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02

백승종 | Facebook 중립 스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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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비엔나, 강요된 “분단”마저 스스로 걷어내다

비엔나는 삶의 질이 대단히 높다. 통계조사 결과 세계인이 가장 선호하는 최상의 문화도시로 평가되었다. 2018년 3월 미국의 컨설팅 회사 머서(MERCER)가 한 순위에 따르면, 비엔나는 9년 연속으로 1위를 지켰다. 2위는 스위스의 취리히였고, 서울은 유감스럽게도 79위였다.
다 아는 대로 비엔나는 이곳의 영어식 이름이다. 독일어로는 비인(Wien)이라 부른다. 도시의 인구는 대략 150만 명에 불과하다. 한국의 대도시를 기준으로 판단하면 그렇게 큰 도시는 아니다.
하지만 비엔나는 더할 수 없이 국제적이다. 과장이 아니라 관광객의 행렬이 끝도 없다. 또한, 각종 국제회의가 무척 빈번하다. 잠시 통계를 곁눈질해 보았다. 2014년 한 해만도 이곳에서 202번의 대규모 국제행사가 개최되었다. 
비엔나의 역사에도 내리막길은 있었다. 이 도시도 한때는 깊은 위기에 빠져 허우적댔다. 오스트리아 출신 아돌프 히틀러가 일으킨 문제였다. 1938년, 독재자 히틀러는 자신의 조국 오스트리아를 독일제국에 편입하였다. 그 바람에 오스트리아는 전범국가가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주권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사람들은 지혜로웠다. 그들은 신중한 고려 끝에 중립을 선포했다. 장차 미국이 주도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에 속하지도 않겠고, 소련 중심의 동구권에 가입하지도 않기로 맹세했다. 이 약속으로 오스트리아는 10년 만에 주권을 되찾았다. 1945년 해방 뒤에 겪은 한반도의 혼란과 비극을 생각하면, 오스트리아의 결정이 한없이 부럽기만 하다.
유서 깊은 문화도시 비엔나는 약속대로 흔들림 없이 정치적 중립을 지켰다. 국제사회는 그에 대해 일종의 보상을 해주었다. 국제원자력기구가 비엔나에 본부를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엔마약범죄사무국, 석유수출국기구, 유럽안보협력기구 등도 하나둘씩 이 도시에 둥지를 틀었다. 오스트리아는 국제무대의 중심으로 떠오른 것이다. 
정말 부러운 일이다. 우리나라도 장차 이처럼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출처: 백승종, <<도시로 보는 유럽사>>(사우,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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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24 January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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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완벽한 도시, 취리히!

나는 스위스의 완벽함을 사랑한다. 30여 년 전 취리히 행 기차를 처음 탔을 때부터 이 나라를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탄 기차는 스위스에서 제작한 거였는데 차량은 고갯길에서도 덜컹거리지 않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객차의 출입문과 차창을 열고 닫을 때 손끝에 전해지는 촉감도 여느 기차와는 달랐다. 부드럽고 우아한 느낌이었다. 화장실의 수도꼭지 하나도 얼마나 정밀하든지 시계로 유명한 스위스라서 과연 다르다며 감탄했다.
알고 보니 스위스 시민은 언어의 달인이기도 했다. 영어, 독일어, 불어는 기본이고 이탈리아어까지 능숙하게 구사하는 이들이 많았다. 또, 스위스의 역사를 읽은 다음에는 그들이야말로 참으로 용감하고 자립적이란 사실, 그래서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어있으면서도 당당하게 ‘중립’을 유지한 줄을 알게 되었다. 스위스의 영세중립은 스스로의 힘으로 얻어낸 외교적 성과라는 점에서 더욱 값진 것이다.
