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27

Taek Gyu Kim | Facebook 친일

Taek Gyu Kim | Facebook:


Taek Gyu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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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을 같이 읽자
지난주 목요일, 대학원 기말 리포트를 채점하다가 중국인 여학생이 자신과 한국 문화의 인연에 관해 술회한 부분을 읽었다. 그녀가 초등학교 3학년일 때 “한국 드라마가 대량으로 중국에 수입되었다. 《대장금》, 《내 이름은 김삼순》, 《거침없이 하이킥》에 《천국의 계단》까지. 당시 중국 티브이는 마치 한국 드라마 채널 같았다. ... 한국 드라마는 주부부터 우리 엄마 같은 직장 여성에 이르기까지 각 계층에 깊이 파고들었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 관한 기본 교육을 엄마와 함께 한국 드라마를 보며 받은 셈이다. 매일 소파에서 엄마와 울며불며 서로 휴지를 건네며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말이다.” 
더 인상적인 부분은 그녀가 한국 유학을 온 후의 변화에 관한 서술이었다. “2015년 9월 3일, 베이징에서 열린 항일 전쟁 승리 70주년 열병식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은 맹하고 귀여운 모습으로 중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당시 중국과 한국의 관계는 온통 화목하기만 했다. 겨우 몇 년도 안 돼서 양국 관계가 지금 이 지경까지 악화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그랬다. 바로 그 이듬해인 2016년 가을, 나는 베이징의 어느 호텔 로비에서 사장 스타일의 낯선 남자에게 “길거리에 나가봐라. 우리가 현대 자동차를 저렇게 많이 사서 몰고 다니는데 너희 한국이 사드를 배치해?”라고 욕을 먹었다. 그 후로 내가 관여하던 한중 출판 교류는 2년 넘게 단절되었다. 작년부터 조금씩 회복되고 있기는 하지만 과거의 좋았던 시절로 되돌아가기는 다소 힘들 것 같다.
같은 날 오후에는 새로 독서 모임을 만들기 위한 예비 모임에 갔다가 젊은 친구들을 만났다. 그중 웹소설 업체에 다니는 K는 본래 일본소설 편집자였다. 2년 전 여름, 갑자기 나를 찾아와 “일본 수출규제 강화 전후로 일본 라이트노벨 매출이 절반 밑으로 떨어졌어요. 아무래도 회사에서 해고당할 것 같습니다.”라고 고민을 토로했는데, 다행히 요즘 인기 상승 중인 중국 웹소설 쪽으로 업무를 확장해 간신히 수명 연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학 전문 출판사에서 중국어 교재를 편집하는 S는 위기의 한가운데 있었다. “일본어 교재도 판매가 반 토막이 났는데 중국어 교재는 아예 4분의 1토막이 났어요. 이러다가는 정말 회사에서 쫓겨나겠어요!” 어쩔 수 없이 어학서 이외의 일반서로 눈을 돌려 한창 기획 중이라고 했다. 사실 내 본업인 중국 문학 번역도 판매가 부진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책이 안 팔리는 것보다 나를 더 속상하게 하는 것은 우리 독자들이 내용과는 무관하게 ‘중국 것’이라는 선입견만으로 중국 문학을 외면하는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날 나와 그 젊은 친구들을 비롯한 5명은 앞으로 한, 중, 일의 현대사와 문화 현상에 관해 책, 드라마, 영화를 보고 토론하는 모임을 운영하기로 했다. 그들은 대부분 중국어와 일본어를 다 구사할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문화콘텐츠를 오래 즐겨와서 내가 배울 게 많을 듯했다. “선생님은 왜 이런 모임을 꾸리려고 하세요?”라고 누가 물었다. “저는 오랫동안 한중일 삼국의 역사·문화를 비교하고 아우르는 시각을 갖고 싶었어요. 지금 세 나라는 반중, 반한, 반일의 조류가 어느 때보다 기승을 부리지만 사실 깊이 들어가 보면 한국의 드라마, 영화, 음악과 중국의 웹소설, 웹툰 그리고 일본의 애니메이션이 서로 깊숙이 침투해 있잖아요. 게다가 고대의 상호 문화 교류와 근대의 동시적인 서양 수용을 돌이켜보면 이웃 국가로서 수많은 접점이 있죠. 한중일의 정치·외교 관계와 민족 감정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르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삼국을 하나의 역사·문화 단위로 삼아 이해하려는 노력은 계속 있어야 해요.”라고 나는 답했다.
우선 취합한 도서 목록을 보니 조너선 스펜서, 프랑크 디쾨터의 중국사 시리즈와 강상중, 가토 요코 등의 일본사 논저처럼 무거운 인문서들이 많았다. 역시 나도 구세대여서 책을 매개로 지식을 흡수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다. “요즘 중국 드라마와 일본 애니메이션은 어떤가요? 볼 만한가요?”라고 묻자, 곧장 두 젊은 친구에게서 “요즘 중국 드라마, 장난 아니에요. 예전과는 달라요.”, “일본 애니메이션은 여전히 문제작들을 배출하고 있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앞으로 그들에게 얹혀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


