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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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비 순명효황후
호칭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호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제휘열목명성태황후
(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齊徽烈穆明成太皇后)
출생지
경기도 여주목 근동면 섬락리 사저
사망지
한성 경복궁 내 건청궁 곤녕합 옥호루
본관
여흥(驪興)
배우자
고종(高宗)
아버지
여성부원군 민치록
어머니
한산부부인 이씨
생몰
기간
음력
1851년 9월 25일 ~ 1895년 8월 20일
양력
1851년 11월 17일 ~ 1895년 10월 8일(향년 45세, 만 43세)
재위
기간
1866년 ~ 1895년
1. 소개2. 사진과 초상화3. 왕비가 되기까지4. 시아버지, 흥선 대원군과의 관계5. 민씨 일파
5.1. 성장과 몰락5.2. 외세와의 연계6. 을미사변과 그 직후
6.1. 조선인 협력자들6.2. 무시당한 을미사변?6.3. 2009년 TV 아사히의 보도6.4. 명성황후는 죽지 않았다?7. 평가
7.1. 사치7.2. 질투7.3. 미화7.4. 다른 시각
7.4.1. 옹호론7.4.2. 비판론7.5. 민씨 척족과 친일 문제8. 호칭
8.1. '민비'는 일제가 만든 통칭이다8.2. '민비'는 일제가 만든 통칭이 아니다9. 2차 창작물에서 나오는 묘사
1. 소개[편집]
明成皇后 閔氏
조선/대한제국 고종의 정비이자 조선의 마지막 군주 순종의 어머니. 숙종의 모친인 '명성왕후' 김씨와 헷갈릴 수 있으니 주의하자.
을미사변으로 일본인들에게 살해당했기에 가장 유명한 왕비이며[1], 여러 가지 의미로 한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왕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2] 부정부패와 사치, 외세를 불러오는 등의 행위로 조선을 파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악녀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의해 살해된 점 때문에 여론과 미디어[3]에 의해 조선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한 철의여인과 같은 이미지로 상당히 많이 미화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2. 사진과 초상화[편집]
사진과 초상화가 남아있는 시아버지 흥선 대원군, 남편 고종과 달리 그녀의 외모에 대한 자료는 불분명하다.
Korean palace-woman in full regalia(대한제국멸망사, 1906)
가장 널리 알려진 사진이지만 이미 1890년대 초반부터 민간에 궁녀의 사진으로 유통되던 사진이라 명성황후의 사진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또한 역사학자와 전문가들에 따르면 신발도 신지 않은 버선발 차림으로 사진을 찍는 등 '왕비'로서 지킬 체통과 의식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4]
몇 해전 언론보도에 나온 명성황후의 사진. Die Ermodete Königin(살해당한 왕비)라는 주석이 붙어 있어 가능성이 높은 사진으로 주목받았지만, 1893년 독일의 에른스트 폰 헤센-바르테크가 쓴 '코레아', 1894년 발간된 화보잡지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등의 책자에는 '궁녀'라고 소개되어 있다. 따라서 명성황후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이승만의 책 "독립정신"에 실려있던 사진으로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명성황후 사진으로 알려졌던 사진. 사진의 주인공이 명성황후라고 밝힌 유일한 사진이다.
일본에서 그렸다는 명성황후-고종-흥선대원군의 3자 합동 초상. 조선국 귀현 초상(朝鮮国貴顕肖像).
명성황후 사진으로 알려진 사진들에 대한 내용은 본 기사를 참조.
권오창 화백이 그린 명성황후 영정. 이미연을 닮은 듯한 건 기분 탓인가?
3. 왕비가 되기까지[편집]
명문가인 여흥 민씨의 자손으로 여주에서 민치록의 딸로 태어났다. 이름은 자영/혹은 아영이었다고 하며, 아버지 민치록은 그녀가 어릴 때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것처럼 무척 가난하게 살지는 않았다. 고아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당시 그녀의 어머니는 살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할아버지는 물론 아버지 민치록은 살아있을 당시 벼슬을 지냈고, 여흥 민씨는 세력은 크지 않지만 명문가다.
명성황후의 본명을 두고 논란이 있다.[5] 우선 "자영"은 줄리에트 모리오의 운현궁, 정비석이 쓴 "소설 민비" 등에서 나온 작명이라는 것이다.[6] 다른 이름으로 유력한 것은 아영으로 학술자료의 기본이 되는 열성왕비세보 열성황후왕비세보(列聖王妃世譜列聖皇后王妃世譜)에는 아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여흥민씨 집안에서는 입에서 입으로 전하다보니 변경된 것으로 본다고 '자영'을 미는 중. 그 외에 아명은 당시 항렬을 따라서 정호였다는 말도 있으나, 여자의 경우는 남자와 다른 항렬자를 사용한 예도 있어서 확실한 증거가 없다. 본명이 자영이라고 사전에 등록된 경우는 많지만, 정식사료가 아영인 것으로 봐서는 별도의 학술적 근거보다는 여흥 민씨 쪽 족보에 따른 것으로 추정 중.
고종의 왕비를 물색하던 흥선 대원군은 외척의 발호를 염려하던 찰나, 자신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의 추천에 따라 아내의 먼 친척인 민아영을 간택 대상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일가친척이 별로 없어 외척이 득세하지 못할 것이며, 득세한다해도 소수파벌에 불과할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대원군은 조 대비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녀를 며느리로 세웠다는 말이 있는데, 왕의 혼인 상대를 결정하는 것엔 대왕대비나 대비와 같은 내전의 뜻이 최우선이므로 정말로 그랬을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조선왕조실록상 왕비 간택은 조 대비의 삼간택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고종의 아내로 명성황후를 선택한 의도가 약간 달랐을 거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여흥민씨 집안은 세도가문은 아니였지만 어느정도 명문가였기에 순수하게 외척견제용으로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여흥민씨는 결혼이전부터 흥선대원군과 어느정도 관계를 맻고 있었는데, 명성황후의 양오빠 민승호는 흥선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 민씨의 친남동생이다. 흥선대원군과는 자형과 처남사이. 그리고 흥선대원군의 어머니가 여흥 민씨 집안 사람이기 때문에,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과도 먼 친척 관계가 된다. 그래서 대원군은 직접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집안을 외척으로 맞아들어, 외척의 발호를 막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고 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7]
4. 시아버지, 흥선 대원군과의 관계[편집]
명성황후는 비록 흥선대원군이 간택한 며느리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틀어져 나중에는 결국 견원지간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 원인을 두고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완화군과 관련된 설이다.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기 직전인 1871년 11월 4일 명성황후는 첫 아들을 낳는데. 이 아이는 항문이 없이 태어나[8][9] 결국 4일 뒤인 11월 8일에 죽는 일이 벌어졌다(출처 승정원일기 1871년 11월 8일 기사), 이 때문에 흥선대원군이 이전에 고종과 궁인 이씨에서 태어난 완화군을 원자로 책봉하려 시도했고 이때부터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의 사이가 벌어졌다는 주장이 있다. 여기에 덧붙는 야사에 따르면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의 아들이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듣자, 아기의 건강 회복을 위해 산삼을 달여 먹도록 지시했는데, 달인 산삼을 먹은 민씨의 아들은 얼마 후에 급사했고 명성황후는 이를 흥선 대원군이 완화군을 세자로 만들기 위해 고의적으로 아기를 살해한 것이라 주장, 흥선 대원군에게 적개심을 불태우게 되었다고 한다.
다만 위 주장은 근거가 부족한게 일단 죽은 명성황후의 아이는 대원군이 독살한 것이 아니라 항문이 막혀서 죽었고, 완화군 이야기도 자손이 귀해진 조선왕실 입장에서는 고종의 첫 아이기이자 귀한 손자이기 때문에 할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유난히 완화군을 귀여워한건 당연한 일이다. 거기에 왕권 강화을 하려던 대원군의 입장에서 후대 왕의 권위에 문제를 줄 수 있는 서자를 성급하게 왕세자로 책봉해야할 하등의 근거가 없고, 당시 고종이 아직 20도 안된 나이 인 것을 생각해보면 서자를 급히 원자로 책봉하는 것은 명분은 물론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는 일이다.
각설하고 아기가 죽은 후 흥선 대원군의 정책에 본격적으로 반대 노선에 나선 명성황후는 흥선 대원군에 맞서기 위해 자신의 친척들을 불러 모아 정치 세력화 하였고, 고종을 부추겨 흥선 대원군과 고종의 공동 정치 체제를 부정하는 친정 선언에도 어느 정도 개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당시 명성황후의 개입이 어디까지었냐는 것엔 논란이 많다. 주로 알려진 야사에선 명성 황후가 고종을 조종하다시피 부렸다고 말하며, 명성황후의 막후통치설을 주장한다.
일본인들에 의해 기록된 자료에는 위의 이야기와 달리, 내정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흥선대원군에 대한 컴플렉스를 느낀 고종이 자발적으로 움직였고 이 과정에서 민씨의 파벌을 키우는데 이바지했다고 나와 있다. 실제로 대원군 실각 이후의 실제 대립은명성황후와 대원군이 아니라 고종과 대원군을 중심으로 문제가 커졌기에 야사에서의 이야기보다 이쪽이 더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 와중에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대립에 관한 소문 등이 널리 퍼진 것은 확실하고 이를 바탕으로 을미사변 시기 대원군이 동원되기도 하지만, 이 문제 자체도 대원군이 낚인 것에 가깝지, 주도했기는커녕 보조한 흔적도 없다. 차라리 대원군과 명성황후가 인척관계 외 다른 연결고리가 있었으나 그 고리가 끊어지게 되면서 소원해졌다거나, 고종과 대원군의 사이가 벌어지고 고종의 처가인 민씨 일파의 세력이 커지면서 고종의 아내인 명성황후 역시 대원군과의 사이가 소원해졌다는 해석이 신빙성이 높다.
