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01

김원웅/비판 및 논란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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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웅/비판 및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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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국가보안법 위반
2.1. 종북 및 반미 행위
2.1.1. 2018년 12월 8일 반미종북 발언 논란
3. 군사정권 부역 논란4. 광복절 경축식 기념사 정치편향성 및 허위 사실 (2019년 ~ 2021년)5백선엽 비하6. 문재인 정부 이명박근혜 비유 논란7. 광복회장 정치중립 위배 논란8. 생계형 당료 및 "백선엽 장군은 사형감" 막말 논란9. 애국가 변경 주장10. 국회 난입 및 방역수칙 위반 논란11. 광복회 예산 부당집행 논란12. 부친(김근수) 독립운동 경력 허위 의혹13. 모친(전월선) 독립운동 경력 위조 의혹14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관련 발언 논란15. 차기 대통령 관련 발언16박용진 의원 저격17. "소련군은 해방군 미군은 점령군" 발언18. 광복회 카페 자금 횡령 논란19. 가족회사 특혜 논란20. 해임투표 기습 수용으로 꼼수 논란21. 광복회 사퇴회견 논란22. 8억원대 비리 의혹 적발23. 총평

1. 개요[편집]

광복회장 김원웅에 대한 비판과 논란을 정리한 문서다. 군사정권 핵심 간부 출신으로 극렬 반미, 반일운동에 앞장선 인물이라서 비판과 논란이 가득하다. 그리고 김원웅의 이러한 행태들을 문재인 정부 국가보훈처가 제대로 관리·감독하지 않은 것이 윤석열 정부가 보훈처의 오랜 숙원인 국가보훈처의 부 승격을 보류하는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1]

2. 국가보안법 위반[편집]

2.1. 종북 및 반미 행위[편집]

국회의원 활동 시절에도 논란이 된 적이 있기는 했지만 정계은퇴 이후만큼 극단적인 수준이 아닌 대북 유화정책을 주장했으나, 정치 활동을 접은 후에는 친북을 넘어서 거의 종북주의자같은 주장을 본인의 페이스북을 통해 하고 있다. 북한의 핵개발을 옹호하며## 문재인 정부까지도 북한에 강경하게 대응한다는 이유로 비난하고 있다. 문재인의 장진호 전투 기념비 참배를 경박하다고 비난하면서 심지어 6.25 전쟁 당시 월남한 국민들을 친일파 청산을 피하려 온 사람들로 비하하고 있다.김정은 맞이 세미나 “박근혜보다 金 좋아하는 게 개념 있어”

한국을 나치부역자와 같은 친일세력이 장악했으니 '6·25 민족해방 전쟁' 부인 못한다고 밝혔는데, 정작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재단의 토르 할보르센 대표는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북한을 나치 독일에 가까운 국가로 본다고 지적했다. 오히려 북한을 옹호하고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김원웅이야말로 해외의 시각으로는 나치의 만행을 정당화하고 연합군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식민지에 빌붙어서 동족을 괴롭히던 사람들이 집권한 나라가 딱 두 나라라며, 하나는 패망한 월남(남베트남), 또 하나가 바로 대한민국이라며 이게 나라냐고 일갈했다. 하지만 미제 식민지 한국을 '해방'시키겠다며 자칭 '해방전쟁'을 일으키고, 외세로부터 해방됐다고 주장하는 북한은 어째 세계 최악의 '현대판 노예 국가'로 선정되었다. 북한보다 훨씬 '살기좋은 나라'인 카자흐스탄은 물론, G2라 불리는 중국 국적을 지닌 조선족조차 불법체류라는 수모를 감수해가면서 한국에서 살고 있다. 실제 불법체류 신분의 카자흐스탄 노동자가 화재 현장에서 한국인들을 구해 '포상'으로 대한민국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됐다.#[2]

국회의원 활동 당시에도 반미 성향을 드러냈는데 한나라당 의원 시절에도 미군 철수를 주장했고# 열린우리당 입당 이후에는 노무현 정부나 여당 사람들에게도 한미동맹을 강조하거나 이라크 파병을 지지하면 숭미사대주의자라고 비난했다.# 미국이 북한의 핵개발과 인권을 비판하자 한반도를 평화 위해서라면 한미동맹을 포기할 수도 있다며 선택하라면 한미동맹을 포기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현재는 미국을 외세라고 부르며 한미동맹을 부정하고 있다. '한미동맹의 강화는 대미종속의 강화'라고 주장했고 '착한 동맹은 없다'며 한미동맹을 반대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사실 대한민국을 동맹국가로 생각 안한다. 졸개로 생각하지'라고 말하며 한미동맹은 거짓말이라고 주장했다.##

2.1.1. 2018년 12월 8일 반미종북 발언 논란[편집]

김정은을 '위인'이라고 부르는 '위인맞이 환영단'은 8일 오전 서울 중구 명동 향린교회에서 '왜 위인인가'를 주제로 공개세미나를 열었다. 김원웅 전 통합민주당 의원(현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 회장)은 이날 세미나에서 “박근혜를 좋아한다는 사람보다 김정은을 좋아한다는 사람이 훨씬 개념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김 전 의원은 지난 14, 16, 17대 국회에서 3선을 지냈다. 20여명이 참석한 이날 세미나에서 그는 축사를 했다. 김 전 의원은 “일본에 충성을 다 하겠다고 하고 혈서를 쓴, 독립군 토벌에 앞장 선 집안에서 큰 박근혜보다 일제강점기에 항일 무장 투쟁한 독립운동가의 가문에서 자란 김정은이 더 낫다”며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것은 히틀러 후손이 독일에서 대통령이 된 것과 진배없다”고 했다. 그는 “한미동맹은 거짓말이다. 미일동맹에 남한을 종속시킨 것이 한미동맹의 핵심”이라며 “친일의, 친일에 의한, 친일을 위한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이게 나라냐. 이런 나라를 지킨다고 국가보안법을 만들었느냐”고 했다. 김 전 의원은 또한 '김정은 찬양'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김정일 위원장은 지도자로서의 판단력과 식견을 상당히 갖추고 있다고 알고 있다'는 것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이고, '김정은이 솔직담백하고 예의 바르다'는 게 문재인 대통령의 말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위대한 이상가다'라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발언도 있다. (그렇다면) 트럼프 대통령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해야지 왜 하지 않느냐[3]”고 했다. 당연하지만 대한민국의 국가보안법으로 외국 대통령을 처벌한다는 발상부터가 넌센스다.

3. 군사정권 부역 논란[편집]

일단 김원웅은 본인부터가 박정희 대통령이 만들었던 민주공화당에서 당료 생활을 시작했고, 민주정의당 창당에 참여한 군사정권 핵심의 문민인사 간부로서의 인생을 스스로 부정하는 셈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는 단지 참여 정도가 아니라 민정당의 공천까지 받은 군사 정권의 핵심 간부였던 그가 무려 45세 중년까지 박정희, 전두환이라는 독재자를 모셨으며, 심지어 중간 이탈자도 아닌 민정당이 해체하면서 당적을 바꾼 진성 군사정권 핵심인사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본인은 "대학 졸업 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고 하는데 애시당초 본인의 신념에 반하는 정치 생활을 생계형으로 하는 것이 합리화될 수 있느냐 마느냐를 떠나서 이는 백선엽 등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친일반민족행위자 대부분에게도 똑같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들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조국이 일본 제국이라고 교육받아왔고, 생계 유지와 어느 정도의 입신을 위해서는 일제에 협력하는 것이 불가피했다. 그들이 철없던 20대 몇 년간 가담한 일부 친일반민족행위는 씻을 수 없는 죄악이고, 김원웅이 20대부터 장장 20년 가까이 군사독재 정권의 집권 여당에 부역한 행위는 생계형으로 너그러이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란 말인가? 결국 김원웅의 논리를 한마디로 하면 "내가 한 독재정권 부역은 생계형, 니가 한 일제 부역은 친일파"라는 식이다.

또한, 당시 생계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면 은행과 대기업, 혹은 언론사 등 공화당이나 민정당보다 급여가 높은 기업은 너무나 많은 시절이었다. 운동권 출신의 제약을 감안하여도 당시는 대학 졸업자들이 적어서 명문대 출신은 무조건 고액 연봉을 보장하는 사기업이 가득하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김원웅의 변명은 근본적으로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다. 군사정권 부역 시기도 총 20년에 가까워서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은 안타까울 지경이다.

오히려 안전하고 편안한 정치적 도약을 위한 변절이었다는 것이 여러모로 설득력이 있다.

4. 광복절 경축식 기념사 정치편향성 및 허위 사실 (2019년 ~ 2021년)[편집]

2019년 8월 15일 오전 천안 독립기념관 겨레의 집에서 열린 제74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김원웅은 광복회장 자격으로 기념사를 했다. 여기서 그는 한국과 무역분쟁중이던 일본을 싸잡아 비난하였다. 여기까지는 시국을 감안한 기념사라 하지만, 뒤이은 대목이 정치 편향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일본의 화이트국가(안보우호국) 배제 조치에 대해 “한국경제를 흔들고 민심을 이반 시켜 그들이 다루기 쉬운 친일정권을 다시 세우려는 의도”며 “우리 정부는 한발짝도 뒷걸음질 치거나 물러서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 “한국의 탄탄한 성장, 친일반민족정권의 몰락,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으로 한반도에서 움트는 새로운 평화 기운,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초조감을 드러냈다”며 “아베 정권은 큰 오판을 했다. 촛불 혁명으로 탄생한 정부를 과소평가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우리 정부는 일본의 경제보복에 잘 대처하고 있다. 의연하게 잘 대처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격려의 힘찬 박수를 부탁드린다”고 말하면서 노골적으로 문재인대통령을 찬양하는 발언을 했다#.

