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신부들 “윤석열, 오염수 무단방류 두둔…바다도 끝났다”
입력2023.05.22.
조현 기자
2,670
정의구현사제단 의정부 시국미사
서울광장에서 시국미사를 하고 있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들. 사진 박승화 기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비상대책위원회는 22일 저녁 7시 경기도 의정부교구주교좌성당에서 시국미사를 연다.
사제단 비대위는 이날 시국미사에 앞서 ‘분단, 겨레의 원한’이란 성명서를 내어 “앞을 보지 못하는 자가 앞을 맡긴 수천만을 이끌고 오늘도 파멸의 진창을 향해 일로매진하고 있다. 천신만고 끝에 거둔 성장과 민주화의 결실을 남의 나라 손에 넘기고는 국익을 챙겼다고 우길 정도로 반민족적·반국가적”이라며 윤석열 정부를 비판했다.
사제단 비대위는 또 “군비확장에 아무리 돈을 쏟아 부어도 가만히 있는 교수들이 복지예산이 손톱만큼만 늘어나면 곧 나라가 망할 것처럼 악을 쓰고 난리를 부린다”며 “돈, 권력 다 가진 극소수가 기회마저 독점해서 자산과 소득의 불평등을 키우고 또 키워도, 나머지 99%를 각자도생의 살벌한 지옥으로 내몰아 노인자살, 청년자살이 세계 최고인데도 믿을 건 그래도 그들이라며 착한 사람들이 표를 몰아주고, 심지어 교종의 가르침 ‘모든 형제들’을 공부하는 자리에서조차 ‘언제부터 교회가 빨갱이였느냐?’, 따지고 대드는 목소리가 갈수록 기세등등한데 이 모든 비극과 비정상은 분단이라는 원천적 결손에서 비롯한다”고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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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서>
분단, 겨레의 원한怨恨
앞을 보지 못하는 자가 앞을 맡긴 수천만을 이끌고 오늘도 파멸의 진창을 향해 일로매진하고 있다. 살얼음판 위에서도 그는 태연하고 과감하다. “눈먼 사람이 어떻게 눈먼 사람을 인도할 수 있겠느냐? 그러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루카 6,39) 하는 탄식이 밤낮 그치지 않는다. “설마 저러다 말겠지.”라거나 “나와 무슨 상관인데….” 하는 것은 망국적 재앙을 키우는 위험천만한 방관이다. 거리의 촛불도, 골방의 기도도 좋다. 맨 앞이 아니라도 된다. 곁이라도 좋고 맨 뒤라도 괜찮다. 함께하기만 하면 된다. 예사롭지 않은 위기가 목전에 닥쳤다.
1. 바다도 끝났다
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아무리 못난 바보라도 제 식구가 마시는 우물에 누군가 침을 뱉거나 오물을 쏟으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버리는 그것이 독이 든 것이라면 말이다. 침략과 살육의 전력을 가진 일본이 뭇 생명의 고향이며 인류 공동의 우물인 바다를 영영 오염시킬 태세다. 이웃나라에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을 강요하는 일본 총리가 자국 어민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핵 폐수’ 투기를 예고했다. 덩달아 마셔도 되는 ‘처리수’라면서 방사성 오염수의 무단 방류를 두둔하는 자가 우리 가운데 있다. 골수 친일파라고는 하나 인류 전체의 생존과 직결된 범죄의 하수인이 되고 싶어 안달이니 어째야 옳은가? 삼면의 바다 어디에서도 육신과 영혼을 위한 소금을 마련하기 힘들어졌다. 바다란 낮은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세상의 모든 더러움을 꿀꺽꿀꺽 삼켜서 맑디맑은 생수로 돌려주는 겸손과 사랑의 화신. 그런데 시시각각 우리 영혼을 습격하여 정신을 더럽히는 그가 어머니의 자궁이나 다름없는 저 검푸른 시원始原마저 욕보이려고 한다.
