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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넘어 대륙과 해양을 향한 라선을 바라보다(上) : 두만강지역개발의 꿈
두만강은 국제성(国際性)이 흐르는 강
2020.10.14 10:00
by 이찬우 (테이쿄대학 교수)
▲구글어스로 본 라선지구와 라선시
▲라선시 라선극장에서 전시한 유물전에서. 필자촬영(2017년)
한반도의 어느 하천도 수많은 역사를 품고 흘러왔지만, 그중에서도 두만강은 참 애틋한 느낌이 드는 강이다.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흘러드는 두만강 하류 지역은 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고 신석기시대 유물인 흑요석 활촉이 출토되기도 했다. 흑요석은 한반도에서는 백두산 화산지역에서만 나는 것으로 그 강력한 절삭력으로 인해 우수한 무기와 생활 도구로 쓰였고 중요한 교역 물품이기도 했다.
역사시대에 들어 두만강은 고구려 발해 영토의 중심부에 있는 강이었지만, 어느덧 우리 민족의 변경이 되고 국경을 가르는 강이 되었다. 반도로 줄어든 땅에서 민족이 웅크리고 있을 때, 두만강은 여진족(만주족)의 터전이 되었고 그래서 만주에서 청나라를 일으킨 그들의 고향이 되어있기도 하다.
청나라 건국 이야기를 담은 <만주실록>에는 두만강을 금, 원, 명나라 때 호칭인 "아이후 비라"로 적고 있는데 이는 주로 두만강 상류를 일컫는 말이고 두만강 중하류는 투먼쟝(土門江、図們江、豆満江)으로 불렸다. 투먼의 만주어 원래 이름은 투먼서키연(土門色禽)인데 이 뜻은 "萬水之源"(모든 물의 근원)이라 한다. 두만강의 상류에 지류가 하도 많아 본류의 시원을 책정하기가 어려울 정도였고 이 많은 지류가 하나의 강으로 모이기에 붙여진 여진어 이름이 후에 강의 본류 전체를 지칭하는 이름이 되었다.
조선 시대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두만강에 대해 "여진어로 일만(一萬)을 두만(豆満)이라하는데 많은 물이 여기에 이르러 합쳐지니 이에 이름하였다"고 쓰여있다. 중국 쪽에서는 투먼쟝(図們江)이, 조선 쪽에서는 두만강(豆満江)이 주로 쓰였다. 그런데 1712년에 청나라 총관 목극등이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워 서쪽은 압록, 동쪽은 토문(土門)으로 경계를 알린다고 적은 것에 대해, 청나라에서는 토문=도문=두만으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조선에서는 이후 근 200년간 두만강과 토문강이 다른 강이라고 문제를 제기하고 간도가 조선 땅임을 주장하면서 1880년대에 국경회담이 다시 열렸으나 결렬되었다.
그러다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한 후에 1909년에 청나라와 맺은 <간도협약>에서 두만강의 원류를 백두산 남쪽으로 흐르는 지류인 석을수로 정하여 백두산과 간도지역(지금의 중국 연변지역)을 통째로 청나라 영역으로 인정했다. 해방후 1962년에 북한과 중국이 국경조약(조중변계조약)을 맺고 두만강의 원류를 석을수 북쪽에 있는 홍토수로 변경하고 백두산 천지를 조선측이 좀 많게 나누었으니 북한이 백두산과 천지를 반이라도 회복한 셈이다.
두만강의 이름이 두만강인 것은 한자어가 콩 두(豆)에 가득할 만(満)자라 그 동네에 콩이 많아서 그리 이름 붙었나 했었는데 알고 보니 그 어원이 여진어였다. 그래도 콩이 많은 지역이라 두만이란 이름이 붙었다는 말도 일리가 있는 것이 사실 두만강변에는 콩이 많다. 장 담그는 콩의 원산지가 만주-한반도북부 지역이었기에 고구려 시대에 콩된장이 나왔다. 그래서 오랫동안 고려장(高麗醤)으로 표기하고 고구려 발음은 "미소"였기에 고려 시대까지 된장을 "密祖(밀조; 중국발음으로 미주)"로 말한다고 송나라때 고려를 다녀간 손목이 지은 <계림유사>에 나온다. "메주"가 같은 어원을 가진 말이다. 일본에서 된장을 뜻하는 "미소"가 사실 고구려말인데, 고구려가 전해준 된장(고려장)을 고구려인이 미소(美蘇,未醤)라 불렀다는 10세기 기록(화명류취초和名類聚抄)이 전해진다. 만주족의 언어에 된장을 "미순"이라 하는 것을 보면 만주-한반도-일본의 콩된장문화는 고구려어 "미소"로 연결되어있다고 하겠다.
된장을 일본에 전해준 고구려와 후의 발해가 사용한 뱃길(일본도日本道)은 두만강하구 지역 또는 청진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지금은 중국 땅인 두만강변 훈춘(琿春) 또는 청진이 발해 시대 동경용원부(책성부)였고 여기서 바다건너 일본으로 향했다. 결빙기에는 부동항인 청진이, 봄-가을에는 두만강하구 지역이 출발-도착지로 이용되었을 것이다.
두만강 하류 지역은 10세기에 발해가 멸망한 후 변경지역이 되었고 고려시대엔 여진(동여진)인들이 해적활동을 하는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고구려가 열었던 동해항로가 여진 해적의 침탈 항로가 된 것이다. 여진 해적은 1018-19년에 동해를 건너 울릉도와 일본 큐슈까지 침탈하였다고 한다. 여진 해적이 귀향길에 경상도 해안을 침입했으나 고려 수군이 격퇴하고 일본인 남녀 259명을 구출하여 송환하였다는 기록도 있다.(<고려사>현종 10년(1019) 4월조) 1107년 고려 무장 윤관이 함흥 이북의 동여진을 정벌하여 여진 해적이 사라졌다고 하나 청진-두만강하구 지역을 출입구로 하는 동해의 국제 해상항로도 그와 함께 800여 년간 역사에서 사라졌다.
