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2-18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 (박유하) : 네이버 블로그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 (박유하) : 네이버 블로그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
작가박유하출판문학동네발매2011.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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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리즘에 대한 뚜렷한 거부감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을 읽어보기는커녕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나쓰메 소세키를 다룬 문학 평론인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제국의 위안부'로 현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저자의 생각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기본적으로 그 대상이 되는 작품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평론부터 본다는 것이 결코 쉬울 리가 없다. (그래서 소세키의 대표작이라는 '마음'도 샀다. 언제 읽을런지는 모르지만.) 일본 소설이라고는 '인간 실격'과 '침묵' 두 개를 읽었을 뿐인 나의 일본 문학 이해가 일천한 것도 사실이다. 읽은 지 석 달이 넘은 상태에서 이 책에 대한 글을 쓰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우선 내가 느낀 점 두 가지를 쓴다.


첫째. 저자가 이 책에서 드러내고 있는 '소세키로 상징되는 일본의 남성 중심 내셔널리즘'에 대한 반감이 결국 위안부 문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는 정대협이나 일부 자이니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물론 '내셔널리즘은 내셔널리즘으로 대응해야 한다' '일본의 남성 중심 내셔널리즘에 맞서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 바로 현재의 위안부 관련 운동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일본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본을 싫어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저자는 내셔널리즘 그 자체를 싫어하고, 이 책에서 분석하고 있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내셔널리즘 못지 않게 '소녀상'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비타협적' 내셔널리즘에 대해서도 반감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어찌 생각하면 소세키의 여러 작품에, 개인주의와 문명주의의 외피 속에 숨어 있다는 내셔널리즘보다, 자이니치인 서경식이나 정영환 교수의 글에 시퍼런 칼날처럼 드러나 있는 내셔널리즘이 저자에게 더 충격을 주었다고나 할까. (사실은 나도 그런 한국의 내셔널리즘에 대해 불편을 느낀 적이 많았다.)


다만, 한가지 아이러니가 있다.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한국 쪽에서 '비타협적' 내셔널리즘을 내세우기보다는 일본의 '내셔널리즘에 덜 경도된 (서경식, 정영환 교수 등이 '타락한 리버럴'이라고 부르는)' 사람들과 대화하고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 낫다는 저자의 생각이, '상상의 공동체'인 '네이션'이 아닌 '실재하는 권력'인 대한민국(국가)에 현실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한일간의 관계가 거의 사상 최고 수준이었던 김대중 정부 때를 생각해 보자. 그렇다고 저자를 우익-국가주의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작년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한일 양국간의 위안부 문제 합의를 저자가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한일관계 개선이라는 한국 정부의 목표를 지지하는 '현실적인 국가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한국와 일본 두 나라의 일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내셔널리즘, 특히 그 완고하고 '남성적'인 태도에 대한 반감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나 나름대로 추측을 해 본다.


두번째는, 과연 한국의 근대 문학가들이 소세키를 비롯한 일본의 동시대 문학가들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 수가 있겠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 책을 보면 소세키는 죽기 전 1910년대에 이미 '문호'로 대접을 받았던 듯하다. 당시 일본에 있었던 이광수나 염상섭 등이 소세키 등 일본 문학가의 영향을 분명히 받았을 텐데, 찾아보니 여기에 대한 연구가 별로 없었다. 오늘 작고한 코미디언 고 구봉서 선생도 일본의 희극 극본을 항상 읽었다는데, 소설가나 시인들이라고 달랐을까? 누군가 한 번 연구를 해 봐야 할 과제가 아닐까 생각했다.


저자는 내셔널리즘, 즉 '내셔널 아이덴티티'가 '국민국가'를 지탱하기 위해 고안된 '모더니티(근대적 요소)'에 지나지 않으며, 그 형성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 문화, 그 중에서도 문학이라는 주장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와 같은 맥락이다. 개인주의자, 문명비판자로 알려졌던 (솔직히 나는 잘 몰랐던 부분이다) 일본의 대표적 근대 문학가 소세키가 사실은 일본의 내셔널 아이덴티티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 저자가 이 책을 쓴 목적이다.


제1장 '소세키의 문명관'에서 저자는 소세키가 가지고 있었던 서양 문명에 대한 '유사 식민지적 공포' 즉 서양이라는 '적'에게 '침범'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사실은 일본 내셔널리즘의 공격성과 패권주의적 욕망을 은폐하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우리 한국의 내셔널리즘과 비교해 본다. 물론, 한국은 일본에 의한 식민지 체험을 가지고 있다는, 그러니까 '식민지에 대한 공포'가 '유사'가 아니라 진짜라는 결정적인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식민지 체험 하나만으로 과연 한국이 공격적 내셔널리즘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솔직히 한국의 내셔널리즘을 정말로 공격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다. 북한이 훨씬 더 공격적으로 보인다. 다만, '일제 강점기 36년'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한국의 내셔널리즘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그 불편함이 결국은 그 숨겨진 공격성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결론을 내린다.