2020년 8월 15일 오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광복절 경축식에서 '이승만이 친일파와 결탁하여 대한민국은 민족 반역자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는 논조의 기념사를 발표했다. # [4][5]

해당 기념사는 전국 시도 광복절 기념식에서도 대독(代讀)되었는데, 이 대독 연설문 가운데에는 "이승만이 집권해 국군을 창설하던 초대 육군참모총장부터 무려 21대까지 한 명도 예외 없이 일제에 빌붙어, 독립군을 토벌하던 자가 육군참모총장이 됐다"는 내용이 있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며, 고인에 대한 명예 훼손의 소지가 있다. 건국 초기 육군참모총장 가운데서는 일본군 복무는 했으되 독립군 토벌에 종사하지 않은 사람도 있고, 학병이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지 않은 사람도 다수 있으며, 아예 일본군 복무를 하지도 않은 사람도 1명(노재현)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방부는 이 발언에 대해 "역사적 사실에 관한 발언일 뿐", "광복회장의 발언에 국방부가 나서는 게 적절하지 않다"는 등의 익명 발언만 내보냈을 뿐 공식적으로 항의하지 않았다#. 대통령 및 집권 세력이 친일 청산을 강하게 주장해왔고 이에 반론을 제기하는 세력들을 그간 적폐청산 명분으로 계속 척결해왔기 때문에, 반론을 제기할 엄두를 못 내고 있다는 것이 합당한 해석이다. 김원웅의 연설문을 미리 보고도 광복절 축사를 시켜주었던 청와대는 이 같은 행보에 영향을 받았는지 김원웅의 발언은 청와대와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 국방부는 25일에 가서야 정경두 국방장관이 "역대 육군참모총장 중 일본군에 복무한 사람이 있기는 있으나, 6.25에서 나라를 구한 것도 있으니 종합적으로 반응해야 한다"[6]고 처음으로 공식 반응했다.#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당대표 후보는 광복회장으로서 그정도 말할 수 있다며 차분하게 따져보지 않고 호들갑을 떤다면서 김원웅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비판했다. 또 김원웅이 주장한 파묘에 대해 원칙적으로 동의한다고 밝혔기에 여권이 하고 싶은 말을 총대 메고 김원웅이 대신 해줬다는 평가도 있다. 정의당 원내대표는 김원웅의 광복절 기념사에 대해 무엇 하나 틀린 말 없는 기념사라며 안익태와 박정희, 백선엽은 모두 명백한 친일 행위가 확인된 반민족행위자들이므로 '무덤 파내자'고 주장하며 어떤 국민이 반대하냐고 주장했다.

반면 원희룡 제주특별자치도지사는 이를 반박하는 즉석 연설을 펼쳐 화제를 모았다. 원희룡 지사는 제주시 조천체육관에서 열린 75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김률근 광복회 제주도지부장이 대독한 김원웅의 기념사를 듣고는, 준비한 기념사 대신 그 자리에서 반박 연설을 했다. 그는 "김원웅 광복회장님, 우리 국민 대다수와 제주도민들이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매우 치우친 역사관이 들어가 있는 이야기를 기념사라고 광복회 제주지부장에게 대독하게 만든 이 처사에 대해 매우 유감"이라면서 "제주도지사로서 결코 동의할 수 없다는 걸 분명히 밝힌다"고 밝혔다#연설 전문 요약연설 영상 참조. 한편 해당 행사는 기념사와 즉석연설에 각각 항의하는 일부 참석자들의 고성 등으로 파행을 빚었다.

김원웅의 이 기념사는 명백하게 틀린점이 또 있다. 한국이 민족반역자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라는 말도 명백하게 거짓이다. 일단 김원웅이 전세계 200개 국가들을 다 뒤져봤는지는 차치하고서 북한만 보더라도 김일성 초대 내각 중 16명이 친일파였다. 심지어 북한의 역사서인 '조선전사'에도 "김일성 동지께서는 지난날 공부나 좀 하고 일제 기관에 복무하였다고 하여 오랜 인텔리들을 의심하거나 멀리하는 그릇된 경향을 비판, 폭로하시면서 그들을 새 조국 건설의 보람찬 길에 세워주시었다."라고 적혀있을 정도다. 당장 김일성의 친동생이자 부주석이었던 김영주도 일제강점기 관동군 출신이며, 북한 초기 정권 서열 10위권의 여러 인사들(장헌근, 김정제, 조일명)등이 친일파 출신이었다. 그와 달리 한국의 초기 내각은 이승만 본인부터가 독립운동가이자 임시정부 대통령 출신이었고 부통령 이시영도 임시정부 내무총장 출신이며 초대 총리 겸 국방장관 이범석은 광복군 참모장 출신이고 지청천 무임소장관도 광복군 총사령관 출신이다. 사실 이승만 초기 내각에서 친일파 출신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후에 반민특위 등이 무산되면서 한국 사회내에 제대로된 친일파 청산에 실패한건 사실이나 마치 한국은 청산을 못했지만 북한은 친일파를 청산했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명백한 거짓이다.

민족반역자라는 단어의 의미대로라면 동족간 대량학살전쟁을 일으킨 김일성과 그 자손이야말로 민족반역자에 가장 부합되는 대상이다. 광복회의 정체성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의구심을 가지게 된 사건이다.

2021년 구 서울역사에서 열린 광복절 경축식에서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박근혜 등 역대 보수 정권을 정통성 없는 친일정권으로, 백선엽 장군을 친일주구로 대놓고 폄하하면서 보수세력은 조선총독부의 법통을 이은 친일세력이라고 강변, 보수세력에 대한 친일몰이를 했다는 논란이 되었다.# 이런 논리라면 친일정권에 부역한 본인이야 말로 제일먼저 광복회장에서 퇴출당하는게 마땅하다. 심지어 이승만은 여러 구설로 이미지는 안 좋지만 친일보다는 반일정책을 하기로 유명했다. 이렇게 한 이유도 애초에 이승만도 독립운동가 출신이었기 때문이였으며 이승만이 친일 이미지를 지니게 된 이유는 반민특위와 친일파 등용을 언급하며 친일파라며 억지 주장을 하는 세력이 꾸준히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승만은 당사국인 한국과 중국이 빠진채 샌프란시스코 협정으로 일본의 족쇄가 풀려 다시 독도를 넘보는 모습때문에 6.25 전쟁이 한창인 와중에 일본에 되려 강경대응을 하는 모습까지 보인 인물이다. 한편 친일몰이성 광복절 연설을 들은 진보측 논객 진중권은 김원웅의 역사인식은 70-80년대에 멈추어있는것 같다는 것과 뉴스버스라는 언론에서는 제적등본까지 내밀며 김원웅의 어머니가 에모토 시마지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한 사실마저 언급하며 디스하였다.# 한편 이런 행사는 보통 청와대가 주관하는 행사로 청와대가 연설내용을 몰랐을리가 없을터인데 이런 막무가내식 친일몰이 연설에 국민의 힘을 비롯한 보수정당은 매우 불쾌한 심정을 내비추며 항의를 했다.#

5. 백선엽 비하[편집]

백선엽은 사형감이라며 업적이 과장됐다고 폄하했다. 김원웅이 평가절하한 백선엽에 대해서 에이브럼스 주한미군사령관이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백선엽 장군을 영웅이고 보물이라고 하자 격노하여 오만방자한 에이브럼스, 조선 총독 연상시킨다며 공식 항의를 추진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김원웅이 독립운동을 했다고 '공식인정'하며 추켜세운 김일성은 정작 김원웅이 찬양해 마지않은 김원봉에 대해 8월종파사건으로 숙청하면서 '중국 국민당 장개석의 사주를 받은 국제간첩'이라는 죄목을 뒤집어 씌웠다는 것이다. 실제로 조선의열단의 업적이 과장됐다는 평가도 있으며, 중국에 빌붙어 중국 공산당 자금으로 조직되어 오직 중공의 이익을 위한 조선족 꼭두각시는 아니냐는 비판이 있고 김원웅에게 인증받은 '항일영웅' 김일성이 '중국 간첩' 명목으로 김원봉을 숙청했다.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하는데, 대개 독재자가 그렇듯 '누명'을 씌워 제거했다는 평가이나 김원웅이 김정은을 추켜세웠던 이유가 '김일성 가문'에서 자랐다는 이유 때문이다. 헌데 박헌영을 '미 제국주의의 고용 간첩'이란 혐의를 씌워 저세상으로 보내고 김원봉도 마찬가지라면, 그런 곳에서 배우고 자란 김정은은 '위험한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 고모부 장성택을 중국 간첩 혐의를 씌워 제거했다.

2021년 8월 17일에도 6·25전쟁 영웅인 고 백선엽 장군을 지목해 "전쟁영웅이 아니"라고 주장해서 또 논란을 일으켰다. 그 근거로 북한이 예전에 내보낸 선전 방송을 들었는데 패전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에 대한 평가를 하면서, 전쟁 상대의 말을 인용하였다. 김원웅, 北 선전 근거로 "백선엽 한국전쟁 영웅 아냐" 폄하

6. 문재인 정부 이명박근혜 비유 논란[편집]

2017년 9월 4일,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지 약 4개월이 지난 상황에서 본인 트위터에 우리 군이 '김정은 참수부대' 창설에 착수했다는 내용의 인터넷 기사를 공유했다. 그러면서 “북에서도 문재인 참수부대 창설하면 어떻게 하나?”라며 “완전히 이명박근혜의 길로 가네. 다시는 김대중·노무현 팔지 마라”고 친북적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면서 문재인 정부까지 강력하게 비난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국방부가 유사시 김정은 등 북한 지휘부를 제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육군 특수임무여단을 창설한 것을 강하게 비난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발족하면서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의 뒤를 잇는 제3기 민주 정부를 자처한 점, 그리고 실제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역시 대북 화해 정책과 동반해 국방력 강화에 심혈을 기울인 점을 감안한다면 김원웅의 친북적 색채가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 있다.#

7. 광복회장 정치중립 위배 논란[편집]

친북 반미적 행적에도 광복회장에 당선되어 논란이 되었다. 김원웅이 열린우리당 의원 출신이긴 하지만 지나치게 극단적인 친북 반미 성향으로 문재인 정부에서도 김원웅이 아닌 이종찬 전 국정원장을 광복회장 선거에서 밀었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었다. 광복회 내부적으로 선거로 인해 소란을 겪고 있다. 광복회장 선거에서 김원웅 지지자들은 이종찬을 전두환 정권 부역자라고 비난했는데 사실 김원웅도 민정당 출신이다. 그 소란의 중심에 선 인물이다. 정치에 관해 그동안 개입하지 않았던 광복회의 신임 광복회장이 이념 전쟁을 주도하자 후손 중 내부의 정치성에 반발하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총선을 계기로 하여 김원봉의 서훈을 위해 보훈법을 개정을 주도한다는 소식을 언론에 전했다.

