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24

사부대중이란 무슨 뜻인가요? - 불교신문

이것이 궁금해요!-사부대중이란 무슨 뜻인가요? - 불교신문

이것이 궁금해요!-사부대중이란 무슨 뜻인가요?

승인 2007.06.16 10:05

문 : 사찰에서 ‘사부대중’이란 말을 자주 듣습니다. 스님과 신도를 말하는 것 같은데 사부대중이란 무슨 말이에요?

비구와 비구니, 우바새와 우바이 통칭하는 말

답 : 사부대중이란 불교 교단인 승가를 이루는 기본 집단으로 출가한 남녀 수행승인 비구, 비구니와 재가의 남녀 신도인 우바새, 우바이를 통틀어 가리키는 말입니다.

비구와 비구니는 스님을 말하는데, 남자 스님을 비구하고 하며 비구는 250가지의 계율을 받아 지키면서 수행을 합니다. 여자스님은 비구니라고 하는데 348가지의 계율을 받은 스님입니다.

우바새 우바이는 출가하지 않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들을 말합니다. 우바새는 5계 혹은 보살계를 받은 남자신도를 말하며 거사, 청신남이라고도 합니다. 우바이는 5계 혹은 보살계를 받은 여자신도를 말하며 보살, 청신녀라고도 합니다.

[불교신문 2336호/ 6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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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대중 [四部大衆, Sabudaejung]

비구 (比丘), 비구니 (比丘尼), 남자 신도와 여신도를 가리킴. 줄여서 사중 (四衆)이라고도 말함

The fourfold assembly or community, or the fourfold retinue: Bhikkus or monks, bhikkunis or nuns, laymen and laywo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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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사부대중(四部大衆)

http://www.theology.ac.kr/institute/dtdata/%EB%B9%84%EA%B5%90%EC%A2%85%EA%B5%90%ED%95%99/%EB%B6%88%EA%B5%90%EC%9A%A9%EC%96%B4%EC%97%B0%EA%B5%AC/%EC%82%AC%EB%B6%80%EB%8C%80%EC%A2%85.htm

불교교단은 범어로는 상가(sangha), 한역으로는 승가(僧伽)라고 일컬어 진다. 
상< 인도 사람들 사이에서 공화국이나 조합을 의미했는데 불교에서 그 운영 방법과 조직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출가 수행자와 재가신자로 구성되며 남녀를 모두 포함했다. 교단의 구성을 이루는 사부대중(四部大衆)은 다음과 같다. 

1) 비구(比丘)-남자 수행승 
2) 비구니(比丘尼)-여자 수행승 
3) 우바새-남자 재가신도 
4) 우바이 -
여자 재가신도의 넷이다.

이와 같은 사부대중의 화합된 무리가 집단의식을 구현하는 곳이 승가이며 또한 율법에 의하여 질서를 유지하는 조직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특수한 경우 여기에 다시 미성년자의 그룹까지를 포함시켜 칠중(七衆) 이라 하기도 한다. 

즉 
5) 사미(沙彌)-20세 미만의 남자 출가승 
6) 사미니(沙彌尼) -20세 미만의 여자 출가승 
7) 식차마나(式叉摩那)
-비구니의 구족계를 받기 직전의 여자  출가승의 세 부류를 더하여 칠부대중으로 하는 것이다.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불(佛). 법(法). 승(僧) 삽보에 귀의할 것이 요구되는데 그 중 승보가 바로 사부대중 또한 사부대중 또는 칠부대중이 화합하여 성립되는 승가(僧伽)를 뜻한다. 이 승가의 중심을 구성하는 것은 비구와 비구니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비구중(比丘衆)이었다. 불전에 의하면 여인의 출가가 허락된 것은 상당히 후대 즉 석가모니 부처님의 만년에 와서 이룩된 일이라고 한다. 제자 아난의 간청에 의하여 여인의 출가가 허락되고 승가의 일원으로 포함되게 되었는데, 비구와 비구니는 재가의 애욕생활을 떠나서 출가하여 독n신으로 걸식하며 사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탁발(托鉢)로 목숨을 유지하고 늘 삼의일발(三衣一鉢) 이외에는 아무것도 지니거나 저축하지 못하였으며, 암자나 큰 나무 아래서 좌선 하기도 하고 산속 동굴에 머물면서 정사(精舍)를 지어 집단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우바새와 우바이는 출가수행자들을 위하여s 의복과 음시. 약 등을 제공하여 수행자들이 수행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된다. 논밭 등을 갈며 직접 생산 활동에 참여하는 우바새. 우바이와는 달리 마음의 밭은 갈며 풍요로운 정신적 수확을 얻은 출가수행자는 경제적 보시 대신 중생들의 정신적 갈구를 채워주게 된다. 이리하여 서로가 세상의 일을 함께하고 화합하며 서로 위로하고, 우유와 물이 화합하듯이 자비스러운 마음을 갖고 사는 것이 사부대중 또는 칠부대중의 화합된 모임인 것이다.

