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18

영화 , 최명길과 김상헌 되돌아보기 < 조선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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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남한산성>, 최명길과 김상헌 되돌아보기이전 기사보기다음 기사보기
기자명이병헌
입력 2017.10.23


조선개국과 통치바탕이 된 성리학, 조선을 망국으로 이끄는 폐쇄주의로 변질되다

병자호란을 기점으로 탄생한 노론, 망국과 매국 소굴이 되다

병자호란 당시 지배세력의 난맥상, 오늘날도 다르지 않게 되풀이 되다

스스로 주인이기를 포기한 사대주의, 기득권 지배세력은 호의호식,

그들을 떠받치는 민생은 죽지 못해 사는 처지로 전락하다

글: 이 병 권(시민기고가)



이 영화는 김훈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병자호란이 발발한 1636년 12월 14일 부터 이듬해 1월 30일까지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47일 동안 남한산성에 대피한 인조 정부 내의 치열한 노선투쟁과 처절했던 당시 모습과 무능한 정부의 부끄러운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낸 영화입니다. 이 책을 읽었던 당시, 그 먹먹하고 암담했던 기억이 떠올라 쉽게 영화관을 찾지 못했습니다. 백성은 없고, 허공에 맴도는 말만 무성했던 그 통한의 시간을 다시 떠올려 우리네 한심했던 조상들을 다시금 도마 위에 올리는 것이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남한산성의 47일은 이후 조선 역사의 흐름을 바꾼 중요한 변곡점이기도 합니다. 또 우리 역사에 너무도 많은 영향을 미친 까닭에 스스로 몇 가지 질문을 던지며 객석에 앉기로 했습니다.

조선의 성리학은 무엇을 남겼는가?

흔히들 조선은 '철학의 왕국'이었다고 합니다. 듣기에는 그럴듯하지만, 사실은 다양하고 치열한 철학 논쟁과 통섭을 한 것이 아니라, 딱 한 가지 성리학 내의 주기와 주리를 둘러싼 논쟁만 존재합니다. 퇴계와 율곡에서 발화된 이 논쟁도 조선 후기에 가면 사실상 그 차이조차 불분명해 집니다.

고려 말 개혁 사상으로 도입되었던 성리학은 정도전, 권준 등을 중심으로 토지개혁과 권문세족의 혁파를 이루어낸 혁명사상이었습니다.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흥 사대부들은 과거 그 어느 계층 보다 논리, 철학, 재생산구조가 탁월했지요. 항시 명분을 중시하였기에 그들은 목숨을 걸고 임금과 지배계층의 잘못을 질타하고 스스로가 '군자'가 되어 '덕' 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이상 국가를 꿈꾸었습니다. 그래서 사대부, 선비는 무릇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고 '충'과 '효'로서 국가사회의 근간을 튼튼히 하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역사에서 발견하는 조선 성리학은 딱 거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사람의 됨됨이는 그 사람이 어려운 지경에 처했을 때 그 진면목이 나타나고 한 시대의 사상이나 체제의 탁월성 역시 국가 위기상황에서 판가름 됩니다. 로마는 위기에 처할 때 마다 원로원 귀족들이 솔선수범 하여 ‘노블리제 오블리주’를 실천해 제국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중국이 만리장성을 쌓아 기마민족의 침입을 막으려 했으나, 미봉책 이었을 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같은 시기 로마는 세계로 길을 내어 세계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역사에서 개방과 포용으로 나간 민족과 국가는 대부분 성공 했으나, 닫아걸고 다양성을 부정한 독선의 길은 대부분 패망의 길을 걸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조선의 성리학은 다양성과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상실한 채 독선과 아집을 선택함으로써 더 이상 시대적 과제를 해결할 추동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남한산성 북문. 병자호란 당시에도 저렇게 흰눈이 내린 한겨울이었다. 사진출처: 경기 광주시, 남한산성문화제

성리학-지배자의 교리

조선 중기가 지나면서 조선 건국 때 단행되었던 토지개혁은 물거품이 됩니다. 각종정변에 뒤이은 공신전들이 난립하면서 대거 토지 겸병과 집중이 일상화 되고, 조세와 국방의 의무에서 배제된 양반님들 덕택에 양민들의 삶이 도탄에 빠지게 됩니다. 양반사대부는 지배계층, 수탈의 주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성리학은 유학의 유파 중에서도 권위와 명분을 가장 강조합니다. 주자 이후 4서3경 이외의 새로운 경전은 허용 하지 않았습니다. 주자의 성리학을 완성체로 보았기에 이후 유학의 과제는 수행심화에 있었지 결코 새로운 유학의 출현에 있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도그마(교리)의 단초가 마련된 것입니다. 이는 곧 철저한 지배이념으로 작동한다는 의미입니다. 양반들의 조세와 군역 회피를 정당화 하고 일반 양민들에게는 끝없는 충성만을 강요하는 사회질서, 그 질서의 중심이 바로 성리학 체제였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상과 현실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상은 옳은데 시대가 문제이었다고 하거나 사람이 문제였다는 주장은 사실상 궤변이라고 봅니다. 사상과 철학은 바로 그 한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대정신이라는 것도 시효가 있는 것이고,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항상 옳고 진리라고 주장되는 사상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종교입니다. 의심이 필요 없는. 조선의 성리학이 그런 종교가 된 것입니다.

양반, 사대부만을 위한 종교

종교는 의심을 배척합니다. 이단으로 처단합니다. 조선 중기 이후의 성리학이 그랬습니다. 충의 대상은 자신들의 종교를 창시한 중국 한족인데 당시로서는 명나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조선은 스스로 명나라 제후국이라 칭했으므로 중국에서 오랑캐로 칭한 모든 민족, 성리학 지배질서를 모르는 모든 국가는 모두 무지하고 문명을 모르는 금수와 같으니 천시하고 경멸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조선 성리학자들, 특히 인조반정(1623) 이후 집권한 서인들이 이후 숙종 6년(1680) 경신환국을 계기로 노론으로 중무장 하고 사유 없는 성리학, 종교로서의 성리학을 완성했습니다. 우리가 드라마에서 흔히 접하는 '사문난적' 이란 용어도 조선 후기 노론세력이 자신들에 반대하는 자들을 탄압하는 전형적인 단죄의 틀입니다. 당시로서는 '학문을 더럽히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들' 이란 뜻이었지만, 서기21세기 한국에서는 '빨갱이'라는 말로 바뀌어 쓰이고 있다고 보입니다.

저는 여전히 궁금합니다. 조선의 성리학이 그 시대 나라와 백성의 삶과 발전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국난이 닥칠 때 버팀목 역할을 하였는지, 계속 질문하고 답을 찾을 것입니다.

최명길과 김상헌의 다른 길

소설과 영화 <남한산성> 의 주인공은 당연히 최명길과 김상헌입니다. 영화에서 최명길(1586~1647)은 청에 대한 주화파, 김상헌(1570~1652)는 척화파를 상징합니다. 영화와 실제 모두에서 청나라와의 화친(사실상 항복)을 주장한 최명길은 철저히 소수자였습니다. 남한산성 내에서도 최명길은 자신의 화친론으로 인해 끊임없이 매국노로 탄핵되었고, 오랑캐에게 고개를 숙이고 어버이와 같은 명나라에 등을 돌렸다는 이유로 은혜를 모르는 자로 조선조 말 까지도 지탄받았습니다. 영화에서는 김상헌의 강경 척화파가 명분도 있고 자존심도 세우고 오히려 청나라와 강화하는 것이 나을 수 있다는 논리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척화파는 백성이 아닌 자신들만의 명분만 중시했을 뿐, 현실인식과 국가이익 측면에서 쓸모가 없었습니다. 마치 이승만이 입으로만 북진통일을 외치다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긴 것과 유사합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마지못해 파병한 것을 두고 극진히 숭상한 서인들의 눈에 백성과 국가의 안위는 없었습니다.

병자호란 뒤 최명길과 김상헌의 길은 또한 갈립니다. 애초에 최명길은 인조반정에 적극 참여하여 1등 공신이 되었습니다. 이후 고속 승진하여 병자호란 당시에는 이조판서를, 병자호란 뒤에는 죄의정과 영의정을 두 차례나 지냈습니다. 인조가 가장 신임한 중신이었습니다. 그는 병자호란 이후 자청하여 청과의 어려운 외교문제들을 목숨 걸고 해결했습니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대규모로 공격하는 과정에서 조선에 파병을 거듭 요구했습니다. 이에 최명길은 자청하여 죽을 것을 각오하고 심양으로 가 조선이 남한산성에서 항복한 것과 파병은 다른 문제라고 버텼다고 합니다.(1637) 당시 청나라 황제는 화를 내고 가두었으나 곧 방면하고 최명길의 의기를 칭찬하였다고 합니다. 최명길은 현실주의자 였습니다. 그는 명나라가 비록 망해가지만 관계를 이어가고자 승려, 독보를 보내 명과 교섭하였는데 이것이 청에 발각되어 심양으로 압송되기도 했습니다.(1640)

그곳 심양에서 최명길은 앞서 끌려온 김상헌을 만나고 다음과 같이 시를 나누며 묵은 감정들을 씻었다고 합니다.

