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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즈카 에이조(石塚英藏)' 의 명성황후 시해 보고문서 실체 對 日本史
2006.12.15. 18:01
http://kosskosa.blog.me/40032094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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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즈카 에이조(石塚英藏)' 의 명성황후 시해 보고문서 실체
작가 김진명씨는 "황태자비 납치사건"을 저술하여
조선왕조 최대의 비극을 초래했던 을미사변에서 명성황후 최후를
가장 리얼하고 흥미위주로 다루고 있는 몹씬을 그는 실존해 있었던 그 당시의 원 보고서를 발굴하여 테마로 잡았다고 했습니다.
가장 알고 싶었고 규명해졌어야 할 왕비 최후의 비극적인 일본 낭인들에 의해 난자(亂刺)된 그 상황이 내게는 평소부터 알고 싶었던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작가 김진명씨가 그처럼 대단한 어느 일본 외교관이 작성했다는 보고서를 '에조문서 435호'라면서 발굴한 과정을 그는 '오마이 뉴스'지를 통해
다음과 같이 기자와의 인터뷰를 했는데
장황하지만 그 전부를 여기에 재수록하면서 문제시되고 있는 항목에
내 개인적인 견해를 붙여두겠습니다.
① <작가 김진명씨 측으로부터 기자('오 마이 뉴스')에게 연락이 온 것은 약 한 달 전이다.
그는 자신의 소설 "황태자비 납치사건"의 결정적 모티브였던 '435호 비밀문서'의 존재를 추적하던 중 마침내 진본을 찾았다고 말했다. >
[ 김진명씨가 찾았다고 하는 에조문서 435호는 내가 그동안 조사해서 얻은 결과적인 견해는 그 괴문서는 세상에 전하지 않는 허구적인 작가 김진명씨의 창작품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실증되지도 않은 괴문서를 본인은 '황태자비 납치사건'에서의 주요 풀롯으로
아주 요긴하게 써먹었습니다.
그는 괴문서를 출현시키면서 괴문서의 정체를 작품을 쓰기 위한 가상의 것이란 말 하나 없이 그럴 듯하게 참람(僭濫)할 생각이 들 정도로 십분 작품 속에 깊이 개입시켜 일종 에조 문서 435호의 실상을 밝히면서 직품에 따르는 재미의 효과를 마음껏 누리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황태자비 납치사건'은 추리적인 소설이면서 김래성의 '백가면'이나 그 소설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유불란' 탐정의 소설 보단 재미는 전혀 없습니다.
에이조 이시즈카(石塚英藏)가 한국에 온 것은 시대적으로 보아 한 외교관의 자격으로 온 시기는 을미사변이 발발하기 몇 일 전에 한국정부가 그를 내부 고문관직으로 임명함에 맞추어 온 것으로 그는 한국 사정에 대해서 그 형편을 잘 알지도 못했을 뿐더러
고종을 비롯한 왕비에게 알현하여 본 일도 없는 그러한 일개 일본 무관이었습니다.
그냥 덤덤하게 몇 일 동안을 지내고 있는 찰라에 10월 8일 대사건을 그는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경복궁 내의 왕비 처소인 옥호루(玉壺樓)에서 왕비가 일본 낭인배의 급습을 받고
비참한 최후를 맞은 사실도 그 당일(當日)에 그는 알고 있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위급했던 한국 정부 대궐 내에서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자행된 사실여부도 알고 있지 못했었던 그에게 사변 직후 스에마즈(末松)는 총리대신 사이온지(寺園)의 명령을 받아 때마침 한국에 나가있는 '에이조'에게 사건의 전말을 조사해서 보고해 올리라는 급전(急電)을 받고 영문을 모르는 '에이조'는 주섬주섬 주위의 떠돌고 있는 소문,
일부 낭인들을 족쳐서 줏어들은 가당찮은 얘기들을 모아서 보고서 형식을 갖춘다는 것이 그만 일개 서간문 형식의 문서를 꾸며 10월 9일자로 본국에 발송했던 것입니다.
사이온지는 먼저 주한 일본공서 미우라 고오로(三浦梧樓)에게 한국에서 벌어진 중차대한 이 사건의 전말을 숨김없이 보고하라는 독촉을 전달했지만
미우라 공사는 은폐하여 일본인은 전혀 이 사건에 관계한 사실이 없다고 기만하면서
횡설수설로 일관하는 것을 미우라 공사의 사건에 개입된 그 사실을 다른 차원에서 알아보고자 스에마즈에게 사건 전말을 다시 조사해서 보고하도록 지시했고
스에마즈는 한국 내부 고문관의 자격으로 한국에 나가있는 '에이조'에게
사건시말을 조사보고하도록 급전을 보냈었던 것입니다.
어쨌거나 '에이조'는 상부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서 그 나름대로 급조(急造)한 자신의 작성 간찰을 스에마즈에게 보냈던 것입니다.
이른 바 이것이 '에이조'가 을미사변이 발발한 그 다음날 본국의 스에마즈 고위층에
간찰 형식의 원문입니다.
'에이조'가 초안한 을미사변 관계의 보고문은 이것 한 가지 외엔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와중에 김진명씨는 소설 가운데에서 '에조 문서' 435호를 등장시켜
고의적으로 '에조' 문서의 존재를 입증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던 흔적이
이곳 저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소설 속에서 허구적으로 433호, 434호 따위의 암호도 아닌
헛된 에조 보고문서를 세상에 실존하고 있는 양 이야기를 남발하고 있는 것
그 자체의 진의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김진명씨는 엉뚱하게도 '에이조'의 신분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왕비를 시해하기 위해 결성된 낭인배의 한 사람이라고 까지 헛된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가 맡고 있었던 한국정부 내부 고문직은
위장술에 불과한 헛된 직분이었다고 되지도 않을 망언을 서슴치 않는 그의 방자스러움에
혐오와 전율을 느낄 뿐입니다.
② <'에조 보고서'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7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철저하게 숨겨져 있었다.
이 보고서를 맨 처음 찾아낸 사람은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邊健太郞, 1905∼1977).
그는 1966년 2월 " 일한병합소사(日韓倂合小史) "를 이와나미(岩波書店)에서 발간했다.
