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11

이제 만나러 갑니다 > 시청자 - 탈북민의 증언을 기초로 편집 제작해본 북한의 고난의 행군

이제 만나러 갑니다 > 시청자 - 탈북민의 증언을 기초로 편집 제작해본 북한의 고난의 행군

탈북민의 증언을 기초로 편집 제작해본 북한의 고난의 행군

배정준 2015.03.14 11:17:10 조회 6049 삭제

가깝지만 먼 나라가 어디냐고 물어본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본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가깝고도 먼 나라는 일본이 아닌 북한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필자는 어느 순간부터 북한에 관심을 갖는 것만으로 보수 성향의 정치편향을 갖는 우파로 비춰질 것 같아 쥐도 새로 모르게 북한에 대한 관심을 접었습니다. 그러나 국내 탈북자 수가 27,000명을 넘어서고 중국 내에서도 150,000명 이상 탈북자가 국내 입국을 희망하고 있는 만큼 탈북자들의 사회적 관심과 화합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아 북한에 관한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보려고 합니다.

 


김정일 사망과 고난의 행군

 

어린 시절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학교에서 주야장천 불렀지만, 성인이 된 후 어느 순간부터 통일은 양치기 소년의 외침이 되고 말았습니다. 누군가 통일을 이야기하더라도 그저 듣고만 있었습니다만 최근 북한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경제적 협력만큼은 반드시 진행해야 한다고 봅니다.

 

1994년 김정일 사망일. 지금도 그 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친한 친구에게 면회를 간 날이라 아직도 제 머릿속에는 그날이 생생한 기억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날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던 중 면회시간이 15분도 채 지나지 않아 김일성 사망이라는 소식으로 전국에 비상령이 떨어졌습니다. 휴가 나갔던 군인들마저 조기 복귀를 할 수밖에 없었으니 면회 후 외출을 기대했던 제 친구는 면회를 취소하며 돌아갔습니다. 우리에게 해프닝같은 날이었지만,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북한은 국제적 고립과 자연재해(가뭄, 홍수)로 수백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일명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고난의 행군이란 1938년 말에서 1939년까지 김일성 주석이 이끄는 항일 빨치산이 만주에서 혹한과 굶주림을 겪으며 일본군의 토벌작전을 피해 100여 일간 행군한 것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당시 북한 정부는 어려워진 경제 사정을 고난의 행군과 비교하며 주민들의 정신무장과 희생을 강요했다고 합니다.

 

고난의 행군은 2000년까지 이어졌으며 북한이라는 국가조직의 모든 기본적인 시스템을 붕괴시켜 그 여파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물론 김정은 정권이 들어선 이후 식량사정이 회복되고 있어 2014년 북한의 곡물 생산량은 총 498만 톤으로 증가하였습니다.

 

분석자료에 따르면 북한의 식량 생산량은 1995년 405만 톤에서 2001년 257만 톤까지 떨어졌지만, 2004년부터 400만 톤 이상을 유지하였으며 2011년 422만 톤에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집권한 2012년 445만 톤, 2013년 484만 톤 그리고 지난 해 498만 톤으로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증가 추세에도 불구하고 북한 당국의 식량 공급량은 주민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수요량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자체 수확량이 적었던 2007년까지 국제사회 지원 덕택에 주민들의 최소 수요량만큼 식량을 공급할 수 있었으나 2008년부터 지난 해까지 외부 지원 감소로 7년 연속 수요량을 맞추지 못하고 있으며 현재도 약 37만 명 이상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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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행군 전, 북한은 적어도 식량 사정만큼은 정상이었습니다. 아시아를 기준으로 인당 하루 평균 쌀 권장 소비량은 600그램이었습니다. 북한이 고난의 행군 전 주민들에게 평균 620그램 정도 쌀을 배급했다고 하지만, 80년대 후반 즈음 작황이 좋지 않아 식량 배급이 조금씩 줄기 시작하더니 고난의 행군 시기에 들어서서 배급량이 현격하게 줄어들었습니다.