"이제야 서로 의 우정을

되찾으니, 문득 백년 의심이

풀리는구나 (김상헌) "

“그대의 마음은 물 같아

끝내 돌아가기 어렵지만,

내 마음은 둥근 고리 같아

때로는 돌아간다오 (최명길) "

최명길은1645년, 소현세자, 김상헌, 이경여 등과 청에서 풀려나 귀국합니다.

최명길의 고군분투

최명길은 병난 이후 청과의 외교문제 중 특히 청에 끌려간 여인들 포함 조선 포로문제를 해결하고자 각별히 진력하였습니다. 1637년 인조의 허락을 받아 은을 갖고 대규모 포로 석방을 위해 전심전력했다고 합니다. 또한 민간의 개별 상환작업도 청의 협력을 얻어 상당히 진척시켰다고 합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조선인 수천 명을 귀국시켰다고 합니다. 청에 끌려간 수만 명에 비하면 아주 적은 수에 불과하지만 당시 조정에서 최명길만큼 포로석방에 발 벗고 나선 사람이 없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최명길이 관심을 갖고 주창한 또 하나의 병자호란 후 수습책 중 하나가 이른바 '환향녀 속환과 이혼 불가론' 입니다. 병자호란 당시 청에 끌려갔다가 속환된 여인들이 '환향녀'라고 불리며 버림 받고 심지어 이혼 당하는 병폐를 막자는 취지의 내용입니다. 당시 사대부들은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인 여인들에게 명분과 정절을 지키지 못했다고 전쟁책임을 물었다고 합니다. 최명길은 이러한 사대부들의 몰염치를 바로잡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조정은 최명길의 이러한 노력을 반대했습니다. 책임질 줄 모르는 사대부의 민낯입니다. 일제 위안부 문제와 겹쳐지는 대목입니다. 욕으로 쓰이는 '화냥년' 이란 말이 병자호란 후에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아녀자들을 부르는 말에서 나왔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바입니다.

최명길은 대동법도 추진했습니다. 대동법을 시행코자 했으나 이 역시 서인들의 반대로 무산 되었습니다. 대동법은 광해군을 권좌에서 끌어 내린 경제개혁 방안입니다. 소유한 토지의 크기에 따라 세금을 매기자는 취지의 법인데 당시 기득권자의 이익에 반했습니다. 오늘날의 공정거래법과 종합부동산세를 합친 것 보다 더 강력한 법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병자호란 때, 인조정권은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군대에 항전하다 결국 항복했다. 송파구 삼전도에서 항복의례를 행했다. 그 때 세운 대청황제공덕비, 일명 삼전도비다. 청나라 만주글, 몽골글, 한문 3개 국어로 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 쓰러져 있는 것을 일제가 바로 세운 것이다.

대안과 책임

같은 서인이었지만 이렇게 최명길의 행보는 달랐습니다. 정치인은 정책을 제시하고, 그 실천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최명길의 정책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 생각저변이 다른 서인들과 달랐음은 분명합니다. 최명길은 성리학으로 출발 했으나 양명학을 두루 섭렵 했고, 기학과 무예와 병법에도 능통했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에서 양명학은 같은 유학의 일파였지만 성리학에 비판적인 입장 때문에 이단시 되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최명길도 독학을 하였다고 합니다. 최명길은 병자호란 이후 병난의 수습과 개혁에 매진 한 책임지는 정치가 였습니다. 그는 청과 담판이 결렬되면 청에 의해 죽을 것이라 생각하고 유언장과 관까지 준비해 심양으로 갔다고 합니다. 목청껏 척화를 주장하다 청에 머리 조아리기 바빴던 그 서인 노론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입니다.

안동 김 씨 일문의 창시자 김상헌

1645년 청에서 풀려나 귀국한 김상헌은 1652년 작고 할 때까지 이렇다 할 정치 활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심양에서 귀환하기 1년 전인 1644년 하늘 같이 떠받들던 명나라 멸망하고 오랑캐의 나라 청이 대륙을 통일했으니 그로서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의 74세 되던 해에 명나라가 망하자 시를 써서 심정을 드러냈는데 그의 완고한 척화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지난 날 사신으로 입조해 빈객이 되니

바다 같은 황제 은혜 신하에게 미치었네

하늘과 땅이 뒤엎어진 오늘을 만나니

아직 죽지 않아 부끄럽게 의를 저버린 사람이 되었구나"

이 글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그는 조국과 백성에 책임지는 정치인이 아니라 사대의 대상인 중국 명나라의 충실한 신하였습니다. 이러한 김상헌의 충실한 사대주의는 그의 제자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의 핵심기치로 계승됩니다. 조선이 망할 때 까지 그의 이름은 '숭명배청'의 상징이 되었고 인조 이후 왕들은 노론에 의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김상헌을 기려야 했습니다. 김상헌의 자손들은 훗날 조선을 망조로 이끈 세도정치의 상징, 안동 김 씨입니다.

김상헌의 양자였던 김광진은 세 아들, 김수종, 김수홍, 김수항을 두었습니다. 또 3남 김수항은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김창섭의 장남 김재점이 세도정치의 시조인 김조순입니다. 김상헌의 자손들 모두가 노론의 핵심 세력이었고 영의정을 비롯한 조정의 주요 관직을 독차지 했습니다. 김상헌도 인조반정의 공신이었으니 노론의 시작에서 끝을 이끈 노론의 대표선수 집안이었던 것입니다. 참고로 최명길의 후손들은 소론의 길을 걸었다고 합니다.

나라 팔아먹은 노론

조선을 일제에 팔아먹은 노론의 마지막 영수가 이완용이었다는 것은 이미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눈여겨 볼 것은 이완용 개인이 아닌, 노론전체가 매국에 가담해 그 공로로 일제로부터 작위를 자랑스럽게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1910년, <조선사편수회> 가 발간한 「조석귀족약력」에 따르면 작위 수여자 총 76 명의 조선인 이 있습니다. 소속 당파를 파악할 수 있는 64명 중 88%에 해당하는 56명이 노론 소속이었습니다.(이덕일,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221쪽 참조) 왕족과 나라의 대신들이 합심해 팔겠다는데 그 무엇인들 팔지 못하겠습니까.

이완용의 매국의 변이 아주 걸작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중국에 사대해 왔는데, 이 제와서 그 사대의 대상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됩니까?”

앞서 김상헌이 명의 몰락을 애도하며 명 황제의 신하로 지칭한 것과 비교됩니다. 300년의 전통에 빛나는 노론 사대주의 대단하지 않습니까. 지난 5월 초까지 대한문 앞에서 태극기와 미국 성조기를 흔들며 '박근혜 무죄'를 주장한 그들도 이렇게 강변 할지 모릅니다.

"옛날에 우리 조상들은 중국에 사대했고, 일본에도 했는데, 세계 제일인 미국에 무조건 사대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

식민사학자들이 언급조차 피하고 싶어 하는 것

바로 노론입니다. 인조반정 이후 300년이나 권력을 유지한 노론 세력을 연구한 책이 얼마나 있는지 알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의 없습니다. 이주한 선생이 쓴 「노론300년 권력의 비밀」 (2012) 한 권 밖에 없습니다. 연구서로 단행본은 이것 밖에 없을 정도입니다. 역사학계가 담합하여 연구하지 않았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영화 <남한산성>은 우리에게 이제 좁은 산성에서 나와 역사의 광장에서 더 많은 사유를 하라고 재촉하는 것 같습니다. 사유하지 않거나 사유를 막고 주어진 사고의 틀만 을 고집한다면 자존도 없고 남의 생각 틀에 기대는 사대주의가 자라날 수밖에 없음을 영화<남한산성>이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영화 <남한산성>은 오늘날 시사 하는 바가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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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미  201708
017· 

홀로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자. 



영화 남한산성에 관한 평은 페이스북에 걸리는 대로 다 읽었다. 
김훈의 ‘남한산성’도 예전에 읽었다. 영화를 선전하는 동영상도 놓치지 않고 봤다. 그래서 영화는 아는 것을 현실화시키는 정도로 그칠 것 같아 재미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정말 재미있었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을 한 치도 넘지 못했음에도 생생했고 절실했고 아름다웠다. 

떼거지로 합창하는 것은 말이 아니다. 
인조 앞에 엎드려 말하는 그 수많은 자 중에 
혼자 생각하고 자신의 생을 걸고 말하는 자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거슬러 홀로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자. 그래서 파국으로 치닫는 물길을 돌리는 자. 말에 현실의 힘을 담는 자. 
영화에서는 김상헌이 말을 한 것으로 나오지만 김상헌은 떼거지로 몰려가는 흐름의 제일 선두에 섰을 뿐이다. 

