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 - 120년 만에 밝혀지는 일본 군부 개입의 진상 epub
이종각 (지은이) | 메디치미디어 | 2015-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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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재조명한 책이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 군대와 낭인들이 경복궁 담을 넘어 들어가 왕비를 참혹하게 살해하고 불태웠다. 이른바 을미사변이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범인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은 당시 여러 증언자의 기록과 일본외교 문서 등을 종합할 때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12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 범인의 정체에 대해선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은 미우라 고로 주한공사가 총책임자가 되어, 대원군의 쿠데타로 위장하고 낭인부대를 동원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했다는 정도다. 영화와 드라마가 묘사하는 명성황후의 최후에는 언제나 기모노를 입고 칼을 휘두르는 낭인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황후 시해범이 낭인이라는 통설에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을미사변은 일본 군부의 군사 작전이었고, 그 범인 역시 군인이라는 것이다. 이는 저자가 우치다 사다쓰치 주한영사(미우라 공사가 왕후 살해 작전에서 철저히 배제시켰던 인물)가 보고한 '우치다 보고서'를 비롯하여, 그가 본국 하라 다카시 외무차관에게 보낸 개인서신, 그 밖에 관련 자료를 검토한 끝에 내린 결론이다.
청일전쟁 후 동아시아 패권을 다투던 일본 제국 정부가, 왕비 살해라는 막중한 임무를 깡패와 다름없는 낭인패들에게 맡겼을 리 없다는 것. 곧 을미사변을 바라보는 시각틀 자체를 바꾸어야만 이 사건과 범인의 정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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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여우사냥
무장 미우라의 서울 부임
‘왕후 폐제廢除’에 나선 군 지휘관들
난입전야
‘왕비 살해’ 긴급 타전
제2장 참극의 현장, 건청궁
서양인이 목격한 참극
건청궁의 비명소리
제3장 누가 명성왕후를 죽였는가
‘왕비 살해자는 우리 육군소위’
결정적 단서 ‘육군사관이 먼저 칼로’
제4장 검증 ‘시해범 미야모토 소위’
의혹 하나, 왜 우치다는 살해범을 은폐했는가?
의혹 둘, 왜 미야모토를 현장에 투입했는가?
의혹 셋, 왜 우편취급 기사, 사진사는 급거 귀국했는가?
의혹 넷, 왜 미야모토 조사는 서둘러 끝냈는가?
의혹 다섯, 왜 미야모토는 타이완 헌병대로 갔는가?
의혹 여섯, 왜 전사자인데도 야스쿠니 명부엔 누락됐는가?
제5장 을미사변, 그 후
낭인들, “너도나도 왕비를 하수”
천황, “해야 할 때는 해야 하는가”
제6장 명성황후는 누구인가
외국인이 본 명성황후
명성황후의 친필 한글편지
에필로그_홍릉에서
맺는 말
참고문헌
부록
자료 1 「우치다 보고서」(전문 번역)
자료 2 「한국왕비살해사건 군법회의 판결서」(전문 번역)
자료 3 「우치다 사신私信」(전문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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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종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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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
신문기자를 하다가 뒤늦게 한일 간 근현대사를 발굴하는 저술가가 됐다.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1977년 동아일보사 수습기자로 입사해 2000년까지 사회부·정치부 기자, 국제부·정치부 차장, 기획팀장, 심의팀장 등을 지냈다. 2001년 일본으로 가 도쿄대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친 뒤(2004년), 주오 대학교에서 출강하는 한편, 저술 활동을 시작했다. 2012년 귀국 후 동양대학교 교양학부(한일관계사)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 『이토 히로부미』, 『추락하는 일본』, 『일본 난학의 개척자 ...
광복 70년, 을미사변 120년 만에
드디어 명성황후 시해범의 실체가 드러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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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을미사변 120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재조명
낭인이 살해범이라는 통설을 뒤엎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 군대와 낭인들이 경복궁 담을 넘어 들어가 왕비를 참혹하게 살해하고 불태웠다. 이른바 을미사변이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범인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은 당시 여러 증언자의 기록과 일본외교 문서 등을 종합할 때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12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 범인의 정체에 대해선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은 미우라 고로 주한공사가 총책임자가 되어, 대원군의 쿠데타로 위장하고 낭인부대를 동원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했다는 정도다. 영화와 드라마가 묘사하는 명성황후의 최후에는 언제나 기모노를 입고 칼을 휘두르는 낭인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황후 시해범이 낭인이라는 통설에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을미사변은 일본 군부의 군사 작전이었고, 그 범인 역시 군인이라는 것이다. 이는 저자가 우치다 사다쓰치 주한영사(미우라 공사가 왕후 살해 작전에서 철저히 배제시켰던 인물)가 보고한 「우치다 보고서」를 비롯하여, 그가 본국 하라 다카시 외무차관에게 보낸 개인서신, 그 밖에 관련 자료를 검토한 끝에 내린 결론이다. 청일전쟁 후 동아시아 패권을 다투던 일본 제국 정부가, 왕비 살해라는 막중한 임무를 깡패와 다름없는 낭인패들에게 맡겼을 리 없다는 것. 곧 을미사변을 바라보는 시각틀 자체를 바꾸어야만 이 사건과 범인의 정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여우사냥’은 일본 군부의 군사 작전이었다!
