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2-19

당당뉴스 북한방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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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우물 이야기] <북한방문기8> 용맹스런 인민군??? [새창] 박인환 2005-12-02
[꽃우물 이야기] 북한방문기7 [새창] 박인환 2005-11-21
[꽃우물 이야기] 북한방문기6 우리와 다르더라도 [새창] 박인환 2005-11-18
[꽃우물 이야기] 북한방문기5 "고속도로의 결투" [새창] 박인환 2005-11-12


[꽃우물 이야기] 북한방문기4 [새창] 박인환 2005-11-09
[꽃우물 이야기] 북한방문기(3) [새창] 박인환 2005-11-01
[꽃우물 이야기] 북한방문기(2) [새창] 박인환 2005-10-21
[꽃우물 이야기] 북한방문기 [새창] 박인환 2005-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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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어?


몇 년 전부터 북한을 다녀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한 번 다녀왔으면”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런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은 것이 항상 걸림돌이었다. 돈의 액수도 만만치 않았지만 내 나라의 다른 한 쪽의 땅을 밟기 위해 큰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백두산관광 길이 열려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왔다. 나도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백두산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 역시 중국을 통해 간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젠가는 중국 땅을 통하지 않고 삼지연을 거쳐서 걸어서 백두산을 등정할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다.

그런데 오래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북한방문은 엉뚱하게 이루어졌다. 기독교대한감리회가 ‘북한선교주일’을 지키면서 헌금한 돈으로 밀가루, 분유, 냉온방기, 그리고 평양 칠골교회에 보내는 음향기기 1세트 등을 북에 전달하는 임무를 가지고 남포를 방문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몇 달 전, “내가 월남 실향민의 아들이며 시집을 따라 혼자 월남한 어머니 가족의 생사여부라도 알아야겠는데 막막하다”는 말을 듣던 서부연회 전용호총무가 “그럼 내가 북한 방문할 기회를 한 번 줄까?” 했던 당신의 말을 잊지 않고 연락을 해 와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같이 동행한 사람들은 부평서지방 샘터교회의 김성복목사, 적십자요원인 최현복선생(여)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었다.

10월 12일 오전 10시에 인천항을 출발한 배가 남포항 묘박지(외항)에 도착한 것은 그 다음날 새벽 6시. 그런데 오후 1시가 되어서야 북의 도선사, 출입국관리소 직원, 검역소 직원 등이 승선하였다. 우리는 서로 반갑게 악수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만나자마자 모나미에서 메서 만든 샤프펜슬을 하나 씩 돌렸더니 고마워했다.

그들은 생각보다는 훨씬 더 친절하고 부드러웠다. 승선한 북의 직원들이 배에서 먼저 점심식사를 하더니 우리에게 여러 가지 궁금한 것들을 묻기 시작했다. “남쪽에서는 떼레비를 유선으로 봅네까? 케이블로 봅네까?”

“선생님들이 소속한 감리교는 기독교 하고 어떤 관곕네까?” “최선생님은 몇 살이십니까? 참으로 고우시구만요.” 그들은 특히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 최선생에게서 “어떻게 그렇게 미인이냐”며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남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또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했다. 남한사람들이 아주 잘 산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들은 또 “남쪽에서 비료를 준 것 때문에 금년 농사가 풍년이 되었다”면서 감사한 마음의 표현도 숨기지 않았다.

한참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서해갑문을 향해 출발하였다. 서해갑문은 북한이 가장 자랑하는 시설이다. 배에서부터 시작하여 돌아오는 날까지 여러 사람들로부터 서해갑문에 대한 자랑을 들어야 했다.

서해갑문은 과연 그들이 자랑할 만한 것이었다.(이것은 나중에 쓰겠다.) 남포갑문을 지나면서 배에서 내려다 보니 민간이들이 많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어떤 아낙네는 기차침목 짜투리를 머리에 이고 가고 있었고 어떤 아저씨는 방구들 한 번 덥히기에도 부족할 것 같은 나뭇가지 단을 지고 걷고 있었다.

총을 멘 군복차림의 소녀,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 맨손으로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전거에는 꼭 바구니가달려 있었고 자전거를 타지 않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헝겊으로 만든 배낭을 지고 있었다.

그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어? 인천항과 비교가 되네?” 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인천항에는 그렇게 한가로이 거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으로 안다. 배와 관계된 사람이 아니면 한 사람도 인천항 안에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후부터 4박5일간 북한에 머물면서 얻은 결론은 ‘오늘의 북한은 매우 느슨한 사회’라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평양아리랑축전 등에서 보여준 카드섹션이나 집단체조, 그리고 조선논동당 창건기념행사 등에서 보여주는 열병식 같은 것을 보면서 온 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느낌과 더불어 북한은 그렇게 규격화되고 빈틈이 없는 사회라고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며칠 안되는 짧은 북한체험이었지만 느슨하다고나 할까, 아니면 군기(?)가 빠진 듯한 북한주민들의 모습이 자꾸 보이는 것이었다.


