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잃어버린 내 젊음을 돌려다오” (88)
by 주성하기자 2014-03-25 10:10 am
앞서 소개해드린 여학생의 탈북수기는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 중에서도 가장 행운의 케이스에 속합니다.
이번에 소개해 드리는 수기는 가장 불운한 케이스에 포함된다고 봅니다. 솔직히 저도 1990년대 북한에서 살았고, 원산도 1990년대 중후반 2~3차례 찾았지만, 이 정도로 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제 주변에는 그나마 잘 사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수기의 저자가 쓴 글이 거짓말이라고는 꼬물만치 생각하지 않습니다. 눈으로는 엄청난 방랑자들과 꽃제비들을 보았고, 시신들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그들 모두 참혹한 체험을 겪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죠.
중국에서도 13년 동안 머무르며 이 여성은 다른 탈북여성들에 비해 엄청난 고난을 겪었습니다. 위의 여학생처럼 한국에 가족이 먼저 와서 데려오는 경우 가장 쉽게 고초없이 올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쉽지 않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이 중국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인데, 이 여성은 좋은 사람은 거의 만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 조선족들에 대해 말한다면 좋은 사람이 대다수입니다. 그러나 많은 탈북자들은 불행하게도 이런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대다수 조선족들은 탈북자에 대해 무관심하지만, 민족의 불행을 악용해 돈을 벌려는 소수의 악독한 인간들이 북중 국경 전역에 거미줄을 쳐놓고 악착같이 강을 넘는 탈북여성들을 사냥해 팔아넘기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행군 시기를 포함해 북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 아는 듯이 함부로 단정하는 몇몇 한국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납니다. “최악의 정보통제로 북한에서 살았던 나조차도 미처 다 모르고 사는데, 네가 어떻게 알어”라고 반박하고 싶습니다.
“김정일, 내 청춘을 돌려다오”라고 제가 달았습니다. 2011년 한국에 입국해 사는 그녀의 현재 심정이 그럴 것이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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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0월, 나는 강원도 문산시 산재동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1999년 1월 29일 37살의 나이로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한 후, 중국에서 12년간의 힘겨운 생활을 끝으로 2011년 4월 11일, 한 단체의 도움으로 한국땅을 밟았다.
내 나이 49살에야 자유의 땅에 들어와 감사와 행복감을 느끼면서도 지난 날의 고통을 잊을 수가 없다. 나의 하나원 동기 중 ○○○을 볼 적마다 그 분은 여든 살의 고령에도 희망의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는데,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작은 오빠와 올케, 어린 조카들, 그리고 나의 귀여운 아기는 왜 고난의 시기를 넘기지 못하고 먼저 저 세상으로 가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면서 쓰리고 아픈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 나의 지난 역경의 날들과 탈북 동기에 대해 이곳에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내가 태어나기 전, 나의 아버지는 강원도 문산시 산재동의 당 부비서를 거쳐 강원도 당 책임비서로 공직에서 높은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부유했던 작은 아버지가 억울한 일로 추방당하면서 아버지를 비롯한 형제들도 모두 천직되어, 내가 태어날 당시에는 일가친척의 삶의 기반이 모두 무너진 상황이었다.
집안이 갑자기 가난해지게 되자 어머니는 울화병으로 앓아 누우시고, 아버지도 밖으로 나돌며 여자들을 만나고 다니며 타락하셨다. 내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는 수입이 일정치 않은 막노동을 하시며 이리저리 생계를 꾸리고 계셨다. 나는 1963년 가을, 기울어지고 암울한 이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는 47세, 어머니께서는 42세이셨다.
아버지는 15년 동안이나 병중에 계시며 일어나 앉지도 못하고 누워만 지내셨다. 결국 1992년 3월 31일 병중에 돌아가셨다. 나는 스물여섯에 첫 번째 결혼을 하고 곧 이혼으로 친정에 돌아와 살다가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식량난이 점차 심해지자, 친정에서 지내는 것도 어려워져 재혼을 하여 일단 친정살이를 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90년대 북한 사회에서의 식량난은 해가 갈수록 점점 더 악화되어갔다. 당시 북한에서는 강연회와 인민 반상회의를 진행할 때마다 인민들에게 선전하기를, 이런 심각한 식량난의 위기가 마치 남조선 괴뢰도당과 미제침략자들, 그리고 일제야만의 경제적 봉쇄로 인해 일어난 것인 듯 책임을 돌리고 있었다. 당시 순진하고 천진하던 북한인민들은 이 말들을 곧이곧대로 믿었고 모든 원한을 남한과 미제로 흘려보냈다.
인민들은 굶으면서도 이 고난의 시기만 지나면 모두가 잘사는 날이 오는 줄만 알고 허리띠를 졸라매며 굳게 이겨내자고 다짐하고 있었다. 외부 세계에 대한 소식이 단절된 채 사는 인민들은 당국의 이런저런 선전과 조치들에 속고 또 속으며 배고픈 생활에 나날이 지쳐가고 있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식량난은 가혹해져만 갔다.
식량난이 해마다 가중되던 중, 설상가상으로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갑작스럽게 삼장마비로 사망하였다. 북한인민들 모두가 김일성을 하나님처럼 경배하면서 모든 것을 그에게 의탁하고 기대하며 살아오고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당시 인민들이 받은 충격은 자유세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컸다.
외부소식과 완전히 단절된 채 북한 인민들은 오직 김일성에 대한 찬양과 선전만을 접하며 살아왔었고, 김일성 사망 이후 삶에 대한 두려움과 아버지를 잃은 슬픔으로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였다. 순진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던 많은 인민들이 강원도 원산시 개선광장 내 김일성 동상 앞에 꽃다발을 증정하고 묵도하던 도중, 땅을 치고 통곡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어 나가기도 하였다.
