대해서 논쟁이 일어났고, 백파 긍선과 의순 사이 에 조사선과 여래선, 의리선의 논쟁이 일어났다.

이러한 삼문수학의 전통과 함께 조선후기에는 염불수행과 관련이 있는 4 정토신앙 등 불교민중화가 크게 일어났다. 이러한 불교 민중화는 각종 천도 의식이나 예불관련 서적, 염불을 통해서 극락에 왕생한다는 염불문 서적이 크게 늘었던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전기에는 불교억제책으로 실시된 토지와 노비 정리로 경제기반이 극도로 위축되었고, 사찰에서 종이를 만들어 납품하는 지역紙f殳의 부담이나 잡역 부담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천도제와 기복신앙은 여전 하였고, 왕실 원당이 크게 늘었다. 이러한 사찰에서는 각종 보사補寺활동과 계의 조직으로 사찰을 유지해 갔으며, 해남 대흥사나 영광 불갑사 등은 많은 토지를 경영하였다.

조선후기에는 민간에서 도교신앙과 정치적 예언서인 비기秘記가 널리 유 행했다. 왜란과 호란이 터지고, 불안정한 정국으로 인해 새 왕조가 들어설 것 이라는 정치적 예언서인『정감록』이 널리 퍼지고, 난세에도 일가족을 보존할 수 있는 십승지+勝地를 찾는 사람이 많았다.

『정감록』은 1628년(인조 6)에 전직관리 윤운구 등이 주장한 진인출현설 이후 진인에 의해 새로운 왕조를 세운다는 예언사상으로 발전한 것이다. 정 감이라는 가공의 인물이 이심, 이연 형제와 전국을 유람하고 국운을 예언하 였으며, 전쟁과 역병의 참화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십승지가 제시되었다. 운봉 지리산이 십승지의 하나로 거론되고, 덕유산, 내장산, 추월산, 변산, 조계산,

월출산, 팔영산 등이 길지로 손꼽혔다. 이러한『정감록』의 영향으로 1860년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하고 5만 년 태평세월을 예언하였으며, 1894년 동학농 민혁명 무렵에는 민간에 노래형태를 떤 비기가 널리 유행하고, 전봉준도 에언 가로서 명성이 높았다.『정감록』에는 개성이 역사의 중심으로 부상한다는 주 장을 하고 있는데, 고조선과 고구려의 부활을 소망한 가운데에서 나온 것으 로, 서북출신 술사들의 소망이 담긴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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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조선후기 천주교 전파와 동학교세의 확산

19세기에 이르면 서세동점의 추세속에 조선에도 천주교가 널리 보급되

고, 동학이 출현하였으며,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조선은 개항을 하고 더 이상

봉건정부와 유교를 고집할 수 없게 된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포교자유가 인 정되고, 보국안민과 제폭구민을 앞세우며 동학도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해 나 갔다. 불교도 포교의 자유를 얻게 되고, 20세기 초에는 동학을 계승한 천도 교가 각종 사회운동과 종교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국권 상실을 전후한 시기 에는 대종교, 증산교, 원불교 등 각종 신종교가 출현하였다 전라도에도 18세기 말 천주교가 들어왔다. 1784년 겨울 이벽의 집에 조 선교회가 설립되었을 때 전주 초남이에 살던 유항검이 권철신(암브로시외을 찾아가 교리를 배우고 이승훈(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아우구스 티노였다. 진산에 살던 윤지충도 정약전에게 교리를 배우고 이승훈에게 세례 를 받았는데, 유항검은 윤지충의 이종사촌, 윤지충은 정약용의 외사촌으로 친인척관계이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를 통해 유교식 조상제사를 금 하는 내용이 천주교 신자들에게 전해지니 1791년 5월 윤지충은 어머니 권씨 상을 당해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모시지 않았다. 8월 장례식 때 이 사실 이 발각되어 조정에서 윤지충과 외사촌 권상연이 전주 남문 밖에서 참수형 을 받았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서학서를 모두 소각하고 서학의 전파를 금지시 켰다.

그러나 이후로도 고산 저구리로 이주한 윤지충의 동생 윤지헌, 전주의 유항검, 무장의 최여겸 등에 의해서 천주교가 전파되어 나갔고, 1795년에

는 주문모 신부가 고산과 전주 유항검을 방문하여 성사를 집전하고 강론을 했다. 이후 전라도 지역은 1801년 신유박해 때에 유항검, 유관검, 윤지헌 등 200여 명이 체포되어 20명이 죽고 42명이 유배되었는데, 전주 출신이 절반 이상이었다.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고산과 금산 일대를 비롯해서 전라도 각처에 천주교 신자들이 늘어갔다. 1827년 2월에는 곡성 덕실마을의 옹기점 의 천주교 신자들이 적발되면서 전라도 각지에서 240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전주에 붙잡혀 왔다. 이후로도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를 받으면서 지속적으 전 로 신앙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890년대에 전라도 지역에는 동학이 급속히 전파되었다. 동학의 교주 최제우가 1861년 11월 남원 은적암隱寂庵에서 머물며「논학문論學文」•「안심 4 가安心歌」•「교훈가」•「도수사道修龕」등을 지으며 동학을 체계화하였으나, 경 주로 다시 떠나 1864년 3월 처형된 이후로는 동학이 이어지지 않았다. 이후 1880년대 후반 최시형에 의해서 익산이나 삼례, 임실 등지에 전파되었다가, 1890년대 초반에 전라도 대부분 지역에 동학이 전파되었다. 이른바 '남접南 전의 거두들인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이방언, 오지영 등이 동학에 입도하 였다. 이후 1892년(고종 29) 1월 '삼례집회'를 열고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였 고, 이듬해 4~5월 보은에서 2자 신원운동이 전개되었을 때에는 전라도 금 구에서 전봉준, 서장옥, 손화중 등은 탐관오리 척결과 외세배격을 외졌는데, 1894년에는 반봉건, 반외세의 동학농민혁명으로 발전해갔다.

바. 한말 불교와 기독교의 발전 조선시대 이단으로서 배척을 받아왔던 불교도 1895년에는 도성출입이 허용되면서 포교의 자유를 얻게 되고, 1902년에는 사사관리서寺社管理署가 설치되어 국가의 통치영역내에 편입되면서 근세 불교로 탈바꿈되어갔다. 그 런데 이러한 조선불교의 변환은 일본불교의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도성출 입금지를 해제시킨 것은 일본 승려 사노 젠레이[佐野前勵]의 건의를 통해서였 다. 일본불교는 개항장을 중심으로 일본 거류민들에 의해서 신앙되었는데, 호남의 경우 목포와 군산이 개항장이었기 때문에 일본불교가 들어왔고, 광

주 등지에서는 식산흥업, 실업학교 설립 자원에서 포교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대한제국기에 체계적인 교단 조직을 위해 노력하여 1908년 3월 원종종무단이 설립되었는데, 전라도 지역은 1911년 송 광사, 쌍계사 등지에서 임제종 총회를 개최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31본산 제 도를 두었는데 전라도에는 7본산이 있었다. 위봉사, 보석사, 선암사, 백양사, 송광사, 대흥사, 화엄사 등을 두고 말사를 관할하게 하였다. 이들 사찰에서는  

보통학교를 승려들의 기초교육을 담당하고, 중앙의 불교전문학교에 보내 체 1

계적인 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당대의 대표적인 승려로는 백양사 주지로서 중 앙불교교단을 이끈 만암 송종헌, 내장사에서 선농불교 운동을 전개한 백학

명, 독립운동과 불교청년운동에 매진한 응송 박영희 등이 저명하였다. 1937

년 1월 순천 선암사에서 결성된 전남 5본산(백양, 송광, 선암, 대흥, 화엄사)은 경 남 3본산(범어, 통도, 해인사)와 힘을 합쳐 총본산 건설운동을 전개하여 1938년 10월 총본산 건물이 완공되고 태고사太古寺가 인가를 받게 되었다.

1890년대에는 전라도 일대에 미국 남장로회의 선교사들에 의해 개 신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1882년 미국과 수호조약 체결로 북장로회 의 알렌대.N. Allen)이 입국하였고 1885년에는 북장로회의 언더우드대℃. Underwood), 남감리회의 아펜젤러대.G. Appenzeller) 등이 입국함으로써 조선 에도 개신교가 전파되었다. 전라도 지역은 1892년 미국 남장로회의 테이트, 레이널즈, 전킨 등이 내한한 이후 주로 남장로회에서 선교를 담당하였다. 이 들은 전라도 주요 지역에 스테이션(station)'이라는 선교거점을 만들고, 구내 에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여 주민들을 모으는 간접선교 방식을 선택했다.

이에 따라 전주, 군산, 목포, 광주, 순천 등 스테이션에 전주의 신흥학교 와 기전학교, 군산의 군산영명학교, 목포의 사립목포영흥학교, 광주의 승일 학교와 수피아여학교, 순천의 매산남학교, 매산여학교 등의 학교가 설립되었 고, 1907년에는 군산예수병원, 1902년 전주예수병원, 1916년 목포 프렌치 병원, 1912년 광주제중원, 1916년 순천의 알렉산더 병원이 설립되어 많은 환 자들이 찾아왔다. 이처럼 남장로회에서는 스테이션을 중심으로 교육, 의료를 통한 선교사업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일제에 의해 신

사참배가 강요되자, 1937년 남장로회 선교사 총회에서 신사참배 반대안을 발표하고, 학교를 자진 폐교하였으며, 1940년대에는 선교사들도 미국으로 철수하였다.

아. 일제강점기 신종교와 원불교 발전

1900년대에는 동학농민혁명으로 잠시 주춤했던 동학이 다시 활발해 졌다. 전라도에서도 대체로 3세 교주 손병희의 문명개화노선을 지지하여, 전 1904년 11월 다수의 진보회를 조직하였고 혹의단발을 하였다. 1905년 12 월 천도교로 종교명칭이 바뀌면서 1906년에는 전라도에는 광주대교구, 강진 대교구, 전주대교구, 익산대교구, 태인대교구를 두어 산하의 교구를 관리하게

4 하였다. 천도교인 수도 1906년 4,808명에서 1918년경에는 1만 1,166명으 로 증가하였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양한묵과 박준승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고, 전주, 익산, 김제, 임실, 순창, 남원, 구례 등지의 천도교인들에게 독립선언서가 전 달되어 기독교인 등과 함께 임실, 정읍, 순창, 익산, 김제, 남원, 장성, 장흥, 고 흥, 완도, 진도 등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3.1운동 이후로도 전라 도 천도교인들도 일제에 대한 협력에 부정적이었다. 1920년대 초 신문화운 동 건설에 동참하였으나, 1925년 천도교 본부의 자치운동에 맞서서 전라도 교인들은 박인호를 제4세 교주로 삼아 중앙종리원을 세우고 천도교 구파로 분립하였다. 이후 전라도 교인들은 신간회에 참여하여 비타협적 민족운동을 계속하였고, 1926년 초 천도교연합회에서 중국 길림성 길림에 고려혁명당을 조직할 때 전북 익산과 옥구, 김제 등지에서 112명이 집단이주하였다. 1938 년에 '무인멸왜기도사건' 등 항일운동에 참여하여 장흥의 김재계, 임실의 최 종기, 김한경, 박성언 등이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1909년에는 전라도 벌교의 나철과 강진의 오기호, 김제의 이기 등은 단 군교를 중광하였고, 1910년 8월 5일 대종교로 개칭하여 국권상실의 위기 상 황에서 자주독립사상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 으로 국내에서 활동이 어렵게 되자 북간도와 서간도에 시교당을 설치하고 간

부를 파견하여 포교활동의 기반을 마련하였고, 1914년 5월 13일에는 길림성 화룡현 삼도구로 대종교총본사를 이전하였다.

나철은 이곳을 중심으로 청림학교 등 교육기관을 설치하고 대종교 총 본사 산하에 동•서•남•북 4개 교구와 중국, 일본, 구미 지역을 관장하는 외도 교구 등 5대 교구를 설치하였으며, 대종교의 경전을 보관한 고경각과 배달민 족 지도자를 모신 고령사를 설치하였다. 이후 나철은 1916년 8월 15일 구월  

산의 삼성단에서 일제의 대종교 탄압에 항거하여 순교하였고, 이후 2세 교주 김교현과 사교 서일 등이 대종교를 이끌어갔다. 서일은 대종교 교리를 체계화 했을 뿐만 아니라 중광단에 이어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를 이끌었으며, 총사 령관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 대첩을 이끌었다. 그러나 대종교는 이후 일제와 1

중국 군벌의 탄압으로 총본사가 만주 각지를 전전하게 되었고, 1942년 11월 19일 3세교주 윤세복과 안희제, 이용태 등 기명이 검거되고 이 중 10명이 순 교하였다. 나철의 큰 아들 나정련과 둘째 아들 나정문도 이때 순교하였다.

일제강점기 전라도 지역에는 증산교와 원불교 등 여러 신종교가 출현하 였다. 정읍의 강일순姜특卓은 1901년 모악산 대원사에서 수도하던 중 선천의 도수를 고쳐서 후천 개벽을 여는 천지공사天1蚣事를 스스로 행하겠다고 선 언하고, 전주, 태인, 정읍, 고부, 순창, 함열 등 전라북도 각 지역에서 환자를 치료하면서 천지공사를 행하였다. 강일순은 종교를 창시하지 않고, 1909년 39세로 타계하였는데, 강일순 즉 강증산의 천지공사나 의통醫通, 도통道通을 계승하려는 노력이 일어나 많은 교파가 생겨났다. 그 중 정읍 대흥리 출신 자 경석車京石은 강증산의 부인 고판례高判禮의 종교 체험을 계기로 교인들이 집 결되자, 천지개벽의 문로路가 자기에 의해 열린다고 주장하였다. 흔히 보천 교로 불리우는 이 종교는 천제天祭를 지내고 교도수가 6백만 명에 달한다고 할 정도로 크게 성장하였다. 그러나 이 보천교는 일제의 회유와 압박으로 시 국대동단이란 친일단체를 만들게 되면서 혁신운동이 일어나서 교단이 분열 하였고, 차경석이 죽자 일제의 유사종교 해산령에 따라 교단이 해체되었다. 또한 차경석에 반발하여 김형렬金亨烈은 금산사의 미륵불을 영제로 받드는 종교단체를 만들었다. 미록불교로 일컬어지는 이 종교는 1919년 김형렬과 신

 

도 수십 명과 함께 금산사에서 독립운동을 한다고 밀고하여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무극도나 갱정유도 등도 성행하였다. 무극도는 조철제가 1917년 강증산의 대순진리를 깨닫고 만주에서 귀국하여 1925년 태인 도창 에 무극도를 창도하여, 신도가 10만 명에 이르렀다. 갱정유도는 1929년 전라 198 북도 순창 출신 강대성이 자신의 종교적 체험을 바탕으로 창시하였다. 갱정유 도는 동서양의 합일한 하나의 기운인 일기-氣로 도덕문명 세계를 이루는 것 을 목표로 한다. 어려서부터 서당교육을 받고 갱정유도의 표지로 한복과 갓 전 등 전통적인 복장을 입고 있으나, 사회개혁에 적극적이다.

원불교는 영광출신의 소태산 박중빈의 깨달음을 토대로 창립한 반농반 선半農半禪의 자립적인 종교공동체이다. 박중빈은 어려서부터 우주와 인간에 4 대한 깊은 고뇌를 한끝에, 그의 나이 26세 때에 1916년 4월 28일 깨달음을 얻고 정신개벽을 통한 종교운동을 시작하였다. 제자들과 함께 저축조합을 만들어 미신타파, 근검저축운동을 시작하였고, 모은 돈으로 간척지를 개척 하였다. 간척지가 완성된 1919년에는 특별기도를 통해 백지白指에 혈인血印이 나타나는 법인성사法認聖事를 이루었다. 이후 그는 변산에 들어가서 교법을 제정하고 1924년에 전라북도 익산에 교명을 걸고 종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신룡리에 선원을 설립하여 낮에는 토지를 개척하여 생활의 근원을 삼고 밤 에는 불법의 진리를 연구하였으며, '신정의례新定儀禮'를 제정하여 예법을 혁신 하였다. 이러한 원불교의 교리는 일원상의 진리를 근거로 삼학팔조三學八條의 수행문과 사은사요四心四要의 신앙문을 실천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삼학팔조 의 바른 수행과 깨달음을 통해 불법을 생활화하고, 사은사요의 은혜를 알고 보답하며 무아봉공하는 실천을 통해 처처가 불상인 낙원세상을 만들어간다 는 것이다. 소태산 사후 2대 종법사 송규는 해방 후「건국론」을 제시하고 전 재동포戰災同胞구호사업, 한글보급, 교육사업에 주력하여 국가 건설에 적극 참여하였다.

김봉곤

2 사상

 

전라도는 1천여 년간 전라인 특유의 수용성과 개방성을 바탕으로 일찍 부터 중국으로부터 선진 사상을 수용하고 이를 창조적으로 응용하여 한반 도 내에서 어느 지역보다 다채로운 사상적 면모를 보여주었다. 해양 문화와  

대륙 문화가 공존하는 전라도 지역에는 고대사회를 주도했던 무속적인 사상 적 경향을 뒤로 하고 중국으로부터 유학 사상, 불교 사상 등 세계와 인간에 대한 주체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한 선진적인 사상을 일찍부터 수용하였다. 그리고 이를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응용하는 한편, 새롭게 조성된 사상적 전 1

통을 일본에까지 전파하여 국내는 물론, 국제적인 사상의 발전을 이끄는 중 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전라도에서 조성된 여러 사상은 안정기에는 사회와 문화의 번영을 이끄 는 바탕이 되었으며, 대내외적 모순이 가중되는 위기의 시대에는 새로운 변 화와 개혁을 조성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세계 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도모하며 개혁적 경향을 보여주었던 전라도의 여러 사상은 한국 사상의 다채로움을 이끌었다.

1천여 년의 역사 속에서 전라도에서 조성되고 지속된 사상은 소통과 개 방의 지향점이 부각된 것을 비롯하여 실천적인 의리 정신의 구현, 다양한 사 상과 학파의 공존, 개혁 지향적인 실천성의 부각 등 특징적인 면모를 보여주 었다. 그리고 전라도에서 일구어낸 문학과 예술 정신의 기반으로서 그 역할 을 담당하며 전라인의 삶 속에 오늘도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가. 주체적 응용을 통해 국제적 교류 주도한 백제 유학 전라도에서 주목할 만한 사상이 자리 잡기 시작하였을 때는 백제 시대 였다. 북방의 고구려 계통과 남방의 삼한 문화, 그리고 이전부터 한반도 내에 이어져 온 고조선의 문화적 전통이 복합되어 조성된 백제의 문화적 전통은 개방성과 다양성, 국제성과 보편성을 떤 것이었다. 이러한 전통을 기반으로

백제는 고구려나 신라보다 먼저 왕성하게 중국으로부터 선진적인 유학 사상 을 받아들여 주체적으로 응용하는 면모를 보였다.

4세기 이미 박사 제도를 시행한 백제는 유학 사상을 주체적으로 수용하 고 응용하는 면모를 보이며 부족 연맹체에서 벗어나 중앙집권적인 국가 체계 를 수립하기 시작하였다. 유교 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의 설치를 통해 유학적 지 식인을 배출하며 공적인 문서 기록의 관장, 역사서의 편찬, 국왕에 대한 정책 자문 등을 진행했던 백제는 6세기 초에 오경박사구i經博士제도를 공식화하는 전 한편, 경학經學에 대한 이해를 전문화하는 등 한층 발전된 유학 사상을 전개 하였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신라 이외에 왜국倭國에 선진문물과 사상을 제 공하는 등 국제적인 교류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4 이후에도 백제는 예학禮學에 관심을 기울여 유교적인 의례의 시행을 추 진하였으며, 이를 근거로 관제, 행정제도 등의 정비를 꾀하는 등 중앙집권체 제의 확립을 주도해 나갔다. 그리고 오경박사 제도를 전문적인 기술 분야로 확대하여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분야의 전문화를 꾀하는 등 유학의 주체적 응용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밖에『춘추좌전』등 경전에 근거하여 충절忠節 을 강조하는 면모를 보여주었으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의리 정신도 전라도 를 비롯한 백제 지역에 뿌리내렸다.

4세기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백제의 유학에서 주목되는 사실 중 하나는 근초고왕 때 왜국에 건너가『논어』와『천자문』을 전하고 왜국의 군신 群臣에게 유학을 가르친 왕인王仁이었다. 당시 왜국의 태자가 “왕인에게서 여 러 전적을 학습하여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라는『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 록을 통해 왕인의 가르침은 경전에 대한 기본적인 학습을 뛰어넘어 유학에 서 추구하는 왕도王道를 기반으로 한 통치술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가르 침은 문화적으로 미개함을 벗어나지 못한 왜국에 새로운 사상적 기운을 불 어넣은 것이었다.

왕인 이후 왜국에는 백제로부터 오경박사 이외에 다양한 인사와 문물의 전수가 이어졌다. 그리고 백제의 사상과 문화는 일본의 고대문화 발달의 밑 거름이 되었다. 이렇듯 전라도를 중심으로 한 백제의 유학 사상은 주체적인

수용과 응용을 넘어 국제적인 교류와 연대를 통해 왜국의 발전을 도모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백제의 멸망 후 통일신라에 편입된 전라도 지역은 당나라로 유학을 다 녀온 지식인들의 근거지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들은 당시 통일신라의 교종 중심의 체제에 불만을 가진 선승들과 연대하여 새로운 기풍을 조성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통일신라 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적 지식인인 최치원(崔致遠857~?)은 그의 탄생 설화가 군산 지역에 지금도 회자될 정도로 전라도와 인연이 깊었다. 당 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최치원은 진골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 체제의 문 제점과 국정의 문란함에 염증을 느껴 890년에 현재의 전북 태인에 해당하는 1

대산군大山郡의 태수를 역임하는 등 전라도의 유학에 영향을 끼쳤다. 최치원 이외에 도당 유학생 출신인 김입지金立之, 金穎김영 등도 전라도 지역의 태수 를 맡아 지역의 유학적 기풍을 조성하는 데 이바지하였으며, 말세로 지칭될 정도로 어지러웠던 신라 하대에 지역의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신라 하대에 이르러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꾀하며 전주와 무주 지역에 서 성장한 후백제의 견훤(甄萱867~935) 휘하에는 도당 유학생 출신의 지식인 들이 운집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여 사상적 변화를 모 색하였다. 견훤 휘하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유학적 지식인은 최치원, 최언위  彦撝와 함께 그대 3최'로 불린 최승우崔承祐이었다. 당나라 유학 후 귀국한 그 는 927년에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서신인「대견훤기고려왕서代甄萱寄高麗王書」 등을 작성하는 등 외교와 문한文翰의 역할을 담당하였고, 존왕적 정치 이념 을 추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최승우를 비롯하여 민 극閔卻, 최견崔堅, 김악金岳등 견훤 휘하의 유학적 지식인들은 당시 신라 불교 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졌던 관해觀惠, 경보慶甫승려들과 교유하며 새로 운 시대를 열기 위한 사상적 모색을 함께 하였다는 점이다.

나. 뚜렷한유학적 기풍과 인물을 배출한고려 시대 육두품 출신의 최치원을 비롯한 도당 유학생들의 활동이 돋보이는 신

라 하대의 전라도에는 이 시기 왕건王建의 천하 통일을 예언한 최지몽(崔知夢, 907~987)을 비롯하여 일군의 유학적 지식인들이 활동하는 등 이전보다 진전 된 유학적 기풍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고려 시대를 맞아 본격적으로 유학 사 상의 전개가 구체화되었다.

고려 시대는 기본적으로 불교를 국교로 한 사상적 기풍이 자리 잡고 있 었다. 하지만 건국 초기부터 왕건이「훈요십조」를 통해 유교주의에 입각한 국 가의 정치적 운영 방향을 천명하였고, 이에 따라 유학 사상에 대한 국가적 관 전 심은 점자 증대되었다. 역대 고려의 국왕들은 유교적 덕목을 쌓기 위해 스스 로 노력하는 면모를 보여주었으며, 각종 유교 관련 정책이 후속되는 등 유교 사상의 진흥은 눈에 띄게 강화되었다. 이러한 국가적인 유교 진흥과 관련하

4 여 주목되는 정치적 조치는 광종대에 유교 경전을 주요 과목으로 채택한 과

거제의 시행과 함께 성종대에 최승로崔承老의「시무 28조」로 대표되는 유교주 의적 노선이 강화였다. 이 시기의 구체적인 유교 진흥책에 힘입어 전국 각지 에는 향교로 대표되는 유교 교육기관의 설치가 본격화되었으며, 효행을 권장 하는 유교적 기풍이 구체적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문종대 이후 고려 유학 은 본격적인 부흥기를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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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고려사』김심언전에 실린 봉사 2조의 일부 내용

고려 초기부터 구체적으로 표면화된 유학 진흥책에 힘입어 전라도에는 10세기에 현재의 전주, 나주, 순천 지역에 향교가 설립된 것을 필두로 이후 부 안, 영광, 남원 등지에도 향교가 설치되는 등 유학 교육이 본격화되기 시작하 였다. 그리고 이렇게 조성된 유학적 기풍 하에서 주목할 만한 유학적 지식인 들이 배출되었다.

고려 시대에 전라도 출신의 대표적인 유학적 지식인으로는 성종에게「봉  

사 2조」를 올린 영광 출신의 김심언(金審言?~1018)을 비롯하여 무신 정권기에 유교적 교양을 갖춘 문신으로서 국왕에게 과감하게 충언을 아끼지 않으며 백 성들로부터 신망을 받았던 나주 출신의 문극겸(文克謙1122~1189), 고려 후기 에 '완산 삼최完山三崔'로 불리며 청렴한 관리이자 곧은 절개를 지닌 인물로 평 1

가받은 최척경(崔陟卿, 1120~1186)•최균(崔均, ?~1174)•최송년(崔松年, ?~?) 죠  손꼽을 수 있다. 이들 이외에도 순창을 수호하는 성황신이 된 고려 후기의 문 신 설공검(薛公儉1224~1302), 고려 후기 최고의 문장가로 손꼽히는 부안 출신 의 문인 김구(金坵, 1211~1278) 등 적지 않은 전라도 출신의 유학적 지식인들이 활동하였다.

여말에 이르러 경학經學을 중심으로 한 사장학詞章學중심의 유학적 경 향과 구분되는 주자학의 수용이 이루어짐에 따라 전라도의 유학은 이전과 다른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특히 깊이 있는 이론적 탐색과 개혁 지향적 실천을 보여준 이 시기 전라도 출신 유학자들은 중앙 관계에서 활동하는 한 편, 전라 지역의 유학 진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실천 윤리적 측면이 강조되었던 주자학의 선구적인 모습을 보여준 장 성 출신의 서릉(徐稜, ?~?)은 우리나라 최초의 유교 가훈家訓인「거가십훈居家+訓」을 지어 향촌 사회의 교화에 주목하였으며, 담양 출신의 이성(李晟, 1251~1325)은 출사하여 여러 관직을 거친 후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 연구에 매진하다가 국자박사에 임명되어 후진 양성에 매진하였다. 금산 출신의 윤구 尹龜生은『주자가례』에 따라 의례를 준행하는 면모를 보여주었으며, 그의 영향을 받아 그의 아들이자 이색의 문인이었던 윤소종(괗紹宗, 1345~1393)은 왕실의 의례를 유교에 따라 지낼 것을 강조하는 등 개혁 관료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아우 전귀생田責生, 전조생田租生과 함께 학문과 시문에 능해 삼은三隱-0 로 불린 담양 출신의 전녹생(田祿生, 1318~1375)은『고문진보』의 간행을 주도 하는 등 유학 진흥에 힘쓰다가 나주 출신의 박상충(朴尙裒1332~1375) 등과 함 께 정치적 사건으로 인해 죽임을 당하는 등 고려 말에 개혁 지향적 면모를 보 여주었다. 그리고 정몽주의 문인인 나주 출신의 범세동范世東과 정몽주의 생 질인 전주 출신의 최양(崔瀁1351~1424)은 조선 건국을 맞아 불사이군의 충절 전 로 은거하는 등 절의적 면모를 보이며 전라도 유학 정신의 면모를 역사에 아 로새겼다.

이처럼 고려 말 전라도 출신 유학자들은 정치적 입장의 차이가 없지 않 4 았지만, 주자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권문세족과 대항하며 개혁을 추진 해 나갔으며, 특히 유교적 생활관습과 유교적 가치를 중시하는 면모를 보여주 었다. 특히 의리 정신에 투철하여 왕조 교체기에 은거의 삶을 택하는 등 절의 적 면모를 전라도 유학에 아로새겼다.

다. 호남사림을 중심으로 한 성세가•• 기축옥사 이후 맞이한 침체기 조선 초기 계유정난癸酉靖難을 비롯하여 정치적 격변이 이어지는 가운데 전라도는 최덕지(崔德之, 1384~1455), 김문발(金文發1358~1418), 이선제(李先齊, 1390~?), 정극인(丁克仁, 1401~1481), 유분柳坍유승조(柳崇祖, 1452~1512)  렷한 학문적 성취와 주목할 만한 행적을 보여준 일군의 학자를 중심으로 주 자학적 기풍이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15세기 중반에 이르러 광주에서 향약 이 시행될 정도로 유교 의례에 의한 교화 활동이 본격화되었다.

16세기에 이르러 전라도에서는 성리학적 소양을 갖춘 일군의 사림이 역 사 문화적 공동체로서 지역정체성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이른바 '호남사림'이 라 불리는 이 시기의 유학자들은 여말선초에 거듭된 정치적 변동 속에서 절 의를 지키고자 혹은 정치적 박해를 피하기 위해 전라도로 이주해온 사대부 가문의 후예들이었다.

연산군 대에 서서히 등장하여 중종 반정 이후 중앙 관계로 진출하였

던 호남사림은 무오사화戊午士禍(1498)로 인해 호남으로 유배온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의 영향을 받아 소학 `學중시의 학문적 경향을 강화하였 고,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능주 유배를 계기로 사림 정신의 배양과 더 불어 학문적 성숙을 일구어 나갔다. 김굉필, 최부(崔溥1454~1504), 송흠(宋

欽, 1459~1547), 박상(朴祥, 1474~1530), 이항(李恒, 1499~1576),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을 중심으로 구도화된 이 시기 호남사림은 명종대에 이르러 조선  

유학의 지형이 서경덕徐敬憾, 이황李滉, 조식曹植등을 중심으로 학파의 형성이 1

가시화되면서 지역 내 문인들 간의 통혼 및 사승, 그리고 이에 따른 학문 경 향의 차이에 따라 그 구도가 송순(宋純, 1493~1582) 계열과 서경덕 계열로 재

편되었다.

김인후(金麟厚, 1510~1560), 나세찬(羅世纘, 1498~1551), 양산보(梁山甫, 1503 ~1557), 임형수(林亨秀, 1504~1547), 임억령(楙億齡, 1496~1568), 양응정(梁應鼎, 1519~158D, 오겸(吳謙, 1496~1582) 등의 송순 계열은 주로 광주, 담양 등 전 라좌도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박순(8卜淳, 1523~1589), 정개청(鄭介淸1529~

1590), 노수신(盧守愼, 1515~1590), 윤의중(尹毅中, 1524~?), 유희춘(柳希春, 1513~ 1577), 박응남(+卜應男, 1527~1572) 등 서경덕 계열은 나주, 함평 등 전라우도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동서분당 이후 송순 계열은 대부분 서인으로, 서경덕 계열은 동인이 되어 중앙뿐만 아니라 향촌 사회에서 서로 대립하였다. 하지만 기축옥사己丑獄事를 계기로 서경덕 계열이 몰락하고, 주도권은 송순 계열로 넘어갔다. 하지만 중심인물들이 왜란을 거치며 상당수 사망하고, 인 조반정 이후 경기 및 충청지역의 서인들이 주도하게 됨에 따라 시가와 문학에 경도되었던 호남사림의 기반은 점점 약화 되어갔다.

