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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한국 기득권의 역사 (1) 지역의 토호(土豪), 중앙의 귀족이 되다
기자명 이종우 칼럼니스트
승인 2022.04.28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윤석열 당선자가 대통령에 취임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윤석열 당선자는 “공정과 상식”이라는 명제를 전면에 내세웠고, 이 명제가 유권자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윤석열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런데 윤석열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돼 당선자 신분이 된 후 새 정부를 꾸리는 과정에서 각종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이로 인해 윤석열 당선자가 후보 시절 내세웠던 ‘이게 윤석열 당선자가 후보 시절에 말한 공정과 상식이냐?’는 비아냥까지 나오고 있다.
문재인 정권에서 조국 전 법무부장관 딸의 의학전문대학원 부정 입학 의혹, LH 직원들의 부동산 투기 등은 진위여부와 상관없이 민주당 정권이 5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인수위원회가 내세운 공직 후보자 자녀의 편입학 관련 아빠 찬스 의혹, 부동산 차익, 심지어 저가로 차를 구매하기 위한 위장전입과 범칙금 미납 의혹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서민들에게는 매섭고 권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관대한 법의 이중 잣대, 권력을 이용한 편법과 불법의 현실이 드러나고 있다. 진영에 상관없이 각종 편·불법 의혹이 불거지는 상황에서 시민들의 정치인을 향한 불신은 더욱 커지고 있다. 그리고 이들과 연결돼 있는 법조계 인사, 언론인, 재벌 등에 대한 불신으로도 확대되고 있다. 정치인, 법조인, 언론인, 재벌 등은 현대 사회의 대표적인 기득권 세력이다. 물론 기득권 세력을 향한 시민들의 불신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자는 문득 한국사에서 기득권의 흐름이 궁금해졌다.
근현대 사회와 이전 사회를 구분하는 점 중 하나는 신분이 아닌 능력이 사회적 지위를 좌우한다는 것이었다. 능력 중심의 사회 분위기는 신분 제도의 해체로 이어졌고, 신분제도 해체는 근현대 사회의 핵심적인 정체성 중 하나였다. 그런데 21세기 한국 사회는 신분 구분과 세습이 없는가? 기업에서 자식에게 경영권과 소유권을 상속하고, 대를 이어서 지역구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기업의 2세에게 경영자 수업을 시키고 유학을 보내며, 국회의원은 지역구 유권자들이 표를 준 결과인데 뭐가 문제냐고 반론할 수도 있다. 그런데 자식에게 엄청난 비용이 드는 사교육과 해외 유학을 시킬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어떨까? 한국 기득권의 상징인 서울대 입학생 중 비수도권 출신 학생의 비중이 점차 줄어들고 특수 목적 고등학교 출신 학생들이 늘어난다는 현상을 고려한다면 어떨까? 배가 고파서 빵을 훔치면 감옥에 가지만, 법조인, 특히 검찰이 범죄 혐의를 받으면 시간을 끌다가 무혐의 처분이 내려지는 상황. 이것이 현대 한국 사회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신분제도가 생겨서 고착됐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근대 이전으로 가보자. 통신과 교통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고,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을 때 신분제도는 매우 견고했다. 통신과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것은 지역을 중심으로 한 세력들은 정치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가질 수 있게 해줬다. 특히 국가의 법이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았던 상황에서 지역의 토호들은 자기 지역 내에서 상당한 수준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중앙군과 다른 독자적인 사병(私兵)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중앙에서 경제력과 군사력이 필요할 때 지역의 세력들에게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이 반영된 것이 초기국가시대부터 고려 대까지다. 초기국가시대, 즉, 고조선부터 부여, 옥저, 동예, 삼한 등이 존재했던 시기에 이들 국가들은 왕이 없거나, 왕이 있어도 그 힘이 강하지 않았다. 이들 세력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로 변하고 이들 국가를 주도했던 지역 세력이 다른 지역 세력을 흡수하면서 삼국시대가 시작되었다. 당시 지역을 대표하는 세력들은 중앙 정치에 참여했는데, 고구려의 욕살(褥薩), 신라의 화백(和白) 등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왕이 존재했고 끊임없이 왕권을 강화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일정 부분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9주5소경이라는 지역 통치 제도를 운영했고, 지역 토호 세력의 자치를 보장하는 동시에 이들을 감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역의 세력은 강대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해상 세력이었던 장보고(張保臯, ?