남포항에 내리니 저녁 7시가 되어있었다. 무려 33시간이나 배에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비행기 타고 아프리카나 남미 어느 국가에 가는 것보다도 긴 시간이다. (사진은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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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민둥산
해마다 가을이 되어 낙엽이 질 때면 작은형과 함께 앞산을 오르내렸었다. 나무를 베기 위해서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나무를 베기 시작했으니 참으로 오래된 이야기이다. 우리 형제들과 이웃의 몇몇 친구들 때문에 그 높고 가파른 앞산은 가을만 되면 늘 벌거벗곤 하였었다.


나무를 잔뜩 해서 집으로 들어올 때마다 항상 두 가지 생각을 하곤 했던 기억이 있다. 하나는, ‘내 힘으로 나무를 해다가 군불을 지필 수 있다는’ 뿌듯한 생각이었고 또 다른 하나의 생각은 ‘나무와 산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우리들이 베어낸 자리가 황량하게 보이는 산에게 미안했고 속절없이 아궁이에서 불타서 재가 되어버리는 나무에 대해 미안하곤 했다. 이것은 하나의 죄의식으로 연결되곤 하였다. 그러나 어쩌랴. 연탄 살 돈이 없는 걸. 그리고 그 추운 강원도 산골짜기의 겨울에 얼어 죽지 않으려고 열심히 나무를 베었을 뿐인 걸.


가끔 고향의 골짜기를 가 보곤 한다. 그리고 내가 살던 곳의 앞산이 지금은 울창한 숲으로 변해 있음을 보고 안심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생각을 하곤 한다. “아, 이 골짜기에서 사람들이 떠난 다음에야 산과 나무들이 안식을 얻게 되었구나!” 그렇다. 광산이 폐광되면서 사람들이 많이 떠나버린 골짜기에는 더 이상 산의 나무를 베어낼 사람도 없을뿐더러 혹 조금 남은 사람들도 이제는 더 이상 군불을 지피며 난방을 하지 않으니까 산은 생명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리랑축전을 관람하기 위해 남포에서 평양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나는 40여 년 전의 내 고향 앞산을 생각하게 되었다. 도로 양편에 보이는 산들이 너무나 황폐하여 있었다. 해마다 가을이면 벌거벗던 내 고향 앞산은 거기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60km를 가는 동안 숲이 있는 산을 보지 못하였다. 가끔 소나무가 무리지어 있는 산들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소나무만은 베어내지 못하게 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를 안내하는 이들에게 “주민들이 겨울 난방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아, 물론 석탄을 때지요.” 하는 대답을 하였다. “그렇군요.” 이렇게 맞장구를 치면서도 속으로는 “석탄마저 충분치 않은가보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한 시간 이상 차를 타고 가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 연료부족으로 추운 겨울을 따뜻이 보내지 못하는 듯한 동포들이 불쌍하였다. 그리고 그 헐벗어버린 산들의 황량함이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그래도 우리는 씨는 남겨두지 않았던가. 그래서 다음 가을이 오면 작년에 베었던 곳을 피하여 나무를 베곤 하였었다. 그러나 그곳은 그렇지 않았다. 온 산이 민둥산이다. 새끼나무를 싹틔울 씨앗을 떨어뜨려 줄 나무마저 없는 듯 보였다. 아, 언제 저 산들은 나무로 덮인 자기의 본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아니 그 날이 과연 올 수 있을까?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주는 산이다. 좋은 공기, 추위를 이겨내게 하는 땔감, 아늑한 보금자리를 만들어주는 목재들... 그러나 북녘의 산들이 이미 그런 것들을 줄 능력을 빼앗긴 듯이 보이는 것은 단지 나의 짧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인가?
북녘의 민둥산은 어쩔 수없이 산에게 몹쓸 짓을 해댔던 나의 40여년 넌 전의 기억을 떠오르게 하였다. 그리고 그 민둥산은 오늘의 북한 동포들의 모습을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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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방문기(3)식기도를 해 주시지요
박인환 | gojumool2@naver.com





입력 : 2005년 11월 01일 (화) 00:00:00 [조회수 : 2928]












우리를 영접한 북쪽인사는 김영철선생과 최성삼선생이다.

김선생은 주로 금강산에서 일을 하는 이인데 아마 정치보위부원인 듯하였다. 최선생은 북한 적십자요원 가운데서도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남한을 여러 번 방문하였노라고 하였다.

둘 다 세련되고 젊잖은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4박5일간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여러 가지 편의를 봐 주었다.


“교회에서 오셨으니까 목사님 중에서 한 분이 식기도를 해 주시지요.”

남포에서의 첫 저녁식사 때, 북의 김선생이 하는 이 말을 듣고 순간 깜짝 놀라서 “이거 무슨 소린가?”하고 생각하며 당황했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유물사관으로 무장된 북쪽사람, 그것도 당성이 깊은 북 관리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으니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박목사님이 기도하시지요” 하는 김성복목사의 말을 듣고도 잠시 머뭇거리다 기도를 하였다.






