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2-22

[이만열] 한국 기독교와 민족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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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열] 한국 기독교와 민족운동
본문
 2008년 4월 19일 kpi월례 발표회


한국 기독교와 민족운동
   - ‘한국기독교 민족운동’의 개념화를 위한 시론
     이만열

1. 머리말

[최근 아프간 사태로 인해 기독교는 한국 사회의 반기독교적 거센 정서에 직면해 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로 분석될 수 있다. 그 동안 기독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전래 초기나 일제하 그리고 해방 후 어느 때처럼 한국 사회에서 더 이상 약자로 존재하지 않고 다수의 강자로 존재하게 되었다.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으로 핍박을 받거나 따돌림당하지 않고 오히려 거대한 세력이 되었고 때로는 집단이기주의의 한 축을 이루기도 했다. 1980-90년대의 단군문제 이후 기독교는 한국의 민족주의적 지성인들에 의해 많은 비판을 받아왔고, 옷로비 사건 이후 한국 기독교인들의 윤리적 문제점은 최근 각종 부패에 연루되는 목회자들의 행태로 더욱 비난의 대상이 되어 왔다. 대형 교회 목회직 세습과 개정사립학교법 재개정을 둘러싼 삭발운동은 기독교회의 집단적인 이기주의가 어디에까지 갔는가를 보여주었다. IMF 이후 기회만 있으면 몰리는 집단 심리와 과격한 쏠림현상은 아프간 사태를 계기로 한국 교회를 향한 반기독교적 정서의 극점을 이루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태에 직면하고 있음에도 이 글은 한국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민족사에 어떤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는가를 중심으로 엮어진 것이다.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필자]

기독교는 1880년대, 외국 선교사 주도로 전파된 다른 나라의 경우와는 달리, 선진적인 한국인들에 의해서 한국에 수용되었다. 한반도 주변에까지 전파된 기독교는, 만주와 일본에서 성경의 일부가 번역되고, 그 곳에서 기독교를 수용한 용기있는 한국인들이 그 번역된 성경을 한국에 전함으로 비로소 개종의 역사가 일어났다.1) 다른 여러 나라들에서는 외국 선교사들이 기독교를 전파하여 수용하게 되었지만, 한국의 경우는 한국인 스스로가 먼저 수용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국의 기독교의 역사에는 수용 초기부터 한국인들의 적극적인 활동이 돋보였다.
기독교 수용의 이같은 특징은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성격을 해명하는 중요한 관건이 된다. 기독교 수용에서 한국인들의 자기 필요성에 의한 측면이 강조될 수 있다면, 한국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를 그들이 처한 상황과 필요에 따라 활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 연역될 수 있다. 그 필요는 영적 세계에 그치지 않고 민족공동체가 처한 역사적 상황과 관련되었을 것이고 그 점에서도 활용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한국에 수용된 기독교가 초기부터 한국 사회의 시대적 과제와 맞물려 교호작용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 교호작용은 한 세기에 걸친 한국의 민족운동 그것과 관련되는 것이다.
기독교가 수용된 이후 한국 사회는 여러 가지로 변화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중세사회의 전통적인 유습을 개혁해야 한다는 수용당시의 당면한 과제에서부터 시작하여, 한말에는 외세의 침탈에 대항하여 국권을 수호해야 했으며, 일제 강점하에서는 국권회복․민족독립이라는 요구에 직면하게 되었다. 해방 후에는 식민지적 유제 청산을 비롯하여 민족적 전통의 창조적 회복과 통일된 민주국가의 건설해야 하는 등 중층적인 과제를 안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해방 초기의 식민지잔재의 청산이라는 민족적인 과제는 독재․군사 정권 아래서는 인권 신장․민주화의 과제로 발전되었으며, 분단이 민족공동체의 제반 사회적 조건들을 제약한다는 것을 통절하게 깨달았을 때에는 무엇보다 통일국가의 실현이 가장 뚜렷한 민족사의 과제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과제는 민족구성원으로서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기독교인에게도 당연히 주어진 과제였다.
수용당시에 이미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성격을 보였던 한국 기독교는 민족사의 고비마다 주어진 시대적 과제를 수행하는 데에 등한하지 않았다. 한국의 기독교인 또한 이같은 과제를 의식하고 수행함에 적극적이었다. 필자는 기독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수행한 그같은 과제들이 민족운동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고 그것을 ‘한국기독교 민족운동’이라고 가정하고자 한다. 한국의 기독교 혹은 기독교인이 자신들 앞에서 주어진 민족사적 과제 앞에서 퇴영적 자세를 갖지 않고 적극적으로 과제 해결에 나섰다는 뜻이다.
민족운동은 체질․언어․문화를 같이하고 있는 민족공동체가 정치적․사회적․문화적 통합을 이룩하고 대내외적 주체성을 지키며 자체의 성장과 발전을 기약하려는 제반 운동을 말한다. 그것은 대내적으로는 인간 평등을 전제로 공동체의 균형과 정의, 인권과 자유를 신장시키려고 노력하는 운동이며, 대외적으로는 민족공동체가 주체성을 확보, 신장하기 위해 노력하는 운동을 1차적으로 하여 민족과 민족간의 화해와 협동을 증진시키고 인류와 세계의 보편적인 가치관을 증진시키려고 노력하는 제반 운동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민족운동을 이렇게 규정할 때 ‘기독교 민족운동’은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나 기독교인 같은 특정 집단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민족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인들이 행한 운동을 특별히 ‘기독교 민족운동으로 범주화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이런 문제의 제기에는, 기독교인이 기독교라는 종교에 속하고 있지만 그는 종교인이기 이전에 민족공동체에 속한 존재라는 점과 그가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그런 민족운동을 주도하거나 참여했을 것이라는 가능성이 전제되어 있다고 본다. 이런 전제를 유념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점도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즉 앞서 말한 범주의 민족운동에서 기독교 공동체 혹은 기독교인에 의한 것이 같은 시대의 다른 이념 집단과 구별되거나 비교될 수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 혹은 기독교인에 의한 운동으로 간주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필자가 이 글에서 시도하려는 것은 기독교 혹은 기독교인들의 운동을 새롭게 소개하려는 것이 아니다. 앞서 열거한 민족적 과제 수행에 대한 기독교(인)의 활동은 필자를 포함한 여러 연구자들의 개별적인 논문과 단행본들에 소개되어 있다. 때문에 이 글에서는 그런 내용을 종합하고 개괄하여 그 요점을 간단하게 제시하고 그것을 하나의 맥락으로 엮으면서 기독교인들의 그같은 운동이 ‘기독교 민족운동’이라는 개념설정을 가능케 할 것인가을 논의의 초점으로 삼고자 한다. 이 글이 넓은 의미의 ‘기독교 민족운동’ 개념화설정을 위한 논의를 활성화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를 거듭 기대한다.


2. 한말 반봉건․사회개혁 운동

기독교가 수용될 때에 한국은 중세 말기의 모순과 부패로 사회적인 취약점이 드러나고 있는 데다가, 서구 제국주의의 서세동점 현상으로 민족족적으로 극심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사회적인 취약점과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자기 사회의 체질을 개혁하여 근대사회를 이룩하는 길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대내적으로는 반봉건, 대외적으로 반외세(반침략)를 위한 사회개혁이 필수적이었다. 사회개혁을 통해 근대적인 사회와 국가를 이룩하는 것만이 당시의 위기를 해결하는 방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말 기독교 수용 당시의 이같은 민족적인 과제는 기독교인에게도 그대로 적용해야 할 과제였다. 따라서 이 무렵의 기독교의 민족운동적 성격은 결국 기독교가 이같은 한국의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사회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했는가 하는 점을 검토하는 데서 시작할 수 밖에 없다.
한말 봉건사회의 모순은 이미 조선 후기부터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당쟁과 세도정치는 그런 모순을 더욱 촉진시켜 19세기에 들어서서는 각종 민란으로 통칭되는 농민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을 필두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민란’들은 봉건사회의 실정과 모순들의 필연적인 결과물이었다. 매관매직으로 인해 인사상의 난맥과 삼정의 문란이 극도에 달하여 철종조에 들어서는 임술년(1862) 한 해 동안에 37건의 ‘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대원군이 등장하여 세도정치로 땅에 떨어진 조선왕조의 권위를 재건하고자 일종의 개혁정치를 과감하게 실천하고자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대원군의 몰락과 함께 왕비족인 여흥 민씨에 의한 세도정치가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어느 사회에나 한 파당의 전횡이 있는 곳에 독재나 부패가 만연할 수 밖에 없다. 민씨 세도는 얼마 안가 국고를 탕진했고 인사의 난맥상으로 부정과 부패를 수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시의 관리들의 부패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독립신문의 기사다.