두만강 지역에는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조상이 경원-경흥에서, 청나라를 세운 누르하치의 조상이 회령-훈춘에서 살았다. 여진족 거주지역을 세력기반으로 성장해 고려왕조를 무너뜨린 이성계의 조선왕조는 <여진족 콤플렉스>인지 함경도지역 사람들을 특히 차별하였다. 세조 때의 <이시애의 난>은 함경도 전체가 차별철폐를 요구하며 석 달 이상 봉기에 나선 조선 최대의 지방 봉기였다.
그리고 조선과 여진은 두만강 지역을 두고 싸움을 계속하였는데, 임진왜란 전인 1587-88년에 강 하구의 섬 녹둔도(현재는 러시아에 연륙해 있어 러시아령이 되었음)에서 두 차례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당시 조선은 두만강 하구에 조산보를 설치하고 있었고 충무공 이순신이 조산보 만호 겸 녹둔도 둔전사 벼슬을 하였다. 조선 최고의 무장인 성웅 이순신의 군인 경력은 사실 두만강 하구 여진인들과 처음 전투한 1587년 9월 "녹둔도 사건"에서 당한 패전으로 시작되었다. 부족한 병력으로 여진과 잘 싸웠으나 결국 퇴각한 이순신은 패전의 누명을 쓰고 "백의종군"이라는 처벌을 받았다. 그 후 1588년 1월 이순신의 조선군은 여진 정벌에 대성공을 거두고 이순신은 백의종군에서 사면되었다.
이때의 승리를 기념하여 이순신 장군의 후손이 1762년에 두만강 가 언덕에 <승전대비>를 세웠다. 철도역인 두만강역에서 서번포 호수를 끼고 두만강 하구 쪽으로 가면 언덕배기 산이 나오는데 이 언덕이 조산(造山)이다. 이 언덕에 승전대비가 있고, 승전대 건물이 있다. 이곳으로 가는 길은 2019년에 도로가 포장되어 중국과 러시아 관광객이 쉽게 방문할 수 있도록 정비되었다. 중국 관광객은 중국측 방천 부두에서 배를 타고 건너 두만강역으로 들어오고, 러시아 관광객은 철도로 두만강역으로 들어와 차편으로 승전대를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이곳은 북-중-러 3국 관광의 중요코스로 될 것으로 보인다.
▲ 승전대(2017년 필자 촬영)
▲두만강가의 승전대비(2017년 필자 촬영)
이 두만강 하류 지역에 있는 북한의 경제특구인 도시가 라선시(羅先市)다. 원래 이름은 1993년에 설치한 북한 최초의 경제특구 <라진선봉자유경제무역지대>의 라진선봉시(羅津先鋒市)이고 그전에는 라진시와 선봉군(구 웅기군)이었다. 라진시는 일제시대인 1930년대에 일본이 만주-조선북부-일본을 동해 루트로 직접 연결하기 위해 만든 라진항과 라진 철도역이 들어서면서 도시로 성장한 곳이며, 선봉군은 일제시대까지 경흥군 웅기읍이었고 웅기항이 있었다.
8.15해방 직전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소련군이 가장 먼저 한반도에 상륙한 곳이 웅기항이었는데, 북한은 조선인민군이 소련군과 함께 웅기를 해방하였다고 하면서 이를 기념하여 1980년에 웅기군 이름을 선봉군으로 바꾸었다. 선봉군은 1959년에 김일성 수상의 웅기군 현지지도 때에 군 전체를 하나의 <군종합농장>으로 통합하여 농업-제조업-상업을 모두 종합농장이 관할하는 최초의 실험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소위 협동소유제를 전인민소유제(국유제)로 전환하는 실험을 하였는데 40여년을 그렇게 운영하다가 라진선봉시의 선봉군이 2000년에 라선시 선봉지구로 변경되어 <군> 단위가 없어지면서 종합농장이 해체되고 농장체계의 변화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기도 하다.
라선시가 위치한 두만강은 역사적으로 국제성이 흐르는 강이었다. 우리 민족과 여진족, 중국, 러시아 그리고 일본이 각축을 벌인 곳이다. 이제 이 두만강을 넘어 대륙과 해양을 향하는 라선을 바라보며 근대 이후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꿈꾸는 미래 국경도시 라선의 모습을 그려보고자 한다.
※ 다음 호 라선을 바라보다(中)은 근대 이후 현재까지의 라선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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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선 #두만강 #남북경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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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넘어 대륙과 해양을 향한 라선을 바라보다(中) : 두만강지역개발의 꿈
2020.10.21 09:00
by 이찬우 (테이쿄대학 교수)
두만강을 넘나든 근대의 라선 : 동북아의 대격변기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사정
▲ 일제시대 조선 북부-만주 철도망 연결과 라선 (필자 작성)
한반도 동북쪽 귀퉁이 두만강 하구 변에 있던 라진과 선봉(구 웅기)이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러시아제국이 1860년에 북경조약으로 청나라로부터 연해주를 할양받으면서부터였다. 이때 두만강 하구에서 15km까지가 러시아와 조선의 국경하천이 되었다. 이로부터 두만강 하류 지역에서는 조선왕국(이후 일본제국, 북한)과 청나라(이후 중국) 그리고 러시아제국(이후 소련, 러시아연방)이 국경을 맞대고 교류와 격리를 반복하였다. 두만강을 넘어 사람과 물자와 사상과 혁명이 오갔다.