영화는 남한산성 당시에 최명길과 김상헌이 서로을 온전히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으로 해석하지만 역사적 사실로 보면 당시에는 그럴 수가 없다. 

감독은 이 후 드러난 두 사람의 인생을 남한산성이라는 일생일대의 현장에 축약시켜서 그렇게 표현한 것 뿐이다. 
인생의 막바지에 북경의 차가운 감옥, 옆방에 갇혀 조우한 그때야 비로소 서로를 인정하고 화해한 것이다.

“명예만을 탐한 사람인 줄 알았소.”
“오랑캐에 넘어간 사람인 줄 알았소.”
어떤 시사회에서 날쇠로 나오는 고수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많은 분들이 김상헌 혹은 최명길의 입장에서 영화를 평하시는데, 정작 제대로 영화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민초인 날쇠의 입장에서 서서 봐야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 날쇠가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는 최명길과 김상헌의 싸움의 판관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핵심권력층은 자신의 생사관과 자신의 개인적 신념으로 국정을 끌고 가서는 안된다. 
그것이 김상헌과 최명길의 근본적인 차이다.

사실 나와 마찬가지로 영화를 보는 사람들 대부분이 김상헌과 최명길 같은 핵심권력층이 아니라 날쇠와 같은 서민일뿐이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고통스럽지만 반드시 가야할 삶의 길인지 분명하게 드러난다. 

