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17

황석영, 그는 누구인가… | beseto 韓中日硏究所

황석영, 그는 누구인가… | beseto 韓中日硏究所


황석영, 그는 누구인가…

카테고리 : 정치사회연구 | 작성자 : 於田
2013/05/22 10:58 추천 0 스크랩 0
http://blog.chosun.com/besetohan/6982850
원문출처 : 가을이 머무는 풍경
원문링크 : http://blog.chosun.com/nolboo54/6981193
황석영, 왜 간첩으로 불리우는가?
다섯 차례에 걸쳐 북한을 방문하고
일곱 차례 김정일을 만나 찬양을 한 황석영
아직도 많은 국민들이 그의 실체에 대해 모르고있다
임을 향한 행진곡의 개사 작시로 유명한
황석영에 대해 알아보자
태어난 곳은 만주.
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는 것은
김정일앞에서 자신의 고향은 평양이라고
스스로 말한 것으로 더 유명하다
왜 그런 발언이 나오게 되었는지 알기위해서
황석영에 관한 책을 속을 살펴보면
모친이 평양 출신이다.
객지라는 중편소설로 문단의 관심을 받기시작하고
73년 무렵 ‘삼포가는길’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삼포가는 길에 대해서 한 번 들여다보자.
70년대 산업화로 인해 농어촌이 해체되기 시작하자
농어민들이 뿔뿔이 도시로 흩어져 가난한 노동자로 변한다.
이 소설은 산업화로 인한 우리사회의 어두운 면을
강하게 비난하고 있다.
이때부터 그의 사상은 좌익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다음은 그의 단체 및 조직 활동들에 대해 살펴보면
그 면면이 몹시 화려하다.
자유 실천 문인협회(후에 민족 문학 작가회의)의
주요 활동을 살펴보면
문학이라는 수단으로 정권에 대한 투쟁을 하는것이
그들의 주된 활동이다.
그리고 1974년 그의 스펙타클한 인생에
시동을 거는 일이 생긴다
‘민주질서를위해 권리를 포기하지않겠다’는
성명을 낸 황석영 외 8인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함께 연행된 사람 중
몹시 익숙한 이름이 눈에 띈다.
백낙청?
친일파 아버지를 두고 종북활동의 우두머리에 있는
그 유명한 인물, 백낙청.
‘끼리끼리’ 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인가?
뭐 백낙청의 위엄은 워낙 유명하니 건너 뛰고
계속 황석영에 집중해 본다.
85년도까지 일관되게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루며
산업화를 비난하는 글을 써오던 황석영.
그러다가 85년 5월.
‘죽음을 넘어 시대의어둠을 넘어 광주 5월 민중 항쟁의 기록’
이라는 제목만 봐도 불온한 광주사태를 다룬 황석영의 책이
경찰에 의해 압수 되었고 관련 자들이 연행되었다.
이때 기사에 나와 있듯이 ‘경찰은 황씨의 소재를 찾고있다’
이때부터 황석영의 도망자적 면모가
슬슬 발동이 걸리기 시작한다.
85년 5월 29일.
드디어 도망자 황석영을 찾아 연행에 성공한 경찰들.
16일부터 수배를 내렸으니 13일 정도의 도피생활을 했다.
이때는 초보도망자 시절이라 스케일면에서 아주 소박했다.
그리고 경찰은 조사를 위해 황석영의 집을 수색하는데…?
본가가 광주에 있다? 알다가도 모를 일…
어쨌든 유언비어 날조혐의로 조사를 받게된 황석영은
‘구류10일’이라는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다.
경찰들의 자비로움에 눈물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85년 8월에는 이 불온한 책을 몰래 팔아온
서점주인들 역시 유언비어유표 혐의로
즉심에 넘겨졌다.
구류10일이 너무 약했나?
의지의 황석영을 보라.
문화계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라며
단체시위를 벌인다.
단체로 들고 일어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좌좀들의 취미일까?
풀려난 황석영은 근 1년간 미국, 일본, 유럽,
아프리카 등지를 돌아다니며 꾸준히 요상한
글들을 집필하는데 열중하는데
그러다 1년만에 귀국하는 순간
공항에서 연행당하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동료들의 깨알같은 항의…
안하면 동지애의 결핍.
참, 일베에서는 서로를 부를 때 동지라고 하지 않는다.
