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중산층 200만명 시대…평양에 리설주 단발 유행” (121)
by 주성하기자 2013-07-23 9:02 am
김정은 시대의 북한은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수차례 평양을 방문한 바 있는 유럽의 저명한 북한 전문가가 최근 방북길에서 보고 들은 분위기를 생생히 묘사한 글을 번역, 게재한다.
영문계간지 ‘글로벌아시아’ 2013년 여름호에 실린 이 글을 통해 필자는 평양 경제가 이전보다 다변화한 현금 중심 경제로 옮겨가고 있다고 분석한다. <편집자>
북한의 식량, 에너지, 운송 문제가 심각하다는 건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이론적으로 비료, 전기, 석유, 기계만 추가로 투입하면 식량 생산이 훨씬 수월해지리라는 점도 잘 알려졌다.
북한의 풍부한 천연자원은 잠재적으로 현금을 만들어낼 원천이며 이를 가공, 수출하는 전략이야말로 경제개발의 관건이라는 점도 부연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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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활동 한 단계 업그레이드
그러나 경제개혁에서 김정은은 적잖은 내부 제약에 직면했다. 현재 북한 지도부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점진적이고 통제된 개혁을 선호하므로, 개혁은 철저히 하향식이어야 한다. 또한 그 과정에서 발생할 비용과 이익이 친족과 부유층, 관료에게 골고루 배분되도록 신경 써야 한다.
이렇듯 다양한 이론적 한계에도, 김정은의 북한은 분명 서서히 움직인다. 그는 공식 취임 이전인 2011년 12월에도 전형적인 가부장적 방식으로 인민들에게 물질적 풍요를 약속한 바 있다. 만경대 놀이공원에서 인민을 잘 챙기지 못했다고 관료들을 공개적으로 질책한 일이 대표적이다.
인기에 영합하는 듯한 그의 이러한 행보는 공개연설이나 현지지도 와중에 주민들과 나눈 대화, 2012년 4월 로켓 발사 실패를 신속하게 시인한 일 등에서도 나타난다. 북한 정치에서는 보기 드물게 지도자의 부인이 공식석상에 출현하고, 모란봉밴드가 스타가 된 점도 흥미로운 단편이다.
2012년 4월 방북했을 당시 필자가 느낀 것은 북한 주민 사이에 감도는 긴장감과 새 지도체제 하에서의 미래에 대한 불안이었다. 하지만 같은 해 9월 방북 당시에는 그 분위기가 활기차면서도 긍정적으로 변해 있었다. 춘궁기를 지나온 데다 서구와의 ‘말 대결’을 벌인 직후였던 5월 방북 때도 이러한 분위기엔 변함이 없었다.
북한 조선무역은행에서 발행한 나래카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평양 여성이 이설주처럼 현대적 감각의 단발을 많이 한다는 점이었다. 이를 통해 개인 각자의 자신감을 표현하는 듯했다.
2012년 두 번의 방북 사이에 이미 빵이나 음료수, 빙수, 담배 등을 판매하는 노점이 눈에 띄게 늘어 있었다. 평양, 지방도시, 교외지역을 가리지 않고 이러한 노점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올해 5월 방북을 통해서는 이러한 상업활동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음을 알았다. 과거에는 길거리에 늘어서 있던 점포들이 이제는 번듯한 건물 안에 자리하고 있다.
번화가에는 거의 50m 간격으로 식당과 상점 간판이 눈에 띄었다. 지방도시나 교외지역에는 여전히 노점상이 많지만, 세련된 모습의 상업시설이 한층 늘어나는 추세다.
경쟁의식도 증가했다. 국가나 군, 조합 소유의 기업들이 금색 잉크로 덧칠한 새 간판에 자신의 상호를 자랑스럽게 새겨 내걸어놓았다. 출입구에 붙은 적청색 스티커에는 북한 현금카드인 나래카드를 취급한다는 내용이 적혔다.
이전에는 애국심을 고취하는 고색창연한 상품명이 많았지만, 이제는 ‘목란비디오’ ‘평화자동차’ 같은 좀 더 세련된 브랜드가 대중적으로 자리 잡은 듯했다.
