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抗日)과 친일로 이어진 명성황후 후손들의 120년 영락
⊙ 구한말 척족으로 세도(勢道) 누린 여흥민씨… 권력핵심인 삼방파(三房派) 후손은 현재 2000명 안 돼
⊙ 명성황후 친정 후손은 승호(황후의 양오라비)-영익-정식-병호-성기 등으로 세대(世代) 이어
⊙ 순명효황후 친정 후손은 태호(민영익의 親父)-영린-효식-병서-형기-경준 順
⊙ 자결한 우국지사 민영환은 대원군 처남의 아들… 영환-범식-병철(병기)-홍기 順
⊙ 명성황후 친정 후손은 승호(황후의 양오라비)-영익-정식-병호-성기 등으로 세대(世代) 이어
⊙ 순명효황후 친정 후손은 태호(민영익의 親父)-영린-효식-병서-형기-경준 順
⊙ 자결한 우국지사 민영환은 대원군 처남의 아들… 영환-범식-병철(병기)-홍기 順
갑신정변 직전의 개화당 인사들. 명성황후의 친정조카 민영익(앞줄 가운데), 서광범(앞줄 앨범 든 사람), 유길준(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 등의 모습. |
조선왕조가 막을 내릴 무렵에 일어난 구한말(舊韓末)의 비극은 한국 근대사의 치욕이자 깊은 상처로 광복 70주년과 사변 120년이 되는 오늘날까지 회자하고 있다. 기자는 120년의 시간을 명성황후를 배출한 여흥민씨 가계의 영락(榮落)을 통해 들여다보았다.
명성황후와 순명효황후를 배출한 여흥민씨는 구한말 대표적인 세도가다.(여흥민씨 문중에서는 세도가라는 표현을 꺼린다.) 대원군 아내인 부대부인(府大夫人·대원군 아내의 작호) 역시 여흥민씨다. 좁게 보자면 여흥민씨 여러 파 중에서도 삼방파(三房派) 후손들이 왕의 척족이자 척신이 되어 구한말 개화의 거센 물결과 맞섰다.
황후 시해와 한일병탄(1910년) 이후 여흥민씨 삼방파 일족은 항일(抗日)과 친일(親日), 극일(克日)이란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며 후손을 이어 갔다.
흥선대원군의 처남인 민태호(閔泰鎬)의 아들 민영환(泳煥)은 일제에 맞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명성황후의 친정조카인 민영익(泳翊)은 중국으로 망명, 상해에서 망국의 슬픔을 달래다 사망했다. 순명효황후의 친동생인 민영린(泳璘)은 친일을 택해 백작의 작위를 받았다. 1910년 당시 백작이 된 이는 민영린을 비롯해 ‘을사오적’인 이완용(李完用), 이지용(李址鎔) 등 3명뿐이다.
또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한 이도 적지 않다. 상해 임시정부의 외무차관 겸 김구(金九) 주석의 비서실장 등을 지내며 중국 국민당과 교섭해 무장경비대를 조직하고 항일에 앞장섰던 민필호(弼鎬) 역시 삼방파의 후손이다.
어쩌면 민씨 집안 내의 친일과 항일로 이어진 엇갈린 행로는 일제 강점기와 광복, 분단을 거쳐야 했던 한국 근현대사의 곡절과 다르지 않다.
명성황후 집안의 가계
권오창 화백이 그린 명성황후 표준 영정. |
여흥민씨 삼방파 종친회에 따르면, 황후의 양오빠 민승호는 1864년 문과에 급제한 후 1873년 병조판서를 지냈다. 정치적으로는 ‘일본 메이지 정부의 국교(國交) 요청에 대원군이 거부하자 민승호는 찬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1874년 생일날 아침 선물로 위장한 폭약이 든 우편물을 받았다가 폭사(爆死)하고 만다. 여흥민씨 삼방파 종중 민병설(丙契) 이사장은 “대원군이 보낸 폭탄 소포를 받고 폭사했다는 것이 정설로 알려져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민승호가 황후와 명목상 남매이긴 했지만 원래 먼 일가 동생인 황후보다 자형인 대원군과 더 가까운 사람이라고 볼 수 있어요. 하지만 고종과 황후가 친정(親政)하면서 민승호는 황후의 노선을 따랐을 것으로 보입니다. 고종과 황후가 친정을 하면서 최초의 과업이 1876년 일본과의 수호통상조약의 체결이었어요. 쇄국 노선을 버리고 개화를 택한 것이었어요.”
