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26

알라딘: 미의 법문 - 야나기 무네요시의 불교 미학

알라딘: 미의 법문


미의 법문 - 야나기 무네요시의 불교 미학 
야나기 무네요시 (지은이),최재목,기정희 (옮긴이)이학사2005-05-15









절판 판권 소멸 등으로 더 이상 제작, 유통 계획이 없습니다.
절판
보관함 +


- 절판 확인일 : 2020-12-24

251쪽
책소개
야나기 무네요시의 '불교미학 4부작'(<미의 법문>, <무유호추의 원>, <미의 정토>, <법과 미>)을 번역하여 한 권으로 엮은 책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주석을 새로 달고 주요 인물에 대한 소개를 넣었다. 저자는 미의 문제가 서양사상을 중심으로 해명되는 것을 비판하며 독자적인 미의 표현과 체험을 갖고 있는 동양인은 동양의 사상에서 미의 문제를 다루어야 함을 역설한다.

저자가 말하는 불교미학은 '불이(不二)의 미(美)'를 밝히는 학문이라고 한다. 불이의 미란 미추에 집착하지 않으며 그것을 초월한 자유로움을 의미한다. 미추란 상대적이며 조작적이고, 인간의 분별에 의한 가치판단의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나아가 불법에는 모든 것에 통하는 보편적 이법이 숨어 있다고 말하며, 미의 세계도 그 법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저자는 어려운 불교 경전의 구절들을 현실적인 물건인 민기(조선 막사발 등)에 적용시켜 해명함으로써 미는 결국 법미(法美)와 같음을 보여준다.


목차


서문_불교미학의 비원

미의 법문
무유호추의 원
미의 정토
법과 미

부록1 야나기 무네요시의 불교미학 4부작 해제
부록2 주요 인물 소개
부록3 야나기 무네요시 연보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책속에서


이 필연적인 수동의 길이 공인이라는 약한 존재를 강하게 수호하였다고 말해도 좋겠지요. 그러므로 범인이 구원되는 데는 더 없이 큰 '타력'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생각하면 예로든 '이도 다완'이나 '귀얄문 다완'의 아름다움은 타력에 맡겨져 저절로 구원된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 때문에 손쉽게 그냥 만드는 물건에 명공조차 쉽게 만들어내지 못할 정도의 아름다움이 타력적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범인이 천재보다 뛰어난 물건들을 만들었던 많은 사례들을 부정할 수 없는 한 '선인이 구원된다면 하물며 악인이야'라는 말은 조금도 거짓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불가사의하게도 서양에서는 아직까지도 이 '타력미'에 대해서 말한 사람이 없습니다. - 본문 160쪽에서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야나기 무네요시 (柳宗悅)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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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1901년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싹텄다. 1907년 학습원(學習院)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의 가르침을 받았다. 1910년 ≪시라카바(白樺)≫ 창간, 동인이 되었다. 도쿄제국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1914년 최초의 저서 ≪윌리엄 블레이크≫를 간행했다.
1916년 불국사와 석굴암을 처음으로 방문했다. 1919년 동양대학 종교학과 교수로 부임했고, 1921년 조선민족미술관 설립을 계획했다. 1924년 모쿠지키 불상(木?佛) 연구를 발원했다. 1925년 ... 더보기

최근작 : <나무아미타불>,<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 마음 사람>,<수집이야기> … 총 16종 (모두보기)

최재목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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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문학과 철학에 관심이 많은 청년기를 보냈다. 198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뒤 현재까지 시를 꾸준히 써 오고 있다. 영남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수학하던 도중 일본으로 건너가 츠쿠바 대학원 철학사상연구과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방문학자·객원 연구원으로서 하버드 대학, 도쿄 대학, 레이던 대학, 베이징 대학에서 연구했다. 현재 영남대에서 철학을 가르치며 그림도 그리고, 여행도 하고, 농사도 지으며, 대충 제멋대로 별 재미없이 살아가고 있다. 닉네임은 돌구乭九, 돌... 더보기

최근작 : <해방후 울릉도·독도 조사 및 사건관련 자료해제 Ⅱ>,<울릉도·독도로 건너간 거문도·초도 사람들>,<스무 살, 나답게 산다는 것> … 총 63종 (모두보기)

기정희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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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자대학교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영남대학교 대학원 미학미술사학과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그 뒤 일본 도쿄 대학 대학원 미술예술학 전문과정에서 수학하였으며, 영남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빈켈만 미학에서 그리스 고전예술의 해석'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남대학교 미술학부 강의교수로 재직중이다.

논문으로는 '플라톤의 <향연>에 나타난 미와 에로스의 문제', '쉴러의 미학에서 자유의 의미', '레싱의 시화(詩畵)비교론', '빈켈만과 미의 이상', '빈켈만의 미술사학', '빈켈만의 예술해석론' 등이 있다.


최근작 : <빈켈만 미학과 그리스 미술> … 총 4종 (모두보기)
야나기 무네요시(지은이)의 말
병중이라서 불충분한 점은 많지만, 반대로 병 때문에 이 한 권의 책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서양인이 당분간 접할 것 같지 않은 미에 얽힌 문제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 책은 보잘것없지만 서구에 대한 하나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가능하다면 머지않은 날에 이것을 영역하여 널리 세상에 알리고 싶습니다. 누군가 번역을 맡아줄 사람이 나온다면 고맙게 맞이하고 싶습니다. 덧붙인다면 나는 논의가 추상으로 흐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실례를 들고자 노력하였습니다. (1958년 7월 중순 병상에서 적습니다)



출판사 소개
이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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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정조의 군주상>,<맑스주의 이해하기>,<하나논리>등 총 210종
대표분야 : 철학 일반 9위 (브랜드 지수 86,883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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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스 노부쿠니, <일본근대사상비판> 읽기






▷ 고야스 노부쿠니(子安宣邦), 『 일본근대사상비판 』(김석근 옮김), 역사비평사, 2007.

