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파우저, 사회의 언어] ‘하다’ 대신 ‘되다’…생각의 행위자를 감추는 시대
등록 2023-04-12 


최근 20~30년 새 두드러진 말 생활의 변화 가운데 하나는 ‘하다’ 대신 수동형인 ‘되다’를 많이 쓴다는 점이다. 일부는 영어나 일본어 표현이 유입돼 확산해서라고 주장하지만, 주체를 감추고 싶어하는 사회문화적 흐름이 그 바탕에 있는 건 아닐까? 클립아트코리아



로버트 파우저 | 언어학자



한국에 다시 돌아온 건 2000년대 말이었다. 십수년 만에 다시 살면서 먼저 느낀 변화는 말이었다. 기억에 남는 변화는 ‘되다’의 잦은 사용이었다. ‘좋은 하루 되세요’라는 인사가 아주 이상했는데, 점점 익숙해졌다. ‘되다’가 ‘하다’를 대체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이런 경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생각되다’를 떠올려 보자. 자주 쓰긴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좀 이상하다. 1920년부터 1999년까지 뉴스를 검색할 수 있는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를 살펴보면, 1980년대 말부터 ‘생각되다’의 사용 빈도가 높아지기 시작해 1990년대 이후로 계속 높아진 걸 알 수 있다.

영어의 영향을 지목하는 이들이 많다. 맞는 말일 수 있다. 실제로 1990년대 이후 국제교류가 급증했고, 1980년대 미국에 유학을 다녀온 전문가들의 사회적 영향력이 커지기도 했다. 동시에 초등학교 영어교육이나 수능 영어 듣기능력 평가 같은 정책과 맞물려 토익 열풍이 불었다. 영어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고, 정보기술(IT) 업계를 선두로 업무 현장에서 외래어 도입도 급증했다.

그렇지만 영어 때문만일까. 그 이전 한자어에 붙이는 ‘되다’는 일본어 수동태 영향이라고도 했다.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어 영향을 많이 받았으니 그럴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1990년대는 그 영향력이 퇴색해 가던 시기였다. 따라서 ‘되다’의 급증을 설명하기에는 충분치 않아 보인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1990년대 말 한국사회는 아이티 붐이 가속하는 한편으로 외환위기를 겪었고, 1997년 정권교체를 이뤘다. 이후 2000년대는 짧은 시간에 일어난 극적 변화를 수용하고 발전시키는 시대였다. 그 변화 끝에 선진국에 진입했지만, 이전과 다른 방식의 일상이 펼쳐졌다. 암묵적으로 서로 통용하고 이해하던 시절이 지나고 매사에 구체적이고 정확한 규칙을 제시하고, 서로 준수하며 살아야 했다. 어디서든 길고 자세한 약정을 마주하는 것은 일상이 됐고, 갈수록 그 내용은 더 길어지고 더 세세해졌다. 핵심은 책임과 의무의 규정이었다. 긍정적으로 보면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는 것이지만, 다르게 보면 곧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소송 많기로 유명한 미국에서도 1990년대 이후 아이티 붐 확산과 함께 약정이 부쩍 늘었고, 분량도 갈수록 길어졌다. 역시 책임 소재를 정하기 위해서였다. 소송이 적고 암묵적인 이해가 상당히 통하는 일본 역시 1990년대부터 매사 책임에 예민해 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이런 추세는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던 선진국 거리에서도 일상생활의 구체적인 부분까지 개입하는 안내문과 지시문을 흔히 볼 수 있는데, 그 역시 거의 모든 활동에서 책임에 그만큼 예민해졌음을 방증한다.

이렇듯 사회 전반이 책임에 예민해질수록 책임으로부터 어떻게든 회피하는 것이 안전하다. 기업은 자칫하면 경제적 타격을 일으키는 소송 대상이 될 수 있으니 법적 범위 안에서 책임을 회피하려고 한다. 개인 역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책임질 일은 되도록 피하려고 조심한다. 이렇듯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태도는 당연히 언어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이럴 때 가장 쉬운 방법은 주제, 즉 주어를 없애거나 감추는 것이다.

영어의 수동태는 동사 변화를 통해 주어를 문장의 피행위자로 바꾼다. 객관적이고 전문적인 느낌을 준다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행위자가 명확해서 주어를 생략해도 되거나 그 반대로 행위자가 누구인지 모를 때 수동태를 쓰곤 한다. 여기에 행위자를 감추고 싶을 때 사용하는 경우도 빼놓을 수 없다. 실제로 미국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서 선주민 억압이나 흑인 노예에 관한 문장에서 평균보다 더 많은 수동태를 사용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이를 통해 행위자인 정부나 백인 주류 사회의 책임을 감추고, 그런 일들이 마치 자연 현상인 것처럼 서술한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되다’의 잦은 사용 역시 어쩌면 어떤 상황에서든 책임을 회피하려는 안전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다’와 ‘생각되다’를 나란히 놓고 보면 의미의 차이는 분명하다. ‘생각되다’에서는 생각의 행위자도 명확하지 않고 그 주체 역시 애매모호하다. 그렇게 보면 ‘되다’의 잦은 사용은 책임이 예민한 시대에 주어, 곧 행위자를 은폐하고, 그 생각의 책임을 회피함으로써 스스로를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선택한 방법일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되는데’, 여러분은 어떠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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