김훈의 책은 언제나 관념의 어두운 터널과 같아서 헤매고 난 후 기억에 남는 것은 모호한 무게감뿐이다. 
이 영화를 보니 오랜만에 다시 김훈의 남한산성을 읽어볼 엄두가 났다.
 하지만 영화관에서 돌아오는 길에 도서관에 들러보니 다들 빌려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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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헌 최명길 두 충신에 대한 얘기는 영화 ‘남한산성’을 통해 잘 알려져 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과 소설가 김훈이 나눈 대화로도 유명하다. 김 작가는 ‘남한산성’을 탈고한 지 몇 년 후 초겨울 서울행 KTX열차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만났다. 김 전 대통령은 김 작가에게 김상헌과 최명길을 어떻게 보느냐고 묻더니 혼잣말로 또렷이 대답했다고 한다. "난 최명길을 긍정하오." 이념과 현실 사이 벽에서 몸을 갈며 인고의 세월을 버텨온 그가 최명길의 실리주의에 손을 들어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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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 속 최명길의 유연한 정치력, 그 비결은?
영화 <남한산성>을 결국 봤다. 원래는 다른 거 보려했는데, 어쩌다 보니 그리 됐다.
언론 지면이건, 페북이건 워낙 많은 이야기가 나왔던 영화인데다, 김훈의 원작도 봤던 터라, 사실 안 봐도 본 느낌이었다.
듣던대로 영상과 음악은 아름다웠고, 대사 가운데 상당수는 원작을 따왔다.
당시 역사 및 영화에 대해 잘 거론되지 않은 사항 몇 가지를 적어본다.
1. 폭넓은 이념적 스펙트럼 : 양명학자 최명길
<남한산성>에 대한 숱한 글들이 왜 이 대목을 빼먹는지 모르겠다. 최명길은 당시로선 드물게 양명학에 조예가 깊었다. 알다시피 당시 주류 이념은 성리학이었고.
퇴계 이황이 <전습록논변>을 통해 양명학을 잘근잘근 비판한 이래, 조선 선비들에겐 양명학은 금기였다. <전습록>은 양명학의 대가인 왕수인(왕양명)의 글을 모은 책이다. <전습록논변>은 그걸 논리적으로 비판한 글이고.
옛 운동권들이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해선 알지 못한 채, 그걸 비판한 레닌이나 로자 룩셈부르크의 글만 읽었던 것처럼, 조선 선비들 역시 <전습록>은 잘 모르면서 <전습록논변>만 보고 양명학을 사문난적 취급했다. 마치 옛 운동권들이 레닌이 수정주의는 나쁘다 했으니, 수정주의는 아예 거들떠 보지 않았던것처럼.
하여튼 그런 시대에 양명학을 깊이 공부했다는 건,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최명길이 당대의 통념에서 벗어나, 유연하고 실용적인 외교노선을 추구했던 배경엔, 그의 폭넓은 이념적 스펙트럼이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2. 엘리트주의와 책임감
21세기 한국은 수험의 나라다. 청소년기, 청년기의 몇 가지 시험 성적이 평생에 걸쳐 영향을 미친다. 청년들은 죄다 공무원하겠다고 하므로, 공무원 시험 경쟁률은 살인적이다. 이른바 '헬조선' 현상의 한 축.
'헬조선' 말고 '진짜 조선'은 더 심했다. 글을 아는 자는 모조리 과거 시험에 목을 맸다. 지금이야 시험 말고도 사업이나 정치로 성공하는 길이 있지만, 그때는 오로지 과거 시험뿐. 여기서 성공한 자의 우월감, 낙오한 자의 열패감 역시 살인적이었다. 아울러 그걸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문화였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말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분위기.
'시험의 나라' 조선의 대표적 승자는 율곡 이이다. 이른바 '구도장원공'이었다. 과거 시험은, 소과 초시부터 대과 전시까지 여러 단계인데, 율곡 이이는 무려 아홉 번을 장원(수석)을 한 것이다. 이른바 '공부의 신', '수험의 달인'으로 당시에도 엄청난 스타였다고 한다. 이런 기록은 조선 500년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런 기득권자가 대표적인 경장론자(개혁가)였다는 게 조선의 복이었고, 율곡 이이의 미덕이었다.
최명길도 율곡 이이만큼은 아니지만, 당대의 대표적인 '수험의 달인'이었다. 고작 스무 살 나이에 과거에 합격했는데, 소과부터 대과까지 같은 해에 붙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대학 입시 치른 해에 행정고시까지 함께 쳤는데 모두 합격한 경우. 역시 조선 500년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시험의 나라'에서 '수험의 달인'이라는 건, 정치적으로 엄청난 자산이었다. 실제로 최명길은 자신의 지적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고 한다. 주변에서도 인정해주는 분위기였고. 최명길이 좀 이상한 이야기를 하긴 하나, 그래도 엄청나게 똑똑한 녀석인 건 맞아, 라는 식. 실제로 최명길을 비판하는 글도 대개는 '최명길은 재주는 있으나~' , '최명길은 재주만 믿고~' 등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척화'가 주류였던 당시 조선 정치 지형에서, 외롭게 '화의'를 주장할 수 있었던 배경엔, 최명길의 뿌리 깊은 엘리트 의식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어지간한 비판쯤은 논리와 지식으로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 물론 그게 지나치면 독선이 된다.
다만 최명길은 독선에 빠지지 않고, 시종 유연한 자세를 취했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최명길은 영의정이 됐는데, 그때는 또 명나라와의 물밑외교를 했다. 지금 우리야 명-청 전쟁의 승자가 청이라는 걸 알지만, 당시엔 누가 그걸 알았겠나. 명이 승리할 경우에 대비해서 명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한때는 명에 대한 사대를 고집하는 선비들과 싸우며 청과의 화의를 주장하고, 또 다른 국면에선 명이 이길 경우에 대비해서 명과 물밑 외교를 하는 자세. 정치인은 그래야 한다고 본다.
한 가지 미덕 추가. 명-청 전쟁이 청의 우세로 기울면서, 명의 대신들이 청에 대거 투항했다. 기밀 문서를 들고 말이다. 그 때문에 최명길이 몰래 명과 교섭한 사실이 청에게 들통 났다. 청 황제는 크게 화가 나서 조선의 영의정인 최명길을 압송하라 했고, 최명길은 조사를 받고 투옥됐다. 하지만 그 과정 내내 모든 게 자기 책임이며, 자기 혼자 벌인 일이라고 했다. 좋은 정치인이다.
3. 남성, 양반 기득권을 거스르는 정치 행보
'심즉리'를 주장하는 양명학은, 상당히 진보적인 학문이다. 지식이 짧고 신분이 낮은 평범한 사람을 존중하는 철학이다. 반(反)엘리트주의적인 면이 있는데, '수험의 달인' 최명길은 어쩌다 그런 이론에 빠졌을까.
이것도 재미난 대목이다. 이른바 '엘리트'가 '반(反)엘리트주의'적인 사상에 빠지는 경우는 지금도 흔히 본다. 일종의 악세사리인 경우도 있고, 막연한 부채의식의 한 표현인 경우도 있다. 또 인간의 사상이란, 그의 존재조건을 기계적으로 반영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현실에선 '반(反)엘리트주의'적인 사상에 골몰한 '엘리트'가 어떤 국면에선, 그러니까 자기 기득권과 사상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선 기득권을 고르는 경우가 많다. 그 뒤 사상을 바꾸거나, 아니면 이런저런 궤변을 늘어놓거나.
최명길은 그런 점에서도 매력적이다. 남성, 양반 기득권을 거스르는 정치적 결정을 했다. 전쟁 과정에서 많은 여성들이 청으로 끌려갔다. 일부가 돌아왔는데, 남편들은 이혼을 원했다. 오랑캐에게 끌려갔던 부인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게다. 최명길은 동료 남성 양반들의 정서를 거스르는 결정을 했다. 청에게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성과의 이혼을 금지했다. 하지만 상당수 사대부들은 이런 결정을 무시했다고 한다.
부유한 양반들의 기득권도 거슬렀다. 청에게 끌려간 이들을 데려오려면 돈을 내야 했다. 노예를 다시 사들이는 값이다. 이른바 속환이다. 문제는, 너도나도 속환을 시도하니까, 조선인 노예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은 속환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의 속환은 최상류층의 특권이 됐다. 이는 속환 가능한 인구의 수가 대폭 줄어든다는 뜻이다. 청나라 노예 상인들에게만 좋은 일이라는 뜻도 되고.
최명길은 이에 대해 강한 규제 정책을 내놨다. 부유층의 반발을 누르고 속환 가격 상한선을 정했다. 그보다 높은 돈을 주고 속환한 사례가 발견되면 처벌하겠다고 했다.
쓰다보니 길어졌다. 김상헌 이야기도 쓰고 싶은데, 그건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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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파 김상헌하면 문정권의 조국이죠]
척화파로 유명한 김상헌을 보니 문재인정권의 인물들과 딱 겹치는데 특히 조국이 그렇군요. 앞에서는 원리주의 깃발을 흔들고 뒤에서는 자기 이익을 챙기죠. 문정권 인물들이 자주성을 고취시키기 위한 영화 '깃발'을 만들면 조국이 김상헌 배역을 하면 되겠어요. 마스크도 좋구요. 그리고 당연히 조국을 중심으로 시나리오가 굴러가겠죠. 조국이 연기하면 연기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일상 하던대로 보여주는 생활다큐 '인간극장'이라고 생각하고 연기하면 그게 메쏘드 연기가 되는 것이니 남우주연상을 받을 수 있을 듯해요.
김상헌이 나가서 싸우다 죽자라면서 자기는 살 길을 찾아가는 것도 정말 문재인정권스러운데 역시 조국이 가장 적임자죠. 본인 때문에 지금 가족 여럿이 옥고를 치르게 생겼는데도 본인은 등산 다닌다고 하죠. 문재인 캠프에서 수행비서한 사람이 운전기사도 한다고 하구요. 조국은 부인이 법정에서 원고인 검찰과 다투야 할 영역이라고도 했죠.  최명길같은 사람이 유교주의 국가의 고위관료로서 종묘사직이라는 임무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이니 정말 원리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오랑캐와 타협이나 하는 한심한 사람으로 폄하되어 있구요. 이것은 지금 한국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죠. 정말 자신이 아니라 대의명분을 위해서 노력한 사람은 푸대접받죠. 깃발들고 부추킨 사람들은 알고 보면 빠져나가 있고 순진한 사람들만 희생이 되기 쉽상이죠.조선의 명분론자들은 실은 원리주의자도 아니었죠. 성리학이야 보편이념이니 원리라고 할 수 있지만 명이니 청이니 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만일에 청도 성리학을 채택하면 같은 동학인데요. 그런데도 아에 처음부터 청은 오랑캐라고 규정했죠. 그리고 실제도 청이 성리학을 무시한 것도 아닌데요. 이렇게 일단 해외의 진영을 설정한 다음에 그 진영을 지지하냐 아니냐로 국내의 진영을 나누죠. 문재인정권도 미국/일본 쪽은 빈정상해하죠. 중국과 북한 진영을 편들어야 자기편이죠. 그것 아니라고 하면 못잡아먹어서 안달나하구요. 문정권과 척화론자들은 참 닮아있죠. 아래 기사 쓴 기자는 한동안 역사 이야기와 현실을 잘 못 연결시켜서 억지스러운데 이번 기사는 성공했네요. 굳이 시사점을 안써도 병자호란의 척화파하면 문정권이죠. ----인용인조반정의 공신이 아니었던 김상헌은 최명길보다는 상대적으로 책임도 덜하고, 자유로운 입장이었습니다. 그는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사림의 입장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냈습니다.비변사 당상 시절엔 국왕이 ‘정차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라고 묻자 “하늘의 도(天道)를 믿으십시오”라고 했고, 남한산성에선 “군신(君臣)은 마땅히 맹세하고 죽음으로 성을 지켜야 합니다. 이루지 못하더라도 돌아가 선왕을 뵙기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라면서 왕에게 결사항전을 설득했습니다.병자호란 후 청나라가 명나라를 칠 원병을 요구하자 “명분과 의리를 저버리면 재앙이 있으니 옳은 의리를 지키고 하늘의 명을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철저한 대명의리론을 고수했습니다.하지만 병자호란이 끝날 무렵 그가 보인 행보는 논란이 됐습니다. 포위가 풀리고 인조가 성 밖으로 나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을 때, 그는 동문으로 조용히 남한산성을 빠져나가 고향인 안동에서 칩거했습니다. 그의 처신을 놓고 전후 처리에 대한 책임을 회피했다는 비난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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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in Jung
7 October 2017
  · Seoul, South Korea  · 
소설도, 영화도 보지 않았지만... 왜 오늘 얘기 같을까?
난 김상헌이나 최명길 같은 지위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럴 능력도 없는데... 
(편한 게 역사적 상상이니... 내가 그 시대에 살았다면 아마도 최명길이었으리라.. 내 스승들의 모든 가르침이 "현실주의" 였으므로...)
김형민
6 October 2017
  · 
남한산성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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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마다 먼저 보는 것이 있고 유심히 보는 부분이 있다.  그 누구도 무얼 먼저 봐야 한다거나 어느 부분을 유심히 보는 것이 도리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개인 취향이라는 것이겠다.  <남한산성>은 개인 취향상 반드시 봐야 하는 영화였다. 그래서 개봉하던 날, 경주 여행 중에 왕년의 시골 극장 같은 '메가박스‘를 찾아들어 보았다.  그 느낌들을 주저리주저리 적어 보기로 했다.  이 또한 개인 취향이다.  공감할 수도 있고 고개를 저을 수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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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36년의 남한산성은 영화화하기에 충분한 서사를 지닌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묻혀 찾아든 전쟁과 농성, 암울한 공포 속에서도 시들지 않던 기대와 희망이 절망과 낙심으로  사그러들었던 47일의 겨울이었다. 그 속에 얼굴을 들이미는 사연과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번다했다.  영화 <남한산성>은 이 시기를 다룬 김훈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뼈대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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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디 영화는 원작을 뼈대로 하고 영상의 충실함과 각색의 교묘함으로 그 살을 붙인다. 더하여 감독의 의도와 배우의 연기가 혼을 불어넣으면 그제야 완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김훈의 <남한산성>이 이 영화의 뼈대를 넘어 살이 되고 감독과 배우마저도 비곗살로 더해진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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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의 언어와 영화의 대사와는 분명 다른 것일진대 지나치게 원작에 충실(?)한 대사들은 되레 몰입을 방해했다. 왕을 인도해 얼어붙은 강을 건네 줬으나 오랑캐들이 와도 그 길을 안내해 주고 쌀말이나 얻어먹을 생각을 하는 뱃사공이나 극중 중요한 임무를 맡은 대장장이 서날쇠는 선비처럼 다음어진 언행을 구사했다.  최명길과 김상헌의 급박한 현실 속에서 치고받는 논쟁이라기보다는 피차 잘 다듬어진 성명서 읽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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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는 간단하다. 김훈의 어투를 전혀 고치지 않은 것이다.  영화 보면서 이 다음 대사 내용은 무엇이고 어휘는 이러하리라 예측하고 몇 초 뒤 그럴 줄 알았어 중얼거리는 일이 반복된다면 영화 보는 재미가 어찌 반감되지 않으랴.   나는 영화를 보러 왔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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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내내 최명길과 김상헌의 대결(?)은 불꽃을 튀긴다. 그러나 이 숨가쁜 대결도 김훈이 원고지에서 적은 대화 느낌 이상의 카리스마는 보여 주지 못한다. 척화와 주화의 논리는 화려하게 펼쳐지나 알멩이가 없다.  비주얼은 기막힌데 먹어보면 맹물 맛인 요리라고나 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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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대결 구도 속에서 가장 덕을 본(?) 캐릭터는 물론 김상헌이다.  영화에서 김상헌은 남한산성의 군사 전략을 책임지는 자리에 올라 ‘대보름 협격 작전’을 전개할 뿐 아니라 임금의 항복을 맞아 할복까지 하는 비장한 모습을 보여 준다.  남한산성 47일 뿐 아니라 조선 왕조 역사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경륜을 보여 주는 (개인적인 평) 최명길에 맞서려면 그 정도의 비중(?)은 필요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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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의 핵심은 ‘척화냐 주화냐’가 아니었다.   현실과 명분의 싸움이었고, 그 명분은 나라도 백성도 아닌 사대(事大)에 갇힌 아집의 다른 이름이었다.  농성 중에도 명나라 황제에 행하는 정초 문안을 보면서 청 태종은 “내버려 두라. 그들은 그들의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하는 일을 몰랐다고 하는 것이 솔직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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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황제에 대한 충성 앞에 자기네 백성이 어찌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버렸고, 오랑캐에 대한 경멸만 그득할 뿐 스스로에 대한 자각을 전혀 하지 못했던 어리석음을 대놓고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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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마디로 겹겹 포위된 남한산성만큼이나 ‘꽉 막혔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김상헌은 그 논리들의 머리 꼭대기에 있었다.  