“혁파하라신 잡세를 여전히 무는 것은 관장들의 탐학하는 까닭이요, 돈 많은 부자들을 무단히 불효부제(不孝不悌)한다고 잡아가두는 것은 그 부자가 다른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돈모은 것이 죄가 됨이요 한 동리 사람은 아무가 불효부제인줄 모르되 먼 데 있는 관찰사와 군수들이 먼저 아는 것은 그 관원들이 다른 탁이한 문견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주사야탁(晝思夜度)이 다만 돈 먹을 생각뿐인고로 동녹슬 밝은 눈이 먼 데 있는 돈구멍을 능히 밝게 봄이라.”2)

기독교는 한말 이같은 사회에 선교사에 앞서 먼저 성경이 번역, 보급되면서 수용되었다. 선교사보다 성경이 먼저 번역, 보급되었다는 것은 오히려 한국이 기독교 복음에 먼저 접근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뒤에 한국 기독교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에도 일정하게 유용성을 갖는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Bible-loving Christian) 혹은 ’성경을 사랑하는 자들‘(Bible lovers)이라고 불려졌고, 또 한국의 기독교를 ‘성경기독교’(Bible Christianity)라고 언급한3) 것은 이 때문이었다.
선교사가 도래한(1885) 후 얼마 안된 1888년경부터 주기도문․십계명․사도신경․웨스트민스터요리문답 등의 교리서가 번역 출판되었고, 1890년대에서 1900년에 이르는 기간에 성교촬리를 비롯하여 60여종의 전도문서들도 간행, 유포되었다. 성경과 전도문서의 유포는 선교사들이 전해준 서양문화와 함께 한국 사회에 충격과 영향을 주었다. 기독교 문서들은 기독교의 중심교리 - 신론․기독론․성령론․인간론․창조론․계시론․죄론․천사론․구원론․종말론 - 와 우상숭배 금지․제사문제와 부모공경․안식일 준수 등의 종교적 주제, 및 인간평등과 남존여비의 문제․결혼의 문제․자녀교육의 문제 등의 사회적 주제들을 다루고 있었다.4) 이런 주제들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하나님 앞에서 변화된 인간이 가져야 할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십계명과 기독교 교리들은 한국 사회의 봉건적 관행과 사회적 모순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정면으로 개혁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기독교가 한국 사회의 개혁에 미친 중요한 것의 하나는 기독교적 인간관이 주는 영향이다. 이것은 곧 근대사회 성립의 가장 중요한 요건이라 할 인민평등의 문제와 상통할 것이다. 즉 모든 사람은 서로 평등하다는 전제가 근대사회를 성립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기독교가 수용되어 바로 이런 인간관을 가장 먼저 가르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기독교적 인간관은 인간의 존엄성과 천부적인 인권을 담보해주는 것일 뿐만아니라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가르쳤다. 기독교는 백정과 종이 양반이나 주인과 같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한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평등권이 현실화되는 단서가 된다. 서울의 승동교회는 백정 출신의 박성춘(朴成春)이 장로로 되었던 사례를 갖고 있다.5) 그리고 그의 아들 박서양(朴瑞陽)은 세브란스 1회 졸업생이 되어 한 때는 모교에서 가르치기까지 했다. 이런 사례는 결혼의 풍속도 등 전통적인 풍속을 변화시키는 것과 함께 도시 시골 할 것 없이 기독교회가 성립되는 곳에서 시작되고 있던 현상이다.
기독교의 수용은 인간관의 변화와 함께 직업관과 가치관의 변화를 수반하게 되었다. 이미 반상의 차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가졌던 직업관도 바뀌어지기 시작했다. 일의 귀천에 관계없이 어떤 일이든 하나님의 일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봉사와 희생을 기독교적 실천덕목으로 강조하는 교회의 가르침과 함께 기독교인들의 삶의 영역에 파고 들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남을 섬기는 자가 되라’는 예수의 교훈은 배재학당의 당훈(堂訓)이 되었고 이를 교훈 받은 자들이 섬겼던 한국 사회의 가치관을 개혁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의료선교사들의 콜레라 퇴치를 위한 헌신 봉사는 한국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편견은 물론 직업관과 가치관을 변화시키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다.6)
한말 성경과 십계명, 기독교 전도문서들에 의해 정직과 신용, 근면과 절제를 기독교윤리로 받아들인 기독교인들은 부정과 부패에 항거하는 능력을 배양해 갔다. 이것은 물론 선교사들이 한국 사회에서 서양의 문화와 힘을 소개하면서 점차 ‘양대인화(洋大人化)’하여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그 힘에 의존하게 되었던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독교인들의 부정 부패에 대한 항거는, 당시 오로지 복종만 강요당해 온 백성들의 자각 없이는 불가능했다고 본다.
이런 상황에서 백성들은 관장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기 위해서도 기독교에 입교하는 경우가 더러 생겨나게 되었다. 그래서 관장의 말을 믿다가는 큰 낭패를 보겠으니 다시는 관장의 말을 믿지 말고 외국교에나 들어가서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게 하자7)고 하는 가련한 백성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황성신문』도 당시 백성들이 외국교에 떼지어 들어가는 것은 관리들의 탐학에 고통받아 그 화망을 피하기 위함이라고 했다.8)
한말에 기독교가 수용되어 교회가 세워지는 곳에서 전통적인 종교나 사상에 의한 갈등이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었다. 서울 평양 수원 등지에서 일어난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그 뒤에 지방관의 조종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갈등은 곧 선교사와 지방 수령과의 갈등으로 압축되었고 급기야는 선교사가 승리하여 그들의 힘이 한국인들에게 과시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따라서 서양 선교사 세력을 뒤로 한 기독교인들은 지방 수령의 부정과 부패에 대해서 과거처럼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지방 수령 중에는 부정에 항거하는 기독교인들을 ‘동학교도’라는 혐의를 뒤집어 씨워 투옥시키기도 했지만 부정부패한 지방관들 중에는 부정을 고발하는 기독교도들의 항거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매관매직하여 지방수령으로 발령받은 일부 양반들은 야소교 있는 마을에는 부임하지 않겠다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번에 새로 난 북도 군수 중에 어떤 유세력한 양반 한 분이 말하되 예수교 있는 고을에 갈 수 없으니, 영남 고을로 옮겨 달란다니 어찌하여 예수교 있는 고을에 갈 수 없나뇨. 우리 교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도라, 교를 참 믿는 사람은 어찌 추호나 그른 일을 행하며 관장의 영을 거역하리요. 그러나 관장이 만약 무단히 백성의 재물을 뺏을 지경이면 그것은 용이히 빼앗기지 아닐 터이니 그 양반의 갈 수 없다는 말이 이 까닭인 듯”9)  

이런 사례들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서양 선교사들의 힘을 의지한 기독교도들의 항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이 갖고 있는, ‘부정과 부패에 대한 항거 정신’이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고 아니 할 수 없다. 이러한 사례들은,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을 거친 사회의 변화와 민중의 성장에 따른 것이라 하더라도, 당시 인간관이나 가치관의 변화와 함께, 기독교인들에 의한 일종의 반봉건․사회개혁의 의미로 범주화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3. 국권수호를 위한 항일 운동