호남사림의 기반 약화에도 불구하고 16세기 호남사림이 이룩한 학문적 성취는 남다른 것이었다. 본격적인 이기심성론에 대한 독자적인 이해를 보여 주며 조선 성리학사의 선구가 된 이항을 비롯하여 천명사상 연구를 비롯하 여 인심도심론에서 독자적인 견해를 피력한 김인후, 이황과 함께 사단칠정논 쟁을 주도한 기대승(奇大升, 1527~1572) 등 뚜렷한 학문적 성취를 일구워 낸 학 자들이 대거 배출되면서 16세기 전라도 유학은 성세기盛世期를 맞이하였다.

특히 이들이 일구어낸 학문적 성취는 전라도 지역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학 자들과의 빈번한 교류를 통해 그 영향력이 확대되었기 때문에 이들이 주로 활동한 16세기 후반 이후 전라도 유학은 그 영향이 약화 되었지만, 향후 언제 라도 부흥할 수 있는 기반이 온전히 갖추어져 있었던 셈이었다.

전라도 유학이 심대한 타격을 입은 기축옥사 이후 조선 유학의 전반적인 지형은 이이를 계승한 김장생金長生과 그의 학문을 계승한 일군의 기호학파 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학계와 정계의 주도권을 가진 기호학파 내에서 전 전라도 출신 유학자들은 주변부에 위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예학의 시다라 불리는 17세기에 이르러, 전라도에서는 남인 계열의 윤선도(尹善道, 1587~1671) 가 존왕론에 근거한 특징적인 예설禮說을 제기하였지만, 대부분의 전라도 유 4 학자들은 기호학파의 학설을 충실히 따르는 면모를 보였다. 상대적으로 이 전 시기와 비교해 침체기를 맞이한 가운데 퇴계학을 일본에 전한 강항(姜沆  1567~1618), 의리사상의 모범이 된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을 비롯하여 송시 열 문하의 대표적인 문인인 박광일(朴光- 1655~1723) 등 주목할 만한 학자들 의 배출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18세기에 이르러 전라도에서는 기호학파 내부에서 호락논쟁이 본격화

 

그림 2. 월봉서원(기대승)

되는 가운데 주목할 만한 학문적 입장을 제시한 다수의 학자가 배출되었다. 비록 독자적인 학통을 수립하면서 학계 구도의 재편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 만, 기호학파의 중심인물 중 한 사람으로 부각한 호론 계통의 이이근(李頣根, ?~?)과 낙론 계열의 양응수(楊應秀, 1700~1767), 황윤석(黃胤錫, 1729~1791), 이기 경(李基慶1756~1819) 등이 호락논쟁을 주도하며 전라도 유학의 학맥은 지속 되었다.  

1

라. 호남실학, 현실 비판과 개혁의 산실이 된 전라도 기축옥사 이후 전라도에 대한 정치적 소외가 심각하게 드러나고, 이에

더하여 경제적 수탈이 가중되는 가운데 전라도 지역에서는 당시 주류를 형

성하고 있었던 주자학에서 벗어나 사회개혁과 현실 비판적인 사상적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특히 조선 유학의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17세기 이후 전라도에서는 새로운 사상의 흐름의 단초가 배태되기 시작하였고, 17 세기 이후 전반적인 사회경제적 변동에 유의하면서 주자학의 관념론에서 탈 피하여 현실 비판과 개혁의식으로 무장한 이른바 실학이 전라도 지역을 중 심으로 태동한 것이다. 철학사상뿐 아니라 경제 문제를 중심으로 한 사회정 책론, 역사와 지리, 언어학 등 국학과 자연과학을 포괄한 실학은 서울과 경 기를 중심으로 한 근기실학과 전라도 지역을 기반으로 한 호남실학으로 양

 

그림 3. 반계서당 편액

분되어 전개되었다. 특히 호남실학은 실학의 비조로 평가받는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의 부안 이거와 이후 20여 년간 펼쳐진 학문 활동을 통해 본격화 하였다.

유형원의 학문적 영향이 지속되는 가운데 이후 전라도 지역에서는 김서 경(金瑞慶, 1648~1681)•유문원(柳文遠, 1638~1717)•양득중(梁得中, 1665~1742)•나 경적(羅景繢, 1690~1762) 등에 이어 18세기 중반에 이르러 '호남삼천재'로 불린 신경준(申景濬, 1712~1781)•황윤석(黃胤錫, 1729~1791)•위백규(魏伯珪, 1727~1798) 전 등이 배출되어 호남실학의 흐름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비록 학맥과 사상적 경향이 일치하지 않았지만, 전라도 지역의 실정을 반영한 토착적 면모를 보여 주었다. 특히 유형원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방대한 저술을 통해 다양한 분야 4 에 걸쳐 학문적 관심을 표출하여 백과전서적 면모를 보여주었으며, 보다 적 극적이고 실천적인 운동으로서 실학적 면모를 드러냈다.

17세기 이후 구체화된 호남실학은 단순히 지역 내의 사상으로만 머물지 않았다. 자득의 면모가 강한 신경준은 자신의 실학적 학문 체계를 구축하면 서 근기 지역의 성호학파 인사들과 교류를 진행하였고, 노론의 낙론계 학자 인 황윤석은 성리설에 대한 관심 이외에 실학적 학문 경향을 뚜렷이 하면서 관련 인사와의 교유를 구체화하였다. 그리고 노론의 호론계 대표 학자인 윤 봉구尹回九의 문인인 위백규도 끊임 없이 학문적 교유를 진행하였다.

호남실학은 그 개혁 지향적인 사상적 지향을 부각하며 그 내용의 면에 서도 다양성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특히 실학이 추구하는 사상적 측면에서 의 개방성뿐만 아니라 인적인 측면에서의 개방성도 호남실학에는 깊숙이 자 리하였다. 이에 따라 비록 전라도 출신은 아니지만, 전라도와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은 실학자들은 전라도를 배경으로 실학적 사상을 구체화하여 호남 실학의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하였다. 대표적으로 부친이 나주 목사로 재임 하는 등 선대의 전라도와의 인연이 배경이 되어 북학파 실학자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황윤석, 나경적 등과 교유하며 호남실학을 풍성하게 하였다.

19세기에 이르러 하백원(河百源, 1781~1845)은 농공상고農工商賈도 학문 임을 주창하며 이전 시기의 호남실학의 학풍을 계승하는 한편, 자승거自升車

의 제작 등 자신의 과학 정신을 구체화하였다. 특히 실학의 집대성자로 평가 받는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18년에 걸친 강진에서의 유배 생활을 통해 실학의 성과를 집대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근기실학과 호남실학을 아우르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전라도에서 그 규모를 갖춘 그의 실학사상은 호남실학 을 더욱 폭넓고 깊이 있게 가꾸는 데 일조하였다. 그의 제자인 황상(黃裳, 1788

~1863?), 이청(譬靑1792~1861) 등에게로 그의 사상이 이어졌을 분만 아니라  

정통 성리학자들에도 영향을 주어 19세기 이후 전라도의 사상을 더욱 풍성 1

하고 개혁 지향적으로 가꾸는 데 일조하였다.

마. 근현대 이후 한국 유학의 중심으로 우뚝 선 전라 지역

19세기에 접어들어 전라 유학은 기호학계의 지형 변화 및 대내외적 모순 의 가중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새로운 변화의 계기를 맞이하였다. '문 호 분립門戶分立'과 '학파 분화學派分化'에 따라 그 지형 변화가 구체화하는 가 운데 지역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학파의 형성 속에서 전라도 지역에서는 전 남 지역을 중심으로 학파의 외연을 경남 지역으로까지 확장한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노사학파蘆沙`學派', 전라 및 충청 지역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문 인 집단화를 이룬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의 '연재학파淵齋學派, 충청 지역을

 

그림 4. 기정진의『노사집』및『답문류편』의 목판(전남 장성 고산서원 내)

중심으로 학파의 기초를 이룬 후 전라 지역으로 중심지를 옮겨 전국적인 문 인집단을 형성한 전우(田斅, 1841~1922)의 깐지1학파艮齋學i辰' 등이 중심을 이루 었다.

이들 학파 이외에 이항로李恒老의 학맥을 계승한 화서학파의 대표적인 문인인 최익현(嵌益鉉, 1833~1906)도 전라 지역 내에 적지 않은 문인을 배출하 며 유력한 문인집단을 형성하였고, 유학적 가치관을 기반으로 호남학회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이기(李沂, 1848~1909)와 황현(黃玹, 1855~1910), 그리 전 고 이들과 더불어 '근대 호남 삼걸」桀로 일컬어지는 이정직(李定稷1841~1910) 등이 활동하였다. 그리고 영남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전북 남원을 중심으로 전남의 곡성, 능주, 화순 등지에는 당시 영남 유학을 대표하던 곽종석C「鍾錫  4 1846~1919)의 문하로 입문하는 문인도 적지 않게 배출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19세기 이후 전라 유학은 이전 시기의 침체를 벗어나 기호학계 를 주도하는 대표적인 학파를 배출하며 새로운 부흥기를 맞이하였다. 특정 한 학맥이나 학파가 전일적으로 전라 지역의 학계 및 사상계를 주도하기보다 는 다양한 학파들이 서로 연계되어 전라 지역의 유학을 주도하였다. 특히 전 라 지역을 배경으로 형성되고 활동을 펼쳐 나간 각 학파의 문인들은 특징적 인 학문과 사상은 제기하며 조선 성리학의 총결로서 문제의식을 드러냈을 뿐 만 아니라 급변하는 시대적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현실 대응 논리와 그 실천을 선도하며 시대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비록 봉건 지배 질서 체제를 뒷 받침하는 성리학적 가치의 수호라는 시대적 사상적 한계를 가지고 있기는 하 였지만, 전라 지역의 각 학파 유림이 보여준 실천 지향적 위정척사 운동과 이 에 이어진 의병 활동은 제국주의의 침탈에 대항하는 민족의식의 발로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전라 지역을 배경으로 형성되고 활동한 유림은 학파를 불문하고 19세 기부터 본격화한 삼정문란三政紊矞의 폐해를 직접 목도하면서 백성들의 고충 에 공감하였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구체적인 개혁책을 제시하였다. 특히 전 라 지역의 유림은 학파적 결집을 통해 개항 이후 전라도 지역에 불어 닥친 위 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개항 이후 전라 지역은 어느 지역보다 제국주의적

 

침탈에 따른 폐해가 극심하였고, 이러한 폐해는 지역 공동체의 위기로 다가 왔기 때문에 이러한 현실을 목도한 전라 지역의 유림은 표면화하는 제국주의 침탈을 극복하고자 하는 실천적 지향을 추구하였다.

한편, 정통 유림의 사상적 지향과 구분되는 개신적인 면모를 갖춘 전라

지역 지식인들의 활동도 구체적으로 드러나 20세기 전반기 전라 지역의 사 상적 면모를 다채롭게 구성하였다. 정통 성리학에서 벗어난 1900년대 초반 211

의 전라 지식인들은 '호남학회'의 창립 등을 통해 에국계몽운동을 선도하며 1

근대 전환기를 맞이한 전라 지역의 사상적 변화된 지형을 보여주었다. 이들의 사상적 지향은 문명개화이었지만, 전통 사상의 변화된 인식을 보여준다는 점

에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선 20세기 전반기 전라 지역의 사상계 지형은 이전 시 기에 활성화된 정통 유학의 흐름이 약화하기는 하였지만 개신 유학적 흐름이 부가되었고, 이에 더하여 일제를 통해 서양의 학문과 사상이 본격 이입되어 근대적인 사상이 이후에 주류를 형성하는 구도를 조성하였다. 그리고 해방 이후 전통과 현대, 서양과 동양, 정통과 이단 등 여러 측면에서 복합적인 요소 가 중층적으로 결합된 채 전라도 내의 사상적 흐름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러 한 구도 속에서도 전라도의 사상적 기저는 전라도 특유의 개방과 소통, 개혁 과 변화가 중심을 이루었으며, 과거에 안주하지 않고 현재를 반성하며 미래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전진하였다.

박학래

제2장 문학과 예술

 

4

1. 口言&1- 그

한국문학사를 시대 구분하는 두드러진 지표는 한글 창제와 근대 전환이

다. 조선 초의 한글 창제를 계기로 조선시대의 문학은 그 이전과는 비교할수 없 을 정도로 풍부한 유산을 갖게 되었다. 또 조선 말 근대로의 전환을 분기점으로 우리 문학사는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으로 나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현재 전하고 있는 작품의 수량이나 성격에 비추어, 전라도의 문학 역시 이 두 가지 지 표를 기준으로 삼아 다음 세 시기로 나누어 보는 것이 효과적이다. 첫 번째 시기 는 한글 창제 이전인 원시에서 조선 초까지이고, 두 번째 시기는 한글이 창제되 고 근대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조선시대이며, 세 번째 시기가 근대 전환 이후 현 재까지이다. 따라서 전라도의 문학을 이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자.

가. 조선 초 이전; 중양문화에 흡수되어 편린으로 남다 문헌 기록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전라도 문학의 가장 오래된 모습은 옛

부족국가였던 마한의 집단가무에서 비롯된다. 해마다 오월과 시월에 행해졌 던 마한의 농경제의에서 연행된 집단가무의 잔영은 전라도의 농악이나 강강 술래 등을 통해 찾아지기도 하는바, 그 기저에는 풍요다산을 바라는 고대인 의 소망이 담긴 것으로 파악된다.

집단가무 이후 시가문학에 있어서는『고려사』악지 삼국속악'조에 백제 의 노래로 기록된「정읍」•「선운산」•「무등산」•「방등산」•「지리산」등이 그 첫

머리에 놓인다. 하지만 현재까지 노래의 가사가 전하고 있는 작품은 고려속요 1

로도 널리 알려진「정읍(일명 정읍사井현詞)」하나에 불과하다. 이밖에 비슷한 시 기의 노래인「완산요」와「산유화가」의 유래나 성격 등이『삼국유사』와『증보

문헌비고』에 언급되어 있다. 향가로는『삼국유사』에 실린「서동요」만이 서동

과 선화공주와의 사랑 이야기 및 익산의 미록사 창건 설화와 함께 남아 있다.

고려의 노래로는 궁중의 속악가사이기도 하였던「동동」•「청산별곡」•「쌍화 점」이 전라도의 노래라는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그 여부  단정하기 어렵다.

설화문학으로는 탐라를 세운 고을라•양을라 부을라가 땅에서 솟아났다 는 제주도의 삼성신화를 비롯하여, 일부 서사무가와 함께 지역에 따라 갖가지 구비설화가 전해진다. 하지만 문헌설화로는 백제 개루왕의 횡포로 도미와 그의 처가 수난을 당했다는 이야기와,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광주의 북촌 어느 부잣 집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 전하는 정도이다.

한문학은 4세기에 이미 백제의 왕인이 일본에『논어』와『천자문』을 전 했다는 사실 등으로 미루어 일찍부터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남아있 는 백제의 오래된 작품으로는『삼국사기』에 보이는「조위상표문朝魏上表文」같 은 외교 문서,「칠지도명문七支刀銘文」이나「무령왕릉지석武寧王陵誌石」같은 금 석문을 들 수 있다. 초기 작가로는 후백제 견훤을 보좌한 최승우의 활약이 눈에 띈다. 이후 고려를 지나며 뛰어난 작가들이 등장하여 나름대로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장연우, 김황원, 고조기, 오세재, 조통, 김구, 전녹생, 탁광무가 이『전라도 천년사』의 고려시대 문학을 말하는 자리에서 거론된 인물들이다.

다음에 이들의 활동상을 간략히 요약한다.

장연우(?~1015)는 고창 사람으로, 현종 때 호부상서를 지냈다.『동문선』 권19에는 그가 고려속요의 한역인「한송정곡″亭曲」의 작자로 수록되어 있 는데, 그가 광종 때 강남에 사신으로 가 이 노래를 한역하였다는『고려사』악 지 속악조의 장진공과 동일한 인물인지는 의문이다. 다음 한림학사 김황원 (1045~1117)은 광양 사람으로, 고문에 능통하여 '해동제일'로 칭송되었던 인 물이다. 평양의 부벽루에 올라 “긴 성 한편엔 넘실대는 물이요[長城-面溶溶水], 넓은 들 동쪽에는 점점이 산이러大野東頭點點山]”라는 명구를 남겼다는 일 전 화가 유명하다. 제주의 고조기(?~1157)는 의종 때 중서시랑평장사 등을 지냈 다. 진도의 벽파정 제영으로 알려진「진도강정」등 수편의 작품이『동문선』 에 전한다. 고창의 오세재(1133권)와 옥과의 조통(?권)은 무인정변 이후 죽림

4 고회의 일원으로 이름을 남겼다. 또 부안의 김구(1211~1278)는 무인집권기와 원지배기에 걸쳐 활동하며 중서시랑평장사 등을 지냈는데, 당시 최자에 버 금가는 문명을 날렸다. 담양의 전녹생(1318~1375)은 공민왕 때 정당문학때 사헌 등을 지냈다.『야은일고』에 그의 시문과 행적이 전한다. 광주의 탁광무 (1330~1410)는 공민왕 때 출사하였고, 물러나 향리에서 경렴정景濂亭을 조영하 였다. 그의 시문을 모은『경렴정집』이 있다. 그런데 이 여덟 명은 모두 관직에 나아가 자신의 뜻을 펼친 관료 출신 작가라는 공통점이 있다. 고려의 과거제 실시가 한문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불가의 한문학으로는 고려 후기 불교혁신운동의 중심이었던 순천 수선 사修禪社와 강진 백련사白蓮社의 지눌•혜심•충자천인•천책 등의 활동이 주목 된다. 이 가운데 특히 수선사의 제2세였던 혜심은 화순 사람으로,「어부사漁父詞」와 같은 선시와 함께 불도의 수행자를 대와 얼음에 비유한「죽존자전竹尊者傳」과「빙도자전氷道者傳」이라는 가전을 남겼다. 장흥 사람으로 수선사의 제과였던 충지가 남긴 24운의「영남간고상嶺南쮨苦狀」은 당시 백성들의 참상 을 생생하게 그려낸 작품으로 의미가 있다. 이밖에도 유수의 문인들이 각 고 을의 산하, 관아, 누정, 명승, 고적 등과 관련하여 쓴 시문이『동국여지승람』 에 상당수 수록되어 있다 이것이 고대에서 백제를 거쳐 고려 말에 이르는 전라도 문학의 대체적인

모습이다. 남은 자료만을 놓고 보았을 때, 무엇보다 먼저 그 유산이 매우 영성 함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현전 모습이 당시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 는 것은 아니다. 현전하는 내용과 당시의 실상 사이에 전승이라는 과정이 개 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비전승과 문헌전승이 그것이다. 그런데 적어도 600 년 이상의 시차가 나는 조선시대 이전의 경우, 구비전승이 옛 모습을 충실히 유지하지 못함은 당연한 일이다. 또 문헌전승의 경우도 그것이 당대의 기록이

아닌, 주로 후대의 관찬 문헌을 통해 남아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역사서인 『삼국사기』•『삼국유사』•『고려사』, 종합 문헌인『동문선』, 전국 지리지인『동 국여지승람』이 주된 전승 문헌인데, 이것들은 모두 왕이나 집권층의 입장을 반영하는 중앙 위주의 시각에서 편찬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지 1

방의 자료나 작품이 소략하게 취급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백제와 후백제 별 망 이후 중앙의 지위를 갖지 못한 전라도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대다 수의 작품이 문헌에 정착되지 못한 채 인멸되었고, 극히 일부만이 중앙 문화 에 흡수되어 살아남은 결과가 앞에서 본 현재의 모습이다. 시가와 설화의 현 전 작품인「정읍사」•「서동요」•삼성신화•도미설화• 견훤설화가 모두 왕이나 궁 중음악과 관련이 있고, 한문학의 작가에 관료 출신만 부각된 것이 그 때문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되어 남은 작품들이 모두 당대는 물론 후대에 이 르기까지 오래도록 공감을 얻은 명편이라는 점은 의심할 수 없다.

나. 조선시대; 다양한 양상으로 문학사를 주도하다 조선시대의 전라도 문학이 보여주는 모습은 전 시대의 그것과는 크게 다르다. 이전과는 달리 많은 작가와 작품이 등장하였고, 여러 갈래에 걸쳐 한 국문학사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였다. 그러한 경향은 특히 조선 중기를 지 나며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전라도 문학의 발전은 문학사의 전반적 인 흐름 속에서 그 모습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조선시대의 한국문학은 악장, 경기체가, 시조, 가사, 소설, 한시, 시화, 잡록, 실기 등 여러 갈래에 걸쳐 매우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전라도 문학 역시 시가와 설화 및 한문학 영역에 서 소수의 작품만을 잔존시킨 이전 시대와는 달리, 여러 갈래에서 풍부한 유

 

4 그림 1. 담양의 한국가사문학관 모습

산을 남기며 실로 활발하게 펼쳐졌다. 물론 이러한 발전은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무엇보다도 한글 창제에 힘입은 바 크다.

먼저 시가문학의 경우, 성종 때 정극인의「상춘곡」을 필두로 정읍에서 조선의 가사문학이 은일가사로 비롯되었다. 그리고는 담양과 화순 일대 무등 산권의 누정을 배경으로, 송순의「면앙정가」와 남언기의「고반원가」와 정철 의「성산별곡」이 그 뒤를 이었다. 그 결과 면앙정, 고반원, 식영정을 무대로 우 리 문학사에 누정은일가사라는 새로운 작품 유형이 성립하였다. 송강정에서 이루어진 정철의「사미인곡」과「속미인곡」은 미인계 연군가사의 백미로 평가 되며, 장흥 출신 백광홍의「관서별곡」에서 비롯된 기행가사의 맥을 이어 정철 은「관동별곡」에서 그 정수를 보여주었다. 조위의「만분가」와 양사준의「남 정가」가 유배가사와 전쟁가사의 첫 작품으로 나오게 된 곳도 전라도의 순천 과 영암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특히 장흥에서 가사의 창작이 활발하였는데, 노명선과 위세직에 의한 향토기행가사의 창작, 장흥 대기근의 참상을 고발한 작자 미상「임계탄」과 같은 현실비판가사의 등장이 주목된다. 조선 초부터 창작되기 시작한 시조 역시 중기의 송순과 정철에 의해 본격적으로 창작되기 시작하였다. 흔히 '호남가단'이라 지칭되는, 이들을 중심으로 한 문인들의 시

가 활동에 힘입어, 전라도는 16세기에 와서 비로소 한국문학사의 중심으로 떠오르며 본격적인 조명을 받게 되었다. 그러한 활동은 조선 후기에도 이어져 남원의 정훈, 해남의 윤선도, 장흥의 위백규 등이 계승 발전시켰다. 정훈은 임 진왜란 직후 향촌사족의 진솔한 삶을, 윤선도는 현실을 배척하는 사대부 자 연시조의 최고 경지를, 위백규는 실제의 농경 체험을 반영한 사대부 전원시 조의 결정적 변모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경기체가로 성종 때 정

극인의「불우헌곡」과 박성건의「금성별곡」이 정읍과 나주에서 창작되었다.

소설문학과 전라도의 관련 양상은 다음 세 측면에서 정리할 수 있다. 첫 째는 전라도 출신 작가가 작품을 창작한 경우이고, 둘째는 작품의 주인공이 나 배경이 전라도 사람이거나 전라도인 경우이며, 셋째가 전라도의 설화에 근 1

원을 두고 작품이 형성된 경우이다. 먼저 첫 번째 경우로 주목되는 작가가 나 주의 임제(1549~1587)이다. 그는 16세기 후반의 문인으로, 한문소설「수성지」• 「화사」•「원생몽유록」•「서옥기」를 창작하였다.「수성지」와「화사」에서는 사람 의 마음과 꽃을 의인화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갔고,「원생몽유록」에서는 주인 공의 몽중 체험을 통해 은연중에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였다. 또「서옥기」 에서는 창고의 곡식을 훔쳐 먹은 늙은 쥐의 재판을 통해 나라를 좀먹는 벼슬 아치들을 우의적으로 비판하였다 모두 단순한 흥미거리가 아닌, 날카로운 현 실인식과 비판정신을 바탕으로 한 작품들이다. 그런데「원생몽유록」과「서옥 기」에 대해서는, 그것이 임제의 소작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두 번째 경우로 는 김시습『금오신화』중의「만복사저포기」가 남원의 만복사를 그 배경으로 하였고, 채수의「설공찬전」이 순창을 배경으로 하였다 또「홍길동전」은 장성 의 '아자곡亞次谷'에 살았던 실존인물 홍길동을,「전우치전」은 담양 사람으로 전해지는 전우치를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이다. 조위한(1567~1649)은 계축옥사 이후 남원에 이주하여 살면서 그곳을 중심 배경으로 삼아「최척전」을 창작하 였고, 이덕무(1741~1793)는 1790년 강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살인사건을 취 해 왕명으로「은에전」을 엮었다. 이밖에도 작자 미상의「김학공전」은 고흥의 '계도桂島를 배경으로 사건을 전개시켰다. 세 번째 경우로는 판소리계소설이 있 다. 남원의 근원설화에서 형성된「춘향전」과「흥부전」, 곡성 관음사의 홍장설

 

4 그림 2. 장성에 재현된 홍길동 생가

화에서 형성된「심청전」이 그것이다. 이렇게 살펴보았을 때, 임제라는 걸출한 작가의 활동 외에도, 우리 고소설사에서 주목 받는 기넘비적인 한문소설, 한 글소설, 판소리계소설들이 다수 전라도와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창작되거나 형성되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지역적으로 남원이 그 중심지로 부각된다.

한시는 고전문학에서도 가장 많은 창작이 이루어진 갈래이다. 따라서 전 라도의 한시 역시 매우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그러한 양상을 여기서 다 보일 수 없기에, 가급적 다른 장르와의 중복을 피해 일부 문인들의 이름만 거명한

다. 조선시대 전라도 한문학의 초기 인물로는 영암의 최덕지, 광주의 이선제, 정읍의 정극인이 있다. 이후 최부, 박상, 송흠 등이 사림의 성장과 한문학의 발전을 주도하였고, 그 결과 16세기 중• 후반에 많은 문인들이 배출되어 활동 하였다. 최산두, 양팽손, 송순, 임억령, 나세찬, 이항, 김인후, 유희춘, 임형수, 양응정, 박순, 기대승, 고경명, 정철, 백광흠 최경창, 임제 등 모두 당시 우리나 라를 대표하는 문인들이었다. 17•18세기에는 특히 실학파 문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져 유형원, 신경준, 황윤석, 위백규, 나경적, 하백원 등의 성과가 주목된 다. 19세기 주요 인물로는 기정진, 이정직, 이기, 황현 등이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는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특히 전

라도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다. 김천일, 최경회, 고경명, 안방준 등이 당시 거의 에 앞장선 주역들이었다. 이들이 민족 수난의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거 나, 포로가 되어 고초를 겪은 사실을 기록한 것이 바로 실기문학이다. 임진 왜란기 전라도의 실기로는 정경달의「반곡난중일기」, 안방준의「호남의록」 과「삼원기사」, 노인의「금계일기」, 강항의「간양록」, 정경득의「호산만사록」, 정희득의「월봉해상록」, 정호인의「정유피란기」가 있다. 또 정묘•병자호란기

의 것으로는「광산거의록」,「천계정묘양호거의록」,「정묘거의록」,「우산선생 1

병자창의록」,「호남병자창의록」을 들 수 있다. 상당히 풍부한 기록 유산이다.

그런데 실기는 실제로 있었던 사실이나 직접 겪은 체험의 생생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사실성을 기본으로 성립한다. 그런 점에서 조선 후기 사실성을 바탕

으로 한 산문정신의 발달에 기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양에서 멀리 남쪽에 위치한 전라도는 해안과 도서가 많은 지역이다. 그 래서 특히 유배객이 많았다. 제주도를 비롯하여 추자도, 위도, 진도(금갑도), 완 되신지도), 임자도, 흑산도 등에 그렇다. 조선시대 전라도에 유배되었던 주요 인 물로는 조위, 조광조, 노수신, 송시열, 김수항, 김춘택, 김이익, 정약용, 김정희, 조희룡, 이세보, 최익현 등이 있다. 이들이 유배지에 남긴 자취는 체계적인 저 술을 비롯하여, 한시, 시조, 가사, 일기, 서간, 서화 등으로 다양하다. 저술로는 정약전의『자산어보』와 정약용의『목민심서』등이 유명하고, 한시로는 역시 정 약용이 남긴「탐진악부」등이 대표적이다. 시조로는 김이익의『금강영언록』과 이세보의『풍아』에 실린 작품들이 주목을 요한다. 하지만 전라도의 유배문학 에서 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가사 작품이다. 유배가사의 효시로 이미 언급한 조 위의「만분가」(순천)를 필두로, 홍섬의「원분가」(고흥), 김춘택의「별사미인곡」(제 주), 이진유의「속사미인곡」(추자도), 안조환의「만언사」(추자도), 김이익의「금강 중용도가」(금갑도), 채구연의「채환재적가」(신지도)가 전라도의 유배 체험을 통해 이루어졌다. 현전하는 유배가사 10여 편의 근간을 이루는 작품들이다.

전라도 여성문학의 출발은 멀리「정읍사」를 노래한 백제의 여인으로까 지 소급될 수 있다. 그렇지만 구체적인 작가론의 기술이 가능한 작가의 등장 은 조선시대 초에 이루어졌다. 단종이 폐위되는 것을 보고 순창 귀래정에 은

거했던 신말주의 아내 순창설씨(1429~1508)가 그 첫머리에 놓인다. 그는 문서 화文書畵에 두루 능하여, 불전 개축에 시주를 권면한「권선문」과 8폭의「화조 되를 남겼다. 전라도를 넘어, 우리나라 여성문인의 선구로 꼽힌다. 순창설씨 의 뒤를 이은 작가가 담양의 송종개(1521~1578)이다. 유희춘의 아내였던 그는 한시를 통해 주로 부부와 가족 간의 사랑을 노래하였는데,『덕봉집』에 작품 20여 편이 전한다. 부안의 기녀였던 이매창(1573~1610)은 가곡과 거문고에 능 한 시조 작가이면서, 한시도 잘 지었다. 한시 58편이『매창집』에 전한다. 남원 전 과 진안에서 살았던 김삼의당(1769~1823)은 90여 편의 한시에 주로 남편 하 립과의 사랑 및 향토 자연의 서정을 담았다.『삼의당김부인유고』가 남아 있 다. 19세기 인물로는 보성에서 태어나 해남윤씨 종가의 며느리로 출가한 광 4 주이씨(1804~1863)가 있다. 그런데 그는 신행을 앞두고 그만 남편이 사망하는 불행을 겪었고, 양반가 종부로서의 생활도 순탄하지 못하였다. 이런 자신의 어려운 처지와 억울한 심사를 한글 서간 형태인「규한록」을 통해 매우 직설 적으로 토로하였다. 이렇듯 거론할 수 있는 전라도 여성문인의 수는 제한적 이다. 하지만 그 성향을 살펴보면, 양반가의 여성과 기녀, 불교적 세계관과 유 교적 윤리관, 화락한 부부애와 독신 종부의 고단한 삶 등으로 다양하다.

다. 근대 이후; 시대의 요구와 새로운 감성을 담다 한국문학사에서 근대 전환의 기점을 어디로 삼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 견이 있다. 하지만 단순히 장르적 측면만을 고려하면, 현대의 시•소설•희곡• 비평과 같은 새로운 장르의 등장을 기점으로 기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 론 이런 새로운 장르의 등장은 국내외에서 서구적 방식의 교육을 받은 문인 들의 활동과 함께 이루어졌다.