그는 이 저서에서 "사체 능욕"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썼는데,
이것이 바로 그후 국내 역사학계에서 거론되기 시작한 '명성황후 능욕설'의 원조가 됐다.
야마베 겐타로(山邊健太郞)는 일본 굴지의 근대사 연구의 태두(泰斗)입니다.
그가 '에조' 문서-실상 일본외교문서의 그 수많은 문건 중에 '에조 문서'라고 남아있는 것은
단 한 건도 없습니다.
야마베도 자신의 저서 '일한합병소사'에서 '에조'의 보고문을 다소 참고해서 쓰고 있지만
그는 '에조 문서'란 용어를 쓰고 있진 않았습니다. 또한 야마베가 인용하고 있는 조선 왕후 시해사건에 결정적으로 이른 바 '에조'의 글을 강조하여 수록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에조'가 '스에마즈'에게 보낸 보고문 내용 자체가 너무 구체적이지 않고 그가 사건 현장에서 이미 숨을 거둔 조선 왕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만행 따위를 직접 목격하고 쓴 글이 아니기 때문에 이 내용의 신빙성은 사실적으로 알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런 일들을 사건에 관련했던 낭인들 일부 사람들에게 전해들은 그 자체를 거르지 않고 자신의 서간문에 썼을 뿐 사실 여부를 캐낼 수 있는 어떤 확실한 묘사같은 것이 많이 은폐되어 있음을 볼 수 있으니까요.
야마베도 역시 아직까지는 '에조'의 글이 세상에 전해진 바 없었던 것을 알고
그가 조선 땅에서 일어난 을미사변을 다룬 한 장(章)에 '에조'의 글을 참고자료로 활용했을 뿐 야마베 본인의 어떤 견해도 이 책 속에는 써놓고 있지 않습니다.
'에조'의 서간 내용은 비록 '야마베' 한 학자만의 저술 가운데에서 언급되어 있진 않습니다. 나는 일본 외교문서를 비롯 여타 이 관계의 문건에서 '에조'의 글이 부분적으로 인용되어 쓴 글이 있었음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아래 소개의 글을 유심히 살펴봐 주십시오.
" 왕비는 일본인에 의해 옥호루(玉壺樓)에서 살해되었다.
그러나 일본인은 왕비의 얼굴을 몰랐으므로 확실히 왕비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궁녀와 왕태자 이척(李 )을 연행하여 확인시켰던 것이다.
이렇게 살해한 후 사사 마사유키는
왕비의 몸에 달려있는 향(香)주머니와 기타 귀중한 물품을 빼앗아 가고
다른 난입자(亂入者)도 또한 왕비 방에서 각종 물품을 빼앗아 갔다.
(<王妃殺害> 諸第 57號)고 우치다는 보고하고 있다.
더구나 왕비를 끌어내어 2, 3 군데 인상(刃傷)을 입히고
또한 발가벗겨 국부검사(局部檢査= 可笑又可怒-原注)를 했다고 까지 전해지고 있다.
(<日本의 韓國倂合> 야마베 켄타로오(山邊健太郞) 太平出版社 1966년. pp. 51~52)
그때 미우라는 입궐하여 국왕을 알현하고 있었다.
범인들은 사후 처리의 지시를 긴급히 요구했으므로
미우라는 알현 도중에 자리를 떠나 왕비의 사체(死體)를 확인하고
하기하라에게 급히 치우라고 명령하고 다시 알현실로 되돌아가고 있다.
(<太山巖> 第4卷. p. 432)
그래서 하기하라는 왕비를 옥호루 동쪽 정원에 장작을 쌓아 석유를 끼얹어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그것은 죄악의 증적(證迹)을 인멸(湮滅)하기 위해서(<王妃殺害> 公信 第 98號)였다. "
" 범행 현장에는 조선인은 물론, 맥이 다이와 러시아 기사인 사바틴이 함께 있었으므로,
일본인의 범행을 자국(自國)의 영사(領事)들에게 속히 보고했다.
이들의 보고로 진상은 곧 퍼져갔으며 미우라의 처리방책은 파탄을 본다.
그래서 사건 당일 오후 미우라는 약간 어조를 바꾸어 사이온지에게 보고하였다.
사건은 표면 상 조선인의 일이나 이면(裏面)에서 다소의 일본인이 가담하였기 때문에
실은 본관(本官)이 묵시(默視)했던 것이며,
러시아와 조선 왕비의 결탁이 일본의 정책에 위기를 초래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대항하는 대원군의 결기(決起)에 일부 일본인이 가담한 것이다.
단 우리 군대는 진정코 진무(鎭撫)를 위해 출병했을 따름이며
결코 그들을 방조(傍助)하지 않았다.
또 일본 민간인도 역시 난폭한 짓을 한 사실은 없지만
장래 이 때문에 외교상의 곤란을 야기(惹起)할 염려가 있다면,
본관은 처벌을 받아도 유감이 없다고 하였다.
이 보고서에서는 미우라 책의 원형의 첫째, 둘째 원칙을 무너뜨리고 있지는 않지만
파탄(破綻)을 보이기 시작한 곳은 일부의 일본 민간인이 대원군의 요청으로
호위에 참가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정이 게재되어 있다.
사건 직후 구미 각국 공사들이 고종을 알현하고 그 길로 미우라를 방문하여 일문(一問)한다.
미우라는 앞서 말한 원형을 고집하여 궤변을 늘어놓았으나,
러시아 공사 웨버 등은 입궐하는 길에, 칼을 빼어 들고 왕궁에서 물러 나오는
일본 군민의 다수와 만났다는 것,
게다가 맥이 다이와 사바틴 등이 왕궁에서 일일이 목격한 바가 있다.
이는 어찌 된 일이냐? 하고 추궁하였다.
이에 대해 미우라는 대원군을 호위한 것은 일본군이 아니다.
