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정권의 반대자를 고문해 감옥에 보내고 비전향 장기수에 대한 전향 공작으로 자기 신념을 지키려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장애자로 만든 이들 중에서, 제대로 처벌받은 이는 거의 없다. 피해자는 있어도 가해자가 없는 게 ‘관례’다. 이거야말로 대한민국에서 과거 정리의 전형적 방식이다.



양심수 양산의 정치는 공포정치다. 헌법상 보장된다는 자유의 내용은 퇴색하고 ‘자유민주주의’는 형해화돼 껍데기만 남는다. 이러다가는 90년대까지 기승부렸던 고문도 돌아올 날이 멀지 않을 것이다. 저항만이 대한민국을 인간이 그나마 살아 숨 쉴 수 있는 나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나와 대한민국 사이의 인연에 애당초부터 ‘양심수’라는 핵심어가 있었다. 소련 공민으로서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인터내셔널)에 가입이 가능해진 1989년부터 내가 바로 가입을 하여, 그때부터는 빠짐없이 한국 양심수들에 대한 자료를 받고 석방요청서에 사인하기 시작했다. 가끔가다가 국제사면위원회의 한국 관련 자료는 충격 그 자체였다. 얼핏 보면 ‘민주화’된 듯했지만, 그 자료대로라면 시인 박노해가 1991년 3월에 체포됐을 때에 3주간 잔혹한 고문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민주화’된 사회에 고문이라니, 오랫동안 믿을 수 없었다. 박노해뿐만인가? ‘민주화’된 세상에 그와 같이 잡혀간 또다른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 관계자인 백태웅, 은수미에 대해서도 ‘고문’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 이렇게 국제사면위원회와 인연을 맺어 남한 ‘민주화’의 겉과 속이 얼마나 달랐는지를, 1990년대 초반에 처음으로 실감나게 확인했다.

그때부터 어언 20여년이 지났다. 한때에 사형이 구형됐던 박노해는 이미 명망가 대열에 올라 있다. 백태웅은 하와이대학에서 일하면서 유엔에서 자문역을 맡고 있고, 은수미는 국회의원이다. 이들이 몸담았던 사노맹은 민주화 운동 조직으로 공식 인정되었다. 한데 아무런 범죄도 저지른 적이 없었던 그들을 고문하고 거의 10년간 감옥에 썩힌 자들 중에서 처벌받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거야말로 대한민국에서 과거 정리의 전형적 방식이다. 정권이 몇번 바뀌고 과거의 사법살인·고문수사에 대한 비판 여론이 정설로 굳어지면, 억울한 피해자나 그 후손들이 어쩌면 명예복원과 함께 약간의 보상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피해자는 있어도 가해자가 없는 게 ‘관례’다. 1970~80년대에 150여명의 재일 조선인들을 살인적 고문을 통해 관제 ‘간첩’으로 만들고, ‘사노맹 사건’과 같은 수많은 시국 사건들을 터뜨리면서 정권의 반대자를 고문해 감옥에 보내고 비전향 장기수에 대한 전향 공작으로 자기 신념을 지키려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장애자로 만든 이들 중에서, 제대로 처벌받은 이는 거의 없다. 고문 수사, 허위진술 강요 등이 체제의 ‘관습’이 돼버린 상황에서는, 인권유린 피해자가 명예복원돼도 인권유린 그 자체는 처벌되지 않는다. 문제는 이와 같은 사회에서는 과거와 같은 인권유린이 언제든지 다시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매우 가시적인 양심수의 양산은 이미 돌아왔다. 아마도 미래의 사학자들이 박근혜 통치기를 명명할 적에 “정부가 노동과의 전쟁을 벌인 시대”나 “재벌 만능의 시대” 같은 명칭과 아울러 “양심수 양산의 시대”라고 부를 것이다. 물론 박근혜 집권 이전에 양심수가 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비록 약간의 개선은 있었지만, 김대중·노무현 시기에도 대한민국은 여전히 세계 최악에 가까운 병영사회·공안국가·노동억압사회였다. 그래서 과거의 양심수 출신이나 인권변호사 출신이 대통령으로 돼 있어도 양심적 병역거부자와 노동운동가(‘업무방해’, ‘퇴거불응’, ‘집시법 위반’), 그리고 국가보안법 관련으로 구속기소된 좌파민족주의자 등 수백명이 매년 감옥을 메우곤 했다. 한데 박근혜 시대에는 양심수 양산은 새로운 수준에 도달했다. 자신의 양심을 지키려고 감옥에 가야만 하는 사람들의 수가 다소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가시성이 높은 양심수 투옥의 공포 확산 효과도 매우 컸다.