Taek Gyu Kim
4 December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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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뒷목을 삐었다고 뭔가를 뒤지더니 동그란 파스를 찾아 목에 붙이는 게 아닌가! 생전 처음 봐서 물었다.
"그게 뭐야? 그게 뭐야?"
"응, 일본 동전 파스라는 건데 어느 특정 부위가 아플 때 붙이면 효과가 아주 강력해."

자동으로 어떤 말이 입에서 나왔다.
"역시 일제야!"

역시 자동으로 아내가 핀잔을 주었다.
"니가 그 말 할 줄 알았다, 이 친일파."
"....."
*사진은 로이히츠보코 동전 파스


Taek Gyu Kim
25 September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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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과 함께 한국 문단의 최대 관심사는 친일 문학 행위에 대한 비판과 그 청산 문제였다. 친일파로 지목된 문인들은 어떤 형식으로든 이 문제에 대한 비판을 거쳐야만 했다. 우선 이광수는 일제 시대에 일본의 황민화 정책을 앞장서서 지지했다. 스스로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의 전쟁 승리를 기원하는 많은 글을 썼고 학병 권유 연설을 하기도 했다.  해방 직후 그는 “과거 칠팔 년 걸어온 내 길이 그 동기는 어찌 갔든지 민족 정기로 보아서 나는 정녕 대도를 걸은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조선 신궁에 가서 절을 하고, 가야마 미쓰로로 이름을 고친 날, 나는 벌써 훼절한 사람이었다. 전쟁 중에 내가 천황을 부르고 내선일체를 부른 것은 일시 조선 민족에게 내릴 듯한 禍端을 조금이라도 돌리자 한 것이지마는, 그러한 목적으로 살아 있어 움직인 것이지마는, 이제 민족이 일본의 羈絆을 벗은 이상 나는 더 말할 필요도 또 말할 자격도 없는 것이다. 가장 깨끗하자면 해방의 기별을 듣는 순간에 내가 죽어버리는 것이지마는 그것을 못한 나의 갈 길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라고 고백했다.


Taek Gyu Kim
3 September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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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야와 아침 밥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아빠, 나 요즘 유시민의 한국현대사 읽는데 이승만은 어떤 사람이야?"
헉, 올 것이 왔구나. 
"이승만은 국부라고 불렸잖아. 나라의 아버지. 한 나라의 대통령이 국부라고 불리는 게 옳다고 생각해?"
"모르겠어."
"난 우리 현대사의 지도층이 권위주의적이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던 것 같아. 자기가 옳고, 자기가 없으면 안 되며, 자기가 대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도자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겠어?"
"그런데 이승만은 친일파 싫어하지 않았어?"
으악, 너무 깊이 들어가잖아.
"이승만이 친일파를 싫어했든 안 싫어했든 이승만은 친일파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어. 1945년 해방 이후 이승만은 미군정과 손잡고 정권을 구성했잖아. 사실은 미군정이 국가 복원을 주도했지만. 미군정은 친일파 청산 같은 민족적 문제보다는 어떻게든 효율적이고 안정적으로 우리 사회를 관리하는 데 더 관심이 많았어. 어쨌든 걔들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잖아."
"응."
"그런데 해방 이후에 미군정이 손쉽게 활용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일본에 협력한 관리들과 지식인들이었어. 그래서 그들의 친일 경력을 단죄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등용해 국가 경영에 써먹었던 거야."
"응."
"그 과정에서 미군정에 협력했던 이승만도 자연히 친일파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거고."
소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또 물었다. 
"그러면 남산에 이승만 동상을 세운 건 어떻게 생각해?"
아이고, 골치 아파라.
"우리 현대사는 독재로 점철되어 왔잖아. 역시 친일 경력의 관료, 지식인들이 계속 독재 정권을 떠받쳤고. 그 바람에 제대로 역사가 씌어지지도, 가르쳐지지도 못했어. 그러다가 80년대 말부터 민주화와 역사 바로보기 작업이 시작되면서 다행스럽게 객관적인 역사 교육이 이뤄졌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과 독재에 협력한 사람들과 그들의 자손이 옳게 평가되고 청산된 것은 아니야. 숨죽이고 있었다고나 할까. 그 사람들이 계속 우리 사회의 기득권자로 존재하면서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 들어와 역사적 자존감까지 탈취하려고 역사를 고쳐 쓰려고 하는 거야. 이승만 동상도 그 일환이고. 너도 알다시피 박근혜는 친일 부역 독재자의 딸이잖아."
"교학사 교과서도 그런 거야?"
"응. 교육부도 결국 친일과 독재의 사관에 동조하는 입장에 선 거지"
"교육부하고 교학사 교과서랑 관련이 있어?"
"교육부의 지원이 없었으면 교학사 교과서는 만들어지지도 못했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야?"
"글쎄. 무엇보다도 이명박, 박근혜를 뽑은 우리들한테 책임이 있지 않을까?"
"유시민도 그랬어. 한국 현대사의 각 단계마다 우리 국민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수준에 따라 지도자를 뽑았었대."
"......"
아주아주 보람 있고 머리 아픈 아침식사였다.