일본 군대는 질서유지를 위해 출동한 것이며 부인을 학살한 사실은 보고에 없으며
인부 등의 약간의 일본 민간인은 혼잡을 틈타 섞여 든 자일 것이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열강 공사들은 일본 군민의 참가는 엄연한 사실이며
이 사변은 자못 중대한 일이니 이대로 간과(看過)할 수 없다고 항의하여
미우라의 궤변은 통용되지 않았다.(<日本外交文書> 28-1 pp. 493-494)
맥이 다이 등이 목격한 것이 일본에게는 치명상이 되었다.
그것을 내부고문(內部顧問) 이시즈카 에이조오(石塚英藏, 1866-1942)는
공교롭게 어떤 미국인이 현장을 목격한 것을 보통 일반 조선인의 증언처럼 말살해버릴 수는
없다....살인의 일이므로 다소 빈 구석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는 바이나,
정도가 매우 심하다고 정부에 보고했다.
(<스에마츠 법제국장관(末松法制局長官) 완(宛) 이시즈카 에이조오(石塚英藏) 서간(書簡) >
국립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 (國立國會圖書館 憲政資料室) 소장.
<헌정사편찬회수집문서(憲政史編纂會收集文書)> 所收) "
김진명씨는 전후 사건보서에 연루된 여러 증거 자료들을 찾아 대조해 보지 않고
나름대로 자신의 주장이 가장 옳다는 듯이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은
여간 미흡한 우행(愚行)을 자처하지 않았던가 하는 말을 해두고 싶습니다.
③ <" 더욱이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이 같은 일본인인 나로서는
차마 묘사하기 괴로운 행위를 하였다는 보고가 있다.
전 법제국(法制局) 참사관이며 당시 조선 정부의 내부 고문관
(실제 보고서에는 '고문'이라고 적혀 있음-기자주)이었던 이시즈카 에조는
법제국장관 스에마쓰 가네즈미 앞으로 보낸 보고서에서
'정말로 이것을 쓰기는 괴로우나…'라고 서두에 쓴 후에 그 행위를 구체적으로 쓰고 있다. " >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이 '에조'라고 하는 것 같은데
이런 근거 없는 내용이 과연 '에조' 서간의 내용 가운데에서 어디에 나오고 있는 것인지
많이 혼란스럽니다.
그는 후사코 여사의 '민비 암살' 책자에서 보았다고 했는데
분명 이 책 내용 가운데에서 '에조'가 조선왕비 저해(沮害) 직후 그 현장에 있었다고 하는 부분은
나와있지 않습니다.
이것 역시 김진명씨가 조작해놓은 헛된 망상의 글이 아닌 다음에야
후사코 여사의 책까지 거론하면서 필요 없는 낭설을 왜 식언(食言)하고 있는지
그 의도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물론 '에조'가 사건 현장에 있어 가지고 자신이 목격했었던 그 현장기를 써 가지고
스에마즈에게 보냈다고 한들 이것 자체가 더할 수 없는 사건현장 목격기로서
자료적인 가치의 우월성은 남다른 좋은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은 두 말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잘 아시겠지만요. 이 사건에 연루되어 실제 행동했던 일본인들은 48명이었는데
이 가운데에서 '에조'라고 지칭하는 사람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밝히고 말고 할 것 없이 김진명씨는 뜬금 없이 이런 저런 사실이 아닌 그 자체를
교묘하게 오도(誤導)하면서 얽힌 실 타래기 풀려고 하는 듯 이상한 짓을 하고 있습니다.
굳이 '에조'가 한국정부 내부 고문으로 와 있으면서
자신이 들어 알고 있는 사건의 내막을 피상적으로 쓰면서
자신의 사건 이후 향후의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해서 상부에 올렸던 글에 불과한데
김진명씨는 이 내용을 너무 부풀려 허구적인 것들을 많이 포함시킨 그럴 듯 하게
그 소설 속에서 '에조' 문서 435호를 탄생시켰던 것입니다.
김진명 씨 자신이 '에조'란 한 인물의 사실적 규명을 이런 따위로 해결하였다는 그 바보스러움에
비소(鼻笑)를 흘릴 따름입니다.
④ <'에조 보고서' 전문을 찾아 헤매던 김진명씨는 쓰노다 후사코 여사의
"민비암살"을 정독하다가 그 행간에서 명성황후의 죽음에 '어떤 비밀'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을 번역한 김은숙 교수를 통해 후사코 여사로부터 대여섯 권의 전적을 소개받았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을 온통 헤집었지만
그는 도저히 문제의 '에조 보고서' 전문을 찾아낼 수 없었다.
마침 후사코 여사마저 "기억이 희미하다"며 한 발짝 물러선 최악의 상황이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김진명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동경 히토츠바시 대학에서
외교사를 전공하는 권용석씨에게 보고서를 찾아줄 것을 부탁하고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권씨가 몇 권의 책과 자료를 보내왔다.
그 중에는 앞에서 기자가 거론한 "일본의 한국병합"도 있었다.
김진명씨는 이 책을 읽다가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는 문제의 '능욕' 장면 중 일부가 소개돼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그가 원한 것은 보고서의 일부가 아니라 전문(全文)이었다. >
먼저 김진명씨에게 묻습니다.
'에조'의 문서를 찾고자 한 원래의 의도는 무엇이었으며
과연 그 문서 속에 어떠한 내용을 보고자 열망했던 것입니까?
나는 김진명씨가 굳이 후사코 여사의 "민비 암살"이란 책자를 정독(精讀)하다가
그 행간에서 사건의 실마리(왕비의 최후, 시신에 얽힌 이런 저런 낭인들의 추태)를
찾고자 하였다고 했는데 대단히 미안하지만 후사코 여사는 그 책자에서
'에조'의 글을 한 두 줄 간략하게 인용한 것 외로는 그 글을 인용한 출전만이 들어있을 뿐
어떠한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진 않았습니다. (角田房子 『閔妃暗殺』p. 323)
과연 이 소략한 대목에서 김진명씨는 '에조'의 보고서(?) 전문(全文)을 꼭 찾아내야 하겠다고 하는
자긍심을 갖게 된 것일까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후사코 여사도 '민비 암살'을 저술할 적에 이 부분은
야마베 겐타로 씨의 "일한합병소사" 속에 수록된 그 내용을 다시 옮겨온 것에 불과했고
후사코 여사 본인이 직접 원래의 '에조' 글 자체를 찾아서 확인하고 자료를 인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과연 김진명씨가 '에조' 문서를 처음엔 관심조차 갖지 않고 간계 자료들을 찾던 중
어부지리(漁父之利) 격으로 굴러들어온 야마베,
후사코 여사가 이미 사계(斯界)에 공개한 그 흔해빠진 자료들을 소설 속에서 응용하려고 했지만
재료가 너무 단출하고 미흡해서 결국은 일본에 있는 권용석씨의 도움을 받아
'에조'의 서간문을 받아보기에 이르른 것입니다.
