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2-11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

알라딘: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
김문자 (지은이) | 김승일 (옮긴이) | 태학사 | 2011-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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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2세 김문자의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 이 책에 수록한 글은 저자가 최근 10년 동안 조금씩 써서 모아두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전체를 구상하고 쓴 글은 아니지만, 모두 발표하지 않은 글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왜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는지, 누가 계획하였는지, 어떻게 시해하였는지를 원자료를 원자료를 인용하면서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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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 7
을미사변 관련 요약 연표 ● 20
범례 ● 24
서장 왕비의 사진 ● 25

조선왕비 시해 사건 27
민비 사진 30
왕비인가, 궁녀인가? 34
로제티의 <한국과 한국인> 40
사진사 무라카미 덴신(村上天眞) 42
<전국사진화보(戰國寫眞畵報)> 46
누가 처음 잘못했는가? 49
주한영국총영사의 보고서 51
「스나가(須永) 노트」에 묘사된 왕비의 최후 53

제Ⅰ장 청일전쟁에서 대승한 이후에 ● 61
1. 삼국간섭 후의 무쓰 외상과 가와카미 중장 65
「신 대한방침」의 각의 결정 65
조선주둔군의 교체 문제 69
계속된 삼국간섭 71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의 귀경 75
2. 조선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의 의견서 77
조선공사가 된 ‘원훈(元?)’ 이노우에 가오루 77
공채(公債) 문제: 배상금의 일부를 조선정부에 기증 82
전신(電信) 문제: 조선에 대한 전신선 반환론 86
경성 수비병 문제: 일본군의 주둔을 둘러싼 의혹 90
요시카와 법상이 야마가타와 무쓰에게 보낸 서한 92
3. 조선정부의 주병의뢰서와 러시아의 개입 97
‘주병의뢰서’의 괴이함 97
‘주둔의뢰서’의 진상 101
러시아의 개입 104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에 관한 것 108

제Ⅱ장 왕비 시해를 준비한 것은 누구인가? ● 113
1. 이노우에의 경질과 미우라 고로의 등장 117
육군중장 미우라 고로, ‘특명전권공사’에 임명되다 117
이노우에 가오루가 노무라 외상에게 보낸 전신 119
미우라 고로의 회고담 122
다니 다데키(谷干城)가 이토 총리에게 보낸 서신 124
가와카미 소로쿠와 미우라 고로 127
2. 이노우에 공사의 귀임과 회유책의 시작 131
조선왕실의 러시아 접근과 이노우에의 회유책 131
왕비의 기부금 수취 거부 134
3. 사다리를 벗어난 이노우에의 회유책 136
기부금을 둘러싼 공사와 외상 두 사람의 전신(電信) 136
이노우에를 밀어낸 사이온지의 전신 141
국왕에게 기부금 철회를 통고함 144
이노우에의 전신선(電信線) 처분 안 147
4. 미우라 고로의 조선주둔군 지휘권 획득 149
주둔병을 둘러싼 미우라 공사와 가와카미 중장의 전신 149
미우라의 군대 지휘권 요구 154
가와카미 소로쿠의 대본영 훈령 안 157
사이온지 외상의 격노 159
이토 총리의 추인(追認) 161
남부(南部)병참감에 대한 훈령 164

제Ⅲ장 ‘왕비사건’ 제1보의 타전자(打電者) ● 167
1. 왕비 사건의 제1보 169
국왕은 무사하고, 왕비는 살해됨 169
의외였던 해군으로부터의 제1보 171
2. 니이로 도키스케의 약전(略傳) 173
보신전쟁 때 가고시마에서 하코다테까지 열도 종단 173
군함 ‘가스가(春日)’를 타다 177
군사 밀정이 되다 181
3. 청일전쟁기의 니이로 도키스케 185
조선공사관(朝鮮公使館) 배속이 되다 185
황해해전에 나가다 186
대본영(大本營) 배속이 되다 192
웨이하이웨이(威海衛) 공략 작전 중에서 198
4. 왕비 시해 사건 전야와 ‘최후의 날’ 204
정보 장교로서의 관찰 204
우치다(內田) 경성영사(京城領事)의 증언 209
왕비 시해를 보고하러 온 자들 213
5. 가와카미 소로쿠가 주도한 정부와 군의 특사 파견 215
사건 직후 일본정부 수뇌들의 움직임 215
무쓰(陸奧)도 모략을 묵인하고 있었다 218
이슈인(伊集院) 해군 대좌의 보고 221
6. 니이로 도키스케의 그 후 226
금치훈장(金?勳章)을 받다 226
고쳐야만 할 해군의 첩보 활동 227