제2장 '소세키의 개인주의'에서는 그가 주장하는 개인주의가 사실은 일본인이라는 '내셔널 아이덴티티'에 입각했다는 것, 국가가 위험해질 경우 개인의 자유보다는 국가의 안위가 우선이라고 하면서 국가주의의 우위를 시사했다는 것, 그리고 '교육받은 일본인 남성'에만 적용될 뿐 교육받지 못한 사람, 여성, 타민족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불완전한 개인주의였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에게 있어서 개인주의란 '일본'의 개성이나 특색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그가 주장한 개인주의는 근대국가의 내셔널리즘과 굳게 결합된 '독일적 개인주의'라는 얘기도 나온다. 그의 글에 나오는 '즉천거사(하늘에 따라 나를 버린다)'라는 표현이야말로 그의 개인주의가 (은폐된?) 국가주의요 질서에 대한 순응을 내포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는 결론으로 이 장을 마무리하고 있다.


제3장, '두 개의 시골'은 '풀베개'와 '도련님'이라는 두 소설에 사뭇 대조적으로 나타난 시골에 대한 묘사를 제시하고 있다. '풀베개'에서의 시골은 서양에 대항하는 동양, 현세와 비교되는 아득한 옛날, 일본 고유의 아름다움, 아와레(처연함) 등을 상징한다. 그러나, 또한 저자는 이 소설에서 아와레라는 '여성미' 그리고 나아가서 여성 그 자체를 전통과 시골 안에 가두어 두고 남성 혼자 '내셔널 아이덴티티의 문명화'로 나아가려고 하는 욕망을 발견한다. 반면, '도련님'에서 시골은 도회지(도쿄)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차별과 혐오의 대상으로 그려진다. 내셔널리즘은 기본적으로 차별과 배제의 과정이며, 동양을 배제하는 서양의 내셔널리즘에 맞서기 위해서 일본의 내셔널리즘은 시골을 배제하는 '도쿄중심주의'로 흘렀다는 얘기로 보인다. 결국 시골의 고립을 통한 도시의 전진이라는 측면에서 두 소설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시골에 대한 혐오는 작년에 읽은 마루야마 겐지의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에서 아주 잘 드러났던 기억이 있다. 소세키로부터 백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전통인 셈이다. 그런데, 일본이 과거 봉건 영주인 다이묘의 힘이 강했던 지방 분권 체제였던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시골 혐오가 얼핏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전근대적 봉건 체제'를 타파하고 천황 중심의 '근대적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는 것이 메이지 유신과 일본 내셔널리즘의 과제였음을 생각하면 또 시골 혐오가 자연스러운 측면도 있다. 한국의 내셔널리즘에 명시적인 시골 혐오가 존재하지 않는 것 역시 이런 시각으로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한국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군현제/중앙집권체제를 확립했기 때문에 굳이 봉건제도 타파를 위해 시골 혐오를 앞세울 필요가 없었던 것이리라.


제4장, '소세키와 제국주의'는 일본 사회가 그동안 소세키를 반국가주의, 반제국주의 인물로 인식해온 경향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그가 조선인과 중국인에 대해 종종 사용한 '더럽다'라는 표현이 '전근대'는 더럽고 '근대/문명'은 위생적이라는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 혹은 오리엔탈리즘의 산물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한국인이 흔히 가지고 있는 '일본은 깨끗하다'는 생각에 대해서도 다시 돌아다 보게 된다. 러일전쟁을 '국가 존망이 걸린 독립 전쟁'이라고 생각했고, 일본이 수행 주체가 되면 전쟁이나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을 멈춘 소세키는 '내셔널 아이덴티티'의 확립이라는 과제에 직면한 '동양의 지식인'이 가지는 한계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는 결론이다.


