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26

알라딘: 그레고리 헨더슨 평전- 대한민국 현대사 목격 증인의 생생한 이야기 김정기

알라딘: 그레고리 헨더슨 평전:

그레고리 헨더슨 평전 - 대한민국 현대사 목격 증인의 생생한 이야기 
김정기 (지은이)한울(한울아카데미)2023-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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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
50,000원
488쪽


책소개

한국에 대한 애정 어린 그러나 냉철한 시선. 이 책은 헨더슨의 삶과 사상을 조명하는 평전이기도 하지만 대한민국 현대사를 현장에서 목격한 증인의 생생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는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에서부터 1950년의 한국전쟁을 비롯해 1960년의 4·19 학생혁명, 이어 한국 민주주의를 역전시킨 5·16 박정희 군사쿠데타, 1979년 박정희 암살 이후 등장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저지른 12·12 쿠데타, 마지막으로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정권이 자행한 5·18 광주만행까지 198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신이 목격한 신생 대한민국이 겪은 고통을 깊은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저자는 단순한 길동무가 아니라 펠로 트래블러(fellow traveler)의 마음으로 그레고리 헨더슨의 이상, 사상, 철학을 함께 나누는 동조자로서 그의 영혼과 함께 한국과의 인연이 이끌어간 여정을 함께 했다고 말한다. 1부에서 헨더슨의 삶의 궤적과 한국 및 지은이와의 인연 그리고 한국 사회와 정치에 대한 비판과 한국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사랑을 담았고, 2부에서는 헨더슨이 본 한국 사회의 병리와 그 해법에 대해서 살펴보고 3부에서는 그의 학문, 사상, 이론, 그리고 한국을 위해 기고와 토론 증언과 고발의 실천을 그의 행적을 돌아보며 서술했다.


목차


프롤로그 ...7

제1부 그레고리 헨더슨, 그는 누구인가?
제1장 삶의 궤적 ...18
제2장 헨더슨이 맺은 한국 인연 ...63
제3장 지은이가 맺은 헨더슨과의 교유 ...89
제4장 헨더슨의 도자기 미학 ...111

제2부 한국 정치의 병리를 진단하고 처방하다
제5장 헨더슨이 만난 한국전쟁 ...150
제6장 한국 정치의 중간 지대 상실 ...161
제7장 회오리 정치와 단극자장 ...218
제8장 중간 지대의 정치 합작 ...259

제3부 헨더슨의 사상, 이론, 그리고 실천
제9장 정다산론과 조선유교론 ...324
제10장 헨더슨의 상상, 사색, 그리고 학예: 고려청자·고려불교 ...365
제11장 군사정권에 대한 레지스탕스 1: 고발자 헨더슨 ...386
제12장 군사정권에 대한 레지스탕스 II: 행동하는 지성인 헨더슨 ...426

에필로그 ...446
헨더슨 부처 연보 ...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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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34 헨더슨은 쿠데타 주동 인물인 박정희와 김종필의 공산당 전력을 캐내기 위해 쿠데타 초 이래 그가 아는 한국군 내부 인맥을 통해 정보수집 활동을 은밀히 벌였는데 이것이 박-김 그룹의 정보망에 포착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잖아도 헨더슨의 활동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던 쿠데타 세력은 헨더슨을 감시하기 시작하면서 촉수가 헨더슨과 주변을 압박했다. 이를 눈치 챈 헨더슨은 서울을 떠나려고 마음먹었다. 워싱턴 당국이 쿠데타를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게다가 쿠데타를 진압하려던 맥그루더 장군과 그린 대리 대사도 서울을 떠난 마당에 그들과 생각을 같이 했던 헨더슨이 서울에 계속 남아 있는 것이 그로서도 불편했을 것이다. _ 제1장 삶의 궤적  접기

P. 71 헨더슨은 이 때 미군이 이들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하는 처우는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신참 소위라는 낮은 계급의 지위를 아랑곳 하지 않고 공식적으로 탄원서를 냈다. 곧 이들 조선인은 군인들이 아니고 노동자들이며, 게다가 카이로 선언은 조선인들이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되고 독립되어야 한다고 되어 있지 않은가? 우리들은 일본군 포로와 한국인 노동자를 구별해 처우해야 한다는 것. 헨더슨은 이런 취지의 메모를 써 군 본부에 공식적인 탄원을 한 것이다. _ 제2장 헨더슨이 맺은 한국 인연  접기

P. 229 다시 헨더슨이 구성한 회오리 정치 모델 평가에 되돌아 가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지은이는 그의 회오리 정치 모델은 아직도 여전히 우리나라 정치를 설명해 주는 유력한 이론적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이 이론적 모델은 한국 민주주의가 중대한 국면에서 실패한 이야기의 모티프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한국 정치발전의 방향을 제시해 준다. 예컨대 현재 한국 정당의 응집력 결여는 그의 회오리 모델이 잘 설명해 준다. 또한 그것은 뛰어넘어야 할 장애물이기도 하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중간 기구의 응집력을 모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마치 허들 경기 선수가 약물을 먹고 이 장애물을 뛰어 넘을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지은이는 생각하다. _ 제7장 회오리 정치와 단극자장  접기