반봉건․사회개혁 운동은 상황에 따라서는 반외세․국가자주 운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양자는 표리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례는, 시대가 좀 다르기는 하지만, 몽고의 침입때에 청주성 전투의 승리의 예에서도 보인다. 청주성을 지키던 김윤후는 성 안에 있는 노비문서를 불사르고 반봉건적 일종의 신분해방을 약속하면서 노비들을 독려할 때에 노비들로 조직된 부대가 발분하여 몽고군을 물리쳐 승리하는 반외세․반침략와 연관되었다.
기독교인들이 반봉건운동에 나서게 되는 때가 1890년대 후반인데 바로 그 무렵부터 기독교인들의 국가자주운동도 함께 보이기 시작했다.10) 기독교인들은 1896년경부터 우선 왕의 탄신일을 맞아 그것을 축하하는 모임을 가지면서 충군애국운동을 벌이는가 하면, 독립협회와 협성회에 참석하여 민권신장을 통한 국가자주독립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독립협회의 운동은 기독교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진행되었는데, 그것은 지도부(윤치호․서재필)를 비롯하여 중간지도층(남궁억․이상재는 아직 기독교에 입교하지는 않았으나 뒷날 기독교에 입교하게 된다. 그 밖에 주시경․이승만 등)과 대중동원층에 기독교인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었다. 배재학당의 학생회인 협성회에도 기독교 인재들이 많이 모였다.11) 만민공동회에는 백정 출신의 박성춘이 연설하는 것을 비롯하여 기독교인들의 참여가 적극적이었다.
노일전쟁에서 일제가 승리하고 일본의 배타적인 한국간섭이 노골화되어가자 기독교인들의 반외세 국가자주운동은 거의 항일운동으로 집약되었다. 한국교회의 항일운동은 종교적인 행위라고 할 기도회 등에서 나타났다. 일제 침략이 노골화하자 1905년 9월에 모인 제 5회 장로회공의회에서는 길선주 장로의 발의로 그해 11월 감사절 익일부터 7일간 전국교회가 나라를 위해 기도하기로 결정했다. 을사조약이 늑약된 후 정순만․전덕기 등이 그 철폐를 위한 기도회를 상동교회에서 개최했을 때 연일 수천명이 모였고, 순종 황제 서순(西巡) 때에도 환영예식을 거행한 후 교당에 회집해서 ‘나라위한 기도회’를 열었다. 이 때 평양 교회 김 장로의 증언에는 “교중에서 왕왕히 나라를 위하여 기도한다”는 내용도 있었다.12) ‘나라 위한 기도회’의 전통은 그 뒤 1906년에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 조사와 박치록 장로가 새벽기도회를 시작하는 것으로 발전하는데13) 이 또한 그 시기로 보아서 나라위한 기도가 그 중요한 동기였다고 생각된다.  
을사조약이 늑약되자 이를 무효화하기 위해 감리교회의 엡웟청년회(Epworth League, 懿法靑年會)는 상소운동을 벌인 적이 있었다. 진남포 교회 엡웟청년회의 총무였던 김구도 이 철폐운동에 참가했다.14) 을사늑약 후 기독교인인 최재학 이시영 등은 평양에서 올라와 조약의 철폐를 주장하는 격문을 살포하다가 70여일간 경무청에 수감되었다. 또 예수교인 김하원 이기범 김홍식 차병수 등도 ‘이천만동포에게 경고하는 글’을 뿌리고 운집한 시민들에게 격렬한 연설을 하다가, 일본 현병들과 충돌, 일본군 사령부에 구금되었다.15) 그런가 하면 일제의 침략에 울분을 참지 못하던 기독교인 우국지사 중에서 자결하는 경우도 있었다. 박영효 귀국환영 및 궁내부장관 취임 축연에 참석할 것으로 예상한 이등박문이 나오지 않자 그를 제거하려고 준비했던 정재홍이 목숨을 끊었는가 하면, 고종의 양위소식을 듣고 대한문 앞에서 자결한 예수교인 홍태순 등의 예도 있다.
한말 기독교인의 항일운동은 여러 방면에서 이뤄졌다. 우선 경제적인 측면에서 항일운동을 들 수 있는데, ‘시장세반대투쟁’과 ‘납세거부투쟁’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이다. 선교사와 그 조사들은 “예수교도들에게는 특권상 폭자(暴者)의 학대 그 중 일본 군대의 압박들을 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문명적인 교의에 기초하여 생명 재산 등에 관한 권리를 얻었음으로 전제적 정치의 법령 측 인도(人道)에 반하는 금제(禁制) 및 가세(苛稅)에는 복종할 수 없다.”16)고 설교하면서 이미 통감부 지배하의 한국정부에 대한 조세저항까지 정당화하고 있었다.
기독교인들의 항일운동은 폭력적인 무력행사에서도 나타났다. 앞서 언급한 정재홍이 이등박문을 암살하려 했던 것이나, 안중근과 뜻을 같이했던 우연준이 기독교도였다는 사실, 스티븐스를 제거한 장인환이 기독신자였다는 데서 우선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을사조약 후 전덕기는 평안도 장사들을 모집하여 박제순 등 을사오적을 처단하려 했으나 일본 병사들이 신변을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또 이재명 의사와 그의 동지들이 이완용과 이용구를 처단하려 한 경우를 보면, 이재명 자신이 기독신자였을 뿐만 아니라 그와 뜻을 같이 행동대원 중에는 이학필이라는 목사를 비롯하여 대부분이 기독신자였다.17) 이같은 기독교인의 적극적인 항일투쟁은, 뒤에서 언급할 항일운동의 두 큰 흐름인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에 비춰볼 때, 어느 유형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오히려 뒷날 나타나고 있는 의열투쟁의 형태를 띄고 있다고 할 것이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의열투쟁이 1920년대에 적극화된다는 점에 비춰본다면 한말 기독교인들의 의열투쟁은 매우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말의 이같은 기독교인의 의열투쟁은 일제 강점기에는 강우규․김상옥․편강열 같은 기독신자들의 의열투쟁으로 이어진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한말 이같은 기독교인들에 의한 반침략적인 항일민족운동이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검토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성경을 통해 일찍부터 애국교육을 시켰던 것이 그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된다. 이 점은 노일전쟁이 일어나자 그것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와서 일제의 침략적 만행을 폭로하면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서술했던 매켄지(F.A.Mckenzie)에 의해서 지적된 바가 있다. 그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항일정신의 근거를 성경과 관련시켜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기 전에 많은 수의 한국인이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 미션계 학교에서는 잔다아크 햄프던 및 조오지 워싱턴 같은 자유의 투사들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근대사를 가르쳤다. 선교사들은 세계에서 가장 다이나믹하고 선동적인 서적인 성경을 보급하고 또 가르쳤다. 성경에 젖어든 한 민족이 학정에 접하게 될 때에는 그 민족이 절멸(絶滅)되던가, 아니면 학정이 그쳐지던가 하는 두 가지 중의 하나가 일어나게 된다.”18)

한말 항일운동의 큰 두 흐름은 애국계몽운동과 의병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굳이 기독교인들의 애국계몽운동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말 사립학교의 설비주체에서 기독교계의 사립학교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비교적 높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일단 기독교계의 애국계몽운동은 더 언급할 필요없이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사립학교 교육 외에 애국계몽운동류에서 언급할 경제․정치․사회 운동에서도 기독교계의 운동은 결코 낮게 평가할 수 없다.
여기서 언급할 것은 한말 기독교계의 항일민족운동에서 개별적․비조직적인 의열투쟁에서는 뚜렷한 성과가 보이지만, 조직적인 의병투쟁에서는 괄목할 만한 활동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병의 배후에 선교사가 지원한다는 일본측의 정보가 있었고 교회가 의병운동을 지원한 듯한 일본측의 보고가 있었으며 교회가 의병운동으로 환란을 당한 경우가 있었다. 특이한 것은 의병의 지휘부에 기독교인이 가담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기독교인 중 구연영․구정서 부자와 우동선 등이 기독교인으로서 의병운동에 가담한 것으로 지목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기독교는 의병운동에 소극적이었다. 그것은 의병운동이 척사위정 이념을 기반으로 한 유생들 중심의 복고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음에 비해 기독교는 개화주의를 지향하고 있어서 항일독립운동상의 목표와 방법이 상이했기 때문이라고 풀이된다.19)