제Ⅳ장 육군은 사건에 어떻게 관여했는가? ● 231
1. 전원 무죄가 된 사건 관여 군인들 233
군법회의 판결 법정 233
왕비 살해 실행자인 군인들 235
2. 군인 엘리트 구스노세 유키히코의 탄생 237
육군사관학교 수석 졸업 237
4년간의 프랑스 유학 239
가와카미 소로쿠를 수행한 독일 유학 243
3. 청일전쟁기의 구스노세 유키히코 246
조선국 군무고문에 취임 246
구스노세의 훈련대 설치계획안 250
「18대대 진중일지」에 보이는 구스노세의 활약 254
4. 왕비 사건 전야 259
국왕 고종의 훈련대 배척 259
미우라 고로의 부임과 훈련대 교관의 보강 261
구스노세가 가와카미 소로쿠에게 보낸 전신 263
5. 군법회의 판결서 268
‘최후의 날’의 귀국 연극 268
전원 무죄의 논리 270
6. 구스노세의 부하이자 보좌관의 증언 272
구스노세는 부하 11명을 인솔, 경복궁에 침입했다 272
부하의 입을 봉한 훈시 275
7. 조선으로부터의 소환선(召還船) 속에서 277
구스노세, 미우라 고로와 함께 귀국 277
미우라는 무죄판결을 확신하고 있었다 279

제Ⅴ장 고발과 은폐 사이에서 ● 283
1. 우치다(內田) 영사와 왕비 사건 285
‘역사상 고금을 통틀어 전례 없는 흉악’ 사건이라고
불렀던 외교관 285
새벽의 포성 288
2. 외무차관 하라 다카시 앞으로 보낸 개인 편지 290
남아 있는 편지 12통 290
왕비를 시해한 것은 ‘육군 소위’ 291
우치다 영사의 은폐 공작 295
3. 우치다 영사의 공적 편지 보고서 297
외무대신 사이온지 긴모치 앞으로 보낸 보고 297
사이온지의 질책과 우치다의 반론 301
왕비 시해 현장 도면과 천황에 대한 보고 303
기밀 제53호와 히로시마재판 306
4.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도피 후의 재조사 308
조선정부에 의한 조사 보고 발표를 둘러싼 공방 308
조선정부 보고서에 묘사된 참극 310
5. 메이지 천황과 미우라 고로 312
천황의 심부름꾼 312
미우라가 자인한 ‘지어낸 말’ 314

제Ⅵ장 왕비 시해에 가담했던 장사(壯士)들 ● 317
1. 구마모토국권당의 2대 영수 아다치 겐조(安達謙藏) 320
<자서전>과 「담화속기(談話速記)」에서 320
‘민후(閔后)’를 ‘민비(閔妃)’로 정정 323
삿사 도모후사가 설립한 세세코(濟??)에서 배우다 325
참모본부의 첩보 활동에 협력했던 유학생들 328
2. 조선에서 군대의 행동에 관여하다 331
일본군의 왕궁 점령 사건의 내막도 알고 있었다 331
국권당 기관지의 시찰원으로 청일전쟁에 종군 334
종군기자들의 중국 상인 학살 사건 336
가와카미 소로쿠에 대한 전황 보고 340
3. 왕비 시해 사건의 아침 342
아다치의 처 유키코(雪子)의 증언 342
여명 전의 이상한 행군 346
계획을 엉망으로 만든 대원군의 ‘공로’ 349