P. 303 헨더슨이 제안한 의회사법원은 지금의 시각으로 볼 때 일종의 변형된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쯤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48년 헌법은 회기 중 국회의 동의가 없는 한 국회의원을 체포할 수 없다는 회기 중 불체포권을 부여하고 있으며, 국회 안의 발언도 면책을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체포된 의원들의 경우처럼 회기 중 불체포권은 너무 쉽게 남용될 여지가 드러났으며, 헌병대의 조사 과정에서 국민의 대표라는 국회의원들이 가혹한 수사와 고문을 받은 것이 공연한 비밀이 된 마당에 그는 행정부의 자의적인 국회의원 체포를 막는 헌법적 장치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다. 곧 헨더슨은 국회의 행정부 견제 기능을 보장하기 위해 국회의원들의 사법처리를 관할하는 의회사법원의 설치를 주장한 것이다. 그의 아이디어는 1952년 벌어진 부산정치파동 때 국회의원들이 출근 도중 어처구니없는 국제공산당음모 혐의로 대량 체포되는 경지에 이르면 더욱 수긍이 간다. _ 제8장 중간 지대의 정치 합작  접기

P. 341 헨더슨에 감동한 재야 민주운동가 있다. 그가 동양사상가로 우뚝 선 묵점 기세춘이다. 이을호 교수가 헨더슨의 ?정다산론?에 공감했다면, 묵점 기세춘은 헨더슨의 유교론에 크게 감동했다. 묵점은 1958년 즈음 강진에서 헨더슨의 조선유교 강의를 듣고는 크게 감동했다 한다. 한울엠플러스의 박행웅 고문이 직접 들은 바에 의하면 “나는 조선인인데도 서양인보다 유교의 가르침을 모르고 있었다니”라고 개탄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조선 성리학을 비롯해 동양고전에 눈을 돌려 동양사상가로 전문가의 반열에 올랐다. 기세춘은 재야 민주화 운동가이기도 했다. 그는 신영복 교수와 함께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무려 22년간이나 혹독한 옥중생활을 당했다. _ 제9장 정다산론과 조선유교론  접기

P. 371 상기해 보면 헨더슨이 휘말린 이른바 ‘도자기 사건’은 프레이저 청문회를 앞두고 궁지에 몰린 박정희 정권이 헨더슨의 입을 막아보려는 잔꾀로 만들어 낸 흑색선전에 지나지 않는다(제4장 4절 ‘수집과 반출’ 140~141 및 제12장 1절 ‘프레이저 한국 인권청문회’ 426~442 참조). 그러나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이 흑색선전은 그의 입을 막는 데 전혀 소용이 없었다. 박정희가 유신체제 아래 지식인, 교수, 종교인, 언론인, 학생들에 무차별 탄압을 자행하고 있을 즈음, 헨더슨 등 미국 동부 진보적 자유주의 인사들이 요구한 프레이저 청문회가 열리자 헨더슨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최종길 교수의 고문 살해 등 한국 중앙정보부의 반인륜적인 고문 실상을 여지없이 폭로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헨더슨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이 흑색선전에 놀아난 일부 언론으로부터 인간적 성실성이 훼손당하는 수모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헨더슨과 그의 부인 마이어가 평생 동안 모은 143점의 헨더슨 컬렉션[제4장 3절 ‘헨더슨의 도자 컬렉션’ 참조]은 이제 더 이상 헨더슨가의 개인 컬렉션이 아니다. 1992년 1월 하버드대학 새클러미술관에 기증되어 인류의 보배로서 한국 도자기 문화의 예술성과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리는 진주가 된 것이다.

지은이는 2006년 10월 헨더슨 문집을 열람차 하버드-옌칭도서관을 찾았을 기간, 새클러미술관에 들러 헨더슨 컬렉션 중 일부를 관람한 적이 있다. 예컨대 그때 전시된 16세기 조선 분청자기로서 분청사기철화삼엽문장군(粉靑沙器鐵畵蔘葉文缶)과 18세기 조선 청화백자로서 바위, 국화, 곤충무늬의 입 큰 화병 등은 보물급에 속하는 명품일 것이다. 그 밖에 12세기 말 것으로 추정되는 차형 토기와 상감운학문 매병 등은 보물급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하다. _ 제10장 헨더슨의 상상, 사색, 그리고 학예: 고려청자·고려불교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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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기 (지은이)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부 명예교수이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1963)을 졸업하고, 동 대학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학위(1966)를,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1992)했다. 한국언론학회 회장(1996~1997), 한국외국어대학교 서울캠퍼스 부총장(1998.9~ 1999.9), 방송위원회 위원장(1999.9~2002.1), 한국 정치커뮤니케이션학회 회장(2003~2005)을 지냈다.
▪주요 저서: 『국회프락치사건의 증언』(2021), 『미의 나라 조선: 야나기, 아사카와 형제, ... 더보기

최근작 : <그레고리 헨더슨 평전>,<국회 프락치사건의 증언>,<일본 천황, 그는 누구인가> … 총 17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그레고리 헨더슨의 한국 여정을 담다