을미사변은 1년 전 ‘경복궁 기습 점령’ 사건의 복사판
사실 일본군의 경복궁 난입은 을미사변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명성황후 살해 1년 전에 일본군은 ‘경복궁 기습 점령’ 사건을 일으켰다. 청일전쟁의 발단이 된 이 사건은, 일본군 2개 대대가 경복궁을 점령하여, 고종을 인질로 잡고 대원군을 앞세워 친일정권을 세운 일을 말한다. 작전계획서까지 마련됐던 이 사건은 을미사변과 거의 복사판이다.
이후 청일전쟁의 승리로 의기충천했던 일본은 러시아 주도로 이뤄진 삼국간섭으로 다시 위기감에 빠진다. 특히 민 왕후를 중심으로 ‘인아거일引俄拒日(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을 물리침) 정책이 시행됨에 따라, 일본 입장에서는 민 왕후 제거가 시급한 목표로 대두되었다. 을미사변을 두어 달 앞둔 7월 19일 육군 무장 출신 미우라가 일본공사로 파견되고, 대본영의 지시로 공사관 부속무관 구스노세 유키히코 중좌 밑으로 대위 3명과 하사관 5명을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배치한다. 실제 사건 당일 경복궁 난입에 동원된 일본군 장교는 10여 명에 이르고, 동원된 군 병력만 해도 3개 대대나 되었다.
이처럼 을미사변을 군사작전의 시각으로 볼 경우, 일본 군부가 결과를 책임질 수 없는 낭인부대에게 그 임무를 맡겼을 리 만무하다. 곧 민 왕후를 실제로 살해한 자는 특별한 임무를 받고 현장으로 투입된 현역 군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가 바로 경성수비대 소속의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이다.
‘왕비를 살해한 육군소위’는 누구인가?
저자가 미야모토 소위를 왕후 시해범으로 지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결정적인 단서는 을미사변 당일, 우치다 영사가 하라 다카시 외무차관에게 보낸 한 통의 비밀 서한이다. 사변에 대한 간략한 개요를 담은 이 보고에는, “살해당한 부녀 중 한 명은 왕비라고 하는바, 이를 살해한 자는 우리 수비대의 어느 육군소위로서……”라는 대목이 나온다. 사변 당일 사건의 과정을 전해들은 우치다가 시해범의 정체를 파악하고, 곧바로 상부에 보고한 것이다. 이후 그는 「우치다 보고서」나 히로시마 지방재판소의 검사정 보고에는 ‘육군사관’이란 표현을 써 범인의 정체를 흐리고 있다. 하지만 우치다가 하라 차관에게 읽고 태워줄 것을 요청할 정도로 민감한 내용이 담겼다는 점에서, 첫 번째 비밀서한이야말로 그날의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럼 우치다가 거론한 육군소위는 누구인가? 당시 경성수비대에는 4명의 소위가 있었다. 그중 다케나가 소위는 경복궁 경비를 서고 있었고, 미야모토를 제외한 두 명의 소위는 당일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유일하게 왕비 살해 현장에 있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는 인물이 미야모토 소위이다.
을미사변 직후, 사건에 참여했던 경성수비대 군 지휘관들이 히로시마 헌병대에 수감돼 조사를 받는다. 그 과정에서 군 장교와 낭인의 입을 통해 미야모토 소위가 마키 특무조장과 함께 왕비 살해 현장에 있었다는 증언들이 반복해서 나온다. 그중에는 미야모토가 왕비를 보호하려던 궁내부대신 이경직을 총으로 쐈다는 증언도 있었다.(이 책 117~118쪽)
사건 직후 일본 군부의 의심스런 움직임들
그리고 미야모토 소위를 둘러싼 여러 의혹들
이런 증언 등이 사실이라면, 미야모토 소위가 왕비 살해 현장에 있었고, 마키 특무조장이 그를 수행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의심스러운 것은 이후 일본 정부의 대처이다. 미야모토 소위와 마키 특무조장은 사건 한 달여가 지나서야 뒤늦게 본국으로 소환 명령을 받고, 각각 하급장교, 부사관에 불과한 둘의 귀국 동정이 대본영의 참모차장, 육군성의 차관 등 군 수뇌부에게 세세하게 보고가 된다. 그러고는 불과 3일 만에 서둘러 참고인 조사를 끝낸다. 구스노세 중좌를 비롯한 8명의 장교들이 헌병대 감옥에 수감된 채 조사 받은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의심을 더하는 것은 그 다음부터다. 조사 직후 소집 해제된 미야모토가 1년 9개월 뒤에 타이완 헌병대로 발령이 난 것이다. 당시 타이완은 타이완 민중들의 항일투쟁이 극심했던 곳으로, 일본 병사들이 숱하게 죽어나갔다. 특히 토비 진압의 선봉에 선 헌병대는 가장 위험한 병과였다. 38세라는 늦은 나이에 미야모토는 어째서 이 사지(死地)를 제 발로 찾아간 것일까? 그리고 을미사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구스노세 중좌가 타이완 총독부 과장으로 있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저자는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의혹을 제기한다. “미야모토를 보낸 배경에는 일본군 수뇌부의 고도의 계략이 숨겨져 있다. 군 수뇌부는 을미사변 당시 미야모토 소위의 역할을 보고받아 잘 알고 있었기에, 그가 일본에서 계속 생활할 경우 을미사변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발설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의심에 더욱 부채질을 하는 것은 타이완에서 교전 중 사망한 미야모토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야스쿠니 신사 충혼사』(정부로부터 제신명부를 받아 영령으로 합사한 자들의 명부)에 그의 이름이 빠져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이 실수로 보기엔 무척이나 중대한 문제로, 앞서 구스노세 중좌가 미야모토 소위의 전사 소식을 전해 듣고, 군 수뇌부와 그의 제신명표 문제를 의논했을지 모른다고 추정한다. “이웃나라 왕비를 살해한 자를 야스쿠니 신사가 다른 전사자와 합사해 ‘천황 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으로 모시는 사실이 후일 밝혀질 경우, 국내외적으로 큰 물의를 빚을 가능성을 우려”했을 것이란 의혹이다.
