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의 ‘원효대사 ’ VS 한승원의 ‘원효’ :: 주간불교
이광수의 ‘원효대사 ’ VS 한승원의 ‘원효’
“화쟁(和諍)의 가르침으로 무애(無碍)하라”
유응오 | 2007/02/23 14:48
“화쟁(和諍)의 가르침으로 무애(無碍)하라”
글밭에 핀 만다라
이광수의 ‘원효대사 ’ VS 한승원의 ‘원효’
남남통일 남북통일 인도할 선지식이자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 '우주 씨앗의 눈'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원효스님의 행장을 담은 두 편의 소설이 출간됐다. 한 편은 이광수의 《원효대사》를 화남출판사가 재출간한 것이고, 다른 한 편은 《아제아제 바라아제》 《초의》 등 작품발표를 통해 구도소설의 선구자 역할을 해온 한승원의 《원효》이다.
그렇다면 이광수의 《원효대사》와 한승원의 《원효》는 무엇이 다른가?
먼저 이광수의 《원효대사》를 살펴보자.
춘원의 《원효대사》의 줄거리는 제행무상(諸行無常)→번뇌무진(煩惱無盡)→파계(破戒)→요석궁→용신당 수련→방랑→재회(再會)→도량(道場)으로 전개돼 막을 내린다. 원효와 몸을 섞어 설총을 낳은 요석공주를 비롯해 그를 저자거리 술집으로 끌고 간 대안대사·요석공주의 연적(戀敵)이기도 한 아사가·진평왕의 아들 바람·명랑법사·방울스님·의명스님·김춘추와 김유신·지조공주·사사마 소년 등이 출몰하는 이 소설은 원효대사가 자기를 죽이려는 도적대장 바람을 순화시켜 그와 같은 사람들이 결국 삼국통일에 나서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소설의 끝은 《원효대사》의 해설을 쓴 김준태 시인이 지적한 ‘계몽주의적 한계를 증명하는 듯이 너무 교화적으로 끝을 맺어 독자들의 긴장을 너무 쉽게 풀어버린다’는 단점과 백낙청 문학평론가가 지적한 ‘역사의식의 빈곤’을 상기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소설이 발표된 것은 1942년이다. 즉, 소설 《원효대사》의 한계는 주인공 ‘원효의 한계’가 아니고 일제 강점기를 살다간 춘원 이광수의 한계라 할 수 있다. 춘원의 《원효대사》는 크게 구도소설과 역사소설로 해석이 가능한데, 김준태 시인이 후자보다 전자에 비중을 두어 해석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 때문일 것이다.
김준태 시인은 “이 소설이 역사소설이기보다는 불교소설(혹은 종교소설)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며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부처의 지혜를 구하고 닦는 ‘상구보리의 정신’ 못지 않게 대중 속으로 더 깊숙이 내려 그들과 함께 하려는 ‘하화중생 측면의 원효’를 소홀히 한 나머지 춘원은 원효의 파계에다가 소설적 재미를 더 많이 부여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제행무상 측면에서의 자유인 ‘불자 원효’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통일국가 신라시대의 원효’를 놓치고 있다는 게 김 시인의 평가다. 하지만 김 시인은 춘원이 ‘소 한 마리를 잡아서 통으로 삶을 수 있는 큰 기름 가마’ 속에서 원효를 건져내 살린 점으로 높이 평가하면서 이를 톨스토이의 《부활》과 비교한다. 그리고 남남통일 남북통일을 목전에 둔 우리들에게 ‘통일신라시대의 원효’가 왜 중요한지 역설한다.
춘원의 《원효대사》에 대한 해석 중 첨예한 이견을 보이고 있는 것은 작의(作意)이다.
이와 관련 국문학자인 이병주 씨는 “내가 원효대사를 내 소설의 주인공으로 택한 까닭은 그가 내 마음을 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장처(長處) 속에서도 나를 발견하고 그의 단처(短處) 속에서도 나를 발견한다. 이것으로 보아 그는 우리 민족적 특징을 가장 많이 구비한 것 같다. 나는 원효를 그림으로 불교에 있어서는 한 중생이 불도를 받아 대승 보살행으로 들어가는 경로를 보이는 동시에 신라 사람을 보이고, 동시에 우리 민족의 근본정신과 그들의 생활 이상과 태도를 보이려 하였다.”는 춘원의 ‘내가 왜 이 소설을 썼나’는 서문을 인용하면서 “일제가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원효대사》를 연재케 한 속심은 기실 원효가 승병을 일으켜 나라에 충성한 불요불굴의 정신을 비상 체제하의 한인에게 알려 이른바 국가 총동원의 선전성을 노린 것이었으나 선생은 이를 역이용해 한민족의 정기를 불러 일으키는 천재일우의 기회로 삼았다 해야 마땅하다”고 평가했다.