양오라비를 잃은 명성황후는 다시 삼방파 내에서 양자를 찾았다. 그렇게 택한 이가 민태호(台鎬·1834~1884)의 아들 민영익(泳翊·1860~1914)이다. 민영익은 명성황후의 며느리 순명효황후의 친정오빠다.
이때부터 삼방파 족보에는 민영익이 민태호의 아들에서 출계(出系), 민승호의 양자가 된다. 즉, 명성황후의 친정조카가 되는 셈이다.
민영익이란 이름에는 ‘구한말 비운(悲運)의 세도가’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는 한국인 최초로 1883년 9월 미국 전권대신으로 미국 땅에 처음 발을 디딘 인물이다. 미국 아서(Arthur) 대통령과 만났을 때 큰절을 한 일화가 전해진다. 이조·예조·형조·병조 판서를 모두 거쳤지만 명성황후 시해와 을사늑약(1905년)을 겪으며 상해로 망명했다.
종중 관계자의 말이다.
“민영익은 상해, 홍콩, 소주 등지에서 조선에서 가져온 홍삼(인삼)무역으로 정치자금을 확보하고 대외정보를 수집하며 객지생활을 했어요. 일시 귀국해 관직도 역임했으나 이미 국운이 다하고 외세에 따라 부침하는 정치상황에서 그는 더 이상 뜻을 펼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상해에서 칩거하는 동안 한반도 정세를 살피며 금의환향과 세도 복귀를 열망한 민영익은 결국 한일병탄이 되자 절망, 술과 서화(書畵)로 망국의 시름을 달랬다.
민영익이 남긴 재산의 행방
김구 주석의 비서실장 시절의 민필호(오른쪽)와 비서 김은충. 민필호의 아들 민영백씨(사진 오른쪽). |
〈민영익이 상해에 있으면서 4만원을 내어 법국과 아라사의 변호사를 고용한 뒤 안중근의 재판을 도왔다.〉 (p439, 《매천야록》, 허경진 옮김, 서해문집)
민영익은 홍삼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 부는 개인돈이 아닌 나랏돈이다. 민영익은 조선 홍삼 전매권을 쥐고 무역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55살의 한창 나이에 사망하면서 돈이 공중으로 날아가 버리고 만다.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한 민필호(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의 아들 민영백(泳柏·㈜민설계 회장)씨를 만났다. 명성황후와 민필호는 촌수가 13촌 사이다. 그는 아버지가 민영익이 남긴 재산을 추적한 일을 회고했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시던 아버지 회고에 따르면, 민영익이 세상을 떠날 때 아무 유언도 없이 다만 열쇠 하나만 중국인 첩에게 맡겼다는 겁니다. 아버지는 그 열쇠가 어느 금고나 은행 보험궤(保險櫃)의 열쇠인지 알 수 없었다고 해요. 또 임정에서는 민영익 명의의 계좌에 거액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민영익의 재산을 추적한 결과, 상해 영상회풍은행(英商匯豊銀行·HSBC)에 개인금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합니다. 열쇠를 가지고 은행에 보관된 금고를 열어 보니 문서 몇 장만 나왔다는 겁니다. 낙담은 했지만, 은행장을 통해 홍콩 본점에 민영익의 금고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해요. 아버지는 곧장 홍콩으로 달려가셨죠. 그곳에서 1년이나 미납된 금고 임대료 1000여 원까지 지불하고 금고를 열었더니 역시 소송 문서 두어 장이 있을 뿐 아무것도 없더라는 겁니다.”
그 돈을 민영익이 다 썼을까. 민영백씨는 “은행이 농간을 부렸을 가능성이 크다”며 이렇게 말했다.
