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 있다 보니, 오래 전부터 듣는 이야기가 있다. 남한사회가 북한이탈주민에게 과한 혜택을 부여하는 것에 관한 지적이다. 이들 스스로도 이른바 '지원쇼핑'에 관한 자성어린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한 측의 입장만을 두둔하기도 어려운 의제이다.
본 에세이는 과잉지원 자체의 가부를 가리기보다 탈북민을 바라보는 남한 원주민들의 관점(viewpoint)을 조금 넓혀보자는 필자의 소박하지만 야심찬 욕구에서 출발한다. 남과 북을 모두 경험한 이들의 행보는 남북사회 통합 모델의 현재진행형인 동시에 미래 통일사회의 밑그림을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차지하는 지분이 적지 않다.
어렸을 적 통일논의는 해방·전쟁 세대가 주도했고 분단 이후 세대들은 관망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통일은 남과 북의 분단 이후 세대간의 게임이 되어버렸다. 모 케이블 방송사의 15분간 진행되는 1대 1 요리 배틀 프로그램이 인기인데, 이제는 우리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종의 셰프가 되어야 한다. 통일이라는 메인디쉬의 형태를 조금이라도 갖추고 약간의 맛이라도 볼 수 있게끔 주어진 시간을 활용해야 한다. 그런 다음 후세대들에게 다음 프로세스를 맡길 수 있다. 이때 재료(이슈)를 바라보는 셰프의 관점이 획일적이라면 그것은 재앙과 다름없을 것이다. 관점의 다각화는 그래서 중요하다. 분단 이후 지금까지 한국에 입국한 3만 명의 탈북민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함의와 시사점은 어느 하나도 간과하거나 놓칠 것이 없다.
그렇다면 탈북민은 과연 어느 정도의 지원을 받고 있을까. 통일부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하나원)를 수료하며 받는 초기 정착지원금은 1인당 700만원 선이며 주거지원금 1,300만원을 포함하면 2,000만원 선이다. 웬만한 질병은 본인부담이 들지 않는 의료보호 1종 수급권자와 정규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면 매월 50만원 정도가 지급되는 기초생활보호 수급권자의 자격도 주어진다.
조금 더 들여다보자. 청년층을 보면 과잉지원이라고 보는 관점은 심화될 수 있다. 중·고, 국립대 진학시 등록금이 면제되며, 4년제 사립대학 진학시 대학과 정부 각각 50%를 부담하므로 4년 내 기본적인 학점 수준만 유지한다면 100% 학비를 감면받기도 한다. 대학뿐 아니라 대학원 진학시 중소 민·관 장학기관 및 종교기관들의 돕는 손길들의 규모가 적지 않다. 주요 어학원이나 영국문화원 또는 인권단체 등을 통해 소정의 경쟁을 거치면, 저렴한 학비로 국내외에서 어학을 습득할 기회도 어렵지 않게 취할 수 있다. 일부 공공기관이나 금융권, 언론사, 대기업에선 여전히 이 청년들의 창업지원, 제한경쟁 등의 문을 열어놓고 있고, 그 기회는 남북관계의 경색이 장기화되는 분위기 속에서 확대되는 추세이다. 그저 주어지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 아닌 능동적 입장에서 보면 청년들의 자립의지는 그들의 정보력과 비례하고 이는 지원받을 수 있는 기회와 수혜로 이어지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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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하나재단을 방문한 하나원 교육생들 ⓒ남북하나재단 |
한편, 지원사업의 취지를 왜곡하여 지원금을 활용하거나 법의 사각지대를 악용하거나(위장이혼 등) 하는 행태도 엿볼 수 있다. 이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도덕적 해이와도 유사한 현상으로, 반드시 일부 탈북민만의 특정한 문제로 보기는 지난한 부분이 있다. 다만, 탈북대학생들 중에도 장학기관을 우롱하는 식으로 연간 수천 만원씩 장학수혜를 취하는 등 본인들의 이득을 극대화하려는 모습은 사업관계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별다른 철학 없이 백화점식으로 벌려놓고 보는 지원 기관들의 실책도 간과하기 어렵다. 이들 기관들의 고른 사업 배분을 위한 연대는 여러 사정상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현실에 맞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과잉지원인가? 살펴본 바와 같이 적어도 ‘장학’ 측면에서는 그렇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영역들까지 묶어 과잉지원으로 단정 짓기에는 해석의 신중함이 요구된다. 행간의 탈북민들에 대한 지원으로 소외계층이 역차별을 받을 수 있다는 지적도 사실은 층위가 다른 의제이다. 각 계층이 처한 현실에 맡게끔 정책을 펼치면 잠잠해질 문제이다. 정량적 비교도 어려울 뿐더러 계층간 갈등만 드러낼 수 있다. 탈북민과 소외계층이 함께 거론된다는 것은 이들이 남한사회에 정착할 겨를도 없이 소외계층의 이름으로 먼저 안착시킨 사실을 스스로 자인하는 셈이기도 하다.
