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17

식민지수탈론 vs 식민지근대화론 이영훈

[한겨레] 세카이

(3) 식민지수탈론 vs 식민지근대화론
이영훈 2006/08/15 18:23  http://blog.hani.co.kr/ohayougozaimasu/6251 
(3) 식민지수탈론 vs 식민지근대화론 
<해방전후사 재인식> 특강 (3)
일본의 조선 동화정책이 낳은 조선 근대화
[ 이영훈 / 2006-06-21 12:08 ]조회 : 1608 
故 정주영 회장(좌) 故 이병철 회장(우)
자유주의에 기초한 새로운 역사인식과 민족주의에 기초한 낡은 역사인식은 1905-1945년간 일제하의 식민지기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서부터 크게 갈리고 있습니다. 현재 국사학계에서 주류를 점하고 있는 민족주의 역사인식은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하고 조선의 토지와 식량과 자원과 노동력을 수탈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생존권을 부정하고 우리 민족의 정상적인 발전의 길을 왜곡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를 가리켜 흔히 ‘식민지수탈론’이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역사를 계급적인 관점에서 착취관계로 인식하는 맑스주의적 역사학과 경제학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가령 한국에서 근대적인 역사학과 경제학은 1930년대부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초창기의 역사학자와 경제학자를 보면 대개 유물사관(唯物史觀)에 기초한 맑스주의자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수탈론을 좀더 구체적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1910-1918)을 실시함에 있어서 농민들로 하여금 소유 농지를 신고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농민들 가운데 신고 기한을 놓친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물경 전국 농지의 4할이나 되는 많은 토지가 총독부의 소유지로 수탈되었으며, 이 토지는 일본에서 온 이민농민이나 동양척식주식회사와 같은 회사에 헐값으로 넘겨졌다는 것입니다. 지난 40년간 대한민국의 국사 교과서는 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쳐왔습니다.

또 국사 교과서에는 일제가 생산된 쌀의 절반을 빼앗아 일본으로 실어 날랐다고 되어 있습니다. 농사를 다 짓고 나면 일본 경찰과 헌병이 총칼을 들이대고 절반을 빼앗아간 것처럼, 그렇게 직접 쓰고 있지 않습니다만,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문맥으로 학생들을 가르쳐 왔습니다. 또 일제는 조선인의 노동력을 수탈하였다고 합니다. 1940년대의 전시기(戰時期)에 약 650만 명의 조선인을 전선으로 공장으로 탄광으로 강제 연행하였으며, 끌고 가서는 임금을 주지 않고 노예와 같이 부려먹었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조선의 처녀들이 있었습니다. 정신대(挺身隊)라는 명목으로 조선의 처녀들을 동원하여 일본군의 위안부로 삼았는데, 그 수가 수십 만에 이른다고 교과서는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사실이 아닙니다.
 깜짝 놀랄 분들이 많으시겠지만, 거두절미하고 말한다면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교과서를 쓴 역사학자들이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해방 이후의 역사 교과서를 검토해 보면 1960년대까지는 이러한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들어와, 특히 1974년 이후 국정교과서 체제로 넘어가면서, 위와 같이 난폭한 서술들이 교과서에 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여기서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할 겨를이 없습니다만, 궁금하신 분은 저의 이전 논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이영훈, 「국사 교과서에 그려진 일제의 수탈상과 그 신화성」, 『시대정신』28, 2005)

앞서 소개하였듯이 수탈론은 1930년대부터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의 수탈은 일종의 이론적인 것으로서 맑스주의적 수탈이었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부터의 수탈은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그냥 폭력적으로 뺏아가는 문자 그대로 벌거벗은 약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한 벌거벗은 약탈로서 수탈론이 1970년대부터 교과서에 등장한 것은 한국의 역사학계가 아직 일제하의 식민지기를 과학적으로 인식할 능력과 자세가 부족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토지와 쌀을 빼앗가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치 풍선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듯이 경제는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어서 굳이 증명할 수고조차 필요 없을 정도로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에 따라 사람들은 점점 가난해집니다. 인구는 줄게 되지요.