“당시 아버지가 은행의 내막을 잘 아는 중국인에게 물었더니 ‘중국 정황(政況)을 악용해 은행이 부정축재를 했다’는 것이었어요. 중국 혁명 초기, 만청(滿淸) 황실이나 황족의 부자들은 막대한 돈을 상해와 홍콩의 은행에다 가명으로 맡겨 두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공산화 과정에서 부자들이) 피살되거나 혁명군이 두려워 찾지 못한, 사실상 주인 없는 저금이 많았다고 해요. 그 돈을 은행이 암암리에 자기 재산으로 만들어 오늘날 큰 은행이 됐다는 겁니다. 아버지는 민영익의 재산도 이런 경우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하셨어요.
민영익의 후손들
민영익의 후손들은 이후 어떻게 살았을까. 민영익은 같은 집안 민정식(珽植)을 양자로 맞았으나 양어머니의 노여움을 받고 파양당해 쫓겨난 것으로 전해진다. (신복룡, 《한국사 새로보기》 참조)
민영익이 중국에 망명할 당시에 중국 소주(蘇州) 출신 첩에게서 낳은 아들이 민정식(庭植·1897~1951)이다. 본부인인 광산김씨 사이에는 자식이 없다. 《매천야록》에 이런 구절이 있다.
〈… 민영익은 본래 선천적인 고자였는데 오랫동안 해외를 돌아다니며 좋은 약을 복용하여 양도를 회복했다. 첩을 얻어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이름을 민보(閔寶)라 했다. …〉 (p284, 《매천야록》, 허경진 옮김, 서해문집)
이에 대해 삼방파 종중 측은 “《매천야록》이 항간에 떠도는 야화(野話)를 모은 것일 뿐 진실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민정식은 아버지 유산을 물려받은 장안의 거부였다. 족보를 보니 전주이씨, 거창사씨, 안동김씨를 각각 아내로 맞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일설에는 민영익가의 유산을 둘러싸고 친인척과 민씨 주변인들이 달려들어 시비와 말썽이 많았다고 한다.
삼방파 종중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돈 쓸 줄은 알았지 벌 줄 모르니까 재산을 탕진하다시피 했다고 합니다. 또 이 양반의 처남이 보통사람이 아니었다고 해요. 처남이 ‘뭐가 좋다’고 하면 한섬지기 팔아다가… 요즘 얘기로 평당 1만원 하는 땅을 1000원에 팔아치웠다고 합니다. 속된 말로 재산을 다 날려 버렸어요. 중국에서 왔으니 우선 말이 안 통하고 정서도 달라 힘이 들었을 겁니다.”
이런 말도 했다.
“구한말 벼슬 한 일가의 후손 가운데 관직에 오르거나 큰 성공을 거둔 경우가 많지 않아요. 그냥 조상이 물려준 것 먹고 관리만 하고 산 것이죠. 그러나 자식들을 열심히 가르치고 교육시킨 집안은 융성했지요.”
민영익의 아들 민정식은 2남2녀를 낳았는데 장남이 민병해(丙海), 차남이 민병호(丙湖)다. 족보에는 민병해가 1945년 8월 실종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민병호는 딸 셋을 낳은 뒤 아들을 보았다. 그의 아들 민성기(盛基)는 현재 LG그룹 중견간부로 재직 중이라고 한다.
여흥민씨 삼방파 삼방파는 조선 19대 임금인 숙종의 왕비인 인현왕후, 고종(26대)의 아내인 명성황후, 순종(27대)의 아내인 순명효황후를 배출한 문벌이다. 흥선대원군의 아내도 삼방파 출신이다. 삼방파 가운데 문과에 등제한 이가 모두 70명에 이르고 이들 중 상신(相臣,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을 총칭)이 7명이나 된다. 또 종이품(從二品) 및 정삼품(正三品) 당상관에 오른 이가 80여 명에 이른다. 그러나 여흥민씨 족보에는 인현왕후나 명성황후, 순명효황후의 흔적이 없다. 모든 족보에서 그렇듯 딸자식은 시집 가 남의집살이를 하는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다. 왕비조차 흔적이 없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전체 여흥민씨 후손들은 15만여 명으로 추산되나 그중 삼방파는 300~350가구, 그 수가 아무리 많아도 2000명이 안 된다. 민씨의 구한말 세도정치는 민치록(致祿)의 딸이 명성황후가 되고 이후 흥선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나면서 시작된다. 고종이 친정(親政)하면서 치(致), 호(鎬), 영(泳), 식(植) 자 돌림의 삼방파가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삼방파 종중 민동환(東桓) 상임이사의 말이다. “흥선대원군이 볼 때, 안동김씨와 맞설 문중이라 본 것이죠. 그래서 (권력 중심부로) 끌어들인 것이지 (명성)황후가 되어 떼거리로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은 턱도 없는 소리죠. 자리 배치도 과거 급제를 안 하면 안 되는 것이니까, 시쳇말로 사법고시 안 보고 판·검사할 수 있나요?” |
순명효황후 편지에 담긴 공포와 슬픔
1895년 을미사변 직후 순명효황후가 순종의 세자시절 스승인 김상덕에게 쓴 한글 간찰. |
그러나 순명효황후가 궁에 들어간 지 두 달 만에 황후의 어머니 송씨(진천 송씨)가 사망한다. 그리고 12살 때 아버지 민태호마저 살해된다. 본인은 33살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난다.