 

소련에서도 배급제는 스탈린 초기 시기, 정확하게는 1929년~1935년, 2차 세계대전 시기에만 제한적으로 시행되었고 1947년 12월에 들어서 이를 완전히 폐지하였습니다. 물론 배급제 폐지 이후 간간히 상당수 물품들을 배급하기도 하였지만 법적으로 공식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북한은 공식적으로 배급제를 폐지하지 않았고 북한 주민들은 고난의 행군을 극복한다는 명분으로 노동시간을 늘려 학생들까지 농사일에 투입하였습니다. 당장 끼니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노동력의 증가가 이루어질 수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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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 배급이 줄자 북한 인민들은 임시장에서 식량을 구해다 먹었고 부족한 식량을 조금이라도 증산하기 위해 농사에 동원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기초적인 국가 시스템은 마비로 전기 생산은 중단되었고 교통 마비로 공공 서비스의 질은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이런 기근은 결과적으로 북한에서 시장경제가 싹틀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한 반면, 탈북자들을 급속도로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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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위원장의 회고록을 근거로 고난의 행군 시기에 300만이 아사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북한 외무성은 22만 사망설을 주장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황장엽 위원장은 300만 명이 사망했을 거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함흥시에서 입수된 내부 문서에는 360만 사망설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2008년 UN에서 조사단을 파견해 직접 북한의 인구조사를 실시한 결과, 예상보다 총 인구 숫자가 많았습니다. 이 결과로 고난의 행군 시기 아사자를 추정해본다면 약 30~40만 명일 것입니다. 그 당시 인구 170,000명인 김책시에만 하루에 무려 200명이 사망할 정도였습니다.

 


 

인구의 20%가 사라진 우크라이나 대기근이나 인구의 5%가 증발한 중국 대약진 운동에 비하면 북한은 인구 1.5~2% 감소한 것이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고난의 행군' 시기만 고려하면 처음으로 급격한 식량 감소를 겪은 1994년부터 북한 당국이 공식적으로 '고난의 행군 종결'을 선언한 2000년까지 시기를 확장하였을 때 피해규모로 따지면 대략 60만~110만 명, 인구의 3~5% 정도가 기근으로 사망한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것으로 고난의 행군은 무려 만 5년에 걸쳐 엄청난 기근이 계속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워낙 구멍이 크고 광범위하여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써야할지 알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더욱이 고난의 행군은 북한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지나친 영양 결핍으로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갈 정도입니다. 성인에 진입한 1990~2000년대 출생자들의 키가 머리 하나 정도 작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2014년 현재 10~20대 평균 신장은 150cm가 안 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을 발육부진세대라 하며 이들이 군 복무 시기부터 대폭 하향된 신검 신장 기준이 확인되면서 이 추측이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당시 북한 관련 통계를 살펴보면, UN 추산 1인당 GNI가 1994년 약 400$ 수준에서 1995년 200$로 급감하였고 이후 2012년까지 600$를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1990년부터 GNP 하락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면 이 시기 북한 경제는 말 그대로 극심하게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한편, 2000년 북한은 조선노동당 창건 55주년을 기념하며 고난의 행군이 끝났다고 선언하였습니다. 하지만 경제 상황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으며 이후에도 15만 명이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수치상 대략 1990년대 초반 수준으로 경제상황이 나아졌고 시장도 크게 활성화되었습니다. 이와 다르게 시장화의 부작용으로 양극화 현상이 벌어졌으며 사회복지와 배급 체계는 고난의 행군 시기 전으로 복원되지 않아 출세한 계층을 제외한 나머지 계층의 사정은 굶어 죽을 일이 줄어들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크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탈북을 감행하였고 이 중 일부는 한국으로 입국하게 됩니다. 물론 그 전에도 소수 주민이 북한을 탈출하여 한국으로 넘어왔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정치적인 문제가 주류였습니다. 경제적 문제로 생존을 위해 북한에서 도망친 탈북자의 존재가 대규모로 확인된 것은 고난의 행군시기입니다. 이에 따라 북한은 이미 1990년부터 마이너스 경제 상황이었으며 전면적인 개혁개방을 하지 않는 이상 이런 결과를 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고난의 행군은 예견된 재앙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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