어느 좌쫌 신문에서 광주 5.18행사에 참석한
어느 일베가 전향(?)한 글을 올렸는데 그곳에
‘일베 동지’들에게 라는 글이 보여서 마구 웃었다.
요즘들어 좌쫌들의 실수들을 보고 있으니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코메디를 보는 것 같다.
서운하盧?
하지만 이 연행 역시 오래가지는 못하고
21일 오후에 풀어주게 된다.
지난번 연행처럼 구류10일 정도를 받은것으로 추측된다.
문학인들은 부지런하기도 하다.
이번에는 개헌촉구에도 목소리를 높여 주시고(87년 4월)
87년 10월에는
김대중, 김영삼 양 김씨의 후보 단일화를 촉구하기 시작.
이때부터 단일화를 그렇게 좋아했나?
좌쫌들은 단일화라면 사족을 못 쓴다.
87년 12월에는 김대중 슨상님의 자상함을 설명하는
찬조연설에도 목소리를 높여 주신다.
88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북한과의
물밑 접촉이 생기기 시작한다.
88년 5월 황석영의 작품 ‘한씨 연대기’가
6.25 특집극 형식으로 방송을 타기 시작하는데
이 ‘한씨 연대기’라는 작품의 내용을 살펴보면
반공이라는것을 비하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한 작품으로
반공규율사회가 한 인물을 인생의 파탄으로
몰아갔다는 내용으로 6.25를 깎아내리는 듯한
반반공(?)효과를 불러일으게 된다.
88년 7월에는 본격적으로 북한에
러브콜을 보내기 시작하는 황석영이다.
북한 작가들하고 만나게 해달라고 애원을 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대망의 89년…
드디어 황석영의 전설이 시작되는 해이다.
1989년, 황석영의 불법 북한 여행이 시작된다.
한국에서 열렬히 북한에 러브콜을 보내던
황석영의 충성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북한에서는
그를 비밀스럽게 초청을 하게 되고
황석영은 당연히 그 부름에 응한다.
이것은 그의 의뭉스러운 행동으로
근 한 달 가까이 드러나지 않다가 한달 쯤 뒤에
일본에 있는 친구에게 맡겨 놓은 성명문이 발견되어
그가 북에 들어갔음이 밝혀 지게 된다.
황석영은 3월 18일, 일본에 ‘문화’라는 핑계로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위장 후 평양으로 들어 간다.
그가 일본에 도착해 밝힌 선언문을 보면
남한 민중의 통일에 대한 열망에 순종하여
자신이 통일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 위해서 라고 한다.
황석영은 방북전에 안기부 직원에게 슬쩍
자신의 방북계획을 알렸는데
이 때 분명 안기부 직원의 ‘가지말라’는
강력한 경고가 있었음에도
무슨 반항 청소년이라도 되는양
불법 방북을 행하고 만다.
북한에 들어가는 과정도 아주 스펙타클하다.
동경에서 북경으로, 북경에서 평양으로…
이 때부터 마일리지 쌓는게 있었으면
VVVV-VIP이였을 듯…
3월 27일,
드디어 김일성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김일성은 황석영 일행을 격하게 환영하며
함께 오찬을 가지고 방북에 고마움을 표시하며
북한 방송에서는 ‘남조선의 민주투사들이
어려운 환경속에서 투쟁하는것에 지지를 보낸다’는
극도의 칭찬을 받기에 이른다.
막 나가는 황석영 때문에 열난 검찰들…
황석영의 집을 압수수색한다.
검찰들은 황석영을 국가보안법위반혐의
(탈출잠입 회합죄)로 돌아오자 마자
구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때 당시 국보법 제 6조 1항 및 제8조의
잠입 탈출 회합죄를 위반했을 시에는
15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하게 되어 있었다.
구속방침 소식을 들은 황석영과 일행 두 명은
겁을 집어 먹고 4월 3일, 약 10일간의
북한여행을 마친 황석영을 제외한 두 명은
귀국을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
하지만 황석영은 굴하지않고 홀로 북한에 남는다.
대체 남아서 뭘하려는 건지 궁금해 지지 않을 수 없다
4월 9일과 10일에는 금강산을
13일에는 백두산을 등산한 황석영.
한국은 누구누구때문에 발칵뒤집혀지고
난리가 났는데 누구는 띵까띵까 등산놀이에…
이게 바로 신선놀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신나는 여행을 마치고 북경으로 향한 황석영.
