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2-18

대원군·민비·고종…조선 망국의 뒷이야기

대원군·민비·고종…조선 망국의 뒷이야기

대원군·민비·고종…조선 망국의 뒷이야기
망하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의 나라…자학이 아닌 역사의 교훈서 배워야
승인 2016-08-30 15:10:00 | 편집국 기자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망국의 풍경들


어린 시절부터 많이 들어왔던 이야기가 있다.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펴지만 않았으면 나라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라는 이야기, 일본에게 20~30년 정도 개국(開國)에 뒤쳐진 것이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운명을 갈랐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나이가 많이 드신 분들, 배울 만큼 배우신 분들 중에서도 그런 말씀을 하는 분들이 있다.


이영훈 교수님의 발제문 <조선왕조의 해체>는 그런 이야기들이 ‘신화(神話)’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한 마디로 이영훈 교수님의 발제문은, 무척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조선은 일제의 침략 이전에 스스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환경파괴에서부터 시작해 농업생산성의 저하, 경제체제와 국가재정의 전반적인 붕괴, 민심의 이반, 국제정세의 급변, 저급한 리더십 등 여러 요인들이 서로 맞물리면서, 백약이 무효인 지경에서 나라가 망했던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멸(自滅)이었다.


공부가 얕은 토론자로서는, 이영훈 교수님의 발제문에 대해서는 망국의 역사에 대한 더없는 공부가 되었다는 이야기 외에 특별히 덧붙이거나 비판할 것은 없다. 다만 발제문에 대한 이해를 돕는 차원에서, (아마 시간과 분량의 제약 때문에 생략했으리라 여겨지지만) ‘왕조해체의 역사’ 이전에 ‘18세기에 걸친 조선왕조의 안정과 번영’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부탁드리고 싶다.

‘조선왕조의 해체’에 이르는 거시사적 흐름은 이영훈 교수님께서 잘 말씀해 주셨다. 토론자는 그 발표문을 미시적으로 보완하는 차원에서, 당시의 리더십의 한계를 보여주는 망국 전야 조선의 삽화들을 몇 가지 보여주고자 한다.


1. 고종과 신정희의 대화 (매천야록)


고종이 즉위 후 경연(經筵)에서 “어떻게 하면 연운(燕雲)의 땅에 말을 몰아 우리 조종(祖宗)의 치욕을 씻는단 말인가?”라고 하문했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고 싶다는 얘기였다. 오늘날의 국방비서관 격인 무승지(武承旨) 신정희가 “그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라고 했다. 고종이 기대에 차서 “어떤 계책이 있는가?”라고 묻자 신정희는 이렇게 말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덕(德)을 닦으시옵소서.”

신정희는 조선 말기의 대표적 무신인 신헌의 아들로 신정희 자신도 무신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해야 하는 무신(군인)은 구체적‧실천적으로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 직업이다. “덕을 닦으라”는 얘기는 유학자(문신)들이나 할 얘기지 군인이 할 얘기는 아니었다. 조선은 군인조차 문신 흉내를 냈던 나라였다.


2. 민비와 민영휘의 대화 (매천야록)

동학란이 발생한 후 민비가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려 하려 했다. 민비의 척족인 민영휘가 천진조약을 거론하면서 “청국은 진실로 우리의 우방이니 우리를 보호하는 데에 악의가 없다고 보겠으나 왜국이 오래도록 틈을 엿보던 터이니, 만일 조약을 핑계 대고 부르지 않는데도 온다면 형세가 매우 위태로울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하였다. 민비는 이렇게 호통을 쳤다. “못난 놈! 내가 차라리 왜놈의 포로가 될지언정 다시는 임오년의 일을 당하지 않겠다. 또 내가 망하면 너희들도 씨가 마를 것이니, 여러 말 말라.”


민영휘의 중국에 대한 안이한 인식과 일본에 대한 경계가 요즘의 동북아 인식과 비슷하거니와, 당시 상황은 민영휘의 걱정처럼 흘러갔다. 그리고 결국 민비는 ‘왜놈의 포로’가 되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국제정세를 보는 눈이 어두웠고, 나라의 운명보다 자신의 권력을 먼저 걱정했던 여자를 불세출의 외교관이나 되는 양, 혹은 ‘조선의 엘리자베스’라고 치켜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 사진은 일제강점기(1910~1945) 대한제국 황실을 촬영한 것이다. 사진은 고종(高宗)의 둘째 아들이었던 영친왕(榮親王) 이은(李垠)과 그 부인인 이방자(李方子)를 중심으로 고종과 순종(純宗) 내외가 배치되어 있다. 고종은 오른쪽 상단에 위치해 있다./사진=대한민국 역사박물관 현대사아카이브