제Ⅶ장 현장으로부터의 도주 ● 353
1. 왕비를 벤 자유당(自由黨) 장사의 증언 355
호시 도루의 부하 데라자키 야스기치 355
데라자키의 궁궐 침입담 359
2. 호시 도루의 빚 문제를 둘러싼 이노우에와 무쓰의 편지 362
이노우에가 무쓰에게 보낸 편지 362
무쓰가 이노우에에게 보낸 편지 367
3. 호시 도루가 조선정부 법부고문에 취임 369
이준용(李埈鎔) 포박 사건 369
조선의 재판소에서 호시와 부하들 372
호시의 귀국과 미국으로의 출국 374
4. 무라카미 텐신이 촬영한 전봉준의 사진 377
<메자마시 신문> 특파사진사 377
동학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 사진 381
호시 도루와 무쓰에 한하지 않는 깊은 의혹 385

종장 목표는 ‘전신선’의 확보였다 ● 387
이노우에 가오루가 들은 왕비의 말씀 389
미우라 고로가 들은 왕비의 목소리 394
대본영이 미우라 고로에게 부과했던 사명 395
청일전쟁에서 전신선의 결정적인 역할 396
청일전쟁 이전의 조선의 전신선 400
마치는 말 403

후기 ● 407
미주 ● 412
찾아보기 ●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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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문자 (金文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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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작 :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
 소개 :
1851년에 태어난 명성황후보다 정확히 100년 뒤에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2세다. 오사카에서 자라고, 나라여자대학에서 동양사를 전공했으며,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계속해서 7년 동안이나 사학과 조수직으로 일하면서 하나의 당당한 연구자가 되지 못한 채 퇴직한 ‘낙제생’ 연구자다. 자녀 교육과 병간호에 쫓긴 생활 뒤에 다시 나라여자대학에서 사무보조원 자리를 얻었고, 다시 한 번 연구를 하겠다고 생각한 지 약 10년이 지났다. 저자가 명성황후와 만난 것은 많은 일본인이 그렇듯이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의 <민비암살>이었다. 특히 권두에 실린 ‘민비 사진’에 마음이 끌려 실물 사진을 보고 싶다고 생각, 쓰노다 씨의 책에 소개된 <영상이 말하는 한일병합사>에 적혀 있던 사진의 소장처, 이와테현(岩手?) 미즈사와시(水?市)의 사이토 마코토(?藤實)기념관에 전화를 걸어 ‘민비 사진’을 보게 되면서 원전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어떠한 것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주요 논문으로, 「박규수의 실학-지구의의 제작을 중심으로」(<조선사연구회논문집> 17호, 1980년 3월), 「이조후기, 과거제도에 대하여-직부법(直赴法)을 중심으로」(<硏究年譜> 24호, 나라여자대학 문학부, 1981년 3월), 「3.1운동과 김윤식(金允植)-독립청원서 사건을 중심으로」(<寧樂史苑> 29호, 나라여자대학사학회, 1984년 3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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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 김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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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 :
1955년생으로 경기 안성 출신이며, 동국대 사학과(문학학사). 대만국립정치대(문학석사), 일본 규슈대(문학박사) 등에서 중국역사를 연구하고 귀국한 후, 동아시아경제연구원 수석연구원을 거쳐 국민대와 동아대 교수를 역임하였다. 현재는 동아시아미래연구원 원장으로 연구와 강연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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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3개국에서의 생활과 경험을 통해 동아시아세계의 문화교류, 사회경제 교류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역사와 동아시아 지역의 교류와 협력에 필요한 정책을 연구하여 동아시아의 정체성을 재구성하는데 진력하고 있다. 그러한 결과물로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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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 소개>

누가 명성황후 시해를 준비하였는가?

