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2-18

명성황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명성황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1.3 명성황후의 마지막
1.3.1 명성황후에 대한 박영효의 암살 미수
1.3.2 암살 준비 과정
1.3.3 암살
1.4 사후
2 암살의 배후
2.1 일본 낭인
2.2 조선인 협력자들
3 논란
3.1 강간 또는 시간 논란
3.2 노출기피증, 대인기피증, 암살공포증 논란
3.3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의 생존 의혹
4 평가
4.1 당대의 평가
4.2 후대의 평가
4.3 비판
4.3.1 국고 탕진에 대한 비판
4.3.2 외척으로 편중된 권력
4.4 외국의 평가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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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의 마지막[편집]

1883년 1월 일본에 체류중일 때 그려진 박영효의 초상화
명성황후에 대한 박영효의 암살 미수[편집]
조선은 1895년 4월 일본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일본은 대원군을 퇴진시키는 한편 의정부의 명칭을 내각으로 바꾸고 물러나있던 김홍집을 7월에 다시 총리대신으로 앞세워 연립 내각을 구성했고, 내정의 내각엔 일본인 고문관을 두어 내정 간섭을 강화했다.[59] 이에 명성황후는 프랑스, 러시아, 독일의 압박으로 일본은 요동 반도를 다시 청나라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정세를 이용하여,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몰아내려 했다.[59] 명성황후는 박정양을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하고 김홍집 내각을 퇴출했다.[59][60]
1895년(고종 32년) 7월 왕후를 암살할 계획이 박영효에 의해 꾸며진다. 조선의 개화 이후로 고종은 안으로는 군국기무처가 마음대로 하고 밖으로는 일본의 견제를 받아 고종은 단 한 가지 일도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었다. 이에 명성황후는 이를 못마땅하고 분하게 여겨 러시아와의 제휴를 통해 점차로 군권(軍權)을 회복하기를 기원했으나, 박영효는 이를 우려했다.[61] 명성황후는 군국기무처의 일부 급진개화파가 독단하는 것을 우려했고 이들의 정책을 뒤엎을 기회를 찾았다. 이때 명성황후를 암살할 음모가 박영효의 단독에 의해 계획됐다.
박영효는 왕후의 능력과 권모를 두려워해 왕후가 암살되어 화근을 뿌리 뽑아야 된다고 여겨, 1895년 7월로 날짜를 정하고 일본에 병력 을 요청하였다. 유길준을 박영효는 제 조력자로 여겨 가만히 뜻을 알렸다.[61] 이에 유길준은 매우 놀라워하며 명성황후 암살 계획을 바로 임금에게 알렸다. 유길준의 밀고를 박영효는 알아채어 양복으로 바꿔 입고 변장하며 일본인의 호위를 받아 도성 을 빠져 나와 한강 자락의 용산에서 증기선 을 타고 달아났다. 그의 일당인 이규완, 신응희(申應熙) 등도 따라 달아났다.[61] 이러하여 왕후 암살 모의는 유길준에 의해 대원군과 이준용에 의해 또 다시 꾸며지고 있었다.

암살 준비 과정[편집]