당당하게 북한기행문을 내겠다고 포부를 밝힌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김정일이 자신의 책을 읽었고
김일성의 독서량에 감탄했다.’
‘북 주민들의 평등한 모습을보고
많이가지는게 죄라고 느꼈다.’
‘구속할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나는 떳떳하다.’
‘대작이 될 북한기행문을 쓸 것이다.’
‘평양에서 친척들을 상봉했다.
많이 울었다.
내 고향은 평양이다.’
‘내가 가는 곳마다 모두 환영해 주며 울었다’
‘남북 모두에게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발언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고향의 친척을 만나고 있는 황석영의 모습.
정일이와의 다정한 한 컷.
디테일한 그의 북한에서 행적을 살펴보면
북한 문화인들과 술 마시고 여자이야기하고
기사까지 딸린 벤츠를 타고 평양 곳곳을 구경하고
심지어 도우미 아주머니 2명과
요리해 주는 아가씨 한 명까지…
이건 뭐 국빈대접이 따로 없지 않는가.
황석영이 이러고 있는 사이
자신의 부인은 안기부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의지의 황석영 자신은 한달동안
일본에 머물면서 북한여행기를 쓸 계획이라고 밝힌다.
공안당국은 다시 한번 황석영이 돌아 오자 마자
구속시킨다고 일갈하였다.
황석영의 반응은…
4월 27일, 나리타 공항에 도착한 황석영.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저 여유.
놀랍지 않은가?
일본 체류비자가 끝나가서 연장 신청을 한 황석영.
그러나 결과는 거절.
결국 5월 19일 서독으로 도망.
황석영의 가족 3명 역시 한국에서 서독으로
도망을 가기 위해 표를 예약했는데
법무부에서 출국금지 결정.
결국 독일에서 북한기행문을 쓰고있는 황석영.
9월 12일 전화인터뷰로 소식을 알린다.
그런데 애초 말했던 글쓰기에 걸리는 시간이
한 달 아니었는가?
갑자기 말을 바꿔 다음 해 봄에 귀국하겠다고…
그러다가 9월 29일 인터뷰에서는 다시 말을 바꿔
3개월간 글쓰다가 미국으로 가겠다고 선언한다.
좌쫌들은 자신들 말 바꾸기를 참 쉽게 한다.
그리고 이 인터뷰에서 앞으로
김일성 전기를 쓰겠다고 좌쫌으로서의
당당한 포부를 밝힌다.
11월이 되어 황석영의 방북기를 게제했던
출판사와 출판사 사장집이 압수수색을 당하고
심지어는
그의 고교생 아들까지 안기부에서 조사를 받게 된다.
부인에 이어서 아들까지…
1990년 4월 이번에는 황석영이 미국에 떴다.
그리고 이 때는 3개월뒤에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출국금지가 풀린 황씨의 가족들도
역시 독일로 출국했다.
분명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여러번 했던 황석영.
과연…
1990년 8월, 독일에서 이번에는 부인과 함께
다시 북한으로 들어간다.
1990년 8월 15일, 범민족대회에 참여한 황석영은
29일에 평양을 떠난다.
범민족대회란 무엇인가?
바로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조국통일민족연합
일명 범민련이 이 때 결성되고
황석영은 남측대표랍시고 참석을 하였다.
알면 알수록 대단한 인간이 바로 황석영이다.
그러던 중 1990년 10월,
북한에서 충격적인 소식이 나온다.
그것은 바로
북한에서 ‘광주’ 영화를 만들게 되고
시나리오는 바로 황.석.영.
시나리오 집필을 핑계로 한국에는
돌아올 생각을 안할 것이 예상되는 부분이다.
1990년 12월 20일 황석영의 행보가 포착된다.
독일에서 범민련 모임에 참석한 황석영.
그리고 시간이 흘러 1991년 11월 14일.
독일을 떠나 정착하기 위해 미국으로
도망을 치는 황석영.
그로부터 약 6개월 뒤
황석영이 드디어 귀국의사를 밝혔다.
인터뷰에서
‘북한을 4번 방문했으며
김일성을 7번 만났으며
자신의 해외 활동은 잘못이 없다,
자신의 구속으로인해 국가보안법 철폐의
당위성이 대중화되길 바란다’고 헛소리를 마구 한다.