3. 대한제국 최초의 근대식 군함 양무호


양무호(揚武號)라는 배가 있다. 대한제국이 보유했던 최초의 근대식 군함이었다. 영국에서 1881년 건조한 이 배는 원래 전투함이 아니라 일본 미쓰이물산에서 사용하던 석탄운반선 팰러스(Pallas)호(3432톤)였다. 이 고물 선박을 1903년에 당시 국가예산(500만원)의 10%, 국방비의 30%가 넘은 거금 55만원에 구입한 것이다 (미쓰이물산은 이 배를 25만원에 구입했다). 여기에 낡은 일본 군함에서 뜯어낸 대포(80mm) 4문, 소포(5mm) 2문을 장착해 ‘군함’이라고 했다. 함장은 동경상선학교 출신 신순성이라는 분이 맡았다. 하지만 대한제국 정부는 이 배에서 연료로 사용할 석탄을 댈 돈도 없었다. 바다에 나가는 날보다 항구에 묶여 있는 날이 더 많았다.

이 배는 러일전쟁 직후 일본 해군에 징발 되어 화물수송선으로 쓰이다가 군대해산 후인 1907년 해양실습선으로 전락했고, 1909년 일본 하라다상회에 4만2000원에 팔렸다. 그리고 1916년 동중국해에서 침몰했다.

‘광무개혁’을 대단한 자주적 개혁인 것처럼 포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양무호의 운명이야말로 실패한 광무개혁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4. 독일 영사에게 매 맞은 외부 대신

1898년 7월 당시 외부대신(외교부 장관) 유기환이 독일 영사 구린(口麟: Krien, D)에게 매를 맞는 황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구린의 부름을 받고(일개 영사가 일국의 외부대신을 부른 것이나 그런다고 외부대신이 찾아간 것이나 모두 황당한 일이다) 유기환이 영사관을 찾아 가자 구린이 갑자기 유기환의 팔을 때렸다. 유기환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이번에는 대답도 없이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때리고 문 밖으로 밀어내면서 외부에서 보낸 공문 두 장을 마당에 내팽개쳤다. (<독립신문>, 1898년 7월2일, 4일, 6일, 7일자).

이게 만국공법 체제에 편입된 ‘대한제국’의 모습이었다.


5. 고종의 매관매직 행태 (매천야록)


민영환은 고종의 총애를 받는 신하였다. 그가 외숙 서상욱에게 군수 자리를 하나 달라고 여러 번 고종에게 아뢰었다. 고종은 “너의 외숙이 아직까지 고을살이 하나 하지 못했단 말이냐?”면서 곧 벼슬을 내릴 것처럼 이야기했다. 하지만 벼슬이 내려오지 않자, 민영환이 다시 임금에게 청했다. 임금은 광양군수 자리를 서상욱에게 하사했다. 민영환이 집에 돌아와 “오늘 임금이 외숙에게 군수 자리를 허락하셨으니, 천은이 감격스럽다”고 했다. 그의 어머니가 실소하면서 “네가 이처럼 어리석고도 척리(戚里)란 말이냐? 임금이 한 자리도 은택으로 제수한 적이 있더냐? 어찌하여 너에게만 특별히 은덕이 미친단 말이냐? 내가 이미 5만냥을 바쳤단다”라고 말했다.


민영환처럼 총애하는 신하에게도 벼슬자리는 철저히 ‘give and take'였다는 얘기다. 매천 황현은 “관찰사 자리는 10만냥~20만냥이었고, 일등 수령자리는 적어도 5만 냥 이하를 내려가지 않았다”면서 “부임하면 빚을 갚을 도리가 없어 다투어 공전(公錢)을 낚아내어 상환하였다”고 했다.


6. 노론을 자처한 고종 (매천야록)

고종은 스스로 노론을 자처하여 신하들을 대할 때도 당색에 따라 차별하였다. 매번 대과 합격자가 임금을 알현할 때마다 노론이면 "친구"라 하고 소론이면 "저쪽"이라 하였으며, 남인과 북인이면 "그놈"이라 하였다

널리 인재를 구해 써야 할 임금이 이런 태도를 보였으니, 나라가 잘 될 턱이 있나? 당시 일본에서는 막부의 해군제독으로 홋카이도까지 가서 ‘에조공화국’을 세워가면서 메이지 유신에 저항했던 에노모토 다케아키를 문부대신,체신대신, 농상무대신, 주러시아공사 등으로 중용했다. 메이지유신의 원훈이면서도 서남전쟁을 일으켰다가 죽은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생 사이고 쓰구미치는 이후에도 근위도독, 참의, 육군경, 농상무경, 북해도개척장관, 해군대신, 내무대신, 후작, 해군원수 등을 지냈다. 고종은 갑신정변에 참여했던 김옥균, 홍영식, 서재필, 박영효 등의 가문을 도륙했다.