그가 주장한 ‘옥쇄’는 조선이 아니라 명나라를 위해 장렬히 깨져 나가는 것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의병들이 의주로 도망간 임금을 위해 전멸을 불사했듯, 조선인들도 명나라를 위해 다 죽어도 좋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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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김상헌과 최명길이 ‘척화’와 ‘주화’의 대표 주자가 돼 맞서고 최명길이 인조에게 “상헌을 곁에 두시옵소서. 그는 충신이옵니다.” 운운하는 대사를 치는 장면은 매우 불편했다.  (소설에 이런 장면이 나오는지 다시 읽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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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대결(?)을 미화하다 보니 더욱 중요한 요소들이 엑스트라가 되거나 장식품으로 배치되거나 아예 배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영화 초반에 청 태종은 성이 안에서 무너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는데 원작 소설에도 주요하게 등장하고 실제로도 있었던 조선 군병들의 막판 반항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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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상에 걸리고 얼어 죽었던, 엉뚱한 명령에 따라 성 밖을 나서다가 까마귀밥이 되기도 하고 성벽에 달라붙은 청나라 군을 쏘아 죽이던 조선군들은 이미 싸울 이유를 상실하고 있었다.  소설 속에서 군인들은 행궁으로 몰려가 척화신을 내보내라고 아우성친다.  “우리는 팔다리에 얼음이 박혀서 백발에 한 발도 맞출 수 없소.” 칼을 빼들고 위엄을 세우려는 승지 앞에서 비아냥거렸다.  “승지가 칼을 빼니 산천이 떠는구려. 그 칼을 들고 적 앞으로 나아가시오, 우리가 따르리다.”  그리고 윗전들의 정면을 찌른다.  “성을 지키는 까닭은 성을 나가기 위함이다. 우리는 살고자 한다. 묘당은 죽고자 하는가.  성을 지켜 살 수 없다면 성을 열어서 살게 해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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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배의 공포 속에서 얻은 삶에 대한 애착은 사람들을 격동시켰고 자신들의 삶을 무익하게 버리려는 극단적 원칙론자들에 대한 항거를 가져왔다. 어쩌면 성이 안으로부터 무너져 내리는 그 장면이야말로 실제의 남한산성에서나 소설 속 남한산성에서나 가장 극적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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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지점은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임금의 출성 앞에서 머리 조아리고 엎드리는 끝까지 충성스러운 병사들만 있을 뿐이었다.   상헌과 명길의 논쟁의 내용이 뜨겁도록 치열하고 병헌과 윤석의 연기들이 홀릴 만큼 아름다웠으나 그들은 남한산성이라는 빙산의 일각이었을진대 영화는 빙산의 몸뚱이를 왕과 상헌과 명길의 삼각 구도의 바다 아래 감춰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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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남한산성>은 찾아서 보아도 좋을 영화라고 생각한다. 굳이 오늘에 빗대어 청이 누구고 명이 어디이며 당시의 조선의 행보와 오늘 우리의 갈 길을 대입하고 비교하지 않더라도 그 전쟁의 까닭과 과정과 결말과 후환을 짚어보는 자체로 유익한 시간일 수도 있다.  또 뼈대가 살이 된 애매한 상황에서도 김윤석과 이병헌의 연기 대결은 살에 윤기를 더하고 필요한 근육을 덧대 줄 만큼 인상적이다. 단지 아쉬울 뿐이다. 달리 할 얘기가 많을 터인데 일종의 ‘영상 소설’로 그친 것이 안타깝다고나 할까.
조재휘
7 October 2017
  · 
<남한산성>(2017)의 문제는 대화장면의 비중이 큰 영화에 적절한 연출과 편집의 방식을 찾는데 실패한데 있다. 문학 텍스트를 영상으로 옮기는데 있어 흔히 저지르는 교과서적인 실수는 단순히 대사를 하는 그 순차대로 배우의 얼굴 클로즈업을 담아내는 건데, 이 영화는 그러한 실패의 전형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주된 갈등은 최명길(이병헌)과 김상헌(김윤석) 간의 서로 다른 정의의 충돌에서 오는데 영화는 이 두 사람에게 포커스가 맞아야 할 대화 장면에서도 집중력을 잃고 중요하지 않은 인물의 얼굴까지 일일히 클로즈업을 잡아버린다. 
TV 드라마처럼 시각적으로 단조로워지며 극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가가 모호해지는 이런 함정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단순히 내용을 전달하는데 그치는게 아니라 장면만의 뉘앙스, 분위기와 감정을 만들어내기 위해 대가들은 나름의 수법을 고안하곤 한다. 최명길 역의 이병헌은 특히나 미세한 표정의 떨림 등 디테일에 강하기 때문에 <잔 다르크의 수난>(1928)처럼 어느 정도 시간적 여백을 두고 그 연기의 섬세한 결을 포착해야했지만 영화의 커트는 냉정하게 감정의 흐름을 끊어버린다. 이건 배우의 연속적 감정선을 편집이 깎아먹는 마이너스 요인이다.
과도한 대사량을 소화하는데 있어선 나는 두 가지 연출의 레퍼런스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거미집의 성>(1957)처럼 세익스피어 원전의 장황한 대사를 모조리 날려버리고 대신 시각적 표현으로 대체하거나, 둘째는 <이누가미가의 일족>(1976)처럼 있는 그대로 대사를 다 살리되 편집 과정에서 복수 인물들의 대사를 다양한 앵글에 짧은 속사포 교차편집으로 이어붙여 속도감을 살리다가 상황이 종료될 때 정적인 테이크로 풀어버리는 등 리듬의 완급을 만드는 기교를 발휘하는 것이다. <남한산성>에는 문학적인 성격이 중요한 영화가 어떠한 연출 스타일을 선택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다. 따라서 나는 이 영화를 긍정적으로 보는 의견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뛰어난 배우의 연기와 괜찮은 서사를 방만한 연출이 망친 모범적 케이스라고 두고두고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종민
23 November 2019
  · 
< 유성운 기자 페북에서  >
@@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병자호란 때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라고 독촉하던 김상헌은 성문이 열리자 가장 먼저 사라졌다. 항복문서가 조인될 때 고향으로 바삐 내려가던 그는 훗날 "몸이 안 좋아서"라고 변명했다.
죽창가 외치고 지소미아 폐기를 부르짖던 청와대와 여당 인사들은 지금 뭐하고 있나. 양심이 있고 부끄러움을 알면 오판에 대해 최소 한 명이라도 책임을 져야하지 않을까.
[유성운의 역사정치] 영화와 달리 내뺀 김상헌···文에겐 최명길이 필요하다
N.NEWS.NAVER.COM
[유성운의 역사정치] 영화와 달리 내뺀 김상헌···文에겐 최명길이 필요하다
병자호란을 다룬 영화 ‘남한산성’에서 가장 돋보이는 두 인물은 최명길과 김상헌입니다. 두 사람은 각기 주화파(主和派)와 척화파(斥和派)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청(淸)나라의 요청을 수용하고 화친을 맺자고 했던 최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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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순
26 January 2013
  · Seoul, South Korea  · 
남한산성
남한산성은 병자호란때 인조가 47일 머물며 삼전도 치욕을 당한 그곳이다.  조선시대 이른바 쿠데타로 왕위에서 쫓겨난 왕은 노산군( 단종), 연산군, 광해군 등 세 명이다. 
그 가운데 ‘반정(反正)’ 즉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왕이 교체된 것은 연산군을 폐한 중종반정과 광해군을 폐한 인조반정이다. 
그런데 반정이라는 이름은 같지만 왕위에 오른 과정을 보면 중종과 인조(仁祖, 1595~1649, 재위 기간 1623~1649)는 아주 달랐다. 중종이 정변을 일으킨 공신들의 추대로 갑자기 왕위에 올랐다면, 인조는 왕이 되고자 몸소 정변을 준비하고 앞장선 인물이다.
이렇게 뻔뻔하게 올랐으면 나라를 제대로 관리했어야 했다. 1636년 병자년 겨울. 청의 대군은 압록강을 건너 서울로 진격해 오고, 조선 조정은 길이 끊겨 남한산성으로 들 수밖에 없었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은 1636년 12월 14일부터 1637년 1월 30일까지 47일 동안 고립무원의 성에서 벌어진 말과 말의 싸움, 삶과 죽음의 등치에 관한 참담하고 고통스러운 낱낱의 기록을 담았다. 
쓰러진 왕조의 들판에도 대의는 꽃처럼 피어날 것이라며 결사항쟁을 고집한 척화파 김상헌, 역적이라는 말을 들을지언정 삶의 영원성이 더 가치있다고 주장한 주화파 최명길, 그 둘 사이에서 번민을 거듭하며 결단을 미루는 임금 인조. 그리고 전시총사령관인 영의정 김류의 복심을 숨긴 좌고우면, 산성의 방어를 책임진 수어사 이시백의 기상은 남한산성의 아수라를 한층 비극적으로 형상화한다. 
'죽어서도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소설은 작가 특유의 냉혹하고 뜨거운 말로 치욕스런 역사의 한장면을 보여준다. 또한, 지도층의 치열한 논쟁과 민초들의 핍진한 삶을, 연민을 배제한 객관적 시각으로 돌아보고 있다.
삼소장
6 October 2017
  · 
남한산성 : 영화후기
스포있음. 어차피 다큐에 가까워서 역사를 알면 이미 아는 내용이기는 하나, 어쨌든 스포있음.
명절을 맞아 장인어른, 장모님, 처형과 형님, 그리고 우리 부부가 심야에 영화를 보러 가기로 하였다. 장모님은 워낭소리가 마지막으로 본 영화라고 기억하고 계셨으나 조금 더 추궁하자 국제시장이 마지막 영화였다고 하였다.
영화의 내용은 둘째 치고, 이 구성으로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쉽게 있는 일이 아니라 비가 오는 와중에도 영화를 보러 가 본다.
상영중인 영화이므로 단적인 감상만 적는다.
1. 배우들의 연기는 훌륭하다.
2. 반전이나 극적인 장면은 없다. 남한산성과 관련해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다만 남한산성 이야기에 반사적으로 백숙 생각만 나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므로 본인의 그런 반응을 애써 감출 필요는 없다. 
3. 박해일이 나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난 그게 당연히 무장 중의 한 명일 거라고 생각했다. (최종병기 활의 이미지가 아직 강하게 남아 있는 듯) 왕일 줄은 몰랐다.
4.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하기는 하였으나, 등장 캐릭터들은 아동용으로 각색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매우 노골적이고 분명하고 직설적이다. 이 영화에서 나쁜 놈은 나쁜 놈이고 착한 놈은 착한 놈이고 이기적인 놈은 이기적이다. 복합적인 인간은 없다.
5. 4번의 영향으로 인하여 다소 등장인물들의 운명이 예측된다. 이렇게 될 것 같으면 이렇게 되고 저렇게 될 것 처럼 느껴지면 저렇게 된다. 내가 갑자기 신내림을 받은게 아니라면 연출이 너무 뻔하다는 증거다.
6. 그 와중에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해서 다소 4번과 5번에 대한 반감이 수그러든다.
7. 이병헌은 과거 영화 광해에서 왕으로 나오면서 매우 실리적인 노선을 택하는 것으로 나온다. 임진왜란 때 신세를 톡톡히 진 명나라를 사대하는 와중에 광해는 새로 떠오르는 세력인 청나라를 배척하지 말고 친분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놀랍게도 같은 배우가 다음 영화에서는 신하로 나오면서 같은 주장을 한다. 왕이 굴욕을 겪어도 백성이 살아남는게 옳은 길이라는 주장이다. 인조는 광해 다음 왕이므로 영화를 연속해서 보면 광해군이 실각하고 인조의 신하로 들어가 과거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듯한 모습이 된다. 광해를 매우 재미있게 보았던 나로서는 화면에 이병헌이 잡힐 때 마다 어허 저 양반이 실제로는 왕인데, 광해군인데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특히 영화 광해에서는 1인 4역을 했기 때문에 거기에 이번 배역 하나를 더 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는 일이다.
8. 광해, 아니 최명길(이병헌)과 반대편에 서 있는 김상헌 역을 맡은 김윤석은 볼 때 마다 타짜의 아귀가 생각이 나지만 역시 연기로는 깔게 없는 양반이다.
9. 배우들의 연기는 훌륭하다.
10. 그러나 어디 영화가 연기로만 완성이 되던가. 이건 CJ가 최근 지속적으로 만들고 있는 이런 류의 영화들이 갖는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CJ는 과거 어느 시점에 있었던 일들을 (역사라고 부르지) 좋은 배우와 대형 자본을 조합해서 영화로 만들어내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영화라기 보다는 다큐멘터리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명량만 봐도 잘 만든 영화이기는 한데 내용이 이미 우리가 잘 아는 것을 좋은 연기로 어떤 뚜렷한 메세지나 연출이나 뭐랄까 뭐 창작물에서 기대할 수 있는 재해석이라던가, 그런 것이 없이 그냥 우리가 아는 내용 그대로 보여준다. 이미 아는 내용을 뻔한 구성으로 예측 가능하게 보여주다 보니 영화가 가져야 할 '이야기 거리'를 끌어내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적어도 볼거리 라도 제대로 만들기 위해서 물량을 충분히 쏟아붓고 검증된 배우를 동원하여 잘 만드는 것이다.
11. 10번 항을 짧게 다시 쓰면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듣는 기분이다. 다 좋은데, 꼭 그래야 했나 싶다. 혹은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라던가.
12. 이 영화에서 인조로 나오는 박해일은 영화 최종병기 활의 주인공인데, 최종병기 활 또한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다. 즉, 박해일은 병자호란이 있었던 때에 국경 근처에서는 명궁으로 청나라 군과 싸우고 동시에 남한산성에서는 왕으로 동시에 존재하였던 것이다. 영화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기는 하나, 계속 마음이 쓰인다. 극에서 박해일이 나올 때 마다 쟤가 원래 지금쯤 국경 근처 어느 마을에서 활을 쏘고 있어야 되는데, 바람을 계산하는게 아니라 극복하고 있어야 되는데, 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든다.
13. 동시에 김윤석 또한 전우치에서 도사로 (실은 괴물로) 살아온 인물로 왠지 마음만 먹으면 청나라 군대를 혼자서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계속 날 괴롭힌다. 김윤석, 박해일, 이병헌 모두 훌륭한 배우인데 너무 여러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소비되다 보니 작품의 감상에 방해가 된다.
14. 놀랍게도 (이게 사실 이 영화의 가장 큰 반전이자 유일하게 나의 예상을 뒤엎은 부분이다) 놀랍게도 이 영화에는 이경영이 나오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경영이 언제 어떤 역할로 나올까 초조하였던 나에게는 큰 반전이었다. 
15. 광해, 명량, 병자호란 등의 영화의 특징은 모두 CJ가 만들었다는 건데, 또 공통적으로 우리 역사 가운데 다소 시련이 있었던 때를 주로 묘사한다는 것. 이 기조가 계속 유지된다면 언젠가 CJ에서 최순실 사태를 영화로 다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16. 이 영화는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며 최종병기 활과 같은 배경을 공유한다. 최종병기 활 때에도 꽤 거슬리던 문제인데, 침략자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불만이다. 영화에서는 '사실성'을 살리기 위해 적국의 병사들이 모두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는데 (과거 사극들이 일본군 사이에서 혹은 일본 내의 정부 각료 사이에서도 한국어를 사용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문제는 그것이 이미 사라진 언어인 탓에 아무렇게나 지어낸 말이라는 것이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지어낸 말인 탓에 그 언어에 관한 호흡과 억양, 성조 등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인위적인 언어라는 것이 느껴진다. 어차피 서로 모르는 언어이니 발음이나 억양이 이상하다는 지적은 애초에 불가능하지만 호흡이 불안정하여 자기 언어가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느낄 수가 있다. 물론 이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물며 레퍼런스가 정확하게 있는 외국어 조차도 본토인처럼 완벽히 소화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실존하지도 않는 언어를 여러명의 배우가 실존 언어처럼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어려운 일임은 알지만, 그 대사가 영화 곳곳에서 적지 않은 분량으로 반복되기 때문에 계속 불편하다.
17. 내가 서두에 짧은 단상만 쓴다고 했던 표현을 지금 지울까 말까 고민 중.
18. 이것은 소설가 김훈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원래 소설이라는 것은 '인물'에 대한 묘사가 중점이 되고, 영화라는 것은 그 인물들이 만드는 사건으로 벌어진 '갈등'에 대한 묘사가 중점이 된다. 그래서 소설을 영화로 만드는 일, 혹은 그 반대의 일은 매우 어렵다. 하여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를 만들 경우엔 거의 재해석, 재창조에 가까운 작업을 해야 한다. 김훈은 인물에  대한 묘사, 대조가 탁월한데 영화에서도 그것이 느껴진다. 아직 김훈의 원작을 보지 못했지만, 추정해 보면 아마 그 소설에서도 최명길과 김상헌의 내적 갈등을 집중적으로 다루지 않았을까 싶다.
19. 나는 숫자 21을 좋아하기 때문에 뭔가 세 꼭지만 더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고민을 써 놓고 보니 두 개만 더 쓰면 되게 되었다.
20. 언제부터인가 CJ의 영화가 불편해 지기 시작했다. 광해도 명량도 재미와 감동을 강요하는 느낌이다. 이번 영화도 마찬가지다. 음식으로 치면 단 한 그릇이라도 깊은 맛과 영혼이 치유되는 듯 한 소울푸드가 있는 반면, 호텔 뷔페처럼 차려진 것은 많고 재료도 훌륭하고 딱히 탓할 것도 없기는 하지만 왠지 정이 가지는 않는 식탁도 있다. 명량, 남한산성도 같은 문제를 갖고 있다고 본다.  모든 것은 예측 가능했고 소재와 전개가 뽀로로나 터닝메카드 급의 단순함을 갖고 있다. 유아용, 청소년용이라면 그래도 되지만 성인을 대상으로 한 영화라면 이 기조를 유지하다간 조만간 싫증을 가득 느낀 사람들이 보고 나서 욕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믿고 거르는 수준이 되지 않을까 우려가 된다. CJ의 영화는 그 밖의 완성도에서는 이미 정점에 달해 있어 이대로 버리기엔 아까운 패다. 어쩌면 시스템으로 일하는 조직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21. 배우들의 연기는 훌륭하다.