명성황후의 죽음을 낳은 낭인들(한성신보 사옥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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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8월에 명성황후는 죽고 대원군을 꼭두각시로 만든다는 음모가 일본 공사 겸 예비역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三浦梧楼)와 8월 15일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衫村濬), 무관 구스노세 유키히코(楠瀬幸彦), 로닌 두목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등과 함께 꾸미어졌는데, 명성황후의 죽음은 일본인 군인들과 로닌들이 맡고, 대외적으로는 불만을 품은 조선인 군인들의 반란이었다고 발표하는 것이 골자였다.[62] 8월 16일 대원군은 명성황후 제거와 관련된 맹세에 자필로 서명했다.[63] 그 내용은 명성황후가 죽은 뒤 대원군이 국왕을 보필해 궁중을 감독하되 내각에 정사를 맡겨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명성황후가 죽은 뒤 대원군이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미리 언약을 받아 둔 것이다. 이날 대원군은 대원군의 장남인 이재면과 장손자 이준용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자필로 각서에 서명했다.[63]
8월 20일(양력 10월 8일)에 명성황후 암살 작전이 그들에 의해 결행에 들어갔다. 대원군이 은거했던 공덕리의 별장 아소정(我笑亭)에, 일본군은 로닌과 일본 군인, 명성황후에 불만을 품은 조선인 군인 300명가량을 모았다. 대원군은 미우라와 결탁하고 합의하여 가마에 태워져 경복궁으로 나아갔다.[59][64] 대원군은 먼저 명성황후가 죽음을 맞아 마땅하다는 주장의 '고유문'을 발표하고 이를 내일 서울 시내에 게시하라고 지시했다. 이 고유문의 내용은 '민씨 일가의 척족이 권력을 잡고 갑오경장의 개혁을 무위로 돌려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있으니 이들을 제거해 버리겠다'는 내용이다.[63] 이를 대원군은 제 자필로, 일본의 강요도 없이 적어놓았다. 대원군이 이런 글을 적는 이런 일이 일어나며 이 글을 미리 들은 조선의 학자들과 지식인들은 매우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대원군이 일본의 강요에 의해 그러했는지 본인의 의지로 그러했는지는 논쟁이 있다.
유길준에 따르면, 1894년 가을 명성황후가 개화당(개화파) 모두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꾸몄다가 대원군의 정보망에 발각되었고, 명성황후의 죽음과 암살을 위해 대원군은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내기로 일본공사 오카모토와 협의했다.[28]'고 한다. 일본 낭인들은 이두황, 이진호, 우범선, 구연수, 이주회 등이 이끄는 조선인 궁궐수비대 예하 각 대대 병력의 길안내를 받으며 반나절도 안돼 도성에 인천으로부터 잠입했다.

암살[편집]

옥호루. 명성황후가 암살당한 곳이다.
경복궁에서 이들을 마주친 홍계훈 경비 대장이 이들을 가로막았으나[62], 홍계훈과 경비대원들은 일본 낭인들, 낭인들에게 협력한 조선인 군인들의 발포에 맞아 죽는다. 명성황후가 있던 궁궐에는 홍계훈을 죽인 낭인들이 들어와 명성황후를 찾아다녔다. 외침을 들은 명성황후는 궁녀복으로 갈아입고 건청궁 곤녕합 쪽에 있는 옥호루로 은신했는데, 궁녀와 내관들은 낭인들에 의해 피습당하고 있었다.[62] 이경직 내부대신이 두 팔을 벌려 명성황후와 궁녀들 앞을 가로막아 가리니 두 팔이 잘려 죽음을 맞는다. 궁녀들과 함께 있던 명성황후는 대궐에 다다른 낭인들을 만난다.[65]

명성황후는 방 한 구석에 기대어 몸을 감추고 있다가, 낭인 오카모토 류노스케의 눈에 띄어 검에 베여 죽었다 한다.[66] 명성황후의 죽은 몸은 그 뒤 석유가 뿌려진 다음 불태워졌다. 이 때 명성황후의 나이는 44세였다.[62][64][67][68]

명성황후가 암살당했다는 이야기는 경복궁내 강녕전에 머물던 대원군이 휴식을 취하던 중에 보고됐다.[63] 놀라고 두려운 고종은 대원군을 불러 이 날 아침 경복궁내 건청궁에서 아버지와 대면한다. 이런 대원군이 건청궁으로 발길을 옮기던 때에, 명성황후의 주검은 대궐 홑이불에 둘러싸인 채 대궐 솔나무 숲으로 옮겨져 기름이 부어진 가운데 가을의 바람에 한줄기 연기가 되어 날려가고 있었다.[63] 다만 그녀의 유골의 일부만이 누군가에 의해 주워져 닦이운 뒤에 고종에게 전달된다. 고종을 대면한 자리의 대원군은 고종의 형이자 그의 장남인 완흥군 이재면을 궁내부대신에 앉히고 또 정권을 장악한다.[63]