또한, 이 둘의 대립이 심했다는 이야기는 원래 일본의 기록에서 나온 것이 야사로 발전했다는 추측도 있다. 이렇게 추측하는 학자들은 실제로는 그 정도까지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는데, 일본이 명성황후의 평판을 떨어뜨리려고 과장해서 퍼뜨린 이야기라고 본다.
2012년 6월, 흥선대원군이 임오군란 이후 청에 잡혀있을 때 고국에 보낸 한글 편지가 명성황후에게 보낸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정말 명성황후가 수신자라면 두 사람의 관계가 실제로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는 위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뉴스 기사 그러나 이 편지의 내용이 정중하다는 걸 근거로 그렇게 판단하는 것도 좀 무리가 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편지 내용이 이렇게 정중하고 우호적으로 되어 있는 것도 크게 이상하지 않은 것이, 우선 이 사람들은 왕실 사람들이다. 왕실 사람들이 쓴 편지, 그것도 서로 주고 받는 편지임을 생각해 본다면 이건 얼마든지 구사할 수 있는 미사여구로 봐도 그다지 이상하지 않다. 더군다나 이 편지 보낼 당시에는 흥선군이 '을'이고 명성황후가 '갑'이다. 당시 명성황후는 고종에게 정치적으로 영향을 주는 상황이었는데[10], 어떻게든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흥선군이, 본인의 귀향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명성황후를 상대로 편지를 쓰면서 엎드려 기어도 시원찮을 판에 "너 때문에 이게 뭐야, 개년아!" 이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러니 명성황후와의 사이가 아무리 나빴다 해도 이러한 편지가 그다지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이들은 왕실 사람이며 또한 정치인이다.
5. 민씨 일파[편집]
5.1. 성장과 몰락[편집]
고종의 친정선언으로 인해 흥선대원군과 그 파벌이 정권의 중추에서 밀려난 뒤, 공백에 가까운 중추세력을 명성황후가 불러들인 민씨 일파가 잡게 되고 명성황후의 권력은 급속도로 성장하게 된다.
본래 소수 파벌이었던 민씨 일파는 자신들의 친척들을 동원하여 매관매직에 참여, 파벌의 덩치를 순식간에 불리었고 이 행위를 명성황후가 눈감아 주어 단기간에 급성장하는 원동력이 된다.[11] 아 장사하자 먹고살자 오늘도 방실방실 막장 조선말기의 하늘
대원군 축출 이후 강화도 조약까지의 조선의 정치 상황은 구 대원군 일파, 민씨 일파, 중도인 안동 김씨, 이최응을 비롯한 반대원군 종친 세력이 균형을 이루는 상황이었는데 운요호 사건이 터진다. 일단 야만인이라고 얕보던 일본에게 처참하게 깨진 건 둘째치고 박규수를 비롯한 대원군 일파, 이최응, 고종이 모두 개항에 이득이 될 것 같다고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고 조선은 개항된다. 그리고 어설프지만 소위 근대화라는 것이 조금씩 시도되기 시작한다.
이 근대화를 핑계로 자신들의 세력을 굳건히 한 민씨 일파는 자신들의 사욕을 채우기 시작했고 결국 1882년, 신식군대 별기군에 대한 과도한 우대에 격앙한 구식군대들의 반발과 일반 백성들의 분노가 모여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명성황후를 선두로 민씨 일파는 장호원으로 피신하게 되며 이 피신사건이 대대적으로 알려져, 사실상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다.
그런데, 강화도 조약에 대해선 이런 말도 있다. 조선 궁중 외교비록인 '선유실록'에 의하면 명성황후는 강화도조약에 반발했으나 좌파당성 1군수 김현참 종1품을 비롯한 유생들이 명성황후에 강하게 반발하고 왕에게 상소를 올려 통과되었다고 한다.
5.2. 외세와의 연계[편집]
임오군란으로 명성황후가 장호원으로 도망친 뒤, 권력의 중심에 복귀한 흥선 대원군은 민씨일파의 소탕을 위해 소문으로 돌던 명성황후의 사망설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국장을 선포한다.[12]
이대로 국장이 치뤄지면 권좌로 돌아 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은 명성황후는 윤태준을 고종에게 비밀리에 보내어 자신의 생존을 알린 후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 청군이 진주하여 흥선대원군을 청으로 납치하게 한 후 권력의 자리로 복귀하게 된다. 청의 원군을 요청한 것은 윤태준과 접촉을 마친 고종이란 설이 있다. 2007년에 발견된 문헌에선 당시 명성황후는 도피하는데 바빠서 청나라와 접촉할 여유와 능력이 안 되었다. 그리고 시기상으로 본다면 청에 원군을 요청한 것은 영선사들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자세한 것은 임오군란 문서 참고.
이후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지만 삼일천하로 끝나 사실상 개화파 정권이 붕괴하고 10년 후에 일어난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 청이 신분을 구류하고 있던 흥선대원군의 신병을 일본측이 양도 받는 일이 벌어져 갑오개혁으로 이어진다.
한편 러시아는 일본이 급격히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자 프랑스, 독일과 합세하여 삼국간섭을 통해 일본이 먹은 요동반도를 도로 토해내도록 압력을 넣었다. 이에 고종과 명성왕후 부부는 러시아의 존재에 대해 매우 주목하게 되었고 러시아 공사 베베르를 수시로 불러서 러시아 정부와 외교적 접촉을 가졌다. 삼국간섭이 명성황후의 작품이란 뻘소리가 가끔 나오는데 그냥 헛소리다. 어쨌거나 이노우에 가오루는 고종과 명성황후가 대놓고 자신을 괄시하며 일본에게서 거리를 두는 것을 포착하고 자신의 후임 공사로 무장 출신의 미우라 고로를 추천하며 그와 1달간 같이 생활하며 모종의 음모를 꾸미게 된다. 그게 바로 을미사변이다. 이 때의 행보는 참 장기적으로 봐야 하는 것이, 을미사변이란 사건 자체는 명성황후를 죽이고 일시적으로 조선에 친일내각을 세우는데 성공했지만 고종이 일본과 완전히 척을 지고 춘생문 사건과 아관파천을 통해 미국과 러시아에 매우 노골적인 러브콜을 보내는 계기가 되어 결국 잠깐 들어선 친일 내각은 전멸당하고 조선의 친일파 세력은 일시적으로 일소된다. 하지만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지면서 결국은 일본이 조선을 완전히 장악하게 됐고 일본을 막을 여건이 되는 영국과 미국은 오히려 일본의 조선 지배를 묵인한 상황이었으니 다 끝나고 만다.[13]
6. 을미사변과 그 직후[편집]
고종과 명성황후가 노골적으로 러시아의 개입을 허락하고 고종이 일본 교관들이 양성한 훈련대의 해산방침[14]을 통보하자 일본은 그 결정의 배후로 지목된 명성황후를 암살하기 위해 1895년 10월 8일, 일본 군대와 경찰 및 조선군 훈련대 등을 동원해 경복궁을 공격한다. 일본군과 경찰이 시위대를 몰아내고[15] 같이 온 일본 낭인들이 옥호루에서 명성황후를 살해한다. 그리고 그 시체를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이 사건은 '을미사변', '을미의 변'이란 이름으로 기록된다.
이틀 뒤인 1895년 음력 8월 22일, 고종은 일본의 압력의 의해 그녀를 서인으로 강등했다. 8월 23일 왕태자(순종)가 이에 대해 상소를 올려, 그날 고종은 그녀에게 빈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같은해 10월 10일 왕후의 신분을 복위시켰고, 이후 1897년 1월 6일 문성이란 시호를 받기까지 그녀는 대행왕후로 불렸다. 하지만 3월 2일에 그 시호는 정조의 시호와 같다며 명성으로 고쳐, '명성왕후 민씨'로 불리게 된다. 몇 달 뒤인 10월 12일, 고종이 황제에 즉위하자 그녀 역시 황후로 추숭되어 '명성황후 민씨'로 불리게 된다.
명성황후 친위세력의 대표격인 훈련대장(연대장급) 홍계훈은 광화문에서 교전 도중에 전사했고[16] 시위대는 연대장 현흥택과 미국인 군사 고문 다이의 지휘하에 맞서 싸웠으나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사건 이후 일본을 비난하는 국제 여론이 비등하자 일본은 처음엔 조선인들의 내부 소행을 뒤집어 씌웠다고 개소리를 시전했지만 러시아 기술자 사바틴, 미국 교관 다이를 비롯해서 조선인 뿐만 아니라 외국인 목격자도 많았는지라 숨길 수가 없는 처지였고 미우라 공사를 소환하고 낭인들도 소환후 체포해서 법정에 세웠다가 증거불충분+춘생문 사건을 빌미로 방면했다.[17] 물론 일본은 이 사건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발생 당시 세간의 관심도 그리 받지 못했다. 또한 2009년 전까진 일본의 모든 언론기관이 을미사변에 대해선 거론하지 않았다.
2011년 유인촌 당시 청와대 문화특보는 경복궁의 담이 너무 인간적이게도 낮아 민비가 살해되었다는 병맛 독특한(…) 주장을 # 제기하였다. 그간의 병크 언동으로 시선이 곱지 않던 안티들은 역사 스페셜 진행하던 인간이 저딴 소릴 한다면서 많이 많이 깠다.