중국지역에선 훈춘이 국경 마을이 되었는데, 중-러 사이에서는 바다를 상실한 두만강 지역의 중국이 훈춘-크라스키노(포시에트항) 간의 경제교류로 육로를 통해 바다로 나갈 수 있도록 양해가 있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혁명 후 소련 시대를 통틀어 두만강하구 포시에트항을 포함한 소련지역은 봉쇄되어 중국지역으로서는 두만강을 넘어 한반도 쪽 통로로 경제교류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러한 러시아-중국 쪽 정세변화와 일본의 조선(대한제국) 합방 이후 대륙진출이라는 일본-한반도 쪽 정세변화의 흐름 속에서 라진과 선봉(웅기)도 부침을 경험했다.
그런데 당시 조선사람들의 관점에서 근대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함경북도 지역에 조선의 주민이 원래부터 주로 모여 살고 경제면에서나 물류 면에서 중심적이었던 곳을 알아야 한다. 함경북도에서 항만을 낀 곳으로 중심적이었던 곳은 ①길주-성진항(지금의 김책시), ②경성-독진항, ③경흥-웅기항 이렇게 세 곳이었다. 함경북도에서 길주는 남쪽, 경성은 중앙, 경흥은 북쪽에 있다. 청진항과 라진항은 후에 일본제국이 개발한 항만이다. 성진항은 1899년에 개항하였는데 길주-성진은 조선인 사회가 강력했다. 주로 콩과 소(生牛)를 평안도지역은 물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수출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경성은 함경북도 지역의 중심지로서 상업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경흥에는 러시아와 소(生牛) 교역을 위해 시장이 열렸고 웅기항도 콩과 소 교역의 중심으로 성장하였다(1921년 개항).
1860년대 이후 경흥-웅기에서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핫산-블라디보스톡 지역에 정착한 조선사람들은 주로 농축산업과 소 교역을 통해 러시아군과 시민들에 공급하는 것으로 부를 일구었다는 것이 1894년에 포시에트 지역을 방문한 영국인 비숍 여사의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포시에트만(灣)은 멋진 막사와 상점들이 있는 커다란 군 주둔지로, 민간인이 사는 것 같지 않았지만 멀지 않은 곳에 한인마을들이 자리 잡고 있어, 블라디보스토크에 공급되는 소고기의 대부분이 이 곳으로부터 나왔다. 우리는 강건하고 윤택해 보이는 한인들이 60마리의 매우 살찐 소를 몰고 증기선으로 내려가는 것을 목격하였다."(이사벨라 버드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이렇게 길주-경성-경흥으로 연결되어 콩과 목축을 중심으로 두만강을 넘나들며 성장하던 조선인 지역사회의 축은 일본에 의해 청진과 라진을 중심으로 중국 만주와 연결, 그리고 지하자원개발과 중화학공업, 수산업을 건설하는 것으로 변화하였다. 청진항은 1904년 러일전쟁시 일본군의 상륙 지점이었고 청진-회령 군사철도를 부설하였기에 그 군사적 가치를 높이 산 일본이 1910년이후 적극적으로 개발하여 일본인 시가지를 만들었다. 청진-회령 철도는 1917년에 함경선 연장으로 개통되었고 1927년에 회령을 지나 중국 쪽 개산툰을 연결하는 두만강 국제철교가 개통되어 중국 길림성으로 이어졌다. 제국 일본이 개발한 청진은 근처의 라남에 일본군 제19사단(라남사단) 설치와 더불어 지역사회의 인구이동을 수반하는 식민지적 변화를 만들어냈다. 청진-라남과 청진항이 중심이 되면서 근처에 있던 경성-독진항은 1910년대 이후 쇠퇴의 길을 걸었다. 1920년대까지 청진항은 중국-일본 사이의 통과화물이나 라남의 군수물자, 일본인들의 수요물자를 공급하는 항만으로 기능하였고, 성진과 웅기항은 콩과 소의 수출항으로 기능하였다. 그래서 길주-성진항과 경흥-웅기항이 함경북도의 조선인 사회 및 경제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농축산업-상업에 발전 가능성이 있던 함경북도 조선 사회는 식민지 통치하에서 일본의 계획에 따라 근대 산업화와 도시화에 말려들어갔고 함경북도에도 산업재편과 인구이동이 급격히 일어났다.
이러한 과정은 필연적으로 조선사람들의 변화뿐 아니라 일본에 대한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두만강을 넘나드는 의병운동과 러시아와 중국으로 이주한 조선인(한인)들의 항일운동으로 나타났다. 러시아로 이주한 한인중에 항일운동의 중심인물은 최재형 선생이었다.
최재형은 1860년에 경흥군 북쪽에 있는 경원군에서 노비의 아들로 출생하였는데, 1869년 홍수 기근 때에 가족이 두만강을 넘어 크라스키노 지역의 포시에트에 있는 지신허 마을(러시아 최초의 한인 마을)로 도망하였다. 러시아에 초기 이주한 경우인데 최재형은 러시아인 고용주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녔고 원양상선을 선원을 하고 장사도 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러시아 문화와 중국어까지 익숙한 인텔리 교양을 몸에 지니게 되었고 1895년에는 러시아 국적자로서 크라스키노(연추) 지역 한인 자치군의 도헌(책임자)로 임명되어 13년간 활동하였다. 그는 러시아에 이주한 한인들의 교육에 힘썼으며 회사를 설립하여 러시아군에 소고기, 군복 등을 공급하는 군납업으로 크게 돈을 벌었다. 상기 영국인 비숍 여사가 본 1890년대 포시에트의 육류 판매 한인 중에 큰 부자가 된 사람이 최재형이었다.