왜 미야모토 소위를 살해 현장에 투입했는가?
마키 특무조장의 역할은 무엇이었나?
그럼 왜 미우라 공사와 구스노세 중좌 등 ‘왕비 살해’ 작전의 책임자들은 수비대의 중위(5명)와 소위(4명) 가운데 미야모토 소위를 골라 살해 현장에 투입했을까? 저자는 그들이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해 적임자를 찾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첫 번째로 하사관이나 병졸에게 그 같은 중책을 맡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중대 병력을 지휘해야 하는 중대장(대위)을 제외한 중위나 소위 등 초급 장교 중에서, 두 번째로 일국의 왕비를 살해하는 중차대한 임무를 맡기는 만큼 상당한 군대 경험과 인명을 살상한 경험, 즉 실전 경험이 있는 자, 세 번째로 임무를 수행한 후 발설하지 않을 ‘신뢰’할 수 있는 자로 골라야 했을 것이다.”(이 책 123쪽) 실제 미야모토 소위는 10여 년에 걸친 군 경력에다 ‘동학당 정토’에 참가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럼 살해 현장에 있던 마키 특무조장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그에게는 두 가지 임무가 주어졌을 거라고 추정한다. “미야모토 소위 혼자 현장에 투입했을 때, (…) 부상, 살해당해 임무 수행에 실패할 경우를 상정할 수 있다. (…)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현장 상황이므로, 단수보다는 복수로 보내 상대방의 방어 또는 위해에 대비하는 일반적인 신변 경호의 원칙을 따랐을 것이다. 두 번째로 (…) 미야모토 소위가 혹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처지에 놓일 경우 그 임무를 대신 수행하라는 역할이 부여됐을지 모른다. 그가 하사관 가운데서 가장 경험이 많은 특무조장인 만큼 충분히 그 역할을 해내리라 판단했을 것이다.”(이 책 130쪽)
“이 책은 을미사변 연구의 중요한 단초가 될 것이다”
을미사변 3개월여 만에 사건의 총책임자 미우라 일본공사를 비롯해, 일본인 56명(군인 8명, 민간인 48명) 모두가 무죄 판결을 받았다. 세계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참사이자, 우리 민족의 자존심에 커다란 생채기로 남아 있는 을미사변의 허무한 결말이었다.
이 책은 을미사변 연구의 가장 난제인 ‘명성황후 살해범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일본 군부의 역할에 초점을 두고 다루고 있다. 명성황후 시해범이 민간인 신분의 낭인인 경우와 군인인 경우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당시 주한 일본공사의 지휘를 받아 동원된 일본군 부대에 소속된 군인, 그것도 현역 장교가 시해범일 경우 당시 일본 정부의 법적·외교적 책임은 더욱 무거울 수밖에 없다.
사건 직후 일본인들의 증거 인멸과 왜곡 등으로 여전히 을미사변 연구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일본 학계의 경우, 재일한국인 사학자와 극히 일부의 일본인 연구자를 제외하고는 의식적으로 이 사건에 대한 연구를 외면하고 있다. 결국 이 사건은 국내 연구자들이 두고두고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명성황후 서거 120년을 맞은 올해 출간된 이 책이, 독자들에게 을미사변에 대한 초보적인 이해를 돕고, 관련 연구자들에게는 새로운 자극이자 단초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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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 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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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 새창으로 보기
이화준 ㅣ 2015-10-23 ㅣ 공감(0) ㅣ 댓글 (0)
조선의 500년 역사 중 가장 치욕적이고 지우고 싶은 부분. 바로 고종시대입니다.