제목 : 사성제(四聖諦)

불교에서 가장 먼저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네 가지 진리'의 가르침이었다. 부처님은 바라나시 교외에 있는 녹야원에서 그전의 동료였던 다섯 명의 수행자들 에게 가르침을 열었는데 이것이 
불교의 기본 교리에 대한 최초의 설법이었다. 깨달음은 이러한 네가지 기본적인 진리를 터득하는 것이다. 사성제에서 제(諸)란 진실. 사실. 진리의 뜻을 갖고 있는 바, 곧 사성제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이다. 뭇 교설은 사성제로 집약된다고 말해질 정도로 중요시되는 이 사성제는 괴로움의 모음과 멸에 입각해서 베풀어진 실천적 가르침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고성제(苦聖諦)란 태어나는 것도 고(苦)요, 늙는 것도 고요, 병드는 것도 고요, 죽는 것도 고다.

우울함.슬픔.고통.고뇌.고민.미움. 사람과 만나는 것도 고며,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것도 고다.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고다. 요컨대 집착의 원인이 되는n 다섯 가지 응어리 모두가 고인 것이다. 

2) 집성제(集聖諸), 즉 고가 일어나는 원인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곧 또다시 헤매임의 생존을 초래하고 기쁨과 탐욕을 수방하여 여기저기 집착해서 환희를 구하려고s 하는 
헛된 집착이다. 그것은 곧 항락적 욕망을 구하려는 망집과 개체의 생존에 탐닉하는 망집과 생존의 영원을 바라는 망집이다. 
3) 명성제(冥聖諸)는 '고의 소멸'이라 말해진다.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기에, 무명의 멸진을 통해서 그 괴로움은 근본적으로 사라니는 것이다. 4) 도성제(道聖諸)는 이와 같은 고의 소멸로 이끄는 길로서 법을 잘 결택하여 관찰하는 것과 생각할 바와 생각안할 바를 마음에서 잘 분간하는 것 그리고 네가지의 선한 신업, 정당한 방법으로 적당한 의식주를 구하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노력하여 물러심이 없이 마음을 닦는 것과 생각할 바에 따라 잊지 않는 것, 마음을 한 곳에 바르게 집중하는 삼매를 행함은 곧 고의 멸진에 이르는 도이다. 이와 같이 사성제는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차례로 알게 되는 것이요, 한꺼번에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마치 의왕이 먼저 병상을 알고 난 후에 병의 원인을 알며, 다음에 병의 증상을 알고 마지막으로 양약을 알아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사제설은 선악의 근저에 있는 올바름과 그릇됨의 결택을 통해 생사의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하려는 해탈에의 길이다. 이런 까닭에 범속한 세간의 생사를 벗어나는 신성한 진리라고 해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고 하는 것이다.

제목 : 사향사과(四向四果)

부처님께서 한때 사문법(沙門法)과 사문과(沙門果)에 대하여

설하신 적이 있었다. 사문법이란 성인의 여덟 가지 길을 뜻하는

것으로 정견(正見) 등 팔정도 (八正道)이며, 사문과란 팔정도를

닦아 얻어지는 경계로서 예류과(預流果; 須陀洹), 일래과(一來果 ;

斯陀含), 불환과(不還果), 아라한과(阿羅漢果)로 2단계로 2단계로

구분하여 사과(四果)를 설했다. 이 사과는 팔정도를 잘 수행하며

증득하는 것으로 ① 예류과(預流果)란 유신견 (有身見),

계금취(戒禁取), 의(疑)의 세 가지 번뇌(三結)가 끊어진 것이고 ②

일래과(一來果)란 위의 세 가지 번뇌가 끊어지고

탐욕.성냄.어리석음이 엷어진 것이며 ③ 불환과(不還果)란

욕계의 다섯 가지 번뇌(五下分賂)가 다한 것이며 4)

아라한과(阿羅羅果)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다하고 일체의

번뇌가 다한 것이다. 초과(初果)로부터 마지막에 이르며 점차

많은 번뇌가 단절됨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사과는 반드시

단계적으로 순서를 n밟아야 한는 것은 아니고 근기 (根機)와

정진(精進)의 정도에 따라 비약적인 해탈을 이룬 자도 적지

않았지만, 비교적 순서대로 수행s丙甕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수행의 단계를 구분한 기준은 사과에 도달하기 위하여

수행하나 아직 과(果)에 이르지 못한 동안을 일컫는 사향(四向)을

나타내는 술어의 기본적인 뜻을 보면 알 수 있다. ①

예류향(預流向)이란 성자의 흐름에 막 들어가는 지위라는 뜻으로

최고 7회를 천상과 인간에 왕생하면 마침매 열반을 얻는다고 한다.