스위스는 잘 사는 나라다. 국가경쟁력도 세계 4위(2019년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 IMD 조사결과)요, 1인당 국민소득도 세계 1위이다(2017년 기준 8만 1209달러). 이 나라의 사회적 여건을 고려할 때 믿기 어려운 일이다. 전체 인구는 860만(2019년 현재)에 불과한데다 26개의 칸톤으로 잘게 분할되어 있다. 출신지역에 따라 공용어도 달라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로망슈어를 제각기 사용한다. 연방의 수도는 베른이지만 여러 모로 취리히와 제네바의 영향력이 더욱 크다. 지역주의에 휘말리기 쉬운 구조이다. 누가 보아도 국가정체성을 세우기 곤란한 조건인데 시민들은 스위스를 결속력이 강한 연방 국가를 만들어냈다.
스위스 시민들은 칸톤 중심으로 생활한다. 만약 10만 명 이상의 시민이 공동으로 청원하면 주민투표를 통해 가부를 결정하는 식이다. 
1874년의 헌법에 명시된 사항이다. 칸톤 생모리츠와 다보스에서는 주민투표를 통해 동계올림픽의 유치를 거부한 적도 있었다. 최근에는 주민투표로 중동난민의 유입을 통제하기 위한 이민법을 만들었고, 기본소득의 실시를 보류하기도 했다. 스위스의 칸톤은 해마다 20번 이상 주민투표를 실시한다. 스위스처럼 직접민주주의를 과감하게 도입한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그들은 대의정치와 직접민주정치를 적절히 혼합하여 많은 성과를 내고 있어 부러움을 산다.
취리히, 교통의 요지에 자리한 문화예술도시
취리히는 스위스에서 가장 큰 도시다(2005년 기준 인구 35만 명). 이곳이 내 관심을 끈 지는 오래되었다. 독일에 유학하던 80년대 후반, 한국사정이 궁금할 때면 나는 대학도서관에서 서구 나라의 신문을 뒤적였다. 한국 사정을 가장 정확히 보도한 것은 취리히에서 온 신문들이었다. 그들은 사안을 정확하고 날카롭게 분석해 독자를 놀라게 했다. 미국 같은 강대국의 신문들은 자국의 정치적 이익에 따라 왜곡할 때가 많았으나, 스위스 언론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도시라서 그랬는지 시간이 갈수록 취리히와의 인연이 깊어졌다. 친한 내 친구 슈테판도 취리히 대학교 출신이었다. 어느 해였든가.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그와 함께 스위스 비스킷을 나눠먹은 적이 있었다. 꿀을 섞어 만든 얇고 단단한 비스킷, 달콤한 맛이 일품이었는데 모양도 빛깔도 다양한 것이 좋았다.
취리히의 경관은 수려하다. 시내에 큰 호수가 있고 그 곁으로 리마트 강이 흐른다. 여름철에는 호수에서 수영도 할 수 있고, 배를 타고 출근하는 사람들도 볼 수 있다. 호수가 드넓어 유람선을 타고 일주하는 것도 멋진 일이다.
까마득한 옛날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곳에 세관이 있었다.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이다. 이곳은 북이탈리아와 프랑스 및 독일을 하나로 연결하는 길목이었다. 취리히라는 도시의 이름이 세관을 뜻하는 라틴어(Turicum)에서 유래했다니 신기하다.
그런데 취리히 사람들은 정치보다는 문화예술을 중시한다. 스위스 전체가 그러하다. 스위스 화폐인 프랑을 보더라도 정치가의 초상을 하나도 발견할 수 없다. 건축가, 화가, 조각가, 음악가, 작가 및 역사가의 초상만이 등장한다. 최고가 화폐인 1000프랑(약 125만원)에는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라는 역사가가 등장한다. 그는 19세기의 학자로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미술에 관해 독보적인 저술을 남겼다.
취리히는 물가가 비싼 도시이지만 임금 수준이 높다. 고용률도 높아서 80%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제일이다.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이 도시의 시민이라면 누구도 생계에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니 실로 대단한 일이다.