~846)의 청해진(淸海鎭)이었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중앙의 정치에 참여했던 지방 세력은 그대로 중앙의 귀족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기득권은 지역에서 그랬던 것처럼 세습됐다. 이런 과정에서 중앙의 귀족보다 신분은 낮지만 실력은 좋은 새로운 세력들은 중앙에서 나라를 개혁하거나 기득권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기득권을 가진 귀족들의 견제로 실패하여 새로운 세력의 인사는 초야에 묻히거나 목숨을 잃었다. 최치원(崔致遠)이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 역사에서 적어도 고려시대까지는 지방에 기반을 두고 중앙에 진출하기 시작한 토호 세력들이 기득권을 가졌던 시대였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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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한국 기득권의 역사 (1) 지역의 토호(土豪), 중앙의 귀족이 되다
기자명 이종우 칼럼니스트
승인 2022.04.28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윤석열 당선자가 대통령에 취임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윤석열 당선자는 “공정과 상식”이라는 명제를 전면에 내세웠고, 이 명제가 유권자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윤석열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런데 윤석열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돼 당선자 신분이 된 후 새 정부를 꾸리는 과정에서 각종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이로 인해 윤석열 당선자가 후보 시절 내세웠던 ‘이게 윤석열 당선자가 후보 시절에 말한 공정과 상식이냐?’는 비아냥까지 나오고 있다.
문재인 정권에서 조국 전 법무부장관 딸의 의학전문대학원 부정 입학 의혹, LH 직원들의 부동산 투기 등은 진위여부와 상관없이 민주당 정권이 5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인수위원회가 내세운 공직 후보자 자녀의 편입학 관련 아빠 찬스 의혹, 부동산 차익, 심지어 저가로 차를 구매하기 위한 위장전입과 범칙금 미납 의혹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서민들에게는 매섭고 권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관대한 법의 이중 잣대, 권력을 이용한 편법과 불법의 현실이 드러나고 있다. 진영에 상관없이 각종 편·불법 의혹이 불거지는 상황에서 시민들의 정치인을 향한 불신은 더욱 커지고 있다. 그리고 이들과 연결돼 있는 법조계 인사, 언론인, 재벌 등에 대한 불신으로도 확대되고 있다. 정치인, 법조인, 언론인, 재벌 등은 현대 사회의 대표적인 기득권 세력이다. 물론 기득권 세력을 향한 시민들의 불신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자는 문득 한국사에서 기득권의 흐름이 궁금해졌다.
근현대 사회와 이전 사회를 구분하는 점 중 하나는 신분이 아닌 능력이 사회적 지위를 좌우한다는 것이었다. 능력 중심의 사회 분위기는 신분 제도의 해체로 이어졌고, 신분제도 해체는 근현대 사회의 핵심적인 정체성 중 하나였다. 그런데 21세기 한국 사회는 신분 구분과 세습이 없는가? 기업에서 자식에게 경영권과 소유권을 상속하고, 대를 이어서 지역구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기업의 2세에게 경영자 수업을 시키고 유학을 보내며, 국회의원은 지역구 유권자들이 표를 준 결과인데 뭐가 문제냐고 반론할 수도 있다. 그런데 자식에게 엄청난 비용이 드는 사교육과 해외 유학을 시킬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어떨까? 한국 기득권의 상징인 서울대 입학생 중 비수도권 출신 학생의 비중이 점차 줄어들고 특수 목적 고등학교 출신 학생들이 늘어난다는 현상을 고려한다면 어떨까? 배가 고파서 빵을 훔치면 감옥에 가지만, 법조인, 특히 검찰이 범죄 혐의를 받으면 시간을 끌다가 무혐의 처분이 내려지는 상황. 이것이 현대 한국 사회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신분제도가 생겨서 고착됐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근대 이전으로 가보자. 통신과 교통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고,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을 때 신분제도는 매우 견고했다. 통신과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것은 지역을 중심으로 한 세력들은 정치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가질 수 있게 해줬다. 특히 국가의 법이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았던 상황에서 지역의 토호들은 자기 지역 내에서 상당한 수준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중앙군과 다른 독자적인 사병(私兵)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중앙에서 경제력과 군사력이 필요할 때 지역의 세력들에게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이 반영된 것이 초기국가시대부터 고려 대까지다. 