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24

[역사와 현실]조선식민지화의 세계사적 특수성 - 경향 모바일

[역사와 현실]조선식민지화의 세계사적 특수성 - 경향 모바일

[역사와 현실]조선식민지화의 세계사적 특수성
기사입력 2017.07.26 11:19
최종수정 2017.07.26 20:54
[역사와 현실]조선식민지화의 세계사적 특수성

도쿄 유학 시절 곧잘 대만 친구들하고 어울렸다. 대만도 일본 식민지였기에 ‘같은 편’인 줄 알고, 일본 욕을 하며 맞장구를 기대했다가 김이 빠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들은 별반 ‘반일감정’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베트남, 인도네시아, 인도 사람들도 식민본국에 대해 썩 유쾌하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강렬한 적개심을 표출하는 건 별로 못 본 것 같다. 그럼 우리가 특이하다는 건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위안부, 강제징용을 비롯한 일본의 악행이 가장 큰 이유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리가 그동안 간과해 왔던 조선 식민지화의 특성에 대해 몇 가지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장기간에 걸쳐 역사를 공유하고 교류를 해온, 같은 문화권의 이웃 나라를 식민지화했다는 점이다. 영국-인도·미얀마, 네덜란드-인도네시아, 프랑스-베트남 등 많은 경우 같은 문화권이 아닌, 멀리 떨어진 곳을 식민지화한 것과 대조적이다(영국이 식민지로 삼은 아일랜드는 이웃 국가였지만 둘의 관계는 근대 이전부터 긴 침략의 역사가 있었다). 게다가 중화질서의 우등생이었던 조선은 일본에 대해 문화적, 국제적 우월감을 갖고 있었다.

역사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역사조작들(신공황후의 신라 정벌, 임나일본부설, 일선동조론 등)은 한국인들에게 깊은 내면적 상처를 안겨주었다. 한·일 간의 역사분쟁은 이미 이때부터 있었던 것이다. 영국과 인도 사이에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역사조작으로 한국인의 정체성을 부정하려고 한 시도들은 독립 후까지 한국인들을 크게 분노시켰다.


둘째, 조선은 세계 주요 국가 중 가장 늦게 식민지가 된 경우다. 세계가 이미 제국 해체의 시대로 접어들 무렵(청나라, 합스부르크, 오스만튀르크, 러시아제국의 해체), 일본은 거꾸로 제국주의를 강행했다.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의 식민지화는 거의 1880년대 이전에 이뤄졌다. 그런데 1880년대 이후 세계 각지에서는 민족주의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조선에서도 1880년대 이후 병합까지 약 30년 동안 민족주의가 형성, 강화되었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농민전쟁, 대한제국 수립,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애국계몽운동 등이 모두 이 시기에 일어난 일들이다. 다른 식민지와 달리 조선은 식민지로 되기 이전에 이미 강력한 민족주의의 세례를 받은 사회였던 것이다(대만은 비교적 늦은 1895년에 식민지로 되었으나, 이곳은 국가가 아니라 중국의 일개 지방이었다는 점에서 조선의 경우와 다르다). 조선은 이미 남의 통치를 받기에는 너무 커버렸다.



셋째, 비교사적으로 식민기간이 짧았다는 점이다. 물론 우리 민족에게 암흑의 35년은 너무도 긴 기간이었지만 물리적 시간으로는 그렇다. 16세기 이래 서양에 점령당한 아메리카대륙은 차치하고라도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식민지의 경우, 35년보다 길다. 이 짧은 기간 동안 일본은 동화정책과 차별정책 사이를 우왕좌왕했다. 식민정책은 크게 동화정책과 차별정책으로 나누는데, 전자는 식민지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고 식민본국과 완전히 같은 사회로 만든다는 것이고(프랑스-알제리), 후자는 차이를 인정하여 본국의 언어나 법률 적용 등을 강제하지 않는 것이다(영국-인도, 네덜란드-인도네시아). 정치적으로 전자는 식민지인들에게도 본국 의회의 투표권을 줘야 하며, 군대 의무도 부과해야 한다. 후자는 식민의회를 따로 인정하는 것이다(인도의 경우).

그러나 일본은 동화정책을 표방하면서도 끝내 조선인들에게 투표권과 입대를 허용하지 않았다(태평양전쟁 때 위기에 몰리자 약간 변화). 투표권이 생기면 인구가 많은 조선에서 일본 의회의 3분의 1가량을 차지하는 조선인 의원들이 나올 것이며, 이들이 ‘조선당’을 만들어 캐스팅보트를 행사하면 큰일이라고 거부했다. 군대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인에게 총을 쥐여준다? 그 총구가 앞만 향하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며 꽁무니를 뺐다(김동명 <지배와 저항 그리고 협력>).

이렇게 식민지정책이 갈팡질팡하면서도 초지일관한 게 있었으니 바로 독립 논의를 일절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미국과 필리핀, 영국과 인도 등 다른 경우에는 식민본국 정부와 식민지 정치 엘리트 사이에 자치의회, 독립 등을 놓고 논의와 협상이 있었으나(심지어 1930년대 중반 미국 의회는 가까운 장래에 필리핀을 독립시킨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일본은 달랐다. 이 때문에 조선의 주요 정치 엘리트들은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했고, 국내에 남아있던 엘리트들과도 이렇다 할 정치협상을 벌이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일본이 패전국이 되고 조선은 갑자기 독립했으니, 혼란은 피할 수 없었다. 한국전쟁의 책임을 일본에 묻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지금 돌아보면 과거 식민지배를 당했던 나라 중 한국만큼 ‘쎈’ 나라는 없다. 강대국들은 전쟁 책임에는 관심이 많아도 식민지배 책임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도 가해자였으므로. 따라서 식민지 문제는 한국이 앞장서 그 세계사적 의미와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경험을 냉정하게 객관화할 필요가 있다.

<박훈 서울대 교수 동아시아사>



원문보기: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707261119001&code=990100&utm_campaign=share_btn_click&utm_source=facebook&utm_medium=social_share&utm_content=khan_view&utm_campaign=share_btn_click&utm_source=facebook&utm_medium=social_share&utm_content=mkhan_view#csidx589639e8655d130976607e89615071e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