‘김일성이 죽었어도 산 사람들은 각자의 자식들을 생각해서 살아야 한다.’며 순진한 인민들은 아픈 마음을 추스렸다. 그런 와중에 둘째 오빠도 그의 살아생전 소원이었던 새 집에서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아 보겠다며 자기노력과 뼈심(뼈힘. 몹시 힘겹게 쓰이는 힘이란 뜻의 북한말)으로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1995년 초부터 벽돌을 손으로 찍어서 축조를 해가며 어머니와 둘째 오빠, 올케 셋이서 큰 집을 지어놓았다. 비록 벽지와 장판을 바르지도 못한 채 살고 있었으나, 50Kg짜리 돼지와 오리를 함께 기르며 400-500Kg의 식량을 밑천으로 삼아 만족을 느끼고 살아가던 때였다. 배부른 밥은 먹지 못했어도 앞으로 잘 살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에, 집을 지어놓은 것만으로도 우리 친정 가족들은 행복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1995년 7월 29일 새벽 2~4시 사이, 하늘이 깨질듯한 번개와 사정없는 소낙비가 내리던 그 날 밤, 그날의 날씨처럼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벌어졌다. 우리 가족의 미래였던 돼지와 오리, 식량이란 식량 전부를 깡그리 도적질 당하였던 것이다! 그때부터 어머니와 둘째 오빠, 올케 그리고 3명의 어린 조카들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었다.
김일성이 죽은 이후, 식량공급체계로부터 시작되어 모든 생필품 등 공급체계가 완전히 마비되어갔다. 간혹 외국에서 식량을 실어왔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 내어준다던 밀쌀이나 알락미, 강냉이를 비롯하여 1-2Kg의 식량을 받기도 너무도 힘든 때였다. 일체 공급체계로 살아가던 북한인민들에게 갑자기 모든 것이 차단되고 마비된 생활이 이어지게 되자, 모든 이들이 가난에 허덕이며 고난을 겪게 되었다. 우리 친정 가족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던 우리 친정 가족들은 사경을 헤맬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가족 중 올케가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났다. 1996년 5월 3일이었다. 다음 해인 1997년 초, 어머니께서 돌아가셨고, 곧이어 5월 중순에 둘째 오빠가 세상을 떠났다. 이렇듯 담담하게 ‘굶어 죽었다’고 서술하기에 그 굶주림의 고통은 너무나 컸다.
둘째 오빠가 죽기 직전, 오빠는 세 자녀에게 유언을 남겼다. 그것은 생존에 대한 명령이었다. “아버지는 이만큼 살았으니 죽어도 되지만, 어린 너희들이 태어나서 이 세상을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으면 얼마나 불행하냐. 꼭 살아라. 꼭 살아서 이 땅에 생존해라. 집에 있으면 죽는다. 돌아다니면서라도, 밥을 빌어먹으면서라도 죽지 말고 살아남아야만 다시 좋은 날이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버지는 이제 틀렸다. 나는 가지만 너희들은 꼭 살아남아라.”
둘째 오빠는 큰오빠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부어 오른 몸으로 숨을 거두었다. 큰오빠는 둘째 오빠가 새로 지은 집을 눅은(헐) 값으로 팔고, 3명의 조카들을 거두었다. 하지만 큰오빠는 본인의 자식 4명 중 군대에 보낸 첫째를 제외하고 남은 자식 3명과 올케가 있었기 때문에, 죽은 동생의 자식 3명까지 총 8명의 대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이런 대가족이 90년대 고난의 삶을 유지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둘째 오빠의 아이들은 큰오빠의 집에서 뛰쳐나와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들이 뿔뿔이 흩어져 어디에 살고 있는지 찾을 길도 없었다. 나 또한 두 번의 이혼 후, 장사 등으로 생계를 연명하면서 남은 돈 300원을 수중에 쥐고 원산시 신흥동 장마당을 거닐고 있을 때, 죽은 오빠의 자식인 첫째 조카아이와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상상 할 수도 없는 몰골의 꽃제비가 되어있었다. 며칠을 굶었는지 걸을 힘조차 없어 간신히 몸을 끌며 맨발로 서있는 조카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미어지는 아픔에 눈물을 왈칵 쏟았다. 조카도 나를 보고 아줌마라 부르며 앞으로 다가오지 못한 채로 우뚝 서서 소리 없는 눈물만 줄줄 흘리고 있었다.
내 사정을 생각하기에 앞서 이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조카아이가 먹고 싶다는 대로 100원어치를 사 먹이고, 신발과 옷을 사 입혔다. 수중에 있던 300원을 그 자리에서 모두 다 써버린 것이다. 우리는 할 수 없이 큰오빠 집으로 도움을 청하러 가게 되었다.
결혼과 이혼
나의 첫 결혼은 금세 이혼으로 끝났다. 그는 부잣집 아들이었으나 도벽이 있었다. 남편의 도둑질이 문제가 되자, 큰오빠가 찾아와 도벽 있는 사람과 절대 같이 살게 할 수 없다며 이혼을 시켰다. 시댁형편이 친정보다 훨씬 나았기 때문에 아이는 그 집에 두고 나왔다.
아이와 헤어지는 것이 너무도 가슴 아팠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의 소원은 통일이 되고 죽기 전에 생이별 하였던 딸을 한 번이라도 만나보는 것이다. 당시 시댁이 부잣집이었으니 아마 좋은 곳에서 잘 자라서 지금쯤 20대의 어여쁜 처녀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렇듯 친정의 성화에 못 이겨 이혼을 한 후 다시 친정으로 돌아왔지만, 마음이 결코 편하지 않았다. 집에는 이미 오빠와 올케, 조카들이 함께 살고 있어서 내 집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고, 내가 이혼할 당시 식량난이 심해져 더 이상 친정신세를 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친구 어머니의 소개로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 남자 역시 이혼한 사람이었지만 대학을 두 군데나 졸업한 교원으로 겉보기에 매우 점잖은 사람 같았다. 나는 하루빨리 친정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그를 몇 번 만나본 후 덥석 재혼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제 재혼하여 행복하게 살 수 있겠다, 란 생각에 한껏 들떴고 나의 여성스러운 기질을 잘 살려 가정을 아끼며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렇게 새로운 결혼생활에 대한 기대는 컸으나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은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재혼 전에는 이런 괴상한 성격을 전혀 알지 못했지만, 알고 보니 술만 마시면 여자를 학대하고 괴롭히는 성격 이상이 있었다. 이전에는 그 남자의 이혼사유를 알지 못하였는데 아마 이런 이유로 이혼했을 것이다.