미우라 고로는 대원군과 훈련대의 쿠데타를 가장하여 왕비를 시해하고 친일정권을 수립해서 일본정부와 일본정부군의 현안이었던 전신 문제와 군대 주둔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려고 했다. 그 직전에 대본영으로부터 병참수비대의 지휘권을 위임받은 미우라는 이 모략을 계획할 때 만일 다른 나라의 군사 간섭이 있을 경우, 수립된 친일정권의 의뢰를 받는 형식을 취해 수비대를 출병시킨다는 계획을 상정하고 있었다. 여기에 육군 대본영의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육군 대장과 친일군대인 훈련대를 창설 지휘한 구스노세 유키히코(楠瀨幸彦) 포병 중좌가 등장한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전신선 확보 문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을미사변’이라고도 한다. 청일전쟁의 강화가 성립하고 삼국간섭이 일어난 후에도 일본은 조선에서 전신선을 확보하기 위하여 계속해서 일본군을 주둔할 필요를 느꼈다. 이에 일본정부와 대본영의 뜻을 받은 전권공사 미우라 고로가 그 장애물이 되는 왕비―러시아와 결탁하여 일본에 대항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던 왕비―를 제거하고 친일정권의 확립을 목표로 경성수비대라는 일본의 군대를 사용하여 일으킨 모략 사건이다. 모략 사건인 이유는, ‘훈련대’라는 일본인 사관이 훈련시킨 조선군이 대원군을 옹립하고 일으킨 쿠테타를 가장했다는 점에 있다.
청일전쟁에서는 통신선의 확보가 전략상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규슈뿐만 아니라 멀리 바다를 사이에 두고 대군을 파견하고, 전황을 파악하여 명령을 내리기 위해서는 대본영과 전투 지역 사이를 전신선으로 연결하는 수밖에 없다. 일본해군이 러일전쟁에 앞서 모든 선박에 무선통신기의 비치를 끝낸 것을 생각하면, 청일전쟁이야말로 ‘전신선 시대의 대외전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은 청국에 대한 선전포고에 앞서 전쟁 지역이 되는 조선 및 중국 동북부에서부터 일본까지 연결되는 전신선과 전신국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앞에서도 언급했던 1894년 7월 23일 새벽녘의 군사작전, ‘조선왕궁 점령’의 숨겨진 목적의 하나였다.

주요내용
이 책에 수록한 글은 저자가 최근 10년 동안 조금씩 써서 모아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전체를 구상하고 쓴 글은 아니지만, 모두 발표하지 않은 글이다.
서장으로는 「민비 사진」을 먼저 썼다. 이때 근대가 되어 처음 출현했던 사진이라는 사료를 역사가가 아직 정확하게 취급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통감하고, 이후 조선에 관한 초기 사진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 저자의 은밀한 목표였다.
서장 다음에는 사건에 관여했던 백년 전의 일본인을 한 사람 한 사람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이상하게도 가와카미 소로쿠와 연결된 점을 발견하고 앞으로 가와카미 소로쿠에 대해 더 연구되어야 할 인물임을 지적했다. 전신선 문제는 일본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래서 일본정부든 대본영이든 청일전쟁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조선에서 전신선을 일본의 관리 아래 둘 계획이었다. 그런데 조선의 항일투쟁이 전신선의 절단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신선을 수비하는 군대를 계속 주둔시켜야 한다. 그런데 당시 조선에 배치되어 전신선을 지키고 있던 일본군은 전시에 특별히 소집된 후비병들이며, 전쟁 종결 뒤에는 귀국 후 소집을 해제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이를 대신하는 상비군을 새롭게 파견해야 했지만, 삼국간섭이 조선에 파급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던 일본정부는 대본영에 대하여 잠시 동안 현상유지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의 사정을 제Ⅰ장에서 밝혔다. 이와 같은 상황 아래에서 ‘전신선의 조선반환론’을 주장하는 조선공사 이노우에 가오루가 경질되고, 후임으로 예비역 육군중장 미우라 고로가 기용되어 1895년 9월 1일 서울에 부임했다.

