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학자’ 박순경 교수의 소천에 부쳐
기사승인 2020.10.27 08:32:37
분단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는 평화통일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통일에 대한 논의는 다양하다. 특히 기독교 관점에서의 논의가 많다. 그러나 이 땅의 통일을 위한 바른 통일신학의 부재를 지적하는 사람도 많다.
우리나라 신학자로서 한 생을 평화통일운동에 헌신해 온 원초(原草) 박순경 선생이 10월 24일 오전 9시께 숙환으로 서울 방배동 자택에서 별세했다(향년 98세). ‘故 원초 박순경 선생 통일사회장 장례위원회’는 이창복, 함세웅, 김상근, 청화, 김희선, 이규재, 한충목, 김재연 등이 공동장례위원장으로, 상주로는 고인을 모시고 산 제자 김애영 한신대 교수가 맡았다.
박 교수는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 Drew대에서 조직신학(박사)을 전공하고, 이화여대와 목원대에서 교수로 후학을 양성했다. 한국여신학자협의회 초대 회장, 한국여성신학회 초대 회장 등 여성신학계를 이끌었다. 운동가 측면에서 박 교수는 많은 선언, 단체, 국제기구 등에서 활약해 왔다. 학계대표로 범민련 결성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민족회의, 통일연대,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 등에서 중책을 맡았고, 6.15남측위원회 상임고문과 한국진보연대 고문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박 교수가 갖는 한국 기독교에서 중요한 의미는 그녀의 깊고 넓은 통일에 대한 신학적 성찰과 탐구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로 『한국민족과 여성신학의 과제』(대한기독교서회, 1983)를 비롯해 『민족통일과 기독교』(한길사, 1986), 『통일신학의 미래』(사계절, 1997) 등 많은 저서와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대한기독교출판사, 2003), 포이에르바하의 『기독교의 본질』(종로서적, 1982) 등의 역서를 남겼다. 교육과 통일운동 등의 공적으로 대한민국 석류장(1988, 보안법 위반으로 2006년 정부로부터 상훈 박탈)과 늦봄 통일상(2009)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박 교수의 저술에 등장하는 ‘민족’은 지연, 혈연, 언어, 종교, 문화, 사회경제적 삶의 집단 혹은 공동체로서의 역사적 산물이다. 따라서 그때그때의 역사적 상황에 다라 민족 개념이 규정될 수 있으며 그때그때에 규정되는 민족의 특수성이 총체적인 운명과 명맥을 지님을 강조한다.
동시에 민족의 주체성은 공동체적 주체성으로서 사회, 경제적 평등 없이 성립될 수 없고, 또 왜곡되어 버리며, 민족의 주체성은 그래서 민족 내적으로 또한 대외적으로 반민족적 세력들을 극복하고 새로운 공동체적 삶의 질서를 창출하는 역사적 자유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한반도에서의 통일신학을 이해함에 있어 한국 신학과 서양 신학 전통을 일괄적으로 비판, 극복하기보다 기본적 교의의 유의미성은 유지하되, 통일을 갈구하는 우리 민족의 신학적 주제는 서양 기독교와 신학 전통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건이므로 통일신학의 명제는 서구신학 전통을 선별적으로 흡수해 가지되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지평과 주제임을 역설했다고 애제자 김애영 교수는 전했다.
서광선 교수는 박순경 교수의 “통일신학”에 대해 1991년 북조선의 주체사상 전문가 박승덕 박사와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정리되고 강화되었다고 한다. 박 교수는 1991년 7월 동경에서 열린 주체사상 강연에서 ‘주체사상의 신봉자이며 선동자’로 고발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징역(3년 구형에) 1년 6월, 자격정지 1년 6월에 집행유예 2년으로 석방되었다. 출감 이후 박 교수는 1995년 8.15 50주년 민족공동행사의 일환인 “민족대토론회”에서 발표한 “통일운동의 원칙과 방도”를 통해 “88선언”이 제시한 통일의 5대 원칙의 준거인 1972년 7.4 공동성명의 “자주”, “평화”, “민족적 대단결” 3대 원칙에 “민주”를 더해 4대 원칙을 제시하기도 했다.
우리 시대 걸출한 통일신학자 박순경 교수의 소천은 이제 한반도에 보다 진일보하고 시대와 상황에 맞되 기독교적 가치와 교의에 조화되는 새로운 통일 신학의 필요성을 절감케 한다.
동시에 통일 정치학, 통일 경제, 경영학, 통일 언어, 문화, 통일 건축학, 통일 물리, 화학 등 거의 모든 학문과 이론 분야에서의 심도있는 학문적 탐구와 통일을 위한 이론적 토대의 구축과 보다 실천적인 대안과 정책의 개발 등이 모색되어야 한다. 준비 없는 통일은 엄청난 비용과 문제를 유발할 것이 분명하며, 통일 독일의 경험은 이를 웅변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 분단 2천여 년의 디아스포라 상황에 조국 회복의 꿈과 비전을 준비했던 헬츨(Theodor Herzl,1860~1904)의 경험과 지혜를 보아야 한다. 그의 〈유대인 국가, The Jewish State〉(1896)와 <오래고 새로운 땅, Old New Land >은 키브츠(Kibbutz), 모샤브(Moshav) 및 모사드(Mossad) 등 회복될 이스라엘의 정치, 경제, 사회문화 등 주요 비전과 정책에 대한 꿈과 제안을 던지고 있다. 이를 통해 그의 후예인 바이츠만(Chaim Azriel Weizmann,1874~1952), 벤구리온(David Ben-Gurion, 1986~1973) 등의 리더들은 착실하며 원대한 국가설계를 멋지게 감당할 수 있었다.
평생을 이 땅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헌신하신 박순경 교수님의 소천은 우리 각 분야에서 통일을 위한 준비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본다. 가장 먼저 정립되고 체계화되어야 할 부분이 통일신학임은 자명하며 그래서 더 시급한 과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생신이 7월 14일이신데, 올해도 프랑스혁명 기념일이라고 굉장히 좋아하시면서 음악을 들었는데, 전인권의 ‘걱정말아요 그대’ 마지막 대목인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를 좋아하셔서 무슨 꿈이냐고 물으니 역시나 ‘민중해방, 민족해방, 여성해방, 남북통일, 평화통일, 세계평화’이라고 하시더라”고 애제자는 회고하고 있다. 우리 통일논의는 늘 결단과 희생을 수반했다. 문익환 목사님의 무모하게 보이던 방북과 많은 선각자들의 용기와 결단으로 이만큼이라도 진행된 것이 아닌가란 지적은 의미 있게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김홍섭 ihome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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