사족으로,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 중에 김진명의 '황태자비 납치사건'이 있는데 작가의 주장에 의하면 명성황후 민씨의 죽음은 (시간을 포함한) 매우 치욕적인 죽음이었다고 하며 이를 증명하는 문서[18]가 실존한다고 한다. 실제로 소설 내용도 그렇기도 하고. 물론 이 작가가 늘 그렇듯 그저 작중 떡밥일 뿐 어떠한 가치도 없다. 도리어 고인드립의 측면이 강하다.
그녀의 원수를 갚은 사람이 있다. 고영근 문서 참조.
1897년 11월 국장절차를 밟아 청량리 밖 홍릉에 매장되었는데, 미국 26대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 루스벨트가 방한했을 때 수행원들과 함께 이 능을 방문했었다. 그런데 앨리스와 그 수행원들이 이 능의 석물에 올라타서 인증샷을 찍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이런 쳐 죽일 년! (그 사진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항목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뒷날 1919년에 남편 고종이 사망하자 천장하여 남편과 함께 경기도 남양주시의 홍릉에 합장되었다. 그리고 청량리 홍릉 자리에 들어선 것이 영친왕의 생모인 고종의 후궁 순헌귀비 엄씨의 묘로 이를 '영휘원'이라고 부르는데 '구 홍릉'이라는 지명 역시 남아 있으며, 이 주변에는 수목원이 있고 근처에 세종대왕기념관도 있다.
6.1. 조선인 협력자들[편집]
명성황후 살해 사건 당시 조선인 고위직 협력자는 흥선대원군[19], 유길준[20], 영선군, 이두황, 이진호, 이주회, 우범선, 구연수 등과 도성수비대 3개 대대의 병사들.
이중 우범선은 우장춘의 아버지이고, 구연수는 송병준의 사위이기도 하다.
1894년 흥선대원군과 영선군은 함께 뻔질나게 일본 대사관에 출입하며 명성황후를 폐출하는데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거절... 1895년에도 흥선대원군과 시조카 영선군은 함께 일본 대사관을 찾아가 명성황후 제거에 협력할 것을 요청한다. 말이 씨가 된다고 일본은 그대로 낭인들을 보낸다.
한국땅을 처음 밟는 일본 낭인들이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하자마자, 이주회,우범선,이두황 등 3대대장과 전 군부차관 이진호 등이 협력하고 개화파 거물 유길준까지 가세하면서 일본낭인들은 반나절도 안 돼 한성에 들어왔다.
조선인 병사, 혹은 명성황후를 보아왔던 일본인 여성들이 궁녀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얘는 누구 쟤는 누구' 식으로 지목했던 게 컸던 모양이다. 결국 명성황후는 궁녀로 분장했음에도 조선인 병사 (혹은 오랫동안 명성황후를 보아왔던 일본인 여성)들이 '이 여자가 왕비입니다' 한마디에 손도 못쓰고 그대로 칼맞고 최후를 맞았다.
민족문제 연구소의 윤덕한이 쓴 《이완용 평전》에 의하면, 사실 대원군이 여기에 많이 개입되어 있다. 그는 출발 전에 고유문을 붙였는데, 간단하게 쓰자면 다음과 같다.
"왕비와 그 무리들이 (원문에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민씨일족을 가리키는 것이 많음) 나라를 망치니 두고 볼 수 없구나. 피를 봐서라도 나라를 지킬테니, 너희들은 나서지 말고 할일이나 계속하라. 방해하면 보복하겠다." 대충 이런 뜻이었다. 그 날 대원군은 실패에 대비해, 손자인 이준용에게 일본으로 도망가라고 했다.[21]
6.2. 무시당한 을미사변?[편집]
명성황후의 살해소식에 유생들이 을미의병을 일으켰으며 이것이 전국적인 의병봉기로 이어졌다는 설이 가장 잘 알려진 시각이지만, 이러한 시각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비판하는 측에서는 이는 KBS 사극 <찬란한 여명>에서 방영한 내용을 맹신하는 것으로, 을미사변으로 일어난 을미의병의 주요 구성원은 유생들이었으며, 직접적인 실력행사보단 일본세력의 국외 추방을 요구하는 탄원서가 주를 이루었고 한 달이 지나지 않아 해산되었다고 주장한다. 사실 의병은 단발령 시행이 계기가 되어 전국적으로 번진 것이다. 즉, 명성황후는 당시로선 효를 상징하는 머리카락보다 중요도가 떨어졌다는 것.
그런데 이는 을미의병의 성격을 몰라서 하는 말이라는 반박도 있다. 을미의병은 처음부터 근왕운동적 성격과 성리학적 질서 보호라는 명분이 작용했다. 즉, 강화도 조약 이후부터 을미사변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은 왕실은 물론 성리학적 세계관을 위협한다고 위정척사파 유생들이 생각했던 것이다. 이 경우, 당연히 을미사변은 을미의병의 주요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을미사변 이후 명성황후를 폐위시키려 하자 유생들이 토역소를 올렸고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고 운운하며 각지에서 창의소가 만들어졌다. 따라서 을미의병은 단발령 뿐 아니라 을미사변에 대해서도 분노하며 일어난 운동이 맞다는 것이다.
걍 왕비가 살해당해서 빡친 상태인데 머리까지 깎으라고 해서 완전히 폭발한거다.
6.3. 2009년 TV 아사히의 보도[편집]
2009년 TV 아사히에서 일본에서는 최초로 을미사변에 대한 보도를 했고 이 보도에 자극을 받은 일본내의 모든 혐한들은 "모든 것은 조선인의 조작이다."라든가 "모든게 조선을 위해서였다."라는 개드립을 인터넷상에서 뿌렸는데, 되려 혐한의 입지들을 축소시키는 일이 되고 말았다.
6.4. 명성황후는 죽지 않았다?[편집]
2013년 7월 1일, 정상수 한국방송통신대 통합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는 독일 외교부 정치문서보관소와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명성황후가 을미사변 때 죽지 않고 탈출했다는 내용의 외교문서를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기사
정교수가 발견한 문서는 1896년 2월 6일, 러시아주재 독일공사 후고 라돌린이 총리앞으로 보낸 암호문서 해독문인데 이 문서에 의하면 "러시아 외교부 장관 로바노프가 자신의 정보에 따르면 죽었다고 이야기되는 한국의 왕비가 아직 살아 있다고 나에게 말했다.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베베르)는 왕비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할 수 있는지를 한 명의 한국인으로부터 매우 비밀리에 요청받았다고 한다”라고 적혀있었다고 한다.
또한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 월터 힐리어가 보낸 문서도 발견했는데 이 문서에는 "왕과 왕세자(순종)은 피살을 모면한 것 같다. 그리고 왕은 왕비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말하지 않고 있다"라고 했다는 것. 힐리어는 을미사변 직후 작성한 문서에서도 "일본인들이 궁녀 서너명을 죽였으며 왕비는 사라졌는데 탈출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작성했으며 이후 힐리어는 베베르의 방문을 받았는데 베베르가 왕비의 생존 가능성이 있음을 말했다는 보고서도 작성했다고 한다.
과연 정교수가 발견한 문서가 실제 사실을 말하고 있는 건지는 의문이 생기긴 한다. 만약 명성황후가 탈출했다면 왜 이후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는지 쉽게 납득하기는 힘들다. 명성황후가 살아있었다면 오히려 자신의 생존을 이후에라도 드러내서 일본을 궁지로 몰수도 있었는데 왜 고종이나 명성황후가 그런 카드를 활용하지 않았을까? 또한 일각에서는 일본이 외교가에 역선전을 살포한걸 독일과 영국이 착각한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정교수와 일부에서는 당대 최강대국인 독일과 영국이 일본의 역선전을 아무 확인도 않고 덜컥 믿고 본국에 보고했겠느냐, 명성황후는 일본의 재암살 시도를 피하기 위해 숨어 살다가 곧 사망했을 것이다라는 반론도 나온다. 결국 구체적인 사료가 더 발굴되지 않는 한은 쉽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을 듯하다.
7. 평가[편집]
부정적인 평가가 많은 인물로, 동시대 인물이었던 유길준은 세상에서 가장 악독한 여인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명성황후를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명성황후 자신과 민씨 일가에게 이익이 되는 길이 외세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을 뿐이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에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특히 개혁 세력들의 주장을 묵살하며 제국을 운운[22]하는 시대 착오적인 주장을 내세운 고종을 부추겼다.
명성황후의 추천으로 수많은 인척이 등용되었다. 이들이 민씨 일파다. 명성황후의 파벌인 민씨 일파 역시, 명성황후의 이름을 등에 업고 세도를 부리며 엄청난 부정을 저질렀지만 명성황후는 이를 만류하거나 처벌하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권장하고 장려하며 이러한 전횡과 부정부패를 조장하며 민씨 일파의 세력을 급격하게 키워나갔다. 당시 민씨 일파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는 극심했고, 민영준은 백성들이 하도 씹어대는 통에 이름까지 민영휘[23]로 바꿀 지경이었다. 그가 평안감사로 일하면서 평안도 백성들을 끔찍하게 뜯어 먹은 탓에 후일 그가 휘문학교를 세웠을 때 이들의 주요 수탈 대상이었던 평안도 출신들은 발도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민씨 일파의 패악질은 놀랍게도 일제 시대까지 계속되었는데, 가장 적극적인 친일파 중에 상당 지분을 민씨 일파가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이 자행한 친일 행위의 비중이나 악영향 역시 가늠할 수 없이 막대하였다.