한 나라의 왕비가 그것도 한 나라의 수도로 가장 경비가 삼엄한 궁궐 침실에서 일본인 낭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니 말입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일본 군인과 낭인들이 침입한 것으로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조선인 훈련대 2개 소대가 동원되어 왕실의 경비대와 접전을 벌여 일본 군인과 낭인의 침입을 도운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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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에서 조인된 청일전쟁 강화조약으로 청나라는 랴오둥 반도와 타이완 등 일본에 할양하고 배상금으로 2억 량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전쟁을 끝마칩니다. 그러나 남하정책을 추진 중이던 러시아가 프랑스, 독일과 연대해 일본에 랴오둥 반도 영유를 포기하도록 압박했습니다.
일본은 삼국의 압력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해 같은 해 5월 5일 랴오둥 반도 영유를 포기했습니다.
이런 국제 정세 속에 조선에 대한 일본의 야욕이 드러나자 민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물리친다는 '인아거일' 전략의 외교를 진행합니다.
같은 해 8월 말 단행된 제3차 김홍집 내각은 친러파와 민씨 세력을 바뀌고, 친일내각이 추진하던 각종 개혁은 폐기가 되었습니다.
한편 왕실과 민씨 일파에선 일본군 장교가 교육하는 훈련대를 해산시켜 군대에서도 일본의 영향력을 없애려 하였습니다.?
이를 타계하기 위해 일본은 육군 중장 출신인 미우라 고로를 임명하여 민비를 제거할 계획을 수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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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라는 민 왕후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가장 강력한 왕후 반대 세력인 대원군을 이용하기로 계획합니다.
자정 무렵 아디치가 이끄는 낭인퍄와 사복의 일본인 순사 등 30여명이 공덕리 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으로 향했습니다.
한밤중에 처들어간 이들은 대원군을 급박하여 가마에 태워 경복궁으로 행했습니다. 대원군 일행이 서대문 쪽으로 향하던 중 한성부청 (현 서대문경찰서) ?부근에 우범선이 이끄는 조선 훈련대 제2대대 병사들과 합류하여 새벽 5시 30분 광화문에 도착하였습니다.
일본 순사 몇 명이 긴 사다리로 광화문 담벼락을 타고 넘어가자 경비하던 시위대 병사들은 무기를 버린 채 도망쳤습니다.
광화문이 열리자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대원군과 함께 궁구러로 진입하였습니다.
이때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이 경복궁 밖에서 대기 중이던 훈련대 1개 중대 병력을 겨우 설득하여 군부대신 안경수와 함께 광화문으로 집입하는 일본군을 제지하려 하자 총격전이 벌어졌고 홍계훈은 일본군 장교가 쏜 총에 맞아 전사하였습니다. 총격전은 불과 10여 분 만에 끝이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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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 당일인 1895년 10월 8일.
우치다 영사는 경복궁에서 돌아온 낭인들로 부터 사건의 전말을 듣고 외무차관 하라 다카시에게 급보를 전한다.
"살해 당한 부녀 중 한명은 왕비라고 하는바, 이를 살해한 자는 우리 수비대의 어느 육군 소위로서....."
"..... 극비리에 보고 드리는 바이오니 부디 일람하신 후에는 태워 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문구 속에 처음으로 일본 군인이 참여 했고,
살해범이 육군 소위임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육군 소위는 누구인가??
군법회의 팔결서에 따르면 소위 4명 중 다케나가 데쓰노스케는 중대 지휘를 맡았고, 나머지 소위 2명은 궁녀 등 살해 현장에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
또한 군법회의 3일 만에 조사 종결로 판결하고 소집 해제되어 고향으로 귀향하게 된다.
그 이후 1년 9개월 뒤인 1897년 9월 27일자 미야모토가 육군 보병소위에서 육군 헌병소위로 임명되어 파이완으로 파견된 뒤, 같은 해 12월 20일에 전사 했다는 뜻밖의 사실이 밝혀졌다. 왜 일본은 저항이 심한 파이완 반일투쟁 최전선에 미야모토를 다시 내세웠을까?
만일 미야모토가 살아 있다면 언제가는 민 왕후 살해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어 일본의 외교 상 불리하게 될 것을 염려해서일 것이다.
이에 대한 반증으로 침략전쟁에 동원되어 전몰한 영혼을 신으로 받드는 야스쿠니 신사 명부에 미야모토 이름이 없다.
심지어 같은 타이완에서 같은 시기에 치안을 담당하던 경찰도 야스쿠니에 이름을 올렸는데도 말이다. ?
이는 만일의 사태를 염려한 일본의 치밀한 계획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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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되었든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약소국 조선의 치욕으로 간과하기에는 너무 슬픈 역사이다.
