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 소녀'였던 할머니, 극락왕생하소서"
"'만년 소녀'였던 할머니, 극락왕생하소서"
[현장] 일본군 '위안부' 배춘희 할머니 떠나보내던 날
서어리 기자(=광주) | 기사입력 2014.06.10. 19:57:50 최종수정 2016.05.12. 16:05:45
짙은 눈화장에 보랏빛 조끼 차림. 영정 사진 속 할머니의 모습은 화려했다. 부러 '수수한 차림'으로 꾸미지 않은, 즐겨 차려 입던 화려한 모습 그대로였다. 할머니는 영정 속에서 그 고운 자태를 뽐내며 조문객들을 맞이했다.
10일 오전,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나눔의 집' 앞마당에서는 지난 8일 별세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배춘희 할머니의 영결식이 열렸다. 영정 사진이 담긴 액자 앞으로 상이 차려졌다. 100세 상수(上壽) 맞이 잔칫상이었으면 좋으련만, 할머니는 안타깝게도 망백(望百)의 나이인 91세로 생을 마감했다.(관련 기사 : "위안부 피해 배춘희 할머니 별세…생존자 54명")
▲10일 오전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 집에서 8일 별세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배춘희 할머니 영결식이 열렸다. ⓒ프레시안(서어리)
고된 삶이었다. 배 할머니는 열아홉 살이던 1942년, "돈을 벌게 해준다"던 말에 깜빡 속아 친구 '봉순이'와 함께 중국 만주로 끌려갔다. 그로부터 4년간 지옥 같은 성노예 생활에 시달렸다. 광복 뒤엔 정처 없는 떠돌이 생활을 했다. 일본에서 엔카 가수로 전전하다 1980년대에야 친척의 도움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그러나 고국 땅에 돌아왔다는 기쁨도 잠시, 어렵사리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친척에게 사기를 당해 몽땅 잃어버렸다.
가진 것도 없고, 평생을 함께할 배우자도 자식도 없는 혈혈단신의 몸, 할머니는 결국 겨우 용기를 내 1997년 이곳 '나눔의 집'에 들어왔다. 같은 고통을 겪은 이들과 의지하고, 때론 싸우고 다시 정들고, 그러다 몇몇을 먼저 떠나보내고…. 그렇게 남은 생을 이곳에서 지냈다.
배 할머니의 마지막 배웅을 해주는 것도 나눔의 집 할머니들이었다.
영정을 마주 보고 앉은 할머니들의 눈가가 붉었다. 배 할머니와 평소 투닥거리던 김군자 할머니가 "친구가 먼저 가니까 서운하다"며 "과거지사 다 잊고 극락왕생하라"고 했다. 이옥선 할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애써 농담투로 "먼저 가서 좋은 자리 많이 잡아놓으라"는 말을 던졌다. 시종 흐느낌을 멈추지 않던 유희남 할머니는 "먼저 가고 나중에 가고 차이지만 한을 풀고 가지 못해 마음이 섭섭하다"면서 "갈 길 갔다고 생각하고 편하게 가"라며 고인의 마지막 길에 축복을 빌었다.
▲배춘희 할머니 영정 사진을 만지며 흐느끼는 정복수 할머니. ⓒ프레시안(서어리)
나눔의 집 식구들은 평소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던 할머니를 위해 영결식에서도 노래를 준비했다. 상주 역할을 맡은 나눔의 집 박재홍 과장이 본인 휴대전화에 저장된 할머니의 육성 녹음 파일을 재생했다.
"봉숭아꽃 꽃잎 따서 손톱 곱게 물들이던 내 어릴 적 열두 살 그 꿈은 어디 갔나. 내 나라 빼앗기고 이내 몸도 빼앗겼네. 타국만리 끌려가 밤낮없이 짓밟혔네. 오늘도 아리랑 눈물 쏟는 아리랑."
'위안부' 피해 여성들을 위한 '소녀 아리랑'이라는 곡으로, 지난 1월 설 명절에 나눔의 집을 방문한 정홍원 총리 앞에서 할머니가 직접 부른 노래다.
노래 제목처럼, 할머니는 소녀 같았다. 아기자기한 장신구를 좋아하고 텔레비전에서 아기나 새끼 동물이 나오면 화면에서 눈을 뗄 줄 몰랐다. 특히 고양이를 좋아해 주먹만 한 고양이 모양 펜던트를 목에 걸고 다니며 방문객들에게 "이 '네코짱(일본에서 고양이를 부르는 애칭. 편집자.)'이 막내딸"이라며 자랑하기도 했다.