사후[편집]

명성황후 옥보
명성황후의 암살은 바로 한성부에 체제하고 있던 프랑스와 청나라 공사관의 외교관 및 외교관 부인, 언론인들의 입을 통해 외국에 알려졌다. 주조선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즉시 보고서를 작성하여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보고했다. 당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베베르의 보고서를 직접 읽은 뒤표지에 자필로 “정말로 놀랍다. 이런 일이 진짜로 일어났단 말인가.”라고 적은 뒤 즉각 한반도에 가까운 아무르 주 주둔군에 비상 대기령을 내렸다. 프랑스 공사관에서는 명성황후 암살의 배후로 흥선대원군을 지목했다.
1895년 10월 문석봉은 김해로부터 나와 충청북도 보은 등지에서 많은 이들을 모아놓고 의병을 일으켜 적당들을 토벌하자고 외쳤다. 이에 이곳과 인접한 읍의 유생, 선비들이 두건과 도포를 입고 나아갔지만 얼마 뒤 공주부에서 보낸 군인들에 의해 모두 잡혔다.[69]
명성황후의 직위는 일본의 압력으로 인해 죽음 이틀 뒤 폐인으로 강등했으나, 바로 다음 날 그녀의 직위는 고종의 명으로 "빈"(嬪)으로 올라갔다.[64][70][71] 국모에게 저질러진 이런 만행이 국제적으로 알려져 비난을 받게 된 일본은 10월에는 형식적인 조사를 했으며, 명성황후의 지위도 완전히 복원되어 암살 이전 생전 마지막 작호인 왕후로 복작됐다.[64][72] 1897년 음력 1월 6일 문성의 시호를 받고 문성왕후가 됐으며, 능호는 홍릉으로 고쳤다.[64][73] 그러나 뒤에 시호의 문성(文成)이 정조의 시호와 같다 하여 여러 논의 끝에 음력 3월 2일 명성왕후로 개칭됐다.[74] 같은 해 8월, 고종은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10월에는 대한제국정을 발표하고 황제에 올랐다. 이와 함께 명성황후의 사후 지위도 올라가 같은 해 10월 고종의 황제 즉위에 따라 그녀 역시 황후에 추존되어 명성황후가 되었으며, 장례도 국장으로 또다시 치러져 지금의 청량리동에 안치되었다가 지금의 위치로 이장됐다.[75]

1919년 고종이 붕어한 뒤, 고종에게 태황제(太皇帝)라는 시호가 올려지자 그 정후인 명성황후에게도 ‘태’(太) 자의 시호가 올려져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가 되었는데[76] 왕후에게 2자호를 썼던 조선의 오랜 풍습의 영향 아래 흔히 명성황후로 불린다.
한편, 명성황후의 암살은 조선 민중들의 분노를 야기하였고, 암살에 관련된 조선인 장교들과 군인들은 피신하거나 은신해 있었다. 이 때에 백범 김구(이 때의 이름은 김창수, 金昌洙)는 의병으로 만주에 있다가 1895년 초 귀국하며 일본인 상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일본 낭인으로 오인하며 치하포에서 만나 그를 죽이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김구는 이에 대해 뒷날 그가 일본 낭인이거나 왕비 암살에 가담한 자라고 주장하였으나, 오늘날 그는 일본인 상인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배경식 교수는 "지금까지 확인 가능한 어떤 자료에도 그 일본인이 육군중위라는 기록은 없다"며 "일본 공사관의 보고서와 조선 관리의 보고서, 독립신문의 사건 보도는 한결같이 그를 '상인(商人)'으로 적고 있다"고 했다. 그뿐 아니라 배 교수는 백범도 그가 육군 중위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77] 1997년 도진순 창원대학교 교수는 일본의 자료로부터 그가 계림장업단의 상인이며 민간인이었다고[78] 밝혔다.
암살의 배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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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낭인[편집]