이상은 대한제국 시절에 벌어졌던 몇 가지 사건들이다. 이런 나라가 망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할 정도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고종의 광무개혁을 높이 평가하면서 고종을 ‘근대화를 추진했던 계몽전제군주’로 미화하고 있다. 하지만 광무개혁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내장원(황실재정기관), 원수부(통수기구) 등 황제의 개인권력기반 강화차원에서의 개혁이었지, 진정한 의미에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추구하지는 못했다.

대한제국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국제(大韓國制)> 제2조를 보면 “대한제국의 정치는 이전으로 보면 500년 전래하시고 이후로 보면 만세에 걸쳐 불변하오실 전제정치이니라”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 무슨 근대성이 있나.

군대해산 당시 대한제국 군대 규모는 중앙과 지방의 군대를 다 끌어 모아도 8000여명 수준이었다, <매천야록>을 보면, 군대가 폐지되자 백성들은 오히려 반겼다는 기록이 나온다, 군대가 아니라 양아치, 무장강도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 고종은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관찰사 자리는 10~20만냥이었고 수령 자리는 5만냥 이하로 내려가지 않았다. 고종 어진./사진=국립중앙박물관



7. 망국의 마지막 풍경 - 시호 왕창 세일

결국 1910년 8월29일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다 (경술국치). 8월22일 조약을 체결하고서도 29일 공표한 이유는 8월28일 순종 즉위 3주년 기념 파티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당시 위정자들의 사고방식이었다 (조윤민, <두 얼굴의 조선사>).

망국 직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기가 막히다. 한 달 내내 정변이나 당쟁 때문에 역적으로 몰려 죽은 옛날 신하들에게 시호를 추증(追贈)하거나 대신들에게 훈장을 주었다는 기록 등이 계속된다. 나라가 망하기 이틀 전인 8월20일에는 26명에게 시호를 내리는데, 정약용에게 문도(文度), 박지원에게도 문도(文度), 남이에게 충무(忠武)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나라가 망하기 전에 ‘시호 왕창세일’을 한 것 같다.


8. 매천의 자결

오히려 초야에 묻혀 있던 매천 황현(梅泉 黃玹)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그나마 선비의 체면을 살렸다. 황현은 "나는 (벼슬을 살지 않았으므로)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국가가 선비를 기른 지 오백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 몸을 바친 자가 한 명도 없다면 어찌 통석할 일이 아닌가! 나는 위로 하늘의 병이의 아름다움과 아래로 평소 읽은 책의 의미를 저버릴 수 없다. 눈을 감고 영영 잠들면 참으로 쾌할 것이다."라고 유언하고,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지난 역사 헤아리니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되기 어렵기도 하다."라는 절명시를 남겼다.


9. 망국, 그 뒷 이야기


나라가 망하자 집권 노론 대신들은 일본 작위를 받았다. 황실은 왕실로 격하되었다. 나라는 망했지만 이씨 왕실의 사직은 계속된 것이다. 이씨 왕실의 사직이 망한 것은 1945년 해방 이후, 맥아더가 일본의 왕-공족, 화족(귀족) 제도 폐지했을 때였다.


작년에 1천만명이 넘는 관객을 끌어 모았던 <암살>이라는 영화가 있다, 배우 이정재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하려 했고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긴 독립투사였지만 마지막에 변절한 염석진의 역을 맡았다, 해방 후 옛 동료들이 나타나 그에게 “왜 변절했느냐”고 질타하자 그는 이렇게 답한다. “몰랐으니까, 해방이 올 줄 몰랐으니까... 알았으면 그랬겠냐”

그게 당시를 살았던 대다수 한국인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일제가 한반도를 넘어, 만주, 중국대륙, 동남아, 태평양을 석권하는 상황에서 지도층, 민족지도자들마저 그 질서에 순응하려 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은 어쩌면 인지상정이었을 것이다
.