2. 허약하고 부실한 한국 민주주의
1인당 국민소득 3만 불 이상, 인구 5천만 명 이상인 나라들을 일컫는 ‘30-50클럽’. 미국·일본·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가 여기에 해당한다. 사실상 ‘강대국’이라고 불릴 만한 나라들 중에 일곱째로 이름을 올린 나라가 있다. 대한민국이다(2019년). 어디 그뿐인가. 스웨덴의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소>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그 7개국 중에서 한국 민주주의가 1등이었다(2019년). 영국·이탈리아·독일이 우리 뒤를 이었고, 그 다음 등급으로 프랑스·미국이 뒤따랐는데 일본은 일곱 나라 중 꼴찌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변성룡魚變成龍의 어엿하고 듬직한 나라, 한국이었다니 잘 믿기지 않는다.
코로나의 습격으로 인류사회가 혼란에 빠졌을 때에도 한국은 경이로운 경제성장률을 달성했다. 시민들이 대대적으로 협조하고, 서민들이 고통을 전담해 준 덕분이었다. 그런데 바이러스 대유행이 사그라지기도 전에 미중이 패권 경쟁을 본격화하면서 세계화라는 종래의 질서에 금이 갔다. 양쪽에서 하나를 취하고 하나를 버려서 될 일이 아니었다. 하기에 따라서는 도약의 계기로 삼을 수 있었다. 고도의 직관과 용기를 가진 지도자가 필요했다. 하필 그런 시점에 어떤 기준으로든 보통 이하인 자가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 후 ‘눈 떠보니 선진국’이었다던 나라는 날이 갈수록 ‘헬조선’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4·19는 1년 만에 5·16군사반란으로 무너졌고, 5·18은 전두환의 학살과 만행으로 짓밟혔다. 6·10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으나 그 결과는 또 다른 군인의 집권이었다. 그러고 나서 2016년 촛불대항쟁이 일어났다. 기무사령부가 계엄령 포고를 설계했지만 촛불의 위세에 눌려 슬며시 감추었다. 2017년 5월 일명 ‘촛불정부’가 등장했다. 민주화 원년인 1987년 이후 20년 만에 찾아온 ‘재민주화’의 기회였다. 시민들은 ‘정권교체’가 아니라 ‘체제교체’이기를 바랐다. 더이상 타락한 기득권 집단의 노예로 살지 않기를 바랐고 새로운 나라에서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적폐청산도 삶의 근본적 개선도 없었다. 오히려 권력의 시녀였던 검찰 일당이 권력의 주체가 되면서 ‘적폐정권 시즌2’가 도래하였다. 왜 한국 민주주의는 감개무량하면서도 허무한가?
3. 체제가 된 분단
겪고 보니 ‘검찰독재’보다 ‘군사독재’가 덜 나쁘다. 군사독재는 경제 하나만큼은 책임지겠다고 했고, 정치민주화는 좀 기다려달라고 할 만큼 인간적인(?) 데가 있었다. 반면 검찰독재는 어른들이 천신만고 끝에 거둔 성장과 민주화의 결실을 남의 나라 손에 넘기고는 국익을 챙겼다고 우길 정도로 반민족적·반국가적이다. 군사독재든 검찰독재든 정전 70년, 한미동맹 70년 동안 이 땅에서 요지부동의 체제가 된 분단의 산물이다. 뚜렷이 의식하지 못했을 뿐 극단적으로 우경화한 정치 지형 속에서, 그리고 사람 잡아먹는 야수자본주의의 옹벽에 갇힌 채로 우리는 먹고 마시고 일하며 아이들을 키웠다.