그는 이 돈으로 독립운동의 후견자 역할을 하게 되는데 1908년 4월에 국권 회복 항일운동단체인 동의회(同義会)를 자신의 집에서 설립하고 그 총재로 선출되었다. 동의회는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정신 함양, 실력양성과 함께 국내 진공 작전도 하였다. 국내 진공 작전에는 의병들이 소부대별로 두만강을 건너 북한지역으로 진공하여 국내에 거점을 만들어 장기적인 국내항전을 도모하였다고 한다. 무기조달은 러시아군과 가까운 최재형이 주로 담당하였다. 1908년 여름 함경북도지역은 두만강을 건너온 의병들에 의해 장악된 곳이 많았으며 웅기지역의 일본군 소부대가 궤멸 당하기도 하였다. 이 국내진공 작전에 참가한 의병의 한사람이 바로 최재형과 가까웠던 동의회 평의원 안중근이었다. 안중근 부대는 두만강을 건너 경흥군 홍의리를 습격하여 일본 수비대 병사 2명과 헌병 1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회령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한 후 안중근은 구사일생으로 두만강을 다시 건너 러시아로 퇴각했다. 이후 최재형은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하기 위한 의거를 계획할 때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다. 안중근이 1909년 3월 새끼손가락을 자른 유명한 "단지동맹"의 본래명칭이 "동의단지회(同義断指会)"였고 그 결성 장소가 바로 포시에트의 <최재형의 집 창고>였다.
최재형은 1910년 한일 합방 이후에는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권업회(勧業会)라는 이름의 경제단체를 조직(1911년 12월)하고 항일 독립운동을 이어나가기도 하였고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재무총장으로 선임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조선해방은 임시정부를 조직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인 해방군대를 조직 양성하는 데 있는 것이다. 나는 본시 조선의병대에 종사하였고, 지금도 종사하고 있다. 만일 상해로 가는 여비가 있다면 나는 그 돈으로 총을 사서 우리 독립군대로 보내겠다."
최재형은 사실 무장항쟁을 지원했지만, 무장항쟁만을 추구하는 강경론보다는 교육과 기업을 통해 힘을 키운 뒤에 독립한다는 온건론의 입장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러던 최재형이었지만, 러시아 혁명 후 일본이 시베리아 극동지역에 군대를 파병하여 볼세비키 적군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이게 되면서 1920년 4월 최재형은 우스리스크의 자택에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그의 시신은 돌려받지 못하였다.
한편 두만강가의 웅기 출신으로 근대시대의 민족정신을 추구한 인물로는 기독교계의 송창근 목사(1899~1951년?)와 김재준 목사(1901~1987년)를 들 수 있다. 송창근 목사는 한국기독교장로회를 창립한 김재준 목사를 기독교로 전도한 인물이며 함경도 출신이면서 유명한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시무하였고 6.25 전쟁 때 서울에서 납북되어 52세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송창근은 개화사상과 기독교를 받아들인 집안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인 이동휘가 세운 간도의 광성중학교를 나왔다. 이동휘의 기독교에 대한 희망은 "민족 갱생을 위한 인간 변화"였다고 하는데 이 마음을 이어받아 1916년에 서울에 가서 피어선 성경학원(현 평택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고 이때 중앙기독청년회(YMCA)에 가입하여 이상재 선생의 지도를 받았으며 이후 일본 유학(아오야마학원 신학부)기간까지 10년간 서울YMCA와 동경YMCA에서 활약하였다. 1920년에 송창근은 독립운동 노래를 배포한 일로 "정치범죄 처벌령"과 "출판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징역 6월을 살았다. 출감 후 그는 고향 웅기와 회령 등지에서 강연회 연설을 하고 다녔는데 당시 나이 22세 미남형에 유머에 능했고 폭발적인 강연으로 매회 400여 명의 청중들이 몰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당시 김재준은 웅기항에 있던 웅기 금융조합 서기로 있었는데 2살 연상인 송창근을 만나고 직장을 치워버리고 서울에서 신학 공부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김재준, 한경직 등과 함께 신학 공부를 하고 신학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송창근 목사는 진보적인 신학을 추구하였고 부산에서 빈민구제 활동 등 사회사업을 하였으며 1937년에는 수양동우회(흥사단) 사건으로 2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 신사참배 등을 하고 종교보국회 이사 등을 한것으로 친일 행적이 있어, 신사참배 거부로 옥살이를 한 기독교인들로부터 해방후 친일파로 규탄받기도 하였으나 자의에 의한 행위가 아닌 소극적 행위였다는 것이 교계의 대체적인 견해다. 송창근은 1940년에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를 김재준과 함께 설립하였다. 김재준 목사는 송창근 목사에 대해 "바울의 고백과 같이 내 민족을 위해서라면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져도 좋다고 할 만큼 민족애에 불타는 애국자였다"라고 평가하였다.
1930년대 라진 개발의 의미
러시아 혁명 이후 소련 연해주 지역은 혼란시기를 지나 소련 적군이 장악하면서 일본군은 1922년에 러시아 연해주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이로부터 두만강 건너 러시아 지역은 봉금지대가 되었다. 새로이 등장한 사회주의 국가 소련에 대항하여 일본은 한반도와 중국 만주를 일본의 지배하에 강력히 묶어 두기 위한 일본-조선-만주의 경제권통합 정책을 추진하게 되는데 군사적 관점에서 산업정책이 본격화되고 이에 결합한 철도, 항만 건설과 공업지대 건설이 추진되었다.