제Ⅱ장에서는 먼저 내각령 제4호(1892년 5월 26일자) 및 외무대신훈령(같은해 8월 5일자)에 따라 재외공관은 외무대신의 허가 없이 본국 각 관청과 통신하는 것이 일체 금지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본영의 가와카미 소로쿠 중장은 미우라에게 9월 6일발로 상비군 및 헌병 파견과 후비군의 철수에 관한 의사를 타진하였고, 이를 계기로 미우라는 외무대신의 허가 없이 대본영과 통신을 시작한 사실을 밝혔다. 더 나아가 미우라 공사가 대본영의 가와카미 중장에게 조선 주둔 일본군의 지휘권을 요구하고, 이를 승인하는 대본영의 명령이 10월 5일자로 남부병참감 앞으로 발령되는 과정을 밝혔다.

제Ⅲ장에서는 니이로 도키스케라는 일본 해군소좌를 추적하여 일본의 한국침략을 위한 사전 준비와 병성황후시해와의 관계를 주적하였다.

제Ⅳ장에서는 미우라가 계획했던 모략은 왕비 살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는 했지만, 일본인의 관여를 숨기는 점에 대해서는 크게 파탄이 났다. 왕비를 살해당한 조선국 측에서 볼 때, 이 모략 사건을 파탄시킨 가장 큰 공은 대원군에게 돌릴 수 있을 것임을 언급했다.

제Ⅴ장에서는 대원군이 미우라 고로와 공모했다는 증거는 아무 것도 없다. 종래에 증거라고 했던 것들은 모두 날조된 것임을 밝혔다. 이 사건을 “역사상 고금을 통틀어 전례 엾는 흉악”한 사건이라고 외무성에 보고했던 경성영사 우치다 사다쓰치조차도 ‘일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일본 관리와 군인의 관여를 은폐하려고 관계자 사이의 말을 맞추기에 적극적으로 관여했으며, 하라 다카시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쓰지 않았던 미우라와 대원군의 공모설을 공식 보고서에 남겼다.

출간의 의미
지금은 교과서 왜곡문제로 한일 간의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이러한 갈등의 배경에는 일본의 한국을 지배하려는 오랜 야욕이 숨겨져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를 문제가 제기될 때만 와글와글 떠들다 그친다. 이러한 때에 일본이 얼마나 오래 전부터 한국을 지배하려고 노력하고 있는지를 명심하고 우리 스스로를 어떻게 지킬 것인지를 꾸준히 강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데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의 출간은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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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자 선생님과의 서면 대담

변선웅: 저는 태학사의 편집담당 이사입니다. 저희는 홈페이지 <저자와의 대화>라는 난을 통하여 저희 필자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아래와 같이 몇 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어렵지만 한국의 독자들을 위해서 답변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변선웅: 선생님께서는 「후기」에서 “명성황후와 같은 총명함”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선생님께서 만난 명성황후는 어떠한 분이셨습니까?
김문자: 명성황후는 어떤 인물인가? 솔직히 말해서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이 사건을 같은 조선인 무리들의 쿠데타로 위장하기 위해서 일본측에서 의식적으로 유포시킨 “대원군과 왕비의 대결”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일단 백지화하고 사료에 기초해서 하나하나 명성황후의 상(像)을 그려나가고 싶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노우에 가오루가 일본 외무성에 보고한 왕비의 연설(이것도 통역관인 고쿠분 죠타로에 의해서 요약된 것이지만)로부터 보면 기억력이 대단히 좋고, 총명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우라 고로조차도 “여성으로서는 실로 드문 재능 있는 호방한 사람이어다”라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 요인들은 왕비가 러시아와 연결해서 일본에 대항하는 일을 두려워했습니다. 왕비만 없다면 국왕은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도 단순했다는 것을 일본은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왕비가 20세부터 30세에 이르렀던 (1870년대) 시기에 왕비는 거의 매년 출산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 만을 빼고는 낳자마자 모두 사망했습니다. 오로지 무사히 키워진 것이 후의 순종입니다. 왕비가 살해되기 1년 전에 3번 알현을 허락 받은 비숍 여사는 왕비의 아름다움과 총명함을 서술함과 동시에 알현하는 중에 어머니와 아들이 손을 잡고 앉아 있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미 20살이 된 아들을 흠뻑 사랑하는 모친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변선웅: 이노우에 가오루의 기록을 통하여 명성황후가 직접 하신 담화의 내용을 남겨주셨습니다. 이노우에 가오루가 청일전쟁의 피해를 보상하는 문제를 제기한 것과 무슨 관계라도 있다고 보십니까?