명성황후가 나라에 끼친 가장 큰 폐악 가운데 하나는 국가의 각종 이권을 열강에 헐값에 팔아 버린 것이었다. 일례로, 알렌의 꼬드김에 넘어가서 미국에 단돈 2,700원에 팔아넘긴 운산금광의 채산성이 4,000만원 정도였다. 국채보상운동이 갚고자 했던 국가의 빚이 1,300만원 정도였으니 저 금광만 잘 관리했다면 국채보상운동은 애초에 없어도 됐을 것이며 미국인 알렌만 좋은 일 시킨셈이 되었다.[24][25]
다만 운산 금광의 경우, 2,700원에 팔린 것이 아니라 일시금 25만원에 년간 25,000원을 받는 조건으로 25년간 특허권을 준 것이 확인되었다.# 물론 2,700원보단 많지만 여전히 파낸 것에 비해 터무니 없이 적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게다가 그 돈 다 받지도 못했다
역사학자들의 해석 중에는 명성황후의 역할은 고종의 대리역이라는 해석도 있다. 철저한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아버지와 대립한다는 건 고종 입장에서 부담이 큰 일이다. 마찬가지로 대원군의 입장에서도 임금에게 직접 맞서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때문에 고종과 흥선 대원군은 직접 맞서는 대신 명성황후를 통해 싸우게 된다. 마치 강대국들이 직접 싸우기 부담스러우니까 대리전을 수행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최근에는 이노우에 공사가 명성황후에게 거액의 뇌물을 제시했으나 거절당했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는 일본의 금전 제공과 그에 따른 일본의 영향력 확대, 또 일본에 빚지는 것을 사전 차단한 것으로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덧붙이자면 당시 일국의 왕비로서 일본의 차관을 받기로 하는 결정은 딱히 타국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일이 아니므로, 아마도 명성황후 자신이 러시아 등 외세의 힘을 끌어들이는 와중에도 일본만은 믿지 않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받지 않은 것으로 보거나, 혹은 대여금(차관)은 나중에 갚아야 할 돈이므로 굳이 받지 않은 것이라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7.1. 사치[편집]
사치로 나라를 파탄으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서태후와 비견되기도 하지만, 사실은 서태후가 차라리 낫다. 서태후는 사치에 들이는 돈을 정하여, 정해진 범위안에서 사치를 했고 다른 예산은 건드리지도 않았다. 비록, 결과는 나빴지만 이화원 건축이나 해군 예산[26] 등 나름대로 국력 과시를 목적으로 쓴 지출이었으나 명성황후는 국력 신장 그딴 거 없고 그냥 돈만 보이면 다 써 버렸다. 더구나, 인구가 20배, 재정의 차이가 30배 정도인 조선과 청의 사치의 스케일은 비슷하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라면 명성황후가 얼마나 사치를 했는지 알 수 있다.
거기에다 여흥 민씨의 수탈까지 더해져서 임오군란 때 민중들이 명성황후와 여흥 민씨들을 모두 죽여버리려고 했으며, 황현의 매천야록 서술에 따르면. 정치에 자신의 인척을 끌어들이고, 원자(순종)가 태어나자 허구한 날 잔치를 벌여 내탕금을 탕진하고 호조의 예산(즉 국고)까지 까먹는 막장짓을 저질렀다고 한다. 명성황후 살해 이후의 민중들의 반응도 서술하고 있는데, "외국인들이 남의 나라 궁궐에 무단침입해 국모를 죽였으니 분노해야 할지, 학정과 부패의 대명사인 민씨 일파의 수장이 죽었으니 기뻐해야할지 헷갈려" 웃을까 울을까 망설였다네 했다고…
그 사치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로, 접견실의 크고 아름다운 표범가죽 양탄자가 있다. 이것은 한국전쟁 때 미국으로 반출된 후 실종되어 그 행방이 묘연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가 아니고 바로 요기잉네? 수장 유물 목록에서 누락된 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있던 것이 발견되었다. 표범 가죽 107조각을 붙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확실히 웬만한 강대국의 군주들도 혀를 내두르고 급 버로우를 탈 것만 같은 표범가죽 양탄자의 위엄. 하지만 현실은 망국 크리.
그러나 사진의 것은 국립박물관 측에서 명성황후의 것이 아닌, 대한제국 시기의 물건이라고 밝힌 바 있다. 어째서 가짜 주장이 연속해서 나오는 거냐 링크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명성황후에 대한 다른 시각 항목에서 서술.
을미사변 1년 전 조선을 방문한 오스트리아인 여행가 헤세-바르텍 역시 명성황후를 신랄하게 깠다. 사치는 부릴대로 부리고, 주변의 관직은 자기네 일족에게 나눠주고, 고종의 시야를 차단해서 민생을 살필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고 비판했다.
7.2. 질투[편집]
남편인 고종은 후손이 많지만 정작 그 자신의 후손은 순종 말고 없었다. 외에 다른 아들이나 딸들은 모두 어릴 때 죽었고 순종은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 이 때문인지 후궁들에 대한 질투가 심했다고 한다. 고종의 다른 아들들인 완친왕, 의친왕, 영친왕의 생모들은 모두 명성황후의 질투에 의해 승은을 입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궐밖으로 내쳐진적이 있다.[27][28] 영친왕의 생모인 귀비 엄씨도 을미사변 이후에야 궁궐에 다시 들어왔으니…
7.3. 미화[편집]
1990년 중반, 찬란한 여명에서 열강들의 이권다툼에 정면으로 도전한 여걸로 묘사되며 빠가 확 늘어난 뒤에 1990년대 말, 뮤지컬 명성황후와 드라마 명성황후의 대박으로 인해 "조선의 앞날을 걱정한 국모"라든가 "열강의 이권다툼에 맞서 싸운 여걸"이란 식으로 마치 잔 다르크[29]처럼 묘사된게 이미지로 굳어저셔 빠들이 대책없이 미화하고 있다. 사실 영화, 드라마 계의 명성황후 미화는 60년대부터 내려온 나름의 전통이다. 1965년에는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라는 영화가 만들어진 바 있으며, 최근에는 명성황후를 미화하는 웹툰도 나왔다.
하지만 2011년 03월 07일 네이버캐스트 인물한국사의 댓글을 보면 언플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인식은 정말 곱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미디어를 통한 미화가 많은건, 어쨌거나 일국의 왕후라는 사람이 외국에서 온 습격자들에게 피살당했다는 것은 분명히 그 자체로 비극이기 때문이란 점도 있다. 그리고 나서 제대로 습격자들을 처단이라도 했으면 모르는데 것도 못했다니…
다만 여기서 그나마 긍정적인 점을 찾을 수 있다면 자신이 살해당함으로써 일제의 조선 침략 야욕을 극명하게 보여줬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한반도 역사상 가장 기막힌 타이밍에 죽은 사람. 물론 일제의 조선 침략 야욕이 밝혀졌음에도 딱히 달라진것도 막아내지도 못했으니 크게 의미는 없다.
어쩌면 명성황후의 역할은 크지 않았을 수 있다는 점을 염두해둘 필요는 있다. 여하간에 조선은 남성 우위 사회로, 대다수의 최종 결정은 명성황후보다는 고종이 주도하여 내려졌다. 이런점에서 명성황후 오오 거리는 빠나, 명성황후를 까내리는 까나 모두 명성황후가 마치 고종을 대신해 국정을 한것처럼 이해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결국 1차로 까여야할 것은 고종이요, 그 다음으로 까여야할 것이 명성황후라는 정도로 이해하면 좋다. 사이좋게 막장부처인건 변화는 없다 그리고 위의 지적과 더불어 조선왕조 내내(특히 말기로 갈수록) 대비나 왕비를 중심으로 한 외척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은 만만치 않았다는 점도 염두에 두고 균형있게 판단하도록 노력해야겠다. 명성황후 본인이 실제 정치적 최종결정은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궁중의 정치적 암투에서 차지한 역할과 남성 외척들의 역할을 균형있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로 인해 일각에서는 명성황후와 고종(즉 조선)이 서구 시민혁명의 형태로 무너지고 민주적 국가가 탄생하여 조선에 대한 철저한 가치판단이 민중에 의해 이루어졌어야 했는데 이 사건과 을사조약을 통해 망국의 군주와 살해당한 황후로 미화되어 조선에 대한 가치 판단에 감정이 끼어들 요소를 남겼다며 아쉬워하기도 한다.
7.4. 다른 시각[편집]
7.4.1. 옹호론[편집]
명성황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당시의 시대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보통 미디어에서나 사람들의 인식은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대립에 초점을 맞춘다. 이 과정에서 명성황후는 권력에 눈이 먼 왕비로 묘사되고, 고종은 아무 힘이 없는 무능한 왕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이를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권력투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게 된다.
우선 흥선대원군은 어디까지나 대원군이였기 때문에 언젠가는 고종에게 권력을 물려줘야 할 위치였다. 하지만, 대원군은 왕의 나이가 찼음에도 권력을 포기하지 않았고, 고종과 대원군의 갈등이 시작된다. 유교국가인 조선에서는 아무리 왕이라고 하더라도 아버지에게 대항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고, 대원군의 입장에서도 왕이 권력에 눈이 멀었다고 말하는 것과 왕후가 권력에 눈이 멀었다고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명분에 맞는지는 뻔한 일이었다. 아버지에게 직접 대항하지 못하는 고종의 입장과 왕에게 직접 대항하지 못하는 대원군의 입장은 곧 명성황후를 통한 대리전으로 변하게 된다. 실제로는 조선의 실제권력은 고종에게 있었다. 가령 민씨 일가가 조정의 요직을 장악하기 시작할때 고종이 이를 묵인한 것은 고종이 허수아비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고종의 의지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권력기반이 없었던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충신들로 채워진 신하들보다 황후의 친인척들을 더 신뢰했던 것이다.