“우리의 만남이 남북화해와 통일로 가는 길에 보탬이 되게 해 주시고 우리가 가지고 온 남한교회 교인들의 정성 모은 밀가루와 분유로 인해 북녘의 많은 동포들이 기뻐하고 건강할 수 있게 주십사”는 기도를 하고 식사를 하였다.


어느덧 북한사람들의 마음에도 ‘교회’라는 단어가 자리를 잡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남포항을 향하는 배 위에서 북의 출입국관리들이나 도선사들이 우리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물어본 질문들 중에도 ‘교회’에 관한 것이 많았었다.

종교의 자유가 없다고 하는 북녘의 사람들도 ‘교회’에 대한 궁금증과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남한의 교회가 지난 몇 년 동안 열심히 북녘동포들에게 밀가루, 분유 등을 보내주는 일을 통해서 그만큼 북녘의 사람들이 교회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는 것과 또 교회가 ‘좋은 일’하는 곳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동포를 돕는 일에 한국교회 중 우리 기독교대한감리회가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는 것은 두고두고 한국기독교역사에 자랑거리로 남을 것이라 생각한다.


4박5일 동안 우리를 안내한 김선생과 최선생이 우리 두 목사를 부르는 호칭도 꼭 “목사님”이었다.

옛날 같으면 “선생” 혹은 “목사선생”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를 꼭 “박목사님, 김목사님”이라고 호징하였다. 그것은 곧 언제부터인가는 모르지만 교회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만큼 존중한다는 표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가 꼭 “예수 믿으라”고 전도의 말을 건네지 않았어도 어려울 때 헌금을 모아 밀가루와 분유, 그리고 강냉이를 보내 주는 일로 인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선교가 시작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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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방문기4"내레 죽는줄 알았시요"
박인환 | gojumool2@naver.com





입력 : 2005년 11월 09일 (수) 00:00:00 [조회수 : 2810]













출발할 때부터 우리 셋의 최대관심사는 “과연 평양 아리랑축전을 관람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혹시 모르니 입장료를 준비하자.”는 최현복선생의 말을 듣고 돈까지 마련한 터였다.

그런데 정작 첫날 저녁식사가 끝나고 나서 북쪽 요원들에게 “아리랑축전에 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더니 펄쩍 뛰는 것이 아닌가?

“오기 전에 미리 약속해 놓지 않았기 때문에 못 간다”는 것이었다. “

에이, 그러지 말고 힘 좀 써 보세요. 우리가 여기를 자주 오기라도 합니까? 그리고 아리랑축전을 그렇게 잘 준비했다는 데 한 사람이라도 더 보여주면 좋지 않습니까?”

나와 김목사, 그리고 대한적십자사의 최선생 모두가 말펀치를 날리기 시작했다.(사실 간청인지 압박인지 구분이 잘 안 되는 것이긴 하지만)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숙소 로비에 가슴에 태극마크를 단 사람들이 몇 명 보이는 것이었다.

그들은 쌀을 싣고 왔다가 그 날 남쪽으로 내려가는 통일부 직원들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그들로부터 “어제 아리랑 축전 구경을 하고 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보고 온 감상을 묻는 우리들의 질문에 그들 중 나이가 들어 보이는 분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소름이 끼치더라”고 하였다.

그 말에 그들 중 가장 젊어 보이는 사람은 “아니,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보니까 이 사람들이 자랑할 만하던데요. 예술성도 있어 보이고 말입니다” 하고 말을 하였다.






똑 같이 아리랑축전을 본 사람들의 서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으니 아리랑축전을 보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해 졌다.

때마침 숙소에서 나오는 북의 최선생에게 “이 분들도 어제 평양 가서 아리랑축전을 보고 오셨다는데 왜 우리는 안된다는거냐”고 했더니 “아 이 선생님들은 남쪽에서 올 때 미리 약속을 오신 겁니다. 우리가 애쓰고 있으니 조금 기다려 보십시오” 하고 대답을 하였다.

그런데 조금 기다리라던 이 사람들이 도무지 두문불출이었다. 우리는 아침식사를 하고 숙소(남포외국인선원구락부) 앞에서 낚시꾼들이 고기 낚는 것을 구경하면서 기다리는 데 낮 12시가 다 되도록 아무 소식이 없는 것이었다. 안되면 안 된다든지 되면 된다든지 아니면 지금 자기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말을 해 주어야 할 것 아닌가?

“이 사람들 해도 너무하는 구먼” “이 동네 사람 살 곳 못되는 구먼” “그래도 우리가 밀가루를 가지고 온 사람들인데 대접이 이래?” ..... 최선생과 둘이서 궁시렁거리고 있는데 북의 요원 두 분이 나타났다.






