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대 명예교수 2016.10.23 금강일보
1987년 늦은 가을이나 초겨울일 것이다. 초여름까지의 민주화의 열기에 따라 헌법이 개정되고, 그것에 맞는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일 때다. 오랜 군부의 집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산뜻한 민주정권을 만들기를 희망하는 분위기가 사회에 가득할 때다. 여당에서는 노태우, 야당에서는 김영삼, 김대중이 각각 입후보하였다. 물론 큰 관심 밖에 있는 다른 몇 사람도 입후보하였다. 이 때 아주 강한 분위기는 두 김 씨가 단일화하는 일이었다. 시간은 무자비할 만큼 빠르게 결전의 날이 다가오는 데, 두 사람과 그들을 각각 지지하는 진영에서는 단일화를 바라지 않거나 반대하는 흐름도 있었다. 또 찬성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내 측으로 단일화이지, 다른 사람에게 밀어주면서 까지는 생각하지 않을 때다. 이러한 것은 그 때만이 아니라 선거 때마다, 그것이 크든 작든 언제나 있었던 것들이다. 그것이 잘 되지 않을 때가 더 많지만 사람들은 그 문제를 또 꺼내고 기대한다. 그 때도 그랬다. 그 때야말로 야당이 단일화하여야 정권교체가 가능하다는 것을 아주 확연하게 믿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았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정권을 잡은 측에서 부정선거를 이끌지 않고 공정하게 선거를 관리한다는 전제에서 나오는 일이다. 물론 부정선거의 가능성이 있지만, 그것을 믿지 않으려는 것이 일반 경향이기도 하다.
이런 분위기와는 달리 전혀 양측은 단일화 할 기미도 없었고, 심지어는 그렇게 3파전으로 가야 야당이, 두 김 씨 중 한 사람이라도 이긴다는 궁색하고 뻔한 거짓 논리를 펴기도 하였다. 이 때 철학을 하는 내 친구는 아주 좌불안석이었다. 그가 어느 날 서울에 가자고 하였다. 우리가 존경하는 선생님 몇 분을 만나서 이들 양김 씨가 단일화하도록 노력하여 달라는 말을 드리자는 것이었다. 나는 별로 실효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으나 그 친구의 열정에 따랐다.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겠다는 계획은 접었다. 그 날이 일요일인데다 그렇게 간단히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다음 문익환 선생에게 전화했으나 예배에 가셨단다. 어느 교회로 가셨는지, 언제 댁으로 돌아오실 지 전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퀘이커 예배모임으로 가서 함석헌 선생을 만나기로 하였다. 모임에 나오신 선생께 만날 시간을 달라고 하여 얻었다. 오후에 댁으로 찾아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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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아주 열심히 열정을 내어 선생께 설명을 드렸다. 어르신들께서 이 두 양김 씨를 불러다 놓고, 국민들의 간절한 소원이니 한 사람으로 빨리 합하라고 말씀하시고 강력히 그들에게 압력을 넣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말없이 들으시던 선생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들이 우리의 말을 들을 것이라면, 벌써 국민의 소리를 들었겠지요. 그렇게 해본 사람들이 없었겠소? 이번 선거는 다 끝났다고 봐요. 역사는 계단을 뛰어넘는 법은 없다고 합디다. 이번 일은 이미 끝난 것이니 다음 5년 뒤를 위하여 준비하는 것이 좋을 거요. 그리고 그런 맘이 있으면 직접 하는 것이지 누구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여 주시오 라고 할 일이 아니지 않소?” 5년 뒤를 직접 준비하라고? 어떻게 누가 준비한단 말인가?
물론 단일화는 불가능하였고, 선거는 군정에 참여하였던 세력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고 난 5년 뒤는 여당을 비롯한 3당이 깜짝 합당하여 큰 정당을 만들어 선거에 승리를 하였고, 그 5년 뒤에는 또 다른 연합으로 선거에 승리하는 일을 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그 일들을 이끄는 핵심 인사들에게는 ‘대통령병’에 걸린 사람들이라고 지탄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차례로 대통령이 됐다. 그 뒤 한 일들도 꽤나 있지만, 그것들이 꼭 대통령이 한 일이며, 꼭 대통령이 돼야 할 일인가는 두고 생각해 볼 일이다.
다시 ‘5년 뒤를 준비하시오’ 라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 시간만 가면 되는 것은 아니지 않던가? 그 뒤 또 다른 ‘영웅’ ‘인물’을 만들라는 말도 아닐 것이다. 그 때 가서 야합하거나 억지로 합하라는 뜻도 아닐 것이다. 영웅이 필요하지 않은 민주주의 시대에 왜 사람들은 굉장한 인물을 찾고 바라고 만들려고 하는 것일까? 다 맥없는 거짓인데. 지금 굉장히 큰 세력을 가진 미국이라는 나라의 선거전에 나선 사람들이 영웅일까? 인물일까? 거기에도 구역질나는 사람과 일들이 많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인물은 없다. 있다면 성실한 생활인이 있 뿐이요, 필요할 뿐이다.
그런데 선거철이 가까이 오니 어김없이 인물론과 세력론과 합종연횡의 전략들이 마구 일어난다. 은둔을 접고 세상에 나온 사람, 작은 일을 하다가 큰 영역을 맡겠다고 나오는 사람, 그러면서 이러한 사람이라면 좋겠다고 나서고 따라가는 사람들. 이러저러한 모임과 정당들을 새로 만들거나 쪼개거나 합하거나 하는 사람들. 그렇게 하여 산뜻한 정치를 하여 보겠다는 주장들. 그것들은 다 거짓이다. 계약직 대통령이 실세도 아니고, ‘비선실세’라는 말도 다 허상이다.
실세는 바로 우리, 나와 너의 생활인의 깨어있는 주권만이 실세다. 생활을 모르는 자들은 정치가의 계열에서 배제되어야 한다. 표몰이배들은 배제되어야 한다. 오로지 바른 생활을 공동으로 하자는 자만이 나타나게 해야 한다. 요동치고 까불리는 물결에 붙박는 닻을 내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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