김문자: 이노우에 가오루가 조선이 입은 피해를 보상하는 문제를 제기했던 것은 이노우에 나름의 ‘내정개혁’을 실행하려 해도 재원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노우에는 그 원인을 조선이 청일 양군의 전쟁터가 되었으므로 농민이 흩어져 버리는 바람에 수확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정당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청국으로부터 3억 엔이 넘는 막대한 배상금을 획득했기 때문에 그 중 500만 엔 정도를 조선에 나누어 주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일본의 정부 요인 중에서는 특이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노우에는 이 조선에 대해 기부금을 가지고 국왕과 왕비를 회유하려는 방책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동경에서 서울로 돌아온 이노우에가 국왕과 왕비를 알현하고 기부금 이야기를 꺼냈을 때, 이것은 자신이 왕비의 총명함, 이제까지 불행하게 조우된 과정 등을 천황에게 상주하여 정부 여러 대신에게 설명한 결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본과 조선의 4반세기에 걸친 역사를 논리정연하게 말한 왕비의 말이 이노우에에게 기부금 안을 제기시켰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이노우에가 왕비의 정치 관여를 엄숙히 배제해온 종래의 정책을 버리고, 왕비를 회유하는 정책으로 일전(一轉)하는 데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변선웅: “이 책에서 남긴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 가겠다”고 하셨는데, 그 문제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내용들인가요?
김문자: 금후의 문제에 대해서는 책에서 몇 가지 말했습니다. 먼저 서문에서 왕비의 사진이 암살자 손에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사료를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진이 언제 누구에 의해서 촬영되었고, 어떠한 루트를 통해 암살자의 손에 건네졌는가를 해명할 수 있다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배경은 보다 명백히 될 것이라고 썼습니다. 저는 이 과제를 계속해서 추구하고 있고, 동시에 명성황후의 진정한 사진을 찾아내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종장에서 가와카미 소로쿠는 더욱 연구해야만 할 인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일청전쟁 당시 대본영의 의지 결정 중심에 있었던 것이 가와카미입니다. 조선 공사로서 부임한 미우라 고로가 외무성을 무시하고 가와카미와 통신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으로부터 사건의 전체적인 모습이 보였습니다. 전신선(電信線)의 반환논자인 이노우에 가오루를 경질하고, 미우라 고로를 조선 공사로 보내는 것처럼 이토 내각에 압력을 넣은 것은 대본영이라는 것도 썼습니다만, 나아가 명백한 사료로써 논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스노세 유키히코 육군 중좌가 가와카미에게 보낸 보고서도 찾아내고 싶습니다.

사건에 관계된 일본인들 중에 본서에 소개된 사람은 극히 일부입니다. 중요한 인물로서 충분히 취급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대부분이 재차 조선에 돌아와 훗날 침략정책의 나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금후에는 일러전쟁기까지 시야를 넓혀 그들이 행했던 모략의 궤적을 명확히 하고 싶은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변선웅: 선생님에게 1910년의 ‘한국병합’은 무엇인가요?
김문자: 저의 아버지는 한국이 일본에 합병된 다음 해에 태어나 10대 때 일본에 건너왔습니다. ‘한국합병’이 없었다면, 제가 일본에서 태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해방 후에도 창씨개명에 의한 이름을 계속 사용했고, 자신의 출생 내용을 숨겼다고 합니다. 많은 재일 동포들이 경험한 굴욕적인 생활사가 저에게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픔을 가지고 역사를 읽으며 분노를 가지고 역사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최근 ‘한국병합’을 병합할 수 없었던 역사로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메이지 정권은 먼저 홋카이도를 병합하고 일본에 편입시킨 다음으로는 오키나와를 병합시켰습니다. 한국은 일본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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