민태호는 학자 유신환(兪莘煥)의 제자로 1870년 문과 급제, 총융사, 여영대장, 대제학을 지냈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 때 김옥균(金玉均) 일파에 의해 피살됐다.
순명이 23살 되던 해인 1895년 시어머니 명성황후가 피살되는 장면을 지켜보게 된다. 이 사변으로 그녀는 정신적 트라우마를 겪어야 했고 죽을 때까지 병상을 떠나지 못했다. 《고종실록》 제45권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순명효황후의 친정아버지 민태호. 그는 1884년 갑신정변 때 金玉均 일파에 의해 피살됐다. |
을미사변 직후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순명의 한글 편지가 2012년 발견돼, 학계의 관심을 모은 적이 있다. 이 편지를 한국학중앙연구원이 공개했으나 편지에 담긴 몇 문장의 뜻풀이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연구원 측은 순명의 외가(어머니 친정)인 ‘진천송씨’ 문중에 문의했고, 고문 번역가 송병혁(宋炳赫)씨가 그 답을 찾았다. 기자는 송병혁씨와 순명의 외삼촌 송태현(宋泰鉉·1852~1918)의 직계 증손자인 송병은(宋炳垠)씨를 만났다.
먼저 송병혁씨의 말이다.
“순명효황후는 어린 시절 궁에 들어가 의지할 곳이 없었어요. 친정부모마저 일찍 돌아가셨으니까요. 《고종실록》에 보면, ‘처음에 비(妃)는 충문공(민태호)이 살해되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는 슬픔에 겨워 낯이 까맣게 질려가지고 머리를 숙이고 얼굴을 손으로 싸쥐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이가 순명의 외숙 송태현이었어요.”
송태현은 한성부 판윤과 대한제국 농상공부(農商工部) 상공국장(商工局長)을 역임한 인물이다. 요즘으로 치면 서울시장과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송병은씨의 말이다.
“편지에 이런 구절도 있어요. ‘나는 수많은 사람 중에 유달리 지통(至痛·지극한 아픔)을 품은, 부모형제도 없는 혈혈단신에 겸하여 사고무친(四顧無親)한 사람이며 밤낮으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한다’고요.”
진천송씨 문중의 고문번역가 송병혁씨. |
“이 편지는 남편 순종이 세자 시절 스승이었던 김상덕(金商悳)에게 보낸 겁니다. 오죽하면 남편의 옛 스승에게 편지를 썼을까요. 편지에는 또 ‘운수가 박하고 때를 못 만나 하루아침에 국가의 망극함이 이 지경이 되니 다시 무슨 말을 할 수가 없다’는 대목도 있어요. 추정컨대 이 편지는 을미사변 직후, 시어머니 명성황후가 시해된 장면을 목격한 뒤 쓴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못 푼 대목은요.
송병혁씨 말이다.
“편지 중에 ‘옛 사람의 죄이오나, 전에 믿으시던 송현이 말한 것도 아닙니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연구원에서 ‘송현’이 누구인지 몰라 진천송씨 종중의 문을 두드렸어요. 문장을 보니 ‘송현’은 ‘송태현’이었어요. 그럼 왜 은어처럼 ‘송현’이라 썼을까요? 아마 편지가 일제의 손에 들어갈 경우 혹시나 외삼촌이 끌려갈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명성황후 시해 이후 일제의 감시가 아주 심했음을 유추할 수 있어요.”