지난 해 고야스 노부쿠니의 『귀신론(鬼神論)』(이승연 옮김, 역사비평사, 2006)을 아주 흥미롭게 읽고나서 일본의 두터운 학문적 지층과 그 왕성한 사상적 '소화력'에 다시금 새삼스레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고야스의 다른 책으로는 이미 국내에 『동아·대동아·동아시아』(이승연 옮김, 역사비평사, 2005)와 『야스쿠니의 일본, 일본의 야스쿠니』(김석근 옮김, 산해, 2005)가 번역돼 나온 바 있었지만, 이 두 책이 공통적으로 다분히 '친한적(親韓的)'인 주제에 입각해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던 반면에, 『귀신론』은 이른바 '소라이가쿠(徂徠學)' 등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정통적인 [정치]사상사 계통을 잇는 본격 사상사서라는 점에서 그 번역이 더욱 반가웠던 것이다. 물론 고야스의 방법론이나 제재가 '정통적으로' 정통적인 것은 분명 아니다. 그의 문장이나 문제의식에서는 구조주의 이후 현대 [서구]철학이 걸었던 행보의 잔향과 수혜가 느껴진다. 『귀신론』만 놓고 봐도 주제의 선택이나 그 주제를 다루는 방법론에 있어서 정통의 일본사상사의 영향보다는 오히려 아날 학파나 미시사 연구의 영향이 더욱 강하게 느껴지는 것이 그 한 사례이다. 역사비평사에서 고야스의 책들을 선별하여 순차적으로 출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러한 영향사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 고야스의 최근 성과물들이 번역되는 대로 찬찬히 살펴보면서 천천히 음미해보기로 하자('근간' 예정인 책들을 번역하고 있을 번역자들에게 표면적으로는 부담을 주지 않는, 하지만 가장 강력한 부담을 안겨주는, 독한 제안, 지독한 제안).

1) 최근에 읽었던 고야스의 책은 역시나 역사비평사를 통해 올해 4월 김석근 선생이 번역하여 출간한 『일본근대사상비판』이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김석근 선생은 특히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의 저작을 중심으로 일본과 근대성 담론에 관한 만만찮은 역작과 노작들을 꾸준하게 한국어로 옮겨 오고 있는 정력적인 번역가이다.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늦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고3 시절 여름에 읽었던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정치사상사연구』 국역본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숨 막힐 듯한 마루야마의 정치한 논의도 논의였거니와, 권두에 수록된 도올 김용옥의 해제는, 낙엽만 뒹굴어도 폭소를 터뜨리고 찬바람만 불어도 눈물을 떨구던 어린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 丸山眞男, 『 日本政治思想史硏究 』, 東京大學出版會, 1996[新版 9刷].
▷ 마루야마 마사오, 『 일본정치사상사연구 』(김석근 옮김), 통나무, 1995.


2) 일본의 근대와 사상사를 다룬 저서의 경우, 이 역시 아는 사람들은 아는 바, 마루야마 마사오를 언급하지 않고는 거의 책을 쓸 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만큼 마루야마의 사상사 논의는 이후 '근대'와 '일본'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필수적인 고지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따라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만, 고야스가 펼치는 '근대' 논의의 중심에도 마루야마 비판이 자리 잡고 있다.


3) 하지만 고야스의 마루야마 비판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책의 순서를 따라가보도록 하자. 그는 제1부 "일국적 지식의 성립"에서 일국민속학과 국어신학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일국적 지식(一國知)"이라는 말 자체가 지극히 일본적인 배경을 지닌 말, 곧 일본의 근대화 담론을 배후로 하여 형성된 용어이다. 다시 말해서, 민족주의/국가주의(nationalism)의 형성을 제쳐두고서는 이 용어를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먼저 지적해야 한다.


4) 여기서 고야스가 일국민속학과 국어신학 비판을 통해 공통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외부자의 배제', 곧 '내부자의 시선에 대한 강조'이다. 예를 들어 고야스는 일국민속학에 대한 비판으로 야나기다 구니오(柳田國男)의 이른바 '오키나와의 발견'이라는 텍스트를 꼼꼼히 독해하고 있다. 고야스가 따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야나기다의 '민속학'을 비판하고 있는 이 부분에서 [한국인으로서?] 내가 거의 즉각적으로 바로 떠올린 인물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였다. 그는 누구인가? 서슬 퍼런 식민지 시대에 이른바 '조선의 민중'과 그 예술('민예(民藝)')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보이며 많은 저술을 남겼던 '일본인'이다. 야나기 무네요시에 관해서는 아래 두 책의 일독을 권한다(작년에 출간된 그에 관한 평전은 아직 구해 읽지 못했다). 어떤 의미에서 이 두 책은 '발전적' 구조로 묶어서 일별해볼 수 있다. 야나기가 조선 민예라는 '각론적'이고 구체적인 세계로부터 출발해서 어떻게 "미(美)의 법문(法門)"이라는 추상적인, 아니 거의 종교[미학]적이라 할 수 있는 세계에 이르게 되는지, 그 개인적인 이론의 '발전사'를 확인해볼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이렇게 본다면, 야나기 무네요시의 '개인적' 발전사는 거의 완벽하게 '헤겔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렇다면, 한 개인의 '발전사'가 정확히 헤겔적 운동에 부합한다는 것은, 축복인가, 아니면 저주인가, 그런 생각도 드는 것이다).





▷ 야나기 무네요시, 『 조선과 예술 』(박재삼 옮김), 범우사, 2003[2판].
▷ 야나기 무네요시, 『 미의 법문 』(최재목·기정희 옮김), 이학사, 2005.