“오늘 오후에 평양 가도록 합시다. 그런데 여성인 최선생님만 오라고 하는데요?” 아니 이런 일도 있나 하고 생각하면서 그들의 얼굴을 보니 표정이 꽤 밝아보였다. 그들이 농담을 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날 오후 3시 반에 아리랑축전 관람차 평양을 가게 되었다. 모두 같이 가서 관람을 하게 되었다면서 북의 최선생이 으쓱하며 공치사를 하였다.

“그래도 우리 북측이니까 이렇게 편의를 봐 드리는 겁니다” 이 말에 내가 “최선생님이 남쪽에 여러번 와 보셔서 아시겠지만 이렇게 빡빡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했는데 그 말이 실수였다.

여기서 최선생의 불평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내레 지난 봄에 울산에 쌀 실으러 갔다가 죽는 줄 알았시요. 쌀 싣는 작업이 일주일 계속되는데 그 동안 부둣가 콘크리트도 제대로 못 밟았수다.






중간에 두 번 남쪽 적십자 직원하고 식사하러 울산 시내로 나간 것 외에는 꼼짝없이 배 안에 있었시요. 잠간 내려가서 체조라도 하려고 하면 국정원직원이 ‘내리시면 안됩니다’ 하면서 딱 앞을 가로막는 거야요. 내가 뭐 도망이라도 칠 줄 아는 것처럼 섭하게 하두만. 사료가루 날리는 울산항구, 그것도 배 안에서 내레 혼났습네다. 그래도 우리는 육지에 내려서 주무시도록 하지 않습니까? ....”

전혀 생각지도 못한 내용이었다. 나는 막연히 남한이 자유로우니까 당연히 북한을 방문하는 남한 사람들보다는 남한을 방문하는 북한사람들이 좀 더 편리하게 지낼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말을 들으면서 조금 전까지 남쪽 최선생과 함께 불평하던 일이 아주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아, 그런 것이었다. 별 거 아닌 것을 가지고 그렇게 서로 신경전을 펼치는 것이다. 이미 북한에 대해서 웬만한 것은 다 아는 남쪽 사람들에게 아리랑 축전 한 번 보여주고 안보여주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문제인가?

쌀을 가지러 온 북의 적십자직원에게 울산현대자동차공장도 보여주고 조선소도 보여주고 이왕 선물 주는 거 백화점에 데리고 다니면서 사 주면 또 어떤가?

생각해보면 우리가 60년 동안 이렇게 살아왔다. 남한이나 북한이나 똑같이 정말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남북관계에 있어 ‘유치함’을 떨어 버릴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서로 감출 수도 없고 또 감출 필요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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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방문기5 "고속도로의 결투"10차선이나 되는 고속도로 가운데서 아이들이 싸움을 할 정도로 고속도로는 여유로운 모습
박인환 | gojumool2@naver.com





입력 : 2005년 11월 12일 (토) 00:00:00 [조회수 : 3428]







5.“고속도로의 결투”






남포에서 평양까지는 60km 길이의 10차선 고속도로가 있다. 평양 아리랑축전을 관람하기 위해 이 고속도로를 탔다. 왕복10차선의 고속도로! 우리나라에는 그렇게 넓은 고속도로가 없다. 세계 여러 나라의 고속도로를 타 봤지만 아직까지 그렇게 넓은 고속도로를 본 적이 없다. 북한이 무언가 야심찬 경제적인 안목으로 건설한 것임에 틀림없는 고속도로였다. 남포로 떠나기 전에 이 고속도로에 대한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은 생각 밖의 것이었다.

우선 톨게이트가 없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중앙분리대가 없고 도로 양쪽에 가드레일이 없는 것이 우리와 달랐다. 또 한 가지 우리와 다른 것은 고속도로 양쪽에 아스팔트로 포장된 자전거도로가 있는 것이었다. 남포에서 평양으로 가는 60km 고속도로 양쪽의 자전거도로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가고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언젠가 북한을 다녀온 사람이 하는 말이 “이북에 가보니 사람들이 어디론가 하염없이 걷고 있더라” 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내 눈으로 직접 보니 알 수 있었다.

십 수 년 전부터 우리는 웬만하면 차를 타고 다닌다. 불과 몇 백미터 거리만 되어도 차를 탄다. 그러니 자동차도로는 복잡해지지만 걸어 다니는 사람은 눈에 많이 띄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웬만하면 다 걷는다. 아니, 걸을 수밖에 없다. 우리처럼 차가 일반화되지 않았고 또 차를 타고 다니는 일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속도로 양편에서 걷고 있는 사람, 자전거 타고 가는 사람들은 그저 ‘하염없이 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각자 일터로 가거나 혹은 퇴근하여 집으로 가는 길이다. 이것을 거두절미 하여 “북한에 가보면 사람들이 하염없이 걷더라”고 말해 버리면 거기서부터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남포를 출발해서 약 20분 쯤 지났을까, 어느 큰 마을이 보이는 곳을 지나고 있는데 왼편 자전거도로에서 열두어 살 쯤 보이는 아이들 수 십 명이 줄지어서 뛰고 있었다. 아마 학교 체육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뛰어가는 아이들 보다 약 100미터 쯤 앞에서 두 아이가 싸움을 하고 있었다. 두 주먹을 움켜쥐고 서로 심각하게 노려보고 있는 폼이 곧 치고받기 직전이었다.