4. 일제하 항일독립운동

일제하의 민족운동은 항일독립운동이 대종을 이루고 있었다. 대내적으로 평등권 운동과 사회개혁 운동이 없지 않았지만 그런 운동들도 항일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가령 사회주의 운동도 그 지향점이 반드시 항일운동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에도 항일독립운동의 범주에서 논의되었던 작금의 상황은 이런 이해에 일말의 도움이 된다.
일제하의 항일독립운동에는 3.1운동 같은 거족적인 항일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 그 후에 항일민족독립운동이 본격화되는 단계에서는 임시정부운동과 외교운동, 무장투쟁과 공산(사회)주의운동, 국내의 실력양성운동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항일독립운동상의 여러 흐름과 세력에서 기독교 민족운동이 갖는 위치는 어떤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일제하의 기독교인이 관여한 민족운동은 3.1운동에서 그 역량을 발휘한 이래, 더러 준비론 혹은 개량주의로 흐르는 부류가 없진 않지만, 임시정부운동과 외교투쟁, 무장투쟁과 공산주의운동, 무실역행운동과 절제운동․농촌운동․사회운동․독립운동자금 지원 및 기도회운동과 신사참배반대투쟁 등이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민족운동으로서의 신사참배반대투쟁에는 기독교인만이 거의 유일하게 참여하고 있었다.
일제는 한국을 강점한 후 기독교에 대한 회유와 탄압정책을 병행했다. 강점 후 일제가 사회단체와 언론기관을 해산 또는 폐쇄했지만, 구미제국을 의식하여 남겨놓은 기독교회에 대해서는 양면정책을 취했다. YMCA나 교회당의 건립에 보조금을 지원한다던가, 기독교지도자들을 유람시킨다든가 하는 것은 일종의 회유정책이었다. 한편 한말부터 가장 강력한 민족주의를 표방했던 기독교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탄압하는 정책도 수반하였다. 그것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1911년에 터진 이른 바 ‘105인사건’이었다.20) 한말 비밀 독립운동 조직으로 창건된 신민회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었다고 하지만, 연루된 사람들은 서울과 서북지방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기독교계에 대한 이 조작된 음모사건은 혐의자에 대한 심한 고문 등 일제의 비문명국적인 야수성을 국제 사회에 노출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지만, 한편으로는 기독교인들의 민족의식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탄압을 가할 수 있다는 엄포적인 효과는 충분히 거두었다.
강점 초기에 선교사를 포함한 기독교계에 보였던 회유정책은 점차 탄압정책으로 전환되었다. 그들은 기독교 학교와 교회에 대해 간섭함으로 기독교 선교 자체에 제동을 걸었을 뿐아니라 기독교계의 민족의식 제고와 민족운동에도 간접적인 제재를 가했다. 1915년 일제는 ‘사립학교법’에 손대어 미션계 학교에서 성경교육과 종교의식을 금하도록 하는 한편 그 학교들이 제도와 시설을 보완하여 정규학교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회유정책도 폈다. 이것은 말하자면 채찍과 당근을 같이 주는 정책이었다. 일제는 또 같은 해에 ‘포교규칙’을 개정하여 종교기관의 설립이나 기관책임자의 초청에는 반드시 당국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21) 이것은 다른 종교에 대한 제재라기보다는 기독교를 탄압하려는 것이었음이 명백했다.
3.1운동이 기독교계의 적극적인 참여로 발발하게 된 것은 기독교계에 대한 일제의 이같은 탄압을 배경으로하고 있다. 3.1운동과 기독교계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들이 있으므로22) 여기서 그 내용을 자세히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 점화단계에서나 지방으로 확산되는 단계에서 보인 기독교계의 활동은23) 3.1운동의 가장 뚜렷한 핵심세력이 기독교계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더구나 당시 기독교인의 수 20여만명을 민족종교라는 천도교의 교세와 비교해 볼 때 이런 견해는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당시 천도교주 손병희는 법정 진술에서 녹명자(錄名者) 300만․의무부담자 200만이라고 했는데 이 수자에 비춰본다면 기독교인은 천도교인의 15분의 1 내지는 10분에 1에 불과한 셈이었다.  
3.1운동의 역사적 의의는 한국의 민족․민주 운동사 뿐만 아니고 세계 반제(反帝)운동사에도 혁혁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우선 민족운동의 차원에서 보면, 그 전에 척사위정․개화․민중 운동의 세 갈래로 진행되던 민족운동이 3.1운동을 계기로 하나의 흐름으로 통합시켰다.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후 한국민은 나라를 잃고도 분개해 할 줄 모른다느니 일제의 ‘개혁정치’에 열복한다느니 하는 기만적인 선전을 계속했는데 3.1운동은 이를 완전히 분쇄하게 되었다. 또 3.1운동은 이를 계기로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이 임시정부운동․무장투쟁운동․무실역행운동․외교운동 등으로 새롭게 도출될 수 있게 되었다. 3.1운동은 독립운동사에서 뿐만 아니고 한국의 민주운동에서도 큰 전기를 맞게 되었다. 그 때까지의 독립운동은 왕조를 회복한다는 의미의 복벽(復辟)운동적 성격을 가졌었지만, 3.1운동은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민주공화정 이념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민주주의 운동사에서도 큰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3.1운동은 또 세계 제 1차 대전후 새로운 강대국 중심의 질서로 재편하는 베르사이유체제에 항거한 사건으로 세계 반제운동의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으며 이를 계기로 중국의 5.4운동과 인도의 사티야그라하 운동을 비롯한 필립핀․베트남․이집트의 독립운동에도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기독교인들의 일제하 민족운동은 3.1운동 후의 임시정부 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임정에 참여한 지도자 중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이승만․이동휘․안창호․김구․김규식․손정도․현순․송병조․김병조․김인전 등 수많은 분들이 있었다. 미주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이 대부분 교회적인 배경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독립자금 또한 교회를 통해 모금되었다. 무장투쟁에도 기독교도들의 활약을 무시할 수 없다. 앞서 언급한 강우규․편강열․김상옥 열사를 비롯하여, 청산리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대한독립군 부대가 기독교도로 조직된 부대였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국내 국산품애용운동을 포함한 무실역행운동에는 조만식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이 참여했을 뿐만아니라 추진과정에서도 교회와 기독교 기관들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일제하 기독교의 국내 농촌운동이나 사회운동에 대해서는 여기서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1915년 한인사회당을 창건하고 뒤이어 고려공산당으로 발전시킨 이동휘가 한 때 기독교 전도사로서 맹활략했다는 사실이나, 김일성의 가계가 기독교적 배경을 갖고 있다는 것24), 그의 젊은 시절의 활동에서 손정도 목사와의 관련을 시사한 대목은 한국의 초기공산주의운동이 기독교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1930년대 후반부터 강화된 전시체제 하에서 국내 민족운동은 위축될 대로 위축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사회주의계와 기독교계만이 일제의 통치에 계속 저항했다. 기독교계의 저항은 주로 신사참배거부운동의 형태로 나타났다.25) 일제 말기에 2천여명이 신사참배반대에 나섰으며, 신사참배반대로 2백여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50여명이 순교당했다는 통설에서도 보여주는 바와 같이 기독교계의 저항은 일제말까지 계속되었다. 일제의 황민화(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강제된 신사참배강요에 대한 반대는 그것을 주도한 사람들이 우상숭배를 반대한다는 순수하게 교조적인 의미만을 고집했다 할지라도 그 파장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대한 반대의 의미가 부각될 수 밖에 없었고 그런 의미에서 신사참배반대투쟁은 민족운동의 선상에서도 이해됨직한 것이었다.26) 일제가 신사참배반대자들을 보안법 위반 사건으로 몰아가려고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성격 때문이었다고 본다. 따라서 기독교도들에 의한 신사참배반대투쟁은 국내에서 이뤄진 마지막 항일민족운동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고 해석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일제 강점기에 한국 기독교가 남긴 민족운동이 당시 한국 기독교계의 주류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가 하는 점과 그들의 민족운동에서 기독교적인 이념을 발견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 점과 관련, 민족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이 기독교계의 주류도 아니고 그들의 민족운동이 기독교계의 합의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다고 그것이 기독교계의 의사표시로 볼 수 없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일제하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전체 한국인의 극소수라고 하여 한국에 독립운동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 하나, 기독교인의 민족운동에서 기독교 이념과의 연관성 문제는 일반적인 애국심이나 민족의식과의 경계선을 분명히하기가 힘들지만 전혀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가령 3.1운동의 이념과 기독교 신앙의 관련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밝혀졌을 뿐만 아니라 3.1운동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을 보며 기도하면서 이 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한 사실 등은 이 점을 어렴풋이 나타내 준다고 할 것이다.27) 또 도산 안창호의 민족주의의 기저에는 기독교적인 이념이 뒷받침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는28) 것도 그 실례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지적할 것은, 기독교인과 개량주의와의 관련성 문제와 기독교 민족운동의 투쟁의 강도문제라 할 것이다. 이 문제과 관련,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 굴절한 인사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1920년대부터 보여준 타계주의적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 신앙이 갖는 화해적 성격이 타협적인 것으로 비친 데서 이러한 문제가 제기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러한 문제 제기에 대해, 여기서 상론할 수는 없지만, 그런 측면을 인정해야 할 것이고, 타협과 굴절이 기독교인에게만 적용되어야 하느냐고 변명할 필요는 없다. 그러면서도 가령 신사참배반대투쟁을 민족운동의 차원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면 기독교인의 민족운동을 타협일변도로 치부할 수 있겠는가의 문제는 역제기해 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5. 식민잔재 청산과 민주화 운동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한 민족은 물론이고 갖은 핍박을 받고 있던 한국 기독교계에는 무상의 ‘복음’이었다. 일제가 그 해 8월 17일경에 신사참배반대에 앞장 선 옥중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살해할 계획까지 세웠다는 미확인된 주장에 비춰본다면 해방의 타이밍에서 그 뒤 한국 교회의 정화를 위한 그루터기를 남기려는 섭리마저 읽게 된다.
대부분의 역사에서 그렇듯이, 긴장이 풀리고 자유가 주어지면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한 바탕 위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거기에 충실하게 되는 것이 쉽지 않다. 한국 기독교계가 바로 그랬다. 해방을 맞았으나 한국 기독교로서는 선교 종주국이라 해야 할 미국이 군정을 펴고 이어서 ‘철저한’ 기독교도로 자처한 적이 있는 이승만이 집권함으로써 일제하의 수치스런 과거를 철저히 청산하고 예언자적인 사명을 새롭게 회복하는 데에 도움은커녕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분단 상황이 일반사회의 부일협력자들을 제대로 청산할 수 없게 했다. 이 점은 기독교계에도 영향을 미쳐 기독교계는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게 되었다.