그런데 사실은 어떠하였습니까. 정반대였습니다. 1910년의 조선인 인구는 대략 1600-1700만 정도였습니다. 1940년에는 2400만이었습니다. 일본과 만주로 나간 사람을 합하면 2600만 정도였습니다. 불과 30년의 짧은 기간에 50% 이상 인구가 증대하였는데, 이러한 인구증가 현상은 경제가 찌그러지고 있었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 밖에 경제사 연구자들의 정밀한 통계적 추정에 의하면, 식민지기 1910-1940년간에 걸쳐 한반도의 총소득은 연평균 3.7%의 속도로 지속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그 정도는 당시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20세기 전반 세계자본주의는 정체와 위기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선진국이라 해도 대개 2% 전후의 낮은 성장률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일본만이 유독 3-4%의 높은 성장률을 보였는데, 우리 한반도가 일본의 영토로 편입되어 있었던 연고로 일본 본토와 마찬가지로 그 정도의 경제성장률을 보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벌써 저의 이야기에 불쾌감과 짜증을 느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가령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있는데 전라도는 연평균 4% 성장하고 경상도는 연평균 -4%로 후퇴하는 일이 있을 수 없지요.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한반도는 일본제국의 한 부분으로서 일제의 영토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 영토가 된 것을 두고 역사학자들이 식민지라고 이야기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바로 그 이유로 일본이 경제성장한 것과 꼭 같은 정도로 한반도에서도 경제성장이 있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을까요. 일본으로 쌀을 실어 날랐던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 쌀을 수출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수출이 아니라 ‘이출’(移出)이라 하였습니다. 어쨌든 일본의 쌀값이 조선보다 높아서 시장원리에 따라 일본으로 수출된 것이지요. 그 결과 수출한 농민이나 지주에게는 수출소득이 발생하게 됩니다. 국내에서 쌀을 처분했을 때보다 더 많은 소득이 발생하지요. 그러면 경제가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 수출대금으로 일본에서 면제품과 같은 공산품도 수입하고, 만주로부터 모자라는 식량도 사들이고, 은행과 회사에 투자도 하고, 공장도 짓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제적 변화를 제대로 알기 위해 우리는 일제가 한반도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한 목적이나 방식부터 올바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일제가 한반도를 식민지로 지배한 기본 목적은 이른바 ‘영구병합’이었습니다. 일제가 남긴 통치사료를 보면 ‘영구병합’이란 말이 지겨울 정도로 자주 나옵니다. 영구히 일본의 영토로 삼겠다는 것이지요. 일본사람들은 여기에 한 20, 30년간 살다가 돌아갈려고 온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영구히 살려고 왔습니다. 이 점을 똑바로 응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구병합’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무엇보다 조선의 사회와 경제를 일본과 같은 것으로 동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목적에서 일제는 자기 나라의 법과 제도를 식민지 조선에 이식하였습니다. 그래야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넘어와서 자기 나라처럼 불편없이 편안하게 살 것 아닙니까.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그 문화와 정신을 빼앗아 일본인으로 만들어야 영구히 병합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하기 위해 조선의 문화와 정신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되지요. 새로운 문화와 정신을 도입해서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바꿀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럴 목적에서 일제는 근대적인 법과 제도를 조선에 이식하였던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1912년에 발포된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입니다. 이때 시행된 일본의 민법은 지금도 대한민국의 민법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두 법을 놓고 보면 당초의 표현이 순서까지도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근대적인 민법의 핵심 원리는 무엇입니까. 그에 대해 민법학자들은 ‘사적(私的) 자유의 원칙’을 이야기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인간은 국가나 다른 사람에게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존재로서 그 사회생활과 경제생활은 자신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는 재산권제도와 관련하여 첫째 ‘소유권 절대의 원칙’으로 나타납니다. 소유권은 절대적으로 불가침이며, 국가도 이를 임의적으로 침해하거나 제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계약자유의 원칙’입니다. 이는 재산권을 양도하거나 처분함에 있어서 소유자의 자유의사에 기초한 계약만이 법적으로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앞서도 지적하였습니다만,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향유하고 있는 재산권제도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일제는 조선의 사회와 경제를 통합하는 정치원리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도입하지는 않았습니다. 일본 자신이 자유민주주의를 아직 몰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가족주의적이며 전체주의적인 정치원리를 천황제의 형태로 발달시켰습니다.

일본이 자유민주주의의 정치원리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은 미국에 의해 천황제 군국주의가 해체된 1945년 이후부터입니다. 그렇지만 일제는 천황제라는 정치체제 하에서 사회생활과 경제생활의 원리로서 근대적인 민법을 서유럽에서 도입하여 자기식으로 정착시켰습니다. 그래서 크게 보아 명치유신(明治維新) 이후의 일본을 근대사회라고 부르지요. 그 서유럽 기원의 근대의 요소가 식민지기에 조선에 이식된 것입니다. 바로 식민지 조선을 영구히 일본 제국의 영토로 편입하고 병합하고 나아가 동화시킬 목적에서였습니다.