또 명성황후는 살해당하기 전 일본이 제시한 거액의 뇌물을 거부했다. 살해당했다는 것이 오히려 일제의 조선침략에 명성황후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는 근거가 된다. 그렇지 않고 그녀가 일제에 긍정적인 호응과 함께 협력했다면 잔인하게 살해할 이유는 전혀 없다.
명성황후 비판론자들이 명성황후의 사치를 비판하는 주된 근거는 매천야록에 있다. 문제는 매천야록은 신빙성이 높지 않다는 것이다.매천야록이 야사로 보기도 어렵다는 건 둘째치더라도 저자인 황현 선생은 생전에 명성황후를 굉장히 싫어했는데, 명성황후의 인사등용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는 설이 있다.일반적으로 명성황후의 가장 큰 실정이라 지적되는 사치, 부패, 향락, 매관매직보다 더 중하게 여긴 단점이 고작 여자가 정사에 관여한다는 거였다는 걸 생각해보면, 정치적 입장이 달랐을 것이라는 주장이 신빙성을 얻기도 한다. 물론 현대적 관점으로 과거의 시대적 가치관을 단정짓는 것은 삼가해야 하겠지만서도, 역사성 있는 인물을 고작 그런 이유로 단정지었던 인물의 의견을 어디까지 수용해야 될지에 대해서는 심히 의문스럽다.
그렇기에 같은 저자의 같은 책 속에서 어느 것은 믿을 수 있고 어느 것은 믿을 수 없는 것인지 어느 게 사실 이고 어느 게 허구인지 무조건 수용하지 말고 객관적으로 검증해야한다.[30]
또한 역사학자들도 매천야록을 고증을 위한 사료로 보기보다는 단순히 사실성과는 거리가 먼 당시에 이런 이야기도 있었구나 쯤으로 또는 당시 모습을 이해하는 여러가지 방법중에 한 가지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있다.그러나 어설프게 아는 것은 차라리 모르는 것만 못한다 했던가. 매천야록을 근거로 의견을 타진해나갈 때는 그 자체로 논리 오류의 덫에 빠질 것을 염두해야 한다.
야사는 야사라는거다
예를 들어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에는 매관매직에 대한 기록은 있어도 사치에 대한 기록은 없다. 조선에서 쓴 것도 아니고, 일제에 의해 쓰여진 책인데도 전혀 없다. 심지어 왜곡이 심해 정실로 인정받지 못하는 역사서인데도 말이다. 명성황후가 매일같이 연회를 베푼 기록에 대해서도 실제로 그 호화찬란한 연회에 참석했다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게다가 국립중앙박물관은 표범가죽 카펫은 명성황후의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해당 카펫이 명성황후가 쓰던 것이라는 것은 미국의 <라이프>라는 신문에서 나온 내용이며 명성황후가 썼다는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증거로 표범가죽 카펫에 새겨져있는 오얏꽃 문양은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꿀때 사용한 대한제국의 상징인데, 대한제국의 건립은 을미사변 2년 뒤에 일이다.[31] 당대 인물들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비숍의 여행기록(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왕후는 40세가 넘는 여인으로서 몸이 가늘고 미인이었다. 검고 윤이 나는 머리카락에다 피부는 진주가루이건 사치 아니냐?를 이용해서 창백했다. 눈은 차갑고 날카로웠는데, 그것은 그녀가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임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머리장식으로는 왕관을 쓰지 않았고 모피로 가장자리를 단 검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처음 만났을 당시) 그녀는 머리 위에 진주와 산호로 만든 장식을 단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았다. (한국을 떠나기전 만났을 때)
릴리아스 언더우드의 기록(Americal tract Society, 1904)
왕비 전하는 장식에 신경을 많이 쓰지 않는 것 같았으며, 또 거의 달지도 않았다. 북부지역의 젊은 여성들이 커다란 은 귀걸이를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조선의 여성들도 귀걸이를 하지 않았다. 왕비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제까지 그녀가 목걸이, 브로치, 또는 팔찌를 할 것을 본 일이 없다.
미국공사 부인 로즈 푸트
뛰어난 침착성과 무엇인가를 탐색해내려는 듯한 눈빛을 지닌 총명한 여인.
윤치호
왕후는 뛰어난 외교관이었다. 구미 열강과 이권 문제를 처리할 때면 왕후는 고종에 앞서 사안 하나하나를 세밀히 검토하고 이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는데, 그 논리가 치밀하고 정연해 외국 공사들이 하나같이 감탄하곤 했다.
영국 왕립 지리 학회 회원이기도 한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는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에서 명성황후와 흥선 대원군과의 정치적 대립에 대해서 언급하면서도, 명성황후를 '대화내용에 흥미를 가지게 되면 눈부신 지성미로 얼굴이 빛나는 지식인이자 우아한 자태를 가진 귀부인'으로 묘사하였다. 또한 어의였던 언더우드 여사의 기록에서도 명성황후는 우아하고 근엄했다고 표현하였다. 이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왕비가 우아하고 근엄했으며, 체형은 수척했고, 얼굴은 창백했으며, 눈빛은 날카롭고 초롱초롱했다고 밝히고 있다. 게다가 순박하면서도, 즉 순수하면서도 뛰어난 기지와 매력을 지닌 여성으로, 서양의 기준에서 볼 때도 완벽한 귀부인이었다고 밝히고 있다.(ISBN 89-7474-870-3) 또한 윌리엄 프랭클린 샌드는 《명성황후와 대한제국》에 “뛰어난 학문과 지성적인 강한 개성과 굽힐 줄 모르는 의지력을 지녔으며, 시대를 추월한 정치가이자 외교가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애쓴 분이었다.”라고 썼다.
결정적으로 명성황후의 사치설을 부정하는 가장 큰 근거는 고종의 비자금이다. 고종의 비자금은 신무기 구입, 전기 및 전화 설치, 은행 설립, 제중원 건립 등에 쓰였으며 일제강점기시절에는 대한독립군의 주요자금으로 쓰였다. 이 비자금은 매관매직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마련한 것인데, 황후가 사치가 심했다면 고종에게 이런 거액의 비자금이 존재할 수가 없다.# 매관매직으로 벌어들인 돈이라는 것이 논란의 여지는 될 수 있어도 명성황후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돈을 흥청망청 썼다는 건 거짓이다.
7.4.2. 비판론[편집]
위의 주장을 반박하는 주장도 있다.
먼저, 명성황후의 사치를 포함한 악행에 대한 기록은 매천야록 말고도 있다. 유길준의 증언이라든지 남가록(南柯錄) 등에서 상당수 확인할 수 있다. 단순히 가장 유명한 것이 매천야록 이었기 때문에 매천야록을 예로 드는 것이지, 명성황후의 사치를 포함한 악행이 매천야록에만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임오군란 당시 구식군과 시위대의 주목표는 왕비 민씨와 외척들이였고 때문에 왕비는 도주했고 민씨일파도 도주하거나 시위대에 잡혀셔 살해당했다. 민씨 일파가 얼마나 증오의 대상이었는지 보여주는 일이다.
매천야록이 현재 사학자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믿거나 말거나인 찌라시와 다름 없는 당시대에 야담들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과 이를 당시 기득권층인 사대부들이 어떻게 받아들었는지에 대해서 왜곡없이 서술했기 때문이고 이것이 매천야록의 가치를 폄하한다거나 신뢰성 제로의 허구라는 말은 아니다. 기존의 역사서 혹은 실록들 또는 당시에 조선과 교류했던 여러 외국의 자료 등에서도 기록되지않은 독특한 내용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당시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빠트릴 수 없는 소중한 자료임은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 무엇보다 사학에서 그렇게 중시하는 것이 1차 사료이다. 당대인이 그 시대를 겪고 서술한 자료가 1차 사료다. 매천야록은 그 조건을 충족한다. 1차 사료 자체가 진실이라 볼 수는 없지만 귀중한 사료인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매천야록을 '갑오경장 이전 기록은 들은 것을 그대로 수록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 자체가 잘못 전달되어 틀린 부분도 약간 있고 다소 과장된 부분도 적지 않다. 그리고 갑오경장 이후 사실에 대해서도 편년체로 기록한 내용이라 할지라도 황현 자신이 직접 보고들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 기술된 부분도 있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서 찾아보기 힘든 귀중한 사료들이 망라되어 있어서 한말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반드시 읽어야 정도로 가치가 매우 높다.' 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매천야록이 신빙성이나 공신력이 높아 역사적 가치라 높기 때문은 전혀 아니다.'거나 '매천야록에 이리 쓰여졌으니 당연히 그렇다고 독불장군처럼 자신의 극히 주관적인 의견을 타진해서는 많은 사람의 지지는 커녕 조롱만 당하게 될것이다.'는 식의 주관적 관점으로 일방적으로 비하해서도 안 된다. 그런 논리라면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도 믿을 부분이 별로 없을 것이다. 결론은 매천야록의 사실 자체가 잘못 전달되었다 하더라도 사료가 남아있는 이상 다른 역사서와의 교차 검증을 통해서 어느 정도는 사실로 밝혀진 부분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임이 마땅하며, 명성황후를 옹호한답시고 지나치게 매천야록을 격하시켜서도 안 될 것이다.[32]
특히 무녀인 진령군을 총애하여 국고 파탄난 책임이 컸다, 민씨 척신정치를 할때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었고 동시에 정치를 함에 있어서 무속과 같은 샤머니즘에 의존하는 추태는 왕조차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 명성황후의 본질적 문제였다. 민씨척족들의 부패와 사치, 매관매직의 중심에 명성황후가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는 국력이 열악한 현실로 급격하게 가던 조선의 재정을 파탄냈을뿐만 아니라 부패를 양산했다. 결과적으로 동학농민운동과 같은 민란을 제대로 진압이나 위무하지 못하는 사태에서 명성황후와 그 일족 정권이 생각한건 청나라에게 반란세력 진압을 명분으로 군사력을 빌리는 조선 역사상 말도 안 되는 일들 뿐이었다. 게다가 개항문제에서도 조선의 거의 모든걸 다 내주다시피했다. 특히 윤요호 사건과 강화도조약 이후 보여주는 고종과 명성황후의 추태는 그야말로 19세기 조선의 참담한 까막눈 현실을 보여줌으로서 조선자체를 멸망으로 이르게하는 상황까지 간다.