누구의 도움을 입었던 이 '에조' 서간문은 김진명씨 자신이 일본열도 전국을 누비고 헤매면서
천신만고 끝에 발굴해낸 개가(凱歌)의 소산물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1966년에 야마베 교수가 발굴하여
자신의 저술서 "일한합병소사"에 그 서간 전문은 수록하지 않고
필요한 부분 일부만 옮겨 '에조'의 실체를 세상에 알맀습니다.
주지(周知)하다 싶이 이런 상황으로 보아선
'에조'의 실체는 그 서간문 한 건으로서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게다가 야마베씨의 '일한합병소사'가 한국으로 건너와 번역까지 되어 읽히고 있었던 것도
꽤 오래 전의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오매불망(寤寐不忘) 찾아보고 싶어했던 '에조'의 서간문 내용을
본인이 숙독(熟讀)한 결과 과연 그 내용 속에서 무엇을 규지(窺知)했고 얻고
감동과 적개심 받은 부분은 어떤 부분이었습니까?
⑤ <그러던 어느 날 김진명씨는 문득 짚이는 것이 있어 "일본의 한국병합"을 다시 꺼내들었다.
문득 겐타로가 '에조 보고서'를 발견한 장소를 어딘가에 밝혀놓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에조 보고서'가 언급돼 있는 이 책의 223쪽을 보자 주석이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부리나케 주석 번호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출전이 밝혀져 있었다.
"국립국회도서관(國立國會圖書館) 헌정자료실(憲政資料室) 장(藏)
'헌정사편찬회문서(憲政史編纂會文書)'. >
이것 역시 이미 학계에 널리 알려진 것이고
그가 손수 일본 전국을 '에조' 문서 찾기에 급급했다고 자신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넌센스일 뿐입니다.
지금도 이 자료가 필요로 할 것 같으면 일본 국회도서관에 우편으로 요청하면
2, 3일 이내로 집에서 편히 그 복사본을 받아보실 수가 있을 테니까요.
⑥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원인과 발단에서부터 실행자와 사후 대책까지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는 '에조 보고서'의 분량은 각 2쪽씩을 차지하고 있는
목차와 서문을 포함해 모두 12쪽이다.
아울러 보고서는 (1)발단 (2)명의 (3)모의자 (4)실행자 (5)외국사신 (6)영향 등의
소제목이 붙어 있는 6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
뒤에 전문-일문-, 한국어 번역-을 소개하여 두었습니다.
그 전문에 간찰 내용의 r성이 전부 6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김진명씨는 이 전문의 내용을 필요로 하고 있진 않습니다.
이미 야마베 겐따로가 소개한 그 부분만이 필요로 했으므로
내용의 전문에 대한 분석 비판과 같은 언급은 단 한마디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것 자체가 '에조문서' 435호의 정식적인 보고서 형식의 것이라면
왜 야마베, 후사코 같은 분들이 원래의 출전을 그렇게 안 밝혀둘 까닭이 없습니다.
한 가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눈 여겨 볼 것은
이 간찰 자체가 사건 당시로부터 멀지 않은 그 당시의 것이라서
자료로서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겠습니다.
얼토당토않은 435호 따위의 보고서 형식을 취해서 한 가짜 문서를 창출했던
김진명 씨의 머리 회전은 기가 막힐 정도로 빠른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황태자비 납치사건' 속에 나오는 '에조문서' 435호의 실체는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작가 김진명씨가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자료 수집해서 쓴 글로 알고 있습니다.
참, 어처구니없고 기가 막힌 이 사실 아닌 사실을 아직도 사실인양
그는 언론매체에 거짓을 나팔 불고 다니면서 행패를 부리거나 온갖 추태를 일삼고 있습니다.
⑦ <한편 김진명씨는 '에조 보고서'와 관련해 기자에게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그의 발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모든 한국인들은 명성황후가 난자 당해 죽은 걸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
다만 '에조 보고서'의 존재를 접한 극소수의 일본인과 한국인 학자들만이
명성황후가 살해당한 뒤 시간(屍姦) 된 걸로 주장하고 있다.
나조차도 그런 기존의 해석에 따라 "황태자비 납치사건"에서 시간으로 묘사했다. "
그러나 그는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본 뒤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다시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 명성황후 최후의 장면을 기록한 유일한 문서인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명성황후가 시해 직전 즉 살아 있는 동안 능욕 당하고 불태워지면서 죽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명성황후는 시간(屍姦)을 당한 것이 아니라 강간(强姦)을 당한 것이다. "
▲ 에조 보고서
"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
(處刃傷).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
(웃을(笑) 일이다. 또한 노할(怒) 일이다)를 하였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다만 그들은 명성황후가 그렇게 칼에 찔려 즉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 김진명씨는 이렇게 반론을 펼쳤다.
" 그들은 최후의 장면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아니다.
나중에 궁녀 등에게 전해들은 얘기를 다시 전달한 것에 불과하다.
더욱이 '에조 보고서' 이외의 어떤 기록에도 '능욕' 부분은 나오지 않는다.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피해자인 명성황후와 가해자인 일본인들이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죽었고, 일본인들은 진실을 철저하게 은폐하고 조작했다.
가해자 중의 한 명이면서도 미우라 일파와 입장을 달리 했던 에조의 증언이
가장 진실에 가깝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일본인들은 명성황후를 시간한 것이 아니라 강간한 것이다.