5) 고야스의 야나기다 구니오 비판에서 내가 문득 야나기 무네요시를 떠올린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마치 야나기다가 오키나와에서 그가 보려던 것만을 보고 발견하려던 것만을 발견함으로써 결국엔 자신의 '확고한' 가설이었던 야마토 정신(大和魂)을 확인하는 데에 그쳤던 것처럼, 조금은 다른 층위에서ㅡ그러니까 어쩌면 야나기다의 논리가 정반대로 뒤집힌 논리에서, 혹은 더욱 '은밀하게' 확장된 논리에서ㅡ야나기 무네요시가 이른바 '조선 민중의 민예'를 통해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느끼고 싶은 것만을 느낀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 때문에서였다. 따라서 뿌리 깊게 착종되어 있는 '한-일 관계'와 그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식민지적 '근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나로서는ㅡ이러한 '강박증'은 나만의 '천형'인가?ㅡ일본[만]의 입장에서 보다 '충실히' 국가주의적이라 평가될 수 있는 야나기다 구니오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근대적 착종 관계의 중심 혹은 경계에 서 있는 야나기 무네요시가 훨씬 더 '문제적' 인간으로 가깝게 다가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가깝게'라고 말했지만, 그렇게 애써 겨우 입을 떼긴 했지만, 내 안에서 이 '가까움'의 거리는 어쩌면 현기증이 나도록 지극히 '머나먼' 거리감의 반어적 표현일 지도 모른다(요즘 유행하는 말을 차용하자면, 차용증서 없이 차용하자면, 나는 딱 이맘때 즈음에 이르러 기분이 매우 '메롱'해지는 것이다).



▷ 윤택림, 『 인류학자의 과거 여행 』, 역사비평사, 2003.


6) 고야스의 야나기다 비판 읽기, 그리고 거기에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한 개인적인 '회상'이 덧붙여지는 이 즈음에 떠오르는 책이 하나 있다. 윤택림의 『인류학자의 과거 여행』이라는 책이 그것이다. 말랑말랑하게 들리는 제목이 어울리지 않을 만큼, 이 책은 국내에서는 보기 드물게 치밀하고 본격적인 구술사(oral history) 저서이다(이 책의 부제는 "한 빨갱이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이다). 르 고프의 심성사도 좋고 긴즈부르그의 미시사도 좋지만, 누군가 읽을 만한 역사서를 한 권 추천하라고 한다면 나는 단박에 이 책을 거론하고 싶을 것이다. 고야스의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이 떠오른 이유는 아마도, 고야스가 야나기다의 민속학을 비판하면서, 그리고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을 모범적으로 언급하면서 이야기하고 있는 '내부자-외부자'의 구분법 때문인 것 같다(물론 이때의 나의 위치는 일종의 '피분석자적' 위치인 만큼, 나도 나의 '자유연상' 논리를 모두 설명해낼 수가 없다). 그러한 구분법을 이 책에 적용시켜 본다면? 이 책의 시각과 방법은 내부자의 시선인가, 아니면 외부자의 시선인가, 혹은 구술사란 무엇인가, 아니면 무엇이 되어야 하나, 무엇을 위한 것인가 등등의 질문이 폭주할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말이다.


7) 나는 고야스의 '일국민속학' 비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ㅡ아니, 동의할 수밖에 없지만ㅡ그의 '국어신학' 비판 논의, 혹은 '국어'와 '일본어' 사이의 대립에 대한 논의에 관해서는 몇 가지 아쉬운 점을 덧붙이고자 한다. 독서 내내 나에게 특히나 아주 흥미로웠던 것은, 이른바 '국어'의 정립에[만] 관심이 있었던 중심적이고 관제적인 주류 학자들과는 사뭇 다른 주장을 폈던 도키에다 모토키(時枝誠記)의 텍스트였다. 그가 '국가' 중심의 '국어' 이해라는 편협성에서 이탈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경성제국대학의 교수를 역임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주장은 '국어'라는 것을 '모국어'이자 '민족어'로 이해하는 한계 안에서는 식민지 조선에 '국어(일본어)'를 강제할 명분과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곧,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도키에다는 그 자신에게 고유한 '식민지' 경험 덕분에, 일본이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을 기획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국가' 단위를 훌쩍 뛰어넘어 버리게 되는 '국어/일본어'의 문제를 오히려 첨예하게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도키에다는 민족 개념에 근거한 '국어'가 아니라 일본의 정치적 우위에 근거한 '국가어'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다. 그런데 고야스가 생각하는 이러한 도키에다의 한계랄까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하지만 도키에다가 일본의 정치적 우위에 기초해서 말하는 국어의 가치적 우위 주장은, 그가 말한 국어가 결국은 야마다의 '대일본제국의 용어'와 큰 차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준다."(『일본근대사상비판』, 97쪽)


8) 물론 야마다와 도키에다, 둘의 차이는 현상적으로나 결과적으로는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다. 나도 그 점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나의 의문은 이렇다. 첫째, 현상적으로, 결과적으로는 그렇지만, 인식적으로도 과연 전혀 차이가 없는가. 둘째, 첫째 의문과 관련하여, 고야스가 이른바 [푸코 식의] '지식의 고고학'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라면, 오히려 저러한 인식적인 둘의 차이가 보다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혹은, 물음을 바꾸자면, '지식의 고고학'을 방법론으로 삼은 고야스가 저렇게도 쉽게 이런 손쉬운 결론을 내려버려도 되는 것일까. 셋째, 따라서 도키에다의 텍스트는 보다 '징후적으로', 그리고 '내재적'이고 인식적인 입장에서 독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내 기준에서 고야스의 결론은 일차적이고 표면적인 비판밖에는 안 된다는 반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고야스 스스로 제시하고 있는 방법론이 이미 그 자신의 너무 '안이한' 결론을 훨씬 상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야스가 다루고 있는 문제가 '근대성' 혹은 '국민국가(nation-state)'의 문제라고 할 때, 그리고 또한 그의 방법론이 푸코 식의 '고고학'이라고 할 때, 도키에다의 텍스트에 대한 분석은 보다 징후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도키에다에 대한 표면적 비판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고야스가 더욱 치열하게 문제 삼고 포착해야만 했던 것은, 도키에다로 하여금 '국어-일본어'의 관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저 '근대성-국민국가-제국주의'의 배후, 그것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고야스의 논의를 흥미롭게 읽으면서도 자꾸 느끼게 되는 것은 이러한 아쉬움이다.