전라도에서 현대문학 활동의 선봉에 선 문인으로는 먼저 목포의 김우진 을 들 수 있다. 그는 극작가이자 연출가로서「난파」•「이영녀」등을 통해 현대 희곡사를 개척하였으며, 시인이자 비평가로도 활동하며 1920년대 전반기를 수놓았다. 전주의 이익상과 유엽도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였다. 이익상은 소설 창작과 비평 활동을 하며 '파스큘라' 및 '카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금

성』동인이었던 유엽은 서사시「소녀의 죽음으로 주목받았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조운과 이병기는 주로 시조의 창작과 연구를 통해 시조부흥운동의 성과를 높이는 한편, 소설가 박화성과 시인 조남령 등을 중 앙 문단으로 이끌며 지역 문단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동반자 작가로 분류 되는 소설가 채만식이 활동을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는 1924년 단편 「세 길로」를 시작으로 장편「탁류」와「태평천하」등의 문제작을 내놓았다. 또

김진섭은 1926년에 결성된 '해외문학파'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해외문학을 1

연구하고 소개하는 한편, 수필 창작에도 심혈을 기울여 수필의 문학적 경지 를 끌어올렸다.「인생예찬」•「생활인의 철학」등이 그가 남긴 명편이다.

1930년에는『시문학』이 창간되며 박용철과 김영랑을 중심으로 시문학

파가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여기에는 김현구와 신석정이 동인으로 함께 참 여하였다. 이들의 지향은 카프의 정치적 경향과는 다른 순수한 서정시를 추 구하는 것이었다. 구인회의 일원이기도 하였던 김환태 역시 이에 동조하여 문 학의 순수성을 옹호하는 비평 활동을 펼쳤다. 카프계열의 전라도 문인으로 는 이익상 외에도 김창술, 정우상, 김태수, 김해강 등이 있다. 지문학파'에 이 어 순수문학과 생명 존중을 표방한 생명파'의 활동도 주목된다. 이 활동에는 1936년『시인부락』을 창간한 서정주를 중심으로 여상현과 이성범이 참여하 였다. 이밖에도 이 시기에 활동한 전라도 문인으로 시의 임학수와 김현승, 시 조의 고정흠과 양상은, 소설의 이근영, 비평의 임순득과 윤규섭 등이 있다.

1941년 말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우리 민족에 대한 억압과 수탈 을 한층 강화하였다. 그러자 일제에 동조하고 협력하며 반민족적 행위를 한 문인들이 있었다. 채만식, 서정주, 임학수, 김해강 등이 그랬다. 이에 반해 조 운, 박화성, 김현승 등은 절필을 선택하였다.

8•15 광복은 민족 해방의 기쁨을 안겨주었지만, 또 한편으론 남북 분단 이라는 커다란 불행을 몰고 왔다. 그 결과 해방공간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거쳐 한국전쟁을 치르기까지, 양분된 우리 문단에는 이데올로기에 의한 좌• 우익 간의 대립과 갈등이 격화되었다. 이 시기에 전라도의 일부 문인 역시 당 시의 처지에 따라 재북 상태로 남거나(임순득), 자신의 이념을 좇아 스스로 월

 

북하거나(조운, 이근영, 윤규섭), 또는 전쟁의 와중에서 납북되었다(임학수, 여상 현). 그렇게 하여 남과 북으로 우리 문학사도 양분되었다.

해방공간을 거쳐 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기에는 치열한 작품 활동보다는 선명한 이넘 투쟁이 문단의 전면을 지배하였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내면적 222 성찰이 부족한 어두운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전후에 복구가 진행되 면서, 우리가 당면한 사회 문제 및 국제 정세 등이 문학의 주된 관심사로 떠올 랐다. 1950년대와 1960년대를 지배했던 전후 문제와 동서 냉전이 그것이었 전 다. 이후 지금까지 산업화와 도시화, 반독재와 민주화, 후기 산업화와 세계화, 생명•생태•환경 등이 시대의 추이에 따라 문학의 관심을 지배했던 의제들이 었다. 이런 의제들을 안고 전라도의 문인들 역시 깊이 고뇌하고, 작품을 통해 4 눈부신 성과를 보여주었다. 분만 아니라,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겪고 나 서는 민중 항쟁의 체험과 정신을 승화시킨 '오월문학'을 통해 한국문학에 새 로운 흐름을 유도하였다. 1950년대 이후 활동한 문인으로는 이성부, 문순태, 김준태, 조태일, 문병란, 김승옥, 송기숙, 한승원, 이정준, 조정래, 윤흥길, 최명 회, 양귀자, 신경숙, 김남주, 곽재구, 김용택, 복효근, 임철우, 은희경 등이 있다.

다른 어느 시대보다도 특히 근대 이후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급격한 변 화를 겪었다. 국권의 상실과 회복, 분단과 전쟁, 산업화와 민주화의 대장정을 거쳤다. 그러는 동안 문학 역시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며, 시대의 요구와 달라진 감성에 부응하였다. 이전에 없던 현대 장르의 도입, 전통 장르의 혁신, 해외 사조의 소개와 수용, 새로운 유파나 의제의 형성 등이 이루어졌다. 특히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전라도의 문인과 그들의 작품이 있었다. 그런 데 이것은 근대 이후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고전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의 시가나 소설 등 여러 장르에서 기존의 관심이나 형태를 뛰어넘는, 새로운 유형의 작품들이 늘 전라도에서 산출되었음이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그런 점에서 실험성, 독창성, 저항성을 전라도 문학을 관통하는 키워드 로 꼽을 수 있다.

김신중

2 출판•언어

 

가. 완판방각본의 출판과 유통

가) 완판방각본의 개념 국어사전에는 완판본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국어사전에서는 완  

판본을 고전소설에 국한하여 다루고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1

는 완판본을 방각본(판매용 책)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국어사전 의 개념보다 백과사전의 개념이 훨씬 포괄적이다.

완판본의 개념은 광의의 개념과 협의의 개념으로 나누어 생각해야 한

다. 광의의 개념으로 볼 때는 '전라도 전체에서 발행한 옛 책을 완판본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조선시대에는 전라감영에서 전라남북도와 제주도를 관 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협의의 개념으로는 전라감영이 소재한 '전라도 전 주를 중심으로 발행한 완판방각본을 말하는 개념으로 정리되어야 한다. 따 라서 협의의 개념인 '완판본의 사전적 뜻풀이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야 한

다. 이때 완판본의 개념은 판매용 책인 완판방각본을 말하는 것이다.

완판본完板本: 조선 후기에, 전라북도 전주에서 간행된 판매용 책을 통틀 어 이르는 말. 전라도 사투리가 많이 들어 있는 목판본 한글 고전 소설을 비롯하 여 천자문, 사서삼경, 역사서, 실용서 등의 판매용 책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나) 완판방각본 출판의 배경 전라도 전주는 조선시대 전라감영이 소재한 곳으로, 전라도의 정치, 경 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전라도에서 생산한 물품이 모여들어 큰 시장을 형성하였고, 한지를 대량으로 생산하였으며, 판소리가 크게 발달하였다.

전라감영에서는 주로 중앙정부가 요청한 90여 종류의 책들을 인쇄하여 관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때 목판을 새기는 각수, 종이를 만드는 지장, 다 양한 인쇄기술이 발달하였고, 조선시대 후기에 들면서 각수들이 고급 인쇄 기술을 가지고 사간본이나 방각본 제작에 참여하면서 지역의 인쇄출판의 발

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특히 전라감영이 관장하는 교육기관인 회현 당希顯堂에서는 '회현당 철활자'가 만들어졌다.

한편 전주부에서 책을 발행하면서 축적한 다양한 인쇄기술이 완판방각 본의 출판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전주부에서는 조선시대 단일 도시로서 전 224 국에서 가장 많은 책을 출판하였다. 1799년부터 1844년까지 14종이 발간된 태인방각본의 책판이 일부가 완판방각본으로 재출판되었기 때문에 완판본 발달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전 조선시대 전주에서는 남문시장(현재 남부시장)을 중심으로 여러 출판소에 서 완판방각본을 인쇄하고 판매하였다. 이 출판소들은 서울과 대구 등과 교 류하면서 완판방각본이 여러 지역으로 판매되었다.

4 완판방각본은 한지의 질이 매우 우수하였는데, 전라감영의 시설로 조지 소造紙所에는 지장紙匠이 있어 양질의 한지를 만들었다. 전주 인근인 상관, 구 이, 임실 등에 지소紙所를 두어 우수한 품질의 한지를 생산하였다. 조선 후기 에는 전국에서 가장 품질이 우수한 한지를 생산하였다.

전라도에서 발달한 판소리는 18세기를 지나 19세기에 이르러서 양반과 평민들이 모두 즐기는 음악이었다. 판소리가 대중예술로 성장하면서 판소리 계 소설인 완판본 한글고전소설로 상업화가 되었다. '춘향가, 심청가, 토별가, 적벽가' 등의 판소리가 크게 유행하자, 이를 바탕으로 인쇄츨판인들이 판매 용 책인 완판방각본 한글고전소설을 출판하였다.

다) 완판본 한글고전소설의 특징 동리 신재효(1812~1884)가 새롭게 정리한 판소리 사설 춘향가, 심청가, 토 별가, 적벽가를 바탕으로 완판본 판소리계 소설을 전주에서 출판한다. 그 결 과 춘향가는『열여춘향수절가』, '심청가'는『심청가』와『심청전』으로, '토별가' 는『퇴별가』로, '적벽가는『화룡도』란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이런 이유로 완판 본 한글고전소설은 동시대 한양(서울)에서 발행한 경판본 한글고전소설과는 상당히 달랐다. 이런 차이를 중심으로 완판본 한글고전소설의 특징을 살펴보 기로 한다. 완판본 한글고전소설의 제목을 현대국어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완판본) : 열여춘향수절가(춘향전), 별춘향전, 심청전, 심청가, 홍길동전, 삼국지, 언삼국지, 소대성전, 용문전, 유충열전, 이대봉전, 장경전, 장풍운전, 적성의전, 조웅전, 초한전, 퇴별7}, 화룡도, 임진록, 별월봉긔, 정수경전, 현수 문전, 구운몽, 세민황제전

한양(서울)에서 발간한 경판본은 장수가 16장본에서 64장본(r월왕전』)까 지 있으며, 대부분 20장본과30장본이다. 완판본의 초기본은 21장본, 26장  

본, 29장본, 41장본이나, 후기본은 73장본, 84장본이 대부분이다. 경판본은 흥미를 위해 판매를 목적으로 발행한 책이었고, 완판본은 당시 전주 지역에 서 유행한 판소리의 사설을 중심으로 소설화한 책이기에 장수가 많다 글꼴의 경우, 경판본은 식자층들이 읽을 수 있는 '궁체의 하나인 행서체 1

로 쓰여 있고, 완판본은 서민들이 읽고 한글을 공부할 수 있도록 정자체(해서 체)로 쓰였다.

경판본은 서술 방식이 한문 번역투의 문어체이지만, 완판본은 일상적인 구어체 이야기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래서 완판본 한글소설에는 전라도 방언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나 경판본은 방언이 들어 있지 않다. 완판본『열 여춘향수절가』에는 '향단이' 대신에 상단이로 나온다. 완판본『용문전』에는 '괴벗다가,『심청가』에는 '픽각질'(딸꾹질)이 나온다. 당시 전라도에서 규칙처럼 일반화된 구개음화, 전설모음화, 이모음역행동화, 원순모음화'와 같은 음운현 상과 전라 방언의 다양한 어휘가 아주 많이 나온다.

라) 완판방각본의 출판소 전주 남문시장을 중심으로 '서계서포, 다가서포, 양책방, 문명서관, 장남 서관, 질서방, 완흥사서포' 등과 같은 출판소에서 완판방각본을 출판하고 판 매하였다.

전주의 최초의 서점으로 추정되는 '서계서포'에서는 1700년대 중반부터 1800년대 초•중반에도 책을 발간하였다. 1911년에 한글 고전소설인 '화룡 도, 조웅전, 유충열전, 심청전, 초한전, 소대성전, 장풍운전, 열여춘향수절가, 이대봉전, 구운몽, 삼국자 등을 주로 발간하였다. 서계서포에서는 17종의 방

각본 고전소설과 비소설 기종이 발간되었다

'다가서포'는 양책방이 서계서포를 인수하여 합병한 서점이다. 그래서 '서 계서포'와 '다가서포'에서 찍은 책이 거의 같다. 주로 1916년 한글고전소설과 판매용 책을 인쇄하고 판매한 서점이다. 특히 1916년 발간된『열여춘향수절

226 가』는 완판본『춘향전』계열에서 가장 대표적인 소설이다. '다가서포'에서 발 간한 고전소설은 14종이고, 비소설류는 24종이다.

'문명서관'은 다가서포의 옆집이다. 당시 발행자는 '양완득梁完得'이다. '문 전 명서관'에서 발행한 책은 간기를 보이지 않는다. '문명서관'에서 발간한 서적 은 고전소설은 1종이고, 비소설은 12종을 발행하였다.

'창남서관'은 출판소인 칠서방e書房의 총판매소이다. 당시 주인은 장환 4 순張煥舜이다. '창남서관은 칠서방에서 인쇄한 책을 판매하는 서점이었다. 일 제강점기 후반에는 활자본, 중국본 등 서울에서 가져온 책도 함께 판매하였 다. '칠서방'은 '전주하경룡장판全州府河慶龍藏板'이란 간기를 갖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서삼경을 인쇄한 전주를 대표한 서점이다. 이 서점에서는 30종 의 방각본을 출판하였다.

'완흥사서포'는 전주 남부시장 쪽(전주 남문 쪽)에 위치한 싸전다리 근처에 위치하였다 완흥사서포에서는 한글고전소설 3종, 비소설 4종을 발간하였다. '양책방은 1915년 무렵에 전주 다가동에서 서점을 하다가 '서계서포'와 합쳐 서 '다가서포'가 되었다. 이후 전주군 용진면 아중리로 옮겨서 1932년까지 몇 권의 소설을 발간하고, 1937년까지는 비소설을 찍어냈다. 양책방에서는 고 전소설 6종과 비소설 14종을 발간하였다.

이 출판소 중에서 '서계서포, 다가서포, 창남서관, 칠서방, 양책방' 등은 서울, 대구 등 전국적으로 교류하면서 판매하였다.

나. 전라도 언어(방언)의 특징 전라도의 언어는 대체로 방언을 말한다. 그러나 사실 전라도의 언어 안 에는 민속어, 고유어, 방언, 유행어, 외래어, 관용표현, 속담 등이 모두 포함된 다. 전라도 방언은 일반적으로 전라북도 방언과 전라남도 방언을 말한다. 전

라도 방언을 지리적으로 구별하여 서남 방안이라고도 한다. '북부 서남 방언' 은 전북 방언을 가리키고, '남부 서남 방언은 전남 방언을 말한다. 여기서는 방언을 중심으로 서술하기로 한다.

가) 음운 현상 한국어의 단모음은 10개이다. 전라도 방언인 서남 방언에서 단모음은  

 이, 에, 애, 위, 외, 으, 어, 아, 우, 오의 10모음 체계를 갖는 지역이 있다. 그런 가 하면 '에'와 '애가 발음에서 구별이 어려워 중화되어 하나로 처리하기 때문 에 9모음 체계를 갖는 지역도 있다. 두 가지 모음이 합쳐진 '이중 모음은 중앙 어와 같다. 1

전라도 말의 발음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음운현상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모음 역행동화는 '움라우트'라고도 하는데, '이모음 역행동화는 단어 또는 어절에서, 가, 터, 고등의 모음이 다음 음절에 오는 '1' 또는 기' 계  모음의 영향을 받아서, '거, 기, 되 등의 모음으로 변하는 현상을 말한다. 전라 도 방언에서 '아비-에비, 토끼-퇴끼, 고기-괴기, 당기다-댕기다, 안기다-앵기 다, 다리다-대리다(다리미_대리미), 마음이-맴이, 속이-쇡이, 잡히다-잽히다, 속 이다-쇡이다, 참빗-챔빗' 등과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둘째, '원순모음화' 현상은 '비 표, u'의 뒤에 오는 '-가 원순 모음인 '구로 바뀌는 음운 현상을 말한다. 전라도 방언에서 '거미-거무, 호미-호무, 나 비-나부, 파리-포리, 팔-폴, 팥-퐅, 먹다-묵다, 먼지-몬지/몸지, 짧은-짤룬(짤 룹다), 기르다-지루다/질구다, 일리다-일구다 등의 예를 들 수 있다.

셋째, '전설고모음화'는 '가슴〉가심, 쓰리다〉씨리다, 가루〉가라와 같이, 치 살음 또는 '근' 뒤에서 '으모음이 '이로 변화하는 현상이다. '베개〉비개, 세다〉 시다와 같이 '에' 모음이 '이' 모음으로 변화하는 현상도 포함된다. 전라도 방 언에서 스물-시물, 쓰레기-시레기, 벼슬-베실/벼실, 보습-보십, 쇠스랑-쇠시 랑, 이슬비-이실비, 마을-마실, 가을-가실' 등의 예를들 수 있다.

넷째, 구개음화는 '입천장소리 되기로도 불린다. 끝소리가 '니 E'인 형태

소가 모음 '1' 또는 반모음 ' 1 [j]'로 시작되는 형태소와 만나면 그것이 구개음

'치文'이 되거나, '근 뒤에 형식 형태소 '하가 올 때 '亏'과 결합하여 이루어진 'E'이 '文'이 되는 현상을 말한다. 전라도 방언의 구개음화는 '기의 '굿으로 변 하는 'k구개음화'와 '구이 '入으로 변하는 'h구개음화, '드 E'이 '치文'으로 변

228 하는 't구개음화'로 나눌 수 있다. 전라도 방언에서 '견디다-전디다, 김-짐, 길질, 길게-질게, 기르다-질르다, 기침-지침, 곁에-졑에, 김제-짐제/짐게/김게, 혀-서, 힘-심, 형님-성님, 해다-세다, 흉악한-승악한' 등의 예를 들 수 있다. 전

나) 문법 현상 전라도 방언에서 문법적인 기능을 하는 조사로는, 느마동/-마닥/-마도

4 (마다), -한질라/-할라(조차), -에가(에), -썩/-쓱(씩), -부텀左부톰(부터), -까장

(까지), -맹이로/-가치(처럼), -보담(보다), -허고/-랑(하고), -사야), -배끼(밖에), 만침/-맨치(만큼)' 등이 있다.

“저 밑에 {산밑이서부톰} 저 우여 면사무소 우여까장 있었어.”

“여그가 {콩알맹이로} 톡 불기드래야.”

전라도 방언에서는 연결어미인 표준어 '-니깨를 대체로 '-(의0게, '-(의 0께'로 발음하는데, '먹어봉게, 웃응게'와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표준어 '-.으면 서를 '-(의u서'로 발음하는데, '웃어쌈서, 먹음서'와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표 준어 '-는데를 '가는디, 사는디, 말허는다와 같이 '-는다로 발음하고, 표준어 '-.으면을 '웃으먼, 보먼, 가먼'과 같이 '-으먼으로 발음한다.

'가도만, 오노만, 간다도만' 등과 가간디?, 알간디?' 등에서처럼 전라도 방 언에서는 종결어미 '-간디/가디/가니/간'과 '-도만, -노만' 등이 많이 쓰인다.

전라 방언에서 화용표지 '-잉'은 친근감을 나타내는 기능을 하면서 많이 쓰이 고 있다

“오늘 내가 {음서봉게} 사람들이 겁나게 가데.”(오늘 내가 오면서 보니까 사람 들이 겁나게 가더라)

“니가 {웃응게} 내가 보기가 좋다.”(네가 웃으니 내가 보기가 좋다.)

“내가 {알간디}? 나는 몰라.”

“나 {간다잉}, 잘 {있어라잉}.”

전라 방언의 부사로는 '점드락(종일), 포도시(겨우), 솔찬히(상당히), 겁나게 (아주, 매우), 뜽금없이(갑자기), 죄다(모두), 대번에(바로), 맥없이/매럽시(그냥), 육 장(계속), 내동(내내), 엘라(오히려), 머냐(먼저), 팜나(밤낮, 매일)' 등을 들 수 있다.  

'점~드락, 포도~시, 겁~나게, 굥~장히, 워~너나 등과 같은 어휘는 장음으로 1

표현하는 특징을 보인다.

“무신 사람덜이 이르게 {겁~나게} 뫼야가꼬 멋을 헌다나?”

“{점~드락} 일을 힜드니 뻬마디가 다 쑤시네.”

다. 전라도 방언의 역사성 전라 방언은 전체 한국어에서 지역별로 분화를 일으킨 언어의 하나이기 때문에, 고대국어 또는 중세국어나 근대국어와 밀접한 역사적 관련성을 갖고 있다.

15세기 중세국어의 문헌인『훈민정음 언해본訓民正音諺解本』에는 골다 가 쓰였다. 전라 방언은 중세국어에서 바로 길다〉맹글다〉맹길다의 변화를 겪은 것이다. 중세국어의 문헌에 쓰인 어휘들 중에 전라 방언에서도 이미 중 세국어 이전부터 쓰이고 있던 어휘가상당하다.

밍구노니 (1446, 훈민언, 39 

표준어 '달래다는 전라 방언으로는 '달개다이다. 중세국어 '달에다는 연 철 표기로 한다면 '다래대로 표기되어야 한다. 연철 표기를 하지 않은 이유는 '달에다'의 '에'의 '0'이 '기의 약화된 성문유성마찰음[h]이기 때문이다. 중세국 어의 '몰에[沙]'도 같은 이유로 연철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전라 방언에서 자주 쓰이는 '맑다, 몰까, '말기다는 중세국어보다 이전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 할수있다.

전라 방언 '고습다는 '고不다〉고소다/고수다〉고습다〉꼬습다의 변천을 거 졌다. '고습다는 중세국어 '고不다'가 변한 '고수다에 형용사파생접미사인 '압/업-'이 점가되어 '고습다가 되었다. 현대국어 '고소하다는 '고不다〉고소다 의 변화에서 어간 '고소-에 형용사파생접미사 '-하가 연결된 어휘이다.

230 전라 방언 '자빠지다는 중세국어에서부터 '졋바디다〉졋바지다〉짓바지다 〉잣바지다〉자바지다로 변화를 한 것이다. '자빠지다'의 뜻은 원래 '뒤로 넘어 지다는 의미를 가지고 사용되었다. 그리하여 부정적인 뜻을 가지고 있기 때 전 문에 '놀고 자빠졌네'의 표현에서 조동사로도 사용되고 있다.

전라 방언 솔찬하는 '수월하지 않다에서 변화한 말이다. '수월하다의 부 정형인 '수월하지 않다는 수월치 않다, 수월찮다로 축약된다. 수월치 않다는

4 '쉽지 않다, '예사롭지 않다는 의미는 물론, 상당하다, 많다의 의미로도 쓰인 다. '수월찮다는 수나 양을 나타낼 때는 상당하다의 뜻을 가진다. '수월찮다 의 부사형 수월찮이'는 '꽤 많이'의 의미를 갖는다. 수월찮이'의 전라 방언형 이 솔찬히'이다.

무신 일을 혈 때 히드라도, 나를 살살 {달개감서} 히여. 나 설웁게 말고오. 최명희,「혼불』, 1996.3, 기쪽.

아, 깨를 볶으먼 {꼬순} 내가 진동을 혀.

〈전라 방언〉.

시꺼먼 털이 승일승얼한 정강이를 통째로 드러내놓고 {자바세 자는 꼬 락서니가 보기 싫어서, 초봉이는 커튼으로 몸을 가렸다.

채만식,「탁류』, 1987, 267쪽.

지난참에 본게 이 사람이 {솔찮이} 똑똑합디다.

송기숙,「녹두장군』5, 1989, 207쪽.

라. 전라 방언과 현대 문학 작품 김영랑의 시「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는 오-매 단풍들것네'라는 방 언 문장을 반복하면서 시의 전반적인 리듬감을 주도하고 있다. 특히 전라 방

언 '오매, 들것네'의 사용으로 리듬감이 배가되고 있다.

오-매 단풍들것네/ 장광에 골불은 감닙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듯이 지 어다보며/ 오-매 단풍들것네

(이하 생략)

서정주의「인사」에서 '안녕하셔라우?, 할테지라우?, 가겨라우 등에서 쓰  

이는 '-라우는 표준어에서 존대의 접미사 '-요와 같은 기능을 하는 종결어미 1

이다. '안녕하셔라우?'에서 특유의 전라도 가락을 생각하면서 음조를 넣어 읽 어야 한다.

과 合竹扇든春香이가 인사를 한다/ “도련님들 아가씨들 안녕하셔라우?/ 변심이랑 행여나 안 할테지라우?”/井邑詞의女人도 인사를 한다/ - “궂은 날 도 즌델랑은 밟지를 말고 꼬독꼬독 마른데만 골라 가겨라우.”

「인사 -全北大學校第22周年記念日에」 

채만식은 자기의 고향 언어인 방언 사용을 통하여 구어체 문장을 구사하 고, 작중인물의 성격과 지역성(토속성)을 묘사하고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설정하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방언을 이용하여 풍자에까지 이용한, 백릉 채만식의 작품에서는 1930년대의 다양한 전라 방언을 확인할 수 있다.

(며느리 고재 “내던 아무껏두 잘못헌 72! 옶어라우! 파리 족통만지두 잘못 헌 것 옶어라우! 팔자가 기구히여서 이런 징글징글헌 집으루 시집은 죄백으년 아무 죄두 옶어라우! 왜 걸신허먼 날 못잡어 먹어서 응을거리여?”

「태평천하』.

전라도 사람들이 하는 대화 안에서 사용되는 전라 방언, 각종 문헌 자료 에 나오는 전라 방언, 문학작품에 나오는 전라 방언을 이해하면서 언어를 통 하여 전라도 천년의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태영

3. 판소리

 

가. 백제의 노래, 고려의 노래

232 민족음악학자인 존 블래킹(.John Blacking)은 음악도 언어나 종교와 같이 인간이라는 종에 특유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음악은 거의 모든 인간에게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블래킹은 유보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는 전 모든 인간을 다 조사해 보지 못해서 조심스럽게 하는 말이다. 음악은 아마도 인류의 시원에서부터 존재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라도의 음악은 전라도 땅에서 우리 민족이 삶을 영위하기 시 4 작할 때부터 있었을 것이다. 일을 하면서는 노동요를 불렀을 것이고, 제의를 행할 때에는 집단적으로 주술적인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장례를 치를 때, 잔 지를 할 때도 노래를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기록이 없어서 실체를 확인 할 수 없을 뿐이다. 전라도 음악이 처음 기록을 만난 것은 고려시대이다.

『고려사』「악지」삼국의 속악에서는 신라, 고구려, 백제의 음악도 고려에 서 모두 사용하고 그것을 악보에 편입했다고 했다. 그런데 가사는 실려 있지 않고, 제목과 내용 그리고 노래와 관련된 사연 등이 실려 있을 분이다. 여기에 는〈선운산〉,〈무등산〉,〈방등산〉,〈정읍〉,〈지리산〉등 다섯 편의 백제 노래가 소개되고 있다.〈선운산〉은 부역에 나간 남편이 기한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 자 아내가 선운산에 올라가 남편을 생각하며 부른 것이며,〈무등산〉은 광주 무등산에 성을 쌓았는데, 백성들이 그 덕으로 편안하게 살 수 있어 즐거워서 부른 노래라고 했다.〈방등산〉은 신라 말에 도적이 일어나서 방등산에 근거 를 두고 양가의 자녀들을 많이 잡아갔는데, 도둑에게 잡혀온 여인이 자기 남 편이 곧 와서 구출해주지 않는 것을 풍자한 노래라고 했다.〈정읍〉은 장사하 러 먼 길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노래이고,〈지리산〉은 무소불위인 백제 국왕 의 권력에 저항하며 지아비를 향한 변함없는 정절을 담고 있는 노래이다.

이상의 기록을 보면, 백성들이 성을 쌓으며 불렀다는〈무등산〉외에는 모두 남편을 그리워하는 아내의 이별과 그리움, 기다림과 원망의 정서를 노래

한 것들이다. 이러한 정서는 지금도 전라도 예술의 근원적인 정서가 되고 있 다. 그러나 이 나들이 백제 때 형성된 노래라는 증거는 찾기 어렵다. 다만 이 다섯 편의 노래가 고려사회에서 백제 노래로 인식되어 있었고, 그러한 인식이 계승되어 조선시대에 편찬된『고려사』에 백제 노래로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또「악지」에 실린 고려속악 가운데는〈장생포長生iD라는 노래가 있는데, 이는 고려말 장생포(순천부에 속한 포구)에 침입한 왜구들을 장수 유탁(1311~  

1371)이 위엄으로써 싸움 없이 물러나게 한 것에 군사들이 기뻐하며 지었다 1

고 하였다.

고려시대 지방의 속악은 전국에 산재해 있던 광대•악공•창기들이 담당

하고 전파했으므로, 전라도 지방의 속악과 기악• 잡기 또한 이들이 담당하면

서 연행했을 것이다. 이들은 지방관아를 중심으로 개최되는 다양한 행사에 서 연행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나주목에서는 국가행사인 팔관회八閭會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본래 팔관 회에서는 가무백희의 공연행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나주에서 행해졌던 팔 관회에서도 가무백희가 연행되었다고 보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나. 판소리의 발생과 발전 조선 전기에 전라도에서 향유되었던 음악들에 관한 자료는 찾기 어렵다. 그렇다고 노래가 하루아침에 다 사라졌다고 볼 수는 없다. 고려에서 조선으 로 넘어오면서 국가의 이념은 불교에서 성리학으로 바뀌었지만, 사람들의 일 상이 완전히 바뀌거나 멈추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 전기 는 후기에 다양하게 피어나는 음악의 기틀을 마련한 시기로 규정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조선조 후기에 전라도의 음악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판소리이다. 판소리 는 음악으로 보나 문학으로 보나 매우 오랜 근원을 갖고 있다. 판소리가 부상 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 기원이 되는 이야기나, 광대, 음악은 우리 민 족의 시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이러한 판소리가 역사 속에 등장한 것은 대체로 17세기경이라고 본다.

18세기에 들어서면 판소리로 볼 수 있는 기록이 확인된다. 과거에 급제한 사 람들은 유가游街를 하고, 조상들의 묘를 찾아뵈며, 사당에 가서 제사를 드린 다. 이때 집안에 풍요와 행운이 깃들도록 음식을 자려놓고 비는 고사告祀했는데, 이 고사소리를 하던 사람들이 후에 판소리 소리꾼이 되었다. 문헌을 234 통해서 현재와 같은 판소리의 존재를 확실하게 인정할 수 있는 최초의 시점 은 영조 무렵이다. 19세기에 들어서면 여러 문헌에 판소리 창자들이 등장한 다. 이 시기 양반들은 판소리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양반들의 참여로 전 판소리는 음악이나 사설에서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다.

19세기는 판소리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인데, 19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사람들을 전기8명창, 19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사람들을 후기8명창이라고 4 한다. 전기8명창으로 일컬어지는 사람 중에서 전라도 출신은 권삼득, 송흥록, 모흥갑, 신만엽, 송광록, 주덕기 등 여섯 명이다. 그런데 전라도 출신 소리꾼 들은 자신의 소리를 후세에 남겼으나, 전라도 출신이 아닌 명창들은 한두 대 목을 제외하고는 자기 소리를 후세에 남기지 못하였다. 후기8명창들은 전기 8명창의 소리를 계승하여 다양한 더늠들을 개발하였다. 전기8명창들이 대 부분 여러 가지 향토 선율을 판소리에 도입하여 다양한 선율형을 개발한 데 비해, 후기8명창들은 전기8명창들이 개발해놓은 선율형들을 갈고닦아 판소 리사에 길이 남을 아름다운 더늠들을 만들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판소리 애호가는 흥선대원군(1820~1898)과 신재효 (1812~1884)이다. 이들의 판소리 향유는 대원군으로 대표되는 최고위 지배층 에서부터 신재효로 대표되는 구층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계층에서 일상 적인 것이 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또 이 시기에는 서민지향적 감성의 서 편제 판소리가 나타났고, 여창 판소리도 등장했으며, 전주대사습이 생겨나서 판소리 창자들의 등용문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02년부터 해방 때까지는 5명창시대라고 한다. 5명창에 거명되는 명창은 박기홍(1854~1939), 김창환(1854~1939), 김채만(1865~191D, 송만갑 (1865~1939), 이동백(1872~1935), 김창룡(1873~1949), 유성준(1873~1949), 전도 성(1864~?), 정정렬(1876~1938) 등이다 이 중에서 이동백(충청도 서천 출신)과 김

창룡(충청도 장항 출신) 외에는 모두 전라도 출신이다.