Joon-Mo Hong
4 October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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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 첫 영화로 '남한산성'을 택했는데, 이제 프랑스에서 만든 중세 영화 못지않게 고증을 충실하게 잘해서 마치 내가 1636년 동지 섯달 추위에 떨며 남한산성에 갇혀있는 듯한 현장감과 무력감을 느꼈다. 역사적으로 익히 잘 알고 있던 주화파 최명길(이병헌 분)과 척사파 김상헌(김윤식 분)의 대립도 연극 무대를 방불케 하는 피를 토하는 듯한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이정도의 스케일과 고증으로 한국사의 주요 장면들을 차례 차례 영화로 만들어 나가주었으면 관객 입장에선 참 행복하겠다. 단, 비분강개형 체질을 가지신 분들은 영의정 김유(송영창 분)의 대사를 듣다가 조선 왕조의 성리학적 명분론과 군사적 무능함에 열받아 앞 관객의 의자를 걷어차버릴 가능성이 높으므로 관람을 삼가하시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영화 '남한산성' 티저 예고편
YOUTUBE.COM
영화 '남한산성' 티저 예고편
2017.10.3 개봉 (주)싸이런픽쳐스 제작 CJ엔터테인먼트 제공/배급 감독 : 황동혁 출연 : 이병헌, 김윤석, 박해일, 고수, 박희순, 조우진 김훈 작가의 동명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 청의 대군이 공격해오자 임금과 조정은 적을 피해 남...
Kim Jeongho  · Follow
12 August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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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이 출간 10년 만에 영화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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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hyun Nam
10 March at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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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을 쓰며 고전(古典)을 접하는 건 큰 기쁨이다. 