이를 위해 조선총독부 철도국은 1927년부터 "조선철도 12년(1927-38년) 계획"을 새로 시행하여 그중에 두만강 변을 따라 도문선(웅기-종성, 163km, 1927년 착공하여 1933년 개통)을 신설하였다. 이때만 해도 만주-조선-일본의 경제결합을 위한 조선 함경도 항만은 청진항과 두만강 쪽의 웅기항 두 군데였다. 그런데 1931년 만주사변과 함께 만주국이 건설되면서 일본은 동해를 건너 만주로 직행하는 루트에 대한 검토를 하였는데 일본 육군의 입장은 라진 앞바다가 수심이 깊어 전함과 화객선이 접안할 수 있고 섬이 자연 방파제 역할을 하는 천혜의 항이라면서 라진을 개발하기로 주장하였다. 결국 청진, 라진, 웅기의 세 항이 "북선3항(北鮮3港)"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취급되었고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의 만주 신경(장춘) -도문 철도의 조선쪽 최종착역으로 라진이 결정되었다(1932년 8월23일 총독부관보 1689호). 그래서 웅기와 라진을 연결하는 철도를 만철이 1933년 4월에 착공하여 당시 한반도 최장의 3.85km의 터널을 포함하는 15.2km의 웅라선을 1935년 8월에 개통하였다.
▲ 라진역의 건설 직후 모습 ⓒ 일본 항만협회('항만'제13권 12호, 1935년)
라진항도 만철이 연간 화물처리능력 300만톤의 대형 항만으로 건설하는 제1기 5개년 공사를 1933년 5월에 착공하였다. 장기적인 목표는 900만톤의 연간화물처리능력을 갖는 것이었다. 1935년 11월 제1부두의 완성과 함께 만주국 도문세관사무소, 국제운수창고 등을 갖추고 개항장으로 되었다. 이로부터 만철이 직접 경영하는 라진항은 만주직통열차를 통해 북한지역 동북부에서 중국 동만주지역과 일본을 연결하는 주요한 상업항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1938년까지 8,000천톤 급 선박 12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3개 부두와 방파제, 창고, 화물야적장이 건설되었다. 라진항의 주요화물은 결국 중국 화물이어서, 라진 주위에 상공업이 수산가공업 이외에는 본격적으로 형성되지 못한 탓에 당시 “방은 갖추어져있지 않은데 현관만은 훌륭하다”고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일본과는 니이가타(新潟)와 츠루가(敦賀), 사카이미나토(境港)에서 연락선이 청진-라진-웅기 3항에 기항하였다.
▲ 라진항 개항당시 모습 (제1부두), 사진상의 아마쿠사마루(天草丸)는 원래 1902년에 러시아제국이 건조한 배수량 2,346톤의 '아무르'호인데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탈취하여 사용하였음 ⓒ항만협회 상동
한편 웅기항은 연간 60만 톤 정도의 화물처리능력을 갖는 항으로 정비되어 1936년 4월에 만철이 라진항의 보조항으로 시설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주요 화물은 석탄, 어유, 목재로 바뀌었다.
▲ 웅기항의 1930년 모습 ⓒ 조선총독부 내무국, 『조선항만요람』1931년
이와 같이 두만강하구 지역은 1945년까지 조선 쪽의 라진과 웅기가 하나의 세트가 되어 일본의 대륙지배를 진행하는 교두보 역할을 하게 되었다. 라진은 도시 건설을 통해 새로 일본인 사회가 형성되었고 웅기에는 조선인 사회가 중심이 되었다.
일본인 사회가 중심이었던 청진과 라진이 해방 이후에도 북한 함경북도 지역의 중심지로 유지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하지만 이는 중국 만주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에 의해 강제된 근대의 산물이 토대가 되어 새시대를 연 굴절의 역사도 우리의 역사이다.
필자는 이 흐름을 딛고 스스로 근대를 찾아나선 조선사람들의 "주체성"을 더 중시하고 싶다.
※ 두만강 넘어 대륙과 해양을 향한 라선을 바라보다 (하)는 해방이후 라선의 변화와 경제특구 개발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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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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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넘어 대륙과 해양을 향한 라선을 바라보다 (下) : 두만강지역개발의 꿈
2020.10.28 09:00
by 이찬우 (테이쿄대학 교수)
두만강을 다시 생각하는 현대의 라선
① 해방후 1980년대까지 라선의 변화
▲ 라진의 뒷산인 사향산에 올라 내려다본 라진 시가지, 라진만, 라진항 (2017년 필자 촬영)
바다를 낀 라선(라진, 선봉)은 수산물은 물론이요 산이 많고 토질로 보아 목축과 콩, 감자 농사가 적합하다. 두만강 변에는 옥수수밭과 논이 펼쳐져 있다. 강변은 겨울에 모래바람이 심한데 이 문제만 없다면 사시사철 천혜의 농, 축, 수산 지역이다. 그래서인지 라진에서 먹은 냉면이나 쟁반국수에는 고기가 많이 들어있었다.
▲ 라진의 식당에서 나온 쟁반국수와 감자냉면 (2017년 필자 촬영)
먼저 해방 전후 라선의 변화를 짚어본다. 해방 전에는 일본이 1931년에 만주국을 세운 이후 동해가 일본제국의 사실상 내해(内海)가 된 상태에서 만주-조선-일본의 경제통합을 위해 이른바 "만주국의 현관" 항구로 라진항이 건설되었다(1932년 8월 일본정부 각의결정). 동시에 라진시가지 건설을 위해 조선총독부가 1934년 6월 20일에 식민지 조선에서는 첫 도시계획법인 <조선시가지계획령>(총독부령 제18호)을 제정하고 그 첫 대상지역으로 라진을 선정하여 1935년부터 토지구획정비사업을 진행하면서, 장래 라진과 웅기를 통합하고 인구 30만명을 포용할 수 있는 계획을 추진한 바 있다. 사실 1990년대에 라진과 웅기(선봉)를 통합한 라진선봉시(라선시) 설립의 원래 구상은 해방 전에 조선 총독부가 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1940년대에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라진 개발은 멈춰지고 결국 일본이 패망하면서, 두만강 하구 변의 라진과 웅기가 일본의 통치에서 가장 먼저 벗어났다. 동해로 난 천혜의 부동항(不凍港)이며 중국 동북지역의 관문이었던 라진항의 기능은 변할 수밖에 없었다. 라진항을 통해 만주의 콩을 매년 수십만 톤 일본에 수출했고 또한 연간 5-6만 명이 라진항으로 만주를 드나들었었는데, 일본이 망해서 그 역할을 더는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청진항도 마찬가지였지만 청진은 제철소 등 중공업 기반을 가진 20여만 인구의 도시로 성장해 있었던 반면에, 라진은 수산물가공공장, 콩을 원료로 한 장류 생산 공장 정도로 대규모 공장이 없었고 해방 전 약 4만 정도에 그쳤던 인구가 해방 후에는 일본인들이 빠져나가면서 3만 명 정도로 줄었다. 자연히 도시 기능이 쇠락하면서 국내 수송을 담당하는 철도와 항만 기능만 중시되었다. 참고로 1940년 인구통계를 보면 함경북도에서 청진이 약 20만 명, 성진 6.2만, 경성 주을 3.4만, 어랑 3.2만, 웅기 3.2만이었다(평양은 당시 약 29만 명, 서울은 약 94만 명).