2) 일래향(一來向)이 이르고자 하는 일< 한번 옴이 있는 자로

1회만 인간세상에 태어나면 해탈을 얻기 때문에 일<箚 하는

이름을 얻는 것이다. 3) 불환향 (不羅向)이란 내려옴이 없는

위치에 이르고자 하는 자라는 뜻으로 불환은 인간으로 태어남이

없이 천상에서 열반을 얻는다. 4) 아라한향(阿羅漢向)이란 해탈을

성취한 최고의 지위인 아라한과를 얻는 동안을 일컫는 것으로

아라한과를 얻게 되면, 인간. 천상의 공양에 응할 자격이 있는

적격자라는 의미에서 '적자(適者)' 또는 '응자(應者)'라는 이름을

얻는다고 한다. 아라한과는 초기불교에 있어서 수행의 궁극적

단계로서 '모든 번뇌가 이미 다하고 깨끗한 행이 이미 서고, 해야

할 바는 모두 갖추어지고, 또한 다시 윤회에 빠지니 않는다.'는

경계이다 앞의 4과에서 3과까지는 아직 배우고 수행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이를 유학 (有學)의 성자라고 하는 데 대하여 제4의

아라한과에 이르면 할 바를 이미 다 마치고 또한 배워야 할 것이

더 이상 없기 때문에 무학(無學)이라고 부른다.


제목 : 사홍서원

대승불교에서는 많은 서원들이 설해지는데, 이를 분류해 보면

공통의 원과 각자의 특수한 원이 있다. 사흥서원은 공통의

원이면서 총괄적인 서원이라는 의미에서 총원(總願)이라고도 한다.

일체의 보살이 처음 발심할 때에 반드시 이 원을 발한다. 이

소원은 넓고 크므로 홍원(홍원)이라 하고 그 마음을 자제하므로

서라 하며 뜻의 만족을 구하므로 원(願)이라 한다.

사성제(四聖諦)와 관계되기 때문에 네 가지 원이라 한다. 곧 ①

중생은 가없지만 기어코 건지리다. 이는 고제(苦諦)를 연하여

가없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다. ② 번뇌 끝없지만

기어코 끊으리다. 이는 집제(集諦)와 연관되는 것으로 다함 없는

번뇌를 끊음을 원하는 것이다. 3) 법문 끝없지만 기어코

배우리다. 이는 도제(道諸)와 연관되는 것으로 끊없는 법문을

배울 것을 발원하는 것이다. 4)불도(佛道)가 없지만 기어코

이루리다. 이는 멸제(滅諸)와 연관되는 것으로 끝없는 불도를

성취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 사홍서원은 현재 공식적인n

불교의식 에서 주로 법회가 끝났을 때 한결같이 사용되고 있다.

사홍서원은 네 가지의 서원이나 오직 한 가지 길인 보살도가 네

가지 형태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위로 보리를 구하고 아>

중생을 교화한다는 말을 먼저 깨달음을 얻은 다음에 중생을

교화하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잘못이듯이 중생교화와 번뇌를

끊는 것 그리고 법문을 배우고 불도를 이루는 것은 총체적으로

보살행을 하는 자의 수행의 내용이며, 어느 것 하나 더욱

우월하다거나 먼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성취되어야 할

내용인 것이다. s또한 네 가지 원 하나하나는 각각 나머지 세 가지

서원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중생을 구제함에 따라서 번뇌가

사라지고 법문을 배우게 되며 불도를 이룬다. 마찬가지로 불도를

이룬다는 것은 중생을 교화하지 않고 번뇌를 끊지 않으며 법문을

배우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어느 한 가지로 나아가도

모두가 구족해지니 사홍사원에는 모든 서원의 총괄적인

총원(總願)이라 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또한 총원을 발하는

것은 대승의 보살이 갖는 큰 특징이다. 대승(大乘)이라고 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므로 소승불교가

자신의 깨달음만을 목적으로 함에 대하여 대승의 보살은 보살행의

결과 부처님이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원(願)의 내용이 달성될

때까지 미혹한 세계에 남아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진력한다.