해방 후 가장 중요한 민족사적 과제의 하나는 부일협력자를 포함한 일제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고 정의로운 새 질서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런 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게 더 중요한 것은 일제잔재의 청산을 통한 정의로운 새 질서의 확립보다는 일제로부터 떠 안은 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험있는 관료와 무조건 충성할 수 있는 경찰 등의 권력의 도구가 필요했다. 해방 후 혼란상태는 일련의 ‘정신도 줏대도 없는’ 기능인을 필요로 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적어도 지배층 상호간에는 일제시대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다 북쪽에서 부일협력자를 신속하게 처리한 것과는 달리 남쪽에서는 이데올로기의 첨예한 대립으로 각처에서 분란이 야기되자 오히려 부일협력자의 도움을 필요로하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분단상황이 결국 친일파를 온존시키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형국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기에 “친일세력이 분단체제의 고정화에 기여했고 또 분단체제는 친일세력의 기득권을 보호, 신장시켜 주는 역할을 수행했다”28)는 지적은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다.
약점이 많으면 자기 주장을 강하게 펴거나 실천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권력이 약점 많은 자를 골라서 자기의 하수인으로 삼는 경우를 본다. 불의하고 정통성이 약한 권력일수록 그럴 뿐만 아니라 약점 투성이의 하수인을 많이 거느린 권력이 정당성을 가질 수 없는 것 또한 역사의 교훈이다. 일제 강점하에서 이민족에 부역하면서 민족을 배반하고 조국을 등졌던 사람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들을 필요로 하는 새로운 체제에 무조건 순응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새로운 체제가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약점가진 무리들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하의 부일세력들이 분단정권과 결탁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점을 시사한다. 그들은 정당성의 문제에서나 기득권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공동의 운명을 지니고 있었고 때문에 쉽게 결합될 수 있었다.
해방 직후 기독교계에서 일제하의 죄악을 회개해야 한다고 가장 먼저 주장한 이들이 신사참배에 앞장 섰던 친일파들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45년 9월 2일,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경남교구장 출신인 김길창은 최재화․권남선․심문태 등을 끌어들여 ‘신앙부흥운동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일제하에서 행한 범죄를 회개하고 정통신앙에 매진할 것을 주장하는 선언문29)을 발표하고 이어서 9월 18일에는 경남재건노회를 조직하고 자숙안30)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출옥성도들이 남하하기 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신속한 변신의 계략’이었다고 지적된다.31) 변신을 위한 이같은 계략은 한국 장로교회가 신사참배 취소결의를 세 번(1946․1947․1954)이나 한 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적 진실성을 가진 것이었다고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 뒤의 그들의 행적이 그러한 행동이 진실이 아니었고 제스춰에 불과했다는 것을 증거했다.
한국 사회가 부일세력을 청산하지 못한 결과 민족정기를 세우지 못했고 새 질서를 바탕으로한 조국을 건설하는 일에 실패했다. 마찬가지로 한국 교회도 일제잔재 청산에 실패한 결과 것잡을 수 없는 혼란과 분열을 가져왔다. 한국 교회 분열의 첫 머리에, 신사참배 회개를 외치고 친일잔재청산을 주장했던 출옥성도 중심의 일련의 ‘개혁주의자’들을 희생의 제물로 바쳤다는 것은 한국 교회사가 갖는 일종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일제강점기에 비해서 해방직후 기독교계는 민족운동다운 민족운동을 펼치지 못했다. 다만 통일국가 건설운동에서 김구․김규식 같은 평신도 지도자와 몇몇 목회자들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해방 후 정치․관료․법조․지식인 사회에서 친일파를 제거하지 못하고 이들을 온존시킨 결과 사회전반에 정의감이 상실되고 역사허무주의가 팽배하게 되었으며 기회주의자와 보신주의자를 양산하게 되어 한국의 민주적 발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교회는 교회대로 교권주의적․권력지향적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일제청산을 주장하는 개혁적인 세력은 주류에서 축출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가 과거에 대한 회개와 청산을 외치고 시대마다 필요한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은 오히려 격에 맞지 않았다. 더구나 이승만 정권 하에서는 일부 교직자들이 정치에 관여하는 등 교권과 정치권력이 유착하는 현상이 뚜렷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승만․자유당 정권하에서 정교유착을 벗어나지 못하고 부정선거에 개입하게 되는 상황에서 기독교가 자기 목소리를 갖는 것은 불가능했다.
기독교가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갖게 되는 것은 1960년 4.19와 그 이듬해 5.16군사 쿠테타를 계기로 해서 자기반성이 일어나면서부터다. 4.19혁명 후 기독교계와 교계신문은 돌연 비판자로 변했다. 그러나 5.16군사쿠테타가 일어났을 때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군사쿠테타를 지지하였고, 심지어 기독공보는 “자유를 희생하더라도 방종한 무리들이 숙정되는 것을 보고 싶다” 혹은 “권위있는 정부 밑에 있게 되어 행복하다”고 아첨을 떨었다.32) 이 때까지 교권을 쥐고 있던 인사들이 4.19로 불안을 느꼈기 때문이다. 심지어 김활란 한경직 등 기독교계 대표는 미국을 방문하여 군사정부를 지지해줄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5.16을 계기로 그 전까지 유착관계에 있던 기독교와 정권 사이에는 파열음이 일어났고, 군사정권의 반인권적이고 비민주적인 자세에 대한 기독교의 비판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군사정권이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은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경제성장을 국가적 과제로 삼고 거기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자원이 없는 나라에서 수출위주의 산업구조는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변명한다. 군사정권은 산업현장의 노동력 착취를 정당화하면서 노동자들의 인권은 물론 산업현장의 민주적 의사결정 요구를 억압해 갔다. 정권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자기를 상대화시켜 갔던 기독교계는 자신의 시대적 사명을 인권과 민주주의의 신장에서 찾았다. 여기서 군사정권과 기독교계의 대결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박정희 군사정권과 기독교계의 대립이 뚜렷해진 것은 1965년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을 서두르고 있을 때였다. 경제성장을 서두르고 있던 박 정권은, 1960년대에 이르러 미국의 원조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중재에 따라 한일회담을 서둘러 마무리지어 경제성장을 위한 자금을 일본측으로부터 들여올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과거 식민지배에 대한 정중한 사과와 정당한 배상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군사정권이 굴욕적인 외교인 줄 알면서도 한일회담에 나설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군사정권 하에서 이렇다 할 비판세력이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강요 등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한국 기독교계는 분연히 일어나 이 굴욕외교에 항거하게 되었다.
한일회담에 대한 기독교계의 비판은 1964년 2월 12일 한국기독학생회(KSCM)가 발표한 ‘일본기독자에게 보내는 공개장’에서 비롯되었다. 그 해 3월 6일 기독교계인사들은 야당과 각계인사 200여명과 함께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에 참여했고, 4월 17일에는 한국기독교연합회가 ‘한일국교정상화에 대한 우리의 견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렇게 불붙게 된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그 이듬해(1965) 6월 22일 조인을 앞둔 시기에 영락교회에서 연합으로 기도회를 개최했으며, 이 열기는 7월까지도 계속되면서 반대성명을 발표하기도33) 하고 금식기도회로 모여 한일국교정상화에 반대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합동측의 승동교회와 평안교회 등이 움직인 것을 보면, 한일회담 반대운동에는 진보와 보수의 구분이 없었다고 보여진다.34)
한국기독교 민족운동사에서 진보와 보수의 경계가 뚜렷하게 되는 것은 1968년 박정희의 삼선개헌이 시도되면서부터다. 이 때부터 한국교회에는 권력에 대한 대응에서 견해차가 분명해지기 시작했다고 지적된다.35) 1968년 8월, 김재준․박형규․함석헌 등 진보적 인사들이 ‘3선개헌저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조직, 동 8월 15일에는 반대성명서를 냈다. 그러나 그 해 9월 2일에는 김윤찬 조용기 김준곤 김장환 등 보수측 인사 242명이 ‘개헌문제와 양심자유선언’을 발표, 앞서 김재준 등의 성명서가 “순진한 성도들의 양심의 혼란을 일으키는 선동적 행위”라고 비난하고 교회의 정치적 중립을 주장했다. 이 사흘 뒤인 9월 5일에는 앞서의 242명에 포함된 박형룡 김준곤 김윤찬 김장환 조용기 등이 ‘대한기독교연합회’라는 단체 명의로 ‘개헌에 대한 우리의 소신’을 발표하고 3선개헌을 지지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것은 앞서 그들 자신이 주장한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내용과도 상치될 뿐아니라 급조된 ‘대한기독교연합회’란 이름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비슷한 단체명이어서 국민들에게 혼란을 일으키도록 했던 것이다. 다분히 의도적이었다고 보여진다. 이를 계기로 한국 기독교계는 진보와 보수가 사회문제에 관한 한 서로 냉소적인 입장을 견지하게 되었다.36)
한국 기독교계의 인권․민주화운동은 1970년대 ‘유신정권기’에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된 후 극단적인 인권탄압과 반민주적인 행태가 자행되고 있었다. 서슬퍼런 유신정권 아래서 누구도 인권과 민주화를 거론하지 못하던 때였다. 이를 박차고 나온 것이 기독교계였다. 이 대 한국 기독교회는, 비록 그 일부이기는 하지만, 1973년 4월 22일의 남산부활절 예배사건을 필두로 개헌청원운동, 민청학련사건, 오글 선교사의 추방, 3.1민주구국선언(1976), 도시산업선교 활동 및 기독자교수해직사건(1977) 등으로 전개되는 일련의 사건들에서 그 중심에 서 있었다.37) 이 무렵 민주화운동을 신학적으로 뒷받침한 것이 민중신학이었고 민중신학은 인권․민주화운동의 진전에 따라 심화되어 갔다. 민중신학은 또한 해방신학 등 일련의 정치신학과도 맥락을 닫고 있었다.
한국기독교계의 인권․민주화운동은 한국 기독교 민족운동의 한 형태로서 한국의 인권신장과 민주주의 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다. 특히 비판세력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던 군사정권 하에서 기독교계의 그런 운동은 한국 사회에 큰 희망이었고,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공감대와 지원세력을 끌어낼 수 있었다. 한국이 세계자본주의 시장에 진출함에 정치․경제․문화․사회 등의 측면에서 자신의 폐쇄성을 극복하고 보편적인 가치관을 확보해가면서 소위 ‘선진국’과 어깨를 겨룰 수 있게 되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인권․민주화가 이룩한 긍정적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시 인권․민주화운동이 갖는 한계도 분명히 있었다. 한국 기독교계가 이 문제로 말미암아 진보와 보수로 확연히 분열되었다는 것을 지적함과 동시에 이 운동에 대한 신학적인 입장이나 신앙적인 고백을 조율하지 못하고 사회문제가 잇슈화될 때마다 거의 협력하지 못했다는 것을 일단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운동이 기독교계가 자신을 상대화시키면서 예언자적인 기능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이뤄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 객관성을 끝까지 담보하지 못하고 더러는 이념적인 편향성을 노출하기도 하고 더러는 계급적 성향이나 지역성에서 편가르기를 노골화하게 된 것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 운동이 예언자적 순수성을 끝까지 담보하지 못했다고 지적하는 이유의 하나는 과거 이 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인사 중에는 그 뒤 문민정권과 국민의정부에 가담하여 정치적 오류를 범한 사례가 보이기 때문이다.
인권․민주화운동을 전개하면서 한국 기독교계는 이를 저해하는 세력의 논리가 ‘안보’라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인권․민주화에 제동을 거는 집권세력의 논리가 ‘안보논리’라는 것이다. 이 안보논리는 분단을 전제로 한 것이며 그 배경에는 바로 민족분단이라는 절벽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인권․민주화를 위해서는 그것을 가로 막고 있는 분단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분단의 벽을 허무는 것이 바로 통일운동이다. 여기서 인권․민주화를 위해서도 통일운동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자연스럽게 도출되었던 것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 인권․민주화운동과 표리의 관계를 갖고 전개된 한국기독교계의 통일운동은 1960-70년대의 기독교 운동의 축적된 경험과 그 동안의 자기한계를 극복하려는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하여 얻은 값진 결실이었다.

