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04

한국형 경제건설 저자 오원철은 누구인가? - 뉴스타운



한국형 경제건설 저자 오원철은 누구인가? - 뉴스타운



한국형 경제건설 저자 오원철은 누구인가?

편집부
승인 2006.05.03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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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김형아 반 리스트 교수 (호주 린필-드 대학)글이다





^^^▲ 오원철 고문^^^



오원철(吳源哲)씨는 한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의 연대였던 1960년대와 70년대에 상공부와 청와대에서 근무하면서 한국의 주요 산업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박정희 행정부의 전형적인 테크노크라트 (Technocrat) 로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 정책수립가, "공업 조직자"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를 가르켜 "오 국보"라고 부를 정도로 그의 공헌을 높게 평가하였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마치 자신의 "팔다리"처럼 여길 만큼 깊이 신뢰한 사람이었다.




^^^▲ 공군 시절 오원철 고문^^^



그는 1928년 10월 황해도 풍천(豊川)에서 태어났으며, 해방되던 해인 1945년 4월 경성공업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같은 해 12월 방학 중 고향을 다녀온 후, 그는 북한에 남은 그의 가족과 헤어지게 되었다. 그의 가족은 1945년 말에서 1946년 초 사이에 재산을 몰수당하고 고향에서 추방당했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가족과 헤어진 그의 부친은 한국 해군에 의해 구조되어 남쪽으로 내려올 수 있었지만, 그의 모친과 여섯 동생들은 북한에 남았다. 이렇게 해서 그는 한반도 분단의 직접적 피해자가 되었다.

1946년 국립 서울대학교의 창립으로 경성공업전문학교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으로 개편된 후, 화학공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해 12월 공군 기술장교 후보생 시험에 응시, 합격하여 6개월간의 훈련을 받은 후 1951년 6월 공군소위로 임관하였으며, 같은 해 9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이후 1957년 8월 소령으로 전역할 때까지 사천(泗川), 마산(馬山), 진해(鎭海), 대구(大邱)의 항공창(航空廠)을 설립, 운영하는 데 참여하면서 엔지니어로서의 소양을 쌓았다.




^^^▲ 시발자동차^^^



군에서 전역한 후 그의 첫 직장은 한국 최초의 자동차 회사인 시발자동차 회사였다. 그는 이 회사에서 공장장을 맡아 한국 최초의 국산 자동차를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1960년 4 ·19 이후 사회혼란이 가중되어 시발자동차 회사가 운영난에 빠지자, 국산자동차 주식회사 공장장으로 자리를 옮겨 다음해 5 ·16 이 일어날 때까지 근무하였다.

5 · 16 이 일어난지 불과 일주일 후인 1961년 5월 23일, 그는 군사정부에 의해 소환되어,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조사위원회 조사과장으로 일하다가 얼마 후 상공부 화학과장으로 발령 받았다. 상공부 화학과장으로 일하는 동안, 그는 제1차 경제개발 5 개년계획(1962년 1월 13일에 발표)의 화학공업 부문을 입안하였으며, 특히 정유공장과 비료공장, 시멘트공장 관련사업을 추진하였다.

이때 경제개발에 대한 "마이크로 접근방법"과 "임팩트 폴리시(impact policy)"에 대한 아이디어를 확립했으며, 재정자금 활용방책으로는 "목돈 작전"을, 공업화 전술로는 "공업 단지화 전술"을 적용하기 시작했다.(이때 울산(蔚山) 공업단지 건설을 입안, 추진했다) 여기서 "목돈 작전"은 새로운 사업을 추진해 나갈 때 필요한 자금을 미리 확보해 두는 방법을 말하고, "공업 단지화 전술"이란 공장건설이 신속하게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정부가 먼저 공업단지를 조성해 놓는 방법을 뜻한다.

그의 이러한 아이디어는 한국에서 최초로 성공한 공업 단지인 울산공업단지의 계획과 건설에서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다.




^^^▲ 경제 제2수석비서관 시절 오원철 고문^^^



1964년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이 수출제일주의로 전환된 직후, 그는 주요 수출 업종인 경공업 분야를 담당하는 상공부 공업 제1국장으로 임명 받아 수출제일주의 전략을 직접 실행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섬유공업을 비롯한 경공업의 수출산업화와 중소기업 육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일했다.

또한 1965년 이래 석유화학공업 육성 계획을 직접 입안하여 추진하던 중, 1968년에 기획관리실장으로 승진하였으며, 1970년에는 광공전(鑛工電)차관보가 되었다. 승진한 후에도 석유화학공업 육성은 계속 책임을 맡아 울산의 석유화학 공업단지를 건설(1972년 완공)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였다.(오늘날 그는 한국 석유화학공업의 대부라고 불리운다.) 또 그는 철강, 전자, 자동차, 조선 등 각종 공업분야의 정책을 수립하는 데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1970년대에는 남북한 간의 대결이 전쟁 직전의 상황으로까지 치달았던 위기의 시대였다. 이때의 남북한 간의 정치적, 군사적 대결은 경제개발을 직접적으로 규정하는 요인이 된다. 1971년 11월 박정희 대통령은 이러한 긴박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그를 경제 제2수석비서관으로 임명하여 방위산업 육성의 총책임을 맡겼다.