경제적인 측면의 동화정책에 대해 좀더 설명하겠습니다. 근대적인 민법과 상법이 이식된 식민지 조선은 결국 일본과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었습니다. 1920년까지 모든 관세가 폐지되었습니다. 자본과 상품이 오고가는 데 장애가 없어졌습니다. 그에 따라 두 지역간의 무역이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무역이 발달하면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1960년대 이후 한국경제는 수출 무역을 주도로 고도성장을 하였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무역이 늘면 경제는 성장을 하게 됩니다.

경제란 가계와 기업 간의 재화와 노동력과 소득의 흐름이지요. 여기다 수출과 수입이 더해지면 순환의 규모가 커지게 되지요. 경제성장이 지속되고 일인당 소득수준도 증가합니다. 그 과정에서 일본으로부터 자본이 들어와서 조선의 농토를 개간하고 공장을 지었습니다. 그렇게 일본인이 주체가 된 경제성장이었습니다. 그렇게 자꾸 자본이 들어와서 경제성장이 지속되면 결국 어떻게 됩니까? 조선의 토지와 지하자원과 공업시설은 점점 일본인의 소유가 됩니다. 바로 이런 것이 경제학적으로 말해 진정한 의미의 식민지적 수탈이지요.

빼앗아 간 것이 아니라 투자를 하여 한반도의 경제적 자원을 일본인의 소유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영구병합과 동화정책에 따른 실질적인 수탈의 무서운 결과를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합니다만 사기와 폭력으로 인민의 재산을 빼앗는 것은 고대의 약탈국가나 중세의 정복국가들이 하는 짓입니다. 일제는 그러한 야만의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근대사회였고 근대국가였습니다. 그들은 한반도를 영구히 일본 영토로 편입하고자 하였으며, 그 목적으로 투자를 하였던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한 식민지적 수탈의 결과로 조선의 사회와 경제도 근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인들이 공장을 짓고 농장을 세우면 조선인들이 노동자로 또 소작농으로 고용됩니다. 그에 따라 조선인의 소득이 증가하기 시작합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인 가운데서도 일본인을 본받아서 공장을 짓고 기업가로 성장하는 계층이 발생합니다. 앞서 근대 민법의 기본 정신을 말했습니다. 사적 자유의 원칙이지요. 조선인에게도 그러한 사적 자유의 원칙이 적용됩니다. 그래야 동화니까요.

그런데 전체 인구의 2-3%에 불과한 일본인이 조선의 모든 토지와 자원을 다 소유할 수 있습니까? 절대적으로는 여전히 조선인 소유의 재산이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인 자산가 가운데 일본인에게 배우고 또 일본에 유학하여 상급학교를 졸업한 근대적인 인간집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삼성그룹과 현대그룹을 창업한 이병철 선생과 정주영 선생도 모두 식민지기에 기업을 일으킨 사람들입니다.

1939년 말이 되면 그렇게 조선인으로서 공장을 경영하고 있는 사람의 수가 일본인보다 많게 4천 명을 넘게 됩니다. 근대화의 주역은 어디까지나 일본인이었지만, 다수의 조선인들도 거기에 슬슬 참가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근대로부터 차별당하면서 근대를 학습하고 근대를 실천하기 시작한 것지요. 그렇게 생겨난 근대적인 인적자본을 토대로 하여 나중에 일제가 이 땅에서 물러갔을 때 이 땅에 우리 힘으로 근대경제와 근대사회와 근대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역사의 우연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일제가 영구병합하고자 동화정책을 펼친 결과가 그렇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런 것을 두고 역사의 간지(奸智)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한 역사의 의의를 근대적인 법과 제도의 이식을 통한 조선의 근대화에서 찾는 학설을 가리켜 ‘식민지근대화론’이라 합니다.

지금 방송을 하고 있는 저와 같이 주로 경제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그런 주장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어느덧 알게 모르게 저희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이름을 붙여주더군요. ‘식민지근대화론’에 관해, 곧 식민지기에 있었던 경제적 변화에 대해, 보다 자세하게 알고 싶은 분은 『해방전후사의 재인식』1권에 실린 김낙년의「식민지 시기의 공업화 재론」과 주익종의「식민지 시기의 생활수준」이란 두 논문을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저의 성급한 설명보다 훨씬 자세하고 유익한 설명을 거기서 들을 수 있습니다.

이영훈 (서울대 교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공동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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