2019년 10월 18일, 이석기를 찬양하고 자유한국당을 폄훼하는 등 정치적 중립을 어기고 있다는 이유로 광복회 내부 상벌위원회에 제소된 것으로 알려졌다. 광복회 정관에는 정치적 중립이 명시돼 있다. 국가보훈처도 "국가유공자 등 단체 설립에 관한 법률 제14조에 따라 각 단체는 특정 정당의 정강을 지지, 반대하거나 특정 공직 후보자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등의 정치 활동을 할 수 없다"며 "이에 따라 정치 중립 위반 여부를 검토해보고 그 결과에 따라 상응한 관리·감독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다. # 박삼득 보훈처장이 1차로 구두 경고했다고 발표하자 경고받은적 없다며 광복회는 보훈처에 떠나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게다가 김원웅은 예비역 장성 출신인 박삼득 처장이 임명되자 임명을 철회해달라고 청와대에 요구한적이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2021년 1월 25일에는 독립운동 역사를 널리 알리는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수여하는 '최재형상'을 당시 법무부장관인 추미애에게 수여하여 논란이 일었다. 추미애 장관은 검찰개혁 문제로 윤석열 검찰총장 및 야권과 대립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와중에 광복회에서 상을 수여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추미애 이전에도 여권 정치인에게만 이 상을 수여했다는 것이고, 다른 문제는 '최재형상'이 독립운동가인 최재형 유족 및 후손들의 동의없이 광복회가 멋대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사단법인 독립운동가 최재형기념사업회'의 문영숙 이사장은 “민주당 출신 김원웅 광복회장이 정치적 사리사욕으로 최 선생을 이용하고 있다”면서 “광복회가 '최재형상'을 가로채 여당 정치인들에게만 주면서 선생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논란이 일자 광복회는 '최재형상'을 폐지했다.

그러나 논란이 사그라들기도 전에, 이번에는 더불어민주당의 강성 친문의원으로 꼽히는 송영길에게 '우리시대 독립군 대상'을 수여하였다. 이 상 또한 마찬가지로 같은 당의 설훈우원식안민석 의원에게 수여한 바 있다#. 게다가 '최재형상'과 '우리시대 독립군 대상' 모두 김원웅이 광복회장에 취임한 이후 제정한 상이라 정치인을 위해 광복회를 이용했다는 심각한 정치 편향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김원웅이 이렇게 대놓고 정치 편향적인 움직임을 보이자 광복회원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제기되었고, 2020년 10월에는 광복회 회원과 독립운동가 유족 등 100여명으로 구성된 '광복회 개혁모임'이 작고한 김원웅 부모의 독립운동 행적에 의혹을 제기하며 "진위를 조사해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을 작성하였다. 또 2021년 3월에는 광복회원들이 항의차 김원웅 집무실을 찾았는데 김원웅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이에 분을 이기지 못한 회원들이 김원웅의 광복회장 명패를 부수는 일도 발생했다#.

급기야 2021년 4월 11일,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제102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에서 김원웅이 화난 광복회원에게 멱살을 잡히는 소동이 있었다#. 독립운동가 김붕준 선생과 노영재 지사의 손자인 김임용씨가 식전 도중 김원웅에게 가 멱살을 잡으며 맹비난을 퍼부었는데, 사건 이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김원웅 광복회장이 우리 할머니(노영재 지사)가 만든 임시의정원 태극기를 마음대로 복제했다”면서 "지라시처럼 쓰고 있다”고 말했다#. 임시의정원 태극기는 1923년 중국 상하이 임시의정원에 걸렸던 태극기로,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냈던 김붕준 선생이 아내 노영재 지사와 함께 제작한 것이다. 해방 이후 후손인 김임용씨 등이 소장하고 있다가 국가에 기증했고, 2008년 국가등록문화재 제395-1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소장 중이다. 김원웅은 이 태극기를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사용하면서 광복회를 방문하는 정치인 등 손님들과 이 태극기를 들고 기념사진을 자주 찍어왔다. 상술한 추미애 장관 뿐만 아니라 같은 당 박주민 의원과도 임시의정원 태극기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은 바 있다.

정치 중립을 건의했다는 이유로 독립지사 후손인 광복회원들을 교묘히 친일파로 몰아세웠다는 증언까지 나왔다. 인터뷰

그리고 이를 항의하고 멱살잡은 회원을 제명하고 또한 의혹제기하는 TV 조선의 탐사보도에 대해서는 친일신문이라면서 인터뷰를 거절하는 등 여전히 정치적 편향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급기야 2021년 5월 21일에는 국회에 와서 기자회견을 하여 그동안 의혹제기는 소란이라며 평가절하하고 모든 것이 토착왜구들의 공작이라며 아직도 친일프레임을 하고 있다.

8. 생계형 당료 및 "백선엽 장군은 사형감" 막말 논란[편집]

2020년 8월 15일 광복절 75주년 기념사에서 그는 애국가의 작곡가인 안익태를 민족반역자로 지칭하고 백선엽 등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것을 비판했다. 이어 "친일반민족세력이 민족 자주적 역량의 결집을 방해하며 미래로의 길목을 가로막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현충원에 매장된 친일 행위가 있는 사람들을 파묘해야 한다고 주장해 논란이 되었다. 이들의 친일 행위가 문제가 되는건 사실이나 동시에 이들로 인해 한국이 여기까지 성장한 것도 맞으니 파묘는 보류해야 한다는 여론과 아무리 공적이 있다고 해도 친일의 원죄는 씻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나뉘고 있다.

이어 8월 17일에도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 KBS라디오 《김경래의 최강시사》에 출연해 “백선엽 장군은 사형감”, “애국가는 불가리아 민요를 베꼈다”고 거듭 주장해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인터뷰 원문을 보면 친일파라서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6.25 개전 초기에 상부에서 철수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무단으로 1사단을 거느리고 한강 남쪽으로 철수했기 때문에 그때 사형에 처했어야 한다는 게 김원웅의 주장이다. 게다가 친일 미청산의 중심에는 이승만이 있다고 하며 "갈등의 원흉"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사실관계를 도외시한 일방적인 주장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부분이 문제이다.
  • 백선엽의 제1사단은 6월 27일까지 격전을 벌이면서 개성시-문산읍에서 퇴각해 봉일천 일대에서 방어를 하고 있었다. 이날 오후 김홍일 소장은 민기식 대령 등 육군본부 작전지도반과 함께 사단을 방문했는데, 이때 백선엽은 김홍일에게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에게 한강 방어선으로의 퇴각을 건의해줄 것을 요청했고 김홍일도 이에 동의하며 육군본부 복귀 후 해당 사항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당시 북한군 주공이 미아리 전선을 돌파해 서울 함락이 임박했기 때문에 육군본부는 제1사단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수원으로 퇴각해버렸다. 곧이어 28일 새벽에는 한강 인도교 폭파가 이뤄지면서 제1사단이 그대로 위치를 고수하다가는 한강 북안에서 퇴로가 막혀 사단이 전멸할 위기에 봉착했다. 김원웅의 주장은 이런 혼란 상황에서 그대로 명령을 기다리고 앉아있다 부대가 전멸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이다. 이는 군사학의 기본도 모르는 소리이다. 그나마 제1, 5, 7사단을 비롯한 한국군의 잔존 병력들이 행주, 이산포, 한남동, 서빙고, 뚝섬, 광나루 등지에서 나룻배로 한강 남안으로 퇴각하고 이들이 김홍일의 시흥지구전투사령부 하에서 방어태세를 정비함으로써 국군은 한강 방어선에서의 귀중한 지연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 애국가가 불가리아 곡 〈도브루자의 땅이여(О, Добруджански край)〉를 표절했다는 이야기는 불가리아계 미국인 니콜로프의 주장이었으나, 이후 연구를 통해 근거가 희박한 것으로 판명났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이에 대해 각종 소셜 미디어에서는 정작 김원웅 자신이 박정희의 민주공화당 공채 사무원으로 일하면서 유신 시대를 보내고 이후 제5공화국 시절에는 전두환의 민주정의당에서도 일하며 사실상 '군사독재에 부역'을 했는데도 이에 대한 해명은 없이 과거의 친일반민족행위자들만 공격한다는 지적이 이어졌다.#1 이 문제가 이슈화되자 그는 이런 과거 행적에 대해서는 세상을 모르고 역사도 잘 모르던 시절에 벌인 “생계형” 활동이라고 강변했다. 미래통합당 김은혜 대변인은 “(민정당 근무 등) 부역의 역사가 들통나자 '생계형'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하는데, 대한민국의 벅찬 광복의 역사를 이끌어야 할 자리에 '생계형'은 맞지 않다”고 꼬집었다.

참고로 이렇게 친일이라면 학을 때는 사람이 정작 친노시절부터 신기남이나 김희선 등과는 잘만 어울려 지냈다. 심지어 신기남의 부친 친일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결국 본인이 그 문제를 부끄럽게 생각하느냐 자랑스럽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거취문제를 결정해야 할 것"이라며 직접적인 사퇴를 권하지 않고 중립적인 자세를 취했다.# 백선엽에 대해서는 온갖 비판을 다 했던 사람이 단순한 친일파가 아닌 독립운동가들을 잡아 고문한 악질적인 케이스에 대해서는 강하게 질타하긴커녕 애써 외면한 것이다. 그러니까 내 편 친일은 착한 친일, 남의 편 친일은 나쁜 친일이라는 것이다.

9. 애국가 변경 주장[편집]

2020년 8월 20일에는 애국가가 친일, 친나치 성향의 인물 안익태가 작곡한 곡이라는 이유로 국가(國歌)를 바꾸자는 발언을 하여 다시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 이외에도 불가리아 민요 표절, 코리아환상곡의 자기표절 논란을 언급하기도 하였으며, 이에 11월 9일 안익태의 유족은 사자 명예훼손을 이유로 경찰에 김원웅을 고소하였다.

안익태 문서에도 나와 있듯이 안익태의 친일, 친나치 행위는 명백한 팩트인지라 여론이 안익태의 유족에게 호의적이지는 않다. 또한, 애국가 작사에 윤치호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한 때 애국가 변경에 대한 주장 또한 설득력을 얻었으나, 애시당초 3.1운동 당시에 애국가를 따라서 불렀고, 김구조차도 그 당시 임시정부 시절에 애국가 논란을 겪었지만 본인이 "우리가 3·1운동을 무엇으로 했는가. 태극기, 선언서, 애국가로 했는데 그 작사자가 왜 문제인가?"라고 일갈했었던 것을 생각하면 다소 무리가 있는 주장 아니냐는 의견도 존재한다.