미 국무부 소속 20대의 젊은 외교관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 1922~1988)은 1948년 신생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목격한 이래 이승만 원시독제 체재 아래서 벌어진 일을 비롯해 이 나라가 겪은 중요한 사건들을 목격한 남다른 경험을 했다. 예컨대 그는 해방 정국에서 벌어진 김구 암살을 비롯한 주요 정치지도자 암살의 회오리를 온 몸으로 체험했는가 하면 반민특위·국회프락치사건을 목격했다.
특히 국회프락치사건의 경우 재판심리의 전 과정을 모두 기록해 미 국무부로 보내 귀중한 역사적 기록유산으로 남겼다. 그는 왜 그토록 이 사건을 중시했는가? 이 사건이 신생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향방을 가르는 분수령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헨더슨의 삶과 인물을 조명하는 평전이기도 하지만 대한민국 현대사의 목격 증인의 생생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도 하다. 그가 목격한 한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이란 무엇보다도 1950년의 한국전쟁을 비롯해 1960년의 4·19 학생혁명, 이어 한국 민주주의를 역전시킨 5·16 박정희 군사쿠데타, 1979년 박정희 암살 이후 등장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저지른 12·12 쿠데타, 마지막으로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정권이 자행한 5·18 광주만행 등이다.
이들 사건들은 그가 저술해 낸 『회오리의 한국정치(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 하버드대 출판부, 1968)』의 내용적 벽돌이 되었을 것이다. 이 책은 이미 한국정치를 설명하는 세계적 고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여기서 내린 처방은 한국정치의 회오리 병리를 처방하는 유효한 약재라고 지은이는 보고 있다. ‘촌락과 제왕(village and throne)’으로 한국정치현상을 상징화하고 이러한 병리를 치유하자면 중간매개체의 양성이라는 처방을 내린다.
헨더슨이 저술한 영역은 정치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는 다산 정약용에 주목해 「정다산: 한국 지성사 연구(Chong Ta-san: A Study in Korea’s Intellectual History)」라는 출중한 논문을 1957년 써냈다. 이어 1958년 그는 미국 의회도서관의 전문사서 양기백 씨와 함께 「한국유교약사(An Outline of History of Korean Confucianism)」를 저술했다. 이 「정다산론」을 계기로 그는 다산 연구가인 이을호 교수와 각별한 교유를 트게 되었으며 그의 조선유교론이 동양사상가이자 재야 민주화 운동가인 기세춘에 지적 충격을 주어 그를 조선 고전에 눈을 돌리게 했다.

여행 동반자
내가 헨더슨 평전을 쓴 것에는 한 인물의 전기를 객관적으로, 또는 연대기적으로 기술하는 것보다 더 높은 동기가 자리하고 있다. 그 인물이 추구한 이상, 사상, 철학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것으로는 충족시킬 수 없는 어떤 여백의 공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공간 안에 내가 그의 영혼과 함께 실존한다고 표현하고 싶다.
헨더슨은 살아생전 40여 년간 필생의 한국 탐방 여정을 수행하다 1988년 불의의 사고로 비교적 짧은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탐방한 여정은 바다와 같이 넓고 깊다. 나는 이제 40년간 그의 한국 여정을 함께하는 동반자의 마음으로 그의 평전을 쓰고자 한다. 영어의 펠로 트래블러(fellow traveler)는 단순한 길동무를 넘어 그가 품은 이상, 사상, 철학을 함께 나누는 동조자이다. 나는 이런 마음의 여행 동반자로서 그의 영혼과 함께 한국여행을 떠나는 마음으로 이 평전을 쓰려고 했다.