그러므로 원은 그 의지력을 표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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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이 있군요. 절에도 복잡한 구조와 문제가 있겠지요.
<사부대중은 평등할 수 없다?>
 유정길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675

승인 2019.06.11
 호수 1492 
댓글 3

52%의 신도가 십일조, 개인당 월 33만원의 헌금 한 사람을 알려면 현재 그가 어떤 친구들을 만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더 깊이 알려면 그가 어디에 시간을 많이 쓰는지 알면 된다. 나아가 그 사람이 현재 버는 돈 중 어떤 부분에 가장 많이 쓰는지를 보면 더욱 깊이 알 수 있다. 2008년 발표된 바른교회아카데미 여론조사에는 개신교인의 52.1%가 수입의 10분의1 이상을 정기적으로 십일조 헌금을 하고, 그 이상을 내는 사람도 20.4%나 됐다. 가구당 헌금액은 연평균 345만원이고 감사헌금이나 건축헌금을 포함하면 연평균 400만원이라고 했다. 매월 평균 33만원 정도다. 

인연과보를 믿는 우리는 현재 발생하는 모든 것이 우리가 받을만해서 받는 것임을 믿어야 한다. 기독교가 현재 한국사회에 큰 영향을 발휘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과거에 했던 행동의 결과이다. 매주 1~2회 교회를 나가고,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고, 수입의 1/10을 헌금하고, 수시로 봉사를 하고, 거리와 전철에서 전도를 하고, 목숨을 걸고 해외선교를 다니는 그들의 인연에 따른 과보인 것이다. 종교적 신심과 신행의 강도와 헌신의 밀도가 높으면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돈도 많이 모이고, 큰 건물도 짓게 되고,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오히려 최근 개독교라는 이미지 추락으로 그들이 애쓴 것에 비해 영향력이 적은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불자인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성장하는 이웃종교와 단순 비교하며 질투어린 비난을 하는 것은 인과의 이치를 믿지 않는 것이다. 현재의 불교는 이제껏 우리가 해온 과거의 결과이다. 우리의 미래는 내가 지금 결심해 실행하면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부대중의 평등은 1/4의 책임성

열심히 수행하고 노력하는 스님도 많지만, 무위도식하는 스님도 많은 듯하다. 교회를 성공시키려고 치열하게 노력하며 종교적인 서비스에 최선을 다하는 목사와 달리, 애쓰지 않고 불교가 융성하길 바란다면 그야말로 연목구어라 하겠다. 또한 자칭 불자라면서 꼬박꼬박 법회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고, 십일조까지는 아니지만 삼보를 위해 보시하는 것도 아니며, 마음을 닦거나 수행도 하지 않는다면 대체 스스로 불자라 명명할 근거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 

4명이 동업한 회사에서 빚을 졌다면 4명이 그 빚의 1/4씩을 골고루 나눠야 한다. 그리고 사고로 결원이 있다면 나머지 사람이 균등하게 피해를 나누어야 진정한 주인이다. 4부대중이 평등하다고 하면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가 똑같이 1/4의 책임과 역할을 해야 한다. 불사, 염불, 간경, 주력, 참선 등 수행도 똑같이 해야 하고 보시도, 포교도 스님이나 재가자나 같은 수준의 책임을 갖고 있어야 평등하게 대접받을 자격이 있는 것 아닐까? 주장만 불자인 사람에게 곳간 열쇠를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그저 불교단체의 월급 직원인 사람에게 4부대중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삼보정재를 결정할 권한을 줄 수 없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나마 비구 비구니 등 2부대중은 책임을 져야할 사람이라는 외양적 보증이 있다. 하지만 신뢰가 점검되지 않은 재가자에게 동등한 권한을 위양할 수 있을까. 물론 우리 재가자들도 할 말이 없지는 않다. 책임질 기회를 부여받은 적 없이 그저 스님들이 모든 것을 쥐고 있고, 설법과 교시에 따르는 위계적 관계 속에 수동적 신자로 만들어 온 것도 스님이라고 원망할 수 있다. 옳은 이야기다. 가르치고 알려줘야 할 스님에게 우선적 책임이 있다.

수처작주((隨處作主)의 시각에서 불교의 주인은 나

그러나 내가 항상 주인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해결의 주체도 바로 ‘당신’이 아닌 ‘나’이다. “스스로의 마음을 항상 고요하고 닦으면 그곳이 바로 불교이고 절이며 수행공동체”라던 서암 스님 말씀이 떠오른다. 부처님도 열반하시면서 “법에 의지하고 자신에 의지하라”고 했듯이 법의 주인은 나이다. 지금 출가자가 줄어들고 있어 앞으로 스님 없는 사찰들이 늘어 날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책임 있게 삼보정재를 맡을 주체가 더욱 많아져야 한다. 스스로 담마불교의 주인으로 원력을 갖고 정진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 불교의 바람직한 미래이자 불교의 희망이다.

유정길 불교환경연대 운영위원장 
ecogil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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