초기국가시대, 즉, 고조선부터 부여, 옥저, 동예, 삼한 등이 존재했던 시기에 이들 국가들은 왕이 없거나, 왕이 있어도 그 힘이 강하지 않았다. 이들 세력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로 변하고 이들 국가를 주도했던 지역 세력이 다른 지역 세력을 흡수하면서 삼국시대가 시작되었다. 당시 지역을 대표하는 세력들은 중앙 정치에 참여했는데, 고구려의 욕살(褥薩), 신라의 화백(和白) 등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왕이 존재했고 끊임없이 왕권을 강화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일정 부분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9주5소경이라는 지역 통치 제도를 운영했고, 지역 토호 세력의 자치를 보장하는 동시에 이들을 감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역의 세력은 강대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해상 세력이었던 장보고(張保臯, ?~846)의 청해진(淸海鎭)이었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중앙의 정치에 참여했던 지방 세력은 그대로 중앙의 귀족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기득권은 지역에서 그랬던 것처럼 세습됐다. 이런 과정에서 중앙의 귀족보다 신분은 낮지만 실력은 좋은 새로운 세력들은 중앙에서 나라를 개혁하거나 기득권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기득권을 가진 귀족들의 견제로 실패하여 새로운 세력의 인사는 초야에 묻히거나 목숨을 잃었다. 최치원(崔致遠)이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 역사에서 적어도 고려시대까지는 지방에 기반을 두고 중앙에 진출하기 시작한 토호 세력들이 기득권을 가졌던 시대였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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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사가 된 문재인 정권 (1)-적폐는 청산됐는가?
기자명 이종우 칼럼니스트 승인 2022.05.12 23:07 댓글 0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또 하나의 정권이 저물었다. 이번 회차 지면을 작성하는 5월 10일부터 윤석열 당선자가 당선자 신분에서 대통령이 되고, 문재인 대통령은 전대통령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지난주부터 칼럼을 준비하면서 필자의 마음은 매우 좋지 않았다. 한국종교사를 연구하는 연구자이자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윤석열 정부의 공직 후보자들을 둘러싼 의혹들이 필자를 매우 불쾌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각종 부모 찬스, 박사 학위 논문 심사의 장소(속칭 “방석집”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총장 시절 학생을 향한 무례한 행동 등 각종 의혹은 필자의 삶 자체를 부정하게 만드는 논란들이었다. 그래도 한 정권을 책임 진 대통령이 물러나고 새로운 대통령이 등장하는 시기에 개인의 씁쓸함을 표현하는 내용보다는 지난 정권을 돌아보는 내용으로 칼럼을 작성하는 것이 “신문 칼럼”이라는 공적인 지면에 더 어울린다고 판단해, 이전에 작성했던 원고를 갈아엎고 새로운 원고를 작성하기로 결심했다.
정권이 교체되면서 문재인 대통령 재임 기간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이 평가들 속에서 예상 외로 많이 간과되고 있는 점이 바로 “탄핵 이후 탄생한 정권”이라는 사실이다. 국내외에서는 박근혜씨의 탄핵에 대해 매우 후한 평가를 내렸다. 엄동설한에 연인원 1000만명이 탄핵을 요구하는 촛불집회에 나섰고, 물리적 충돌 없는 평화적인 집회 모습은 민주주의의 모범적인 사례로 기록됐다. 그리고 문재인 정권은 촛불집회에서 표출된 시민들의 염원을 받아 안으면서 탄생한 정권이었고, 이렇게 탄생한 문재인 정권은 “적폐청산”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수행할 의무를 가지게 됐다.
5년이 지난 지금 적폐들은 얼마나 청산됐을까? 박근혜 정권을 탄핵이라는 역사적 불행을 야기한 적폐 세력들은 과연 청산됐을까? 필자의 생각에 문재인 정권이 받았던 시대적 요구인 적폐 청산은 이뤄지지 않았다. 탄핵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일부 인물들과 박근혜 정권 이전의 이명박 정권에 대한 일부 심판을 제외하고, 대한민국 사회의 적폐로 지목되고 있는 세력들의 상당수는 청산되지 못했다. 실질적 적폐 세력은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의 일부 인물들을 재물로 던지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 사회의 적폐는 특정한 직군이 아니다. 시대별 타도의 대상이었던 이승만 독재정권, 박정희에서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부독재 세력은 적폐 자체인 동시에 적폐의 결과물이었다. 이들이 사라진 뒤 이들과 비슷하면서도 이들에게 빌붙어서 기득권을 키웠던 또다른 적폐 세력이 모습을 드러냈다.