5명창시대에는 밀려오는 서양문화에 대응하여 판소리에 변화가 일어났 다. 그 첫 번째 대응은 극장의 도입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은 1902년에 건립된 협률사였다. 극장에서의 판소리 공연은 협률사식 옴니버스 공연과 창 극으로 발전 분화되었다. 1935년에 결성된 조선성악연구회는 창극을 주도하 면서 창극의 융성을 이-끌어냈는데, 이 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익산 출신인 정  

정렬과 고흥 출신인 김연수였다. 1

극장식 공연장에서는 누구든 일정한 입장료를 내고 입장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일반 대중이 관객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판소리

는 일반 대중의 취향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권번의 설치로 인

하여 판소리가 유흥의 도구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전주, 군산, 익산, 정읍, 남 원, 광주, 목포 등지에 설치된 권번을 통해 판소리 창자의 공급이 이루어지게 되면서, 판소리는 요릿집에서의 여흥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권번의 등장과 함께 판소리는 급격히 여성화되었다.

이상과 같은 여러 변화를 통해 판소리는 세속화되었다. 세속화의 음악적 표현은 계면조(슬픈 가락)이다. 판소리가 일반 대중의 취향에 의존하게 되면서 급격하게 슬픈 가락이 판소리에서 크게 늘어났다는 것이다. 판소리에서 슬픈 가락이 늘어나게 된 것과 전라도 중심 판소리 전승은 서로 맞물려 있다. 전라 도 지역의 음악적 정서의 기반이 슬픈 계면조였기 때문이다.

다. 조선후기 풍류와 민속음악 조선후기 전라도의 붙박이 예술집단이 만들어낸 음악문화는 판소리를 시작으로 하여 산조로 확장되었다. 또 전라도에서 활동했던 사당패와 같은 유랑집단의 공연 종목은 후에 남도잡가와통속민요의 기반이 되었다.

전라도 민요는 '남도소라라고 부르는데 전라도를 비롯하여 충청남도와 경상남도 일부지역 민요를 포괄한다. 남도소리의 전승은 해당 지역의 농업 환경과 형태 등의 문화 환경에 따라 양상이 다양하다 산조는 전라도를 비롯하여 충청도와 경기도 남부의 민속 음악인들 사이

에 전승되어온 시나위' 또는 '심방곡L方曲'으로 시작하여, 조선후기 새로운 민 속 음악으로 발전한 기악 독주곡이다. 초기에는 가야금 연주로 시작되었고, 이후에 '대금', '거문고, '단소, '해금, '아쟁' 등으로 확대되었다. 산조는 전남 영 암 회문리 출신의 김창조(1856~1919)가 산조의 시조로 인정되고 있다. 전남지

236 역에는 한숙구(1865~1940)와 같은 인물이 활동하였고, 전북에서는 박한용 (1890~?), 이영채(1879~1931) 등이 함께 활동하였다.

농악은 일하는 사람들의 놀이이자 공동체 문화이다. 농악의 역사는 분명 전 하게 가늠하기 어려우나, 적어도『조선왕조실록』1738년(영조 13)의 기록을 통 해서 이때 마을 농악이 존재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농악은 꾸준하게 발 전하여 동학농민혁명 등에서 민중들의 희망을 노래하는 역할을 했다.

4 조선시대에는 궁중과 지방의 관아, 향교와 서원 등의 각종 의식에 음악 이 사용되었다. 궁중의 의식음악과 지방 관아의 의식음악은 기본적인 구성이 같다고 할 수 있다. 관아의 의식에 사용되는 음악은 주로 삼현육각으로 연주 되는 대풍류 악곡이다. 관아를 비롯해서 민간의 잔치에서 기생들의 춤 반주 로 삼현육각 악곡을 두루 연주하였으며, 결혼식, 절의 재의식, 무속의식 등에 서도 삼현육각이 기본이었다.

이 시기 전라도 아전들은 전주는 물론 정읍지역에서 풍류방을 개소하 며 풍류 문화를 주도하였다. 여기에 재인들이 풍류방에 참여하면서 오늘날의 풍류가 전승될 수 있었다. 특히, 정읍과 담양에서 풍류방 문화가 활발하게 전 개되었다.

양반들이 시를 짓고 이것을 노래하는 장르는 정가正歌이다. 전라도는 가 사문학을 주도했던 지역이다. 특히 태인과 담양은 가사와 시조의 고장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 지역이다. 음악적으로는 노래로 연행하는 가창가 사가 중요한데, 가창가사인〈춘면곡〉이 전라도에서 만들어져 경기와 서도로 퍼져나갔다. 이는 판소리가 남도에서 생성되어 서도까지 전파되어 많은 전통 예술 장르들에 녹아들어간 상황과 맞닿아 있다 시조는 악기반주를 넣어서 5장 형식으로 노래하면 가곡이 되고, 3장체 로 노래하면 시조가 된다. 전라도의 지역성을 담은 시조를 완제시조라고 하여

다른 시조와 구분한다. 완제시조가 따로 논의된다는 것은 전라도의 시조가 독자성을 가지고 발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범패는 절에서 재齋를 올릴 때 부르는 소리이며, 의식무용인 작법乍法과 더불어 연행되는데, 범패는 이들 작법무의 반주 역할을 하기도 한다. 지금은 전라도의 범패 전승이 약화되었으나, 지역적 특성을 지닌 채 계보를 만들며 전승되어 왔다.  

조선후기 전라도 민속예술의 발전은 전라도 지역의 발전된 농업문화와 높은 예술성, 그리고 근월대 예술로 전개되는 예술적 기반을 갖추게 했던 향 리들의 안목과 지원에 의해 가능했다. 전라도인들의 예술에 대한 깊은 관심 과 참여 그리고 빼어난 예술성을 발휘한 무계 집단들의 활발한 활동의 뒷받 1

침이 있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만 한다.

라. 현대 국악

가) 판소리의 종말과 부활 해방이 되자마자 광주에서는 광주성악연구회가 결성되었다. 1946~ 1947년에는 여러 창극 단체가 결성되어 공연에 나섰는데, 결성 지역과 공연 지역을 불문하고 다 전라도 출신 명창들이 주도했다.

해방 전후의 판소리는 전라남도는 박동실로, 전라북도는 이기권으로 대 표된다. 그래서 '남에 박동실, 북에 이기권으로 일컬어졌다. 그러나 박동실이 월북함으로써 박동실의 판소리는 전승력이 급격히 약화되었고, 이기권의 판 소리는 전승자를 만나지 못해 세력이 약화되어 버렸다. 1970년대 이후 전라 도의 판소리는 남에 보성소리, 북에 동초제(김연수 바디 판소리로 재편되었다.

6.25 이후에는 사설 국악원들이 각지에 생겨 판소리를 가르쳤다. 전주, 익산, 군산, 정읍, 남원, 광주, 목포, 순천 등지에 국악원이 생겨서 판소리 창 자들을 양성했다. 이 국악원들은 판소리의 쇠잔기에 판소리 전승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라져가는 판소리의 맥을 이어준 곳이 바로 이 국악원들이기 때문이다 창극과 여성국극으로 어렵게 이어지던 판소리는 6.25로 인하여 큰 타

격을 입은 뒤에 좀처럼 회복하지 못하다가, 1960년에 이르러 거의 절멸 지경 에 이르렀다. 소리꾼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은 시장 바 탁에서 물건을 파는 장사꾼들에게 불려가 호객을 위한 소리를 하면서 버텨 나갔다. 1960년 이후 1970년대 초까지 이러한 상황은 계속되었다. 이 시기가 238 판소리사상 가장 혹독한 시기였다.

판소리가 절멸 지경에 이르자 정부의 정책적 개입이 시작되었다. 대표적 인 것이 1964년에 시행되기 시작한 무형문화재 제도이다. 전라도에서도 무형 전 문화재 보유자 인정을 통해 전통 음악의 보존에 힘쓰고 있다. 지금까지 전라 남도에서 7명, 광주시에서 6명, 전라북도에서 기명의 무형문화재 보유자를 인정하였다.

4 1980년대에는 판소리가 교육체계 속에 편입되기 시작했다. 1983년에 전 남대학교에 국악학과가 설치된 후, 1984년 우석대학교, 1988년 전북대학교, 1995년 원광대학교에 국악학과가 설치되어 판소리 교육을 시작했다. 한편 고등학교는 1982년에 광주예술고등학교에 국악전공이 설치된 이래, 1991년 전남예술고등학교, 1994년 전주예술고등학교, 1997년 남원국악예술고등학 교가 설립되어 판소리 교육을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전라도 지역의 판소리 교육은 국가의 공식 교육체계 속에 편입이 되었다. 또 이들이 활동할 각종 국 공립 연주단체도 설립되었다. 이렇게 하여 전통음악과 창작음악이 활성화되 기 시작했고, 국악은 다시 활력을 찾기 시작했다. 각종 축제와 경연대회도 다 수 생겨나 전통 음악의 저변 확대에 기여하고 있다.

전라도 지역의 농악은 우리나라 농악을 대표한다. 그래서 익산, 필봉, 남 원, 구례의 농악이 국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각 시군에서도 여러 지역 에서 농악보존회의 농악단 및 농악전수회관을 설립하여 지역 문화행사에 참 가하고 공연을 함으로써 지역민의 대동단결에 앞장서고 있다.

조선말 이후 일제강점기 동안 흩어져 있던 전라도의 풍류객들은 해방 이후 각 지역에서 풍류 모임을 갖고, 지역간의 인적교류와 음악교류를 통하 여 전통음악의 맥을 전승하고자 하였다. 익산과 구례의 풍류가 대표적이다. 풍류는 국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사회 속에 부리를

내리지는 못하고 있다.

산조음악도 우리 지역에서 활발하게 전승되면서 공연되고 있다. 특히 국 악 관련 국공립단체와 민간단체의 활동이 두드러지는데, 이를 통해 우리 음 악의 저변 확대에 큰 공헌을 하고 있다.

나) 서양음악의 전래와 발전  

음악사학자들은 대체로 우리나라에 서양음악이 들어온 시기를 서양 신 1

부들이 천주교 교리를 전파하던 시기에서 조선이 외국과의 교류를 시작하던

1800년대 말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서양음악이 조선사회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우리나라를 세계 제국주의의 질서

에 흡수해버린 1910년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우리나라 대부 분의 지역에서 서양음악의 전래는 천주교와 기독교의 선교 활동 중에 이루어 졌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전라도 지역에 전래된 서양음악의 경로도 이와 크 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전라북도의 근대 학교들은 대부분 기독교 선교 과정에서 만들어진 학교 로 기독교 전파와 신교육을 보급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찬 송가와 창가가 필수 교과목으로 운영되었다. 그런데 창가는 쉬운 선율이기도 했지만 선율이 주는 느낌이 때로는 감상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가슴을 요동 치게 하기도 하여 사람들 속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일제강점기 광주와 전남에서도 서양음악의 교육은 교육기관이 중심이 되어 시작되었다. 그 때부터 학교나 교육기관 등에 서양악기를 나눠주게 되었 다. 이렇게 악기를 배우고 연습하여 실력이 늘어나면서 음악경연대회와 더불 어 연주회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때를 시작으로 더욱 더 전문적으로 활동하는 음악인들이 늘어났다. 이러한 음악인들이 모여 활동하면서 처음 연주단체가 생기기도 하였다.

6.25 이후 여러 가지 사회적 큰 변화를 겪으며 광주와 전남의 음악은 대 학교에서부터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시작하였다. 그러한 음악교육 덕분에 많 은 전문 음악인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음악인들의 활동으로 연주회가

 

많아졌다. 광주에서는 1950년에 처음으로 조선대학교 초급대학부 예술학과 가 만들어지고, 1955년에 광주사범대학이 설립되었다. 1971년에 전북에서 는 처음으로 원광대학교에 음악교육과가 설립되었고, 뒤이어 1973년 현 전주 대학교의 전신인 영생대학에 음악과가 설립되었다. 1979년에는 전북대학교 에 음악교육과, 군산대학교에 음악과가 설립 되었다 전라북도에서는 일찍이 지역의 문화예술인들이 보다 강력하게 연대하고 협력하는 협회와 단체를 만들어 조직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62년 4월〈예 전 술문화단체 총연합회 전라북도지부〉가 결성되었고, 지역 음악인들이 대거 참 여하는 종합예술제인〈전라예술제〉를 개최하였는데〈전라예술제〉는 지금까 지도 매년 계속되고 있다.

4 1970년대에 전라남도에서는 다양한 민간 음악 단체들이 대거 탄생하 였다. 1976년에 '광주시립교향악단', 1978년에는 '광주시립합창단' 그리고 1976년에는 '시립소년소녀합창단'이 만들어져 매년 정기연주회를 가진 바 있 으며, 2017년에 시립단체로는 처음으로 '광주시립오페라단'이 새롭게 생김으 로/서 현재 총 네 개의 시립예술단이 활동하고 있다. 민간 오페라단은 일반 사 람들과 함께 전문 성악가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1982년 광주•전남지역 에서 처음으로 '광주오페라단'이 만들어진 이후 여러 오페라 단체가 만들어 져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1980년대 전라북도의 음악계는 풍성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전라북도 전 지역에서 문화예술공연에 대한 도민들의 관심이 커지고 그만큼 수요가 많아지면서, 도내 곳곳에서 음악, 무용 등 무대예술활동과 미술전시회 등이 활발하게 펼쳐졌다. 도민들의 관심이 늘어날수록 지역의 정치행정계에서도 지역의 문화예술 발전과 성장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다양한 형태의 지 원도 늘어났다. 관립 예술단체들이 대거 등장했던 것도 이러한 지원 때문이 었다.

1966년 처음 만들어진 이래 몇 차례 재창단을 반복하던 '전주시립합창 단이 1984년 전주시 관립 전문합창단으로 재창단되었으며, 1976년 창단한 지립교향악단'은 1987년을 기점으로 단원의 상임화를 시행하면서 연간 50

라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지역에 음악대학이 설립되고 국내외에서 수학한 지역 출신 음악가들이 241

귀향하면서 1990년대 이후 전라도의 음악은 만개하였다. 이들은 각 단체에 1

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전라도의 음악문화 발전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

현대에 들어 대중문화의 확산으로 모든 지역에서 정통 클래식 음악이

크게 위축되고 있으나, 전라북도의 음악계는 다른 지역에 비해 우리나라클

여 회의 연주 활동을 하는 상근 단체로 발돋움하였다. 이외에도 여러 개의 합 창단이 생겨나 활발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1970년대에는 전문적인 인적 자원이 풍부해지고 음악적 역량이 깊이 축적되면서 종합음악예술의 꽃으로 불리는 오페라 활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전북지역에서도 오페

래식 음악의 부리가 되는 기독교의 전래가 일찍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만큼 서양음악의 부리가 깊어 여전히 서양음악이 사랑받고 있다. 도내 곳곳에 합 창단과 연주단 같은 크고 작은 시민 음악 단체들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으 며 생활문화운동과 평생교육 차원에서 개인교습이나 음악교육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제 전라도 지역의 서양 음악은 지역사회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으나, 대중음악의 홍수 속에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 하는 시점에 놓여 있다. 무 엇보다도 클래식 음악의 청중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과제 를 앞에 두고 있는 상황은 전통음악이나 서양음악이 다르지 않다.

최동현

4. 회화•도자•서예

 

가. 전라도의 회화

가) 조선시대의 회화 전라도에는 조선시대 이전에도 이곳을 기반으로 활동한 서화가들은 있 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작품이나 이후 화단과 연결지을만한 구체적인 활동 전 기록 등이 전해지는 것은 16세기 이후이다. 당대에 화가로 알려지지는 않았

으나 화순 출신의 16세기 문인 양팽손(梁彭孫1488~1545)은 18세기 문헌인

『동국문헌』「화가편」에 묵죽을 잘 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의 집안에는

4 그의 작품으로 전칭되는 네 폭의 묵죽도가 전해온다. 오늘날 화가로 잘 알려

져 있지는 않으나 하천霞川고운(高雲1479~1530) 또한 그가 살던 당대에는 호 랑이 그림으로 이름이 있었다.

해남 녹우당에서 출생한 공재恭齋윤두세尹

斗緖, 1668~1715)는 18세기 서민들의 일상을 그린 풍속화를 가장 먼저 그린 인물로 이후 풍속화의 흐름을 이끌었다. 분만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세 밀하게 그린〈자화상〉을 남겨 조선 후기라는 '회 화의 새 시대를 활짝 연' 화가로 평해진다(그림 0.

윤두서의 화풍은 그의 맏아들인 낙서駱西 덕희(尹德熙1685~1776)와 손자인 윤용에게로 전 해졌다. 윤덕희는 부친 윤두서의 화법만이 아니라

그림에 대한 생각과 태도 등 여러 면을 계승하여 그림 1.「자화상」,윤두서, 지본담채, 38.5x20.5cm

해남윤씨 집안의 화백을 형성하였다. 손자인 정고 (해남 녹우당)

靑皐윤용(尹傛, 1708~1740) 또한 윤두서와 윤덕희로부터 그림 재주를 이어받 아 계승함으로써 조선 후기 3대에 걸친 선비화가 집안을 이루었다.

해남 녹우당 3대 화가의 학문과 예술은 외증손인 다산 정약용(T若鏞, 1762

~1836)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윤두서에서 정약용으로,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

(金正喜, 1786~1856)로 이어지는 조선 후기 실학의 흐름, 그리고 김정희와 진도 출신 소치 허련과의 관계는 호남화단의 부리가 그만큼 깊었음을 보여준다.

의 화첩을 빌려 본격적인 그림공부를 시작한 그는 이후 추사 김정희의 문하 생이 되어 김정희로부터 문인화 이론과 필법을 배웠다. 급기야 5자례나 헌종 임금 어전에서 그림을 그려 바치는 영광을 누릴 만큼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허련의 회화는 당대에서 끝나지 않고 아들 미산米山허형(許鎣, 1862~ 1938)을 통해 가전됨으로써 호남화단의 굳건한 토대가 되었다. 허련의 직계 후손들 이외에도 미방米舫김익로(金益魯, 1845~1915)나 옥전王田임양재(i本陽渽, 243 1

윤두서 이후 한 세기가 지난 1808년 진도에서 출생한 소치께礙허련(許練, 1808~1893)은 19세기 남종문인화의 대가이다(그림 2). 녹우당에서 윤두서

1848~1912), 호석湖石임삼현(任三鉉, 1874~1948) 등이 그와 관련이 있는 것으 로 알려져 있다. 허련은 19세기 화단에 남종문인화풍을 토착화시켰고, 그의 화풍은 호남 회화의 특징이 되어 이후에도 호남이 전통회화의 고장이 되게 한 근간이 되었다.

19세기 후반 화순에는 문인화가사호沙송수면(宋修勉, 1847~1916)이 있 었다. 그는 사군자와 함께 나비를 잘 그려 송나비'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송수면의 회화는 그의 조카인 염재念齋송태회(宋泰會, 1872~1942)와 아들 매 사梅沙송대회(宋大會, 1882~1956)로 이어졌다 보성출신 석전石田이희순(李喜淳,

1894~1950)도 송수면을 사사하여 꽃과 나비그림에서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림 2.「선면산수도」, 허련, 1866년(59세), 종이에 수묵담채, 20)(61cm(서물대학교박물관)

전라도 감영이 있어 행정과 문화의 중심지였던 만큼 전라북도는 예부터 맛과 멋의 고장으로 불렸다. 그만큼 전북지역에는 선비정신을 살린 문인화 전 통이 이어져 왔으며, 시써•화를 겸비한 서화가들의 활동이 이어졌다.

조선 전기 순창에 살았던 여류문인 설씨 부인(薛氏夫人, 1429~1509)의『설 씨부인권선문첩』은 조선시대 여성 필적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자 사대부 가문의 부인이 쓴 불교관련 글로서도 의미가 있다.

19세기 김제출신 석정石亭이정직(李定稷, 1841~1910)은 실학적인 학문, 서 전 예와 함께 문인의 의취가 담긴 담박한 화풍으로 이후 전북 화단을 고아한 문 인화의 세계로 이끌었다〈그림 3〉.

이정직의 문하에서 활동한 문인들은 대단히 많다. 그중 대표적인 서화가 4 는 벽하碧下조주승(趙周昇, 1854~1903), 표원表園박규환(朴奎睆, 1868~1916), 유 하柳下유영완(柳永完, 1892~1953), 유재裕齋송기면(宋基冕, 1882~1956) 등이다. 이들의 서화풍은 다시 그 제자와 후손들로 이어지면서 근대 전북지방의 예 맥藝脈을 이루고 있다 전북에는 문인서화가들 외에도 포도그림에 능했던 낭곡浪谷최석환(崔奭煥, 1808~1889이후)이 있어 한층 다채로웠다. 최석환의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오랫동안 활동하였고 또 다작을 했던 듯 많은 작품이 전한다.

조선시대 전라도에서 활동한 많은 서화가들 중 윤두서나 허련은 각자 한 시대를 풍미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의 회화가 당대에 그치지 않고 가전됨

 

그림 3.「사군자」, 이정직, 25x43.lcm(개인 소장)

 

으로써 화풍을 공고히 하였다. 이정직 또한 시서화를 겸비한 문인화가로서 많은 제자들에 의해 그의 서화정신이 전해졌다.

나) 근•현대기의 회화

(가) 한국화 근대기 전라도의 서화활동은 19세기에 활약했던 남종문인화가 소치 허

련의 영향이 그 후손들과 제자들로 이어지면서 그 어느 지역보다 활발하였 1

다. 진도에서 태어난 의재毅齋허백련(許百鍊, 1891~1977)은 20세기 최고이자 최후의 남종문인화가로 일컬어진다. 광주 무등산 춘설헌에서 작품 활동을

하면서 그림제자들을 길렀고, 1938년 서화동호인 모임인 연진회鍊眞會를 발

족시켰다. 또한 농업학교를 세워 농업지도자를 양성하였으며, 자밭을 일구며 시서화와 함께 독서와 자생활로 일생을 보냈다〈그림 4〉.

허백련의 화풍과 회화정신은 연진회 회원들을 통해 호남의 현대화단으 로 이어졌다. 연진회 회원 중 서화가로는 근원 구철우(1904~1989), 구당 이범 재(1910~1993)를 비롯하여 동강 정운면(1909~1948), 자연 임신(1912~미상), 의

 

그림 4.「대풍(待豊)」, 허백련, 1976년, 종이에 수묵담채, 69.0x70.5cm(의자미술관)

재의 넷째 아우인 목재 허행면(1906~1966) 등이 있었다. 이들 외에도 옥산 김 옥진(1927~2017), 금봉 박행보(1935~), 희재 문장호(1938~2014)를 비롯한 수 많은 제자들이 춘설헌을 찾아 그림을 배웠다. 허백련의 장손자 직헌 허달재

(1952~)는 조부의 전통에 현대적 감각을 더한 새로운 문인화를 선보이고 있다. 남농南農허건(許楗, 1907~1987)은 미산 허형의 넷째 아들로 진도에서 출 생하여 목포를 기반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조부 허련과 부친 허형을 통해 전 해 내려온 전통화풍을 토대로 새로 유입된 사생풍寫生風산수화를 재해석하 전 여 자기화함으로써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해방 이듬해에 허건은 '남화연구

원을 개설하고 문하생을 받아 후진 양성에도 정성을 쏟았다. 남농 허건의 제 자들은 자신의 회화세계를 우뚝 세운 화가만 해도 정당 김명제(1922~1992), 4 아산 조방원(1926~2014), 도촌 신영복(1933~2013), 백포 곽남배(1929~2004)를

비롯하여 수십 명에 이른다.

근대기 전북에서 활동한 수많은 서화가들 중 가장 큰 흐름은 석정 이정 직과 직• 간접으로 닿아있다. 이정직의 제자인 조주승, 박규완, 유영완, 송기면 의 서화풍은 다시 조주승의 아들인 심농 조기석(1876~1935), 그 제자인 효산 이광열(1885~1966), 송기면의 아들인 강암 송성용(1913~1999) 등으로 이어지

 

 

그림 5.「황현상」, 채용신, 1911년, 비단에 채색, 95)(65.5cm(구례 매전사)

 

면서 근대 서화계의 큰 흐름을 형성하였 다. 이들 외에도 보정 김정회(1903~1970), 운재 윤제술(1904~1986), 월당 홍진표 (1905~1991) 등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전북의 문인화가들이다.

한편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활

동한 채용신(蔡龍臣, 1850~194D은 조선시 대 사실적인 초상화법을 이은 근대 초상 화의 대가이다. 그는 전통적인 초상화법 에 서양화법이나 사진술로부터 필요한 요소를 받아들여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 을 이루었다〈그림 5〉.

일제강점기인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가 창립되면서 전통회화 부문에서 도 많은 서화가들이 전람회를 통해 이름을 알렸다. 부안출신으로 묵죽을 특 히 잘 하였던 추당 박호병(1878~1942), 박호병에게 그림을 배워 산수와 신선 도, 화조를 잘 그렸던 조중태(1902~1975), 화순 출신으로 고창에서 활동한 송 태회(1872~1942) 등이 있었다.

이와 함께 개성 출신으로 군산에 와서 활동하였던 우석 황종하(1887~  

1952), 우청 황성하(1891~1965), 국인 황경하(1895~미상), 미산 황용하(1899~미 1

상) 4형제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들이 개설한 '서화연구소를 통해 옥구출신

서병갑(1900~1938), 정읍 출신 이상길(1901~1959), 정복연(1909~1979) 등이 활

동하였다.

이당 김은호에게 그림을 배워 인물과 풍속화에서 독자적인 경지를 개 척한 금추 이남호(1908~2001), 허백련 문하에서 그림 공부를 한 순창 출신인 임신(1912~미상)과 허산옥(1924~1993), 사생풍의 산수화를 그린 벽천 나상목 (1924~1999), 토림 김종현(1912~1999) 등이 있어 다채로웠던 전라북도의 근대 화풍은 현대로 이어졌다.

(나) 서양화 서양화는 근대기 일본유학을 통해 본격적으로 유입되었다. 일본유학생 들은 전라도에서도 여수출신 김홍식(1923~1928)을 선두로 30여 명에 이르며 이는 전국에서도 많은 편에 속한다.

전남에서는 화순의 오지호(吳之湖, 1926~1931), 신안의 김환기(金煥基, 1913

~1974)를 비롯하여 보성의 양수아(梁秀雅, 1920~1972), 구례의 고화흠(高和欽, 1923~1999), 강진의 윤재우(尹在玎, 1917~2005), 목포의 문원(文園, 1918~1950)과 강용운(姜龍雲, 1921~2006) 등이 일본의 여러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였고, 귀 국 후 국내에서 교편을 잡고 제자를 양성하면서 지역화단이 형성되었다.

전북에서는 이순재(1904~1958)가 동경미술전문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 했고, 해방 후 전주에서 개척사라는 간판점을 운영했다. 박노홍(1927년 입학), 권우택(1929~1934)을 비롯 전주 출신 김영창(1910~1988), 임실의 부호 박병수

4

그림 6.「남향집」, 오지호, 1939년, 80)(65cm, 캔버스에 유채(국립현대미술관)

(1914~1973), 남원 출신 이경훈(1921~1987), 고창 출신 진환(1913~195D, 완주 출신 권영술(1920~1997), 박노홍(1905~?) 등이 일본유학을 다녀와 미술교사 와 화가로 활동하였다. 이들 외에도 일제강점기에 광주 전남과 전북지역에서 재직한 일본인 미술교사들의 활동과 영향도 적지 않았다.

광주는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지역이었다. 강용운과 양수아가 재직한 광 주사범학교와 광주사범대학은 광주지역 추상회화의 산실이 되었다. 이곳에 서 정영렬•우제길•최재창•최종섭 등 추상화가가 배출되었다.

그럼에도 호남 서양화의 주류는 구상회화였다. 조선대학교 교수로 재직 한 오지호와 임직순의 역할이 지대했다. 1960•70년대 미술대학에서 졸업생 이 배출되면서, 광주쩐남지역의 화단도 활기를 띠었다. 대학 동문 혹은 동향 끼리 모임이 결성되고, 전시도 다양하게 이어졌다.

현대 회화계에서 기존 화숙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한국화의 흐름은 대 학 미술교육이 본격화 되면서 대학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대학의 한국화과나

서양화과는 다양한 기법의 회화를 가르치고, 여러 전공의 다른 지역 출신 교 수들이 부임하면서 더욱 다채로워졌다. 또한 1980년대 새롭게 일어난 민중미 술, 그리고 조각, 공예, 디자인, 미디어아트 등 기존 서화 중심에서 여러 분야 로 다변화되었다.

(다) 각종 단체와 비엔날레  

1980년대 전라도 화단에는 다양한 형태의 그룹전이 생겨났다. 이전 시 기 화숙이나 동문과 같은 단선적인 그룹을 떠나 비슷한 성향을 가진 작가들 끼리 새로운 모임을 만들면서 조형세계를 모색해 나가는 경향을 보였다. 대학 교육이 활성화되면서 각 대학별로 교수와 학생, 혹은 같은 시기 동문들로 이 1

루어진 모임들도 생겨났다.

민족삔중미술론이 본격화 된 1979년 9월 광주에서 '광주자유미술인협 의회가 창립되었고, 1985년에는 민족미술협의회가, 1986년에는 광주목판 화연구회가, 1988년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가 결성되었다. 이 무렵부터 전국 대학에서 미술 운동조직도 결성되기 시작했다. 1981년 전남대학교의 '민화

 

그림 7. 광주비엔날레 전시관

반', 1982년 조선대학교의 '토말', 1988년 5월 광주교육대학에 미술패 '솟다 를 비롯 각 대학의 미술패들이 조직되었다.

1980년대 이후 세계는 교통, 통신의 발달로 인해 문화의 경계가 급속히 무너지고 있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전라도의 회화도 가치개넘, 작가의 태도, 그림의 형식 등에서 급격한 변화를 보였다. 실시간 제공되는 전 세계의 미술 정보 속에서 작가들의 의식은 이미 동서양을 넘나들고 있다. 더구나 1995년 부터 이 지역에서 개최되고 있는 광주비엔날레는 현대미술의 실험정신과 세 전 계 곳곳의 파격적인 창작활동들을 한자리에 모아 과감한 발표와 교류의 장 을 펼쳐놓음으로써 한국 현대미술의 새 역사를 쓰고 있다(그림 7).

이와 함께 전라남도는 2017년 전남국제수묵프레비엔날레를 시작으로 4 수묵에 초점을 맞춰 비엔날레를 개최하고 있다. 전남에서 추진하는 '남도문 예 르네상스 프로젝트' 선도 사업 중 하나로 호남 남종화의 전통화맥과 남도 수묵화 활동을 재조명하면서 세계화를 꾀하고 있다.

나. 전라도의 서예

가) 조선시대의 서예 전라도의 서예는 '동국진체東國眞體서예의 대두, 보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동국진체를 제창한 인물, 보급한 인물, 완성한 인물이 다 전라도와 깊은 관련이 있거나 전라도에서 태어나 전라도에서 삶은 마친 전라도 사람이기 때 문이다 동국진체 이전의 서예가로서 특기할 만한 인물이 김제 출신 송재松齋송 일중(宋日中, 1632~1717)이다. 그의 해서나 초서는 까칠한 풍미를 풍기며 당대 명서가 들과는 다른 창의적 작품세계를 보인다.

옥동玉洞이서(李瀲1662~1723)가 동국진체를 주창하고 난 이후 이서의 절친한 친구였던 공재 윤두서는 전라도에 동국진체를 뿌리내리게 했다. 윤두 서는 사실적인 자화상과 풍속화의 태두라는 화가로서의 명성과 함께 서예가 로서의 의미도 주요하다.