술을 마시면 다른 남자가 있다는 생트집을 잡아 옷을 모두 벗겨 나의 알몸을 요리조리 꼬집어댔다. 때리는 것이 아니라 꼬집어 대는데 내가 조금이라도 반항을 하면 크게 때릴 듯이 협박을 하면서 꼬집은 탓에 온몸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때리는 것보다 오히려 더 폭력적이고 가학적인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매 맞지 않으려고 가만히 있었으나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비록 평소에는 점잖은 사람이었고 술이 깨면 이전에 한 일에 대해 사죄를 하며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그 때뿐이었다. 나는 더 이상 이 남자와 살 수 없어 또다시 이혼을 하게 되었다.
아직 돌도 안 된 어린 딸을 데리고 동거살이(셋방살이)를 하며 장사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갓난아이를 데리고 장사를 한다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장사는 말려들어 가고, 아이와 둘이서 하루 벌어먹고 살아가기도 어려운 형편에, 집세 내는 것은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여 맹위원장이요, 동지도원이요, 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왜 직장을 다니지 않고 하지 말라는 장사를 하냐며 장사밑천을 빼앗아 가곤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생활하기가 어려운데 매나니(괜히) 건집(트집)을 걸어서 장사를 하려고 하면 밑천까지 깡그리 빼앗아갔다. 아이에게 알락미조차 먹일 수 없는 형편에 죽을 쑤어 먹이려 해도 울면서 입 밖으로 도로 내밀며 받아먹질 않았다. 워낙 맥이 없어 하기에 어르고 달래면서 죽을 도로 떠먹이면, 그 어린 것이 서러운 울음소리와 함께 눈물을 줄줄 흘리며 도리도리 고개를 젓곤 하였다.
이러다가는 아이가 갑자기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엄습해오자, 내가 거두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잘사는 집에 보내어 살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관에게 시집간 동창생에게 부탁하여 그 동창의 소개로 평양에 잘사는 한 군관의 집으로 아이를 떠나보냈다. 생때같은 딸이 떠나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첫째 남편의 도벽과 두 번째 남편의 학대로 두 번의 결혼생활은 모두 파탄 나게 되었다. 내 의지와는 별개로 남자들의 결함을 알지 못한 채 결혼하고, 고생하고, 이혼하는 것은 과연 누구의 잘못일까 싶었지만, 그저 남자 복이 없는 것이 나의 운명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당시 90년대의 지독한 식량난으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이미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도 모두 돌아가시고 둘째오빠 내외도 굶어죽게 되자 갈 곳이 없었다. 수중 몇 푼의 돈으로 여기저기서 장사를 해가며 연명해 보았지만, 나는 이 기근 속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파리 목숨과 같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만났던 세 번째 남자는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없이 만난 사람이었다.
죽은 작은오빠의 세 조카들 중 둘은 어디로 갔는지 생사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장마당에서 우연히 꽃제비가 된 큰 조카를 만나게 되었다. 그 아이를 데리고 큰오빠를 찾아가 작은오빠 집을 팔고 남은 돈의 일부(2,000원 정도)를 달라고 하였지만, 나뿐만 아니라 조카에게도 살아갈 밑천을 조금도 나눠주지 않았다. 큰오빠 입장에서는 두 번이나 이혼한 나를 좋게 봐줄리 없었고, 오히려 갈 곳이 없는 나를 이래저래 챙기느라 친정의 가세가 더 기울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때는 사회적으로 식량이 너무나 부족한 시기였다. 가족이라도 서로 챙겨줄 형편이 못 되었고, 오히려 가족끼리도 서로 잡아먹을 수밖에 없는 흉흉한 시절이었다. 돈도 없고 집도 없었던 나와 조카는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여자가 몸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을 잘 알아듣지 못했던 조카에게 ‘혹시 굶어죽을 상황이 되면, 네 몸을 팔아서라도 살 길을 찾아라.’고 가르쳐주었다.
나 역시 지나가다 집이라도 한 칸 있었던 남자를 따라서 살게 된 것이 세 번째 남자와의 인연이었다. 길거리에서 굶어죽지 않으려면, 집이라도 있는 남자가 내게 손을 내밀 때 그저 그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외모나 성격, 직업 등 남자들에게 기대하며 신랑감으로 재던 그 어떤 조건들도 상대방에게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 당시 식량난 중의 내 상황이었다. 단 하루, 오늘의 거처와 먹을 끼니가 해결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손은 나에게 생존의 기회였던 것이다. 90년대의 식량난은 이토록 절박했다.
남자를 따라 간 집에는 제대로 된 이부자리조차 없었다. 그저 솜 같은 것이 둘둘 말려있어서 한기를 피할 수 있을 뿐이었다. 둘이서 국수장사를 시작한 후 임신을 하게 되었지만, 하루 종일 제대로 못 먹으며 시장바닥에 앉아 국수를 팔다보니 몸을 추스릴 시간이 없었다.