▷ 이연숙, 『 국어라는 사상 』(고영진·임경화 옮김), 소명출판, 2006.


9) 『일본근대사상비판』의 1부 3장에서 다뤄지고 있는 '국어' 또는 '일본어'에 관한 논의 역시 마루야마의 '학문적' 그늘 안에서 이해될 수밖에 없고, 또 그러할 때만 고야스 논의의 쟁점을 파악할 수 있다. 물론 이 문제에 관한 책은 일본 안에서도 수도 없이 많다. 다만 고야스가 언급해줬으면 하고 내심 바랐지만ㅡ한국어판 서문에서든 후기에서든, 그 어디서든ㅡ그가 그렇게 하지 않은 책이 하나 있다. 이연숙의 『국어라는 사상』이 바로 그것이다(이 책의 일본어판은 1996년에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에서 출간되었다). 고야스가 말하고 있는 '국어'와 '일본어'의 대립, 혹은 국어학과 언어학의 대립에 관한 일본 내의 통시적이고 공시적인 논의와 세부적인 쟁점사에 관심이 있다면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책이라는 생각이다. 일독을 권한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일제 말기 한국 작가들의 일본어 글쓰기 혹은 이중어(조선어/일본어) 글쓰기에 관한 김윤식 선생의 흥미진진한 논의에 관해서는 아래 두 책의 일독을 권한다. 선생의 이중어 글쓰기 논의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별도의 장문을 요하는 일이라 후일로 미루지만.





▷ 김윤식, 『 일제 말기 한국 작가의 일본어 글쓰기론 』,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 김윤식, 『 김윤식 선집 7: 문학사와 비평 』, 솔, 2005.


10) 어쩌면 『일본근대사상비판』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고야스의 마루야마 비판으로 다시 돌아와보자. 고야스의 마루야마 비판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마루야마가 '근대'라는 개념을 하나의 '이념형'으로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일본근대사상비판』, 213-214쪽 참조). 이 말은 다시 바꿔 말하자면, 기본적으로 '근대성 일반'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판에 다름 아니다. 다양한 제 각각의 근대성이 존재하는 것이지, 근대성 일반이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ㅡ고야스는 독자인 내가 조금 쑥스러울 정도로 정색을 하면서 단언하고 있지만ㅡ이는 현재의 시점에서 당연하기 그지없는 말이다. 게다가 이러한 비판은, 어쨌거나 헤겔의 영향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마루야마의 시대적 입장을 생각해볼 때 더욱 당연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내게는, 도키에다에 대한 비판과 마찬가지로 고야스의 마루야마 비판 논리 역시, 일종의 정치한 이데올로기 분석으로서의 '고고학'이 지녀야 할 방식과 효과에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바로 이 시점에서 이런 생각도 드는데, 만약 이러한 나의 '재비판'을 고야스가 읽는다면, '고고학'의 방법론을 하나의 '이념형'으로 만들고 있다고 다시 '메타-비판'할 지도 모른다는, 그런 기우, 그런 잡생각 한 자락). 도키에다의 텍스트를 읽는 시점에서부터,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도키에다의 동서양에 대한 '상대적' 규정의 논리를 읽어내는 시점에서부터, 고야스가 보다 정치한 '고고학자'의 모습을 보여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내겐 계속 남는 것이다.


11) 고야스의 마루야마 비판이 지닌 두 번째 요지는 좀 더 세부적인 것, 곧 '근대'라는 용어의 사용법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하지만 그 용어가 다른 것도 아니고 바로 '근대'일진대, 사실 이는 전혀 세부적이지 않고 오히려 가장 포괄적인 문제라고 할 밖에). 저 유명하고도 유명한, 저 악명 높고도 높은 '근대의 초극' 논의에 적대적이었던 마루야마가 '근대의 초극'에서의 '근대'를 '근대적 사유'로 치환하였다는 것, 곧 '근대의 초극'이라는 논의를 '근대적 사유의 초극'으로 재빠르게 뒤바꿔버렸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이것이 비판의 사유가 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사실 이러한 '조작'과 '치환'이야말로 마루야마 사상사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니었던가, 하는 반문 하나 남겨둔 채 지나가도록 하자. '근대의 초극'에 관한 논의의 일차적 문헌은 물론 '근대의 초극' 좌담회이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일본어 문고판은 신주쿠(新宿)의 키노쿠니야(紀伊國屋) 서점에서 샀던 것인데, 이 중에서 좌담회 내용 부분은 예전에 『다시 읽는 역사문학』에 번역·수록된 바 있고 내가 주로 읽은 것도 바로 이 번역이었지만, 이 번역본은 현재 천인공노하게도(!) 절판 상태이다. 가까운 국/공/시립 도서관을 협박차 방문하자.





▷ 『 近代の超克 』, 富山房百科文庫, 2002[8刷].
▷ 한국문학연구회 엮음, 『 다시 읽는 역사문학 』, 평민사, 1995.

12) 오히려 내가 생각할 때 고야스의 논의가 가장 빛나는 부분은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이다: "말하자면 마루야마는 '초극(넘어설 것)'을 말하고 있던 근대, 그것을 곧바로 옹호하거나 집착한 것은 아니었다. 초극이 주장된 근대 그 자체를 따져 묻지 않고서, 마루야마 같은 학자들이 품었던 강한 파시즘에 대한 위기의식 속에서, 이른바 저항의 언설이 옹호하는 근대 개념이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파시즘에 대한 저항의식을 가지고, 어떤 근대 이념이 옹호되고, 그리고 그 근대가 미확립된 국가 사회의 구조적 병리를 드러내서, 비판하는 근대에 대한 새로운 담론이 성립하는 것이다."(『일본근대사상비판』, 221쪽) 왜냐하면 이 문장은 마루야마 [정치]사상사의 본령을 정확히 짚어 정곡을 찌르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고야스의 이러한 분석은 우리가 마루야마의 어떤 저작들 사이에서 읽어낼 수 있는 일견 '표면적인' 표리 혹은 '모순'을 성공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이다. 곧 『일본정치사상사연구』에서 소라이가쿠를 통해 일본[내]적인 근대 담론의 뿌리를 탐색했던 마루야마와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에서 일종의 사회심리학적 분석을 통해 일본 근대의 취약성을 폭로했던 마루야마 사이의 '어떤' 간극이 사실은 절대로 '간극'이 아니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 丸山眞男, 『現代政治の思想と行動』, 未來社, 2003[增補版 156刷].
▷ 마루야마 마사오,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김석근 옮김), 한길사, 1997.