내용 구성

이 책은 3부 12장으로 구성된다. 제1부는 모두 넉 장으로 제1장은 그의 삶의 궤적과 인물됨을 추적하고 1948년 한국 땅을 처음 밟은 이후 부영사 재직 시절까지의 이야기를 엮었다. 이 시기 그는 ‘이영희 사건’이라는 악연도 만났다. 이 사건을 빌미로 버거 대사와의 불화 끝에 추방당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러나 한국과의 인연은 그가 살아생전 미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결실을 맺었다. 그것이 ‘반민특위·국회프락치사건 기억연대’의 결성이다. 이 단체는 반민특위 및 국회프락치사건 후손들의 명예회복과 진실 규명을 위해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어 헨더슨이 작성한 박정희 공산주의 전력 보고서가 지닌 가치와 의미를 분석해 보았다. 여기서 보고서에 언급된 황태성과 황용주가 남북한 관계에서 의미하는 바를 되돌아보았다.
제2장은 헨더슨이 어떻게 한국과 인연을 맺었는지 이야기체로 엮어보고 그 이후 40년간 이어진 한국역사 기행을 시기별로 풀어냈다. 여기에는 그가 어린 시절 한국 도자기를 만난 경위를 포함해 특히 국무부로 들어가 외교관의 길을 시작할 즈음 당시 한국 문화·역사 전문가 조지 매큔 박사를 만나 한국 역사와 함께 한국어를 배운 이야기를 실었고 그가 만난 한국전쟁과 전쟁의 뒷이야기를 엮었다.
이어 제3장은 지은이가 맺은 헨더슨과의 인연을 되돌아보았다. 이 인연으로 지은이는 헨더슨 부인에게 국회프락치사건 자료 등을 넘겨받아 이 평전을 쓸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4장은 그가 한국 도자기의 애호가를 넘어 도자기 미학의 경지를 개척한 이야기를 다룬다.
제2부는 헨더슨이 한국 사회의 병리를 진단하고 처방한 이야기를 담았다. 모두 석 장으로 구성되는데, 제5장은 그가 만난 한국전쟁이 파생한 서사를 살핀다. 제6장은 전쟁이 남긴, 치유하기 힘든 상처로 정치의 중간 지대 상실을 다룬다. 헨더슨은 한국 정치의 온건파 또는 중도파가 대거 납북되거나 전쟁의 분진 속으로 사라진 것을 개탄하면서 그것을 ‘서울의 비극’이라 불렀다.
다음 제7장은 1948년 그가 부영사 시절 만난 국회프락치사건을 다루면서 이 사건이 신생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향방에 끼친 영향을 되돌아본다. 이어 제8장은 헨더슨이 한국 사회의 병리에 대한 처방으로 내놓은 ‘중간 지대의 정치 합작’을 살핀다. 그 실행으로서 이승만 체제의 대안으로서 김규식-안재홍의 리더십을 제안한 것이 그의 안목이다.
마지막으로 제3부는 ‘헨더슨의 학문, 사상, 이론, 그리고 실천’으로 제목 그대로 그가 천착한 학문, 통찰한 사상과 이론을 살피고, 이어 창백한 서생이 아니라 그가 품은 이상을 실천으로 옮기는 데 주저하지 않는, 행동하는 지성인으로서 그가 펼친 행적을 되돌아본다.
제9장은 그가 학문적으로 천착과 애정을 기울인 정다산론을 살펴본다. 이와 함께 고려청자와 관련해 그가 구성한 고려불교 서사를 주목했다. 그는 특히 정다산이 조선 지성사에 자리한 위치에 대해 영문으로 「정다산: 한국 지성사 연구」를 썼으며, 그 번역본 「정다산론」은 ≪사상계≫ 1958년 4월호에 실렸다. 나는 자료 수집 과정에서 ≪사상계≫에 실린 글을 발견했는데 그가 쓴 영어 논문이 한국 사회의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실제 그 논문을 매개로 다산 연구가인 이을호 교수와 헨더슨은 각별한 교유를 맺게 되었다.
이어 제10장에서는 헨더슨이 고려청자와 고려불교와의 관계에 주목하여 「검은 계곡 이야기(A Tale of the Black Valley)」라는 에세이를 쓰는가 하면 이를 가설로 삼아 연구논문을 제시해 검증한다. 마지막으로 헨더슨이 박정희에 이어 전두환 군사정권에 맞선 레지스탕스 운동을 다룬다. 제11장에서는 그의 실천 행동 중에서 무엇보다도 그가 고발하고 폭로한 ‘고발자 헨더슨’의 면모를 살폈다. 마지막으로 제12장은 창백한 서생으로 남는 것을 거부하고 행동하는 지성인으로서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동참한 행동을 되돌아보았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그레고리 헨더슨이 미국의 한국 전문가로서 그의 학문, 사상, 철학, 인물과 인품, 그가 이룬 업적으로서 한국 정치에 대한 통찰, 특히 미국 국무부의 젊은 외교관으로서 국회프락치사건의 재판기록 전체를 남긴 그의 업적, 이어 행동하는 지성인으로서 용기 있는 그의 실천 등에 주목하여 책을 펴내 그의 영전에 헌정하였다.

그레고리 헨더슨의 주요 업적과 유산

*1949년 5월 18일 이승만 정부 성립 반년 만에 일어난 국회프락치사건을 목격하고 재판심리 전 과정을 기록해 역사적 기록 유산을 남기다.
헨더슨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선포를 현장에서 지켜본 뒤 일 년도 못 되어 터진 국회프락치사건을 목격했다. 그 해 5·10 총선에서 정당하게 선출된 국회의원 15명을 ‘남로당프락치’라고 마구잡이로 구속하고 가혹한 고문을 자행한 전형적인 후진 독재국가의 사건이었다.
1949년 5월 18일 제2회 국회가 열리기 직전 이문원(李文源)을 비롯한 세 명의 의원이 구속되면서 사건의 서막이 오르기 시작한다. 약 한 달 뒤 6월 20일 제3회 국회가 폐회된 직후 김약수(金若水) 국회부의장 등 일곱 명이 구속되고, 8월에는 다섯 명의 의원이 더 구속되었다. 이로써 구속된 국회의원이 무려 15명에 이르렀다.
이들 국회의원들은 헌병대에서 가혹한 고문 수사를 받은 뒤 검찰에 이첩되었는데, 오제도(吳制度) 검사는 국회의원 13명을 포함해 15명을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기소했다. 주심 재판관인 사광욱(史光旭) 판사는 1950년 3월 14일 이들 전원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고 최고 10년에서 최하 3년까지 징역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국회의원 피고들이 이에 불복하여 항소심이 계류된 가운데 한국전쟁이 터졌고, 북한군이 서울을 석권한 뒤 이들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풀려났다. 이들 중 서용길(徐容吉) 의원 한 사람을 제외하고 전원이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수목되기 전 북한으로 끌려간 뒤, 이 사건은 역사의 망각 속으로 사라졌다.
헨더슨은 이 사건을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쿠데타’이자 국회에 대한 ‘테러’라고 보았다. 이제는 테러를 저지른 장본인들도, 이 테러의 희생자들도 역사의 분진 속으로 사라졌다. 이 사건의 희생자들인 13명의 국회의원들은 헨더슨이 표현하듯이 ‘사건 아닌 사건(non-event)’ ‘역사 아닌 역사(non-history)’에 연루되어 ‘역사적 무명인간(historical un-persons)’으로 사라진 것이다.
이 사건을 헨더슨이 주목한 것은 이 사건을 신생 대한민국이 택한 민주주의를 가르는 분수령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이 중대한 사건에 숨겨진 진실을 밝히고자 재판 심리의 전 과정을 기록해 미 국무부로 보내 귀중한 기록유산으로 남겼다.