하루의 일이 임산부가 감당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고, 매일 추운 길가에 앉아 있는 것 또한 몸에 안 좋았던지 아이를 낳자마자 보름도 지나지 않아 죽었다. 죽은 사내아이를 바라보는 나의 절망은 너무도 커서, 더 이상 조선 땅에서 숨을 쉬고 살 수 없게 느껴졌다. 그리고 개미만큼의 미련도 남아있지 않은 이 땅을 버리기로 결심하였다. 적어도 중국에서는 숨을 쉬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식량난 중 북한 원산 지역의 상황
나는 아이를 떠나보내고 술을 마시며 눈물 속에서 아픈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다 굶어 죽어가는 상황에서 달리 어쩔 방법이 없었다고 위로해주던 친구와 함께, 마실 줄도 모르는 술을 연거푸 마셔댔다. 정신은 또렷한데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게 되자 이런 생각만 줄기차게 맴돌았다.
‘더는 이 세상을 살고 싶지 않아. 그냥 이대로 잠들어 버리고 싶다…’ 친구는 지금 거리에 시체들이 널려 있는데 이렇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긍지를 가져야 한다고 내 손을 붙잡았다. 어떻게든 살아갈 방법을 찾으라고 얼마 가량 밑천을 대주었던 고마운 동무 덕분에 나는 힘을 얻어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원산의 거리에는 시체들이 드문드문 널려져 있었다. 죽은 지 3일이 지나도록 장사 지내주는 사람이 없어 길에서 썩어가는 시체들에는 악취와 함께 파리와 구더기 떼가 들끓었다. 국가에서는 그런 시체들을 한 차로 실어가서 한데 묻어버렸다. 수많은 인생이 굶주림 속에 속절없이 죽어가고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들도 오랜 굶주림으로 너무나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다음엔 내 차례라며, 지금은 숨이 붙어있으나 며칠 후에는 우리도 이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서로가 공공연히 주고받았다. 시체를 나르고 구덩이 파는 일을 하면 술 한 잔에 밥 한 덩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다해 구덩이 파는 일을 하며 술 한 잔과 음식을 얻어먹고 죽어가는 게 불쌍한 인민들이었다.
수많은 인민은 빌어먹는 처지로 전락하였고 동냥하러 다니는 사람들은 늘어만 갔다. 그중에 꿰맨 군복을 입은 총각들이 허약한 몸으로 굶어 죽어있는 것을 여러 명 보았다. 당시에는 굶주린 탈영병들을 만나기가 쉬웠다. 어느 날 하루는 함흥이 고향이라던 21살의 어여쁜 처녀 아이가 빨간 완장을 달고 군복을 입은 채 국수를 팔던 내게 왔었다. 국수를 사 먹으며 하는 말이 엄마 아빠가 굶어 죽고 남동생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으며, 더는 배고픔을 견딜 수가 없어 부대를 탈출했다고 이야기하였다. 그 여자아이는 스무날 동안 원산역전을 맴돌더니 완전히 거지가 된 몸으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원산역전을 옆으로 마주 보던 건물의 A층 2호에는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이렇게 네 식구가 살고 있었다. 굶주림이 극심한 난리 통에 어머니는 먼저 죽었고, 딸이 음식장사로 간신히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이 장사하던 중 안전원에게 장사밑천을 깡그리 빼앗기는 일이 생겼다.
굶주리던 남동생이 들어와 오늘은 어째서 먹을 것을 하나도 못 벌어 왔느냐고 묻자 누나는 장사밑천을 빼앗긴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순간 동생은 치미는 분노에 악이 받쳐 누나의 머리를 내리쳤는데 누나는 그대로 숨져버렸다. 그다음에 벌어진 끔찍한 일은, 동생이 누나의 인육을 먹은 이야기다. 굶주림에 지칠 대로 지쳐있던 남동생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겠으니 먹고라도 죽자는 심정으로 죽은 누나의 젖가슴과 뱃살을 도려내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걸로 알락미 2kg을 샀고, 시체의 포를 떠서 고기를 베어내어 고기반찬과 밥을 지어 저녁 식사를 내었다. 저녁상을 보고 깜짝 놀란 아버지는 이런 밥과 반찬이 어쩐 일인가 물으니, 누나가 장사가 잘돼서 이렇게 먹을 것을 싸놓고 큰 장사를 하러 떠났다며 둘러댔다. 그날, 아버지와 아들은 허기진 배를 두둑이 채울 수 있었다.
며칠이 지난 후, 아들은 남은 고기를 팔러 장마당에 나갔는데 전에 고기를 사갔던 할머니가 다시 찾아왔다. 총각이 판 돼지고기가 매우 맛있었다며 다시 고기를 사려고 찾아온 것이었다. 할머니는 고기를 뒤적거리다 문득 사람의 배꼽형태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이게 도대체 무엇이냐고 물었다. 순간 너무도 당황했던 아들은 남은 고기를 다 팔지 못하고 식량도 구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아무 것도 구하지 못한 아들은 할 수 없이 밥이나 반찬 없이 고기만을 넣어 아버지와 함께 먹을 죽을 끓여 놓았다. 허약한 몸 때문에 비위가 약해져 고기만 먹기 어려웠던 아버지는 식탁을 보고 이상한 느낌이 들어 아들에게 사정을 물었더니, 아들은 그제야 모든 일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말인즉슨, 아무래도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다 굶어 죽게 될 것인데 한 끼라도 배불리 먹어보고 죽자는 생각으로 죽은 누나의 고기를 내다 팔아 쌀을 구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참을 수 없이 분노한 아버지는 그 즉시 아들을 내리쳤다. 워낙 허약했던 아들은 그 자리에서 맥없이 숨져버렸고, 아버지는 안전부에 잡혀가 그 집은 텅텅 비게 되었다. 단란했던 네 식구의 비극은 이렇게 끝이 났고, 이 소문은 온 동네에 퍼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또 원산시 원석 동에서는 아버지가 굶주림에 미쳐 7살 난 딸을 잡아먹는 사건이 있었다. 아이 아버지는 아이를 먹은 후, 아이 머리를 문 앞마당에 놓고 쓰레기통에 아이의 손이 보이는 채로 꽂아 두고는 허허 웃으며 “내가 먹었어. 내가 먹었어.”라고 되풀이하였다. 그가 정신이 나가 있는 것을 본 안전부에서는 그를 잡아갔고, 동네 사람들은 원산시 검찰소 검찰관들이 사건 현장 사진을 이리저리 찍어가는 모습을 인산인해를 이루며 구경하였다. 나는 지금도 그 집을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북한 사람들이 짐승보다도 못하게 속절없이 굶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인민들의 눈에는 설움이 가득 찼다. 나 역시 너무나 서러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고 말 한마디 잘못하면 어디론가 잡혀가 생사도 모르게 되는 이런 북한 땅에서 인민들의 울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만 갔다.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아무런 의견도 낼 수 없으며 무조건 참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불쌍하고 처참한 인민들의 삶, 이것이 북한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장사 등을 하며 살아갈 궁리를 모색하면, 안전원이나 노동검찰대가 밑천을 깡그리 빼앗아 가기 일쑤였기 때문에 이러한 독재와 극심한 배고픔 속에서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상황이었던 나는 북한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또 함경북도 국경지대 농촌으로 시집가 살고 있던 언니네에서 낳았던 아들이 보름 만에 죽자, 더는 이 땅에서는 숨을 쉬고 살 수가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과거, 첫 번째 결혼에서 난 돌도 안 된 딸아이와 생이별했던 아픔에 이렇게 아들까지 잃자 그 슬픔과 고통은 배가 된 것이다.