그리하여 1949년 2월에 라진시는 라진군으로 개편되었다. 말하자면 도시에서 농촌이 된 것이다. "라진시는 원래 일본제국주의가 만주를 침략하기 위하여 개설한 항구이였으나 해방 후에 그 역할이 변환되면서 현재는 시로서 독립할 만한 조건과 사업량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공식적인 설명이었다(최고인민회의에서 행정구역 개편에 관한 홍명희 부수상 보고, 노동신문 1949년 2월 1일). 라진시로 다시 복귀한 것은 1967년 8월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해방 전까지 소련이 국경을 막았고 항일유격대들이나 밀항자들만 넘나들던 두만강 하류 15km 소련국경이 해방과 더불어 대신 열렸다. 라진을 중심으로 지리적으로 본다면 1920년대 이후 해방 전까지는 동만주-라진-일본의 두만강 종단축(남북축)만 있었고 청진-라진-핫산의 두만강 횡단축(동서축)이 없었는데 해방 후에는 반대로 되었다.
해방 후에 이 두만강을 합법적으로 처음 넘어 소련으로 들어간 이들은 유학생들이었다. 1946년 9월 18일 오후 6시, 평양역에서 환송을 받고 기차로 출발한 이들이 청진에서도 큰 환송을 받은 후 두만강 국경을 넘기 위해 도착한 곳은 안중근 의병대가 1908년에 들이쳤던 홍의리였다. 이곳에 국경검역소가 있었고 이 검역소는 소련군이 관리했는데 이들 유학생들이 홍의에서 보낸 편지가 다음과 같이 노동신문에 실려있다.
"홍의는 대단히 한적한 촌락이 오나 우리들을 위하여 소를 잡고 멀리 웅기 라진에서까지 정당 사회단체학생 부녀들이 동원하여 와주신데 대하여서는 넘우도 황송하여 어찌할줄을 모르고있습니다. 국경이라 아침저녁으로는 일기가 좀 추우나 오이려 건강에는 퍽으나 유리합니다. 우리들을 위한 특별한 설비 알들한 걱정 붉은군대동무들에게는 거저거저 감격과 감사뿐입니다. 그런데 우수운 일은 식당에서 식사할 때에 식사의 방법과 절차를 몰라서 어리둥절하는 일이 각금 있습니다. 그리하여 식당에서 일하는 쏘련녀자동무들에게 각금 웃끼고합니다. 그날그날의 규률있는 문화적 생활을 체험하면서 우리는 지난날 너무도 그날그날이 무질서하였으며 개인주의적이었으며 자유주의적이었다는 것을 반성합니다. 우리조선도 하루바삐 쏘련과 같은 전인민이 잘살수있는 문화의 나라 진정한 민주주의적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힘껏 배우겠습니다" (로동신문 1946년 10월 6일, 맞춤법은 원문 그대로 인용)
당시 해방 후 북한사람들에게 소련이란 존재가 어떤 것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청진-라진-핫산의 두만강 횡단축이 철도로 연결된 것은 196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소련이 먼저 1952년 6.25 전쟁 중에 핫산에서 두만강을 건너 두만강역에 이르는 나무다리 철도(광궤)를 개통했다. 라선지역은 6.25 전쟁 기간 중에 점령되지 않은 지역이어서 도시시설이 파괴되지 않았고 라선 주민들은 남한 국군이나 유엔군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소련은 두만강 다리를 1959년에 철교로 바꾸었고 이 철교가 지금까지 <조러 우정의 다리>라는 이름으로 북한-러시아 사이에 유일한 육상 교통로로 되어있다.
▲ 러시아 핫산 쪽에서 본 '조러 우정의 다리'(또는 조러친선교) 혼합궤도①③ : 북한 표준궤(1435mm), ②④ : 러시아 광궤(1520mm)
북한은 1960년에 두만강역에서 홍의역에 이르는 9.5km 철로(표준궤)를 완공하여 핫산-두만강역(환적)-홍의-웅기-라진 사이(54km) 철도가 이어졌다. 라진-청진 구간 78km(청라선)는 1962년에 착공하여 65년에 완공되었다. 그 뒤 1973년에 철도 전기화가 이루어지고 1989년에는 러시아 광궤철도와 북한의 표준궤 철도의 혼합선(4궤도)이 청진까지 부설되었다. 이로써 소련은 웅기항(선봉항) 과 라진항 그리고 청진항에 철도 환적 없이 직접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소련은 1980년대에 라진항 제1 부두를 자국의 화학비료 수출 부두로 사용하였다.