이서와 윤두서를 이어 동국진체의 맥을 이어간 사람이 원교 이광사(李匣

 

그림 8. 장암 이삼만의 글씨

師, 1705~1777)이다. 이광사는 전라도 출신은 아니나 완도 신지도에 유배를 와 1

50대 이후 23년을 그곳에서 지냈다. 해남 대흥사의 침계루와 대웅전 현판 글

씨 외에 전라도 곳곳의 명찰에 그의 글씨가 남아있다.

이광사의 서예를 전수받은 인물이 대흥사의 스님이었던 아암兒庵해장 (惠藏, 1772~181D이다. 학승으로 명성을 떨쳤던 아암 해장은 이광사가 꽃피운 동국진체의 맥을 계승하였고, 동시대의 명필인 전주의 장암 이삼만(李三晩, 1770~1847)도 흡사한 작품을 남겼다(그림 8). 이삼만 서예의 특징은 이른 바 '유수체流水體' 초서에 있다. 까칠하면서도 물 흐르듯이 쓴 그의 글씨는 자연 스러운 결구에 빈틈이 있지만 허술하지는 않다. 이삼만의 제자로는 호산  서홍순(徐弘淳1798~1976), 대구사람 팔하尋서석지(徐錫止, 1826~1906), 기초 箕樵모수명牟受明등이 알려져 있다.

19세기 전라도의 서예계는 당시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다양한 서풍의 영 향을 받으면서 많은 서예가가 배출되었다. 특히 김제 출신 석정 이정직, 벽하 조주승, 표원 박규환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항일시대에도 많은 서예가가 배 출되었다.

나) 근•현대의 서예 이정직과 조주승이 전북의 김제에서 서예의 바람을 일으킨 이후, 전라 북도에서는 많은 서예가가 배출되었다. 성산 이순재(1869~1943), 벽운 유재 호(1870~1953), 염재 송태회, 심농 조기석, 추당 박호병, 유재 송기면, 효산 이

광열, 오당 강동희(1886~1963), 설송 최규상(崔圭祥,

1891~1956), 유하 유영완(1892~1953), 보정 김정회 7Ⅵ養 (1903~1970), 소정 송수용(1906~1946), 몽련 김진민 心li率6\ (1912~1991) 등이 다 항일시기에 한 시대를 풍미한

서예가들이다. 厹*버이싀에가貳扈

쓁는L』.싀央3#A 弊({쬬쪅즤뇨&,의ib 독립운동가였던 지운 김철수(1893~1986)와 고 이S`에이灯儐서끄屯특 회죠 시트自e'L身魁E 창의 석전 황욱(1898~ 1993)도 연대로는 19세기 초 않게公틔&蠱=鬱\十 수凸lh僉01丘尹K여 기에 활동한 서예가들과 동 시기를 살았지만 광복 으회기되되표爪夐이니 歠호斅•별&稅으장畺(5|7k는) 이후 비교적 늦은 시기에 주로 활동하였다.

남도에서는 노사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4학문을 이은 매천 황현(黃玹1855~1910)과 그 뒤를

1 호 이은 학자 고당 김규태(金奎泰, 1902~1966)와 합천 d 로且다 에드

'`쓔01의 니4시鳳~七 출신으로서 전남 화순에서 학문 활동을 한 효당

그림 9.「충무공 벽파진전첩비」부분, 김문옥(金文鈺, 1901~1960) 등의 서맥書脈을 살펴볼

손재형, 1956년(소전미술관) 수 있다. 이들은 서예가로서도 유명하지만 학자로

서의 명성이 훨씬 높은 인물들이다.

 

고당 김규태의 학문과 서예는 아들 장석 김창동(1947~2019)으로 이어졌 고, 김문옥의 서맥은 아들 벽강 김호(1922~1988)로 이어지고 김호의 문하에 서 목인 전종주, 무산 허회태 등이 배출되었다. 김호의 아들 목원 김구는 경 상도로 거처를 옮겨 문인화가로 활동하고 있다.

근대기 전라도 서예의 큰 맥으로는 소전素荃손재형(孫在馨, 1903~1981)을 들 수 있다. 진도 출신인 손재형은 그만의 독특한 서체인 소전제를 창안하여 당시 한국 서단을 휩쓸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한문 소전제를 한글서 예에 적용하여 한글서예의 새로운 조형을 이루었다(그림 9).

손재형의 서예는 경향 각지의 서예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전라

도 서예가로는 익산의 석당 고재봉(1913~1966), 여산 권갑석(1924~2008), 임 실의 남정 최정균(1924~2001), 진도의 장전 하남호(1926~2007), 금봉 박행보

(19359, 목포의 평보 서희환(1934~1998) 등을 들 수 있다.

1

손재형과 비슷한 시기에 보성의 설주雪舟송운회(宋運會, 1874~1965), 송곡

松谷안규동(安圭東, 1907~1987), 화순의 근원 구철우, 광주의 남룡南龍김용구

(金容九, 1907~1982) 등은 자가 풍격을 세운 서예가들이다. 안규동은 광주에 서예연구원을 설립하여 학정 이돈흥, 백천당 고기임, 장석 김창동, 송파 이규 형, 금초 정광주, 용곡 조기동, 운암 조용민, 녹양 박경래 등 후진을 양성하였 다. 이들 중 학정 이돈흥(李敦興, 1947~2020)은 200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작 가로 성장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날렸다.

광복 후, 전라도 서예의 또 다른 맥은 강암 |菴송성용(宋成鏞1913~1999) 을 들 수 있다. 유재 송기면의 아들인 송성용은 5체를 모두 다 잘 썼고, 격조 높은 문인화도 잘 그렸다(그림 10). 송성용의 서예는 후손들로 이어졌고, 제자 들의 모임인 연묵회를 중심으로 여러 서예가가 배출되었다.

전라북도 서예의 풍부한 흐름에 부합하는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가 전주 에서 개최되고 있다 22년 동안 12회를 개최한 이 행사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권위가 높은 종합적 성격의 국제서예행사로 자리를 잡았다.

다. 전라도의 공예

가) 도자기 선사시대와 삼국시대 우리나라에서는 토기가 제작되었고, 통일신라시대 에는 잿물이 입혀진 고화도 소성의 도기를 구웠다. 이러한 경향에 발맞춰 전 라도에서도 가마를 만들고 번조하는 기술도 충분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전 그림 11. 강진 사당리 청자 요장 출토「청자 양각 모란당초문 기와」, 고러 12세기(국립중양박물관)

4 고려시대에는 중국의 기술과 디자인이 도입되고 새로운 자기에 대한 수 요가 증가하면서 국내에서 직접 자기를 생산하였다. 고려청자와 백자는 10세 기 전반 경 수도 개경 주변인 경기도와 황해도 일원에서 먼저 시작되어 차자 한반도 남서부 지역에 정착되었다. 우리나라 초기청자가 생산되었던 대표적 인 지역들이 전남의 강진, 고흥, 장흥, 해남, 전북의 고창, 진안 등지이다.

고려청자는 가마설비와 제작기술, 생산품 기종과 조형 등은 중국 월주 요계 요업의 영향을 받았지만 차츰 국내 실정에 맞는 소형의 토축요를 선택 하면서 번조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그 과정에서 초벌구이 후 시유하여 다시 굽는 2차 번조를 시작했으며, 환원소성을 통해 비색자기를 제작할 수 있는 단계에 진입하였다. 특히 강진은 자기소磁器所로 지정되어 왕 실과 관청 등에서 소비하는 고급청자의 주 생산지로 자리 잡았다(그림 10. 고 려 중기 대략 12세기 후반~13세기경에는 부안지역이 청자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시기는 고려 500년 역사상 다양한 기종器種과문양, 장식기법, 품 질을 지닌 가장 아름다운 청자가 생산된 시기이다. 독창적인 상감 문양, 대형 매병, 구리銅안료를 사용한 상감청자와 철화청자 등이 생산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 324곳에 도기소와 자기소가 분포하였는데, 전라도 는 자기소 31곳과 도기소 39곳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경국대전經國大典』  의하면 전국에 배지된 사기장 중에서도 100명 중 39명이라는 가장 많은 인

원이 전라도에 배치되어 있어 전라도가 고려시대를 이어 도자 생산에서 중요 한 위치에 있음을 보여 준다.

전국에 도기소와 자기소가 분포하는 만큼 조선시대에는 각 지역마다 특 색 있는 도자기를 생산하였다. 전라도 지역에는 광주 충효동 무등산 요장, 고 창 수동리와 고흥 운대리 분청사기 요지 등이 유명하다. 전라도 지역의 특징 적 분청사기는 덤벙과 귀얄, 조화박지 기법을 이용한 그릇들이다. 특히, 순박  

한 백색의 아름다움이 특징인 덤벙과 귀얄 분청은 단순하면서 깊은 멋을 지 1

니고 있어 이를 생산하였던 전라도 사람들의 미감을 잘 알려준다. 그중에서도

'전라도全道'가 새겨진 모란문호는 전라도 조화박지 분청사기 가운데 가장

유명하다.

백자는 나주 일대를 중심으로 요장이 일부 확인되었다. 순천 후곡리, 곡 성 송강리와 장성 대도리, 장흥 월송리, 진안 황금리 등에서 생산 과정을 알 수 있는 다양한 유구가 발견되었다.

도자기 분 아니라 전라도 곳곳에서는 1980년대까지 지역마다 옹기 요장 이 있어 활발하게 옹기를 제작하였다 기후가 온난하고 일조량이 많은 전라도 의 옹기는 자외선의 영향을 적게 받도록 입과 밑이 좁고 어깨가 넓다. 전라도 곳곳에서 현재까지 전통방식의 옹기를 생산하고 있는 곳은 강진군 칠량면 봉 황리 요장, 무안군몽탄면 몽강리 요장, 보성 미력면 도개리 요장, 김제 부거리 요장, 진안 평장리 요장등으로 입지에 따라 각자 특징을 지니며 운영되고 있다.

나) 죽세공예 담양의 대나무가 유명한 만큼 조선 후기 우리나라 죽세공예는 전라도 지역이 주도하였다. 오랜 죽세공에의 전통에 17세기 초에는 경장인京匠人이 담양에 파견되어 기술이 더해지면서 더욱 발전하였다. 이를 계기로 담양뿐 만 아니라 편죽을 납품했던 주변지역도 세공기술 발전의 전기가 되었을 것으 로 생각된다. 이후 전라도 지역에서는 공납용 부채를 비롯해 재상, 낙죽, 참 빗, 합죽선 등 고급 제품들이 생산되었다.

합죽선은 전주, 채상과 낙죽은 담양에서 발달하였듯이 세 가지 물품 모

두 전라도의 특출난 수공기술이었 으니 전라도의 죽세공은 조선 후기 에 들어 섬세한 예술품으로의 고급 화 현상이 뚜렷해진다. 1920~30년대에는 죽세공품이

 

전국 각지로 유통되는 상품으로 각 그림 12. 담양 죽세공예품 광을 받았고, 해외수출이 시작되었

다. 활발하던 대나무 산업은 1990

년대에는 값싼 중국산 죽세공예품의 수입과 국내 인건비 상승으로 죽세공을 포기하는 농가가 늘어났다. 근래에는 대나무제품, 숯분야, 섬유분야, 식음료 4 분야, 미용분야, 자재분야 등 전통 죽세공이 스러지면서 신산업으로 다시 세

우려는 노력이 한창이다〈그림 12〉.

다) 한지 공예, 기타 전라도는 적어도 조선 전기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종이 의 생산지로서 역할을 담당하였다. 대나무와 한지가 발달한 만큼 전라도에서 는 최상품의 부채가 생산되었다. 부채는 전라도 전주와 남평에서 생산된 것 이 가장 좋다고 알려졌다. 임진왜란 직후에는 첩선貼扇한 자루를 만드는 대 나무 재료의 값이 무려 쌀 24~25두에 달했다고 할 만큼 고급화되었다. 부채 종이는 남원에서 생산된 것을 최상품으로 여겨 모든 부채에 남원의 종이를 사용하였다.

그 외에도 남원의 목기, 나주의 소반 등 목공예분야에서도 지역의 특색 을 살린 뛰어난 작품들이 제작되며 발달하였다.

라. 전라도의 불교미술 전라도의 불교문화는 백제 말기인 가기에 익산, 김제, 정읍을 중심으로 꽃피웠고, 통일신라 초기부터 8세기까지는 수도인 경주와 거리가 있어서인지 이렇다 할 불교문화가 남아 있지 않다. 통일신라시대 후기 즉 9세기부터 선종

구산문의 여러 문파 중 4개의 산문이 전라도 지역에 세워지면서 불상을 비롯 해 석탑과 승탑 등의 뛰어난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2대 45년이라는 짧은 기간 이었지만 후백제 시기에는 실상사 편운화상 승탑을 비롯하여 실상사 수철화 상의 탑과 비, 순천 금둔사 석탑과 불상 등이 조성되었음이 새롭게 밝혀졌다

가) 불상  

불상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시대에 걸쳐 가장 많이 조성되었으며, 고려 1

시대 호남지역 불상은통일신라 조각양식에 백제조각과 지방적인 특색이 더해 지면서 독특한 양식을 이루었다. 통일신라 불상으로는 전 대황사지 출토 증심

사철조여래좌상, 보림사철불, 실상사철불, 약사암석조여래좌상 등이 전한다.

고려시대 전라도 지역의 불상은 전역에 걸쳐 다양한 양식을 보인다. 첫 째, 통일신라불상의 양식을 계승한 불상들이 계속해서 조성되었다. 대흥사 북미록암 마에여래좌상, 도갑사 석조여래좌상, 영은사 석조여래좌상 등이 여

 

그림 13.「영암 월출산 마매여래좌상」, 높이 8m, 전남 영암, 국보 144호

기에 속한다. 둘째, 신라양식을 일부에 남기면서도 고려 특유의 새로운 양식 이 나타나는 불상이 있다. 월출산 마에여래좌상, 광주 운천사 마에여래좌상 을 비롯하여 전남지역 대부분의 불상들이 여기에 속한다(그림 13). 전북지역 에서도 음수리 석조약사여래좌상, 남원 세전리 석불입상 등이 조성되었다. 셋 째, 고려 전기에는 새 왕조의 활력을 반영한 거불巨佛이 조성되는데 전라도 지 역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남원, 영암, 나주 등지에서 많이 조성되었다. 전북 지역의 최대 석불인 용담사지 석불입상(6 0m)과 영암 월출산 마에여래좌상 전 (8.5nå)을 비롯한 여러 불상이 있다. 다섯째, 재료상으로는 특이한 철불이 계 속 만들어졌다. 이 지역의 통일신라시대 철불을 이어 순천 선암사, 해남 은적 사, 남원 선원사와 대복사, 임실 용암리사지(진구사)에서 철불을 조성하였다.

4 여섯째, 고창지역을 중심으로 모자를 쓴 피모지장被帽地藏보살상이 새롭게 등장하였다. 일곱째, 입상에서 상호 위에 원형의 천개天蓋巨교- 상들이 조 성되었다. 논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을 비롯 상당수이다. 여덟째, 퇴화형식 의 불상들이 조성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화순 운주사의 석불군이다. 이 와 유사한 예는 임실 오수리 석불입상, 부안 용화사 석불입상, 장수 원흥사 석불입상, 곡성 죽산리사지 석불입상 등에서 볼 수 있다.

끝으로 고려후기에 유입된 원대의 라마교 불상 형식으로 선암사 천불전 금동관음보살좌상과 담양군 금성면 연동사지의 석조지장보살입상 등이 이 러한 불상계열에 속한 이국풍의 보살상이다.

나) 석탑 전라도에는 백제 무왕 때 조성된 익산 미록사지 석탑과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석탑 20기 정도가 남아있다. 20기 가운데 절반 정도가 구례, 순천, 광 양 등 경남과 가까운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이에 비해 고려시대에는 전라도 전 지역에 고른 분포를 보여 고려 불교의 확산이 뚜렷하며, 불교국가의 면모 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전라도 지역에 남아있는 석탑 중 완형이거나 탑의 형태를 띄고 있는 것 이 현재 약 140여 기에 달한다. 이 중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화엄사 동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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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4.「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높이 5.5m, 통일신라, 전남 구래, 국보 35호

층석탑, 광주 동오층석탑 등이 통일신라시대 석탑이며, 화순 쌍봉사 목조삼 층탑, 함평 용천사 삼층석탑과 같은 조선시대 석탑 등을 제외한 대부분은 고 려시대 석탑이다.

전라도 지역의 고려시대 석탑 가운데 백제석탑인 익산 미록사지 석탑과 부여 정림사지 석탑을 모방하고 계승한 백제계 석탑은 40여 기 정도 파악되 고 있다. 이들은 세부형식은 간략해지고 규모가 축소되는 경향을 보여준다.

신라계 석탑을 근간으로 백제적인 요소가 가미된 신라양식 절충형 석탑 으로는 김제 금산사 오층석탑, 금산사 심원암 북강석탑, 발산리 오층석탑, 남 복리 오층석탑, 부여 무량사 오층석탑 등을 들 수 있다.

전라도의 고려 석탑 가운데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석탑이 둘 있는데 영 암 성풍사지聖鳳寺地오층석탑과 고흥 상림리 삼층석탑이다. 끝으로 운주사의 원형다층석탑(3기)과 원구형석탑(1기), 육각다층석탑인 김제 금산사 청석탑과 같은 이형석탑의 예가 있다.

 

4 그림 15.「쌍봉사철감선사탑」, 국보 57호, 화순 쌍봉사, 통일신라시대

다) 승탑(부도) 우리나라 전 시대를 걸쳐 가장 아름다운 부도로 손꼽히는 것이 화순 쌍 봉사의 철감선사부도이다. 신라하대인 868년(경문왕 8) 쌍봉사에서 입적한 철 감선사의 승탑으로 팔각원당형에 섬세하고 정교한 조각솜씨를 보인다 이와 유사한 구례 연곡사 동부도,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능가보월탑, 보림사 보조 선사창성탑, 대안사 적인선사조륜청정탑 등은 통일신라시대 뛰어난 조각솜 씨를 보이는 승탑들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전라도 지역에서는 통일신라의 영향을 받아 연곡 사 북승탑, 보림사 동•서승탑, 태안사 광자대사승탑, 선암사승탑 3기 등 뛰어 난 승탑이 조성되었고, 후기에는 송광사 국사들의 승탑을 비롯해서 대원사와 불회사에서도 고려 전반기의 승탑들과는 다른 양식의 승탑들이 건립되었다.

라)석비 승탑과 함께 승려의 기록을 담은 석비로는 통일신라시대 영암 도갑사수 미왕사비, 도갑사도선수미비 등이 있다. 귀부의 거북조각은 크고 웅장하며 이수의 용과 구름표현은 섬세하면서도 생동감 있어 이 시기 조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고려시대의 석비는 여전히 통일신라의 영향을 받은 탑비가 주류  이루며, 후기에는 새로운 형식의 매향비가 등장한다.

전라도 지역의 범종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주조된 범종은 8세기에 제 작된 실상사 범종이다. 이는 파종되어 비천상 일부 등만 남아 있으며 현재 동 국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려시대의 범종은 160여 점 정도 알려져 있 으나 14기 정도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 대부분은 고려시대 작품으로 통 일신라에 비해 종의 규모가 작은 소종 ]孼이다. 하지만 부안 내소사 정우 10 년명 범종과 해남 대흥사 소장 탑산사명 범종은 양식적으로 볼 때 고려 후기 261 1

마) 범종

를 대표하는 범종이며 규모도 대형이다.

바)기타 전라도 지역에 있는 기타 불교유물은 석등을 비롯한 석조물, 불구류, 불 서 등이 있다. 통일신라석등으로는 개선사지 석등, 화엄사 사사자석등, 임실 용암리석등 등 크고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조각 형태를 보인다. 고려시대 석 등은 나주 서성문안석등, 군산 발산리석등, 김제 금산사석등, 장흥 천관사석 등, 남원 용담사석등, 순천 장명석등, 나주 동사리석등, 영광 신천리삼층석탑 앞석등 등이 있다.

당간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당간까지 남아 있는 것은 8기 정도이며, 담양 객사리 석당간과 나주 동점문 밖 석당간은 온전히 남아 있는 당간으로 유명 하며, 영광 단주리 석당간과 부안 외서리 석당간은 상부 일부만 유실되었을 분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불구류佛具類로는 향로, 사리합, 직인통, 금강저 등이 전한다.

이선옥

제3장 생활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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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요인은 바로 자연지리적 환경이다. 정치•종교구범•전통등의 사회문화적 환경도 중요하나, 지형토양•기후 조건 등에 따른 지역별 산물産物과 생활양식은 1자적 지배요인으로 특정 지역의 고유한 음식문화를 만들게 된다.

한반도의 남서해南西海는 리아스식 해안으로 조수간만의 자가 크고, 특 히 서해는 개펄이 발달되어 있다. 전 국토의 약 70%가 산지로 백두산에서 지 리산까지 백두대간이 뻗어 있는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이다. 전라도와 경상 도는 소백산맥으로 경계를 두고 있고, 전라도의 정읍과 장성 사이에는 노령 산맥이 있다. 노령산맥을 경계로 서쪽은 만경강과 동진강으로 둘러싸인 호남 평야이며, 동쪽은 진안고원이 있는 산간지역이다. 영산강은 담양에서 발원하 여 목포만으로 흐르는데, 영산강 유역에는 나주평야가 발달해 있다. 호남평 야와 나주평야는 우리나라 제일의 곡창지대이다.

 

한반도는 4계절을 가진 온대지역으로,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농경을 기반으로 한 삶을 살아왔다. 그러므로 세시풍속歲時風f'谷은 연중의 농사 주기 와 관련하여 발달하였다. 세시풍속에는 의례와 함께 음식이 빠질 수 없다. 특 히 전답田畓의 비율이 높았던 전라도 지역에서 농번기와 농한기의 농경의례 와 명절 행사는 고유의 전통 생활양식을 잘 보여준다. 조선시대 전라도의 명 절음식과 시식時食에 대해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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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1월

가)설날 음력 1월 1일[正月]은우리 민족의 가장큰 명절 설날[元日]이다. 설날에는 가묘家廟에 가서 차례茶禮를 지낸다. 새해에 먹는 음식을 세찬歲饌이라 하고, 새해에 마시는 술을 세주歲酒라 한다. 설날에는 멥쌀가루를 푹 쪄서 안반에 놓고 떡메로 매우 쳐서 가늘고 긴 흰떡을 만든 후 살짝 굳으면 엽전처럼 동글 동글하게 썰어 떡국용 떡을 준비했다. 소고기나 꿩고기로 맛을 낸 국물에 썰 어놓은 떡을 넣어 떡국[湯餠]을 끓였다. 설날에는 자례상에 메[飯] 대신에 떡국 을 올렸다. 흰 떡국은 무병장수 기원과 엽전과 비슷하게 생긴 떡국처럼 부자 가 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 떡국을 먹으면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고 하 여 나이를 물을 때 “떡국 몇 그릇 먹었냐?”를 묻기도 한다.

 

나) 대보름 음력 1월 15일을 정월 대보름[上元]이 라 한다. 찹쌀로 밥을 짓고, 여기에 대추  밤, 기름, 꿀, 간장을 섞어 다시 푹 찐 후 잣 을 넣어 고루 섞어 약밥[藥飯]을 만든다. 신 라 소지왕炤智王때 왕의 목숨을 구하게 해 준 까마귀를 기린 날을 기념한 것이다.01) 보름날 새벽에는 생밤, 호두, 은행, 잣, 무 따위를 깨물며 1년 열두 달 무사태평하고

 

 

그림 1. 정월 대보름 절식 (전주대학교 한식조리학과)

부스럼이 나지 않기를 기원하였는데, 이를 부럼깨기[嚼癤]라 한다. 또 청주를 데우지 않고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고 하여 이를 귀밝이술[耳明酒]이라 하였다.

오곡h穀을 섞어 잡곡밥을 지어 이웃과 나누어 먹었다. 찬으로는 박, 오이, 가지, 호박, 버섯, 취나물 등을 말린 것으로 묵은나물[陣菜]을 하고, 채소잎이나 김으로 밥을 싸서 밥을 싸서 먹으면 오래 산다고 하여 복쌈[福裏]이라고 했다.

나. 2월 전 음력 2월 초하루를 중화절中和節이라 하였다. 이날부터 농사를 시작한다 고 하여 '노비엘 또는 '머슴날'이라고도 했다. 이날은 큰 송편을 만드는데, 정 월 보름에 세워놓은 볏가릿대로 하였다. 콩을 삶아 소를 넣고 떡을 반달모양 4 으로 빚은 후 솔잎을 사이사이에 깔고 시루에 넣어 푹 찌고, 다 익으면 꺼내 서 참기름을 발랐다. 이 송편을 노비들에게 나이 숫자대로 나누어 주고 일을 잘하도록 격려하였다.

다. 3월

가) 삼짇날 삼짇날은 음력 3월 3일로, 상사일上巳日또는 답청절踏靑節이라고도 했다. 화창한 봄이 시작되고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는 날이다. 진달래가 만개 한 산과 들로 꽃놀이를 갔다. 이날은 진달래화전을 먹었는데 찹쌀가루를 익 반죽하여 둥글게 빚어 진달래꽃으로 수를 놓아 기름에 지진 떡이다. 또 녹두 가루를 묽게 반죽하여 얇은 그릇에 담고 뜨거운 물로 익혀서 가늘게 썰고, 여 기에 오미자국을 붓고 잣을 띄우면 화면花麵이라고 하였다. 꽃술을 제거한 진 달래꽃을 녹두가루를 입혀 뜨거운 물에 살짝 데쳐두었다가 오미자국에 띄우 기도 했다.02)

나) 한식 한식寒食은 동지에서 105일째 되는 날로, 우리 조상들은 설날, 단오, 추석 과 함께 4대 명절로 여겼다. 한식날에는 술, 과일, 포, 젓갈, 떡, 국수, 구이를 준

비하여 제사를 올렸는데 이를 절사節祀라고 하였다. 집안 형편과 전통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한식과 추석이 가장 성대했다. 이날은 미리 만든 음식을 가지 고 조상의 묘를 찾아가 성묘를 하였다. 중국 춘추 시대에 개자추介子推의 전설 에 따라 이날은 불을 피우지 않고 찬밥을 먹어 냉절冷節이라 하기도 하였다.

다) 봄철의 시식

봄철에는 탕평채蕩平菜, 수란水卵, 조것국, 하돈河豚, 도미찜, 떡 등을 먹었

다. 탕평채는 청포묵에 고기, 미나리, 달걀지단, 김, 실고추 등을 넣고 식초와 간장으로 무친 음식이다. 청포묵의 흰색[白], 고기와 김의 검은색[黑], 미나리 의 푸른색[靑], 달걀의 노란색[黃], 실고추의 붉은 색[赤]이 어우러져 오색을 나 1

타내니 조화로운 음식이라 하여 그 이름이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에서 유래하 였다고 알려져 있다.03) 하돈은 복어인데, 복승아꽃이 떨어지기 전에 미나리 를 넣고 유장으로 국을 끓여 먹었다. 도미찜은 그 맛이 기생과 음악을 이길 만큼 빼어나다고 하여 승기악탕勝妓樂湯이라고도 하였다. 떡은 송기松肌와 쑥 으로 만든 환병環餠, 오색의 등근떡, 대추찰시루떡 등을 많이 만들었다.

봄에는 소국주, 두견주, 도화주, 송순주 등을 빚었다.『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1849)에 의하면 남원지역에서는 봄이면 고을 사람들이 용담龍潭이나 율 림栗林에 모여 술을 마시고, 활을 쏘며 예를 행한다고 하였다. 또 지금의 익산 지역에 해당하는 용안龍安에서는 봄이 되면 향음주례鄕飮i酉禮를 행하였는데, 80~90세, 60~70세, 50세 이하의 사람들이 나이별로 각각 모여 앉아 효성 과 우에, 충성과 신의를 다지는 글을 읽고 술을 즐겼다고 하였다.

라. 4월

가) 초파일 초파일은 석가모니의 탄생일로, 등불을 켜는 풍속이 있어 등석燈夕이라 고도 한다. 또 향수를 끼얹어 불상을 씻는 날이라는 뜻으로 욕불일浴佛日이라 고도 한다. 초파일 시식으로는 삶은 콩, 미나리강회, 느티잎시루떡 등 고기를 넣지 않은 음식으로 소식素食을 준비하여 손님을 사하였다.

 

나) 초여름 시식 초여름[初夏]에는 증편[蒸團, 화전花煎, 어채魚菜, 어만두, 미나리강회 등 을 먹었다. 증편은 기주떡이라고도 하는데, 쌀가루에 술을 넣어 발효시킨 후 콩으로 만든 소를 넣어 방울 모양으로 쪄낸 떡이다. 발효를 시켰기 때문에 시

266 큼한 맛이 있지만, 더위에 잘 상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여름철의 화전은 잡 쌀 반죽에 노란 장미꽃잎을 붙여서 만든다. 어채는 흰살생선의 살을 포를 떠 서 녹말을 입힌 후 끓는 물에 살짝 데쳐 낸 숙회이다. 숙전복, 오이, 감국잎, 석 전 이, 달걀지단 등과 함께 색스럽게 담아 꽃처럼 아름답다고 하여 화채 2菜라고 도 한다. 어만두는 승어나 민어 같은 흰살생선을 넓게 포를 떠서 고기소를 넣 어 만두 모양으로 빚은 후 쪄내어 초장을 찍어 먹었다. 미나리강회는 연한 미

4 나리나 실파를 끓는 물에 살짝 데친 후 말아서 만든 강회로, 겨자장이나 초 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술안주로도 이용하였다.

마. 5월

가) 단오 단오端午 음력 5월5일이다. 단오에는 쑥으로 호랑이모양을 만든 애호 艾虎를 문에 걸어 액운을 쫓았다. 단오는 더위가 시작되는 날이라 하여 부채 를 선물하였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관찰사 및 통제사는 절선節扇을 진상하고 조정관원과 친지들에게도 보냈다. 특히 전주와 남평에서 만든 부채가 유명하 여 고을의 수령도 진상하고 증여도 하였다") 단오는 수릿날[戌衣日], 천중절天中節, 단양端陽등으로도 불렀다. 수리는 수레를 뜻하는 우리말로, 쑥이나 취를 넣어 만든 떡에 수레바귀 모양의 떡살 을 찍어 차륜병車輪餠을 만들었다. 그 밖의 단오 절식에는 증편, 어알탕, 준치 만두, 앵두화채, 제호탕, 생실과 등이 있었다. 제호탕은 더위를 이기기 위한 보 양 음료이다. 꿀[白淸], 오매말弓梅末, 백단향白檀香, 축사縮砂, 초과草果를 모두 곱게 가루 내어 되직하게 달여 백자항아리에 담아두고 여름 내내 냉수에 타 서 마시면 더위를 이길 수 있었다.

1

전 그림 2. 5월 단오 절식(전주대학교 한식조리학과)

나)기타 초복에는 보리, 밀, 오이를 사당에 올리는데, 5월 종묘에 천신하는 물품 은 보리, 밀, 오이, 살구, 앵두였다. 겨울철에 만들어 둔 메주로 장醬을 담갔다. 장은 길일吉日을 택일하여 담았는데, 특히 장이 쉬는 것을 우려하여 신일辛日 에는 장을 담지 않았다.

바. 6월

가) 유두 음력 6월 보름을 유두流頭라고 한다. 동쪽으로 흐르는 냇물에 머리를 감 고, 산골짜기나 경치 좋은 물가에 가서 유두연流頭宴을 벌이며 액막이를 하였

다. 유두날 아침에는 벼, 조, 기장, 피를 조상께 천신하였는데, 곡식을 가묘에 바치는 것을 천곡薦穀이라 하였다.