부자도시 취리히를 찾는 이들도 많다. 연간 900만 명이나 된다. 그 중 2백만 명이 여기서 숙박한다고 하는데, 방문객의 상당수가 사업상의 목적으로 들른다. 이곳이 유럽 굴지의 사업장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부자 도시답게 취리히 도심에는 유서 깊은 명소가 즐비하다. 우선 취리히 호수와 리마트 강변을 따라 늘어선 고풍스런 건물들이 시선을 잡아끈다. 볼만한 곳을 조금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린덴호프가 있는가 하면 그로스뮌스터 대성당, 프라우엔 뮌스터, 성 페터 교회의 시계탑도 빠뜨릴 수 없다. 또, 4백년이나 된 시청과 길드 관(館), 명문 취리히 대학교와 연방공과대학도 둘러볼 가치가 충분하다.
그 중에서도 린덴호프는 꼭 가보아야 한다. 리마트 강 왼쪽 기슭의 언덕 위에 있는 곳인데 로마시대 세관이 있던 곳이다. 그때 쌓은 성터가 아직 남아 있다. 마침 언덕배기라서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어 좋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은 반호프 슈트라세(역전거리)이다. 취리히 중앙역에서 호수로 이어지는 1킬로미터도 넘는 거리이다. 백화점과 명품상점들, 그리고 화려한 은행건물이 많아서 도보로 걸어도 지루한 느낌이 없다. 유럽 최고의 귀금속상점과 고급 시계점도 연달아 있다. 이곳은 취리히는 물론이고 유럽의 많은 부자들을 단골로 거느린 호화로운 쇼핑센터이다.
리마트 강 서편의 신시가지도 인파가 넘친다. 도보로 20분가량이면 둘러볼 수 있는 아담한 구역이다. 절반쯤은 차 없는 거리지만, 트램(전차)은 자유롭게 통행한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프라이탁 매장도 있다. 본래 트럭의 화물 덮개와 안전벨트 같은 폐품을 이용해 가방을 만들었다고 한다. 신시가지는 컨테이너 박스를 이용한 가게도 많고, 다양한 식당이며 흥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공간이 적지 않다. 젊은이들이 신시가지를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다.
취리히는 문화예술의 도시답다. 인구 35만의 도시인데도 박물관이 50여개이다. 그 가운데 취리히 국립박물관의 인기가 높다.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스위스의 풍부한 문화유산을 한눈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 축구의 모든 것을 전시한 ‘피파(FIFA) 박물관’, 시계의 역사를 소개하는 시계박물관도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다.
놀랍게도 취리히에는 2백 개도 넘는 미술관과 화랑이 있다. 내 생각에는 취리히 미술관(Kunsthaus Zürich)이 그 중 압권이다. 1910년에 개관한 곳인데 스위스 최고의 미술관이라고 해도 좋겠다. 미술관 입구에는 청동으로 만든 ‘지옥의 문’이 있다. 로댕의 작품이다. 이곳에는 중세부터 현대까지 스위스를 대표하는 회화와 조각, 드로잉, 사진 등이 가득하다. 아울러, 세계적인 거장들의 작품도 많다. 들라크루아, 렘브란트, 르누아르, 세잔, 모네, 마네, 고흐, 뭉크, 마티스, 르네 마그리트, 달리, 피카소, 칸딘스키 등의 작품을 하나씩 감상하노라면 서양미술사의 흐름이 손에 잡힐 듯하다.
인구로만 보면 취리히는 우리나라의 중소도시 수준이다. 그러나 이 도시를 깊게 들여다보면 볼수록 완벽한 명품도시라는 확신이 생긴다.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취리히 또는 스위스의 성공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교육의 힘이었을 것이다. 이 조그만 나라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25명이나 나왔다. 문학상이 둘, 평화상이 셋이고, 나머지 20명은 모두 자연과학 분야에서 나왔다. 흥미롭게도, 취리히가 키운 노벨상 수상자 수는 더욱 많았다. 취리히 연방공대 출신만 해도 28명이 노벨상을 받았다. 그 중에는 국적이 스위스가 아니라서 스위스 통계에는 포함되지 않은 경우가 상당수였다.