▲ (왼쪽) 1965년 청진-라진간 청라선 개통(증기기관차) (노동신문 1965년 6월 11일) (오른쪽) 1973년 청진-라진간 청라선 전기화(붉은기호 전기기관차) (노동신문 1973년 4월 16일)
▲ (왼쪽) 1976년의 라진역 (노동신문 1976년 8월 28일), (오른쪽) 라진항의 부두 상하역 작업 모습 (노동신문 1992년 9월 3일)
▲ 라진역 (2016년에 개조, 2017년 필자촬영)
▲ 두만강역 (2017년 필자촬영)
일본제국이 심혈을 기울여 건설했던 라진항은 수산 및 국내 해운수송 그리고 소련 화물의 중계수송 역할을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국내 해운은 철도수송의 부담을 덜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는데 예를 들어 서부지구에서 기차로 실려 온 광석, 무연탄 등을 흥남항에서 싣고 기차보다 빨리 곧바로 청진, 라진까지 수송하고 아오지 등 북부 탄전에서 캐내는 석탄을 흥남지구의 공장들에 공급하는 식이었다(노동신문 1966년 7월 28일). 그리고 라진항에 있는 라진조선소는 3천 톤급 화물선(목선)을 건조할 수 있었다.
▲ 라진조선소에서 배수량 3천톤급 화물선 건설(노동신문 1960년 3월 17일)
라진항의 해운 관계 전문가를 육성하기 위한 교육기관이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1950년에 해양 간부 양성소와 초급해양기술원 양성소가 세워졌고, 1956년에는 4년제 라진해양전문학교(항해과, 선박기관과)가 설립되었다. 1968년에 이를 격상하여 설립한 라진해운대학은 북한에서 유일한 해운대학이다.
▲ 라진해운대학 항해학부의 항해실험실습 (노동신문 1979년 5월 17일)
라진, 웅기 지역은 이와 같은 수송 분야를 빼면 1980년대까지 농, 축, 수산 부문이 중심이 되고 지방공업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한가지 예외라면 웅기지역에 1970년대에 북한 최대의 원유가공기지인 승리화학공장(연간 원유 200만 톤 정제능력, 후에 연합기업소)과 여기에 전력을 공급하는 중유발전소(6.16화력발전소)를 소련의 지원으로 건설한 것이다. 소련이 제공하는 원유는 소련의 원유수송선에 실려 웅기항(선봉항) 앞바다에서 해저파이프를 통해 승리화학공장으로 보내졌다.
▲ 승리화학공장을 현지지도하는 김일성 주석(노동신문 1981년 6월 12일)
라진, 웅기에서 농, 축, 수산 분야와 지방공업의 발전 방향은 1954년 7월과 1959년 3월에 있은 김일성 수상의 현지 지도에서 정해졌다. 59년 현지 지도 직후 열린 노동당 함경북도위원회 확대전원회의는 김일성 위원장이 함경북도 당간부들의 관료주의, 지방주의, 종파주의가 특히 농업 분야에서 해방 후 15년 동안 깨어지지 않았다고 맹렬히 비판하면서, 그 이유가 농촌에 "지난날 행세거리로 《혁명》을 한 멋쟁이들만 앉아있고 그들이 《혁명》을 했다는 간판만 팔아먹으면서 당정책을 성실하게 집행하지 않고 있기 때문"(노동신문 1959년 3월 26일)이라고 일갈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때 김일성 수상은 라진, 웅기의 농업협동조합에 대해서는 산간지역의 특성에 맞게 목축(젖소, 돼지, 양 사육)과 감자 생산을 장려하였고 수산부문과 생산협동조합을 포함한 지방공장 들을 통해 지방공업을 육성할 것을 지도하였다.
당시 김일성 수상이 성공사례로 방문한 협동농장은 1954년에 조직된 라진군 무창 농업협동조합이었다. 무창 농업협동조합의 사례는 북한이 생각하는 <관료주의 병폐> 그리고 <타성>과 싸우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무창 농업협동조합에서는 1957년부터 지역 사정에 맞는 감자를 많이 심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도에서 군으로 내려 먹인 옥수수 (주; 북한에서는 옥수수를 강냉이라고 하지만 1970년대까지는 옥수수와 강냉이 명칭을 함께 썼다). 면적을 리에 일률적으로 할당한 <관료주의 병폐>, 그리고 과거부터 해오던 조(좁쌀) 농사를 계속하려는 일부 조합원들의 <타성>이 문제였다. 옥수수가 잘 되는 밭에는 옥수수를 심어야 하지만 감자가 유리한 밭에까지 일률적으로 옥수수를 내려 먹이는 관료들은 책벌을 받을까 무서워 보신주의 때문에 그리한 것이었다. 무창리 당위원회와 농업협동조합 간부들이 꺾이지 않고 조합원들을 잘 설득하고 유도하여 감자 농사와 축산으로 성공을 이루었다고 한다. 1957년에 조합이 농사지은 감자로 10여 톤의 쌀과 교환하여 조합원들에 분배한 것으로 조합원들이 감자 농사의 의미를 알고 1958년엔 감자 농사가 50%나 늘었다고 한다. 이를 모범으로 삼아 라진과 웅기에서는 목축과 감자농사, 옥수수, 쌀농사를 적지적작(適地適作;토지에 맞는 작물을 재배)의 원칙에서 융통적으로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웅기군(1952년에 경흥군에서 분리)은 김일성 수상이 1959년 현지지도에서 제기한 방침 즉, "웅기군에서는 다양한 군내 농업협동조합들과 수산사업소, 수산협동조합들을 다 합쳐서 시험적으로 전 군을 한 개 국영농장으로 만들어 보자"에 따라 전국에서 처음으로 군 전체가 하나의 <군종합농장>으로 되었다. 실제로는 지방공업과 상업 부문까지 다 포괄하는 전국에서 유일한 군 단위 국영농장이 만들어져 2000년까지 40년간 이어졌다. 이는 1958년에 북한이 농업부문의 협동화를 완료한 시점에서 협동소유, 협동경리의 다음 단계가 전인민적 소유(국유, 국영경리)라는 사회주의 발전 방향을 실험적으로 해보려는 취지였다고 보인다. 그 후 국영농장은 목장, 과수원 등을 중심으로 한 종합농장이 몇 군데 생기지만 군단위에서 모든 생산단위를 포괄하는 종합농장은 <웅기군 종합농장>이 유일했다. 웅기군 명칭은 1981년에 선봉군으로 바뀌었다. 선봉군에서는 1989년까지 30년간 군 안의 9,000 정보의 늪과 습지, 모래언덕, 산을 정리 개간하여 배수로를 치고 방풍림을 조성하고 방목지, 양어장 등을 조성하여 젖소, 오리, 물고기를 길러서 1959년에 비해 비하여 고기생산이 7.3배, 양식 물고기생산이 16배, 우유 생산이 95배로 증가하였다고 한다.