아울러 탈북민이 신체적·정신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정도에는 개인마다 분명 현격한 차이가 있을 것이나, 과거 어떠한 복지정책도 취지에 부합하는 수혜 그룹만을 온전히 담지 못했던 한계를 지녀왔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탈북민 지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복지와 아울러 덧씌워진 성격들을 살펴봐야 한다. 먼저 이들을 위한 복지정책에는 사회공동체 일원으로 소프트랜딩을 유도하기 위한 복지적 성격이 존재한다. 여기에 더하여 먼저 온 통일의 빗장을 열어가는 이들에 대한 투자적 성격도 부여되고 있다. 민족적 견지에서 이견은 있겠지만 분단구조로 인한 ‘피해자’로 보는 시각으로 해석도 가능하다. 분단 당사국인 남한의 헌법적 가치에 기반한다면 ‘우리 국민’에 대한 보상(혹은 인도적 지원)의 성격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적으로 지원대상인 이들을 바라볼 때에는 고향을 떠난 사람들, 탈북민이 지니는 제 특질(개인에게서 고유하고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심리적 경향으로서)을 고려해야 한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이후로 탈북한 이들은 건강 문제로 신음하는 경우가 많다. 주로 간 기능에 문제가 잦고 두통이 뇌수막염으로 발전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북한과 중국에서 적절한 치과 치료가 결여된 경우는 젊은 나이에도 임플란트 치료를 받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신체적 ‘신음’과 더불어 정서적 ‘시름’은 분명한 외상 장애 현상으로 나타난다. 적지 않은 탈북민들은 탈북과정에서 온전한 가정이 해체되거나 인신매매와 같은 충격을 경험하며 자기 에고를 상실하거나 하는 경우들은 이미 매스컴을 통해서도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이런 사정으로 남한정착과정에서도 전 남편(한족, 조선족, 북한출신)에게 접근금지를 신청하는 등 보편적이지 않은 가정을 꾸리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뭇 남성에게 사기를 당해 제3국 망명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호주나 캐나다를 전전하다 현지에서 출산한 자녀를 데리고 다시 남한을 찾는 경우들도 있다. 경우에 따라 국내 지원이 중단되기도 한다. 남한에서 태어났음에도 학생들의 차별어린 시선으로 탈북민 대안학교로 진학해야만 하는 말못할 사연들도 있다. 이와 같이 재북(北)시 혹은 탈북과정에서, 마지막으로 남한 정착과정에서 경험하는 어려움들은 이들의 외상장애를 심화시키고 나아가 이들의 2세들에게까지 숙주처럼 머물다 성인으로 가는 길목을 막아서기도 한다.
지난 6월, 한 탈북여성의 자녀(캐나다 태생)는 소아정신과 전문의로부터 자폐성 장애 진단을 받았다. 언어 지연 및 전반적인 발달 지연이 이유이다. 발달 평가 및 자폐 평가에서 동일 연령대 0.1% 미만으로 현저한 지연을 보이며 아동기 자폐증 평정척도와 사회지수에서 자폐증과 지적장애라는 소견이다. 물론 선천적 요인을 간과할 수 없으나 후천적으로 자녀를 캐어할 수 있는 상황을 전혀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은 자녀의 성장기에 크나큰 불안요소로 기능하기 마련이다.