반민특위·국회프락치사건 기억연대
한편 그가 남긴 국회프락치사건 재판 기록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결실을 맺었다. 그것은 ‘반민특위·국회프락치사건 기억연대’(이하 ‘기억연대’)의 결성이다. 이 단체는 1948년 설치된 반민특위의 위원장 등을 비롯해 특경 요원들의 후손들과 ‘남로당 프락치’라는 주홍글씨로 낙인찍힌 제헌의원들 후손들을 주축으로 2021년 4월 19일 창립되었다. 이들은 소장파 제헌의원이자 선조인 프락치 의원들의 명예회복과 진실 규명을 위해 지속적으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 단체가 2022년 4월 25일 광복회관에서 주최한 학술회의에서 김정육 회장은 인사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이만큼 진실 규명과 명예 회복을 이룬 데에는 두 분의 은인이 있습니다. 한 분은 그레고리 헨더슨이라는 미국외교관, 다른 한분은 한국외대 김정기 교수입니다. 헨더슨은 프락치사건 재판기록을 남긴 분이며, 김 교수는 이 기록을 세상에 알린 분입니다.”
기억연대는 금년 2023년 헨더슨 영면 35주년을 맞아 헨더슨 추모 기념 학술대회를 연다고 하니 헨더슨은 저세상에서 흐뭇해할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 한국사회는 단극자장이며 그 결과 나타난 한국의 회오리 정치는 응집력이 결여한 모래성이다. 그 유일한 처방은 정치 중간지대로의 정치합작이다.
헨더슨은 주저 1968년 『회오리의 한국정치』[이어 그가 1987~1988년간 쓴 전정 수정판]에서 한국 정치를 ‘회오리(tornado)’라는 메타포를 사용해 설명한다. 그는 한국이 정치발전을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험준한 산이 있다고 봤는데, 그것을 ‘회오리 정치(vortex politics)’에 비유한 것이다. 그것이 미국에서 일어나는 회오리폭풍, 곧 ‘토네이도’에 한국 정치를 대입시킨 그의 이론적 모델이다.
헨더슨이 토네이도에 대입시킨 한국 정치는 정당이든 개인이든 모든 정치 개체들이 원자사회의 모래알이 되어 권력의 정상을 향해 빨려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거대한 흡인력은 이성적인 성찰도, 여야 간의 타협도, 정책을 위한 진지한 토론도 마비시킨다고 보았다. 이런 회오리 정치 상황에서는 정치발전에 필수적인 요건, 곧 정치 개체 간에 또는 구성원 간에 조직의 응집력을 배양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회오리 정치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있다. 헨더슨은 회오리 정치의 정형이 ‘유전병(a hereditary disease)’일 수 있지만 그것은 “사회의 유전병이지 혈통의 유전병은 아니다(the one of the society, not the blood)”라면서, 따라서 “투병을 할 수도, 더욱이 고칠 수도 있다”(Henderson, 1968a: 367)고 진단한다.
그가 내놓은 처방전은 무엇인가? 지은이는 그것을 한마디로 중간지대의 정치합작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남한 국내 정치의 역학 속에, 또는 지역 정치의 대립각 속에, 그리고 남북한 간에, 한국 정치가 풀어야 할 영원한 숙제이다. 헨더슨이 먼저 애초 한국은 이승만의 극우파가 지배해서도 안 되고, 김일성의 극좌 전체주의가 휩쓸어서도 안 되는데도 현실은 극우 또는 극좌의 극한지대로 뜀박질해 가버린 것이 한국 정치의 비극이라고 진단한다. 따라서 그의 생각은 어쩌면 아주 단순하고 명쾌하다. 곧 한국은 극한지대의 대결 정치로부터 중간지대의 관용 정치로 옮겨와야 한다는 것이다.