일본 자객들은 치밀하게 계획을 짜고 한성으로 잠입, 명성황후의 암살을 주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 병사들을 훈련하여 표면적으로 앞세웠다.[62] 또한 명성황후의 암살 배후로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 등이 지목되었다.[79] 2006년에는 최문형 한양대 명예교수가 일본 헌정자료실에서 찾아낸 야마가타 아리토모 (山縣有朋) 육군대장과 무쓰 무네미쓰 (陸奧宗光) 외상 사이의 편지를 통해 일본 정부의 개입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80] 명성황후의 암살 과정에서 조선인 병사들이 길안내를 했고, 일본군이 양성한 훈련대의 제1대대장 이두황, 제2대대장 우범선, 제3대대장 이진호(李軫鎬) 등이 일본 낭인에 협력했다. 그 밖에 전 군부협판 이주회 등도 포섭하였다. 이 중 우범선이 1903년 고영근에게 죽음을 당했다.[81]

조선인 협력자들[편집]
명성황후 암살의 국내 고위급 협력자로 유길준과 흥선대원군이 지목되었다. 윤치호는 그의 일기에서 그를 암살한 일본 낭인들의 지휘자 중 한사람으로 유길준을 지목하였다.[82] 명성황후가 암살당할 무렵 윤치호는 유길준과 일본인 이시즈카가 사건의 전말을 은폐하기 위해 자신을 그날의 저녁 식사에 자신을 초대했다는 것이다.[82] 유길준은 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 측 주동자라고 지목하였다.[28] 1894년 가을 명성황후가 개화당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꾸몄다가 대원군의 첩보망에 발각되었고, '대원군은 일본 공사 오카모토와 협의 끝에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 그녀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이다.[28]
유길준은 흥선대원군을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인 거물 협력자로 지목했다. 미국인 교수 에드워드 모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유길준은 명성황후 암살은 실행되었지만 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 문제를 일본공사와 협의하고 일본측에 약간의 도움을 요청한 것은 큰 실수였다고 지적하였다.[28] 그러나 유길준은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의견도 덧붙였다.[28] 사학자이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2대 대통령인 박은식도 흥선대원군을 명성황후 암살의 배후로 지목하였다. 박은식은 춘추전국시대에 조돈(趙盾)이 왕을 암살한 것을 비유하여 이와 다를바 없다고 평가하였으며 감정이 사람의 양심을 가린다며 비판하였다.[83]
흥선대원군과 유길준 외에도 조선국 국군 1대대장 우범선(禹範善)·2대대장 이두황(李斗璜)·3대대장 이진호(李軫鎬) 등과, 전 군부협판 이주회(李周會), 국왕 친위대 부위(副尉) 윤석우(尹錫禹), 일본공사관 통역관 박선(朴銑), 문신 구연수(具然壽) 등이 협력했고, 궁궐수비대의 구식군대 출신 조선인 병사들도 자발적으로 협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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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편집]
당대의 평가[편집]