부모의 입장에서 나의 2세에게 나타나는 장애는 사실 부정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치료의 개입시기를 놓치면, 눈마주침, 착석유지, 충동성 등을 비롯하여 자발어 지체 등에 관한 치료기간이 장기화되고 보다 다양한 측면의 치료 접근을 요하게 된다. 자녀를 키우는 입장에서 이 탈북민의 자녀 사례는 여러모로 아프게 하는 구석이 많다. 분단이 없었다면 그녀는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원래 ‘그런 삶’이란 없다. 개인의 삶이라는 것이 어느 순간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나의 역사는 마주친 사람들을 통해 흐르고 나의 신체가 소멸된 이후에도 2세의 존재로 이어지며 어떤 모습으로든 사회공동체 안으로 스며들며 지속된다. 이처럼 한 사람의 개인의 네러티브는 운명처럼 사회사를 관통한다. 그 복합적 성질은 범학문적 개념의 통섭적 접근으로도 이루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분단 이후 지금까지 국내외 매스컴에서 떠들어왔던 전형적인 ‘탈북민’은 칸노 요코(Yoko Kanno)의 노래 ‘nowhere and everywhere’처럼 어디에도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사례가 탈북한 사람들의 경향성으로 설명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탈북으로 인한 요인은 한 개인의 삶에 지속적인 변수로 등장하고 작동한다는 것이다. 국내 탈북민 자살율은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인 평균 자살률보다 3배가 높다고 한다. 통일부 발표에 의하면, 2015년 기준으로 최근 10년간 탈북민 사망자 조사 결과를 보면, 10~40대 사망원인 순위 중 5위 안에 자살이 포함돼 있다. 10~20대 사망원인 중 24.3%가 자살이라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팩트이다. 자살이라는 것은 감내하기 어려운 사회구조적인 폭력과 연관되어 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탈북민들은 남한 주민에 비해 5배 이상 범죄에 노출돼 있고, 특히 사기 피해 건수는 무려 43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범죄 가해의 경우도 남한 평균보다 배 이상 높다는 결과는 우리 사회 내 북한이탈주민의 취약성을 방증하고 있다. 약 5년간 70명에 달하는 탈북민이 탈남했다는 정부발표의 통계는 공식적으로 파악된 최소치일 뿐이다.
■ 최근 5년간 탈북자들의 탈남 현황(2012~2016) <자료:통일부> 제3국 위장망명 신청으로 보호중지 53명 재입북자 16명
결과적으로 이러한 배경에 놓인 탈북민 지원에 대한 과잉 지적은 유행어마냥 ‘그게 뭣이 과한디?’로 반박하고 끝나서는 곤란하다. 적어도 공공부문에서 집행되는 예산의 효율적 배분에 대한 지속적인 모니터링이 수반될 때에서야 지금까지 일었던 잡음을 최소화할 수 있다. 최근 국정감사에서는 통일부가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남북하나재단)’을 통해 한 해 230억 원 정도를 탈북자 지원에 쓰고 있지만, 집행이 비효율적이라는 지적이 제기된 바 있다(더불어민주당 김경협 의원실). 전체 금액의 50% 미만인 112억 원만 탈북자들에게 돌아갔을 뿐 30% 정도는 재단 운영을 위한 행정비로 사용됐다는 지적이다.
과잉지원의 논란 가운데에는 사람은 없고 제도와 객체만 남아 있을 것은 아닌지 우리 사회가 북한이탈주민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복기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국경의 남쪽, 우리 남한사회의 건강함을 회복하는 것이 이 땅에서의 북한출신들의 자립을 선도할 수 있는 지름길이 아닐는지.
한기호/ 우양재단 과장, 소셜캠페이너 '탈분단통일연구소' 운영자, 연세대 통일학 박사과정
*이 글은 한기호 님의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kiho.han.7/posts/1307889222589130)에도 게재됐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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