Taek Gyu Kim
27 November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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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리와 박경리의 인연
친일 문학가 이광수가 숱한 후학들을 <조선문단>을 통해 등단시켰던 것이 내게 의외였던 것처럼 해방 후 보수문단의 대표자였던 김동리가 박경리의 문단 진출을 이끌었다는 사실도 내게 충격을 주었다. 
"한국전쟁 중 남편을 잃고 세 살 아들마저 병으로 잃은 '전쟁 과부' 박경리는 김동리의 부인이 진주여고 선배여서 자신이 써둔 시 원고를 김동리에게 보일 기회가 생긴다. 그 원고를 보고 한동안 반응이 없던 김동리는 얼마 뒤 작품을 갖고 '문예살롱'으로 나오라는 전갈을 보낸다. 낯가림이 심했던 박경리는 친구를 앞세운 채 문예살롱에 드나들며 김동리에게 계속 습작품을 보였는데 김동리는 그녀에게 시 대신 소설을 써보라고 권한다. 이미 일본어로 소설을 써본 적이 있던 박경리는 곧 소설 습작으로 방향을 튼다. 그러던 중 문예살롱에서 누가 그녀의 얼굴을 스케치해 주위 사람들에게 돌리는 일이 벌어진다. 이 일로 그녀는 모욕감에 떨며 다시는 문예살롱에 나가지 않는다. 김동리에게 넘긴 습작 원고 뭉치도 친구를 통해 돌려받는다. 그런데 어느 날 박경리는 김동리의 큰아들로부터 <현대문학>에 작품이 추천되었으니 원고료를 받아가라는 얘기를 듣는다. 박경리에게 습작품을 돌려줄 때 빼놓은 작품을 김동리가 <현대문학>에 추천한 것이다. 이로써 박경리의 단편 <계산>이 <현대문학> 1955년 8월호에 발표된다. 첫 추천을 받고 1년이 지난 뒤 <흑흑백백>으로 추천이 완료되어 박경리는 비로소 한국문단에 얼굴을 내민다."


Taek Gyu Kim
5 July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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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직후 주둔한 미군이 점령군이고 초대 정부가 미군정과 친일 인사들의 합작품이라는 이재명의 발언에 오세훈, 이준석, 원희룡, 윤석열이 줄줄이 개떼처럼 달라붙어 별 소리를 다 한다. 국민을 갈라치지 말라느니, 우방을 점령군 취급한다느니...
난 대학 때 이재명의 말과 동일한 역사를 배웠다. 수업 시간에도, 학회에서도. 저 보수 인사들은 나와 전혀 다른 데서 역사를 배웠나?
1982년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에 대한 관점을 물어보면 더 재미있겠군.