언니네가 국경지대에 살았기 때문에 중국으로 가는 루트를 잘 알고 있었다. 언니가 비용을 대주었고, 국경지대의 다른 사람 집에 15일 정도를 머무르며 도강할 기회를 엿보았다. 드디어 1999년 1월 29일, 이 땅에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은 나와 남편은 드디어 두만강을 건너 북한을 떠나게 되었다.
중국에서의 삶
우리는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 ‘서문여관’이라는 곳으로 갔다. 내가 임신해 있는 동안 남편이 그곳에서 묵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여관주인과 안면이 있었다. 당시 우리는 수중에 중국 돈 10원이 있었을 뿐, 완전 빈털터리나 다름없었다. 갈 곳이 마땅치 않았고 다른 곳은 말도 통하지 않으니 조선족이 운영하는 이 여관을 무작정 찾아갔던 것이다. 여관주인은 우리가 돈이 있는 줄 알고 받아주었다.
대책도 없이 여관에 머무는 동안 공안에 발각되어 북송될 처지에 놓인 적이 있었다. 다행히 남편의 친척이 중국 상문시의 공안부 국장이어서 우리의 뒤를 봐주어 풀려날 수 있었다. 북으로 후송되는 탈북자 일행 가운데 공안은 나와 남편 둘만 두만강가에 몰래 풀어주었다. 같은 공안끼리 의리를 지키느라 그리한 것이었다. 그것은 분명 특별대우였다.
그대로 북송되어 우리에게 일어났을 일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다행히 한 번의 북송 위기는 넘겼으나 또다시 잡히면 이번에는 그대로 북송될 처지였다. 당연히 북송 위기에 처한 적 있던 그 여관이 안전한 곳이 아니었음에도, 갈 곳이 없던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여관장은 다시 찾아온 우리를 여관이 아닌 자기 살림집으로 데리고 가 일주일간을 숨겨주었다. 그 집에 있는 동안 우리는 라면과 김치만 먹었는데, 그 음식들은 매웠지만 정말 맛있었다. 라면을 먹으면서 너무 매워 얼굴이 빨개져 가면서도, 우리 둘은 후후 불어가며 맛있게 먹었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것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일주일을 지내는 동안, 여관주인과 남편은 중국인 남자에게 팔려가는 수밖에 없다며 자꾸 나를 꾀었다. 우리가 무일푼이니 그 방법 외에는 달리 빠져나가는 수가 없다는 말이었다. 나더러 팔려갔다가 다시 도망쳐 나오라고 했지만, 중국말도 모르는 내가 중국의 내지 깡촌으로 팔려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들도, 나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여관 밖으로 나가 잡히면 북송될 처지였고 그렇다고 무한정 여관주인집에 신세를 지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모든 일이 이미 정해진 것 마냥, 나는 중국인 브로커에게 3,000원에 팔리고 여관집 주인이 2,000원, 남편이 1,000원을 나누어 가졌다. 내가 받은 돈은 고작 100원이었다. 나 역시 이러한 거래를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야말로 눈 뜨고 당하는 셈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어느 시골의 중국 남자에게 팔려가게 되었다. 남편에게 그가 받은 1,000원 중 500원을 우리가 북한을 탈출하는 데 도움을 준 북한의 언니에게 보내주라고 부탁하였으나, 후에 알아보니 언니에게 돈을 보내지 않은 채 입을 닦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 점에 대해서는 괘씸하다는 생각뿐이다. 후에 그와 내가 모두 한국에 들어왔으나, 아예 연락하지 않는다.
탈북 여성에 대한 인신매매의 메커니즘은 이러하다. 국경지대에서 나를 3,000원에 사간 브로커는 중국 농촌의 남자에게 6,000원에 되팔았다. 국경지대에서 북한사람을 사서 내지로 이동시켜 중국남자에게 넘겨주는 일은 브로커들에게도 큰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중국 내 북한여자를 파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실제 여자를 사가는 사람들에게 두 배 넘는 이문을 넘겨 되팔게 되는 것이다. 20대 젊은 여자들은 5,000원에 팔려가 10,000원에 되팔리고, 그 중 인물이 예쁘면 더 비싸게 팔리는 실정이다. 친척들이 중국에 있거나 거처가 있지 않은 한, 북한에서 무일푼으로 도강한 여자들은 무조건 제 몸을 뜯기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다. 거의 모두 팔려간다고 보면 된다. 중국의 조선족 사람들이 다 중국 사람들에게 팔아먹는 것이다.