그는 방위산업 육성은 중화학공업 건설이라는 큰 틀 안에서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으며, 이때까지 각종 공업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면서 얻은 경험을 총괄하여, "공업의 단계별 육성"과 "엔지니어링 어프로치"로 요약될 수 있는 "한국형 경제개발 모델"을 정립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그는 중화학공업 건설을 위한 구체적 계획을 마련하기 시작했는데, 그 결실이 바로「공업구조개편론」이다.(1960년대가 경공업 발전의 연대였다면, 1970년대는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공업구조를 개편해 나가야 할 시기가 된다.「 공업구조개편론 」은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해 나가기 위해 상세한 조사, 계획, 추진방법을 서술하고 있다)

이를 채택한 박 대통령은 1973년 1월 "중화학공업화 정책선언"을 하게 되었으며, 이 선언에 따라 같은 해 5월 중화학공업 추진위원회와 그 산하 기획단이 창설되었다.




^^^▲ 美 카터 대통령 방문시 오원철 고문^^^



그는 1974년 2월부터 중화학공업 기획단 단장을 겸임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1979년 10 · 26 사건 때까지 박정희 대통령의 정책보좌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한국의 산업화를 추진하는 데 다음과 같은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첫째, 그는 철강, 석유화학, 기계, 전자, 조선, 비철금속 등 중화학공업의 6대 핵심 분야를 육성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하였으며, 이를 위해 여천(麗川), 창원(昌原), 구미(龜尾), 옥포(玉浦), 온산(溫山) 등 주요 공업기지를 건설하였다. 여러개의 공장으로 구성되는 공업단지 개념은 이때부터 주택단지, 항만, 교육기관, 검사기관, 숙련근로자 양성을 위한 훈련소 등 관련시설까지 포함하는 공업기지의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둘째, 방위산업 육성과 율곡계획의 집행을 담당하면서 개인 기본병기, 각종 화포, 장갑차, 탱크, 헬기, 해군 함정, 미사일 등 현재 한국군의 근간을 이루는 주요 장비를 국산화, 현대화하는 데 앞장섰고, 국산화가 어려운 장비들의 도입을 합리적으로 추진하여 한국군의 전력 증강에 이바지하였다.
또한 그는 원자력산업 개발 프로젝트에도 참여하였다.

셋째, 1973년 오일 쇼크 이후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중동 진출, 플랜트 엔지니어링 산업 육성을 추진하였다.

넷째, 인력 양성과 관련하여 기능사, 기술자, 엔지니어, 과학자 양성을 위한 과학 기술교육제도의 개편과 각종 연구소의 설립, 대덕 연구단지 건설 등에 관여하였다. 동시에 그는 국토 종합 개발계획의 입안과 추진을 주도하였는데, 이것이 국토의 효과적 이용, 대도시 과밀인구의 억제, 환경오염 방지 등 여러 가지 목적을 갖는 것이었다. 또 이 계획은 공해를 막기 위해 내륙지방의 공장들을 해안 몇 곳에 집중시키는 사업과 행정수도를 대전 근처로 이전하는 사업을 포함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오원철은 1) 경제건설, 2) 인력양성(기술교육, 근로의욕 고취), 3) 국토개발, 4) 자주국방을 4대 지주로 삼는 박정희 대통령의 근대화 이념을 실천에 옮기는 과정에서 활약한 핵심적 정책 수립가였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근정훈장을 수여받았다. 1965년에 받은 첫번째 훈장은 수출지향적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1964년에 한국이 1억 달러 수출목표를 달성하는 데 기여한 공로를 인정한 것이고, 1972년의 두번째 훈장은 석유화학공업 육성(한국 중화학공업이 출발)에서 발휘한 그의 지도력에 대해 주어진 것이었다.




^^^▲ 집필중인 오원철 고문^^^



1979년 10 · 26 사건 직후 공직에서 물러난 그는 1980년대의 정치적 반동 아래에서 어두운 시절을 보냈다. 그는 1980년 5 · 17의 정치적 숙청 사건 때 체포되어 정신적, 육체적으로 매우 심한 고통을 당했을 뿐 아니라(그는 거의 두 달 동안 구금된 채로 고문을 당해야 했다), 1992년까지 10여년 동안 침묵을 강요당했다.

오늘날까지도 그는 전두환 정권이 왜 그에게 개인적 공격을 가했는지 궁금해 하고 있다. 박정희 행정부의 주요 정책 결정자들 가운데서, 이유야 어떻든 10여년간 사회적 활동을 중단당한 사람은 오로지 그 한 사람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1980년대에도 계속 공직을 유지하거나 정치에 참여했다.

1992년 7월 27일부터 1994년 4월 13일까지 약 20개월간 [한국경제신문]에 "산업전략 군단사"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연재한 후, 그는 [월간조선], [신동아], [월간 Win ] 등에 계속 중요한 논문들을 발표하였으며, 외국의 학술 잡지들에도 기고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현재 그는 '남은 인생'을 걸고 1992년 7월부터 집필에 매달려온 [한국형 경제 건설] 시리즈(전 10권 목표)의 저술에 힘을 쏟고 있다. 산업화 과정의 실무적인 추진과정을 각종 증언과 관련자료, 비화 등을 꼼꼼히 기록한 대하 기획물로 현재 7권까지 출판되었다.

그가 갖고 있는 소박한 바램은 1960년~ 70년대 그의 경험을 정리하고 그로부터 역사적 교훈을 이끌어내어 후대에 남김으로써 한국사회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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