그래서 대한민국에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넘쳐난다. ‘안보국가’에서 ‘발전국가’로 성장했고, 발전국가를 넘어서 ‘민주국가’로 거듭 성숙하였지만 집권자들은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정상 진로를 바라지도 용납하지도 않는다. 군비확장에 아무리 돈을 쏟아 부어도 가만히 있는 교수들이 복지예산이 손톱만큼만 늘어나면 곧 나라가 망할 것처럼 악을 쓰고 난리를 부린다. 재래시장의 가난한 상인들은 “나라를 팔아먹어도 우리는 무조건 무슨 당!” 하며 제 발등 찍는 소리를 늘어놓는다. “삼중수소도 못 걸러내고 다른 방사성 물질도 기준치 일만 사천 배”라고 하던 민족정론지 조선일보는 느닷없이 말을 바꿔 별 거 아니라고 일본 편을 든다. 미국에 천억 불을 쏟아 놓고 와서는 “튼튼한 안보, 탄탄한 경제”라는 현수막이 나부끼게 만들기만 해도 국정 지지율이 쑥쑥 올라간다. 돈, 권력 다 가진 극소수가 기회마저 독점해서 자산과 소득의 불평등을 키우고 또 키워도, 나머지 99%를 각자도생의 살벌한 지옥으로 내몰아 노인자살, 청년자살이 세계 최고인데도 믿을 건 그래도 그들이라며 착한 사람들이 표를 몰아준다. 심지어 교종의 가르침 <모든 형제들>을 공부하는 자리에서조차 “언제부터 교회가 빨갱이였느냐?”, 따지고 대드는 목소리가 갈수록 기세등등하다. 이 모든 비극과 비정상은 분단이라는 원천적 결손에서 비롯한다.
4. 꾸짖을 용기
가난한 제 동생을 의심하고 미워하고 따돌렸던 칠십 년을 다시 살아보겠다면서 미군도 모자라 왜군까지 끌어들이고, 그러려고 주권마저 팔아넘기는 고질적인 어리석음을 교회조차 꾸짖지 못한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세상에 봉사하는 사목은 또 어떤 일이 되는가? 바로 보자.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노상강도들은 흔히 반대쪽을 보면서 길을 지나쳐 가는 자들과 은밀히 동맹을 맺고 있다.”(모든 형제들, 75항)는 저 무서운 진실을.
2023년 5월 22일
분단의 선을 넘어 평화의 손을 잡는
의정부교구 주교좌성당에서
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조현 기자 cho@hani.co.kr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비상대책위원회는 22일 저녁 7시 경기도 의정부교구주교좌성당에서 시국미사를 연다.
사제단 비대위는 이날 시국미사에 앞서 ‘분단, 겨레의 원한’이란 성명서를 내어 “앞을 보지 못하는 자가 앞을 맡긴 수천만을 이끌고 오늘도 파멸의 진창을 향해 일로매진하고 있다. 천신만고 끝에 거둔 성장과 민주화의 결실을 남의 나라 손에 넘기고는 국익을 챙겼다고 우길 정도로 반민족적·반국가적”이라며 윤석열 정부를 비판했다.
사제단 비대위는 또 “군비확장에 아무리 돈을 쏟아 부어도 가만히 있는 교수들이 복지예산이 손톱만큼만 늘어나면 곧 나라가 망할 것처럼 악을 쓰고 난리를 부린다”며 “돈, 권력 다 가진 극소수가 기회마저 독점해서 자산과 소득의 불평등을 키우고 또 키워도, 나머지 99%를 각자도생의 살벌한 지옥으로 내몰아 노인자살, 청년자살이 세계 최고인데도 믿을 건 그래도 그들이라며 착한 사람들이 표를 몰아주고, 심지어 교종의 가르침 ‘모든 형제들’을 공부하는 자리에서조차 ‘언제부터 교회가 빨갱이였느냐?’, 따지고 대드는 목소리가 갈수록 기세등등한데 이 모든 비극과 비정상은 분단이라는 원천적 결손에서 비롯한다”고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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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서>
분단, 겨레의 원한怨恨
앞을 보지 못하는 자가 앞을 맡긴 수천만을 이끌고 오늘도 파멸의 진창을 향해 일로매진하고 있다. 살얼음판 위에서도 그는 태연하고 과감하다. “눈먼 사람이 어떻게 눈먼 사람을 인도할 수 있겠느냐? 그러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루카 6,39) 하는 탄식이 밤낮 그치지 않는다. “설마 저러다 말겠지.”라거나 “나와 무슨 상관인데….” 하는 것은 망국적 재앙을 키우는 위험천만한 방관이다. 거리의 촛불도, 골방의 기도도 좋다. 맨 앞이 아니라도 된다. 곁이라도 좋고 맨 뒤라도 괜찮다. 함께하기만 하면 된다. 예사롭지 않은 위기가 목전에 닥쳤다.