2021년 4월 28일, 경찰은 해당 고소건을 증거 불충분으로 인한 혐의없음으로 판단, 불기소 불송치 처리하였다. # 경찰은 해당 경축식 발언에 대해, "적시한 사실이 진실과 약간 차이가 나거나 다소 과장된 표현이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고 보인다"며 "중요한 부분이 객관적 사실과 합치하지 않는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다른 발언들에 대해서는 "피의자(김 회장)가 논문, 도서 등 구체성을 띤 소명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특히, 안익태의 친 나치 행적의 경우, 광복회가 독일 정부로부터 입수한 자료까지 제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경찰은 ''역사적 사실은 진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 자료에 한계가 있어 허위 여부 판단이 어렵다"고 밝혔다. 또한, 대법원 판례를 근거로 "사자의 명예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탐구 또는 표현의 자유가 보호돼야 한다"고 취지를 밝혔다. 이에 대해 안익태 유족 측은 해당 결정에 유감을 표하며 이의를 제기할 것이라 밝혔다.

10. 국회 난입 및 방역수칙 위반 논란[편집]

김원웅 광복회장은 2020년 8월 24일 국회 기자회견장에서 '미래통합당은 토착왜구', '원희룡 지사는 패역의 무리' 등의 궤변을 쏟아내 논란이 되었다. 게다가 마스크도 쓰지 않아 더욱 논란이 커졌다. 더 큰 문제는 김원웅은 기자회견을 신청한 적이 없었다는 것. 기자회견을 신청한 사람은 최강욱이었는데 정작 최강욱 본인은 기자회견장에서 회견을 진행하거나 심지어 기자회견장에 서 있지도 않았다. 사실상 최강욱 이름으로 김원웅이 대리 회견을 진행한 셈. 참고로 최강욱은 김원웅의 회견장을 나갈 때 동행하였는데 최강욱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고 한다. #

김원웅이 기자회견을 마친 직후 한민수 수석이 박병석 의장 지시 사항 브리핑을 위해 회견장 단상에 올랐다. 하지만 국회 측은 "박 의장의 방역 관련 지시는 브리핑에 앞서 이뤄졌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김원웅이 이날 박 의장이 사무처에 내린 지침을 어기고 기자 회견을 강행한 것이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마스크를 하지 않은 모습이 포착됐다. '턱스크'도 하지 않았다. 회견을 지켜본 사람들 사이에선 "최소한 마스크는 착용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 나왔다. #

11. 광복회 예산 부당집행 논란[편집]

국가보훈처에서 준 2억원을 김원웅 광복회장이 부당하게 집행했다고 징계('주의'조치) 당한 것이 국회를 통해서 밝혀졌다.#

12. 부친(김근수) 독립운동 경력 허위 의혹[편집]

김원웅의 예산 부당집행과 맞물려 부친 김근수의 독립운동에 대한 관련 기록이 전무하다고 광복회 대의원들이 해명을 요구했다. # 권준 장군의 손자인 권영혁(權寧爀, 1949. 4. 3 ~ )[7] 씨, 김상윤의 장손자인 김기봉(金基鳳, 1944. 8. 16 ~ ) 씨, 전기홍(全基弘)의 후손인 전영복 씨는 "김근수 지사의 의열단 입단 근거를 제시하고, 광복군 활동 기록에 김원웅 회장 부모의 기록이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은 이유에 대해 해명하라"고 요구했다.# 또한 권영혁 광복회 대의원 등은 김 회장에게 여러 차례 직·간접적으로 이 부분에 대해 진위를 밝히라고 얘기했고, '9월 말까지 답변하라'는 내용증명까지 보냈지만 묵묵부답"이라며 "그래서 결국 청원을 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번 청원은 광복회의 명예를 위해 제기한 것으로, 한 개인을 음해하거나 모욕주기 위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근수는 1912년 9월 27일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고 일본에 의해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하자 중국으로 건너간 뒤 1935년에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1940년 대한광복군에 가담하여 항일 독립 투쟁을 전개했다고 알려져 있다. # 그러나 의열단은 1927년에 난창 폭동에 참여한 여파로 와해되었다. 그 때 의열단에 가입하였다고 주장했다는건 시간의 앞뒤가 안 맞는다. 또한 김근수 지사가 광복군에서 참가했다고 스스로 밝힌 사실조차 사학계 고증이나 검증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에 논란이 깊어지고 있다. 독립운동사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초빙교수는 "김원웅 회장의 부모 이름이 나오는 사료들은 근거 자료가 아닌 구전에 의한 것으로 불명확하다"며 "두 사람이 광복군 활동을 했다는 직접적인 근거라고 볼 순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국임시정부 직원권속 교포명책'(임시정부 직원 및 가족, 현지 교민 명단)을 "김 회장의 부모가 광복군이 아니라는 증거"라며 제시되기도 했다. 이 책에는 여기엔 왕석(김근수의 이명), 김희(전월선의 이명), 왕원웅(김원웅의 이명) 등 김 회장 일가의 이름이 나온다. 그런데 이 책에 나온 사람들의 명단은 임시정부 직원 및 현지 교민의 명단을 기록한 것인데 광복군은 적혀있지 않다는 것이다. 김원웅 회장 일가는 더군다나 임시정부 직원도 아닌 현지 교민이었기 때문에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권영혁 광복회 대의원은 "김원웅 회장 측은 그동안 부모가 임시정부 직원이 아닌 광복군이라고 주장해왔다"며 "광복군은 당시 중국군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 명부에는 등재돼 있지도 않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한시준 교수 역시도 "임시정부가 광복 이후 귀국행 비행기를 마련하기 위해 그곳에 살던 교포들 명단을 작성해 중국 정부에 제출한 것"이라며 "독립운동을 한 사람을 적은 게 아니다"고 말했다. #

하지만 김원웅 본인의 요청으로 보훈처가 조사한 결과, 보훈처 관계자는 "본인 요청으로 독립유공자 공적검증위에서 조사를 진행한 결과 서훈 자격에 문제가 없음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 #

그러던 중, 후술할 모친 전월선의 독립운동 허위 경력 문제가 불거져 자료가 재검토되면서 김근수의 경력 또한 허위였음을 보여주는 정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국가보훈처 공훈 기록에는 김근수가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고 1992년 1월 작고한 것으로 나온다. 김원웅 본인도 각종 인터뷰에서 1963년부터 1990년까지 선친이 포상을 받았다고 주장해왔다. 그런데 정부가 1963년 '광복군 출신 김근수'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할 당시 공적조서에 김근수씨는 이미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공훈록 내용대로라면 1963년 이전에 이미 사망한 인물이 1992년에 또 한 번 사망한 것이다.#

더군다나 공훈록 내용에 따르면 '1963년 김근수'와 '1990년 김근수'는 동일 인물로 보기 어렵다. 1963년 공적조서에는 김근수가 '1939년 2월 조선의용대 입대'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총무처 근무' '1942년 10월 산서‧화북지구 적 후방 지하공작'을 했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1990년 김근수의 공훈록에는 '1939년 8월~1941년 3월 조선의용대 활동' '1941년 3월 광복군 편입' '1945년 8월까지 중경‧하남성 및 만주지방 특파공작원'이라고 적혀 있다. 두 김근수가 활동한 시기는 물론 지역도 다른 것이다. 결국 동명이인의 공적을 자신의 부친의 공적으로 속인 셈이 된다.

이를 의식한 듯, 그동안 모든 독립운동 관련 행사 및 광복회 내부 행사 때마다 모습을 비추던 김원웅은 이후 행사에 불참하고 있다. 2021년 6월 26일에 있은 백범 김구선생 72주기 추모식에 조차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자들의 인터뷰에도 일절 응하지 않았다.# #

국가보훈처는 2021년 7월 18일 독립유공자 공적검증위원회(검증위)를 열고 추가로 조사한 결과 21일 김원웅 광복회장의 부모가 독립유공자가 맞다며 서훈 변경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검증위는 1940년대 쓰인 '외사월보'와 '섬서지구 한교거류 정황적 함령' 등의 자료를 종합 고려할 때 "김석 또는 왕석, 전월순 또는 전희가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 등으로 독립운동을 한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보았다.

김근수의 신원 관련 의혹에 대해서도 1963년 포상 당시 김근수는 생존해 있었고, 김 회장의 부친이 맞다고 봤다. 논란이 됐던 공적조서에 쓰인 작고(作故) 표현은 행정상 오류일 것으로 추정했다.#

정부 안팎에선 "위원들 명단은 물론 회의록조차 공개하지 않는 검증위가 김원웅에게 또다시 면죄부를 준 것 아니냐.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고 봤다면 어떻게 조사했고 그 근거가 무엇인지 공개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지만, 보훈처는 자필 공적서와 같은 핵심적인 증거 자료 공개를 거부했다.

김근수에 대한 여러 의혹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황이다. 인터넷 매체인 뉴스버스는 김씨의 제적부를 통해 과거 '김차돌→김근수'로 개명한 사실을 공개했다. 앞서 김원웅은 부친인 김근수가 독립운동 당시 김석, 왕석이란 이명을 썼다고 주장하면서 독립운동사 등의 자료를 근거로 제시했다. 하지만 어떤 자료에도 김차돌이란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정부 관계자는 “이런 각종 의혹이 나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검증위가 제대로 된 검증 없이 서둘러 결론을 내린 건 또 다른 의혹만 낳게 될 뿐”이라고 검증위의 발표를 비판했다. #

김근수의 공적서에는 국가기관의 사료와 배치되는 내용이 기재돼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김근수는 각각 1965년 11월과 1966년 3월에 당시 총무처 장관 앞으로 2개의 공적서를 보냈는데 두 공적서에는 기존 사료와 배치되는 내용이 공적으로 적혀 있다. 김근수는 두 공적서에서 공히 “1942년 5월, 광복군 제1지대 제2구대장 임명”을 공적으로 제시했는데,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한국독립운동사 5권』에선 이소민(李蘇民·이명은 이경산)이 구대장으로 나온다. 또 편제표에는 구대원 중에 김근수는 물론 김근수가 주장한 이명(김석, 왕석 등)도 보이지 않는다. #

13. 모친(전월선) 독립운동 경력 위조 의혹[편집]

김원웅은 1990년 모친을 독립유공자로 신청하면서 “'전월선(全月善)'이 본명이고 '전월순(全月順)'이란 이명(다른 이름)으로 광복군 활동을 했다”고 주장했다. 전월순이라는 가명을 썼을뿐 실제 독립운동을 한 당사자는 전월선 본인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따라 김원웅의 모친 전월선은 '16세이던 1939년에 중국으로 건너가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에 입대해 일본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대원을 모집'했다는 공적을 인정받았고, 그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받았다. 이 때문에 보훈처 공식 서훈 기록엔 독립운동 당시 이름인 '전월순'으로, 자력철(보훈대상자 명부)에는 현재 이름인 '전월선'으로 기록됐다.

