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17

'모가디슈'는 왜 북한 사람들의 대사에 자막을 달았을까

'모가디슈'는 왜 북한 사람들의 대사에 자막을 달았을까



'모가디슈'는 왜 북한 사람들의 대사에 자막을 달았을까이희동 입력 2021. 08. 15. 11:39

[리뷰] 남북한 신파가 사라진 시대의 영화 <모가디슈>


[이희동 기자]



▲ 영화 <모가디슈> 포스터
ⓒ 롯데엔터테인먼트


류승환 감독의 영화 <모가디슈>가 화제다. 개봉 전에는 '코로나 19'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OTT나 온라인 플랫폼 대신 극장 개봉을 고집했다는 면에서 이슈가 되더니, 최근에는 관객 200만 명 돌파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사실 처음 이 영화의 소개 자료를 접했을 때만 해도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류승완 감독은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부터 <부당거래> <베를린> <베테랑> 등에 이르기까지 내가 믿고 보는 감독 중에 하나였지만, <모가디슈>가 다루고 있는 1991년 소말리아의 남한 대사관 탈출기 실화는 결코 만만한 소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소말리아 내전과 관련해서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전설적인 작품 <블랙호크다운>과의 비교를 감수해야만 했다. 오죽 영화가 훌륭하면 아직까지도 전쟁영화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블랙호크다운>. 과연 류승완 감독은 제작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블랙호크다운>만큼 소말리아 내전을 그려낼 수 있을까?

그러나 더 큰 걱정 요인은 영화의 소재인 남북한 관계였다. 실화는 남한과 북한의 대사관이 서로 도와 소말리아를 극적으로 탈출했다는 것인데, 감독이 북한과 관련된 전형성의 함정에 빠지지나 않을지 우려스러웠다. 줄거리가 신파 그 자체 아닌가. 힘든 고난 속에서 맺어지는 민족의 화합과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남북한 대사관 식구들의 이별 장면.

게다가 류승완 감독은 전작 <군함도>에서 그가 그 전형성의 덫에 빠질 수 있음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물론 자본이 많이 투입된 만큼 제작사의 입김도 컸겠지만, 어쨌든 감독은 과하게 민족과 관련된 신파를 강조하다가 '군함도'라는 매력적인 소재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우를 소말리아 모가디슈를 대상으로 또 범하지 않으라는 법은 없었다.

과연 류승완 감독은 <군함도>의 실패를 거울삼아 남북관계의 전형성을 극복할 수 있을까? 또한 <블랙호크다운>의 부담감을 떨치고 소말리아 모가디슈의 현장감을 관객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다행히 영화 <모가디슈>는 위의 질문에 대해 류승완 감독다운 대답을 하고 있었다.
신파가 사라진 남북관계




▲ 영화 <모가디슈> 스틸 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감독은 영화에서 남북과 관련된 신파를 철저히 통제했다. 소말리아 내전이라는 극단적인 환경 속에서 남한과 북한 대사관이 살아남기 위해 서로 돕다보면 눈물 쏙 빠지는 장면을 연출할 만도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런 장면이 없다. 오히려 관객들이 눈시울을 적실만 하면 감정선을 끊는다. 많은 이들이 영화를 보고 나와 헛헛하다고 할 정도이다.
처음 남한 대사관이 북한 대사관 사람들을 들이는 것부터가 우연에 가깝다. 조인성이 분한 강대진 참사관은 그들에게서 전향서를 받아 승진하기 위해서 그들을 받아주자고 하며, 김윤석이 분한 한신성 대사는 그런 참사관의 제안에 반대하다가 오갈 곳 없는 북한 아이들의 모습에 마음이 동해 문을 열어준다. 같은 민족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혹은 휴머니즘에 입각하여 북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다.