또한 일본인이 사건의 주범이지만 이를 옆에서 도운 조선 훈련대가 있었다는 사실은 또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왜 이런 과거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오늘을 사는 우리는 과거를 잊지 말고 미래를 준비해야할 것이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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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를 둘러싼 의혹 새창으로 보기
몽당연필 ㅣ 2015-07-26 ㅣ 공감(4) ㅣ 댓글 (2)
말말말. 요즘 일간지나 인터넷으로 보도된 기사를 보면 의미를 상실한 말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언행불일치, 막말정치를 일삼는 정치인들을 보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언제쯤 진정한 모습으로 자리매김할지 의문이 드는데요.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것이 바로 일본의 행태지요. 우선 군함도라 불리는 일본 나가사키의 하시마섬. 수많은 조선인을 비롯해 여러 나라의 국민들이 강제로 끌려와 가혹하게 노역과 착취를 당했던, 참혹한 참상이 어린 곳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이곳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가혹한 조건에서 강제노역 했다’는 것을 인정했다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자마자 '강제노동이 아니'라는 궤변과 망언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거기다 일본의 대기업인 미쓰비시가 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노역에 동원된 미국과 중국인들에 대해서는 사과와 보상을 하겠다고 하면서도 정작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우리에게는 어떠한 사과도 하질 않고 있는데요. 이뿐만이 아닙니다. 일본은 자국에게 불리할 수 있다면 역사를 왜곡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미처 모르는 사이에 자행되었던 역사왜곡, 바로 명성황후의 죽음에 얽힌 의문입니다.
일국의 왕비가 자신의 나라 수도 한복판에서, 그것도 시위대가 지키는 왕궁 안에서 외국 군대와 폭도들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되고 불태워진 것이다. 그야말로 세계사에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참사였다. 그런 만큼 을미사변은 우리 민족의 자존심에 커다란 생채기로 남아 있다. ㅡ 11쪽. 프롤로그 중에서.
‘을미사변’을 인터넷에 검색하면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조선 고종 32년(1895년)에 일본 자객들이 경복궁을 습격하여 명성 황후를 죽인 사건’, ‘1895년(고종 32)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주동이 되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일본세력 강화를 획책한 정변’. 어느 사이트에서나 명성황후를 시해한 범인에 대해 거의 비슷하게 ‘자객’ ‘괴한’ ‘낭인’이란 표현을 쓰고 있는데요. 이것이 과연 정확한 것일까? 저자는 이점에 의혹을 갖습니다.
의혹을 풀기 위해 저자는 우선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알려줍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랴오둥 반도와 타이완, 엄청난 배상금을 거둔 것을 시작으로 조선에 대한 지배를 가일층 매진하기에 이르는데요. 이런 일본에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제재를 가하고 나섭니다. 이른바 ‘삼국간섭’의 결과로 일본이 청나라에 랴오둥 반도를 돌려주자 조선은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물리친다’는 ‘인아거일’ 전략으로 나갔는데요. 이에 일본은 조선 지배의 걸림돌이 된 러시아를 끌어들이는데 앞장 선 왕비를 살해하려는 모의를 세우기에 이릅니다. 1895년 10월 8일 여명, 일본은 명성황후를 살해하기 위해 왕비와 견원지간이었던 대원군을 내세워 궁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합니다. 명성황후 시해작전, ‘여우사냥’은 이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광화문이 활짝 열렸다. 이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대원군과 함께 궁궐로 진입했다. ㅡ 47쪽.
명성황후의 살해된 사건이 벌어진 당시의 배경과 시해사건 당일의 상황을 조목조목 짚어준 다음 저자는 말합니다. 명성황후 시해범은 결코 낭인이 아니라고. 한 나라의 왕비를 살해하는 작전에 ‘정해진 직업도 없이 여기저기 유랑하며 떠돌아다니는 부랑인’에게 맡길 수는 없다고. 상식적으로도 맞지가 않는다고. 일본 군부는 물론이거니와 천황도 알고 있었던 작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낭인’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억지주장일 뿐이며 일국의 왕비를 살해한 것으로 쏟아질 외교적인 비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낭인설’로 조작했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우치다가 밝힌 이 ‘왕비를 먼저 칼로 친 육군사관’이 바로, 하라에게 보낸 사신에서 말한 ’우리 육군소위'이며, 그가 바로 이 책에서 검증하려는 미야모토 소위다. ㅡ 97쪽.
책에는 저자가 시해현장에 있었던 두 명의 군인 중 미야모토 소위가 왕비 시해범으로 주목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어떤 것을 근거로 했는지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우치다 영사가 외무차관에게 보낸 비밀의 서한인데요. 읽고 나서 태우라고 주의를 줄 정도였다니 그 서한이 담고 있는 진실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짐작이 됩니다. 이후 미야모토 소위의 행적을 추적해보면 의심스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 모두가 ‘명성황후 시해범은 미야모토 소위’라는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로 알려진 이 날이 우리에게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날이더군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이 언도된 날이 바로 2월 14일이라는 사실을 올해가 되서야 알게 됐습니다. 이후로 해마다 2월 14일이 되면 예전과는 다르게 숙연한 마음으로 맞이하게 되겠지요. 한글날 즈음해서도 마찬가지가 될 것 같습니다. 한글날 전날인 10월 8일이 명성황후가 무참하게 살해된 날이니 말입니다. 명성황후가 서거한지 올해 120년을 맞게 됐지만 그 억울한 죽음에 대해 아직도 이렇다 할 연구가 없다는 것이 실로 안타깝습니다.