Taek Gyu Kim
4 November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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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레이>, <적빈> 등 1930년대 일련의 저항소설을 집필한 백신애(1908-1939)는 대구에서 친일 거상 백내유의 딸로 태어나 반일 지식인인 오빠 백기호의 영향을 받았다. 사범학교를 나와 1926년 19세에 경북 최초의 여교사가 되었으며 조선여성동우회 회원인 것이 발각돼 학교에서 축출된 후에는 서울에 올라가 여성운동을 벌였다. 같은 해 2월 25일 천도교회관에서 경성여성청년동맹 2주년 기념식에 단독으로 집회 허가를 받아내고 혼자서 대회를 치르는 강단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집안의 강요로 은행원 이근채와 결혼을 했지만 오빠를 찾아 상해 여행을 간 뒤 일방적으로 이혼을 요구, 집사를 시켜 이혼 수속을 밟는다. 이 정도면 대구경북 지역 페미니스트의 원조가 아닐까. 진냥 (Heejin Jagn)


Taek Gyu Kim
7 November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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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오, <헤밍웨이 읽기>-23
중국의 감정 혁명을 이끈 선구자
‘민국’의 역사, 특히 전기의 역사에는 한 가지 눈에 띄는 주제가 있는데, 중국의 철학자 리쩌허우(李澤厚)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구국(救國)과 계몽의 이중 변주’라고 불린다. 이것은 두 가지 강력한 동기 사이의 밀고 당김을 뜻한다. 한쪽은 구국이 먼저라고 주장했으며 다른 한쪽은 계몽이 더 중요하고 근본적이라고 강조했다. 양쪽의 견해는 모두 거대한 열정을 촉발했다. 
처음에는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과 맞닥뜨리고 그다음에는 일본이 한쪽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 탓에 중국은 여러 차례 망국의 벼랑 끝에 섰다. 그랬으니 당연히 구국과 생존을 도모하는 부르짖음이 생겨났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런 분석을 한 이들이 있었다. 중국이 그렇게 깊은 위기에 빠진 것은 국민이 너무 무지하고 어리석기 때문이므로 반드시 그들에게 현대적인 지식을 주입해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라를 구할 수 없고 설령 이번에 구하더라도 다음에 다시 똑같이 능멸과 위협을 당한다는 것이었다.
‘계몽파’는 적극적으로 백화문(구어문) 사용을 제창하여 누구나 쉽게 글자를 알아보고 지식을 흡수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것은 ‘구국파’가 보기에는 긴급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 국민이 어리석은 게 문제라 해도 국가가 먼저 망해버리면 어떻게 계몽을 한단 말인가? 구국파는 불가피하게 강한 엘리트적 태도를 갖고 있었으며 국민 개조와 사회 개혁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우선 안목과 능력을 지닌 엘리트들이 정확한 방향을 제시하고 국민들을 이끌거나 심지어 따라오도록 강요하여, 집단의 통일된 행위로 먼저 나라부터 부강하게 하자는 생각이었다.
사실은 계몽도 구국의 수단이기는 했지만 사안의 선후와 경중에 대한 판단 차이로 인해 계몽파와 구국파 사이에는 고도의 긴장 관계가 형성되었고 수십 년에 걸쳐 논쟁과 대립이 이어졌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은 어떤 의미에서는 구국파의 승리를 상징했다. 여전히 대다수가 문맹인 농민들을 구성원으로 삼은 그 새로운 국가의 출현은 새로운 희망을 가져왔다.
하지만 단순히 계몽과 구국의 대립과 힘 겨루기로 이 기간의 역사를 정리한다면 너무나 많은 것들을 빠뜨리게 된다. 예를 들어 쉬즈모(徐志摩[1897~1931], 중국 현대시의 개척자로 꼽히는 낭만주의 시인. 미국과 영국에 유학했고 귀국 후 각 대학에서 재직하며 많은 작품을 썼다. 인도 시인 타고르를 중국에 소개하는 데 공헌하기도 했으며 1928년에는 중국 현대시의 중요한 유파인 신월파[新月派]를 조직했다)도 빠뜨릴 수밖에 없다. 쉬즈모는 계몽에도 구국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저우쭤런(周作人[1885~1967], 루쉰의 동생으로 일본에서 영문학과 그리스어 등을 배웠고 루쉰과 공동으로 유럽 근대문학을 번역, 출판했다. 1924년 루쉰 등과 함께 유명한 수필 유파 ‘어사사’[語絲社]를 결성해 이후 빼어난 많은 수필을 발표했다. 하지만 중일전쟁 때 친일 괴뢰 정부인 왕징웨이[汪精衛]정권에 부역하여 전후에 전범으로 투옥됐으며 출옥 후에는 베이징에서 계속 번역 작업을 했다) 같은 사람도 집어넣을 자리가 없다. 그가 쓴 소품문(小品文, 일상생활에서 보고 느낀 것을 자유로운 필치로 간단히 적은 수필)들은 구국에도 계몽에도 속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남들이 전전긍긍하며 구국과 계몽을 염려할 때 그저 자연을 감상하며 생활의 정취를 추구했는데도 뜻밖에 당시 큰 명성을 누렸다. 이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며 또 여기에는 어떤 이치가 숨어 있는 걸까?