제5장, '개인주의의 방향'은 '그후'와 '문'이라는 두 소설에 등장하는 개인주의의 한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후'의 주인공 다이스케는 남성에 대한 기존의 젠더 바이어스 및 '국민의 의무' '노동' '결혼' 등 공동체의 규범에 대해 저항하는 이례적인 인물이지만, 이는 일본에 대한 '서양의 압박'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이 저자의 해석이다. 일본이 발전하여 '서양의 압박'을 받지 않게 된다면 공동체의 개인에 대한 규범도 즐어들 것이고, 주인공이 개인주의를 내세울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소세키의 개인주의에 대한 믿음이 그리 깊지 않았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문'은 사랑의 도피행을 단행한 주인공 부부가 거듭되는 사산으로 아이를 가지지 못하면서 '근대가족'으로의 정착에 실패하는 이야기이다. 사실 '모성애'로 '재생산'을 해야 한다는 '근대가족'으로서의 '국민적 의무'에 대한 강조는 출산율 제고가 국가적 과제가 되어 버린 오늘날의 한국에서도 지속되고 있다. 여기서 비쳐지는 불륜에 대한 도덕적인 단죄는 소세키가 개인주의보다는 국민국가의 질서를 더 중요하게 여겼음을 보여준다고 저자는 결론을 내린다.


(사실 내가 놀란 것은 이 소설 '문'에서 보여지는 '근대성'이었다. 1910년 발표된 소설인데, 얼핏 보여지는 소설의 구조는 오늘날의 TV 연속극이 생각날 정도로 자연스럽다. 같은 1910년, 한국 사회는 과연 그러한 '근대성'을 갖추고 있었던가? 메이지 유신 이후 40여년만에 일본이라는 사회의 근대성은 이렇게까지 빨리 발현되었단 말인가?)


제6장, '여자의 부정과 국가'는 소설 '행인'에 등장하는 '여자'라는 존재에 대한 규정을 분석하고 있다. 지식을 익힌 '문명인' 이치로에게 여자란 자기 스스로 통제를 할 수 없는 '자연인'이자 남성의 가부장적 질서유지와 통제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는 이야기이다. 소세키에 있어서 개인주의란 고등교육을 받아 '인격'을 갖춘 남성에 한정되었다는 결론이다.


제7장 '개인주의의 파탄'은 소설 '마음'에 등장하는, '고립과 자기로 넘쳐나느 현대'와 '메이지 정신'의 대립을 다루고 있다. 사실 앞의 여러 장과는 달리 이 7장에 나타나는 소세키의 모습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일본 극우의 모습 거의 그대로이다. '마음'에 등장하는 '메이지 정신'이란 천황 또는 국가에 순사(殉死)하는 일 그 자체이며, 또한 철저히 여성을 배제한 남성들만의 세계이다. (이 대목에서 동성애자인 미시마 유키오가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메이지 유신 100년이 되는 1968년을 전후하여 '마음'에 등장한 '메이지 정신'을 재발견했다는 대목도 의미심장했다. 하지만,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서양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문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일본 사회가 1916년 소세키 사망 직후에 이미 그를 '문호'로 치켜세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자기본위'를 주장한 '개인주의자' 소세키야말로 서양과 맞설 수 있는, '국가를 위하여 소설을 쓴' '민족을 대표하는 문호'로서의 자격이 있다는 논리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소설이라는 이광수의 '무정'이 나온 것이 1917년인데, 그 바로 전인 1916년 일본은 이미 디킨스나 발자크, 톨스토이와 맞서는 '문호'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내셔널리즘은 지금으로부터 딱 한 세기 전 이미 '문호'를 만드는 단계에 돌입한 것이다. 솔직히 무섭다.


내가 알기로, 한국 문학에는 아직 '문호'라고 부를 만한 소설가가 없다. 굳이 만들고 싶지도 않다. 어차피 '문호'란 19세기 내셔널리즘이 한창 유럽을 휩쓸 때의 산물 아니겠는가. 우리 한국의 민족주의 형성에 '문호' 내지 근대 문학이 기여한 바가 크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문호'를 만드는 시대착오적인 행동을 하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본격 소설'은 이제 대중 문화의 자리에서 내려왔으니까.


제8장 '국가의 말'은 소세키가 아닌 모리 오가이라는 소설가의 '무희'를 다루고 있다. 찾아보니 모리 오가이는 소세키와 함께 일본 근대의 '양대 문호'로 추앙받는 소설가라고 한다. 이 책에 인용된 평론가의 말대로 '임신한 여자를 버리고 성공가도를 달리는 남성의 이야기'인 이 소설이 일본 '문호'의 데뷔작이요 대표작이 된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저자는 그 이유를 동양 남성이 '가난하고 사투리를 쓰는' 서양 여성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뒤틀린 제국주의' 내지 '콜로니얼리즘의 역전된 형태'에서 찾는다. 한국 남성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이러한 심리가 1890년 나온 거의 일본 최초의 근대 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소설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서양 여성에 대한 애정보다 국가를 지탱하는 남성 사회의 가치관을 우위에 놓으면서, 그 서양 여성이 정신이상이 되었다는 것을 핑계로 쉽게 떠나 버린 주인공의 결정은 '남성 중심의 내셔널 아이덴티티'라는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와 일맥 상통한다.