-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 정경유착, 노동자 탄압, 비자금 축적을 자행하는 재벌,
- 자신의 특권 의식이나 자기 조직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법조인들,
- 사실을 왜곡하고 특정 집단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언론인들,
- 대의와 명분을 저버리고 자신의 정치생명 연장에 급급한 정치인 등이 그들이다
- (일부라고 생각하고, 일부였으면 좋겠다).
이들 세력들을 개혁하기 위해 문재인 정권에서는 최저 임금 인상, 언론과 검찰 관련법의 개정 등을 시도했다. 그러나 번번이 적폐 세력의 강력한 저항과 국민 선동으로 인한 여론 악화로 법 개정은 좌절되거나 개혁적 성격이 상당 부분 후퇴했다.
문재인 정권이 내세웠던 구호 중 하나가 ‘사람이 먼저다’였다. 이것은 대한민국 국민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적폐 역시도 사람이 먼저다. 적폐는 특정한 기관이나 집단이 아니라, 그 기관과 집단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폐라는 의미다. 즉, 재벌, 법조계, 정당이 문제가 아니라 재벌의 오너, 법조인, 언론인, 정치인들 중 일부가 청산 대상이 되는 적폐라는 뜻이다.
그리고 적폐 청산에 대한 이들의 반발과 선동의 영향을 받지 않고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는 시민 개개인의 안목이 적폐 청산의 중요한 원동력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은 사람을 바꾸려는 노력보다는 제도 개선에 집중했고, 이것은 적폐청산 실패로 이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교육 개혁을 통해 사람을 바꾸는 것은 긴 시간이 필요하고, 정부는 사람을 바꾸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제도 개선만이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적폐 청산은 정권이 바뀐다고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작업이 아니라는 의미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누가 정권을 잡건 정권이 할 수 있는 일은 명확한 한계를 가진다. 법적 근거와 민주적 절차를 거쳐야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권 기간 동안에 이루지 못한 적폐 청산 실패는 오히려 시민의 인내와 적극적 참여라는 숙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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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사가 된 문재인 정권 (2)-또 하나의 묵은 적폐, 남북분단
기자명 이종우 칼럼니스트 승인 2022.05.25 12:37 댓글 0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지난 회차 칼럼에서 필자는 문재인정권 기간 동안 한국 사회의 적폐가 청산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어쩌면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 것일지도 모르는 적폐는 시민들이 박근혜씨를 대통령직에서 탄핵함으로써 청산의 필요성이 전면에 드러났다.
그러나 이 모든 적폐는 “사람”이 문제였고, 사람의 인식과 사고를 인위적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문재인 정권 동안 제도의 개혁을 시도했으나, 사람이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제도의 개혁은 번번이 가로막히고, 그 결과는 시민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 한국사에서 사람의 인식과 사고와 함께 주요 적폐 중 하나고, 사람의 인식과 사고가 가장 많이 이용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남북분단상황이다.
남북분단의 시작과 그 과정을 이 지면에서 다시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남북분단의 시작과 지속의 근본적 원인은 북한이라는 것도 재론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한국의 기득권이 분단의 주요 원인이 북한이라는 이유로 북한의 소멸만을 주장하는 것은 비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한국에 이익도 되지 않고, 오히려 한국을 전쟁의 공포로 몰아넣는 악수(惡手) 중의 최악수다. 적을 이기거나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이 전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가장 좋은 수”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것도 모자라서 한국의 기득권은 이러한 분단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지켜왔고, 여기에 항의하고 저항하는 시민들을 다시 분단 상황을 이용하여 탄압해 왔다. “멸공”, “반공”, “승공”, “종북” 등의 용어는 모두 이런 맥락에서 생겨났다. 그리고 “교련”, “등화관제” 등의 병영국가화, 그리고 최근에 발생했던 “유우성 간첩조작 사건”을 비롯한 각종 간첩 조작 사건 등은 그 결과물이다. 특히 유우성 간첩조작 사건에서 잘못된 기소로 징계를 받았던 이시원 전 검사의 공직기강 비서관 임명은 윤석열 정권이 남북분단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을 확인할 수 있는 인사였다.