나중에 정리되어 나온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 그 시대 사람들의 감수성을 복원해야만 우리는 비로소 이 문제에 답할 수 있다. 그 시대 사람들이 보기에 쉬즈모와 바진 사이에는 그렇게 명확한 경계선이 없었다. 후스(胡適[1891~1962] 중국의 학자, 교육가로 미국 유학 시절 잡지를 통해 백화문 운동을 제창해 문학혁명의 계기를 만들었고 1917년 귀국 후에는 베이징대학 교수로 취임하여 과학과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계몽운동의 중심 인물로 활약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직전인 1948년 타이완으로 건너가 중앙연구원 원장 등 요직을 역임했다)와 천두슈(陳獨秀[1879~1942] 일본과 프랑스에서 유학한 뒤 1916년 상하이에서 잡지 《신청년》을 창간해 5·4 신문화운동의 사상적 근거를 마련했다. 그리고 1921년 중국 공산당 창당을 주도했으며 코민테른의 지시 아래 중앙 총서기로서 국민당과의 합작을 이끌었지만 1927년 국공합작의 결렬로 총서기직에서 축출되었다) 사이에도 역시 명확한 경계선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혁명 세대에 속했으며 혁명의 조류 속의 선도적인 인물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쉬즈모의 글을 읽어도 량치차오(梁啓超[1873~1929], 중국 청말, 중화민국 초의 계몽 사상가이자 문학가. 어려서 전통 교육을 받았지만 서양 서적을 보고 생각이 크게 바뀌어 캉유웨이[康有爲]와 함께 여러 나라 서적의 번역, 신문과 잡지의 발행, 정치 학교 개설 등 혁신 운동을 펼쳤으며 신사상을 소개하고 구사상을 배격하는 정치 논설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무술변법의 실패로 일본에 망명한 뒤에도 계속 《청의보》[淸議報], 《시무보》[時務報] 등을 통해 계몽 활동을 전개했다), 후스, 루쉰의 글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쉬즈모가 거둔 혁명의 효과는 후스에 뒤지지 않았다. 량치차오와 후스가 일맥상통하여 추진한 것이 지식의 혁명이었다면 쉬즈모는 감정 혁명을 추진한 선도자였다. 계몽의 논리는 중국을 구하려면 먼저 중국을 개조하여 서양과 같은 현대 국가로 탈바꿈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중국을 개조하려면 서양의 과학기술을 배워야 했는데, 먼저 정치제도의 개혁을 수행하지 않으면 과학기술은 중국에서 뿌리내릴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먼저 국민의 의식과 국민의 지식수준을 바꾸지 않으면 정치제도 역시 효과적으로 이식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수십 년간의 실험과 추진이 이어졌는데도 한발 한발 뒤로 물러나 1919년 전후의 ‘5·4 시기’에 이르러서는 루쉰이 말한 ‘국민성’까지, 다시 말해 먼저 국민의 정신을 개조해야 하며 정신의 개혁이야말로 모든 것의 근본이자 모든 것의 기점이라는 주장까지 후퇴하고 말았다.
후스는 ‘모든 가치의 재평가’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고 ‘과학적 방법’과 ‘과학적 태도’에 관해 논의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것은 단지 지식 차원의 개혁이 아니라 정신적 차원의 개혁이었다. 쉬즈모는 후스보다 좀 더 철저했을 뿐만 아니라 좀 더 매력적이기도 했다. 그는 후스처럼 정신의 원리를 이야기하는 대신에 자신의 정신을, 매우 색다른 낭만적인 정신을 글로 나타냈다. 이것은 수많은 독자들에게 인간이 살아가는 또 다른 방식과, 강한 열정을 갖고 속박되지도, 열정 속에서 위축되지도 않는 새로운 삶을 시범으로 보여준 것과 같았다. 이런 삶은, 이런 삶에서 투영되는 낭만적인 감정은 그전까지 중국에는 없었던 것이며 심지어 중국의 전통 사회에서는 독사나 맹수처럼 여겨져 어떻게든 제거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하남석 박민호 김결
End of resul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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