기초적 사실부터 확인하자. 박근혜 정권 시기에 접어들어 국가보안법 기소율은 노무현 시절에 비해 약 2~3배 뛰었다. 2007년에 86건, 2008년에 56건의 기소가 각각 집계됐지만, 2013년에 165건의 국가보안법 기소라는 ‘신기록’이 세워졌다. 미국의 국무부마저도 악법으로 인정한 법의 내용이야 그대로지만, 그만큼 그 ‘활용의 범위’가 넓어졌다. 물론 기소된다 해도 구속률은 20~30% 범위 내에서 왔다 갔다 해서 모두가 무조건 감옥행이 되는 건 아니지만, 2000년대 중반에 비해 구속자 수가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노동자 구속의 경우, 구속자의 수 자체는 2000년대 중반 이후 경향적으로 내려가긴 한다. 한데 이는 대한민국의 사법부가 갑자기 인심이 후해져서가 아니고, 노동탄압의 방법들이 극도로 교묘해져서이다. 기업들이 광범위하게 용역을 쓰는 관계로 파업 노동자와 경찰의 직접 충돌이 드물어지고, 또 살인적 손해배상 요구와 노동운동가 재산 가압류 등은 애당초부터 노동운동을 짓눌러버린다. 현재 수감 중인 노동계 양심수 통계를 보면 대부분은 비정규직 투쟁 관련자(40여명)와 노점상 등 생존권 투쟁 관련자(10여명), 외국인 노동자(12명) 등 가장 취약한 계층들을 대변하는 사람들이다. 국가는 노동계급의 주변부, 즉 비정규직과 해고자, 영세민 등의 투쟁을 구속수감으로 공격하는 셈이다. 수감 중인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자(현재 약 600여명)는, 세계 평화 수감자의 90% 정도를 이룬다. 국가보안법 사범, 수감된 노동자, 병역거부자, 밀양의 할머니와 할아버지, 강정마을 주민과 평화운동가….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양심수들의 나라, 산업화되고 형식적 ‘자유민주주의’를 실행하는 나라들 중에서 양심수를 가장 많이 양산하는 전형적 인권유린국이다.

박근혜 정권 이전이라고 해서 인권유린국이 아닌 것도 물론 아니었다. 하지만 이 정권 아래서는 인권유린은 가시적으로, 보란 듯 자행된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인권의 외형을 갖추려는 시도라도 했지만, 이번 정권은 인권탄압을 자랑하듯 한다. ‘인혁당 사건’ 등이 박정희 정권의 야만성을 상징했듯, ‘구미 유학생단 간첩 사건’ 등이 전두환 시대의 전형적 고문수사의 실체를 보여주었듯, 위에서 언급한 ‘사노맹 사건’이 노태우 시절 ‘민주화’의 부실함을 폭로했듯, 1993년의 ‘남매 간첩 사건’ 등 1990년대 초·중반의 각종 ‘간첩’ 조작들이 김영삼 시절 ‘민주화’의 한계를 확인했듯, 이번 정권의 반인권성을 ‘이석기 사건’은 길이길이 상징할 것이다. 그만큼 이 사건에서 보여진 정권의 ‘대담함’은 기가 막힐 수준이다. 단순히 그 진위 여부가 문제시됐던 녹취록 등의 매우 단편적이고 불확실한 ‘증거’에 의한 현직 의원의 체포나 거의 7~8%의 고정 지지율을 기록하는 의회정당의 사법적 해산과 같은 규모의 권력형 폭거들은, 건국 초기나 1950년대 이후로는 대한민국 헌정 사상 찾아보기도 힘들었다. 정권이 법을 도구화시켜 정적 제거를 과감하게 할 의사를 과시한 듯했다. ‘이석기 사건’ 이후에는 정권 반대자의 체포는 박근혜 정권의 하나의 ‘관습’이 됐다. 이석기 등 통합진보당 인사들은 국내에서 오래전부터 심각한 탄압을 받아온 좌파민족주의 경향에 속했지만, 2013년 12월에 합법적 파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체포된 철도노조 지도부나 일제 강점기를 연상케 하는 ‘소요죄’로 기소될지도 모를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 세월호 유가족들의 원한을 풀려고 희생적으로 노력하다가 구속당한 박래군 같은 한국의 대표적 인권운동가 등은 좌파민족주의 등 한국 사회에서 불온시되는 그 어떤 이념과도 무관했다. 그들은 단지 약자들을 위해 뛰었다가 영어의 몸이 된 것이었다. 그들을 체포한 정권이,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에 약간이라도 불리한 그 어떤 활동도 체포로 끝날 것이라는 메시지를 모두들에게 전하려 했던 모양이다.


결국 양심수 양산의 정치는 공포정치다. 현직 국회의원이나 전국 노조의 수반, 아니면 유명한 인권활동가마저도 언제든지 투옥될 수 있다면 그 누구도 안심하고 표현이나 결사, 집회의 자유를 누릴 수 없다. 헌법상 보장된다는 자유의 내용은 퇴색하고 ‘자유민주주의’는 형해화돼 무의미한 껍데기만 남는다. 이러다가는 90년대까지만 기승부렸던, 위에서 언급한 ‘사노맹 사건’ 피해자들에게 악몽이 됐던 고문도 돌아올 날이 멀지 않을 것이다. 인권을 상습적으로 유린하는 정권에 대한 저항만이 우리 자손들이 살아가야 할 대한민국을 인간이 그나마 살아 숨 쉴 수 있는 나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