알고 보면, 취리히는 근대 교육의 요람이었다. 18세기 유럽의 교육을 근본적으로 혁신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가 바로 이 도시의 아들이었다. 그로 말하면 모든 스승의 모범이요, 사회개혁을 추구한 선구자였다.
개혁 지향성은 취리히의 오랜 전통이었다. 그 출발점에 울리히 츠빙글리가 있었다. 1519년 그는 취리히에서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인문주의자였던 그는 그리스어로 기록된 신약성서를 연구해 가톨릭교회와 불화를 겪었다.
슈테판과 나는 치즈플레이트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앉았다. 취리히 시절 아인슈타인이 자주 들렀다는 카페 오데온에서였다. 우리는 에멘탈 치즈를 비롯해, 그뤼에르, 아펜젤러, 몽도르를 맛보았다. 취리히의 이름난 맥주회사 초팝(CHOPFAB)의 필스너도 한 잔씩 주문했다.
슈테판은 츠빙글리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취리히 생활은 그로스뮌스터 대성당을 무대로 했다. 그런데 이 성당은 12-13세기에 건립된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본래는 칼 대제가 창건한 교회당이 그 자리에 있었다. 대성당의 지하에는 아직도 칼 대제의 조각상이 모셔져 있다. 참고로, 대성당의 고딕식 쌍탑은 이 도시의 랜드 마크에 해당한다. 츠빙글리 덕분에, 이 성당이 스위스의 종교개혁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슈테판은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취리히의 큰 교회를 간단히 소개하겠다고 했다. 프라우엔 뮌스터는 원래 수녀원이었다. 853년 독일의 루드비히 왕이 남부독일의 귀족여성들을 위해 창립했다. 하지만 종교개혁 이후 이 도시가 신교지역으로 바뀌자 수녀원의 관할권도 시청으로 넘어갔다. 또 성 페터 교회는 취리히의 가장 오래된 교회로, 유럽에서 가장 큰 시계가 있다. 13세기에 완공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첨탑도 유명하다.
츠빙글리가 성경을 깊이 연구한 것은 루터의 영향이었다. 그도 사제의 특권을 부정하는 만인제사주의를 주장하였다. 특히 츠빙글리는 공개토론회를 중시했는데, 이 도시의 전통에 어울리는 거였다. 그는 성화(聖畫)와 성상(聖像)의 폐지를 주장했고, 십자가, 제단, 오르간도 폐지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스위스와 독일 서남부의 종교개혁운동에도 큰 영향을 주어, 사람들은 그를 ‘스위스의 루터’라고 부른다.
하지만 츠빙글리는 루터와는 달랐다. 1529년 그들은 성찬론(聖餐論)으로 대립하였다. 루터는 성경에 나오는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피와 몸이라고 이해하였다. 츠빙글리는 반대였다. 그는 이것이 하나의 상징이라고 보았다. 두 사람에게는 이러한 견해 차이가 있어, 독일과 스위스의 종교개혁 세력은 결국 분열되었다.
츠빙글리는 사제의 책임을 폭넓게 해석했다. 시민의 사회적 안녕을 보장하고, 정치적으로도 무거운 책임을 져야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가톨릭 군대와 싸우다가 취리히 근교 카펠에서 세상을 떠났다.
츠빙글리는 교회를 교육공동체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려면 남녀노소가 함께 예배를 드리고, 모두가 함께 교리와 성경을 배워야 했다. 시민들은 누구라도 성경을 직접 읽고 해석할 줄 알아야했다. 츠빙글리의 개혁교회는 시민의 문해력도 향상하였고 인권의식도 높였다.
바로 이러한 전통을 바탕으로 훗날 페스탈로치가 등장했다. 그는 교육과 사회가 불가분의 관계라는 점을 강조했다. 교육을 통해서 사회를 개조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던 것이다.