** 1950년 터진 한국전쟁을 개탄하여 이는 한국정치의 중간지대의 상실을 가져온 회오리 정치의 참화이며, ‘서울의 비극’이다.
헨더슨은 무엇보다도 무고한 한국인들이 죽어갔고 특히 중도파들이 사라진 것을 ‘서울 비극의 가장 주목을 끄는 부분(the most absorbing part of the tragedy of Seoul)’이라고 말하면서 이어 그는 사라진 ‘명사(prominent men)’들의 숫자들에 놀란다. 몇 명의 정치인과 국회의원들의 이름을 거명하는데 여기에 김규식, 안재홍, 조소앙, 윤기섭, 원세훈, 조훈영, 엄상섭, 김용무, 백상규와 그의 아들 등, 헨더슨은 이것이 정치 중간지대의 절멸을 가져온 ‘서울의 비극’이라고 개탄했다. 헨더슨은 서울의 비극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하경덕(河敬德, 1897~1951) 박사의 이야기를 통해 자세히 적고 있다.
하경덕은 전라북도 익산 출생으로, 1913년 전주신흥학교를 거쳐 1915년 평양 숭실중학을 졸업,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1925년 하버드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 1928년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1929년 귀국했다. 그 뒤 그는 조선기독교청년회 사회조사위원회 총무를 거쳐 1931년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그 뒤 흥사단에 가입하여 후진 양성과 독립운동에 힘쓰다가 8·15광복을 맞아 ≪코리아타임스≫를 창간하여 사장에 취임하고, ≪서울신문사≫ 및 ≪합동통신사≫의 사장을 역임했으며, 잡지 ≪신천지(新天地)≫를 창간했다. 1947년 과도정부 입법의원 의원이 되었다. 그는 6·25전쟁이 나자 미처 탈출하지 못하여 인민군에 잡혀 갖은 역경을 거치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다. 그러나 그는 그 여파로 건강이 악화된 나머지 1951년 죽고 만다.

** 다산 정약용을 흠모하면서 그를 놓쳐서는 한국지성사는 성립되지 않는다. 다산의 유배지 먼 길 강진을 찾는가 하면 경기도 광주 그의 묘지를 찾아 참배하다.
제10장은 「정다산론」과 함께 「조선유교론」을 다루는데, 그레고리 헨더슨은 다산 정약용을 흠모하고 그 인물에 천착했음을 그가 집필한 논문과 다산을 향한 그의 행적에서 엿볼 수 있다. 간단히 말해 그는 조선왕조 말 다산과 그를 둘러싼 파당 정치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조선왕조 그 자체에 이어 해방 뒤 태어난 한국의 어두움을 상징화하고 있다. 「조선유교론」 역시 조선왕조의 이념적 족쇄의 시각은 뚜렷하지만 유교의 핵심적 자기수행의 가치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정다산론」에서 다산이 조선왕조 말까지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누구나 범치 못할 주자학에 대해 비판적 실용적 사상을 견지했다고 짚고 있다. 그러나 정 다산은 파당 정치에 함몰되고 만다. 남인 문중에서 태어나 자란 정 다산은 대립하는 파당인 노론이 득세하고 자신을 총애하던 정조가 승하하자 그를 시기하던 노론 세력에 밀려 집안과 함께 몰락하고 만 것이다.
그의 형들은 처형되거나 유배의 길로 들어서고 다산 자신도 강진으로 귀양 가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러나 헨더슨은 이렇게 말한다. “정 다산과 그의 일파의 패배는, 19세기 말엽의 대세를 따르려고 한 조선의 비극적 실패와 중요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헨더슨이 보인 다산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남다르다. 그는 1957년 다산의 먼 유배지 강진으로 포장 안 된 먼지 길을 지프차로 달려갔다. 그는 다산의 어머니 해남 윤 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다산초당’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다산의 숨결을 온몸으로 체험코자 했다. 다음 해 그는 다시 강진을 찾는다. 아마도 저자는 그가 다산의 인물됨에 취한 나머지 그의 영혼을 체험코자 한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본다.
그 뒤 1984년 국회프락치사건 연구차 서울을 방문했을 때 다시 강진을 찾는다. 이번에는 1957년 당시 그를 초청해 준 해남 윤씨 가문의 어른(head clansman)의 묘소를 찾는 길이었다. 그 어른의 부인과 함께 ‘영감님’ 묘소를 찾았는데, 헨더슨은 부인이 죽은 ‘영감님의 외국인 친구’에 예의를 갖추는 모습과 ‘영감님’ 묘소를 모시는 행동을 감상적으로 적는다(≪The Korea Herald≫ 1984년 10월 24일 자).
헨더슨은 정 다산을 놓쳐서는 한국의 지성사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보는 듯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 아마도 조선의 지적 역사에 있어 가장 뚜렷하고 독창적인 사상가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그는 다산의 저작물을 열거하면서 “학술적 저작의 양을 두고 말하면 그만한 위치를 차지한 조선의 어떤 저술가도 다산을 따를 자가 없다”면서 중요 유교 논문으로 230권, 정치에 관한 논문 78권, 음운학(音韻學) 50권, 지리에 관한 논문 42권, 시가 18권, 의학 및 기타에 관한 논문 20권에 이른다고 했다.