송병혁씨는 “한 나라의 국모가 살해당하자 순명효황후가 느낀 불안과 정신적 괴로움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컸을 것이 분명하다”며 “을미사변 직후 고종과 순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 아관파천(1896년)이 있자 무려 1년 동안 텅빈 궁에서 황후는 극심한 불안감에 떨어야 했을 것”이라고 했다.
순명효황후 친정의 120년
일제시대 백작이 된 민영린(왼쪽)과 가족들. 민영린은 순종과 처남매부 사이다. |
황후의 남동생이자, 순종과 처남 매부 사이였던 둘째 민영린(泳璘)은 효식(孝植)과 위식(暐植)을 낳았는데, 셋째 민영선(泳琁)이 아들을 못 낳자 형(민영린)의 차남 위식을 양자로 삼았다. 종중에 따르면 “사실 민영린도 민태호의 친자가 아니라 양자다. 같은 민씨 집안인 민술호(述鎬)의 아들을 데려온 것”이라고 한다.
민효식은 다시 아들 4형제(丙叙·丙敎·丙效·丙穆)를 낳았고, 장남 병서는 형기(亨基)·숙기(肅基)를, 다시 형기는 경준(庚晙)을, 숙기는 경진(庚璡)을 낳았다.
민위식은 아들 3형제(丙宇·丙宰·丙完)를, 장남 병우는 윤기(允基)를 낳았다. 족보상 둘째와 셋째 병재와 병완은 아들이 없다.
기자는 순명효황후 친정의 장자인 민형기(74)씨에게 집안 얘기를 들었다. 그는 충남 천안에 거주하고 있다.
—집안에 순명효황후와 관련한 사료나 문중 이야기가 있나요.
“‘~카더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깊은 얘기는 아는 게 없어요. 순명효황후의 서찰이 발견됐다고 하는데 집안에 내려오는 유물이나 유품은 없습니다. 고조부 민태호는 장자(민영익)를 양자로 보냈고, 증조부(민영린)도 양자로 데려왔어요. 내 자식을 저쪽에 보내고, 저 자식을 내 자식으로 옮기고… 당시엔 혈통보다는 (가문의) 형식을 더 중요시했던 것 같아요.”
—민태호의 장남 민영린은 어떤 분이었나요.
“증조부 민영린은 구한말인 1904년 동지돈녕부사가 됐고, 특명전권공사가 되어 일본에 다녀오셨어요. 돈녕부는 왕친이나 외척의 친선과 관련된 업무를 처리했던 관청으로 요즘으로 치면 청와대 민정실쯤 될까요? 증조부는 1910년 한일병탄 때, 일본으로부터 백작의 작위를 받았어요. 고조부는 일본을 등에 업은 김옥균의 개화파에 반대해 죽음을 당하셨지만, 증조부는 한일병탄에 찬성하셨죠.”
순명효황후. |
“그렇죠. 그런데 증조부가 재산을 다 없앴어요. 말년에 아편하면서…. 아편에 당할 자가 없어요.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에 아편을 하면서 고조부가 갖고 있던 재산을 그렇게 다 없앴어요. 그래도 자식들에게 공부를 많이 시키려 애쓰셨어요. 며느리들도 시집온 뒤에 다 학교에 보냈죠.”
순명효황후의 남동생인 민영린은 병탄 때 백작과 매국 공채 12만원을 받은 것으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 그러나 아편 흡입죄로 징역 3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1919년 7월 21일 실작했다.
—민영린의 장남 효식씨는 무슨 일을 하셨어요.
“할아버지께선 여주에서 능참봉을 하셨어요.”
능참봉은 조선 임금의 각 능(陵)을 관리하던 참봉을 말한다. 품계는 종9품이었다.
“언젠가 할머니에게 ‘왜 능참봉을 맡으셨냐’고 여쭈니, ‘구한말에는 국록을 먹고 살더니 나라 망하니까 안 맡는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 하게 됐다는 겁니다. 아버지(민병서)는 일제 때 그림을 그리셨어요.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 화백과 함께 그림을 배웠다고 합니다. 6·25 때인 서른세 살 때 이북으로 끌려가셨어요. 그래서 저도 고생 좀 했지요.”
