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 Kim
오늘 아침 6월 4일자 조선일보에서 보도하고 있는
영화 '김일성의 아이들'에 관한 뉴스입니다.
드디어 메이저급 언론사들이 저희 영화에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6월 25일까지는 이제 겨우 21일.
개봉 전까지 최대한 홍보와 마케팅에 주력해서
코로나의 난관을 뚫고 많은 분들이 극장을
찾아주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6월개봉작 #극장개봉 #영화 #한국전쟁
#김일성의아이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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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에 두 번 버림받은 고아 5000명… 그들의 비극 뒤쫓았죠"
뉴욕국제영화제 본선 진출한 '김일성의 아이들' 김덕영 감독
김성현 기자
입력 2020.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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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70주년인 오는 25일을 맞아 다큐멘터리 '김일성의 아이들'이 개봉한다. 얼핏 제목만 보면 '동토(凍土)의 왕국' 김씨 왕조를 다룬 것 같지만 아니다. 전쟁 중이던 1952년부터 1960년까지 북한에서 동유럽 5국으로 내보냈던 전쟁고아 5000여 명의 비극적 운명을 뒤쫓은 작품이다. 다큐를 연출한 김덕영(55) 감독은 이들의 자취를 추적하기 위해 폴란드·루마니아·불가리아·헝가리·체코 등 동유럽 5국의 문서 보관소와 북한 전쟁고아들이 머물렀던 학교·기숙사 등을 일일이 답사했다. 그 결과물인 이 다큐멘터리는 오는 21일 열리는 뉴욕국제영화제 본선에 진출해 있다. 국내에서는 20일 평창국제평화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뒤 25일 극장 개봉한다.
다큐멘터리 ‘김일성의 아이들’을 연출한 김덕영 감독은 “다음 작품에서는 반대로 6·25전쟁 직후 미국 등으로 입양된 한국 고아들의 사연을 다루고 싶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이라크 전쟁과 탈북자 문제 등을 취재한 시사 전문 다큐 감독이다. 그가 북한 전쟁고아들의 사연을 접한 건 2004년 초였다. 서강대 철학과 2년 선배인 박찬욱(57) 감독의 전화 한 통이 계기가 됐다. 당시 동유럽 답사 중이던 박 감독은 루마니아 할머니 제오르제타 미르초유(87)가 북한 남편과 '생이별'한 뒤에도 40여 년간 기다리고 있다는 사연을 접한 뒤 김 감독에게 제보했다. 김 감독은 곧바로 루마니아로 날아가 미르초유 할머니를 인터뷰했다.
북한에서 1952년부터 위탁 교육이란 명목으로 루마니아에 보낸 전쟁고아만 2500여 명에 이른다. 동유럽에서도 공산권의 국제 연대를 과시하기 위한 명분으로 북한 전쟁고아를 수용했다. 당시 북한 고아들을 관리하는 책임자였던 조정호씨가 루마니아 미술 교사였던 미르초유와 사랑에 빠져 1957년 결혼했다. 미르초유는 1959년 북한 귀국 명령을 받은 남편 조씨와 함께 평양으로 향했다.
하지만 남편은 귀국 직후 숙청을 당해 탄광 노동자로 전락했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결국 미르초유만 평양에서 낳은 딸과 함께 루마니아로 돌아왔다. 조씨의 생사는 지금도 확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미르초유는 "남편이 살아서 돌아올 것을 굳게 믿고 남편 나라의 언어를 잊지 않기 위해 루마니아어·한국어 사전을 자필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당시 김 감독이 취재한 이 사연은 2004년 6·25 특집 지상파 방송을 통해서 공개됐다.
1950년대 헝가리 교실에서 북한 전쟁 고아들이 헝가리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받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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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도 김 감독의 취재는 끝나지 않았다. 동유럽 각국의 영상 보관소에 북한 전쟁고아들과 관련된 자료를 꾸준히 요청했다. 김 감독은 "북한은 폐쇄적이고 비정상적인 국가라 사실상 현장 취재가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일부 친북 인사가 전해주는 왜곡된 이야기를 고급 정보인 양 받아들이는 현실이 안타까웠다"면서 "동유럽에서 튀어나온 생생한 자료들을 도무지 놓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실제 동유럽 각국에서 보내준 영상 자료는 60여 년 전인데도 생생하기 이를 데 없었다. 1950년대 루마니아에서 단체 생활을 하는 북한 아이들이 아침 6시 반이면 일어나 김일성 얼굴이 그려진 인공기를 바라보며 경례하는 장면도 다큐에 담겼다.
이들과 함께 공부한 루마니아·불가리아 친구들은 60여 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김일성 장군의 노래'(1947년 작곡)를 정확히 기억해 한국어 가사를 부르는 장면도 촬영했다. 김 감독은 "이미 1950년대 초반부터 김일성 우상화 작업이 동유럽 현지에서도 광범위하게 진행됐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북한 고아들의 운명은 1956년부터 요동쳤다. 당시 김일성이 친소파·연안파 등을 대대적으로 숙청한 '반(反)종파 투쟁' 이후 북한의 분위기도 급변했다. 동유럽에서 북한 유학생과 고아들이 서유럽으로 탈출을 시도하거나 반소 투쟁에 참여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동유럽 각국의 고아들을 다시 북한으로 '강제 귀국'시키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김 감독은 "결국 이들은 북한과 동유럽에서 두 번이나 삶의 터전을 잃고 뿌리를 뽑힌 셈"이라며 "그 뒤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던 이들의 비극적 운명을 재조명하는 것도 넓게 보면 우리의 책무라고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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