“김목사님, 쟤들 봐. 싸우네. 애들 싸우는 것은 남한이나 북한이나 같네 그려” 하면서 김성복목사와 함께 허허거리며 웃다가 보니까 뭔가 좀 이상했다.

그 아이들이 싸우는 장소가 웃기는 것이었다. 고속도로! 고속도로 안으로(5차선) 들어와 싸우는 것 아닌가.

한 번 상상해 보라. 지나다니는 자전거와 사람들을 피해 고속도로에 들어가서 싸우는 아이들의 모습을. 우리들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고속도로 보다는 고속도로 양편의 자전거도로가 훨씬 더 복잡하였다. 고속도로는 말이 고속도로지 더 이상 고속도로가 아니었다. 차량도 많지 않은 평양까지의 60km 길을 1시간 넘게 달렸으니 말이다.

길은 넓게 만들어 놓았지만 오랜 동안 보수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군데군데 파인 데도 많고 울퉁불퉁하다보니 운전사는 마치 80년대 초 내가 군목생활을 하던 전방의 비포장도로를 운전하듯이 운전하고 있었다. 아마 석유화학공업이 발달되지 않아서 도로포장재를 쉽게 조달하지 못하는 결과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이것은 그 날 오전에 우리가 가지고 온 물품을 확인하기 위해 남포항에 나갔을 때 이미 확인한 것이었다. 요즈음 북한에서 물동량이 제일 많다고 하는 남포항 야적장의 대부분이 비포장이었다.

그날따라 바람이 심하게 불어 흙먼지가 날리는 통 애를 먹었다. 야적장에 우리나라 기업인 SK가 보내온 도로 포장용 콜타르 수백 드럼이 있기에 “그것으로 남포항 야적장을 포장하려는가 보다” 하고 생각했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평양 순안비행장 활주로를 보수하기 위해 보내 온 것이라고 하였다.

북한의 어려움은 식량문제만이 아닌 것 같다. 물질적인 면에서는 총체적으로 부족한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20여 년 간 경제적으로 봉쇄를 당하면서 북한 땅 안에서 나는 것으로만 살아야 할 터이니 부족한 것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런데 한 가지 엉뚱한 생각이 드는 것은 ‘어느 면에서는 궁핍한 만큼 여유로운 모습도 있다’는 것이다.

10차선이나 되는 고속도로 가운데서 아이들이 싸움을 할 정도로 고속도로는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왕복 10차선이나 되는 고속도로를 주민들이 자유롭게 횡단하여도 누구 하나 말리거나 나무라는 사람이 없다.

남한에서는 온 국민이 바쁘다. 도시화.산업화를 거치며 경제적으로 많이 여유로와 졌다. 그러나 식구들이 함께 모여 식사하는 것마저도 쉽지 않을 만큼 삶의 ‘여유로움’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도로에는 차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얼마나 세게 달리는지 길을 걷는 것마저도 긴장해야 하게 되었다. 도로의 주인자리는 사람이 아닌 자동차가 차지하고 말았다.

북한은 통제의 사회이고 자유가 없는 사회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적어도 도로에서만큼은 자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사람이 도로의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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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방문기6 우리와 다르더라도
박인환 | gojumool2@naver.com





입력 : 2005년 11월 18일 (금) 00:00:00 [조회수 : 2900]







6.우리와 다르더라도
서부연회가 보내는 밀가루를 가지고 감리교목사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그리스도연맹의 백근삼전도사라는 분이 남포의 우리 숙소를 찾아왔다. 숙소 로비에서 30여 분 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대부분은 백전도사님이 말하고 우리가 듣는 셈이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하셨습니다.” “강영섭목사님이 오늘 해외여행을 떠나시게 되어서 제가 대신 인사차 왔습니다.” “신경하감독님은 안녕하시지요?” “서부연회 전용호 총무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전해 주십시오.” “남쪽 교회에서 우리 그리스도연맹에 보내주시는 밀가루로 빵과 국수를 만들어서 탁아소 양로원 등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서부연회의 지원으로 북에서 우리 조선그리스도연맹의 위상이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우리 봉수교회의 선교적 관심은.....”....


