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서의 5-18(4) 황석영과 종북 좌파와의 관계
January 26, 2014 at 7:06pm
황석영과 종북 좌파와의 관계
북한의 혁명노선에 따르면 남한은 여전히‘미국의 식민지’일 뿐이었다. 그런데 황석영은 바로 그런 북한의 사관을 지지하였다. 광주사태 주동자들은 미국인들을 인질로 납치하려 했었음을 황석영은 그가 1989년 밀입북하기 몇 달 전『창작과비평』에“항쟁 이후의 문학”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광주에서 봉기했던 항쟁지도부는 이 점을 눈치 채고 이란에서의 방식대로 미국인을 인질로 카터 행정부와 밀고 당기면서 군사정권의 퇴진과 계엄군의 철수와 식량수송을 요구하면서 투쟁을 지속시킬 계획도 세웠지만, 역시 당시로서는 대중들의 정치의식에 한계가 있다고 여겨서 결행하지 못했습니다. (황석영, 1988, 51)
황석영은 월남전을 해방전쟁이라 부른다:
예를 들어 베트남은 해방전쟁 기간 중에 전 세계의 양심적인 시민들과 더불어 반미·반전을 위한 평화전선을 구축했고, 심지어는 식민지 종주국이었던 프랑스와 교전 상대국인 미국의 지식인 예술가들을 하노이로 불러다 협조를 호소했습니다. (황석영, 1988, 72)
황석영은 밀입북 준비를 하며 쓴“항쟁 이후의 문학”에서 전 남민전 전사 김남주를 이런 표현으로 지지한다:
무엇보다도 기억할 만한 것은 김남주의 옥중 시집이 2권이나 나온 일이며, 최근에 나온『조국은 하나다』라는 시집은 항쟁 이후 문학의 당당한 진전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황석영, 1988, 53)
김남주가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되기 전 김남주와 윤한봉은 현대문화연구소 공동운영자였는데, 황석영은 자신도 윤한봉과 더불어 현대문화연구소를 운영했다고 이렇게 주장한다:“미국에서는 광주에서 나와 함께 현대문화연구소를 운영하던 윤한봉이 미주 한청련 조직을 끌고나가고 있지요.”(황석영, 1988, 58-59) 이것은 윤한봉의 현대문화연구소와 자신의 밀접한 관계를 표현한 말이지만, 정확한 사실 관계는 현대문화연구소가 운동권 관객을 동원시켜 황석영을 키워준 것이고, 그의 극단 단원 임영희가 현대문화연구소 간사였을 뿐이다. 1980년 1월 전남대 민속문화연구회와 연극반 출신이 중심이 되고 조선대 탈반, 전남대 국악반 출신 일부 회원이 하나로 결집돼 광주 마당극 운동의 본류로서의 극희 광대가 탄생된다.(광주매일,『正史 5 ‧ 18』특별취재반, 1995, 53)
황석영은 1980년대 중반 미국에서 생활하던 시절 윤한봉을 통해 많은 친북 인사들과 교분을 가졌음을 이렇게 서술한다:
미국에 가서 눈물의 상봉을 했지만, 그가 미국 12개 도시에 조직한 <한청련>을 통해서 여러 분들을 만났습니다.『분단을 넘어서』라는 책도 그때 보았고, 북한을 방문한 목사, 교수, 지식인 필자들도 만났지요. 좌우간 전두환 파쇼정권이 기승을 부리던 그때에 나는 강연을 다니면서 대사관이 그어 놓은 선을 넘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났고, 우리의 통일운동이 대단원에 이르렀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와다 교수를 통해서 일본의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우리 동포 작가·지식인들을 거의 모두 알게 되었던 겁니다.… 북쪽 국적을 갖고 있는 작가(이하 경칭 생략) 이회성이나 김석범이나 시인 김시종이나 또는 전 한민통 기관지의 주필을 지낸 정경모나 그 밖에 여러 계층의 동포들을 종횡무진으로 만났습니다. (황석영, 1988, 59)
황석영은 그때 윤한봉을 통해 알게 된 조총련계 인물들과 더불어 일본에서 친북활동을 하였음을 이렇게 자랑한다:
동경에서 재일동포 3, 4세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문화패‘한우리’를 구성하고‘우리문화연구소’를 개설했습니다. 이회성, 정경모 선생들이 뒤에서 밀어주었고 일본 지식인들이 도와주었죠. 북한 국적의 작가인 이회성과 남한의 나는 함께 재일동포 젊은이들과‘통일 굿’을 벌이기로 해서 그가 실행위원장을 맡고 내가 총 연출을 맡았지요. (황석영, 1988, 58-59)
황석영이 북한판 5 ‧ 18영화 시나리오를 쓸 목적으로 밀입북하기 위해 김일성과 연락이 닿았던 것은 아마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잠시우리는 황석영의 동지 윤한봉이 미국 망명 시절 재미교포들을 북한에 보냈던 이유를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조총련이 재일교포들을 북한에 보내는 것은 그들이 김일성에게 충성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면 윤한봉은 무슨 이유에서 재미교포들을 북한에 보냈던 것인가? 윤한봉의 광주운동권 동지 서경원의 간첩활동이 드러났던 1989년 윤한봉은 미국에서 <재미 한국청년연합>(약칭, 한청련)이라는 친북단체를 이끌고 있었으며, 그때 이미 재미교포들 중 방북 교포수가 4천 명을 넘고 있었다. 운동권 출신 기자 윤정모는 윤한봉의 한청련은“남북의 운동역량에 상응하는 고유한 역할 임무, 즉 남한운동 지원 사업, 해외에서의 조국통일운동”을 하는 세력이라고 설명한다.(윤정모, 1989, 77) 그때 반미 소설『고삐』의 작가 윤정모가 월간지『말』지 1989년 9월호에“한청련과 윤한봉을 찾아”란 제목의 탐방기를 기고하였다. 윤정모는 윤한봉의 종씨였으며, 광주사태 직후부터 윤한봉을 서울에서 숨겨 주었던 장본인이다. <역사로서의 5.18>(4권)216쪽
January 26, 2014 at 7:06pm
황석영과 종북 좌파와의 관계
북한의 혁명노선에 따르면 남한은 여전히‘미국의 식민지’일 뿐이었다. 그런데 황석영은 바로 그런 북한의 사관을 지지하였다. 광주사태 주동자들은 미국인들을 인질로 납치하려 했었음을 황석영은 그가 1989년 밀입북하기 몇 달 전『창작과비평』에“항쟁 이후의 문학”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광주에서 봉기했던 항쟁지도부는 이 점을 눈치 채고 이란에서의 방식대로 미국인을 인질로 카터 행정부와 밀고 당기면서 군사정권의 퇴진과 계엄군의 철수와 식량수송을 요구하면서 투쟁을 지속시킬 계획도 세웠지만, 역시 당시로서는 대중들의 정치의식에 한계가 있다고 여겨서 결행하지 못했습니다. (황석영, 1988, 51)
황석영은 월남전을 해방전쟁이라 부른다:
예를 들어 베트남은 해방전쟁 기간 중에 전 세계의 양심적인 시민들과 더불어 반미·반전을 위한 평화전선을 구축했고, 심지어는 식민지 종주국이었던 프랑스와 교전 상대국인 미국의 지식인 예술가들을 하노이로 불러다 협조를 호소했습니다. (황석영, 1988, 72)
황석영은 밀입북 준비를 하며 쓴“항쟁 이후의 문학”에서 전 남민전 전사 김남주를 이런 표현으로 지지한다:
무엇보다도 기억할 만한 것은 김남주의 옥중 시집이 2권이나 나온 일이며, 최근에 나온『조국은 하나다』라는 시집은 항쟁 이후 문학의 당당한 진전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황석영, 1988, 53)