학부 때는 경전도 사료로 읽는 훈련을 받아서 그 의미를 음미할 기회가 적었는데, 조선시대 문인들은 경전을 경전으로 대하니 자연스레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게 된다.
<대학> 정심(正心)에 나오는 다음 구절은 여러번 음미해도 많은 울림이 있다.
心不在焉, (마음이 없으면)
視而不見(보아도 볼 수 없고), 聽而不聞(들어도 듣지 못하며), 食而不知其味(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수신(修身)의 중요성을 말하는 이 구절은, 영화 <남한산성>에서 청과의 화친을 주장하며 "조선의 백성들을 살려야 한다"는 최명길(이병헌 분)의 말에 대해 김상헌(김윤식 분)이 "명길이 말하는 삶은 삶이 아닙니다"와 같이 되받아치는 모순어법의 논리적 기저가 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에 앞서 격물치지성의정심을 말하는 성리학적 가치관이 잘 담긴 말이다.
나는 도학자가 아닌 그저 역사 공부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구절을 조금 비틀어 공부할 때의 마음가짐으로 삼기로 했다.
心在焉(마음이 있으면),
不視而見(보지 못해도 볼 수 있고), 不聽而聞(듣지 못해도 들을 수 있으며), 非食而知其味(먹지 않아도 그 맛을 알 수 있다.)
내가 공부하는 분야는 과거를 다루는 것이기에, 필연적으로 그 시대를 볼 수도 들을 수도, 맛볼 수도 없다. 그런데 '마음'이란 것이 있다면, 보지 못해도 조금은 그 시대를 엿볼 수 있고, 듣지 못해도 조금은 그 시대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맛보지 않아도 조금은 그 시대를 음미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어렸을 때 무협지서 종종 보았던 '마음의 눈'이라는 표현에는, 사실 수백년 전 옛 사람들의 가치관이 담겨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성현석
26 October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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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오늘 쓴 글이라네요
성현석
26 October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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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 속 최명길의 유연한 정치력, 그 비결은?
영화 <남한산성>을 결국 봤다. 원래는 다른 거 보려했는데, 어쩌다 보니 그리 됐다. 
언론 지면이건, 페북이건 워낙 많은 이야기가 나왔던 영화인데다, 김훈의 원작도 봤던 터라, 사실 안 봐도 본 느낌이었다. 
듣던대로 영상과 음악은 아름다웠고, 대사 가운데 상당수는 원작을 따왔다. 
당시 역사 및 영화에 대해 잘 거론되지 않은 사항 몇 가지를 적어본다. 
1. 폭넓은 이념적 스펙트럼 : 양명학자 최명길  
<남한산성>에 대한 숱한 글들이 왜 이 대목을 빼먹는지 모르겠다. 최명길은 당시로선 드물게 양명학에 조예가 깊었다. 알다시피 당시 주류 이념은 성리학이었고. 
퇴계 이황이 <전습록논변>을 통해 양명학을 잘근잘근 비판한 이래, 조선 선비들에겐 양명학은 금기였다. <전습록>은 양명학의 대가인 왕수인(왕양명)의 글을 모은 책이다. <전습록논변>은 그걸 논리적으로 비판한 글이고. 
옛 운동권들이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해선 알지 못한 채, 그걸 비판한 레닌이나 로자 룩셈부르크의 글만 읽었던 것처럼, 조선 선비들 역시 <전습록>은 잘 모르면서 <전습록논변>만 보고 양명학을 사문난적 취급했다. 마치 옛 운동권들이 레닌이 수정주의는 나쁘다 했으니, 수정주의는 아예 거들떠 보지 않았던것처럼. 
하여튼 그런 시대에 양명학을 깊이 공부했다는 건,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최명길이 당대의 통념에서 벗어나, 유연하고 실용적인 외교노선을 추구했던 배경엔, 그의 폭넓은 이념적 스펙트럼이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2. 엘리트주의와 책임감
21세기 한국은 수험의 나라다. 청소년기, 청년기의 몇 가지 시험 성적이 평생에 걸쳐 영향을 미친다. 청년들은 죄다 공무원하겠다고 하므로, 공무원 시험 경쟁률은 살인적이다. 이른바 '헬조선' 현상의 한 축. 
'헬조선' 말고 '진짜 조선'은 더 심했다. 글을 아는 자는 모조리 과거 시험에 목을 맸다. 지금이야 시험 말고도 사업이나 정치로 성공하는 길이 있지만, 그때는 오로지 과거 시험뿐. 여기서 성공한 자의 우월감, 낙오한 자의 열패감 역시 살인적이었다. 아울러 그걸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문화였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말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분위기.
'시험의 나라' 조선의 대표적 승자는 율곡 이이다. 이른바 '구도장원공'이었다. 과거 시험은, 소과 초시부터 대과 전시까지 여러 단계인데, 율곡 이이는 무려 아홉 번을 장원(수석)을 한 것이다. 이른바 '공부의 신', '수험의 달인'으로 당시에도 엄청난 스타였다고 한다. 이런 기록은 조선 500년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런 기득권자가 대표적인 경장론자(개혁가)였다는 게 조선의 복이었고, 율곡 이이의 미덕이었다. 
최명길도 율곡 이이만큼은 아니지만, 당대의 대표적인 '수험의 달인'이었다. 고작 스무 살 나이에 과거에 합격했는데, 소과부터 대과까지 같은 해에 붙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대학 입시 치른 해에 행정고시까지 함께 쳤는데 모두 합격한 경우. 역시 조선 500년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시험의 나라'에서 '수험의 달인'이라는 건, 정치적으로 엄청난 자산이었다. 실제로 최명길은 자신의 지적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고 한다. 주변에서도 인정해주는 분위기였고. 최명길이 좀 이상한 이야기를 하긴 하나, 그래도 엄청나게 똑똑한 녀석인 건 맞아, 라는 식. 실제로 최명길을 비판하는 글도 대개는 '최명길은 재주는 있으나~' , '최명길은 재주만 믿고~' 등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척화'가 주류였던 당시 조선 정치 지형에서, 외롭게 '화의'를 주장할 수 있었던 배경엔, 최명길의 뿌리 깊은 엘리트 의식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어지간한 비판쯤은 논리와 지식으로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 물론 그게 지나치면 독선이 된다. 
다만 최명길은 독선에 빠지지 않고, 시종 유연한 자세를 취했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최명길은 영의정이 됐는데, 그때는 또 명나라와의 물밑외교를 했다. 지금 우리야 명-청 전쟁의 승자가 청이라는 걸 알지만, 당시엔 누가 그걸 알았겠나. 명이 승리할 경우에 대비해서 명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한때는 명에 대한 사대를 고집하는 선비들과 싸우며 청과의 화의를 주장하고, 또 다른 국면에선 명이 이길 경우에 대비해서 명과 물밑 외교를 하는 자세. 정치인은 그래야 한다고 본다. 
한 가지 미덕 추가. 명-청 전쟁이 청의 우세로 기울면서, 명의 대신들이 청에 대거 투항했다. 기밀 문서를 들고 말이다. 그 때문에 최명길이 몰래 명과 교섭한 사실이 청에게 들통 났다. 청 황제는 크게 화가 나서 조선의 영의정인 최명길을 압송하라 했고, 최명길은 조사를 받고 투옥됐다. 하지만 그 과정 내내 모든 게 자기 책임이며, 자기 혼자 벌인 일이라고 했다. 좋은 정치인이다. 
3. 남성, 양반 기득권을 거스르는 정치 행보
'심즉리'를 주장하는 양명학은, 상당히 진보적인 학문이다. 지식이 짧고 신분이 낮은 평범한 사람을 존중하는 철학이다. 반(反)엘리트주의적인 면이 있는데, '수험의 달인' 최명길은 어쩌다 그런 이론에 빠졌을까. 
이것도 재미난 대목이다. 이른바 '엘리트'가 '반(反)엘리트주의'적인 사상에 빠지는 경우는 지금도 흔히 본다. 일종의 악세사리인 경우도 있고, 막연한 부채의식의 한 표현인 경우도 있다. 또 인간의 사상이란, 그의 존재조건을 기계적으로 반영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현실에선 '반(反)엘리트주의'적인 사상에 골몰한 '엘리트'가 어떤 국면에선, 그러니까 자기 기득권과 사상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선 기득권을 고르는 경우가 많다. 그 뒤 사상을 바꾸거나, 아니면 이런저런 궤변을 늘어놓거나. 
최명길은 그런 점에서도 매력적이다. 남성, 양반 기득권을 거스르는 정치적 결정을 했다. 전쟁 과정에서 많은 여성들이 청으로 끌려갔다. 일부가 돌아왔는데, 남편들은 이혼을 원했다. 오랑캐에게 끌려갔던 부인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게다. 최명길은 동료 남성 양반들의 정서를 거스르는 결정을 했다. 청에게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성과의 이혼을 금지했다. 하지만 상당수 사대부들은 이런 결정을 무시했다고 한다. 
부유한 양반들의 기득권도 거슬렀다. 청에게 끌려간 이들을 데려오려면 돈을 내야 했다. 노예를 다시 사들이는 값이다. 이른바 속환이다. 문제는, 너도나도 속환을 시도하니까, 조선인 노예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은 속환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의 속환은 최상류층의 특권이 됐다. 이는 속환 가능한 인구의 수가 대폭 줄어든다는 뜻이다. 청나라 노예 상인들에게만 좋은 일이라는 뜻도 되고. 
최명길은 이에 대해 강한 규제 정책을 내놨다. 부유층의 반발을 누르고 속환 가격 상한선을 정했다. 그보다 높은 돈을 주고 속환한 사례가 발견되면 처벌하겠다고 했다.  
쓰다보니 길어졌다. 김상헌 이야기도 쓰고 싶은데, 그건 나중에..