체구는 깡마르고 자그마한 분이 달변이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그가 우리 남한교회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안다는 것이었다. 대북활동과 관련한 최근 한국교회의 동향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남한교회의 여러 교파 지도자들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었다. 아마 자주 접하게 되는 남쪽 교회관계자들에게서 듣는 이야기들이 많아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부연회에 대한 감사의 말을 여러 차례 하기에 “우리 감리교회가 지원하는 물품이 전체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약간 난처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며 하는 말이 “제가 퍼센테이지를 그대로 말씀드리면 적은 수치인데 그렇게 되면 목사님들이 섭섭하게 생각하실까봐... 그러나 어쨌든 감리교서부연회가 우리에게 제일 먼저 지원을 시작하셨다는 점에서 각별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수공장 기계도 서부연회에서 마련해 주셨고, 특별히 감리교회가 저희 신학원 운영을 맡아주시기로 한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오래 전에 서부연회 총무를 하였던 은목사 얘기를 하면서 “남쪽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우리가 잘 모르지만 우리는 그분을 우리는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노라고까지 표현하였다. 그리스도 연맹 쪽에서도 대북관계와 관련하여 생겨난 우리 감리교 내부의 문제들을 잘 알고 있는 듯하였다. 이 말들을 들으면서 우리들의 생각과 그들의 생각이 많이 다르다고 생각되었다.

그들은 어쨌든 대북지원사업의 물꼬를 튼 사람에 대한 의리랄까 애착 같은 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백전도사의 이야기에서, 얼마 전 금강산관광의 초석을 놓은 김윤규사장을 해임시켰다는 이유로 더 이상 현대와 사업을 않겠다고 선언했던 북쪽 사람들의 태도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백전도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북쪽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다. 우리와 멀리 살고 있는 북쪽 사람들이 우리를 그렇게 잘 알고 있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속마음까지 다 아시는 것 아닌가?

이번 여행에 동행한 김성복목사가 남포에 도착하는 날부터 “이번 주일에 평양 봉수교회에서 예배드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북의 인수요원들에게 거듭 요청하였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그들이 당황하고 긴장하는 느낌을 받았었다. 백전도사와 이야기를 마칠 즈음에 북쪽의 김선생이 백전도사를 자기 방으로 잠간 데리고 갔다.

아마 김성복목사가 “봉수교회에서 주일예배를...” 하면서 자꾸 푸쉬를 하니까 도움을 요청한 듯하였다. 백전도사가 다시 돌아와서 하는 말이 “지금 봉수교회가 공사 중이고 해서 모시기가 곤란합니다. 다음에 오시면 꼭 봉수교회에서 예배드리도록 해드릴 테니 이번에는 이해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사실 김목사가 그렇게 요청한 것은 꼭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백전도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북한교회의 한계를 확인하게 되었다. 요즈음 교계 일각에서 “북한교회는 가짜교회이고 봉수교회 교인들은 배우이다. 그러니 지원을 당장 그쳐야 한다.”며 북한지원반대운동을 벌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 북한교회의 한계를 보면서 그렇게 판단한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생각을 달리한다. 북한교회가 가짜라기보다는 ‘한계가 있는 교회’이고 ‘우리와는 좀 다른 교회’라는 생각이다.
필리핀사람의 대부분은 천주교인이다. 그런데 그들은 정통적이 천주교와는 많이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말하자면 필리핀 식으로 약간 변질된 천주교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교황청에서 “필리핀천주교는 가짜다.”라고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북한교회가 기독교본질에서 많이 벗어난 교회인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북한교회가 기독교의 본질로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해주고 협력해 주어야 할 대상이지 ‘가짜’라고 정죄하는 것은 기독교정신에서 벗어난 행동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북한교회가 가짜인지 진짜인지는 하나님이 정확히 아신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들(북한교회)이 남한의 교회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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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방문기7할머니가 묻어 두신 보물
박인환 | gojumool2@naver.com





입력 : 2005년 11월 21일 (월) 00:00:00 [조회수 : 2515]








인천항으로 돌아오기 위해 배를 탔을 때다.

“은전! 은전!” 누군가가 나를 향해 큰 소리로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은 데 처음에는 그 말이 무엇인지 몰랐다. 휘 둘러보니 낯설지 않은 사람이 나를 향해 “은전! 은전!” 하면서 반가움을 표시하고 있었다. 남포항에 입항할 때에 제일 먼저 만났던 출입국관리소직원 중 젊은이(33세)었다. 배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모두 우리가 남포에 도착할 때 맞이했던 출입국관리소직원들과 도선사들, 그리고 세관 직원들이었다.

며칠 만에 나를 보고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이 은전이었나보다. 남포외항에서 남포항으로 들어가는 몇 시간 동안 출입국관리소 직원 두 명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이야기 중에 “나는 실향민 2세다. 부모님이 평북 태천출신이신데 3차 숙청 대상자가 된 것을 미리 알고 월남하였다”고 하였더니 “쯪쯔.. 고거 잘 모르고서 내려가셨구만요. 우리 공화국에서는 지주들 땅만 빼앗고 죽이지는 않았단 말입니다” 하고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시작으로 잠시 설전이 오갔다.