취리히를 빛낸 인물들
그 후 많은 시민들이 취리히를 빛냈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요하나 슈피리가 먼저 생각난다. 19세기 후반 알프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하이디이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삶을 통해 작가는 진정한 치유란 과연 무엇인지를 물었다.
슈테판과 나는 취리히대학교의 구내 카페에서 초프라고 하는 스위스의 빵을 나눠먹으며 하이디를 떠올렸다. 초프는 머리카락을 꽈배기처럼 땋은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취리히는 《녹색의 하인리히》를 쓴 고트프리트 켈러의 고향이기도 하다. 켈러는 소설에서 시민을 위해 헌신하는 정치활동이라면 예술 활동과도 같은 숭고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만약에 이 도시를 대표하는 한 명의 작가를 손꼽으라면 게오르크 뷔흐너라고 대답하겠다. 그는 <보이체크>로 유명한 극작가였다. 사후에 더욱 호평을 받게 된 천재 작가이다. 오늘날 독일어권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독재를 물리치기 위해 그는 반체제운동에 참여했고, 가난한 농민의 권익을 위해서도 싸웠다.
취리히로 망명한 예술가와 지식인도 많았다. 독일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와 러시아 혁명가 미하일 바쿠닌, 폴란드 출신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도 한때 이 도시의 시민이었다.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의 주역 레닌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슈피겔가세 14번지에 살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더욱더 많은 명사들이 취리히로 몰려왔다. 작가 제임스 조이스는 죽어서까지도 취리히를 떠나지 못했다. 전후에는 독일작가 토마스 만과 베르톨드 브레히트도 취리히로 건너왔다. 학자들도 취리히 행을 결심한 이가 많았다. 나치의 탄압을 피해 여기로 온 앨버트 아인슈타인은 취리히 연방공대와 취리히 대학교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출처: 백승종, <도시로 보는 유럽사>(사우,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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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28 October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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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리히의 직접민주주의가 부럽다
나는 스위스의 완벽함을 사랑한다. 30여 년 전 취리히 행 기차를 처음 탔을 때부터 이 나라를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탄 기차는 스위스에서 제작한 거였는데 차량은 고갯길에서도 덜컹거리지 않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객차의 출입문과 차창을 열고 닫을 때 손끝에 전해지는 촉감도 여느 기차와는 달랐다. 부드럽고 우아한 느낌이었다. 화장실의 수도꼭지 하나도 얼마나 정밀하든지 시계로 유명한 스위스라서 과연 다르다며 감탄했다.
알고 보니 스위스 시민은 언어의 달인이기도 했다. 영어, 독일어, 불어는 기본이고 이탈리아어까지 능숙하게 구사하는 이들이 많았다.
또, 스위스의 역사를 읽은 다음에는 그들이야말로 참으로 용감하고 자립적이란 사실, 그래서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어있으면서도 당당하게 ‘중립’을 유지한 줄을 알게 되었다. 스위스의 영세중립은 스스로의 힘으로 얻어낸 외교적 성과라는 점에서 더욱 값진 것이다.
스위스는 참 잘 사는 나라이다. 국가경쟁력도 세계 4위(2019년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 IMD 조사결과)요, 1인당 국민소득도 세계 1위이다(2017년 기준 8만 1209달러). 이 나라의 사회적 여건을 고려할 때 믿기 어려운 일이다.
전체 인구는 860만(2019년 현재)에 불과한데다 26개의 칸톤으로 잘게 분할되어 있다. 출신지역에 따라 공용어도 달라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로망슈어를 제각기 사용한다. 연방의 수도는 베른이지만 여러 모로 취리히와 제네바의 영향력이 더욱 크다. 지역주의에 휘말리기 쉬운 구조이다. 누가 보아도 국가정체성을 세우기 곤란한 조건인데 시민들은 스위스를 결속력이 강한 연방 국가를 만들어냈다.