13) 마루야마 마사오의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는 이른바 전후 일본 지성계에 획기적인 획을 그은 논문으로 평가된다. 물론 고야스의 마루야마 비판의 한 꼭지가 이 논문의 등장 이후 일본의 '자가분석'은 마루야마를 따라 일종의 '병리 분석'이 되고 말았다는 점이지만, 언제 읽어도 그 분석의 날카로움에는 감동을 받게 되는 논문이다. 일독을 권한다. 이 논문은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에 수록되어 있다(이 책 역시 김석근이 옮겼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일본판[증보판]은 긴자(銀座)의 유서 깊은 마루젠(丸善) 서점에서 2003년에 구입한 것인데, 그때 이미 증보판으로도 156쇄였고 증보판이 나온 것만도 이미 1964년이었으니, 지금은 몇 쇄까지 나왔을지 대강 상상과 계산을 해보시라. 그 정도로 이 책은 일본내에서 스테디셀러라고 할 수 있는 책이다. 마루야마는 나중에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에서 갈파했던 '주체의식의 부족'이라는 일본적 심리 구조를 확대·일반화하여 '무책임'의 구조라는 개념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러한 논의를 포함하여 마루야마의 '개념화' 작업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책 중의 하나가 바로 『일본의 사상』이다(이 책도 김석근 옮김, 하하). 이 책 역시 일독을 강권한다('강권'하는 이유는, 나의 모든 다른 '이유'들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개인적인 것인데, 내가 이 책을 읽고 눈물을 왈칵 쏟았다는 것이 그 이유, 하지만 왜 울었는가, 그것은 말하지 않으련다).




▷ 丸山眞男, 『日本の思想』, 岩波書店, 2005[82刷].
▷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의 사상』(김석근 옮김), 한길사, 1998.


14) 오히려 고야스의 마루야마 비판과 관련하여 내가 좀 더 도전적으로 묻고 싶은 물음은 다음과 같다: 그렇다면 마루야마가 '결여'하고 있던 시각은 무엇인가? 파시즘 자체가 '근대적 이성'의 진리라는/였다는 것, 곧 체계의 진리는 그 과잉 속에서 드러나고 '실현'되는 것이라는, 강박적일 만큼이나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 저 기이하게도 익숙한 명제에 기반하는 그 어떤 시각이 아닐까? 고야스의 지적처럼, 마루야마에게 있어서는 아직 일본에 '합리적' 근대란 도래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또한 앞으로 도래해야 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러나 이러한 '이성'과 '근대'와 '과잉'ㅡ혹은 그에 덧붙여 '나치스'ㅡ에 대한 보다 진전된 논의, 곧 단순한 '과잉'과 '진리'의 담론에 머무르지 않는 보다 진전된 논의는 지젝의 책 『까다로운 주체(The Ticklish Subject)』 1장의 하이데거에 관한 논의에서 찾고 싶다. 하지만 이는 후일에 따로 장문으로 논의할 성질의 문제이다.





▷ 마루야마 마사오 外, 『 사상사의 방법과 대상 』(고재석 옮김), 소화, 1997.


15) 사상사란 무엇인가, 결국 우리는 다시 이 가장 기본적인 정의(definition)의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언제나 다시 반복하게 되는, 하지만 매번 다르게 반복하고 발음하게 되는, 이 질문은 내게는 그런 종류의 '강박적' 질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을 스스로 던지기에 앞서, 마루야마의 아주 친절하면서도 짤막한 강연문 「사상사의 사유 방식에 대하여」의 일독을 권한다(이 글은 위의 책에 첫 글로 수록되어 있다). 개인적인 독서 경험에서 하는 말이지만, 아마도 마루야마 자신의 글 중에서 사상사의 방법론에 관해 이만큼 집약적이고도 독립적인 글은 잘 찾아보기가 힘들 것이다. 10년만에 이 책을 다시 꺼내 읽어보면서 들었던 몇 가지 생각들과 접점들,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개인적인 물음들은 다음과 같다:





넓은 의미에서의 '사상사'라는 범주를 놓고 볼 때, 푸코가 그의 생애 후반기에 행했던 이론적 작업들과 그 결과물(혹은 과정물?)인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강연들ㅡ이 작업들은 푸코 사후에 갈리마르 출판사와 쇠이유 출판사의 공동 편집을 통해 강의록으로 출간되게 되는데ㅡ, 곧 이른바 '사유 체계들의 역사(Histoire des systèmes de pensée)'는 어떤 이론적이고 역사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는가? 또한 우리에게는 딜타이(Dilthey)의 이른바 '정신사(Geistesgeschichte)'라고 하는 개념과 방법론에 대한 새로운 검토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마루야마가 일본적 심리 구조에 있어서 '주체의식의 부재'를 말하고 '책임성의 부재'를 말할 때, 이는 주체의 상실 또는 결여라는 현대적 주제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 것일까(어떻게 보면 한쪽으로는, 롤랑 바르트가 『기호의 제국(L'empire des signes)』에서 그 '기호들의 제국'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무대로 일본을 '상정'한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괄호를 열어[닫아]젖힌 김에 여담 한 자락 풀어놓자면, 앙리 미쇼가 만들어놓은 땅 '가라바뉴(Garabagne)'도 몰라서 역자 주석의 지면을 변명으로만 가득 채웠던 『기호의 제국』 번역본의 절판은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해도, 적어도 이땅에서 '근대의 초극' 좌담회 번역본은 어떤 형태로든 다시 출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16) 고야스의 일국민속학과 '지나학'의 역사적 지위에 관한 논의를 읽으면서 드는 의문이 하나 더 있었다. 이 시대, 이른바 '세계 속'의 '한국학'의 자리와 위치라는 담론에 관한 의문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오래된 문법, 오래된 노래는 가끔씩, 아니 자주, 다음과 같은 논리의 전개를 보여준다: '서구에서는 오래 전부터 일본학이 있어 왔다', '일본에서도 오래 전부터 지나학이 있어 왔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한국학은?', '세계 속의 한국학의 확립과 확대는 국가적 사안이며 국력의 잣대이다' 등등. 이러한 지극히 순진한 논리의 전개ㅡ사실은 끔찍하리만치 근대적이고 국민국가적이며 심지어 제국적이기까지 한 요설의 전개ㅡ앞에서 우리는, 그러니까 '한민족'이라고 하는 눈물 나는 이름으로, 그러니까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자랑스러운 이름으로, 울어야 하나 웃어야 하나. 나는 이것이 정말 궁금하다,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다, 너무 궁금해서 웃지도 울지도 못할 지경이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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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07-06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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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 무네요시 다시읽기