중국 농촌에는 여자들이 부족하고 노총각들이 많아서 조선 여자들을 사가려는 수요가 많다. 그래서 중국의 시골이나 농촌 곳곳에는 북한에서 팔려온 여자들이 많다. 그들은 중국에 살다가도 북한 여자임이 알려지면 공안에 잡혀 북송되는 위기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나는 중국 농촌으로 팔려간 지 3개월도 지나지 않아 세 번이나 도망가려다 매번 붙잡혔다. 세 번째 탈출 시도 때는 중국 남자에게 붙잡혀 매를 맞았는데, 맞던 중 발길에 차여 꼬리뼈를 정통으로 맞았다. 순간적으로 온몸에 마비가 와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고 그대로 기절하였다.
정신은 말짱한데 이상하게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말도 한마디 나오지 않는 상태로 10여 분 정도를 누워있었다. 온몸에 마비가 풀리자, 그제야 짐승같이 폭풍 울음을 쏟아내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나를 동정하며 중국 남자를 욕하는 눈치였다. 당시에 중국말은 하나도 몰랐지만, 사람들이 혀를 차는 행동과 나에게 보내는 동정 어린 눈빛, 말하는 어투에서 그러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 번 기절하고 난 후, 이제는 내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시어머니가 변소에 갈 때도 따라나오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 집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는 등 시위를 하였다. 생사람 죽이겠다며 동네에서도 나를 다른 곳으로 보내주라고 하자, 중국 남자는 결국 자신의 친척쯤 되는 사람에게 나를 넘겨주었다. 그는 나를 6,000원에 사온 것이기 때문에 나와 같이 살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다시 돈을 받고 팔고 싶었을 것이다. 나를 데리러 온 사람은, 그에게 돈을 주기로 하고 일단 나를 데려가는 것 같았다.
나는 어디로 가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보다 더 못한 곳으로 가게 될까봐 너무도 두려웠다. 나를 데려가는 사람에게, 다른 남자에게 나를 팔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였다. 식당 같은 곳에 넘겨주어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또 부탁하였다. 그와 같이 길을 가던 도중에 수중에 있던 100원마저 그에게 넘겨주었다. 그 사람은 착한 사람인 것 같았기 때문에 중국 상황에 전혀 무지한 나는 이 사람을 믿고 의지하고 싶었다.
그는 내게 잘해주었으나, 유부남이었고 부인이 갑자기 찾아와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나는 결국 중국인이 하는 식당에 넘겨졌다. 열심히만 일하면 그곳에서 돈을 모아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 줄 알았으나, 결과적으로는 월급을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일만 열심히 한 셈이 되었다. 왜냐면 그 식당이 망했기 때문이다.
나는 장춘과 송원의 중간쯤 위치한 자그마한 농촌의 식당에 넘겨졌다. 그곳은 농촌을 가로질러 도시로 가는 도로변에 줄지어 있는 식당 중 하나였다. 1996년 이후, 중국의 식당에는 아가씨(몸 파는 여자)들이 많아졌다. 몸을 팔아 큰돈을 번 여자들이 많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가씨 일은 하지 않고, 식당의 허드렛일을 하며 늘 일제 기성복을 차려입고 춤과 노래로 열심히 손님의 기분을 맞춰주었다.
이 식당은 나 때문에 손님이 많아져서 돈을 많이 벌었다. 이때 나는 중국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싶어 미련하다 싶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당시 그 주변 식당에서는 나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다. 얼굴이 예쁜데 아가씨 일은 하지 않고 춤과 노래만 하면서 식당일을 열심히 한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주변의 식당 주인들도 탈북자인 나를 보호해주려고 하였다.
중국 공안들이 몸 파는 아가씨들을 잡으러 식당을 수색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 번은 수색 중이던 공안이 나에게 말을 시켰는데, 순간 가슴이 쿵쿵 뛰었다. 어디서 왔는가 하고 물어서 대답하고, 몇 살이냐고 물어서 당시 나는 37살이었는데 31살이라고 하였다.
그 사람들이 자신들과 같은 나이 또래라고 생각하였는지 그저 흘끔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자기들끼리 ‘야 곱다’, ‘근데 북한에서 온 거 아냐?’, ‘머 어때 우리는 그런 거 잡으러 다니는 것도 아니잖아.’ 하는 대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그냥 가버렸다. 나는 심장이 떨려서 죽다 살아난 것 같았다.
식당에서는 한 달에 300원을 준다고 하였지만, 사실 단 한 푼도 받지 못하였다. 애초 식당 주인이 300원을 주겠다고 했던 이유는 내게 몸 파는 일을 시키고 노예처럼 부려 먹을 생각에서였던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때그때 돈을 주었는데, 나는 탈북자라 그런지 돈을 바로 주지 않았다.
돈을 못 받은 채 그 식당에서 다섯 달을 내리 일만 하였다. 물론 나도 내 수중에 그런 큰돈이 있는 것이 두려웠다. 다른 사람들이 노릴 것만 같아서 오히려 돈이 사장님 품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할 것 같았다. 하지만 돈을 못 받고 일만 열심히 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억울하다.
손님들이 나를 원하는데 내가 몸 파는 일을 하지 않자, 식당 주인은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식당에서 냉동고가 필요해서 같이 일하던 22살 아가씨와 함께 가까운 송원 시내로 냉동고를 보러 나갔다. 그런데 돌아오자마자 이 아가씨가 중국말로 내 욕을 미리 했었는지, 사장이 내게 다짜고짜 욕을 하는 것이었다.