그의 벗 윤치호가 명성황후를 살해한 범인이라고 지목했던[82] 유길준은 명성황후를 ‘세계에서 가장 나쁜 여성’이라고 혹평하였다.[28] 암살 직후 유길준이 미국인 은사 모스에게 보낸 날짜 미상의 편지에서 유길준은 명성황후를 잉글랜드의 메리 1세 여왕,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보다도 더 악하다고 비판하였으며, 비판 사유로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는 국왕은 일개 인형이고 왕비는 그 인형을 갖고 노는 사람이라는 시중의 소문을 근거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소문은 소문이므로, 신뢰할 것이 못된다. [28] 유길준은 명성황후를 개화당 살해의 배후로 보았다. 모스에게 보내는 편지 본문에서 유길준은 명성황후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와 비밀 접촉하고, 1894년 가을 개화당 모두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미다가 국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에게 발각되었다고 하였다.[28]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명성황후의 사치와 민씨 정권의 매관매직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서술되어 있다.[90]
서재필은 명성황후가 영민한 두뇌의 소유자라고 평가하였다. 1947년 군정기 때의 한 회고담에서 서재필은 "김옥균의 지략은 역사적인 것이었소. 박영효와 홍영식과 서광범 또한 그에 뒤지지 않는 재사들이었지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들에다 나까지 넣어 다섯 사람의 기지와 계략을 모으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다고까지 일컬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다섯 사람이 함께 민비 앞에 나가면 으레 민비에게 기선을 잡혀서 머리를 긁적거리며 물러나오기 마련이었지요. 민비는 실로 당할 길 없는 지략과 재략을 지닌 걸물이었소.[91]"라며 그녀가 사태 분석에 기민했다[91] 고 평하였다.

후대의 평가[편집]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학계의 평가는 친일 급진 개화파와 수구적 척사파, 일본 관변 측으로부터 모두 좋지 않은 평을 얻었다.[92] 반면에 그러한 좋지 않은 평가는 명성황후의 정책 노선이 그만큼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었다는 반증이라는 주장도 있다.[92] 한편 척족정치의 악순환을 거듭케 했다는 비판도 있다.[93]
또한 명성황후와 척족 세력은 중인 중심의 개화파와는 달리 전통과 서양 문명을 절충하려는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정책 노선을 띠었다. 이 때문에 급진개화파의 입장에서 사대당 또는 수구당으로 평가를 받기도 한다. 반면에 고종의 입장에서는 근왕파로서 고종이 시도한 광무개혁의 지지세력이었고, 을미사변 이후에는 반일의병운동을 배후에서 지원하였으며, 대한제국 성립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94] 그러나 대원군에 의해 척결된 세도정치를 다시 불러들였다는 비판과 외세를 이용하려 하여 국내에 일본의 침입을 촉진시켰다는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심지어 일부 극단적 평론가는 비슷한 시기 청제국을 쇠퇴시킨 서태후와 동급을 취급하기도 한다. 보통 그들은 서태후와 명성황후를 19세기 동양의 최악의 황후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의견에 맞는 구체적인 제시자료가 없고, 있다해도 전부 다 신뢰할 것이 못되는 것들 뿐이다.

비판[편집]
국고 탕진에 대한 비판[편집]

유학자 황현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국고를 탕진했다는 점을 지적, 비판했다. 그리고 황현 자신의 저서 매천야록의 곳곳에서도 이를 언급하였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원자가 태어나자 궁중에서는 원자가 잘 되길 빈다는 핑계로 제사를 8도 강산에 두루 돌아다니며 지냈다. 이렇게 탕진하는 하루 비용이 천금이나 되어 내수사가 소장한 것으로는 비용 지출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95] 마침내 호조나 선혜청에서 소장한 공금을 빌려서 사용했지만 그것이 위반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1년이 채 못돼 대원군이 비축해 놓은 재물을 모두 탕진했다. 그래서 매관이나 매과[96] 까지 기승을 부렸다고 한다.[95] 허나 매천야록이 한양에서 수백 리나 떨어진 전라도에서 떠도는 소문을 모아 저술한 책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신뢰할 것이 못된다.