그러나 2021년 6월 15일, 광복회 개혁모임(약칭 광개모)과 광복군 제2지대 후손 모임인 장안회가 성명서를 내어 김원웅 광복회장의 모친이 허위 사실을 바탕으로 독립유공자에 등록됐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광개모 등에 따르면 김원웅의 모친 전월선(1923~2009)은 실제 독립유공자 전월순(1921~1953)의 여동생으로, 둘이 동일 인물이라는 김원웅의 주장과 달리 다른 인물이다. 《뉴스버스》의 취재에 따르면, 김원웅 외조부의 가계제적부 기록 상으로도 전월순은 1921년 2월 20일생, 전월선(김원웅의 모친)은 1923년 2월 6일생인 자매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2021년 6월 17일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개혁모임(광개모)과 광복군 후손모임 등이 제기한 '김원웅(사진) 광복회장 모친(전월선) 독립운동 행적 가짜 의혹'과 관련해 조사에 착수했다. 언론 보도와 별도로 국가보훈처에서도 이들이 동일 인물이 아님을 확인했다고 한다.

언론에서는 이러한 의혹에 대한 김원웅의 입장을 묻기 위해 접촉을 시도했으나, 김원웅 및 광복회 측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1#2 또한 2021년 6월 21일에는 김원웅의 모친 전월선이 1940년에 창씨개명을 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뉴스버스》가 공개한 전월선 부친의 제적부(제적등본)에 따르면, 전월선의 부친(김원웅의 외조부)가 우선 1940년 8월 8일에 '江本(에모토)'라는 일본식 성으로 바꿨고(창씨), 이어 12월 19일에 첫째 딸 전월순은 '島一', 둘째 딸 전월선은 '島次'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바꿨다(개명) 전월선의 부친은 창씨만 하고 추가로 개명은 하지 않았다. 이러한 창씨개명 시기는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공적으로 적시된 조선의용대 활동 기간과 겹친다. 공적조서 상에 전월선은 1939년 9월 19일부터 조선의용대 활동을 하여, 1942~45년에는 광복군 제1지대 활동을 한 것으로 나온다. 호주가 창씨를 하면 일가족 전체의 성이 함께 자동으로 바뀌므로 창씨는 전월선 부친의 독단적 행동이었다고 둘러댄다 해도, 개명은 본인이 직접 법원의 허가를 얻어야 하므로 또 다른 문제이다. 제적부와 공적조서 내용대로라면 전월선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창씨개명을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일본의 강압에 의해 창씨를 한 비율은 79.6%였으나, 개명까지 한 경우는 10%에도 미치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독립운동가 집안의 처신이라고는 납득하기 힘든 사실이다.

김원웅은 이에 대해 "1940년은 저희 어머니가 조선에 없을 때"이니 "한국에 남아있는 가족들이 가능하다면(할 수 있지 않았겠느냐)"며 "저는 처음듣는 얘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뉴스버스》의 분석에 따르면, 호적부의 개명 사항에 단순히 '계출(屆出,신고)'이라고만 되어 있다. 이는 가족 등 대리인이 신고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개명 신고를 했음을 의미한다. 대리인이 신고할 경우, 대리인의 인적사항을 함께 적도록 되어 있다. 또한 정작 전월선의 부친은 창씨만 하고 개명은 하지 않았는데, 전월순·전월선 자매만 개명된 것을 보면 남은 가족들이 임의로 개명했다기 보다는 이들 자매가 직접 개명 신고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는 일제의 강압이 심했으므로 창씨개명을 했다고 해도 친일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적어도 1939년부터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주장과는 배치된다.

무엇보다 전월선의 독립운동 공적 근거는 객관적인 자료가 전혀 없고, 1983년에 작성된 부실한 인우보증서 3건 뿐이다. 김원웅은 1942년 4월에 모친이 광복군 제1지대에 편입했다고 주장하나, 정작 1942년 10월에 작성된 제1지대 대원 명단에는 전월선과 언니 전월순의 이름은 물론, 김원웅이 또 다른 가명이었다고 주장하는 '김희(金喜)'나 '전희(全熺)' 등의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들 이름이 등장하는 명부가 있기는 하나 이는 대원 명부가 아니라, 임시정부가 중국 정부에 식량을 요청하기 위해 직원 가족과 다른 재중교포들까지 모두 기재한 것에 불과하다. 또한 같이 광복군 제1지대에서 근무했다는 김원웅의 부친 김근수는 1977년에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는데, 모친 전월선은 왜 6년 뒤에 별도의 인우보증을 받아 신청했는지도 의심이 가는 부분이다. 정밀한 조사가 어렵다는 허점을 악용해 친분이 있는 실제 국가유공자들로부터 인우보증을 받아 국가유공자로 둔갑한 사례들은 그간 끊이지 않고 있어왔다. 대표적으로 5.18 구속부상자회 회장 문흥식은 아무런 문서 증거 없이 인우보증에 의해 5.18 유공자로 인정받았으며, 광주광역시 동구 학동 철거건물 붕괴 사고의 관련 핵심인물로 지목되자 경찰 수사를 피해 미국으로 도피했다.

부친과 모친 모두에 대한 허위 의혹이 계속되고 있음에도 김원웅이 사과나 사퇴의사를 밝히지 않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급기야 2021년 6월 28일에 광개모 회원들이 김원웅의 집무실로 몰려가 인분을 투척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이날 김 회장 집무실의 문을 부수고 들어갔으나 김원웅은 이미 도망한 상태였고, 이에 광복회 직원과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 사이 광개모 회원 일부가 미리 준비한 인분 2통을 책상과 서류더미 등에 뿌린 것으로 알려졌다#.

국가보훈처는 18일 독립유공자 공적검증위원회(검증위)를 열고 추가로 조사한 결과 21일 김원웅 광복회장의 부모가 독립유공자가 맞다며 서훈 변경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검증위는 "김 회장의 모친 전월선 선생이 실제 독립운동가인 언니의 공적을 가로챘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단했다"고 밝혔다. 검증위는 언니 전월순씨가 독립운동을 한 전월선 선생이 중국에서 활동하던 시기인 1939~1945년 경기 김포군에서 자녀 3명에 대한 출생신고를 한 것을 확인하고 김 회장 모친의 친언니로 추정되는 전월순씨의 자녀와 접촉한 결과 모친의 독립운동과 관련하여서는 '모른다'는 대답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으며 검증위는 "당시의 시대상황 등을 감안할 때, 제적부가 사실과 다르게 작성됐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전월순님의 거주 지역과 출산시기 등으로 미뤄볼 때 독립운동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이를 두고 "DNA 감정 결과는 모계 혈통만 증명할 뿐 그 사람들이 실제 전월순씨의 자녀라는 것은 입증할 순 없다"며 "만일 두 명의 전월순이 존재한다면 누가 독립유공자인지 확인도 안 된 상황에서 검증위가 인정해준 것으로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고 서훈 존치 결정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

14.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관련 발언 논란[편집]

북한이 우리 국민을 피격한 사건을 두고 친일 세력의 행태가 이번 사건의 근본적 원인이라고 주장한 것도 모자라 피살된 공무원이 월북자라고 단언하였다. 김 회장은 이날 성명에서 ''그간 친일에 뿌리를 두고 분단에 기생하여 존재해온 세력이 끊임없이 민족을 이간시키고, 외세에 동조하면서 쌓아온 불신이 이번 불행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밝혔다.#[8]

15. 차기 대통령 관련 발언[편집]

왕산 허위 선생 기념관에서 열린 특강에서 민족주의를 거론하면 무조건 빨갱이로 매도하는데, 김대중노무현문재인 대통령을 빨갱이라고 한다, 따라서 태극기 부대로부터 빨갱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다음에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 논리의 주장을 하였다. 그 자리에서 미국은 한국을 졸개로 본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재명 후보가 2021년 11월 광복회를 방문했을때 김원웅은 "이후보에게 광복회원들이 동지적 애정을 많이 갖고 있다. 독립운동 정신에 투철한 정치인이라는 인식이 각인돼 있다"고 치켜세웠다.#

16. 박용진 의원 저격[편집]

서울 강북구의 더불어민주당 소속 P 의원이 친일 비호 언행을 했다고 주장해 대놓고 박용진 의원을 저격했다.#

17. "소련군은 해방군 미군은 점령군" 발언[편집]

2021년 5월 21일 경기도교육청이 추진하는 '친일 잔재 청산 프로젝트' 활동에 참여한 고교생을 대상으로 한 영상메시지에서 종북주의적 발언으로 논란이 되었다.

이 기사에서 인용된, 김원웅이 일본의 항복 후 한반도에 진주한 소련군과 미군을 대조하며 이야기했다는 내용은 아래와 같다: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려서 북한은 소련군이 들어오고 남한은 미군이 들어왔다. 소련군은 들어와서 곳곳에 포고문을 붙였다. '조선인이 독립과 자유를 되찾은 것을 참 축하드린다' '조선인의 운명은 향후 조선인들이 하기에 달렸다' '조선 해방 만세'. 이렇게 포고문이 돼 있다. 그런데 비슷한 시점에 미군이 남한을 점령했다. 맥아더 장군이 남한을 점령하면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다' '앞으로 조선인들은 내 말을 잘 들어야 된다' '내 말을 안 들을 경우에는 군법회의에 회부해서 처벌하겠다' '그리고 모든 공용어는 영어다'. 이런 포고문을 곳곳에 붙였다.