—자식들에게 집안의 자부심을 어떻게 가르칩니까.
“안 해요. 우리 할아버지(민효식)도 제게 ‘너희 고조부는 어쨌다, 증조부는 어쨌다’ 그런 말씀을 절대 안 하셨어요. (민영린 할아버지 때문에) 넌더리가 나서…. 일제 시대, 이왕직 사람들이 명절 때 우리 집안에 세배하러 오긴 했지만 할아버지는 절대 (집안의 자부심을) 얘기 안 하셨어요.”
이왕직(李王職)은 일제 강점기 ‘대한제국 황실’이 ‘이왕가(李王家)’로 격하되면서 기존 황실업무를 관장했던 궁내부 업무를 계승한 기구다. 이왕직의 2대 장관이 남작 민영기(泳綺), 4대 장관이 자작 민병석(丙奭)이다. 일제는 이왕직을 통해 고종과 순종의 친인척을 예우하며 관리했지만 실상은 이들을 통제하는 기구였다.
민치구-민태호-민영환의 생애
고려대 박물관에 소장된 애국지사 민영환의 血竹 사진. 피묻은 옷을 간직했던 마루에서 대나무가 자랐다고 한다. 민영환의 손자 민병진씨(사진 오른쪽). |
충정공(忠正公) 민영환은 1878년 문과에 급제해 1882년 대사성, 1893년 형조판서가 됐고, 1896년 고종의 친러 정책에 따라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참석하는 등 구한말 임금의 척신으로 활약했다.
민영환이 자결할 당시 장남 범식(範植)이 7살, 차남 장식(章植)이 2살, 막내 광식(匡植)이 한 살이었다.
기자는 민장식의 아들이자 종중 이사장을 지낸 민병진(丙璡)씨를 만났다. 그는 조부 민영환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돌아온 과정을 한문으로 기술한 《해천추범(海天秋帆)》의 한글 번역본(1996년 을유문화사 再版)을 기자에게 선물로 주었다.
민병진씨는 한국관광공사에 입사해 박정희 정부의 관광정책 입안에 일조했다고 한다. 관광공사 지도부장, 제주도 파라다이스호텔 사장, 프라자호텔 총지배인, 한국관광협회 상근부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조부 민영환의 혈죽(血竹)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905년 11월 4일 새벽 할아버지는 자택(서울 종로구 계동 133번지)으로 가시지 않고 청지기 집엘 갔었어요. 집에 어머니(증조모)와 가족이 있으니까 자결 장소를 청지기 집으로 택한 겁니다. 그곳에서 각국 공사에게 (을사늑약 파기를) 고하는 유서를 남기고 단도로 목숨을 끊으셨어요.
나중 피에 젖은 할아버지의 옷을 집으로 가져와 ‘마룻방’에 두었는데 8개월 후 그 자리에서 대나무가 자랐다고 합니다. 마루 틈으로 피가 땅바닥에 떨어졌고 그 자리에서 대나무가 자랐던 것이죠. 이른바 ‘혈죽 사건’이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유생(儒生)들이 찾아와 집앞에서 대성통곡을 하고 돌아가곤 했어요. 그러자 일제는 혈죽이 조작된 것처럼 만들려 했어요. 그러나 조작된 증거를 못 찾자 대나무를 뽑았는데, 뿌리 없는 대나무가 쑥 뽑히더랍니다. 혈죽을 오동나무 함에다 넣어 두었었는데, 1962년 고려대 박물관에다 기증했지요.”
그는 “큰아버지(민범식)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둘째인 아버지(민장식)께서 줄곧 조부의 혈죽과 유품을 보관하셨는데 당시 고려대 교수였던 사촌형(閔丙岐)이 아버지와 상의해 고려대로 옮기게 됐다”고 덧붙였다.
민영환 후손들 이야기
—민영환의 자결 후 비극을 견뎌야 했던 아들 3형제의 삶이 궁금합니다.
“큰아버지(민범식)와 아버지(민장식)는 1920년대에 국비 장학생으로 프랑스에 유학을 가셨어요. 큰아버지는 프랑스를 거쳐 독일에서 공부하셨죠. 아버지는 7년 동안 프랑스에 머무르며 소르본대학에서 경제학을 배우셨다고 합니다. 작은아버지(민광식)는 할머니가 멀리 가지 말라고 하셔서 유럽 대신 중국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지요.”