야나기 무네요시 다시읽기


여러 해 만에 야나기 무네요시 님 책을 다시 읽는다. 이번에는 《조선을 생각한다》(학고재,1996)를 다시 읽기로 한다. 야나기 무네요시 님 넋을 가장 잘 간추렸다고 하는 책이지만, 정작 이 책은 출판사에서 더 찍지 않는다. 더 안 팔리니까 더 찍기 어려울 테지.

지난 2007년에 《야나기 무네요시의 두 얼굴》(지식산업사,2007)이라는 책이 나온 적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사람을 찬찬히 읽으려 하지 않고 ‘죽은 자료’를 들추어 내는 한편 ‘집안 발자국’을 살피기까지 하는 책이라고 한다. 나로서는 이런 책은 굳이 읽고프지 않다. 내가 옳게 살아가며 옳게 바라본다면, 야나기 무네요시 님이 쓴 책을 읽으면서 얼마든지 이이 삶과 넋과 말이 거짓인지 참인지 바른지 그른지 착한지 궂은지 고운지 미운지를 깨닫는다. 나 스스로 옳게 살아가지 않거나 옳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따끔하거나 찬찬하다 싶은 비평이든 논설이든 비판을 읽는달지라도 제대로 삭이거나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리가 읽을 글이란 ‘어느 한 사람이 온마음을 쏟아 내놓은 첫마음’ 담은 글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한 사람이 쓴 모든 글을 두루 읽을 수 있는 가운데 《야나기 무네요시의 두 얼굴》 같은 책을 함께 읽을 수 있다면 더 널리 헤아리거나 돌아볼 수 있기도 하겠지. 그러나, 정작 《조선을 생각한다》라든지 《공예문화》라든지 《다도와 일본의 미》 같은 책을 찾아볼 수 없다면 우리로서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살피며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아쉽다면 《조선을 생각한다》는 더 찾아 읽을 수 없으나 《다도와 일본의 미》(1996)는 아직 찾아 읽을 수 있다. 《미의 법문》(2005)이나 《수집 이야기》(2008)도 찾아 읽을 수 있다. 《조선과 그 예술》(2006)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나온 책도 하나 있다. 2006년에 신구문화사에서 다시 찍은 《조선과 그 예술》이 앞으로 언제까지 새책방 책시렁에 자리잡을 수 있을까 모르겠는데, 우리 삶과 문화와 발자취를 곰곰이 되새기고자 마음쓰는 이라면 헌책방마실을 꾸준히 하면서 야나기 무네요시 님 예전 책이든 다른 좋은 책이든 넉넉히 찾아서 읽으리라 본다. 내가 읽을 책은 ‘산 야나기’이지 ‘죽은 야나기’가 아니니까.

《조선을 생각한다》는 2000년에 읽었으니 열 해 만에 다시 펼친다. 열 해 뒤에 책을 다시 펼치니 가슴으로 새롭게 와닿는 대목이 있다. 아니, 열 해에 걸쳐 내 삶은 굵든 짧든 구비구비 헤치며 흘렀으니, 이만큼 새롭게 볼 눈길을 길렀다 할 만하리라. 이를테면, “조선에 대해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사상이 조금도 현명하지 않고 깊이도 없고 또한 따뜻함도 없다는 것을 알고(14쪽)” 같은 대목을 새롭게 읽는다. 나로서는 이 글월에서 “따뜻함도 없다”라는 대목이 눈에 걸린다. 잇달아, “이웃과의 사귐은 오직 사랑이 맺어 주는 것이다. 군정이나 압박이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다고 누가 생각할 수 있겠는가(15쪽)”를 읽으며 가만히 되짚는다. 참말 사랑 아니고 무엇을 하겠는가. 참말 따뜻함 없이 무슨 일을 하거나 무슨 글을 쓰겠는가. 따뜻한 사랑을 담아 쓰는 글이 아니라면 나부터 이런 글을 되읽기 싫다. 내가 쓴 내 글을 나부터 기쁘게 되읽을 만해야 내 글을 사람들 앞에 내놓는다. 아니, 나는 내가 쓴 글을 나 스스로 한 해 뒤이든 열 해 뒤이든 되읽으며 내 삶을 일구고 싶지, 누구한테 내보이거나 선보일 생각으로 글조각만 붙잡을 마음이 없다. 내가 쓰고픈 글은 따뜻한 사랑을 담는 글이요, 내가 읽고픈 책은 따뜻한 사랑을 담은 책이다.