영결식에 참석한 스님들은 '소녀 아리랑'이 끝나자, 이런 생전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만년 소녀였던 배춘희 보살, 편히 오소서"라고 했다.
▲배춘희 할머니의 생전 모습. 왼쪽은 2010년 가을, 오른쪽은 2014년 설 무렵. ⓒ프레시안(최형락)
과거 상처로 마음의 빗장 걸어 잠근 할머니…한 못 풀어
이제 곧 배 할머니가 나눔의 집을 떠나야 할 시간. 17년 간 할머니가 살았던 나눔의 집 곳곳을 마지막으로 보여드리기 위해 박 과장이 영정 사진을 들었다.
박 과장 손에 들린 영정 사진이 마당을 지나 생활관 내 할머니 방 안으로 들어왔다. 때 묻은 이불보 위에 놓인 영정 사진을 보고 조문객들이 통곡했다. 박 과장과 안신권 소장은 사진을 향해 재배를 올린 뒤 방을 한 바퀴 둘러보고 거실로 나갔다.
할머니는 구석진 곳을 좋아했다. 거실에 마련된 자리도, 방 위치도 할머니의 자리는 늘 구석이었다. 햇볕이 잘 들지 않는 방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갖던 할머니에겐 늘 비밀이 많았다. 겉을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과 달리, 자신의 얘기는 어두운 곳에 꽁꽁 숨겨뒀다.
나눔의 집에 계신 할머니 중 상당수가 과거에 본인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당했는지 고발하고 증언하는 데 적극 나서지만, 할머니는 아팠던 과거를 꺼내놓지 않았다. 살을 부대끼며 살다시피 하는 상근 직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다른 할머니들에게서 '역사의 산증인으로서 책무를 다하지 않는다'며 종종 타박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할머니의 상처가 너무도 깊고 쓰린 것을 알기에, 나눔의 집 식구들은 좀체 마음을 열지 않는 배 할머니를 안쓰러워했다.
▲배춘희 할머니 방. 이날 상주 역할을 한 박재홍 과장(왼쪽)과 안신권 소장이 영정 사진을 향해 재배를 올리는 모습. ⓒ프레시안(서어리)
뭐든 감추고 속에 쌓아두는 할머니는 물건도 방에 쌓아두길 좋아했다. 내용물을 빼고 남은 빈 상자, 비닐봉지도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뒀다. 그래서 할머니의 방은 항상 발 디딜 틈 없이 잡동사니로 가득 찼다. 직원들이 한 번 청소하려고 하면 아무것도 건들지 말라고 호통을 치곤 했다. (관련 기사 : "빼앗긴 청춘"…명절도 눈물 쏟는 '아흔 소녀' 아리랑)
그러나 이날, 할머니의 방 안은 깨끗했다. 온 벽을 다 가릴 정도로 높이 올려졌던 잡동사니 상자들이 모두 사라졌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별안간 '대청소'를 지시한 것.
나눔의 집에서 할머니들의 생활을 돕는 한 직원은 "갑자기 왜냐고 물어도 말씀해주시지 않았다. 아마도 임종 때가 된 걸 아신 것 같다"고 했다.
배 할머니는 올해 들어 임종을 예감한 듯 나눔의 집 식구들에게 미리 '이별 인사'를 했다. 할머니는 감기에 걸려 몸져누웠던 3월, 직원을 불러 "이것만은 꼭 말해야 할 것 같다. 이제 틀린 것 같다"며 "모두에게 신세 많이 졌다. 다른 할매들도 다 좋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언제 떠날지 모르니 30분 간격으로 들여봐 달라"고 했다.
늘 "잠든 것처럼 조용히 갔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배 할머니는 지난 8일 새벽 5시경, 소원대로 잠을 자듯 숨을 거두었다. '위안부' 성노예 경험의 한을 풀지 못한 한 인간의 삶은 이렇게 조용히 저물었다.
▲배춘희 할머니에게
모든 절차가 끝나고, 운구차가 나눔의 집 마당을 서서히 빠져나갔다. 김군자 할머니는 차량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극락왕생하라"고 말했다. 김 할머니의 바람처럼 배 할머니가 저 세상에선 극락왕생할 수 있을까.
한국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7명 중 이제 남은 생존자는 54명. 일본 정부는 이날도 여전히 지독하게 고요하다.
▲배춘희 할머니가 생전에 쓰던 화장 도구들. ⓒ프레시안(서어리)
▲배춘희 할머니가 나눔의 집 식구들과 찍은 단체사진. ⓒ프레시안(서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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