다산의 실학운동
그들은 이익[성호], 안정복[순암], 홍대용, 박지원, 유향원[반계], 박제가 등 ‘실학파’였다. 다산은 이들과 사상적 공감대를 이루었다. 그는 시기심과 음모가 도사려 있는 서울을 떠나 농촌에 서재를 마련하였다. 헨더슨은 이것이 조선의 지적 전통에서 중요한, “초당의 저항자들(grass-roof protesters)의 연원이 되었다”라고 진단했다. 다산의 경우 이는 두 개의 유교적 항의 운동으로 발전되었는데, 즉 하나는 청나라 고증학파의 반대운동, 다른 하나는 그 자신이 속한 남인파의 저항운동이라는 것.
따라서 다산의 저항운동은 그 자신의 실용주의 사상에서 나온 결과이기도 하고 남인파의 싸움이기도 하다. 다산은 1789년 정조 임금 시절 과거 문과에 장원급제해 관료의 세계로 들어간다. 처음엔 말직인 한림직(翰林職)으로 임명된 뒤 빨리 승진해 1792년 성균관 수찬직(修撰職)이 되었으며 그해 겨울 정조 임금의 명으로 수원 화성을 지어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그 뒤 다시 승진해 병조참의가 되었다.
수원 화성은 1794년 1월 착공해 1796년 9월까지 2년 반 만에 완공했다. 화성은 위급 시 방어 목적의 성곽이기도 하지만 정조가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해 ‘융릉’으로 만들어 호위하려는 성이다.
이 성은 정다산의 실용성이 묻어나는 건축물이자 조선 건축학의 기념비적 축조물로 우뚝 섰다. 이것은 당대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굳어진 주희 사상에 저항하고, 실용성을 증언하고 있다. 기중기가 없었던 시절 ‘거중기’를 이용해 어떻게 성을 치밀하게 설계해 지었는지 「화성성역의궤」에 그대로 남아 있어 한국전쟁 때 파괴된 부분을 완전 복원할 수 있었다. 이런 연고로 1997년 화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헨더슨은 이렇게 말한다.
“다산이 기술에 치중한 노력의 증거로 대체로 수원의 보루(fortifications)만 언급된다. 하지만 우리는 실용성 창작을 향한 자극을 거기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다산은 ‘정기(ether)’, ‘형식(form)’, ‘기(matter)’의 본질에 대한 이조 시대의 끊임없는 철학적 공론과 깨끗이 결별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강진 유배
그러나 1799년 채제공이 죽고 그 다음 해 정조가 승하하자 다산은 갑자기 정치적 후원자들은 잃고 자리를 지탱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는 사직하고 형들과 함께 고향 서천으로 내려가 준순각(逡巡閣)이라는 서재에서 후학에 고전을 가르치며 연구를 계속했다. 그러나 노론파는 다산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1801년 조정을 장악한 노론파 치하에 그는 두 번이나 투옥되는가 하면 기독교인으로 지목된 그의 형은 처형되고 다른 형은 작은 섬으로 유배당하였다. 다산 자신도 사형을 받았으나 증거가 불충분하다 하여 강진으로 유배를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여기까지가 헨더슨이 「정다산론」에서 기술한 정다산에 관한 주요 서사이다.
그러나 강진 유배로 다산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다산은 앞서 헨더슨이 다산의 저작물을 열거하면서 “학술적 저작의 양을 두고 말하면 그만한 위치를 차지한 조선의 어떤 저술가도 다산을 따를 자가 없다”고 짚은 저작을 강진 유배지에서 저술했다. 다산초당을 지어 정원과 연못을 만들고는 다산학의 ‘르네상스’에 진배없는 학문적 업적을 여기서 이룬 것이다. 헨더슨은 다산의 저술 중 『여전고(閭田考)』와 『목민심서(牧民心書)』에 특히 주목한다.
『여전고』는 농촌의 토지공동소유제를 주장하면서 이는 생산의 질을 향상시키며, 양을 증가시킨다면서 분배의 공평을 기하기 위해 “농부들이 제공한 노동량을 기준으로 생산물을 전부 그들에게 분배하며 일정한 율의 세금을 할당할 것”을 제안했다. 헨더슨은 이는 “이조의 사회적 불공평에 대한 명백한 반항을 찾아볼 수 있다”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여전고』가 “북한 학자들이 집단농장의 약도라고 쥐고 늘어졌으며 다산의 시를 ‘일종의 전기 공산주의의 사회개혁자의 시’라고 내세우고 있다”면서,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일축한다.
헨더슨은 『목민심서』에 대해서 여기에 “기록된 악정의 예, 천여 개는 분명히 이조의 행정을 맡아본 체험을 토대로 그렸으며, 다산이 계통적으로 서술한 악정에 대한 시정책은 이조의 사상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직접성과 객관성을 보여주고 있다”라고 풀이했다.
그는 세밀한 부분까지 선명하게 묘사했다. 벼슬을 얻어 서울을 떠날 때 어느 관찰사가 운동을 하였으며, 누구에게 뇌물을 얼마나 먹였으며, 여행을 어떻게 하였으며, 임지에 도착했을 때 누가 와서 만났으며, 어떤 종류의 환영을 받았으며, 대접 받은 요리와 음악은 무엇이었으며, 누구 덕을 보려고 가까이 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이 서술에 대해 헨더슨이 프랑스의 소설가 스탕달(Stendhal)과 같은 촘촘한 분석과 영국의 시인 스위프트(Jonathan Swift)의 시정에 견준 비유가 흥미롭다.