나:“에이, 그런 소리 마시오. 해방직후 북에서 공산정권에 죽은 사람이 한 두 명입니까? 죽이지도 않는데 모두 월남을 한답니까? 지주라고 죽이고 기독교인이라고 죽이고... 오죽하면 고향과 재산 버리고 월남을 했겠습니까?”"공산당에게 가족 잃고 이를 갈며 월남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북쪽사람:“아니 그런 말씀 마시라요. 사람 많이 죽인 건 미국놈이디 우리가 아닙네다. 기독교인도 미국놈들이 다 죽였시오. 미군들이 교회는 폭격하지 않을거라면서 다들 교회로 들어갔는데, 교회마다 폭격했시오. 살아남을 사람도 교회로 모였다가 다 죽은 거디요.”

나:“당신들이 북쪽에서 미군이 사람 죽인 것만 얘기하는데, 남쪽에서는 지방 빨갱이들이 붉은 완장차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어요. 그런 사실은 모릅니까?”
북쪽사람:“처음 듣는 얘깁네다?”

나:“그러니까 당신들은 북한정부에 유리한 것만 교육받은 것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교육받지 못한 것입니다” “사상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을 핑계로 서로 죽인 겁니다. 그러니 과거에 누가 더 죽였느니 어쩌니 하는 것 가지고 싸울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공격하면서도 속으로는 “우리도 역시 일방적인 교육만 받았는 걸.” 하는 생각을 하였다. 우리가 초등학교인가 중학교인가에서 배운 교과서에는 ‘공산당에 의해 학살된 시체’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런데 최근 그 사진이 공산당이 아닌 아군에 의해서 죽은 부역자들의 사진이라는 기사를 접하고 깜짝 놀란 일이 있다.

그런 것이었다. 북의 김일성정권은 김일성정권대로 그리고 남쪽의 이승만정권과 곧 이어진 군사정권은 군사정권대로 저마다 자기들의 권력유지를 위해 남북분단을 교묘히 이용해 온 것이다. 그러니 피차 진실을 가르치지 않은 것이다.

초반부터 너무 예민한 얘기가 오갔다 싶어 화재를 비정치적인 방향으로 돌렸다.
나:“우리가 북한에서 아주 잘 사는 집이었다는 데 남쪽으로 내려와서 죽도록 고생했다”

북쪽사람:“땅이 얼마나 되었었답니까?”
나:“농지 삼사만 평에 술도가 두 개에 산도 있었다고 하고...”
북쪽사람:“만오천평부터 지주로 취급했습네다. 그런데 토지문서는 보관하고 있습네까”
나:“피난 통에 다 잃어버렸다지요. 그런데 그거 가지고 있어봐야 휴지조각이지 뭐 합니까?”
북쪽사람:“그래도 모르디요. 아하, 고걸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 때 그 사람이 무 슨 의도로 땅문서가 있는지를 물었는지 잘 모르겠다.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나:“이미 60년이나 지나갔는데, 남북통일 되더라도 우리가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네요. 그래서 저는 땅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북쪽사람:“그럼 뭐 다른 게 있습네까?”
나:“예, 월남하기 직전에 일정시대 때 쓰던 은전 두 항아리를 할머니가 부엌바닥에 파묻으셨다고 하더군요. 요즘 남쪽에서는 그 은전 하나만 내다 팔아도 큰 돈 됩니다. 남북통일 되면 나는 제일 먼저 우리 부모님 고향집에 가서 부엌바닥을 파서 은전을 챙기려고 합니다.”

내가 신이 나서 은전얘기를 하니까 이들이 아주 흥미롭게 듣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왕 내 차지가 되기 어려운 것 까짓 거 크게 인심을 썼다. “그런데 혹시 남북통일 되기 전에 당신들이 평북 태천에 갈 일이 있거든 태천읍에서 제일 큰 집터 부엌바닥을 파서 그 은전 챙겨서 부자되시오.”

언젠가 다시 돌아와서 파내실 요량으로 할머니가 정성껏 파두어 놓으셨다던 은전 두 항아리는 돌아가신 할머니는 물론 살아계신 어머님 허락도 없이 내가 마음대로 인심을 써 버렸다.

그 말을 하고 나니 마음 한 구석에서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의 물결이 이는 듯하였다. “저녀석들이 찾기 전에 내가 먼저 가서 찾아야 할 텐데” 하는 어리아이같은 마음도 불쑥 드는 것이었다.

물론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그들이 태천에 ‘보물찾기’ 하러 가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내 말을 농담으로 여겼는지도 모르고, 또 그들이 그 말을 믿는다고 해도 북의 사회가 우리처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니까 말이다.

그런데 북의 출입국직원이 닷새 만에 나를 보고 반갑다고 하는 말이 하필이면 “은전! 은전!”이라니...
이 친구, 아마 ‘은전’에 귀가 솔깃하긴 했나보다.