우선 이 포고문 내용 자체는 일부분 사실에 부합한다. 이는 1945년 8월 25일에 당시 북한지역 점령을 책임진 소련군 제25군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가 발표한 포고문과, 1945년 9월 9일에 남한지역 점령을 책임진 미군 태평양지구 육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 명의의 제1호 포고를 비교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는 이미 17년 전인 2004년 금성출판사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서 왜곡된 기술로 학계의 비판을 받았던 내용이다. * 당시 소련군은 독소전쟁 승리 과정에서도 그랬듯이 언제나 점령지에서 파시스트 압제의 '해방자'임을 자처했다. 반면 미군은 한국에 대한 인식 자체가 매우 부족했고, 한국에서 일본군을 신속히 무장해제시키고 치안을 확보하는걸 우선시했다. 그러다 보니 두 포고문을 비교하면 미군의 포고문이 훨씬 고압적이라는 느낌을 주는게 사실이며, 이는 실제 원문을 읽어보면 쉽게 느낄 수 있다:
북한 점령 치스차코프 대장의 포고문 (1945. 8. 25) 【전문 펼치기·접기】













































































맥아더 사령부 포고 제1호 (1945. 9. 9) 【전문 펼치기·접기】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하지만 김원웅의 발언은 두 포고문의 전체 맥락과 배경을 무시하고 교묘하게 발췌한 왜곡임도 분명하다. 김원웅은 미군이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라고 자처했다고 하는데, 위의 미군 포고문에 보면 분명히 조선 인민의 오랫동안의 노예상태와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키라는 연합국의 결심을 명심하라는 부분이 있다. 미군의 진주 목적이 조선의 해방 독립임을 명시한 것이다. 다만, 보다 효율적으로 그 목표에 이르기 위해 조선 인민들도 일단 미 군정에 잘 협조해달라는 맥락이다. 단순히 '점령'이라는 단어를 썼다는 이유로 미군이 한반도를 점령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김원웅이 옹호한 소련 포고령에 기명된 치스차코프 사령관은 "소련군에 대해 북한 인민이 저항한다면 그 절반을 처형하겠다!"라는 극언을 남기기도 한 인물이다. 이는 후술된 소련 해방군 내부 보고서에 그대로 남아있다.

소련군이 미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고압적인 모습을 보인 것은, 단지 공산주의자들이 비교적 순탄하게 북한 지역의 주도세력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해방 초기에는 북한 지역에서도 우익 인사가 다수 참여하는 건국준비위원회 지부들이 결성되었으나, 이내 소련군의 비호와 함께 김일성을 위시한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가담한 인민위원회로 대체되었다. 이후에도 소련군은 민정부를 설치하여 인민위원회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주도 세력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이러한 패턴은 북한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의 지배에서 벗어난 동유럽에서 반복적으로 이뤄진 소련의 전형적인 공산화 방식이었다.

반면 미국은 한국 실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을 뿐 아니라, 남한에서는 특정 정치세력이 남한 지역의 주도세력으로 자리잡지 못했다는 차이가 있었다. 당시 대구가 동양의 모스크바라 불렸을 정도로 남한 역시 공산주의자의 세력이 강했다. 이런 구도는 신탁통치 오보사건까지 이어져 그 사건 이후에야 우익이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소련이 이미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김일성 등 빨치산계 독립운동세력을 포섭하여 우호세력을 구축해 놓은 것과 달리 미국은 그렇지 못했으므로, 종전 후 남한에서 어떤 정치세력과 제휴해야 할 것인지조차 잘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은 소련과 달리 통치의 난이도가 극히 높았고, 군정 초기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남한의 여러 정치세력들과 충돌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남한에 진주한 일부 미군에 의한 범죄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조선총독부가 물러가고 들어선 미군정의 행정적 미숙함이 큰 문제였는데 당장에 미군정을 책임진 존 하지부터가 한반도와 한국인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고 더하여 본인부터가 군인으로서의 능력은 몰라도 정치적, 행정적 능력이 없다 보니 하는 일마다 삽질이었다. 그나마 소작료 감소, 문맹률 감소 같은 업적이 있긴 한데 그걸 다 덮을 정도로 일을 말아먹었다. 하다못해 남한 내 우익인사들조차 한민당 빼면 워낙 그가 무능하다보니 좋아하지 않았다. 우익인사들이 이럴진대 이념적 이해관계가 없는 일반 민중들은 더 싫어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해방군을 자처한 소련군이 실제 북한에서 저지른 행동이다. 겉으로 내세운 것과 달리 소련군도 군기는 엄격히 잡히지 못해 북한 인민을 상대로 상당한 약탈과 폭력, 비행을 일삼았다. 이는 1946년 1월에 소련군 내부에서 작성된 북조선 동향 보고서에 생생하게 나와 있는 엄연한 사실이다.
우리 군과 나라의 명예와 가치를 모욕한 군무원들의 부도덕한 행동은 조선에서 실로 재앙적인 규모이다. 우리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시‧군들 도처에서는 밤마다 총소리가 울린다. 다른 도시들보다 상대적으로 치안이 양호한 평성에서조차 총소리 없이 밤이 지나간 경우는 한 번도 없다.

음주는 온갖 특이한 사건들과 부도덕한 행동들의 원천으로, 도처에서 관찰된다. 특히 음주는 신의주에서 한창인데, 심지어 낮에도 길거리에서 술취한 군무원들을 볼 수 있다. 밤만 되면 모든 여관이며 매음굴(신의주에 70군데가 넘는다)마다 술취한 바쿠스들이 나타난다. 취한 장교들은 바로 거기서 순찰중인 위수부대원들의 묵인 하에 병사들과 교대로 창녀를 갖는다. 신의주에 주둔하고 있는 비행사단의 한 대원(정치부장 추니크(Цуник) 중좌)도 이런 온갖 추태스런 품행을 보이고 있다. 소좌 데미도프(Демидов)가 지휘관으로 있는 현지 보병연대 군무원들 역시 이에 뒤지지 않는다. 데미도프는 토요일 아침부터 다음날 저녁까지 이틀 동안(12월 8~9일) 그에게 특별히 제공된 위수사령부 여관방 두 개에서 계속 창녀들과 함께 있으면서 술취한 바쿠스로 지냈다(그래서 이 방 두 개에서는 군사고문, 대좌 그라포프(Графов), 도위수사령관인 중좌 기르코(Гирко)가 지내기도 하는데, 이 일은 그들이 보는 앞에서 벌어졌다). 도위수사령부 정치 담당 부사령관인 소좌 아탸소프(Атясов)는 우리의 명에 따라 술취한 데미도프에게 제재를 가하려고 했으나, 그는 거친 욕설로 응수하면서 여관방들은 '위수사령관 기르코가 손수' 자신에게 제공한 것이라고 말했다.

신의주에 있는 도위수사령부의 특징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도 있다. 회의 참석차 이틀 일정으로 평성으로 떠난 기르코 대신 남아 있던 부사령관 소좌 표도로프(Федоров)는 이틀 동안 원없이 술에 취하느라 사령부에 나타나지 않았다. 사령부에는 당직자인 부사관만 남아 있었고 심지어 장교조차 한 명 없었다. 고주망태가 된 표도로프와 장교들을 우리는 이틀째 되는 날 집에서 발견했으며, 위수사령부의 나머지 장교들 소재는 파악할 수 없었다. 대도시 신의주는 이틀 동안 실질적으로 위수사령부의 감시 밖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은 얼마 전 바로 이 신의주에서 있었던 조선 민족주의자들의 연설에 대한 부분적인 원인이 된다.

수많은 병사와 장교들이 매일같이 사방에서 매우 빈번하게 약탈과 폭행 등을 자행하는 것은 이들이 처벌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일례로 884 БАО(신의주) 출신의 상위 막시모프(Максимов)는 계획적으로 약탈을 하는데도 벌을 받지 않고 지나간다. 12월 6일 막시모프는 자동차 종대를 이루고 구성시를 지나다가 운전사 7명과 함께 현지의 조선인 여관에 투숙하게 되었다. 밤새 내내 일행은 여자를 요구하면서 술 마시고 소란을 피우더니 아침이 되자 숙박료도 지불하지 않고 떠나 버렸다. 12월 11일, 그러니까 닷새가 지나 돌아오는 길에 막시모프는 바로 그 자동차 종대와 함께 다시 구성에서 멈췄다. 군위수사령관은 그에게 이전 것에 대해 여관 주인과 계산을 끝낼 것을 명했다. 막시모프는 굉장히 내켜하지 않으면서 사령관의 강압으로 돈을 건넸으나,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 돈은 엔이 아니라 그곳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만주의 고비였다. 이 도시를 떠난 직후 변두리에서 막시모프는 자신의 소총병들 중 한 명과 함께 길 가던 조선인 농부에게 강도짓을 해 180엔을 빼앗았다. 우리는 막시모프의 근무지인 신의주에 이 사실들을 즉시 통보하라고 위수사령관에게 명했고, 위수사령관 칼레딘 대위는 이 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자신은 이미 사령부에 막시모프와 그 외에 사람들에 관해 보고를 했으나 아무 결실이 없으며, 그래서 막시모프는 신의주에서 평성으로 가는 길에 구성 및 다른 군의 도시들 지나면서 끊임없이 무례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1946년 1월 11일 칼라시니코프가 테렌티 시티코프에게 보내는 북조선 주둔 소련군의 행태 및 북조선 주민의 정치‧경제상황 보고 번역문
이러한 해방자와는 전혀 동떨어진 소련군의 만행들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소련군은 해방군, 미군은 점령군'이라는 도식을 어린 학생들에게 주입시키는 짓은 무지의 소산이자 매우 무책임하고 편향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이어 김원웅은 미 군정이 남한을 식민지로 삼아야 한다는 비밀 보고서를 올렸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이는 학계에서도 북한이 남조선 인민해방을 명분으로 삼기위한 북한 노동신문의 왜곡임이 밝혀지며 일축된 이야기인데 이를 정설이랍시고 이야기 한 셈이다. 이 또한 역사적 사실과 배치된다. 만약 미군정이 남한을 식민지로 삼으려 했을 정도로 그 전략적 가치가 높았다면 애치슨 라인에 남한을 제외한 것이 설명되지 않고, 이미 미군이 주둔한 상황인데 오히려 병력을 더 보내 주둔시켰으면 주둔시켰지 철수할 이유가 없었다. 만약 독립국가로 보이는 식민정권으로 하려 했다면 지킬 수 있는 미군 장비를 다수 지원을 하는 정황도 없었다.