1993년 4월 27일 귀국한 황석영 가족과
공항서 끌어안고 눈물을 찔찔 흘린다.
이는 그가 한국을 떠난지 약 4년만의 일이다.
자, 지금까지 팩트로 확실하게 드러난
그의 도망 행적만 보더라도
한국 – 일본 – 북경 – 북한 – 북경 – 일본 -
서독 – 미국 – 서독 – 북한 – 서독 – 미국 – 한국
(이외에 5번의 방북이 더 있었고
다른 나라 어디를 더 갔는지도 알 수 없다.)
그의 행적은 간첩의 행위에 버금가는 행적이다.
국보법위반을 저지른 황석영은
끝까지 국가보안법을 비난하며 구속된다.
검찰 조사 결과 황석영은
김일성의 회고록을 집필했으며
25만달러의 공작금을 받았음이 확인되었다.
1993년 10월 11일.
황석영에게 징역 8년 형이 구형되었다.
그리고 다음해 항소심에서 6년형이 구형되었다.
그러나 1994년 다시 대법원에서
기밀누설죄로 7년형을 재선고 받는다.
그런데 97년 12월 모두가 알고 있듯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98년 2월 취임하게 된다.
슨쌍님이 한 일은?
바로 3.1절 특사로 황석영 석방.
황석영이 풀려나는 날
두자녀와 기쁨을 만끽하고있다.
그런데 부인이 보이지 않는다.
이상한 기운이 맴돌기 시작하는 것일까?
이쯤에서 황석영의 가정사를 한번 알아볼까.
황석영의 첫 부인은 소설가 황희담.
이혼 하자마자 재혼한 두번째 부인이 김명수.
황석영의 도망자시절을 함께 했던 전 부인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이 두번째 부인과도 이혼을 하고
새로운 여자를 만나게 된다.
일반인과는 클래스가 다르지 않는가…
2번의 이혼.
아, 꽁지영이가 있다.
클래스가 우리와는 다르고 황석영이와는 같은 급이다.
하지만 그 부인은 황석영을 따라서
북한에 들락날락거렸던 죄로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황석영은 사면된 이후 한국에서 자신의 소설을
드라마로 만드는 과정에서
드라마 보조작가랑 동거를 한다.
그리고 황석영은 이혼소송을 해서 승소하고
열이 난 김명수는 5억원 짜리 소송을 걸게 된다.
이 소송은 결국 흐지부지 넘어가게 되고…
하지만 황석영은 사생활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사게 되고
그의 신뢰가 추락하게 되어버렸다.
그러다가 복병이 등장하는데
바로
좌빨편향 거짓선동 전문 방송인
‘무릎팍도사’ 출연으로
그간 자신의 행적들을 보기좋고,
듣기좋게 포장을 한다.
지금까지 황석영의 파란만장한 인생의 일부를 보았다.
그러면 여기에서 5.18만 되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노래 ‘임을 향한행진곡’이 왜 문제가 되는가를
살펴보자.
‘님을 위한 교향시’는 황석영이
김일성에게 불려가 제작한 북한의 5.18영화이다.
이 영화의 주제곡이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황석영이 가사를 쓴 5.18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며, 이 노래가 북한의
5.18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된 것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마지막으로 많이 알려진 그의 북한 사랑을
사진으로 한번 보자.
그가 간첩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TIP]
지난 4월28일.
광주서구 치평동에 소재한 김대중센타 광장에서
민주당이 하고 있는 김대중우상 숭배정치를 비판하는
일인시위를 하였었습니다.
막 활동을 시작하자말자 어떤 사람이 와서 시비를 겁니다.
“어! 뭐여?
당신 전라도사람이여?
이게 뭔 짓거리여?”
그러자 뒤따라온 여자가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광주에서 쫒아내버려야 해요.
주제를 모르고 염병하네!”
전라도사람은 김대중을 숭배해야한다는 강요와
그렇지 않은 사람은 호남에서 쫒아버려야 한다는
의식에 매여 나를 향해 비웃거나
외면하고 가는 사람들을 향해 힘껏 외쳤습니다.
“거짓을 숭배하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영토내준 매국노를 애국자라고,
분열정치모리배를 민주투사라고,
비굴한 자를 행동하는 양심이라고 숭배하는
김대중우상은 소멸되어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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