전성배
28 February at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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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子 한국을 말하다] 인천일보 한칼(韓字칼럼)
- 제58화. 이치에 따르다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이옵니다. 만백성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지 마시옵소서. 적의 아가리 속에도 삶은 존재하고 죽음은 가볍지 않습니다. 약한 자가 살기 위해서 강한 자에게 못할 일은 없습니다.” - 이조판서 최명길.
  “정녕 전하께서는 칸의 신하가 되시겠습니까? 삶과 죽음에도 분명 아름다운 자리가 있을 진대 하필 적의 아가리속이겠나이까! 죽음은 가볍지만 치욕적인 삶은 가볍지 않사옵니다. 하룻밤을 버티지 못하시고 어찌 무릎을 꿇으시려 합니까!” - 예조판서 김상헌. 영화 <남한산성> 중. 
  爲政(위정)이란 정치를 행하는 방법을 말한다. 도덕경 제58장 順化(순화-이치에 따르다)에서는 위정자가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 즉 정치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노자의 정치관은 확연하다. 有爲정치가 아닌 無爲정치를 숭상한다. 보통 사용하는 純化(순화)는 불순한 것을 제거하거나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한다는 ‘인위’를 뜻한다. 이에 반해 본문의 順化(순화)는 자연 그대로 이치에 따라 순응하는 ‘무위’를 말한다. 그는 福과 禍, 善과 惡은 인간의 기준으로 정할 수는 없으며, 서로 인과관계를 맺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悶悶(민민) 어수룩한 모습으로 무위를 뜻하며, 察察(찰찰)은 까다롭게 따지는 유위를 비유한다. 제20장에서는 俗人察察 我獨悶悶(사람들은 명석하여 바르게 가려내지만 오직 나만은 흐리멍덩하다)이라 하였다. 兼(겸)은 利(리)와 같고, 劌(귀)는 害(해)나 傷(상)과 같다.
  정치가 어수룩하면 백성이 순박해지고, 정치가 까다로우면 백성은 부족한 생활을 하게 된다. 재앙에는 복이 기대어 있는 것이요. 복에는 재앙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누가 그 끝을 알겠는가? 재앙과 복은 정해진 것 없이 늘 변하는(無常) 것이다. 바른 것은 다시 그른 것이 되고, 선한 것은 다시 악한 것이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 헤매는 날들이 오래되었다. 그러므로 의로운 정치인은 반듯하지만 남을 베어서 반듯하게 만들지 않고, 자신은 예리하지만 남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자신은 예의가 바르지만 남에게 교만하거나 무례하지 않다. 자신은 밝게 빛나면서도 남을 눈부시게 하지 않는다. 
  (其政悶悶 其民醇醇. 其政察察 其民缺缺. 禍兮福之所倚 福兮禍之所伏. 孰知其極? 其無正. 正復爲奇 善復爲妖. 人之迷 其日固久, 是以聖人方而不割 兼而不劌 直而不肆 光而不耀. 「道德經」 第58章-順化)
化 화 [되다 / 변하다 / 생육하다]
①亻(인)은 사람의 옆모습으로 보통 남성을 상징하고, 匕(비)는 거꾸로 있는 모습으로 여성을 상징한다. ②化(화)는 두 사람(亻+匕)이 공중에서 곡예를 하는 모습이거나,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③사람(亻+匕)의 일생은 변화變化의 연속이다.
  휘발유 유류세 25%로 축소. 양도세 이월과세 5년에서 10년으로 확대. 2주택자 종부세 중과 폐지. 법인세 최고세율 24%로 인하. 무순위청약 거주지역 요건 폐지. 모든 대학교 입학금 폐지. 최저임금 9,620원. 만 1세 이하 아동을 둔 부모급여 도입. 자살 고위험군 지원 확대. 6월부터 만 나이로 통일. 유통기한을 소비기한으로 변경 등. 이상은 올해부터 달라진 정책이나 제도 중에서 골라낸 것들이다. 여야간 합의가 정당이 아닌 백성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 믿고 싶다.
  “백성을 위한 새로운 삶의 길이란 낡은 것들이 모두 사라진 세상에서 열리는 것이오. 그대도 나도 그리고 우리가 세운 임금까지도 말이요.” -삼전도 굴욕 후 김상헌이 최명길에게.
(그림) 사람(亻+匕)의 일생은 변화(化)의 연속이다. / 그림=소헌


이근배
8 September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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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淸이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다(병자호란). 인조는 청淸과 명明을 두고 갈등한다.
"순간의 치욕을 견디고 나라와 백성을 지키자"는 최명길(淸)과 "청과 맞서 싸워 대의를 지키자"는 김상헌(明)의 주장이 대립한다. 마침내 남한산성에서 인조는 청에 항복(삼전도)함으로써 전쟁은 종료됐지만 수많은 포로가 발생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현재 우리 상황과 비슷해 보인다. 영화 '남한산성'이 당시 상황을 그려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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