문학평론가인 김윤식 서울대 교수도 《이광수와 그의 시대》라는 글을 통해 “이광수는 원효를 조선민족으로 보고 나아가 조선 자체로 보았던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에 대해 한승원 씨는 180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
《원효》의 작가의 말에서 한씨는 “춘원이 장편소설 《원효대사》를 집필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였다. 그 소설이 연재된 지면은, 한반도 식민 통치의 총지휘소인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였다. 조선총독부는 그 전쟁을, ‘대동아 공영을 위한 성스러운 전쟁’이라고 선전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새파란 청년들과 군수 물자를 강제 동원해 전쟁터로 실어 보냈다. 그때, 조선 총독부는 왜 춘원 이광수로 하여금 《원효대사》를 연재소설로 쓰게 했을까. 그 소설 속에서, 신라의 김춘추 김유신이 일으킨 삼국 전쟁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인물로 하여금 신라 젊은 이들을 향해 ‘성스러운 전쟁에 기꺼이 몸을 던져라’하고 부르짖게 함으로써,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쟁에 기꺼이 참여하게 충동질하려는 것 아니었을까.”라고 추론하고 있다.
그 근거로 한씨는 ‘원효는 도술로써 바람이라는 큰 도적을 제압하고 제자로 만들었는데, 바람은 신라군의 장군이 되었고, 휘하 부하들 또한 모두 군직을 받았다. 훗날 삼국 통일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이 이들이었다.’고 쓰여 있는 소설의 말미를 제시했다.
한씨가 《원효》를 쓴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씨는 춘원이 철저하게 원효대사의 행장을 오독하고 있다고 봤다. 한씨가 바라보는 원효스님은 반전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내말을 들어보시오! 하늘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기둥 깎을 도끼 자루가 됩시다. 무너지려 하는 우리 하늘을 떠받칩시다. 귀 있는 사람들은 다 나를 따르시오.”-《원효2》 P. 87에서
한씨는 《삼국유사》에 명기돼 있는 ‘자루 빠진 도끼를 나에게 주려는가. 내가 그 도끼로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깎으련다.’는 노래와 ‘전쟁으로 인해 과부가 된 요석공주를 나에게 주면 그 자궁의 자루 노릇을 해서 무너지려 하는 신라 하늘을 떠받칠 큰 인재를 낳게 하겠다’는 해석을 전면 뒤집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한씨는 ‘자루 빠져버리고 없는 도끼’를 ‘눈을 잃어버린 우주적인 씨앗’으로 확대해석한다. 이는 유식론에서 말하는 ‘아뢰야식’, 즉,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 우주적인 씨앗의 눈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씨가 《삼국유사》에 나오는 원효스님의 일화를 전면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신화적인 상징을 이해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가령, 《송고승전》에 나오는 《금강삼매경》에 대한 일화에서 말은 馬가 아니라 言이고, 소는 牛가 아니라 疏라는 게 한씨의 설명이다.-《원효3》 ‘원효와의 인터뷰’ P. 321에서
한씨가 재창조한 원효스님의 행장 중 기존에 알려진 것과 다른 게 또 하나 있다. 바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경위이다.
한씨는 원효스님이 해골물을 마셨다는 것을 알고 득도 한 게 아니라 시체를 담아놓는 땅막에서 잠을 자다가 깨달았다고 해석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 원효스님은 신라 중생들과 더불어 삶과 죽음을 같이 해야 겠다는 생각에 중국 유학의 길을 접고 다시 신라로 돌아온다. 반전시위를 벌이기 위해서이다.
이상 살펴본 바가 대략적인 이광수의 《원효대사》와 한승원의 《원효》의 차이점이다.
문학의 원전 텍스트는 자연이고, 우주이고, 사회이고, 인간이다. 때문에 보는 이에 따라 자연도, 우주도, 사회도, 인간도 여러 스펙트럼의 색을 띠게 마련이다.
이광수의 ‘원효대사’는 이광수를 닮았고, 한승원의 ‘원효’는 한승원을 닮았다. 일찌감치 어머니를 잃은, 그래서 연민을 불러 일으키는 원효의 모습은 이광수 본인의 고아의식의 반영일 것이고, 요석공주의 자궁과 우주라는 자궁과 관세음보살의 자궁을 동일시하는 원효의 모습은 한승원 자신의 ‘어머니 콤플렉스(《원효3》 ‘원효와의 인터뷰’ P. 336에서 인용)’의 투영일 것이다.
각기 내용은 다르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두 작가의 원효는 결국 신라시대 저자거리에서 무애의 춤사위를 펼친 원효라는 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원효’라는 원전 텍스트에서 무엇을 읽어야 할까? 그건 화쟁(和諍)이라는 가르침일 것이다.
영산강물 한강물 섬진강물 압록강물 대동강물 모두가 바다로 흘러 들어가지만 그들은 그 안에서 나는 대동강물이다, 한강물이 하고 우김질하며 싸우지 않듯 우리도 화쟁의 가르침 아래 무애해야 한다는 것을….
유응오 기자 arche@jubul.co.kr
주간불교 8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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