6. 민족통일 운동

한국교회는 1980년대부터 통일운동에 뛰어들었다. 스스로 통일운동을 전개하면서 정부의 통일정책을 비판하고 자극하며 더러는 선도하였다. 이는 기독교가 한국에 수용된 이래 반봉건 개화의식과 반침략 자주의식을 성장시켜 왔고 군사정권 후에 인권․민주화 운동을 계속해 온 연장선상에서 이룩한 것이다. 해방 후 한때 정경유착으로 기독교계가 예언자적인 사명을 망각한 적이 있지만, 1960년대 이래 군부통치를 경험하면서 기독교인들의 마비된 역사의식과 시대적 사명감은 회복의 수순을 밟았다. 기독교인들의 역사의식은, 군사통치 초기에는 인권, 민주화 운동으로 나타났지만, 80년대에 들어서서는 통일운동에도 역점을 두게 되었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인권․민주화운동에 제동을 건 것은 안보논리 때문이고, 안보논리가 자신의 정당성을 찾는 근거는 분단상황이었기 때문에, 민족통일이야말로 인권문제와 민주화운동의 한계를 극복케 하는 중요한 요건이었다.
기독교계 통일운동을 말하자면 먼저 한국에서 전개된 기독교와 사회주의와의 관계부터 언급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최근의 것에 국한시키고자 한다. 기독교 통일운동에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것은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의 발표다. 이 때까지 애매한 태도를 보였던 기독교계는 그 뒤 유신체제의 정착으로 남북대화가 중단될 때까지 통일논의에 그런대로 적극성을 보였다.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2주일 후인 7월 18일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발표한 ‘7‧4공동성명에 대한 성명서’는 통일문제를, 반공적인 여론을 억압하고 민주화를 후퇴시키는 빌미로 삼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보이고 있다.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통일을 위하여 우리의 민주적 이념을 경시함을 의미할 수는 없다. … 우리는 민주주의적이며 반공적인 질서와 교육을 소홀히 할 수 없고, 대화의 밑바탕이 될 우리의 민주적 힘을 강화하여야 한다. … 성급한 남북대화 때문에 반공적인 여론이 억압되는 경우에는 심히 우려되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38)