“고분을 파헤쳐 옛 예술품을 모은 사람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통해 조선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 같다(15쪽)” 같은 대목을 차분히 곱씹는다. 이는 지식인을 이르는 대목이다. 지식인들은 수많은 책을 읽어 지식을 쌓지만, 이 지식을 어떻게 펼쳐야 하는 줄을 헤아리지 않기 일쑤이다. 수많은 논문이 있고 또다른 책이 쏟아지지만, 정작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여느 사람들 수수한 삶에는 눈길을 안 두기 일쑤이다. 가난한 사람이나 아픈 사람을 사진으로 담는다는 다큐멘터리 사진쟁이는 가난한 사람이나 아픈 사람들하고 어떻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나. 몸으로 부대끼며 함께 살아가는 지식인은 얼마나 될까. 환경운동을 말하면서 내 몸 깊이, 아니 내 삶으로 환경사랑 자연사랑을 잇는 일꾼은 얼마나 있다 할 만한가. 지식과 구호와 논문과 논설로 4대강사업하고 다부지게 맞선다 하는 분들은, 당신 삶을 얼마나 ‘4대강사업을 몰아낼 만한 눈높이’로 가꾼다 할는지 궁금하다. 목소리만 내어서는 아무 일을 하지 못한다. 목소리는 내지 않더라도 몸으로 살아내고 마음으로 삭일 수 있어야 한다. 농사짓는 사람들 마음이 되어야 하고, 아이한테 젖을 물리는 어머니 마음이 되어야 하며, 아이를 품에 안고 살가이 보듬는 어버이 마음이 되어야 한다.

“승리하는 것은 그들의 아름다움이지 우리의 칼이 아니다(17쪽)”나 “칼의 힘은 결코 현명한 힘을 낳지 않는다(18쪽)” 같은 대목은 잘 읽어야 한다. 뭐랄까, 제대로 읽어야지. 야나기 무네요시 님은 일본 군벌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일만 놓고 슬퍼 하거나 아파 하지 않는다. 불쌍한 사람은 식민지 조선사람뿐 아니라 총칼을 앞세운 일본 군인과 권력자이기까지 하다. 아니, 식민지 조선사람보다 총칼을 앞세운 일본 군인과 권력자가 훨씬 불쌍하다. 얼마나 덧없고 부질없으며 값없는 삶을 보내는 군인과 권력자인가. “사람들은 일본의 사상을 심으려고 했지만 그들의 마음을 살리려고는 하지 않았다(20쪽)”고 하듯, 일본 권력자와 한국 권력자는 일제강점기에 더 큰 잇속을 챙기려 했을 뿐이다. 이리하여 참으로 크나큰 잇속을 챙긴 두 나라 권력자이다. 일본 권력자만 잇속을 챙기지 않는다. 한국에도 똑같은 권력자가 있다. 그런데, 이런 권력자가 있든 저런 권력자가 있든 밑바닥에서 짓눌리는 사람들은 내 삶을 버리지 않는다. 지식인들은 갖은 일본말과 중국말과 미국말을 주워섬기는데, 이 나라에서 이 나라 말과 글을 지키거나 건사한 사람이란 누구인가. 바로 여느 사람, 수수한 사람, 가난한 사람, 지식 없는 사람 들이다. 이 나라 지식인들은 아직까지도 ‘일본 제국주의 물이 짙게 밴 일본 한자말과 일본 말투’를 아무렇지 않게 쓴다. 게다가, 당신들 지식인 스스로 이런 얼토당토않은 말에 젖어들어 있는 줄 못 깨닫기까지 한다. 일제강점기를 꾸짖으면서 정작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주의자들 말투와 낱말로 이야기를 한다면, 이 얼마나 슬프고 딱한 노릇인가.

지식에 앞서 삶이고, 지식이 아닌 사랑이어야 한다고 느낀다. 다른 사람들이 이러거나 저러거나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야나기 무네요시 님 책을 꾸준히 읽고 되읽어 왔다. 내가 읽는 야나기 무네요시 님은 중국사람 노신 님하고 한동아리이다. 연변땅 김학철 님하고도 한동아리이다. 남녘땅 리영희 님이라든지 일본땅 오다 마코토 님하고도 한짝이라고 느낀다. 남녘에서는 일찍이 1976년에 송건호 님이 야나기 무네요시 님 책을 《한민족과 그 예술》(탐구당)이라는 이름으로 옮긴 적이 있다. 이때 옮긴이 말에 송건호 님은 “일본에는 아직도 옛날의 식민주의적 잔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우리를 업신여기거나 재진출을 꾀하는 층이 있음에 비추어, 그들에게 저자세로 영합하는 친일행위는 용서할 수 없다. 한편 일본에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두 나라의 참된 우호를 위해서는 실로 우리 민족을 이해하고 협조를 아끼지 않는 양심적 인사들이 많다는 점에서, 일본을 무조건 증오하고 배격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일본의 대한 태도에 있어 무엇을 경계하고 무엇을 환영하고 고맙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분명히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적었다. 일본에서 살아가며 옳은 삶 옳은 넋 옳은 말로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 있는 한편, 한국에서 살아가며 슬픈 삶 그릇된 넋 못난 말로 미움을 쏟아붓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식민지 조선 무렵 일본사람’ 야나기 무네요시가 아니라 ‘참삶을 사랑하고 아낀’ 야나기 무네요시를 읽어야 한다.

생각해 보면, “금전이나 정치로는 마음과 마음이 서로 맞닿을 수 없다(23쪽)” 같은 말을 1919년에 일본사람이 읊은 대목을 못마땅해 할는지 모르겠다. 아마, 무척 못마땅하다고 느낄 만하다. 그렇다면 이무렵 한국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읊었는가. 뒷날 시인 신동엽 님은 〈껍데기는 가라〉 같은 시를 읊기도 했는데, “향기로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든 쇠붙이는 가라”라는 대목이나 “이웃 간에 영원한 평화를 구하려고 한다면, 우리의 마음을 사랑으로 깨끗이 하고 동정으로 따뜻하게 하는 길밖에 없다(22∼23쪽)”라는 대목이나 서로 한 흐름이고 한 넋이다.