1. 바다도 끝났다
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아무리 못난 바보라도 제 식구가 마시는 우물에 누군가 침을 뱉거나 오물을 쏟으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버리는 그것이 독이 든 것이라면 말이다. 침략과 살육의 전력을 가진 일본이 뭇 생명의 고향이며 인류 공동의 우물인 바다를 영영 오염시킬 태세다. 이웃나라에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을 강요하는 일본 총리가 자국 어민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핵 폐수’ 투기를 예고했다. 덩달아 마셔도 되는 ‘처리수’라면서 방사성 오염수의 무단 방류를 두둔하는 자가 우리 가운데 있다. 골수 친일파라고는 하나 인류 전체의 생존과 직결된 범죄의 하수인이 되고 싶어 안달이니 어째야 옳은가? 삼면의 바다 어디에서도 육신과 영혼을 위한 소금을 마련하기 힘들어졌다. 바다란 낮은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세상의 모든 더러움을 꿀꺽꿀꺽 삼켜서 맑디맑은 생수로 돌려주는 겸손과 사랑의 화신. 그런데 시시각각 우리 영혼을 습격하여 정신을 더럽히는 그가 어머니의 자궁이나 다름없는 저 검푸른 시원始原마저 욕보이려고 한다.
2. 허약하고 부실한 한국 민주주의
1인당 국민소득 3만 불 이상, 인구 5천만 명 이상인 나라들을 일컫는 ‘30-50클럽’. 미국·일본·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가 여기에 해당한다. 사실상 ‘강대국’이라고 불릴 만한 나라들 중에 일곱째로 이름을 올린 나라가 있다. 대한민국이다(2019년). 어디 그뿐인가. 스웨덴의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소>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그 7개국 중에서 한국 민주주의가 1등이었다(2019년). 영국·이탈리아·독일이 우리 뒤를 이었고, 그 다음 등급으로 프랑스·미국이 뒤따랐는데 일본은 일곱 나라 중 꼴찌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변성룡魚變成龍의 어엿하고 듬직한 나라, 한국이었다니 잘 믿기지 않는다.
코로나의 습격으로 인류사회가 혼란에 빠졌을 때에도 한국은 경이로운 경제성장률을 달성했다. 시민들이 대대적으로 협조하고, 서민들이 고통을 전담해 준 덕분이었다. 그런데 바이러스 대유행이 사그라지기도 전에 미중이 패권 경쟁을 본격화하면서 세계화라는 종래의 질서에 금이 갔다. 양쪽에서 하나를 취하고 하나를 버려서 될 일이 아니었다. 하기에 따라서는 도약의 계기로 삼을 수 있었다. 고도의 직관과 용기를 가진 지도자가 필요했다. 하필 그런 시점에 어떤 기준으로든 보통 이하인 자가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 후 ‘눈 떠보니 선진국’이었다던 나라는 날이 갈수록 ‘헬조선’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4·19는 1년 만에 5·16군사반란으로 무너졌고, 5·18은 전두환의 학살과 만행으로 짓밟혔다. 6·10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으나 그 결과는 또 다른 군인의 집권이었다. 그러고 나서 2016년 촛불대항쟁이 일어났다. 기무사령부가 계엄령 포고를 설계했지만 촛불의 위세에 눌려 슬며시 감추었다. 2017년 5월 일명 ‘촛불정부’가 등장했다. 민주화 원년인 1987년 이후 20년 만에 찾아온 ‘재민주화’의 기회였다. 시민들은 ‘정권교체’가 아니라 ‘체제교체’이기를 바랐다. 더이상 타락한 기득권 집단의 노예로 살지 않기를 바랐고 새로운 나라에서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적폐청산도 삶의 근본적 개선도 없었다. 오히려 권력의 시녀였던 검찰 일당이 권력의 주체가 되면서 ‘적폐정권 시즌2’가 도래하였다. 왜 한국 민주주의는 감개무량하면서도 허무한가?