성명은 끝 부분에서 “우리 기독교회는 원래 화해와 복음을 생명으로 하는 단체이므로 우리는 7‧4공동성명에 나타난 정신을 적극 지지한다”고 하여 마지 못해 그 성명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난처한 입장을 드러냈다.
통일문제는 종래 정부만이 독점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기독교계는 통일문제를 민간 차원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1974년 초, 기독교청년협의회 회원 약 3천여명은 <통일을 기원하는 예배>를 드린 후 가두데모를 감행하였다. 통일문제로 데모를 감행한 것이다. 1976년 3월 1일에는 ‘명동사건’에서 ‘민주구국선언서’가 발표되었는데 그 선언서에서는 민족통일의 긴급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국은 처리과정에서 이 문제를 간과해버린 채, KNCC 등 사회참여세력을 용공으로 몰아세우려 하였다. 유신체제가 극성을 부리던 1978년 10월 17일, 함석헌, 문익환, 윤보선, 이문영 등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된 재야인사 402명이 ‘10‧17민주국민선언’을 공동으로 발표하였다. 골자는 반독재 민주구국 투쟁과 민족염원인 통일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에는 전반적으로 교회가 통일을 논의하는 것은 독재정권의 연장 술책에 말려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고, 통일의 당위는 말하지만 통일활동은 보류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기독교계가 민족통일에 공헌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했다. 기독교회가 변화된 의식을 기반으로 민주화 못지 않게 통일운동에 나서게 되는 것은 1980년대를 기다려야 했다.
기독교인들의 통일운동에 하나의 계기를 만든 것이 해외에 거주하던 기독교인들이 북한동포를 만나 조국의 통일을 논의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1차는 1981년 11월 3일부터 6일까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2차는 1982년 12월 3일부터 5일까지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만났는데39), 이 때 발표된 공동성명에서 참석자들은 북측의 주문에 따라 김일성 부자에 대한 비판에 신중한 반면 ‘미제국주의’ 비판, 미군 철수 및 한국의 민주화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모임은 1991년 1월 30일-2월 3일의 프랑크푸르트 회의까지 10차나 회합을 갖게 되었는데, 당시 국내 언론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이 대화는 됫날 남북 기독자들이 만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40)
한편 한국 기독교회가 통일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자극한 모임들이 있었다. 1981년 6월 8일-10일 서울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분단국에서의 그리스도 고백’이란 주제와 ‘죄책고백과 새로운 책임’이란 부제를 달고 <제4차 한‧독교회협의회>가 개최되었다. 이 협의회의 권고에 따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82년 2월 26일 산하에 <통일문제연구원 운영위원회>를 특별위원회로 설치하기로 결의하고 이 해 9월 16일 운영위원회를 조직하게 되었다.41) 1984년에는 ‘제3차 한‧북미교회협의회’가 열려 미국이 한국을 분단시킨 나라라는 것과, 때문에 미국교회는 한국교회와 함께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공동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요지의 결의문을 남겼다.
이런 국제적인 모임을 배경으로 1984년 10월 29일부터 11월 2일까지 일본의 토잔소(東山莊)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 국제문제위원회가 주관한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정의에 관한 협의회(Consultation on Peace and in Justice in Northeast Asia)’가 모여 ‘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전망 - 도잔소협의회의 보고와 건의안-’(일반적으로 ‘도잔소 보고서’라 함)을 남겼는데 이 선언에서, “한반도의 평화‧통일은 화해의 복음의 구체적 실천의 결과요 목표라는 점”과 “평화통일은 남한 교회만의 일방적 선교과제가 아니고 남북한 교회 쌍방의 공동과제라는 점”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통일이 단순히 남북한만이 아닌 세계 교회의 공동 책임이라는 점” 등을 천명했다42). 이같은 결의로 말미암아 토잔소선언은 한국 기독교 통일운동사에서 뿐만아니라 한민족 통일운동사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남북교회는 1986년부터 2년 간격으로 세 차례에 걸쳐 스위스 글리온에서 만나게 되었다. 남북교회의 만남은 1986년 9월 2일부터 5일까지 스위스 글리온에서 세계교회협의회 국제문제위원회가 주최한 ‘평화에 대한 기독교적 관심의 성서적‧신학적 기반’이라는 주제의 세미나에 참석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제1차 글리온회의’로 불려지는 이 만남은 ‘조선기독교도 연맹의 4인대표’와 ‘WCC회원교회 및 대한민국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대표하는 6인 대표단’을 포함한 ‘22명’이 참석하였으며, ‘악수와 포옹’을 나누고 교회의 일치와 인류의 일치를 상징하는 표징으로서의 성만찬도 이뤄졌다. 제2차 회의는 1988년에, 제 3차 회의는 1990년에 각각 글리온에서 열렸다. 제 3차 회의에서 남북교회는 상호방문, 남북당국간 상호불가침선언 채택 촉구, 사업추진 실무기구 설치 등 9개항에 달하는 ‘희년 5개년 공동작업계획’에 합의했다. 그러나 그 뒤에 전개된 남북관계의 경색은, 1995년 3월 교토(京都)회의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 후속조치를 무산시키고 말았다. 글리온 회의는 1995년을 통일을 위한 희년으로 설정하고 화해와 일치를 위한 구체적인 목표를 정하여 이를 실천하려 했다는 점에서 민족통일운동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남북교회가 이렇게 만나고 있을 때 남측의 KNCC에서는 1988년 2월 29일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KNCC 통일선언’)이 선포했다. 이 선언에 대해서는 필자가 이미 자세히 언급한 바 있기43) 때문에 여기서는 더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이 선언은 “분단 반세기 동안에 남한 사회에서 민간부문에 의해 제출된 최초의 본격적인 통일선언으로 획기적인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혹은 “민간 차원의 통일논의의 물꼬를 튼”44) 것으로 평가되는가 하면, 이 선언이 제시한 통일원칙은 “지난 60년대 이후 남한교회의 진보세력이 주장해 온 통일의 기본원칙을 수용‧집약한 것”45)이라고도 평가된다. 또한 이 선언은 민족통일운동에 종사해 온 한국교회가 교회내부의 통일론을 수렴하는 한편, “그간의 정부 당국에서 내어놓은 통일정책 선언서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민간차원에서 공포한 최초의 통일선언이며” 따라서 이 선언으로 “통일논의의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의 수위와 지향점을 결정케 하는 분수령이 되었다는 점에 의의”46)를 둘 수 있다. 따라서 이 선언으로 한국 기독교회는 종래 진행시켜 왔던 통일운동을 정리하는 한편, 앞으로 새롭게 전개시킬 통일운동의 이념적인 근거를 마련했던 것이다.
1980년대의 한국 기독교의 통일운동은 1989년의 문익환 목사의 방북운동47)을 거쳐 1990년대에는 새롭게 다양한 통일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990년대의 통일운동은 다양성의 측면에서는 기존의 KNCC를 중심으로 한 평화통일희년운동 흐름과 ‘기독교사회운동연합’을 중심으로 해서 전개하고 있는 평화군축운동의 흐름, 남‧북‧해외의 범민족대회 흐름, 여성운동의 흐름 그리고 90년대 들어 새로운 운동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는 복음주의(보수주의)권의 흐름 등으로 정리될 수 있다.48) 1990년대의 통일운동에서 주목되는 점은 동구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북한의 식량난이 겹치게 되어 한국기독교의 통일운동이 북한돕기 운동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점과 북한돕기 운동에서 진보와 보수가 제휴하고 있다는 점, 통일운동의 일환으로 한반도평화운동이 새로운 호소력을 가지고 자리잡아가고 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7. 맺는말

한국에 복음이 전파된 지 어언 120여년이 넘어서고 있다. 기독교가 전파되는 곳에 인간을 변화시키고 사회와 민족을 개혁하는 역사가 전개되었다. ‘하나님의나라’는 이 땅에서 이렇게 확장되어 왔다.
한말에 수용된 기독교는 민족사가 전개되는 단계마다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고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했다. 기독교인들이 그런 단계마다 의식한 시대적 사명은 당시의 민족적인 과제와 크게 어긋나지 않았고 오히려 제대로 의식한 것이었다. 필자는 그것을 단순화된 용어로 정리하여 다음과 같이 몇가지 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다. 즉 한말 반봉건․사회개혁 운동에서 시작하여 국권수호를 위한 항일운동, 일제하의 항일독립운동, 그리고 군사정권 하의 인권․민주화운동을 거쳐 20세기 말에는 민족통일운동으로 발전되어 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을 시대별로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관점에 따라서는 이런 편년사적인 방식을 지양하고 달리 정리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에 의한 민족운동이 이렇게 전개되었다고 해서, 기독교가 시대를 잘못 읽고 반역사적인 과오를 범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의 이런 민족운동이 기독교인만의 것이라고도 보지 않는다. 위의 민족운동 중에서는 기독교(인)가 선구적인 역할을 감당한 것도 있고 대세에 밀려서 따라간 것도 없지 않다. 한말의 사회개혁 운동과 항일의열투쟁은 선구적 내지는 독보적이라고 말할 수 있고, 일제 강점기의 전반적인 항일독립운동은 3.1운동을 제외하고는 적극적이었다고 평가하기에는 미흡하다. 그러나 20세기 후반기에 전개된 인권․민주화 운동과 민족통일운동은 그 선진성과 적극성이 돋보인다고 할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전개한 민족운동이 기독교계의 주류 혹은 지도부에 의한 것인가 하는 점과 그 때문에 기독교인의 그런 운동을 ‘기독교 민족운동’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의문으로 동시에 제기될 수 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선진성과 적극성을 보였던 한말의 의열투쟁이나 20세기 후반의 인권․민주화 운동과 민족통일운동이 기독교계의 주류에 의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기독교계의 주류가 한말 대부흥운동과 100만인 구령운동을 전개하고 있을 때 기독교인 청년들의 의열투쟁이 전개되었고, 안보논리를 벗어나지 못한 보수적인 기독교계가 여의도에서 수십만 수백만의 신자를 모아 ‘삼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를 외치고 있을 때 소수의 선각적인 기독교인들에 의해 인권․민주화 운동과 민족통일운동이 감옥을 벗삼아 전개되고 있었다. 따라서 운동에 참여한 수의 다과와 지도부의 참여 여부에 의해 ‘기독교 민족운동’의 성격 여부가 결정되어야 한다면 답은 명백하다. 그러나 기독교 밖의 일반적인 민족운동도 삼천만 전부가 혹은 지배층이 그런 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것을 민족운동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수의 다과와 지도부의 참여 여부만이 운동의 성격을 결정하는 잣대가 될 수 없다. 비록 소수의, 비지도부가 주도한 운동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시대적 소명과 자신들의 이념에 얼마나 충실하였는가에 따라 결정될 수 있다.
필자가 한 기독교인으로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은 자칫 편견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한 시대에 어떤 이념을 가진 공동체에서 시대적인 소명에 충실한 사람들이 다른 이념적 공동체에 뚜렷이 구별되거나 수적으로 비교가 될 수 있다면 그 나름대로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더 직접적으로 말해서 한국의 기독교인이 일반 백성들이나 다른 종교인들에 비해서 시대적 과제 인식면에서나 그것을 실천하는 측면에서 구별되거나 비교될 수 있다면 그것을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개별화 내지는 개념화시키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따라서 기독교인들에 의한 민족운동도 이같은 관점에서 구별하여 하나의 민족운동사의 장르로 개념화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운동의 흐름을 역사적으로 구명하는 것 못지 않게 그 운동을 기독교 이념과 관련하여 분석, 종합하는 작업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런 연구는 후일을 기대할 수 밖에 없다.      
기독교가 인간과 사회를 변화, 개혁시키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나라’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 기독교인은 그가 처한 민족과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는 시대상황에 따라 그런 단계적인 소명을 의식하면서 자체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민족운동에 노력해 왔다. 앞으로도 기독교는 자신의 영적 영역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실천력을 강화함과 동시에 각 시대마다 부과된 역사적인 사명을 완수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기독교가 민족사에서 생명력을 더 존속시킬 수 있느냐의 관건은 여기에 달려 있다. 한국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시대적인 과제는 인권․민주화와 통일․평화의 과제다. 이것들은 한말부터 심화시켜 온 자주․독립의 과제와 앞으로 세계를 향한 봉사․공생의 과제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 기독교는 오늘도 민족과 세계를 향한 자신의 이러한 과제 앞에 서 있다.
[이 글은 <한국기독교와 역사>제 18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3. 2)에 게재된 것임]
1) 이 점에 대해서는 백낙준 김양선 등 여러 선학들이 증언해 온 것이지만, 필자가 「1880년대 서간도 한인촌 기독교공동체 연구」(『한국 기독교와 민족의식』 지식산업사, 1991) 등의 논문에서 정밀하게 밝힌 것이며, 최근 「한국의 기독교 수용과 그 특징」(『亞細亞硏究』44호,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2001. 12)에서 다시 정리한 바 있다.