외척으로 편중된 권력[편집]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을 축출한 뒤 황후는 민씨 일족을 대거 등용하여 조정에 진출시켰다. 이 중 민겸호는 선혜청에 있으면서 군인들의 급료를 착복하고 모래를 섞어서 주어 임오군란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문정공 송준길은 우복 정경세의 사위이며 민유중은 송준길의 사위이다. 명성황후는 송준길 집안에 대해서는 가까운 외가의 의를 지켰고, 정씨 집안을 추대해서 역시 외척같이 각별히 생각해 왔다.[97] 명성황후는 정경세를 부르기를 우복 할아버지라고 하였다. 그래서 송씨, 정씨 두 집안의 후손들은 크게 고종의 총애를 받아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을 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로 많았다. 이때 고종과 흥선대원군은 친골육지간이지만 사이가 나빠져, 아버지 대원군을 혐오했던 것 같았다. 이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며 비아냥거렸다. "내전(왕비)는 돈목을 감소시키고 대전(임금)은 돈목을 증가시키면 좋겠다.[97]"는 것이다.

외국의 평가[편집]

명성황후에 대해 일본인을 제외한 외국인들은 대체적으로 좋게 평가했다. 이를테면 정치적 이해관계에 예민하지 않은 민간인의 기록이 그러하다. 그들은 한결같이 명성황후가 영리한 판단력과 뛰어난 외교력을 지닌 교양 있는 여성임을 전해준다.[92]
영국 왕립지리학회회원이기도 한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는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에서 명성황후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했다.


조선을 방문했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민씨는 첫눈에도 예사로운 여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매가 날카롭고 매서웠으며 두뇌회전 또한 기민해 보였다. 성격도 대단히 차분하고 냉철하게 느껴졌다. 왕비는 마흔 살을 넘긴 듯 했고 퍽 우아한 자태에 늘씬한 여성이었다. 머리카락은 윤이 나는 흑단이었고 피부는 투명하여 진주빛을 띠었다. 눈빛은 차갑고 예리했으며 반짝이는 지성미를 풍기고 있었다. …(중략)… 나는 왕비의 우아하고 매력적인 예의범절과 사려 깊은 호의, 뛰어난 지성과 당당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통역자를 통해 나에게 전달되기는 했지만 그녀의 화법은 탁월한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기묘한 정치적 영향력, 왕 뿐만 아니라 그 외의 많은 사람들을 수하에 넣고 지휘하는 통치력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 대화가 시작되면, 특히 대화의 내용에 흥미를 갖게 되면 그녀의 얼굴은 눈부신 지성미로 빛났다. 왕비의 주위는 온통 적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우두머리는 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이었다. 왕비가 그녀의 재능과 권력으로 조정의 고위관직을 친인척을 등용하여 거의 석권해 버렸으므로 그녀에 대한 대원군의 반감은 엄청났다.[98]

 
—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
미국 공사관 서기인 윌리엄 프랭클린 샌드는 명성황후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했다.

뛰어난 학문과 지성적인 강한 개성과 굽힐 줄 모르는 의지력을 지녔으며 시대를 추월한 정치가이자 외교가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애쓴 분이었다.
 
— 윌리엄 프랭클린 샌드(William Franklin Sands)
미국인 선교사이자 명성황후의 어의였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 여사는 명성황후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했다.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Lillias Horton Underwood)
우아하고 근엄있다. 체형은 수척하고 얼굴은 창백했으며 눈빛은 날카롭고 초롱초롱했다. 순수하면서도 뛰어난 기지와 매력을 지닌 분으로 서양의 기준에서 볼 때에도 완벽한 귀부인이다. 그녀는 세계 강대국과 그 정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섬세한 감각을 가진 유능한 외교관이었고 반대세력의 허를 찌르는 데 능했다. 일본을 반대했고 애국적이었으며 조선의 이익을 위해 몸을 바치고 있었다. 그녀는 아시아의 그 어떤 왕후보다도 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여인이었다.
 
—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Lillias Horton Underwood), 《조선견문록(Old Korea)》
한편, 일본의 화가들이 그린 명성황후의 삽화는 모두 그 모습이 뚱뚱하고 심술궂게 그려져 있다. 또한 일본 외교관들은 그녀를 “여우”라고 불렀다.[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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