<북한방문기8> 용맹스런 인민군???
박인환 | gojumool2@naver.com





입력 : 2005년 12월 02일 (금) 00:00:00 [조회수 : 2995]












북한에서 받은 가장 큰 충격은 인민군을 본 것이었다. 인민군을 북한에서 보았다고 해서 무어 그리 충격을 받을 일이었냐고 반문할 것이다. 인민군이야 군 생활 중 전방에서도 많이 봤고 판문점에서도 가까이 본 적이 있었다. 그렇다. 인민군은 인민군일 뿐 별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지난 달 그들의 모습을 보고 정말 놀랐다. 남포에서 평양으로 가는 길에 혹은 검문을 하고 혹은 경계를 서고 있는 인민군들을 여럿 보았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이 20여 년 전 전방 GP에서 멀리 넘어다보던 활기 찬 인민군의 모습도 아니고 몇 년 전 판문점에 가서 보았던 침착한 인민군의 모습도 아니었다.

너무 작았다. 그리고 너무 말랐다. 키는 하나같이 어찌 그리 작은지. 눈짐작으로 160cm 넘는 군인들을 보지 못했다. 그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어린 시절 만화에서 보던 ‘깡마르고 광대뼈가 튀어나온 인민군’의 모습이었다.

“인민군들이 먹지 못해 키가 작고 가냘프다”는 말은 많이 들어서 대강 짐작은 하고 있었기에 그렇거니 하고 보았지만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전혀 상상치 못했던 그들의 또 다른 모습 때문이었다.






남포외국인 숙소를 경비하는 인민군들을 보니 나이가 어려 보이기에 “소년병들인가?” 하고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그 후 여러 곳에서 본 인민군들의 얼굴이 모두 하나같이 십 오륙 세의 소년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그들 가운데 소년병은 하나도 없고 모두 제 나이에 입대한 20대의 인민군들이었다.

아, 나이는 들었어도 얼굴이 아직 소년인 인민군들! 먹지 못해 키도 자라지 못했지만 얼굴마저 어른으로 변하지 못한 젊은이들. 그들이 인민군이었다. 우리네 군인들과는 너무도 다른 외양 때문에 “이들이 과연 우리와 한 핏줄이란 말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구 소련이 와해되고 공산주의 국가가 모두 사라짐으로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붕괴된 후, 1995년부터 북한사람들이 굶주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부터를 그들은 ‘고난의 행군’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의 인민군들은 한참 잘 먹고 커야 할 10대 초반을 굶주림에 시달리며 자라난 것이다.

북한도 여늬 공산국가처럼 시장경제체제로 전환을 했다거나 개방을 했다면 그렇게 굶주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분노가 끓어오른다.

그 망할 놈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독재체제 유지를 위해 백성들이 그렇게 굶주리고 체형과 얼굴모양까지 색다르게 바꾸어 놓다니...

우리교회는 올 해 북한선교주일 헌금을 하긴 하되 힘내어 하지는 않았다. 막연하게나마 굶주리는 북한주민들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막상 북한을 위해 헌금한다는 것이 썩 내키지 않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었는가보다.

또 어쩌면 “대북한 퍼주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 “대북지원하는 양식이 군량미로 전용되니 보내주면 안된다”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세뇌가 됐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번 북한방문을 하고 나서 엉뚱하게도 인민군을 보고나서 그들을 열심히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사람이 굶주리는데, 거기에 무슨 조건이 필요하며 단서조항이 필요할 것인가?

좀 역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불쌍한 인민군들을 위해서 쌀을 보내자”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일설에 의하면 고난의 행군 기간 동안 200만 명이 굶어죽었는데 그들 중 대부분이 어린이와 노인들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의 인민군 병사 세대들은 고난의 행군 동안에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살아남았으되 아직 얼굴은 어른이 되지 못한 어린이의 모습을 한 불쌍한 이들이다.

인민군들을 보면서 엉뚱한 생각을 한 번 해 보았다. “중국이 북한을 도와주지 않고 미국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고 지금 가지고 있는 그대로의 재래식 무기로 남북이 싸운다면 누가 이길까?” 물론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만의 하나라도 크게 염려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80년대 초 3년 동안 전방근무를 하면서 매일 북쪽에서 해대는 대남방송을 들었었다. 그 중 가장 많이 들었던 것이 '우리의 용맹스런 인민군'이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20여년이 지난 지난 달 북한에 가서 만난 인민군들은 결코 용맹스러워보이지 않았다.

북한을 다녀온 지 한 달이 넘었지만 내 눈 앞에는 아직도 인민군병사들의 핏기어린 앳된 얼굴들, 그리고 초점을 잃은 듯 퀭한 눈동자들, 땅에 끌릴 듯 간신히 소총을 메고 있는 가냘픈 어깨들이 맴돌고 있다.

그리고 검문을 하면서 “어디 가십네까?” 하던 ‘군기’라곤 찾아 볼 수 없던 힘없는 말투들이 내 귓전을 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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