진열대에서 판매하는 상품도 늘었고, 돈을 가진 손님도 많아졌다. 평양이 대표적이긴 하지만 남포, 사리원, 개성 같은 지방도시도 그 뒤를 좇고 있다. 하지만 물가는 가히 살인적이다. 사과 3kg 가격이 공무원 한 달치 봉급과 맞먹는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나나 같은 이국적인 상품도 판매했다.
한마디로 이제 북한에선 옛 사회주의국가처럼 물건이나 서비스를 누릴 기회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자처럼 ‘적절한 화폐’를 충분히 갖고 있으면 쓸 곳은 넘쳐난다.
물론 어떤 외화를 어떻게 보유할지는 여전히 매우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최소한 개인 차원에서는 북한 경제활동이 서서히 정상화하고 있음을 뜻한다. 북한이라는 나라가, 혹은 북한 주민이 시장화와 통화재정 동향에 대응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는 의미다.
수십 년간 극소수의 보이지 않는 엘리트 계층과 나머지 국민으로 양분되던 북한 사회는 이제 중산층 200만 명을 보유했으며, 그 수는 점차 증가하고 있다. [인구의 10%]
이들은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택시를 타며, 다양한 옷과 장신구를 걸친다. 자체 생산한 7인치 태블릿PC ‘삼지연’이 180달러에 판매되는데, 여기에는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와 사전, 장기게임, 김일성과 김정일의 저작 모음집 등 다양한 애플리케이션이 깔렸다.
인라인스케이트 절정의 인기
평양의 한 노점에서 시민들이 음료와 음식을 사고 있다.
평양 아이들 사이에서는 인라인스케이트가 절정의 인기를 구가한다. 이제 그 인기는 교외지역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필자는 5월 방북 당시 처음으로 청바지 차림의 16세 남자아이와 사전에 조율하지 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호화음식을 파는 레스토랑도 있었는데, 이곳을 찾은 손님들은 영양상태가 좋아 쇠고기를 남길 정도였다. 어떤 이들은 평양의 한 호텔에서 스파를 즐겼다. 지불 수단은 모두 통용화폐인 경화였다.
인민대학습당을 비롯한 박물관 등 대중시설에도 상점이 즐비했다. 개성우표상점에서는 북한의 유명 화가인 정창모 화백의 작품을 1400유로에 구매할 수 있다.
주머니에 현금뭉치를 들고 다니는 불편함이 싫다면 현금카드를 사용하면 된다. 조선무역은행에서 발행하는 나래카드나 고려은행의 고려카드를 다양한 상점에서 사용할 수 있다.
한때는 흔히 ‘평양의 꽃’이라고 부르는 여성 교통경찰관들이 일종의 아이콘이었지만, 이제는 늘어나는 신호등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도심 곳곳에서는 소규모 교통정체가 빈번히 발생한다. 고속도로는 여전히 비었지만 평양 시내에는 다양한 국산 혹은 외제 자동차가 즐비했다.
개인 소유임을 뜻하는 노란색 면허판을 부착한 자동차 수도 늘었다. 엄청난 거리를 운행한 낡은 버스는 평양에서 생산한 신형버스로 교체되고 있다.
물론 평양의 삶의 질은 다른 지역과 크게 차이가 난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격차가 사회적 불만을 증가시킬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필자 생각은 좀 다르다. 어차피 주민은 해적판 DVD나 USB를 통해 외국의 화려한 대도시에 대해 충분히 잘 알고 있다.
북한 내에 그와 비슷한 곳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영리한 전략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사회 안정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촌구석 주민이 아니라 평양 중산층 주민이 무엇을 꿈꾸는지에 있다. 이들을 잘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뜻이다.
변화는 이념적 차원에서도 감지된다. 쉽게 볼 수 있는 선전구호와 기념비들이 개조 혹은 철거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는 2012년 9월에도 느꼈던 변화이지만 최근 방문에서는 한층 두드러졌다.
덜 노골적인, 북한말로는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는’ 구호가 많아졌고, 100m 이상 떨어져서는 읽기 어려울 정도로 작아졌다. 이렇듯 새로운 스타일의 구호판을 평양에서만 50개 넘게 볼 수 있었다. 더욱이 전체적으로 구호나 포스터 수가 줄었다는 점도 특이했다.
빨간색과 하얀색으로 칠해 눈에 확 띄는 각종 선전구호가 여전히 즐비하지만, 김정은은 말뿐이 아닌 행동으로 주민에게 인상을 남기고 싶어 하는 듯했다. 그의 모습을 담은 배지도 배포했다고 하는데, 평양 지하철에서 그 배지를 본 건 단 한 번뿐이다.