진보적 역사학자로 알려져 있는 야마베 겐타로 조차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이 끔찍한 만행에 놀라 보고서 전문은 소개하지 않고
'사체 능욕'이라고 축소해서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한 주권 국가의 왕비에게 만행을 저지른 것과 그것을 은폐하고 조작한 것에 대해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
한국인들 역시 처참하게 능욕 당하면서 죽어간 명성황후의 원혼을 풀어줘야 할 책임이 있다. "
명성황후는 이미 일본 낭인들의 휘두른 시퍼런 칼 날에 맞아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옆으로 쓰러진 것을 두 서너 명의 낭인들이 합세해서 왕비를 향해 내리찍은 칼을 받고
순간적으로 운명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 낭인들은 조선 왕비의 죽어 쓸어진 시신을 앞에 놓고
망연자실(茫然自失)했을 것은 짐승이 아닌 인간들로서의 회오(悔悟)의 감정은 가졌을 것이다.
헌데 왕비의 시신을 가운데에 두고 김진명씨는 그들 낭인들에 의해 강간을 당했다고
열변을 토합니다.
이미 목숨이 끊긴 시신에게 성적 행위를 취하는 것이 '강간'이란 용어로 통용이 될 수 있을 것인지...
또는 '능욕'을 행했다고 하는 것은 사리에 안 맞는다고 부정하는 따위의 작가 김진명의 헤프닝.
그것을 규명한들 조선 왕비의 죽음 이후 캐내어야 할 까닭과 당위성은 무엇일까?
정신 빠진 작가 김진명은 생각하다 못해서 그의 소설 '황태자비 납치사건'(하권)에서는
이미 운명한 왕비의 그 뒤에 벌어진 추악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 민비는 강제로 저고리가 벗겨져 가슴이 훤히 드러난 상태로 머리채를 잡혀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낭인 하나가 거센 발길로 민비의 가슴을 밟고 짓이기자
또 하나의 낭인이 민비의 가슴을 칼로 베었습니다. 일은 그 후에 시작되었습니다.
왕세자를 불러 죽은 여인이 민비임을 확인한 낭인들은 모두 민비의 주위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조선의 가장 고귀한 여인을 앞에 두자 갑자기 숙연해졌습니다.
왕비를 시해했다는 기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조선 제일의 미녀를 앞에 두어서였는지.....
낭인들은 민비의 하의를 벗겼습니다.
한 낭인이 발가벗겨진 왕비의 음부를.....숫자를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몇몇 낭인이
결국은 바지를 벗고 성기를 꺼내 왕비의 희고 깨끗한 몸에.....
정액으로 얼룩진 조선 왕비의 시체를 앞에 놓고 낭인들은 대일본 만세를 불렀습니다. "
(황태자비 납치사건 2권 pp. 208~209 에서 전재)
더군다나 이 해괴망측한 내용은 '에조 문서' 435호에 소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번거롭지만 '에조'의 문서가 아닌 그의 간찰 전문을 여기에
소개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분명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가장 처음으로 보고했다는
에이조의 본국의 스에마즈에게 보냈다는 보고문서가
실존해있던 것인가를 집중 추적을 해보았습니다.
일본 국회의 헌정자료실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에이조의 관계 서간문 하나는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김진명씨가 기염을 토하면서 찾아냈다고 하는 에이조의 보고문서
433호, 434호를 비롯하여 그 중 압권이 될 수 있는 435호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확정을 지었습니다.
알본 반도를 통 털어 뒤졌어도 이들 괴문서(?)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관계 학자, 요로(要路)에도 문의했지만 에이조가 그토록 문서번호를 제 몇 호 호라고 까지
번호를 붙여서 보낼만한 위치의 외교관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은 도시 이해 못할 날조, 변조한 허구의 것이라는 실체가 들어난 것입니다.
에이조가 스에마즈에게 보낸 사건보고 형식의 서간 1통이 남아 있기는 한데
그 간찰이 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날 전송한 것이 아닐 뿐더러
1개월 여를 지난 11월 중순경에 보낸 것이 었고
그것은 김진명이 밝힌 대로의 그러한 내용과는 전혀 거리가 멀뿐더러 내용도 달라서
왕비의 시신을 벌여놓고 낭인들이 시간을 했다는 둥의 표현은
전혀 나타나 있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건의 경위와 왕비의 죽은 시체를 잠깐 국부를 헤집었다는 순간적인 표현이 담겨있는 것 외로는
이런 문귀 자체를 날조, 변조하여 김진명씬, 그와 같은 괴문서를 꾸민 것입니다.
날조한 괴문서?
참으로 치가 떨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한갖 억울하게 돌아가신 왕비를 모델로 하여 썼다는 이 소설이
고작 음난성을 유포한 일개 성애소설(性愛小說)로 바꾸어 썼다니
원통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그 사실 자체를 작가 김진명씨에게 그 문서의 원문을 보여줄 것을
여러 차례 촉구한 바 있었습니다.
작가에게 메일로도 여러 차례 원문 공개를 바라는 요구를 보낸 바 있었지만
그에게서 종내 무슨 답신을 받아본 사실이 없습니다.
나는 나대로 정말 어렵게 입수한 에이조가 스에마즈에게 보낸 간찰 내용에서
'사건 경위'의 내용을 번역했는바
김진명의 "황태자비 납치사건" 하권에 수록된 에조 문서 435호의 내용과 비교해서
분석을 해보았습니다.
천하에 해먹을 짓 없어 천인공노할 이따위 짓거리로 소설을 써서 치부(致富)한다 한들
작가 김진명씨의 작가적 운명은 곧 끝이 날 것으로 믿습니다.
" 황태자비 납치사건"를 읽으신 여러 독자들께서는 너도 나도 에조문서 435호에 담겨있는
왕비 시간의 부분적인 내용을 철저하게 믿고 있는 사실도 개탄스러웠습니다.
위에 보이는 것이 내가 찾아낸 진본(眞本) 에이조가 본국의 스에마즈 관방장관에게 보고한
보고문서 형식의 서간문입니다.
김진명씨는 원본 '에조' 서간에서 다음과 같이 이 부분의 내용.
[ 왕비를 이끌어내고 두 세 군데의 칼질로 칼에 의한 상처를 입히고 나서 옷을 벗기고
깔아놓은 요 위에 눕혀 옷을 벗긴 후에 국부(局部)를 검사하였습니다.