야나기 무네요시 님이 쓴 〈조선사람을 생각한다〉라는 글이 요미우리신문에 실렸다 해서 말썽거리가 많다는 사람이 많기도 한데, 1970∼80년대에 글 하나 써서 내놓으려면 조선일보나 동아일보에 싣지, 어느 신문에 실었을까. 동아투위니 무어니 하고 이야기하는데, 조선일보이든 동아일보이든 이무렵에 어떤 글투로 어떤 이야기를 신문에 담았는가. 더군다나 요즈음 한겨레신문 기사를 돌아보건대, 나로서는 한겨레신문이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다. 2200년이나 2500년쯤에 살아갈 뒷사람들한테는 한겨레신문이 진보 목소리를 지켜 주는 매체라 여길는지 모르나, 2010년을 살아가는 내 눈썰미로는 한겨레신문은 진보 목소리를 앞세워 장사를 한다고 느낀다.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같은 매체는 보수라든지 안보라든지 경제 목소리를 내세워 장사를 한다고 여긴다. ‘진보 목소리’가 아니라 ‘진보’라 한다면, 한겨레신문에는 주식시세표나 방송편성표나 골프 기사나 재벌회사 광고 따위는 실어서는 안 된다. 더욱이 국민주 신문이라 한다면 광고 하나 없는 신문으로 나아갈 길을 찾아야지, 더 많은 몹쓸 광고를 실으며 신문사 살림을 꾸리는 일이란 얼마나 두동진 모습인가. 〈조선사람을 생각한다〉라는 글이 어느 신문이나 매체에 실렸든 하나도 돌아볼 만한 값어치가 없는 대목이다. 이 글이 어떠한 글인가를 읽어야 한다. 이 글이 무슨 뜻과 넋을 실었는가 헤아려야 한다.

삶을 읽는 책이어야지 지식을 갈무리하는 책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삶을 사랑하는 글이어야지, 지식을 우러르는 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올 3월에 읽은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유미리 산문,2000)를 엊그제 다시 끄집어 내어 읽다 보니, “진상을 폭로해 버릴까 싶기도 하지만, 진상 따윈 들을 귀가 없을 것이다(40쪽)” 같은 대목이 있다. 피식 웃음이 나면서 서글퍼 눈물이 난다. 왜 우리한테는 들을 귀가 없을까. 왜 우리한테는 읽는 눈이 없을까. 왜 우리한테는 아로새기는 가슴이 없을까. 왜 우리한테는 부둥켜안는 몸이 없을까. 유미리 님은 거듭 이야기한다. “여성은 어디서든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눈썹, 복사뼈, 엉덩이 사이에서도.” 하고.

그래, 야나기 무네요시 님, ‘유종열’ 님은 어머니 같은 눈길과 손길로 글을 썼고 사람을 사귀었다. 어떤 이들은 야나기 무네요시 님을 정치나 군사나 종교나 문화 따위에 써먹으려고 휘두르기도 했겠지. 어머니한테서 돈을 울궈낸다든지 시골집 논밭을 팔아 대학교를 다닌다든지 하는 딸아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머니는 제 뼈와 살과 피를 아이한테 내어주는데다가 젖까지 먹인다. 나중에 무럭무럭 자라도록 밥을 차리고 빨래를 하며 옷을 입힌다. 잘 자라며 자장노래까지 부른다.

사람들이 어머니 넋을 읽거나 어머니 사랑을 깨닫거나 어머니 슬기를 알아챈다면, 야나기 무네요시 님을 새로우면서 옳게 삭일 수 있으리라 믿어 본다. 믿어 보련다. 믿고 싶다. 한 해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12월을 맞이하면서 아름다운 삶과 사람과 사랑을 헤아리고 싶었는데, 자꾸만 슬프며 아픈 삶과 사람과 사랑만 되뇌고 마는구나. (4343.12.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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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0-12-01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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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

1. 주말 일터일이 비로 취소되어 다행!스럽게 일찍 *전으로 향하다. 꼼지락거리며 가벼운 이책을 보다. 풍경학 관련하여 이름은 들었고, 도서관에서 지나치면서 아직 아니다싶어 책을 들지 않았는데 이렇게 조우하게 된다. 그래서 관련책들을 찾아보았더니 풍경학에 관한 것은 없고 접힌 글처럼 주루룩 달려나온다. 비판적인 면을 다룬 [..두얼굴]의 소개글이 있나했더니, 백지상태다.


2.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가면, 학생들이 숙제하느라 바빠 정작 그림이나 전시물에는 관심이 없다. 소개글을 먼저 읽었으니 그 전시물에 갇혀 별반 새로운 느낌이 솟아나지 않는다. 나도 그 학생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고, 근자에 들어서나 그것이 오히려 느끼는데 방해가 되어 순서를 바꾸었을 뿐이다. 그러고 나니 문득 그리워지는 전시물들이 마음에 깃든다. 그래서 발길이 슬슬 그리로 향한다. 지금도 마음이 그곳에 향하는 전시장이 몇몇 곳이 생겼다. 어쩌면 책한권읽는 것보다 강열한 느낌을 받는 경우도 종종있다.

3. 민예운동과 두얼굴에 대한 지적은 다음으로 넘기기로 한다. 우리의 일그러진 근대와 지식인이 저어해야할 부분의 경계가 고개를 내밀기도 하는 것 같다.

4. 차창밖은 얕은 비가 내리고 밤으로 향하는 농촌의 전경은 아늑하다. 그리고 내내 책을 읽으면서 수집이란 말 대신에 사람이나 사람과 관계를 병치시켰다. 위험한 발상이긴 하지만, 사람과 사람이 대면하고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일 역시 선입견이 필요하지 않다. 관계의 끈, 너-나의 공간을 만드는 일들이 과거에 연연해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지나친 오독이지만 한번 연습해보고 읽는다고 손해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경도되지 않는다면... ... 주말 빗줄기가 짙어지고, 목련 잎도 목필도 짙어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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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9-05-16 공감 (1)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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