이에 국민의힘과 광개모에서 맹비난이 일었고 심지어 광복회를 관리하는 황기철 국가보훈처장 또한 김원웅의 발언에 "대단히 부적절하다, 광복회에 사실 내용을 파악해 우려를 표명하든지, 다른 방법이 있으면 강구해서 조치하도록 하겠다"고 유감을 표했다. #

그러나 김원웅은 적반하장으로 아래와 같은 성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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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보도자료 제목에 '개무시'라는 막말을 섞는 극도의 천박함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회장의 개인 성명을 단체의 보도자료로 뿌린 것 자체가 부적절한 행태다. 김원웅이 광복회를 사조직 정도로 여기며 얼마나 전횡을 일삼고 있는건지 보여준다. 상술한 내용과 같이, 보도자료 내용도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게다가 부친 김근수와 모친 전월선 항목에서 알 수 있듯, 김원웅이 '독립운동가 자손'인지조차 불분명해진 상황에서 사죄나 반성은 커녕 되려 큰소리를 친 것은 어떻게 봐도 정상적인 상황으로 보기 어렵다. 더군다나 더글러스 맥아더는 한국인을 무시한 적이 없으며, 저 성명에서 맥아더가 친일파를 기용했다는 또 다른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미 17년 전에 완벽히 논파된 거짓말을 다시 들고 나와 역사를 왜곡한 이는 본인임에도 그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지록위마의 자세로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모욕하는 천박한 행태로 인해 전방위적으로 비판받게 되었다.

18. 광복회 카페 자금 횡령 논란[편집]

TV조선에서 익명의 前광복회 간부인 자의 제보 및 인터뷰를 통해 김원웅 회장이 국회 내에서 광복회가 독립유공자 후손에게 장학금을 주기 위해 운영하는 카페의 수입 중 총 4,500만원을 이발비, 양복비, 마사지 비용 등등 개인용도로 횡령했다는 기사를 올렸다.관련 기사 TV조선의 단독 뉴스에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감사에 들어가겠다며 공식입장을 내놓자 김원웅 회장 측은 "회장이 가게운영을 몰라 대신 운영을 담당하던 부장이 전횡과 일탈 및 비리를 저지른거고 회장은 아무 연관이 없다."라며 공식 반박문과 함께 날조기사를 올린 TV조선에 명예훼손을 좌시하지 않을것과 이는 김원웅 죽이기 일환이라며 주장하였다.기사(연합뉴스)

이후 통화 녹취록이 공개 되었다. 김원웅 회장 육성으로 "카페에서 나는 계속 일정 정도 돈이 나오는 줄 알았어.그래서 그거 갖고 내가 쓰는 줄 알았어." "좀 다른 비용들 이렇게 조그마한 것 나가는 것 있으면 그걸로 좀 커버가 되는구나 이렇게 생각을 해왔어, 나는." 등의내용이 기사를 통해 공개되었다. 김원웅 회장측은 "전후 맥락이 생략된 악마의 편집" "비자금 조성을 지시하거나, 보고 받지 않았다"라고 반박했다.기사(TV조선)

그러나 보훈처 감사측은 비리의혹 감사에 들어갔다고 발표하였다.기사(동아일보)

김원웅은 직원 개인의 비리였고 9월에 알게 되었다고 주장했지만, 7월에 광복회 간부와의 통화에선 카페 돈이 나오고 그걸 자신이 쓰는 줄 알았다는 말을 직접 했다. "비리 몰랐다"던 김원웅, "카페서 나오는 돈 내가 쓰는 줄 알아" 녹취 입수

국가보훈처는 감사 결과 카페 수익금이 민간기업에 임의로 사용되고, 허위 발주·원가 과다 계상 등의 방법으로 6,100만원 가량의 비자금을 조성했으며, 김원웅의 양복 구입비 등 사적 용도에 유용된 비위 사실을 확인하고 수사를 의뢰하는 한편 해당 수익 사업에 대한 승인 취소 절차를 진행하기로 했다.# 감사 과정에서 김원웅은 "해당 직원의 개인 비리였고 나는 몰랐으며 돈은 나중에 알게 된 뒤 채워넣었다"는 입장을 계속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감사 결과로 김원웅의 광복회에서의 입지는 줄어들 예정으로 보이는데 이전부터 광복회가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던 전통도 무시하여 일부 광복회원이 김원웅에게 공격한 사례가 있었다. 그만큼 광복회 내부에서도 김원웅의 행보에 불만이 많았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번 감사가 사실로 밝혀지면서 광복회 단체의 명예를 실추시킨 셈이다.

결국 광복회 대의원 61명중 31명이 탄핵하기 위한 임시총회를 건의하면서 22일에 회의가 구성에 충족되었으나 김원웅은 요건이 안된다며 반려시키는 치졸함을 보이며 사퇴도 거부하며 버티기에 들어갔다. 한편 김원웅은 국가보훈처를 향해 "일방적으로 개인비리를 저지른 부하의 말만 듣고 행한 이번 조치는 편향적인 위법행위이고 명예훼손을 좌시하지 않겠다"며 기존 주장을 반복했다. 김원웅의 모르쇠가 계속되자 전직 간부는 김원웅이 220만원 테이블을 사라고 지시한 문자를 공개했다. # 한편 국민의당 후보 안철수는 자신이 집권하면 광복회에 대한 국비지원을 끓을것이고 광복회에 감사단을 보내 자금줄을 감시할 것이라는 공약을 선언했다.

2월 12일, 백범 김구 선생의 장손인 김진 광복회 대의원은 “김원웅의 개인 비리로 광복회의 신뢰와 명예가 실추됐는데도 사퇴하지 않고 버티는 것에 분노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냈다. 기사 및 성명서 전문

19. 가족회사 특혜 논란[편집]

TV조선에서 익명의 前광복회 간부를 통한 단독보도로 김원웅이 광복회장의 권한으로 광복회 건물 내에 가족들이 운영하는 회사 공간을 제공해주고 이 회사를 공공기관과의 영업을 밀어줬다는 비리의혹을 추가 보도하였으며 그 근거로 2020년 4월 골재사업을 담당한 회사의 등기임원 중 김원웅 회장의 아내와 처조카가 있었다는 문서와 광복회의 날인이 찍힌 미군기지 임시 출입증서와 여주시와의 골재사업 문의 공문 문서를 증거로 보도하였다. 조선일보의 취재가 시작되자 아내와 처조카는 등기임원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김원웅은 취재진의 전화와 문자에 아무런 답장도 안하는 상태라고 한다.기사(조선일보)

2월 10일자 국가보훈처 감사 결과에 따르면 광복회 건물 4층에 가족회사 사무소 제공이 사실이였고 이 외에도 문서등록부에 등재되지 않은 6건의 문서와 문서의 일련번호가 있었다며 발표하며 이것 역시 일부 사실이 인정되어 수사 의뢰가 들어갔다.

20. 해임투표 기습 수용으로 꼼수 논란[편집]

수익금 횡령 의혹을 받고 있는 김원웅 광복회장이 자신의 불신임안을 의결할 임시총회 개최요구를 돌연 받아들여 나흘 뒤에 열겠다고 했다. 그동안 광복회 일부 회원들의 임시총회 개최 요구에 "정관상 요건이 안 된다"며 직권 반대해오다 기습 수용 의사를 밝힌 것이다.

광복회원인 이문형 광복회개혁모임 대표는 15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총회 구성원들이 대부분 연로해 갑작스럽게 투표를 위해 상경하기 어려운 점 등을 이용해 준비기간을 주지 않으려는 꼼수"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꼼수는 사실로 드러났는데, 결국 임시총회 개최가 흐지부지되고 김원웅 측에서 명확한 답변을 내놓지 못하면서 언론의 비판이 지배적이었다. 비리 사실이 드러난 마당에 꼼수로 회장직을 지키려다가 더 큰 비난을 받게된 자충수였다.

끝까지 광복회 회장의 자리에 연연하면서 노욕을 감추지 않는다는 여론에 대통령 선거를 앞둔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판도 김원웅 기사마다 댓글로 이어졌다. 광복회 주변 일설에는 김원웅이 청와대와 민주당에 SOS를 쳤으나, 사안이 너무나 명백하고 불량해서 이미 거리를 두기로 정리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대선을 앞둔 집권여당 입장에서, 더우기 반일을 기치로 앞세운 문재인 정권을 특성상 광복회의 혼란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어서 김원웅의 사퇴 권고를 전했다는 주장도 있다.

21. 광복회 사퇴회견 논란[편집]

상술된 꼼수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광복회장 사임을 선언하며 사퇴회견을 열었다. 그러나 이 사퇴회견도 비리에 대한 사과문보다 남탓과 친일몰이로 가득한 4과문이라는게 문제였다.# 이에 끝까지 김원웅스러운 마지막을 보여줬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사람을 볼 줄 몰랐고 감독 관리를 잘못해 이런 불상사가 생긴 것이니 전적으로 제 탓"이란 발언은 자신의 부하가 독단적으로 비리를 저질러 형성된 비자금을 자신은 몰랐다 라는 기존주장을 되풀이 한 건데 애초에 이것조차 몰랐다면 무능에 가까운 것이다. 더우기 김원웅이 주장하는 '비리 행위자'와 '제보자'가 같은데 이는 본인의 범죄를 자수했다고 우기는 것과 같다. 금전적 혜택을 김원웅이 얻었더라도 형사법상 공금 횡령과 배임은 주모자에 더 큰 책임을 묻는다. 따라서 애초에 김원웅의 주장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이후에도 "난 반평생[9]을 친일청산에 앞장서 왔고 친일반민족언론 조선일보와 대척점에 서서 싸워 왔는데 그 조선일보, TV조선에 의해 내가 무너지는 게 더 가슴 아프다."며 친일몰이를 하였다. 특히 김원웅은 보수세력을 친일세력이라고 한 주제에 군사정권 시절에는 앞잡이 노릇을 하고,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 민정당의 공천까지 받았던 인물이기에 진보개혁에 앞장선 것도 아닌 사람이다. 그리고 조선일보가 없는 사실을 꾸며낸것도 아니고 보도 후 국가 정부기관 국가보훈처서 공인한 사실인데 마치 악랄한 보도를 당했다는 듯이 호소하는 것은 김원웅이 얼마나 상식 밖의 후안무치인 인물인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렇게 자신이 물러날 때조차도 스스로 논란을 만들고 갔다.