그럼 왜 명성황후는 우치다 영사의 말처럼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흉악한’ 사건에 휘말려 저 같은 최후를 맞이했는가? 이에 대한 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는 약소국의 왕비였기 때문에 그런 변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ㅡ 253쪽. 에필로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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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모토 소위,명성황후를 찌르다 새창으로 보기
우보 ㅣ 2015-07-26 ㅣ 공감(3) ㅣ 댓글 (0)
2015년은 구한말 명성황후 서거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교과서,매체,소문 등을 통해 명성황후가 누구의 손에 살해되었는가는 안개 속과 같다.게다가 이 문제를 파고 들려는 역사 연구가가 많지 않은 것도 안타깝기만 하다.다행히 이종각 저자에 의해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관련하여 다방면의 사료를 수집하여 얻은 결과가 이 도서인데,읽어 가다 보니 당연 통한으로 남는 것은 강한 국가,강한 민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명성황후가 시해되던 1895년 조선은 풍전등화와 같은 형국이었다.동학혁명,청.일전쟁은 강대국에게 좋은 먹이감이 되었다.국내에선 민란이 끊이질 않았고,대외적으로 개방의 압력을 받았던 조선은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정책 실행보다는 수동적으로 끌려 다니던 못난 나라였다고 생각한다.
1876년 운요호 사건으로 일본과 불평등 조약(강화도 조약)을 맺었던 조선은 을미사변,을사늑약,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불행의 연속이었다.동학혁명이 거세어지면서 조선 조정은 청국에게 군 요청을 하게 되고,일본은 이에 질세라 청과 일전을 불사른다.결국 이것이 청.일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일본은 승리를 거머쥐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는다.랴오뚱 반도를 할양 받으려 했던 일본은 독.프.러 3국 간섭으로 랴오뚱 반도를 할양 받지 않는 대신 청국에게 거액의 보상금을 받는다.이 시기 조선 조정은 친일파와 친러파로 분류되는데 친러파의 핵심인 명성황후였다.일본 정부는 명성황후가 눈에 가시,미운 오리새끼였기에 폐제(廢除)하려 치밀한 음모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청.일전쟁의 공신으로 인정 받았던 이노우에 가오루 공사는 조선에 러시아를 불러 들이는 결과를 초래하고,명성황후를 제거해야 조선에서 일본이 당당하게 세력을 팽창시키면셔 조선을 병탄할 수 있겠다는 계산을 했던 것이다.이노우에 가오루 공사 대신 후임으로 조선에 공사로 온 사람은 바로 미우라 고로였다.거사 전날 군부대신 안경수는 미우라 공사에게 훈련대 해산 예정을 통보하게 되니 미우라 공사 입장에서는 차질없이 거사 성공만 남은 셈이었다.그는 육군 보병 중장출신으로 명성황후 살해를 실행하기 위해 휘하 군부 요인들을 내세워 조선의 심장부를 난입했다.또한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쿠데타로 위장했다.
명성황후 시해 당일 경복궁 담을 넘어 명성황후 침전이 있는 건청궁까지 난입했던 자객(刺客)들은 명성황후의 거처를 수소문하면서 궁녀들을 시퍼런 칼날로 인정 사정없이 살육한다.이 자리에 궁내부대신을 먼저 발포하고 명성황후를 가장 먼저 칼로 찌른 장본인이 바로 미야모토 다케타로우 소위다.미야모토는 생경한 인물인데 명성황후 살해 직후 우치다 사다쓰치 일본 영사는 명성왕후 살해 사건에 대한 뒷처리를 했던 인물이다.그는 당시 살해 사건에 대한 객관성과 신빙성이 두드러지기도 한다.일등 신민국가인 일본제국이 이웃 나라 왕후를 살해하려 했던 음모에 대해 개탄을 금치 못한다.명성황후는 건청궁 옥호루에서 일본 낭인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다.시신은 옥호루 뒷쪽 녹산(鹿山)에서 통나무에 기름을 부어 화장하고 유해를 연못에 버렸지만 후환이 두려워 다시 수습하여 녹산에 묻었다고 한다.이후 청량리 홍릉에 이장하고 고종이 승하하면서 남양주 홍유릉(후비포함)에 합장했다.그렇다면 미야모토 소위는 누구일까?