유두 절식으로 떡수단, 보리수단, 건단, 유두면 등과 수박이나 참외 등의 햇과일을 먹었다. 또 편수, 화전, 밀쌈, 깻국탕, 어채, 복분자화채, 참외, 상화병 霜花餠도 먹었다. 유두에는 덥고 비가 많이 내려 고온다습한 날이 연속되므로 누룩을 디디기 좋았다. 이날 만드는 누룩을 유두국流頭麴이라 하는데, 밀가 루를 이용하여 둥글게 만들었다. 유두국은 주로 술을 빚는데 쓰였지만, 구슬 모양으로 만들어 오색으로 물들여서 세 개를 이어 색실로 꿰어 문에 달면 액 운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나) 삼복 시식 복날에는 더위를 피하여 산과 물이 좋은 곳으로 가서 찬물에 발을 담그 268 며 시를 짓고 술을 마셨다. 복날에는 붉은팥과 쌀로 죽을 쑤어 더위를 물리 지고자 하였다. 삼복三伏시식으로 수단, 연병, 편수, 찰떡, 꿀설기, 주악, 규아 상, 편수, 육개장, 계삼탕, 깻국탕, 영계찜, 어채, 떡수단, 복분자화채, 열무김치 전 을 먹었다. 연병은 밀전병을 얇게 부쳐서 애호박, 팥, 깨 등으로 소로 넣어 돌돌 만 음식이다. 편수는 밀가루 반죽을 얇게 밀어서 애호박 소를 넣고 빚 어서 익힌 만두로, 초장을 찍어 먹었다. 계삼탕은 삼계탕의 다른 이름이다. 닭 4 뱃속에 찹쌀과 인삼, 대추, 마늘 등을 넣어 푹 곤 것으로, 여름철 더위를 이길 수 있는 보양식이다.

사. 7월

가) 칠석 음력 7월 7일은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에서 1년에 한 번 만난다는 날이

다. 직녀는 직물의 신으로, 부녀자들은 이날 길쌈과 바느질을 잘하게 해 달라 고 빌었다. 또 비가 많이 오는 계절이므로 맑은 날이면 방안의 옷가지와 책들 을 꺼내서 거풍擧風을 시키는 풍습이 있었다. 칠석七夕의 절식에는 밀전병, 증 편, 육개장, 게전, 잉어구이, 잉어회, 복승아화채, 오이소박이 등이 있었다.

나) 백중 음력 7월 보름은 중원中元이라 하고, 백종일百種日또는 망혼일亡魂日이라 고도 한다. 백종일은 백가지 과실을 가리기는 것으로, 시중에 과일과 채소가 많다는 뜻이다. 망혼일은 백성들이 술, 과실, 채소, 밥을 자려 먼저 세상을 떠 난 망혼을 천도하는 우란불공盂蘭佛供을 드린다는 의미이다.『동국세시기』에 는『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기록을 빌어 전라도 여산군礪山郡조에 7월 15일에는 여산군과 충청도 은진현의 경계에 있는 직지直旨에 양도의 백성이

모여 씨름을 한다고 하였다.

아. 8월

가) 추석 추석秋夕은 가배嘉俳또는 한가웨漢嘉會]라고도 한다. 신라 때부터 시작된 풍속으로, 설과 가장 큰 명절이었다. 오곡이 무르익고, 모든 과일과 채소를 풍  

성하게 수확하는 계절이므로, 햇곡식으로 신곡주新穀酒와 오려송편을 빚어 1

조상님께 추석 차례를 지냈다. 한가위 절식에는 토란탕, 가리찜, 닭찜, 밤단자, 갖은 나물, 배화채와 밤, 대추, 사과, 배, 감 등의 햇과일이 있다.

나)기타

8월에는 오곡백과가 풍성한 계절이므로 이것을 활용한 떡을 많이 하였 는데, 잘 익은 호박을 썰어 고지를 만들어 호박떡을 만들었다. 송편은 쌀가루 를 익반죽하여 콩이나 깨로 소를 넣어 작게 조개 모양으로 빚어 솔잎을 깔고 진다. 솔잎 향이 은은하고 잘 상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밤단자는 찹쌀가루 를 쪄서 둥글게 빚어 삶은 박을 고물로 묻힌 떡으로 가을철 별식이었다

자. 9월

가) 중양절

중양절重陽節은 가장 큰 양 수陽數인 구九가 겹친 날로, 중구 절重九節이라고도 한다. 삼짇날 에 돌아온 제비가 다시 따뜻한 강남으로 떠나고, 기러기가 온다 는 날이다. 중양절에는 산과 들 로 나가서 울긋불긋한 단풍을 감상하며, 향기로운 국화꽃과

잎으로 화전을 지져 먹고, 국화 그림 3. 중양절 절식(전주대학교 한식조리학과)

주를 마시면서 시를 읊었다. 중양절의 절식에는 감국전甘菊煎, 밤단자, 유자화 채, 생실과 등이 있다. 감국전은 황국의 꽃받침과 꽃술을 제거한 꽃잎을 찹쌀 반죽에 동그랗게 붙여서 지져낸 화전으로, 가묘에도 올렸다.05) 유자화채는 유 자와 배를 가늘게 채 썰어 꿀물에 넣고 석류와 잣을 띄운 화채로, 제철을 맞 270 은 유자의 향기가 좋고, 석류의 붉은 빛깔이 아름다운 음료이다.

나) 가을철 시식 전 새로 추수한 햇곡식이 풍성한 계절로, 물호박떡, 무시루떡, 대추인절미, 밤단자, 토란단자, 토란탕 등을 만들고, 살찐 닭으로 백숙을 하여 이웃에게 후하게 베풀었다.

4

차. 10월

가) 무오일 오일午日은 말날[馬日]이다. 붉은팥을 고물로 하여 햇곡식으로 시루떡을 쪄서 마구간에 갖다 놓고 무병하기를 비는 날이다. 오일 중에는 무오일戊午日 을 가장 좋은 날로 치고, 병오일丙午日에는 병丙과 병病이 발음이 비슷하여 꺼 렸다.

나) 초겨울 시식

10월을 상월上月이라 하여 무당을 불러 성주굿을 하고, 햇곡식으로 술 을 빚고 붉은팥 시루떡을 바치며 집안의 평안을 빌었다. 햇무를 썰어 쌀가루 와 함께 섞어 무시루떡을 하였다. 시식으로는 변씨만두卞氏饅頭, 쑥국[艾湯], 연 포탕軟泡湯, 강정[乾酊] 등이 있다. 변씨만두는 메밀가루 반죽으로 빚은 세모꼴 의 만두로, 변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잘 만든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쑥 국은 에탕이라고도 하는데, 겨울의 연한 쑥을 개서 소고기와 함께 끓인 국이 다. 연포탕은 두부[泡]를 가늘게 잘라 꼬치에 꿰어 기름에 지져서 닭고기를 넣 어 끓인 국이다. 강정은 삭힌 찹쌀가루를 쪄서 여러 번 친 후 얇게 밀어 반대 기를 만들어 두었다가 기름에 튀겨서 고물을 묻힌 과자이다. 특히 쌀 생산이

많은 전라도에서 잘 만들었는데, 고물로 세반細飯, 흰깨, 검정깨 등을 붙여 다 양하였다.『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10월령에서처럼 무, 배추, 파, 마늘, 생강, 고 춧가루 등을 준비하여 겨우내 먹을 양식으로 김장을 하였다.

무우 배추 캐어 들여 김장을 하오리라 앞냇물에 정히 씻어 염담을 맞게 하소

고추 마늘 생강 파에 젓국지 장아찌라 1

독 곁에 중두리요 바탕이 항아리라

양지에 가가 짓고 짚에 까 깊이 묻고 박이무우 알암말도 일잖게 간수하소.

「농가월령가(農象月令歌)』.

조선 후기 김치는 고추의 유입과 함께 절임형태에서 오늘날과 같은 절여 서 양념을 하는 형태로 바뀌었다.『지봉유설』(1614)에 남만초南蠻椒로 처음 소 개되고,06) 약 100여 년이 지나『산림경제』(1715)에 고추의 재배 방법이 기록 되었다.07) 이후『소문사설』(1720)에는 무에 고춧가루를 넣어 버무린 '청해  醢'가 등장하였고,『증보산림경제』(1766)에는 오이김치에 고춧가루를 사용하 였다.08)『규합총서』(1809)에는 섞박지를 만드는 법에 조기젓과 고춧가루를 사용하여 오늘날과 같은 김치의 형태가 완성되었다.

카. 11월

가)동지 동지冬至는 밤이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동지를 지나면서 해가 조 금씩 길어져 동지를 다음 해가 되는 날이라는 뜻으로, '아세亞歲또는 '작은 셀이라고도 하였다.

동짓날에는 팥죽을 쑨다. 팥의 붉은 색이 잡귀를 쫓는다는 벽사辟邪의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팥죽은 먼저 사당에 올려 차례를 지낸다. 그리고 방, 마루, 헛간 등에 한 그릇씩 떠 놓고, 대문이나 벽, 마을 어귀나 고목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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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림 4. 동지 절식(전주대학교 한식조리학과)

팥죽을 부리고 나서야 먹는다. 동지 팥죽을 먹어야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고 생각하여 '팥죽 몇 그릇 먹었냐?'는 물음은 '나이 몇 살이냐?'를 뜻한다. 또 동 지 팥죽에는 찹쌀로 새알심을 만들어 넣는데 먹는 사람의 나이 수만큼씩 먹 었다. 팥죽은 귀신을 물리치는 음식이므로, 붉은 팥으로 만든 음식은 제사에 는 금기시하였다. 그 밖의 동지 절식에는 전약煎藥, 식혜, 수정과, 동치미 등이 있다.『동의보감東醫寶鑑』에 전약은 백강白薑, 계심桂心, 정향丁香, 후추[胡椒] 등 을 곱게 가루 내고, 아교阿膠를 녹인 후 대추고와 꿀을 넣어 달인 후 네 가지 가루를 넣어 오랫동안 달여서 만드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나) 겨울철 시식 냉면은 대표적인 겨울의 시식이다. 메밀국수를 김치와 고것국물에 말아 먹었다. 김장을 할 때 작은 무를 이용하여 동치미를 담는다. 동치미가 잘 익으 면 새콤하고 시원한 동치밋국에 국수를 말아 먹기도 했다. 채소나 고기를 볶 아 국수와 버무리는 비빔국수는 골동면骨董麵이라 했다.

 

타. 12월

가) 납일 납일臘日은 동짓날에서 세 번째 미일米日로, 종묘사직에 제사를 지냈다.

한 해 동안 일어난 여러 가지 일에 대하여 신에게 고하는 제사로 납향蠟享이

라고 한다. 사냥으로 잡은 노루, 산돼지, 메추리, 꿩 등으로는 전골을 만들었 는데, 이를 납평전골이라 불렀다. 또 밤에는 그물을 가지고 참새잡이를 하였 다. 참새 등지에 그물을 대고 막대기로 추녀를 쳐서 놀라 날아오르는 참새들 을 잡았다. 참새구이를 만들어 아이에게 먹이면 천연두에 효험이 있다고 믿 었다. 납설수臘雪水는 납일에 내린 눈을 받은 물이다. 납설수는 약효가 있어 눈에 바르면 눈병이 없어지고, 옷이나 책에 바르면 좀이 슬지 않고, 장이나 273 1

술, 김치를 담글 때 쓰면 음식에 벌레가슬지 않는다고 하여 귀하게 여겼다.

나) 대회일 대회일大晦日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섣달 그믐날로, 모든 것을 마무리하 고 고요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한다 하여 제야除夜라고 한다. 섣달그믐에 잠을 자면 두 눈썹이 하얗게 된다고 하여 잠을 자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그 믐날에는 묵은 음식을 섞어 비빔밥을 해서 먹고, 새해에는 새로 음식을 장만 하였다.

차경희

2. 민속

 

가. 전라도 민속의 문화권적 분포와 특징

274 민속문화는 준거에 따라 여러 유형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존재양상에 따라 물질민속과 비물질민속 또는 유형민속과 무형민속으로 나눌 수도 있고, 삶의 양식에 따라서 생활민속, 생업민속, 생생민속 등으로 분류도 가능하다. 전 또한 문화가 시간, 공간, 인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안출되고, 전승되고, 변화된 다는 점에 착안하고 보면 시간에 따른 문화사, 공간에 따른 문화권, 인간에 따른 문화층이 대별되며, 이러한 문화현상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민속문화 4 는 문화사에 기준을 둔 역사민속, 문화권에 기준을 둔 지역민속, 그리고 문화 층에 기준을 둔 사회민속으로 나뉘게 된다. 한편 전라도의 민속이란 당연히 전라도의 역사, 전라도의 지리, 전라도의 사회와 관련된다는 점에서 전라도의 민속은 전라도의 민속문화사, 전라도의 민속문화권, 전라도의 민속문화층을 구성하면서 전승되어 왔다.

이들 중에서 전라도로 구획되는 지리적 경역을 기준으로 하여 하나의 민속문화권을 구성하고 있는 전라도 민속은 등가적인 권역, 예를 들면 충청 도의 민속이나 경상도의 민속에 비해서 뚜렷한 특징을 내재한 채로 전승되어 오고 있다. 그 특징의 가장 일반적 사실은 전라도 민속이 다시 두 가지 하위 민속권으로 양분되는 현상이다.

일반인들에게도 익숙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판소리의 동편제와 서편제를 들 수 있다. 섬진강을 기준으로 하여 동서로 분할된다는 설도 있지 만, 칼로 재단하듯 그렇게 명확하지는 않다. 삶의 터전이 확대되고 문화교류 가 활발해지기 이전의 전근대적 상황에서는 문화가 자연지리적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어 문화권적 특성이 비교적 확고하지만, 소통과 교류가 활발 해지면서부터는 사회문화적 영향을 더 크게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민속 현상 역시 서로 혼효되는 양상을 피할 수 없다. 판소리의 동편제와 서편제만 큼 잘 알려진 것으로서 농악의 좌도굿과 우도굿을 들 수 있다. 대개 우리나라

농악을 5대 유형으로 구분하는데, 이들 중 무려 2개 유형이 전라도 농악으로 서 좌도굿과 우도굿이다. 민속음악의 측면에서 판소리의 발상지로서 명성을 떨친 곳이 바로 전라도지만, 오히려 농악의 경우는 한국 어디에나 있는 민속 음악의 대표격이라는 측면에서 두 가지 유형으로 분할되는 전라도 농악의 이

러한 개성적 발전은 그 수월성을 증명해주는 실례라 할 것이다.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로 양분되는 행정구획과는 다른 전라도의 민속문 275

화권은 거칠게 잡아 비교적 산악지대인 동부와 해안선평야가 발달한 서남부 1

지역으로 대별된다는 점에서 행정권과 문화권은 다르다. 동서 또는 좌우로 구분되는 전라도 민속은 판소리와 농악에만 한한 것은 아니다. 주거 민속의

예일 수 있지만, 동부지역에 비해서 서부지역의 민가는 상대적으로 더 크고

넓다. 음식민속 역시 차이를 보이는데, 동부는 장류가 발달한 것에 반해서 서 부는 젓갈류가 더 발달해 있다. 또 서부를 홍어문화권으로 분류하자면 상대 적으로 동부는 잰피문화권으로 대별된다.

들노래의 경우에 북동부는 산아지권, 서부는 긴소리권으로 구획되고, 마을 앞에 수호신격으로 세우는 입석의 경우는 서부는 큰 돌 하나를 세로로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데 반해서, 동부의 경우는 작은 돌들을 쌓아올린 적석 형 돌탑의 모습이 많다. 또한 동서가 명확히 구분되는 것으로서 대보름 세시 풍속 중에서 서부는 줄다리기가 놀아지는데 반해서 동부는 달집태우기가 보 다 일반적이다. 그러나 현행되는 민속현상으로 보면 이러한 구획이 크게 흔들 리고 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의 달집태우기와 줄다리기만 하더라도 이농 과 고령화현상이 뚜렷한 까닭이겠지만, 만드는 것도 과정이 복잡하고 또 많 은 사람이 참여해야 하는 줄다리기는 현격이 줄어드는 것에 반해서, 예전에 달집태우기를 하지 않던 서남부지역들에서도 줄다리기 대신에 달집태우기를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마치 세습무권이 해체되는 사이 강신무권이 확산되 는 현상과 같이 민속의 현장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한편 전라도의 서남부는 다시 농촌지역과 어촌지역 또는 평야지대와 도 서지역으로 더 세분되는 현상을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민간신앙 중 동제 를 예로 들면 전라도 지역에서는 대개 당산제라는 명칭이 통칭이지만, 해안

도서지역의 경우는 당산제라는 명칭보다는 당제라고 부르는 마을이 더 많고, 또 동제도 농촌지역의 경우 대보름에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도서해안지 역은 정초에 모시는 곳이 많다. 또 해풍이 심한 때문인지 해안도서지역은 마 을 소유의 당집을 따로 짓거나 임시로 움막을 지어 사용하는 예가 많다. 또 276 전라도 해안도서지역의 한 특징으로서 말신앙이 발달해 있는데 철마를 만들 어 마을의 수호신격인 당신堂神으로 모시는 사례도 드물지 않다.

나. 구비문학 구비문학의 종류는 다종다양하다. 설화(신화, 전설, 민담), 민요(유희요, 노동 요, 의식요), 판소리(동편제, 서편제, 중고제), 무가(서사무가, 서정무가), 가면극, 속담,

4 수수께끼 등이다. 이들 중 전라도에서 가면극은 전승되지 않은 대신에 판소 리가 발달한 것을 특징으로 한다.

설화 중에서는 지역적으로 전승되면서 지역적 특징을 잘 반영해주는 것 은 전설이다. 전라도 지역의 전설은 지명전설, 인물전설, 불교전설 등으로 분 류할 수 있겠다. 먼저 지명전설 중 첫째 지역수호신의 역할을 하는 전설 내용 들로서 지리산 성모천왕전설, 전북 부안의 수성당여신전설, 전남 완도의 호국 신사에서 모셔지던 송징전설, 그리고 나주의 금성산신 등을 들 수 있다. 둘째 산악전설로서 전라도를 대표하는 산신전설이 전한다.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허락지 않아서 경상도에 있던 지리산을 전라도로 귀양을 보냈다고 하는 지리 산전설, 역시 이성계의 건국을 허락지 않았던 무등산신이 건국 후 벼슬을 받 지 못했다는 무등산전설이 있다. 지리산전설과 유사한 내용으로 장흥의 천관 산전설도 전한다. 셋째 강호와 제언에 관련된 전설도 다수 전하고 있다. 전라 도의 대표적인 섬진강과 영산강에 관련되는 것으로서 섬진강전설은 홍수에 떠내려가는 두꺼비를 구해주자 보은을 했다는 내용으로서 이러한 전설에 의 거해서 두꺼비 섬蟾자를 쓴 강이름이 쓰이고 있다. 영산강은 흑산도 앞 영산 도 사람들이 옮겨오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로 알려진 김제 벽골제에는 아름다우면서도 처연한 단야 관련 전설이 전하고 있 으며, 영산강의 지류인 드들강이나 황룡강 등에 새겨진 전설이 많다. 드들강

 

전설은 드들이라는 처녀를 수장하였다는 인신공희전설에 속한다. 황룡강전 설은 견훤의 탄생지와 관련되며, 영산강 하류의 몽탄이라는 지명은 후삼국 시대 견훤과 왕건이 패권을 다툴 때, 꿈에 현몽하여 왕건의 목숨을 살렸다는 내용의 전설에서 나온 지명이다. 넷째 도서와 해양전설을 들 수 있는데 전북 군산의 선유도에는 황금의 돼지굴에서 최치원 선생이 탄생했다는 전설이 전 하며, 여수 백도는 예전에 옥황상제 아들 하나가 아버지의 노여움을 받아 귀

양을 왔다가 바다의 용왕 딸과 사랑에 빠졌다는 낭만적인 전설을 가졌다. 또 1

신안 압해도의 비비각씨섬에 얽힌 전설은 슬픔과 아쉬움을 가진 까닭인지 대중가요로도 만들어져 불리면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전라도의 인물전설은 매우 다양하다. 전설은 기억된 역사라고도 하는

데, 특정 인물에 대한 서사를 통해서 역사에 기반하면서도 역사와는 다른 지 역민의 지향을 투사하는 것이 인물전설의 창작동기에서 읽힌다. 전라도 지역 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전설은 김덕령전설이다. 충과 효를 다했지만, 역 적으로 몰려 죽은 그의 억울한 삶을 민중들은 영웅전설로 되돌려 놓았다. 실 제 김덕령전설은 전라도에 한하지 않고 전국적으로 전승되는 대표적인 현상 을 보인다. 그 만큼 그의 죽음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던 때문일 것이다. 완도 의 송징전설, 장성의 홍길동전설, 그리고 담양과 광양에 전해오는 전우치전 설도 유명하다. 또한 광주에서 태어나 전주에서 왕국을 건설했던 견훤은『삼 국유사』에 보면 호랑이 젖을 먹고 컸다고 한다. 그의 주무대였던 전북의 여러 지역에서 견훤 관련 전설이 전하고 있다. 고려조와 조선조 양대를 통해서 추 양을 받았던 장군은 바로 곡성 출신 신승겸이다. 곡성에는 그와 관련된 여러 지명전설이 함께 하고 있다. 또한 전라도에 널리 전해지는 전설로서 그 유명 한 이순신 장군에 대한 전설이 있다. 강강술래, 거북선, 노적봉 등 여러 전설 증거물이나 전설유적과 함께 그의 위대성을 민중들은 전설을 통해서 마음속 에 새겨왔던 것이다. 전북 장수군 천반산에 있는 성터를 비롯해서 마당바위, 장군바위, 뜀바위, 깃대봉, 시험바위 등으로 불리는 정여립 관련 전설들이 전 해온다. 한편 의녀, 효녀, 열녀 등 여성전설도 많다. 논개의 이야기가 대표적이 며, 판소리와 소설의 배경이 된 심청과 춘향 관련 근원전설도 있다. 실제 곡성

에는 관음사라는 절이 있다. 관음사연기설화가 바로 심청전의 근원설화이며, 이를 기려서 매년 곡성군에서는 심청축제를 열고 있다. 한편『고려사에 실린 지리산가, 선운산가, 방장산가, 정읍사 등의 배경설화도 여성전설로서 그들의 기구하고 가련한 삶을 기억하는 기제로 전해오고 있다.

우리 문화에 크게 영향을 미쳐왔던 불교 관련 전설도 많다. 가장 대표적 인 불교관련 전설은 익산에 있는 미록사창사전설이다. 백제의 무왕과 신라 왕녀 선화공주의 애틋한 결연을 말하고 있는 서동요 배경설화에서는 선화공 전 주의 서원에 따라 미록사를 창건했다고 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닌 것 으로 밝혀졌다. 민중불교의 산 증거로서 화순 운주사의 천불천탑과 와불전 설이 유명하며, 선운사의 마에불전설은 비결과 관련되고 있다. 선운사를 창 4 건한 검단선사가 마애불의 배꼽에 비결록을 감추어두었는데 이 책이 세상에 나오면 한양이 망하지만, 책을 꺼내려하면 벼락살을 맞는다는 금기도 함께 전했다. 전라감사 이서구가 열려했다고도 하고, 동학군인 손화중이 배꼽을 열고 비결록을 얻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실제 손화중이 비결록을 얻었다는 말을 듣고 전국에서 수많은 동학도가 손화중의 아래로 모여들었다 고 하는 것으로 보면 당시 이인, 진인, 비결록 등에 대한 믿음이 민간에 두터 웠던 것으로 보인다.

전라도는 농도로서 특히 농업과 관련된 민요가 많고, 또한 여기에 그치 지 않고 어업요도 활발히 전승되어 왔다. 민요는 노동요, 유희요, 의식요 등으 로 분류하는데, 특히 전라도에는 논농사와 관련된 모뜨는소리, 모내기소리, 김매기소리 등이 많이 불리었으며, 또 뱃노래로서는 줄꼬는소리, 노젓는소리, 배치는소리, 후리는소리 등도 어업요로 전한다. 이들이 남성민요의 대표적인 것이라면 여성민요는 훨씬 다양하게 전해온다. 시집살이노래, 밭매기소리, 목 화따는소리, 물레소리, 베틀가, 자장가, 흥글소리 등 아주 종류가 많다. 유희 요로 불리는 노래들은 대개 노동요에서 기인한 것이 많은데 대표적인 소리는 등당이타령과 진도아리랑이다. 등당이타령은 길쌈작업에서 기인하고, 진도 아리랑은 전라도 동부지역의 김매기소리인 산아지타령에서 기인했다. 의식요 또한 많은데 가장 일반적인 것이 상여소리다. 또 혼례 때 가마를 메고 부르는

권마성, 주술성이 강한 주당맥이소리 등도 전승되었다. 역사적으로는 백제의 부전가요로 전해지는 지리산가, 무등산가, 선운산가, 방장산가, 정읍사 등도 민요에 속하며, 역사적인 지역색이 뚜렷한 민요로서는 “새야새야 파랑새야” 가 동학농민혁명의 전봉준 장군과 관련되는 민요로 알려져 있다.

다. 민간신양

민간신앙은 주체별로 나누면 가정신앙, 마을신앙, 무속신앙 등으로 구분 1

할 수 있다. 그러나 의례적 성격이 강한 세시의례, 통과의례, 주술요법, 농경의 례, 수산의례 등 기능적 갈래도 있을 수 있다.

가정신앙은 가택신앙이라고도 부르는데 전라도 지역 역시 주부가 사제

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남성 중심의 유교식 제례와 구별되며, 또 유교식 제 례가 직접적인 조상신을 대상으로 한 조상승배에 한정되는 것에 반해서 가 정신앙에서 모서지는 신격은 집안 곳곳에 위치하여 기능적 신직을 가진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대청마루의 성조, 안방의 조상, 부엌의 좌, 장독대의 칠성 이나 천륭, 뒷곁의 터주, 우물의 용왕, 대문간의 문신, 화장실의 측신, 지붕에 업 등이 모셔진다.

마을신앙은 마을의 보호와 마을민의 안녕은 물론, 오곡백과의 풍작과 육축의 번성 등을 소망하는 신심에 기초하여 마을민 전체가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여 제사를 모시고, 집단적인 소망을 빈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일반적 으로 마을신앙을 당산제 또는 당제라고 부르는 곳이 많다. 마을신앙의 신격 은 당산할아버지와 당산할머니가 일반적이며, 당산나무를 신체로 하는 경우 가 많다. 그러나 마을에 따라서는 매우 다양한 당산신이 모셔지고 있으며, 역 사적인 인물이 신격으로 좌정하고 있는 예도 많고, 해안도서지역에서는 바다 를 대상으로 하는 갯제 또는 용왕제가 부대적으로 모셔지거나 오히려 확대 된 곳이 적지 않다. 대개 당산제는 정월에 모시는 곳이 다수이며, 특히 대보름 에 모시는 지역이 대부분이지만, 특별히 날받이를 하여 모시는 마을도 있다. 제사 비용은 마을민을 대상으로 호구전이나 인구전을 그때마다 걷기도 하고, 또 제답이나 제전 등 재산을 마련해둔 마을도 있다. 당산제를 모실 때는 마을 민 전체가 조심을 하지만, 특히 제사에 직접 참여하는 제관을 매년 따로 뽑으 며, 그들에게는 마을민을 대표하여 심한 재계가 요구된다. 제사에 참례하는 사람은 현관, 축관, 유사 등이 있고, 특히 제물을 장만하는 화주를 가장 엄중 하게 고른다. 당산굿을 치는 사람들도 집안에 유고가 있을 경우 참여할 수 없 다. 당산제를 모시고 나면 충분히 음식을 장만했다가 마을민들이 모여 음복 을 하기도 하고, 또 음복을 하면서 마을총회를 열기도 한다. 또 줄다리기나 달집태우기 등 점복기능을 가진 집단놀이도 하고, 풍물을 즐기기도 하며, 당 전 산제를 위해 마巨0 入%` 고고O1며, 당산, 우물 등을 깨끗이 청소를 하는 위생적 활 동도 이 기간에 이루어진다.

무속신앙은 무당들에 의해 주도되는데, 본래 전라도 지역은 세습무권에

4 속하였지만 오늘날 세습무보다는 강신무 계통의 무속인이 훨씬 많다. 과거 조선시대에 무속인은 8천의 하나로 규정되었지만 합리적 사고가 일반화되고 과학적이며, 의학적 지식이 보편화되었으며, 또한 직업선택이 자유롭고 또 주 거이전이 활발해진 시대에 이르자 많은 세습무계 집안의 사람들이 무업을 그 만두고 직업도 바꾸고, 지역을 벗어나 이주한 때문에 급속히 세습무가 줄어 들었다. 호남지역의 무속현상 중에서 다른 지역과 비교해서 오래도록 전승되 었던 현상의 하나는 당골판이었다. 당골판이란 특정 무속인이 사제권을 행 사할 수 있는 일정 지역을 가리기는 것으로서 당골판을 가진 무속인은 춘추 로 각 가정에서 춘곡(주로 보리)과 추곡(주로 나락)을 걷는다. 이는 일종의 종교 세와 같은 것으로서 무속인들 사이에서 사고 팔 수도 있는 상권의 일종이었 다. 나라굿, 고을굿, 마을굿, 가정굿 등 다양한 굿이 있었지만, 전라도 지역에 서 현재 거의 가정 단위의 가정굿만 전승되고 있는 실정이며,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부안 위도의 띠뱃놀이와 영광 법성포의 단오제 등에 겨우 마 을굿이 잔형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라. 세시풍속 동양에서는 태양력과 태음력을 함께 사용해왔다. 태양력에 따른 24절기 와 태음력에 따른 월별 명절이 배치되어 있으며, 각 명절 때 마다 일정한 의례 와 주술, 음식, 놀이, 복식, 행사 등이 함께 하는데 이들을 일러 세시풍속이라 고 한다. 전라도에서는 24절기는 대개 농사력에 적용하는 예가 많은 반면, 음 력에 따라 거의 매달 배치되어 있는 명절은 일명 속절이라 하여 그때그때 해 당되는 풍속이 전해져 왔다.

음력으로 1월 1일은 설, 1월 15일은 대보름, 2월 1일은 초하루, 3월 3일 은 삼질, 4월 8일은 초파일, 5월 5일은 단오, 6월 15일은 유두, 7월 7일은 칠

석, 7월 15일은 백중, 8월 15일은 추석, 9월 9일은 중구, 10월은 상달, 그리고 12월 말일은 섣달그믐이라 하여 명절로 쇤다. 또 양력에 따라 입춘, 한식, 청 명, 동지 등도 속절로 쇠지기도 한다.

명절은 몇 가지 규칙이 있다. 먼저 처음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1월 1일과 1

2월 1일은 명절이 속하며, 보름달과 농사의 풍요다산이 직결되는 것으로 믿 어져온 때문에 1월 15일, 6월 15일, 7월 15일, 그리고 8월 15일을 각각 명절로 삼는다. 또 홀수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어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 9월 9일 역시 명절로 쇤다.

설날을 제외하고 연중 가장 큰 명절은 추석이다. 추석은 전형적으로 전 라도에서 크게 쇠오던 명절로서 특히 추수와 관련성이 깊다 보리농사를 많이 짓는 곳에서는 단오를 가장 크게 쇠고, 벼농사를 많이 짓는 곳은 추석이 가장 크다. 따라서 논농사가 많은 전라도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추석이 크게 쇠 어졌다. 추석의 가장 대표적인 놀이인 강강술래만 하더라도 전라도 전역에서 놀아졌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과 관련짓기도 하고, 또 현재는 국가무형문 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까닭에 해남, 진도지역에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지만, 전 라도 전역에 걸쳐 전승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라도에 인접한 경상도나 충청도 일부 지역에서도 놀아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편이 전형적인 추석의 절식 이라 한다면, 강강술래는 전형적인 추석의 대표적인 놀이로서 특히 전라도 지 역에서 많이 놀아졌던 까닭은 모두 농업, 특히 벼농사와 관련이 짙다. 송편은 나락의 형상을 닮았다. 전라도의 송편은 다른 지역의 그것에 비해 크다. 실한 나락이 결실을 맺어 풍년이 이루어지길 소망하는 주술적 의미를 담았다. 강 강술래 역시 가임 가능한 젊은 여성들의 둥그런 형상의 춤을 닮아 추수를 앞

둔 오곡백과가 속이 가득자 풍작을 소망하는 주술적 의미를 가졌다.