이러한 변화에도 해묵은 과제는 여전히 산적해 있다. 물가는 오르고 투기가 판친다. 심각한 부패와 심화한 빈부격차로 좌절감이 커져간다. 사실 이론적으로 따져봐도 집권 1년 만에 김정은이 인민의 삶을 상당 수준 끌어올릴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건 비현실적이다.
반면 북한 사회에서 불평등이 심화한다는 것은 변화 또한 가팔라지고 있다는 뜻이다. 개인 간 수입과 복리후생의 격차가 증가한다는 것은 북한 경제가 사회주의적 평등주의에서 벗어나 자본주의적 다양화로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러 면에서 북한 분위기는 이전보다 한층 여유 있어 보였다. 5월에 동행했던 외국인 관광객들은 개성 한 국경마을의 김일성 동상 앞에 서서 아이폰으로 고국에서 보낸 문자메시지를 확인하며 굉장히 재미있어 했다. 한국의 KT와 SK텔레콤 통신망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와 동행한 경호원들은 이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멀고 먼 북한 개혁의 길
분명한 것은 이제 무대가 마련됐고, 인민의 기대도 커진다는 사실이다. 정말 어려운 것은 어쩌면 지금부터다. 경제발전과 정치안정을 동시에 이루는 일이다. 개혁은 김정은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지만, 이를 실행하기란 쉽지 않다. 많은 것을 동시에 이뤄야 하기 때문이다.
외곽지역 주민과 빈곤층에게는 더 나아지리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평양 중산층에게는 상위계층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장해줘야 한다. 최고위층들에게는 그들이 가진 특권을 계속 누릴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세계시장과의 무역을 통해 수익을 늘리는 한편, 대중(對中)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 그러나 미국의 동의 없이 이러한 소망은 요원하고, 특히 김정은으로선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전제조건인 핵 폐기를 미국이 계속 요구하는 한 한낱 꿈에 불과하다.
북한은 최근 남측을 압박하는 카드로 개성공단을 이용했다. 이 결정이 일시적으로 효과가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반면 수출주도형 현대화 전략에 꼭 필요한 외국인투자자나 교역상대국에게 신뢰를 얻는 일은 그로 인해 한층 더 힘들어졌다. 최근 미국과 벌인 마찰이나 핵전쟁 위협 또한 전혀 도움이 될 수 없다.
아마도 김정은은 여러 위험이 도사린 국내 개혁 작업에 돌입하기 전 국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자기 입지를 강화하고 싶었을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그가 과거 유산들로부터 쉽게 빠져나올 수 없으리라는 점이고, 수많은 권력층의 다양한 집단이익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북한 개혁이 이론적으로는 쉬워 보여도 실제로는 굉장히 복잡한 일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국제사회는 극히 영리한 태도로 정책 설계에 임해야 한다. 한국이 취할 수 있는 확실한 전략은 무역과 투자를 확대해 북한 내부의 개혁적 기류를 뒷받침하는 방식이다. 북한과의 거래는 실망스러운 결과를 낳기 일쑤지만, 짧은 시간 안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해선 곤란하다.
경제 시스템으로 보면 이미 실패한 사회주의 경제를 변화시키는 것, 특히나 매우 점진적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겪고 70년 가까이 분단된 채 살아온 두 나라를 다시 결합하는 엄청난 작업이다.
개혁이 성공할 경우 현재의 북한 정권도 연장된다는 점에서 많은 이가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도리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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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주간동아 895호(7월8일자)
필자 : 루디거 프랭크 비엔나대학 동아시아학과장
번역=강찬구 동아시아재단 간사 ckkang@keaf.org
(영어원문은
www.globalasia.org/V8N2_Summer_2013/Rolling_Reforms_Reflections_on_Visits_to_Kim_Jong_Un_s_North_Korea.html
참조)
‘Global Asia’는 동아시아재단이 발간하는 국제문제 전문 계간 영문저널이다. ‘21세기 아시아가 열어가는 세계적 변화의 형성 과정에 주목한다’는 기조 하에 아시아 지역 주요 현안과 관련해 각국 전문가와 정책결정자들의 공론장 구실을 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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