“그것은 소설은 아니다. 하지만 때때로 스탕달과 같이 촘촘히 그리고 냉정히 분석하고 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든 경건한 제목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적 논문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패를 해부함에 있어 그가 지적한 낱낱의 과오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농민의 등허리를 부러뜨리는 짐이다. 유교국가 시절 감히 말 못할, 그런 신랄함과 예리함(pungency and bite)이 묻어난다. 다산이 주장한 결코 감상적이 아닌 개혁은 스위프트의 본능을 지녔다.”

정 다산을 흠모한 헨더슨
지은이는 헨더슨이 다산 유배지 강진을 몇 번 찾아간 것은 알고 있었지만 경기 광주 능내리 다산 묘소를 찾은 것은 몰랐다. 그런데 한 출판인의 중개로 다산의 직계 후손 정호영(丁浩榮) 전 EBS미디어 사장을 만난 것을 계기로 헨더슨의 다산 묘소 방문 사실을 알았다. 정호영 씨는 1986년 즈음 영등포 한옥 주택 수리를 하던 중 집 한구석에 묻혀 있던 할아버지 정향진(丁向鎭) 씨가 남긴 한문 일기 『목석비망(木石備忘)』을 우연히 발견했다.
이 한문 일기에는 1958년 8월 21일[음력 7월 7일]부터 9월 18일까지 모두 일곱 군데에 헨더슨에 관한 서술이 나온다. 8월 21일 자에는 “오후 1시 반 종중 숙부 규열 씨가 내방하여 미국인 중간 통역인 여운홍 선생이 ‘다산공 묘소 수리’를 하게 되었다고 전했다”고 적은 뒤 끝에 ‘미국인: 주한 미국 대사관 문정관 그레고리 헨더슨’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어 8월 23일 자는 “오후 1시 반경 ⋯ 종중 대부 홍교 씨에게 가서 여운홍 선생과 다산공 묘소 건을 상의했다”면서 “5시경 향후 미국인과 함께 만나 협의키로 약속한 후 다시 의견을 나누고 헤어졌다”고 되어 있다.
여기까지 헨더슨에 관한 서술을 풀이해 보면 ‘다산공 묘소 수리’라거나 ‘다선공 묘소 건’을 여운홍[해방정국에 암살당한 여운형 선생의 동생]을 통역으로 해 헨더슨과 상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 8월 27일 자에도 “30일 오후 5시 반에 삼화빌딩에서 미국인과 여 선생과 회의를 할 것이니 ⋯ ”라고 나온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8월 30일 자에는 일기를 쓴 정향진 씨가 “6시 반 정각에 여 선생을 만났다”며 “여 선생과 함께 헨더슨 씨 댁으로 가서 다산공 묘소 비석 건립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왜 ‘다산공 묘소 수리’라든가 ‘다산공 묘소 비석 건립 계획’을 미 대사관 문정관 헨더슨과 상의를 했는가? 이는 그리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는데 정 다산을 흠모한 헨더슨이 다산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광주 능내리를 찾아 묘역에 잡초가 무성하고 묘소가 그대로 방치된 것에 후손들에 손가락질하며 질책하지 않았을까. 이에 후손들이 ‘다산공 묘소 수리’를 헨더슨과 상의하지 않았을까.

** 헨더슨은 창백한 서생으로 남기를 거부하고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박정희 정권 아래 중앙정보부가 저지른 만행을 폭로한다. 이어 그는 전두환 신군부 정권이 저지른 광주학살 만행을 폭로하고 주한미군사령관이 특전사 파견을 승인했다고 고발한다.
이 책의 마지막 제11장 및 제12장이 다루는 주제는 행동하는 지식인 헨더슨의 면모이다. 전자가 한국의 군사정권이 저지른 만행의 폭로에 중점을 두었다면 후자는 미국 대한 정책의 치부를 드러내는 고발에 방점을 두었다. 전자가 배경에는 박정희 유신 시절에는 고발은커녕 정권이 불러주는 대로 읊는 ‘앵무새 언론’이 판을 친 상황에서 헨더슨이 폭로자의 역을 자임한 것이다. 헨더슨은 고발자의 역도 자임했는데, 이는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광주학살 만행 등을 자행하던 즈음 주한미군사령관이 특전사 출동을 승인하는 등 만행을 승인 또는 묵인했기 때문이다.
헨더슨은 국무부를 뛰쳐나온 뒤 1964년 1월부터 학문 세계에서 새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새 생활은 조용한 서생의 울타리 안에 안주하기보다는 그 울타리 넘어 전개되는 현실 세계에 대한 치열한 진실 탐구와 행동하는 지식인의 운동으로 점철된다. 먼저 그는 하버드대학 국제문제 연구소 ‘연구원(faculty research associate)’으로 위촉받은 뒤부터 한국학, 특히 한국정치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그때부터 그가 느닷없이 죽음을 맞은 1988년 10월까지 거의 사반세기 동안 그는 한국학 전문가로서 일가를 이루지만 박정희 군사정권에 이어 전두환 신군부 정권에 대한 치열한 저항 투쟁을 멈춘 적이 없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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