문재인 정권은 집권 초반부터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사실 문재인 정부 초반 남북관계는 좋지 않았다. 평창동계올림픽 개최를 앞둔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북한에 남북단일팀 결성을 제안했지만, 한국 내에서 선수의 기회 박탈 논란이 발생했고, 북한의 핵실험 강행으로 인해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국방위원장 사이에서는 자신의 핵무기 발사 단추가 더 크다는 소위 “말의 전쟁”이 이어졌다. 그러나 북한 측이 평창동계올림픽에 대표단을 파견했고, 이때부터 시작된 회담에 관한 협의가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의 2018년 제1차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이 회담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의 역사적인 “월경(越境)”이 있었고, 도보다리 산책, 그리고 공동성명 발표로까지 이어졌다. 이후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이 더 있었다.
그 결과 한국의 주선으로 북한과 미국의 정상 간의 세 차례의 정상회담이 있었다. 첫 회담인 싱가포르 정상회담은 매우 좋은 분위기로 진행됐으나, 두 번째 회담인 하노이 정상회담은 합의문조차 발표하지 못한 채 종료됐다. 그나마 2019년에 있었던 세 번째 회담은 남, 북, 미의 정상이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에서 한 자리에 모였다는 의의가 있었으나, 이 역시 북한이 2020년 미사일 실험을 재개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다시 수구정권이 들어섰다.
문재인 정권 집권기의 남북정상회담에서 나왔던 장면들은 많은 뜻을 은유하고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월경은 한반도를 남북으로 가르는 휴전선이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지 알 수 있었던 장면이었다. 또한 회담 논의 후 약 12시간 만에 성사된 2018년의 두 번째 남북정상회담은 남북의 정상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만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아울러 평창동계올림픽에서 결성된 여자아이스하키 단일팀의 경기에서 득점한 단 한 점은 1등과 메달에 매달렸던 한국 사회의 변화된 모습, 남북한이 힘을 합쳐서 이뤄낸 성과에 남북한 시민들이 열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러한 긍정적인 장면 외에도 부정적인 모습도 드러났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미국의 존재”가 있었다. 전문가들이 개성공단의 정상화, 금강산 관광의 재개의 필요성을 강변(强辯)했지만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미국과의 협의를 거쳐야 한다는 한국 정부의 생각 때문이었다. 북한은 분단 이후 한국 정부를 철저하게 무시하고 타도의 대상으로만 규정했다. 기본적으로 북한은 한국 정부를 소위 “괴뢰” 정부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휴전협정의 당사자가 북한과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이었고, 한국군은 휴전협상에 반대하면서 휴전협정에 참여하지 않는 바람에 북한은 한국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휴전협상 당사자라는 이유로 미국과의 협상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이 오랫동안 한미연합사령부에 있다가 겨우 평시작전권만을 돌려받은 상황은 북한이 미국만을 상대하는 중요한 원인이 됐다.
문재인 정권은 집권 초부터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고,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한반도 운전자론”이 있었다. 이것은 문재인 정권이 한국 사회의 근본적 적폐에 한반도 문제가 있음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반도 문제에서 남한이 주도권을 잡는 것이 분단사와 미국을 비롯한 러시아, 일본, 중국 등 강대국의 존재로 인해 쉽지 않음만을 보여줬다. 한국전쟁부터 시작된 역사적 한계의 해결을 지속적으로 후세대에게 떠넘기는 상황에서 이전 세대는 책임감도 느끼지 않은 채 기득권 지키기에 몰두하고 있고, 후세대는 한반도 문제에 관한 관심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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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사가 된 문재인 정권 (3)-역병과 싸우다
기자명 이종우 칼럼니스트 승인 2022.06.09 18:29 댓글 0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박근혜씨를 대통령직에서 탄핵하는 과정에서 “‘적폐 청산’이라는 시민의 염원”을 받아 안고 출범한 문재인 정권은 집권 초반 적폐 세력의 수사와 사법처리를 비롯한 적폐 청산에 집중했다. 특히 북한 김정은 위원장과의 회담을 빠르게 개최해 묵은 적폐인 남북 대립의 개선을 위한 한 걸음을 내딛었다. 수차례 진행된 남북정상회담은 남북 정상이 당면 현안의 논의를 위해 “언제든” 만날 수 있고, 휴전선이 얼마나 의미 없는 경계선인지 보여줬다. 그 외에도 문재인 정권은 경제, 외교, 사회문화 부분에서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이러한 문재인 정권의 의욕적인 정책 수행 전반을 가로막은 사건이 발생했으니, 그것은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19(이하 코로나19)의 확산이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발생이 처음 보고된 것은 2019년 12월, 중국 우한(武汉)이었다. 이후 전 세계는 팬데믹 상황에 빠져들었고,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 역시 2020년 1월 20일에 첫 번째 확진자가 보고됐고, 2월 16일까지 30여명의 확진자가 나타났다. 2월 18일 31번째 확진자 발생이 보고될 때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는 더 이상 확산되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하루에 1-2명 정도 확진자 수가 보고됐고, 심지어 확진자가 단 1명밖에 남지 않은 적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31번째 확진자인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 신자로 인해 급속도로 코로나19가 확산되기도 했다. 이후 2020년 4월 30일~5월 5일 이태원 클럽발 대규모 확진, 2020년 8월 15일 사랑제일교회와 수구단체 집회로 인한 대규모 확진 등이 있었다. 그리고 문재인 정권 말까지 지속적으로 확진자가 발생했다. 심지어 오미크론 변이가 확산되기 시작했던 정권 말에는 확진자 수가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문재인 정권 말 일상으로의 복귀가 일부 이뤄졌다.