마. 민속놀이 민속놀이는 유희, 연희, 경희 등으로 나뉜다. 유희는 자급자족적인 놀이 로서 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즐기는 것이다. 연희는 노는 사람들 자신 을 위해서가 아니라 관중 또는 관객을 대상으로 하여 연행되는 놀이를 뜻하 고, 경호는 개인적이든 또는 집단적이든 편을 나누어 양쪽의 승부를 가리는 전 놀이를 지칭한다 전통적인 놀이는 아동놀이, 성년놀이, 또는 남성놀이, 여성 놀이로 구분되기도 하지만, 독자적인 놀이로 존재하기보다는 세시풍속이나 통과의례 등과 같은 특정한 민속적 의미를 가진 특정한 날에 행해지는 것도 4 많다. 또 계절이나 월별, 일별로 놀아지는 예들도 많다 유희는 주로 아동놀이에 많다. 연날리기, 팽이치기, 공기놀이, 도롱태굴 리기, 썰매타기, 눈사람만들기 등이 유희에 속한다. 이들 중에서는 경희로 놀 아지는 예들도 있는데 예를 들면 연싸움, 팽이싸움, 또는 공기놀이도 개인이 나 집단적인 승부를 내는 놀이로 놀아지기도 한다.

연희는 대표적으로 풍물을 들 수 있다. 과거 공연형태의 놀이가 발달할 수 있는 사회적 상황이 아니었던 관계로 민속놀이 중에서 연희는 매우 한정 된다. 특히 한국의 대표적인 연희종목이라 할 수 있는 탈춤의 경우, 전라도 지 역에는 놀아지지 않았다. 대신 판소리가 전라도 지역에서는 발달했으며, 또한 조선조 후기부터는 사당패와 남사당패 등 공연을 목적으로 하는 유랑연예집 단이 형성되는데 이들의 주무대가 경제적 여유가 있던 전라도 지역이었던 것 으로 알려져 있다.

경호는 집단적 놀이로서 놀아지는 줄다리기, 고싸움놀이, 달집태우기, 횃불싸움놀이, 석전놀이 등이 있으며, 윷놀이, 딱지치기, 화투치기, 자치기 등 그 종류가 많다. 특히 민속놀이 중에는 치기라는 이름을 가진 놀이가 유독 많은 편인데, 짱치기, 자치기, 돈치기, 못치기, 낫치기, 갈퀴지기, 화투치기, 비 석치기, 엿치기, 딱지치기, 구슬치기, 팽이치기, 사방치기, 손치기발치기, 샅치 기, 핀치기, 물방구치기 등이 있으며, 노동에서 기인한 떡메치기, 파대치기 등

 

도 치기놀이로서 전라도 지역에서 놀아지던 민속놀이들이다.

바. 생업민속 전통사회에서 농업은 산업의 근간이었다. 세종대왕이 처음 사용했던 '농

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말이 지금은 농악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 지만, 이순신 장군의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는 더더욱 조선조까지 도 전라도 지역의 산업적 근간을 직설해주는 역사적 증좌라 하겠다. 농업기 반사회였던 조선조의 세곡 현황을 보면 전국 8도의 50%에 가까운 부담을 전 라도가 안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전라도 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긴 해안선을 물론 80%에 이르는 개펄이 발달해있는 지역이며, 따라서 283 1

해조류는 물론 근해어업이 발달해 있었다. 또한 전라도의 가장 특징적인 생 업민속으로 들 수 있는 것은 바로 청자, 백자, 분청사기, 옹기 등의 제작과 남 원을 중심으로 한 목제기의 발달이었다. 분만 아니라 전라도 지역은 특히 닥 나무가 잘 자라고 물이 좋아 한지산업이 가장 성업을 했던 곳이며, 담양을 중 심으로 발달한 죽공예품은 전국적으로 가장 유명했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호남은 전통사회에서 생업민속이 발달해 있었을 분만 아니라 물적 토대가 튼 실했던 만큼 의향義鄕, 예향藝鄕, 미향味鄕이라는 3향문화권을 형성하면서 나 름의 독특하면서도 비교우위를 점하는 문화권적 특징과 크게 생업민속이 발 달해 있었다.

나경수

3. 섬과바다

 

전라도의 섬과 바다 이야기는 기록과 구술로 확인된다. 먼저 기록을 통 해 본 섬 이야기는『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진다 조선정부가 섬을 어떤 시선 으로 바라보았는지, 역대 국왕들이 섬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 그로 인해 섬 정책이 어떻게 변화되어왔는지, 시기별 추이를 읽어낼 수 있다. 전 그런가하면 대代를 이어 그 섬에서 누대로 살고 있는 주민들은 누가, 언제, 어 디에 정착하여 경제생활을 영위해왔는지, 구술이 촘촘하다. 어떤 이는 그 섬 에 가장 먼저 정착한 입도조入島祖의 무덤자리를 이야기하고, 또 어떤 사람 4 은 집안에 누대로 전해오는 고문서를 보여주면서 구체적인 사례를 전달해주 고, 또 어떤 이는 설화와 전설을 통해 그 섬 사람 이야기를 실감나게 전해준

다. 또 어떤 이는 섬에서 생산되는 산물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를 설명해 주고, 또 어떤 사람은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석장승에 얽힌 이야기를 실감나게 전해준다. 이러한 섬과 바다이야기를 퍼즐 맞추듯 모아 놓고 보면 해당 섬의 역사와 문화가 채워진다. 그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어보자.

가. 다도해사람들의 이주와 정착 조선시대 전라도 섬에 관한 정보는 고문헌과 고문서에서 검출된다. 예컨 대 조선 세종이 전라도 관찰사 이맹진李孟畛에게 교유하기를, “제주도 인근에 백도와 흑산도 등 섬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런 섬이 제주 근처에 몇 개나 있는 가? 만약 있다면, 그 섬사람들은 서로 왕래가 가능한가? 섬과 섬의 거리는 얼 마나 떨어져있는가? 섬에서 생산되는 산물은 무엇이 있는가? 또 전라도 연해 지역 주민 가운데 물에 익숙한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이렇듯 구중궁궐에서 통치하고 있던 조선의 국왕은 신하에게 전라도의 섬에 대해 질문했다. 이렇듯 조선시대의 섬에 관한 정보는 일반 현황조차 파악할 수 없는 변방이었다.

이러한 전라도의 섬에 관한 기록이 고문헌에서 검출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중엽이다. 조선 세종 때 전국을 대상으로 간행된『세종실록지리지』

에서 나주목의 부속도서로 '압해도•암태도•자은도•혹산도' 등이 확인된다. 이들 섬은 오늘날 '1004의 상이라 부르는 신안군의 부속도서로, 소위 다도 해多島海라 칭하는 해역에 입지하고 있는 섬인데, 겨우 4개 섬이 지리지에 등 재되어 있다.

조선전기 전라도의 섬은 사람들의 거주를 금하였다. 대신 국용조달을 위 한 목장과 송전을 설치하였다. 그러다가 조선 성종 때 노사신(1427~1498) 등 이 만든『동국여지승람』에 나주목의 부속도서 등이 등재되어 있음이 확인된

다. 즉 오늘날 신안군의 부속도서인 팔이도(현 팔금도), 안창도(현 안좌도), 하의 도, 태이도, 도초도, 반월도, 박지도, 장산도, 자은도, 암타도(현 암태도) 등 섬

30개소가 확인된다. 비록 섬의 지명만 확인되고 있는 수준이지만, 중앙정부 285 1

의 전라도 섬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라도의 섬으로 사람들이 모여든 것은 조선후기다. 임진왜란 이후 내륙 지역 사람들이 새로운 공간을 찾아 섬으로 이주하였다. 그들은 폐목장을 개 간하여 농경지를 만들고, 갯벌에 제방을 쌓아 간척지를 만들었다. 또 바다에 서 고기잡이와 각종 해산물을 채취하고, 산에서 땔감을 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정황이 전라도 섬에서 누대로 세거해 오고 있는 주민들의 구전 을 통해 확인된다. 오늘날 섬에서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에게 직계 선조들의 입도유래에 대해 질문하면 그가 누구인지, 언제 어디에서 출생하였는지, 그 가 왜 섬으로 이주하였는지, 섬의 어디에 처음 정주공간을 마련하였는지, 심 지어 그의 이력을『족보』에서 찾아준다. 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호구단자 나 매매문서 등 고문서를 보여준다. 그 내용을 종합해보면, 전라도의 섬으로 사람들이 이주하여 정착한 것은 17~18세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확인된다. 이 는 도서별•성씨별 입도조의 생존 시기를 기준으로 산출한 것인데, 실제 입도 조의 무덤이 해당 섬에 봉안되어 있었다. 이런 까닭에 오늘날 섬 주민들의 입 도조가 대체로 10~15대조로 전해오고 있는데, 폐를 30년으로 환산할 경우 지금으로부터 약 300~450년 전에 전라도 섬마을이 형성되어 오늘날까지 장 기 지속되고 있었다.

나. 표류와 기록 전라도의 섬은 한주일 3국을 이어주는 바닷길에 입지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바다에서 해난사고를 당한 표류민이 발생했다. 동아시아 사람들은 이 들 표류민들에 대해 경계하기보다는 해난사고를 당했다가 살아서 돌아온 뱃 사람으로 인식했다 표류이야기도 기록과 구술로 전해온다. 즉 표류를 경험한 사람이 직접 그 체험담을 기록으로 남기거나, 혹은 표류 경험담을 타인에게 전해주고 그 전 로 하여금 대신 글로 작성하도록 하였다. 이것을 모두『표해록』이라 칭한다. 그런가하면 중앙정부의 관원이 표류민을 대상으로 표류과정을 심문하고, 그 내용을 정리한 것을「문정별단」이라 한다.

4 조선후기 전라도의 섬에 표착한 표류민의 국적은 어디일까? 현전하는『비 변사등록』「문정별단」을 토대로 표류민들의 국적을 분류한 결과 중국인이 710%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에 일본인이 11%, 오키나와 5% 순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동아시아 사람들 가운데 유독 중국인이 우리나라 해역에 가장 많이 표 착한 이유는 해로海路때문이었다. 즉 중국 절강성 주산군도, 한반도 서남해안, 그리고 대한해협으로 흐르는 바닷길에서 동아시아 사람들의 해난사고가 빈번 하게 발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물길은 중국인들을 조선의 서해해역으로 인도 하였고, 조선인은 일본의 오도열도와 큐슈의 중서부, 혼슈 남부로 이끌었다.

이제 전라도의 섬과 바다에 표착한 중국인들의 표류이야기를 들어보자. 『조선왕조실록』과『비변사등록』에서 '황당선荒唐曇당선唐船•이국선異國船  청인淸人한인漢人화인華人대국인大國人중국인中國人' 등을 검색해보면, 비변 사 관원이 정리한「문정별단」이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표류민의 성명, 거주 지, 신분, 출항지, 목적지, 선적물품, 농사, 토산, 전답, 세금, 지방관, 표류 선박 의 규모, 어로기술, 항해술, 해적 등 상세정보가 확인된다. 일례로 1756년(영조 32) 전라도 영광촴평에 표착한 중국인 24명을 역관 이정희李廷禧가 문정하였 는데, 이들은 모두 복건성 천주부 동안현 출신으로 확인된다. 이들은 선박을 이용하여 복건성과 산동성을 왕래하면서 지역의 특산물을 교역하는 장사꾼 들이었다. 표류사고가 일어난 당일 아침에도 산동성에서 생산한 황두黃荳•두

 

병荳餠분건粉乾식미食米•땔감 등을 싣고 복건성을 향하여 출항하였다가 서 풍을 만나 우리나라 전라도 함평현 임병도 인근 해상에 표착하였다. 그런가 하면 1813년(순조 13) 전라도 영광에 표착한 중국인들은 모두 산동성山東省 등주부登州府문등현文登縣사람들로, 청어잡이 어부들이었다. 이들은 거듭된 흉년으로 생계가 어렵게 되자,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 해역까지 월경하여 그 물을 설치하다가 표류된 사건이었다.

실록에서 검출된 서해해역에 표착한 중국인들은 17세기 10건(358명), 1

18세기 10건(681명),19세기 9건(286명) 등으로 나타났다. 이들이 전라도 해역 에 표착한 지점은 혹산도(26건), 나주(22건), 제주도(22건), 영광(14건), 진도(6

건), 영암(4건), 순천(1건), 고흥(1건) 순이었다. 표류 중국인들이 승선한 선박의

규모는 소형과 중선배였고, 승선인원은 5~10명 정도였으며, 승선자는 뱃사람 을 비롯하여 공객空客이라 칭하는 일반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선주는 공객에 게 '셋돈', 일명 '뱃삯을 받았다. 셋돈은 승객의 화물 소지 여부에 따라 금액에 차이가 있었다. 표류는 물길을 따라 인간과 문화를 이동시기는 요인이었다.

다. 포구와 바닷길 포구는 바다로 통하는 출구다. 포구는 사람들의 생활방식에 따라 그 역 사와 문화가 다양하다. 어떤 포구는 고기잡이 어선들의 정박처였고, 어떤 포 구는 해산물과 농산물이 교환되는 장소였다. 이렇듯 포구는 입지환경에 따 라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하였다. 또 명칭도 나루, 개[浦], 진7聿, 도渡, 량梁등 다양하게 불렸다.

조선시대 포구에 대한 정보는 역대 지리지에서 찾아진다. 전라도의 포 구는『세종실록지리지』에서 그 흔적이 확인된다. 이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된 것은 1481년(성종 12)에 편찬된『동국여지승람』과 1530년에 간행된『신증동 국여지승람』에 수정 보완되었고, 한말에 편찬된『호남읍지』에서 그 변화상 이 검출된다. 이에 따르면, 전라도 56개 군현에 219개 포구가 확인된다. 전라 도 군현 가운데 포구가 없는 곳은 고창•남평능주괌양•옥과•동복•창평•장 성• 진산• 정읍•태인•고산•임실• 진안•장수•함열 • 운봉• 무주 등 18개 군현으로

32.14%로 확인된다. 반면 나루가 있는 군현은 광주(5)•곡성(3) •남원(3)•구례(2) •전주(2)•금산(2)•순창(1) 등 7군현 18개소로, 강이 흐르는 지역에 입지하고 있었다. 또 포구가 분포한 군현은 제주(45 : 제주목 24, 정의현 8, 대정현 13 포함)• 순천(22)•해남(15)•나주(12)•부안(9)•광양(9)•무안(8)흥양(6)•만경(6)•김제(5)• 무장(5)•장흥(4)•함평(4)•낙안(4)•보성(3)•임피(3)•옥구(3)•용안(3)•함열(3)•진도 (3)• 강진(2)•흥덕(2)•익산(1)•영광(1)•영암(1)•고부(1)•여산(1)•금구(1)•용담(1) 등 31군현 183개소가 확인된다. 이로써 보건대 전라도 56개 군현 가운데 38개 전 군현에 나루와 포구가 입지하고 있었다.

한편 전라도의 해로海路는 1723년(경종 3) 7월 18일 기사에서 확인된다. 『경종실록』에 “호남의 해로는 우수영右水營이 가장 큰 요해처가 되고, 이곳 4 을 지나 시하柴河의 큰 바다를 건너면 임자도가 또 하나의 요해처이다. 임자도 를 건너 칠산七山의 큰 바다를 건너면 고군산古群山이 또 하나의 큰 요해처이

다.”라고 밝히고 있다. 즉 우수영은 내륙지역 해남의 끝자락에 입지하며, 바다 를 사이에 두고 진도와마주한다. 이 길목을 소위 '명량 |3 ' 혹은 '울돌목'이라 부른다. 이 을 들 목을 건너면 곧장 목포 앞바다인 시하바다로 연결된다. 시하 바다는 영산강 하류에 입지하여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지점이다. 시하바다 다음 험로는 임자도 이혹암리로 연결된다 이 해로에서 고대이래로 중국에서 일본으로 항해하던 선박들이 침몰하였다. 임자도에서 질산바다로 나아가면 영광의 법성포에 당도한다. 법성포를 지나면 곧장 고군산열도로 연결되고 연 이어 군산 앞바다에 이른다 이 바닷길은 고려시대 이래로 매년 2월에 전세  稅를 수합하여 3월에 한양의 마포 광흥창으로 납부하였다 이 해로를 소위 '조 운로漕運路'라 칭한다. 전라도 각 군현에서 출발한 조운선이 서울 경장에 이르 는 뱃길 여정은 광양 30일, 순천 24일, 무안 25일, 낙안 20일, 홍양 20일, 강진 20일, 보성 17일, 해남 17일, 진도 15일, 장흥 15일, 함평과 영광 10일, 무장 25 일, 흥덕 20일, 부안 10일, 옥구 15일, 용안 7일 정도 소요된 것으로 확인된다. 이 가운데 강진과 무안은 해장이 내륙에 입지하여 인접 지역보다 5일 정도 더 소요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 조운선이 통과하는 조운로는 섬과 바다에 설치되 어 있던 수군만호의 엄호를 받으며 안전 항해를 도모하였다.

라. 신앙과 의례 섬 지역의 신앙과 의례는 기록과 구술, 문화유산 등으로 전승되고 있다. 그 흔적이 고인돌, 설화, 초분草墳, 우실, 노두露頭, 도깨비굿, 당제 등에서 찾 아진다. 섬 지역의 신앙의례 가운데 묘제인 고인돌이 곳곳에 분포한다. 전라 남도 신안군 혹산도•안좌도 사람들은 섬에 분포하고 있는 고인돌을 '칠성암' 이라 부른다. 즉 일곱 개의 별을 상징하는 칠성신앙과 관련이 깊다. 또 신안

군 신의도 상태서리에도 고인돌 기기가 집중 분포하고 있고, 신안군 안좌도 방월리 사람들도 고인돌을 '칠성암' 혹은 '당산(상당•중당•하당)'이라 칭한다. 이 외에 진도군 의신면 옥대리 기기,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3기, 완도군 고금도

101기, 완도군 청산도 23기 등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1

섬 지역에 전해오는 설화는 섬사람들의 신앙과 연동된다. 일례로 진도 의신면 회동마을과 모도마을의 봉할머니 설화, 신안군 안좌도 중노두 설화, 신안군 수도 사도세자당 설화, 완도군 송정 설화, 영광군 안마도 당할머니 설 화 등이 대표적이다. 또 섬에 전승되고 있는 설화는 관음신앙과 관련되어 있 었다. 주된 내용은 진귀한 보물을 실은 배가 표류하여 전라도 해안에 당도한 다는 이야기이다. 배에 실린 보물은 불상•불경•보살상 등 대체로 불교 전래와 관련이 깊다. 이렇듯 섬마을의 설화는 해당 섬의 환경과 관련된 설화이고, 신 양의 대상물이자 의례의 형식으로 전승되고 있다.

또 서해 섬과 바다가 고대 국제항로로서의 위상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 온다. 대표적인 사례가 수성당水聖堂과 임수도의 해로이다. 수성당은 변산 격 포 죽막동 개양할미에 관한 설화이다. 개양할미는 '바다를 연다.'라는 뜻을 담아 '개양開洋'이라 부른다. 개양할미는 변산 여울골에서 딸 여덟을 낳았는 데, 이 중 7명의 딸을 칠산바다로 보내 섬을 다스리도록 하였고, 개양할미는 막내딸을 데리고 죽막동에 머물렀다. 즉 개양할미와 여덟 딸은 변산 앞바다 를 항해하는 선박의 안전과 어부들의 풍어를 관장하였다.

한편 전북 부안 사람들은 죽막동과 위도 사이에 있는 임수도 앞바다를 '인당수라 부른다. 바로 인당수는『심청전』에 얽힌 지명이다. 다만 심청전과 모티브 차이가 있다. 즉『심청전』은 '딸의 희생으로 부친의 눈을 뜨게 한다는

이야기인데 반하여〈수성당 설화〉는 철마를 타고 서해를 날아다니며 왜구를 무찌르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전라도 서남해 도서지역에는 이중 장제인 초분草墳이 전해온다. 초분이 란 일명 '최빈•외빈•초구•출분이•초상이•초우•초빈•고름장츨변•초장•이중 장례•복장례' 등으로 칭한다. 명칭에서 보듯이 초분이란 사람이 죽었을 때 곧장 매장하지 않고 일정 기간 동안 볏짚이나 가옥, 나무 위, 성벽, 돌무더기 등에 안치하였다가 육탈 후 매장하는 의례다. 장지를 옮긴다는 뜻에서 이장 전 移葬과 유사하다.

섬마을에는 마을을 보호하는 울타리가 있는데, 이것을 우실이라 한다. 우실은 일명 우술•우슬•돌담•돌담장•당산거리•방풍림•방조림•방피림•사정 4 나무거리 • 정자나무거리 •노거수림' 등으로 부른다. 대체로 마을신을 승배하거 나 반대로 기피하는 형태로 보존되어왔다. 즉 살아있는 사람들의 정주공간 을 비보裨補하기도 하고, 혹은 죽은 자의 공간을 보호해주기도 한다. 우실은 나무숲으로 조성되는데, 대체로 '대나무•팽나무•느티나무•동백나무' 등으로 만든다. 이외에 흙을 쌓아서 만든 '토담 우실'도 있다.

섬마을 갯벌 위에 놓인 노두露頭의 경우도 약식 의례를 행해왔다. 노두 란 조수간만의 차에 따라 그 외형이 드러난다. 신안군 안좌도 부속도서인 박 지도와 반월도에 '중노두에 얽힌 전설이 전해온다. 박지도 암자에 비구比丘한 사람이 살았고, 반월도에는 비구니比丘尼한 분이 살았다고 한다. 이들은 일 굴을 본 적도 없고, 만난 적도 없지만 서로 연모하게 되었다. 그들은 들물에 바다를 가로 막고, 썰물에 갯벌에 돌을 놓아 섬과 섬을 건너는 노둣길을 만 들었다고 전해온다.

섬마을 역병을 방지하기 위한 의례로 도깨비굿이 전해온다. 대표적인 사 례로 전라남도 진도군 가사도의 도깨비굿이 있다. 이 굿은 여성들만의 제의라 는 점에서 주목된다. 가사도 도깨비굿은 마을제사와 관련이 있다. 정월 그믐 날 자정을 넘어서면 동구 앞에 젯상이 차려진다. 다음 날인 2월 초하루에 가 사도 여성들이 모두 도깨비굿을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메구굿을 인도하는 장대에 '월경한 속곳을 꽂고 메구굿을 친다. 마지막 날에 나무로 만든 배에 허

수아비(액)를 실어 바다로 띄워보낸다. 도깨비굿은 액귀를 몰아내는 의례였다.

마. 소금과 염장 소금은 바닷물을 토분(강원도는 쇠솥)에 담아 불을 지펴 끓여서 만들거나 혹은 바닷물을 햇볕과 바람으로 건조시켜 만들었다. 전자를 자염煮鹽이라 하 고, 후자를 천일염天日鹽이 부른다. 자염은 '화염火鹽•전오염煎熬鹽•육염陸鹽 

으로 칭한다. 모두 바닷물의 염도를 높인 후 그 물을 삶아서 만든 소금이다. 따라서 자염 생산을 위해서는 반드시 연료가 풍부한 곳이 최우선 요건이었

다. 이렇게 생산된 소금은 다양한 방법으로 판매되었다. 보통은 소금을 사기 위해 섬마을을 찾아온 상인에게 판매하지만, 염막 주인이 소금을 전부 구매 1

하여 생산자가 직접 소금을 판매하기도 했다. 이때 염막 주인은 배에 소금을 싣고 육지로 나가서 농산물과 물물교환하기도 하였다.

염전에는 명절과 처음 소금을 내릴 때 제의祭儀를 행하였다. 명절의 경우 방안 제사보다 먼저 염전에 가서 제를 모셨다 염전 제사는 남보다 먼저 지내야 수확량이 많다고 믿어 새벽에 올렸다. 제수는 돼지머리와 술로, 염막 앞에 차 려놓는다. 염막 주인이 먼저 절을 올린 다음 인부들과 함께 음복했다. 또 매년 첫 수확한 소금을 내릴 때도 돼지머리와 과일, 술을 장만하여 제사를 올렸다.

천일염은 바닷물을 바람과 햇볕으로 수분을 증발시켜서 만든 소금이 다. 천일염 생산은 일제강점기에 시작되었다. 일본은 천일염 생산 방식을 새 로 도입하여 소금을 독점하고 세입을 확보하기 위해 정책을 수립하였다. 해방 후 남한에서는 소금 공급이 부족하여 가격이 폭등했다. 왜냐하면 대형염전 이 대부분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에 밀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46년에 남 한은 염전개발을 민간인에게 개방하여 소금 생산을 독려했다. 이때 신안 비 금도 주민들이 민간 자원의 천일염전을 개발하는데 성공하였다. 비금도 사람  은 처음 조성된 염전을 '1호염전' 혹은 지조염전'이라 칭하였고, 인접 섬마 을 주민들에게 천일염 생산방법을 강연하여 점자 천일염전이 증가하였다.

소금은 젓갈문화를 만들었다. 젓갈이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삼국사기』에 의하면, “683년(신문왕 8) 2월에 일길찬 김흠운金

欽運의 어린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기 위해 대아찬 지상智常에게 납채納采하도 록 하였다. 폐백이 열다섯 짐, 쌀•술•기름•꿀•간장•된장•말린고기•젓갈 등이 135짐이었으며, 벼가 150수레였다.”라는 기록이 확인된다. 또 경주 안압지에 서 발굴된 목간木簡에 “자鮮는 절이는 것이다. 소금과 곡물로써 담가 김제께 와 같이 숙성시켜 먹는다.'라는 내용이 확인된다. 이런 까닭에 젓갈은 어장魚醬, 어해魚醢, 어자魚鮮등이라 칭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인류는 어류를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해 염장鹽藏, 건조乾燥, 훈제燻 전 製발효醱酵등의 저장방식을 활용하였다. 이 가운데 건조는 변질되기 쉬운 어류를 염장하여 장기 보존하고, 동시에 살아있는 어류에서는 맛볼 수 없는 새로운 맛을 가공하는 방식이다. 전라도에서는 물고기를 장기간 보관하기 위 4 해 소금에 절인 후 건조하는 방법을 '건장이라 한다. 신안군 혹산도에서는 '건장이라 부르고, 목포에서는 깐짱'이라 칭한다. 충남 당진에서는 '건선이라 부른다. 명칭은 다르지만, 모두 말린 생선을 의미한다.

바. 놀이와민요 놀이란 인간이 재미를 얻기 위해 하는 활동을 말한다. 또 민요는 민중 사이에 불러 오던 전통적인 노래를 통칭하는 말이다. 전라도의 섬과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놀이와 민요에는 바닷가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회로에락이 담겨있다. 흔히 섬사람들의 삶이 힘겹고 고달프다고 하지만 그들의 생활방식 은 탄식이 아니라 오히려 활기가 넘친다. 그들의 놀이판에는 힘든 일상을 녹 여내는 신명이 담겨있다. 전라도 서남해 도서지역 놀이와 민요의 특성은 다 음과 같다.

첫째, 어로요漱撈謠이다. 어로활동 전반에 대한 전통지식과 섬사람들의 대응방식이 담겨있다. 대표적으로 멸치잡이 민요, 조기잡이 민요, 전어잡이 민요 등이 있다. 주된 내용은 노를 젓고, 그물을 내리고, 물고기를 몰고, 그물 을 당기고, 물고기를 퍼 올리고, 도부꾼들에게 물고기를 퍼주는 전 과정이 민 요로 구현된다.

둘째, 절로소리이다. 전라도 서남해안 간척지에서 여성들이 모심기와 김

매기를 할 때 선소리를 한다. 이것이 절로소리다. 여성이 선소리를 한다는 점 이 내륙과 다르다.

셋째, 갯것 부르는 소리다. 전라도 사람들은 바다에서 생산되는 해산물 을 깻것'이라 부른다. 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는 어로활동은 남성들의 영역이 지만, 갯벌에서 바지락과 굴[석화], 꼬막과 낙지 등을 채취하는 활동은 여성 들의 몫이다. 이런 까닭에 강진군 대구면 하저마을 아낙네들은 갯벌의 풍요

를 기원하기 위해 '갯것 부르는 소라를 한다. 정월 대보름날 밤에 갯제를 지낼 1

때 깻것 부르기를 행한다. 갯벌에 둥그렇게 둘러앉아 빗자루와 갈퀴를 긁으 면서 노래로   

넷째, 도둑잽이굿이다. 전라도 서남해안 사람들은 강강술래, 우수영용

잽이, 북평용줄다리기 등의 놀이를 한다. 모두 왜적으로부터 나라와 마을  지키려는 민중의 염원이 담겨있다.

다섯째, 축제식 상장례喪葬禮이다. 밤달에•다시래기 •만가 등 풍물과 노래, 춤이 어우러져 죽음의 부재를 생명 탄생의 환희로 바꾸려는 의지를 노래한다.

여섯째, 섬마을 민속과 유랑연희의 교류다. 남사당패의 연극적 요소를 다시래기와 만가 등에 접목시켜 민속전승의 복합성을 담았다.

일곱째, 전라도 도서지역의 놀이와 민요는 뱃길을 따라 섬과 연안, 내륙 지역에 습합되어 전승되었다.

사. 성과 바다 이야기는 '개미가 있다 전라도의 섬과 바다이야기는 도서민의 이주와 정착, 이국에 표착한 표류 민, 포구와 바닷길, 신앙과 의례, 소금과 염장, 놀이와 민요 등을 통해 재구성 하였다.

전라도는 곡창지대로, 일찍이 들노래가 발달하였다. 섬마을도 예외는 아 니었다. 배를 타고 선상에서 바라본 섬은 바다에 떠 있는 육지다. 그 섬이 그 렇게 넓은 간척지와 염전, 임야와 어장을 품고 있으리라곤 상상이 되지 않는 다. 그런데 선창에 당도하여 바라본 섬은 육지의 농촌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하다. 어떤 섬은 드넓은 농경지로 채워져 있고, 어떤 섬은 고운 자갈과 모래를

 

품어 해수욕장을 담아내고, 또 어떤 섬은 갯벌로 둘러싸여 각종 해산물을 내어준다.

그래서일까? 조선전기 전라도 섬에서 상납하였던 특산물은 “꿀, 밀, 범 가죽[호피], 상어, 말린 승어, 전복, 생복生鰒, 말린 홍합, 낙지, 굴, 감합甘蛤, 대 294 합조개, 은어, 붉은 큰새우, 인포引鮑(절인 전복), 해모海毛, 우무, 오징어, 옥등어 [玉頭魚], 다시마, 부레, 분곽枌藿, 상곽常藿, 울멱[早藿], 해각海角, 황각黃角, 매산 이苺山伊, 김[海衣], 감태甘苔” 등 무려 110종이었다. 또 조선후기에 간행된 이중 전 환의『택리지』에 의하면, “전라도의 땅이 기름지고, 서남쪽은 바다에 임하여 생선, 소금, 메벼, 실, 솜, 모시, 닥, 대나무, 귤, 유자가 생산된다.”라고 하였다. 전라도의 풍부한 물산이 주목되는 대목이다.

4 흔히 전라도 음식을 말할 때 “개미가 있다(혹은 없다)”라고 표현한다. 여기 서 말하는 “개미”란 음식 맛을 언급하는 최상의 표현으로, 음식 맛의 깊이를 극찬할 때 사용한다. 즉 “개미 있는”이란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동시에 이를 대체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드세고 투박하지만, 정凊많고, 흥이 많은 전라도 섬사람들의 정서가 묻어난다. 그들의 소리는 바람과 파도를 달래고, 물고기 와 해산물을 부르고, 농사와 어로의 풍년을 기원하고, 인간의 회로에락을 풀 어냈다.