미야모토 소위는 일본 야마구치현 평민 출신으로 동학혁명 정토(征討)에 참여했고,명성황후 살해 사건에 연루된 소위 네 명 가운데 미야모토가 끼여 있다.일본 정부,대본영은 미야모토와 같이 계급이 낮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을 하수인으로 내세우고 거사가 끝나면 없었던 걸로 하려고 했던 흔적,심산이 강렬하게 다가온다.미야모토가 거사를 마치고 바로 퇴한(退韓)한 뒤 일본에 머물게 되면 그가 훗날 심경의 변화가 있어 을미사변에 관여했다고 이실직고할지도 모르기에 일본 정부는 미야모토를 타이완 헌병대로 차출시키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크다.미야모토 중위(1858∼1897)는 짧은 삶을 살았다.명성황후 거사 직후 일본 정부에 보낸 제1타전에서 일본 군부가 살해했다는 내용,그리고 우치다 영사가 올린 정식보고서,비밀사신(私信)에서 '육군소위','육군사관'을 왕후 살해범으로 단정하고 있다.그런데 일본 정부는 일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넋을 위로한다는 의미에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는 명단에 미야모토 다케타로우라는 인물은 없다.일본 정부 최고위층,대본영 수뇌부가 조직적.계획적으로 명성황후 살해 사건을 은폐,왜곡,증거 인멸을 획책하고 있다.명성왕후 살해 사건의 주범이 이제야 밝혀져 다행이다.일본 정부는 객관적인 증거자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리발을 내밀 것이낙.역사를 은폐,왜곡하는 민족에겐 미래가 암울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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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역사] 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 새창으로 보기
책력거99 ㅣ 2015-07-26 ㅣ 공감(1) ㅣ 댓글 (0)
[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 ] 책제목이자 곧 사건의 본말을 파혜치기 위한 화두어 이다. 2009년도, 재일교포 사학자 김 문자 선생의 < 조선왕비 살해와 일본인 > 2009년이란 책을 통해서 우치다 영사가 하라 외부 차관에게 보낸 비밀 서신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 경성 수비대육군 소위에 의해 왕비가 피살되고 , 미야모토 소위가 바로 그 당사자로 보인다는 사실 관계자료에서 출발한 이책은 이전의 추리 논증이나 역사적 고찰 없이 다만 일제에 의해 전해저 내려온 그냥 단순한 낭인 폭도들의 집단에 의해 무참히 살육 당한 당시 궁궐 안의 아수라장을 생각해 볼때 일대 사건의 전환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무지 몽매한 대한 국민 백성들이 이재껏 , 나라님의 말슴을 잘 듣고 , 하라면 하는 시늉이나라고 밥걱정 하면서 하루 하루 연명 하던 시절, 그리고 , 을미 사변 이후의 아관파천과 더욱 복잡 다단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의 시나리오에서 결국 1905 년 한일 합방 까지 거침 없이 이루어진 역사적 사실을 본다면 단순한 광기 어린 집단이 아닌 , 치밀하고도 조직 적인 군부의 개입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 작전" 의 성격인 것이다...
그간 많은 사료로서의 자료를 대체 해준 < 우치다 보고서> 등에서는 이미 많은 조작과 은폐가 된 상태에서의 공식 문건이므로 신회성의 가치가 떨어 진다고 하겠다.
비록 흥선 대원군이라는 꼭두각시를 내세워 또한 조선의 마지막 군대 해산을 하루 앞둔 시점에서 그들을 이용하고 뒤로는 치밀하게 사건을 만들어온 그들의 진정한 배후는 당시 일제 군부의 수뇌부라는 논리에는 심증이 가는 바이다.
단순 낭인 집단들의 폭거 엿다면 , 한국 지리에서도 비밀에 속하는 궁궐 내부 지도와 도랑을 타고 들어가는 진입로 지시까지 완벽 하게 설명 할수 있을까 . 도한 미야모토 소위가 당시 앞장서서 민비를 살해 하지 않았더라면 , 그리도 주도 면밀하게 본국으로 소환 하고 이듬해에 자의반 타의반의 전장터인 타이완의 헌병부로 발령내어 결국 전사자로 군갑 하게 만드는 그들의 용의 주도함에 치가 떨릴 뿐이다.
이작전에 가담했던 일부 군인 집단과 , 작전 세력과 그 배후들 , 영사와 영사관에서는 나중에 되어야 알게 되었다고 하여도 이도한 역사적 사실 은폐에 적극 가담한 죄는 치유 될 수 없는 그들의 역사에 또한 오점을 남기지 않겠는가 .. 본국으로 소환된 사진사와 무전기사의 함구령 , 결국 신사에 까지 합방 되지 못한 당시 살해범의 유력한 용의자인 미야모토 소위는 어디로 가버렸는가 ..
많은 역사적 사실들과 그에 부합되던 되지 않던 사건의 객과적인 본말을 지켜 보는 입장이라면 , 우선 나라의 약함과 왜소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 서로 내분만 일으켰던 조선말의 상황이 올해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는 8월 에 들어서기 전 한번 조상들에게 질문 해야 한다고 본다... 왜 그리도 적들을 감싸 안고서 내부 싸음만을 일삼았느냐고 말이다.