물론, '무희'라는 소설을 읽지 못한 상태에서 이 소설을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산물'로 예단하는 것은 위험할 것이다. 서양 여성과 사랑을 나누고 헤어지는 동양 남성의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찌질함' 내지 '비열함'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 역시 문학으로서의 강점이 될 것이다. 찾아보니 오히려 서양 여성의 강인한 자아와 비교하여 주인공의 비윤리적 행동을 반성했다는 해석도 있다. 어쨌든, '부잣집 동양 청년이 가난한 서양 소녀를 버리는' 이야기가 일본의 대표적 근대 문학이라는 사실은 참 복잡한 감정을 가지게 했다.


제9장, '메이지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들'은 일본 식민지 말기 조선인들이 쓴 '친일문학'에 드러난 일본의 모습을 알아보고 있다. 이광수, 서정주의 소설에 나타난 일본의 모습은 기본적으로 '질서'요 '규율'이며 억압적 근대이다. 서정주의 친일문학에서 일본에 대한 소극적인 저항의 기미를 찾아낸 것이 이채롭기도 하다. (서양의)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는 '일본주의'와 공존할 수 없으며, 일본이라는 국가에 충성을 바치려는 조선 남성들에게 어머니, 누이, 아내 등의 조선 여성들은 방해가 될 뿐이었다.


식민지 시대 조선인들이 일본어로 쓴 '친일문학'에 대해서 좀 더 다양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다. 저자는 서정주의 소설에서 약간의 '저항'을 엿보았지만, 결국은 '친일문학'의 분석에 있어서 가장 일반적이라 할 수 있는 '내셔널리즘'의 증거 추출에서 멈춘 셈이다. 위에서 잠깐 언급한, 식민지 시대 조선 문학가들이 일본 문학에서 받은 영향이 일본어로 쓴 '친일문학'에 더 잘 드러날 수도 있으니까.


제10장 '공모하는 표상'은 '무기교의 기교'로 잘 알려진, '조선의 문화예술을 사랑한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을 담고 있다. 그가 내세운 일본의 모습은 '폭력의 일본'이 아닌 '사랑과 예술의 일본'이었지만, 결국 일본=남성, 조선(예술)=여성으로 비유한 것은 대표적인 내셔널리즘의 '타자화'라는 것이다. 일본이 사랑의 주체로서 즐겁고 화려한 색채로 칠해진 모습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 조선은 위로의 객체가 되어 슬프고 외로운, 선 중심의 하얗고 쓸쓸한 모습으로 고정되었다고도 주장한다. 조선 예술의 고유성에 대한 강조는 '국가로부터 자립이 가능한 예술'을 상상하게 하여 오히려 조선의 식민지화를 정당화했다는 얘기도 있다. 야나기에 대한 비판이 오래 전 박종홍, 고유섭으로부터 시작되어 김지하, 최하림, 김달수 등으로 이어졌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저자가 흔히 '친한파 지식인'으로 일컬어지는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해서도 '한국을 배재하는' 내셔널리즘과 '한국을 여성화하는' 젠더의 시각으로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종장 '근대를 넘어서'에서 '근대적 자아'란 개인주의적 성격을 지니면서도 근본적으로 '내셔널한 자아'이며 '국가에 소속되기를 희구하는 자아'일 수밖에 없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제 마지막 페이지에 와서야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그리고 저자가 현재 한국의 내셔널리스트와 힘든 싸움을 하고 있는 배경을 잘 드러내는 대목이 등장한다.


"긍지를 필요로 하는 내셔널 아이덴티티의 구조는 자신이 주변화한 타자에게도 전염된다. 특히 저항 내셔널리즘은 국가를 선험적인 것으로 여기는 발상이 절실할 수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내부의 다른 억압을 정당화하고 갈등과 분열을 은폐할 수 있었다. 물론 피지배자들의 욕망이나 모숨은 그들이 놓였던 지배구조 자체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자각이 없다면 피지배자들 역시 그들이 비판하던 지배와 폭력의 순환구조에 언제든 가담하게 된다."


일본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지 70년이 흐른 현 시점에서 아직도 우리에게 '저항 내셔널리즘'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내셔널 아이덴티티'의 주술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목소리'를 발견하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저항 내셔널리즘'에 안주하려고 할 때마다 그 안에 시퍼렇게 살아 있는 '지배와 폭력의 순환구조'를 감당하기가 너무나도 버겁게 느껴지는 것은 저자와 내가 마찬가지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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