그러나 유학파였던 민영환의 세 아들들은 귀국 후 이렇다 할 직업이 없었다고 한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 때문이었다.
“큰아버지(민범식)는 귀국하시자 일본 고등계 형사가 접근해 술과 여자, 마약까지 손을 대게 했어요. 애국지사 후손에 대한 말살정책은 치밀하고도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큰아버지는 마약으로 1934년 무렵 돌아가셨어요. 큰아버지는 평생 특별한 직업이 없으셨죠. 겨우 호구지책으로 이왕직에서 생활비가 나왔는데 굶어죽지 않을 정도였어요.
할머니는 해방을 보시고 1947년에 돌아가셨어요. 제가 어렸을 때 기억나는 것이 대통령이 되기 전 이승만 박사와 프란체스카 여사가 우리집에 오셨어요. 김구, 이시영, 조소앙 선생도 다녀가셨죠.”
민범식(민영환의 장남)은 아들 3형제(丙哲·丙岐·丙逸)를 뒀는데 장남 민병철은 머리가 좋았다고 한다. 독학으로 영어를 배워 해방 후 미 군정 시절 미군 통역관을 할 정도였다. 1947년 미군 트럭을 타고 가다가 전복사고를 당해 사망했다. 그의 외동딸이 고려대 최장집 명예교수의 아내 민명기(明基)씨다.
차남 민병기는 고려대 교수를 지냈고 인천대 학장을 역임했다. 1973년 학계를 떠나 민주공화당 정책위원회 부의장을 맡으면서 정계에 발을 내디뎠다. 그의 아들 민홍기(泓基)는 대기업에 다니다 퇴사한 뒤 현재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막내 민병일은 경기도 용인에서 집안 산소를 관리했다고 한다. 그의 아들 민원기(元基)는 버스운전을 하고 있다.
민장식(민영환의 차남)은 민간기관인 ‘불문화연구소’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쳤으나 그가 서구에서 배웠던 선진 지식과 사상을 다른 한국인과 공유할 수 없었다. 직장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들 병진씨의 말이다.
“저는 중학교에 입학할 때 교복을 못 사 입었어요, 점심 벤또(도시락) 싼 기억도 별로 없고요. 아버지는 (이승만 대통령 시절) 한국전력의 전신인 남전(南鮮電氣㈜)의 사장이 된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마타도어를 당해 끝내 못 가셨죠. 아버지 친구 분이 대신 그 자리로 가셨어요. 그분이 우리집에 찾아와 남전 부사장직을 제안했지만 아버지는 거절하셨죠.
나중 조선피혁의 취체역 대표로 잠깐 계시기도 했고,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고 석유공사의 고문을 맡으셨죠. 하지만 그 시절, 인간이 모질어서 산 것이지, 호의호식이라는 말을 글자로만 알았지 모르고 살았어요.”
민장식은 형제 병덕(丙德)과 병진을 낳았다. 병덕은 해양수산부의 전신인 해무청(海務廳)과 건설부에서 공직생활을 하다가 퇴사해 건설회사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병덕의 아들 3형제(丞基·興基·裕晳)는 모두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민광식(민영환의 3남)은 슬하에 3남3녀를 뒀는데, 장남 병섭(丙燮)은 운송업에 종사했고 차남 병건(丙健)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막내 병하(丙夏)는 가까운 민씨 집안의 양자로 출계했다.