영문도 모르게 욕을 얻어먹자 나도 조선말로 욕을 하면서 싫은 기색을 잔뜩 내었다. 그러자 사장은 갑자기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나는 맞아서 눈이 퉁퉁 붓고 입에서 피가 났다. 주위에 많은 식당 주인들이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모두 내 편을 들어주며 나보고 짐을 싸 들고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
나를 때린 것이 남 보기 부끄러워서인지 사장은 내가 짐을 싸서 나오는데도 문밖으로 나오지를 못했다. 이렇게 도망치듯 나와버려 그동안 일한 품삯은 하나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주위에서는 나를 송원에 있는 조선식당에 소개해주었다. 이리하여 드디어 조선말이 통하는 곳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일 년 뒤 다시 그 농촌마을에 가보니 식당은 망하고 마당에 풀만 무성하게 자라있었다. 그곳은 장거리 운송트럭 운전기사들이 대부분 손님이었던 식당이었다. 춤추고 노래하며 비위를 맞춰주던 내가 없어지자 나를 찾던 손님들이 많이 줄었다고 했다. 나를 때리고 한 이야기까지 주변 식당을 통해 손님들까지 전해져서 그 식당은 결국 망했다고 한다. 그 식당 사장은 참 못나고 나쁜 사람이었다.
새로 일하게 된 송원의 조선식당에서는 개고기도 찢고 카운터도 보고 설거지도 하면서 나름 돈을 좀 모을 수 있었다. 이렇게 겨우 모은 돈 1,000원을 우선 북한에 있는 언니네로 급하게 보내주었다. 내가 북한에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신세를 많이 졌고, 언니네가 북한에서 어렵게 지내고 있을 것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1,000원을 보내느라 별도의 인편 비용으로 400원을 썼다. 두 번째로 또 돈을 보냈고 옷도 보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언니에게 좋은 소리를 못 들을 수 없었다. 인편을 중개로 들은 이야기라 나도 무엇이 진실인지 잘 모르겠다. 그 이후부터 나는 심화병(울화병)을 앓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수시로 탈북자들을 색출해 가는 운동이 벌어졌는데, 그럴 때면 나는 아무도 모르는 곳, 강가의 빈집 등 아무도 나를 색출해 갈 수 없는 곳으로 도망가서 며칠 밤을 자고 오곤 하였다. 아는 사람 집에 있어도 누군가 신고해서 나를 잡아갈 것만 같았기 때문에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북한에 다시 잡혀가는 것은 나에게 곧 죽음을 의미했다. 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벌벌 떨었고 심장이 깜짝깜짝 자주 놀라면서 신경이 예민해졌다. 아직도 밤에 잠을 푹 자지 못하고 신경이 쇠약한 이유가 많은 시간을 조마조마하게 지내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갈 곳 없는 몸으로 식당에서 일하며 지내고 있던 차에 한 중국 남자를 알게 되었고, 나는 그 사람을 따라가서 살게 되었다. 나는 당시 37살이었고 나를 데리고 간 중국 남자는 25살이었다. (나는 팔려올 때부터 31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두 내 나이가 그런 줄 안다) 그 중국 남자는 나보다 젊어 보이지도 않았고, 함께 간 그의 집은 북한의 우리 집보다도 가난한 집이었다. 즉 중국에서도 빈민 중의 빈민층이었다. 사실 북한이 마비만 되지 않았다면 우리 집보다도 더 못 사는 집이었다.
나는 얼마 안 가 이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 나는 항변하고 싶다. 탈북 여성들은 근본이 나빠서 이 남자 저 남자를 따라가는 게 아니다. 공안에 잡히지 않으려면 누군가의 보호 아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사랑이 없어도 따라가는 것이다. 내가 중국말을 못하고 탈북자의 행색이 묻어나는 한, 언제 어디서든 신고의 대상이 되고, 항상 한 군데 붙어서 오래 살 수가 없는 노릇이다.
이렇게 나는 4명의 남자를 따라갔었다. 그들은 모두 중국에서도 극빈층이거나 몸이 성치 않은 환자들이었다. 탈북 여성들은 중국에서 사회적으로 너무나 불안정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이런 남자들과 사는 경우가 많다. 어여쁜 조선 여자들에게 참으로 슬프고 억울한 일이다.
처음에는 공안에 잡혀갈까 두려워 중국 남자를 따라다니며 살았지만, 점차 중국말이 유창해지면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중국에서 산 지 오래되자 누가 봐도 내가 탈북자인지 모를 정도가 되었고, 더 이상 중국남자를 나의 안전 보호막으로 둘 필요가 없었다. 나는 이제 돈을 벌면서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내 주변을 추스를 수 있었고, 완전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는 자유로워졌다. 생계는 식당에서 주방 일을 하면서 유지할 수 있었다.
주위에는 교회가 있었다. 어느 날, 기독교인이던 중국 자매가 나의 처지를 알고 내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주었다. 그녀는 주기도문을 중국어로 읊어가며 나를 위해 기도해 주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기도를 받고 그날 식당에서 일하는데 신기하게도 나의 마음이 교회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중국 교회를 다시 찾아갔는데 내가 말을 잘 못 알아듣자 조선교회를 알려주었다. 그곳에서 준 예수님의 생애를 담은 CD를 보고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님에 대해 알고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내 평생 그때 가장 많이 울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그동안 너무 힘들게 일해 온 탓에 몸이 많이 아팠는데, 성경에서 나오는 치유의 기적이 나에게도 일어나길 간절히 기도했다. 나는 이날 알게 된 하나님을, 내게 주어진 이 절대자 하나님을 절대 놓치지 말고 꼭 붙들겠다고 결심했다.