이것은 가히 웃지도 또한 성내이지도 않을 일이었습니다.(可笑又可怒)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름을 뿌려서 소실(燒失) 했습니다.
참으로 이것을 쓰기가 염려가 되었으며 차마 또 쓸 수는 없습니다.] 란 내용을 교묘하게도,
[ 스에마쓰 장관님, 정말로 이것을 쓰기는 괴로우나
건청궁(建淸宮) 옥호루(玉壺樓)에서 민비를 살해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보고를 드리고자 합니다.
민비는 강제로 저고리가 벗겨져 가슴이 훤히 드러난 상태로 머리채를 잡혀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낭인 하나가 거센 발길로 민비의 가슴을 밟고 짓이기자
또 하나의 낭인이 민비의 가슴을 칼로 베었습니다. 일은 그 후에 시작되었습니다.
왕세자를 불러 죽은 여인이 민비임을 확인한 낭인들은 모두 민비의 주위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조선의 가장 고귀한 여인을 앞에 두자 갑자기 숙연해졌습니다.
왕비를 시해했다는 기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조선 제일의 미녀를 앞에 두어서였는지.....
낭인들은 민비의 하의를 벗겼습니다. 한 낭인이 발가벗겨진 왕비의 음부를.....
숫자를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몇몇 낭인이 결국은 바지를 벗고 성기를 꺼내
왕비의 희고 깨끗한 몸에.....정액으로 얼룩진 조선 왕비의 시체를 앞에 놓고
낭인들은 대일본 만세를 불렀습니다. "
-「황태자비 납치사건」- 하권 pp. 208~209 에서 전재.
과 같이 완전 창작하여 장황하게 소개해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에조'가 '스에마즈'에게 보낸 서간, 또는 보고서(?)라고 보아지겠습니까?
그것을 규명하기 위해서 나는 당시 한국 정부 내부 정치고문으로 한국에 와있었던
'이시쯔카 에이조(石塚英藏)'가 '스에마쯔(末松)' 법제국장(장관이 아님) 앞으로 보낸
왕비사건의 진상을 보고한 서간문의 내용을 우리말로 풀어 소개하려 합니다.
다음은 원본 '에이조' 문서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韓國政府顧問이던 이시쯔카 에이조(石塚英藏)가
스에마쯔(末松) 法制局長 앞으로 보낸 王妃事件의 眞相을 報告한 書簡
書簡用 두루 마리[卷紙]에 먹으로 씀[墨書](明治二八年十月九日附)
(伊東 伯爵家文書 朝鮮王妃事件 關係資料)
[ 안녕하십니까? 이 땅[當地]에서 어제 아침에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는 벌써 대략 아시겠지오?
王妃排除 건은 時機를 보고 決行하자는 것은 모두가 품고 있었던 것이지만
만일 잘못하면 바로 外國의 同情을 일으키고 永遠히 諸國에 占할 日本의 地步를 亡失함이
必然한 것이므로 깊이 輕擧妄動하지 말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이번 사건에 대하여는 저는 먼저부터 謀議에 전혀 關與하지 않았습니다만
오히려 어렴풋이 그 計劃을 朝鮮人으로부터 전해 들어서 조금씩 알게 된 바에 의하면
局外者로서 그 謀議에 參與하여 심지여는 浪人들이 兵隊의 先鋒 역할을 했다는 事實이 있습니다.
그 方法은 輕率千万으로 거이 장난[兒戱]에 속하지 아니한다고 思慮되는데
多幸히 그 가장 꺼림칙한 事項은 外國人은 勿論 朝鮮人에게도 서로 알려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現 公使에 對하여는 조금 禮儀가 없는 느낌이 가나 일단 事實의 大要를 報告드리는 것이
職務 上의 責任일까 생각해서 아래와 같이 簡單히 말씀 드리는 바입니다.
1.發端
王妃排除의 必要에 대하여는 미우라(三浦)公使도 벌써부터 깊이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이것을 決行한 이유는「危急의 경우에 露西亞에 援兵을 要請한다는 約束」및
「訓練隊 解散의 計劃」을 宮內府에서 세웠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訓練隊를 利用한 것입니다.)
2.名義
訓練隊 解散、兵器沒收의 內議를 듣자 부득이 大院君을 앞세워
大內에 哀訴하고자 해서 侍衛隊에서 衝突하게 되었습니다.
王城 앞에 있는 守備兵은 이것을 鎭靜하기 爲해 四門의 警備에 從事했다고 말합니다.
3.謀議者
推察하오나 오카모토(岡本)가 主謀者인 것 같습니다.
大院君의 入闕을 斡旋한 것은 바로 同人입니다.
그 이외에 시바(柴)、크스세(楠瀨)、스기무라(杉村)가 密議에 參與했다고 합니다.
其他는 적어도 關與하지 않았습니다.
守備隊長 마오하라(馬屋原)같은 사람은 命令으로 實行의 任에 充當된 것 같습니다.
4.實行者
이 막된 짓의 實行者는 訓練隊 이외에 守備兵의 後援이 있었습니다.
(後援은 或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다만 守備兵 外에 日本人 二十 名쯤이 있었습니다.
구마모토(熊本)현 출신자가 多數를 占하여(漢城新報社 迹)
그들 중에 新聞記者 몇名 또한 醫師, 商人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洋裝, 和裝이 서로 섞여 있었습니다.
오카모토(岡本)는 大院君과 同時에 入城하여 實行의 任務를 맡았습니다.
守備隊의 將校, 兵卒은 사문의 경위(四門警衛)에 그치지 않고 大門 안으로 侵入했습니다.
특히 浪人들[野次馬達]은 깊이 안으로 들어가 王妃를 이끌어내고두
세 군데 칼질을 저질러(刃傷을 입히고 나서) 裸體로 하고 局部檢査
(웃기고 또한 화가 치민다(可笑又可怒)를 하고 마지막으로 기름을 뿌려서 燒失했다든가
참으로[誠히] 이것을 쓰기 念慮가 됩니다. 차마 쓸 수 없습니다.