나라든 집안이든 망하기 전에 반드시 조짐이 있다고 한다. 의견 불일치의 일로 부터 , 여러가지의 세력 다툼가지 , 당시로서는 그러한 일들이 그들의 존치를 좌우 하는 일이 였기에 그렇게 처신 을 하였겠지만 , 결국 나라를 일제에게 내어 주게 된 연후도 거슬러 올라가면 벌서 1592 년 임진란 전후 부터라고 할수 있겠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미국제독에 의해 1854년 2. 13일 개항을 하게 되고 이후 메이지 유신 ( 1871 ) 이 빠르게 진행되어 그 진보 세력이 주축이 되어 하나의 열강 세력으로 발전 하게 된다. 1883 년 인천항 개항이 이뤄진 조선은 이후 일본인과 러시아 중국인들의 이합집산이 이뤄진다. 1871년의 신미양요 당시 강화도에서의 미국과의 교전에서는 많은 인명 손실을 보았으나 지켰내었다고자평 하나 이는 또다른 괘적으로의 이행에 불과할 뿐이란것을 역사는 객관화 해서 알수 있다.... 결국 나라의 부강을 키우지 못하고 내부 분란과 외부와의 선진 기술을 제때 받아 들이지 못한 우물안 개구리 식의 조선은 차츰 쇄국정책의 테두리안에 자업 자득을 만들어 낸 부분이 없지 않아 잇지 않을까 ,,, 역사란 돌고 도는 것이라지만 , 만약 우리나라가 일본이란 섬나라 보다 먼저 무기 체계를 확립 하고 , 규율이 잇어 제대로 된 군대를 만들고 , 안으로는 안정과 밖으로는 강건함을 견지 하였다면 , 이리도 쉽게 나라를 이리떼 들에게 넘어 가게 만들었을가 하는 안타가운 생각이 든다.
지금은 다변화된 사회이고 , 다중 무역을 하는 시대 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일본은 지속적으로 독도 또한 자신들의 영토라는 주장을 지금껏 해오는 바이고 대부분의 초, 중등 학생들은 이러한 교육 환경에서 자라 나왔기 때문에 자국의 역사 틀어짐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 또한 제대로된 역사 의식을 반영한 교육이 이뤄지지 않는 다면 통일 이후의 한국의 미래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장담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나라의 부강은 안으로 부터 만들어 나아가야 하고 , 밖으로의 대응도 유연 하게 하면서 받아 들일 건 받아서 배우고 또한 익혀서 나아가야만 한다. 싫든 좋든 우리는 4대 열강 나라들의 틈 바귀에 놓여져 있는 형국은 120년전 민비 왕비의 살해 당시나 현재나 변함은 없다. 다면 , 정치 , 경제적인 부분으로의 종속이냐 왜곡이냐에 따라 그 방향성이 달라지고만 있을 뿐이다.
자라나는 우리의 젊은 세대들이 이러한 부분을 직시 하며, 세계인의 눈에 같이 동참하고 자력으로 작지만 강한 나라를 만들어 나가는데 전 세대간의 힘이 고루 합해져야 하지 않을가 생각을 해보는 < 책력거99 >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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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9419 ㅣ 2015-07-26 ㅣ 공감(1) ㅣ 댓글 (0)
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
매년 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그럼 하루 전날이 10월 8일은 무슨 날인지 알고 있는가? 아마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무슨 날인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조선의 왕비 명성황후가 일본인 폭도들에 의해 참살당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당시 일본 경서 영사관의 젊은 외교관은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흉악한 사건'으로 본국 외무성에 보고하였다고 하니 얼마나 참혹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국의 왕비가 자신의 나라 수도 한복판에서 무참하게 살해되고 불태워졌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지만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명백한 사실이다. 우리는 치욕적인 이 사건, 즉 '을미사변'에 숨겨진 의혹들을 밝혀낼 의무가 있다.
조선의 지배권을 두고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러시아 세력을 끌여들인 명성황후를 폐제하는 이른바 '여우사냥' 작전을 개시했다.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살해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사실 은폐와 증거 인멸, 역사 왜곡 등 진실을 감추는데 익숙하다. 현재까지 명성황후 시해범은 '일본 낭인'이라는 것이 통설로 굳어졌다. 허나 저자 이종각의 생각은 다르다. 일본 낭인이 아닌 일본군 경성수비대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를 지목했다. 그리고 그가 명성황후 시해범임을 입증하는 자료들을 근거로 제시했다. 만약 미야모토 소위가 시해범이라면 이 사건의 모든 의미가 달라진다. 일본 낭인은 민간인의 신분이지만 미야모토 소위는 일본 군인으로, 그것도 장교이다. 그렇기에 법적, 외교적 책임은 말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워진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기 전, 가장 치욕스러운 사건이 바로 '을미사변'이다. 외국의 군대가 한 나라의 영부인을 살해한 것이다. 그것도 잔혹하게. 오늘날의 일본 군부는 은닉, 외면하고 있지만 진실을 뒷받침해주는 근거들을 여전히 우리 편에 서서 작은 힘이 되어준다. 하지만 국민들의 관심이 부족하다. 치욕적인 사건을 부끄럽게 여기며 묻으려하고 진실을 거부한다. 눈과 귀를 막고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을미년인 2015년, 을미사변이 발생한 지 만 120년을 맞는다. 이 책을 통해 그동안 몰랐던 사실에 대해 한걸음 다가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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