수차례의 대규모 확진자 발생으로 중노동에 시달렸던 의료인들, 재택근무와 비대면 수업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은 직장인, 교수자, 학습자, 그리고 워킹맘들, 방역수칙 강화로 영업시간 제한을 받아서 가게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소상공인들, 방역수칙으로 노인요양시설에 부모를 두고 발을 동동 구르던 가족들·······. 팬데믹 상황에서 가장 고통 받았던 사람들일 것이다. 이렇게 고통 받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문재인 정권은 국가 전반을 팬데믹 상황에서 일상으로의 회복으로 비교적 잘 이동시켰다. 특히 박근혜씨가 대통령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메르스 확산에 박근혜 정부가 대처했을 때보다는 훨씬 과학적이고 합리적이었으며 피해도 적었다.
문재인 정권은 질병관리청을 중심으로 최선을 다해서 팬데믹 상황에 대처했다. 질병관리청은 “질병관리본부”에서 “청” 수준으로 승급된 기관으로 문재인 정권의 팬데믹 상황 대처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스웨덴, 영국 등에서 확진자 방치를 통한 소위 “집단 면역”을 실험하다가 많은 사망자를 낸 반면, 한국은 빠른 백신 접종을 병행하며 어느 정도 안정적인 면역자수를 확보했다. 또한 중국이 “제로코로나” 정책을 펼치며 강력한 통제를 시행한 반면, 한국은 확진자수를 투명하게 공개하며 어느 정도 일상을 유지하는 정책을 펼쳐서 국가 자체가 중단되는 일이 없었다. 일본에서 뒤떨어지다 못해 원시적인 확진자 관리와 방역을 보여준 것에 비해 한국은 민주국가에 맞지 않는 국가 통제라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확진자 추적과 관리, 사후 처리에서 앞선 IT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팬데믹으로 인해 경제가 휘청거렸던 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의 경제 상황은 부동산 급등을 제외하면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팬데믹 상황에서도 소위 “경제는 선진국이 되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이러한 문재인 정권의 코로나 방역은 여러 가지로 문재인 정권에 악영향을 끼쳤다. 문재인 정권은 정권 초기 의욕적으로 수행했던 적폐청산, 한반도 평화 무드 조성, 소득 주도 성장 등이 코로나 방역에 집중하느라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거기에 그렇지 않아도 우호적이지 않은 언론은 문재인 정권의 방역과 여러 정책을 부정적으로 소개하기 급급했다.
평가하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다르지만, 문재인 정권의 여러 정책은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도 없지만, 모두 잘못되었다고 볼 수도 없다. 물론 실패했다고 볼 수도 없다. 이것은 퇴임 직전까지 문재인 정권이 유지하던 “50%에 가까운 지지율”이 방증한다.
팬데믹 상황은 문재인 정권의 성과이자 걸림돌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문재인 정권의 모든 성공과 실패를 팬데믹 상황에 귀결시킬 순 없다. 얼마 전까지 입법, 행정, 지역 권력을 모두 잡고 있었고, 이것은 적폐청산, 남북 관계 개선, 팬데믹 극복을 모두 수행하라는 국민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정권이 국민의힘으로 넘어가고, 지자체 선거에서 국민의힘이 압승한 것은 문재인 정권의 성공과 실패 여부를 팬데믹 탓으로 돌릴 수 없음을 방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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