其他 宮內大臣은 몹시 殘酷한 方法으로 殺害했다고 합니다.
위는 士官도 도와주기는 했지만 주로 兵士 外 日本人들이 저지른 짓인 것 같습니다.
대략 세 時間 余를 消費하여 위 막된 짓을 저지른 후 위 日本人들은 短銃 또는 刀劍을 손에 쥐고
徐徐히 光化門=王城正門=을 나가 群衆 가운데를 뚫고 나갔습니다.
그 때가 벌서 여덟時가 지났고 王城앞 대로(廣小路)는 사람으로 充塞했습니다.
5.外國使臣
米 露 두 公使는 宮闕 內에서도 大院君 및 미우라公使를 向하여 頻繁히 質問해
다시 同日 午後에는 各國 使臣들이 더불어 日本公使館에 와서 하나하나 證據를 들고 詰問하여,
밤이 되어 各各 歸館했습니다.
미우라公使는 弁解를 아주 努力하여 結局 서로 雙方이 理致만을 따져
끝장이 안나는 논쟁이 있었지만 저[當方]는 너무나 아픔을 느끼지 않을 없었습니다.
不幸하게도 어떤 미국인[米人]이 現場을 目擊하고 있었다 하니
普通 一般 朝鮮人의 證言처럼 一方的으로 抹殺해버릴 수도 없지만
미우라公使의 辨明[辨解] 역시 아주 잘 한 것 같아요(公使의 談話에 依하면).
또한 大院君을 비롯하여 各 大臣들은 굳게 約條해서 日本에 대하여 不利하지 않게 答辯했습니다.
그렇지만 드디어 國際 問題化를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6.影響
만일 이 땅[當地]에서 外國 使臣들 사이의 談話로 마무리되어서 國際問題가 안되더라도
그 遼東問題에는 곧 影響을 미칠 것입니다.
公使는 國難일 境遇에는 免官되며 公使의 辭任은 아마 잘 國際紛議을 플 것입니다.
要컨대 王妃가 從來 改革의 妨害인 事實은 저도 이것을 밤낮으로 憤慨하고 있었던 것인 만큼
그 斷然한 處分을 기뻐함과 同時에 그 方法이 適當하지 않았음을 깊이 아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公使는 위의 浪人들에 對하여는 表面上 各自 處分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諸外國의 困難을 排除할 수 있는지 없을지 의문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勿論 이런 막된 짓인 만큼 多少「失手」를 나타내는 것은 免치 못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이번 일은 너무나도 「失手」가 많지 않았을까?
위는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미우라公使에 對하여는 아주 不信實의 劇이겠지만
職務上의 義務에 쫓겨서 不得已 報告드리는 바이니 부디 잘 봐 주십시오.
十月九日 에이조(英藏)
스에마쯔(末松) ]
이 편지는 서간용 일본식 두루 마리에 씌어진 것으로
그 원본은 '이또(伊東) 백작가문서(伯爵家文書)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원본을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憲政資料室)에서 복사 보관해둔 것을 입수한 것입니다.
이 백작가문서에는 이것말고도 "조선왕비사건"이라 별도로 보관된 문서들이
5통 정도 더 소장하고 있음을 밝혀 드립니다.
다음은 .'에이조'가 '스에마즈' 법제국장 앞으로 보낸 서간문의 일본어 원문입니다.
참고 자료로 첨부(添附)했습니다.
[ 末松法制局長宛石塚英藏書簡 韓國政府顧問たりし石塚より王妃事件の眞相を報告
せるもの 書簡用卷紙に墨書(明治二八年一 月九日附)
(伊東伯爵家文書 朝鮮王妃事件關係資料)
< 敬啓其後は益御淸福張爲入奉恐賀候處當地昨朝之
出來事は旣に大要御承知濟之御事と奉察上候 王妃
排除之儀は若し時機の許すあらば之を決行したるとは
不言不語之間に誰人も抱藏したる考に可有之候得共
若し一步過たば忽ち外國之關係を惹き起し永遠に國
に占むる日本之地步を亡失するは必然の儀なれば深く
輕率を戒しむべきは今更申し越す?も無之儀に御座候
今回之事小生共最初より少しも相談に與からず却而
薄薄其計劃を朝鮮人より傳聞致候程に有之段段
聞知する所に依るに局外者にして其謀議に參與し
甚しきは?次焉連が兵隊之先鋒たりし事實に
有之候而して其方法は輕率千万殆んど兒戱に
類するなきやと思わるるも無之にあらず幸に其最も
忌わしき事項は外國人は勿論朝鮮人にも不相知
候樣子に候 現公使に對しては聊か不德義之嫌有之
候得共一應事實之大要御報告仕るは職務上之責
任と相考候間左に簡單に申陳候
1.發端
王妃排除の必要は三浦公使も夙に深く感ぜられたる
ものの如し而て其今日に之を決行したる所以は
「危急の場合に露の援兵を請うべきの約束」?に
「訓練隊解散の計劃」を宮內府に於て爲したるに
由るものの如し (?ち訓練隊を利用したるなり)
2.名義
訓練隊解散 兵器沒收の內議を聞くや已むを得ず太院君を
要し大內に哀訴せんとして侍衛隊に衝突を來したり
王城前に在る守備兵は之を鎭靜せんが爲め四門の
警備に從事したると云うに在り
3.謀議者
推察するに岡本は主唱者たるの如し 大院君の入闕を斡旋
したるは正しく同人なり 外に柴 楠瀨 杉村は密議に
參與したりと云う 其他は少しも關知せず 守備隊長
馬屋原の如きは命令的に實行の任に充られたるが如し
4.實行者
此荒仕事の實行者は訓練隊の外守備兵の後援あり
(後援は或は當からざるが如し)尙ほ守備兵の外に日本
人二十名若あり熊本人多數を占(漢城新報社迹)
中に新聞記者數名又醫師商人もあり 隨て洋?和
?相混ぜり 岡本は大院君と同時入城し實行の任に
當れり 守備隊の將校兵卒は四門警衛に止まらず
門內に侵入せり 殊に?次馬連は深く內部に
入입み王妃を引き出し二三個處刃傷を及し且つ
裸?とし局部檢査(可笑又可怒)を爲し最後に
油を注ぎ燒失せる茅 誠に之を筆にするに忍びざる
なり 其他宮內大臣は頗る慘酷なる方法を以て
殺害したりと云う 右は士官も手傳へたるも
主として兵士外日本人の所爲に係るものの如し