▲ 영화 <모가디슈> 스틸 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그리고 이어지는 한정된 남한 대사관 내에서의 남북한 사람들 간의 일상의 공유. 여기에서도 그동안 남북한과 관련된 영화에서 보여주는 신파적인 소재는 드물다. 식사 도중 깻잎 한 장을 함께 떼는 장면에서 많은 이들이 남북의 정을 찾고자 하지만 딱 거기까지이다. 깻잎을 통해 마음을 열었다기보다 남과 북이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언어와 문화는 같지만 다른 이데올로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은 같은 민족이지만 감히 하나 되기를 꿈꾸지 못한다. 단지 함께 힘을 합쳐 생존을 모색할 뿐이다. 영화는 북한 사람들이 이야기할 때마다 자막을 깔아주는데 그것은 그들과 우리의 거리를 나타내는, 북한이 우리와 엄연히 다른 존재임을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온갖 역경을 겪고 모가디슈를 탈출한 뒤 드디어 남북한의 대사관이 헤어지는 마지막 장면. 여느 영화 같았으면 남북한 사람들이 부둥켜안고 통일되면 꼭 다시 보자, 그동안 너무 고마웠다 등등의 인사를 나누며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할 테지만 <모가디슈>는 이마저도 거부한다. 양측의 대사관 사람들은 그 모든 걸 꾹 참은 채 서로를 바라보는 대신 앞만 주시한다. 그것이 현실이고,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당시의 생존방식이었다.
남북관계의 현실이 반영된 <모가디슈>




▲ 영화 <모가디슈> 스틸 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그렇다면 도대체 왜 감독은 영화에서 이토록 신파를 자제했던 것일까? 단순히 모든 게 과잉이었던 <군함도>의 실패에서 얻은 교훈 때문일까?

아마도 그것은 영화가 지금의 남북관계를 투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현실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쉬리>가 우리 사회가 드디어 반공주의로부터 한 발짝 정도 벗어났음을 알렸고, <공동경비구역 JSA>가 우리가 북한 사람들을 같은 사람으로 인지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었고, <코리아> 류의 전형적인 신파물들이 같은 민족으로서의 북한을 강조했다면, <모가디슈>는 이제 남북관계가 신파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음을 선언한다.

현재 남북한에는 같은 역사를 공유했던 세대가 저물어가고, 전혀 다른 체제에서 태어나고 자란 세대가 주역이 되고 있다. 당장 북한의 최고 지도자 김정은만 해도 1980년대 생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같은 민족이라고 무턱대고 눈물을 펑펑 쏟기를 기대하고, 무조건 통일을 외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전히 기성세대들은 우리의 소원이 통일이라고 외치지만 이는 MZ세대들에게 뜬금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왜 우리가 같은 민족이라고 꼭 북한과 통일해야 하는가? 통일 대신 평화적인 공존은 안 되는가? 북한은 언어와 문화는 같지만 우리와 전혀 다른 역사적 궤적을 걸어온 완전한 타자인데 말이다. <모가디슈>는 바로 이 지점에서 기존 남북관계의 전형성을 탈피하고 있으며, 시의성을 가지고 있다.
참혹한 소말리아 내전




▲ 영화 <모가디슈> 스틸 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관객들에게 익숙한, 분단을 바탕으로 한 신파의 거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을 졸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영화에서 그려내고 있는 1991년 소말리아 모가디슈의 생생한 모습 때문이었다.

<블랙호크다운>이 참혹한 전쟁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면, <모가디슈>는 그 속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소말리아 개인들의 모습을 더 클로즈업 하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제국주의의 식민지에서 벗어났지만 계속되는 군부의 폭정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조차 힘든 소말리아 사람들.

영화에서 보여주었듯이 군벌 아이디드는 바레 정권에 대항하여 내전을 일으키지만 그 뒤로도 소말리아 민중들의 삶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직까지도 문제가 되고 있는 소말리아 해적은 바로 이와 같은 사회적 배경에서 잉태된 것이다.

감독은 평범한 아이들까지 실제 총을 장난감 삼아 노는 소말리아의 비극적인 현실을 비쳐주며 관객들에게 묻는다. 과연 외교가 무엇이고, 현재 안온한 우리의 삶은 떳떳한지. 관객들은 남한 대사관에 감정이입하여 그들의 무사 탈출을 기원하지만, 현실을 돌아보면 자문할 수밖에 없다. 혹여 우리가 저런 현실에 구조적인 공범 역할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참혹한 소말리아의 모습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떠올렸던 것은 1980년 광주의 모습이었다. 당시 다른 나라 외교관들은 그런 말도 안 되는 비극 앞에서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었을까. 우리가 당시 미국 대사관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듯이 소말리아 사람들은 각국 대사관에게 그런 현실을 고발하지 않았을까?

<모가디슈>는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아직 절찬 상영 중이다. 전쟁 영화를 제대로 느끼고 싶으시다면 철저한 방역 수칙을 지킨 뒤 극장으로 가 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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