예수님을 내 영혼의 구주로 영접하고 난 후 어느 날, 양말을 사러 시장에 간 적이 있었다. 양말 장수가 한눈을 파는 사이, ‘어라, 내가 이 양말을 슬쩍 가져가도 이 사람 아무것도 모르겠네?’라는 나쁜 생각이 드는 순간, 심장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의 뼈마디 골수가 쪼개지는 느낌이 들며 정신이 버쩍 드는 것을 경험했다. ‘내가 너의 하나님이다.’ 그 순간 살아있는 주님을 체험했다.
나는 전도사님을 따라 명절을 지내러 하얼빈에 있는 교회로 갔다. 청년부 앞에서 찬송가에 맞추어 직접 창작한 춤을 공연했는데 모두 좋아해 주었다. 중국에 있는 동안 자유와 소속감을 느껴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하얼빈에서 사람들과 이곳저곳 어울려 다니는 일이 무척이나 행복했다. 내게 송원으로 되돌아가도 되고, 하얼빈에서 더 있어도 된다는 하얼빈 교회의 제안에 너무 기뻐하며 더 머물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하얼빈에서 나는 딱히 갈 곳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한국으로 나오기까지 8개월을 교회 대문 지키는 일을 하면서 교회에서 먹고 자며 숙식을 해결했다. 바느질 솜씨를 살려 교회 청년부 아이들의 무대 공연복도 지어주기도 하였다. 주님 안에서 깨어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내 삶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하얼빈 교회에서도의 생활은 행복 그 자체였다.
중국에서 산지 어언 13년! 이제 중국어도 웬만큼 하게 되었고 중국에서의 고생스러웠던 시간들도 점차 안정적인 생활로 자리 잡혀가고 있었다. 처음 중국에 들어와 팔려 다니던 시절에는 탈북자 행색이 고스란히 묻어났고, 언어도 통하지 않아 항상 언제 다시 잡혀갈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갔었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라고는 허허벌판뿐, 아무것도 없던 시골에서조차 가슴 졸이며 살아온 시간들이었다. 시간이 지나 점차 중국의 언어와 풍습에 익숙해지자 아무도 내가 북한출신인 것을 알아채지 못했고 그제서야 자유롭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조선을 탈출하여 중국 땅에서 10년을 넘게 살았어도 90년대의 처참했던 북한 땅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부모와 둘째 오빠 내외를 땅에 묻고 조카아이들을 뒤로 한 채 조선을 탈출하여 중국 땅으로 왔으나, 내 나라를 언제나 마음에 품고 있다.
중국에서 고마운 사람의 소개로 2011년 4월 11일 드디어 대한민국에 발을 딛게 되었다! 숨어 지내며 온갖 수모를 겪던 지난날과는 다른, 꿈속에서나 그려보던 생활을 하면서… 내 마음은 행복과 만족감으로 설렌다. 대한민국의 품으로 탈북자들을 불러주셔서 이 땅의 당당한 국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와 사랑을 주신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하나원에서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의무교육과 직업훈련도 시켜주셔서 대한민국 사회에 감사한 마음이 물밀 듯 터져 나온다.
아, 집과 정착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주는 이 나라! 대한민국을 더 잘 알아가도록 교육하며 지원해주시는 하나원 선생님들! 친정어머니의 심정으로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섬세하게 가르쳐주시는 선생님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우리 탈북자를 믿어주시고, 앞으로 통일 광장에서 더 큰 역할을 하게끔 기대해 주시며, 어엿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받아주시고 환영해 주시는데 대하여 이 감사의 격정을 누를 길이 없다. 어디서 나를 이토록 당당한 국민으로 받아주리! 나라 없이, 신분 없이 떠돌아다니는 설움을 겪으면서 이런 꿈같은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던 시절이 있기에, 오늘의 행복은 더욱 소중히 여겨진다.
이곳에서의 삶을 주님께서 친절한 팔로 인도해 주시는 것을 느낀다. 북한에서의 강한 말투를 남한사회에 맞추어 부드럽게 하라고 명령하신다. 가구류들은 경비 아바이가 아파트 주민이 이사가면서 버리고 간 것들로 채워주었다. 매달 43만원씩 정부 보조금이 나온다. 국가에서 지원된 300만원의 정착금을 나를 브로커에게 비용으로 지불하고 나를 빼내준 단체에 주었다.
냉장고 옷 등을 사는데 썼다. 지금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은 아니다. 그 동안 고생하여 몸이 많이 상했다. 빈혈 때문에 자주 누워있어야 한다. 6만 원짜리 홍삼 4팩에 24만원 한약 10만 원어치 지어먹고 등등 하니 손님 한 번 청할 때마다 돈이 나가고 해서 돈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게 빠져나가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든지 나는 잘 적응해서 살아갈 것이다.
나는 그동안 북한, 중국 등지에서 고생하며 몸이 많이 상했기 때문에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빈혈 때문에 자주 누워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삶을 주님께서 친절한 팔로 인도해 주시는 것을 느낀다. 가구류들은 아파트 주민이 이사 가면서 버리고 간 것들을 경비 아저씨가 채워주셨고, 매달 43만원씩 정부 부조금이 나온다. 국가에서 지원된 300만원은 브로커와 내가 한국에 올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단체에 주었고, 냉장고, 옷 등을 사는데 사용했다.
앞으로 북한 땅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인민에게 고통이 없는 평화의 나라, 자유의 나라가 될 수 있도록 앞장서야겠다. 우리 민족은 하나의 핏줄로 이어온 동족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대한민국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만큼 우리도 남북통일을 위한 성스러운 길에 동참해야겠다. 우리 탈북자들은 무슨 일을 하든 성심성의로 대한민국 사회를 위하여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하여야겠다.
평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통일의 광장에서 대문을 열고 계속 밀려오고 있는 후배들을 위해 훌륭한 교육으로 지원해 주시는 하나원 원장선생님 이하 모든 교직원, 선생님들을 축복하며 뜨거운 감사의 인사로써 마무리하고자 한다.
출처 : 북한인권시민연합 https://kor.nkhumanrights.or.kr/mai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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