大凡三時間余を費して右の荒仕事を與したる後
右日本人は短銃又は劒を手にし徐徐として光化門
(王城正門)を出て群集の中を通り拔けたり 時已に
八時過にて王城前の廣小路は人を以て充塞せり
5.外國使臣
米露兩公使は宮闕內に於ても大院君及三浦公使に向けて
頻りに質問し尙ほ同日午後は各國使臣相續き日本公
使館に來り 一一を擧て難問し夜に入て各各歸
館したり 三浦公使弁解頗るめ結局雙方水懸論なるも
當方は余程の痛みを感ずる廉なきにあらず 折惡しく
或米人現場を目擊し居りたりと云へば普通一般之朝
鮮人之?言之如く一槪に抹殺し去るを得ざるべく
乍去三浦公使の弁解も亦頗る上出래なるが如し
(公使之談話に依れば)又大院君始め各大臣は堅く
約して日本に不利ならざるの返答を爲し居れり
然るも遂に?際問題たるを免れざるべし
6.影響
?りに當地に於ける外國使臣間之談話にて要領を
得て國際問題とならざるも夫の遼東問題には必ず
影響を與ふるに至るべし 尤も公使は困難なる場合には
免官せられ不苦と被中候得共公使之辭任豈能く
國際紛議を解かん
要するに王妃が從來改革之妨害たる事は小生共之夙夜
憤慨に堪えず打過候事なれば此斷然なる處分を
喜ぶと同時に其方法の宜しきを得ざりしを深く
惜まざるを不得と存候, 公使は右の?次馬連中に對して
は表面上夫處分を施さるの事ならん 乍去諸外國之
困難を排除し得べきや否疑なき能はず 勿論此る荒仕
事之事なれば多少「ボロ」を現はすは免れざる所なりと
雖今回之事余り「ボロ」多からざるか
右は前記に申陳候如く三浦公使に對しては甚不信實之
至には候得共 職務上之義務に馳られ不得已御報道申
上る次第に御座候 右何卒篤く
十月 九日
이 일본어 내용이 김진명이 '황태자비 납치사건'을 쓴 동기의 원본 자료입니다.
'에조'문서 435호 따위를 조작 날조해서 꾸민 내용들
모두 이 '에이조'의 '스에마즈' 국장에게 띄운 서간문을 차용한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에조'문서를 만들어낸 그 기발한 상상력 알아줄 만 합니다.
이 원 문서편지를 조금씩 앞뒤를 꿰 맞추어 '에조'문서=가짜 문서=가 탄생된 것이죠!
다시 말씀 올리거니와 '에조' 문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소설은 소설로만 씌어진 것입니다.
끝으로 나는 한국사를 전공한 사학도입니다.
김진명씨의 소설엔 별다른 관심도 없을 뿐 더러
김진명씨가 쓴 '황태자비 납치사건'의 내용 가운데에서 문제시 된 '에조문서' 435호의 실체를
물어온 한 성명 미상의 여고생 메일을 받아보고 그 사실 여부를 알아봐 줄 것을
요청 받았기 때문에 소설의 내용을 읽은 결과 이것은 한 차례 조사해서
'에조 문서'의 실상을 사방으로 찾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이 소설의 내용은 긴박감 넘치는 추리소설 못지 않게 흥미로우며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내용이
그 중에서 백미(白眉)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의 하권 말미에 문제의 에조 문서에 대한 내용을 읽어가던 중
심상치 않은 에조 문서 435호의 실체에 대한 여부가 여간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실존했던 문서인 것 같기도 하고 작가가 흥미를 도출하기 위한 허구적인 ; 꾸밈' 새인 것도
같아서 머릿속의 혼란을 가늠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김진명씨가 느닷없이 '오마이 뉴스'지에 '에조문서' 435호를
자신이 어렵게 발굴했다고 하면서 일종 기염을 토하고 있는
자신의 소상한 발언, 과정, 그리고 오만한 주장 따위가 못내 내 딴에는 심사가 뒤틀렸던 것입니다.
그는 말하고 있더군요.
이런 막중한 중요 보고서 '에조문서' 435호를 발굴해놓고서도
당당하게 언론 매체, 방송계를 통해 발표 못하고 있는 심정이 무척 괴롭다고요.
그 당시 한일 올림픽 행사 관계로 일본을 자극하는 이 사실 자체를
원만하게 세상에 밝히지 못하고 있는 것이 찜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 마이 뉴스'지엔 연락을 취하여 자신이 '에조 문서' 435호를 발굴하기까지의 사실을
숨김없이 털어놓겠다고 하면서 기자 한 사람을 자신이 머물고 있는 진천 집으로 초청,
결국 장문의 김진명씨가 밝힌 명성황후와 '에조 문서' 435호에 내재된 사실성 등을
기자와의 인터뷰 형식으로 원고 작성된 그 실체가 동지(同紙)에 게재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나름대로 나는 나대로 이 기사를 읽는 순간 '에조 문서'의 실체를 규명해보기로 했습니다.
아직 정확한 결과의 성과는 없으나마 김진명씨가 과연 거짓 말을 상상 이상으로 하였구나 하는
확증은 얻어낼 수 있는 자료들은 상당히 찾아내었습니다.
어느 한 개인을 적대시해서 증오감이 도출되는 글을 나는 쓰지 않도록 노력하여
이 글을 쓴 것입니다.
한 역사학도로서 책임의식의 발로로 시작했었고
이 글을 썼으면 해서 이제 작은 내 소감을 여기에 피력하는 것입니다.
김 종 욱
2006. 8. 13. MBC 시사매거진 2580 「작전명 여우사냥」을 시청하고
게시판에 서지학자 김종욱 선생이 올린 글을 옮겨 놓았다.
[출처] '이시즈카 에이조(石塚英藏)' 의 명성황후 시해 보고문서 실체|작성자 kossko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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