게다가 청일전쟁때에는 아예 자국내에서 외국군이 전면전을 수행하는걸 방임했으며 심지어 일본군과 청군에 각각 조선 정규군들 파병하여 서로 총질까지하게 하는 추태마저 부리는 결정을 하게하는데 원흉이다. 게다가 조선의 현실은 보지 않고 이이제이랍시고 나중에 러시아를 끌어들이는 청일전쟁과 같은 추태의 연속은 그녀 스스로 명을 재촉한 결과를 낳기도 했다. 자국영토내에서 외국군과의 싸움을 조장하고 심지어 방임한 왕비는 한국 역사상 그녀가 유일하다.
또 위에 올라와 있는 외국인들의 평가로 그녀를 쉴드치기엔 객관성이 부족하다. KBS 역사저널 그날의 명성황후편을 참조하면, 민영익을 치료해준 알렌은 사례로 10만냥을 받았으며 당장 위에서 명성황후에게 좋은 평을 한 릴리아스 언더우드도 자신의 책 조선견문록에 명성황후로부터 결혼 축의금을 100만냥 받았다고 기록되어있다고 언급된다. 1895년 기준 조선 정부 세입이 480만냥이었는데 이런 식이었다며 방송에서도 크게 비판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명성황후는 총명하다고 했다며 반박하기도 하는데, 현대에 명성황후를 까는 쪽도 그녀가 똑똑했지만 그 똑똑함을 민씨 일족 등만을 위해 사용했다고 비판하지 그녀 개인이 멍청하다고 까지는 않는다. 당대에도 여우같다느니 등등의 악평을 들었지언정 지능 면으로 까이지는 않았다. 종합하자면, 명성황후는 대체로 서양인들에게 친절했기 때문에 나쁜 평가를 받을 이유가 없고, 멍청하지 않았다는건 이미 당대의 반대자들조차도 대부분 인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총명하다면서 반박하는 것도 허수아비치기에 불과하다.
7.5. 민씨 척족과 친일 문제[편집]
인현왕후 민씨의 아버지였던 민유중의 후손들로 가깝든, 멀든 모두 명성황후의 친족들을 말한다. 물론 모든 민씨 척족들이 이런 짓을 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민영익, 민영환을 들 수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708명 중에 38명, 즉 17명 중 1명 정도가 민씨 척족과 연관되어 있다. 쉽게 말하면 권력자였던 민씨 일가는 러시아에게 들이댔다가 나중에 거의 대부분이 나라를 망치고 매국을 하고 결국 친일까지 했다. 자신들의 황후이자 친족을 살해한 자들한테!
민건식 (1879~?)
대한제국 탁지부 대신 출신의 민영기[33]의 아들이다. 1910년 이 후 남작과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가 되고 그 아버지 민영기도 중추원 고문이 되어 부자가 쌍으로 친일을 했다. 또 친일 유림 단체 조선유교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또 閔原健植라는 명의로 창씨개명했다.
민대식 (1882~?)
민영휘의 장남으로 아버지 민영휘의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아 은행업에 뛰어든 후 조선 실업계의 거물이 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 1935년 발간한 책자를 보면 그의 영향력을 알 수 있으며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 조선신탁회사 등에서 감사역과 경기도 도평의회 평의회원을 거쳤다. 또 사회 여러 단체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고 아버지 민영휘의 재산을 많이 받았으면서 정작 아버지의 장례를 초라하게 치러 손가락질을 받았다. 광복 후에도 살아있어 반민특위에 조사받았으나, 이 활동이 방해를 받으면서 무죄를 받고 풀려났다.
민병석 (1858~1940)
민영위의 손자이자 민경식의 아들이다. 이완용의 사돈이자 절친한 친구로 경술국적의 한 사람이다. 친러파였던 이완용과 함께 활동하다가 친일파로 갈아탔고 명성황후가 죽은 후에도 요직을 맡았다. 그렇게 친했던 이토 히로부미가 죽자 조문을 갔으며 결국 나라를 팔아먹었다. 그 공로로 자작이 되었고 막판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자리까지 올랐고 아내 심경섭과 함께 친일 단체 애국금체회라는 단체를 만들고 활동하다가 1940년 죽는다. 그의 아들은 대법원장을 역임하다가 2007년 사망한 민복기다. 그의 후손들은 재산이 국가에 몰수당하자 다른 친일파 후손들처럼 당당하게 국가에 소송을 낸 상태다.
민상호 (1870~1933)
민치억의 친자이자 민치덕의 양자로 원래 궁내부에서 근무하다가 외교관이 되었고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 남작 자리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의관이 되었다. 그의 후손은 일제에게서 받은 토지를 2007년 국가에 반환하라는 조치를 받았지만 오히려 소송을 제기했다.
민영규 (1846~1922)
민경호의 아들로 태어나 판서와 궁내부 대신을 지냈다. 일제로부터 자작을 받고 그의 작위는 1924년에 그의 손자 민병삼이 습작했다. 1960년 보도에 따르면 민병삼과 그 일가는 일제 강점기 동안 서울 종로에서 부유하게 살았고 손자 중 하나는 군 복무 중 사망했다고 한다.
민영기 (1858~1927)
민준호의 아들로 군부대신에 임명되어 서재필의 독립협회에 대항하는 황국협회를 결성하여 독립협회의 해산에 기여했다. 1905년 을사조약 당시 탁지부 대신으로 한규설[34]과 함께 대신들 중에서 유일하게 조약 체결에 반대했지만 1908년에 변절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부총재와 이왕직 장관에 임명되고 남작이 되었다. 또 1916년 세워진 대정실업친목회가 1921년 친일 단체로 변모될 때 회장을 맡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또 1923년에는 다시 이왕직 장관이 되었다. 그의 아들은 중추원 참의를 지낸 민건식이다.
민영린 (1873~1932)
민술호의 친자이지만 민태호에게 입양되었다. 그래서 순종의 첫번째 부인인 순명효황후 민씨와 남매지간이다. 1910년 10월 16일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았지만 1919년 아편을 빨다가 걸려서 박탈당했다.
민영소 (1852~1917)
민철호의 아들이지만 민규호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민씨 일족이라 빠른 승진을 거듭했는데 호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쳤다. 그러나 임오군란 때 목숨은 건졌지만 집이 불탔고 1894년에는 다시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홍종우로 하여금 김옥균을 암살하도록 했다. 1904년 농상공부 대신에 오를때까지 요직을 거쳤지만 일제로부터 자작을 받고 매국 공채 5만원을 받았다.
민영욱 (?~?)
민상호의 아들로 아버지의 작위를 습작했다.
민영휘 (1852~1935)
명성황후의 친척 조카로 민두호의 아들이다. 1877년 병과 급제 이후로 계속 승진과 요직을 거쳤다. 민씨 일족의 대표 거두라서 임오군란 때 집이 완전히 불타기도 했다. 민씨 일족의 중심인물이자 수구파의 거두로 1884년 갑신정변 때는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여 친일 개화 세력을 몰아내고 위안스카이와 결탁해서 사대당에 들어가 전권을 휘둘렀다. 그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도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여 진압하고 갑오경장 때 민씨 일족과 실각하여 유배되었지만 평양으로 도망가 청나라로 돌아갔다. 1895년에 이준용과 교환되어 귀국하고, 1905년에는 휘문고등학교를 세웠는데 이게 이미지 세탁에 한몫하고 있다. 1910년에는 자작 작위와 은사금, 매국 공채 5만원을 받았다. 민영휘는 경제에 밝아 쉽게 갑부가 됐는데 탐관오리로 있을 때 수탈한 재물을 잘 불려 일제 강점기 동안 조선 최고 갑부 중의 한 명이 되었는데 권력형 부정축재의 모습을 보여준다. 남이섬 소유자들도 현재 그의 후손들.# 2007년 그의 재산을 환수하기로 했지만 그의 후손들은 반발했고, 결국 환수 불가로 결정됐다.#
민형식 (1875~1947)
민영휘의 양자로 한 때는 을사오적 암살 거사에 거액의 자금을 대기도 했지만 변절한 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고 아버지 민영휘에 1936년 사망하자 자작을 물려 받았다. 그러나 아버지와 달리 어려운 사람 돕기를 좋아하고 의리를 숭상했으며 신민회 회원으로 민족 운동에 기부금을 내는 양면적인 모습도 있었다.
민형식 (1859~1931)
민영휘의 아들 민형식과 동명이인이다. 명성황후의 친족으로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를 호종한 공으로 병조참판과 형조참판을 지내고 병조의 요직과 삼도수군통제사 등 국방 분야의 요직을 모두 거친 거족이었다. 하지만 일제에게 협조하여 남작 작위를 받았다. 민형식에게는 아들 6명이 있었지만 모두 아편 중독자가 아니면 전과범이라 습작하지 못했다.