22. 8억원대 비리 의혹 적발[편집]

국가보훈처의 광복회에 대한 감사 결과 8억원대의 비리 혐의가 드러남에 따라 검찰에 고발됐다.#
  • 출판사업 인쇄비 과다 견적 5억원
    • 2020년 '독립운동가 100인 만화 출판사업'을 추진하면서 인쇄업체와 수의계약하여 시장가 대비 90% 이상 부풀렸다. 한편 법적인 문제와는 별도로, 해당 만화 위인전은 백범 김구편이 290쪽인 데 반해 김원웅의 모친인 전월선편은 무려 430쪽에 달해 본인 가족사 미화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더구나 전월선은 독립운동 경력 위조 의혹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13번 문단 참고)
  • 카페 공사비 과다 계상 9,800만원
    • 국립수목원 내 '수목원 카페' 수익사업을 추진하면서 적정 공사비를 훨씬 넘는 공사비를 지출했다. 18번 문단의 카페 수익금 횡령과는 별개 사안이다.
  • 대가성 기부금 수수 1억원
  • 기부금 목적 외 사용 1억3,000만원
    • 모 금융사가 기부한 8억원 중 1억3,000만원을 기부 목적과 다른 운영비로 사용하여 기부금품법을 위반했다.
  • 법인카드 유용 2,200만원
    • 자신이 운용하는 약초학교 직원/인부의 식대, 개인용 반찬, 약값, 목욕비, 가발미용비 등에 법인카드를 사용했다.

불공정 채용 의혹도 제기됐는데 재임 당시 채용된 15명 중 7명을 공고나 면접 등 어떤 절차도 없이 채용한 사실이 드러났으나 불법성을 입증하기가 곤란해 고발 대상에서는 제외됐다.

현재 비자금 중 6100만원 중 4000만원대 가량은 비리여부를 계속 조사중으로 나왔다.

한편 검찰은 4000만원대 금액 재조사를 요청하였다. 골무사업도 현재로써는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가 되었다.

23. 총평[편집]

요약하자면 김원웅은 광복회 역사상 최악의 광복회 회장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처음부터 민주공화당민주정의당으로 시작하며 핵심 간부를 맡고 군사독재정권에 부역한 주제에 자신은 그저 취업을 하기 위해서였다는 식으로 내로남불적 태도를 보였다.[10] 민주화 이후 자신이 유리하다 생각하는 쪽으로 당적을 마구 옮기며 기회주의적인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도저히 알 수 없는 정치 행보와는 별개로 극단적인 반미종북 성향은 분명하였는데 김정은을 위인이라고 치켜세웠고 북한은 오히려 피해자인 것마냥 실드를 치고 미국은 제국주의라는 식으로 맹비난을 해댔으며, 6.25 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 부르거나 미군이 점령군이라는 등 역사왜곡 발언 역시 서슴치 않았고 북한이 자행한 도발의 피해자들마저 비하하는 2차 가해까지 저질렀다. 그러면서 이승만박정희 대통령 등의 보수대통령들은 친일세력이라고 펌훼하였고, 자신이 몸담았던 민주당 출신 대통령인 김대중노무현 대통령들은 빨갱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심지어 자신이 광복회 회장을 지내는 동안 대통령을 지내고 있었던 문재인 대통령까지 자신의 마음에 안들면 마구잡이로 비난하는 등 대한민국 대통령들에 관해서는 자신이 필요할 때만 찬양하고 사실상 부정하고 있는 위선자같은 행태를 보였다.

광복회 회장이 된 이후에도 광복절 경축식 때마다 온갖 물의를 일으키는 망언들로 정치 중립성을 파괴하였고 자신을 적극적으로 믿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나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상을 뿌렸고 반면에 미래통합당 보수정치인들은 그저 깎아내리기 바빴다. 김원웅은 회장을 지내는 동안에도 사실상 독립운동가들의 명예를 팔아먹었고 독립운동가들은 그저 김원웅의 이미지 세탁의 수단으로 악용되면서 먹칠을 당했다.[11][12]

원래 광복회는 정치집단이 아닌 그저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모인 비영리 단체였다. 하지만 김원웅이 회장을 맡으면서 광복회는 혼란 그 자체에 빠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로 인해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서로 싸움을 벌이는 사태까지 벌어졌고, 이런 상황에서도 김원웅은 정작 자신의 반대세력은 독립운동가 후손이건 보수이건 진보이건 가리지 않고 무조건 친일파로 몰아세웠다. 김원웅과 그 지지세력들의 마녀사냥 공작은 김원웅이 회장에서 물러날 때까지 쭈욱 이어져 왔으며 무고하게 제명 당하는 후손까지 나오면서 상황은 계속 심각해질 뿐이였다. 결국에는 광복회 회장의 이기주의적인 태도로 인해 회원들 간에도 여러 분열, 갈등이 조장되었고 현재 광복회가 이 지경까지 망가지게 된 셈이다.

이러한 막장 행보를 보이던 와중에도 광복회 카페 자금을 횡령하는 등 부정부패를 저지르다가 논란이 커지자 광복회를 개판으로 만들어놓고 잠적하였다. 횡령 논란이 터지는 와중에도 인터뷰에는 응하지 않으며 오히려 기자들을 친일파들이라고 몰아세우다가 결국 소용이 없자 사과문마저도 온갖 남탓만 섞인 글로 낭독하다가 퇴장하는 찌질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장호권 현 광복회 회장마저도 이에 관해선 "그의 그릇에 어울리는 입장문"이였다고 평가하였다.

결국 김원웅은 자신의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애국자들의 이름을 팔아먹고, 자신에 대해 비판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내로남불과 적반하장격 태도를 보이며 남탓과 피해자 코스프레를 시전하고 독립유공자 장학사업에 쓰일 돈을 개인의 사리사욕에 미쳐 횡령하는 등 계속해서 논란을 만들어내는 원흉으로 남게 되었다. 더군다나 이석기임수경과 같은 종북주의적 활동을 벌이면서 대한민국 대통령들을 전부 부정하는 모습도 보여주었고, 끝내 반성이나 진심이 담긴 해명조차도 남기지 않은 채 인생을 마쳤다.

[1] 그러나 기관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라고 생각한 것인지 윤석열 정부는 이를 번복하여 보훈처를 보훈부로 승격시키기로 했다. #[2] 사실 일제강점기 인적청산을 잘 못한건 사실이다. 여기까지 비판하는 건 자유나 문제는 북한도 숙청을 해대면서도 친일파는 기용했다는 것은 입을 꼭 닫는다. 북한은 실제 친일파인지 아닌지보다 정권유지에 위협이 되는 무고한 자를 숙청해놓고 친일파 숙청이라고 주장하였다.[3] 교과서적인 피장파자장의 오류이다.[4] 이는 다소 오류가 있는 게 일제강점기는 35년간 이어졌고 대다수가 강제로 일제에 순응하며 살아야 했다. 그 상태서 해방을 해버렸는데 당장 기용할 사람들이 정말 없었다는 것이다. 찾으려고 노력을 했긴 했으나 없었고 대부분이 일제에 강제 혹은 자발적으로 부역한 사람들로서 어쩔수 없이 내각을 그렇게 짤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이 청산도 주변 친일파로 인해 다소 소극적으로 간것이다. 북한도 숙청용으로만 친일파 처단을 했지 기용된 사람 대부분이 일제강점기때 강제로라도 엮인 사람들이었다. 참고로 아이러니 한것이 이승만,김일성 두 인물 다 독립운동을 해서 인맥이 있었을텐데도 말이다. 이는 그 당시 상황이 개판이기도 했고 독립운동가 좌익 정당 우익 정당 뒤섞여서 우후죽순 나오는 상황에서 이념에 맞는 정당과 미국 정부에 맞는 정부를 수립하는데에 있어서 좌익 독립운동가보다는 우익 일본에 부역한 사람이 낫다고 판단한것이다. 심지어 자기 자체도 독립운동가였는데 말이다.[5] 그리고 한국만 식민지 청산을 못한건 아니다. 당장 북한도 정적제거에 친일파 숙청이라는 명목을 섰을뿐 진짜 일본에 부역한 모든 사람들을 죽이거나 기용하지 않거나 하지 않았다.[6] 정작 일제에게 자원입대를 한게 아니라 강제동원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일본군 군인이라고 하면 무조건 비난하는 것도 어폐가 있다.[7] 독립유공자 권태휴의 차남이기도 하다.[8] 그 주사파도 반대편 정치인이 사람 목숨을 잃으면 비아냥 거리지는 않았다.[9] 평생이라고 표현한 것은 나머지 반평생을 군사독재 정당에서 핵심간부로 역임한 것을 인식한 듯하다.[10] 김원웅은 광복절 축사 때마다 4.19 혁명5.18 민주화운동6월 항쟁촛불혁명을 언급하였고 국립 5.18 민주묘지에 가서 참배를 하는 모습도 보였는데 결국엔 이마저도 자신의 여태 행적들을 세탁하기 위한 행위들이다. 애초에 전두환이라는 독재자을 따랐고 김일성이라는 독재자를 존경하던 인간이 당시에는 아무것도 한 게 없었으면서 반성은커녕 자유민주주의+반공주의 사상을 가지고 민주화운동을 전개한 사람들을 입에 올린 셈이나 다름없다.[11] 그가 팔았던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반공주의자들도 상당히 껴있었는데 특히 강성 반공주의자였던 김구장준하이범석 등의 인물들이 6.25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민족을 학살하고 분단의 아픔을 가져온 희대의 살인마의 손자을 존경한다는 자에게 기념을 받은 것은 너무나도 황당한 사례다. 더군다나 김원웅이 그렇게 떠들어대는 김원봉을 숙청시킨 것도 다름아닌 김일성이였다.[12] 친일청산을 주장한 것 역시도 자신이 애국자인 것처럼 보이기 위한 행동이나 다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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