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06

[세상읽기] ‘시민됨’의 도리 - 경향신문

[세상읽기] ‘시민됨’의 도리 - 경향신문
[세상읽기] ‘시민됨’의 도리
기사입력 2015.12.14 21:11
최종수정 2015.12.14 21:20
12월5일 2차 민중총궐기에 참가했다. 무엇보다 경찰의 물대포로 농민 백남기님의 목숨을 위협하고도 한마디 사과가 없는 것에 참을 수 없었다. 이에 항의하는 시민의 수가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내 머리 하나라도 보태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사과는 고사하고 오히려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을 ‘복면’을 썼다고 IS에 비교하는, 시민의 권리에 대한 ‘테러’에 항의해야만 했다. 나는 그게 공화국 ‘시민됨’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집회에는 다양한 깃발들이 나왔다. 박근혜 대통령이 쌀값을 21만원으로 올려주겠다고 한 공약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되묻는 농민, 노동자, 빈민, 사회단체는 물론이고 지역소모임 깃발들도 있었고 중·고등학생들도 나와 있었다. 어떤 이는 얼굴에 마스크팩을 하고 나와 “복면이 아닙니다. 예뻐지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말해 좌중의 시선을 한 몸에 끌었고, 어떤 고등학생들은 “국정교과서 때문에 재수도 못하게 생겼다”며 지나갔다.

[세상읽기] ‘시민됨’의 도리
그러나 언론의 관심사는 오로지 ‘평화’였다. 이날의 시위에서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할 것인지 아닌지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바라는 평화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당연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 침묵,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평화다. 한 보수언론이 말한, 평화적이건 아니건 시위에 국민들이 지쳤다는 말로 선수를 친 것의 의미가 그것이다.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있지 않는 모든 것은 평화를 깨는 행위, 즉 ‘소요’다.
 
이들에게 평화의 책임은 전적으로 말하는 자가 지는 것이다. 말을 하기로 결심했으면 가급적 조용히 해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은 아예 말하지 않는 것이다. 말하는 자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높으면 그것은 평화를 깨는 행위이기 때문에 비난받아야 한다. 여기서 다시 그들이 말하는 가장 좋은 평화가 나온다. 아무도 말하지 않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침묵, 즉 죽음이다. 죽음이야말로 이들이 원하는 최상의 평화다. 이들은 산 우리가 죽은 이의 평화를 실천하고 누리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과 달리 평화의 책임은 말하는 이가 아니라 듣는 이의 몫이다. 말하는 이의 목소리 ‘정도’는 거의 전적으로 듣는 이의 태도에 달려 있다.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이가 경청을 한다면, 그리고 진지하게 대답을 한다면 이미 이 대화는 ‘평화’롭다. 설전이 벌어지더라도 평화롭다. 이것은 한쪽이 가만히 있음으로써 지켜지는 죽음의 평화가 아니라 살아있는 역동적인 평화다. 말하는 것을 듣고, 듣고 난 다음 들은 그 말에 대해 대답하고. 그러면 다시 말한 이의 위치는 ‘듣는 이’가 되어 평화를 지켜야 하는 책임이 말한 이에게 넘어간다. 그가 이제 ‘듣는 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평화는 말하는 순간이 아니라 듣지 않는 순간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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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한국을 통치하는 세력이 무슨 이야기를 제대로 들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거의 없다. 반면 시민인 우리는 그들이 하는 말을 진지하게 들었다. ‘혼이 비정상’인 ‘전반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그들의 말을 하나하나 다 들었고 기억했다. 듣고 기억했기 때문에 그들이 한 말을 가지고 다시 되물었던 것이다. 쌀값을 21만원으로 해준다고 한 그들의 말을 어떻게 되었냐고 물었다. 역사는 역사가에게 맡겨야 한다고 한 그 말은 어떻게 되었냐고 물었다. 진지하게 들었으니 묻는 것, 공화국 ‘시민됨’의 도리가 아닌가.
 
그러나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지난번 정권은 그래도 뒷산에 올라 아침이슬 노래라도 들었다고 했는데 이번엔 그런 말조차 없었다. 아버지대에서는 ‘말 많으면 빨갱이’더니 따님에 이르러서는 ‘말 많으면 테러리스트’라고 위협한다. 우리는 듣는 존재지 되묻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이 태도가 평화를 깼다. 말만 할 뿐 듣지도 대답하지도 않는 당신들이 평화를 깬 것이다. 그래서 이날 집회의 구호는 단마디로 요약된다. ‘국민의 소리를 들어라.’
 
물론 이 말도 안 듣겠지만 듣고 대답할 때까지 줄기차게 떠들 것이다. 진지하게 듣고, 들었으며 되묻고, 되물었으니 대답을 또 들어야 하는 것. 나는 이 공화국 시민의 도리를 다할 것이다. 당신들 혼의 전반적인 상태와는 상관없이.

<엄기호 | 문화학자>


원문보기: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512142111085&code=990100#csidxb3f69d565b41fcfa44d1a15d6455cf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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