김남주가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되기 전 김남주와 윤한봉은 현대문화연구소 공동운영자였는데, 황석영은 자신도 윤한봉과 더불어 현대문화연구소를 운영했다고 이렇게 주장한다:“미국에서는 광주에서 나와 함께 현대문화연구소를 운영하던 윤한봉이 미주 한청련 조직을 끌고나가고 있지요.”(황석영, 1988, 58-59) 이것은 윤한봉의 현대문화연구소와 자신의 밀접한 관계를 표현한 말이지만, 정확한 사실 관계는 현대문화연구소가 운동권 관객을 동원시켜 황석영을 키워준 것이고, 그의 극단 단원 임영희가 현대문화연구소 간사였을 뿐이다. 1980년 1월 전남대 민속문화연구회와 연극반 출신이 중심이 되고 조선대 탈반, 전남대 국악반 출신 일부 회원이 하나로 결집돼 광주 마당극 운동의 본류로서의 극희 광대가 탄생된다.(광주매일,『正史 5 ‧ 18』특별취재반, 1995, 53)
황석영은 1980년대 중반 미국에서 생활하던 시절 윤한봉을 통해 많은 친북 인사들과 교분을 가졌음을 이렇게 서술한다:
미국에 가서 눈물의 상봉을 했지만, 그가 미국 12개 도시에 조직한 <한청련>을 통해서 여러 분들을 만났습니다.『분단을 넘어서』라는 책도 그때 보았고, 북한을 방문한 목사, 교수, 지식인 필자들도 만났지요. 좌우간 전두환 파쇼정권이 기승을 부리던 그때에 나는 강연을 다니면서 대사관이 그어 놓은 선을 넘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났고, 우리의 통일운동이 대단원에 이르렀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와다 교수를 통해서 일본의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우리 동포 작가·지식인들을 거의 모두 알게 되었던 겁니다.… 북쪽 국적을 갖고 있는 작가(이하 경칭 생략) 이회성이나 김석범이나 시인 김시종이나 또는 전 한민통 기관지의 주필을 지낸 정경모나 그 밖에 여러 계층의 동포들을 종횡무진으로 만났습니다. (황석영, 1988, 59)
황석영은 그때 윤한봉을 통해 알게 된 조총련계 인물들과 더불어 일본에서 친북활동을 하였음을 이렇게 자랑한다:
동경에서 재일동포 3, 4세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문화패‘한우리’를 구성하고‘우리문화연구소’를 개설했습니다. 이회성, 정경모 선생들이 뒤에서 밀어주었고 일본 지식인들이 도와주었죠. 북한 국적의 작가인 이회성과 남한의 나는 함께 재일동포 젊은이들과‘통일 굿’을 벌이기로 해서 그가 실행위원장을 맡고 내가 총 연출을 맡았지요. (황석영, 1988, 58-59)
황석영이 북한판 5 ‧ 18영화 시나리오를 쓸 목적으로 밀입북하기 위해 김일성과 연락이 닿았던 것은 아마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잠시우리는 황석영의 동지 윤한봉이 미국 망명 시절 재미교포들을 북한에 보냈던 이유를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조총련이 재일교포들을 북한에 보내는 것은 그들이 김일성에게 충성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면 윤한봉은 무슨 이유에서 재미교포들을 북한에 보냈던 것인가? 윤한봉의 광주운동권 동지 서경원의 간첩활동이 드러났던 1989년 윤한봉은 미국에서 <재미 한국청년연합>(약칭, 한청련)이라는 친북단체를 이끌고 있었으며, 그때 이미 재미교포들 중 방북 교포수가 4천 명을 넘고 있었다. 운동권 출신 기자 윤정모는 윤한봉의 한청련은“남북의 운동역량에 상응하는 고유한 역할 임무, 즉 남한운동 지원 사업, 해외에서의 조국통일운동”을 하는 세력이라고 설명한다.(윤정모, 1989, 77) 그때 반미 소설『고삐』의 작가 윤정모가 월간지『말』지 1989년 9월호에“한청련과 윤한봉을 찾아”란 제목의 탐방기를 기고하였다. 윤정모는 윤한봉의 종씨였으며, 광주사태 직후부터 윤한봉을 서울에서 숨겨 주었던 장본인이다. <역사로서의 5.18>(4권)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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