스위스 시민들은 칸톤 중심으로 생활한다. 만약 10만 명 이상의 시민이 공동으로 청원하면 주민투표를 통해 가부를 결정하는 식이다. 1874년의 헌법에 명시된 사항이다.
칸톤 생모리츠와 다보스에서는 주민투표를 통해 동계올림픽의 유치를 거부한 적도 있었다. 최근에는 주민투표로 중동난민의 유입을 통제하기 위한 이민법을 만들었고, 기본소득의 실시를 보류하기도 했다.
스위스의 칸톤은 해마다 20번 이상 주민투표를 실시한다. 스위스처럼 직접민주주의를 과감하게 도입한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그들은 대의정치와 직접민주정치를 적절히 혼합하여 많은 성과를 내고 있어 부러움을 산다.
출처: 백승종, <도시로 보는 유럽사>(사우, 2020)

사족:  우리나라는 국정 현안이 국회에서 표류하기 일쑤입니다. 주민투표 또는 국민투표를 통해 사안을 확실하게 매듭짓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현재와 같은 양당체제 아래서는 민생에 큰 영향을 주는 여러 가지 현안이 정당 간의 합의로 마무리되기가 불가능합니다. 야당은 오직 집권당을 반대하는 것만을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고, 주요한 매체들도 국가의 장래를 결정지을 새로운 방향을 논의하기 보다는 표창장이나 군부대 휴가 같이 사소한 일만을 들추며 시민사회의 분열을 획책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집권당도 말로는 시민의 눈높이를 이야기하지만 진정으로 시민과 함께 여러 가지 난제를 돌파할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적지 않습니다. 스위스처럼 우리도 지방자치단체의 현안이든 국정현안이든 시민이 직접 투표로 결정하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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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19 July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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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리히의 직접민주주의 
나는 스위스의 완벽함을 사랑한다. 30여 년 전 취리히행 기차를 처음 탔을 때부터 이 나라를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탄 기차는 스위스에서 제작한 거였는데 차량은 고갯길에서도 덜컹거리지 않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객차의 출입문과 차창을 열 때나 닫을 때 손끝에 전해지는 촉감도 여느 기차와는 달랐다. 부드럽고 우아한 느낌이었다. 화장실의 수도꼭지 하나도 얼마나 정밀하든지 시계로 유명한 스위스라서 과연 다르다며 감탄했다.
알고 보니 스위스 시민은 언어의 달인이기도 했다. 영어, 독일어, 불어는 기본이고 이탈리아어까지 능숙하게 구사하는 이들이 많았다. 
또, 스위스의 역사를 읽은 다음에는 그들이야말로 참으로 용감하고 자립적이란 사실, 그래서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어있으면서도 당당하게 ‘중립’을 유지한 줄을 알게 되었다. 스위스의 영세중립은 자신의 힘으로 얻어낸 외교적 성과라는 점에서 더욱 값진 것이다.
스위스는 잘 사는 나라다. 국가경쟁력도 세계 4위(2019년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 IMD 조사결과)요, 1인당 국민소득도 세계 1위이다(2017년 기준 8만 1209달러). 이 나라의 사회적 여건을 고려할 때 믿기 어려운 일이다. 
전체 인구는 860만(2019년 현재)에 불과한 데다 26개의 칸톤으로 잘게 분할되어 있다. 출신 지역에 따라 공용어도 달라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로망슈어를 제각기 사용한다. 연방의 수도는 베른이지만 여러모로 취리히와 제네바의 영향력이 더욱 크다. 지역주의에 휘말리기 쉬운 구조이다. 누가 보아도 국가 정체성을 세우기 곤란한 조건인데 시민들은 스위스를 결속력이 강한 연방 국가를 만들어냈다. 