민종묵 (1835~1916)
대제학 민승세의 아들이지만 민명세의 양자가 되었다. 1874년부터 성균관 대사성, 병조참판, 이조참판, 대사헌 등으로 중용되고 갑신정변 이후에는 형조판서와 병조판서를 겸했다. 1905년 을사조약때는 조약 체결에 찬성한 대신들을 처벌한 것을 상주했지만 정작 일제에게 남작 작위를 받았고 2만 5천원의 은사 공채를 받았다. 1911년에는 매일신보에 한일 병합 1주년 축하문을 싣기도 하고 1912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민철훈 (1856~?)
민종묵의 장남으로 궁내부에서 일했고 아버지 민종묵이 죽자 1916년 남작 작위를 세습했다. 1920년에는 친일파 윤덕영 등이 세운 해동운행 설립위원장을 맡았다.
8. 호칭[편집]
보통 그녀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명칭으로는 '명성왕후', '명성황후', '민비' 3가지가 있다. 이 중에서 문제가 되는 명칭이 '민비'인데, 일단 1983년 이후, '명성왕후 민씨'나 '명성황후 민씨'와 달리 '성+비'로 된 '민비'는 공식명칭이 아니니 호칭으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학계와 대한민국 정부에서 결론을 내렸다. 일단 학계의 입장은, 명성황후보다 더 문제가 많았던 다른 왕비들을 김비, 이비, 박비라는 식으로 부르지는 않는 것처럼 통일성을 두자는 측면이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이것은 권장사항이지 법적으로 강제되는 것은 아니기에 명성황후만은 현재까지도 인터넷상에서 논란이 되곤 한다.
사실 공식명칭이 꼭 통칭이 되는 것은 아니며, 법적으로 대중들이 '민비'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1983년에 나온 결론은 공적인 매체나 공적인 장소에서 한반도에 있던 나라의 왕비의 호칭으로 '성+비'로 된 명칭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정부가 국민들에게 가급적 사용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한 것이지, 아예 사용하면 안 된다고 강제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사적인 경우에 그녀를 가리킬 때, 공식명칭을 사용할 것인지 공식명칭이 아닌 '민비'를 사용할 것인지는 순전히 개인의 호불호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명성황후 민씨는 보기에 따라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인물이라, '민비'란 호칭을 사용해야 할지 아닐지에 대해 그녀를 어떻게 보느냐는 감정적인 부분이 작용하고 있어 계속 논란이 되는 것이다. 비판적으로 보는 이들 대부분은 '민비'로 그녀를 호칭하는 걸 보면 이 논란은 어떤 명칭으로 그녀를 부르는지보다는 그녀를 보는 관점과 더 관련이 깊다는 걸 알 수 있다. 이것은 명성황후와 마찬가지로 성+비로 된 명칭이 호칭의 하나로 사용되었던 순정효황후 윤씨의 경우는 1983년 이후로 이런 논란이 거의 발생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 논란에는 크게 '민비는 대한민국에서 공식명칭이 아니니 사용하면 안 된다. Vs 대한민국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다. 사적인 곳에서 어떤 명칭을 사용하든 그건 개인의 표현의 자유다.'와 '민비는 일제가 만든 명칭이니 일제의 잔재를 청산해야 하는 대한민국에선 사용하면 안 된다. Vs '성+비'로 된 명칭은 조선에서도 사용한 것이다. 일제가 만든 것이 아니다.'의 두 가지 논쟁이 있다. 전자는 표현의 자유와 관련이 있고, 후자는 문제의 명칭을 누가 만들었느냐와 관련이 있다. 역사적으로 후자는 꽤 중요한 문제인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조선의 황족들의 칭호를 격하했고 이 당시 일제가 만들어 그들의 호칭으로 쓰인 명칭들은 법적인 처벌을 받는지와 관계없이 대한민국에선 일반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선 대부분 일제가 만든 조선의 황족들의 명칭들을 호칭으로 사용해야 할지 말지는 논란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후자의 논쟁에서 어떤 결론이 나느냐가 전자의 논쟁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위키에선 후자의 논쟁에 대한 양측의 주장을 간단히 서술함으로써 '민비'라는 명칭이 사적인 경우에서도 호칭으로 사용하는데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를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8.1. '민비'는 일제가 만든 통칭이다[편집]
생전에 사용된 그녀의 공식 호칭은 결코 '민비'인 적이 없었다. 당대 기록에선 대부분 중전, 중전마마, 왕비, 중궁전하 민씨 정도로 적혀 있다. 폐서인이 되지 않는 조선의 왕비 중에서 '성+비'로 만들어진 명칭이 잘 알려진 호칭의 하나로 사용된 사람은 명성황후와 순정효황후뿐인데, 그것도 대부분 일제강점기 이후의 기록에서 발견된다. 매천야록과 윤희순의 격문 '왜놈 대장 보거라'에 '민비'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데, 이 두 기록은 당대에 '민비'라는 호칭이 쓰였다는 걸 증명한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현재 전해지는 매천야록은 황현의 후손의 필사본으로 1920~30년대에 쓰인 것이고 현재 전해지는 윤희순의 격문은 윤희순 의사 말년(1935년 사망 직전의 회고록)에 재 작성한 해평 윤씨 일성록의 기록이다. 원본은 당대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현재 전해지는 기록은 이보다 십년 이상 지난 뒤에 작성된 것이므로 단어 몇 개가 바뀌는 식으로 원본 내용이 그대로 기록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즉, 조선에서 '성+비'로 된 호칭으로 왕비를 부르는 건 거의 없는 일이었지만, 일제강점기에 '성+비'로 된 명칭이 왕비를 부르는 통칭의 하나가 되었을 거라는 추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민비 부정론자들은 조선과 일본의 호칭 체계를 비교해서 이런 명칭이 생겨난 원인을 이렇게 추정한다. 조선의 여성들은 통칭으로 통상적인 '이름'이 사용되지 않았다. 왕실 여성들도 존호나 지위명이 통칭으로 쓰였고, 후궁은 대부분 직첩명+성씨(또는 성+직첩명)이 통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일본의 호칭 체계는 조선과 다르다. 일본에선 여성에게도 통상적인 '이름'이 있지만, 일본 황실은 성씨가 없다. 그 때문에 황족과 결혼한 여성을 통칭할 때 주로 '이름+비', '이름+황후'가 쓰인다. 호칭 체계에서 두 나라가 같았던 건 군주의 정실 부인에게만 시호를 올렸고 이를 통칭으로 사용했다는 것 정도다. 일본은 조선을 강제병합한 후에 왕공족이라는 신분을 만들어 조선의 황족들을 집어넣었다. 조선 초기 이후로 왕비는 대비가 되지 않는 한은 존호를 받지 않았으므로, 일본 입장에선 명성황후와 순정효황후에겐 성씨 외에는 마땅히 '이름'으로 쓸 명칭이 없었다. 당시 명성황후에겐 고종이 준 시호가 있었지만, 조선을 병합하고 그 나라의 황족들의 신분을 격하시킨 상황에서 그 시호를 그녀의 '이름'으로 쓴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통칭으로 사용될 호칭으로 '성+비'로 만든 명칭이 생겼고, 그 후로 이 호칭이 일본인들이나 조선인들 사이에서 통칭으로 쓰이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8.2. '민비'는 일제가 만든 통칭이 아니다[편집]
왕비나 후궁을 호칭할 때 지위명, 시호, 직첩명+성씨(또는 성+직첩명) 등을 사용하는 건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경우다. 공식명칭이 아닌 명칭이 백성들 사이에서 사용되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다. 이러한 명칭들은 공식적인 게 아니니 사료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는 게 정상이다. 그러니까 폐서인이 된 왕비가 아닌 이를 '성+비'로 된 명칭으로 호칭한 경우가 사료 중에 하나라도 발견이 된다면, 당대에 백성들 사이에서 그런 명칭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최초의 여성 의병장인 윤희순이 지은 격문 <왜놈 대장 보거라>에서 보면 '더욱이 우리의 민비를 살해하고도 너희 놈들이 살아서 가기를 바랄쏘냐.'라는 부분이 있다. '민비'라는 부분을 '국모'로 쓴 경우도 있는데, 독립기념관의 기록과 국가보훈처 대표블로그에서는 '민비'라고 쓴다. 그리고 매천야록에 그녀를 가리킨 호칭의 하나로 '민비'가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매천야록 공식 국역 자료) 2013년에 발생한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논란 등을 들어 번역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할 사람은 원문을 찾아보기 바란다. 분명히 '민비閔妃'라고 되어 있다. 매천야록은 그 특성상 거기에 실려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는 맹신 할 수는 없는 자료지만, 그건 책에 실린 일화의 신빙성 유무 때문이니 호칭에도 적용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윤희순 의사와 매천야록의 저자 황현은 둘 다 양반으로, 명성황후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고 해도 당대에 아예 없는 명칭을 새로 만들어서 호칭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낮다. 특히 윤희순의 <왜놈 대장 보거라>는 명성황후의 죽음에 대해 일본에게 분노해, 조선 사람들이 가만히 보고 있지 않을 테니 좋은 말로 할 때 너희 나라로 가라고 경고하는 내용이다. 둘 다 현재 전해지는 기록이 원본이 아니며 이 기록들은 조선이 멸망한 이후에 작성된 거라 원본 내용 일부가 왜곡되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있는데, 또 다른 필사본이 발견되지 않았으니 왜곡된 게 맞는지, 왜곡된 부분이 어디인지 확인이 불가능하다. 민비라는 단어가 원본에 있는 것일 가능성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는 말이다.
9. 2차 창작물에서 나오는 묘사[편집]
명성황후 민씨의 실체를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명성황후(드라마)는 명성황후 민씨를 미화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앞서 말한 드라마 이후 명성황후(뮤지컬)에서 미화의 정점을 찍는다.