김경옥

 

특산물持産物은 어떤 지역의 특별한 산물을 말한다. 지역마다 기후나 지 형 등 자연 환경에 따라 다를 것이고 그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의 역사나 인 식, 풍습 등 인문환경 속에서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특산물은 곡물류, 과일  

류, 채소류, 화초류, 조수류弓獸類, 어패류魚員類, 약재류, 광물류, 공예품류 따 위 다양하다. 특산물을 가공한 경우나 생산 시설 등도 중요한 자원이다. 선 사시대나 고대 사회 특산물을 살펴 볼 자료가 많지 않다. 유적을 통해서 출 토된 자연 유물 가운데 패류나 어류 등의 점유 빈도를 통해서 유추해 보고자 1

한다. 고려시대는『고려사』나『세종실록지리지』등의 기록을 살펴 가면서 전 라도의 사례를 정리해 보기로 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신증동국여지승 람』등 지리지와읍지 등의 기록을 통해서 현황을 정리하면서 지역별로 드러 나는 특산물을 훑어보겠다. 현재의 특산물은 무형문화재, 지리적 표시제, 중 요농뻐업유산 등 제도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몇 사례를 정리할 것이다. 특산 물의 개별특징이나 가치 등에 대한 서술 보다는 전라도라는 거시적인 틀에서 시기와 지역에 따라 현황을 살피면서 연계성을 찾아보고자 한다.

가. 유적을 통해서 본 선사~고대의 특산물 선사시대의 특산물은 생산 지역이나 종별을 한정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 다. 다만 발굴조사된 유적에서 출토된 자료를 통하여 일부는 짐작해 볼 수 있 다. 신석기시대의 패총 가운데 신안 가거도와 완도 여서도, 여수 안도패총에 서는 외양암초성 패류인 두드럭고등, 소라, 삿갓조개, 홍합류 등이 주를 이루 고 있다. 군산 가도와 광양 돈탁, 광양 의암패총에서는 내만성 패류인 참굴이 주를 이루고 있다. 특히『광양 오사리 돈탁패총』문화유적 발굴보고서에 따 르면, 돈탁패총에서는 섬진강 기수역의 특성인 갓굴(벚굴)을 채취하여 식용 으로 이용하였음을 보여준다.

신석기시대 패총유적에서 출토된 패류는 52종에 이르는데 앞에서 본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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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광양 오사리 돈탁패총 출토 그림 2. 광양 벚굴(광양시정 2019.1230) 갓굴[벚굴](목포대학교박물관, 20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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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주를 이루어 이들이 선사시대 전라도의 특산물이라 할 것이다. 갓굴(벚 굴)은 지금도 광양의 특산물로 널리 알려져 있어 그 오랜 역사성을 알 수 있 다. 홍합의 경우도『세종실록지리지』전라도 공물조에 올라 있고,『신증동국 여지승람』의 강진, 고흥, 광양, 보성, 순천, 영암, 진도, 장흥의 토산조에 기록 되어 있어 선사시대 이후 지역 특산물로 볼수 있을 것이다.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어류는 모두 42종인데 군산 나섬과 완 도 여서도패총에서 출토된 어류는 전체 어류 가운데 참돔이 50% 가량을 자 지한다. 또한 노래심 패총에서 민어가 10%를 점하고 있어 서해안의 대표적인 어종인 점과 연관된다 하겠다. 광양 의암과 돈탁패총에서는 내만성 어종인 감성돔, 숭어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군산 노래섬패총과 완도 여서도패총에 서는 복어가 상당량 점하고 있다. 출토유물 가운데 점유빈도가 높은 이들 어 종이 당시의 특산물로 볼 수 있겠다.

군산 가도 패총의 4패총은 청동기시대로 굴의 점유율이 98.7%0에 이른 다. 신석기시대인 5패총(98.4%), 6패총(98.7%)과 같이 청동기시대에도 굴이 대 부분을 자지하고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의 부안, 옥구, 나주, 영암, 함편, 무 안 토산조에 굴[石花]이 기록되고 있다. 옥구는 조선시대에 가도패총지역을 관 할하는 현이었다. 가도패총의 신석기시대 패총과 청동기시대 패총에서 함께

출토된 패류는 꼬막, 피불고동, 백합, 대수리 등이지만 점유율은 낮은 편이다.

청동기시대 유적 가운데 여수반도 지석묘에서 발견된 비파형동검(적량 동파 간돌검(월내동), 옥(평여동), 바위그림(암각화, 오림동)은 한국 청동기문화를 대표하는 유물들이다. 이 가운데 옥王은 장신구로서 천하석제 곱은옥, 구슬, 소옥과 벽옥제 대롱옥으로 재질에 따라 구분된다. 뒤이은 시기의 영암 옥야 라신연라내동리 고분, 나주 정촌 고분 등 영산강 유역의 고분에서 많은 수  

량의 옥이 확인되고 있다. 특히 나주 정촌고분 석실에서는 1,100여 점의 구 슬이 출토되었다.『삼국지』위지 동이전 한조韓條에 “구슬로서 재물과 보배로 삼기도 하고 또는 뀌어서 옷에 장식하기도 하고 목에 걸거나 귀에 늘어뜨리기 도 한다[以瓔珠弓財寶或以綴衣弓飾或以懸頸垂耳]”는 기사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1

이 시기의 특산물로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전傳영암 거푸집 일괄(국보),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국보), 완주 갈동 출토 동검과 거푸집 일괄(보물) 등도 정교한 기술과 예술적 감각이 조합 된 공예품으로서 당대 지역을 대표하는 특산물로 보아도 될 듯싶다.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4세기에 걸쳐 형성된 광주 신창동 유적(사적) 에서는 155cm에 이르는 벼 껍질층이 확인되어 벼농사가 경제적 기반으로 본 격화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신창동 유적의 저습지에 형성된 벼 퇴적층을 두께로 환산해 보면 산출된 벼 총량은 약 500톤에 이른다. 이처럼 막대한 양 은 중국의 하모도河姆渡유적을 능가하는 세계 최대량으로 이 시기의 농업 규 모와 기술 수준이 선진적인 단계에 진입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국립광주박물 관에서 발굴조사를 하였고 사적 지정 20주년 기념 특별전 “2000년 전의 타 임캡슐”을 한 바 있다 이러한 자료는 영산강 유역에서 대단위 쌀 농사가 이루 어졌음을 나타내 주는 것으로, 이 시기의 특산물이라 할 것이다.

나. 고러시대 유적과 기록으로 본 특산물 고려시대의 패총유적에서는 주 유물이 꼬막임이 확인되었다. 마한문화 연구원에서 2008년에 발굴조사한 보성 호동유적의 2개소 패총이다. I지구 패총 패각의 범위는 11x11m, 최대 두께 40m, Ⅱ지구의 패총 패각의 범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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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그림 3. 보성 호동 유적 패총 단면. 고러시대 패총유적으로 그림 4. 호동 유적 패총 출토 꼬막의 꼬막이 87%를 차지한다.(마한문화연구원, 2011) 각장(殼長)(마한문화연구원, 2011)

4 길이 20m, 너비 13m, 최대 두께 100cm로 층위는 8개층인데 꼬막의 비율이 87%에 이른다. 역사 시대의 패총 유적은 사례가 드문데 주 구성층이 꼬막인 고려시대 패총 유적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호동 유적은 전남 보성군 벌교읍 에 속하는데 벌교 꼬막 산지와 바로 이웃한 곳이다. 이 같은 역사성이 이어져 보성 •벌교 꼬막은 2009년 2월 25일 수산물 지리적표시 제1호로 등록되었다. 벌배를 타고 꼬막을 채취하는 보성 벌배어업은 2015년 12월에 국가중요농업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보성 벌교-순천 갯벌은 2021년에 신안 갯벌, 고창 갯 벌 등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꼬막은 조선초기 지역 특산 물을 알 수 있는『신증동국여지승람』의 흥양현(현재 고흥) 토산조에 강요주  瑤柱에 올라 있다. 벌교 꼬막 주 산지인 장도와 바로 연결되는 지역이다.

1123년(인종 0 고려를 다녀간 서긍(徐兢, 1091~1153)의 사행보고서인『선 화봉사고려도경』(제23권 잡속) 토산조의 기록은 중국에까지 알려진 전라도 토 산에 대한 내용이다. 나주도의 소나무가 과실과 안주, 국과 적에 쓰인다는 기 록이다. 이 기록에서 나주도는 전라도를 이른 것 같다. 요약해 인용한다.

큰 소나무가 많다. 소나무는 두 종류가 있는데, 다만 다섯 잎이 있는 것 만이 열매를 맺는다. 나주도羅州道에 있다. 열매가 처음 달리는 것을 솔방[松 깨이라 하는데, 모양이 마지 모고H本瓜]와 같고 푸르고 윤기가 나고 단단하다

1

전 그림 5. 보성 벌교 꼬막 채취 낼배어업(보성군 벌교옵 장도리, 김순, 2010.1027.)

과 가, 서리를 맞고서야 곧 갈라지고 그 열매가 비로소 여물며, 그 방房은 자주색 을 이루게 된다. 고려의 풍속이 비록 과실과 안주와 국과 적에도 이것을 쓰지 만 많이 먹어서는 안 되니, 사람으로 하여금 구토가 멎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이 기록에 이어서 “나주에서는 백부자白附子• 황칠黃漆이 나는데 모두 조 공품[上貢]이다.”는 내용이 있다. 백부자는 관백부閭白附, 노랑돌쩌귀라고 하며 진통작용이 있어 약재로 쓴다. 황칠나무의 황금색 수액은 고급 칠의 재료로 뛰어나고 귀하여 왕실에서 사용하였다. 중국 당나라 재상 두우(杜佑, 735~812) 가 편찬한『통전通丱』에 “백제의 황칠수黃漆樹는 6월에 진액을 취해서 기물  物에 칠하는데 황금같이 그 빛이 번쩍번쩍 빛나서 안광을 빼앗는다.”고 하였 다. 백제 때부터 특산물로 중국의 사서에 올라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산 정약 용은 황칠이라는 시에서 '궁복산에 가득한 황칠나무를 그대 보지 않았던가 [君不見弓福山中滿山黃]'라 하여 완도에 황칠나무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천연기 넘물 완도 정자리 황칠나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이다.

1271년(원종 12) 6월 23일조의『고려사』기록에 몽골에서 고려 조정에 회 귀한 물품을요구한다는 내용이 있다. 진도에서 남해와 함께 '청등藤', '팔랑 충八郞虫', '비자나무 열매[榧實]', '동백 열매[冬栢實]'가 난다고 하였다. 이 시기에 중국까지 알려진 전라도의 특산물인 셈이다. 청등과 팔랑충은 약재로 알려

졌다. 진도군 조도면에 속한 청등도靑藤島가 있다. 천연기넘물인 진도 상만리 비자나무는 수령 600년이 넘는데 고려시대의 임회현이 있던 곳이다. 고려 조 정을 통하여 몽골에 보내진 '비자나무 열매를 땄던 나무일성싶다.

고려시대 목간을 통해서도 특산물의 내용과 유통을 알 수 있다. 1131년 300 (인종 9)의 태안선은 탐진현耽津縣(강진)의 도자기 운반선이다. 1208년(희종 4)의 마도 1호선은 회진현會津縣(나주), 죽산현竹山縣(해남), 수령현遂寧縣(장흥), 안노 현安老縣(영암)의 곡물(백미白米중미中米, 콩[太, 미, 벼[租], 조[粟])과 발효식품(젓갈 전 [魚醢], 고등어 젓갈[古道醢], 게 젓갈[蟹醢], 메주[末醬], 알젓갈[卵醢]) 등을 운반하였다.

1197년(신종 1)~1213년(강종 기의 마도 2호선은 장사현長沙縣(고창), 무장 현茂松縣(고창), 고부군古阜郡(정읍), 고창현高敞縣의 백미[白米], 중미[中米], 콩[太, 4 미 등 미곡류, 메주[末醬], 누룩, 알젓갈[卵醢], 꿀[精蜜], 참기름[眞] 따위를 실어 날랐다.

1265년(원종 6)~1268년(원종 9)의 마도 3호선에는 여수현呂水縣(여수)의 생 전복[生鮑], 전복젓갈[生鮑醢], 마른 홍합[乾錟], 홍합젓갈[蛟醢], 물고기기름[魚油], 육포[개고기포], 상어[沙魚], 직물, 겉보리[皮麥]이 실려 있었다 전라도의 각군현에 서 개경의 세력가에게 보낸 점을 보면 품질이 뛰어난 지역 특산물이라 하겠다.

고려시대의 전라도 특산물 가운데 손꼽을만한 것이 고려 청자이다. 강진 대구면 일대에 188개소, 해남 산이면 진산리와 화원면 신덕리 일원에 227개 소, 부안 진서면 진서리와 보안면 유천리 일원에 77개소의 청자 요지가 분포 되어 있다. 개별 요지로는 더 많다. 그리고『세종실록지리지』에 자기소磁器所와 도기소陶器所기록이 있다. 자기소는 전국 120개 군현에 139개소가 있고, 도 기소는 152개 군현에 185개소가 있다. 전라도의 자기소는 30개 군현에 고개 소가 있고, 도기소는 29개 군현에 39개소로 모두 70개소이다.『경국대전』에 도자 장인은 44군현 101명의 기록이 있는데 전라도가 14군현 39명으로 가장 많다. 서긍의『선화봉사고려도경』이나 태평노인의『수중금中錦』에 고려의 비 색청자翡色靑瓷를 천하제일로 기록하고 있다. 고려시대 내내 전라도는 청자 생 산의 중심지로 천하제일이라 할 것이다.

다. 고려 후기~조선시기의 전라도 특산물 고려 후기 조선시대 전기의 특산물은『세종실록지리지』(1454, 단종 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1481, 성종 12/신증본 1530, 중종 25)을 통해 알 수 있다.『세 종실록지리지』는 토의土宜, 토공土貢, 토산土産, 약재藥材로 구분되어 있다. 토 의란 그 고장의 흙의 성질에 잘 맞는다는 의미이고 토공은 공물 형식으로 징 수하는 지방 특산물이다. 특산물의 범주에 든다고 하겠다.『신증동국여지승  

람』에는 구분 없이 토산조에 실렸다. 1

제철 수공업 특산물을 생산했을 철장鐵場은 6개 군현에 7곳이 있고 연

전 철과 정철을 생산하였다. 생산량은 5,404근 12냥쭝이고 군기감, 선공감, 전 주 등에 바쳤다.『신증동국여지승람』토산조에 철이 기록된 곳은 무주(대덕 산), 금산, 진산(월외리月外里), 광양(목곡本谷), 광산(장불동長佛洞), 동복(무등산), 무안(철소리鐵所里), 창평(무등산), 함평(사내포沙乃浦, 옹암포甕巖浦), 화순(냉천)이다. 주철[水鐵]은 무안(해제리海際里), 동銅은 진산(달왕산達往山), 자석磁石은 진 산(암정리巖井별)에서 나왔다. 자연동自外銅은 순창, 강진, 고흥, 영광, 창평, 해남

(황원리 망포芒浦)에서 나왔다.

소금을 생산했던 염소鹽所는『세종실록지리지』에 12개 군현에 60개소, 가마 수는 2개 군현에 143개소가 있었다. 특히 나주목은 염소가 35개소, 영 광군은 가마가 113개소가 있었다. 염창은 9개 군현에 있었는데 염간鹽干-O

표 1. 전라도의 철장鐵場C세종실록지리지』)

군현 개소 품질 종류 수량(근) 입납처

 

 

  1,725명, 소금 생산량은 5,771석이었다. 나주목은 오늘날의 신안군 섬 지역을

4 관할하고 있어서 신안 지역에 있었던 염소, 염창이라 하겠다. 나주목 염창조에 는 “나주 판관이 주장하여 민간의 면포綿布와 무역해서 국용國用에 이바지한

다.”라는 기록이 있어 염창의 관리를 나주목의 판관이 했고 면포와 무역하여 국용으로 썼음을 알 수 있다. 영암 염창조에는 “고려 공양왕 원년(1389) 기사에 해진海珍백야포白붠浦의 염간을 옮겨 붙여서 군에게 창고를 설치하고 인하여 해남창海南倉이라 하고, 군사郡事로 하여금 주장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어량魚梁은 물살을 가로막고 물이 한 군데로만 흐르게 터놓고 통발이나 살을 놓아서 고기를 잡는 곳을 말하는데 무장현 34곳, 부안현 2곳(위도猾島), 낙안군 1곳(장도獐島), 영광군 13곳(마성불동馬城佛洞) 등 4개 군현에 50개소가 있었다. 부안현 위도 어량은 어종으로 청어가 보인다.

다소茶所는 무장현 2곳(용산龍山•재역梓亦), 장흥도호부 13곳(요량饒良• 수태

守太칠백유七百乳정산井[l」•가을평加乙坪운고雲高•정화丁火창거昌居•향여香餘•웅점 熊山占•가좌加佐•거개居開•안칙곡安則谷)이 있다.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보 물)에는 859년(헌안왕 3)에 국왕이 자와 약을 내린다는 내용이 있는데, 자 관 련 금석문 기록으로는 가장 오래되었다.

토산으로 자茶가 기록된 곳은 고부, 고창, 무장, 부안, 순창, 옥구, 정읍, 태 인, 흥덕, 강진, 고흥, 광양, 광산, 구례, 나주, 남평, 능성, 동복, 담양, 무안, 보 성, 순천, 낙안, 영광, 영암, 장성, 장흥, 진원, 함평, 해남, 화순이다. 보성 전통

1

그림 6. 1917년의 무안(현재 신안) 압해도 대천리 염전(현재 신안군 합하면 대전리, 사진『전남사진지」, 목포신보사, 1917) 자 농업시스템과 장흥 발효차 청태전 농업시스템은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죽전竹釐은『신증동국여지승람』토산조에 6도 59개 고을 91곳이 나온

다. 전라도가 24개 군현에 47개소로 가장 많다. 광주 하소, 전북 5개 군현에 7개소, 전남 18개 군현에 39개소이다. 특히 나주의 삼향죽은 천하에 제일이 라고 알려졌다. 전라도관찰사 김종직(1487년 5월 27일 부임)이 지은「금성곡錦城曲」12수 가운데 7수에서 읊은 내용이『점필재집』에 실려 있다.

산과 바다는 아름다워 빼어난 기운이 새롭고, 山海扶輿秀氣新

예부터 다만 명신名臣을 낸 것 뿐 아니다. 古來不擉出名臣

삼향三鄕의 대화살竹箭이 천하에 소문나니, 三鄕竹箭聞天下

석석錫石과 단은丹鋹이 어찌 보배라 할 것인가. 錫石丹鋹豈足珍

『조선왕조실록』에는 “삼향 전죽三鄕箭竹”을 궁궐의 후원에 심기 위해 전 라도 관찰사에게 50포기씩 캐어 보내도록 하고, 어통개전仰筒介箭과 어시仰矢 를 만드는 데 쓰이고, 궁중에서 각종 행사 때 상품으로 하사되고, 가장 굳세 고 강하여 온 나라에서 쓰는 화살대가 모두 삼향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조선시대 이후 전라도의 특산물은 매우 다양하다. 김덕진이『전라도의 탄생』2-생업의 현장-에서 정리한 바에 따르면, 옷감 작물에 있어 나주의 비 단, 무안의 목화, 강진의 무명[康津本]이 잘 알려졌다. 곡성의 돌실나이[삼베]나 나주의 샛골나이[무명베]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한양가」에는 해남 포[마포]가 나온다. 작물에 있어서는 나주 배, 화순 동복의 복삼福蔘, 진안 담 배, 전주 생강, 장성 모시, 금산 삼, 나주 무[菁], 진도 구기자 등이 나온다. 담양 의 죽세공예품과 영암 참빗, 나주 소목, 남평 승두선, 전주 합죽선이 잘 알려 졌다. 광산촌은 장수 수연광산, 김제 사금광산, 해남 명반석[납석, 옥돌]광산, 광양 금광산 등이『조선의 취락』에 나온다. 화순은 석탄이 나온다. 혹토평  土坪1라는 지명도 있다.

허균(許筠, 1569~1618)의 시문집『성소부부고犀戶斷覆甑藁』에 있는「도문대작屠

표 3. 전라도의 죽전竹箭산지(C신증동국여지승람』)

군현

4

광산 남일

무장

H안 2 대죽도大竹島, 소죽도기`竹島

2 도이곶[都邇串] , 모든 성[凡회

 

3 옥산玉山, 제원동濟院洞, 군지리單知里

4 성산城山, 장자산長者|회

3 점이산點爾山, 광동廣洞, 추라산推羅山

광양 2 성거역蟾居驛, 계곡산戒谷山 구례 나주 낙안 남평 담양

口아 함박산含朴山

보성 4 초라산萆曪山, 천동산泉洞山, 조양兆陽, 당산堂山

순처 5 묘산도卯山島, 시중당侍中堂상이사리上(尹沙里, 하이사리F伊沙里

영광 장성

장홍 진도 2 정화리丁火뼌, 남산南山

2 가홍리加興里용장리龍費里

진원 2 가리산加利山, 상림산上林山

 

門大嚼」은 함열 배소에서 팔도의 진미와 여러 종류의 이름난 산물에 대해 소개 하고 품평한 저술이다. 전라도 군현별로 산물을 보면, 나주의 감태甘苔•무[蘿藷]

•승에水魚], 담양의 생강[薑], 무안의 감태, 부안의 녹미鹿尾(사습의 꼬리)도하4兆*헟

•오징어[烏國魚], 순천의 차茶, 영암의 감류甘榴, 옥구의 도하b뻤, 전주의 백산자白散子(속명 박산薄散)•엿[飴]•승도僧桃생강, 창평의 생강, 함평의 감류깎태, 흥덕 오 정어 등이다. 그리고 노령이하의 죽순절임[竹筍醐, 전라도 지역권으로 순채[蓴]•  

웅에葦魚]• 청어靑魚•토란[芋], 남해의 김[海衣], 홍합, 남해변의 유자 등이다.

라. 자연환경과 문화가 녹아 든 현재의 특산물 - 무형문화재, 지리적 표시제, 1

중요농•어업유산

현재의 전라도의 특산물에 대해서는 몇 가지로 한정하여 정리해 보자. 먼저 무형문화재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3대 이상 전승되어 온 전통 공예나 직물 등에 대하여 문화재청장이나 시 •도지사가 지정하는 제도이다. 특산물이 기반이 된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도입되어 1964년부터 무형 문화재 종목 지정과 보유자(인간문화재) 인정을 하고 있다. 국가지정무형문화 재와 사도지정무형문화재가 있다 국가지정무형문화재는 백동연죽장, 윤도장, 한지장, 선자장(이상 전북), 나 주 샛골나이(무명베짜기), 곡성 돌실나이(삼베짜기), 낙죽장, 채상장, 장도장, 제 와장, 옥장, 염색장, 소반장(전남) 등 11종목이다.

시•도지정무형문화재는 필장, 청자도공, 악기장, 화류소목장, 대목장, 나 전칠장(이상 광주), 향토술담그기(이강주, 죽력고, 송화주), 선자장(단선, 태극선, 합죽 선), 목기장, 악기장(단소, 북, 장구, 거문고, 가야금), 옻칠장, 목가구(소목장), 침선 장, 죽염제조장, 사기장(청자), 대목장, 한지발장, 지장, 석장, 전통음식(전주비빔 밥), 불교목조각장, 방짜유기장, 우산장(지우산), 전주 나전장, 전주 낙죽장, 부 거리옹기장, 진안고원형옹기장, 민속목조각장, 색지장, 지승장, 전주배첩장, 야장, 여산 호산춘(전북), 광양궁시장, 나주반장, 참빗장, 담양죽렴장, 해남진 양주, 진도홍주, 청자장, 옹기장, 전남의례음식장, 낙죽장, 보성 강하주, 담양 선자장(접선장), 악기장, 조선장, 초고장(전남) 등 50종목이다.

지리적표시 등록제도는 농축산물, 수산물, 임산물의 품질이 해당 지역 의 지리적 특성에 비롯된 경우에 지리적표시를 등록하여 보호하여 지역 특 산물 또는 가공품의 품질을 향상하고 지역 특화 산업으로 육성을 꾀하는 제 도이다.「농수산물 품질관리법」이 모법이며,「소금산업 진흥법」,「전통주 등

표 4. 전라도 특산물의 지리적 표시제 시군별 종별 목록

시군 농축산물 수산물 임산물

전북 고창(2) 군산(2) 남원(1)

무주(6) 복분자주, 복분자

찰보리쌀, 쌀

미꾸라지

사과 머루, 머루와인, 천마, 호두, 오미자

부안(1) 순창(1) 오디

전통고추장

4

 오미자

고홍(8) 유자, 한우, 석류, 마늘 미역, 다시마, 김, 굴

 

곡성(1) 토란

 

광양(2) 매실 백운산 고로쇠수액

구려1(1) 나주(1)

담양(기 무안(2) 보성(4) 순천(1) 신안(2)

여수(5) 딸기 죽순

양파, 백련차

녹재 삼베, 웅지 올벼씰 벌교꼬막

순천만 가리맛조개

굴, 전복

돌산 갓, 돌산 갓김치, 거문도 쑥 굴, 여자만 시|꼬막

전남

영광(3) 고추, 고춧가루, 모싯잎송편

 

영암(2) 무화과 대봉감

 

완도(5) 전복, 미역, 다시마, 김, 넙치

기조개, 김, 매생이 표고버섯

홍주, 대파, 검정쌀, 울금 전복 구기자

한우

겨울 배추, 고구마 김, 전복

장홍(4) 진도(6) 함평(1) 해남(4)

화순(2) 작약, 목단

소계(57)  

합계(71) 34 23 14

의 산업진흥에 관한 법률」이 관련되고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장, 국립수산 물품질관리원장, 산림청장이 지리적 표시 관리 기관장이다.

농축수산물은 원료 농산물과 농산물 가공(품)으로 나눌 수 있는데 2002년 1월 25일에 등록된 보성 녹차가 1호, 현재까지 106호가 등록되었다. 전북은 7종, 전남은 27종 등 34종이 등록되었다.

수산물은 2009년 2월 25일 보성•벌교 꼬막이 등록된 이후 25호가 등  

록되었다. 전북 1종, 전남 22종 등 23종이 등록되었다. 1

임산물은 2006년 3월 27일 등록된 양양송이 이후 56호가 등록되었다.

전북 6종, 전남 8종 등 14종이 등록되었다.

지역 특산물이 기반이 되어 등록된 지리적 표시제는 모두 187종인데 이

가운데 전라도는 71품목이 등록되어 38%0에 이른다.

71품목의 특산물 가운데 23종은 조선 전기『신증동국여지승람』등 지 리지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그만큼 역사성이 기반이 된 것이다. 무주오미자, 장수오미자, 고흥유자, 고흥김[海衣], 고흥미역, 고흥굴, 나주배, 담양 죽순(대), 보성녹자(차), 보성•벌교꼬막(강요주), 신안(나주)굴, 신안(나주)전복, 여수(순천) 굴, 완도(강진)김, 완도(강진)전복, 완도(강진)미역, 영암대봉감(감), 장흥김, 장흥 매생이[莓山], 장흥 표고버섯[香簟], 진도전복, 해남김, 해남전복이다.

지리적 표시 단체표장 제도도 있는데「상표법상」에 따라 특허청이 지역 특산품의 명칭을 권리로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장흥표고버섯이 2006년에 처음 등록된 뒤로 2016년 기준 332건이다. 주요 품목을 보면, 고창복분자주, 군산찰보리쌀, 남원목기, 남원지리산고로쇠수액, 무주머루, 무주머루와인, 무 주사과, 무주천마, 봉동생강[완주], 전주비빔밥, 순창고추장(전북), 강진청자, 고흥유자, 고흥유자자, 구례산수유, 영암무화과, 보성녹차, 장흥표고버섯, 진 도홍주(전남) 따위이다

「농수산물 품질관리법」에 다른 지리적 표시제가 특산물의 품질에 관한 것이라면,「상표법상」에 의한 지리적 표시 단체표장 제도는 특산품의 명칭에 관한 것이라 하겠다.

국가중요농업유산은 농업인이 해당 지역의 환경•사회•풍습 등에 적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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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장수 오미자 기록(신증동국여지승람 권37, 장수현 토산조, 1530년, 한국고전종합DB)

그림 8. 무주 오미자 기록(신증동국여지승람, 권37, 무주현 토산조, 1530년, 한국고전종합DB)

 

매생이[莓山] 기록(신증동국여지승람 권37, 장흥도호부 토산조, 1530년, 한국고전종합DB)

 

그림 9. 무주 오미자 - 임산물 지리적표시 등록 제54호(지리적표시가이드북)

 

그림 11. 장흥 표고 버섯[香簟]- 임산물 지리적표시 등록 제2호(엄길섭, 20기.03.31)

 

1

과 그림 12. 장흥 매생이[莓山] - 수산물 지리적 표시 제11호(엄길섭, 2020)

면서 오랫동안 형성시켜 온 유형•무형의 농업자원 가운데「농어업인 삶의 질 향상 및 농어촌지역 개발촉진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농림축산식품부장관 이 지정한 농업유산을 말한다. 2013년에 청산도 구들장논(완도)을 시작으로 15호까지 지정되었다. 전북은 부안 유유동 양잠농업, 완주 생강 전통농업시 스템, 전남은 청산도 구들장논, 구례 산수유농업, 담양 대나무밭, 보성 전통 자 농업시스템, 장흥 발효자 청태전 농업시스템 등 7개소가 등재되었다. 부안 양잠, 완주 생강, 구례 산수유, 담양 대나무, 보성 전통차, 장흥 청태전 등 지역 특산물의 생산 시스템에 관한 것이다. 완도 청산도 구들장논은 생산 시설에 관한 것이고 유엔 식량농업기구가 등재하는 세계중요농업유산에 올라있다 국가중요어업유산은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고유의 유형 •무형 어업유 산을 보전하기 위해 해양수산부가 2015년부터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는 유 산을 말한다. 9종목이 지정되었는데 보성 땔배어업, 신안 갯벌 천일염업, 완 도 지주식 김 양식어업, 무안•신안 갯벌낙지 맨손어업 등 전남의 보성 꼬막, 신안 천일염, 완도 김, 신안 낙지 등 전라도 4개 지역의 특산물 관련 어업이 지 정되었다.

김희태

 


 

편찬위원회 명단

 

위원장 이재운 전주대학교

부위원장 김덕진 광주교육대학교 홍성덕 전주대학교 홍영기 순천대학교

편찬위원(가나다순) 편집디자인•제작

김경옥 목포대학교

김신중 전남대학교 (주)다니기획

김종수 군산대학교 WWVV dani .CO. kr

김희래 전라남도 문화재위원회 02-545-0623(代)

노영기 조선 대학교 서올특별시 강남구 학동로26길 78

박맹수 원광대학교 총괄책임 추기숙(21록학)

박중환 (전)국립나주박물관 정성권(역사학)

원도연 원광대학교

윤상원 전북대학교 교정교열 강지혜 박노석 박선미

이강래 전남대학교 (역사학) 임숙정 탁현진

이동희 예원예술대학교

이중효 호남고문현연구원 정제한 김향순 배우희

임송자 성균관대학교 (국문학) 장석현 민문기 김턔윤

조법종 우석대학교

하태규 전북대학교 업무진행 장기영 김정매 석수영

한규무 광주대학교

한정훈 목포대학교 편집 최 진 박상락 성지은 권턔원 김지현 양승주 박정웅 이사별 장하린 전욱진

편찬 지원 디자인 이동훈 이찬범 김봉재 정은경 유지연 권영지

김동영, 심경순, 오대영 조혜진 박유미 김민우

촬영 이강우

인쇄제작 박현철 사재웅

전라도 전년사 01 총설 전라도의 위상과 역할

발행인 전라도전년사편찬위원회 발행처 전북연구원(http•//www jthink kr) 전북 전주시 완산구 콩쥐팥쥐로 1696 전화 063-280-7100 발행일 2022년 12월 30일

ISBN 978-89-6612-409-1 94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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