3. 체제가 된 분단
겪고 보니 ‘검찰독재’보다 ‘군사독재’가 덜 나쁘다. 군사독재는 경제 하나만큼은 책임지겠다고 했고, 정치민주화는 좀 기다려달라고 할 만큼 인간적인(?) 데가 있었다. 반면 검찰독재는 어른들이 천신만고 끝에 거둔 성장과 민주화의 결실을 남의 나라 손에 넘기고는 국익을 챙겼다고 우길 정도로 반민족적·반국가적이다. 군사독재든 검찰독재든 정전 70년, 한미동맹 70년 동안 이 땅에서 요지부동의 체제가 된 분단의 산물이다. 뚜렷이 의식하지 못했을 뿐 극단적으로 우경화한 정치 지형 속에서, 그리고 사람 잡아먹는 야수자본주의의 옹벽에 갇힌 채로 우리는 먹고 마시고 일하며 아이들을 키웠다.
그래서 대한민국에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넘쳐난다. ‘안보국가’에서 ‘발전국가’로 성장했고, 발전국가를 넘어서 ‘민주국가’로 거듭 성숙하였지만 집권자들은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정상 진로를 바라지도 용납하지도 않는다. 군비확장에 아무리 돈을 쏟아 부어도 가만히 있는 교수들이 복지예산이 손톱만큼만 늘어나면 곧 나라가 망할 것처럼 악을 쓰고 난리를 부린다. 재래시장의 가난한 상인들은 “나라를 팔아먹어도 우리는 무조건 무슨 당!” 하며 제 발등 찍는 소리를 늘어놓는다. “삼중수소도 못 걸러내고 다른 방사성 물질도 기준치 일만 사천 배”라고 하던 민족정론지 조선일보는 느닷없이 말을 바꿔 별 거 아니라고 일본 편을 든다. 미국에 천억 불을 쏟아 놓고 와서는 “튼튼한 안보, 탄탄한 경제”라는 현수막이 나부끼게 만들기만 해도 국정 지지율이 쑥쑥 올라간다. 돈, 권력 다 가진 극소수가 기회마저 독점해서 자산과 소득의 불평등을 키우고 또 키워도, 나머지 99%를 각자도생의 살벌한 지옥으로 내몰아 노인자살, 청년자살이 세계 최고인데도 믿을 건 그래도 그들이라며 착한 사람들이 표를 몰아준다. 심지어 교종의 가르침 <모든 형제들>을 공부하는 자리에서조차 “언제부터 교회가 빨갱이였느냐?”, 따지고 대드는 목소리가 갈수록 기세등등하다. 이 모든 비극과 비정상은 분단이라는 원천적 결손에서 비롯한다.
4. 꾸짖을 용기
가난한 제 동생을 의심하고 미워하고 따돌렸던 칠십 년을 다시 살아보겠다면서 미군도 모자라 왜군까지 끌어들이고, 그러려고 주권마저 팔아넘기는 고질적인 어리석음을 교회조차 꾸짖지 못한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세상에 봉사하는 사목은 또 어떤 일이 되는가? 바로 보자.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노상강도들은 흔히 반대쪽을 보면서 길을 지나쳐 가는 자들과 은밀히 동맹을 맺고 있다.”(모든 형제들, 75항)는 저 무서운 진실을.
2023년 5월 22일
분단의 선을 넘어 평화의 손을 잡는
의정부교구 주교좌성당에서
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조현 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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