2) 『독립신문』4권 187호 (1899. 8. 16)


3). ”Matters of Moment" Bible in the World, Mar.1907.p.70 “이 땅에서 발전되고 있는 기독교는 출중하게도 Bible Christianity이다. 복음전도자들이 전도하기 위해 가져가는 것은 성경이다. 믿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것에 의해 사람들이 구원받고 있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매일 먹고 마시는 양식은 성경이다.”


4) 이만열, 『한국 기독교와 민족의식』(지식산업사, 1991) pp. 221-222


5) 『勝洞敎會百年史 1893-1993』(1996) p. 123


6) 이런 점들에 대해서는 이만열, 「기독교의 전래에 따른 한국사회의 개화」『한국기독교와 역사의식』(지식산업사, 1981) pp. 9-47 참조


7) 『독립신문』4권 185호 (1899. 8. 14)


8) 『황성신문』광무 5(1901)년 3월 28일자


9) 『대한크리스도인회보』 3-9호 (1899. 3.1)


10) 이 점에 대해서는 이만열, 「한말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動態化과정」『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지식산업사, 1991) pp. 257-291 참조


11) 이만열, 『한국기독교 수용사 연구』(두레, 1998) pp. 233-242, 483-485


12) 『대한매일신보』 1909년 2월 11일자


13) 金麟瑞, 「靈溪先生 小傳」『金麟瑞著作全集 5』(信望愛社, 1976) p. 68


14) 金九 씀 이만열 옮김, 『백범일지』(역민사, 1997) pp. 181-182. 이 때 상동교회에 모인 인물들은 전덕기․정순만․이준․이동녕․최재학․계명록․김인집․옥관빈․이승길․차병수․신상민․김태연․표영각․조성환․서상팔․이항직․이희간․기산도․전명헌․유두환․기기홍․김구 등이었다고 한다.


15) 이만열, 「한말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과정」『한국기독교 수용사 연구』(두레, 1998) p. 515


16) 「淸津理事官機密警察月報(명치 42년 4월분)」 발췌,『駐韓日本公使館記錄』


17) 이만열, 「한말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과정」『한국기독교 수용사 연구』(두레, 1998) pp. 516-517


18) F.A.Mckenzie, Korea's Fight for Freedom, Yonsei Univ. Press, 1969, p. 7


19) 기독교의 의병운동에 대해서는 이만열, 「의병운동」『기독교대백과사전』(기독교문사, 1984) 제 12권, pp. 1017-1020 참조


20) 105인 사건에 대해서는 尹慶老, 『105人事件과 新民會 硏究』(一志社, 1990) 참조


21) 이 점에 대해서는 윤선자, 「1915년 <포교규칙> 공포 이후 종교기관 설립 현황」『한국기독교와역사 8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8) 참조


22) <3.1운동 70주년기념 특집호> 『韓國基督敎史硏究』 제25호(한국기독교사연구회, 1989) 및 <특집: 3․1운동과 제암리사건> 『한국기독교와역사』제7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7) 참조


23) 가령 민족대표 33인중 16명이 기독교인이라든가, 3.1운동이 진행되는 도중 6월 30일까지의 투옥자 9,458명중 2,087명(22%)이, 이해 12월까지의 복역자 19,525명중 3,373명(17%)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은 당시 한국 인구 중 1.3%에 불과한 20만명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점과 함께 이 점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24) 최영호, 김일성 생애 초기의 기독교적 배경 『한국기독교와역사』제 2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2) 참조


25) 이 점에 대해서는 김승태 엮음, 『한국기독교와 신사참배문제』(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1) 참조


26) 이상규, 「해방 후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한국기독교와역사』 제 4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5) p. 67 주 2) 참조


27) 이덕주, 「3.1운동의 이념과 기독교 신앙문제」『韓國基督敎史硏究』제 25호(한국기독교사연구회, 1989) 참조


28) 이만열, 「도산 안창호와 기독교 신앙」『도산사상연구』제 8집(도산사상연구회, 2002) 참조


28) 김학준, 『한국민족주의의 통일논리』(집문당, 1983) p. 98


29) 심군식, 『세상 끝날까지 - 한국교회의 산 증인 한상동 목사 생애』(총회출판국, 3판, 1997) pp. 241-242. 이 때 모인 인사들은 권남선․김길창․한익동․최재화․김만일․김상순․강성갑․윤인구․노진현․김두만․심문태․한정교․양성봉․우덕준․서명준․김기현․구영기․백낙철․김은선․주영문 등 20명이었고, 선언문은 “과거 장구한 시일에 가혹한 위력하에 교회는 正路를 잃고 복음은 악마의 유린을 당하고 신도는 가련한 곤경에 들어 있었다. … 오늘까지 노예의 속박하에 끌려오던 모든 제도 일체는 자연 해소의 운명에 이르고 말았다. 우리는 과거의 모든 불순한 요소를 청산 배제하고 순복음적 입장에서 교회의 근본 사명을 奉行하려는 의도에서 좌기에 의하여 조선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를 재건하려는 것이다.”라고 했고, 그들은 ‘종교개혁의 정통신앙을 사수’하며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을 전적으로 채용한다.’고 했다.


30) 심군식, 앞의 책, pp. 242-243. 내용은, “목사 전도사 장로는 일제히 자숙에 들어가며 현재 시무하는 교회를 일단 사면할 것.” “자숙기간이 지나면 교회는 교직자에 대하여 시무투표를 시행하여 그 진퇴를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구호에 그쳤다.”


31) 이상규, 「해방 후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한국기독교와역사』 제 4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5) p. 71


32) 『기독공보』1961년 5월 29일자


33) 『크리스챤신문』1965년 7월 9일자


34) 『기독신문』1965년 7월 19일자


35) 이상규, 「해방 후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한국기독교와역사』 제 4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5) p. 81


36) 이상규, 위의 논문, p. 81


37) 이만열, 「5.17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진실과 그 역사적 의의」『한국근현대사연구』 제14호, 2000. 가을호)


38) 김상근, 「민족의 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한 한국교회의 공헌」(『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창      립70주년』 1994), p.43에서 재인용


39) 통일신학동지회 엮음, 「제2차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기독신자간의 대화’」         (『통일과 민족교회의 신학』 한울, 1990) p. 304


40) 『비엔나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북과 해외동포․기독자간의 통일대화 10년의 회고』(형상사, 1994) 참조


41) 박종화, 「한반도 통일을 위한 남북교회의 실천-자료모음-」(『남북교회의 만남과 평          화통일신학-기독교 통일신학자료 및 평화통일 신학논문 모음집』 한국기독교교회협의         회 통일위원회 편, 1990) p. 2


42) 박종화, 위의 논문 - ‘도잔소 보고서’전문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통일위원회 편, 위의        책, pp. 12-19에 실려 있음.


43) 이 점에 관해서는 이만열,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의 의의」        (『基督敎思想』1995년 1월호) 참조


44) 박성준, 「1980년대 한국기독교 통일운동에 대한 고찰」(『神學思想』 71집, 1990),              p. 964


45) 김흥수, 「한국교회의 통일운동 역사에 대한 재검토」(『기사연무크』9, 한국기독교사회문      제연구원, 1991) p. 116


46) 박종화, <해설-한반도 통일을 위한 남북교회의 실천>(위의 책), p. 4


47) 문익환 목사의 방북운동에 대해서는 진보와 보수측의 엇갈린 평가가 있는데, 보수측의 평      가에 대해서는 이상규, 앞의 논문, p. 95 참조.


48) 박상증 외, <-특별대좌담 - 기독교 통일운동에 대한 총괄평가와 전망>(기사연무크3, 1991)      p. 21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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