여흥민씨 宗中이 주장하는 역사왜곡
종중은 기구치의 대표적인 왜곡 사례의 하나로 명성황후가 완화군·이귀인의 사망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들었다. 고종은 명성황후와 결혼하기 전 궁녀 출신인 귀인 이씨를 먼저 알게 되어 1868년 완화군을 낳았다. 기구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완화군의 생모인 이상궁이 갑자기 서거하니 사람들은 모두 그 급사에 대하여 의심을 하였으며 설상가상 완화군도 또한 흉거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종중 측은 “완화군이 1868년 출생해 1880년 1월 12일 13살에 죽고(《승정원일기》), 어머니 이귀인은 명성황후 사후인 1928년 12월 17일 노령으로 죽었는데도(《동아일보》 1928년 12월 19일자 2면 ‘李貴人別世’ 기사) 황후를 포악한 여인으로 부각시키고 꾸미기 위해 이귀인을 완화군의 죽음보다 먼저 명성황후가 죽인 것처럼 썼다”고 밝혔다. 또 황현의 《매천야록》과 정비석의 소설 《민비》 역시 왜곡에 일조했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매천야록》에는 ‘황후가 끝까지 그(대원군)를 꺼려 남모르게 자객을 시켜 그를 해치려고 하였다’거나 ‘기묘년 봄 완화군이 사망했다. 전하는 말에 명성황후가 젓동우(생산 염장동이)에 거꾸로 넣어 죽였다고 하고, 일설에는 방망이로 때려 죽였다고도 한다’, ‘황후는 의화군의 어머니 상궁 장씨의 음부 양쪽 살을 도려낸 후 그를 낭가에 실어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등이 조작됐다는 것이다. 또 “1980년 간행된 정비석의 소설 《민비》 역시 황후를 ‘사내아이와 같은 괄괄하고 기승스러우며 억센’ 무명천녀(無名賤女)로 비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전남 광양 출신의 황현(1855~1910)은 스물한 살(1876년) 때 서울로 와서 스물아홉(1883년)에 전남 구례 만수동으로 귀향했다. 1888년 34살에 성균회시에 장원급제하고 2년간 서울에 머무르다 서른여섯에 다시 귀향했다. 그가 남긴 문집은 《매천야록》, 《매천집》 등이다. 삼방파 민병설 이사장은 “황현의 서울 거주 기간은 불과 10년이고, 일생 대부분을 서울에서 멀고 먼 구례 산골에서 살았는지라, 그의 기록은 대부분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한 소문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민동환 이사도 “소문에 근거한 황후의 이야기 일부는 기구치 겐조가 조작한 내용들이 사실인 것처럼 인식하는 데 일조했다”며 “정비석 역시 기구치가 조작한 역사를 토대로 황후를 더욱 포악하고 음란한 여성으로 그렸다”고 말했다. |
애국지사 집안은 왜 가난한가
민영환의 손자 병진씨는 애국지사 후손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저도 평생 재산이란 걸 만져 보지 못했어요. 할아버지의 자결로 할머니가 어렵게 생계를 꾸리실 때, 주위 분들이 ‘중요한 재산은 맡겨 두라’고 해서 맡겼으나 돌려받지 못했다고 해요. 한때 할아버지 덕에 출세했던 분들이 배신을 한 것이죠. 또 그나마 있던 재산도 사기를 당해 대부분 빼앗기고 말았어요.
조계사 바로 뒤편에 우리집이 있었는데 일본놈들이 전부 지번(地番)을 쪼개 집 흔적을 없애 버렸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조계사 오른쪽에 대문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요. 집 안에 들어서면 정자 주춧돌이 군데군데 있었으나 역시 흔적조차 없습니다. 혈죽이 자랐던 마룻방도 보존했더라면 역사적 유물이 됐을 텐데….”
그는 또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돈이 없는데 어떻게 부를 창출하나요. 일본 관헌들이 요주의 인물을 포섭해 정신적으로 말살시키는데 그 양반들이 자기 생계를 꾸릴 생각을 하겠어요? 보는 대로 팔아먹고 살았으니…”라며 말끝을 흐렸다.
—지난 120년 동안 여흥민씨 삼방파 후손들도 친일과 항일을 택하며 영락을 거듭해 왔어요.
“우리 가문 내에서도 친일한 사람들이 있어요. 정초에 아버지와 세배 하러 찾아가면 외출 중이라며 따돌리더군요. 설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삼방파의 어떤 어른은 평양감사로 있을 때 얼마나 노략질을 했는지, 밥상 위에 돈 올려놓아야 밥을 먹었다고 합니다. 할 수 없이 아전들이 애먼 자를 잡아다가 족쳤는데 그때 나온 말이 ‘니 죄를 니가 알렸다’였다고 해요. (친일의 비극은) 비단 저희 문중만의 현상이 아니라 우리 민족 전체의 아픔이지요.”
출처 | 월간조선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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