조선총잡이에서도 나온다. 조선총잡이에선 이전의 명성황후 드라마와 달리 미화없이 사실에 맞게 표현했다. 조선총잡이를 맡은 감독은 공주의 남자를 감독했던 사람인데, 여기서도 수양대군과 한명회를 사실에 맞게 묘사한 바 있다.
에가와 타츠야 작가의 만화 《러·일전쟁 이야기》에서는 저렇게 못생긴 면상으로 등장한다(…). 오른쪽에서 사자후를 내지르는 사람은 흥선 대원군.
한편 좌익(말 그대로 업계 최좌익)성향인 야스히코 요시카즈 작가의 왕도의 개에서는 기품있지만 무시무시한 인물로 등장. 청나라 측 고문으로서 조선을 제 안마당처럼 여기는 위안스카이조차 그 면전에서는 쩔쩔 맬 정도로 만만치 않은 위엄을 지녔지만, 정작 백성은 굶주리는데 불꽃놀이 같은 대규모 행사를 벌여 국고를 탕진하는 것은 물론이요, 나름대로 동아시아의 평화를 추구하던 김옥균을 암살하고, 조선으로 실려온 김옥균의 시체를 토막내어 대원군이 보라고 양화진에 걸어놓는 등 잔혹한 왕비로 묘사된다. 어느 쪽이던 일본에서는 좋게 보지 않는 듯. 같은 만화에 함께 등장하는 고종은 명성황후와 위안스카이에게 눌려 지내는 완전 쪼다에 무능력자로 나온다.
[1] 언론 등에서 그녀의 죽음에 대해 시해당했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단어는 명성황후의 죽음에 사용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단어로 이 단어를 사용하는 건 잘못된 것이다. 시해 문서 참고.[2] 그 다음으로 유명한 왕비가 바로 장희빈 시리즈에서 빠질 수 없는 인현왕후, 그 다음이 문정왕후인데 정치에 관여하고 불교를 숭상한 탓에 이 사람도 만만치 않게 까인다. 다만 정치 관여야 문정왕후 본인이 수렴하는 입장이니 당연한 일이고 불교 숭상이야 사대부 입장에서야 못마땅하겠지만 국가가 무너질 정도로 무리하게 힘을 실어준 것도 아니고 유생들의 행패를 저지하고 세종도 시행한 승과를 시행한 정도인데 깔 이유도 없는 분야다. 문정왕후가 주로 까이는 것은 측근비리와 사림을 혐오한 나머지 측근들에게 의존하여 정치를 했고 부정부패의 심화로 인하여 민생이 개판이 된 점이다.[3] KBS2의 명성황후에서 애국자에 가깝게 미화되었다. 이미연 주연(중반에 최명길로 교체)의 이 드라마가 흥행하면서 당시 상당수의 어린이들이 명성황후가 나라를 위해 일본에 맞서다 죽은 것으로 잘못 인식하게 되었다.[4] 찬물 마셔도 이를 쑤신다는 양반에 대한 고사를 생각해보자.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 자기 의관과 체면이 더 중요한 것이 조선 양반이고 왕실 및 지배계층인데, 사진 촬영을 저렇게 대충 입으며 한다???[5] 조선시대엔 기생과 같은 특수한 경우(기생들은 기명을 사용하므로 이에 기록된다.)를 제외하면 사서에 기록되지 않고, 여성은 당연히 이름을 갖고 있으나, 다른 명칭으로 불릴경우가 많고, 남성보다는 평소에 이름을 사용하는 빈도가 낮아 보이며, 족보에도 결혼을 하면 이름이 적히지 않고, 남편의 이름만 기록되어 추정이 어렵다. 그나마 소설이 출처인 자영이라는 이름도 아명으로 전해진다.[6] 다만 정비석은 창작이 아니고 어느 연구자의 이야기를 듣고 적었다고 한다.[7] 참고로 남연군 - 흥선대원군 - 고종 - 순종 이 가계는 4대에 걸쳐 여흥 민씨와 혼인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어머니, 부인, 며느리, 손자며느리가 모두 일가 친척인 셈이다.[8] 항문폐쇄증 증상으로 추정컨데 묘안증후군으로 추정된다.[9] 승정원 일기에는 大便不通之症이라고 쓰여 있다. 이것이 묘안증후군의 증상인 항문폐쇄증인지 단순한 소화불량인지는 추가바람[10] 정치적 파트너로든 실권자로든 영향력이 무시 못할 정도였다는 것 자체에는 그다지 이견이 없다.[11] 그런데 이 과정은 곧 고종의 친위세력 성립 과정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 시기 민씨 일가의 나이나 연차 등의 문제도 있어서 당상관 정도의 품계가 거의 없었다.[12] 이는 민씨의 피난길에 궁녀들이 떼로 죽은 일이 있어, 이 때 죽은 줄만 알았다는 설이 신뢰를 받고 있다. 물론 살아있어도 돌아오지 말라고 국장을 선포했다는 설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겸사겸사[13]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한 이후 발등에 불이 떨어진 고종이 사방에 구원을 요청한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 중 한명으로 독일의 빌헬름 2세가 있었는데 빌헬름 2세는 고종의 간절한 구원 요청에 조선 사정에 좀 관심을 보이긴 했지만 독일은 비스마르크 시절엔 해외 진출 자체에 관심이 없었고 빌헬름 2세 시절도 동북아시아에서 집적거릴 여건은 안 돼서 소득은 없었다.[14] 훈련대 병사들과 순검들간에 싸움이 붙었다는 말도 있지만 결정적인 사건은 훈련대의 후원자인 박영효가 반역죄로 몰려서 일본으로 망명하면서였다.[15] 시위대는 편성기 겨우 3개월째인데다가 무기와 탄약도 빈약했다.[16] 일본 경찰관이 사살했다고 함.[17] 호레이스 앨런을 비롯한 구미의 인사들이 고종을 미국 공사관으로 탈출시키려고 한 사건인데 일본은 구미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는데 우리가 간섭하는게 뭐가 문제냐?란 논리로 미우라와 낭인들을 석방시켰다.(...)[18] 소설 속에서는, 이시즈카 에조가 작성한 '한성공사관발 제 435호 전문'으로 묘사된다. 물론 이 대목은 작가의 상상이 가미된 허구.[19] 유길준이 미국인 은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흥선대원군이 일본대사관에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왕비 암살을 도와달라고 했다고 폭로했다.[20] 유길준은 40년지기 친구 윤치호가 일기에서 유길준이 낭인들에게 협조했다고 기록했다. 친구 덕에 강남 아니 지옥간 셈.[21] 참고로 이준용은 명성황후 때문에 죽을 뻔한 적이 있다.[22] 러시아의 차르 체제나 독일의 카이저 체제와 같은 전제황권을 추구했다고 한다. 민씨 일가가 친러파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고종 자체가 왕권 강화에 관심이 많았다.[23] 남이섬이 이사람과 연관이 있다.#[24] 고종은 대한제국기 알렌의 소개로 미국 전기회사 (에디슨의 회사)에 전차와 전기에 대한 권리를 팔아먹기도 했다. 민영화의 시초라 할 수 있을 것이다.[25] 다만 상황으로 봤을 때 어쩔 수 없다는 의견이 있다. 빠른 개혁을 하려면 많은 예산이 급하기 때문이다. 열강들이 수없이 간섭하는 상황이기도 했다.[26] 사실 청일 전쟁에서 청 해군의 패전은 구시대적 전술의 문제였다. 운도 많이 작용했다. 그리고 황해 해전 후반부에 청국 전함 정원이 발포한 12인치 포탄이 일본 해군 기함 마츠시마에 명중하고 고작 1발을 맞은 일본 기함이 기능 정지를 하는 바람에 일본 함대의 기동 그 자체가 정지되어 버린 일이 있는데, 만약 해전 초반부부터 청국측의 12인치 포탄이 일본 기함에 운좋게 맞았다면, 해전의 결과는 뒤집어졌을 지도 모르는 일. 덤으로 일본해군이 올린 그 많은 명중탄들은 정작 포탄의 위력이 너무 약한 47mm탄이 절반 넘게 차지하고 있어서 장갑방어가 잘 되어 있던 청국해군의 군함들에게는 상처도 못냈다. 황해 해전에서 일본측이 침몰시킨 청국 군함들은 모두가 장갑판이 없는 함들이었다.[27] 성종 시절에 그러다 쫓겨난 왕비가 하나 있었던 것처럼 왕비가 후궁에 대해 질투하는 행동은 나쁜 행동으로 여겨진 사회가 조선이였다. 당장 칠거지악 중 하나에 '질투가 심한 부인'도 포함되어 있다.[28] 다만 칠거지악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질투의 죄악은 조선 말에 의미가 사라진다.[29] 잔 다르크에 대한 모욕이다. 실제로 조선의 잔 다르크라며 명성황후에 대한 전시회를 열었던 사실이 몇몇 커뮤니티에서 알려지자 댓글들 대부분이 비난하는 내용으로 쓰여지기도 했다. 1, 2, 3[30] 이러한 검증을 거치지 않은 자료를 근거로 주장하는것은 '"사이비 사학자"'들이나 하는 짓이다…[31] 또 카펫에 쓰인 표범가죽은 조선표범이 아닌 중국표범이었다. 중국 표범은 저렴한가? 이 무슨 도를 넘은 서술이…[32] 그러나 매천야록의 신빙성을 역설하는 것과 별개로 이 항목 내에선 다양한 정황들을 근거로 명성황후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유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천야록의 신빙성에 대한 갑론을박은 소모적이고 무의미한 언쟁만은 아니다.[33] 아래 항목에 있는 민영기[34] 그는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남작 자리도 거절했다. 1930년 죽을 때까지 민족 독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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