▲ 선봉군 우암리 젖소목장 (노동신문 1989년 3월 27일)
▲선봉읍의 변화 (노동신문 1991년 8월 18일)
수산분야에서는 1940년 이후 13년간 동해 북한해역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정어리 떼가 1953년부터 다시 회유를 시작하여 라선의 수산업 활황으로 이어졌다. 1930년대에 청진항과 라진항은 정어리 풍어로 일대 황금기를 맞은 적이 있었다. 정어리는 식용, 화학 공업 원료 등으로 사용되는데 정어리는 지방질이 고등어보다도 약 4배나 더 많은 식품이다. 그리고 정어리 기름으로 글리세린을 만들어 이에 화학작용을 가하면 폭발력이 강한 화약을 제조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각종 약품과 화장품, 양초, 비누의 원료가 된다. 또한 어분을 만들어 이 어분에서 사료와 비료를 생산하는 만능 원료이다. 1953년 이후 1980년대까지 동해의 어획은 정어리 회유의 시기에 따라 부침을 하는데 대략 60년대 중반-70년대 중반, 80년대 중반 이후 90년대에 어획량이 줄었다.
지방공업은 지방 자체의 원료를 가지고 소비품을 생산하는 것이 기본인데, 도내의 중앙기업이 설비 등을 지원하는 형태로 육성되었다. 한 예로 라진종이공장은 포장지 정도만 생산하던 수준이었는데 성진제강소의 절단기, 농축기 등 설비 지원을 받아 필기용지와 신문지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노동신문 1966년 12월 6일). 라진의 대표적인 지방공장으로는 당시로써는 혁신적으로 소음이 없고 쓰기 간편한 전기이발기를 생산한 라진철제일용품공장, 수산식품을 생산하는 라진물고기가공공장, 라진장공장, 라진지방공업종합공장(화학일용품, 수지일용품, 유리, 모피 등) 등이 있었다. 라진에도 생산협동조합들이 생겨났는데 라진가구생산협동조합이 대표적이고 사금을 채굴하던 <라진락산 사금생산협동조합>도 있었다. 그리고 도시지구(동, 노동자구)의 인민반원 들 중심으로 구성된 가내생산협동조합들이 어디나 있었다.
▲ (왼쪽) 라진철제일용품공장의 전기이발기 생산 (1966년 5월 24일) (오른쪽) 라진물고기가공공장의 생산설비(노동신문 1970년 10월 24일)
상업 서비스로는 철도 복무원들의 곽밥(도시락) 영업을 빼놓을 수 없다. 청진철도국 라진영업소는 라선의 유명한 청학동 약수 공급과 함께 특산물로 만든 도시락을 판매하였다. 노동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있다.
"판매원 오연희동무는 푸짐한 곽밥을 다 공급하고 뒤따라 청량음료를 공급하려다가 바로 앞의 식탁에서 곽밥의 찬들을 밀어놓고 한 아주머니가 내놓은 반찬을 맛있게 드는것을 보게 되였다. 그것은 집에서도 입맛을 당기게 하느라고 가끔 밥상에 올려놓군하던 불깃불깃하고 보기에도 먹음직한 방게 반찬이였다. - 이 고장 특산물이며 손님들이 저렇게 좋아하는 방게 반찬을 렬차에 올릴 생각은 왜 못했을가. 그는 퇴근길에 바다가 도래굽이로 나가 저녁 늦도록 방게잡이를 한것은 연희동무만이 아니였다. 영업소에서는 이 사실을 좋은 본보기로 하여 자체의 힘으로 지방의 특산물과 원료원천을 더 많이 탐구동원하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렸다. 이와 함께 해당기관과의 련계를 강화하여 지방의 특산물을 비롯한 여러가지 부식물을 철따라 확보하고 계획적으로 주방에 공급해주게 되니 반찬의 질은 더욱 높아지고 봉사활동도 잘되여나갔다." (노동신문 1977년 11월 4일, 맞춤법은 원문 그대로 인용)
▲ 라선 원정리 근처의 청학 약수장 (2017년 필자 촬영)
1980년대까지 라선(라진, 선봉)은 대외적으로는 소련과 연계하면서 승리화학공장이라는 원유정제공장도 생기고 소련의 무역선도 다녔지만, 국내적으로는 철도 및 해운 수송, 협동농장과 수산협동조합, 생산협동조합, 지방산업공장이라는 기층 생산단위가 중심이 된 소박한 국경도시였다. 라선의 인구는 1980년대 말에도 10만 명 정도의 인구였다. 라진항이나 라진역사는 일제시대 모습에서 거의 변하지 않았다. 두만강은 그저 국경이었고 두만강 너머는 심리적으로 멀어졌다.
그러다 소련의 붕괴와 함께 1990년대 대격변의 시대를 맞아 라선은 근본적인 변화와 함께 새 출발을 한다.
※ 다음 호 두만강 넘어 대륙과 해양을 향한 라선을 바라보다 (종결) 은 라선경제특구의 탄생과 새출발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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