그런 어두운 상황 속에서 독립에 대한 희망 놓지 않고 풍찬노숙하면서 고생하고 투쟁한 분들이 독립운동가들이다, 그 분들에 대해서는 아무리 감사해도 지나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분들이 안 계셨으면 오늘날 우리는 일본 사람, 중국 사람, 미국 사람보기가 참 민망했을 것이다.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이승만, 김구. 이런 분들이 있어서 민족의 체면이 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분들의 희생과 노고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일제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던 것은 연합국의 승리, 특히 태평양전쟁에서의 미국의 승리 덕분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독립운동세력은 480만 일본군에 맞서 실제적인 전투를 하지 못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단 한 나라로부터도 국가로 승인받지 못했다. 해방 후 우리의 운명은 여기서 결정되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항일투쟁이라는 것을 대서특필하지만, 김일성이 몸담았던 동북항일연군은 ‘조선의 독립’이 아니라 ‘중국공산혁명’을 목표로 했던 조직이었다.


설사 국내정진군이 작전을 수행했다고 해도, 해방 후 우리의 운명에 얼마나 긍정적 영향을 주었을 지는 의문이다. 예컨대 2차대전 당시 망명폴란드군은 영국본토항공전(배틀 오브 브리튼)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중동, 북아프리카, 이탈리아(몬테 카시노 전투) 등에서 군단 규모 이상의 작전을 펼치면서 엄청난 희생을 치렀지만 종전 후 영토를 소련에 빼앗기고 공산화되는 것을 피하지 못했다. 이게 강자가 지배하는 국제정치의 적나라한 측면이다. 하물며 1개 연대 규모의 병력도, 전투도 없었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무슨 발언권이 있었겠나?




▲ 국제정세를 보는 눈이 어두웠고, 나라의 운명보다 자신의 권력을 먼저 걱정했던 여자를 불세출의 외교관이나 되는 양, 혹은 ‘조선의 엘리자베스’라고 치켜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매천야록에 나온 민비와 민영휘의 대화가 대표적 사례다./사진=뮤지컬 명성황후 포스터



역사를 직시하자


100여년 전의 창피한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자학(自虐)하자는 것이 아니다. 소위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해서도 아니고, 일제(日帝)에 면죄부를 주자는 것도 물론 아니다. 역사를 직시하고, 거기서 ‘교훈’을 얻자는 것이다. 흔히 ‘역사의 교훈’을 이야기하지만, 지나간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으려면, 먼저 그 역사를 직시해야 한다. 역사를 직시하지 못하고 남의 탓만 하거나 분식(粉飾)하면, 우리는 역사로부터 아무런 교훈도 얻을 수 없다.

요즘 한국사회는 거의 병적일 정도로 역사를 분식하고 있다. 고종과 민비의 실정(失政)에 눈감고 그들을 미화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평생 정신병을 앓았던 ‘행위무능력자’ 덕혜옹주를 민족혼의 화신으로 그려내고 있다. 경기도 여주군이 만든 명성황후기념관의 선전문구는 ‘조선을 승리의 역사로 이끈 위대한 철의 여인 명성황후’이다. 100여년 전 망국의 역사 어느 구석에 ‘승리의 역사’가 있다는 말인가?

문제는 역사에 대한 ‘분식회계’가 단순히 지나간 역사에 대해 분칠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어느 386정치인은 8.15경축사에서 “1945년 8월 15일은 세계사의 중대 전환점...우리 민족이 전 세계 평화세력의 일원으로서 이처럼 중대한 역사적 전환을 만들어 낸 주역이었다” “광복절을 자랑스러운 '승리의 날'로 기념하자”고 했다. 그의 연설은 박근혜 대통령의 8.15경축사와 비교되면서 일부 세력의 박수를 받고 있다. 여기서 역사에 대한 ‘분식회계’는 현실정치에서의 선전선동수단, 정치의 무기가 된다.


구한말 조선의 역사는 ‘승리의 역사’가 아니었다. 1945년 8월15일은 우리의 힘으로 만들어낸 ‘승리의 날’이 아니었다. 그런 주장은 ‘아Q식 정신승리’일 뿐이다. 아무리 못나고 부끄러운 역사일지라도, 두 눈을 부릅뜨고 그 역사와 대면하자. 그래야만 우리는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어 오늘의 현실에 응용하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재료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100여년 전 그 지지리도 못났던 나라가 오늘의 대한민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도, ‘건국의 아버지들’과 ‘개발연대의 주역’들에게 역사를 직시하는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이 글은 자유경제원이 29일 주최한 '조선 망국, 교훈을 얻자' 토론회에서 패널로 나선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가 발표한 토론문 전문이다.)[배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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