스위스 시민들은 칸톤 중심으로 생활한다. 만약 10만 명 이상의 시민이 공동으로 청원하면 주민투표를 통해 가부를 결정하는 식이다. 1874년의 헌법에 명시된 사항이다. 칸톤 생모리츠와 다보스에서는 주민투표를 통해 동계올림픽의 유치를 거부한 적도 있었다. 
최근에는 주민투표로 중동 난민의 유입을 통제하기 위한 이민법을 만들었고, 기본소득의 실시를 보류하기도 했다. 
스위스의 칸톤은 해마다 20번 이상 주민투표를 시행한다. 스위스처럼 직접민주주의를 과감하게 도입한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그들은 대의정치와 직접민주정치를 적절히 혼합하여 많은 성과를 내고 있어 부러움을 산다.
출처: 백승종, <도시로 보는 유럽사>(사우,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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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28 October 2019
  · 
취리히, 직접민주주의가 부럽다 

나는 스위스의 완벽함을 사랑한다. 30여 년 전 취리히 행 기차를 처음 탔을 때부터 이 나라를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탄 기차는 스위스에서 제작한 거였는데 차량은 고갯길에서도 덜컹거리지 않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객차의 출입문과 차창을 열고 닫을 때 손끝에 전해지는 촉감도 여느 기차와는 달랐다. 부드럽고 우아한 느낌이었다. 화장실의 수도꼭지 하나도 얼마나 정밀하든지 시계로 유명한 스위스라서 과연 다르다며 감탄했다.
알고 보니 스위스 시민은 언어의 달인이기도 했다. 영어, 독일어, 불어는 기본이고 이탈리아어까지 능숙하게 구사하는 이들이 많았다. 
또, 스위스의 역사를 읽은 다음에는 그들이야말로 참으로 용감하고 자립적이란 사실, 그래서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어있으면서도 당당하게 ‘중립’을 유지한 줄을 알게 되었다. 스위스의 영세중립은 스스로의 힘으로 얻어낸 외교적 성과라는 점에서 더욱 값진 것이다.
스위스는 잘 사는 나라다. 국가경쟁력도 세계 4위(2019년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 IMD 조사결과)요, 1인당 국민소득도 세계 1위이다(2017년 기준 8만 1209달러). 이 나라의 사회적 여건을 고려할 때 믿기 어려운 일이다. 
전체 인구는 860만(2019년 현재)에 불과한데다 26개의 칸톤으로 잘게 분할되어 있다. 출신지역에 따라 공용어도 달라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로망슈어를 제각기 사용한다. 연방의 수도는 베른이지만 여러 모로 취리히와 제네바의 영향력이 더욱 크다. 지역주의에 휘말리기 쉬운 구조이다. 누가 보아도 국가정체성을 세우기 곤란한 조건인데 시민들은 스위스를 결속력이 강한 연방 국가를 만들어냈다. 
스위스 시민들은 칸톤 중심으로 생활한다. 만약 10만 명 이상의 시민이 공동으로 청원하면 주민투표를 통해 가부를 결정하는 식이다. 1874년의 헌법에 명시된 사항이다. 
칸톤 생모리츠와 다보스에서는 주민투표를 통해 동계올림픽의 유치를 거부한 적도 있었다. 최근에는 주민투표로 중동난민의 유입을 통제하기 위한 이민법을 만들었고, 기본소득의 실시를 보류하기도 했다. 
스위스의 칸톤은 해마다 20번 이상 주민투표를 실시한다. 스위스처럼 직접민주주의를 과감하게 도입한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그들은 대의정치와 직접민주정치를 적절히 혼합하여 많은 성과를 내고 있어 부러움을 산다. 
출처: 백승종, <도시의 세계사>(집필중)
첨언: 사실 지금 이 나라의 현안인 검찰개혁, 패스트 트렉 등의 문제야말로  주민/국민투표를 통해 사안을 확실하게 매듭짓는 것이 필요합니다. 현재의 양당체제 아래서는 국가의 중요 현안을 협의로 마무리하기가 어렵습니다. 자한당은 반대를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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